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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791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論)

by Kay/케이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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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論)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1)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 지음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13)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망울이 거듭 터진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4)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5)에서 사시(四始)16)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7)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8)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9)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20)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1)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어제신계성교서(御製新繼聖教序)22)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23)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24)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삼가 살피건대,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께서는 법성이 두루 원만하시어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다. 오랑캐들을 교화하시자 만방(萬邦)이 바큇살처럼 몰려들어 온 백성을 인수(仁壽)의 영역에 올려놓으셨고, 교법을 숭상하시자 사해(四海)가 구름처럼 뒤따라 창생에게 풍요로운 땅을 베푸셨다.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알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25)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26)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27)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28)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29)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30)의 가르침과 규구(規矩)31)가 동일하였다.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32)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33)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34)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35)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성고(聖考)36)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37)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38)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論)

대역룡(大域龍) 지음
시호(施護) 등 한역

묘길상(妙吉祥) 동진(童眞)보살 마하살 등에게 귀명합니다.
반야 등을 성취하여
무이지(無二智)이신 여래
그 중 뜻이 상응하니
그 소리에는 교(敎)와 도(道)의 둘이 있다.
의지(依止) 및 작용(作用)으로
사업(事業)이 동일하게 수(修)를 일으키며
상(相)과 죄(罪)를 분별하고
칭찬(稱讚)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믿음을 갖추는 것을 체로 삼아
스승과 제자가 서로 증설(證說)하고
설하는 때와 설하는 장소 등으로
자량(自量)의 성취를 얻는다.

설법하는 자는 마땅히
세간이 때[時]와 장소[處]의 둘임을 알아야 하니
설하는 자는 증득과 동일한 경지[同證]를 갖고
그 후에 양(量)과 같은 것을 얻는다.
모든 여시집(如是集)과
아문(我聞) 등의 말씀은
여시의(如是義)와 화합하니
최상이 삼십이(三十二)이다.
16상(相)을 분별하니
그 차례와 같이 공(空)하고
8천 송 중에 설하여
다른 방편설을 요지(了知)한다.
지금 이 8천 송은
설한 뜻 그대로 감소할 것이 없으니
원하는 바에 따라 송을 생략한 것이
여시의(如是義)의 말씀과 같다.
보살의 아(我)는 보이지 않으니
이 말씀은 실로 적묵(寂默)하며
능히 6근[內諸事]을 받는
그것을 곧 공(空)이라 설한다.
색(色)과 그리고 색의 자성
이 말씀도 또한 공이니
이것들 6처[外諸處]는
받는 바의 부분에 모두 머무른다.
색 등의 상(相)은 그 몸이
안주하거나 상을 떠나니
언급한 뜻에 따라 볼 것 같으면
그 안[內]에는 실상이 없다.
그 안의 모든 것은 공성(空性)이며
자성도 또한 공이니
모든 식상(識相)의 종류[種]에 대해
나는 곧 비지(悲智)를 일으킨다.
불생하며 또한 불멸하니
유정(有情)은 이것들을 분명히 하여
유정의 생사욕(生死欲)을
그는 말씀하시길 공이라 하였다.
불법(佛法)은 볼 수 없으며
보살법도 또한 그러하니
이것들은 설한 바와 같이
그 10력(力) 등도 공하다.
별별 소유(所有)의 법
이것을 변계(徧計)의 성(性)이라 설하니
그것은 승의(勝義)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을 이와 같이 설한다.
저 아(我) 등의 견(見)을 끊는 것을
대사(大士)는 마침내 이루리니
더욱이 저 인무아(人無我)를
부처님은 모든 곳에서 설하신다.
모든 법은 불생(不生)으로
이 말씀도 또한 그와 같으니
법무아(法無我)를 널리 설하며
모든 곳에서 실(實)을 설한다.
유죄 및 무죄
부증(不增) 그리고 불감(不減)
모든 유위와 무위는
모두 선(善)에 멈춘다.
모든 선(善)의 공성(空性) 가운데
그에서 나오는 것 또한 무량하니
이것은 변계분별(徧計分別)하여
저를 두루 포섭하여 공이 된다.
열 가지 마음의 산란과
마음의 산란한 이처(異處)
어리석은 자는 상응을 얻지 못하고
무이지(無二智)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것의 멈춤과 쉼[止息]은 서로
주관과 객관의 대치가 되니
반야교(般若敎) 중에 있어서
그것이 원집(圓集)의 설한 바이다.
만약 보살이 있어
이 무상의 분별을 갖는다면
산란을 멈추어 쉰 스승[止息師]은
그 세속의 온(蘊)을 설한다.
이 8천 송 등은
첫 말부터 차례로
마지막에 이르러 멈추기까지
무상분별(無相分別)을 설한다.
인(因)이라는 말은 이와 같지 않아
이것은 오직 대상[事相]을 설하니
범망경(梵網經) 등의 경전의
일체가 이치에 따름을 안다.
보살은 아(我)를 보지 않지만
이것들은 광대하니
세존은 여기에서
유상분별(有相分別)의 난(亂)을 지견(止遣)한다.
만약 그 이름을 보지 않고
경계행(境界行)도 또한 그리하면
그 온(蘊)은 모든 곳에서
다 보살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변계(徧計)를 지견하고
이 모든 말씀을 두루 포섭하니
일체지의 인(因)에 올라[乘]
지혜[慧]로써 모든 상(相)을 분별한다.
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의지(依止)를 설하였으니
이른바 변계와 의타(依他)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이와 같은 설구(說句)가 없으면
일체의 변계가 그치니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見邊)
이것을 의타성(依他性)이라 말한다.
네 가지 청정이 있어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설하나
반야바라밀은
부처님과 다른 설은 없다.
열 가지 분별산란을
다스려[對治] 다음과 같이 말하니
이 세 가지를 알고 나면
혹은 나아가고[卽] 혹은 설을 떠난다.
처음처럼 원성(圓成)과
의타(依他)와 변계(徧計)를 말하니
무상분별색(無相分別色)은
그 산란을 지견(止遣)한다.
저 부처와 또한 보리와
설자(說者) 등을 보지 않아도
궁극에 이르러
이 변계성을 지견하는 것을 안다.
자성은 그 색이 공한데
모양을 갖춤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별도의 말 가운데
알고 나면 그것에 머물게 된다.
이는 불공(不空)인 까닭에 공하니
이와 같이 말씀을 설한 것은
모든 훼방과 분별로
일체의 설이 모두 그치기 때문이다.
환(幻)과 같이 또한 그러한 불(佛)
그는 또한 꿈과 같이 그러하니
이와 같이 다음의 것을 안다면
지(智)의 어변(語邊)은 결정된다.
모든 동등(同等)의 소작(所作)을
여기에서는 불(佛)을 환과 같다고 설하니
환영이나 비유 등의 말 등은
이것을 의타성이라 말한다.
모든 이생지(異生智)처럼
그 자성이 청정하고
그러므로 불언(佛言)이라 설하며
보살도 또한 불(佛)과 같다.
자성은 자색(自色)을 덮고
그것은 무명의 인(因)이 만드니
환과 같이 다르게 나타나며
과(果)를 꿈과 같이 버린다.
무이(無二) 별이(別異)를 설함에
과(果) 등은 실로 훼방이 되니
훼방에서 모든 분별이 생기며
그 훼방이 이것을 설한다.
색(色)과 공(空)은 화합이 아니니
그것은 서로 어긋나 장애가 되며
색이 없으면 공의 이름도 없으나
색의 상은 스스로 화합한다.
이 일성(一性)의 분별은
종종성(種種性)을 맞아 다스리니
공은 그 색과 다르지 않은데
그 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무실(無實)이 나타나는 곳이
그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곳이며
이 무실이 능히 드러나는
그것이 무명을 설하는 까닭이다.
여기 이처럼 색을 설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니
무이(無二)의 이(二)는 이처럼
두 가지 분별(分別)을 대치(對治)한다.
이치에 맞는 말은 정성(淨性)이며
또한 그렇기에 얻을 수 없으니
성(性)과 무성(無性)의 차이 등
갖가지 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 색은 오직 이름뿐이라고 설하니
진실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그 자성을 분별하고
수용하여 곧 마땅히 그쳐야 한다.
색 및 색의 자성이
공인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그 자성의 구상(俱相)을
분별하는 것을 여기에서 지견한다.
불생불멸 등
모든 법을 관하되
부처님의 말씀이 흩어져 달라진다면
그것이 차별이며 분별이다.
헛되고 거짓된 명언(名言) 등은
그 법을 만약 분별하면
소리[聲]와 뜻[義]의 둘이 합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자성의 뜻이 아니다.
반야바라밀
불보살도 또한 그러하니
여기서 설하는 것은 오직 이름으로
실의(實義)의 분별을 떠난다.
모든 소리와 뜻을 그치니
이는 지견하는 일이 아니며
이와 같이 나머지 일도 알아서
말 가운데 뜻을 결정한다.
이것이 무소득인 것은 옳으니
일체의 이름을 진실로 알고
뜻과 같이[如義] 성(性)은 이와 같이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
수보리여, 두 가지를 떠나야 하니
소리와 소리의 뜻이 그것이며
보살에게는 이름이 없으니
나는 이것을 보아 설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말의 무결정(無決定)에서 생기니
살펴 헤아리는 것은 오직 지자(智者)이며
이 뜻은 미묘한 지혜[微妙慧]이다.
만약 별도의 뜻을 분별하면
이어지는 뜻을 제거하여 버리게 되어
반야바라밀
그 언설은 메아리와 같으리라.
총괄과 생략[摠略]의 이와 같은 뜻은
반야 등에 의지하니
이와 같은 뜻은 순환하면서
또 다른 뜻에 의지한다.
반야바라밀은
실로 8천 송에 포섭되며
그 얻어지는 복온(福蘊)은
모두 반야로부터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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