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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41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12권

by Kay/케이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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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12

 

 

보살영락경 제12권

축불념 한역
장용서 번역

34. 청정품(淸淨品)
그때에 장로 빈누문타니자(邠耨文陀尼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3세의 법을 설하심을 듣고서 여러 하늘과 인간 백성 그리고 8부 귀신이 모두 공양을 일으키니, 숙세의 호위하던 보살마하살로 성불에 나아간 이와 미래ㆍ과거ㆍ현재의 여러 부처님께서 3세의 분별지혜로 온갖 법이 만들어내는 일체를 태워 없앰을 연설하고, 다시 신족의 도력(道力)으로 교화한 바로써 삼천대천세계를 감동시키고, 행을 닦아서 마음을 잡아 본래의 소원을 버리지 않고,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중생의 자취를 깨끗이 없애나이다.”이때에 장로 빈누문타니자가 다시 부처님에게 나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본래 없는 한 모습의 법[本無一相法]을 닦아 익히면,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신상(身相)을 분별해서 안팎을 청정하게 하여 물들어 집착함을 내지 않으리니,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마하살이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고 신상을 분별해서 안팎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옵나이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족성자여,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6바라밀의 모든 부처님이 행한 바를 행하면,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청정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법이 일체 청정해지는 것인가. 그래서 선남자나 선여인이 3세의 있는 바가 본래 없음을 분별하여 3승의 도를 성취한 이를 보지 않으면, 수다원(須陀洹)으로부터 여래ㆍ지진ㆍ등정각에 이르기까지 모두 3세의 청정한 행을 닦고 안으로 몸을 스스로 관해서 식의 상념[識想]을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서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세 가지 지향인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분별하여 나[吾我]와 남[人]과 수명의 일체 모든 법을 보지 않으면, 수다원으로부터 보살마하살에 이르기까지 설한 바가 청정하니라.다시 빈누문타니자여, 배움 없고[無學], 집착 없고[無著], 생멸하는 바 없음[無所生滅]으로 공관(空觀)의 세 가지 무학법[三無學法]을 분별하지만,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 무엇이 세 가지 무학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인가? 여기에서 족성자여, 미래 가운데서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하고 닦고 있는 정법(正法)을 낱낱이 사유해서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정수(正受)삼매라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느니라.”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배움 없고, 집착 없고, 생멸하는 바 없음으로 공관의 세 가지 무위법을 분별하지만,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옵나이까?”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배움 없음을 배우는 사람이 미래의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해서 영원히 단멸(斷滅)하여 없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다시 이 법으로써 널리 중생에게 미치게 한다면, 이것을 소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다시 다음에 선남자나 선여인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의욕(意欲)의 끊음을 익혀서 미래의 번뇌를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때로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여, 세 가지 무학(無學)에서 하나의 법을 성취하느니라.다시 다음에 빈누문타니자여, 배움 없는 학인(學人)이 현재의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해서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는 정수(正受)삼매로 영원히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처음에 행을 익힌 사람이 현재의 법에서 분별하고 사유해서 각이 있고 관이 있는 정수삼매로 길이 단멸케 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여, 세 가지 무위법에서 때로는 청정하지 않으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혹 배움 없는 학인이 과거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를 분별하고 낱낱이 사유해서 각이 없고 관이 없음으로 길이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않게 한다면, 그리하여 이와 같이 세 가지 무위법을 성취한다면, 이것을 때로는 청정하다고 이르느니라. 만일 닦아 행하는 사람이 현재의 모든 법을 분별하고 사유하여 각이 없고 관이 없음으로 단멸시켜 번뇌가 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을 선남자여,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3세의 분별과 세 가지 유위법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배움 없는 학인은 다시 마땅히 3향법성(向法性)이 다 청정해서 있는 바가 없다고 분별할 것이다. 무엇이 배움 없는 학인이 3세 가운데서 3향(向)을 분별하여 있는 바가 없음인가. 배움 없는 학인이 미래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를 분별하는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으니, 이것을 족성자여, 세 가지 유위법에서 하나의 법을 성취했다고 이르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닦고 배운 사람이 다시 미래의 법에서 일체 모든 법의 나는 바가 모두 공하고 모두 고요해서 있는 바 없다고 분별하여 길이 단멸시켜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족성자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배움 없는 학인이 현재의 법에서 다시 마땅히 원이 없는 바른 행[無願正行]을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으로 또한 단멸시켜 번뇌를 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을 유위법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닦아 행하는 사람이 현재의 법에서 무상정수(無相正受)를 사유하고 분별하여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음으로 단멸시켜 번뇌를 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세 가지 무위법(無爲法)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다고 이르느니라.”
이때에 빈누문타니자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오직 이 세 가지 공(空)과 세 가지 향(向)만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못 모든 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치 않나이까?”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고 그와 같으니라. 족성자여, 너의 물음대로 일체 모든 법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나니, 수다원으로부터 위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며, 4의지(意止), 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현성행(賢聖行)으로부터도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하느니라.”그때에 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것이옵나이까?”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제일의(第一義)의 관점으로부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함을 듣고자 하느냐, 아니면 3세의 모든 법의 관점에서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함을 듣고자 하느냐.”빈누문타니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일의로부터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청정하지 못한 것을 듣기를 원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법은 수(數)가 없어서 수를 두지 않는다. 또한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3세의 법에서 청정함을 얻었다고 이르고,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머묾도 보지 못하고 또한 머물지 않음도 보지 못하는데, 머묾에 상념이 집착하여 물들어 더러운 생각을 낸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보살이 크게 서원하여 온갖 중생의 무리를 두루 구원하는데, 비록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나니,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뜻을 내서 상념의 집착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청정치 못하다고 이르니라.
지혜의 빛을 나타내서 어두움을 제거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그 가운데에서 문득 상념의 집착을 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중생을 인도하여 길이 무위(無爲)에 처하게 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제도한 바 있다고 보아서 물들고 더러운 뜻을 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한뜻으로 한결같이 무위의 도[無爲道]에 나아가되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가 얻은 바와 같게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스스로 일컬어 나는 제도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니라.
도가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품류에 따라 교화하는데 용맹하게 정진하여 게으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부지런히 힘써 닦아 마음이 퇴전하지는 않지만, 상념의 집착으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온갖 행을 분별해도 공하여 있는 바가 없고 성품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니,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 이르고, 다시 스스로 분별하지만 바라고 구함을 끊지 못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수없는 신행(身行)으로 모두 공(空)이 됨을 알아서 이룬 바가 있다는 상념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스스로 공로(功勞)를 찬탄하여 신법(身法)에 물들어 집착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입으로 연설하는 바의 가르침에 막힘이 없고, 또한 스스로 유무(有無)의 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능히 온갖 것을 버리고 나아가 위의(威儀)를 닦지만,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문자(文字)를 분포(分布)하고 온갖 법을 총지(總持)해서 강력한 기억으로 잊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문자가 온갖 법을 낳음을 보지 못하고 공혜(空慧)가 도의 가르침을 이룸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상념은 모두 공에 돌아가니,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본래 이름[名號]없는 것에 이름을 짓고, 다시 그 가운데서 위없는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집착함도 없고 얽매임도 없어서 경계를 추구하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 이르고, 식신(識神)의 무위(無爲)는 안계(眼界)의 볼 바가 아닌데도 바야흐로 그 소굴(巢窟)을 은근히 알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법에서 받아들임[受入]을 보지 않고 바야흐로 온갖 도(道)의 출생을 찾고자 하는데, 그 가운데서 미혹하지 않고 도의 가르침을 이룬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비록 온갖 법을 내지만 뜻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어 세 가지 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법계에 정성스럽고 은근하여 지혜를 익혀 수증(受證)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 이르고, 모든 부처님 법은 하나로서 둘이 아님을 알아서 다시는 일어나고 멸함이 없이 공적하여 형상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10력(力)에 머물러서 10지(地)가 멀지 않고, 밝은 지혜를 닦아 나가면서 온갖 경계를 교화한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여러 가지 법을 관찰하여 3독(毒)을 영원히 여읜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대승의 바른 법[大乘正法]으로 나고 죽음을 뛰어 넘는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온갖 법에 집착이 없으나 스스로 식의 상념을 낸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온갖 법에 가르침이 없는데도 6바라밀을 내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바퀴를 굴리는 법[轉輪法]을 알아서 처소를 세운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온갖 법을 닦고 익혀서 모두 동일한 모습이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온갖 법은 생겨남이 없는데도 출생을 말하여서 두 소견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여래달성(如來達聖)이 큰 법륜을 굴리면서도 형상 없는 공의 성품으로 길이 열반에 처한다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온갖 법도 보지 않고 열반도 보지 않는 이 두 가지 분별하는 마음으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3세의 모든 법이 위와 중간과 아래가 있는데, 차례대로 증명을 받으면서도 미련의 집착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그 가운데서 상념을 일으켜 증명을 받음을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본래 늘고 주는 것이 없이 모조리 공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가령 늘고 주는 것을 보고서 온갖 법을 분별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음을 증득하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온갖 법에서 출생한 바가 있음을 보고서 식의 상념을 일으키고 그 이름을 기억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법의 거칠고 난삽함, 보드랍고 연함의 차별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서 거칠고 난삽함, 보드랍고 연함을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무상(無上)이라서 동전(動轉)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가령 다시 분별해서 동전을 보면, 또한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법은 길이 적멸하여 수호해 지니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설사 다시 분별하여 온갖 법을 받아 지니면서도 이것은 선한 법[善法]이고 이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안팎이 없어서 신법(身法)이 모조리 공으로 돌아간다고 이해해 알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안팎의 여러 가지 법을 분별하여서 이것은 안의 법[內法]이고 이것은 밖의 법이라고 하여 두 가지 마음을 갖는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법에서 귀먹어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서 온갖 법에 귀머거리가 있고 소리가 있다고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에서 온갖 도품(道品)을 성취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출요(出要)가 있음을 보고 도과(道果)를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니라.
백천 만행(萬行)이 다함이 없어서 모조리 허공에 돌아가면서도 상념(想念)이 없다면, 이것을 청정이라 이르고, 샘[漏:번뇌]이 다하고 맺힘[結:번뇌]을 끊고 얽힘[縛:번뇌]를 없앰이 있음을 보면, 이것을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니라.일체 모든 법은 모두 공하고 형상이 없어서 나는 것은 스스로 나고 멸하는 것도 스스로 멸하는데, 또한 나는 것도 보지 않고 멸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분별하여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본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을 스승에게서 받지 않고 자연히 깨달아서 8등행(等行)을 이루었다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스승으로부터 훈계를 받고 높고 낮음의 분별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억지로 참는 마음[忍心]을 일으키지 않고 자연히 참는 마음[柔忍心]을 얻어서, 온갖 번뇌 끊어 없애 길이 쉬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능히 사유해서 근본 행[本行]을 헤아리지 않지만, 일어남이 있고 멸함이 있다는 두 마음으로 온갖 법을 분별한다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대저 도를 구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하고자 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사유하면서 뜻에 게으름을 품고 중도에 물러나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근본부터 지말(枝末)까지 법을 굴리면서 음향(音響)으로 가르침을 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된다고 이르고, 큰 법륜을 굴리고 음향으로 가르침을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에 본래 12연기(緣起)가 있지 않음을 능히 분별하여 버리고 쫓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하다고 이르고, 번뇌를 태워서 멸하는 것 있음을 보면, 이것을 청정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매우 기이하고 매우 특별하여 가도 다할 수 없고 와도 또한 다하지 않으니, 중생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만일 다시 저 언덕을 건너간 이를 본다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온갖 법의 미래는 영원히 멸했다고 사유하면, 이것을 청정이라고 이르고, 미래가 있고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현재 여든네 가지 행[八十四行]을 분별하여 여래의 위엄 있는 얼굴과 낯빛을 장엄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현재 애착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얼굴빛에 물들어 집착한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여러 가지 법은 생겨남이 없어서 조작(造作)을 보지 않고, 자연의 율(律)을 일으켜서 바라밀에 응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일체 모든 법을 조작해서 금하는 계율(戒律)에 응하여 이 마음을 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형상이 없어서 모조리 무위(無爲)에 돌아가서 위없는 도에 응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저의 형상과 빛깔이 변함을 보고서 스스로 상념(想念)을 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이르느니라.일체 모든 법은 홀로라서 짝이 없으니, 여러 가지 법이 말이 없어서 언교(言敎)를 보지 못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법을 설함이 있고 언교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일어나지 않아서 3세에 물들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3세의 법에 일어나고 멸함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못된다고 이르느니라.
여러 가지 법은 의지함이 없어서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이르고, 삼계에 의지하고 집착함이 있으면,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여러 가지 법은 몸[身]이 없고 오직 법만을 체(體)로 삼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법신(法身)에 도지견(度知見)이 있음을 보면, 이것을 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미래ㆍ과거ㆍ현재의 여러 부처님은 가신 이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오실 이도 다함이 없지만, 설하신 도의 가르침이 저마다 들쑥날쑥하여 다르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다시 3세의 여러 부처님이 가르치는 언교의 늘고 줄음을 선포해 말한다면, 이것을 또한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모든 법은 형상도 없고 또한 색상(色像)도 없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다시 모든 법으로 색상을 만든다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볼 수 없고 고요히 비고 공하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만일 다시 모든 법은 볼 수 있다고 선포해 말한다면, 이것을 깨끗함이 못되는 것이라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한량이 없으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모든 법이 한량이 있고 정해진 수(數)가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이르느니라.모든 법은 경계가 없고 찰토(刹土)가 없는데도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나라를 깨끗이 하면, 이것을 깨끗함이라 이르고, 만일 중생이 부처님의 나라가 청정하고 중생을 교화함을 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 못된다고 이르니라.
모든 법이 평등하고 열반도 하나의 성품이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과(果)를 받고 도를 성취하는 이가 있음을 보면, 이것을 깨끗함이 못된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출요(出要)하고 법의 과보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출요하여 법의 과보를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느니라.모든 법은 생겨남을 다하여 영원히 형상과 빛깔을 여의면, 이것을 깨끗한 것이라 이르고, 생겨남을 여의어서 형상과 빛깔을 받음이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이 늘 정해져서 처음부터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면,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움직이고 구르고 변하고 바뀌어서 머물러 있지 않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
모든 법은 깨달아 알 수 없고 또한 어떤 사람도 능히 자취를 찾을 수 없나니, 이것을 깨끗함이 된다고 이르고, 형상의 자취를 찾아가 구할 수 있다고 보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이르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잡아 지녀서 수행한다면, 현세에서 문득 다함이 없는 지혜삼매[無盡慧三昧]의 정수(正受)와 정의(定意)를 얻어서 문득 능히 온갖 부처님 경계를 초월하나니, 한 부처님 나라로부터 한 부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교화해서 부처님 국토를 깨끗이 하며, 온갖 법이 나아가는 바를 하나하나 분별해서 4등심(等心)으로 온갖 것을 널리 윤택하게 하고, 차츰차츰 가르쳐서 각각 제도를 얻게 하고 본래의 원한 바에 따라 각각 충족케 하며, 다시 신통숙명지관(神通宿命智觀)으로 근본을 살펴 알아서 그 행적(行迹)을 깨끗이 하느니라.혹 때로는 보살이 정수(正受)삼매에 들어가 신통 지혜[神通慧]를 얻고,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 다시 위신(威神)을 더하여 법의 성품을 분별하면, 자연히 생겨나고 자연히 소멸해서 생겨남도 나의 생겨남이 아니고 소멸함도 나의 소멸이 아니다. 보살 대사(大士)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있지 않으니, 내가 생겨남을 말미암아서 이 법의 생겨남이 있고 이 법의 소멸함이 있다.그리고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지 않으니, 즉 ‘나는 이미 보살을 이루었는데 아무개는 보살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법을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법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구경(究竟)을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구경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환술(幻術)을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환술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교화를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교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음향(音響)을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음향을 이루지 못하였고,나는 보살의 신통지(神通智)를 이루었으나 아무개는 신통지를 이루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경계에 들어갔으나 아무개는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나는 여러 가지 행의 근본을 초과했으나 아무개는 여러 가지 행의 근본을 초과하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율(律)을 닦았으나 아무개는 보살의 율을 닦지 못하였고, 나는 보살의 나라를 깨끗하게 하였으나 그는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다’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야, 보살마하살이 애초에 ‘온갖 법을 분별해서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다’라는 생각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로서 이 정의정수삼매(定意正受三昧)를 얻은 이는 신족으로 뜻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노닐고, 온갖 법에서 늘고 주는 마음이 있지 않느니라.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정의(定意)를 얻으면 두루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나라를 깨끗이 함을 감당하니,한 부처님 나라로부터 한 부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처님 세존을 섬기고 공경하며, 다시 훌륭한 권도의 방편으로 함께 선지식(善知識)을 짓는다. 그리하여 은밀히 도의 가르침을 말해서 무위의 도(道)에 이르면,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게 해서 서로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처럼, 아우처럼 여겨서 각각 딴 마음이 없게 하며, 서로 번갈아 가르쳐주어 뜻하는 바에 따라 도과(道果)를 다 이루게 하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이 정의(定意)에 들어서 문득 능히 일체 모든 법을 갖춘다고 이르느니라.”
이때에 세존께서 빈누문타니자에게 게송을 말씀해 주시었다.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은
귀결되는 문이 같지 않으며
각각 경계가 다르고
행하는 법도 또한 그러하네.
나는 청정한 도를 설했지만
온갖 행은 다할 수 없으니
이제 대강 그대와 더불어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은 행 말했네.
여러 부처님 헤아릴 수 없고
말씀의 가르침도 다함없으니
이제 대강 바른 요점만 설해서
온갖 도과(道果)를 분별하였네.
여러 부처님의 뜻은 광대하고
공의 지혜도 다르지 않으니
피차(彼此)가 함께 성취하여
모두 해탈문으로 돌아가네.
뭇 지혜의 근문(根門)이 깨끗함은
여러 부처님이 찬탄하시는 바이니
생각 끊어서 뭇 상념 없애면
온갖 지혜의 말을 갖추리라.
여러 부처님의 연설한 가르침
은혜와 애착의 근심을 알게 하시어
있음[有]을 잊고 있음에 처하지 않으니
그 까닭에 인중존(人中尊)이 되셨네.
부처님 본래 숙행(宿行)을 쌓아서
스스로 무상존(無上尊)을 이루었고
보살의 법을 갖추어서
대승의 업을 연설해 펴네.
온갖 지혜가 앞에 나타나 있어
모든 중생의 근원을 다 알고
나고 멸함이 없음을 분별하니
구경(究竟)의 위없는 도이네.
이때 세존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문득 온갖 바라밀을 갖추게 되면, 법계의 미묘한 행을 분별하고, 지혜를 더 늘려서 도훈(道訓)을 펴고, 모두가 두루 4무외(無畏)를 얻게 하고, 온갖 지혜가 자재하여 다시 출요(出要)를 얻어서 제도하지 못한 이를 제도하고, 마음이 온갖 법을 생각[念]하면 모두 나타나 앞에 있고, 선의 지혜[禪智]가 만족하고 염식(念識)을 밥으로 삼고, 법계로 몸을 삼고, 총지(總持)로 행을 삼으며,항상 여러 부처님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다 갖추게 하고, 불도를 성취하여 여러 가지 정(定)을 분별하고, 훌륭한 권도의 방편을 행하여 온갖 부처님이 행한 그 양을 초과하고, 중생의 마음으로부터 생각하는 선과 악을 모두 능히 분별하여 품류를 따라 교화하고, 한량없는 무앙수 억천만 겁으로부터 일심으로 정(定)에 들어서 바른 법을 헐지 않고 다른 딴 상념도 없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다시 빈누문타니자에게 게송을 말씀해 주시었다.
나는 옛적에 불도를 구할 때
보살의 수기를 받지 못했지만
억백천을 지났어도
선정(禪定)은 동요하거나 변하지 않았네.
궁극적으로 일체의 법에서
물들어 집착하는 상념을 내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부처를 이루어
인중존(人中尊)이 되었네.
“일체 모든 법은 불가사의이고, 중생의 경계도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만일 다시 선남자나 선여인이 형상 없는 삼매[無形三昧]에 들어서,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관하여서 제도에 응할 중생도 또한 마땅히 깨달아 알고, 제한 없고 한량없는 제도에 응하지 않을 중생도 또한 마땅히 깨달아 알고, 3세의 일어나고 멸하는 것도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빈누문타니자야, 보살마하살로서 이 정의(定意)를 얻은 이는 청정하지 못한 행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35. 석제환인문품(釋提桓因問品)
그때에 석제환인(釋提桓因)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께서 일체 모든 법을 모두 청정하게 하고, 아울러 여러 한량없는 항하 모래 수효의 부처님 국토와 여러 부처님 세계를 허공처럼 청정케 해서 모두 있는 바가 없다고 설하셨고, 이제 다시 일체의 모든 법을 다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심을 들었나이다. 무엇이 온갖 법 가운데서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는데도 온갖 법을 깨달아 알고자 함이옵나이까?”그때에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구익(拘翼)아, 네가 능히 여래 앞에서 이 뜻을 물으니, 이제 마땅히 너에게 낱낱이 비유를 들어 말해 줄 것이다. 지혜 있는 이는 비유로써 스스로 아느니라.마치 요술쟁이가 국토(國土), 성곽(城郭), 대궐[宮殿], 집[屋室], 음식(飮食), 평상(床臥), 빈천(貧賤), 귀빈(貴賓), 명호(名號), 성자(姓字), 부모형제(父母兄弟), 종, 심부름꾼(僕從給使) 등 만물을 화하여 만들고, 다시 사람의 좌우 시종(衛從)을 화하여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요술쟁이가 보이는 요술[化法]은 혹은 겁수(劫數)를 거치면서 필요한 의복(衣服), 음식, 의약(醫藥), 평상[床臥], 이부자리[臥具]를 공급해서 받는 이도 실제로 받고 보시하는 이도 실제로 보시하는데, 그대가 보기에는 이것이 실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이때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공하고 모두 적멸하여 허깨비와 같아서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나이다. 어리석은 이는 이것에 깊이 집착하여 문득 뒤바뀜을 이루지만, 본래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얽매임도 없고, 다함도 없고, 다하지 않음도 없으니, 허깨비는 형상이 없어서 또한 의지할 수 없나이다.”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구익아, 보살마하살도 또한 다시 그와 같으니라. 환술과 같은 삼매[如幻三昧]의 자연정의(自然定意)를 얻어서 일체 모든 법의 일어나는 바를 분별하지만, 반연이 없고 집착함이 없어서 성패(成敗)를 보지 않는다. 온갖 중생의 무리를 교화 인도하여 제도함 있음을 보지 않고 제도함 없음도 보지 않는다. 제도하여도 제도한 바 없고 교화하여도 교화한 바가 없어서, 모두 공하고 모두 적적하여 다시 나고 멸함이 없느니라.왜냐하면, 요술 같은 정의 뜻 정수삼매[如幻定意正受三昧]는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그 끝이 없고 요술 같음[如幻]의 경계는 불가사의니라. 오직 보살마하살만이 있어 두루 능히 관찰하여 곧 통달해 깨달음을 얻어서 또한 남을 보지 않고 또한 멸함을 보지 않으며, 또한 다시 마땅히 남이 있음을 보지 않고 또한 다시 벌써 남이 있음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보살의 들어가는 바는 불가사의로서 이 나한이나 벽지불의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건너가는 바는 마치 허공과 같으니, 허공을 건너가는 바는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느니라. 환술 같은 삼매[如幻三昧]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동ㆍ서ㆍ남ㆍ북과 사유(四維:네 간방)와 위아래가 없느니라.구익아, 반드시 알아라. 이제 마땅히 너에게 비유를 끌어 대리라. 가령 범부가 본래 형색(形色)이 없어서 능히 선정(禪定)의 근본을 분별하지 못하면, 생겨나도 또한 생겨남을 알지 못하고, 생겨나지 않아도 또한 생겨나지 않음을 알지 못하며, 또한 다시 미래의 생겨남과 이미 생겨난 것을 알지 못하고, 능히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다하지 못하며, 또한 머묾도 보지 못하고 머물지 않음도 보지 못하며, 또한 다함도 보지 못하고 다하지 않음도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형상이 없어서 의지하거나 집착할 수 없고 또한 3승(乘)들이 능히 생각하여 헤아릴 바 아니기 때문이니라.구익아, 반드시 알아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환술 같은 삼매[如幻三昧]에 들어가면,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앞에 나타나서 그 끝도 없고 한계도 없으며, 있어도 있음을 보지 못하고 없어도 없음을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의 경계는 불가사의해서 행하는 법칙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가득 찼기 때문이니라.구익아, 마땅히 알아라. 이제 너에게 비유를 끌어대리라. 가령 사갈(娑竭) 용왕의 비를 내리고자 생각하는데, 만일 여섯째 하늘[第六天:他化自在天]에 있으면 문득 감로(甘露)를 내리고, 만일 사천왕(四天王) 위에 있으면 능히 7보(寶)를 내리고, 난타우발난타(難陀優鉢難陀)용왕 및 마나사(摩那斯)용왕이 여섯째 하늘 위에서 비를 내리면 문득 옷ㆍ장신구ㆍ향구슬[香瓚]ㆍ꽃다발[華鬘]을 내릴 것이고, 만일 네 번째 하늘[第四天]의 위에서 비를 내리면 자연히 음식으로 각각 만족하게 하리라. 어떠한가, 구익아. 이 용이 일으키는 바가 실제로 있는 것이냐?”그때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다만 저 하늘들의 공덕이 곧 여러 용왕들로 하여금 공양을 바치게 했을 뿐이옵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구익아. 7보로 장엄된 궁전과 의복 및 장식은 모두 용이 내린 것으로 본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이제 다시 스스로 여러 하늘의 복덕을 설했기 때문에 여러 용으로 하여금 온갖 보배를 내렸다고 말하지만, 여러 용 및 보물은 실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뜻을 설하고 법을 설하면, 용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보물도 없나이다. 왜냐하면 온갖 만물은 모두 공하고 모두 적멸하여 저의 몸 및 하늘도 또한 있는 바가 없고, 용이 비 내린 바도 또한 비 내림이 있지 않은 것인데, 다만 다함을 보지 못하고 다하지 않음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이 스스로 식의 상념을 내는 것일 뿐입니다.”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으니라, 구익아. 보살마하살이 환술 같은 삼매에 들어가서 일체 모든 법을 다 관하는데, 온갖 법이 생겨나도 또한 생겨남을 보지 않고 생겨나지 않음도 보지 않으며, 온갖 법문의 다함 있음과 다함없음을 보며, 허깨비 법문의 다함 있음과 다함없음을 보며, 다시 한량없고 한정 없는 교화의 법문을 보며, 다시 한량없고 한정 없는 온갖 부처님 세존의 노닐며 걷는 법문을 보며, 다시 한량없고 한정 없는 여러 근(根)의 그물[羅網]이 법문을 보고 들어감을 보며,다시 한량없고 한정 없는 온갖 사물 세계의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겁의 불태움과 심의(心意)가 광대하여 여러 부처님의 행하신 법문을 초월함을 보느니라.
이와 같이 구익아, 마땅히 온갖 법은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다만 중생이 스스로 식(識)의 집착을 낳아서 정의(定意)에 들어가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지 못하고, 공혜(空慧)로 무생(無生)을 얻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천제석(天帝釋)에게 게송을 말씀해 주시었다.
출요(出要)하여 도의 문에 들어서
3세의 행을 분별하고
전전(展轉)하면서 5도(道)를 말미암지만
있음[有]을 타파하여 있음에 처하지 않네.
보살은 여실히 관하여
혜명(慧明)의 길을 분별하고
본래 내가 지은 행은
바로 당장 집착함을 없애네.
세계가 모두 허공과 같고
아(我)와 타(他)라는 두 상념이 없으며
여러 부처님께 공경하여서
지금 무정상(無頂相)을 얻었네.
얼굴 모습 우담발화와 같고
넓고 길어서 얼굴을 덮으며
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아
하늘과 인간에서 존귀함 얻었네.
구익아, 마땅히 근본을 생각해야
온갖 행이 결루(缺漏)하지 않으니
용맹하고 게으르지 아니하여
본말의 공(空)함을 완전히 궁구해라.
앉아서 상념을 일으키지 않고
발로 서서 있음을 보지 않아
온갖 행의 근본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사문(沙門)이라 하네.
실로 열반이 있지 않고
또한 5도(道)의 길도 없으니
다만 보살의 노니는 곳에서
권도의 교화로 생겨남 있음을 보이네.
무앙수의 겁으로부터
욕심 없고 탐내는 바 없어
처음부터 뉘우치는 마음 없거늘
하물며 의지하고 집착함 있으랴.
이로부터 계속해서
선(善)을 닦고 근본을 여의지 않아
일행(一行)으로 불도 이루어서
위없는 법을 굴리네.
나고 죽는 가운데 의탁해서
수없는 사람을 교화하고
남이 없는 법 알게 해서
자연히 도의 가르침에 응하네.
그때에 세존께서 석제환인에게 이 게송을 말씀하실 때에 무수한 백천 여러 하늘과 인간의 백성들이 곧 그 자리에서 무생인(無生忍)을 얻었고, 다시 수없는 여러 하늘ㆍ용ㆍ귀신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발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 및 사부대중인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如幻定意無盡法]을 받아 지니고 외우면 문득 능히 한량없는 법장을 갖추리라. 어떤 것이 한량없는 법장인가. 여래의 변재를 갖추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한량없는 법장[如幻定意無盡法臟]을 배워야 하느니라.다시 다음에 구익아,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구경을 깨달아 아는 부처 지혜[究竟覺知佛慧]를 얻고자 하거든,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삼매[如幻定意無盡三昧]를 배워야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구익아,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여러 부처님 세계에 노닐면서 부처님에게 친근히 함을 얻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삼매를 배워야 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위없는 법륜을 부처님께서 굴리신 것처럼 굴리되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무서움이 없음을 얻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장을 배워야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구익아.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여러 부처님의 백천 총지(總持)를 얻어서 스스로 기뻐하고 즐기고자 하거든,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장을 배워야 하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온갖 중생의 원하는 것을 얻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고 신족의 변화를 얻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장을 배워야 하느니라.
다시 구익아,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여러 부처님 세계의 한량없는 중생의 한량없는 성품의 행을 다 똑같은 한 갈래[一趣]로 함을 얻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한량없는 법장을 배워야 하느니라.다시 다음에 구익아,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량없는 세계의 여러 부처님 국토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되 그 빛깔을 황금처럼 만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장을 배워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온갖 여러 부처님이 모두 여기로부터 생겨났고,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이 허깨비 같은 정의로부터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게 되었으며, 현재의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존도 모두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장으로부터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었으며, 미래의 수없는 항하 모래 수효의 여러 부처님도 또한 마땅히 이 허깨비 같은 정의의 다함없는 법문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에게 비유를 끌어 말하겠으니, 지혜 있는 이라면 비유를 통해 스스로 아느니라.
가령 맹렬한 불의 불꽃이 뜨겁고 치열한데도 다시 장작[薪]을 더 집어넣으면, 큰 바람이 불어와서 드디어 다시 치열하고 불길이 거세져서 쉴 새 없이 산과 들을 태우지만, 풀과 나무가 다 없어지면 불의 세력은 즉시 없어진다.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마음을 발하고 배움을 일으켜서 중생을 제도하려고 법계에 나아갈 바에 나아가 수없는 항하 모래 수효의 찰토(刹土)에 이르기까지 분별하여 사유하고, 다시 허공 중생의 근원을 관하고 다시 스스로 항하 모래 수효의 찰토의 무수 세계의 중생이 심의(心意)로 생각한 바의 근원을 사유해서 낱낱이 분별하느니라.그리하여 다시 스스로 계교하기를 ‘나는 무슨 지혜로써 저들의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나?’ 하고, 낱낱이 자기 법의 나아갈 바를 분별하기를 ‘마땅히 어떤 법을 굴리고 어떻게 교화해야 하나?’ 하느니라. 이때 보살은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본래 원을 발하여 갖가지 선(善)을 갖추었고 중생을 두루 교화하여 나의 소원을 채웠다?’ 하고,다시 스스로 위의와 예절을 갖추어 3세의 근본 행에 굴러 들어가고, 스스로 법을 굴려서 부사의(不思議)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이처럼 계교하여 제도할 것과 못할 것에 응하며, 일체 세계의 있음이나 없음에 응하고, 다시 온갖 부처님 세계의 한량없고 제한 없는 불가사의를 주선(周旋)하고, 함께 주선하면서 공덕의 업(功德業)을 세우고, 바른 법을 끊지 않고 나아갈 바를 맹서하며, 큰 자비를 행하고 큰 서원의 마음을 잡고, 생사를 궁구해서 다하여 마음에 결감(缺減)이 없느니라.왜냐하면 온갖 여러 가지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니라. 다시 중생의 심의(心意)가 생각하는 바를 관해서 응당 어떤 길을 밟아서 장차 인도할 수 있을까 하면서 항상 중생을 어머니가 자식 사랑하듯 생각하느니라.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이 근고(懃苦)의 한량없는 마음을 잡아서 다시 한량없고 제한 없는 삼매에 들어가서 세계를 관찰하여 본래의 서원인 이와 같이 광대하고 한량이 없는 용(用)을 버리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석제환인에게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이 처음 발심함에
큰 서원은 너무나 광대하고
허공의 끝[際]을 다하여서
원하는 바를 갖추었네.
응당 중생을 제도(濟度)할 때는
제도한 바 있음을 보지 않고
3세의 근본을 이해하고 알아서
인연을 오래 의탁하지 않네.
마음이 바르니 움직여 기울지 않고
정념(正念)으로 도의 가르침에 응하며
항상 좋은 방편을 구하여
차례로 해탈에 이르네.
마음에 겁약함을 품지 않고
밤낮으로 법을 사유하여
일행(一行)으로 성불을 얻되
또한 스승으로부터 받지는 않네.
몸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행하고
도의 힘으로 청정함 알아
출가하여 텅 빈 들에 있으면서
정(定)에 들어 몸도 움직이지 않네.
치열하게 모든 법을 불태우고
시방세계를 널리 비추며
스스로 숙명지(宿命智)를 닦아서
중생의 근본을 비로소 아네.
세존께서 석제환인에게 이 법문 설하실 때에 온갖 모인 이들이 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발하였다.
36. 본행품(本行品)
그때에 어떤 천자(天子)가 있었으니, 이름이 중수영락(衆首瓔珞)이었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서 옷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였다. 앞선 부처님 세상이래로 항상 범행(梵行)을 닦아서 세 곳[三處]이 벌써 다하고 과원(果願)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꿇어앉아 합장한 채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살고 있는 방계(方界)는 여기서 극히 머나이다. 원컨대 질문하고자 하옵나니, 만일 허락하신다면 감히 여쭙겠나이다.”부처님께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무리를 인도하는 우두머리[衆首]가 되어서 몽매한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고 법의 큰 깃대를 세워서 지혜의 광명을 펴는구나. 의심이 맺힌 바 있으면 지금 바로 풀어라. 여래가 마땅히 낱낱이 분별해 주리니, 물음에 따라 답해서 열어주고 이해시켜 주겠노라.”그때에 중수영락보살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다시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나아가 닦지 않고서도 성불할 수 있나이까, 없나이까? 자못 1주(住)에서 근기와 공덕의 힘[根德力]을 세운 보살 대사(大士)로부터 8지(地)보살대사에 이르기까지 다시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나아가 닦지 않고, (성불할 수 있나이까, 없나이까?) 자못 여러 하늘이 온갖 행을 갖추고 불퇴전에 서서 여러 근(根)을 갖추고 다시는 사람의 몸을 얻지 않는다면 성불할 수 있나이까, 없나이까? 바라옵나이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방편으로 발견(發遣)하여 주십시오.”그때에 세존께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능히 여래의 앞에서 사자후를 일으키는구나. 살펴 듣고 살펴 들어서 잘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보살이 행하는 온갖 법은 같지 않느니라. 혹 어떤 보살마하살은 손가락 튀기는 사이에 보살의 마음을 얻어서 즉시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이루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으며, 혹 어떤 보살은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큰 서원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 6주(住)에 이르기까지 불도를 구하지만, 문득 퇴전(退轉)이 있어서 성취하지 못하고, 혹 어떤 보살은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7주에 이르기까지 성불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8주(住)의 경지를 거치지 않느니라.”그때에 중수영락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손가락 튀기는 동안에 보살의 마음을 발하여 즉시 불도(佛道)를 이루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6지에 이르기까지 퇴전함이 있어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보살이 7주에 이르기까지 성불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8주의 경지를 겪지 않는 것이옵나이까?”그때에 부처님께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손가락 튀기는 동안에 보살의 도를 구하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아서 부처를 이룬다면, 이 선남자나 선여인은 온갖 근(根)이 갖추어져서 일찍이 생사(生死)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 혹은 어떤 회상[會]으로부터 일단 하늘[天]을 닦아 이 사이[間]에 와서 태어나고, 혹은 무노부처님[無怒佛] 국토로부터 이 사이에 와서 태어나고, 혹은 무량불(無量佛:아미타불) 국토로부터 여래께서 설한 본말(本末)의 공(空)과 생멸이 없는 도를 한 번 듣고서 문득 더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이루니라.혹은 어떤 보살마하살은 여러 가지 행을 갖추어서 여래의 명혜법관(明慧法觀)을 얻고, 다시 여래를 닦으면서 부처님을 생각[念]하고 법을 생각하고 비구승을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고 수식관[安般]을 생각하고 죽는 것을 생각하며, 4의지(意止)ㆍ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성도(聖道)를 생각해 닦고,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음행ㆍ화냄ㆍ어리석음[婬怒痴]에 크게 힘쓰지 않아서 선의 근본[善本]을 더 늘리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갖추게 하지만, 비록 6지(地)에 있더라도 마음에 우물쭈물하는 생각을 내면서 ‘아, 나는 장차 7주(住) 보살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혹은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히 의심하지 않는다’ 하고, 다시 거짓 변화한 보살이 이 보살을 망치려고 말하기를 ‘너는 지금 이미 본말을 꿰뚫는 공의 지혜[本末空慧]를 얻었느니라’하면, 이 보살은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면서 ‘내가 이제 신령하고 덕 있는 보살이 보인 증명을 들었으니, 이제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얻을 것이라’라고 하면, 이런 자는 오래지 않아 문득 6주(住)에서 퇴전하여 성문 벽지불의 도에 떨어지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미 6지(地)에서 보살의 행을 갖추고 다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분명히 8주지(住地)에 있으면서 오래지 않아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이룰 것이다’ 하고, 친근한 선지식이 방편으로 8주의 행하는 법을 설하기를, ‘선남자야, 아는가 모르는가. 너는 지금 이미 8주지에 있으니,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나머지 보살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와 같이 하면 그대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이룰 것이니라’라고 하면,보살이 이를 듣고 기뻐 날뜀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문득 선남자의 가르침을 따라 한가롭고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한마음으로 스스로 생각하니, 저 보살은 곧 8주(住)의 행 속에 있으면서 불퇴전을 세우고 불사(佛事)를 베풀므로 겁수를 지나서 오래지 않아 부처를 이루느니라.”부처님께서 다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다시 다른 보살에게 권면(勸勉)을 받기를, ‘너는 이제 오래지 않아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리라’하면,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행이 없거늘 어떻게 위없는 바르고 참다운 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구경(究竟)을 이루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하고는 마음을 견고히 잡고 문득 앞으로 나아가서 7주지에 있으면서 불퇴전을 얻었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6주 가운데 있으면서 퇴전과 불퇴전이 있다고 이르느니라.”그때에 중수영락보살이 물어 여쭈었다.
“어떠하나이까. 8주의 보살이 곧 성불하는 데 포태(胞胎)를 거치지 않을 수 있나이까, 없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8주의 보살은 온갖 법은 공과 같고 허깨비 같아서 공적하여 형상이 없다고 관하며, 행하는 법칙도 또한 다시 공과 같다고 관한다. 또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면서도 중생이란 상념이 없으며, 시방 여러 부처님 세계에 나아가서 한량없는 법의 가르침을 들어서 받고,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본래 신상(身相)이 없어서 또한 마땅히 안팎의 형상 없음을 분별하고, 여러 부처님에게 두루 물어서 일체 모든 법에 싫증을 내지 않고,다시 마땅히 온갖 중생에게 가르쳐 주고, 이것을 버리고 이것에 나아가서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가고, 앉을 데 앉을 줄 알고 누울 데 누울 줄 알고, 중생을 교화함에 때를 잃지 않고, 깊은 법을 설하여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다 해탈을 얻게 하나니,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행을 갖추면 문득 부처님의 삼매를 얻어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느니라. 이미 국토를 깨끗하게 하면 문득 보살의 정요(正要)에 들어가며, 이미 정요에 들어가면 문득 온갖 총지 법문을 능히 일으켜 갖추며, 이미 법문을 갖추면 곧 능히 변재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 보이느니라.미래ㆍ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연설하신 법의 가르침을 모두 다 갖추고, 변화가 자유로운 일체 모든 법을 성취해도 저마다 어긋나거나 어지러움이 없으며, 온갖 중생의 마음 때[心垢]를 능히 깨끗이 하여 문득 해탈의 걸림 없는 법의 지혜[解脫無碍法慧]를 얻으리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와서 이 선남자나 선여인을 옹호해서 온갖 법을 성취하고 10력(力)을 갖추어 무서운 바가 없으며,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이 심식(心識)이 생각하는 바를 분별하여 낱낱이 선택하여 끝내 버리지 않으며, 온갖 사람을 세워서 본말 공혜(本末空慧)를 얻게 하고, 한량없고 제한 없는 시방세계에 갖가지 방면에 모두 이별이 있고, 시방세계에 모두 합침이 있다는 도의 가르침을 안처(安處)시킨다.그리고 다시 시방 한량없는 세계에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의 온갖 지혜로 영락하여 앞에 나타나 있으며, 다시 한량없는 찰토에서 낱낱의 모든 부처님의 명호(名號)과 성자(姓字)를 모두 다 한 방면(方面)처럼 분별하며,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에서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의 성자(姓字)를 분별하며, 시방 경계의 모든 부처님의 성자도 또한 마찬가지다. 보살마하살이 다시 시방 한량없는 세계로 하여금 펼치게 하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하는데, 시방세계의 이미 펼치고 이미 축소한 것이 다시 한량없고 제한 없는 항하 모래 수효의 찰토로 하여금 지혜의 힘으로 펼치게 하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한다.낱낱의 명호(名號)가 다시 한량없고 제한 없이 여래의 얼굴을 보는데서 다시 지혜의 힘으로 펼치게 하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제한 없는 항하 모래 수효의 온갖 부처님 찰토의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분별해서 모두 다 이와 같은 시방 여러 부처님의 법계를 분별하고 명호를 분별하지만, 그러나 모든 부처님 세존이 다 와서 이 보살을 옹호하여 성취함을 얻게 한다.보살마하살이 이 대승의 뜻을 얻어 본말의 공정[本末空定]에 들어가 보살의 위의와 법칙을 잃지 않고서 두루 중생의 근본을 능히 관찰하고 다시 여러 부처님이 심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능히 안다. 그 보살은 마땅히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당연히 여래라고 칭해야 한다.왜냐하면 온갖 법을 알아서 일체 행을 초월하고, 온갖 법에서 의심을 품지 않고, 행이 여래와 같아서 온갖 여래의 정법을 얻고, 혹은 하나의 생(生)을 알고 백천 생을 알고 아승기를 알며, 한량없는 부처님 법을 받아 지니고 외우며, 불도를 성취하여 잊지 않고, 일체지(一切智)에 들어가 나[吾我]를 보지 않으며, 온갖 부처님 법의 총지를 깨달아 알아서 강력히 기억하여 잊지 않으며, 그 보살이 온갖 법을 관하여 광명을 나타내고, 지혜의 광명으로 어리석음의 어둠을 비추어서 지혜가 퇴전하지 않느니라.그 보살마하살은 훌륭한 권도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데 걸림이 없으며, 그 보살은 이미 한량없는 법을 얻어서 이근(耳根)이 청정하여 다함없는 법을 듣고 자연히 화(化)에 응하지만 믿으면서도 쫓지 않으며, 그 보살마하살은 한량없고 제한 없이 중생의 몸을 변화하여 하나가 아니게 하며, 혹은 무앙수의 색(色)을 도로 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을 나타내고, 다시 무색(無色)으로부터 수없는 색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신해(信解)하지 않음이 없게 하며, 장광설(長廣舌)을 내밀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덮었다가 다시 도로 하나로 만드니, 이처럼 무앙수의 무리를 교화하느니라.”부처님께서 중수영락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시방세계의 허공 변제(邊際)까지 이 온갖 행을 다 능히 요달해 알면, 곧 그 이름을 보살로서 여래를 돕는 곳[菩薩補如來處]이라고 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다시 중수영락보살에게 게송을 말씀해 주시었다.
시방에서 법계를 듣고서
중생의 길 나타내 보이고
모든 불사(佛事)를 닦아 행함은
사람 중의 보살 존자일세.
대중에 있으면서 도를 성취하여
보살의 행을 두루 아니
일체의 행을 초월하는
10력(力) 걸림이 없네.
온갖 부처님이 늘 옹호해서
얼굴을 보듯 앞에 계시며
그 공덕을 칭송하여
법에 위가 없음을 찬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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