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2권
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 제2권
삼보존(三寶尊) 지음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시호(施護) 한역
또 뒤에 공(空)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저 아(我) 등의 견(見)을 끊는 것을
대사(大士)는 마침내 이루리니
더욱이 저 인무아(人無我)를
부처님은 모든 곳에서 설하신다.
여기에서 '아 등의 견'이라는 말은 곧 아 등의 견을 끊는 것을 설한 것이다. '아'란 변계소집(徧計所執), 모든 온(蘊) 같은 것들을 말한다. '등'이란 인(人) 및 중생, 수자(壽者) 등을 포함한다. 이것들의 행상은 이른바 균등한 것으로, 아의 소유 등으로 주석하는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견'이란 집착하여 취하는 견이다. 이 중 총체적인 뜻은 아 등의 경계에 있어서 그 아 등의 견을 끊는다는 것이다. '끊는다'는 것은 없앤다는 뜻이다. '짓는다'고 한 것은 마침내 짓기 때문이다.
묻노니 누가 짓는가?
답하노니 보살이다.
묻노니 만약 보살이라면, 왜 '대사'라 말하는가?
답하노니대사란 곧 대유정이다. 이 대유정은 두루 윤회하고 상속하여 이것을 짓는다. 곧 이 보살이 만약 이와 같다면, 또 무엇을 설하겠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더욱이 그 인무아(人無我)를 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설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모든 곳에 있어서 이와 같이 결정하여 인무아를 설한다. 이와 같이 설하여 무성공(無性空)을 마친 후에 또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모든 법은 불생(不生)으로
이 말씀도 또한 그와 같으니
법무아(法無我)를 널리 설하며
모든 곳에서 실(實)을 설한다.
여기 '모든 법은 불생'이라고 한 말들에서, '모든'이란 두루 남김이 없다는 뜻이다. 법은 곧 이 색 등의 법으로, 모든 것을 곧 법으로 해석하는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모든 법은 남김없이 불생인 까닭이다. 여기에서 '불생'이라 말한 것은 곧 그 생을 멈춘 것이다. 이 뜻은 곧 본래 불생의 성질로, 그 상이 모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얻는 바 그 실제의 성질이 있다. 송에서 '이 설하는 바도 그와 같다'고 말한 것에서 '이'란 이와 같다는 말이다. '설한다'는 것은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이다. '또한 그와 같다'고 한 것은 또한 다시 설하기 때문이다. 송에서 '법무아를 널리 설한다'고 한 말에서 '법'이란 색 등의 제법이며, '무아'는 곧 무자성이다.
묻노니 만약 그렇다면 장차 어떻게 드러내 보이겠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모든 곳에서 실을 설한다'고 말하였다. '모든 곳'이란 곧 두루 일체의 종(種)을 말한다. '실'이란 진실의 의미로, 법무아와 진여를 말한다. '설한다'는 것은 완전히 안다는 의미이며, 완전히 안다는 것은 막는다는 뜻이다. 이 설이 진여로써 다른 법을 막는 까닭이다.
묻노니 누가 '실'을 설하는가?
답하노니불세존께서 설하신다. 이와 같은 설은 외도가 설하는 공과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이와 같이 설하여 무성자성(無性自性)의 공을 마친 다음에 또 두 가지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유죄 및 무죄
부증(不增) 그리고 불감(不減)
모든 유위와 무위는
모두 선(善)에 멈춘다.
이 '유죄 및 무죄' 등의 말에서, '죄'란 과실을 말한다. 과실은 죄에 떨어져 윤회하는 까닭에 유죄라 이름 하는 것이다. 죄와 과실을 떠나는 것을 곧 무죄라 한다. 죄와 무죄의 모든 법은 '부증 또는 불감'이다. 여기에서 '부증'이라 말하는 것은 비록 얻는 바가 있더라도 불어나거나 커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불감'이란 다함이 없는 법이 생겨나 줄어드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여실히 그 다함이 없는 법을 안다. '유위'라 말한 것은 이른바 행위가 있는 까닭에 유위라 이름한 것이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곧 인연으로 생겨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무위'란 유위의 행상이 아닌 것을 가려내는 것이다.
무엇을 택멸(擇滅) 등이라 말하는가? 송에서 '모든 선'이라고 말한 것이다.
묻노니 묻건대 그 유위와 무위의 모든 선이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답하노니가 가운데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유위의 선과 무위의 선을 만약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닦지 않더라도 남김없이 증감이 없는 것을 얻는다. 이 뜻은 단지 승의제 가운데 있어서 실로 취해야 할 법은 없다는 것이다. '멈춘다[止]'는 것은 지견(止遣)을 말하니, 그 모든 무상(無相)의 말을 멈추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여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을 마치고 그 뒤에 또 공을 설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모든 선(善)의 공성(空性) 가운데
그에서 나오는 것 또한 무량하니
이것은 변계분별(徧計分別)하여
저를 두루 포섭하여 공이 된다.
여기 '모든 선의 공성' 등의 말에서 '모든 선'이란 곧 모든 선법(善法)을 말한다. 이른바 공성 가운데 모든 선법이 있지만 무성(無性)이 아니다. 왜냐 하면 송에서 '그에서 나오는 것 또한 무향하다'고 말하였으니, 그 말 속에 모든 선법이 포함되는 까닭이다. '나온다'는 것은 출생을 말한다. '또한'이란 계속 이어서 설한다는 뜻이다. 이 가운데 총체적인 뜻은 모든 선법으로부터 이치대로 출생한다는 것이다. 그 성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그것은 줄어드는 일이 없다. 모든 보살의 일도 또한 간단하지 않다.송에서 말한 '이것은 변계분별하여'를 이른바 지자(智者)는 마땅히 여실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은 변계성을 없앤다. 송에서 '그것이 두루 포섭해 공이 된다'는 말에서 '두루'란 두루 남김 없는 것을 말하고, '포섭'이란 총섭을 말한다. 이른바 이 『팔천송반야경』 가운데서 분별하여 널리 갖가지 공의 종류를 설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상속의 설을 두루 원만히 모아 총섭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두루 포섭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가운데 공을 총섭하는 까닭이다.
묻노니 이와 같은 공의 특징은 어떻게 화합하는가?답하노니 여기에서 설한 공은 단지 변계소집의 법상을 없애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곧 궁극적인 뜻이라 말한다. 이 말 가운데서 이치가 스스로 화합하여 총집(總集)하니, 이와 같이 공을 설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공의 말뜻을 설할 것은 없다.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설한 모든 공은 단지 유정의 취착을 없애기 위함으로, 분별하여 실성(實性)을 설한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실성 가운데 두 가지 공을 설하는 까닭이니, 이른바 인공(人空)과 일체법공(一切法空)이다. 이와 같이 무산공(無散空)을 설하여 마친다.
묻노니 무엇을 무산이라 이름 하는가?답하노니산(散)은 이산(離散)의 뜻이다. 이 불산(不散)을 흩트리는 까닭에 이름 하여 무산이라 한다. 무산(無散)의 체는 이른바 모든 보살이 갖는 선법과 나아가 무여의열반계 가운데 그것 또한 흩트리지 않고 그것 또한 다함이 없는 까닭에 이름 하여 무산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16공을 총설해 마친다.변중변론(辯中邊論)에서 자씨보살이 이와 같은 뜻을 설하여 나타내 보인 까닭에 그 송에서 말한다.
안팎에서 그 몸을 받고
안주하는 사물은 모두 공하니
그것들의 지(智)는 견(見)과 같고
모든 뜻은 공하다.
두 가지 선을 획득하여
항상 유정을 이익 되게 하고
생사에 처해 이익을 지으니
그 선법은 다함이 없다.
종성 등이 청정하여
모든 상호(相好)를 획득하니
청정한 제불의 법을
보살은 또한 성취한다.
인(人) 및 일체의 공
이 가운데에는 성공(性空)이란 없으니
무성(無性) 중에 성이 있으며
그 성도 또한 공하다.
또다시 이 가운데 열 가지 분별산란법(分別散亂法)을 없애는 것을 설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수행을 일으키는 것이 특징이다.
묻노니 무엇이 그 열 가지 분별산란인가? 또 어떻게 멈추는가?
그리하여 송에서 말한다.
열 가지 마음의 산란과
마음의 산란한 이처(異處)
어리석은 자는 상응을 얻지 못하고
무이지(無二智)를 성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열 가지 마음의 산란' 등의 말은 새로이 뜻을 세운 보살이 가지는 열 가지 분별산란을 말한다. 이른바 무상(無相) 분별산란ㆍ유상(有相) 분별산란ㆍ구상(俱相) 분별산란ㆍ훼방(毁謗) 분별산란ㆍ일성(一性) 분별산란ㆍ종종성(種種性) 분별산란ㆍ자성(自性) 분별산란ㆍ차별(差別) 분별산란ㆍ여명어의(如名於義) 분별산란ㆍ여의어명(如義於名) 분별산란으로, 이와 같은 열 가지로 분별하여 마음을 산란하게 만든다. 이 마음과 마음 작용이 이처를 산란시키는 것이다. '산란'이란 산이(散異)와 동란(動亂)이므로 이름 하여 산란이라 한 것이다. '이처(異處)'라 말하는 것은 별개의 다른 곳으로서 분위(分位) 등을 갖는 것을 말하며 동란에 이끌리는 바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 마음은 상응을 얻지 못한다.
묻노니 어떠한 사람이 상응을 얻지 못하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상응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어리석은 자'란 우부(愚夫)와 이생(異生)으로, 어리석은 자는 손해나 이득 및 진실법을 남김없이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묻노니 어떠한 법과 상응함을 얻지 못하는가?
송에서 답하기를 '무이지(無二智)'라 말하였다. '무이'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을 이름 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지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무이지라 이름 한다. '성취'란 이른바 이루어내는 것으로 곧 결정하여 판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은 이치는 송에서와 같다. '성취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모든 우부와 이생은 마음에 산란이 있어 그 색ㆍ성ㆍ향ㆍ미ㆍ촉 등의 모든 경계에 대해 마음으로 취착을 일으켜, 이러한 까닭에 그 청정묘지에 대해 성취를 얻지 못하여 곧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묻노니 만약 무이지와 상응하지 못한다면 이 중에 또 무슨 뜻을 설하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그것의 멈춤과 쉼[止息]은 서로
주관과 객관의 대치가 되니
반야교(般若敎) 중에 있어서
그것이 원집(圓集)의 설한 바이다.
여기의 '그것의 멈춤과 쉼' 등의 말에서 '그것'이란 곧 그 열 가지 분별산란을 말한다. '지식'이란 지견(止遣)이다.
묻노니 어느 곳에 그치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반야교 중에 있어서'라 말했다. 이른바 『십만송반야바라밀다』 등의 가르침에 있어서 일체는 모두 이와 같이 그침이란 말로 설하고 있다.
묻노니 그 어떠한 법이 그치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서로 주관[能]과 객관[所]의 대치가 된다'고 말한다. '서로'란 그 상호간이란 뜻이다. '주관과 객관의 대치'란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상호간에 주관과 객관의 대치가 행상을 말한다. 유상이 대치의 주체가 되며 무상이 대치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무엇인가? 만약 무상이 대치의 주체가 되면, 유상은 대치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이와 같은 특징이 된다.
묻노니 그것은 반야교 가운데 마땅히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그것은 원집의 설한 바이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이 불모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이와 같은 원집총취의 요략(要略)은 이 열 가지 분별산란을 포섭한다. '설한다'는 것은 언설이다. 이 이와 같은 설은 곧 여래로, 이와 같은 최상의 진실을 완전히 알고 원만히 모으고 두루 포섭하여 불모반야바라밀다 가운데서 이와 같이 널리 설한다.
묻노니 설한 바가 무엇인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만약 보살이 있어
이 무상의 분별을 갖는다면
산란의 지식사(止息師)는
그 세속의 온(蘊)을 설한다.
여기 '보살이 이 무상의 분별을 갖는다' 등의 말에서, 보리와 살타, 이것이 곧 보리살타이다. '갖는다'는 것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은 '이 무상의 분별을 갖는다'는 말이다. '무상의 분별'이란 색 무상의 분별이다. 그것은 이와 같은 산란으로, 곧 어리석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묻노니 이 산란이 있는데 그것은 또 무엇인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지식'이라 말한다.
묻노니 누가 능히 그치게 하는가?송에서는 답하기를 '사(師)'라 말한다. '사'란 여래대사를 말한다. 능히 모든 번뇌의 원혼을 잘 극복하고, 또한 능히 악취 등의 두려움을 제도하는 까닭에 사라 이름 한다. 송에서 '그 세속의 온을 설한다'고 말한 것에서 세속은 세간이다. '그 세속의 온'이란 색(色)과 수(受) 등을 말한다. '그 온을 설한다'는 것은 완전히 알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온이 있는 까닭에 무상분별산란을 없앤다. 이와 같이 설하는 뜻은 세존께서 새로이 뜻을 낸 보살 등을 어여삐 여기시는 까닭에, 이러한 까닭에 세속의 여러 온을 설하여 완전히 알게 하는 것이다. 단견을 없애고자 하는 까닭에 그 무상의 분별을 그친다. 실성(實性)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의 가르침 가운데 이와 같은 뜻을 설한다. 곧 모든 반야바라밀다의 주제[本母]의 이치와 상응한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이 8천 송 등은
첫 말부터 차례로
마지막에 이르러 멈추기까지
무상분별(無相分別)을 설한다.
여기에서 '이 8천 송 등'이라는 말에서 '이'는 이와 같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팔천송이 주제를 설한 것인 까닭이다. '등'이란 십만송을 고루 포섭하는 것이다. '첫 말부터 차례로' 등의 말은, 곧 첫 말로부터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른바 경의 처음에 나타나는 언어의 행상은 무엇인가? 경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곧 "수보리여, 너의 요설(樂說)에 따라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출생시키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송에서 '마지막에 이르러 모두 멈추기까지'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경의 처음부터 경의 끝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설하는 바가 두루 남김없이 마쳐지는 까닭이다.송에서 '모두 그친다'고 말한 것에서 '그친다'는 것은 지견(止見)이다. 즉 그 중간에 그 무상분별을 훼방하는 말을 그친다는 뜻이다. 송에서 '무상분별을 설하는 것을'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색 무상의 분별이다. 그 색이 무상인 것을 분별함으로써인 까닭에 더욱이 공에 떨어진다. 유색을 끊은 까닭이다.'설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설한다는 것은 법에 의지해 설하는 것이니, 이 법에 의지해 설한다는 것은 대상[事相]을 설하는 까닭이다. 내용은 무엇인가? 이른바 처음의 언어로부터 일으키며 나아가 끝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설하는 모든 언어는 그 말 중간에 다른 내용을 일으켜 성립시킨다. 이른바 모든 보살과 제석천주(帝釋天主)ㆍ상수(上首) 등은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 그 단견을 없앤다.
묻노니 만약 이들 설하는 언어에 분위(分位)가 일어남이 있다면, 또 어떠한 도리가 있어 법에 의지해 설하여 무상분별을 훼방하는 말을 없애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파하여 말한다.
인(因)이라는 말은 이와 같지 않아
이것은 오직 대상[事相]을 설하니
범망경(梵網經) 등의 경전의
일체가 이치에 따름을 안다.
이 '인이라는 말은 이와 같지 않다' 등의 말에서, '인(因)'은 도리의 뜻이다. '이와 같지 않다'는 것은 이 도리라는 말이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 하면 송에서 스스로 주석을 붙여 '이것은 오직 대상을 설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事)'란 이른바 행위하는 대상[所作事]으로서 닦는 대상[所修事]이 있는 것이다. '설한다'는 것은 언설이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뜻은 오직 대상을 설하기 때문이다.만약 그렇다면 지금 도리에는 화합하지만 뜻은 성취하지 않는다. 무엇이 능히 모든 지혜 있는 자로 하여금 그것을 관찰하여 환희를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그 까닭에 송에서 '『범망경』 등에서 일체가 이치에 따름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범망경』 등 모든 경이다. 또 '등(等)'이라 말하는 것은 『운(雲)』과 『윤(輪)』 등의 경전을 고루 포섭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경 가운데 도리에 맞게 설하는데, 누가 설하는가? 곧 불세존이다. 모든 곳에서 여실한 이치에 의지해 스스로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뜻을 성취한다는 말이다. '안다'는 말은 것은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이 설이 이치에 맞고, 양(量)에 맞는 것을 완전히 안다고 한다.이와 같이 진실한 말뜻을 설하는 것이 결정의 뜻이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만약 앞에서 말한 도리와 같이 설한다면 비록 능히 무상의 분별은 없앤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상분별로 바뀌어 생기하니, 이러한 까닭에 지금 마땅히 그 상위문(相違門)을 드러낸다. 그 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보살은 아(我)를 보지 않지만
이것들은 광대하니
세존은 여기에서
유상분별(有相分別)의 난(亂)을 지견(止遣)한다.
여기에서 '보살은 아를 보지 않지만, 이것들은 광대하다'고 말한 것은 최초에 변계성을 일으킴으로써 보살의 상에 집착하여 취함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그 소취의 상은 실성(實性) 가운데에 있어서 아는 보이지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아'란 자기란 뜻이다. '이것들은 광대하다'는 말에서 '광대'란 곧 널리 포용한다는 뜻이다. 이 보살은 그 뜻이 광대하고,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아는 보이지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반야바라밀다 또한 보이지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설하는 바는 유상분별의 산란을 지견하기 위함이다.송에서 '유상분별의 난'이라는 말에서 '상(相)'이란 색 등의 상이며, '난(亂)'은 바로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분별'이란 색 등의 상 가운데에 있어서 분별하는 것이 있는 것으로, 불여의(不如義) 속에서 여의성(如義性)에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이 의혹에 싸여 어지럽게 움직이므로, 승의제 가운데에는 실성이 없다.
묻노니 누가 지견하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세존'이라 말한다.
이 지견은 어떠한 곳을 지견하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만약 그 이름을 보지 않고
경계행(境界行)도 또한 그리하면
그 온(蘊)은 모든 곳에서
다 보살을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만약 그 이름을 보지 않으면' 등의 말은 만약 보지 않는다면 곧 가히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묻노니 어떠한 법을 보지 않는가?답하노니 이 보살의 이름은 더욱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이름을 설하면 그 설하는 것은 얻어지지 않고, 잠시 이 설하는 것을 없앤다. 송에서 '경계'라 말한 것은 여실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직 보살의 이름만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계 등도 또한 가히 얻을 수 없다. '경계'란 행위의 대상으로, 이것은 모든 보살 행위가 반야바라밀다이며, 그와 같은 도(道)의 상(相)이다.'행도 또한 그렇다'는 말에서 '행'이란 보편적인 모든 행위로, 곧 닦는 것[所修]이며 행위하는 것[所行]이다. 더욱이 이 모든 행은 또한 가히 얻어지지 않는다. '그 온(蘊)은 모든 곳에서'라는 말에서, '온'은 색과 수 등을 말한다. '모든 곳'이란 모든 곳 및 일체종(一切種)에 두루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뜻을 여실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청정한 묘혜로써 이 모든 곳에서 보살상을 구하더라도 가히 완전히 얻지 못하니, 이 인(因) 때문에 보살은 가히 보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모두 보살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여기에서 이와 같이 설하는 뜻은 단지 어리석은 자를 없애기 위함이다. 불세존의 무염지(無染智) 가운데에 실명(實名)이나 경계 등이 있다고 집착하면, 그는 가히 얻지 못한다. 올바로 요지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살상은 원성실성(圓成實性) 가운데에 있어서 또한 가히 떠나버릴 수 없다. 만약 떠나버리는 상을 취한다면, 그에게는 무상의 분별이 다시 또 생겨날 것이다. 이 뜻은 간략히 설하는 까닭이다.
묻노니 지금 이와 같이 실성 가운데 보살이 없다면, 어찌 앞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을까?
게송에서 말한다.
이것은 변계(徧計)를 지견하고
이 모든 말씀을 두루 포섭하니
일체지의 인(因)에 올라[乘]
지혜[慧]로써 모든 상(相)을 분별한다.
여기에서 '변계를 지견한다' 등의 말에서 '변계'란 모든 유정이 일으키는 전도(顚倒)된 견이다. 그 특징이 무엇인가? 이른바 온ㆍ처ㆍ계 중에 실성이 있다고 집착하는데 지금 그것을 없애는 까닭이다. 청정한 묘지(妙智) 가운데 있어서도 없어지는 바가 없다. 송에서 '두루 이 설한 바를 포섭한다'는 말에서 '이'란 이와 같다는 뜻이며, '두루 설을 포섭한다'는 것은 곧 짓는 것[作者], 두루 포섭해 설한다는 말이다. 이 두루 포섭해 설한다는 것은 승의락(勝意樂)이며, 이것들은 반야바라밀다의 뜻인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두루 포섭해 설하며, 이것은 결정이 된다. 곧 그것은 이와 같이 구경(究竟)을 획득한다.
묻노니 어떠한 뜻에서 이러한 설을 짓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일체지의 인에 올라'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와 같은 뜻을 이치에 맞게 나타낸다. '올라탄다'는 것은 승어(乘馭)이다. '일체'란 두루 남김 없다는 뜻이다. '지인(智因)'이란 요별지(了別智)로써 인을 삼는 까닭이다.
묻노니 어떠한 사람이 올라타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혜'라고 말했는데 '혜'란 대혜(大慧)로, 곧 이것은 불(佛)인 까닭이다.
묻노니 무엇을 설하는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모든 상을 분별한다'고 말했는데 '상'이란 이른바 두루 모으는 작용인 까닭에 이름 하여 상이라 한다. 이 상에는 대애(對礙)가 없다.
묻노니 이것들은 어떠한 상인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분별'이라 말했다. 곧 모든 행상을 분별하여 드러내는 까닭이다. 실성(實性)을 설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이와 같이 설한 바의 뜻으로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니, 지극히 미세한 티끌만큼이라도 다른 뜻은 없다. 자성은 가히 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은 그 지의 취(聚)에 올라타 모든 일체의 작용행상을 개시하고 분별한다.
묻노니 어떠한 뜻을 얻는 까닭에 능히 이와 같은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의지(依止)를 설하였으니
이른바 변계와 의타(依他)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이 '반야바라밀다' 등의 말에서 '반야바라밀다'에는 두 가지 법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승상(勝上)이고 둘째는 소행(所行)이니, 승상이란 번뇌와 소지(所知)의 이장(二障)의 지(智)를 떠나는 것이고 소행이란 단어ㆍ구절ㆍ문장 등의 언설로 표현되는[名句文言說] 상이다. 그 승상이란 곧 반야바라밀다의 자성이 설해진 것이며, 그 소행은 설법의 언어란 뜻으로 자성의 작용이다.
묻노니 그 작용대상이란 이 가운데 무엇인가?
송에서는 답하기를 '세 가지 의지를 설한다'고 말한 것이다. '세 가지 의지'라는 이것은 또 무엇인가? 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른바 변계와 의타 그리고 원성실성'이다. 변계란 모든 어리석은 자가 무이의 청정지 가운데에 모든 상을 변계하여 대애(對礙)에 집착하는 것, 이것을 설하여 변계성이라 이름 한다. '의타성'이란 무이지의 자성에 안주하고, 무명종자(無明種子)의 둘은 대애를 가지며, 더욱이 그 무명은 의타기(依他起)인 까닭에 이것을 설하여 의타기성이라 한다. '원성실성'이란 곧 무이의 지를 말한다. 곧 이것이 원성실성이다.
묻노니 무엇을 설하여 세 가지 의지라고 하는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이와 같은 설구(說句)가 없으면
일체의 변계가 그치니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見邊)
이것을 의타성(依他性)이라 말한다.
이 '이것들은 설구가 없으면, 일체의 변계는 그친다' 등의 말에서, '없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구절'이란 여시(如是) 등과 같은 모든 설한 바의 구절이다. '들'이란 그 설법하는 자를 말한다. 그 '그친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묻노니 이 중 특징은 무엇인가?그러므로 송에서는 답하기를 '일체의 변계가 그친다'고 말한 것이다. '일체'란 두루 남김 없다는 뜻이다. '변계'란 허망ㆍ교이(巧異)ㆍ집착ㆍ조작이며 '그친다'는 것은 지견이다. 여기에 이와 같은 설의 뜻은, 만약 일체설을 듣는 자가 있으면, 지견의 말을 설한다는 것이다. 지자는 마땅히 궁극에 완전히 안다. 곧 일체는 모두 이 지견이고, 변계는 상에 집착하는 것이 있다. 송에서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 이것을 의타성이라 설한다'고 말하였는데, '환영'이란 제망(帝網)이며, '등'이란 건달바성 등 모든 환법을 고루 포함하는 것이다. '환'이란 다른 가법(假法)에 의해 생기는 것인 까닭이다.지금 그 환영을 취하여 이 법에 비유하는 까닭에 이름 하여 환영이나 비유라 한다. '견변'이란 그 비유에 의해 이와 같은 법을 깨닫는 까닭에 견변이라 이름 한다. 이 뜻은 만약 환영이나 비유 등 모든 견변의 뜻을 듣는 자가 있으면 지자는 마땅히 이것을 알아 이것은 의타기성이라고 설한다. 이 가운데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환영 등으로 인해 이미 변(邊)을 보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널리 설하신 바가 있는 것이다.
묻노니 그 의타자성(依他自性)은 무엇을 완전히 알며, 원성자성(圓成自性)은 무엇을 설하는 것인가?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네 가지 청정이 있어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설하나
반야바라밀도
부처님과 다른 설은 없다.
이 '네 가지 청정이 있어 원성실성이라 설하나.' 등의 말에서 '설한다'는 것은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즉 네 가지 청정으로써 모든 원성의 자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네 가지'란 곧 네 종류가 있다는 말이다. '청정'이란 번뇌가 없다[無染]는 뜻이다. 이른바 그 네 가지 정(淨)을 얻는 까닭에 곧 청정이라 이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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