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57 변정론(辯正論) 6권

by Kay/케이 2024. 7. 26.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변정론(辯正論) 6

 

 

 



변정론 제6권


법림 지음
이영무 번역


5. 십유편(十喩篇)

1) 보살의 주장과 그 도사의 주장에 열 가지 다른 점에 대한 대답

황건(黃巾)을 쓴 이중경(李仲卿)의, 학문은 관규(管窺)만도 못하고 지혜는 신도(信度)에 부끄러운 이로서 흰 새의 날개를 자랑하여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을 놀라게 하기를 바라고 횃불의 빛을 짊어지고 해와 달의 빛남을 다투려 하여서 이에 열 가지의 다름과 아홉 가지 미(迷)함을 지어서 지극한 성인을 폄량(貶量)하려 하였기에 내가 그의 무식함을 개탄하여 저가 무슨 죄인가를 생각하여 열 가지의 깨우침을 들어 깨닫게 하고, 아홉 가지 잠언으로 경계하여서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써서 밝히니, 군자는 이의 취지를 자세히 할지니라.

⑴ 외적인 첫 번째 다른 점
【註】태상노군은 신(神)을 현묘한 옥녀(玉女)에게 의탁하였으며 왼쪽 옆구리를 가르고 나왔다.
석가모니는 마야(摩耶)부인에게 태를 의지하였으며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나왔다.

내적인 첫 번째 깨우침

노군은 상(常)에 거슬려서 목녀(牧女)에게 의탁하여 왼쪽으로 나왔고, 세존께서는 화(化)에 순응하여서 성모(聖母)로 인하여 오른쪽으로 나왔다.
보살이 말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노경유(盧景裕)와 대선(戴詵)과 위처현(韋處玄) 등의 『집해오천문(集解五千文)』과 양나라 원제(元帝)와 주홍정(周弘政) 등의 『고의류(考義類)』 소(疏)에 ‘태상(太上)에 네 가지가 있으니, 3황(皇)과 요와 순이다. 상고(上古)에 이러한 큰 덕의 임금이 있어서 만 백성들 위에 임하였기에 태상이라 한다’ 하였다.
곽장(郭莊)은 ‘시대의 현명한 자는 임금이 되고 재주가 세상에 맞지 않는 자는 신하가 된다. 그런데 노자는 제(帝)도 아니고 황(皇)도 아닌데 네 가지의 제한이 있지 않다. 그런데 무슨 전거(典據)가 있어서 문득 태상이라 일컫는가?’ 하였다.
도가(道家)의 『현묘경(玄妙經)』과 『중태경(中台經)』과 『주도옥궤경(朱韜玉机經)』 등의 경과 아울러 『출색기(出塞記)』를 검사하여 보니, ‘노자는 이씨(李氏) 여인의 소생이다’ 하였고 ‘현묘 옥녀가 있다’고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미 정설이 아닌데 더욱이 빌려서 잘못 말하였다.
『선인옥록(仙人玉籙)』을 조사하여 보니 ‘선인은 아내가 없고 옥녀는 지아비가 없어서 비록 여자의 형체를 받았으나 필경에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만일 이러한 상서로움이 있었으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 하겠는데 어찌하여 『사기(史記)』에 이러한 글이 없고 『주서(周書)』에 싣지 않았는가? 허망한 것을 구하여 사실인 양 책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자의 말이다.
『예(禮)』에 ‘관직에서 물러나 지위가 없는 자를 왼쪽으로 옮긴다’ 하였으며, 『논어』에 ‘왼쪽으로 옷깃을 하는 자는 예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니 만일 왼쪽이 오른쪽을 이긴다고 하면 도사들이 도를 행할 적에 어찌하여 왼쪽으로 돌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나라의 조서(詔書)에다 ‘오른쪽과 같다’ 한 것은 아울러 하늘을 순종하는 상도(常道)이기 때문이다.”

⑵ 외적인 두 번째 다른 점
【註】노군은 교훈을 드리움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장생(長生)을 열었다.
석가는 가르침을 베풀 적에 불멸불생(不滅不生)의 영멸(永滅)을 보였다.
내적인 두 번째 깨우침
【註】이담(李聃)의 타고난 바탕은 생이 있고 멸이 있어서 환생(患生)의 생을 두려워하고 근심하였기에 도리어 머리가 희어졌다[白首]고 불렸다.
석가모니의 드리운 행적은 멸을 보이고 생을 보이면서 적멸(寂滅)의 멸로 돌아갔기에 이에 금구(金軀)를 빛냈다.
보살이 말하였다.
“노자는 ‘큰 근심은 몸이 있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몸이 없게 할 수 있다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근심이 말미암는 것은 몸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노자가 이미 몸이 있음을 근심하면서 번뇌가 없는 것을 구하고자 하여 머리털이 희어짐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세속과 다르지 않다. 그가 만일 오래 살기를 말하였으면 무엇 때문에 일찍 죽었는가?”

⑶ 외적인 세 번째 다른 점
【註】노자는 생에 응하여 이 중국[東夏]에서 나왔다.
석가모니는 행적을 내리어 저 서융(西戎)에서 나왔다.
내적인 세 번째 깨우침
【註】이이(李耳)는 형체를 낳아서 동주(東周)의 고현(苦縣)에서 살았다.
석가모니는 행적을 내리어 중하(中夏)의 신주(神州)에서 나왔다.
보살이 말하였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천(千)과 천의 거듭된 수이기에 3천(千)이라 말하고, 이에 다시 천을 곱해서 대천(大千)이라 말한다.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이 그 중간에 있다’ 하였다.
『누탄경(婁炭經)』에서는 ‘파밀고원의 동쪽을 진단(震旦)이라 이르니, 그것은 해가 처음 나와서 동쪽부터 비추기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어떤 책에는 그러기에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러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심에 다 중주(中州)에 나고 변읍(邊邑)에는 나지 않는다. 만일 변읍의 땅에 나면 땅이 기울어진다’고 하였다.
『법원전(法苑傳)』ㆍ『고승전(高僧傳)』ㆍ『영초기(永初記)』 등을 고찰하여 보니 모두 ‘송(宋)나라의 하승천(何承天)ㆍ지엄(智嚴)ㆍ혜관(慧觀) 법사가 함께 변지(邊地)와 중앙을 논하였을 적에 법사가 ≺서역(西域)의 땅에는 입하(立夏)의 날[어떤 책에는 하지(夏至)의 날이라 하였음] 정오에 나무를 세우면 그 나무는 그림자가 없는데, 한나라 영대(影臺)에는 입하 날에[어떤 책에는 하지의 시기라 하였음] 표(表)를 없애면 오히려 남은 그늘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산경(算經)』에 의하면 ‘하늘 위의 한 치가 땅 아래에서는 천 리라 합니다’ 하니, 하승천이 이에 깨달아서 중간과 변지의 이론이 비로소 정하여졌다.
일을 가지고 따지면 중천축국(中天竺國)이 땅의 중간이니 진단은 동쪽이 된다 하겠다. 어느 책에는 본래 중심에 있기에 지방별(地方別)로는 바다에서 거리가 5만여 리라 하였다. 그런데 만일 이 땅에 준하면 동쪽으로 바다가 된다. 그러니 가유라위국을 서쪽이라 할 수 없음은 그 이치가 징험한다 하겠다.”

⑷ 외적인 네 번째 다른 점
【註】노군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때니 융성한 주나라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주나라의 장왕(莊王) 때가 되니 계빈국(罽賓國)의 교주(敎主)가 되었다.
내적인 네 번째 깨우침
【註】노자[伯陽]는 직책이 말단 신하에 처하여서 장리(藏吏)에 충당되었으며 문왕의 때에 있지 않았고 또한 융성한 주나라의 종사[師]도 아니었다.
석가모니는 지위가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몸소 특히 높은 분임을 증명하셨고, 나심이 주나라 소왕(昭王)의 전성인 해에 해당하였고 염부제(閻浮提)의 교주가 되었다.
보살이 말하였다.
“『전한서(前漢書)』에 ‘공자는 상상류(上上流)가 되니 이 분이 성인이요, 노자는 중상류(中上流)가 되니 이 분은 현인(賢人)이다’라고 하였다.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노자는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교론(二敎論)』에 ‘주사(柱史)는 조정에 있어서 본래 해찬(諧贊)이 아니다. 주나라에서 나와 진(秦)의 땅에 들어갔으며 윤희(尹喜)를 위하여 도를 말하였으나 제후에게 소문이 나지도 않았으며, 천자(天子)를 보지도 아니하였다. 그리고 주나라의 스승이 되었다 하나 역사에 분명한 증거가 없어서 정설(正說)에 부합(符合)되지 않으니 그래서 되겠는가?’ 하였다.
『사기(史記)』와 왕검(王儉)이 지은 『백가보(百家譜)』에 ‘이씨 노자는 고양(高陽)의 후예이다. 그의 시조 구요(咎繇)는 순임금의 이관(理官)이 되었기에 그로 인하여 씨가 되었다’ 하였다. 이씨의 일어남은 노담으로부터 일어났다. 노담의 전에는 이(李)씨라는 성이 있지 않았고 다만 이(理)를 씨로 하였는데, 노담이 자두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씨라고 일컬었으며,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으로서 위(魏)나라 문후(文侯)에게 벼슬하였으니 대개 춘추(春秋)시대의 말기로서 6국 시절의 사람이다.
주나라 문왕의 시대에는 이미 이씨라는 성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담이 나와서 주나라의 스승이 되었겠는가? 연대가 어긋나서 분명한 의거(依據)가 없다.
『포박자(抱朴子)』에 ‘주나라 문왕의 세상에 나왔다’ 하였고, 혜강(康)과 황보밀(皇甫謐)이 모두 ‘노자가 은(殷)나라 말기에 나왔다 한 것은 대개 도교의 거짓된 글로서 국전(國典)에 실린 것이 아니다’고 지적하였다.”

⑸ 외적인 다섯 번째 다른 점
【註】노군은 주나라 문왕의 시대에 나왔으며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난 것이 5백여 년이다.
석가모니는 오랑캐 나라의 때에 응하여 나왔으며 한 번 멸하고 한 번 생하여 수명이 오직 80세였다.
내적인 다섯 번째 깨우침
【註】노자의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난 것이 이미 분명한 근거가 없다. 가령 5백여 세를 살았다 하여도 거북과 따오기의 수명에는 부끄럽다.
그런데 법왕(法王)은 한 번 멸하고 한 번 생하는데 미진수(微塵數)와 같이 많은 모습을 보였고, 80세를 사시는 동안에 항하(恒河)의 모래같이 많은 대중을 열어 주셨다.
보살이 말하였다.
“여러 역사의 정전(正典)을 검사하여 보니 노자가 세 번 숨고 세 번 나타나서 출몰하였다는 글이 없다. 오직 장긍(臧兢)과 제조(諸操) 등이 지은 『노의례(老義例)』에 ‘노자가 공자를 위하여 인의예악(仁義禮樂)의 근본을 설한 것이 제1의 때이고, 주나라 난왕(赧王) 때에 1천 집이 질병을 앓을 적에 노자가 1백80가지의 계와 아울러 『태평경(太平經)』 1백70편을 준 것이 제2의 때이고, 한(漢)나라 안제(安帝) 때에 이르러 장천사(張天師)에게 정일 명위(正一明威)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때에 스스로 주나라 주사(柱史)라고 일컬었으며 태상이 보내셨다고 한 것이 제3의 때이다.
대저 형체에 응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데는 반드시 인연 있음을 의뢰하고 교화를 권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데는 도중(徒衆)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동안 전혀 제자가 없었는가? 노자가 세 번 나오고 세 번 숨었다 하나 문인들이 학문을 품수하여 친히 받듦을 보지 못하였으니 아득하기가 은하수와 같아서 오유(烏有)의 말이 거리에 공연히 전하여졌다.
주나라에 있을 적에 열가(劣駕)와 작은 수레를 탔으며 수염을 드리우고 머리털은 희었으며 한나라에 와서는 소고(蕭鼓)와 운화(雲華)와 우의(羽儀)가 공중으로부터 떴다. 천보(千寶)의 『수신(搜神)』에도 아직 그러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제해(齊諧)의 『이기(異記)』에도 이러한 영험을 싣지 않았으니 가슴을 어루만지고 심장을 논하여도 속이고 망령됨이 더욱 심하다.”

⑹ 외적인 여섯 번째 다른 점
【註】노군이 세상에 내려온 것은 처음 주나라 문왕의 때로부터 공자의 때에까지 이르렀다.
석가모니의 하생(下生)은 정반왕(淨飯王)의 가문에서 비롯된 것이니 우리 주나라 장왕(莊王) 때에 해당한다.
내적인 여섯 번째 깨우침
【註】가섭(迦葉)이 난 것이 주나라 환왕(桓王) 정묘년이고 죽은 것이 주나라 경왕(景王) 임오년이어서 비록 공자의 때에까지 이르렀다 하나 문왕의 세상에 나지는 않았다.
부처님[調御]의 탄생은 주나라 소왕(昭王) 갑인년이고 돌아가신 것은 주나라 목왕(穆王) 임신년이다. 이는 정반왕의 아들로서였고 본래 장왕의 이전에 나신 것이다.
보살이 말하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이르러서 노담을 보고 예를 물었다는 것은 『사기』에는 모두 나타나 있으나, 문왕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책으로 징험할 수 없다. 주나라 말기에 나왔음은 그 일을 찾아볼 수 있으나 주나라 초기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글에 실려 있지 않았다.
또한 『주례(周禮)』의 관제를 검사하여 보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세상에는 모두 주사(柱史)와 장사(藏史)의 이름이 없다. 이런즉 이는 정품(正品)에는 빠진 조목으로서 주나라 말기의 말단 관리라 하겠다.”

⑺ 외적인 일곱 번째 다른 점
【註】노군은 처음에는 주나라에서 태어났고 만년에는 유사(流沙) 지방으로 갔기에 그가 죽은 곳을 헤아리지 못하고 방소(方所)를 알 수 없다.
석가모니는 서역 나라에서 태어났고 저 발제하(跋提河)에서 돌아가셨기에 제자들이 가슴을 치고 여러 오랑캐들이 크게 절규하였다.
내적인 일곱 번째 깨우침
【註】노자는 뇌향(賴鄕)에서 나고 괴리(槐里)에 장사지냈다. 진시(秦矢)가 조문한 일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결박을 면하고 형체를 숨겼다는 것을 꾸짖었다.
석가모니[瞿曇]는 왕궁에서 태어났고 곡수(鵠樹)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법이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중국에 전하여져서 은밀하게 난대(蘭臺)의 서고에 있다.
보살이 말하였다.
“『장자』 내편(內篇)에 ‘노담이 죽음에 진시가 조문할 적에 세 번 소리 내어 곡하고 나오니 제자가 괴상하게 여겨 ≺부자(夫子)의 무리가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진일은 ≺전번에 내가 들어가서 보니, 젊은이가 곡하기를 마치 자신의 아비가 죽었을 적에 하듯이 하였고, 늙은이가 곡하기를 마치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적에 하듯이 하였다. 옛날에 이르기를 그러한 것을 둔천(遁天)의 형체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그러한 사람으로 여겼더니, 지금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둔(遁)이라 함은 숨는다는 뜻이요, 천(天)이라 함은 결박됨을 면한다는 뜻이요, 형체라 함은 몸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노자를 결박을 면하고 형체를 숨긴 신선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아첨하고 왜곡하여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였음을 슬퍼한다. 그러기에 죽었는데도 내가 친구로 여기지 않음을 면하지 못한다.”

⑻ 외적인 여덟 번째 다른 점
【註】노자는 다섯[五]을 밟아 열[十]을 잡으며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모가 났으며 쌍주(雙柱)ㆍ참루(參漏)ㆍ일각월현(日角月懸)1)의 모습이니, 이는 중국 성인의 모습이다.
석가모니는 코는 금정(金挺)과 같고 눈이 정성(井星)과 같으며 눈동자가 푸른 연꽃과 같고 머리에 나발(螺髮)이 났으니 이는 서역 부처님의 모습이다.
내적인 여덟 번째 깨우침
【註】노자는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모가 났으니 이는 장자(長者)의 형체이다. 그러나 천위(天位)의 다섯을 밟고 지위(地位)의 열을 잡았다는 것은 아직 성인의 모습이 아니다.
바가비(婆伽婆)는 해를 모으고 금을 융합한 빛이 있으니 이미 희유(希有)함을 드러냈으며, 만자(萬字)와 1천 폭의 기특함은 참으로 성인의 모습이라 하겠다.
보살이 말하였다.
“『노자중태등경(老子中胎等經)』에 ‘노담은 누런빛이요, 이마가 넓고 귀가 길며 눈이 크고 이가 드물며 입술이 두터우며 손에는 십자(十字)의 글을 잡았고 발로는 음양의 이(二)와 오행의 오(五)의 그림을 밟았다’ 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특이한 모습일 뿐이고 성인의 기이한 자세는 아니다.
전기에 모두 ‘노자는 코가 우뚝 솟았고 머리가 성글며 입이 뾰족하고 높으며 이가 드물고 눈은 곁눈질을 하고 귀가 둥글고 머리털은 푸르고 검은 색이며 입술은 두텁고 귀는 길다’ 하였으니, 그의 모양이 이와 같을 뿐이니 어찌 부처님께 견주겠는가?
부처님은 몸의 길이가 1장 6척(尺)이고 방정하여서 기울지 않았으며 원광(圓光)이 일곱 자로서 모든 깊은 명부세계를 비추고 정수리에는 육계(肉髻)가 있으며 머리털은 감청색(紺靑色)이고 귀를 덮었고 귓불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밝음을 열었으며 뺨은 사자와 같은 모양이고 칠합상(七合相)이 있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얇은 막이 있으며 입에는 40개의 이가 모나고 희며 가지런하고 평평하고 혀는 능히 얼굴을 덮었으며 연꽃과 잎의 형체이고 손은 안팎으로 쥐어서 손바닥 무늬가 다 이루어졌다. 말은 우레가 치는 듯하며 여덟 가지 음성이고 가슴 위에는 만자(萬字)가 있고 발에는 1천 바퀴가 둘러 있으며 빛은 자마금색(紫磨金色)이어서 상호(相好)를 이름하기 어렵다. 서른두 가지의 모습과 80가지의 좋은 상서를 갖추었으며, 하나의 광명을 놓아 지옥의 괴로움을 쉬게 하고 하나의 법을 연설하여 고통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여러 경전에 모두 나열되어서 번거롭게 자세히 가리킬 수 없다.”

⑼ 외적인 아홉 번째 다른 점
【註】노자가 가르침을 시설하니 위의가 공경되고 사양하여서 스스로 중국에 의지한다.
석가모니께서 법을 제정하시니 위의와 용모가 공경ㆍ정숙하여서 인도는 물론이요 외국까지 따른다.
내적인 아홉 번째 깨우침
【註】노자는 세속 사람으로서 벼슬이 겨우 말품(末品)이었으며 옷 입고 갓 쓰고 절하고 복종하며 스스로 조정의 법도를 따랐다.
석가모니는 성스러운 임금으로서 도가 세속과 어긋나서 복장과 모습과 위의가 보통 제도와는 달랐다.
보살이 말하였다.
“옛적에 단양(丹陽)의 여구여(余玖與)가 『명진론(明眞論)』 19편을 지어서 도사들이 거짓되고 허망한 데서 나왔다고 반박하였음은 저 논에 자세히 나와 있다. 말하자면 건갈(巾褐)의 복장은 바로 옛날 유교(儒敎)와 묵교(墨敎)에서 입던 것이다.
옛적 5제(帝)의 녹건(鹿巾)과 허유(許由)의 피관(皮冠)은 모두 세속의 복장이다. 갈(褐)은 몸의 길이가 3장 6척으로서 3백60촌(寸)이니, 1년이 36순(旬)임을 상징한 것이다. 혹은 1년이 3백60일임을 상징한 것이다. 갈(褐)의 앞에 2대(帶)가 있으니, 음(陰)과 양(陽)을 본받은 것이다. 양(兩)은 건(巾)의 양각(兩角)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양의를 본받은 것이다. 그런데 여씨(余氏)는 또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두 왕조는 하(夏)나라의 10월로 연초(年初)를 삼았다. 그런데 분도(分度)의 영축(盈縮)과 역운(曆運)의 절제(折除)에 대하여는 어찌해서 3백60이라는 수가 나왔는가? 그리고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이러한 복장을 입지 않았다. 찾아보니 황제(黃帝)가 황인(皇人) 9진(眞)의 영(靈)을 만나고, 또한 제곡(帝嚳)으로부터 하나라 우(禹)임금에 이르기까지 도산(塗山)과 종산(鍾山) 두 산에 숨겨진 책을 다 찾아봐도 이러한 복장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근거가 없었다’ 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주나라에 적작(赤雀)의 징조가 있었고 또 단서(丹書)의 상서를 감득(感得)하였기에 이미 화덕(火德)에 부합하여 대대로 붉은 옷을 입었다. 그런데 노자는 주나라 사람이고 또 말단 관리에 있었으니 갓 쓰고 신발을 신고 절하고 복종하며 스스로 내려오는 제도를 받들어서 곧 치두(治頭)라고 하였으니, 본 이름이 귀졸(鬼卒)이었다. 그러니 누런 수건과 붉은 부록(符錄)은 노자를 본받은 것이 아니고 물에 주문을 읽고 부적을 행하는 것은 장씨(張氏)를 직접 스승으로 삼은 것이어서 도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기풍을 본받아서 익힌 것인가?”

⑽외적인 열 번째 다른 점
【註】노자의 교는 효도와 사랑을 회복시키는 것을 덕의 근본으로 삼는다.
석가모니의 법은 친척(親戚)을 버리는 것을 행의 우선으로 삼는다.
내적인 열 번째 깨우침
【註】노자는 난폭하고 방자함을 가르쳐서 두 부모를 죽이는 것으로 행의 근본을 삼는다.
석가모니는 어질고 자비한 것을 가르쳐서 4생(生)을 제도하는 것으로써 덕의 근본을 삼는다.
보살이 말하였다.
“그대의 『화호경(化胡經)』에서는 ‘윤희가 노담을 따르고자 하니, 노담이 ≺만일 지극한 마음이 있어서 나를 따라 떠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대의 부모와 처자 일곱 사람의 머리를 베어 와야 나를 따라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희가 곧 지극한 마음이었기에 문득 스스로 부모 등의 일곱 명의 머리를 베어서 그 머리를 가지고 노담의 앞에 이르자 문득 일곱 마리의 돼지 머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의 도를 따르는 것은 행(行)이요, 온화한 기운을 상하지 않는 것은 효도이다. 그러기에 정란(丁蘭)이란 자는 썩은 나무에 감통(感通)하였으며 동영(董永)의 효는 천녀에게까지 이르렀다. 금수(禽獸)도 오히려 어머니와 자식이 있어서 어버이를 아는데, 하물며 노담과 윤희는 도를 천하에 행한다면서 그의 부모의 목을 베었으니 어찌 효도라 하겠으며, 그의 아내와 자식을 죽였으니 어찌 사랑[慈]이라 이르겠는가?”

2) 내적인 열 가지 깨우침으로 외적인 열 가지 다른 점에 대한 대답
첫째, 내적으로 좇아 나는 데 뛰어남과 열등함이 있음
둘째, 교를 세움에 얕고 깊음이 있음
셋째, 덕과 지위에 높고 낮음이 있음
넷째, 교화하는 인연에 넓고 좁음이 있음
다섯째, 오래 살고 일찍 죽음에 늘어나고 빠름이 있음
여섯째, 화거(化去)하신 행적에 앞과 뒤가 있음
일곱째, 옮기고 사퇴(謝退)함에 나타남과 어두움이 있음
여덟째, 상호(相好)에 적음과 많음이 있음
아홉째, 위의에 같고 다름이 있음
열째, 법문에 돈(頓)과 점(漸)이 있음

열 가지 다른 점에 대답하는 서문
대저 초란(椒蘭)과 포사(鮑肆)에 익숙해지면 이에 가까이 따르게 되고 양문(陽文)과 돈흡(敦洽)을 궁구하게 사랑하면 그의 곡진한 뜻을 반연하게 된다. 그러기에 함지(咸池)의 옥영(玉英)도 묵적(墨翟)에게는 소리가 아니라는 논박(論駁)이 있었고, 순황(淳皇)과 예후(睿后)에게도 전파(田巴)는 성인을 헐뜯는 말이 있었으니, 대개 그것이 법도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기린과 사슴은 바탕이 달라도 노(魯)나라의 풍속은 그의 얼굴을 동일하게 보고, 사슴과 말은 형체가 달라도 진(秦)나라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한가지로 여기니, 대개 느낌의 변함이 이에 이르거니 하물며 유유(悠悠)한 자이겠는가?
그러기에 중경(仲卿)이 불교와 도교의 우열(優劣)을 진술한 까닭이 있다. 내가 그를 불쌍하게 여겨 뒤의 논(論)에 모두 다 적는다. 대답한 하나하나의 조건은 위의 글에서 적은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⑴ 외적인 측면에서 태어난 것이 왼쪽과 오른쪽의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성인의 자취를 응하심은 범부들의 태어남과 달라서 혹은 용과 코끼리를 타고 와서 태(胎)에 처하고 잠깐 옆구리를 열어서 세상에 출현한다. 그러기에 비록 다시 두 기운과는 관계없으나 두 어버이를 빌려 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왼쪽 옆구리로 남과 오른쪽 옆구리로 나는 것의 우열이 다르다 함이 첫 번째이다.”
내적으로 좇아 나는 데 뛰어남과 열등함이 있음노자의 어머니는 뇌향(賴鄕)의 평씨(平氏)인데 노자가 와서 바탕을 위탁하였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摩耶)부인은 가유라위(迦維羅衛) 임금의 왕후로서 석가모니가 그를 인하여 세상에 내려왔다.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것은 융적(戎狄)들이 높이 숭상하는 것이요, 오른쪽으로 명하는 것은 중국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춘추(春秋)』에 ‘가경(家卿)에 명(命)이 없고 개경(介卿)에 있는 것은 또한 왼쪽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며, 『사기』에 ‘인상여(藺相如)의 공이 컸기 때문에 지위가 염파(廉頗)보다 오른쪽에 있었는데, 염파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하였으며, 또 ‘장의(張儀)는 정승이 되어서 진(秦)나라를 오른쪽으로 하고 위(魏)나라를 왼쪽으로 하였으며, 서수(犀首)는 한(韓)나라를 오른쪽으로 하고 위나라를 왼쪽으로 하였으니, 대개 왼쪽을 편치 못하게 여긴 것이다’ 하였고, 『예기』에 ‘좌도(左道)가 군중을 어지럽히기에 죽였다’ 하였으니, 이들이 다 오른쪽을 우수하게 보고 왼쪽을 하열하게 본 것이 아니겠는가?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노자는 초(楚)나라의 상(相) 사람이다. 와수(渦水)의 남쪽에 집을 두고 살았으며 상종자(常樅子)를 스승으로 섬겼기에 상종자가 병이 들자 노자가 가서 병을 위문하였다’ 하였고, 혜강(嵆康)은 ‘노자는 연자(涓子)를 좇아 아홉 신선의 술법을 배웠다’ 하였으며, 태사공(太史公) 등의 여러 서적을 검사하여 보니 거기에 노자가 왼쪽 옆구리를 가르고 나왔다는 말이 없다. 이미 정사(正史)에 없었으면 다 이것이 거짓말이어서 그대로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징험하여 아는 것은 창을 휘두르고 문한(文翰)을 잡는 것이 대개 문과 무의 먼저이고 5기(氣)와 3광(光)은 참으로 음과 양의 우두머리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또한 사람들의 사용을 도와주었다고 하겠다. 장릉(張陵)의 좌도(左道)는 참으로 천상(天常)을 거스른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는 무연(無緣)의 자비를 일으켜 유기(有機)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그의 행적을 말하면 행은 3아승기에 차고 상호는 1백 겁에 원만하였으며, 신(神)이 내려올 적에 옥 코끼리를 타고 햇빛을 가리며 자마금색(紫磨金色)의 모양으로 탄생하셨다. 서른두 가지 상서로움의 아름다운 징조가 지부(地府)에서 열렸으며 18범천(梵天)의 상서로움이 천궁(天宮)을 놀라게 하였으며 신령스러운 모습이 시방에 두루하였고 신기한 광채가 팔방[極]에 나타났다.
그의 근본을 진술하면 오랫동안 둥글고 밝음을 증득하였기에 미진수와 항하의 모래로도 그의 수명을 계산할 수 없고 일찍이 적조(寂照)함에 올랐기에 허공으로 그의 체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오직 가지를 휘어잡고서 거룩한 상서라 하겠으며 흰 머리를 징험하여 상서로움을 본받겠는가?
이는 마치 형광(螢光)과 용촉(龍燭)이 빛을 다투는 격이요 어목(魚目)과 사주(蛇珠)가 함께 빛을 다투는 격이니 도교가 용렬한 것의 첫째이다.”

⑵ 외적인 측면에서 교문(敎門)의 생멸(生滅)이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불교와 도교가 다 같이 생멸이 없음을 말하니 그 이치는 같으나 세상을 인도하여 범부들을 이끄는 데는 차이가 있다. 다만 생(生)한다는 것은 모두가 기뻐하는 것이요, 멸(滅)한다는 것은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의 길은 얻기 어려우니 반드시 닦는 공덕을 기다려야 하고, 멸하는 법은 구하기 쉬우니 어찌 물어서 배우는 수고를 하겠는가? 이러므로 도교에서 말하는 대로 신(神)을 솟아오르게 하고 그림자를 타는 데는 스스로 적겁(積劫)에 몸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기가 다하고 형체가 죽으면 진실로 마땅히 일시에 신이 가야 한다. 이는 교문의 다름의 두 번째인 것이다.”
내적으로 교를 세움에 얕고 깊음이 있음노자의 가르침은 하나를 안고 어리석음을 지키며 형체를 버리고 지혜를 멸하여야 비로소 무위(無爲)에 나아간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널리 두루하고 원만하게 닦아서 여러 덕을 갖춘 뒤에 묘각(妙覺)을 말하였다.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대저 몸을 멸하는 것은 큰 근심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지혜를 끊는 것은 길이 수고함을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령(生靈)들을 달린 사마귀같이 의논하고 성품을 왕락(王樂)에서 없애려는 것이 대개 노자와 장자의 말이다. 또는 면면(綿綿)하게 항상 머무르니 고황(古皇)이 곧 죽지 않고 끝마치지 아니함이요, 승승(繩繩)하여 이름이 없으니 노자가 곧 다시 물건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그러나 항상 있다는 것은 길이 없다는 일컬음이 아니요, 물건이 없다는 것은 어찌 장생(長生)의 교화이겠는가?
다시 그의 깊고 얕음을 밝히겠다. 만일 약함을 보전하고 암컷을 지키는 글과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는 논에 이르러서는 덧없는 인생이 한량이 있음을 살피고 지혜의 물은 가없음을 탄식하였다. 그래서 그 크기를 말하면 구역 가운데 국한되어 있으며 도균(陶鈞)하여도 성품의 분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대개 그의 뜻이다.
그러나 대각(大覺)께서는 다함없는 인연을 여시고 원극(圓極)의 비춤을 뛰어나서 미미(微微)함을 헤아리면 절소(絶鄛)에 다하고 이치를 궁구하면 방소가 없음에 공재(控在)하여서 아름다운 기운이 합하여 함께 어울리고 자금색의 몸이 태허(太虛)와 더불어 견줄 만큼 튼튼하며 그 양을 말하면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이 개미집과는 높이가 다르고, 큰 바다와 조그만 우물물의 그 깊이가 다른 것과 같다. 그러니 도교가 하열함의 두 번째이다.”

⑶ 외적인 측면에서 방위의 동ㆍ서가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동쪽과 서쪽의 두 방위는 스스로 음과 양의 구별이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의 두 위치는 문득 인(仁)과 의(義)의 다름을 이루는 것이다. 인은 오직 길이 착한 것이요, 양은 또 생과 통하며, 의는 마름하여 이루어짐을 주관하고, 음은 숙살(肅殺)함을 논한다. 그러기에 두 기운이 교(敎)로 나타날 적에는 음이 양만 같지 못한 것이요, 다섯 덕으로 말하면 인은 심원하고 의는 천근(淺近)한 것이니, 이는 방위의 다름의 세 번째이다.”
【註】탄(彈)이 말하였다.
“건(乾)은 양이 되고 아버지가 되며 위치는 서북이고, 곤(坤)은 음이 되고 어머니가 되면서 서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있으면 성음(盛陰)의 곳이니 그러기에 중남(中男)의 위치가 되는 것이요, 남쪽에 있으면 성양(盛陽)의 땅이니 그러기에 거꾸로 중녀(中女)의 거처가 된다. 남자와 여자가 이미 일정한 방위가 없으며 음과 양이 항상한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목(木)은 토(土)를 대적[賊]하여서 기(己)로써 갑(甲)의 아내로 삼는다. 금(金)은 목(木)을 이기므로 을(乙)로써 경(庚)의 아내를 삼는다. 건(乾)은 이미 지위가 높기에 이에 서북쪽에 있게 되고 진(震)은 능히 나와서 임금이 된다. 그러기에 다시 동쪽에 있게 된다.
예(禮)의 자리도 만일 남북 쪽에 깔면 곧 서쪽으로써 위가 되는 것이니 건의 높음에 순응함을 말한다. 그리고 동서쪽으로 벌리면 곧 남쪽이 위가 되니 그것은 양이 성함을 따른 것이다. 우열함과 열등함이 스스로 나타난다 함이 이를 이름이겠다.”

내적인 측면에서 덕의 지위가 높고 낮음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 말하였다.
“대저 금(金)이 지아비고 목(木)이 아내이니 음과 양을 뉘라서 영원히 잡겠으며, 이(离)가 남쪽이요, 감(坎)이 북쪽이니 남자와 여자가 일정한 방소가 없다. 그러기에 자방(子方)과 오방(午方)의 동쪽이 양이 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쪽에서 남을 취한 것이요, 자방과 오방의 서쪽이 음이 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쪽에서 늙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곧 생(生)과 노(老)로써 음과 양을 판정한 것이요, 높고 낮음으로써 뛰어나고 용렬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가령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쪽에 있다 해서 응당 자식을 낮게 보아서는 안 되고 남자와 여자가 동쪽에 있다 해서 어찌 감히 아버지를 높이리오.
인(仁)은 의(義)가 아니면 이루지 못하고 의는 인이 아니면 기르지 못한다. 그러기에 아들이 동쪽에 있는 것은 인이요, 아버지가 서쪽에 있는 것은 의이니 곳을 따라 기준을 세운 것이지만 큰 방소에는 미혹하지 말 것이다. 진실로 나는 곳을 국집하여 판정하고 봉역(封域)에 얽매여 제한한다면 또한 마땅히 서강(西羌)에서 큰 우임금이 나와야 하니, 인범(仁汎)의 덕이 갑작스럽게 비게 되고 동이(東夷)에서 문왕이 나와야 하니 재성(裁成)의 가르침이 영원히 빠질 것이다.
황하(黃河)를 마시고 한수(漢水)를 들이는 것은 추애(湫隘)의 더러운 곳이 아닐 것이요, 위수(渭水)에 뜨고 경수(涇水)를 의거하면 제황(帝皇)의 신택(神宅)이 없을 것이다.앞에서는 삿된 것을 꺾고 다음에는 바름을 감탄한 것이다.
그런데 대저 석가모니는 하늘 위와 땅의 아래에 개연(介然)히 그 높은 데 있으시고 삼계와 6도(道)에 뛰어나게 그의 묘함을 미루었다.
더구나 소승인 2승(乘)의 무리들과 대승의 마음인 5품(品)의 무리들이 비유하면 여러 별들이 북극성[北辰]에게, 두 손을 마주잡고 공경을 표하며 금산(金山)이 푸른 바다에 빛나는 것과 같아서 족히 사슴의 머리에 코끼리의 얼굴을 한 것들로 하여금 교항(矯抗)하는 마음을 굽히게 하고 6이(異)와 10선(仙)으로 하여금 복응(伏膺)의 예를 펴게 한다. 그러니 어찌 서갑(徐甲)을 용렬한 남자라고 꺾고 윤희(尹喜)를 관의 아전이라고 인도하는 데 그치겠는가? 이와 어금니의 사이에 품학(稟學)한다.
【註】『고사전』에 ‘상종자(常樅子)가 인하여 그 입을 벌리니 노자가 ≺이(齒)는 강하므로 망하고 혀는 부드러워서 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하니, 상종자가 ≺다하였구나. 이름을 장사(藏史)의 사이에 거두겠구나≻라고 하였다’ 하였다. 그러기에 도교가 용렬한 것의 세 번째이다.”

⑷ 외적인 측면에서 화(華)와 이(夷)에게 가서 교화함이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화(華)와 이(夷)는 예의가 높고 낮음에 격(隔)하였음은 저술에 전신(典信)이 있고, 변(邊)과 정(正)은 도의가 이기고 지는 데 어긋나는 것이 사책(史冊)에 있다. 그러기에 융적(戎狄)의 임금이 참람되게 왕을 일컬음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의 임금이 스스로 낮추어서 자(子)라고 하였다. 그러니 어찌 오랑캐의 미미한 장인(匠人)이 우리 천왕(天王)의 큰 스승을 필적하겠는가? 이것이 화와 이의 다름의 네 번째의 이유이다.”
내적으로 교화하는 인연에 넓음과 좁음이 있음노자는 구복(九服)에서 맑고 빈 교화의 주인이 되었다. 그래서 5천의 교장(敎章)을 말하였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삼계를 두루 아는 법의 임금이 되었다. 그래서 8만 가지의 묘한 법장(法藏)을 열었다.
내적으로 깨우쳐 말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도덕경(道德經)』의 서문에 ‘노자가 도를 닦아 스스로 숨어서 무명(無名)에 힘썼기에 주(周)나라가 쇠하자 함곡관을 나가서 두 편의 가르침을 지었다’ 하였다. 그러나 주서(周書)의 전모(典謨)에는 노자가 지은 것이 없다.
조사하여 보니 『이교론(二敎論)』 등에 ‘5천의 글은 용성(容成)이 말한 것인데 노자가 윤희를 위하여 말하였으니 대개 기술(記述)하고 창작(創作)은 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또 ‘노자의 직위가 오직 장사(藏史)로서 지위가 아형(阿衡)이 아니니 융성한 주나라의 스승이라 함은 장차 없음이 아니겠는가?’ 하였다.앞의 것은 삿됨을 꺾은 것이요, 뒤의 것은 바름을 찬탄한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가유라위국에 태어나셔서 바탕을 왕궁에 의탁하셨다. 지혜는 실로 생이지지(生而知之)요, 도는 오직 두루 깨달으셨다. 그래서 혜명(惠明)을 백억(百億) 세계에 연설하시고 법운(法雲)을 대천(大千) 세계에 펴셨으니 신령스러운 은택이 시방세계에 두루 하고 신기하신 교화가 4표(表)에 크셨다.
높은 벼랑과 높은 벽처럼 많은 경전과 용이 살고 코끼리가 짊어진 경문이 여기에 가득 찼기에 비록 상홍양(桑弘羊)과 같은 계산 잘하는 기술로도 그 작은 겨자만큼도 기록하지 못할 것이요, 추연(鄒衍)과 같이 하늘을 말하는 의론으로도 그 한 방울도 의론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노자의 80의 장전(章典)과 5천(千)의 글만이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그대가 한 길 되는 담을 엿보지 못하여서 무숙(武叔)의 헐뜯음이 있게 되니 또한 다시 해와 달의 잘못이라 하겠는가? 다만 그의 알지 못함을 생각할 뿐이다. 그러기에 도교가 하열하다는 네 번째의 이유이다.”

⑸ 외적인 측면에서 태어남에 오래 살고 일찍 죽음이 있는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노자는 도가 환중(環中)에 계합하여 허공과 더불어 양(量)이 같으며 신(神)이 상(象)의 밖으로 초월하기에 변화를 따르면서 다함이 없다. 그러한 까닭에 수명이 범부와 같지 않고 숨고 나타남이 거연(居然)히 세속과 다르다.
석가모니는 생애가 한정이 있고 수명이 기한을 재촉하며 한 번 멸하고서 다시 살지 못하였다.
【註】탄(彈)은 ‘노자가 이미 장생(長生)한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에 어느 군현(郡縣)에 나서 있는가?’ 하였다. 석가모니의 수명이 80이라 하였는데 그와 비교하여 어찌 위태[危脆]롭다 하는가? 이는 오래 살고 일찍 죽음이 있는 다른 점 다섯 번째이다.”
내적으로 오래 살고 일찍 죽음에 느림과 빠름이 있다.노자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주나라 태사 담(聃)은 2백30여 년을 살았다’ 하였고, 석가모니에 대해서는 『법화경(法華經)』에 ‘5백만억 아승기와 미진수(微塵數)의 겁을 받았다’ 하였다.
내적으로 깨우쳐 말하였다.
『도덕경』의 서문에 ‘이씨를 품으니 이씨가 태에 있은 지 81년이라’ 하였다. 대개 태양의 명운이 1백60년이니 이씨가 태에 있은 지 이미 그 반이 지났다. 세 번 5백을 변하였다 하니, 이는 억지로 희귀하고 괴이함을 일컬음이 아니겠는가?
태사공(太史公)은 ‘초나라 노래자(老萊子)와 주나라 태사 담(聃)을 다 노자라고 하였다’고 했다. 혹은 2백30년이라고 하였고, 혹은 1백60세라고 하였다.
황보밀은 ‘제자(諸子)의 글에서 노자에 관하여 가까운 것은 믿기 어렵다. 오직 진시(秦矢)가 조문하였다 하니 노자가 죽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은 곡신(谷神)이 죽지 않았으니 이를 현빈(玄牝)이라 이른다고 한 것을 보고서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드디어 가탁(假託)하였다’ 하였다.
『신선전』에는 ‘울화자(鬱華子)ㆍ녹회자(錄回子)ㆍ부예자(傅豫子)ㆍ태성자(太成子)ㆍ적정자(赤精子)ㆍ무성자(武成子)ㆍ윤수자(尹壽子)ㆍ진행자(眞行子)ㆍ석사자(錫射子)ㆍ반색선생(反色先生) 등 이것이 모두 노자의 몸이라 한 것은 다 부스러기의 글만 본 것이요, 신선의 정경(正經)에는 나오지 않았으니 근거하여 쓴 것이 못된다.
대저 하늘과 땅이 있으면 도술(道術)이 있으니 도술의 선비들이 어느 때인들 잠시라도 없겠는가? 그러니 어찌 하나의 노자뿐이겠는가? 이는 다 늦게 배우는 무리들이 기이함을 좋아하고 이상함을 숭상하여 진실로 노자를 추숭(推嵩)하여 무한(無限)하게 한 것이요, 얕은 소견의 도사들이 노자로써 신기하고 이상하게 하여서 후세에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궤설(詭說)을 한 것이다’ 하였으니, 참답구나. 이 말이여, 영원히 거울삼을 만하다.
대저 묘한 즐거움은 3덕(德)을 의뢰하여서 이에 법신(法身)을 이루고 5분(分)의 세우는 것이 된다. 이로써 생과 멸을 한꺼번에 보내고 원각(圓覺)의 성품이 이에 드러나며 공(空)과 유(有)를 겸하여 융통(融通)하여서 영의(靈儀)의 묘함이 이에 있다. 그러기에 형체가 보고 들음의 밖을 뛰어넘고 이름이 정진(情塵)의 밖에서 쉬게 된다.
담연(湛然)하게 항상 즐거우니 문계(文系)가 아직 전표(詮表)하지 못한 것이요, 빼어나게 항상 밝으니 언상(言象)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 열매가 여러 번 익어도 연명(延命)하는 것이 아니요, 동쪽 바다와 뽕나무 밭이 자주 변하여도 영생(永生)하는 것이 아니다.
5운(雲)과 9전(轉)이 노끈에 새가 잠깐 머무는 것을 슬퍼하고 휘날리는 눈과 검은 서리가 틈을 지나는 노는 말에 비기어서 견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종규(終馗)는 대춘(大椿)처럼 오래감이 없고 하루살이는 거북과 고니[鵠]처럼 오래 사는 것이 드물다. 이것이 도교가 열등한 것의 다섯 번째이다.”

⑹ 외적인 측면에서 태어난 것이 앞뒤가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는 자가 말하였다.
“도교와 불교의 두 경전에 각기 출생에 대한 말이 있어서 혹은 겁마다 세상에 출현한다 하여 다투어 이보다 앞섬이 없다 하였고, 혹은 대(代)마다 출생한다 하여 오래 전에 출생하였음을 다투어 말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득하고 먼 것을 취하여 증득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기에 이제 전하는 역사에 의지하여 그가 출생한 시대를 정하겠다. 인륜(人倫)으로 말하면 늙은이가 높고 젊은이가 낮으며, 향당(鄕黨)으로 말하여도 형을 어른으로 하고 아우를 어린이로 하니, 이것이 먼저 나고 뒤에 남이 다른 것으로 여섯 번째이다.”

내적으로 교화한 행적에 먼저 하고 뒤에 함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융성한 주나라 초기이고 노자가 난 것은 주나라[姬季]의 말기이다. 그러므로 출생한 해로 봐도 2백여 년의 차이가 있고 임금의 세대로 보아도 10여 임금의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붉은 기운과 푸른 소의 이야기는 소왕(昭王)과 장왕(莊王)의 세대가 아닐 것이요, 신기한 광명과 흰 코끼리의 이야기는 환왕(桓王)과 경왕(景王)의 해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욱한 안개가 하늘을 어둡게 하고 혼탁한 흐름이 땅을 덮으며 문중(文仲)이 거꾸로 제사하였어도 공자는 그를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으며, 자금(子禽)이 성인을 헐뜯어도 자공[賜]이 그의 실언(失言)을 기롱하지 않았다. 말에 티가 있는 것은 갈아 없애기 어려워서 사마(駟馬)의 빠름도 혀를 따르지 못한다 함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다.먼저는 삿된 것을 꺾고 뒤에는 성인임을 찬탄하였다.
대저 행적을 낮추어서 범부에 응하였기에 바탕을 인간에 의지하여 태어나서 기틀을 밟아 중생을 교화하여 수명을 백 년을 함께하였다. 그러기에 과(果)가 인(因)의 닦음에 국한되었다. 신상(信相)이 이로 말미암아 의혹을 일으켰으며 연령은 짧으나 교화는 넓다. 미륵보살이 이 때문에 의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큰 멧부리는 저울추로 헤아릴 것이 아니니 수명이 오래되어 더욱 먼 데 비유한 것이요, 현묘한 허공은 길이나 자로서 판단할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겁(劫)은 멀어도 다함이 없음을 비긴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혈(蛇穴)에서 신선되기를 구하나 도리어 요절하고 예영(蜺纓)이 약을 기다렸으나 연령을 연장하지 못함과 같으리오. 대개 솟아오르는 뱁새가 붕새와 함께 우연히 높이 날고 노둔한 말이 기마(驥馬)와 더불어서 멀리 감을 다투는 격이다. 그러기에 도교의 열등함이 여섯 번째이다.”

⑺ 외적인 측면에서 신(神)을 옮김과 고요함에 돌아감이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노자는 처음 탄생하는 날부터 이미 범부들과 달랐으며 자취를 감출 때까지도 진실로 세상과 달랐다. 그러기에 서쪽으로 유사(流沙)에 갈 적에 길이 함곡관을 지나면서 푸른 소를 타고 경계를 나갔고 자색 기운이 하늘에 떠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었고 방역(方域)을 알지 못하였다.
석가모니는 사위국(舍衛國)에서 위독한 병을 앓았고 사라쌍수에서 운명을 고하였으며, 관을 불사르고 시체를 화장한 것이 도리어 오랑캐의 법대로 여서 기운이 다하고 신이 가는 등 모든 것이 범부와 다르지 않았으니, 이는 세상을 떠나가는 것에 다름이 있는 일곱 번째이다.”

내적으로 옮기고 사퇴하는 데 나타남과 숨음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도덕경』의 서문에 ‘노자는 이씨(李氏)의 태에 형체를 의탁하여서 사람에게 처음과 끝이 있는 뜻을 보였다’ 했으니, 이것이 어찌 생과 멸이 아니겠는가? 이는 장자(莊子)가 말한 ‘노담이 죽음에 진일이 조문했다’ 함이 이것이다. 그런데 노자가 날 적에는 뇌향(賴鄕)을 의지하였고 죽어서는 괴리(槐里)로 나갔다. 그런데도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 없다 하니 어찌 그리 장님인가?먼저는 삿된 것을 꺾고 뒤에는 바름을 찬탄하였다.
석가모니는 큰 자비로 교화함이 원만하고 덕이 원만하였기에 인연이 끝나고 기틀이 없어지니, 어진 배가 두 하수(河水:尼連禪河와 跋提河)에 빠지고 지혜의 해가 쌍수(雙樹)에 잠긴 것 같았다. 그 6천(天)과 8국(國)의 무리들과 법의 무리와 성인의 무리들이 또한 번개가 합한 듯이 바람처럼 달려서 구름처럼 모였다. 신령한 치아(齒牙)와 상서로운 뼈는 뛰어난 복을 다른 지방에까지 빛냈고 감색의 머리털과 붉은 손톱과 발톱은 신비한 공덕을 절대(絶代)에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알겠다. 오지 않고 가지 않으면서 널리 제도하는 덕이 훌륭하고, 나타나지 않고 어둡지 않으면서 성화(聲華)의 풍도가 성하다. 그러니 어찌 정호(鼎湖)2)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나 교산(嶠山)의 무덤이 홀로 있는 것이나 유사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여 부풍(扶風)의 무덤에 나무만 성한 것과 같으리오.
【註】『황람(皇覽)』에 ‘황제(黃帝)의 무덤은 교산에 있고 노자의 무덤은 부풍에 있다’ 하였다. 그러니 도교의 열등함의 일곱 번째이다.”

⑻ 외적인 측면에서 성현(聖賢)의 상호가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성인의 묘한 모습은 본래 범부와 다르다. 석가모니는 여덟 가지 채색과 두 개의 눈동자와 하수의 눈과 바다의 입과 용의 얼굴과 학의 걸음과 반우(反宇)와 기호(奇毫)3)의 형상이 있다. 심지어 고수머리와 푸른 눈동자는 오랑캐 사람의 본 모양이요, 코가 높고 눈이 깊은 것은 오랑캐들의 일상(日常)의 모습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 성인의 기특한 모양을 쓰는 것과 같겠는가? 만일 부처를 섬겨서 이러한 과보를 얻는다면 중국의 사녀(士女)들이 도리어 오랑캐의 모습이 될 것이니 이는 상호가 다른 것의 여덟 번째이다.”

내적으로 상호에 적고 많음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성인들의 모습과 바탕은 일정함이 없어서 방위를 따라 묘함을 나타낸다. 그 때문에 뱀의 몸과 용의 머리를 한 성인은 도가 상황(上皇)으로 화목하였으며, 눈동자가 둘이요, 젖이 넷인 임금은 덕이 중고(中古)에 빛났으며, 주공(周公)이 토하고 머리채를 잡은 것은 기린(麒麟)의 한 털과 같으며, 우(禹)임금의 귀가 어깨에 나란히 있음은 곤륜산의 한 조각 옥과 같아서 비교할 것이 못 된다.앞의 것은 의심을 풀고 뒤의 것은 바름을 찬탄한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법신(法身)이 여여(如如)한 것과 같아 방위가 없다. 그러기에 이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으며, 교화하는 몸은 물건을 응함을 말미암는다. 그러기에 묘한 바탕이 이름과 말에 관계되겠는가?
그러기에 백호(白毫)와 감색 눈동자의 빛남과 과일 같은 입술과 꽃 같은 눈의 고움과 만자(萬字)와 일천 거폭(車輻)의 모습과 해와 달의 채색의 뛰어남과 색이 아니면서 묘한 색의 얼굴과 모습을 여의면서 모습을 갖춘 몸은 박구(薄拘)는 있으면서 갖추지 못하였고 전륜성왕(轉輪聖王)은 갖추어 있지만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註】『살차경(薩遮經)』에서 ‘색(色)이 아니면서 성품을 내는 뛰어남과 여러 상호에서 백복(百福)의 뛰어남은 80가지의 묘한 뛰어남으로써 부처님 해의 몸을 장엄하였다’고 했다.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에서 4생(生) 중생들이 모두 전륜성왕을 이루고,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부처님의 한 털구멍의 공덕을 이루며, 거기서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하나의 좋은 공덕을 이루며, 거기서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상호 하나의 공덕을 이루며, 거기서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의 공덕을 이루며, 거기서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하나의 무견정상상(無見頂上相)의 공덕을 이루며, 거기서 다시 1백 배를 더하여야 비로소 하나의 범려성(梵蠡聲)의 공덕을 이루게 된다. 그러기에 아사타(阿私陀) 신선은 이를 한 번 보고서 스스로 슬퍼하여 쇠한 잎이 되고 또 나이 많음을 슬퍼하였으며, 범지(梵志)는 이를 보고서 느낌이 나서 신령스러운 꽃을 드물게 만남을 감탄하였다. 그러니 어찌 다섯을 밟고 열을 잡아서 기특함을 표하며 몽기(蒙倛)와 단치(斷菑)로서 이상함을 나타내는 데 그치겠는가?
【註】조식(曹植)의 『상론(相論)』에서 ‘공자의 얼굴은 몽기와 같으며 주공의 형체는 단치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니 어찌 양문(陽文)이 종멸(鬷蔑)과 고움을 견주겠으며 맹취(孟娶)가 농염(儱廉)과 고움을 다투겠는가? 그러므로 도교가 하열한 것이 여덟 번째이다.”

⑼ 외적인 측면에서 위의를 표시한 것이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노자의 가르침은 행동거지와 위의와 절하고 엎드리고 읍하고 사양하는 것과 검은 수건과 누런 갈옷[褐]과 홀(笏)을 가짐과 신을 끄는 법상(法象)의 표함이 분명하니 대개 중국의 옛 제도이다.
【註】‘도사는 원래 유교의 복식(服飾)을 입어서 세속 사람과 다르지 않았는데 주나라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횡피(橫披)가 있었다. 스물네 바늘을 자수하니 그것은 음과 양의 24기운에 응한 것으로서 사람의 뜻에서 나왔고 또한 전거가 없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가사(袈裟)가 왼쪽으로 걸리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으며 전 폭이 가로 된 치마요, 반 조각 기지(奇支)의 옷이며 머리를 깎고 정수리를 드러내며 개같이 거좌(踞坐)하고 여우같이 걸터앉으며 인륜에 참예하지 않으니 참으로 되놈의 풍속이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모양을 써서 우리의 위의에 필적하겠는가? 이것이 용복(容服)의 다른 아홉 번째이다.”

내적으로 위의에 같고 다름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도교에서 옥을 차고 금으로 웃옷을 하는 것은 땔나무를 하는 시골에서는 베풀 수가 없고 연꽃 옷과 혜초(蕙草)의 띠는 임금의 뜰을 밟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응기(應器)4)는 영묘(靈廟)의 진설하는 것이 아니요, 옷을 물들인 것은 조종(朝宗)의 복식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도를 타는 자는 혹은 기틀을 순응하여 물건에 법도가 되고, 덕을 의거하는 자는 혹은 시대를 바로잡고 세상을 가르친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고 문신(文身)을 하였어도 공자는 태백(太伯)이 착하다고 칭찬하였으며 보통을 반대하여 도에 합하였어도 당시의 사람들은 당체(棠棣)의 꽃을 아름답게 여겼다. 하물며 성품에 돌아와서 신(神)을 맑히고 범부를 막으며 성인의 지위를 밟으면서 그의 얼굴과 복장을 다르지 않게 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의복으로 하여금 복전(福田)을 상(像)하고 기량이 법과 같이 하여서 거문고가 귀를 매혹하지 않으며 붉은 빛과 자주빛이 눈을 현혹함이 없으며 가벼운 가죽 옷과 살찐 말도 그의 몸에 친압(親押)함이 없으며 세력의 다툼이 그의 마음을 놀라게 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경에서 ‘아라한(阿羅漢)은 진인(眞人)이다. 소리와 빛이 더럽히지 못하고 영화와 지위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할관(鶡冠)5)과 작변(雀弁)으로 도리어 얽매이고 스스로 결박하며 합치(磕齒)6)와 허기(噓氣)로서 도라고 일컫겠는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면 갈수록 멀어지고 배에다 표시를 하고 검을 찾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루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도교가 열등한 것의 아홉 번째이다.”

⑽ 외적인 측면에서 규모를 말한 역(逆)과 순(順)이 다른 점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노자는 모범을 지음이 오직 효성스럽고 오직 충성되며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제도함이 극히 자애롭다. 그 때문에 성교(聲敎)가 길이 전하여져서 뭇 임금들이 고치지 않고 현묘한 바람이 길이 미쳐서 만고(萬古)에 어긋남이 없다. 그러한 까닭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다스려서 항상 모범이 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의(義)를 버리고 어버이를 버려서 어질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하다. 아사세왕(阿闍世王)은 아버지를 죽였어도 도리어 죄가 없음을 얻었으며, 조달(調達)은 형을 쏘았어도 죄를 얻었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 이로써 범속(凡俗)을 제도하면 다시 긴 악이 될 것이요, 이로써 세상의 모범으로 삼으면 어찌 착함을 내리오. 이는 역과 순이 다른 열 번째이다.”

내적으로 법문에 점(漸)과 돈(頓)이 있음

내적으로 깨우쳐서 말하였다.
“의리는 곧 도덕의 낮은 것이요, 예의는 충성과 믿음이 엷은 데에서 생겨난다. 그러기에 세세한 어짊은 필부에게 기롱받았고, 큰 효도는 빠트리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흉한 일을 당하여 노래하고 웃는 것은 중국의 용모에 어긋나고 상(喪)을 임하여 물동이를 두드리는 것은 중국 풍속의 교훈이 아닌 것이다.원양(原壤)은 어머니가 죽자 관을 타고 노래하였는데, 공자가 제사를 도우면서 꾸짖지 않았으며, 자상(子桑)이 죽음에 자공(子貢)이 조문하였는데 네 사람이 서로 보고 웃었으며, 장자(莊子)는 아내가 죽음에 물동이를 치면서 노래하였다.
그러기에 효도로써 가르치는 것은 천하의 사람의 아비가 된 이를 공경함이요, 충성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천하의 사람의 임금이 된 이를 공경함이다. 그러니 교화가 1만 나라에 두루하는 것은 이에 명벽(明辟)의 지극한 어짊이요, 사해에 형법이 되는 것은 실로 성왕(聖王)의 큰 효도이다.
불경에 ‘식(識)의 체가 윤회하니 6취(趣)가 아버지와 어머니 아님이 없고 나고 죽음이 변역하니 삼계에서 뉘라서 원수와 친함을 가리겠는가?’ 하였으며, 또 ‘무명(無明)이 지혜의 눈을 덮으면 나고 죽음의 가운데 오고 가니, 가고 오면서 짓는 것이 많아서 서로서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며, 원수와 친한 이가 자주 아는 이가 되고, 아는 이가 자주 원수와 친함이 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사문(沙門)들이 세속을 버리고 진(眞)에 나가는 것은 서류(庶類)를 천속(天屬)에 고르게 함이요, 영화를 버리고 도에 나가는 것은 기운을 머금은 것[含氣]들을 자기 어버이[己親]와 같이하는 것이다.널리 그치는 마음을 행하는 것이 널리 친하는 뜻에 평등한 것이다.
또 도는 청허(淸虛)함을 주장하는데 그대는 은애(恩愛)를 중하게 여기고, 법은 평등을 주장하는데 그대는 원수와 친함을 가리니 어찌 미혹함이 아니겠는가?
형세가 다투어 어버이를 버리는 것은 글과 역사에 분명히 썼으니 제나라 환공(桓公)과 초나라 목공(穆公)이 그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면서 성인을 헐뜯으려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도교의 열등한 것이 열 번째이다.”

6. 내구잠편(內九箴篇)

1) 밖의 구미론(九迷論)에 대한 대답
첫째, 주나라 세상에는 기연(機緣)이 없다는 것
둘째,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여 세운다는 것
셋째, 위의와 기복(器服)에 대한 것
넷째, 밭가는 것을 버리고 분위(分衛)하는 것
다섯째, 가르침이 다스림의 근본이 되는 것
여섯째, 충성과 효도에 어긋나지 아니한 것
일곱째, 삼보에 번복이 없는 것
여덟째, 이방(異方)에 제도가 동일한 것
아홉째, 노자의 몸은 부처가 아닌 것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말은 화려한 언사를 숭상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노래는 맑은 소리를 숭상하지 않고 가락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불경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 여러 나라의 천자들이 널리 와서 모여 들었으며 혹은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두루 비추셨다.
다만 석가모니가 세상에 계실 때요, 곧 우리 주나라 왕조에 해당함은 여러 역사책에 실려 있어서 진실로 유루(遺漏)가 없다. 그런데도 주나라 임금이 저 파밀고원에 나갔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어찌 중화(中華)의 임금은 착함이 없어서 부처님 도량에 참예하지 못하고 변두리의 임금은 인연이 있어서 널리 법좌(法座)에 참석하였음이겠는가?
그리고 부처의 광명이 비치는 곳에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우리 중국은 무슨 죄로 치우치게 광명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없어서 홀로 은혜의 밖에 막혀 있어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였는가? 우러러 생각하니 부처님은 사사로움을 가리지 않는다.
【註】그대가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업(業)에 성인을 비방한 허물이 있음이니 어찌 신(神)을 원망하겠는가? 오직 스스로를 허물할 것이다.
구하는 마음으로 사실인 양 책망하는 것은 일이 어긋나고 말이 틀려서 망령되고 괴이함이 분명하니 이를 허위(虛僞)라고 일컬으나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림자를 쫓으며 소리를 듣고 짖어서 그래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첫째이다.”

⑴ 불교의 측면에서 주나라에서는 기연(機緣)이 없었음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순수한 해가 하늘에 솟았지만 눈이 먼 늙은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격렬한 천둥이 땅을 놀라게 하지만 귀먹은 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대개 기감(機感)이 끊어져서이다. 사나움을 지은 흉한 도척(盜跖)은 공자의 지혜로도 그의 마음은 막을 수 없었고, 분노에 찬 야인(野人)은 자공[賜]의 변재로도 그의 분노를 덜어 줄 수 없었으니, 이는 뜻과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註】『장자』에 ‘공자가 도척을 보니 도척이 도리어 공자를 책망하였기에 공자가 두려워서 뒷걸음 쳐서 돌아왔다’ 한다. 『유자(劉子)』에 ‘공자의 말이 야인의 곡식을 침노하니 야인이 성이 나서 그의 말을 못 가게 하였다. 공자가 자공을 시켜 즐겁게 풀어 주도록 하였으나 그 야인이 더욱 성을 내었기에 이에 말먹이는 사람을 보내 사죄하니 그 야인이 그제야 기뻐하였다’ 한다.
그러기에 도와 합해지면 1만 리의 먼 데까지 응하게 되고 형세가 어그러지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같이 멀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무시(無始)로 번뇌가 커지면 번뇌와 사랑이 푸른 바다만큼 깊어지고 유위(有爲)의 업이 넓어지면 티끌의 시달림이 큰 산과 같이 높음을 다투게 되어서 여러 뜻이 한꺼번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기에 점차적으로 인도해야지 하고 여러 행을 한꺼번에 닦지 못한다. 그러기에 제한된 분수로써 계책(計策)하는 것이 마치 하늘과 땅의 3화(化)가 비로소 자연에 합하는 것과 같다.
【註】『노자』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하였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두 번 변하여야 이에 지극한 도에 이른다. 마치 빽빽한 구름이 때맞춰 비를 인도하고, 굳은 얼음이 서리를 밟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으니 다 점차적으로 쌓음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3황(皇)이 거느려 교화하였다.
【註】『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에 ‘응성(應聲)보살은 복희(伏羲)가 되고, 길상(吉祥)보살은 여와(女媧)가 되었다’ 한다.
순수한 풍속의 초기에 있어서 세 성인이 말을 세웠다.
【註】『공적소문경(空寂所問經)』에서는 ‘가섭(迦葉)이 노자가 되고, 유동(儒童)이 공자가 되고, 광정(光淨)이 안회(顔回)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미 흐려진 말기에 일어나서 현묘하고 비어 충일(沖一)한 요지(要旨)는 황제(黃帝)와 노자가 그 말을 성하게 하였으며, 시(詩)와 서(書)와 예(禮)와 악(樂)의 글은 주공과 공자가 그 가르침을 높였다.
밝고 겸손하며 바탕을 지키는 것은 이에 성인으로 올라가는 섬돌과 사다리요, 3외(畏)7)
와 5상(常)은 사람과 하늘이 점차 말미암는 것이다. 대개 부처님의 이치에 가만히 부합되어서 바로 말하는 극치의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벙어리와 귀머거리에게 길을 물으면 방위를 몰라서 멀고 가까움을 궁구할 수 없고, 토끼와 말에게 나루를 물으면 건널 줄은 알아도 얕고 깊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를 인하여 은(殷)나라와 주나라 세상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마땅히 행하여지지 못하였다. 마치 더위가 심하여 해가 붉게 빛나면 동자가 눈을 바로하여 보지 못하며, 빠른 우레가 사납게 치면 겁쟁이가 귀를 펴서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하수와 연못이 솟아오르니 주나라 소왕(昭王)이 부처님의 탄생을 기뻐하셨으며, 구름과 무지개가 사방으로 변하니 주나라 목왕(穆王)이 성인의 죽음을 탄식하였다 한다.
【註】『주서이기(周書異記)』에 ‘주나라 소왕 34년 4월 8일에 강과 하수와 샘과 연못이 넘쳐흘렀으며, 주나라 목왕 52년 2월 15일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나무들이 꺾이고 하늘이 음산하고 구름이 검으며 흰 무지개의 괴변이 있었다’ 하였다.
이로 보면 어찌 능히 총하(蔥河)를 건너서 교화를 물으며 설령(雪嶺)을 넘어서 정성을 바치겠는가? 『정명경(淨名經)』에 ‘이는 눈먼 자의 허물이요, 해와 달의 잘못이 아니라’ 하였으니, 구멍을 뚫는 변을 다하고자 하나 그대의 혼돈의 성품을 상할까 두렵다. 그대가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먼 것의 첫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동산(銅山)8)이 무너짐에 낙종(洛鍾)이 응하고, 가회(葭灰)9)가 이지러짐에 월휘(月暈)가 생긴다 합니다. 범이 휘파람 부는데 바람이 나지 않고, 용이 올라가는데 구름이 일지 않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것에 부처의 힘이 가장 높으니 한 생각으로 마음을 운반하면 와서 응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범부의 속인들이 각기 재산을 기울여 다투어 탑과 사당을 지으며 구슬과 옥을 아끼지 않고 다투어 당우(堂宇)를 베풉니다.
혹은 진흙을 개고 전단나무를 조각하여 오랑캐 사람의 모습을 만들며, 금을 녹이고 비단을 짜서 오랑캐의 얼굴을 그리기도 합니다. 미묘함은 단청(丹靑)에 다하였고, 교묘함은 기궐(剞劂)에 다하였습니다. 한 번 절하고 한 번 예함에서 감통(感通)하기를 바랍니다.
오랑캐의 법이 남점(南漸)한 이래로 6백여 년이 되었지만 한 사람도 부처를 보았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랑캐의 사람들은 정례(頂禮)하여 곧 부처님을 감동케 하고, 중국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하여도 부처님[調御]을 만나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부처의 교화가 이곳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이는 곧 영험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속이고 헛되게 위력이 있다고 말하여도 세상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미혹함의 두 번째입니다.”

⑵ 불교의 측면에서 불상과 탑을 건조(建造)하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좌철(左徹)10)이 성인을 사모하여 상(像)을 조각하여 헌원(軒轅)의 임금께 절하였고, 구천(勾踐)은 현인(賢人)을 생각하여 금을 부어서 범여(范蠡)를 본떠 만들었으며, 정란(丁蘭)11)은 극히 효성스럽기에 조각으로 만들어 어버이 대신 섬겼으며, 안재(顔在)는 어진 것을 의뢰하여서 구슬을 캐어 성인을 그렸다. 그러기에 근심하고 기뻐함이 얼굴색에 나타나고 정성이 꿈에서나 깨어서나 통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다.
그 도리천(忉利天)에서 돌아오지 아니하니 우전왕(優塡王)이 이 때문에 나무에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하였으며, 견림(堅林)에서 그림자를 감추시니 아수타국(阿輸陀國)이 여기에서 금으로 부어 만들었다. 그래서 미묘한 모습을 단청에 의탁하였고 신령한 위의를 선옥(銑鋈)에 부쳤다. 그래서 혹은 진영(眞影)을 보고 자리를 피해 앉았고, 모습을 그림에 진영이 몸을 돌렸다.
【註】『감응전(感應傳)』에 ‘양주(楊州) 장간사(長干寺)에는 아육왕(阿育王)의 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사(模寫)하고자 하였으나 금빛이 손상될까 두려워서 그 절의 스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 상을 모사하려는 자가 이에 지극한 마음으로 원(願)을 발하기를 ≺만일 이 정성에 감동함이 있으시면 상이 몸을 돌려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빕니다≻ 하고, 이에 높은 누각을 자물쇠로 채우고 닫고 기도한 후 그 이튿날 아침에 높은 누각을 열어보니 상의 몸이 완전히 서쪽으로 향하였기에 그 절의 스님이 드디어 모사하기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신의 응감이 다함없음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상법(像法)이 동방으로 유전함으로부터 바른 교화가 남방으로 옮길 적에 꿈에 금인(金人)이 하수에 옥마(玉馬)를 띄우니 신비한 빛이 상수(湘水)에서 인도하고 상서로운 광채가 단계(檀溪)에서 발하였다.
【註】『감응전』에 ‘여릉(廬陵) 발몽사(發蒙寺)의 아육왕 상(像)의 기문(記文)에 ≺상의 몸이 여공의 삼곡(三曲)에서 나왔는데 상서로운 빛이 상주(湘州)의 소담(昭潭)에서 나와서 모두 광명을 놓아 벼랑과 언덕까지 비추었다 하고, 무창(武昌)의 단계사(檀溪寺)에는 상서로운 상이 몸소 단계에서 나왔고 광명이 물 위를 비추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장사(長沙)에서 해가 모은 듯한 자세를 표하였고, 여산(廬山)에는 융금(融金)의 바탕을 나타냈으니 그의 사적이 넓지만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간보(干寶)의 『수신(搜神)』과 임천(臨川)의 『선험(宣驗)』ㆍ『징응(徵應)』ㆍ『명상(冥祥)』ㆍ『유명록(幽明錄)』ㆍ『감응전(感應傳)』 등에는 한나라 명제(明帝)로부터 제나라와 양나라의 왕공(王公)과 수목(守牧)과 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와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 등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성인에 그윽히 감응하여서 눈으로 직접 신비한 광명을 본 자가 무릇 2백여 인이었다고 나와 있다.
만산(萬山)에서 부처님의 자취를 보고 호독(滬瀆)에서 광명을 띄운 것과 청대(淸臺)의 아래에서 만월(滿月) 같은 얼굴을 뵈옵고 옹문(雍門) 밖에서 상륜(相輪)의 그림자를 보며 남평(南平)이 상서로운 상의 감응함을 얻고, 문선제(文宣帝)가 성스러운 어금니의 꿈을 감득하였으며, 소후(蕭后)는 한 번 부어서 이루어졌는데 송황(宋皇)은 네 번 본을 떴어도 성취되지 못함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그 사례가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펼 수가 없다. 그러니 어찌 그대의 눈이 없으면서 저들의 영험 있음을 배척하겠는가?
그런데 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이르고, 도가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보리라고 이르며, 지혜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부처라고 일컬어서 이 중국말로써 저 인도 글을 번역하였으니, 저곳과 이곳에서 부처를 분명하게 믿겠다. 어찌하여 분명한가 하면, 부처라 함은 중국말로는 대각(大覺)이요, 보리라 함은 중국말로는 대도(大道)이고, 열반이라 함은 중국말로는 무위(無爲)이다. 그러니 그대가 종일토록 보리의 땅을 밟으면서 대도가 곧 보리의 다른 칭호임을 알지 못하는구나. 대각의 경계에서 형체를 받았으면서도 대각이 곧 부처의 번역된 이름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장주(莊周)가 ‘대각이 있은 뒤에 그의 대몽(大夢)을 알겠다’ 하였는데, 곽씨(郭氏)의 주석에 ‘각(覺)이라 함은 성인이다. 그래서 근심이 품에 있다고 말하는 자는 다 꿈이다’ 하였고, 또 ‘공자가 자유(子游)와 더불어 말을 잊고 신해(神解)하지 못하니 그러기에 대각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군자가 ‘공자의 말이 모두 지극하다’고 하였다.
열반은 고요하게 비추어서 식(識)으로써 알지 못하며 지혜로써 알지 못한다. 곧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행(心行)의 처소가 멸하였기에 말을 잊었다고 하였으며, 법신은 3점(點)12)과 4덕(德)의 이름과 말로 이루어졌지만 소연(蕭然)하여 누(累)가 없기에 해탈이라 일컬으니, 이는 신해하여서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공자는 비록 성인이지만 공덕을 멀리 부처에게 미룬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조사하여 보니 유향(劉向)의 옛날 두 기록에 ‘불경이 중국에 유전된 지 1백50년 뒤에 노자가 바야흐로 5천의 글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주나라와 노자가 모두 불경에서 본 것으로서 말과 가르침이 가끔씩 증험이 있음을 본 것이다.
공자가 ‘대저 역(易)이라 함은 무위(無爲)이고 무사(無思)이다.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으면서 감(感)하면 드디어 통한다’고 하였다. 이는 천하의 지신(至神)이 아니고서는 그 뉘라서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내가 이제 귀를 끌어다가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는 마땅히 쌓인 미혹을 버리고 뒤늦은 깨달음을 짊어질지어다. 지제(支提)의 만듦은 그의 유전이 오래다. 그러기에 봉(封)하고 심었다. 비간(比干)은 충성과 굳셈으로써 무덤을 나타냈기에 그 무덤을 깎지 말게 하여서 전계(展季)13)는 맑고 정숙함으로써 금롱(禁壟)하였고, 사민(四民)들은 10선(善)을 생각하였다. 멀고 먼 윤왕(輪王)의 은덕은 삼계에서 여섯 가지 신통을 높이었으니 이는 아라한의 덕을 드러내 밝힌 것이었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 ‘네 종류의 사람이 투바(偸婆)를 세우게 된다’고 하였다. 투바라 함은 중국말로는 무덤이요, 네 종류의 사람이라 함은 전륜성왕과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이다. 하물며 부처님은 지혜가 열 가지의 힘에 두루하고, 덕이 네 가지의 큰 서원에 가득 찼으며, 미묘한 말은 말을 잊는 데 계합하여서 교훈을 헤아릴 수 없는 데에 드리우고 크게 밝음은 비추지 않는 데까지 다하여서 이에 어두움이 없는 데를 비추신다.
그러기에 향탄(香炭)과 금병(金甁)14)의 전신(全身)이 여덟 나라에 두루하였으며, 광나(光螺)와 선패(鮮貝)의 산체(散體)가 시방에 두루하였다.
다섯 빛깔로 광채가 얽히어서 공중을 돌아 한나라 세상에 비추시고, 여덟 채색이 광채를 나누어 신응(神應)이 오나라 궁중에 나타났다.
그러기에 1백 거울의 신령한 감(龕)과 1천 꽃의 묘한 탑이 구름과 이슬을 손바닥으로 받들었고, 높은 바람에 방울소리 운치가 있으며, 붉은 기둥과 붉은 서까래는 허공의 경계에 멀리 떴으며, 날개 치는 곤계[鵾]와 발돋움하는 봉황은 멀리 허공에 접하여서 웅장하고 화려한 얼굴을 다하였으며 윤환(輪奐)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그러니 어찌 높은 산을 우러러 그치듯 하여 경행(景行)을 잊지 않고 높은 궁궐을 높이 표하여 큰 계책을 세울 뿐이겠는가? 난추(欄甃)15)의 말로써 창해(滄海)의 넓고 좁음을 기롱하지 말아야 하며, 유방(楡枋)16)의 지혜로써 곤륜산의 높고 낮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대가 이를 알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의 두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예의와 의리는 덕을 이루는 미묘한 가르침이요, 충성과 효도는 몸을 세우는 행실의 근본이어서 신하와 백성이 예의를 잃고서 그 나라가 있겠으며, 아들과 손자가 효도하지 못하고서 그 집이 서게 됨을 보지 못하였다.
이제 석가모니가 제정한 법도가 옷은 반드시 오랑캐의 복식과 같으면서 이는 곧 사람 가운데의 스승이라 하고, 입으로 오랑캐의 말을 외우면서 문득 세상의 귀한 분이라 하여서 무뢰(無賴)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를 인하여 패역(勃逆)하여서 아버지와 형의 위에 기거(箕踞)하면서 스스로 사문이라 부르고, 임금의 앞에서 오만하면서 이에 석가의 종족이라 일컬으니, 어질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함이 이미 집에서 나타났고, 즐거움이 없고 공손함이 없는 것이 다시 나라에 나타났다.
【註】『예기』에 ‘아들이 관(冠)을 쓰면 부친이 초제(醮祭)17)를 지내고 모친이 절을 한다’ 합니다. 그러니 하는 곳이 높아도 또한 예가 없고 효도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리되면 이는 곧 가문마다 올빼미와 원숭이 같은 아들18)을 낳을 것이요, 사람마다 승냥이와 이리 같은 아이를 기를 것이니 가슴을 어루만지고 심장을 논하여 참으로 아픈 일이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니 화(華)와 이(夷)를 어찌 가리겠으며, 오직 덕이 있는 이를 도우니 어찌 호(胡)와 한(漢)을 나누겠는가? 그러니 어찌 도교가 수건을 쓰고 착함을 닦아도 치우치게 뛰어난 복이 없을 것이요, 불교가 머리를 깎고 보시를 행한들 홀로 능히 과보를 감득하겠는가? 어질고 은혜로움이 어찌 머리를 깎는 데 있으며, 진(眞)을 지키는 것에 용모(容貌)를 허는 수고가 있어서 되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서 이를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의 세 번째이다.”

⑶ 불교의 측면에서 위의와 기복(器服)을 가르침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불교에서는 현묘한 성인이 법전(法典)을 만드실 적에 인(因)과 과(果)로써 종을 삼았으며, 유교에서는 소왕(素王)이 교훈을 펼 적에 이름[名]과 가르침[敎]으로써 근본을 삼았다. 이름과 가르침은 다스려서 이루는 데 있고, 인과 과는 도가 서기를 기약한다. 도를 세우는 데는 이미 애정(愛情)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 되고, 다스림을 이루는 데는 또한 충성과 효도가 앞선다. 두 뜻이 하늘처럼 다르니 어찌 같은 등급으로 말하겠는가?
사문(沙門)은 행실이 세속의 밖에 초월하고 마음이 진세(塵世)의 밖에 노닐어서 위의와 진취(進趣)는 법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용모와 복식과 응기(應器)는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들여 입는 것은 1만 바탕이 한가지로 돌아옴이요, 검은 옷을 입는 것은 여러 채색이 색깔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간이(簡易)한 것은 해탈(解脫)을 따름이요, 조(條)를 막은 것은 복전(福田)을 본뜬 것이요, 간편한 복장은 집노(執勞)가 있지 않음이요『예』에 ‘집(執)이라 함은 소매가 없는 옷이다’ 하였다. 소매가 없는 것은 울력에 편하게 함이다.
『논어』에 ‘평소에 입는 갖옷은 긴데, 오른쪽 소매를 짧게 한다’ 하였으니, 말하자면 일을 함에 있어서 편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성인의 제도가 까닭이 있어서이지 마침내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애정을 버리고 친척을 떠나는 것은 여러 성인을 우러르는 것이요, 소리와 빛을 꺾어버리는 것은 범행(梵行)을 따름이요, 수염과 머리를 깎아 없애는 것은 화려하게 다툼을 버리는 것이요, 얼굴을 구부리고 바탕을 정숙히 하는 것은 공경함을 잊지 아니함이요,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것은 몸과 목숨을 지탱함이요, 말에 숨기고 굽음이 없음은 간사함과 망령됨을 여읨이요, 소리를 온화하게 하고 기운을 즐겁게 하는 것은 다툼이 없는 데 들어감이요, 뱉고 들임이 안상(安詳)한 것은 사령(辭令)을 삼감이요, 세속의 귀한 이에게 굽히지 않음은 굳고 굳셈을 지킴이요, 맑고 비고 편안하고 조용한 것은 도의 성품을 따르는 것이요, 삿된 모양에 흔들리지 않음은 여덟 가지의 정사에 머무는 것이요, 얼굴을 바로하고 얼굴빛을 낮추는 것은 여러 병든 이를 불쌍하게 여김이요, 사람과 하늘이 높여 우러르는 것은 3업(業)을 청정히 함이요, 현묘함을 다하고 참됨에 극(極)한 것은 구경(究竟)을 취함이요, 어짊을 넓혀서 크게 제도하는 것은 또한 충성과 효도의 성함이다.
그런데 도사는 그러하지 않아서 도를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참됨에 물들지 않고, 집을 버린다고 이르면서 형체는 세속에 변하지 않으며, 둥근 갓을 쓰지만 현묘한 기상을 보는 것이 없으며, 모난 신을 신지만 지리(地理)의 밝음이 없으며, 남정(南鄭)은 한나라를 배반한 수건을 쓰고, 공기(公旗)는 집을 패망하게 하는 홀(笏)을 잡았으며, 도욱(道昱)은 송나라에 화가 되는 옷을 입었고, 손은(孫恩)은 진(晋)나라를 패하게 하던 치마를 끌어서 평상(平常)의 직업을 폐지하지 않고 용예(庸隸)의 역사를 하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세상을 친압(親押)하면서 충성과 효도의 예가 이지러지고 신선되기를 구하면서 고상한 풍도가 부족하였다. 마치 파리를 보고 흰 것이냐, 검은 것이냐 하는 이론이 있고, 박쥐를 보고 새냐 쥐냐 하는 기롱이 있는 것과 같으니, 대개 요사하고 의혹하는 무리들인데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이 세 번째이다.”
【註】『정법념처경』에 ‘비유하면 박쥐가 사람들이 새를 잡을 때에는 굴에 들어가서 쥐가 되고, 사람들이 쥐를 잡을 때에는 굴에서 나와 새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좨주(祭酒)가 그러하구나. 아내와 아들을 기르면서 자비와 사랑이 있다고 이르고, 밭 갈고 심기를 부지런히 하면서 부모에게 타고난 터럭과 살을 헐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왕역(王役)으로 조세를 과(課)하면 출가한 자라고 이르니, 또한 박쥐가 나가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겠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성인이 세상에 응함은 본래 창생(蒼生)들을 제도하여 이익케 함으로써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면서 여러 품류(品類)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풀과 나무를 맛보고 오곡의 정기에 합하며 뽕나무들을 심어서 팔잠(八蠶)19)의 실에 충당한다. 그러기에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가색(稼穡)이 있게 되며 사(社)의 정(正)을 세우고 옷 맡는 이를 두어서 백성들을 이익하게 함이 이에 있게 된다. 만일 한 여자가 길쌈을 하지 않으면 천하가 그 때문에 추위에 괴롭게 되고, 한 남자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천하가 그 때문에 먹을 것이 적게 된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가르친 법은 길쌈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게 한다. 불경에는 밥을 먹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밭에는 밭갈고 심는 사람이 없고, 가르침에는 전련(轉練:金丹을 단련하는 것)하는 방법이 없고, 베 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지어미가 없어졌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발우를 가지고 석장(錫杖)을 흔들어서 입에 풀칠을 하려 하여도 누구를 기대겠으며, 옷깃을 왼쪽으로 하고 편단우견(偏袒右肩) 하고자 한들 어디에 취탁(取託)하겠는가? 그러므로 한 해 중에 굶주리고 추위가 다 이를 것이니, 중생을 이익하게 함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 곤궁함을 보인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그 미혹함의 네 번째이다.”

⑷ 불교의 측면에서 농사를 버리고 걸식[分衛]하기를 가르침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도를 도모하는 데는 먹을 것을 먼저 해서는 안 되고, 믿음을 지키는 데는 배고픔을 반드시 뒤에 한다. 그 때문에 걸닉(桀溺)이 농사에 힘쓰자 공자는 그를 새와 짐승에 비유하였으며, 번수(樊須)가 농사짓기를 배웠는데 공자는 그를 소인(小人)이라고 기롱하였다. 직하(稷下)에는 지위가 없는 선비지만 녹(祿)을 주어 부른 것은 그들의 어짊을 높인 것이요, 금루(黔婁)20)는 벼슬하지 않았지만 상사(賞賜)를 받은 것은 그의 청정함을 숭상한 것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의 도는 어찌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겠는가?
청하노니 그대를 위하여 말하겠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인과 과를 증험하여 3세(世)의 넓은 근원을 꾸렸지만, 선도(仙道)는 금과 옥을 숭상하여 겨우 일생의 허비만 수고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어질고 어리석고 장수하고 요절(夭折)함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믿고, 가난하고 부하고 귀하고 천한 것은 눈 앞에 분명하여서 보응(報應)은 형체와 그림자 같이 어긋남이 없고, 업연(業緣)은 또한 소리와 메아리처럼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그의 취지이다. 단약(丹藥)을 복용하여도 죽지 않고 진액(津液)을 먹어서 오래 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고시(古詩)에 ‘약을 복용하여 신선되기를 구하면, 약에 그릇되기 쉬우니,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고운 명주와 흰 천을 입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후세의 사람에게 말을 붙이기를 ‘도사를 삼가 짓지 마오’ 하였다. 이는 헛되이 공부를 버리고 허망하게 수명과 요절을 말하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그대에게 전련(轉練)의 방법이 있으면 무엇으로 인하여 다시 전지(田地)를 청구하며, 다시 길쌈하는 부인을 말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알겠다. 그들이 모두 아내와 첩을 두었기 때문에 도사가 전용하는 농사짓는 남자와 길쌈하는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어찌하여 입에 풀칠하는 것을 충당하지 못하며, 항상 몸을 자양하는 것을 못한다 하며, 만일 그들이 길쌈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곧 가난한 곳에 떨어진다 하는가? 가만히 보니 누관(樓觀)의 황건(黃巾)들이 사슴의 가죽을 벗겨서 땅에 얽매이며, 현도(玄都)의 귀졸(鬼卒)들이 횡피(橫帔)를 버리고 농사지어도 이미 양식 끊어진 사람이 없고 자못 객작(客作)의 게으름이 부끄럽다. 스스로 방아찧고 스스로 갈아도 굶주림이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몸을 수고하고 마음을 조이니 무슨 도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한나라 안제(安帝)의 원년 임오년에 도사 장릉(張陵)이 황서(黃書)를 분별하여 ‘남자와 여자가 화합하는 법으로서 삼(三)과 오(五)와 칠(七)과 구(九)의 교접(交接)하는 도가 있다. 그 도의 참다운 비결은 단전(丹田)에 있으니, 단전이라 함은 옥문(玉門)이다. 오직 금비(禁秘)로써 중요하게 여기어서 도로에 함부로 누설(漏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도로라 함은 오줌누는 구멍이다. 스승이니 벗이니 부모니 하면서 성근(性根)을 더럽히는 이름이 있다’ 하였다.
또 ‘여자 아이로서 시집가지 아니한 14세 이상의 아이에게 결명(決明)의 도가 있다’ 하였다.
그러기에 『오천문(五千文)』에 주석하여 ‘도를 도라 함은 이른바 아침에 맛있는 음식을 먹음이요, 항상한 도가 아니라 함은 저녁에 오줌이 됨이다. 둘은 같은 것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니 이른바 사람의 성근이 오줌을 내고 오줌에서 정(精)이 나오는 것이다. 현(玄)하고 또 현하다 함은 이른바 코와 입이다’ 하였다.
능미(陵美)가 이 방법을 아들과 손자 삼대로 서로 계속하여 행하였다. 그대의 법이 이와 같이 백성들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니, 만일 백성들에게 권하여 그대의 방법을 의지하여 행하게 하면 효성스럽지 못하고 공손하지 못하여서 대대로 승냥이와 이리 같은 종자들만 낳을 것이요, 예가 없고 의리가 없어서 집마다 올빼미와 원숭이 같은 아이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대저 기이한 재물을 가려 구하는 자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캐기 위하여 아홉 굽이로 돌아 흐르는 깊은 곳도 꺼리지 않고, 빛나는 박옥(璞玉)을 구하는 자는 남염(藍琰)의 구슬을 추구하여 삼습(三襲)의 위험함도 꺼리지 않는 것은 그 보물을 귀하게 여김이요, 지극한 도를 사모하는 자는 그 창을 엿보아서 세력과 이익을 기러기의 털같이 가볍게 여기고 그 은밀한 곳에 들어가서 영화와 지위를 벗어놓은 신과 같이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참됨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게으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힘을 아끼지 않게 하고, 가난한 길손으로 하여금 그의 재물을 아끼지 않게 하는 것은 대개 그윽한 이익을 바람이요, 그들이 미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선되는 술법이 탄망(誕妄)한 데 이르러서는 그의 근원과 흐름이 오래 되었으니 한종(韓終)21)과 서시(徐市)가 처음으로 진(秦)나라에서 속였고, 문성(文成)22)과 오리(五利)23)는 거짓을 이어서 한나라에서 속였다. 그래서 학을 당겨 타는 것을 서술하였지만 구름을 능멸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노을을 먹는 것을 말하였지만 배고픔을 치료하는 믿음을 보지 못하여서 노원(猱猨)과 신합(蜃蛤)과 같다는 이론이 있는 데에 이르렀다.
【註】조식(曹植)의 『변도론(辯道論)』에 ‘신선이라 함은 노원의 무리와 같은 부류인가? 세상 사람들이 도를 얻으면 변하여 신선이 된다 하였으니, 마치 꿩이 바다에 들어가서는 변화하여 조개가 되고, 제비가 바다에 들어가서는 변하여 큰 조개가 되지만 그들이 배회(徘徊)함에 있어서는 그의 날개를 연못에 드리운다. 그것은 스스로 변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홀연히 스스로 던져서 신(神)이 변화하고 체가 변하여 다시 물고기와 자라로 되었으니, 어찌 옛날 임박(林薄)에 날개치고 원옥(垣屋)에 집을 지었던 즐거움을 알겠는가? 우애(牛哀)24)가 병을 앓다가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그의 형을 만나 잡아먹었으니 이와 같이 되면 어찌 변화를 귀하게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바람을 붙잡아 매고 그림자를 붙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에 박의 열매를 버리는 것은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요, 돌밭을 폐지하는 것은 경작(耕作)하기 어렵기 때문이요, 좌도(左道)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허위(虛僞)이기 때문이다.
대개 실지를 검사하면 그와 같은 것을 일컫고, 헛된 것을 연구하면 그와 다른 것을 모은다. 이치가 부합하면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기고 뜻을 속이면 물건이 어긋남은 일상(日常)의 일이다. 어찌 그를 미혹하다 하겠는가? 도교를 낮게 여기고 불교를 높이 보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의 네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는다. 근본이 굳으면 나라가 편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사[賜]는 아들을 기르는 문에 미치고 은혜는 아이를 밴 부인의 집에 흐른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가 제사를 받드는 것이 대대로 실려 이지러지지 않는다. 비록 지극한 효도가 몸을 헐더라도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다. 그러기에 국가가 부하고 굳세어서 천하가 번창하고 성하는 것이니, 인민이 쇠잔하여 없어지고 나서 국가가 있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시집가지 않고 장가들지 않는 것을 법을 받드는 것이라 하고, 오직 부처님만 섬겨야 열반을 얻는다 하니 이미 길이 사는 방법이 없고, 또한 죽지 않는 술법이 없다. 그렇게 되면 한 세상 가운데 집과 나라가 빌 것이며, 세속 사람들이 비록 복을 구하고자 하나 형체와 목숨이 이미 쇠잔하게 됨을 알지 못하니 다투어 집이 편안하기를 사모한들 어찌 종(宗)의 제사가 오래 전에 없어졌음을 깨닫겠는가? 이를 일러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독초를 복용하는 격이요, 물에 빠짐을 두려워하면서 큰 하수에 나가는 격이라고 한다.
또 천황씨와 지황씨의 앞 세대에는 부처가 없었어도 국운(國運)이 길었으며, 후조(後趙)와 후위(後魏) 이래는 승려가 있었어도 국운이 단축되었다. 이것은 바로 참과 거짓이 뒤섞이고 예와 악이 고르지 못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 미혹됨이 다섯 번째이다.”

⑸ 불교의 측면에서 교가 다스림의 근본이 된다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신(神)을 맑게 하고 성품에 돌아오는 것은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요, 정(情)을 끊고 욕심을 버리는 것은 성인에 오르는 먼 근본이다. 그러기에 ‘도가 높은 자를 숭상하고 덕이 큰 자를 상을 준다’고 하였으니, 도로써 신을 전하고 덕으로써 성인에게 준다. 신과 성인을 서로 전하는 것, 이를 훌륭한 계승이라고 이른다. 그러기에 도의 근원을 막고 덕의 뿌리를 치는 것, 이를 뒤를 이을 자가 없다 한 것이요, 애욕을 버리는 것을 뒤를 이을 자가 없다고 이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옛날 하상지(何常之)는 ‘석가모니의 교화는 옳지 않음이 없다. 도에 들어가는 교의 근원을 알고 풍속을 제도하는 데 우두머리로 일컬음을 알아야 한다. 대저 하나의 착함을 행하면 하나의 악함을 버리고, 하나의 악함을 버리면 하나의 형벌이 없어져서 하나의 형벌이 집에서 없어지면 만 가지의 형벌이 나라에서 없어진다. 그러기에 다섯 가지의 계와 열 가지의 착함이 바로 다스리는 근본이 된다’ 하였으며, 또 ‘다섯 가지의 계를 닦음에 악취(惡趣)가 멸하여지고, 열 가지의 착함이 드러남에 사람과 하늘이 자성(滋盛)한다. 사람과 하늘이 자성하면 바른 교화가 높아지고, 악취가 쇠잔하면 재해가 없어진다’ 하였다.
【註】『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사람이 계를 가지지 않으면 여러 하늘은 감소하고, 아수라(阿修羅)는 번성하며, 착한 용은 힘이 없고 악한 용이 힘이 있게 된다. 악한 용이 힘이 있으면 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때가 아닌데 사나운 바람과 세찬 비가 와서 오곡이 풍성하지 않고, 전염병이 다투어 일어나며 인민들이 굶주려서 서로서로 잔해(殘害)한다. 만일 사람이 계를 가지는 이가 많으면 여러 하늘들이 위엄과 광명을 충족하게 되고, 아수라가 감소하고 악한 용이 힘이 없으며 착한 용이 힘이 있게 된다. 착한 용이 힘이 있으면 바람과 비가 때에 맞추어 사기(四氣)가 화창해지고, 단 비가 때에 맞게 내리며, 백곡이 풍성해지고, 인민들이 안락해지며 전쟁이 그치고 전염병이 돌지 않는다.
이는 마치 섶을 숨기고 풀을 없애면 이익은 무겁지만 드러나기 어렵고, 불꽃을 끄고 불타는 것을 끄면 행적은 미미하나 드러나기 쉬운 것과 같다. 그리고 또 뼈를 강하게 하고, 기를 약하게 하는 것은 노자의 지극한 말이요, 골수를 보전하고 정기를 아끼는 것은 신선 공부의 깊은 뜻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음욕(淫欲)을 일러 묘한 가르침이라 하고, 아내와 자식을 교화의 근원이라 하는 것은 노자를 종(宗)으로 받들면서 그가 말한 것을 헐뜯는 것이며, 신선을 공부하면서 그의 술법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또 개와 말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은혜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올빼미와 원숭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은혜를 잊고 주인을 무는 것을 미워함이다. 그러한즉 밤을 경계하여 수고를 대신하여도 공은 개와 말보다도 못할 것이요, 비늘을 거슬러서 혀를 뒤집어도 해가 올빼미와 원숭이보다 깊음을 깨달아야 한다. 수컷 뱀 아홉 마리가 그렇지 않은가? 귀신 한 수레를 싣는 것이 또한 두렵다고 하겠다.
또한 나라의 운이 길고 짧은 것은 비록 하늘의 명이라 하지만 흥하고 흥하지 못함과 길고 짧은 것은 또한 사람이 하기에 달렸다. 그러기에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은 다 아름다운 수(壽)를 누렸고, 걸(桀)임금과 주(紂)임금과 유(幽)임금과 여(厲)임금은 하늘의 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무왕 발(發)은 도를 밟았기에 국운이 길어졌고, 진시황 정(政)은 형벌을 혹독하게 하여 국운이 짧았다.
진사(陳思)의 논(論)에 ‘옛날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임금과 탕임금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과 소공(邵公)과 태공(太公)은 모두 백 년의 수를 누렸다. 이들 일곱 성인과 세 현인(賢人)은 모두 도를 행하여서 천하에서 정치를 닦았기에 신(神)을 허비하지 않았고, 한 나라에 어진 재상으로서 생각을 수고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각기 천 년을 다한 것이다. 걸 임금은 명조(鳴條)에 추방당하였으며, 주임금은 목야(牧野)에서 죽었고, 견융(犬戎)은 유임금을 죽였으며, 여임금은 천수를 마치지 못하였다. 주나라의 운수는 8백 년을 갔고 진나라는 두 대에서 멸망하였다. 이때는 본래 부처와 중이 없었다’고 하였다.
모(謨)와 곡(誥)을 보게 되니 헛된 말이 아니라 하겠다. 이때는 부처가 없었는데도 국운이 연장되었고 후세에는 부처와 중이 있었는데도 나라의 운수가 짧았는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쉽게 하며 어찌 그리 쉽게 하겠는가? 아깝구나. 그대가 스스로 근심을 샀으니 참으로 탄식하겠다. 어둡기가 밤에 노는 것과 같구나. 그대의 눈먼 것이 다섯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효도는 덕의 근본이 된다. 인륜이 먼저 할 것으로서 이보다 큰 종(宗)은 없다. 진실로 아버지 어머니는 호천(昊天) 같은 은택이 있으니 어찌 갚는다 하겠는가? 그러기에 살아서는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공손함을 다하고, 돌아가셔서는 무덤과 능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부처의 가르침은 반드시 그의 해골을 버려서 풀과 들판에 두게 하면서 많은 재산을 내서 부처의 탑과 사당을 경영하게 하니, 드디어 어리석은 지아비들로 하여금 의혹하고 어지럽게 하여 이 전례(典禮)를 폐지하게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에 일찍이 봉하고 나무를 세울 마음이 없게 하였다.
【註】상황(上皇)의 세상을 보니 빈장(殯葬)하는 예가 없었는데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땅 속에 묻는 일[窀穸]이 비롯되었다. 그러기에 노끈으로 혜독(槥櫝:작은 관)을 묶고 기와로 우관(虞棺)을 닫는 것들은 다 중고(中古)에서 일어난 것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때에 이르러서 해골들이 들에 아무렇게나 나와 있던 것을 거두어 감추었기에 비로소 장사(葬事)의 예가 행하여졌다. 그러기에 ‘장사한다는 것은 감추는 것이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보지 않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 때문에 공자가 병이 위독할 적에 제자들이 후장(厚葬)하려 하니, 공자가 ‘내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불모(不毛)의 땅을 가려서 봉하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며 오직 가시와 모감주나무[欒]만을 심어라’ 하였으니, 말세에 장례(葬禮)가 행해진 것과 같았으니, 이는 대개 세속의 일을 면치 못한 것이다.
오랑캐들은 시체의 영(靈)을 돌이켜서 조각하여 장식하는 묘를 다하였다. 한 귀신도 그의 자손이 아니면 제향(祭享)을 받지 않고 사람들 또한 제 조상이 아니면 제사지내지 않는데, 그의 어버이는 공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공경한다 함이 이를 이름이다. 또 수장(水葬)이 있고 화장(火葬)이 있어서 풍속이 다르며, 시체를 파묻음이 있고 시체를 드러냄이 있으니, 마을과 나라가 본래 다르다. 그러니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름으로써 복을 구한다. 어찌 지방의 풍속이 달라서 각자가 그러한 것임을 알겠는가? 이를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그 미혹함이 여섯 번째이다.”

⑹ 불교의 측면에서 충과 효가 어김이 없다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목쉬고 귀먹은 자를 인도하는 자는 반드시 구부리고 우러르며 손가락으로 휘둘러야 하고, 어리석고 막힌 것을 여는 자는 또한 귀를 끌고 손바닥을 들어야 한다. 대저 인륜은 효도와 공경을 근본으로 하고, 효도와 공경은 생성(生成)을 의뢰한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면 날 수 없고 성인이 아니면 서지 못하며, 성인이 아니면 법이 없고 효도가 아니면 어버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생성의 의리가 통하고, 스승과 어버이의 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안회(顔回)가 죽었을 적에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청하니 공자가 ‘안회는 나를 대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지만 나는 안회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의리이다.
또 사랑하고 공경하는 예가 다르나 얼굴은 두 가지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질고 어리석음의 성품이 다르나 품질은 세 가지의 계층을 넘지 않는다. 그러기에 살아서는 효도로 봉양하여 어김이 없어야 하고, 죽으면 장사와 제사를 예로써 해야 하니, 이것이 예제(禮制)의 다름이다. 그리고 작은 효도는 힘을 쓰고, 중간 효도는 수고로움을 써야 하고, 큰 효도는 다함이 없어야 하니, 이는 성분(性分)이 다름이다.
불교와 비교하면 그러한 뜻이 있다. 피를 뿌리고 몸을 태우는 무리와 보탑(寶塔)과 인사(仁祠)의 예에 이르러서는 또 처음을 공경하고 마침을 삼가는 것을 이름이다. 전륜성왕의 8만 보탑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의 3천 보탑이겠는가?
『아육왕경(阿育王經)』에 ‘아육왕이 8만 4천의 궁인(宮人)을 죽였는데 밤에 궁 밖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아육왕이 뉘우쳐서 8만 4천의 보탑을 세웠다’ 한다. 지금 이 중국에도 또한 비슷한 것이 있다. 석제환인(釋提桓因)이 하늘 위에서 3천 개의 탑을 조성하였다 한다.
명해(溟海)를 마르게 하여 구슬을 구하고 거리를 깨끗이 하여 돌을 옮기는 것은 대개 힘을 수고롭게 함이요, 여러 중생을 총괄하여 자기의 임무로 삼고 함기(含氣)를 천속(天屬)과 같게 하며 유루(有漏)의 땅에 깃들이고 무뢰(無賴)한 무리들을 짊어지는 것은 대개 마음을 수고롭게 함이요, 실상(實相)의 구역에 회헌(回軒)하고 적조(寂照)의 마당에 응신(凝神)하며 열반을 가리켜서 길이 돌아가고 법신을 타고 멀리 보는 것은 다함이 없는 도리이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옴에 금관(金棺)을 깨뜨려 글귀를 연설하였고, 아버지 왕이 세상을 떠남에 보상(寶床)을 들고 세상 마침을 전송하기에 이르렀다.
『지도론(智度論)』에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이 목숨을 마치자 부처님이 스스로 승상(繩牀)의 다리 하나를 들고 화장하는 곳에 갔다. 그래서 후세의 일체 중생에게 낳고 길러주는 은혜를 보답함을 보였다’ 하니 효도와 공경을 표한 위의가 또한 갖추어졌다. 그런데 해골을 버리게 가르쳤다 함은 무슨 말인가?
또 불경에 시다림(屍陀林)을 권한 것은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널리 베푼 것이니, 뜻은 묵은 빚을 갚아 장래를 면하기를 바란 것이다. 장주(莊周)의 말세에서 후장(厚葬)하여 예를 잃는 것을 그르다 말한 근본과는 같지 않다. 그러한데도 개미들은 어찌 친하고 새짐승들은 어찌 소홀하게 한다 이르겠는가? 살아서는 자기의 몸을 역려(逆旅:여관ㆍ客舍)로 보고 죽어서 마땅히 하늘과 땅으로써 관곽(棺槨)을 삼는 것이니, 이는 도리어 상고에서 매장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중생들이 생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중하게 보는 폐단을 혐오함에 의지한 것이라 하겠다.
신선의 도를 구하는 자는 혹은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좇아 먼 산에 지고 가며 등칡을 헤치고 혜초(蕙草)로 짜며 검은 신을 끌고 경을 읽는다. 그러나 황금 부엌은 이루기 드물고 옥의 꽃은 보기 어렵다. 골수를 응시하고 뼈로 화한다는 것은 공연히 이러한 말만 이루고, 무지개를 이고 용에 기댄다는 것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하였다.
혹은 해골을 지필(地胇)25)에 버리고, 뼈를 천태(天台)에 잃으며, 살아서는 증양(蒸養)하는 은혜를 궐하였고 죽어서는 명익(冥益)하는 이익이 없다. 전도된 마음은 뭇 사물에 위태롭고 삿된 그물은 여러 중생에게 걸림이 된다. 아홉 겨레는 바름을 헐뜯는 재앙을 맞이하고, 여섯 친척은 성인을 속인 업을 부른다. 위태로움을 반연하고 섞음을 의거(依據)하니 알기에 한심스러우며 거만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니 얼마나 어리석음이 심한가? 유유하여 깨닫지 못하니 그대의 눈먼 것의 여섯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며 말하였다.
“대저 중국과 오랑캐는 말이 달라서 음운(音韻)이 같지 않다. 그래서 불경에서 석가(釋迦)를 모니(牟尼)라고 일컫는 것은 오랑캐의 말이고, 중국에서는 번역하여 능유(能儒)라고 말한다. 능유의 이름은 지위가 주공이나 공자보다 낮으니 그래서 능유라는 용렬한 말을 쓰지 않고 석가라는 오랑캐의 칭호를 그냥 썼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함은, 중국말로는 아(阿)는 없다는 것이요, 뇩다라(耨多羅)는 위라는 뜻이며 삼먁삼은 정변지(正遍知)라는 뜻이요, 보리(菩提)는 도(道)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먼저 더 위가 없는 바르고 참된 도가 있었으니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은 오랑캐의 법에는 없어서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번역하지 않았다.
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 한 것은 중국말로 큰 착한 마음을 가진 중생이라는 말이다. 이 이름은 낮고 용렬하여서 상사(上士)가 되지 못하기에 그 더러운 칭호를 버리고, 또한 번역하지 않았으니, 무릇 번역하지 않는 종류는 그 예가 이와 같아서 세속을 덮어 가리고 중생들의 마음을 의혹하여 어지럽힌다.
그러나 옛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숭상하는 것은 유행의 항상 있는 폐단이요, 같은 것을 싫어하고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세속의 더러운 정이다. 이 때문에 한단(邯鄲)에서는 엎드려 기는 손님이 있었고, 익상(溺喪)에서는 돌아감을 잊는 길손이 있었어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일곱 번째이다.”

⑺ 불교의 측면에서 삼보(三寶)는 번역하지 않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이름은 얻는 물건이 없다 하였으니 대개 실지의 빈(賓)임을 이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 순(順)하는 가담(假談)으로써 현묘한 성인의 우열(優劣)을 따지겠는가? 대저 순씨(荀氏)26) 집에서 우두머리는 질(質)을 부르고, 중씨(仲氏)27)는 산을 가져다 이름을 지으니 산이 구(丘)보다 높았지만 중씨의 어짊이 공자만큼 넓지 못하였고, 머리는 귀를 총괄하였다. 그러나 순씨의 덕이 노담(老聃)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능유의 이름이 어찌하여 주공과 공자보다 아래겠는가?
그런데 석가모니의 호는 뜻이 여러 가지를 포함하여서 1만 덕에 두루 관통하니 인(仁) 한 가지만으로 치우쳐 새겨서는 안 된다. 통인(通仁)은 4구(句)의 변론이 끊어졌다. 그러니 어떻게 일정하게 번역하겠는가? 번역하여 찬술한 자가 일이 부득이하여 억지로 옛 호칭을 두었을 뿐이다.
또 ‘도가에서 옛날에 정변지(正遍知)가 있었다고 하고, 도와 보리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정교(正敎)였던 것이 후세에 유전하면서 이 이름을 훔쳐 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따지고 근원을 찾으면 어떻게 이 호칭을 얻겠는가? 대저 상법(上法)은 높고 뛰어나며 도의 뜻은 통현(通玄)한 것이다. 바르고 진실한 것은 삿된 것을 뒤집고, 진(眞)은 거짓된 데서 돌아옴을 말미암는다. 이제 부적의 글은 주저(呪咀)이니 바르다고 말할 수 없고, 향기로운 풀[薰]과 누린내 나는 풀[蕕]이 혼잡하니 참되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도사의 외귀장부(畏鬼章符)에 ‘왼쪽에는 태극장(太極章)을 차고 오른쪽에는 곤오철(昆吾鐵)을 띠어서 해를 가리키면 해가 멈추고, 귀신을 견주면 천 리나 달아났다’고 하였다. 동중(董仲)은 「황신월장(黃神越章)」을 지어 귀신을 죽였으며, 또한 「적장법(赤章法)」을 지어 사람을 죽였다.
자(雌)를 지키는 것은 하(下)이고 상(上)이라고 이를 수는 없다.『노자』가 ‘자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며, 또 ‘도의 성품은 물과 가깝다’고 하였다.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눈에 아교칠을 하였으니, 어찌 도라고 할 수 있으리오.『장자』에 ‘이주(離朱)의 눈에 아교칠을 하고, 양묵(楊墨)의 입에 자물쇠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봄 새가 지저귀는 것이 혹은 노래하는 것과 같지만 새는 실로 노래할 수 없고, 가을 벌레가 나무를 쪼면 혹은 글자에 가깝지만 벌레는 진실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지가 뒤죽박죽이 된 것은 대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보살을 번역하지 않았음을 의심하는 것은 이의 오류(誤謬)가 더욱 심하다. 서(書)에 ‘상성(上聖)은 초명(鷦螟)에 달한다’ 하였으니, 모두 벌레의 칭호이다. 불경에서는 ‘발이 여러 개인 것이나 발이 둘인 것 중에 여래(如來)가 가장 존귀하다’ 하였다.
그런데 벌레는 영성(靈性)을 함유한 것에 공통되는 것이니, 중생이 어찌 범성(凡聖)을 초월하겠는가? 대심(大心)이라 일컬음은 하열(下劣)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아무리 때를 씻고 티를 찾으려 하여도 남위(南威)의 고움은 손감(損減)할 수 없고, 마음을 받들어서 흉을 보려 하여도 서시(西施)의 고움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다시 그대를 위하여 손바닥 가리키듯이 베풀어 보이겠다. 석가모니는 부처님의 나타난 이름이요, 보리는 법의 존칭이요, 보살은 스님의 도수(導首)이다. 삼보의 뛰어난 호칭을 불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그의 본 이름으로 두었으니, 도교의 주문옥주(朱門玉柱)의 참(讖)과 양부음모(陽父陰母)의 음란한 것과는 같지 않다.
『황서(黃書)』에 ‘명문(命門)을 열어서 진인(眞人)을 안는다. 어린애가 돌듯, 용이 서리듯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아홉 번을 실으며, 하늘이 그물이요, 땅이 그물이듯이 주문을 열어서 옥주를 나아간다. 양(陽)은 음모(陰母)의 희기가 옥 같음을 생각하고, 음(陰)은 양부(陽父)가 손으로 만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였으며, 말똥을 영신(靈薪)이라 부르고, 입의 침을 옥액(玉液)이라 부르며, 이를 두드리는 것을 천고(天鼓)라 하고, 목구멍의 침을 예천(醴泉)이라 하였다. 말똥을 영신이라 하고, 늙은 쥐를 옥박(玉璞)이라 한 것은 『상청경(上淸經)』에 나온다. 일이 더러워서 드러내기를 겁내고 말이 더러워서 나타내기 어려운 것이 마치 영봉(靈鳳)이 덕을 받아들여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다람쥐가 추하고 두려워함으로써 형체를 숨기는 것과 같으니 비록 숨기는 바탕은 일이 같으나 추함과 고움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명연(冥然)히 알지 못하니 그대의 눈먼 것이 일곱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성인의 응화(應化)는 방소(方所)를 따라 가까이 이끌어 들인다. 그러기에 오랑캐에 있으면 머리를 깎고 정수리를 드러내며, 중국에 있으면 단위(端委)하게 홀(笏)을 대대(大帶)에 꽂으니, 이는 중국과 오랑캐의 평상시의 모습이지 교화하는 방소가 뛰어나고 못함은 아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구차스럽게도 이 관면(冠冕)을 버리고 치의(緇衣)를 입게 하며, 우리 중국의 풍속을 버리고 멀리 오랑캐의 풍속과 같이하였다면 이는 곧 관면에 겸하여 통달하지 못하여서 문득 지혜의 힘이 두루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어찌 천축에는 방소를 따라 형체를 나타내어 설교한다고 이르겠는가?
진실로 이를 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부처는 천축에서 난 오랑캐의 신이요, 중국의 큰 성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찌 머리를 깎는 교훈을 정국(正國)에 베푼다고 이르겠는가? 만일 중국에서 오랑캐의 형체를 배워서 머리를 깎는 것을 부처를 섬긴다고 이른다면 옛날부터 중국의 법을 익혀서 수건을 쓰는 것이 또한 도교를 받든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알겠다. 정수리를 드러내는 것과 머리를 기르는 것은 나라의 풍속이 다른 것이다. 슬픈 것은 선비와 백성들이 이렇게 해서 착함을 닦는다고 하니, 이를 일러 이웃의 떨어진 옷을 귀하게 여기면서 자기 집의 보불(黼黻)은 천히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를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미혹한 것의 여덟 번째이다.”

⑻ 불교의 측면에서 방소가 다르면서 제도가 같음을 가리킴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지극한 도는 운수를 응하여 방소가 따로 없고 성현은 기틀을 타서 가까이 이끌어 들이는 것이니,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았으면 그들의 풍속을 더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요, 우(禹)임금이 벌거벗는 나라에 들어갔으면 기쁘게 옷을 벗었을 것이요, 희백(姬伯)이 월(越)나라에 갔으면 문신(文身)을 하였을 것이요, 무령(武靈)은 세상을 순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 비록 다시 통발[筌]과 올가미[蹄]를 쓰는 방법은 다르나 물고기와 토끼를 잡는 공은 같은 것이다.
하물며 풍속을 바꾸어 마음을 봉하고 형체를 헐어서 뜻을 맺어 관직을 버림으로써 도를 알며, 수염과 머리털을 버림으로써 진(眞)을 닦는다면 성인의 제도가 한갓 이름이 있을 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인(仁)과 의(義)가 3유(遊)28)에 변하고 도척(盜跖)이 5선(善)으로 의뢰한다면 성인의 가르침이 멀고 멀기 때문에 마침내 쥐와 박옥(璞玉)이 이름을 뒤섞었고『유자(劉子)』에 ‘주나라 사람이 죽은 쥐를 박옥이라 한다’ 하였다., 현묘한 교화가 그윽하고 미미하기에 드디어 닭과 봉황이 바탕을 섞었다.『문심(文心)』에 ‘초나라 사람은 산의 닭을 봉황이다’ 하였다. 그러기에 95가지의 철학이 서쪽 건방(乾方)에서 날렸고 36부(部)의 철학이 동쪽 나라에서 뒤섞여 어지러웠다.
우루거자(優婁佉子)29)의 논과 위세사주(衛世師主)30)의 경『열반경(涅槃經)』에 ‘위세사(衛世師)의 논이다’ 하였다. 길두(吉頭)와 이라(夷羅)의 신선화선외도(火仙外道)를 길파두(吉波頭)라 하였고, 수선외도(水仙外道)를 이숙두라(夷叔斗羅)라고 하였다.말가사야(末伽闍夜)의 도약제(若提)의 아들이니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와 같은 데 이르러서는 혹은 물과 불을 의탁하여 성인이라 일컬으며, 해와 달을 기대서 신이라 일컬으며, 4대(大)를 가져다가 인(因)이 아니라 하고, 3업(業)을 가리켜서 과보가 없다 하여 식(識)의 체는 어두운 산과 똑같이 어둡고, 삿된 마음은 어두운 골짜기와 같이 어둡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서쪽 지방의 삿된 이론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괴기스럽게 웃고 신령스럽게 말하며 편안하게 노래하고 넓게 부르며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여서 중경(仲卿)의 보통 마음을 놀라게 하고, 비에 양치질하고 바람을 불어서 유안(劉安)의 얕은꾀를 놀라게 하며, 혹은 몸에 중황(中黃)의 부적을 차고 입으로 영비(靈飛)의 부적을 외우며 금궐(金闕)을 밟아 신을 노닐고 옥경(玉京)에 기대서 번뇌를 씻는다. 이와 같은 사례는 동쪽 나라의 이교도의 학문이어서 모두 다 삿된 그물이 마음을 덮고 거꾸로 된 바늘이 눈을 찌르며 깊이 의혹의 참호를 가지고 높게 의심의 성을 쌓아서 각기 한 귀퉁이를 차지하여 삼계에 미혹하여 빠지며 다투어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두 가지 견해를 지켜서 9류(流)에 빠져 어두워진다. 식(識)의 체가 윤회하니 무명이 그의 본 성품을 가리었고, 마음의 작용이 떠서 움직이니 취하는 모양이 그의 긴 근원에 빠졌다.
이에 큰 성인이 도의 눈으로 미리 보시고 근기(根機)를 따라 약을 베푸시어 서쪽 국토에 몸을 탄생하시었으며 정교(正敎)가 동쪽으로 흘러 전하였다. 병이 무거움에 의사의 왕이 친히 강림하시고, 병이 가벼움에 약방문을 붙여서 멀리 주셨다. 그것은 치우쳐서 올빼미와 짐승을 제어하게 하고 무거우면 고래와 암고래를 죽임이니, 이는 또한 불교[釋門]의 화타(和陀)와 편작(扁鵲) 같은 방법이요, 법왕의 손자(孫子)와 오기(吳起)와 같은 형세이다.
성인은 두 가지 제도가 없어서 얼굴과 복식의 뜻이 고르니, 마치 맑으면 흐린 하수를 건너서 창해(滄海)를 한 가지 맛으로 돌아오게 하고, 푸르면 붉은 이마에 응하여서 수미산을 한 빛으로 모은다.
충화자(冲化子)는 ‘선기(琁璣)의 글31)은 다 신선의 죽지 않는 도를 구함이요, 그 다음의 도는 나를 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오늘날 몸과 목숨이 채색을 머무르고 꽃을 연장하여서 3백 년이나 5백 년에 이르면 이로써 참이라 하니,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뜻이 이에 있다.
그런데 지금 도사의 배우는 법은 이로써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불가(佛家)에서 몸은 죽어도 정신은 밝아서 다시 뛰어난 곳에 난다 함과 같게 한다. 그러니 만일 이 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부처의 도를 배우는 것만 못할 것이다.
부처의 도는 정신을 경영하고 단련해서 날로 밝히고 날로 이익됨에 매우 이름[名]과 이치[理]가 있다. 정(定)과 혜(慧)의 법은 역력하여 닦을 만하니 어찌 부지런하고 수고함을 하겠는가? 스스로 도사라고 이름하면서 실지로는 불가의 승려들의 법을 배우는 것인데 배움이 또한 전일(專一)하지 못하니, 대개는 용을 그리고 범을 그리는 무리들이다. 그러니 어찌 녹건(鹿巾)을 버리고 황갈(黃褐)을 풀어버리고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가사를 물들여 입고서 세존께 귀의하지 않는가?
세간의 도사의 경과 도를 행하는 의리는 불가의 두어 논을 본 뒤에 통한다. 말하자면 불가의 경과 논을 훔쳐다가 도교의 서적으로 고쳐 지은 것이니 『황정경(黃庭經)』과 『원양경(元陽經)』과 『영보경(靈寶經)』과 『상청경(上淸經)』등의 경전과 3황(黃)의 법전은 모두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을 고쳐서 지은 것이다. 또한 마음을 닦으려면 좌선(坐禪)의 법을 의지하여 감득(感得)함을 바라는데 좌선의 이름을 고쳐서 정사(精思)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청(上淸)의 법은 더욱 높은데 스승들이 상청 경계의 구역을 넘지 못하였으며, 다음이 태청(太淸)의 신선되는 법인데도 그것마저 버려두어서 논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슨 법을 취하는 것이 불가와 다르기에 도사라고 칭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 뜻을 얻은 자는 부처를 스승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남방의 사람으로서 몸소 모산(茅山) 도사 충화자의 법을 배운 이다. 충화자는 도은거(陶隱居)32)와 더불어 항상 부처의 법을 공경하여 중히 여김으로 업을 삼으며, 다만 여러 스님들을 만나면 예배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바위굴에 불상을 모셨으며, 스스로 문도(門徒)의 배움을 받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아침저녁으로 참회하면서 항상 불경을 읽었다.
조사하여 보니 『선기초문(琁璣抄文)』의 글은 충화자가 지은 것이니, 그는 당세의 도사로서 부처님을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도은거가 대란(大鸞)법사에게 답한 편지에서 ‘지난 초하루에 귀로 스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 새벽에 눈으로 직접 스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혹은 스님께 정례(頂禮)한 지 여러 해기에 이러한 진응(眞應)을 이루었습니다. 주신 편지가 바로 그러하기에 등나무와 포류(蒲柳)를 정돈하고 꽃나무에 물을 주고 옷깃을 정돈하여 엄연히 생각하며 경계하는 말씀을 듣는 것 같습니다. 제자 화양(華陽) 도홍경(陶弘景)은 화남(和南)합니다’ 하였다.
그대의 스승이 부처를 섬기고 스님을 존경하여 일찍이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본종(本宗)을 위배하는 데 빠졌는가? 의리가 아니요 어짊이 아니어서 죄가 극한 형법을 부른다.
『모자론(牟子論)』에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과 공자와 노자의 교화를 부처에게 비교하면 마치 흰 사슴이 기린과 함께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그런데도 그대가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의 눈먼 것이 여덟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천황씨의 9기(紀)의 전에는 서계(書契)를 짓지 않았으며, 태호(太昊)의 6효(爻) 이후에야 문자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이래로 재적(載籍)이 점차 커져서 앞의 현인과 가신 성인들이 다 전분(典墳)을 저술하여서 읍하고 양보한 일과 창과 방패의 일이 모두 전책(篆冊)에 진술되어 있다. 그 때문에 왼쪽의 사관(史官)은 일을 기록하고, 오른쪽 사관은 말을 기록하여 바른 붓과 바른 말로써 잘못됨이 없고 거짓됨이 없었다.
그런데 『위서(魏書)』의 「외국전(外國傳)」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모두 ‘상문부도(桑門浮圖)의 경은 노자가 지었다’ 하였다.
【註】부도경(浮圖經)이라 함은 『위략(魏略)』과 『서역전(西域傳)』에서 ‘임예국(臨猊國)에 신인이 있으니 이름이 사율(沙律)이다. 사율이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도록 항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부도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재앙과 화가 있거나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권하여 부도의 재계를 행하게 하며, 재물을 희사하여 죄를 면하게 하였다. 임예국의 임금이 나이가 많도록 태자가 없었는데 그의 왕비 막야(莫耶)가 부도에 제사함으로 인하여 태자를 낳았다. 그래서 그 태자의 이름을 부도라고 일렀다. 전한(前漢)의 애제(哀帝) 때에 진경(秦景)이 월지국(月氏國)에 사신으로 가니 그 나라 임금이 태자를 시켜서 진경에게 구전해 주었다’ 하였다. 그 때문에 부도경의 가르침이 전한 시대에 일찍이 행하여졌다.
63년 뒤에 한나라 명제(明帝)가 상서로운 꿈을 꾸고서 부도경이 크게 행하여졌다. 그러나 조사하여 보니 진경의 전에는 경을 노자가 말하였다고 이르지 않았다. 조사하여 보니 진(晋)나라 때에 도사 왕부(王浮)가 『서역전』을 고쳐서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이라 하였으며, 이에 노자가 유사(流沙)를 건너가서 오랑캐의 임금을 교화하여 부도가 되게 하고, 몸을 변하여 부처가 되었기에 불교가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거짓되고 속임이 매우 심한 것이다.
다만 계빈국(罽賓國)은 여기서 1만여 리이고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장사꾼과 외국 사신들이 서로 이어서 그치지 않으나 노자가 그곳에 있으면서 오랑캐의 임금을 교화하였다고 전하지 않았다. 하물며 부도경과 노자가 몸을 변하여 부처가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다. 설사 노자가 부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비로소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리를 공양하여 바야흐로 부처의 성스러운 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름이 허탄(虛誕)한가?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에 ‘노자가 오랑캐에 들어가서 몸을 나누어 부처가 되었다’ 하였는데, 도가의 경고(經誥)에는 그러한 말이 매우 많다.
그러나 원굉의 『후한기』를 검사하여 보니 노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글이 본래 없다. 그 당시에는 조정에 박식(博識)한 자가 많았다. 그러니 귀를 막고 요령(搖鈴)을 훔치는 격이며, 사슴을 가리켜서 말이라 하는 격이다. 얼마나 어리석음이 심한가.
『명위화호경』 등에 모두 ‘오랑캐의 임금이 노자를 믿지 않았기에 노자가 신비한 힘으로 조복하여서 바야흐로 허물을 뉘우침을 구하니 오랑캐의 임금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허물을 사과하고 죄를 사과하였다. 이에 노자가 큰 자비로써 그의 어리석고 우매함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를 위해 권교(權敎)를 설해서 근기에 따라 계를 지키게 하였다. 두타(頭陀)의 마음을 일으켜서 걸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흉악하고 미련한 마음을 제어하게 하였고, 붉은 옷을 편단우견(偏襢右肩)함으로써 강하고 날뛰는 성품을 꺾게 하였으며, 그의 얼굴 모습을 끊어 훼손시키고 경죄(剠罪)와 코를 베는 형벌을 한 몸에 보이게 하고 아내를 금약(禁約)함으로써 그의 발역(勃逆)하는 종자를 끊게 하였다’ 한다.
【註】‘그대가 아내를 금약함으로써 죄로 여긴다면 도교에서 현도(玄都)에 성인을 모아서 이에 연이(燕爾)하는 방(坊)으로 삼고 지극한 덕이 맑고 비어서 문득 동뢰(同牢)의 관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오래 사는 것을 배우면서 그대가 항상 부인을 대하고 노자를 친히 사모하니 다 양아(養兒)이다.
다만 이이는 이씨의 종인(宗人)인데도 사람마다 부인을 취하고, 장릉(張陵)과 장노(張魯)는 대대로 아내를 두었다. 그러기에 남관(男官)과 여관(女官)의 두 이름이 있고 계사(係師)와 사사(嗣師)의 별호가 있어서 위(魏)나라 진(晋)나라로 오면서 관(舘)에서 아들을 낳고, 진(陳)나라와 양(梁)나라 때에는 정(靜)의 안에서 아이를 기르며, 부녀(婦女)를 주문(朱門)이라 부르고 사내를 옥주(玉柱)라고 부르니, 음욕의 더럽고 거만함이 도가로부터 나왔다. 밖으로는 맑고 빈 것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더러운 일을 오로지 하니 부끄러움이 심하다 하겠다. 이른바 무거운 병에 독한 약을 더하였으니 배를 가르고 창자를 씻어야 한다. 깊은 죄는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하니 반드시 종(宗)을 목베이고 제사를 멸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 땅의 군자(君子)들은 일찍부터 도교의 참됨을 받았구나.
『한관의(漢官儀)』33)를 검사하여 보니 ‘경제(景帝)로부터 오면서 국학(國學)의 안에 비로소 도관(道舘)을 세워서 학도(學徒)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인민들 사이에 따로 관사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양나라ㆍ진나라ㆍ제나라ㆍ위나라의 이전에는 오직 호로(瓠盧)로서 경의 근본을 삼았고 천존(天尊)의 형상이 없었다.
임자(任子)의 『도론(道論)』과 두씨(杜氏)의 『유구(幽求)』를 조사하여 보니 모두 ‘도는 형체와 바탕이 없으니 대개 음과 양의 정기다’ 하였다.
『도은거내전(陶隱居內傳)』에 ‘모산(茅山)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두 당(堂)을 세우고 하루씩 건너서 조례(朝禮)하였는데 불당에는 상(像)이 있고 도당에는 상이 없었다’ 한다.
왕순(王淳)의 『삼교론(三敎論)』에는 ‘근세의 도사들이 살 방도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의하여 믿게 하려고 이에 불가에서처럼 형상을 만들어 세워서 거짓으로 천존이라 부르고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두 진인(眞人)을 도당(道堂)에 두고 그것으로써 의식에 충당하였다.’고 하였다. 양나라 육수정(陸修靜)이 이 형상을 만들어서 머리 깎는 것을 수고하지 않는다. 본래 지극한 가르침을 따랐으니 어찌 머리 깎음을 빌리리오. 이를 일러 몸에 허물과 티가 없는데도 형틀에 매달리는 것을 즐기며, 집에 죽음의 재화가 없는데도 상복을 즐겨 입는다 하겠다. 어둡고 미련함이 심하니 참으로 슬퍼 통곡하겠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을 감득하고서 이 법이 비로소 이 땅에 와서 도리어 오랑캐들로 하여금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나 중국 땅에서는 그를 따라 행함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위나라가 한나라의 법을 따라서 도리어 옛 제도를 행하였었다.
석륵(石勒)의 때에도 그의 오랑캐의 바람을 염려하여 불도징(佛道澄)의 도인에게 세상을 바로잡게 하였다. 그러나 무릇 하천한 부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다투어서 머리를 깎았다. 이를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아홉 번째이다.”

⑼ 불교의 측면에서 노자의 몸이 부처가 아니라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큰 집은 여러 재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여러 중생은 한 사람이 교화하는 것이 아니다. 시방의 성스러운 지혜는 미진수(微塵數)와 항하사(恒河沙)에 비겨 다함이 없고, 8만 가지의 법문은 강과 바다를 기울여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 성인과 저 성인이 방소를 달리하는 것이 어깨를 비비는 것과 같으며, 앞의 부처와 뒤의 부처가 세상을 달리하는 것이 발꿈치를 맞대는 것과 한가지이다. 비록 상법(像法)의 시대와 정법(正法)의 시대가 다르고, 청정한 국토와 더러운 국토가 구분되지만 악을 징계하고 착함을 권하는 그 흐름은 하나라 하겠다.
또 주공과 공자 시대의 교훈은 오히려 1백 임금에서 고쳐짐이 없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극렬한 말은 오히려 1천 년 동안 아름다움을 드리우니, 어찌 주나라 한 대(代)에 세 번 변하고 세 번 옮기며 노자의 한 몸이 도교를 이루고 불교를 이룬다 함을 용납하리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성인의 지위를 밟을 이치가 없고 여러 벗은 도에 오르기를 바람이 끊어졌을 것이다.
또 먼저는 열 가지의 다름을 기롱하고 뒤에는 한 가지의 같음을 말하였으니 처음과 끝의 사이에 헐뜯고 칭찬함이 모순되고, 말고 펴는 즈음에 스스로가 다 삼성(參星)과 상성(商星)34) 같으니, 눈을 가리고 갖옷을 훔치는 것이 참으로 이러한 속담이 있구나.
대저 참과 거짓이 서로 형성됨은 마치 벼와 피가 서로 비슷함과 같으나 김을 잘 매는 자는 벼를 두고 피를 버리는 것이요, 도를 구하는 자는 또한 참을 의지하고 거짓을 버린다. 그러니 사문의 훌륭함은 종(宗)의 흐름이 오래다.
한나라의 임금은 가섭마등(迦葉摩騰)에게 예를 내렸다.『법본전(法本傳)』과 같다.
오나라 임금이 강승회(康勝會)에게 절개를 굽힘.
『오록(吳錄)』에 ‘오나라 임금이 강승회에게 ≺부처의 법이 어찌하여 세속과 다릅니까?≻라고 묻자 강승회가 ≺악한 일을 하여 드러나면 사람이 그를 목베고, 악한 일을 하여 숨기면 귀신들이 그를 목벱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역(易)』에서 ≺착한 일을 쌓으면 남아도는 경사가 있다≻35)라고 하였으며, 『시(詩)』에서 ≺복을 구함이 간사하지 않다≻36)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유속(儒俗)의 격언(格言)이지만 또한 부처님 법의 점차적인 가르침이라 하겠다’고 하였다.
담시(曇始)를 위나라 임금의 자리에 맞이함.
『위록(魏錄)』에 ‘척발도(拓拔燾)가 최호(崔浩)와 구겸지(寇謙之)의 말을 듣고서 드디어 부처의 법을 멸하여서 다 불상을 헐고 불경을 불살랐으며 중을 몰아 속가(俗家)로 돌려보냈다. 담시가 정월 초하룻날 석장(錫杖)을 짚고 법의(法衣)를 입고 성문에 서 있으니 성문을 지키는 자가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가 명하여 그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세 차례나 칼질을 하여도 담시는 상하지 않았다. 이에 형벌을 주는 자가 척발도에게 그 사실을 아뢰니, 척발도가 스스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전과 같이 목을 베었으나 상하지 않기에 척발도가 담시를 호랑이 우리에 넣으니 호랑이들이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척발도가 이에 도교의 천사(天師)를 우리 옆에 두었더니 호랑이들이 날뛰며 천사를 물고자 하였다. 척발도는 이에 부처님의 교화가 맑고 높아서 황로(黃老)의 가르침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서 담시를 상석(上席)으로 맞으며 사과하였다’고 한다.
도림(道林)은 진나라 임금의 상에 오름
진(秦)나라 시대에 도사 안영삼(安榮參)이 연(輦)을 함께 타고, 조방징(趙邦澄)과 상총무(上寵懋)가 비단옷을 입었다.
『부서(符書)』에 ‘부씨 임금이 나가 노닐면서 안영삼에게 명하여 연을 함께 타고 앉았다’고 하였다.
『고승전(高僧傳)』에 ‘석호(石虎)가 불도징(佛圖澄)스님을 대화상(大和上)이라 부르고 비단 옷을 입혔으며, 매양 전(殿)에 오를 적에는 여러 왕공(王公) 이하에게 칙명을 내려 여(輿)를 붙들게 하였다’ 하였으니 다 도가 극존(極尊)에서 내려오고 덕이 만승(萬乘)에서 돌아왔다 함이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하겠다.
황로의 술법이 유래(由來)로 다투지 못한다. 비재(費才)37)는 이기고 짐을 다투다가 몸을 죽였고 최호(崔浩)는 삿됨으로써 무고(誣告)하다가 바탕을 잃었다.
『위서(魏書)』에 ‘최호와 구겸지(寇謙之)가 척발도를 권하여 바른 가르침을 헐어 멸하려 하였더니, 척발도가 뒤에 무서운 병이 났기에 이에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을 목베었다’라고 하였으며 강빈(姜斌)은 거짓을 모았기에 바탕을 옮겼고, 왕부(王浮)는 거짓을 지었다 하여 목베었으니, 다 눈과 귀로 경험한 것이요, 취하여 주는 헛된 말이 아니다. 그 부처의 법을 높여 공경함이 이와 같으며 그 티를 보아 견책(譴責)함이 이와 같다.
대저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虔)은 공자의 문을 만나서 덕과 행실의 우두머리로 표방되었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귀곡(鬼谷)선생을 만나서 뜨고 거짓의 선두에 거처하게 되었으니, 이는 홀로 사람 성품의 우열(優劣)만이 아니라 또한 익힌 것의 참과 거짓에 있다 하겠다.
또한 어짊과 허망함이 서로 섞이면 허망한 것은 새고 어진 것은 드러나며, 성인과 거짓이 나뉘기 어렵지만 거짓은 다 없어지고 성인은 나타나는 것이니, 마치 사상(蛇床)이 궁궁이[蘼蕪:香草]와 더불어 질(質)이 같지만 꽃다움에 통달한 자는 그의 얼굴을 가려내고, 구문(鉤刎)과 소화(素華)가 뿌리는 같지만 약을 아는 자는 그의 성품을 분간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주공(周公) 단(旦)은 내쫓겼지만 다시 보좌가 되었으며, 공자의 문이 비었다가 다시 차는 것은 스스로의 내력(來歷)이 있다.
한나라 명제(明帝) 때의 각시(捔試)로부터 삿된 견해가 칼날 부러지듯 했고, 지혜의 해가 빛남을 모았으며, 법의 구름이 그늘을 폈다. 그러기에 강번(姜藩)은 집을 희사하여 도에 들어왔으며, 여집(呂集)은 거짓을 버리고 참에 돌아왔고, 조씨(曹氏)와 마씨(馬氏)는 등(燈)을 전하여 다함이 없게 하였고, 진(秦)나라와 위(魏)나라는 샘솟듯이 다함 없었다. 그러나 그대가 ‘징석(澄石)에서 시작하였다’ 함이 또한 속임이 아니겠는가?
황로의 풍속이 요박(澆薄)하였고, 얼굴과 복장이 또한 변하여서 도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기에 속담에 고자라고 하고 잘 저주하고 잘 꾸짖으니 옛 이름이 귀졸(鬼卒)이다. 그의 괴로움을 구하는 것이 머리채를 더듬어 목을 붙잡아 메어 노끈으로써 스스로 결박하며 소똥을 몸에 바르고 서로서로 채찍으로 치는 것이 그들의 법률이다.
만일 부록(符錄)을 잃어버리면 수판(手板)을 거꾸로 물고 바람을 거슬러 땅을 쓸며 버들가지 1백 단을 스스로 쪼개고 스스로 짊어져야 하며, 주장(奏章:상소문)을 훔치면 재의 감옥에서 엎드려 기고 등에는 물동이를 져야 한다.도사 손씨(孫氏)의 『법의(法儀)』에 나온다. 벌을 주어 꾸짖음이 더욱 무거워서 마치 노예의 법과 같으며, 죄의 책망에 복종하는 것이 축생들의 무리와 같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종과 경쇠를 치면 대중이 모이고 경책할 때에도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도가에서는 금강사자(金剛師子) 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 없다. 이는 대개 불교에서 밝힌 것이요, 황로에서 먼저 밝힌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도가에서 불교의 좋은 모범을 본받아서 우리 성스러운 자취를 훔친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안지추(顔之推)는 ‘신선의 일은 금과 옥의 비용만 들고 자못 허방(虛放)하다. 화산(華山)의 아래에는 흰 뼈가 풀무더기 같으니 어찌 신선을 얻을 이치가 있겠으며, 설사 신선됨을 얻더라도 마침내는 마땅히 죽음이 있어서 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대들에게 배우기를 권하지 않는다. 불가에는 3세(世)의 일이 분명하여 증험이 있으니 집의 업으로 마음을 돌리고 가볍게 보아 업신여겨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원래 4진(塵)과 5음(廕)은 분석하면 형체가 있지만 6주(舟)38)와 3가(駕)39)로 여러 중생들을 운반하여 싣기에 1만 행이 공(空)으로 돌아가지만 1천 문이 착함으로 들어가니, 변재와 지혜가 어찌 한갓 7경(經)과 백씨(百氏)40)의 넓음뿐이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과 공자와 노자와 장자 등이 미치지 못함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귀심편(歸心篇)」을 지어서 그로써 자제들을 경계하지만 그대가 알지 못하니, 그 눈먼 것이 아홉 번째이다.”

7. 기위도본편(氣爲道本篇)

옛 것을 상고하는 통인(通人)이 점형(占衡)하는 군자와 더불어 이중경(李仲卿)41)이 비방한 논을 보고, 보살이 변정(辯正)한 말을 열람하고 자세하게 의론하고서 분한 마음을 발하여 탄식을 일으켰으니, 그것은 삿되고 바른 것으로 하여금 궤철(軌轍)을 달리하고, 참됨과 거짓됨이 흐름을 나누어서 그 옳고 그름을 정하고, 잘잘못을 밝히고자 함이었고, 또한 후진으로 하여금 길이 의심이 없게 하고자 함이었다.
통인이 말하였다.
“내가 보니 조화(造化)는 음과 양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런데 물류(物類)들이 생겨난 것이 하늘과 땅을 초월하여서 3고(古)의 세상을 지났다. 다섯 성인의 글을 찾아보아도 천존의 신을 볼 수 없었으며 또한 큰 도의 상이 없었다.
조사하여 보니 『영보구천생신장(靈寶九天生神章)』에 ‘기가 맑고 높고 맑아서 양(陽)을 쌓아 하늘을 이루고, 기가 맺혀 찌꺼기를 얽혀서 쌓이고 막힌 것이 땅이 되었으며, 사람이 생긴 것은 다 3원(元)이 양육하고 9기(氣)의 형체를 겪은 뒤에 생겨난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음과 양은 사람의 근본이요, 하늘과 땅은 물건의 뿌리니 뿌리에서 나는 것이 기여서 따로 도의 신(神)은 없었다.”
군자가 말하였다.
“도사의 『대소은서(大宵隱書)』와 『무상진서(無上眞書)』 등에서 ‘무상대도군(無上大道君)의 다스림은 55겹의 무극대라(無極大羅)의 하늘 가운데와 옥경(玉京)의 위에 있어서 칠보(七寶)의 현대(玄臺)와 금상(金床)과 옥궤(玉机)가 있고 선동과 옥녀가 시위(侍衛)하며 삼심삼천과 삼계의 밖에 있다’ 합니다.
조사하여 보니 『신선오악도(神仙五岳圖)』에 ‘대도 천존은 태현(太玄)의 도(都)와 옥광(玉光)의 주(州)와 금진(金眞)의 군(郡)과 천보(天保)의 현(縣)과 원명(元明)의 향(鄕)과 정지(定志)의 이(里)를 다스려서 재앙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하였으며, 『영서경(靈書經)』에서는 ‘대라(大羅)는 5억 5만 5555중의 하늘 위이다’ 하였으며, 『오악도(五岳圖)』에서는 ‘도(都)라 함은 본다는 것이니, 태상대도(太上大道)는 도 가운데 상도(上道)로서 신명한 임금이 가장 고요함을 지켜서 태현(太玄)의 도에 산다’고 하였소.
『제천내음(諸天內音)』에 ‘하늘이 여러 신선과 더불어 누도(樓都)의 북을 울리면서 아침에 옥경에 연회를 베풀어서 도군(道君)을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이 그릇된 말을 미루어 보면 도군은 하늘의 신명으로서 이미 주와 현에 속하였으니, 그렇다면 천존이라 함은 하늘의 민오(民伍)일 것이다.
불가의 경과 논에서는 삼계의 밖을 이름하여 생(生)과 사(死)에서 벗어난다 하였다. 거기에는 분단(分段)의 형체가 없어서 색(色)과 심(心)의 경계를 벗어났거니, 어찌하여 다시 보대와 옥산과 주와 군과 향과 리가 있겠는가? 허망한 것이 심하여 다시 수긍하기 어렵다. 다만 도가에서 거짓을 말한 것의 자취가 볼 만하고 습관과 풍속이 항상함을 낸지 날이 이미 오래 되었기에 여러 삿됨을 다투어 펴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이름을 바로하고자 하면 이치를 자세히 알아야 하겠다.
이제 간략하게 연기(緣起)의 도리를 가지고 따라서 판단하겠다. 조사하여 보니 『주례(周禮)』에는 요임금의 이전에는 군과 현의 제도가 없었으며, 순임금이 5악(岳)을 순시할 적에 비로소 주의 이름이 보이고, 『상서(尙書)』 「우공(禹貢)」편 이래로 비로소 주의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춘추(春秋)의 때에는 현이 크고 주가 작으며 향은 현에 속하였는데, 한나라 고조(高祖) 이래로 현으로써 군에 소속시켰음은 전고(典誥)가 분명하다. 소위 9주는 우임금의 자취요, 백 군은 진나라가 병합하였다 함이 이것이다.
설사 도(道)가 하늘 위에 있다 하여도 응당 홀로 무위(無爲)를 일삼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호속(戶屬)이 향에 살아서 범부들과 다름이 없게 하겠는가? 이미 주와 현이 있으면 곧 관장(官長)이 있었을 것이니, 주의 목(牧)과 군의 수(守)는 성이 누구고 이름이 무엇이며, 향의 장과 이의 사(司)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아우였는가?
모두 이러한 말들은 관학(官學)의 도사와 무식한 황건(黃巾)들이 옛날과 지금을 다 보지 못하고 경과 역사를 엿보지 못하면서 인간에서 주와 현 두는 것을 보고서 또한 하늘 위에도 세상과 같다고 말한 것이니, 거짓됨을 보전하여 진실로 여기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요, 그 유래와 본말(本末)은 모두 『소도론(笑道論)』 가운데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통인이 다시 말하였다.
“장자는 ‘그 시초를 살펴보니 생이 없다’ 하였다. 이는 한갓 생이 없음이 아니라 본래 형체가 없었다. 그리고 한갓 형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가 없던 것이 황홀한 사이에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고 형체가 변하여 생이 생겼으니, 사람의 생이라 함은 기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생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그러기에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하는 것이니 만물이 하나이다. 어찌하여 하나가 되는가? 천하에는 기 하나뿐이다. 이를 미루어서 말하면 따로 도가 있어서 높이 대라(大羅)에 있으면서 홀로 높고 귀하다고 할 것이 없다.”
군자가 말하였다.
“『음양이기황정경(陰陽二氣黃精經)』에 ‘흐르는 단(丹)이 아홉 번 굴러서 기를 맺어 정(精)을 이루고, 정이 화하여 신(神)이 되고, 신이 변하여 사람을 이루니, 양의 기운이 붉은 것을 현단(玄丹)이라 이르고, 음의 기운이 누런 것을 황정(黃精)이라 이름한다. 음과 양이 교합(交合)하여 두 기운이 정을 내리고, 정이 화하여 신이 되니, 정과 신이 응결(凝結)하여 위로 9천(天)에 응하고, 9천의 기운이 단전(丹田)에 내려와서 신과 더불어 합하고 응결해서 명문(命門)에 다다른다. 그러기에 요는 아홉 번을 지나야 하니, 이를 9단(丹)이라 한다. 위로 화하고 아래로 얽혀서 그로써 사람을 이루는 것이요, 따로 도의 신이 있어서 능히 만물을 맡아서 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통인이 말하였다.
“옛부터 이름 있는 선비와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오천문(五千文)』에서는 보아도 보이지 않음을 이(夷)라 이르니 이라 함은 정(精)이요, 들어도 들리지 아니함을 희(希)라고 이르니 희라 함은 신(神)이요, 쳐도 얻지 못함을 미(微)라고 이르니 미라 함은 기(氣)니, 이를 일러 모양이 없는 모양이요, 물건이 없는 모양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의 체가 한없음을 알겠다. 그 때문에 맞이하여도 그의 처음을 볼 수가 없으며 기의 형체가 맑고 비었다. 그러기에 따라가도 그의 나중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도의 근본이 기를 좇아 났음을 서술한 것이다.
그 때문에 『상청경(上淸經)』에 ‘나는 한없이 넓은 데서 나서 심히 유명(幽冥)하다. 유명한 가운데에서 공동(空同)을 낳았고, 공동의 안에서 태원(太元)을 낳았고, 태원이 변화하여 세 가지의 기가 분명하니, 한 기는 맑고 한 기는 희고 한 기는 누렇다. 그러기에 하나에서 둘이 나고 둘에서 셋이 난다’ 하였다.
『생신장(生神章)』을 조사하여 보니 ‘노자가 원시(元始)의 세 기운을 합하여 하나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사람의 법체(法體)로서 정은 정령(精靈)이고, 신은 변화이고, 기는 기상(氣象)이다. 육간적(陸簡寂)과 장긍(藏矜)과 고환(顧歡)과 맹지주(孟智周) 등의 『노자의(老子義)』에서는 ‘이 세 가지의 기를 합쳐서 성인의 체를 이루었다’ 하였으며, 또 ‘자연은 통상(通相)의 체가 되고 세 가지 기는 별상(別相)의 체가 된다’ 하였다.
도교의 종(宗)하는 것을 검사하여 보니 기로써 근본을 삼는데, 상고하여 보니 세 가지의 기 안에 색(色)이 있고 심(心)이 있다. 이미 색과 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되면 생과 죽음의 근심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항상하다고 일컫는가?”
군자가 말하였다.
“원래 도에서 먼저 하는 것은 기로써 체를 삼는다. 어찌하여 그러한 사실을 밝히는가 하면, 조사하여 보니 『양생복기경(養生服氣經)』에서 ‘도라 함은 기(氣)이니 기를 보전하면 도를 얻고, 도를 얻으면 오래 있다. 신(神)이라 함은 정(精)이니 정을 보전하면 신이 밝고 신이 밝으면 오래 산다. 그러므로 정은 혈맥의 샘이 흐름과 같고 골수의 신령한 부(府)와 같아서 정이 사라지면 뼈가 마르고 뼈가 마르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장자(莊子)』는 ‘취(吹)와 구(呴)와 호(呼)와 흡(吸)은 옛 것을 토하고 새 것을 받아들인다. 팽조(彭祖)는 이를 닦아서 수고(壽考)를 얻었다’42)고 하였다. 이를 의지하여 말하면 화한 기운을 길러서 오래 삶에 이르는 것을 도를 얻는다고 한다.”
통인이 말하였다.
“설사 도가 있더라도 스스로 생길 수 없어서 자연을 좇아 난다 하였으니 자연으로부터 나서 도가 자연을 근본으로 한다면 도는 상대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이미 다른 것을 인하여 있으면 이것은 곧 떳떳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노자』는 ‘사람은 땅을 모범으로 하고, 땅은 하늘을 모범으로 하고, 하늘은 도를 모범으로 하고, 도는 자연을 모범으로 한다’43)고 하였다.
왕필(王弼)은 ‘하늘과 땅의 도는 모두 서로 어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모범이라 한다. 그런데 자연만은 모범한다고 일컬을 수 없어서 궁극(窮極)을 말한 것이요, 도라 함은 지혜와 영지(靈知)의 호칭이다. 지혜를 쓰는 것이 지혜가 없는 데 미치지 못하고, 형체가 있는 것이 형체가 없는 데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도라 함은 유(有)의 뜻이니 자연의 무(無)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자가 말하였다.
“『역건착도(易乾鑿度)』에 ‘옛적에 수인씨(燧人氏)가 북두(北斗)와 북극(北極)을 우러러보아서 방위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포희(庖犧氏)가 이를 인하여 8괘(卦)를 그었고, 황제(皇帝)가 천명을 받고서 대요(大撓)를 시켜 갑자(甲子)를 지었으며, 용성(容成)이 다음으로 역수(曆數)를 지었으니, 오행(五行)과 구궁(九宮)의 말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그러기에 「설괘(說卦)」에 ‘양의 수가 구(九)인 것은 하늘의 도를 세운 것으로서 말하자면 음과 양이다. 음은 이(二)이고, 양은 일(一)인즉 하늘은 삼(三)이다. 땅의 도를 세운 것으로서는 말하자면 유(柔)와 강(剛)이 있다. 유는 이(二)이고, 강은 일(一)인즉 땅도 또한 삼(三)인 것이다. 사람의 도를 세운 것으로서는 말하자면 인(仁)과 의(義)이다. 의는 이이고, 인은 일인즉 사람도 또한 삼인 것이니, 삼에 삼을 갑절하면 합하여 구(九)인 것이다’라고 했다. 음과 양이 서로 통해서 온갖 물건을 이루는 것이요, 따로 도의 신이 있어서 태현(太玄)의 도읍에 처하여 높이 앉았음을 듣지 못하였다.
대개 하늘은 위로 삼청(三淸)을 벌리고, 아래로 삼계를 싸며, 칠영(七映)의 방에 살고, 구궁(九宮)의 위에 나와서 신(神)을 행하고 기를 펴서 온갖 물건을 만들어 낸다 하니, 그렇다면 이가 어찌 인간들을 의혹하여 어지럽혀서 빠지게 하고 떨어뜨림이 아니겠습니까?
공(功)을 비교하여 보니 업이 다르고, 높음을 비교하여 보니 일이 다르다. 사문은 덕을 정표(旌表)하여 어기지 않고 도사는 말과 행동에 허물이 있다. 간행(刊行)하지 않는 먼 자취를 세워서 헤아릴 수 없는 현묘한 꾀를 세워서 양양(洋洋)하여 무어라 숭상할 수 없는 것은 불교라고 하겠다. 그러니 어찌 요당(坳堂)의 작은 물로써 풍이(馮夷)44)의 큰 파도에 견주겠는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