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변정론(辯正論) 4권
변정론 제4권
법림 지음
이영무 번역
4. 십대봉불편 ②
대당(大唐) 고조(高祖) 태무(太武)황제
대당 금상(今上)황제
위(魏)나라 대승상(大丞相) 발해왕(勃海王)
위나라 시중 태보 사도공 광양(侍中 太保 司徒公 廣陽) 의렬왕(懿烈王)
광양(廣陽) 충무왕(忠武王)
위나라 사도(司徒) 광양왕(廣陽王)
광양(廣陽) 문헌왕(文獻王)
위나라 상국(相國) 고왕(高王)
여남왕(汝南王)
위나라 의도왕(宜都王)
위나라 상당왕(上黨王) 목(穆)
위나라 상산왕(常山王) 지(鷙)
위나라 회양왕(淮陽王) 위(尉)
하동왕(河東王) 순(荀)
위나라 동양왕(東陽王) 비(丕)
회남왕(淮南王) 타(他)
위나라 진왕(秦王) 한(翰)
위나라 사도 북해왕(司徒 北海王) 상(詳)
사목 고양왕(司牧 高陽王) 옹(雍)
위나라 팽성왕(彭城王) 협(勰)
위나라 제남왕(濟南王) 문약(文若)
위나라 안풍왕(安豊王) 연명(延明)
중산왕(中山王) 희(熙)
위나라 낭야왕(瑯琊王) 송(誦)
위나라 상서령 광양왕(尙書令 廣陽王) 가(嘉)
위나라 진류왕(陳留王) 건(虔)
위나라 제헌무왕(齊獻武王)
위나라 사지절 중외제군사(使持節 中外諸軍事) 제왕(齊王)
거록왕(鉅鹿王) 천(闡)
위나라 녹상서사 팽성왕(錄尙書事 彭城王) 소(韶)
초군왕(譙郡王) 양(亮)
위나라 강하왕(江夏王) 이(彛)
임조왕(臨洮王) 영(榮)
위나라 태사 대사마 낙주자사(太師 大司馬 洛州刺史) 풍희(馮熙)
위나라 사지절 유주자사 사도공(使持節 幽州刺史 司徒公) 호국진(胡國珍)
위나라 사도(司徒) 조형(祖瑩) 자는 원진(元珍)
위나라 사공(司空) 이무위(李無爲)
위나라 태부 창녕왕(太傅 昌寧王) 이식(李寔)
위나라 소보 건창공(少保 建昌公) 두략(竇略)
위나라 사공(司空) 고오조(高傲曹)
위나라 사도 고융지(高隆之)
위나라 시중 상서령(尙書令) 원예(元乂)
위나라 우복야 대행대 모용소종(右僕射 大行臺 慕容紹宗)
위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형만(邢巒)
위나라 표기대장군 의동삼사 항주자사(驃騎大將軍 儀同三司 恒州刺史) 육정(陸政)
위나라 태상경 공후(太常卿 恭侯) 정경(鄭瓊)
위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한중상(韓仲詳)
위나라 황문(黃門) 최릉(崔陵)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노영수(盧令守)
위나라 패군태수(沛郡太守) 조원측(趙元則)
위나라 하남윤 무읍공(河南尹 武邑公) 이장(李奬)
위나라 태자중서자 어사중승(太子中庶子 御史中丞) 육재(陸載)
위나라 위위경(衛尉卿) 허백도(許伯桃)
위나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위나라 영원장군(寧遠將軍) 후막진인(侯莫陳引)
제(齊)나라 대승상 내외제군사 상산왕(大丞相 內外諸軍事 常山王) 확(確)
제나라 태위 난릉왕(太尉 蘭陵王) 장공(長恭)
제나라 사도 낭야왕(司徒 瑯琊王) 엄(儼)
제나라 녹상서사 장광왕(錄尙書事 長廣王) 담(湛)
제나라 대도독 상서(大都督 尙書) 광평왕(廣平王)
제나라 대사마 청하왕(大司馬 淸河王) 단(亶)
제나라 좌복야 광녕왕(左僕射 廣寧王) 효연(孝衍)
제나라 시중 사지절 상서령 녹사 도독조주제군사 표기대장군 개부의 동삼사 호군장군 조주자사 대육주도독 병대중정 장안공 진창왕(侍中 使持節 尙書令 錄事 都督趙州諸軍事 驃騎大將軍 開府儀 同三司 護軍將軍 趙州刺史 帶六州都督 幷大中正 長安公 晋昌王) 당옹(唐邕)
제나라 우승상 함양왕(右丞相 咸陽王) 곡률명월(斛律明月)
제나라 좌승상 평원왕(左丞相 平原王) 단효선(段孝先)
제나라 녹상서사 회남왕(錄尙書事 淮南王) 화사개(和士開)
제나라 태상 청하왕(太常 淸河王) 고악(高嶽)
제나라 태재 장무왕 고적천추(太宰 章武王 庫狄千秋)
제나라 시중 진왕(秦王) 고언귀(高彦歸)
제나라 시중 상서령(尙書令) 원라(元羅)
제나라 상서령(尙書令) 고조(高肇)
제나라 태위(太尉) 팽락(彭樂)
제나라 사도 반상(潘相)
제나라 사공 사마자여(司空 司馬子如)
제나라 광록대부 상서복야(光祿大夫 尙書僕射) 양준언(楊遵彦)
제나라 소부 상서복야(少傅 尙書僕射) 위목(魏牧)
제나라 광록대부 상서복야(光祿大夫 尙書僕射) 최섬(崔纖)
제나라 우복야(右僕射) 최계서(崔季舒)
제나라 좌복야(左僕射) 연자경(燕子敬)
제나라 복야(僕射) 조언심(趙彦深)
제나라 시중 곡률효경(斛律孝卿)
제나라 시중 곡사문약(斛斯文若)
제나라 시중 서지재(徐之才)
제나라 시중 고정덕(高正德)
제나라 칠병상서(七兵尙書) 왕원경(王元景)
제나라 태상경(太常卿) 최앙(崔昻)
제나라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적(劉逖)
제나라 위위경(衛尉卿) 두필(杜弼)
제나라 전중상서(殿中尙書) 형자재(邢子才)
제나라 비서감(秘書監) 조효징(祖孝徵)
제나라 상서좌승(尙書左丞) 봉효담(封孝琰)
제나라 사지절 평남장군 인주자사 금자광록대부 안강후(使持節 平南將軍 仁州刺史 金紫光祿大夫 安康侯) 번유(樊儒)
주(周)나라 주국 양주총관(柱國 襄州總管) 위왕(衛王)
주나라 주국 익주총관(益州總管) 조왕(趙王)
주나라 주국 옹주자사(雍州刺史) 제왕(齊王)
주나라 태사 대총재 주국 대장군 진국공(太師 大冢宰 柱國 大將軍 晋國公) 우문호(宇文護)
주나라 주국 상서복야 초국공(尙書僕射 楚國公) 두로영(豆盧寧)
주나라 태부 주국 대장군 대종백 등국공(太傅 柱國 大將軍 大宗伯 鄧國公) 두치(竇熾)
주나라 시중 주국 대장경 무위장군 관군장군 중산대부 안풍공(大匠卿 武衛將軍 冠軍將軍 中散大夫 安豊公) 단치(段跱)
주나라 주국 옹주목 남연팔주제군사 연주총관 찬국공(柱國 雍州牧 南兗八州諸軍事 兗州總管 酇國公) 두공(竇恭)
주나라 대장군 유주자사 안정공(大將軍 幽州刺史 安定公) 우문귀(宇文貴)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태자세마 운녕장공 낭야군왕(開府儀 同三司 太子洗馬 雲寧莊公 瑯琊郡王) 척발승(拓拔勝)
주나라 사지절 섬주도독 행대 낭중통직 산기상시 하동공(使持節 陝州都督 行臺 郞中通直 散騎常侍 河東公) 우문선(宇文善)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양화공(開府儀 同三司 陽化公) 원앙(元昻)
주나라 주국 대장군 농서동공(大將軍 隴西東公) 양찬(楊纂)
주나라 통주자사 우시상사 산기상시(通州刺史 右侍上士 散騎常侍) 양조(楊操)
주나라 사공 정후(貞侯) 정목(鄭穆)
주나라 시중 소부 경조군수 행대랑중 대장경 연군공 노경인(少傅 京兆郡守 行臺郞中 大匠卿 燕郡公 盧景仁)
주나라 태보 주국 대장군 오무공(太保 柱國 大將軍 吳武公) 울지안(尉遲安)
주나라 대장군 남만도감 상산공(南蠻都監 常山公) 유경지(柳慶之)
주나라 북형주자사 안도공(北荊州刺史 安道公) 석고(席顧)
주나라 사지절 주국 대장군 대도독 동주자사 서국공(使持節 柱國 大將軍 大都督 潼州刺史 徐國公) 약간봉(若干鳳)
주나라 사지절 태부 주국 대장군 청하공(太傅 柱國 大將軍 淸河公) 휴막진휴(侯莫陳休)
주나라 태사 주국 촉국공(太師 柱國 蜀國公) 울지형(尉遲逈)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안정공(開府儀 同三司 安政公) 사웅(史雄)
주나라 개부 평북장군 인주자사 안화공(開府 平北將軍 仁州刺史 安化公) 구홍빈(丘洪賓)
주나라 익주부중랑 신주자사(益州府中郞 新州刺史) 채가(蔡哿)
주나라 개부 위원장군(開府 威遠將軍) 왕정(王靜)
주나라 대장군 화계웅(和雞雄)
주나라 대장군 이면영(爾綿永)
주나라 사금대부(司金大夫) 파다라기(破多羅紀)
주나라 군사마 홍화공 의력근중경(軍司馬 洪和公 意力勤仲慶)
수(隋)나라 진왕(秦王) 준(儁)
수나라 촉왕(蜀王) 수(秀)
수나라 한왕(漢王) 양(諒)
수나라 태사 상주국 신국공(太師 上柱國 申國公) 이목(李穆)
수나라 태보 상주국 설국공(太保 上柱國 薛國公) 장손람(長孫覽)
수나라 상주국 사지절 회남총관 수주자사 관왕(使持節 淮南總管 壽州刺史 觀王) 양웅(楊雄)
수나라 대사마 상주국 신무숙공(大司馬 上柱國 神武肅公) 두의(竇毅)
수나라 상주국 상서우복야 노국공(尙書右僕射 魯國公) 우경측(虞慶則)
수나라 상주국 상서좌복야 제국공(尙書左僕射 齊國公) 고영(高穎)
수나라 상주국 우위대장군 진국공(右衛大將軍 陳國公) 두항(竇抗)
수나라 상주국 무위장군 양국공(武衛將軍 梁國公) 후막진예(侯莫陳芮)
수나라 상주국 낙예십칠주제군사 낙주자사 순양공(洛豫十七州諸軍事 洛州刺史 詢陽公) 원효구(元孝矩)
수나라 상주국 형주총관 상명공(荊州總管 上明公) 양기(楊紀)
수나라 상주국 상서좌복야 월국공(尙書左僕射 越國公) 양소(楊素)
수나라 상주국 상서우복야 납언 비국공(尙書右僕射 納言 邳國公) 소무위(蘇武威)
수나라 상주국 도독하동제군사 하동태수(都督河東諸軍事 河東太守) 두경(竇慶)
수나라 주국 우위장군 남강공(柱國 右衛將軍 南康公) 유숭(劉嵩)
수나라 표기장군 의동삼사 분주자사(驃騎將軍 儀同三司 汾州刺史) 최봉(崔鳳)
수나라 상주국 하명왕(何明王) 양벽사(楊辟邪)
수나라 병부상서 상대장군 용강공(兵部尙書 上大將軍 龍崗公) 단문진(段文振)
수나라 저작랑 제남후(著作郞 濟南侯) 왕소(王劭)
수나라 상주국 박령사주총관 해릉공(靈四州總管 海陵公) 하약의(賀若誼)
수나라 사지절 대장군 양주제군사 양주자사 조국공(使持節 大將軍 凉州諸軍事 凉州刺史 趙國公) 독고라(獨孤羅)
수나라 상주국 양익육주총관장 국양공(凉益六州總管將 國襄公) 양예(梁睿)
수나라 상주국 광종장공(廣宗莊公) 이숭(李崇)
수나라 상주국 좌무위대장군 사지절 양주자사(左武衛大將軍 使持節 凉州刺史) 우문경(宇文慶)
수나라 상대장군 영주총관 위흥공(上大將軍 營州總管 魏興公) 위세문(韋世文)
수나라 상주국 이부상서 상용공(上柱國 吏部尙書 上庸公) 위세강(韋世康)
수나라 광한태수 양원후(廣漢太守 襄垣侯) 설염(薛琰)
당나라 고조 태무황제
요(堯)를 이어 진(晋)에 살았고 무(武)를 계합하여 주(周)를 기초로 하였다. 구름이 일고 용이 치솟듯 하여 기회를 어루만지고 세상을 명하였다. 일광천하(一匡天下)하듯이 일어났고 구합제후(九合諸侯)를 인하여 즐거이 추대하였다. 삼허(參墟)로부터 출발하여 극히 서울을 정하였으니 풍속을 조문하는 규약을 이미 폈고 법을 약속하는 가르침을 문득 폈다. 다섯 별을 아울러 모으고 교화가 4표(表)에 크시니 지뉴(地紐)가 도로 바르게 되고 천유(天維)가 거듭 펴졌다. 동으로부터 서에 이르도록 먼 곳이 편안하고 가까운 데가 엄숙하였다.
그래서 의로운 깃발이 처음 가리켜서 저 화음(華陰) 지방을 지나면서 신령한 단에 제사지내기를 바라서 복 많이 받기를 구하였으니, 그의 땅은 1만 나라가 조종(朝宗)하는 길이요 6합(合)이 사귀어 모이는 갈피였으니 가히 거둥과 형상을 우러러볼 만하며 참선하고 경을 외울 만한 곳이었다.
이에 신사(神祠)의 오른쪽에 가람을 세우게 하여 영선사(靈仙寺) 한 곳을 지으니 비문은 태자서자(太子庶子) 이백약(李百藥)이 지은 것이어서 문채와 문장이 서로 비추고 황금색과 푸른색이 서로 비추어서 아침저녁의 빛을 끌어 빛나고 무지개의 채색이 환하게 빛난다. 꽃대[花臺]는 그윽하여서 가까이 연꽃 봉오리를 대하였고 그림그린 관(觀)은 드높이 패궐(貝闕)에 빗겨 임하였다.
또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베껴 써서 복을 고루 닦았으며 경사에 회창사(會昌寺)ㆍ승업사(勝業寺)ㆍ자비사(慈悲寺)ㆍ증과니사(證果尼寺)ㆍ집선니사(集仙尼寺)를 지었고, 또 옛 집을 희사하여 흥성니사(興聖尼寺)를 지었다.
병주(幷州)에 의흥사(義興寺)를 지으니 당과 집이 장대하고 불상의 시설이 장엄하고 빛나서 겹친 두공[拱]에 별을 그리고 겹친 문설주에 달을 그렸으며 높은 창문에는 안개가 서린 듯하고 확 트인 창호는 바람을 맞아 이로써 지혜의 동산과 참선하는 숲이 두루 갖추지 아니함이 없었다.
무덕(武德) 1년에 주작문(朱雀門)의 남쪽으로 통한 거리의 위에 도량을 차려 무차(無遮)의 큰 모임을 베푸니 빈분(繽紛)한 우객(羽客:道士)들이 판을 잡고 오는 거둥이 복전(福田)과 더불어 연기 모이듯 다 모여서 허공을 거닐어 겨우 끌어잡음에 흐르는 구름조차 막는 듯하고, 맑은 범종(梵鍾)이 천천히 도니 지나던 새도 멈추는 듯하며 꽃다운 묘한 공양은 다섯 가지의 청정함을 받들어 비추어오고 고운 이름난 꽃은 3산(山)에서 받들어 이른 듯하였다.
이에 수레와 말이 폭주하고 선비와 여자들의 수레가 따르니 마치 현산(峴山)에 모인 듯하고 계 제사[禊] 때 올린 술 마시기를 다투는 듯하였다.
가령 햇빛이 꿈에 통하니 오직 흰 말의 증험을 전하고 보살이 응하여 나니 한갓 적오(赤烏)의 해[歲]를 듣지만 오늘에 비교하면 부끄러움이 있다 하겠다.
또 태조(太祖) 원(元)황제와 원정(元貞)태후를 위하여 전단향나무로 등신상(等身像) 3구를 만드니 상호(相好)가 기이하고 특수하여 장엄함이 희유(希有)하였다. 자비사에서 공양하였다.
무덕 1년 중춘(仲春)의 달에 그 때는 봄빛이 빛나고 드날려서 푸른 풀이 복을 드리니 양의(兩儀)가 서로 통하고 만물이 다 형통하였다. 이에 복이 많으신 분의 마땅함을 응하여 유신(惟新)의 은택을 펴실 때에 사문과 도사(道士) 각기 69인에게 명하시어 태극전(太極殿)에서 7일 동안 도를 행하게 하였으며 자리가 마치는 날 1천 스님들에게 재를 베풀었다.
법림(法琳)은 불교와 도교 두 교가 같은 곳에서 널리 펴지는 것을 보고 신(神)의 공력을 바라며 3경(景)이 연합하여서 보명(寶命)과 이의(二儀)와 더불어 함께 오래하기를 바라면서 이에 비사(鄙詞)를 지어 송(頌)을 올렸다.
멀리 옛날을 찾으니
아득히 듣기로는 원황께서
때를 인하여 교훈을 지으시고
지혜를 써서 꽃다움을 드리웠네.
은혜를 비느라 망(望)제사를 지내고
덕을 갚느라 증(蒸)제사와 상(嘗)제사를 지냈네.
오직 작은 제사를 높이니
어찌 큰 방법을 듣겠습니까?
3교(敎)를 키우지 아니하여
다만 9장(章)만 풍송(諷誦)하였소.
기약을 응해 어지러움을 헤쳐서
우리 성당(聖唐)께서
인과(因果)에 밝게 통달하시고
단정히 문창(文昌)에 공수하시니
교화는 10호(號)에 짝하고
어짊은 백왕(百王)에 깊었소.
시절은 중월(仲月)이고,
때는 소양(少陽)에 올랐소.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는 창창(蒼蒼)한 하늘에 답하여서
금궐(金闕)에 베풀어서
이에 도량을 여셨으니
일궁(日宮)이 빛나고
성대(星臺)가 휘황하게 빛나오.
허공에는 구슬 그림자를 달았고,
불꽃은 윤광(輪光)을 움직이오.
구름이 옥우(玉宇)를 헤치고,
연기가 명향(名香)에 흩어지오.
공양은 날아 내리는가 의심스럽고,
소리는 봉장(鳳鏘)을 머금었소.
기린(麒麟)이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단 이슬이 상서로움을 드리오.
공덕은 겁(劫)을 따라 멀리 가고,
은덕은 하늘과 함께 길어지오.
은혜 젖음이 때가 있는 듯하나
은택 입힘은 끝이 없소.
목숨은 원시(元始)와 한가지이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소.
큰 기틀이 길이길이 가고
많은 복을 내리소서.
대당 금상(今上)황제
태역(太易)과 태초(太初)의 기운을 품수하고 천황(天皇)과 천제(天帝)의 신령함을 의뢰하여서 유방(幽房)에서 고양(高陽)의 터를 열었고 요허(姚墟)에서 중화(重華)의 업을 얽매었다.
붉은 빛은 문호에 흐르고 자색 기운은 하늘을 찌른다. 용의 얼굴과 봉의 가슴의 형체와 해가 뿔이 나고 달이 달리는 조짐과 하수(河水)의 눈이고 바다의 입과 같은 이상함과 위가 풍성하고 아래가 뾰족한 기의함이 있다. 총기 있고 성스러우며 현묘하게 보는 것과 오는 일을 알고 가는 일을 간직하며 그윽함을 더듬고 미묘한 데 들어가서 정신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그의 뜻은 하늘이 주었고 그의 몸은 자연스러웠다.
용잠(龍潛)의 처음에 경륜을 크게 내렸으나 수씨(隋氏) 세상의 말기에 속하여서 우내(寓內)가 나뉘고 무너지니 불이 곤륜산 봉우리까지 타고 물이 푸른 바다에까지 날았다. 그래서 왕세충(王世充)이 공주(鞏州)와 낙주(洛州)에서 발호(跋扈)하였고, 두건덕(竇建德)이 기주(冀州)와 정주(定州)에서 일어났으며, 당필(唐弼)과 설거(薛擧)가 이미 삼진(三秦)에서 개미 모이듯하였고, 흑달(黑闥)과 무주(武周)가 또한 여섯 군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들은 모두 사슴을 쫓는 뜻이 있었고 각기 왕이라 참칭하는 의식이 있어서 무뢰(無賴)한 자제들을 끼고 오합(烏合)의 무리들을 거느리며 소와 염소 같은 힘을 부려서 물풀같은 흉함을 발하니 하수의 오른쪽 이래로 용과 뱀이 같이 죽고 중원의 땅에 옥과 돌이 함께 타서 드디어 지표(地表)와 천수(天垂)가 다투어 어진이가 와서 자신들을 소생시켰으면[來蘇] 하는 탄식이 있었으며 상경(上京)과 요복(要服)의 사람들이 서축(抒軸)의 슬픔을 일으켰다.
우리 황제께서 제자(帝子)의 친(親)에 있으시고 천책(天策)의 명(命)에 응하시어서 약려(若勵)의 무거움을 쓰시고 얼음 밟듯 하는 위험을 구하였고 저녁에 삼가는 것을 깊게 하는 것으로써 거꾸로 매달리는 위급함에 나가셨다.
모두 아홉 번 정벌을 행하여서 총 여섯 군사를 거느렸으며 위로는 일기(日旗)와 월기(月旗)로써 임하시고 아래로는 천진(天陣)과 지진(地陣)으로써 펴시니 북소리가 들에 떨쳐서 기운이 하늘 문까지 움직였으며 고각(鼓角) 소리가 산을 울리니 위엄이 땅의 문까지 놀라게 하였다.
이에 유성(流星)을 띠 두르고 멀리 들어갔으며 빠른 번개를 타고 앞장서 나아가니 저들의 군사가 기왓장 무너지듯 얼음 녹듯하며, 바람이 불자 풀이 쓰러지듯 하였다. 개가(凱歌)가 울려 퍼지자 더불어 공을 따지는 이가 없었다.
천황(天皇)으로부터 9기(紀) 이래 52번을 전쟁한 뒤에 무릇 1백25대를 지난 1천3백59세(世) 1천12만 2천1백27년 이래로 도끼[鉞]를 잡아 전쟁에 임하였으며 기를 휘둘러 무리에게 맹세하여서 악한 기운을 몰아 없애고 참창(攙槍:彗星)을 깎아 평정하여서 횡류(橫流)에 빠짐을 건져주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를 구제하여서 경계를 통일하고 천하를 널리 깨끗이 하는 데는 우리 임금처럼 군사 쓰는 이가 있지 아니하였다.
고조께서 신을 모으고 성스러움을 길러서 연기와 노을 밖으로 생각을 달리고 까만 것에서 나오고 어두운 데 들어가서 하늘과 사람 밖에 높이 뛰어났다. 더욱이 1만 지방이 어두움에 칩거하고 1백 귀신이 제사를 못함에랴. 이에 영양(穎陽)의 높은 풍도를 굽혀서 온 나라[率土]에 빠져 있는 이를 건짐에랴. 백성들이 재조(再造)의 덕을 입었고 뭇 무리들이 사물을 이루는 은혜를 입었다.
위로는 황옥(黃屋)1)으로써 마음을 삼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오직 백성들을 생각하였으며, 사문이 되려는 생각을 마음으로 잊지 아니하고, 석방하고 짊어지는 뜻은 새벽에 나타남이 있었다. 체교(禘郊)에 의탁함을 기뻐하고 종우(宗祐)에 주인 있음을 기뻐하며 때로 상고하고 날로 단련하여서 큰 보배를 소양(少陽)에게 전하였다.
감무(鑒撫)에 광응(光膺)함으로부터 태자[春宮]가 되어서 덕은 안과 밖에 크고 어짊은 어두운 곳과 밝은 곳에 미쳤다. 조금 있다가 거듭 광채를 내어서 우주의 사이를 비추어 밝히고 무(武)와 인(仁)을 키워서 바람과 구름의 때를 넘치게 하며 3선(善)을 따라서 1만 나라를 곧게 하였으며, 하늘의 문이 거듭 열리고 보력(寶曆)이 새로워짐에 적현(赤縣)에 임하여 장엄을 크게 맹세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이익됨을 널리 일으켰으며, 네 가지 평등의 날을 열어서 요(堯)임금의 구름을 두루 비추고 여섯 가지 바라밀의 풍도를 드날려서 순(舜)임금의 비를 흐르게 하니 보배의 배가 잠겼다가 다시 솟고 자비한 구름이 걷혔다가 다시 펴졌다.
그래서 선대(仙臺)는 법원(法苑)과 함께 빛나고 옥거울은 금륜(金輪)과 나란히 구르며 은택은 유정천(有頂天)에까지 두루하고 도는 땅이 끝나 없는 데까지 미쳤다.
신령함은 아름다운 징조에 응하고 조짐은 먼저 나타난 일에 부합하여 너그럽고 어질고 덕스럽고 효도하시니 사관이 뒤에 쓴 것에 갖추어져 있다. 매양 그물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무사태평(無事太平)의 정치에 생각을 두었으니 뜻하는 바는 감옥을 길이 비우고 봉화(烽火)를 길이 그치게 하여서 꿈틀거리는 뭇 중생들을 한가지로 어질고 장수하는 데 돌아가게 하고 망망한 솔토(率土)에서 진여(眞如)를 함께 받드는 데 있다.
정관(貞觀) 1년 헌조협종(獻肇夾鍾:음력 2월)의 달에 높이 뛰어난 기[幢]를 세우고 소양고세(少陽沽洗:음력 3월)의 때에 지혜의 전(殿)을 훤출하게 열어서 경성에 있는 승니들로 하여금 당사에서 7일 동안 도를 행하게 하고 재와 공양에 필수적인 것은 유사(有司)가 맡아 지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재가 끝나는 날 모두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나아갔다.
정관 2년에 조명을 내리기를 ‘신도(神道)에서 교를 베푸는 데는 자비와 은혜가 우선되고 현묘한 교화가 가만히 통하는 데는 정육(亭育)이 우선된다. 짐이 큰 보위에 응한 뒤에 백성들을 어루만져 사랑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을 부딪칠 때마다 자랐다.
이를 써서 옆으로 은근히 돕기를 구하니 밝은 신령이 바라는 것은 9공(功)이 오직 펴지는 것이요, 5복(福)이 이에 응하는 것이다.
요사이 된서리가 일찍 내려서 가을 열매가 풍년들지 못한다. 고요히 생각하니 복이 적고 엷은 이로서 부끄럽고 조심함을 잊지 아니하노라.
이제 온갖 곡식들이 풍성하고 무성하여서 1만 열매가 장차 맺히려 하는데 오직 두려운 것은 바람과 비가 때를 잃어서 기르는 백성들이 붙일 데가 없을까 하는 것이다.
감히 총명함을 의뢰하여 이 복 많은 이에게 관개하는 것이니 마땅히 넓은 하늘의 억조창생으로서 가호하여 돕기를 우러러 비는 바이다. 가히 경성과 천하에 있는 여러 주의 절과 도관(道觀)의 승니와 도사들로 하여금 7일 낮 7일 밤 동안 경을 굴리고 도를 행하게 하여라. 그리고 해마다 정월과 7월에는 예(例)를 다 이에 준하여라’고 하였다.
현묘한 은덕이 지척에 있는데 성스러운 힘이 은근히 도와주어서 경풍(景風)과 기름진 비가 때를 응하여 절후에 미치고 아름다운 싹과 심은 벼가 들과 언덕에 뻗쳐 넘쳐서 나라에는 9년의 자산이 풍부하고 집집마다 1만 상자로 거두어 풍부하였으니, 이는 황제께서 숙세에 5계를 심고 널리 10선(善)을 의뢰하여서 왕업을 일으키는 패도(覇道)를 열어 백성들의 기쁜 마음에 나감이다.
다만 의로움을 세운 초기에는 때가 세상의 끝을 만났기에 친히 시석(矢石)을 담당하여 여러 번 전쟁을 겪으면서 혹은 동쪽으로 7웅(雄)을 베고 서쪽으로 8수(水)를 맑게 하여서 신병(神兵)을 놓아 큰 돼지를 죽이고 천책(天策)을 타서 긴 뱀을 베었다.
이미 대단한 위엄을 움직였으나 원혼(怨魂)들이 아픔을 맺을까 두려워서 그 해 끝 봄에 몸소 조명을 내려 수나라 말기로부터 의(義)를 창건한 것은 뜻이 빠진 이를 건짐에 있다.
북으로 치고 동으로 치면서 향하는 것을 다 평정하여 죽였으니 누런 도끼의 아래와 황금 활촉의 끝에 무릇 상하고 죽은 것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어서 손으로 목 베어 죽인 것이 장차 1천 명에 가까웠다.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깊이 인자함을 숭상하므로 금계(禁戒)의 과목은 죽이고 해침을 삼간다. 길이 이 이치를 생각하니 더욱 뉘우치고 두려움이 더하였다. 그래서 유사에게 명하여 경성에 있는 여러 절에서 다 재를 베풀고 도를 행하며 7일 낮 7일 밤을 정성을 다해 예배 참회하게 하고 가지고 있는 의복을 모두 보시 희사하여 쓰도록 하였다. 이에 바라는 것은 3악도(惡塗)의 어려움이 이를 인하여 해탈하고 1만 겁(劫)의 괴로움이 이를 바탕으로 하여 크게 건져져서 원한과 장애의 마음을 멸하고 보리의 길에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정관 3년 봄에 칙명을 내려서 경성에 있는 승니들은 당사에서 매달 27일에 도를 행하고 『인왕경(仁王經)』과 『대운경(大雲經)』 등을 읽게 하여 늘 있는 법식으로 하였다.
또 칙명을 받들어 파파(波頗) 삼장(三藏) 등이 대흥선사에서 『보성경(寶星經)』을 번역할 적에 법림(法琳)이 다음과 같이 서문을 썼다.
“『보성경』의 범본(梵本)은 3천여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졌다. 여래께서 처음 깨달음의 도를 증득하시고는 목련(目連)과 사리불(舍利弗) 등을 제도하였으며, 마왕(魔王)을 항복시키고 국토를 보호하여 가지려고 이 경을 말씀하였다.
불교가 동쪽으로 중국에 전해진 뒤에 때와 날을 많이 지나서 3륜(輪)과 8장(藏)의 글과 4수(樹)와 5승(乘)의 뜻이 혹은 신비한 광명을 석실(石室)에서 나타냈고 혹은 범종의 소리가 청대(淸臺)에서 흘러 나왔으니 비록 찾으면서 번역하였으나 오히려 의심나고 빠진 데가 많았다.
우리 당나라 황제께서는 이에 성스럽고 이에 신성하며 문(文)을 하고 무(武)를 하신 이로서 기틀을 타고 운수를 어루만지며 물에 빠진 이를 건지고 불에 탄 것을 구제하여서 상황(上皇)의 풍속을 돌이키고 말하지 않는 교화를 행하였다.
교만함과 법도에 지나침을 떠나 이미 8굉(紘)에 정돈하였으며 일이 없고 하는 것이 없으면서 이에 1만 나라에서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한해(瀚海)와 천산(天山)의 땅이 다 제봉(堤封)에 들어왔으며 용정(龍庭)과 봉혈(鳳穴)의 땅이 다 성교(聲敎)에 젖었다. 어진 것은 그물을 풀어주는 것보다 나았고 다스림은 무사태평(無事太平)의 정치를 이었다. 큰 덕이 넓고 크니, 밖으로 팔 측(則)과 가지런하고, 작은 마음이 아름답게 있으니 안으로 4의(儀)가 정돈되었다.
적현(赤縣)을 임하여서 자비가 넘치고 현호(玄扈)에 붙여서 큰 서원을 편다. 매양 모든 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물건과 내가 함께 공(空)하였기에 참되고 요긴함을 생각하여 보니 불교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삼장법사 파파(波頗)는 중국말로 광지(光智)이다. 맹세코 법의 교화를 전하려하여 어렵고 위험함을 꺼리지 아니하고 멀리 파밀 고원과 유하(流河)를 지나 중국에 오니 온 길이 뻗쳐 있는 것이 4만여 리이다.
정관 1년 경술년(庚戌年)에 경성의 임금 있는 곳에 닿으니 이미 윗자리에 올랐기에 이에 비단 옷으로 돌아갈 것을 힘썼다. 유사에게 조명을 내려 석덕(碩德)으로서 겸하여 3교(敎)를 통달하고 10과(科)에 뽑힌 이 열아홉 명을 찾아 드날리게 했다.
대흥선사에서 파파 삼장법사를 청하여 서로 대면하여 번역하게 하였으니, 사문 혜승(慧乘) 등이 증의(證義)를 하고, 사문 현모(玄謨) 등이 말을 번역하고, 사문 혜명(慧明)과 법림 등이 집필하여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은근하게 세밀히 조사하면서 이름을 살피고 의미를 정하여 뜻을 갖추어서 글을 이루었다.
정관 3년 3월에 시작하여 정관 4년 4월에 마치니 무릇 10권 13품이고 종이를 쓴 것이 1백30폭이요, 총 6만 3천8백82언(言)이다.
그해 중동(仲冬)에 승광사(勝光寺)의 주지 승진(僧珍)이 칙명을 받들고 왕궁에 나아가서 불상을 맞이하여 승광사에서 공양하였다.
정관 4년에 헌조(獻肇) 등 여러 절의 대덕 49인이 21일 동안 불상을 완성하여 행도(行道)2)하였으며 날이 차는 날 1천 스님들의 모임을 가지니 왕공(王公)들이 모두 와서 향을 나누어 주었다.”
법림이 또 황제에게 불상을 수놓아 만든 것에 대해 게송을 올렸다.
“멀리 생각하오니, 8수(樹)가 광채를 감추고, 양하(兩河)가 자취를 감추었으며, 바사닉왕(波斯匿王)이 멀리 우러러서 납(蠟)을 부어 전신을 만들었고, 가니색가왕(迦膩色伽王)이 정성을 바쳐서 금을 부어 진상(眞相)을 그렸으며, 청정(靑精)이 남쪽으로 도하고, 백마사(白馬寺)에서 동쪽으로 번역한 뒤에 미쳐서, 불교가 울연히 일어나고, 신령스러운 거둥이 두루 솟았으며, 이에 신기한 자세를 엄숙히 하여 송정(松井)에 오르고 성스러운 몸을 굽혀서 밝은 구슬을 희사하였다.
빛이 장교(張橋)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색이 호독(滬瀆)으로 흘렀으며 몸에 차는 해를 한(漢)나라 임금에게 보이고, 두루는 털을 진(晋)나라 임금에게 주어 감동하게 하였다. 혹은 걸음을 돌아보며 1만 산을 건너고, 잠시 머뭇거리면서 몽저(夢渚)에 노니니, 길조와 아름다운 상서로움은 조짐이 유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를 놓아 진상을 그리고, 공(空)을 원하여 진상을 모범함이 없었더니, 우리 당나라 황제께서 일찍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심고, 일찍이 다섯 가지의 덕을 의뢰하시어서 신기한 공이 헌원씨와 소호씨보다 뛰어나시고, 지극한 다스림은 성왕(成王)와 강왕(康王)보다 아름다워서 어지신 공훈이 위로 현묘하여 힘이 큰 도와 짝하고, 경사로운 구름이 광채를 드리웠습니다.
황금 거울이 7요(曜)의 빛남을 머금고 상서로운 새가 상서를 드리우며, 옥 촛불이 4시(時)의 기운을 고루 하였으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문신(文身)을 새긴 우두머리들이 임금의 뜰에 와서 함께 명령을 청하고, 천흉(穿胸)과 담이(儋耳)의 추장들이 함께 위궐(魏闕)에 구슬을 올렸습니다. 더구나 팔정도(八正道)에 마음을 두고, 5승(乘)에 뜻을 돈독히 하여서 단나(檀那)를 널리 운반하여 정업(淨業)을 힘써 닦음이겠습니까? 부처님[善逝]을 길이 생각하니, 명막(冥漠)함을 어찌 따르리까?
이에 상궁(上宮)에 신칙하여 유경(遺景)을 사모하여서 석가모니불을 수놓은 상(像) 한 정(幀)과 아울러 보살상과 성승의 상과 금강상과 사자상을 받들어 조성하여 선조(仙藻)를 모두 펴고 온갖 신통 변화를 다하오니 여섯 문체가 잡답(雜沓)하고, 다섯 색채가 서로 폅니다. 만월(滿月)의 모양을 두 바늘로 서사하고, 긴 버들을 흰 손에 부탁하였으니, 곱기는 촉나라 비단보다 더하고, 화려하기는 연나라 비단보다 더합니다. 분륜(紛綸)하기론 7영(映)의 빛을 머금었고, 포확(布護)하기로는 9화(華)의 빛을 벌린 듯합니다.
해 바퀴가 불꽃을 토하니 주객(周客)의 실에 아롱지고, 연꽃 눈이 빛남에 얽히니 진나라 계집의 비단을 발하는구나. 양후(楊侯) 1백 리의 구슬도 이 백 가지 복(福)에는 부끄럽고, 자우(子羽) 1천 금의 구슬도 저 천륜(千輪)에는 부끄럽습니다. 꽃 일산이 눈부시게 아름다우니 보기에 솟아났는가 의심스럽고 구름 옷이 이리저리 움직이니 날아오는 듯 옵니다. 어찌 다만 생각이 회장(迴腸)에 극하리오. 또한 교묘함이 현묘함을 다하는구나.
이제 경인년(庚寅年) 태족(太簇:음력 5월)의 달에 3원(元)이 절후를 여는 때요, 4시(始)가 바뀌는 때에 이에 조서(詔書)를 승광사(勝光寺)에 내리시어 재를 베풀어 불상을 완성하게 하니, 49명의 승려가 삼칠일동안 행도(行道)하여 진(秦)나라의 붉은 조는 향적(香積)세계의 공양을 갖추었고,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금고(金膏)는 범왕천(梵王天)의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네 가지 평등한 복전은 생(生)마다 구족하였고, 여섯 가지 인의 착한 과보는 세(世)마다 장엄하였소. 겁(劫)의 돌이 부서져도 보력(寶曆)은 영원히 있고, 겨자씨의 성은 비어도 황제의 터는 영원히 견고하오. 경사스럽고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문득 이에 게송을 씁니다.”
아름다우신 상제(上帝)께서
우리 임금에게 책명하시니,
이에 신성하시고,
무(武)와 문(文)을 갖추어서
나아가기 해와 같고,
바라보기 구름과 같소.
상서로운 부신(符信)은 찬란하게 빛나고
아름다운 기운은 합하였소.
천하를 밝게 다스리어
아름다운 윤리를 펴시고,
도를 체로 하여 회향하시어서
복전을 세우셨소.
바늘은 붉은 과일을 마름하시고,
실은 푸른 연꽃으로 제정하시며,
무늬는 화려함을 머금었고,
채색은 안개를 빼앗았소.
꽃은 멀리 피었는가 의심스럽고,
일산은 허공에 달린 듯하오.
방저(方諸)가 땅에서 솟아
저 하늘에 오른 듯하오.
해는 제격(提格)3)이요
때는 청양(靑陽)인데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어
이에 도량을 높입니다.
10과(科)의 스님들이 별같이 모이고,
8좌(座)가 안개처럼 펼쳤소.
바람은 범종을 울려 돌아오고,
전(殿)에는 명향(名香)을 태우고,
큰 터전에 성하신 왕업이
길이길이 무강(無彊)하소서.
주상께서 매양 청람(聽覽)하시는 여가에 예림(藝林)에서 노니시어서 공자의 벽(壁)에서 나온 책을 토론하시고 석경(石經)의 교훈을 헤치시며, 백왕(百王)의 지난 일들을 모범으로 삼아 3교(敎)의 지귀(指歸)를 상고하셨다. 그래서 이르기를 ‘말이 공하고 공한 데 관계되지 아니하면 일이 마침내 있고 있는 데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성품이 신령스러워서 참되고 요긴하여 가히 마음을 가지고 세속을 건질 것은 불교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여 법약(法藥)을 생각하고 그를 유통시킬 것에 뜻을 두었다.
이에 중천축 나라에 삼장(三藏)법사가 있었으니 본래 왕족으로서 종성은 찰제리(刹帝利)이고 이름은 바라파가라밀다라(波羅頗迦羅蜜多羅)이며, 중국말로는 작명지식(作明知識)이다. 그는 멀리서 당나라가 대승을 크게 천양(闡揚)한다 함을 듣고서 파밀 고원과 유하(流河)를 건너와 성세(聖世)에 노닐다가 정관 1년 대려(大呂)의 달에 몸소 범본(梵本)을 싸가지고 상경에 도달하였다.
옛날 고종(高宗)의 다스림이 일어날 적에 부암(傅巖)이 꿈에 들어왔는데 이제 우리 황제의 도가 성함에 덕성(德星)이 들에 나타나는구나.
파파 삼장법사는 학식과 도량이 통달 민첩하고 기품이 깊고 깊었다. 5백 아라한이 결집(結集)한 글과 8만 수다라(修多羅)의 이치는 축법란(竺法蘭)이 한나라에 오고 강승회(康僧會)가 오(吳)나라에서 노닐면서부터 번역한 것이 중복될 정도로 많지만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파파 삼장법사가 그의 유래를 모두 자세히 하고 같고 다름을 연구하였다. 가령 불교 경전에서 토론한 것들을 외부의 사람들은 다르게 파악하였는데 법사는 가슴 속에 삼킨 듯하고 말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논하는 자리에서 엄숙하게 뜻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특별히 임금의 기뻐하심을 입으셨다.
그해 첫 봄에 조명을 내려 파파 삼장 등에게 승광사에 나가서 『반야등론(般若燈論)』과 『대장엄론(大莊嚴論)』의 두 논을 번역하게 하니, 상주국 상서좌복야 형국공(上柱國 尙書左僕射 邢國公) 방현령(房玄齡)과 산기상시 좌서자 첨사(散騎常侍 左庶子 詹事) 두정륜(杜正倫) 등이 칙명을 받들어 석덕(碩德) 19인을 전형하여 정하였으며, 우광록대부 태부경 난릉남(右光祿大夫 太府卿 蘭陵男) 소경(蕭璟)이 칙사(勅使)가 되어 검교(檢校)하였으며, 백사(百司)가 4사(事)를 공급함이 풍부하였다.
법림도 집필(執筆)에 참여하였기에 이에 다음과 같이 서문을 썼다.
“『반야등론』의 범본(梵本)은 6천여의 게송이 있다. 마가타(摩伽陀) 나라의 왕족으로서 대사(大士)인 파비설가(婆毘薛迦)보살은 중국말로 분별명(分別明)이라 하니 그 사람이 지은 것이다.
처음에 만물은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음은 환(幻)과 같았다. 마음이 환과 같기에 비록 동(動)하지만 항상 고요하고, 물건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비록 일어나지만 무생(無生)이다. 이 때문에 성인들이 환과 같은 마음을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물건들을 보았으니, 물건이 물건 아님을 깨달으면 물건마다 성품이 공하고, 마음이 마음 없음을 깨달으면 마음마다 체가 고요한 것이다. 달관한 사람들은 돌아갈 곳을 터득하여 그 속세에 의탁함조차 잊게 된다.
이에 분별과 희론(戱論)이 없앰을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제거되며, 얻을 것이 없는 관의 문[觀門]은 닦음을 빌리지 아니하고도 이미 들어갔다. 넓고 넓어서 있지 아니하고 떠나지도 아니하며 머묾이 없고 의지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지 7백여 년 사이에 출가한 보살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 용수(龍樹)이다. 참모양을 깊이 통달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었으며,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중론(中論)』을 열어 연설하였다. 『부법장전(付法藏傳)』에는 ‘그 사람이 상법(像法)에서 바른 법의 횃불을 태워서 삿된 견해의 깃대를 꺾었다’ 하였고, 『외국전(外國傳)』에는 ‘지혜의 해가 이미 무너졌던 것을 이 사람이 이제 다시 밝혔으며, 세상이 혼침하기 이미 오래였던 것을 이 사람이 깨우쳐 깨어나게 하였다’고 하였다.
『중론』은 무릇 다섯 사람이 주석하였는데 분별명(分別明)보살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보살은 견문(見聞)을 갖추고 지혜가 깊고 뜻이 굳었다. 근본 원력으로 여러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수라(修羅)의 궁에 가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부촉을 받았다.
성인이 가신 지 때가 오래 되어 여러 의론들이 분분하여서 설산(雪山)에서 약초를 캔다는 것이 독한 풀을 많이 거두고, 깊은 물에서 구슬을 구한다는 것이 다투어 기와와 자갈을 가지니, 진실로 두려운 것은 한 이치를 다하지 못하여 삿된 견해만 도리어 더하고, 한 말을 다하지 못하여 이단(異端)만 되려 일으킬까 하여서 이에 용수보살의 게문(偈文)을 이어 지어서 이 『반야등론』을 지었다.
그의 논문은 안과 밖의 삿된 주장을 쳐부수고 진(眞)과 속(俗)의 이치를 찬양하여서 무생의 이치를 궁구하고 참모양의 근원을 연구하여서 비추어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에 반야(般若)라는 이름을 붙였고 집착을 깨뜨리지 아니함이 없기에 밝은 등불로 비유한 것이다. 이는 대개 방광(方廣:대승경전의 통칭)의 중심이요, 여러 부처가 행한 곳이다. 슬프다. 뒤에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문득 백 성(城)에서 노님을 쉬고 길이 5실(失)의 잘못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논은 무릇 27품이요 권수가 15권이다. 만일 안의 사람으로서 뜻을 세웠으면 전부 인명을 기록하였고 이름이 없는 자는 나열하여 자기의 부[自部]라 일컬었고, 만일 외부 사람으로서 뜻을 세웠으면 또한 인명을 기록하였고 이름이 없는 자는 나열하여 외부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박해품(縛解品)」 이전은 혜이(慧頤)가 집필하였고, 「관업품(觀業品)」 이후는 법림이 집필하였다. 이것을 정관 4년 여름에 시작하여 정관 6년 겨울에 끝마쳤다.
감정(勘定)을 이미 두루하고 베껴 쓰기를 마쳤기에 유사가 이를 자세히 읽고 이에 임금께 아뢰니,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각기 10부씩 베껴 써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함께 유통하게 하였다.
이미 전륜성왕을 이어서 10선(善)으로 세상을 교화하니 나라 안의 여러 시장에서 다 도살(屠殺)의 행동을 중지하였으며 민간에 널리 금지하여 재살(宰殺)을 허락하지 않았다. 양자강 남쪽의 땅에는 나무 우리[塞]를 세워 물고기를 취하였고 30여 주(洲) 곳곳마다 모두 그렇게 하여 반드시 둑을 깨뜨린 뒤에 물고기를 취하였으니, 취한 것은 등림(鄧林)의 한 가지에 비기겠고 그릇되게 죽는 것은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수였기에 또 자비로운 칙명을 내려 모두 폐지하여 없애게 하였다.
또 그 해에 풍년들고 시절이 화하여서 바다 안이 풍년들었기에 승니 3천여 인을 제도하여 여러 주에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이미 덕이 상현(上玄)을 움직이고 감동이 지극한 성현에 통하여서 7난(難)을 함께 없애고 7복(福)을 모두 이루니, 은덕이 9은(垠)의 밖까지 젖고 위엄이 8극(極)의 밖까지 더하였다.
그해 첫 겨울에 흉노(匈奴)의 임금 힐리(頡利) 등이 그의 신하와 자식을 거느리고 그의 부락(部落)을 이끌어서 이고 지고 다투어 와서 앞뒤로 발꿈치를 이어서 대궐의 뜰을 바라보며 나라를 기울여서 이르러 천문(天門)을 뵈옵고 명령을 기다리며 오랑캐의 관저(官邸)에 나아가 밥을 먹었다.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의 군사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스스로 소혈(巢穴)을 다 받쳤으니, 어찌 헌원(軒轅)씨의 무리를 빌려서 자리 말듯 도망쳐 왔겠는가? 한수(漢水)의 남쪽에는 오랑캐의 근심이 없고, 변방의 북쪽에는 오랑캐의 도적이 없어져서 마안(馬岸)과 용퇴(龍堆)의 구역이 이미 중국의 풍속에 물들었고, 교하(交河)와 청해(淸海)의 물가가 다 임금의 땅이 되었으니 편안하고 편안하다. 이 날을 함께 기뻐하며 함이 없고 일이 없어서 지금의 때를 함께 경하한다. 천하를 통솔하고 지극을 세운 공이 전고(前古)에 홀로 높았으며, 부처님을 받들고 착함을 숭상하는 업이 지나간 어진 이들보다 뛰어났다.
주상께서는 일찍이 전장을 겪으면서 칼로 서로 항거하였으며 등극(登極)에 이르러서 뜻이 충정(衷情)에 더욱 깊었다. 그래서 조명을 내리기를 ‘무릇 전진(戰陣)이 있던 장소에는 다 절을 세우고 유사가 공급하여서 힘써 주선하여 갖추게 하라’고 하여 우내(宇內)에 무릇 열 개의 사찰을 두니 엄숙하고 정돈되어 볼 만하였다.
또한 예전에 더위를 피하여 몸소 남산에 행차하여서 이 신령스러운 거처를 점쳤고 큰 장관을 열었다. 그 땅은 진천(秦川)의 아득함을 띠었고 농수(隴岫)의 푸르고 푸름을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낙조(落照)의 물결을 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달이 걸려 있는 포구에 임하여 있으며, 봉황이 깃든 듯 기이함을 다한 돌이 올망졸망 하늘에 치솟았고, 용이 서린 듯 괴이한 낭떠러지가 활 모양으로 은하수를 찔렀다. 그러니 어찌 홀로 바위의 소나무가 해를 가릴 뿐이겠는가? 또한 시내의 대나무가 구름에 치솟은 듯하여 참으로 4호(皓)가 덕을 기르던 장소요, 대개 3진(秦)이 견고함을 짓던 곳이다. 태무(太武) 황제를 위하여 절을 만들었더니 이미 이로움을 입었기에 인하여 용전사(龍田寺)라 하였다.
또한 태무 황제와 주상을 위하여 협저(夾紵)의 등신불상 여섯 구를 조성하여 길이 진정시키면서 공양하게 하고 대중의 필요한 물건은 유사가 공급하게 하였다. 그러니 땅을 사는 수고로움이 없으며 황금을 까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다. 바람을 거스르는 화한 기운의 향기가 동산에 가득 찼으며 길상하여 부드럽고 매끄러운 풀이 풍성하게 섬돌에 드리웠다.
또한 목(穆) 태후를 위하여 경선궁(慶善宮)에 자덕사(慈德寺)를 지으니, 견숙가(甄叔迦)의 보배와 염부단(閻浮檀)의 금으로 가지가지로 장엄하여 낱낱이 화려하였다. 비록 지은 것이 드묾을 알지마는 오히려 망극한 은덕을 펴지 못하였다고 말하겠다.
정관 6년 중간 여름에 대성(臺城) 서쪽 진안방(眞安坊) 안에 목 태후를 위하여 또 홍복사(弘福寺)를 지었다. 이곳의 형세가 뛰어남을 상고하여 보니 시장과 조정이 옷깃처럼 이어져 있던 곳인데 이에 금을 세공하는 사람에게 명하여 터를 열고 만들고 은방(銀房)을 옮기니, 곧 이것이 금원(金園)이다.
법려(法侶)들이 어깨를 부비고 조정의 귀한 분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그 땅은 담이 높고 성곽을 짊어졌으며 백 치(雉)4)를 벌려 세워 얽혀 있고 겹겹으로 된 성이 모퉁이를 마주 보고 있고 아홉 겹으로 높이 솟아 늘어서 있다.
이에 널리 절을 짓고 모든 건물을 갖추었으며 별을 보고 측량하는 형승(衡繩)을 두니 옥석(玉舃)이 빛남을 드리우고 금으로 된 문고리가 광채를 드날린다. 긴 행랑은 머물기에 알맞고 뒤집은 듯한 건물은 밤을 막으며, 뜬 기둥과 수놓은 들보는 위로 구름 기운을 도모하고, 나는 난간과 아로새긴 난간은 아래로 무지개 홍예(虹蜺)를 띠었다.
영탑(影塔)은 엄연히 서로 바라보고 있고, 경대(經臺)는 성대하게 나란히 뻗쳐 있다. 단청(丹靑)은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며 무늬와 채색의 기이함을 다하였으니, 미묘하기는 하늘의 신선인 듯하고 생각은 귀신인 듯하다.
금 소반에 이슬을 받드니 옥수(玉樹)의 단샘에 비기겠으며, 보탁(寶鐸)이 바람에 어울리니 구슬 숲의 극락세계를 모양하였다. 성근 종소리는 밤에 사무치고 맑은 범종은 아침에 드날리며 운(韻)은 어산(魚山)에 합하고 소리는 용목(龍木)에 부합한다. 신령하고 이상한 데 의탁하겠고 선정과 지혜가 의지하고 기댈 데요 뜻을 다하고 마음을 쉴 것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위나라 대승상 발해왕
신비한 기운이 정밀하고 신령스럽고 타고난 바탕이 빼어나고 특이하였다. 덕은 문과 무를 갖추었고 재주는 예와 악(樂)을 겸하였으니 사직(社稷)을 담당할 만한 그릇이요 조정의 주추가 될 만한 재주여서 참으로 왕을 보좌할 만한 풍도가 있었으며 다 난을 진정시킬 것을 부탁할 만하다고 일컬었다.
마음을 돌려 도에 복종하도록 하는 데 이르러서는 홀로 이름난 무리보다 뛰어나서 코끼리와 말을 아끼지 아니하고 구슬과 옥을 아끼지 아니하며 정국사(定國寺)에 보탑을 세웠다.
위(魏)나라 시중 태보 사도공 광양 의렬왕
위나라 광양 충무왕
위나라 사도 광양왕
위나라 광양 문헌왕
위나라 상국 고왕
위나라 여남왕
위나라 의도왕
위의 일곱 임금은 나란히 공경하고 믿음으로 생각을 삼고 돈독하게 높임으로 업을 삼았다. 혹은 문으로 혹은 무로 나라를 바로잡고 집을 바로잡아서 주추가 될 만한 풍도가 있었고 조정을 다스릴 만한 덕이 있었다. 허공의 구름이 옮기고 변함을 알고 신기루가 항상하지 못함을 알며 한가지로 자기의 몸이 다 같이 없어짐을 깨닫고 마음을 부처님의 이치에 돌려서 함께 성스러운 교화를 따라 다 여덟 가지의 계(戒)를 받고 함께 6재(齋)를 가지며 절을 짓고 승을 제도시켜 대회를 베풀고 착함을 숭상하였다.
위나라 상당왕 목
위나라 상산왕 지
위의 두 임금 중 목(穆)은 성품이 온화하고 두터우며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지(鷙)는 얼굴 모습이 걸출하고 허리가 10위(圍:50치를 말함)이며, 성품을 세움이 방정하고 아담하며 말이 적고 맑게 삼갔다. 항상 생달(省闥:官廳)에서 쉬었고, 비록 더위를 당하여도 옷과 갓을 풀지 아니하였다. 벼슬이 시중과 대사마에 이르렀다.
위나라 회양왕 위
위나라 하동왕 순
위나라 동양왕 비
위나라 회남왕 타
위(尉)와 순(荀)과 비(丕)와 타(他)는 모두 얼굴 모습이 씩씩하고 거룩하며 귀가 크고 눈썹이 빼어났다. 40년 동안 해마다 3장(長)의 달과 6재(齋)의 날에 재를 지키고 계를 가져 때로 폐함이 없었다. 『유마경』을 외웠고 법왕사(法王寺)를 지었다. 나이가 많고 신망이 두터워 지팡이를 짚고 와서 조회하였다.
그런데 비(丕)는 또 소리와 기상이 높고 밝아서 나라의 일을 널리 기억하여 물으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향연(享宴)의 때에는 항상 단정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매양 왕공(王公)과 학사(學士)와 대덕과 명승(名僧)들과 더불어 부처의 이치를 연구하여 음미하였으며, 항거하는 음성으로 크게 말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불교는 깊고 흡족하여 유가와 묵가(墨家)를 하는 자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위나라 진왕 한
당세에 힘써야 할 것을 크게 하였고, 이루고 패하는 이치를 다하여서 가까운 일이나 원대한 꾀도 잠깐 사이에 모두 갖추었다. 인을 무겁게 여기고 의를 행하니 조정과 지방에서 다 우러러보았다.
위나라 사도 북해왕 상
위나라 사목 고양왕 옹
혹은 친척으로 본지(本枝)이고 혹은 지위가 외척(外戚)에 있으면서 정본(政本)의 요긴함을 총괄하였고 신주(神州)의 국사를 담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원주(圓珠)를 감득하여 자기의 마음을 독려하였으며 조정의 정책을 빛내고 다스림의 도를 펴서 선양하였다. 그리고 부처의 이치에 가슴을 비워서 법교(法橋)를 숭상하여 믿었다.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베껴 썼으며 탑과 절을 세웠고 일체경 12장(藏)을 베껴 썼다.
위나라 팽성왕 협
마음과 힘을 다하여 세종(世宗)을 보호하며 안과 밖으로 지시하고 도왔다. 위에 올라서는 법문(法門)을 크게 열어서 부처님의 일을 널리 일으키고 절을 수선하고 지으며 신령한 탑을 세웠다.
위나라 제남왕 문약
풍류가 관대하고 아담하며 자세가 한가하고 넉넉하여서 하는 말이 깊고 아름다우며 말과 얼굴이 광대하고 온화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칭송하기를 ‘3공(公)이 많고 많아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나 제남왕(濟南王)의 둥글고 모남을 갖춘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입으로 부처님의 말을 외우고 마음으로 정토(淨土)를 기약하면서 재를 가지고 나물을 먹으며, 불법을 보호하고 스님을 존경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 잘할 수가 없었다.
위나라 안풍왕 연명
위나라 중산왕 희
모두 종실로서 옛 학문을 넓혔고 함께 도량을 세워서 재계와 강(講)을 서로 이었다. 향으로 먹에 개어서 『화엄경(華嚴經)』 1백 부를 베껴 썼다. 흰 바탕에 금색 글자로 『화엄경』 한 부를 써서 다 다섯 가지의 향이 나는 나무로 만든 상자와 네 가지 보석으로 만든 함에 담아 두고서 고요한 밤 좋은 때에 재를 맑게 가지고 도를 행하니 매양 오색의 신기한 광명이 대우(臺宇)를 비추었는데 대중들이 다 보고서 갑절이나 발심하였다 한다.
위나라 낭야왕 송
의리로는 6경(經)을 종합하고 역사로는 백씨(百氏)를 꾸렸다. 의관(衣冠)과 거둥과 모습은 조정이나 지방에서 다 추존하는 바였고, 높은 의론과 맑은 바람은 홀로 당시의 무리에서 뛰어났다.
약관(弱冠)에 양나라 무제를 방문하니 양무제가 기특하게 여겨 종일토록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무제가 말하기를 ‘옛날 왕릉(王陵)이 한나라에 있었고 강유(姜維)가 촉한(蜀漢)의 중승으로 있으면서 있는 곳에서 이름을 이루었으니, 어찌 반드시 본토에만 있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예로 대우받음이 이와 같았다.
항상 양무제에게 계(啓)를 주니, 양무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회왕 송(誦)은 양무제도 그를 책망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이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6재(齋)의 날에는 항상 청정한 공양을 베풀어 부처님께 올리고 스님들에게 공양하였으니 봉록(俸祿)의 비용은 대개 불상과 불경을 조성하는 데 쓰였다.
위나라 상서령 광양왕 가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며 침착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어질고 온후하며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잠깐이라도 넘치지 아니하였다. 일체경을 읽을 때는 무릇 세 번을 읽었으며 애경사(愛敬寺)를 지어서 두 황제에게 보답하였고 『중경초(衆經抄)』 15권을 지었다. 마음을 돌리고 목숨을 바쳐서 뜻이 오직 법성(法城)에 있었다.
위나라 진류왕 건
자세와 기운이 뛰어나고 체력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마음을 비워 도를 사모하였으며 그 뒤에 세속에 돌아왔으나 진리를 익히는 것을 폐지하지 아니하여 비록 정치의 일에 관여하였지만 자못 뛰어난 업을 돈독히 하였다.
위나라 제나라의 헌무왕
생각은 은근함을 따라 움직이고 지혜는 신(神)과 함께 행하였다. 은덕은 봄하늘에 비기고 위엄은 여름날과 같았다. 항상 지극한 마음을 만물에 넓히고 큰 도를 8방(方)에 미치게 하였다. 마음을 닦고 몸을 이겨서 바른 법으로 회향하였고 대비사(大悲寺)를 지어서 여러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였다.
위나라 사지절 중외제군사 제왕
위나라 거록왕 천
위나라 녹상서사 팽성왕 소
위나라 초군왕 양
위나라 강하왕 이
위나라 임조왕 영
모두 빼어나고 굳세고 뛰어나며 풍격(風格)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그리고 법의 말씀을 믿고 공경하여 불교에 회향하였다.
위나라 태사 대사마 낙주자사 풍희
문명(文明) 황태후의 형이다. 부처님을 받들어 지극히 믿어서 여러 주에 부도와 절 72채를 지었고 16부(部)의 일체경을 베껴 썼다. 항상 이름 있는 스님들과 더불어 불교의 뜻을 강론하였다.
위나라 사지절 유주자사 사도공 호국진
영(靈) 태후의 아버지이다. 오직 재계(齋)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고 스스로 예배에 힘썼으며,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며 정화사(正化寺)를 지어 1백 스님들을 공양하였다.
위나라 사도 조형, 자는 원진
아름다움을 모으고 복이 많으며 신을 의뢰하여 선행을 쌓았다. 재간과 도량[器局]이 비고 한가하여 지식(志識)이 깨우쳐졌다. 입으로는 변론의 말을 머금었고 손에는 용을 아로새긴 문채를 잡았으니 의부 현종(義府玄宗)이 여기에 위임케 했다.
위나라 사공 이무위
타고난 성품이 공평무사해서 이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행하였다.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원대함을 이루어서 자질을 안으로 품고 있었다. 홍곡(鴻鵠)이 장차 날아가려 하매 문득 사해의 뜻을 품고 있었고, 천리마가 바야흐로 달리매 이미 천리를 뛰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정치의 일이 성대하지만 항상 『금강반야(金剛般若)』로써 업을 삼았다. 그래서 매달 여섯 재일을 지켜 종신토록 폐지하지 않았다.
위나라 태부 창녕왕 이식
몸가짐이 아담하고 바르며 사람됨이 맑고 검소하여서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으며 법을 받들고 스승을 존경하였으며 여섯 재를 폐지함이 없고 항상 다섯 가지의 계를 가졌다.
위나라 소보 건창공 두략
본디 이윤(伊尹)과 곽광(霍光)과 같은 도량을 갖고 있었으며 일찍부터 기둥과 주춧돌과 같은 재질이 있었다. 바름을 오로지하여 군률(軍律)을 받았으며, 갑(甲)과 을(乙)의 고허(孤虛)5)를 알았으며 적(敵)을 맞이하여 권도로 제정하였고 바람과 구름의 향함과 등짐을 알았다.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귀하면서도 오만함이 없었고 부처님을 공경하여 믿고 숭상하여 중하게 여기며 목숨을 바쳤다. 영산사(靈山寺)와 법운사(法雲寺)의 두 절을 지었고 2백여 명의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다.
위나라 사도 고오조
용기가 무리에서 뛰어나고 무술과 지략이 세상에서 뛰어났다.
위나라 사도 고융지
기상(氣象)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덕풍(德風)을 움켜쥘 만하였다.
위나라 시중 상서령 원예
기질과 재능이 크고 빼어났으며 아름다운 심정이 맑고 포근하였다. 조정과 지방에서 모습이 위엄이 있어서 바르기로 소문이 났다. 대주(岱州)에 법음사(法音寺)를 지었다.
위나라 우복야 대행대 모용소종
총명하고 모범이 되어 그를 일컬을 만하고 어진 이를 예로 대하는 것이 돈독하였다.
위나라 이부상서 형만[보제사(普濟寺)를 지었다.]
맑은 규범이 있고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장자(莊子)』와 『노자(老子)』에 해박하며 『시경(詩經)』과 『이소(離騷)』를 음미하였다. 대승을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불상을 조성하고 절을 세웠다.
위나라 표기대장군 의동삼사 항주자사 육정
평등하고 곧아서 사사로움이 없었고 도를 지키고 욕심이 적어서 장인(長仁)의 지조가 있었고 안색을 우아하게 가졌다. 입으로 『유마경』을 외워서 의론의 근본으로 삼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고상(高尙)하게 여겨 감히 항변(抗辯)하지 못하였다. 이 분은 육재(陸載)의 둘째 아들이다.
위나라 태상경 공후 정경
원추리[萱]와 난초(蘭)처럼 덕을 드러냈고 완옥[琬]과 담옥[琰]으로 마음을 삼으니 조정에서는 훌륭한 태도를 귀하게 여기고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정역사(淨域寺)를 일으키고 법화당(法華堂)을 세웠으며 달마다 재를 영위(營爲)하고 해마다 불경을 베껴 썼으며, 불상을 조성하였다.
위나라 옹주자사 한중상[한사군사(韓使君寺)를 지었다.]
간략(簡略)하고 맑고 화통하였으며 아담한 품속에 표거(標擧)하였으며 깊이 내가 아니라는 마음[非我]을 품었다.
위나라 황문 최릉[보은사(報恩寺)를 지었다.]
도와 예술에 마음을 정밀히 가지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뜻을 두니 조각과 전자(篆字)는 문채가 되고 부조(斧藻)는 덕을 이루었다. 바람을 받들어 생각을 비우고 아름다움을 바라며 마음을 기울이니 당시의 조정에서 독보적이 되었고 중생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삼보에 회향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몸을 맡기면서 업성(鄴城)에 보은사를 지었다.
위나라 유주자사 노영수[통현사(通玄寺)를 지었다.]
출중함[珪璋]이 안으로 젖어 있고 풍화(風化)가 밖으로 엄숙하였으며 그릇과 도량이 아름답고 신용(神用)이 높고 밝았다. 유주(幽州)에 통현사를 짓고 1백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다.
위나라 패군태수 조원측
신상(辰象)에서 정기를 받았고 하수(河水)와 5악(嶽)에서 영성(靈性)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칭찬이 아름다웠고 약관에 이름을 날렸다. 믿고 공경하는 마음에 동요됨이 없었고 보시와 인욕의 마음이 다함이 없어서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는 데 수고롭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위나라 하남윤 무읍공 이장[미륵사(彌勒寺)를 지었다.]
문물(文物)에 모범이 되어서 고관들의 행차가 끝이지 않았다. 하나를 지키고 참됨을 안아 뜻이 극락세계에 있기에 3장(長)의 달에 반드시 스스로 맑게 재를 하였고, 두 어버이의 휘일(諱日)에는 새벽이 되도록 슬피 통곡하였으며 미륵사를 지어서 1백 스님들에게 공양하였다.
위나라 태자중서자 어사중승 육재
육재는 본래 오나라 사람으로서 송나라 함양왕(咸陽王) 의진(義眞)의 행군대도독(行軍大都督)의 장이 되었다가 뒤에 혁련(赫連)에서 패하여 그로 인하여 위나라에서 벼슬하였다. 그는 재주가 있고 말을 잘하였기에 위나라 조정의 귀공들에게 중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성품이 비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항상 불법으로써 뜻을 삼았으며 매양 여러 경을 읽어서 현묘한 뜻을 찬양하였다. 말년에는 정밀함에 이르러 경의 글자가 방광(放光)함에 이르렀고 입으로 『법화경(法華經)』을 외웠으며 때로는 사리(舍利)를 감득하였다.
위나라 위위경 허백도
길고 어진 풍도가 있었다. 거스릴 수 없는 도를 키워서 바른 법을 숭상하여 받들어 시기에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위나라 산기상시 온자승
태충(太冲)의 3도(都)의 필재(筆才)가 있었고 자운(子雲) 백주(百奏)의 재주가 있었으니 비단과 자수도 그 문채가 빛남을 부끄러워하였고 금과 옥도 그 빛나게 비춤을 부끄럽게 여겼다. 묘한 법을 숭상하여 중하게 여기고 대승을 좋아하여 즐겼다.
위나라 영원장군 후막진인[기원사(祇園寺)를 지었다.]
그는 본래 한나라 중산정왕(中山靖王)의 아들로서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 비로소 풍국(豊國)을 소유하여 후(侯)로써 성씨를 삼고 드디어 진(陳)이라 하였다. 기원사 등의 절을 지었으며 항상 재와 강을 영위하였고, 비전(悲田)을 베풀었다.
위는 모두 위나라 당시의 빼어난 사람으로서 한 시기의 뛰어난 선비요, 불교를 흠앙한 자들을 대략적으로 조목 든 것이다.
제(齊)나라 대승상 내외제군사 상산왕 확[공훈과 업적이 숭상할 만하고 아름다우며 특달(特達)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제나라 태위 난릉왕 장공[총명하고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조정과 지방에서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제나라 사도 낭야왕 엄[황제를 보좌하여 조정의 정사를 빛나게 높였다.]
제나라 녹상서사 장광왕 담[왕실의 팔과 다리[股肱]로서 문무(文武)에 밝았다.]
제나라 대도독 녹상서사 광평왕[지혜로운 생각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품행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제나라 대사마 청하왕 단[업행(業行)이 우아하게 깊고 풍격(風格)이 높고 원대하였다.]
제나라 좌복야 광녕왕 효연[지식의 깨달음이 우아하고 원대하며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끝을 아름답게 하였다.]
제나라 시중 상서령 녹사상서 사지절 도독조주제군사 표기대장군 개부의 동삼사 호군장군 조주자사 대육주도독 병주대중정 장안공 진창왕 당옹
중의장엄사(衆義莊嚴寺)와 대영국사(大寧國寺) 두 절을 짓고 미륵불의 금동불상 한 구를 조성하였다. 별의 기운이 부합하고 산신이 복을 내려서 이 창성한 해를 맞아 상덕(上德)에게 바쳤고 다섯 임금을 섬겨 은총이 8명(命)에 더하여졌다. 나가서는 천자를 모시고 들어와서는 청포(靑蒲:천자가 까는 자리)를 밟으면서 빠진 것을 줍고 모자란 것을 기워서 교체할 것인가 아닌가를 알려 드리니 군사제도의 경(經)과 병부(兵符)의 기밀과 나라의 이로운 보배는 남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돌아올 것을 시장(尸掌)이 절밀(切密)하다.
거듭하여 갈복(秸服)을 들어서 전 조나라를 감독하여 살피며 절(節)을 짚어 위엄을 펴고 수레에서 내려 은혜를 펴니 호우(豪右)들의 겸병(兼幷)이 바람과 서리를 바래서 손을 거두었고 단약(單弱)하여 떨어졌던 것이 비와 이슬을 목욕하여 어깨를 쉬었다.
금구(金口)와 나무 혀[木舌] 등과 귀를 끌고 손바닥을 가리킨다.
의식이 풍족해야 영광과 욕됨을 알고 예와 음악이 깊어야 충성과 효도를 안다. 술집에서는 기이하게 무역하는 화폐가 끊어지고 감옥에서는 불쌍하게 여기는 알음알이가 있다.
언약은 생선을 먹는 데 비기겠고 맑기로는 잔의 물에 짝한다. 그러니 삼허(參墟)6)의 장리(長吏)들이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여기고 농사짓는 들의 백성들이 우러르기를 해와 달같이 여기었다.
더구나 양전(良田)으로 몸을 살리고 참금[眞金]은 자기의 성품을 그대로 두어서 여러 법에 유희(遊戱)하고 여러 근(根)을 조복하여서 들으면 반드시 닦아 행하고, 보면 문득 따라 기뻐하였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요임금의 옛 도읍에 중의장엄사(衆義莊嚴寺)를 지었다. 대장(大壯)7)을 본떴고 건상(乾象)을 모방하며 규표(圭表)를 헤아리고 궤연(几筵)을 지났으며 음을 등지고 양을 마주하여 추위를 열어 따뜻한 데로 머금었다. 월궁(月宮)과 일전(日殿)이 밤낮으로 빛을 가지런히 하였고 내원(奈苑)과 연대(蓮臺)가 봄과 가을에 자태를 달리하였다. 이름 있는 스님들이 무(武)를 이었고 청정한 믿음이 있는 이들이 다투어 와서 좋은 달과 아름다운 때에 다투어 예배하였다.
또한 양평(陽平)에 대영국사(大寧國寺)를 지으니 보찰(寶刹)이 드러났고 정려(精廬:精舍)가 멀리 빼어났다. 서까래는 무늬 있는 살구나무를 썼고, 기둥은 전단나무를 썼다. 수[黼]와 무늬가 서로 빛나고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서로 비추었다.
또 미륵불의 황금상 한 구를 부어 만드니 머금은 광채가 일곱 자나 되었다. 흰 돌로 한 길 여덟 척의 불상 두 구를 만들고 아울러 일체경 3천여 권을 베껴 썼으며, 옛 불상을 닦아 다듬은 것이 1만여 구나 되었다.
제나라 우승상 함양왕 곡률명월[용기는 앞설 이가 없고 절개가 더욱 굳세었다.]
제나라 좌승상 평원왕 단효선[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조정의 맡김에 잘 맞았다.]
제나라 녹상서사 회남왕 화사개[돈독하고 민첩하며 부지런하고 삼갔으며 법을 받들어 스스로 힘썼다.]
제나라 태상 청하왕 고악[용맹하고 줄기가 되며 맑고 아름다웠다.]
제나라 태재 장무왕 고적천추[용맹하고 굳세며 공손하고 순하였다.]
제나라 시중 진왕 고언귀[널리 사랑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제나라 시중 상서령 원라
재주 있기로 이름난 선비 왕원경(王元景)과 형자재(邢子才) 등이 다 그의 빈객(賓客)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검소하여서 순순(恂恂)하게 물건을 접하고 삼보(三寶)를 높여 공경하며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받들었다. 법희사(法喜寺)에서 7층(層)의 부도(浮圖)와 벽돌 탑을 일으켰다. 마음을 다하여 성스러운 임금을 보좌하고 몸을 닦아서 길이 편안하기를 도모한 데 이르렀으니, 곧 위로는 임금을 편히 받들고 아래로는 자기를 보존하여 대개 인륜의 수경(水鏡)8)이고 천하의 모범이 되었다.
제나라 상서령 고조[한거니사(閑居尼寺)를 지었다.]
제나라 태위 팽락[어질고 후덕하며 두드러지게 아름다웠다.]
제나라 사도 반상[어진 것을 숭상하고 의리를 귀중하게 여겼다.]
제나라 사공 사마자여[학업이 맑고 아름다웠고 절개를 준엄하게 들었다.]
제나라 광록대부 상서복야 양준언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온순하고 민첩하며 풍의(風儀)가 높고 빼어났다. 일찍이 옥윤(玉潤)으로 표하였고 일찍이 금성(金聲)을 오로지 하였다. 그래서 문학은 9공(功)을 종합하고 무예는 7덕(德)을 갖추었다. 천하에 아름다운 명예를 떨치고 해내(海內)에서 기뻐하는 마음을 감득하였다.
문선제(文宣帝)가 상경(上京)에서 높이 보았고 복야(僕射)가 시무에 힘쓰는 것을 전부 알았기에 배를 두드리며 땅을 치며 사람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없었으니 10년(年) 안에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바로 잡고 합하는 힘을 양공(楊公)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안과 밖을 널리 알았으며 겸하여 유교와 불교를 익혔기에 인사(仁祠:절)가 즐비하여서 여러 사찰들이 서로 바라보았으며 법의 무리들이 다투어 오고 사녀(士女)들이 회향하였으니, 불교를 보호하는 마음이 있어서 백성들이 가까이한 것이었다.
제나라 소부 상서복야 위목
예의와 음악을 모두 익혔고 통틀어 아름다운 윤리를 이었으며 깊이 고(苦)와 공(空)을 통달하여 왕법을 존중하였다. 학문은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을 겸하였고 재주는 응소(應劭)과 유안(劉安)을 덮었다.
제나라 광록대부 상서복야 최섬
재주는 좌명(佐命)공신에 응하고 은총은 주남(周南)과 소남(邵南)에 버금갔으니 대개 조정이 모두 우러러보았고 인륜의 형세가 바라는 바였다. 겸하여 부처님의 법을 믿어서 크게 복전을 일으켰으며 즐거이 이름 있는 스님들과 더불어 지극한 이치를 높이 말하였다. 그리고 불경을 베껴 쓰고 불상을 지으며 가람을 수리ㆍ보완하였다.
제나라 우복야 최계서[명망(名望)이 맑고 높으며 당세에 의표(儀表)가 되었다.]
제나라 좌복야 연자경[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가까이하였으며 법을 지켜 스스로 굳세었다.]
제나라 복야 조언심[어질고 관후하며 맑고 조심하였다.]
제나라 시중 괵률효경[의리와 용맹이 세상을 덮었다.]
제나라 시중 괵사문약[맑고 검소하고 준수했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제나라 시중 서지재[덕의 풍도가 높이 들렸다.]
제나라 시중 고정덕[검소하고 간략하며 지나치지 않았다.]
제나라 칠병상서 왕원경[맑고 통달함이 일찍이 나타났다.]
제나라 태상경 최앙[의를 돈독히 하고 인을 숭상하였으며 당조에서 바라는 명족(名族)이었다.]
제나라 산기상시 유적[학문은 7략(略)을 해통하였고 재주는 4문(門)에 나타났다.]
제나라 위위경 두필[지절이 일컬을 만하였고 말과 행동이 오직 마땅하였다.]
제나라 전중상서 형자재[문채가 흐르는 빛과 같았고 기이한 문장이 세상을 덮었다.]
제나라 비서감 조효징[학업이 우수하고 넉넉하며 재주가 세속에 빛났다.]
제나라 상서좌승 봉효담[맑은 풍도가 높고 원대하며 당시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앞서 있었다.]
제나라 사지절 평남장군 인주자사 금자광록대부 안강후 번유[죽림사(竹林寺)와 발고사(拔苦寺) 두 절을 지었다.]
몸을 조어함이 엄하고 깊었고 이치를 아는 것이 맑고 밝았으며 정성된 장한 뜻이 그와 더불어 짝할 이가 없었다. 여주(廬州)에 죽림사를 지었고 인주(仁州)에 있을 적에 발고사를 지었으며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서사하는 일을 노년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하였다.
위는 제나라 시대의 영특하고 현명한 이들이고 북조(北朝)의 준일(俊逸)들이며, 아울러 학문은 지금과 옛날에 통달하였고 앎은 도교와 유교를 관통(貫通)하였다. 그리고 깊이 불교를 믿어서 인과에 통철하게 밝았으며 손으로는 불경[玉軸]을 펼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말씀[金言]을 외우니 그의 무리들이 마치 풀과 나무가 대지(大地)를 의지하듯 하였고 그의 덮음은 마치 비늘달린 물짐승들이 긴 내를 의지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평민의 농부와 이름 없는 늙은이들과 널리 바라고 지향함을 아는 이들과 약간의 신심을 낸 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4생(生)에 복되게 도와서 경사가 3세(世)에까지 유전하였으니 어질고 용서함이 아들과 손자에까지 미쳤다. 그들의 능히 행하는 덕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겠다.
주(周)나라 주국 양주총관 위왕[봉림사(鳳林寺)를 지었다.]
여러 덕의 근본을 심었다. 양주(襄州)에 있을 적에 봉림사를 지어 올리니, 그 절은 위태함을 기대고 골짜기에 걸터앉아 있으며 기둥을 접하여 있고 구름을 연하여 있었다. 향각(香閣)과 선감(禪龕)이 바위를 의지하여 가로질러 놓여 있었으며, 불사(佛事)가 장엄하고 정돈되었으며 전우(殿宇)가 빛나고 화려하였다.
달이 가을의 창문에 들어오고 바람이 여름의 문호(門戶)에 나서 근심을 잊음이 원(院)에 가득하고 즐거움이 길이 층계에 찼다. 대나무는 띠로 엮은 처마에 솟아 있고 소나무는 돌 섬돌에 가로질러 있으며 기이한 봉우리는 해를 향해 뻗쳐 있고 높은 나무는 하늘을 가로질러 있어서 눈을 붙이는 곳마다 마음이 열리니 자연히 돌아감을 잊었다.
주나라 주국 익주총관 조왕[혜안사(慧眼寺)를 지었다.]
인사(仁祠)에 귀명(歸命)하였고 익주(益州)에 있을 적에 혜안사(慧眼寺)를 지었다. 중문(重門)은 높은 데까지 벌려 있고 나는 듯한 추녀가 구름을 연하여 있으며 새가 기고 용이 서린 듯하며 봉황이 날고 기린이 접한 듯하였다. 창문은 신녀(神女)의 번개를 연 듯하고 들보는 미인(美人)의 무지개를 비춘 듯하며 처마는 사방으로 대어 옆으로 임하였고 섬돌은 세 번을 쉬어 바로 올라갔다. 황금 노끈의 계도(界道)는 마치 도리천(忉利天)의 동산을 그린 듯하고 이슬의 장막이 섬돌에 드리우니 곧 유건(由乾)의 땅을 베낀 듯하였다. 삼춘(三春)의 좋은 달과 같고 팔절(八節)의 아름다운 때와 같아서 사녀(士女)들이 믿는 마음을 내고 도시와 지방의 호방(豪放)하고 의협심이 있는 이들이 몸을 바쳐 회향하고 정례(頂禮)하며 귀의하였다.
주나라 주국 옹주자사 제왕[안거사(安居寺)를 지었다.]
주나라 태사 대총재 주국 대장군 진국공 우문양[회동사(會同寺) 등의 절을 지었다.]
진국공의 지위는 문소(文昭)에 속하고 이름은 왕협(王陜)에 높았다. 사방의 공물(貢物)을 받아들이고 5후(侯)의 정벌을 오로지 하였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처럼 보좌를 하니 뭇 업적이 다 빛났으며 고요(皐繇)의 계책을 펴니 천하가 태평하였다. 사직(社稷)이 그로 말미암아 건립되었고 조정이 그에게 의뢰하여서 인재를 가려 등용하였다.
그리고 믿음이 돈독하여 무리에서 뛰어났고 회향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불교를 흥륭(興隆)시켰으며 인사(仁祠:절)를 지었으니, 무릇 법왕사(法王寺)와 미륵사(彌勒寺)와 척기사(陟屺寺)와 회동사(會同寺) 등의 다섯 절을 지었다. 탕목(湯沐)은 봉급을 거두어서 수형(水衡:조세를 맡은 곳)의 재물을 허비하지 아니하였고 군국(郡國)들이 조세를 덜어서 배를 띄우는 부역을 수고하지 아니하였다.
분음(汾陰)은 보정(寶鼎)을 얻은 땅이요, 안읍(安邑)은 우(禹)임금이 처음으로 도읍을 세운 곳이며, 동산은 수달장자의 황금으로 열었고 샘은 사문의 석장(錫杖)으로 솟았다. 대진(大秦)의 목난(木難)9)을 다하였으며 일남(日南)의 화재(火齋)10)를 기우렸으며 제조는 조장(彫匠)을 다하였으니 공왕(工王)의 그림을 인하지 아니하였으며 공교함은 신공(神功)을 다하였으니 바야흐로 유여(由余)를 대함을 기다렸다. 하늘에 솟은 보배 탑은 멀리 망기(望氣)11)의 대에 임하였고 땅에서 솟은 신령스러운 감실(龕室)은 도리어 염거(鹽車)12)의 언덕에 대하였다. 계율을 수지하는 사부대중이 안거(安居)하며 밤낮 두 때에 항시 법륜(法輪)을 굴리고 항상 선실(禪室)에 모였다. 또 숭화사(崇華寺)에 공양하였다.
주나라 주국 상서복야 초국공 두로영[나한사(羅漢寺) 및 회종사(會宗寺)를 지었다.]
그는 연(燕)나라 문황제(文皇帝) 모용황(慕容晃)의 후손으로서 조부 집(什)은 문성 황제의 직침 사예대부(直寢司隸大夫)이고 아버지 독(篤)은 주국 대장군 부릉공(涪陵公)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벼슬에 처음 나아갔는데 월각(月角)13)이 기특함을 나타내었고, 성정(星精)이 덕을 드러내었다. 군대에 있는 37년 동안 몸소 겪은 42회의 전투에서 호병(胡兵)이 감히 남쪽으로 그 말을 기르지 못하였으니, 조(趙)나라 사람이 어찌 감히 동쪽으로 사냥하였겠는가? 인륜(人倫)의 수경(水鏡)이고 당세의 재목이었다. 그러나 마음 공부를 좋아하여서 회향으로 업을 삼았으며, 나한사와 회종사 두 절을 지었고,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서사하기를 서로 계속해서 끊이지 아니하였다.
주나라 태부 주국 대장군 태종백 등국공 두치[백마사(白馬寺)와 범운사(梵雲寺) 두 절을 지었다.]
오릉(五陵)의 으뜸가는 문벌로 삼보(三輔)14)의 좋은 집안이다. 맹진(孟津)에서 동덕(同德)의 문(門)이라고 일컬어졌고 함양(咸陽)에서 먼저 등용(登龍)되어 보좌가 되었다. 공(功)은 8병(柄)에 참여하였고 지위는 6부(符)에 들었으니, 두치는 곧 안풍(安豊)의 빛나는 집안의 자손이다. 옛날에는 도교[黃老]만을 섬겼으나 지금은 대승불교를 믿어서 백마사와 범운사 두 절을 지어서 당래(當來)에 세간을 벗어날 업을 심었다.
주나라 시중 주국 대장경 무위장군 관군장군 중산대부 안풍공 단우치
간목(干木)의 후예이고 무군(撫軍)의 어린 아들이었다. 풍류로 세상의 중함을 받았으며 명망 있는 무(武)를 이었다.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듯 의표(儀表)가 순수하고 온화하였다. 당시에 여여단(茹如檀)이 연(燕)과 계(薊)를 차지하였을 적에 단우치가 명령을 받들어 전대(專對)하였으나 그를 반역의 무리로 보고 곧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그것으로 도리어 여여단과 좋게 지내게 되었으며, 얻은 인구와 말과 그 밖의 금패(金貝)들을 불경을 베끼는 데 쓰고 아울러 자선사업에 썼다.
주나라 주국 옹주목 남연팔주제군사 연주총관 찬국공 두공
대대로 이어서 구경(龜鏡)이 되고 잇달아 의영(衣纓)이 되었다. 온 집안이 불법을 받들어 다 아름다운 경사를 부러워하였다.
주나라 대장군 유주자사 안정공 우문귀
태조 문황제의 손자요 주국 제왕의 아들이다. 동교(東膠)와 서서(西序)에서 업을 받들어 경을 해석하니 덕이 유림(儒林)에 높았고 이름이 태학(太學)에 높았다.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를 다하였으며 부처님 받들기를 오직 공손히 하여서 보시[檀]와 인욕[忍]을 마음에 두어 늙어도 더욱 지극하였다.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태자세마 운영장공 낭야군왕 척발승
시중 태보 사주목 광양왕 가(嘉)의 손자이다. 아버지 통(通)은 나라의 후사(後嗣)가 되는 것을 버리고 왕가를 벗어나서 갈석(碣石)을 고쳐서 향성(香城)이라 하고 저양(雎陽)을 고쳐서 내원(奈苑)으로 하였으며 갓과 면류관을 버리고 농부의 옷을 입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읖는 일을 그만두고 아담한 범패(梵唄)를 따랐다. 운영장공은 아버지를 위하여, 또한 귀의를 사모하여 이어서 사제(私第)에서 항상 정업(淨業)을 닦았다.
주나라 사지절 섬주도독 행대 낭중통직 산기상시 하동공 우문선
우문선 공의 자는 중량(仲良)이다. 소년이 되어 학문에 나아가서 옷을 백씨(百氏)에게 전수받았다. 약관에 조정에 오르니 준일(俊逸)한 기마가 천리를 달리듯 하였다. 대통(大統)의 초기에 사원(沙苑)에서 승전하고서 하동(河東)의 땅을 접수하고 검(劍)을 짚고 정성껏 돌아오니 그의 종(宗)은 향인(鄕人)을 쫓아서 아울러 개국(開國)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바른 법을 믿어서 장래를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베껴쓰는 등 일생 동안 복을 일으켰다.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양화공 원앙
그는 위(魏)나라 대승상 경조 강왕(康王)의 손자요, 태보 녹상서 항지(恒芝)의 아들이다. 온순하고 공손함으로 절개를 삼고 어질고 효도함을 마음에 두었다. 유림(儒林)에 유학하여서 일찍이 경사(經史)를 익혔고 깊이 불교를 공경하여 집을 희사하여 수덕사(酬德寺)를 지었다.
주나라 주국 대장군 농서동공 양찬
그는 하남(河南)의 근신(近臣) 화산(華山)의 귀한 자손이다. 조부 구(丘)는 우림삼군(羽林三軍)으로서 군사를 6진(鎭)에서 다스렸으며, 아버지 안인(安仁)은 북도(北道)의 대도독이요 삭주(朔州)의 진장(鎭將)이었다. 조고(祖考)로부터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다.
주나라 통주 자사 우시상사 산기상시 양조
그는 서한(西漢)의 10인이요 동경(東京)의 4세(世)로서 고귀한 집안의 자손이며 혁혁한 업적을 서로 이었다. 상서충공(尙書忠公)의 손자요 분주(汾州) 자사의 아들이다. 두 양씨가 같은 세상에서 다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였다.
주나라 사공 정후 정목
그는 천성적으로 나와서는 충성하고 들어가서는 효도하였으며 부처님을 공경하고 스님들을 존중하는 데 있어 오래도록 게으름이 없었다.
주나라 시중 소부 경조군수 행대랑중 대장경 연군공 노경인
그는 태복경(太僕卿) 정(靖)의 작은 아들이다. 고상하고 바르며 옛 것을 널리 배워서 집에서는 부조(父祖)의 업을 계승하였으며 밤낮으로 배우기를 열심히 하여 세상에서는 좋은 활의 가르침이라고 칭찬받았다. 셋째 형 경유(景裕)는 학문이 도교와 유교에서 으뜸이었으며, 넷째 형 경변(景辯)은 널리 배우고 기억하는 힘이 좋아서 모두 능히 헌장(憲章)을 고치고 예악(禮樂)을 제도하였으니, 관중(關中)에서는 공부자(孔夫子)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하상(河上)에서는 공자[仲尼]인가를 의심하였다. 모두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도교[莊老]는 공허하고 가볍다고 일컬었다.
주나라 태보 주국 대장군 오무공 울지안[포의사(褒義寺) 및 선화니사(宣化尼寺)를 지었다.]
헌원씨(軒轅氏)가 성인을 탄생함에 신정(新鄭)에서 그의 큰 근원을 시작하였고, 창의씨(昌意氏)가 내려와 약수(若水)에서 기거함에 그가 남긴 열의를 이었다. 처음으로 위씨(魏氏)의 정사를 본받아서 울지국(蔚遲國)의 임금에 봉해졌으며 관족(官族)이 세공(世功)을 표하였으며 명씨(命氏)가 조읍(胙邑)에서 인하였다.
연이어 있는 빛나는 단서는 이정(彛鼎)에 그의 깊은 공을 새기게 하였고 빛나고 아름다우며 높은 터는 용기(庸器)에 그가 행한 업을 적게 하였다. 아버지는 주국 대장군 장락공이고 부인은 상서 창락대장목(昌樂大長穆) 공주이다. 포의사와 선화니사를 지었다.
주나라 대장군 남만도감 상산공 유경지[향산사(香山寺)를 지었다.]
높고 높으며 매우 준수하여 한 여름에 구름 모이듯 하였다. 기품이 깊고 멀고 풍채와 태도가 엄하고 정재되었다. 그는 왕융(王戎)의 간요(簡要)함을 따랐고 배해(裴楷)의 맑고 통달함보다 뛰어났다. 덕이 있고 재주가 있어서 스승이 될 만하고 숭상할 만하였다. 양주(襄州)에다 향산사를 지으니 사찰은 구름 밖으로 날아가고 번기(幡旗)는 하늘이 드리운 듯하였으며 해는 연대(連臺)에 감돌고 구슬은 금지(金地)에 무더기로 있어서 멀리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비기겠고 계원(鷄園)을 모사한 듯하였다.
주나라 북형주자사 안도공 석고[덕왕사를 지었다.]
그는 기품이 준엄하고 재략(才略)이 통달하였다. 은장(銀章)과 청수(靑綬)와 명경(明經)을 고개숙여 받고 작위를 내려 공로에 보답하고 원공(元功)이 극거(克擧)하여서 영덕(令德)이 국사에 드러나고 책훈(策勳)이 가첩(家諜)에 실렸다. 이 벌열(閥閱)을 기초로 하여 여러 대를 광화(光華)하였소. 등주(鄧州)에 덕왕사를 지으니 방우(房宇)가 정밀하고 엄숙하며 전당(殿堂)이 높고 시원하며 거처한 곳이 형세가 뛰어나서 보는 자가 발심하였다.
주나라 사지절 주국 대장군 대도독 동주자사 서국공 약간봉[지성사(至聖寺)를 지었다.]
사공(司空)의 손자요 무공(武公)의 아들이다. 사직을 세워서 제나라를 이었고 홀[珪]을 잡아서 위(衛)나라를 이었다. 이에 높은 봉우리가 해를 가리듯 하고 긴 날개가 구름에 드리우듯 하였다. 지성사를 지어서 명복(冥福)을 의지하려 하였다.
주나라 사지절 태부 주국 대장군 청하공 후막진휴
문과 무를 겸하여 충성과 효도를 모두 행하였다. 나면서부터 착함을 생각하였으며 항상 자비와 용서를 행하였다. 대승사(大乘寺)에서 계를 받고 발심하여서 일체경을 베껴쓰고 비단으로 만든 1장(丈) 6척의 무량수상(無量壽像)을 조성하였으며 봉록으로 받은 것을 다 보시하였다.
주나라 태사 주국 촉국공(蜀國公) 울지형[묘상사(妙像寺)를 지었다.]
위나라 왕실이 상란(喪亂)하였을 적에 경륜(經綸)하여서 오랑캐를 막았으며, 주나라 왕조가 건국되자 나라를 바로잡고 도와서 읍양(揖讓)하여 공훈이 높고 효과가 무거웠다. 그가 있는 곳은 비록 어려운 곳이라도 착함을 숭상하고 복을 사모하여 오랠수록 더욱 나타났다.
묘상사를 지어서 4사(事)의 공양을 빠짐없이 하였고 항상 법륜(法輪)을 굴려서 3학(學)15)에 더욱 공을 더했다.
주나라 개부의 동삼사 안정공 사웅[안정사(安政寺)를 지었다.]
옛날 주하사(柱下史)가 주남(周南)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성화가 함곡관(函谷關)을 떨쳤기에 관(官)으로 인하여 성씨를 삼아서 드디어 사씨(史氏)라고 불렀다. 조부 준(遵)은 양주(凉州)의 자사이고 아버지 영(寧)은 주국 안정열공(安政烈公)으로서 둘 다 꾀가 깊고 책략(策略)이 커서 시대를 바로잡고 세상을 건졌다. 그리고 가문에서는 삼보를 숭상하고 사람들은 8재(齋)를 받들었다. 안정사를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주나라 개부 평북장군 인주자사 안화공 구홍빈[본기사(本起寺)를 지었다.]
대대로 충성과 절의를 바쳐서 가문이 고귀함을 이었다. 골목마다 긴 창을 든 이가 호위하니 왕준(王濬)의 거처에 비기겠으며 문마다 사마(駟馬)가 대기하니 위서(魏舒)의 집과 마찬가지였다. 아우 광화공(廣化公)과 아울러 기품은 호련(瑚璉:祭器)과 같고 기질은 출중함을 나타내었다. 그러니 난형난제(難兄難弟)인 것이 원계(元季)의 덕과 한가지이고 혹은 장수거나 혹은 왕후(王侯)인 것이 열단(列丹)의 귀함과 같다. 불교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법음(法音)을 연구하여 음미하며 그의 옛 살던 집을 희사하여 본기사를 지었다.
주나라 익주부중랑 신주자사 채가
금마(金馬)의 문에서 조명[詔]을 기다리고 석거(石渠)의 학문에서 유교를 논하였으며 양(梁)나라 동산에서 부(賦)를 지어서 그 대우가 추양(鄒陽)과 매승(枚乘)과 같았고 양나라에서 태어나 주나라에서 죽으니 그 예우가 신공(申公)과 백생(伯生)보다 중했다.
주나라 개부 위원장군 왕정[오환사(烏丸寺)를 지어 공양하였다.]
주나라 대장군 화계웅[화계사(和鷄寺)를 지었다.]
주나라 대장군 이면영[이면사(爾綿寺)를 지었다.]
주나라 사금대부 파다라기[파다라사(破多羅寺)를 지었다.]
주나라 군사마 홍화공 의력근중경[의력근사(意力勤寺)를 지었다.]
위는 주나라 왕대이다.
수(隋)나라 황태자 용[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써서 서로 이어 끊지 않고 계속 하였으며 나아가 외우고 도를 행하여서 때에 따라 바꾸지 않았다.]
수나라 진왕 준[경사(京師)에 연흥사(延興寺)와 제도니사(濟度尼寺)를 지었고 정주(井州)에 개화사(開化寺)를 지었다.]
수나라 촉왕 수[익주(益州)에 공혜사(空慧寺)와 법취사(法聚寺)와 대건창사(大建昌寺)를 지었고, 효경사(孝敬寺)에 공양하였다.]
수나라 촉왕 수의 비(妃) 장손씨[복성사(福成寺)를 지었다.]
수나라 익주장사 창평공 원엄[복승사(福勝寺)를 지었다.]
수나라 한왕 양(諒)
경사에 선정사(禪定寺)를 지었고 병주(幷州)에 내화사(內華寺)와 법인사(法忍寺)를 지어서 각각 스님 1백 명씩을 득도시켜 공양하였다.
위의 세 임금은 모두 불교를 공경하여 믿는 생각을 품고 불교의 유통에 뜻을 두었다. 특히 돈독하게 사랑하고 어질고 효도하는 것은 진왕이 가장 뛰어났으니, 그는 항상 6재(齋)를 지켰고 매양 10선(善)을 행하였으며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여 있는 곳마다 마음을 썼다. 그가 양주(襄州)의 총관(總管)이 되는 날에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교화하고 인도하여 크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세속에서는 와서 구해 줄 것을 읊었고 때가 늦었다고 말하였다. 연흥사의 당우(堂宇)와 제도니사의 신궁(神宮)은 다 진왕이 거처하던 곳인데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수나라 태사 상주국 신국공 이목[수선사(修善寺)를 지었다.]
그는 재능과 도량이 영걸스러우며 풍도가 맑고 넓었다. 그래서 기이한 공과 성한 행적으로 백성들을 제도하는 데 힘썼다. 주나라가 이미 쇠약해져서 세 주변이 솥 끓듯 할 적에 방면(方面)을 숙청하여 편하게 하고 흉한 괴수를 꺾고 막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여서 유명(幽明)을 관철(貫徹)하였다.
뜻이 침착하고 깊으며 음성과 꾀가 뛰어나고 원대하였기에 공훈의 업이 일찍 나타나고 이름과 기량이 일찍이 높았다. 그리하여 무성한 덕과 지극한 도로 앉아서 아담한 풍속을 진압하였으니, 시대의 호걸이요 조정의 의표(儀表)였다. 이에 조래(徂來)의 소나무와 신포(新甫)의 잣나무를 써서 부처의 전당을 세워 일으키고 스님의 방사(房舍)를 세우니 선실(禪室)과 종각이 정밀하고 화려하지 아니함이 없고 강당과 문옥(門屋)이 다 높고 화려하였다.
수나라 태보 상주국 설국공 장손람[실제사(實際寺)를 지었다.]
큰 내와 이름난 산의 신령이 내려서 품화(稟和)가 순수하였다. 코가 우뚝하고 머리가 움푹 들어갔으니 가만히 좌기(佐旗)의 덕에 부합하고 거북 무늬와 깊숙한 눈을 보니 하늘이 내려준 자태가 빼어나다. 효도는 솔유(率由)를 표하고 충성은 모범이 되었으니 온순하고 공손하며 너그럽고 여유 있는 성품과 간솔하고 문채가 있고 원대한 재주와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융성하게 하는 도리와 세상을 바로잡고 시대를 건지는 책략(策略)은 충직하기가 주사(周捨)의 기상이 있고, 엄숙하기 관중(管仲)의 풍도를 품었다. 주무왕과 같이 천하를 다스린 열 명의 신하도 그에게 더하지 못하고 세 명의 호걸로도 이를 비길 수가 없다. 고굉(股肱)의 훌륭함은 이를 이름이라 하겠다.
그리고 법의 근본에 회향하여서 불교를 숭상하며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는데 당우에 힘을 다하였고 이어 금지(金地:佛寺)에 충당하여 곧 보방(寶坊:절의 美稱)을 구성하였다. 월전(月殿:佛殿)과 금인(金人:佛像)과 연대(蓮臺)와 화개(花蓋)가 가지가지로 꾸며져서 화려하고 매사가 빛나고 새로웠다.
수나라 상주국 사지절 회남총관 수주자사 관왕 양웅[귀의사를 지었다.]
사나움을 평정하고 어려움을 고요히 하는 재주와 업신여김을 막아 여러 모로 방책을 짜는 책략과 손톱과 어금니[爪牙]와 같은 보좌하는 쓰임이 이미 나타났고 웅양(鷹揚)의 힘이 드디어 펼쳐졌다. 집을 빛내고 나라를 빛내서 오래 되게 하고 커지게 하였으니 팔과 다리와 같은 유에 속하는 바요 문헌은 다 넉넉하였다.
지극히 진리의 말씀을 믿어서 끌어오기에 게으름이 없었다. 복을 일으키고 절을 지으며 항상 시주가 되었으며 금지옥엽(金枝玉葉)의 공후(公侯)의 자손으로서 집에 전하는 것이 태정(台鼎)이었다. 그러나 공(空)을 알고 유(有)를 보아서 도에 복종하여 돌아올 줄을 알았으며 그의 바람은 더욱 높은데 그의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수나라 대사마 상주국 신무숙공 두의[운화사(雲華寺)를 지었다.]
어려서는 좋은 평판이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달통한 사람으로 불렸다. 집에는 황제가 하사한 글이 있었고 문에는 호위하는 창이 표시되어 있었다. 네 임금을 받들어 공양하매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이었으며 의리는 용의 문채보다 중하게 여기고 재물은 매미 날개처럼 가볍게 여겼다. 옥사를 단정할 적에 불쌍히 여기는 생각을 내었고 판결을 내림을 임하여서는 너그럽고 온화한 어짐을 다하였다. 그리고 삼보를 보호하고 오가(五家)를 체달했으며 절을 짓고 재를 세워서 항상하는 업으로 삼았다.
수나라 상주국 상서우복야 노국공 우경측[충각사(冲覺寺)를 지었다.]
혁혁한 가문이고 조정의 재목이었다. 뜻과 지식이 자세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기량이 널리 통하였다. 그는 6국(國)의 말에 능숙하였고 사방의 풍속에 통달하였으며 이미 인륜(人倫)의 요점을 총괄하였고 두루 유책(惟策)의 기틀을 알았다. 그리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음을 생각하여 조그마한 착함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였으며 복을 일으키고 절을 지을 때에 있는 곳에서 보시를 행하였다. 크게 법당을 일으키고 널리 부처의 전당을 벌여 놓았다. 양주(襄州)에 있을 적에 비단으로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을 조성하니 높이가 1백20척(尺)이었으며, 상호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감응이 항상 특이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상서좌복야 제국공 고영
신적사(信寂寺)와 적선니사(積善尼寺)를 지었다. 재간과 도량이 고르고 진실하였으며 식견과 사려가 우수하였고 예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종합하였으며 음악은 소(韶)와 무(武)를 다하였다. 백관(百官) 씨족들이 두려워하는 바요 구주(九州) 토지의 마땅함이며, 헌장(憲章)하여 나라를 경영하는 계책이요 세상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기르는 기술이어서 조정의 일을 알아서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의 지위가 더욱 높아갈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낮아져서 수나라 황실을 세울 때에 실지로 특수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세간의 일을 잘 통달하여서 환화(幻化)와 같은 줄을 일찍이 알았기에 마음을 거기에서 벗어나는 데 두었고 향성(香城)의 뜻을 독실하게 가졌다. 칠각(七覺)의 꽃대와 삼명(三明)의 보배 전당과 유리의 범우(梵宇)와 마노(瑪瑙)의 선감(禪龕)은 인도의 바라나시[奈苑]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죽림(竹林)정사와 단각(檀閣)정사와 같아서 유람하는 자들로 하여금 돌아갈 것을 잊게 하여 하나하나 사람을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이름 있는 스님으로 해내(海內)의 대덕이신 혜숭선사(慧崇禪師)와 도언법사(道彦法師)들이 모두 그의 공경과 믿음에 감격하여 함께 가람을 일으켰으며, 또 신행선사(信行禪師)를 맞아서 특별히 선원(禪院)을 일으키니 오부(五部)의 대중들이 구름 모이듯 하고 삼학(三學)들이 별이 나열한 듯하였다. 도인과 속인이 귀의함이 이보다 더 성한 것이 없었다. 또 적선니사(積善尼寺)를 지었으니 또한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좌위대장군 진국공 두항[정법사(靜法寺)를 지었다.]
삼보(三輔)의 좋은 집에서 태어났고 오릉(五陵)의 귀한 자손이다. 큰 근원이 뒤에 희수(姬水)가 되며 층층이 있는 바위가 기산(岐山)에서 성해지듯이 대대로 관직의 영화를 누렸고 가문에는 고안(羔雁:卿大夫의 진상물)의 예를 이었다. 풍속을 바로잡아 그의 무성한 행적을 떨치고 능(陵)을 편편히 하여서 그의 반근(盤根)을 풀었다. 비록 속세에 있지마는 뜻은 항상 생사를 벗어나는 데에 두었다.
수나라 상주국 무위장군 양국공 후막진예[사위사(舍衛寺)를 지었다.]
탁월하여 남과 같지 아니하였으며 강직함을 짝할 이가 없었다. 왕실(王室)의 참모가 되어 우두머리로 의로운 깃발을 세웠으며 번거로움을 버리고 간략한 데 나아간 공과 명을 도와서 사나움을 평정한 힘이 있었다. 임관하여 궁궐의 성문을 지키면서 세월이 쌓였고 궁성을 숙직하여 지키며 자주 세월이 바뀌었다. 마음 씀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홀로 당조(當朝)에 아름다웠고 문물이 모두 넉넉하여 성화가 멀리 펴졌다.
같은 가문의 형제 3인이 부마(駙馬)가 되었다. 불교를 공경하여 믿으며 숭상하고 존중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베껴 써서 매양 법의 말로써 착한 일을 모두 닦았다.
수나라 상주국 낙예십칠주 제군사 낙주자사 좌익위장군 순양공 원효구[공관사(空觀寺)를 지었다.]
뜻과 지식이 우수하고 원대하며 풍도와 골격이 서리를 능멸하였다. 터를 다스리는 일에 간여하여 힘썼으며 일찍부터 금위(禁衛)의 일을 알아서 처리하였다. 마음 씀이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처의 법을 받들어 친소(親疎)가 없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정역(淨域)에 충당하였으며 자산을 아끼지 아니하고 항상 복전을 세웠다. 옥 같은 바탕이요 금 같은 상호여서 영걸스러운 성화가 멀리까지 떨쳤다.
수나라 상주국 형주 총관 상명공 양기[정수사(定水寺)를 지었다.]
그가 사는 곳은 형주(荊州)의 뛰어난 땅이요 초나라 변방의 신기한 고을로서 배젓는 소리가 섞여 들리는 물과 육지의 요충 지대이다. 오직 어진 이만이 기탁(寄托)하는 곳으로서 비록 친하여도 있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맡아 정사를 펴서 법규를 펴니 다 의뢰할 수 있다고 일컬어서 맑은 풍도가 멀리까지 윤택하게 하였고 무성한 치적(治績)이 소문이 났기에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이 늦었다는 노래를 불렀고 다 가고서는 생각한다는 노래를 베풀었다.
이 복 있는 땅을 열어 이 인사(仁祠)를 두니 달 같은 전당이 광채를 흘리고 구슬의 대가 채색을 빛냈으며 회칠한 벽에 꽃이 피었고 둥근 못에 연꽃이 피었다. 정씨(鄭氏)의 유마사(維摩寺)와 손공(孫公)의 안양사(安養寺)와 같음에 이르러서는 다 절세(絶世)의 아름다움이라 일러서 미묘함이 단청(丹靑)에 다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상서좌복야 월국공 양소[광명사(光明寺)를 지었다.]
땅을 파서 집을 열었고 후(侯)를 쫓아서 나라를 세웠다. 어려서부터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의 뜻을 품었고 장성하여서는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풍도를 가졌다. 당거(唐擧)16)는 그가 진(秦)나라의 재상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곽하(郭賀)17)는 그가 한(漢)나라를 돕는다고 말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신수(神粹)하며 재간과 도량이 커서 받아들이기는 흐름을 삼키는 데 비기겠으며 비추기는 달아놓은 거울과 같았다. 나면서부터 영준(英俊)하여서 빼어남이 자연스러웠다.
구류(九流)를 밀어서 배척하고 삼고(三古)18)를 완미(玩味)함에 이르러서는 거리의 술잔으로 뜨더라도 다할 수가 없고 창해(蒼海)를 운반해 와도 다할 수가 없다. 그러니 동방삭(東方朔)과 우연(虞延)도 그의 풍채가 훌륭함에 부끄러워하였고 노광(魯匡)과 조착(朝錯)도 그의 지혜의 주머니에 부끄러워하였다.
욱욱(郁郁)한 그의 문장이 훌륭하고 힘세고 날랜 그의 용무(用武)가 씩씩하니 천자를 돕는 힘과 고르게 다스리는 공인들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정각(正覺)을 존중하고 법문을 열고 장려하여서 봉록은 모두 정업(淨業)을 경영하는 데 사용하였다. 벌거숭이 하늘에다 법당을 짓고 거슬린 경치에다 종대(鐘臺)를 일으켜서 칠보의 전당과 구층의 탑이 은하수 밖까지 높이 다다랐고 위로 구름 끝에 나왔다. 이름 있는 꽃들을 심고 좋은 새들을 길렀기에 누구라도 눈을 머물러 두어서 유람하는 뜻을 즐겁게 하였다. 이곳은 관중(關中)에 아름다움을 떨쳐서 천하에 이름을 전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상서우복야 납언 비국공 소무위[제법사(濟法寺)를 지었다.]
그는 곧고 근간이 됨이 일을 이룰 만하고 온화하고 의로움이 중생을 이롭게 할 만하였다. 확실하여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체달(體達)함이 그의 성품이다. 숨어도 친함에 어긋남이 없고 곧아도 세속을 끊음이 없어서 8공(公)이 한(漢)나라에 나아감과 같고 4호(皓)가 들어와 조회함과 한가지였다. 그래서 나라의 정사와 하늘의 강령이 이로부터 크게 갖추어졌다.
그는 자못 백씨의 서적을 익히고 겸하여 3현(玄)을 통달하였다. 마음을 4덕(德)이 있는 곳에 놓고 바탕을 5문(門)의 관법(觀法)에 기탁하였으며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며 부처님께 예배하고 등을 켰으며 저 장엄을 갖추고 모든 공덕을 갖추었다. 수나라 왕조의 좋은 재상이 대개 이 사람과 같이 마음을 낮추고 뜻을 높이 가지며 지식이 그윽하고 보는 것이 원대하여서 문과 무에 모범이 되고 아름다운 윤리를 돈독히 모았다.
수나라 상주국 도독하동 제군사 하동태수 두경
그는 학문으로는 백성을 사랑하고 무예로는 넉넉히 난(難)을 평정하였다. 넓고 넓은 사랑은 어질고 후하여서 백성들이 오는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가고 나서는 생각하였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고 보시와 인욕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수나라 주국 우위장군 남강공 유숭[율장사(律藏寺)를 지었다.]
굳세고 강직하며 법을 받들매 사사로움이 없었다. 집에 사는 것을 싫어하여 해탈을 흠모하고 숭상하였다.
수나라 표기장군 의동삼사 분주자사 최봉[경행사(經行寺)를 지었다.]
그는 품행이 정숙하고 법을 받듦이 넉넉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돈독히 대승을 좋아하여서 바른 길로 회향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하간왕 양벽사[대자니사(大慈尼寺)를 지었다.]
그는 거동과 모습이 온순하고 아담하고 뜻 가짐이 정숙하며 확실하였다. 항상 출세간을 흠모하여 일찍이 유위(有爲)를 싫어하였다.
수나라 병부상서 상대장군 용강공 단문진[운화사(雲化寺)를 지었다.]
그는 대대로 통후(通侯)를 세습하여서 집안에 총명(寵命)을 전하였다. 재간과 도량이 고르고 진실하였으며 식견과 사려가 우수하였다. 무(武)는 손빈(孫臏)과 오기(吳起)보다 나았고 문(文)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보다 높았기에 조명(詔命)을 기다리는 책략이 여러 번 나타나고 응대의 아름다움이 날로 높았으니 대개 조정의 의표이고 황가(皇家)의 동간(棟幹)이었다. 그는 삼보를 숭상하고 공경하여 체가 사구(四衢)에 달하였다.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불경을 서사하고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성품이 자비스럽고 은혜를 베풀며 어질고 관후하며 보시하여 변하지 아니하였다.
수나라 저작랑 제남후 왕소
그는 학문이 경과 역사를 다 궁구하였고 재주가 여러 영웅보다 뛰어났다. 『제지(齊志)』 한 부와 『석로지(釋老志)』 한 권을 저술하였고, 또 『인수사리현서기(仁壽舍利見瑞記)』 한 부를 지어서 부처님 법의 유래에 대하여 총서(總敍)하여 이르기를 “불교에 대해서는 얕은 꾀로 경솔하게 망언(妄言)해서는 아니 된다. 옛날 춘추(春秋) 때에 주나라 장공(莊公) 7년 4월 신묘일(辛卯日) 밤에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밤중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는데 뜻을 말하는 자가 ‘4월 8일 부처님께서 나신 때이다’ 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주나라 4월은 하(夏)나라의 6월이고 신묘일은 8일이 아니었다.
『연기(年紀)』에서는 ‘노(魯)나라의 지식이 다른 나라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모융(牟融)은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금으로 된 사람을 보았으니, 그의 이름이 부처이다. 이에 사신을 보내 그곳에 가서 부처님의 경책을 구하였다’고 하였다. 또 조사하여 보니 한나라 무제(武帝)가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으로 된 사람을 얻었다’고 하였다.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서는 ‘열선 가운데 74인이 불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즉 명제 전에 이미 부처님의 불경과 불상이 있었다 하겠다.
어환(魚豢)은 ‘노자(老子)가 서융(西戎)에 들어가서 부도가 되었다’ 하였으니, 이 말은 『화호경(化胡經)』에서 나온 것이기에 취할 것이 못된다. 한나라 시대에는 부도라는 말은 곧 부처님이었다. 마치 사문(沙門)을 상문(桑門)이라함과 같은 것이어서 말이 바뀐 것이다’고 하였다. 『전략(典略)』에서는 ‘황제(黃帝)가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유람하였다’ 하였는데, 화서씨라 함은 곧 천축국(天竺國)으로서 부처님께서 신유(神遊)하시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수나라 주국 박령사주총관 해릉공 하약의(賀若誼)
참으로 경상(卿相)의 가문이요 관개(冠盖)의 마을이라고 일컫는다. 우뚝한 콧날이 의표(儀表)가 될 만하고 월굴(月窟:月氏國)과 같은 풍도가 있었다. 대승을 독실하게 믿고 부처님을 숭상하여 받들었다.
수나라 사지절 대장군 양주(凉州) 제군사 양주자사 조국공 독고라(獨孤羅)
경공(景公)의 세자(世子)이고 헌후(獻后)의 맏형이다. 법을 공경하고 사람을 존중하며 스승을 높이고 의리를 숭상하였다.
수나라 상주국 양익육주총관장 국양공 양예(梁睿)
신령한 근원을 소호씨(少昊氏)에게 두고 아름다운 뿌리를 백익(伯益)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동한(東漢)의 훌륭한 재상이요 서진(西晋)의 정신(鼎臣:大臣)이다. 불교를 공경하고 믿는 것으로 소문이 있었고 큰 업적이 극히 나타났다.
수나라 상주국 광종장공 이숭(李崇)
타고남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빼어남이 짝할 이가 드물었다. 오직 형과 동생이 왕을 스승으로 하고 황제를 벗으로 하였다. 『반야경(般若經)』을 외우고 익혀서 법륜(法輪)을 일으켜 세웠다.
수나라 상주국 좌무위대장군 사지절 양주자사 우문경
문무의 재주와 책략을 가졌고 인의(仁義)의 법도를 밟아서 만 리(里)에 조목을 펴 백 성(城)에 기림 받기를 도모하였다. 불상을 주조하고 불경을 베껴써서 복되는 업 짓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수나라 상대장군 영주총관 위흥공 위세문
시(詩)를 듣고 예를 듣는 풍도와 세 가지 의리와 세 가지 임금의 덕을 갖추어서 경사를 모으고 은택을 흘리니 부귀한 가지가 다함없었다. 바른 법을 당년에 사모하여 미묘한 말을 여러 해 동안 익혔다.
수나라 상주국 이부상서 상용공 위세강
용모가 훌륭하였으며 풍도와 운치가 밝게 드러났다. 옥 나무에 꽃이 무성함과 같고 구슬 산의 밝고 윤택함과 같았다. 천하를 경영하고 통치하는 것을 잘하였고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을 아름답게 하였으며 지혜의 문에 마음을 돌리고 뜻을 법의 동산에 두었다.
수나라 광한 태수 양원후 설담
그는 봉황의 털이요 기린의 뿔로서 문(文)을 나타내고 무(武)를 보여주었다. 집에서는 바른 법을 숭상하였고 가문에서는 현묘한 기풍을 받들었다. 5량(凉)과 4연(燕)과 3진(秦)과 2조(趙)에 미쳐서 높은 문은 마을의 문에 잇대어 있고 높은 터는 큰 섬돌에 접하였으니 척리(戚里)로서의 황친(皇親)이요 제경(帝京)의 부가(富家)였다. 그렇지만 공손하게 도를 사모하여 각각 불경을 펴놓았으며 입으로는 금언(金言)을 외우고 손에는 옥축(玉軸)을 폈다.
수나라 시대의 왕공(王公)과 명성이 있는 제우(帝宇)에 이르러서는 모두 불교를 흠앙하여 높이고 모두 복전을 공경하였으며, 혹은 절을 짓고 불경을 베껴썼으며, 혹은 보시의 자비와 공경을 행하였고, 혹은 경전을 외웠으며 혹은 현묘한 뜻을 깊이 연구하여 밝혔다.
이와 같은 명문 세가는 여기에서 모두 열거하기가 힘이 든다. 대당 왕조에는 벼슬한 현능한 관리가 숲을 이루었지마는 소족(蕭族)은 『법화경(法華經)』으로써 복의 터전을 삼았고, 두종(竇宗)은 탑과 절을 지음으로써 명(命)을 삼았다. 그리고 대상서(戴尙書)의 널리 공경함과 진장군(秦將軍)의 중생을 제도함에 이르러서는 혹은 부(府)와 성(省)에서 똑같이 흠앙하였고, 혹은 절과 대(臺)를 함께 받들었다. 이에 변두리에 있는 화이(華夷)에 미쳐서는 우두머리로 하여금 종에 이르기까지 한가지로 일심(一心)을 펴서 각기 부처의 이론으로써 지남(指南)을 삼고 아울러 뛰어난 업으로써 자기들의 임무를 삼게 하여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므로 그 같은 일을 여기에서는 기술하지 않겠다. 그러니 어찌 이로(李老)로써 이름을 팔겠는가? 그러기에 깊이 거울삼아서 의탁함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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