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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792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1권

by Kay/케이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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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1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1)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 지음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13)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망울이 거듭 터진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4)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5)에서 사시(四始)16)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7)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8)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9)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20)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1)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어제신계성교서(御製新繼聖教序)22)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23)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24)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삼가 살피건대,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께서는 법성이 두루 원만하시어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다. 오랑캐들을 교화하시자 만방(萬邦)이 바큇살처럼 몰려들어 온 백성을 인수(仁壽)의 영역에 올려놓으셨고, 교법을 숭상하시자 사해(四海)가 구름처럼 뒤따라 창생에게 풍요로운 땅을 베푸셨다.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알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25)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26)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27)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28)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29)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30)의 가르침과 규구(規矩)31)가 동일하였다.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32)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33)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34)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35)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성고(聖考)36)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37)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38)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제1권

삼보존(三寶尊) 지음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시호(施護) 한역

반야바라밀에 귀명하오니
일체 제불을 출생시키는 어머니이시며
그 반야가 훌륭히 의지하는 바[勝所依]가 되어
궁극적으로 집착 없이 모든 번뇌를 씻으리다.
모든 부처가 자성을 여의고 취(趣)하게 하고
중생을 즐거움[喜]과 훌륭함[勝]이 상응하게 하여
주체[能取]와 대상[所取]가 둘 다 없어져
그 중에 상성(常性)이 가히 성립하지 않으리다.
그 2취(二取)의 해탈로 말미암은 까닭에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 모두 없어지며
일체지(一切智)로부터 출생하여
지(智)로 능히 피안에 도달하는 자에게 머리 숙인다.
내가 지금 대역룡(大域龍) 보살이 지은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 중에서 간략하게 그 내용[行相]을 주석하는 것은, 모든 지식이 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뜻을 생각하여 간략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 송에서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승한 지혜[勝慧] 등을 성취하여
무이지(無二智)이신 여래여,
그 중 뜻이 상응하니
그 소리에는 교(敎)와 도(道)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 ‘수승한 지혜[勝慧] 등’이라고 한 것은 곧 지혜에 입각하여 피안에 이른다는 것이다. 수승한 지혜란 이른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 등의 지혜를 말한다. 안(岸)은 언덕이고, 이른다는 것은 가서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청정한 묘혜(妙慧)로 인해 능히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마땅히 물어야 한다.
묻노니 어떠한 사람이 능히 이르는가?
답하기를 모든 보살이라 하였다.
그들은 무엇을 성취시키는가?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다. 성취란 이루어낸다는 뜻이니, 이와 같이 과성(果性)은 증상의요(增上意樂)를 이루어내는 까닭이다. 8천 송 반야교(般若敎) 등을 열어 보이며 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반야바라밀다의 성취라고 말한다. 반야바라밀다의 소리에 있어서는 이루어지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그 성취를 설하는가? 송에서 '무이지(無二智)'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무이'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을 이름 하는 것이다. 이 지(智)가 무이(無二)인 것을 무이지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는 이 속의 뜻은 반야바라밀다는 주관[能取]과 객관[所取]을 떠나기에 무이지라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지를 성취하는 까닭이다. 만약 혹여 그 색 등의 경계 가운데 대상의 상에 집착하게 되면 그 주관인 마음은 무이지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묻노니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다면 왜 지금 여래라고 말하지 않는가?말하자면 여래는 모든 곳에서 제행을 부지런히 닦아 성불을 얻는 까닭에, 논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여래'라고 하였다. '여래'란 그 여래를 말한다. 그란 곧 이 반야바라밀다이다. '여래'란 여실(如實)하게 설하는 까닭에 여래라 이름 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두루 모든 분별의 망(網)을 떠나는 까닭이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이 여래이다. 이 가운데는 둘이 없으며[無二] 또한 분별도 없다[無分別]. 무이[無二]란 여래가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반야바라밀다에 나아가지도 않는 것이다. 무엇을 무분별이라 이름 하는가? 이른 바 등불의 빛과 같으니, 이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여실히 알아야 한다. 모든 지자(智者)가 설하는 바는 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지(智)는 공을 떠나서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는 바가 있지 않으니
여기에서 떠난다는 말의 뜻은
성(性)을 떠나는 것이지 멀리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 두 공[二空]은 식과 달리
조그마한 법이라도 가히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두 무[二無]는 실로 돌고 돌아서
두 아성[二我性]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을 여실상(如實相) 가운데 완전히 증득하여 알기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한다. 이러한 까닭에 주관과 객관이 만약 성(性)이 있다면, 모든 분별에는 의지하는 바가 있다.여기에서 마땅히 묻는다. 만약 반야바라밀다의 무이지를 성취한다면, 어찌하여 송에서 교(敎)와 도(道) 둘을 설하는가? 송에서 '그 중 뜻이 상응하니 그 소리에는 교와 도 둘이 있다'고 답하였다. '그 중'이란 그 소리 중에 있어서 교와 도의 둘을 포함하는 것이다. '뜻이 상응한다'란 말은 차례로 지금 설하겠다.말하자면 그 교와 도의 두 가지는 반야바라밀다의 뜻과 화합하여 상응한다. '그 소리에 교와 도의 둘이 있다'라는 말에서 '그 소리'란 앞에서 이미 주석한 것과 같다. '교와 도의 둘'이란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의 방편이다. 그 소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까닭에 마치 종자와 같이 간직된 자리에 있으며, 그 뜻도 또한 그러하다.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의 소리는 두 가지 뜻을 설하는데, 첫째는 승상(勝上)이고, 둘째는 종류(種類)이다. 그 승상이란 무이지의 상을 말하고, 그 종류란 두 가지 종류로 교도와 자성이다. 이 두 가지가 화합하고 시설함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널리 설해지고 표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 중의 말뜻은 32품으로 개연(開演)하여 증가하거나 감소되는 것이 없다. 이 중에서 설한 말씀은 열 가지 분별산란(分別散亂)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또 열여섯 가지 공(空)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시 또 송에서 말하였다.
의지(依止) 및 작용(作用)으로
사업(事業)이 동일하게 수(修)를 일으키며
상(相)과 죄(罪)를 분별하고
칭찬(稱讚)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 송에서와 같이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의지ㆍ작용ㆍ사업ㆍ상(相)ㆍ죄ㆍ칭찬 등이다. 이것들이 무엇인지를 지금 차례로 설한다.'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불세존으로, 최초로 지(智)를 설하여 그로 말미암아 이처럼 의지할 바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깊고 깊은 법문을 능히 상속하여 연설하였으니, 수보리와 같은 자들은 그 능히 말할 바가 아니다. 능히 이와 같기에 화합하여 의지하는 것이다.
묻노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지(智)의 상은 무엇인가?답하기를 부처님께서 『팔천송반야경』에서 최초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수보리야, 너의 요설(樂說)에 따라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일으키리라.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와 같이 출생 등은 이와 같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건립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셨다. 그 수보리는 곧 능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설하고, 더욱이 장애가 없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설하는 모든 뜻은 그 경 가운데 제1품에서 설하는 까닭이다.'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증상(增上)의 작용으로,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지(智)를 설하시어 증상시키시는 까닭이다. 이 법을 설하기 위해 설(說)을 일으키는 작용은 곧 보살 등 대중의 작용 순서가 이와 같은 까닭이다. 따라서 곧 능히 이 법을 일으키고 널리 설한다.'사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행위[所作]의 사업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어나고,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이와 같이 안주한다. 이러한 까닭에 부지런히 수(修)를 일으키고, 열 가지 분별산란법을 없애고, 그리고 차례로 열여섯 가지의 공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상(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타낸다[標表]는 뜻이다. 또 상은 형상(形相)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만약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다의 법문을 쓸 때나 읽을 때 어떤 사람이 의심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마군의 일[魔事] 등의 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퇴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보살의 상이다.'죄'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을 훼방하거나, 정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혹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나쁜 마음[毒想]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들은 모두 죄의 과보를 부르는 것이다.'칭찬'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위 과(果)를 칭찬하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채움으로써 보시를 한다 해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수지하는 자의 복은 그것을 능가한다. 이 중 또 어떠한 뜻을 설하여 의지로 삼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믿음을 갖추는 것을 체로 삼아
스승과 제자가 서로 증설(證說)하고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 등으로
자량(自量)의 성취를 얻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믿음을 갖춘다'는 말에서 '믿음'이란 이른바 신심(信心)이 청정한 것이다. 모든 보살은 그 믿음에 의지하는 까닭에 깊고 깊은 가르침에 있어 능히 승해(勝解)를 일으킨다. 그 믿음이 있는 까닭에 이름하여 믿음을 갖춘다고 하고,. 그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체가 되는 것이다. '체'란 신체이다. 비유하면 몸이 있는 것이 원인이 되어 곧 능히 계속하여 제행(諸行)을 닦는 것과 같다. 믿음의 뜻도 또한 그러하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증설한다'는 말은 이른바 세존대사가 이 법을 널리 설하고, 보살 등의 제자도 또한 각기 널리 설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설하고 나서 마땅히 표시하는 것이다.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라는 말에서, '때'란 이른바 화합하여 짓는 것으로 설하는 때를 표시한다. 각별히 결정하여 얻는 것이 장소의 의미를 인지(印持)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묻노니 그 설법하는 자는 마땅히 어떠한 뜻을 얻는가?송 자체에서 답하기를 '자량의 성취를 얻는다'고 말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자(自)'란 자기라는 뜻이다. '양(量)'이란 자량, 곧 스스로 얻는 바의 양과 서로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 '성취'란 이루어낸다는 뜻이니, 설법은 설하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루어내는 까닭이다. 그 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설법하는 자는 마땅히
세간이 때[時]와 장소[處]의 둘임을 알아야 하니
설하는 자는 증득과 동일한 경지[同證]를 갖고
그 후에 양(量)과 같은 것을 얻는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설법하는 자'라는 것은 설법하는 사람을 말한다. '세간은 때와 장소의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세간상에 있어 먼저 마땅히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뒤에 지(智)에 의지해 이치에 맞게 설하는 것이다.묻노니 이것은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설하는 자는 증득과 동일한 경지[同證]를 갖는다'고 말하였으니, 이른바 동증화합(同證和合)의 설이 있는 까닭이다.
묻노니 무엇이 '양과 같은 것을 얻는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이른 바 이 진실의 언량(言量)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설하는 때와 장소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또 어떠한 뜻으로 32품을 인가하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모든 여시집(如是集)과
아문(我聞) 등의 말씀은
여시의(如是義)와 화합하니
최상이 삼십이(三十二)이다.
여기에서 '모든 여시(如是)' 등이라는 말에서 '모든'이란 남김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이 남김 없다는 것인가? 이른 바 여시의 취집(聚集)과 아문(我聞) 등의 취집으로, 여시란 여시소작(如是所作) 또는 여시차법(如是此法)을 말한다. '아문 등'이라는 말에서 '아'란 자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문'이란 설법을 듣는 것으로 곧 이 법을 듣는다는 말이다. 이 중의 총체적인 뜻은 여시나 혹은 아(我)나 혹은 문(聞) 등이 총체적으로 모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시아문(如是我聞) 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묻노니 ‘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뜻을 취하는가?
답하노니 ‘등’이란 때와 장소를 똑같이 포섭하는 말이다. '설한다'는 말에서 '설'은 말씀하여 보이는[說示]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저 여시아문 등의 말씀을 설하신 것이다. '여시의와 화합하니'라는 말은 이른바 저 설하는 자가 지었거나 짓지 않았거나 간에 그것들을 화합하여 처음부터 차례로 널리 이와 같은 최상의 뜻을 설하는 까닭이다. '최상'이란 최극승상(最極勝上)으로, 그 언설의 체는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묻노니 이것은 무엇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는 스스로 답하여 '최상이 삼십이(三十二)'라고 말하였다. '삼십이'란 수량을 결정한 것으로, 이른바 여시를 설하는 숫자 중이란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설한 것에는 감소(減少)란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묻노니 『십만송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여러 종류의 공을 설하였으며,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열여섯 가지 공(空)을 설하였다. 그 설하는 바는 어떻게 동일한가? 이 의문이 있기 때문에 송에서는 말한다.
16상(相)을 분별하니
그 차례와 같이 공(空)하고
8천 송 중에 설하여
다른 방편설을 요지(了知)한다.
여기에서 '분별'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갖가지 분류로 구별하는 까닭에 이름 하여 분별이라 한 것이다. 또 분별이란 곧 종류라는 뜻이다. 그 종류란 종종성(種種性)의 뜻이다. 이 말은 무엇을 분별한다는 것인가? 이른바 공(空)을 분별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공을 분별하는 것인가? 바로 열여섯 가지 공이다. 열여섯이란 수로 나눈 것이다.여기서 설하는 열여섯 가지 공과 그 십만송반야경에서 설하는 뜻은 서로 같다. 송에서 '8천 송 중에 설한다'고 한 것은, 곧 『팔천송반야경』에서 설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설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그 차례와 같이'라고 말한 것이다. '차례와 같이'란 넘어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떠한 법이 넘어서지 않는 것인가? 이른바 공이라는 말을 설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다음 송에서 '다른 방편설을 요지한다'고 말하였다.그 뜻은 무엇인가? '다른'이란 별이법(別異法)이니 그 별이법 가운데에 그 방편을 취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설'이란 다른 방편을 설하는 것이다. '요지한다'란 완전히 아는 것으로, 응당 이와 같이 분별하여 완전히 안다는 말이다. 이른바 이 다른 방편을 요지하고 분별하여 공을 설하는 것이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지금 이 8천 송은
설한 뜻 그대로 감소할 것이 없으니
원하는 바에 따라 송을 생략한 것이
여시의(如是義)의 말씀과 같다.
여기에서 지금 이 '8천 송'이라 말하는 것은 법을 가리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감소할 것이 없다'는 것은 결여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는 뜻이다. 무엇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른바 '설한 바 그대로라는 뜻'이다. 즉 그 설하는 바의 뜻이 스스로 원만한 것이다.
묻노니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 설에서 왜 송을 생략하는가?"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원하는 바에 따라 송을 생략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에서 단지 8천 송만 설한 것은 그 듣는 사람[聽者]에게 가장 뛰어난 의요[最勝意樂]에 마땅히 일치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송을 생략한 것이다. '생략[略]'이란 소략(少略)하다는 말이다. '여시의라는 설과 같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또 무엇을 말한 것인가? 송에서는 '설과 같다'고 말하였다. '설과 같다'는 말은 곧 그 언설과 같다는 뜻이다.이와 같은 설을 이치에 맞게 성취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다의 법 가운데 뜻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연(軟)ㆍ중(中)ㆍ상품(上品)과 근성으로 욕(欲)에 따라 받아들이니, 이러한 까닭에 세존은 이 원인에 기인하여 줄여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한 것이다. 그 순서에 따라 다른 방편을 써서 열여섯 가지의 공을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설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인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보살의 아(我)는 보이지 않으니
이 말씀은 실로 적묵(寂默)하며
능히 6근[內諸事]을 받는
그것을 곧 공(空)이라 설한다.
여기에서 '보리살타(菩提薩)' 등이라고 한 것은 보리와 살타를 말하는데, 이것이 곧 보리살타이다. 보리란 무이지(無二智)를 말하고 살타란 곧 보리를 구하는 자인데, 이 살타를 보리살타라 이름 하는 것이다. 즉 그 보리살타의 아(我)는 가히 보이지 않고, 또한 얻어지지 않는다. 아(我)란 자기란 뜻이다. '이 설은 실로 적묵하다'라고 말한 것에서 '이'란 여시의 뜻이다. '설'이란 언설을 말한다. '실로'란 진실이니, 곧 승의제(勝義諦)이다. '적묵'이란 곧 이 세존으로, 이른바 불세존의 신(身)ㆍ어(語)ㆍ의업(意業)은 모두 적묵과 상응하는 까닭이다.이와 같은 설은 부처님의 위신력의 가지(加持)로 말미암는 까닭에 수보리로 하여금 능히 여기에서 이 말을 설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곧 공이라 설한다'한 말에서, '그'란 바로 저 세존이다. '설한다'란 말로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불세존이 설하는 이것을 공이라 한다. 어떠한 법을 설하는 것을 공이라 하는가? 그래서 송에서는 '능히 6근[內諸事]을 받는'이라고 말한 것이다. '내제사(內諸事)'란 이른바 안(眼) 등의 내육근처(內六根處)를 말하는 것이다.저 어리석은 자는 실재로 집착하는 까닭에, 세존은 그 내사가 모두 공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새로이 발심한 보살도 그 가운데에 실제 자성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내(內)는 궁극적으로 공이라고 설한다. 또 다음의 송에서 말한다.
색(色)과 그리고 색의 자성
이 말씀도 또한 공이니
이것들 6처[外諸處]는
받는 바의 부분에 모두 머무른다.
여기에서 '색과 색의 자성' 등이라 말한 것은 색성(色聲) 등의 외육경처(外六境處)를 말한다. 또 '색'이란 바로 이 색처(色處)이다. '색의 자성'이란 말에서 색은 자색(自色)으로, 만일 상(相)을 갖는 것이라면 그 상은 불생(不生)이며, 불생인 까닭에 곧 자성은 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자성은 또한 가히 파괴되지 않는다. 비유하면 사람의 뿔과 같은 까닭이니,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설'이라 말한 것은 이 여시설ㆍ여시 등의 말을 가리킨다. 다시 또 이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모두를 머무르게 한다[止]. 머무른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묻노니 어떠한 법에 머무르는가?
송에서는 말하기를 '이것들 6처[外諸處]'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외제처(外諸處)란 이른바 색 등의 경계 바깥의 모든 분위(分位)로 이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생[異生]은 실체와 같이 소수성(所受性)이 있다고 집착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이 말의 뜻이 머무른다. 이와 같은 말씀은 바깥 대상이 공한 경지[外空竟]를 설한 것이다. 그 송에서 말하는 대로 후에 다시 공을 설하겠다.색 등의 상(相)은 그 몸이
안주하거나 상을 떠나니
언급한 뜻에 따라 볼 것 같으면
그 안[內]에는 실상이 없다.
여기에서 이 '색 등의 상은 그 몸'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팎의 두 가지 색처[二色處], 이것이 곧 그 몸이다. '안주'라고 말한 것은 곧 기세간(器世間)이 각기 특별히 의지하여 안주하는 까닭에 안주라 이름 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장부의 32종상을 말한다. '떠난다'고 하는 것은 그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모두 남김없이 떠나는 까닭이다. 떠난다는 것이 곧 공의 뜻이다. '언급한 뜻에 따라'라는 말에서 '언급한'이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며, 이미 지나갔다는 말은 언급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떠한 법을 언급했다는 것인가? 앞의 게송에서 '색 등의 상'이라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른바 만약 이와 같이 내외의 색처가 모두 남김없이 상이 없다면, 곧 그것이 이와 같은 공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소리의 뜻을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지금 이 송 가운데 먼저 세 가지 공을 설하니, 이른바 내외공(內外空)과 대공(大空)과 상공(相空)이다. 그 다음에 공공(空空)을 설한다. 송에서 '만약 그것을 볼 것 같으면 그 안에는 실상이 없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만약'이란 곧 '만약 그렇다면'의 뜻이다. 공지(空智)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란 곧 그 몸 등을 말한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뜻이다. 아는 것은 곧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이 말 중에서 뜻은 공지(空智)를 알며, 경(境)이 공한 것을 알고 나서란 뜻이다. 곧 이 공지는 안에 실상이 없고 더욱이 있는 바도 없으니, 어찌 하물며 다른 법으로서 의지(依止)할 성질이 있겠는가? 이 구절에서는 이와 같이 공공(空空)을 완전히 설한하며, 이 가운데 또 자성의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그 안의 모든 것은 공성(空性)이며
자성도 또한 공이니
모든 식상(識相)의 종류[種]에 대해
나는 곧 비지(悲智)를 일으킨다.
여기에서 '그 안의 모든 것은 공성이며' 등의 말은 곧 모든 내제처(內諸處)의 공성을 이어서 여기에서 말한 것이다. '자성도 또한 공이다'라는 말에서 '자성'이란 종성(種性)이라는 뜻이다. 그것에 의해 이와 같이 식상(識相) 등이 나타난다. '모든 식상의 종류'라는 말은 모든 만약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가운데 식상이라거나 식성(識性)이라거나 하는 것들의 종성은 곧 나의 자비의 지[悲智]로부터 생긴다. '비(悲)'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게 하는 것이다. '지'란 법상(法相)을 가려낸다는 것이다. 비와 같은 것이나 혹은 지와 같은 것 등을 비지라고 한다. '나[我]'란 자상(自相)이아는 뜻이다. 곧 자신이 소유한 비와 지의 두 가지를 말한다. 이 뜻은 총체적으로 내식처(內識處) 등의 자성이 공함을 설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두 가지의 공의 뜻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불생하며 또한 불멸하니
유정(有情)은 이것들을 분명히 하여
유정의 생사욕(生死欲)을
그는 말씀하시길 공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생 또 불멸' 등의 4구송(句頌) 문장은, 두 가지 공을 뜻하는 복합어[合釋]이다. '불생'이라 말한 것은 그 『팔천송반야경』 중에서 불생을 설하여 이것의 그침과 그 생겨남을 설하고 있다. 이 뜻은 본래 불생의 성질이란 뜻이다. 생이 만약 성이 없다면 멸도 또한 성이 없다. 그 앞서의 성이 불생이라면, 후의 성도 또한 불멸이다.
묻노니 이것들은 무엇인가?그 까닭에 송에서 답하여 '유정'이라 말한 것이다. '유정'이란 곧 5온(蘊)의 신명(身命)이니, '유'란 그 물성(物性)을 갖는 것이며 '정'이란 스스로 만든 바의 성질이다. 화합하여 말하는 까닭에 유정이라 한다. '분명히 한다'는 것은 밝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 뜻은 유정이라거나 혹은 생사라거나 하는 것이 그 두 가지 모두가 공이라는 것을 밝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더욱이 모든 유정에게는 변제(邊際)가 없으니, 여기에서 죽지만 다시 태어나 6취(趣)를 순환하며, 다함이 없이 생사를 윤회한다. 이 '생사'란 곧 윤회로, 이와 같은 내용이 유정이 곧 생사라는 뜻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묻노니 이것은 누구의 설인가?송에서 답하기를 '그'라고 하였다. '그'란 곧 그 여래인데, 진실을 설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설하는가? 이른바 공을 설하니, 곧 유정과 생사의 두 가지가 공인 까닭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성(無性)으로 이 속에서도 또한 떠나는데, 만약 그것을 무성이라 집착하면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송에서 '욕(欲)'이라 말했는가? '욕'이란 낙욕(樂欲)의 뜻이다. 말하자면 바로 유정과 생사의 두 가지 욕인데, 만약 이와 같다면 욕의 대상[所欲]은 필경 이와 같이 진실이다. 이와 같은 말들은 두 가지 공의 뜻을 설하는 것이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이며, 무제공(無際空)이다.
묻노니 무엇을 무제(無際)라 이름 하는가?
답하노니 무제란 이른바 처음이 없는 것이니, 첫 부분이 없는 것이다. 이 무제로 공을 설하는 까닭에 무제공이라 이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생사의 선제(先際)는 가히 표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또 후에 공을 설하는데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불법(佛法)은 볼 수 없으며
보살법도 또한 그러하니
이것들은 설한 바와 같이
그 10력(力) 등도 공하다.
여기 '불법은 볼 수 없다' 등의 말에서 '불법'이란 곧 제불의 법으로, 이른바 18불공법(不共法)과 10력(力) 등의 법이다. 이와 같은 법은 청정묘혜(淸淨妙慧)로써 관하더라도 볼 수 없고 또한 얻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분별은 더욱이 대애(對碍)가 된다. '보살법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곧 제보살법을 말하니, 이른바 보시 등 모든 바라밀다의 갖가지 행상으로, 진실지(眞實智)에 들어 이치대로 관하더라도 또한 보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설한 바와 같이 그 10력 등도 공하다'라는 말에서 '이것들은'이란 이른바 이 이와 같은 가르침을 말한다. '설한 바와 같이'란 곧 그 설한 바와 같은 것을 말한다.
묻노니 여기에서는 어떠한 법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그 10력 등'이라 말하였다. 앞에서 분명히 밝힌 10력 등의 법을 가리킨다. '등'이라 말한 것은 18불공법을 모두 포함한다는 말이다.
묻노니 이 법은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공을 설하는 것이다. 공이란 자상(自相)을 떠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이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설한 후에 또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별별 소유(所有)의 법
이것을 변계(徧計)의 성(性)이라 설하니
그것은 승의(勝義)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을 이와 같이 설한다.
여기에서 '별별 소유의 법, 이것을 변계의 성이라 설한다' 등의 말은 이 변계성을 파(破)하는 것이다. '별별(別別)'이란 곧 각각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변계성인 까닭이다. '변계'란 집착하여 취한다의 뜻이다. 무슨 법을 집착하여 취하는가? 바로 색 등의 법이다. '이것'이란 이와 같다는 뜻이다. '설한다'는 것은 언설을 말한다. 여기의 총체적인 의미는 이른바 각별의 모든 법은 승의제 중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그것은 승의로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을 이와 같이 설한다'고 말한 것이다. '승의로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승의제 가운데 자성이 없는 까닭이다.
묻노니 어떠한 법이 자성이 없는가?
답하노니 이른바 색 등의 모든 법이다.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은 곧 여기에서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이다.
묻노니 누가 이와 같이 설하는가?
답하노니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설을 지으신다. 모든 승의의 상이 공인 것을 관한다. 그 상은 곧 이 변계성이며, 공은 단지 주체의 상이 아니다. 승의제 가운데 그 공을 설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여 승의공(勝義空)을 설하는 것을 마친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말씀의 뜻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주석을 짓는 자는 따로 송을 설하여 말한다.
그것들 변계성은
곳곳에서 모두 집착하나
이와 같은 변계에는
자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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