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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54 변정론(辯正論) 3권

by Kay/케이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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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변정론(辯正論) 3

 



변정론 제3권


법림 지음
이영무 번역


2. 십대봉불편(十代奉佛篇) ①

유생(儒生)이 말하였다.
“믿는 마음이 점차 나고 삿된 고집이 조금은 돌아섭니다.”
그리고는 또 물었다.
“중국에서 임금으로서 불교를 받들고 지극히 믿어서 오랠수록 더욱 돈독하며 복을 받은 자를 징험(徵驗)할 수 있습니까? 들어보고자 합니다.”
보살[開士]이 깨우쳐 말하였다.
“목에 신령스런 햇빛이 내리고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낙양(洛陽)에 들어오고서 마음을 돌려 부처님의 법을 받든 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10대의 임금과 3공(公)과 재보(宰輔)와 유교를 통달하고 널리 아는 자로서 불교를 공경하여 믿는 자들을 일러 주겠다.

진(晋)나라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용안(龍顔)이 기이하고 크며 성명(盛明)한 이로서 운수를 고쳤고 크게 부처님의 일을 키워서 가람(伽藍)을 널리 세웠다.
진나라 혜제(惠帝)마음을 미묘한 도에 돌리고 뜻을 현묘한 종(宗)에 계합하여 이에 낙양의 흥성사(興盛寺)를 짓고 1백 스님들께 공양하였다.
진나라 민제(敏帝)독실한 뜻이 신명(神明)의 마음을 움직여 신의(神儀)를 멀리 내리고 이어서 장안(長安)에 통령사(通靈寺)와 백마사(白馬寺) 두 절을 지었다.
위에 말한 것은 서진(西晋) 시대로서 두 서울에 절이 모두 1백80개이고 경을 번역한 사람이 13인이며 그 부수가 73부이고 승니가 3천7백여 명이었다.

진나라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대동(大同)을 법하여 양자강 왼쪽을 중흥하여 와관사(瓦官寺)와 용궁사(龍宮寺) 두 절을 짓고 단양(丹陽)과 건업(建業)에서 1천 스님들을 득도(得度)시켰다.
진나라 숙종(肅宗) 명황제(明皇帝)총명하고 성스러워 현묘한 것을 보고 재를 베풀어 복을 일으켰으며 황흥사(皇興寺)와 도량사(道場寺) 두 절을 지었고 의학(義學)에 이름 난 1백 스님을 모았다.
진나라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지극한 뜻이 명통(冥通)하고 성스러운 덕이 멀리 감동하였으며 중흥사(中興寺)와 녹야사(鹿野寺) 두 절을 지었고 경을 번역하는 의학들 1천 스님을 모았다.
진나라 효애황제(孝哀皇帝)시신(侍臣)들께 묻고서 미묘한 이치에 마음을 돌려서 아름다운 손님들이 간절히 대하고 크게 용의 빛을 열었다.
진나라 태종(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어질고 너그러우며 온함(溫含)하고 성인을 지음이 흠명(欽明)하였다. 불상을 만들고 재를 베풀며 스님들을 득도시키고 절을 세웠으며 장간(長干)의 옛 탑에 나무로 부도(浮圖)를 세우니 장려(壯麗)하고 특수하게 달랐다.
진나라 열종(烈宗) 효무황제(孝武皇帝)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을 받들고 지념(志念)이 명부(冥符)하였다. 사자국(師子國)의 임금이 불상을 멀리 보내와 붉은 뜻을 표하였다. 흠앙하여 사문 담마최(曇摩最)를 보내왔고 옥으로 만든 불상을 보내서 붉은 정성을 표하였다. 의해(義解)하는 스님을 불렀으며 황태사(皇泰寺)를 지었고 이어서 옛 집을 희사(喜捨)하여 본기사(本起寺)를 지었다.
진나라 안황제(安皇帝)부처님 법을 독실하게 믿어 게으르지 않았으며 복흥사(福興寺)와 황업사(皇業寺)를 일으키고 아육왕(阿育王)의 탑에 대석사(大石寺)를 세웠다.
위에 말한 것은 동진(東晋)시대이니 1백4년 동안 절을 지은 것이 1천7백68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7인이며 번역된 부수가 2백63부이다. 그리고 득도시킨 승니가 2만 4천 사람이었다.

송(宋)나라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계성(啓聖)으로 원(元)을 세워서 순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였다. 입으로 범본(梵本)을 외우고 손으로 계경(戒經)을 썼으며 영근사(靈根寺)와 법왕사(法王寺)의 두 절을 짓고 두루 학문을 섭렵했던 현명하고 거룩한 1천 스님을 모셨다.
송나라 태종(太宗) 명황제(明皇帝)지극한 다스림이 극히 창성하였다. 입으로 『반야경(般若經)』을 외우며 한 길 여덟 자의 금상(金像)을 조성하려 하여 네 차례나 하여도 주성(鑄成)하지 못하였기에 고쳐서 한 길 넉 자로 하였더니 곧 원만하게 장엄이 성취되었기에 다시 한 길 여덟 자로 하였다. 또한 의해(義解)하는 스님들을 공양하는 재를 하였다. 이에 사리를 감득하고 홍보중사(弘普中寺)를 지어서 이름난 스님들을 불러들였다.
송나라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재를 받들어 살생을 하지 않고 정성된 마음으로 도를 사모하였다. 하상지(河尙之)의 바른 대답으로 부처님의 계율을 종으로 삼았기에 앉아서 태평을 이루는 것이 임금의 뜻과 같았다. 구나발마(求那鉢摩)를 흠앙하여 큰 법 일으키기를 힘썼다. 선운사(禪雲寺)를 지어서 항상 1천 스님들께 공양하였다.
위는 송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1천9백13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3인이며 번역된 불경이 2백10부이다. 이름난 스님과 지혜 있는 선비가 성하기 벼와 삼[麻]과 같고, 보찰(寶刹)과 금륜(金輪)이 성하기 대나무나 갈대와 같아서 불교가 융성하고 독실하게 믿는 자가 배나 많았다. 승니는 3만 6천 사람이었다.

제(齊)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손으로 『법화경(法華經)』을 쓰고 입으로 『반야경(般若經)』을 외웠다. 4월 8일이면 항상 금상(金像)을 주조하고 7월 15일이면 절에 나가 우란분(盂蘭盆)의 재를 보냈으며 3백 명의 이름 있는 스님에게 공양하였다. 척기사(陟屺寺)와 정관사(正觀寺) 두 절을 세웠다.
제나라 세조(世祖) 무(武)황제초현사(招賢寺)와 유현사(遊玄寺)의 두 절을 지었고 의학들을 모아 경을 번역하니 3백 명의 스님이 모였다. 3교(敎)의 격(格)을 헤아려서 4년마다 고시(考試)를 치게 하였다.
제나라 고종(高宗) 명(明)황제모든 경을 쓰고 1천 분의 금상을 지었으며 입으로는 항상 『반야경』을 외우고 항상 『법화경』을 전(轉)하였다. 귀의사(歸依寺)를 지어서 참선 익히는 스님을 불렀으며 몸에 항상 여섯 가지의 재를 가지고 열 가지의 착함을 힘써 닦았다.
위는 제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2천15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16인이요 번역된 부수가 72부며 승니는 모두 3만 2천5백 사람이었다.

양(梁)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성도(性度)가 크고 거룩하며 풍감(風鑒)이 명랑하고 빼어났다. 칠각지(七覺地)에 마음을 노닐고 여덟 가지의 참선에 생각을 모았다. 5시론(時論)을 제정하고 사방에 펼쳤다.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 등 다섯 절을 지었으며 중운전(重雲殿)에 강하는 대중 1천 스님들을 모았고 나라 안에 널리 6재(齋)를 가지게 하니 백성들이 다 여덟 가지의 계를 받았다.
양나라 태종(太宗) 간문(簡文)황제천자(天姿)가 높고 밝았으며 풍신(風神)이 초매(超邁)하였다. 마음을 미묘한 법에 맡겨 현묘한 장소(章疏)를 두루 보았다. 자경사(資敬寺)와 보은사(報恩寺) 두 절을 지었으며 피를 찔러내서 『반야경』 10부를 손수 썼다. 태후(太后)의 휘일(諱日)이면 먹지 아니하고 재를 지냈으며 『법집기(法集記)』 2백 여권과 『법보연벽(法寶連璧)』 5백여 편을 지었다.
양나라 중종(中宗) 효원(孝元)성인을 체험하여 능함이 많으며 미묘한 데 들어가서 신령스럽게 깨달았다. 천거사(天居寺)와 천궁사(天宮寺)의 두 절을 짓고서 이름 높고 행이 높은 1천 스님들을 불렀다. 스스로 『법화경』을 강하였고 매양 『성실론(成實論)』을 풀었다.
위는 양나라 시대로서 절을 지은 것이 2천8백46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42인이요 번역된 부수가 2백38부이며 승니가 8만 2천7백 사람이었다.

양나라 효선(孝宣)황제
양나라 효명(孝明)황제문명(文明)하게 정치에 있으면서 대보(大寶)를 중흥시켜 다시 양나라 사직(社稷)을 부활시키고 백성들에게 빛을 주었다. 형주(荊州)에서 천황사(天皇寺)와 척기사(陟屺寺)와 대명사(大明寺)와 보광사(寶光寺)와 사망사(四望寺) 등의 절을 지었다.
위는 후량(後梁)의 두 임금으로서 다스림이 강릉(江陵)에 있기 35년인데 절을 지은 것이 1백8개이다. 산중의 절로는 청계사(靑溪寺)와 녹계사(鹿溪寺)와 복선사(覆船寺)와 용산사(龍山寺)와 비산사(菲山寺) 등이 있다. 모든 불사(佛事)가 장엄하고 화려하며 당우(堂宇)가 기묘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보는 이가 곧 발심을 하고 문득 돌아감을 잊었다. 승니는 3천2백 사람이었다.

진(陳)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
보력(寶曆)을 응하여서 군림(君臨)하시고 회창(會昌)에 나아가서 사목(司牧)하시었다. 몸의 길이가 8척(尺)이고 수염의 길이가 3척이며 머리털은 귀를 덮었고 손을 드리우면 무릎을 넘었다. 큰 원력(願力)으로써 여러 중생들을 편하게 제도하였고 큰 장엄(莊嚴)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깎아 제거하였다.
패읍(沛邑)을 길이 말하여서 땅의 은덕을 갚으려 생각하였으며 원하건대 초도(譙都)로 하여금 아름다운 경사를 같이하려 하였다.
영정(永定) 2년에 양주(楊州)에서 동안사(東安寺)를 지었으며 다시 집과 나라를 위하고 이에 여러 중생에게까지 미치게 하여서 양주 도읍의 치하(治下)에서 흥황사(興皇寺)와 천거사(天居寺) 등의 네 개의 사찰을 지었다. 모두 두공[栱]에 수 놓고 기둥[楹]에 아로새겼으며 망루에 문체를 하고 벽에 분을 칠하였으며 세 개의 섬돌이 엄숙하여 구르는 듯하고 1천 기둥이 빛나서 영롱하며 긴 표찰(表札)은 강구(康衢)에 벌려 있고 높은 문은 치도(馳道)에 임하였으니 미음(美音)의 정사(精舍)도 이를 짝할 수가 없고 선덕(善德)의 인사(仁祠)라 해도 어찌 이에 비기겠는가?
일체경(一切經)과 12부(部)의 경전을 베껴 썼으며 금과 구리로 등신상(等身像) 1백만 구(軀)를 조성하고 승니 7천 인을 득도시켰으며 옛 절을 수리한 것이 32였다.

진나라 세조(世祖) 문(文)황제
삼보(三寶)를 도와 융성하게 5승(乘)을 크게 교화하니 무성한 은택이 자비로운 구름에 비기고 큰 밝음이 지혜의 해에 비겨서 아름다운 칭찬이 사해(四海)에 나타나고 어진 마음이 삼령(三靈)에 통하였다. 작두(勺斗)에 근심이 없고 전쟁이 거두어졌다. 옛 절을 수리한 것이 60였고 일체경 50장(藏)을 베껴 쓰고 승니 3천 인을 득도시켰다.

진나라 고종(高宗) 효선(孝宣)황제
옥판(玉版)을 잡아 중휘(中麾)를 인도하고 금륜(金輪)을 타고 상국(上國)을 지적하였다. 땅은 단(旦:周公)과 석(奭:召公)과 같이 많이 소유하였고 책임이 기형(機衡)을 총괄하였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크게 저축함을 생각하였으니 강토가 일이 없고 천하가 다 편하였다. 양주의 금중리(禁中里)에 태황사(太皇寺)를 지었다.
그러나 끝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기에 뜻이 장릉(章陵)에 간절하여서 시흥(始興) 소열왕(昭烈王)과 효(孝) 태비(太妃)를 위하여 태황사에 7급(級)의 나무 부도(浮圖)를 조성하니 금반(金盤)이 요령(曜靈)과 더불어 색채를 비기고 주륜(珠輪)이 합벽(合璧)과 더불어 빛남을 다투었다.
또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처럼 선양(禪讓)하고 저(邸)를 대신하여 집을 이어서 복전(福田)을 심으려고 숭황사(崇皇寺)를 조성하였다.
태건(太建) 2년에 거듭 시흥 소열왕과 효 태비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미치고자 하여 영찰(靈刹)을 받들어 건립하니 높이가 15장(丈)이고, 그 아래에 부처님의 손톱을 모시니 길이가 2촌(寸)이요 너비가 1촌이었다. 보배의 감실(龕室)을 꾸며서 보배의 상자에 간직하니 어떤 때는 광명이 5색(色)을 날리고 광염(光焰)이 한 길이나 일어나는 등 신통 변화가 다함이 없어서 보는 자들이 더욱 공경하였다.
금과 구리 등으로 불상 2만 구를 조성하고 옛 불상을 수리한 것이 1백30만구이고, 일체경 12장(藏)을 베껴 쓰고 옛 절을 수리하고 보수한 것이 50개이며 승니 1만 명을 득도시켰다.
위는 진나라 시대의 다섯 임금으로서 모두 34년 동안이었다. 절은 1천2백32개로서 국가에서 새로 지은 절이 17개이고 백관(百官)들이 조성한 것이 68개이며, 성 안의 큰 절이 3백여 개였다.
『여지도(輿地圖)』에 이르기를 ‘옛날에 수도에는 7백여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후경(侯景)이 난을 일으켜 이 절들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진나라가 크게 통일되어 백성들이 다스려질 때에 조성하였기에 기와를 연하고 기둥이 맞닿아서 임금의 집과 즐비하여 표찰과 탑이 서로 바라보아 수도에 별처럼 늘어서 있었다고 하며, 경을 베껴 쓰고 불상을 조성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한다.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스님께 공양하고 보시를 하며 방생(放生)을 하여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열 가지의 착함을 크게 펴서 4민(民)들을 등용한 것은 이루 다 일컬을 수가 없다. 승니 3만 2천 명을 득도시켰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세 사람이며 부수가 11부였다. 이는 5대(代)의 임금들이 불교[玄宗]를 진실하게 믿고 불사(佛事)를 널리 폈으며 절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고 이름있는 스님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진(晋)나라 세조(世祖)가 와서 집안을 소생시켰으며 진나라 중종(中宗)이 부유하기로는 양자강 남쪽을 차지하였으며, 명제(明帝)가 보배스러운 운을 이었고, 효(孝)무제가 덕의 바람을 빛나게 열었으며, 송(宋)나라 고조(高祖)는 근심이 조금 풀렸으나 임금의 거둥이 아직도 막혔기에 2년 동안 험한 길을 걸으며 네 번이나 전쟁을 하여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서렸고 만기(萬機)를 옷깃 안에 총괄하였다. 그러면서도 단나(檀那)의 소임을 게을리 하지 않아 항상 불법을 보호하는 마음을 가져서 대승을 높여 중하게 여기고 불상을 첨앙하였으며 용궁에서 나온 화엄경을 읽고 외워 성스러움을 키우기에 싫증내지 않았고 맑은 음성이 그치지 않았다.
송나라 태조는 이 날로 씀을 운반하여 천하가 태평하기를 펴서 매양 그물을 푸는 어짐을 일으켰고 결승(結繩)의 정치로 돌아오기를 생각하였다.
제(齊)나라 고조(高祖)는 진(眞)과 가(假)의 현묘(玄妙)함을 통찰(洞察)하고 유교와 묵교(墨敎)의 청화(菁華)를 다하여 상선(上善)을 닦고 하무(下武)를 빛내서 높였으며, 양나라 고조(高祖)는 유덕(有德)의 앞자취를 지나고 유마힐 거사의 성스러운 궤도(軌道)를 밟아서 지유(地維)가 이미 찢어진 것을 기우고 천망(天網)의 무너진 것을 떨쳤다.
새벽에 옷을 입고 앉아서 아침이 될 때까지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아니하고 돈독히 아름다운 인륜(人倫)을 모았다.
영취산(靈鷲山)의 심오한 경전과 계원(雞園)의 은밀한 뜻에 이르고 2제(諦)와 5승(乘)의 뜻과 3장(藏)과 9부(部)의 글에 이르러서는 붉은 수염[赤髭]이 자세히 하지 못한 것과 푸른 눈[靑目]이 종래 풀지 못하던 것을 아울러 얻어서 글은 거듭 봄이 없고 뜻은 두 번 생각함이 없었다.
그래서 주공과 공자의 속된 꾀를 더럽게 여기시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이름과 이치를 기롱하였다. 그러니 능히 선유(先儒)들로 하여금 체(體)를 해석하게 하고 족히 당시의 선비들로 하여금 복응(伏膺)하게 하였다. 호정(戶庭)에 들어간 이가 드무니 뉘라서 담장 안과 방안을 엿보겠는가?
홀로 성스럽게 봄을 열어서 멀리 하늘의 뜻을 발하였으니 큰 지혜가 한가롭고 한가로워서 밖으로 여덟 가지의 규칙을 정제하였고 언제나 근신하는 마음으로 안으로 네 가지의 거둥을 여미었다. 적현(赤縣)에 임하여서 자비가 넘쳤고 현호(玄扈)에 부치어서 큰 서원에 맞았다. 은택이 유정천(有頂天)에까지 두루하였고 도가 무은(無垠)에 미치었으며 신령스럽게 아름다운 상서에 응하니 조부(兆符)가 먼저 나타났다.
너그럽고 어질고 덕스럽고 효도한 것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으나 미처 전해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을 간략하게나마 거두어서 금간(金簡)에 편집하고 여러 보인(寶印)에 간직하여서 구슬 장막으로써 덮고 옥(玉)의 상자에 받들었으니 연꽃의 대(臺)가 네 기둥에 묘하게 피었고 사자의 자리가 아홉 급(級)에 일어났다. 이는 바로 연초(軟草)의 손님으로 살가죽에 써서 종이를 대신한 것이며, 또한 중향(衆香)의 손님이 피를 뿌려서 티끌을 적신 격이다.
『양기(梁記)』에 ‘무제(武帝)가 재위 49년 동안 매양 정음(庭蔭)으로써 일찍이 기울여서 항상 정법에 감득하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사해(四海)를 가진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나 망극한 은혜를 펼 수 없다. 그러기에 불교의 경전에 마음을 둔다≻ 하였다. 여덟 부(部)의 『반야경』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의 어머니로서 능히 죄의 장애를 제거하고 번뇌를 잘 씻어준다고 하여 여러 경전을 채집하여 몸소 주를 달고 해석하여서 법륜(法輪)을 항상 이어서 재(齋)와 강(講)이 끊기지 아니하며 이 뛰어난 복을 의뢰하여 효도의 마음을 펴려고 희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주 2대의 선황을 대신하여 오체투지로써 명우(冥祐)를 빌었으니 매양 오체투지하는 때마다 땅이 진동하였다. 그래서 종산(鍾山)에 애경사(愛敬寺)를 일으키고 청계(靑溪)에 지도사(智度寺)를 일으켰으며,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喜捨)하여 광택사(光宅寺)를 지었다.
보통(普通) 8년에 이르러서 다시 동태사(同泰寺)를 조성하였으니 전각(殿閣)과 누대(樓臺)가 화려하고 방사(房舍)와 낭무(廊廡)의 채색으로 꾸민 것이 구름의 아홉 층을 얕볼 만하였고 위(魏)나라의 영녕사(永寧寺)보다 화려하였다.
또한 궁 안에 지경전(至敬殿)과 경양대(景陽臺)를 세우고 일곱 묘실(廟室)을 일으키고서 다달이 다시 정찬(淨饌)을 베풀며 매양 종묘(宗廟)의 증상(蒸嘗)에 미쳐서는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측근을 시켜 은근히 교대할 생각을 가졌으며 비록 억조(億兆)가 은성하게 힘썼어도 책을 손에 거두지 아니하고 안팎으로 펴보며 밤에서 새벽까지 이르렀다.
『통사(通史)』와 『서원(書苑)』과 『경률이상(經律異相)』과 『삼교의류(三敎義類)』와 『오전문언(五典文言)』들 수천여 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옥시(獄市)에까지 은혜를 흘려서 자비와 용서를 많이 행하였으며, 그 죄가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도 얼굴빛을 고치며 오래오래 본 뒤에 붓을 내렸고, 간사함을 살피고 송사(訟事)를 들었을 적에 분명하기 신을 통한 듯하였으며 스스로 향연(享宴)이 아니면 음악을 허락하지 않았고 후궁들이 모실 적에도 다 비단을 입지 아니하고 내전(內殿)의 잠자리도 옷과 이불이 다 소복(素服)의 베와 이불이어서 풀자리와 풀신과 칡수건이었다.
천감(天鑒) 년 이후로는 입맛을 모두 끊어서 날마다 한 끼만 먹었으며 먹는 것은 채소에 그쳤다. 그리고 촉(蜀)에서 바치는 고구마의 싹도 향기롭고 맛있는 것이 고기와 같다고 의심하여서 다시 칙령을 내려 금하였으니 옛부터 제왕(帝王)으로서는 능히 따를 자가 없었다.참으로 불가사의한 임금이다.

진(晋)나라 제왕(齊王) 대유(大猷)아담한 법도(法度)가 맑고 간소(簡素)하였다.
진나라 진왕(秦王) 홍도(弘度)재간과 도량이 넓고 온화했다.
진나라 안평왕(安平王)뜻과 절개가 준엄(峻嚴)했다.
진나라 의양왕(義陽王)이치와 생각이 신묘하였다.
진나라 하비왕(下邳王)돈독하게 경술(經術)에 뜻을 두었다.
진나라 고밀왕(高密王)절개와 검소함이 홀로 뛰어났다.
진나라 남평왕(南平王)믿음이 있고 증빙함이 있었다.
진나라 건평왕(建平王)몸을 세움이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
이들 여러 임금은 공적을 돕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넓히고 높이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좌우에 있는 부락들이 다 6재(齋)를 지키고 온 집안의 높고 낮은 이가 다 5계(戒)를 받아 지니었다.

송(宋)나라는 임천왕(臨川王) 의경(義慶)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
송나라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
송나라 임천사왕(臨川嗣王) 도규(道規)
송나라 건안왕(建安王) 휴인(休仁)
위에 든 사람은 송나라의 여러 왕이다. 문재(文才)를 가졌고 아울러 크게 부처님 경전을 익혔으며 매달 6재(齋)일에는 스스로 여덟 가지의 계를 가지는 등 독실하게 단아한 문장을 익히는 데는 의경(義慶)이 가장 우수하여 연구 훈수(薰修)함이 다함 없었고, 안개처럼 밝고 해처럼 명랑하여서 유창한 말재주가 다함 없고 비처럼 흩어지고 연기처럼 날았다.
구역 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아울러 계를 가지고 휘하의 장사들이 다 부처님의 경전을 외웠다. 『선험기(宣驗記)』를 저술하여 삼보에 대해 찬술하였다.

제(齊)나라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
6경(經)을 널리 보았고 7적(籍)에 마음이 노닐어 세상에서 필해(筆海)라고 일컬었으며 당시의 유종(儒宗)이라고 불렸었다. 불교에 회향하여서는 불교의 경전을 따르고 숭상하여서 『성실론(成實論)』을 강하고 『법화경(法華經)』을 외웠으며, 『정주자(淨住子)』 20여 권을 지었다.
나라에서 녹봉을 내리는 것은 다 공덕을 경영하는 데 썼으며 은근한 위엄이 아담하고 불교다운 것은 진나라 임금과 같으나 몸소 예약(藝若)을 설하는 것은 도리어 제석천(帝釋天)과 같았다. 그래서 금언(金言)을 잠깐 여니 이미 전대의 마음을 넘어섰고 옥축(玉軸)을 겨우 펴니 먼저 불타던 것이 뒤에는 불꽃처럼 밝았다.
장막을 동하(東夏)에서 걷으니 월절(越絶)의 풍속이 변하였으며 상서로움은 서하(西河)에서 어루만지니 융중(隆中)의 풍속이 고쳐졌다.
양(梁)나라 소명 태자(昭明太子)
양나라 진안 전하(晋安殿下)
소명 태자는 도가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知]에 계합하였고 진안 전하는 덕이 천종지성(天縱之聖)에 빛났다. 예악(禮樂)의 동산에서 노닐고 인의(仁義)의 마당에서 달리니 낙수(洛水)가의 칭찬은 옛날에 드날렸는데 짝할 이가 없으며 하수(河水) 가의 글은 따를 이가 없었다. 하나라가 개방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희(姬)의 형제 여덟 분이 임금이요, 열 분의 준걸이 있으며, 아울러 학문은 백씨를 다하였고 글은 아홉 유파(流派)를 통괄하였고, 현란한 기운은 풍운(風雲)에 빼어나고 좋은 말은 해와 달보다 빛났다.
묘한 법을 존중하고 복의 문을 흠경(欽敬)하였다. 그래서 승화(承華)를 아침에 열고 숙성(肅成)을 늦게 열며 이름난 승려와 짝을 맺고 통달한 유학자와 모두 모이며 말과 이치를 토해내고 들이키며 안과 밖을 품평(品評)하여서 능히 석덕(碩德)들로 하여금 말을 꺾게 하고 선현(先賢)들로 하여금 병을 핑계대게 하였으니 경을 끼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아니하고 골목에 들어가며 양(羊)의 수레를 빌리지 아니하고 문에 나아갔다.

진(陳)나라 파양왕파(鄱陽王)
진나라 예장왕(豫章王)
진나라 형양왕(衡陽王)
진나라 계양왕(桂陽王)
진나라 의양왕(義陽王)
진나라 신채왕(新蔡王)
여섯 임금은 모두 분전(墳典)을 다스렸으며 편장(篇章)에 유희하였고 불교를 숭상하여 받들어서 미묘한 이치를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며 계를 받고 재를 가지며 매양 자비한 복전을 섬기어서 서로 이어 희사(喜捨)하였다.

진(晋)나라 팽성후(彭城侯) 유유민(劉遺民)5시(時)의 가르침을 짓고 아홉 생각의 시(詩)를 지었다.
진나라 예장태수(豫章太守) 뇌차종(雷次宗)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을 사모하여 서령사(捿靈寺)를 지었다.
진나라 임회령(臨淮令) 주속지(周續之)도를 품음이 날로 새로웠다.
진나라 신채후(新蔡侯) 필영지(畢穎之)마음으로 정역(淨域)에 나기를 기대하였다.
진나라 남양장(南陽長) 종병지(宗炳之)간고(懇苦)함을 일삼은 듯하다.
위의 다섯 현인(賢人)은 직위를 사양하고 영광된 자리를 그만두고 신부(神府)에 이름을 책(策)하며 혜원(慧遠)스님을 따라 거닐고 쉬면서 숨어 지내는 데 뜻을 두고 다 같이 한마음을 펴서 함께 그윽하고 극한 데를 밟았었다.
그래서 부용(芙蓉)을 중간 흐름에 자(藉)하고 경가(瓊柯)를 영언(詠言)으로써 덮었으며 구름 기운을 8극(極)에 나부끼고 향기로운 바람을 백 년 동안 흘렸다. 그래서 몸은 편안함을 잊으면서 더욱 화목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어서 자연스러웠다.

진(晋)나라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간략하고 질박한 데 충성되고 소질이 있다.
진나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저익(褚翌)지조(志操)가 얼음과 서리 같았다.
진나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제갈회(諸葛恢)도를 밟아 정고(貞固)하였다.
진나라 상서(尙書) 빙회(憑懷)소리와 빛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진나라 상서 사광(謝廣)정성스런 마음으로 직간(直諫)하였다.
위는 환현(桓玄)과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조하는 날에 함께 삿된 풍속을 부채질하고 승(僧)을 혐오하여 예에 항거하니, 하충(何充) 등 다섯 현인이 의관(議官)과 박사(博士) 등과 더불어 의견을 세워 말하였다.
‘살펴보니 한나라와 위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미치도록 다른 의론은 듣지 못하여서 높고 낮음의 헌장(憲章)을 잠시라도 대체(代替)함이 없었으며 사문(沙門)으로서 계율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는 자는 늘 향을 피우고 주원(呪願)하되 반드시 국가를 우선하여 복되게 돕고자 하였으니 높은 정이 극(極)함이 없어서 임금을 받들고 착함을 높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예의의 간략함은 대개 법을 지키는 데 말미암습니다. 그 때문에 선황(先皇)들이 세상을 다스릴 적에 그로 인해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른바 그들의 이로움으로 인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에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들이 감히 정을 쓰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주는 베풂이 있었고 아래로는 한결같이 착함을 닦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땅히 선황들의 옛 일을 따릅시다.’
모두의 의론이 그것을 옳게 여겨서 대중들이 맞지 아니함이 없었다 한다.

진나라 사도공(司徒公) 왕밀(王謐)
왕밀이 동쪽 궁액(宮掖)의 절문에서 금빛 광명이 땅에 비춤을 보고 가서 땅을 파니 하나의 황금 불상이 나왔는데 그 불상이 머금은 광명이 7척(尺)이었다. 이에 따로 절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셔 종신토록 공양하였으며 또 서응을 느껴 참[眞]을 드리기에 동안사(東安寺)를 지었다.

진나라 호군장군(護軍將軍) 왕묵(王默)
진나라 후장군(後將軍) 유억(劉抑)
진나라 강주자사(江州刺史) 유열(庾悅)
진나라 심양태수(尋陽太守) 완간(阮侃)
위의 네 분의 현인은 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에 귀명(歸命)하였다.

진나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하무기(何無忌)불교를 숭상하고 믿어 끝맺음을 잘했고 기원사(枳園寺)를 지었다.
안제(安帝)가 서쪽에서 돌아온 후부터 나라의 운수가 화락하고 태평하여져서 도인과 속인이 함께 기뻐하였다. 양자강 북쪽에 회창(會昌)의 법난이 있을 적에 하무기는 안제에게 권하여 불교를 일으키게 하고 공덕을 닦았다.

진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사극회(史郄恢)미타(彌陀) 법회에 나가 놀면서 금상사(金像寺)를 지었다.
진나라 무창태수(武昌太守) 도간(陶侃)
도간이 광주(廣州)에 간 날에 고기잡는 자가 바다에서 신비한 광명이 열흘이 지나도록 더욱 성함을 보았다. 사치회가 도간에게 그 일을 말하자 도간이 나아가 보니 이는 아육왕(阿育王)의 상이었기에 도간이 그것을 무창으로 가져 와서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공덕에 감동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 다 발심한 것은 도간의 힘이었다.

진나라 단양윤(丹陽尹) 고회(高悝)복을 받들고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영응사(靈應寺)를 지었다.
함화(咸和) 연간에 고회가 가다가 장후교(張侯橋)에 이르렀을 적에 포구 안을 바라보니 오색의 광명이 있어서 물 위로 나왔는데 높이가 두어 자나 되었다. 교회가 가서 보고 이에 황금 불상을 얻었는데 배광(背光)이 없고 결가부좌를 하고 있지 않지만 신령스러운 얼굴은 세상에 드문 것이었고 제조한 것이 보통과 달랐었다. 고회가 크게 발심하여 백성들에게 공덕을 권고하였다.

진나라 청신사(淸信士) 장계세(張繼世)
장계세는 물고기 잡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는데 어느 날 보니 물 위에 광명이 있었으니 이는 황금 불상이 꽃위에 결가부좌한 것으로서 간성제(簡成帝)가 안회(安悝)에게 준 상과 같았다. 장계세가 이를 보고 발심하여 그의 본업(本業)을 버리고 종일토록 책근(策勤)하니 성제(成帝)도 회향하여 부처의 위엄과 신령함을 믿게 되었다.

진나라 청신사(淸信士) 동종지(董宗之)
동종지는 본래 합포(合浦)의 물고기 잡는 사람이었는데 매양 보니 물 밑에 광명이 있기에 나가서 취하여서 이에 부처님의 배광을 얻었는데 문제(文帝)가 도안에게 보낸 상과 배광이 완연히 부합되었다. 동종지는 그로 인하여 점차 참회하고 악을 버리고 착한 데로 돌아와서 종신토록 도를 행하였으며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베껴써서 달마다 한 번씩 전독(轉讀)하여 30여 년을 오로지 한 뜻으로 업을 삼았다.

진나라 태상경(太常卿) 주응(朱鷹)
주응은 송강호(松江滬)의 뚝 입구에 있을 적에 두 석불상이 물 위로 떠서 옴을 느꼈다. 민제(愍帝)가 이를 통현사(通玄寺)에 맞아들여 공양할 적에 주응이 드디어 법의 다리에서 목숨을 맡기면서 스스로의 임무로 여기었다.

진나라 상시(常侍) 대안도(戴安道)학문과 예술이 뛰어났으며 초은사(招隱寺)를 짓고서 스스로 5협(夾) 비단으로 자수하여 상호를 만드니 그 상호가 비길 데가 없었다. 항상 신비한 광명을 놓았다.
진나라 부새랑(符璽郞) 이통(李通)뜻을 지켜 한 마음이었다.
진나라 팽성후(彭城侯) 황흔(黃欣)지극한 믿음이 순수하게 두터웠다.
진나라 태복경(太僕卿) 왕순(王珣)지극한 뜻으로 마침내 석간사(石澗寺)를 지었다.
진나라 예장태수(豫章太守) 범영(范寧)희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뜻을 맺어 지혜를 지켜나가고 곡령산(鵠嶺山)에 서선사(棲禪寺)를 지었다.
진나라 태상(太常) 은중감(殷仲堪)지극한 효성으로 몸을 바쳤으며 신령한 글에 감동되었다.
진나라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안과 밖을 널리 보고 엄공(嚴公)의 사표(師表)가 됐다.
진나라 오군(吳郡)의 장공(張恭)간절하고 정성되게 계율을 받들었다.
진나라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뛰어남을 공경하고 덕을 중하게 여기며 공경을 늘여 공평하게 가졌다.
진나라 승상(丞相) 왕도(王導)미묘한 이치를 모아서 묶었다.
진나라 낭야(瑯) 왕민(王珉)곧으면서 뉘우침이 없었다.
진나라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순수한 성품이 넘치지 아니하였다.
진나라 정위(廷尉) 환무(桓茂)덕이 중생에게 미쳤다.
진나라 태상(太常) 사유여(謝幼輿)어진 것을 나타내고 용(用)을 감추었다.
진나라 진군(陳郡)의 사혼(謝混)풍채가 세속을 비추었다.
진나라 광록(光祿)의 주백인(周伯仁)특달(特達)한 생애에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었다.
진나라 중승(中丞) 극초(郄超)어진 이를 공경하고 부처님의 법을 중하게 여겨 뜻을 먼 산림(山林)에 두었다.
진나라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풍아(風雅)한 것을 모두 보았다.
진나라 장광태수(長廣太守) 이의(李嶷)믿음을 크게 하고 도를 품었다.
진나라 상서 대원공(大原公) 왕몽(王濛)어질고 후하여 세상을 건졌다.
진나라 진군(陳郡)의 은융(殷融)영준(英俊)하기 짝할 이가 없었다.
진나라 상서 위개(衛玠)돈독하고 아담하기 짝할 이가 없었다.
진나라 심양자사(尋陽刺史) 환이(桓伊)자기를 잊고 중생들을 제도하며 동림사(東林寺)를 지었다.
진나라 시중(侍中) 원언백(袁彦伯)맑은 바람이 온통 떨쳤다.
진나라 동양태수(東陽太守) 사안석(謝安石)신기한 풍채가 높고 고상하였다.
진나라 상서 은중문(殷仲文)풍류가 아담하고 뜻을 하늘에까지 떨쳤다.
진나라 회계내사(會稽內史) 왕희지(王羲之)문필(文筆)이 뛰어났다.
진나라 익주자사(益州刺史) 모거(毛璩)자비를 기울여 정례(頂禮)하고 뜻을 세워 공평함을 가졌다.
진나라 문학(文學) 왕흡(王洽)과 유회(劉恢)와 은호(殷浩)와 허순(許詢)과 손작(孫綽) 등
이들은 모두 한 대의 이름난 무리요 1천 리를 달리는 준수한 기마(驥馬)로서 학문을 버리는 날이 없었으니 낙수(洛水)의 동쪽에서 그 넓은 문학을 알겠으며,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니 옆의 사람들도 그들이 병이 날까 두려워했다. 꽃다운 소리는 세속을 뛰어넘었고 아담한 기상은 무리에서 뛰어났다. 원언백과 같은 이는 『후한서(後漢書)』를 지었으며 부처님의 이치를 아름답게 칭찬하여 현궐(玄闕)과 의부(義府)가 도림(道林)을 숭앙하고 사모하였다.

송(宋)나라 상서 종경(宗敬)간곡한 지성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송나라 중서령(中書令) 심경(沈慶)정성을 기울여서 중생을 감득시켰다.
송나라 광록경(光祿卿) 대옹(戴顒)교묘한 생각이 신(神)에 통하였다. 대옹이 손수 한 길 여섯 자의 황금 불상을 만들었는데 상호가 견줄 데가 없었다. 뒤에는 광명을 놓았다고 한다.
송나라 신정후(新亭侯) 유소(劉紹)지극한 원(願)이 은근히 부합되었다.
송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왕중덕(王仲德)정성이 사무쳤다.
송나라 중서(中書) 범태(范泰)물건을 널리 알아 현묘하게 통하였다.
송나라 어사(御史) 왕홍(王弘)맑고 통달함이 세속을 초월하였다.
송나라 시중 사공 소공(司空昭公) 유면(劉勔)왕실 돕기를 꾀하였다.
송나라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공경하고 존중함이 더욱 지극하여 폐백을 가지고 엄한 스승에게 가서 문인이 되었다.
송나라 의동(儀同) 소사활(蕭思活)아들과 아우들이 문(門)에 모이고 몸을 이겨 계를 보호하였다.
송나라 상서 사장(謝莊)총명하고 깨달음이 특달(特達)하였다.
제(齊)나라 어사 원민손(袁敏孫)계율을 받들어 게으르지 않았다.
제나라 이부(吏部) 사조(謝眺)정을 반연함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공경하여 믿음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제나라 태위 문충공(文忠公) 서효사(徐孝嗣)
제나라 태위 문헌공(文憲公) 왕검(王儉)
위의 두 분 중에 문춘공은 주석(柱石)의 재목이었고, 문헌공은 이윤(伊尹)과 곽광(霍光) 같은 도량이 있어서 경륜(經綸)을 빠짐없이 갖추어 조정과 지방에서 모두 우러러 보았다. 진실하게 믿는 것이 가빈(嘉賓)보다 더 나았고, 알고 깨달음이 영운(靈運)에 비겼으니, 부처님의 법이 빛나게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에게 달렸었다 하겠다.

제나라 특진(特進) 장서(張緖)지극한 이치에 발심하였다.
제나라 중서령(中書令) 주옹(周顒)현묘한 이치를 아는 것이 세상을 덮었다.
제나라 시중 좌상서 중서령 태자 중서자 국자좨주 징군(中書令 太子 中庶子 國子祭酒 徵君) 하윤(何胤)

위의 사람들은 평소의 행적이 충성되고 은밀하며 풍화(風化)의 힘이 한가하고 넉넉하여서 옥촉(玉燭)의 정기(禎氣)를 안았고 대현(大賢)의 일기(一期)에 응하였다.
학문은 경과 역사를 다하였고 마음은 현묘하고 심오함을 간직하였다. 화천 변서(和天變序)의 음악과 후성 곡대(后成曲臺)의 예로써 직하(稷下)의 의론과 구양수(歐陽修)와 소자(蕭子)의 글을 엄순(淹淳)하였으며, 역(易)은 경(京)과 시(施)를 꿰뚫었고, 시(詩)는 한(韓)과 초(楚)로 나눈 것을 다 훈석(訓釋)하여 반드시 해통(該通)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업(業)을 간청하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여서 헛되게 왔다가 실답게 돌아가며 무리를 모아 교수함에 배워서 다스림이 무리를 이루었다.
반야사(般若寺)에서 밝은 구슬로 기둥을 세웠으며 불교에 깊이 향하여 내교(內敎)에 아담하고 돈독하였다. 구슬 기둥이 칠일 낮과 칠일 밤 동안 방광(放光)을 하였다.

양(梁)나라 시중 상서 좌복야 중위장군 특진 우광록 간숙자(特進 右光祿 簡肅子) 서면(徐勉)
이 분은 온순하고 아담함이 일찍 소문이 나고 고귀한 인품이 일찍 드러나서 명당(明堂)과 곡대(曲臺)의 전적(典籍)과 좌하(左夏)와 한맹(韓孟)의 글과 풍비(風飛)와 염수(焱竪)의 글과 엄중(淹中) 직하(稷下)의 학문과 용궁(龍宮)과 반주(半珠)의 도와 취산(鷲山)과 화수(華水)의 책들을 그 근원을 궁구하고 심오함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번갈아 가면서 마음을 두었었다.

양나라 시중 호군장군 간자(簡子) 주사(周舍)
이 분은 기의(岐嶷)함이 일찍이 이루어지고 어려서부터 출중함을 발하여서 증증(蒸蒸)한 색의 어려움은 맹무(孟武)의 물음을 수고하지 아니하였고 충성되고 곧게 공경하여 권함은 계강(季康)이 의심함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다.
일이 집안에 나타나고 이름이 나라와 읍에 전하여져서 9류(流)와 백씨(百氏)의 기록과 6시(詩)와 5례(禮)의 글을 다 널리 전고(前古)에 다하고 당세에 기준이 되었다.
겸하여 부처의 계를 받아 가지고 불교의 문으로 회향하면서 저 기름지고 피비린내 나는 것을 끊고 소식(素食)을 달게 여기며 용궁(龍宮)에서 나온 금첩(金牒)을 연구하고 곡림(鵠林)의 옥지(玉旨)를 다 연구하였다. 매양 비사리성[毘城]의 훌륭한 편집과 마갈타(摩竭陀) 나라의 미묘한 말을 모아서 뿔을 꺾고 턱을 푸는 데 홀로 당시의 이름난 이보다 높았다.

양나라 상서령(尙書令) 심약(沈約)문원(文苑)과 한림(翰林)에서 홀로 양자강 밖에 이름을 떨쳤다. 학문은 세상의 모범이 되었고 재주는 당시의 뛰어난 이들을 덮었다.
양나라 상서 복야(僕射) 주이(朱异)임금의 도를 도와 다하고 법의 깃대를 세웠다.
양나라 시흥령(始興令) 육함(陸咸)영특하고 날카로움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불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양나라 시중 원찬(袁粲)조행이 밝고 곧으며 매양 법의 자리를 세웠다.
양나라 국자좨주(國子祭酒) 장충(張充)크게 배우고 깊이 연구하며 현묘한 도에 뜻을 돈독하게 하였다.
양나라 태자시독(太子侍讀) 왕엽(王曄)세상에서 뛰어나서 짝할 이가 없다.
양나라 동궁 태자 서자(東宮 太子 庶子) 유증(柳澄)현묘한 도리를 말하여 다함이 없었다.
양나라 중서령 왕승유(王僧孺)불교와 유교를 종합하여 배웠다.
양나라 저작(著作) 소자현(簫子顯)품격이 안과 밖을 종합하였다.
양나라 탁지상서(度支尙書) 소자각(簫子恪)현묘한 도에 안심하였다.
양나라 비서감(祕書監) 하경객(何敬客)보통의 윤리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양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사거(謝擧)불교를 위하여 조정에서 항쟁하였다.
양나라 행군하부(行軍下簿) 유효위(劉孝威)안국(安國)의 자세하고 삼가함이 있었고 영운(靈運)의 현묘한 풍도(風度)가 있었다.
양나라 황문(黃門) 진백지(陳伯之)옛 것을 믿고 좋아하였다.
양나라 중서자(中庶子) 공휴원(孔休源)몸을 충직하고 바른 데 세우고 자기를 청각(淸恪)한 데 행하였다.
양나라 중서자 평서안 북융 소장군 양양령(中庶子 平西安 北戎 昭將軍 襄陽令) 유준(劉遵)
의표(儀表)가 온화하고 윤택하며 풍도(風度)와 자세가 맑고 밝았다. 그래서 종종걸음을 치더라도 빛이 나고 오래도록 공경하게 되니 지초잎[芝葉]과 은 갈고리의 교묘한 것은 장막 가운데에 매달 만하고 거북의 문양과 새 발자국의 기이함은 대 위에 둘 만하였다.

양나라 천관상서(天官尙書) 유효작(劉孝綽)명성이 세상을 덮었다.
양나라 양주 태수(襄州 太守) 유진(柳津)맹세코 높은 버슬을 버리고 현묘함을 숭상하여 도를 실천하였다.
양나라 문학(文學) 왕원장(王元長)영준한 기상은 그를 앞서는 이가 없었다.
양나라 영군장군(領軍將軍) 유효의(劉孝儀)평소에 충직하고 주밀하였고 멀리는 출세간의 도리를 숭상하였다.
양나라 좌승(左丞) 장직(張稷)참을 알고 이치를 통달하였다.
양나라 영만 장사(寧蠻 長史) 서금(徐擒)풍아(風雅)가 한가하고 아담하며 맑은 말이 신(神)의 경지에 들어갔다.
양나라 중서(中書) 안지추(顔之推)공손하고 검소하며 독실하고 믿음이 있었다.
양나라 시중 중서자(侍中 中庶子) 온(溫)의 아들 왕훈(王訓)신비한 용(用)이 맑고 밝으며 풍의(風儀)가 한가하고 준수하였다. 나가서는 충성하고 들어와서는 효도하며 용기와 의리가 청렴함을 숭상하였고 분소(墳素)는 반드시 해통하고 유략(流略)은 이를 총괄하였다.
양나라 산기상시 장후(散騎常侍 章侯) 왕규(王規)조정의 의표(儀表)와 재목으로서 앙앙(昻昻)하게 뒤로 나가서 석거(石渠)에 갓끈을 날리고 완완(婉婉)히 오는 모양은 금마(金馬)에 옷을 떨친다.
양나라 동양군 오양현 쌍림사(東陽郡 烏陽縣 雙林寺) 부대사(傅大士)
항상 법륜(法輪)을 굴리고 세존(世尊)의 지위를 이어서 융성시키면서 몸을 세계에 나누어 여러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혹은 가슴 사이에 잠깐 금빛을 나타내 보이고 주먹 안에서 이상한 향내를 때로 토하며 혹은 몸의 길이가 한 길 남짓한데 팔이 무릎을 넘으며 다리의 길이가 두 자이고 손가락 길이가 다섯 치이며 두 눈은 분명하여 두 눈동자가 빛나게 비추고 얼굴 모습은 단정하고 엄숙하여서 큰 사람의 상호가 있었다.
사신을 보내 글을 써 가지고 양나라 무제(武帝)에게 주기를 ‘쌍림(雙林)의 나무 아래에서 당래에 해탈을 얻을 선혜(善惠)대사가 나라의 임금인 구세(救世) 보살에게 아룁니다. 이제 상의 착함과 중간의 착함과 하의 착함을 조목하여 올리니 능히 받아 지니기를 바랍니다. 그 상의 착함은 대략 생각을 비움으로 근본을 삼고, 집착하지 아니함으로 종(宗)을 삼으며, 상(相)을 잊음으로 원인을 삼고, 열반으로 결과를 삼는 것입니다. 그 중간의 착함은 대략 몸을 닦음으로 근본을 삼고, 나라를 다스림으로 종을 삼으면 하늘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나는 과보를 받아 안락할 것입니다. 그 하의 착함은 대략 중생들을 보호하여 기릅니다’ 하니, 양나라 무제가 이를 맞아 종산(鍾山)의 아래 정림사(定林寺)에 살게 하였다.
부대사는 앉으면 높은 소나무의 그늘에 앉고 누우면 반석을 의지하며 4철(徹)의 가운데 항상 감로를 비내리고 예순 날 안에 항상 하늘 꽃을 비내렸다.
양나라 무제가 화림원(華林園) 중운전(重雲殿)에서 반야(般若)의 법회를 열 적에 홀로 한 탑을 설치하여 부대사로 하여금 임금과 대양(對揚)하게 하고 옥으로 만든 연(輦)으로 전각에 오르게 하였더니 부대사가 안연(晏然)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헌사(憲司)가 이를 비난하여 물으니 부대사는 다만 ‘법지(法地)가 만일 움직이면 일체가 편치 아니할 것이다’ 하고, 또 ‘양나라 운수는 장차 마치게 될 것이니 전쟁의 재앙을 구하겠다’ 하고서 이에 팔을 태워 등잔을 만들어서 오는 재화를 물리치기를 바랐다. 태건(太建) 원년 여름에 이르러서 오른쪽 갈비를 땅에 대고 누워서 엄연(奄然)히 열반하였다.
그 때는 더위가 대단하여서 불같이 쪼이는 햇볕인데도 더위와 따스함이 다름 없었으며 얼굴빛이 즐거움으로 폈고 광채가 곱고 고왔으며 향냄새가 가득 차고 몸을 구부리고 펴는 것이 항시와 같았으니 보는 자들이 발심해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라 하였다.

진(陳)나라 상서 우복야 장후(尙書 右僕射 章侯) 서릉(徐陵)문장이 관절(冠絶)하였고 공경하여 믿음이 짝할 이가 없었다. 불상 1만구를 만들고 경을 1장(藏)을 베껴썼다.
진나라 소보상서 좌복야(少保尙書 左僕射) 원헌(袁憲)충절을 짝할 이가 드물었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음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었다. 상정림사(上定林寺)에서 협저(夾紵) 불상 10구를 만들었다.
진나라 상서복야(尙書僕射) 강총(江總)정(情)을 반연함이 영발(穎拔)하여 전대(前代)에 나타났다. 광산(匡山)에 미륵상을 조성하니 높이 80척(尺)이다. 일체경 1장(藏) 3천 7백52권을 베껴썼다.
진나라 이부상서 정위경(吏部尙書 廷尉卿) 모가(毛嘉)뜻과 절개가 높고 준엄하며 어질고 두텁고 겸하여 높았다. 글씨는 두 왕씨(王氏)를 운필하고 학문은 세 가씨(賈氏)를 짝하였다. 몸소 스스로 붓을 움직여 『유마경(維摩經)』을 쓰니 양나라 세자 운(雲)이 능히 가필(加筆)하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진나라 동궁사인(東宮舍人) 부재(傅縡)학문은 왕씨(王氏)와 정씨(鄭氏)를 짝하고 재주는 사씨(謝氏)와 육씨(陸氏)를 견줄 만했다. 삼교(三敎)를 모두 열람하고 묘하게 1승(乘)을 이해하여 발췌한 것이 무리를 뛰어났기에 해내(海內)에서 추종하여 높였다.
이러한 인용한 것들은 모두 기록한 이가 있고 모두 사적(史籍)에 실려 있다. 그러기에 자세히 말하지 아니한다.
사비(謝朏)와 사람(謝覽)과 같은 이는 삶을 버리고 의(義)를 세웠으며, 유강(柳忼)과 유회(柳恢)와 같은 이는 공(功)을 미루어주고 차지하지 않았으며, 강엄(江淹)과 임방(任昉) 같은 이는 끝과 처음에 마땅한 것을 좇았으며, 유묘(劉杳)와 고협(顧協) 같은 이는 저술(著述)이 다 아름다웠으며, 장홍책(張弘策)의 신밀(愼密)함과 여승진(呂僧珍)의 게으르지 아니함과 정소숙(鄭紹叔)의 충성과 왕업과 소영주(蕭穎胄)의 의거(義擧)에 먼저 응(膺)함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다 세상의 보배가 되었다. 또한 전 집안이 다 일대의 큰 선비로서 참으로 온 천하에 이름 있는 자손이어서 아울러 나라를 경영하는 책략(策略)을 쌓았고 모두 군자의 문이라고 일컬으니 사직(社稷)이 이로 인하여 편안하여지고 위와 아래가 그로 말미암아 화목하여졌다.
문(文)이 있고 무(武)가 있으며 세상을 바로잡고 집을 바로잡으니 사람들은 9합(合)의 공을 표시하고 아울러 천추의 업을 세웠다.
그리고 또 그들의 오체(五體)를 기울여서 우리 삼보를 공경하며 인욕(忍辱)과 자비로써 자기를 용서하여 남을 미루어 미치지 않음이 없어서 현황(玄黃) 보기를 꿈과 같이 하고 종고(鍾鼓) 듣기를 귀먹은 이 같이 하며 척벽(尺璧)을 천하게 여기고 한 마디의 말을 귀중하게 여기며 몸을 던져서 반쪽 게송(偈頌)을 빌었으니 몽염(蒙恬)의 붓이 여러 번 다하여도 그들이 행한 것은 능히 기록할 수가 없으며 채륜(蔡倫)의 종이를 한갓 허비할 뿐 그들의 이익됨을 쉽게 펼 수가 없다. 이러한 사례가 매우 많기에 이를 다 말할 수가 없다.
촉(蜀)과 진(陳)과 수(隋)의 세상이 귀하고 시절이 번영할 때에 여염(閭閻)의 사녀(士女)들로서 높은 문이 여합(閭闔)에 연하였고 높은 터가 임금의 뜰에 접(接)하였으니 척리(戚里)의 황친(皇親)이며 제경(帝京)의 부실(富室)이었지마는 옹옹(顒顒)하게 도를 사모하여 각기 불경을 펴서 입에는 금언(金言)을 외우고 손으로는 옥축(玉軸)을 폈다. 그러기에 그 무리들이 마치 풀과 나무가 대지(大地)를 의지한 듯하고 그들의 만남이 마치 비늘달린 것들이 긴 하천에 떠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가난한 집의 농사짓는 자와 이름 없는 촌로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약간이라도 신심을 낸 이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다 기록에 남아 있겠는가?
그 때문에 4생(生)에 복과 도움을 주고 3세(世)에 경자(慶資)하여서 진실로 어질고 진실로 용서하며 아들에 미치고 손자에 미치는 그들의 능히 행하는 덕은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겠다.
위(魏)나라 태조(太祖) 도무(道武)황제이름은 규(珪)이다.
운수가 상란(喪亂)함을 맞아 우내(宇內)가 나뉘고 붕괴되어서 생민(生民)들이 조두(俎豆)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백성들이 때때로 융마(戎馬)의 자취만 보아서 예악(禮樂)과 문장이 땅에 떨어져 장차 다하려 할 적에 태조가 영웅 호걸의 깊은 자세로써 큰 임금의 바른 도량(度量)을 가져서 조정과 지방을 평정(平定)하여 문득 중원[中州]을 차지하고 크게 용광(龍光)을 열고 은근히 일용(日用)을 이바지하였다.
천흥(天興) 원년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부처님의 법이 일어남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경읍(京邑)에 있어서 모범을 세워 절의 집을 닦아 정돈하여라’ 하고, 또 우(虞)와 괵(虢)의 땅에 15층의 부도(浮圖)를 조성하고 개태사(開泰寺)와 정국사(定國寺)의 두 절을 일으켰으며, 일체경(一切經)을 베껴쓰고 1천의 황금 불상을 주조하였으며, 3백 명의 승려들을 불러서 매달 법회를 하였다.

위나라 태종(太宗) 명원(明元)황제이름은 사(嗣)이다.
밝고 슬기롭고 바르게 관찰하여서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였다. 4생(生)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삼보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업도(鄴都)에서 크게 승니를 득도시켰다.

위나라 세조(世祖) 태무(太武)황제이름은 도(燾)이다.
이 분의 기상은 당시를 덮고 위엄은 천하에 떨쳐서 사해를 갑독(匣牘)하고 1만 나라를 뇌롱(牢籠)하였다. 일승(一乘)에 회향하여 삼보에 귀의하였으며 다시 가람(伽藍)의 뛰어난 땅에 초제(招提)의 깨끗한 궁전을 창건하였으며 이어서 업성(鄴城)에 종정사(宗正寺)를 지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최호(崔晧)에게 미혹되어 비로소 바른 법을 쇠퇴케 하였다.

위나라 고종(高宗) 문성(文成)황제이름은 준(濬)이다.
총명하고 활달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풍격(風格)이 무리에서 뛰어났었다. 불교를 중흥시키고 사찰을 수복(修復)하였으니,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은 문성으로부터여서 무릇 승니 3만여의 사람을 득도시켰다.

위나라 현조(顯祖) 헌문(獻文)황제이름은 홍(弘)이다.
도덕은 저 하늘에 짝하고 도는 극성(極聖)에 이웃하였으며 초은사(招隱寺)를 짓고 참선하는 승려들을 불러와 앉게 하였다.

위나라 고조(高祖) 효문(孝文)이름은 굉(宏)이다.
신기한 광명이 집을 비추고 온화한 기운이 뜰에 가득 찼었다.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작작(綽綽)하였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게 현저하였으며 정치의 일을 듣고 보고하면서 착함을 따르기 물 흐르듯 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하고 긍휼히 여겨 항상 구제하여 이익되게 하기를 생각하였다. 태후의 기일(忌日)이면 능의 왼편에서 통곡하였으며 2일 동안 음식물을 끊고서 통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업도에 안양사(安養寺)를 지으니 석덕 고승(碩德高僧)들이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였으며 6궁(宮)의 시녀(侍女)들이 다 재를 가져서 매년 3장월(長月)과 6재일(齋日)을 지키게 하였고 정진하여 불경을 외우는 자들은 모두 득도시켜 출가시켰다.
일은 크고 작음이 없이 두루 나누어 주기에 힘썼으며 항상 사관(史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나쁜 일도 숨기지 말고 쓰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보는 데로 문득 강을 하였다. 좋은 선비들을 사랑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뜻이 굶주린 이가 밥을 찾듯 하고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 하였다.
장자와 노자의 말을 좋아하며 더욱이 불교에 돈독하였다. 재조(才藻:文才)가 부하고 넉넉하여 문장이 백 편(篇)이며, 유연(悠然)하게 멀리가 서 세상의 사무로써 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어려서 대통(大統)을 이었고 일찍이 예성(叡聖)의 풍도를 나타냈으며 때에 문명(文明)으로써 일을 꾸리고 우유(優遊)로써 몸을 공(拱)하여 현묘한 도를 보아 홀로 얻었으나 스스로 신계(神契)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標)하는 것이 진실로 명화(冥化)에 부합되었다.
몸소 큰 정사를 총괄하여서 하루에 만 기(機)를 살펴서 10여 년 동안 일찍이 틈이 없지마는 공경하고 밝게 옛날을 상고하여 하늘과 사람에 맞추어서 제왕(帝王)이 지은 것과 조정과 지방의 궤도(軌度)를 짐작하여 쓰고 버리고 하였으며 문장에 밝았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다하고 신명을 궁구하며 하늘을 잇고 책력을 이었다.
선황제(先皇帝)를 받들기 위하여서 대각사(大覺寺)에서 법당과 요사를 수리하는데 임금의 보시가 높고 두터우며 공급함이 풍부하고 화려하였다. 그래서 진영을 모신 탑과 경의 좌대가 찬연(粲然)하게 갖추어졌으며, 위에는 황금 표찰(表刹)로 표하고 아래로는 은의 기둥을 나열하니 기러기의 날개가 구름을 인한 듯하고 용의 머리가 해를 받친 듯하였으며, 이름 있는 스님들이 발꿈치를 잇대고 법의 도반(道伴)들이 어깨를 맞대면서 아침에는 연못에 거닐고 저녁에는 향각(香閣)에 머무니 바람이 지혜의 동산에 흐르고 범종이 참선하는 숲에 울려 퍼졌다. 3백명의 승려를 불러서 6시(時)에 빠지지 아니하였다. 득도한 승니가 1만 4천 인이었다.

위나라 세종(世宗) 선무(宣武)황제이름은 각(恪)이다.
식건전(式乾殿)에서 여러 스님들과 조정의 신하들을 위하여 『유마경』을 강하였다.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고 경과 사(史)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불교를 좋아하였고 풍의(風儀)가 훌륭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덕은 음양과 같고 밝기는 해와 달과 같았다. 문교(文敎)를 전파하여 먼 사람들까지 품었고 예악을 고루어서 준걸스럽고 특달한 이들을 표창하였다. 그래서 3하(河)와 6군(郡)의 땅과 경수(涇水)ㆍ위수(渭水)ㆍ패수(覇水)ㆍ산수(滻水)의 구역들에 보통사(普通寺)와 대정사(大定寺) 등의 네 개의 사찰을 지어서 3학(學)을 수행하는 1천 승려에게 공양하였다.

위나라 숙종(肅宗) 효명(孝明)황제이름은 후(詡)이다.
일거(一居)의 정숙함을 얻었고 2린(隣)의 극함을 체달하였으며 3승(乘)을 총괄하여 치빙(馳騁)하고 4구(衢)를 임하여 한가히 걸었다.
이어서 업도에 대각사(大覺寺)를 지으니 그윽한 밀실과 들쭉날쭉한 복전(複殿)이어서 바람이 그의 문에서 나오고 구름과 안개가 서까래와 기둥에서 일어났다.
진기한 나무들이 서로 얽힘을 보았고 꽃다운 풀들이 쌓임과 같음을 보았으니 수달다(須達多)장자가 땅에 금을 깐 것과 서로 비교하겠고 가란타(迦蘭陀) 죽원(竹園)과는 비교도 아니 된다.

위나라 경종(敬宗) 효장황제(孝莊皇帝)이름은 유(悠)이다. 어느 책에는 이름이 가(假)라고 되어 있다.
풍채가 빼어나고 고매하며 자세와 얼굴이 괴위(瑰偉)하였다. 본래 충정(忠貞)을 실천하였기에 일찍이 백성들이 바라는 분이라고 일컬어졌다. 다섯 개의 정사를 지었으며 1만의 석상(石像)을 조각하였다.

서위(西魏)의 무(武)황제이름은 수(修)이다.
운수와 술수를 잘 궁구하고 무예(武藝)까지도 능하였다. 진위(眞位)에 오르는 요지(要旨)를 찬탈하였지마는 출세(出世)의 현묘한 계책을 흠앙(欽仰)하여서 영희(永熙) 1년에 장안에서 척기사(陟屺寺)를 지었으며 2백 명의 이름 있는 스님들을 공양하였고 4시(時)로 불경을 강하고 외워서 헛되이 버리는 날이 없었다.

서위의 문(文)황제이름은 보거(寶炬)이다.
덕을 세우고 인(仁)을 세웠으며 문(文)을 잘하고 무(武)를 잘하였다. 항상 믿음과 희사(喜捨)를 행하고 매양 자비를 행하였다. 대통(大統) 1년에 반야사(般若寺)를 지었으며 외로운 이와 늙은 이를 구제하였고 병든 승려를 공양하였다. 입으로는 『법화경』을 외우고 몸으로는 청정한 계를 받아 지녔다. 칠각전(七覺殿)을 일으키고 사선실(四禪室)을 만들었으며, 공양을 거두지 아니하고 보시와 인욕이 끝이 없었다.

서위의 효정(孝靖)황제이름은 선견(善見)이다.
위(魏)나라는 임금의 상서에 비로소 응하였고 멀리 명부(冥符)에 맞았으며 수구(壽丘)를 경사스럽게 모아서 신비한 비춤이 물과 같아 9위(圍)에 어짐을 가피하고 사해(四海)에 위엄이 더하였다. 3황(皇)의 무성한 서통(緖統)을 이었으며 5제(帝)의 아름다운 발자국을 이었다.
고조(高祖)께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천하를 제도하여 서울을 옮기고 임금의 업을 정하였으며, 세종(世宗)이 슬기롭고 밝음으로써 임금의 업을 받들어서 중원의 구역을 넓히고 편히 하였는데 효정황제가 여러 성왕(聖王)의 기초를 이어서 하늘이 주신 왕업을 의뢰하였으며 하늘의 상을 우러러보고 사람들의 꾀를 굽어보아 맞추었으며 옛 방식을 멀리 따르고 때의 일을 깊이 알아서 시구(耆龜)를 상고하고 길한 것을 이어서 장부(漳滏)로 집을 옮겨 보력(寶曆)을 두 번 번창하게 하고 큰 기초를 극히 세웠으니, 성스러운 덕이 거듭 빛나서 아홉 대(代)에 미쳐 마치게 되었다.

서위의 문조(文祖) 운종정제(運鍾靖帝)
위는 위나라가 군림(君臨)하여 17대 황제이고 1백70년이다. 나라의 큰 절이 47개였다.
또한 북쪽에 있으면서도 항상 서쪽을 다스리고 널리 각각 위아래 30여 리에 돌을 조각하고 감실(龕室)을 두어서 두루 부처님의 상호를 나열한 것이 이루 다할 수가 없어서 장엄하고 크게 볼 만하였으니 지금도 현존하여서 비록 법이 멸하는 시기를 만났지만 이 감실은 파괴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도 왕공(王公)과 귀실(貴室)과 5등(等)의 제후들의 절이 8백 39개이고 백성들이 지은 절이 3만여 개였다. 득도한 총 승니의 수는 2백만 명이었고 열아홉 사람이 49부(部)의 경을 번역하였다.

고(高)씨의 제(齊)나라 고조(高祖) 문선(文宣)황제이름은 양(洋)이다.
날로 나아가는 신령함을 나리고 구름을 바라보는 경사를 드리웠다. 하수의 거북이 그림을 지고 나오니 임금으로 기록되는 정부(禎符)를 징험(懲驗)하겠으며, 바다 밖까지 풍속을 점치니 중국에 성스러운 임금이 있음을 알았다. 아홉 목(牧)들이 와서 조공하고 1백 신들이 다 질서를 지켰다. 도를 귀중하게 여기고 덕을 숭상하며 용(用)을 간직하고 어진 것을 나타내어서 혹은 나가고 혹은 처(處)하니 작은 절개와 지조로써 헤아리지 못할 것이요, 언뜻 슬기로우면서도 언뜻 어리석은 듯하기에 대인(大人)이 알아보는 것이다.
상법(像法)을 크게 통하고 황금의 땅을 장엄함에 이르러서는 기틀[機]로 오는 이가 깊고 얕지마는 모두 열반의 문에 나아가고, 국토는 청정함과 더러움을 따르지만 다 한가지로 유리의 빛이었다.
교만을 꺾어 조복받는 데는 단수(丹水)의 싸움이 다르지만 얽히고 설킴을 싫어서 벗어나는 데는 소화(昭華)의 예가 다르다.
그러기에 불교를 짐작하여서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무리들을 부수고 깨달은 분을 헌장(憲章)하여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높음도 가볍게 여겼으니, 이야말로 큰 방편으로 물건을 응하고 큰 서원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함이라 하겠다.
천보(天保)의 처음에 조선사(稠禪師)를 청하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이에 또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술을 금하였으며 매와 새매를 놓아 버리고 관(官)에서 그물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리고 또 천하에 명을 내려 도살(屠殺)하는 것을 금지시켜서 3장월(長月)과 6재일(齋日)을 지키게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권고하여 재를 가지게 하였으며 모든 관이나 원(園)과 육방(六坊)에서 공사(公私)간에 비린내 나는 나물을 다 제거하게 하고 밖에서 있는 것은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절과 탑을 크게 일으키고 승니를 득도시켜 여러 주(州)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 소현대통(昭玄大統)과 법상법사(法上法師)로써 계의 스승을 삼고 항상 머리털을 땅에 펴 깔아서 스승으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천보(天保) 2년에 조칙을 내리기를 ‘우러러 자비하고 광명하심을 힘입어서 사해를 편하게 통솔하니 그의 은덕을 갚는 길은 오직 정각(正覺)을 기대야 한다. 그러기에 여러 새들의 삶을 손상하는 무리들을 마땅히 산 숲에 놓아 주며 그리고 이 땅으로써 태황(太皇)과 태후(太后)를 위하여 보배탑을 경영한다’ 하고, 매 기르던 사람과 조(曹)를 폐지하여 보덕사(報德寺)를 만들었으며 득도시킨 승니는 8천여 명이나 되니, 10년 동안에 부처님 법이 크게 성하였다.

제나라 숙종(肅宗) 효소(孝昭)황제이름은 연(演)이다.
추전(樞電)의 징험을 이었고 성홍(星虹)의 경사를 계승하여 광명이 4표(表)를 덮고 맞음이 3진(辰)에 순하였으며 도를 체득하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어진 것을 나타내고 성스러움을 지었다. 불교[至敎]를 받들어 높이고 뜻을 현묘한 문에 의탁하였으니, 바라나시[柰國]의 법륜(法輪)과 니원(尼園)의 자세한 말씀과 4제(諦)와 8건도(揵度)의 종지(宗旨)와 5승(乘)과 10항(行)의 전표(詮表)한 것이 향산(香山)의 큰 힘으로도 이기지 못한다고 하겠거든 속을 싸고 가죽에 쓴 것도 또한 갖추지 못한다 하겠다. 그러나 세간의 행업(行業)을 따르고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큰 맹세에 응하여서 선황(先皇)을 받들어서 일체경(一切經) 12장(藏)을 베껴쓰니 합하여 3만 8천47권이다. 청수(靑首)와 자색 끈과 은으로 줄을 만들고 황금으로 새겼으며 연꽃으로 덮어서 사자의 대(臺)에 바쳤다. 글은 해와 달과 더불어 함께 달리고 공은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넓어졌는데 승니를 득도시킨 것이 무릇 3천여 명이었다.

제나라 세조(世祖) 무성(武成)황제이름은 담(湛)이다.
여러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서 응당 불교의 사찰에 노닐게 하였다. 꽃다운 숲의 동산 안에는 다시 화개(花蓋)의 말을 일으켰고 낙양(洛陽) 고을의 성 곁에는 도리어 새서(璽書)의 송(頌)1)을 새겨 놓았다. 층층의 대와 별관(別觀)에는 모두 가람(伽藍)을 세우고 벽옥(璧玉)과 주기(珠璣)는 다 공양하는 도구에 충당하였으며 몸소 스스로 정례(頂禮)하고 매양의 일에 경행(經行)하였다.
대녕(大寧) 1년에 보배의 탑을 경영하면서 진어(珍御)의 옷을 벗어 다 보시에 쓰고 『대품경(大品經)』을 굴리시어 다달이 두어 번씩 하였다.
위는 고씨(高氏)의 제나라 여섯 임금으로서 28년 동안이다. 나라에서 세운 절이 43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여섯 명이요, 번역한 부수가 14부였다.

주(周)나라 효민(孝愍)황제이름은 각(覺)이다.
밝고 넉넉하여 기틀을 연구하고 소통(疎通)시킴이 크고도 멀었다. 타고난 바탕이 신무(神武)하니 백성들이 옥과 송사를 돌렸었다. 황금 거울을 쥐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옥형(玉衡)을 가지런히 하여서 극(極)을 세웠다. 때는 박상(剝喪)함을 만나고 세상이 운뢰(雲雷)를 막았기에 땅이 절유(絶維)를 농락[絡]하고 해 바퀴가 비춤을 가렸지만 문득 9복(服)을 돌려서 1백 신령들을 놀라게 하였다.
주나라 원년에 상법(像法)의 교화를 크게 펴니 바다 안의 명덕(名德)들이 의리를 사모하고 어진 데 돌아와서 널리 해탈의 문을 열고 환하게 보리(菩提)의 길을 열어 유정천(有頂天)에 다하도록 평등하게 자비한 구름으로 덮었으며 땅이 가이없는 데까지 다하도록 모두 지혜의 해로 덮었다.

주나라 효명(孝明)황제이름은 육(毓)이다.
1만 나라에 임금으로 임하시어 백성들을 평장(平章)하였다. 안으로는 9족(族)을 화친하게 하고 밖으로는 4문(門)이 화목하게 하였다.
개구(介丘)에 옥과 보배들을 쌓아 놓고 도산(塗山)에 옥과 비단들이 있는 것을 보았으며, 나아가 근본과 지말(枝末)이 유한(維翰)이요 벌려 있는 벽(辟)이 여러 관원이라, 5계(戒)와 10행(行)이 함께 귀의하는 도리를 알았고 밖으로 관하고 안으로 깨닫는 것이 한가지로 해탈의 문에 올랐다. 세계는 다함이 있지마는 큰 서원은 다함이 없었다. 2년에 선황(先皇)의 뜻을 받아서 공경스럽게 노사나(盧舍那)부처를 직조(織造)한 불상 한 구와 아울러 두 보살의 상을 만들고, 높이가 2장(丈) 6척(尺) 등신(等身)인 박달나무의 불상 12구와 각각 두 보살과 금강사자(金剛師子) 등을 조성하니 장려(壯麗)함이 하늘이 만든 듯하고 미묘함이 신이 조성한 듯하였다.

주나라 태조(太祖) 문(文)황제이름은 태(泰)이다.
총명하여 지혜를 간직하고 재주가 뛰어나 체통을 이었었다. 그러기에 4문(門)이 화목하였고 1백 가지의 법도가 시절과 차례에 맞으니 위로는 아름다운 보배를 내리고 아래로는 복과 상서가 맞았었다.
서울 장안에 추원사(追遠寺)ㆍ척기사(陟屺寺)ㆍ대승사(大乘寺)ㆍ위국사(魏國寺)ㆍ안정사(安定寺)ㆍ중흥사(中興寺) 등의 여섯 절을 건립하여 승니 1천 명을 득도시켰고 또 천보사(天保寺)를 지어서 위법사(瑋法師)와 제자들 70여 인을 공양하였다.
또 안주(安州)에 수산사(壽山寺)와 범운사(梵雲寺)의 두 절을 지었으며, 또 대복전사(大福田寺)를 지어서 국사인 실선사(實禪師)를 공양하였고, 또 실선사의 묘소에 복전사(福田寺)를 지었다. 또 대가한(大可汗)과 대이니(大伊尼)를 위하여 돌궐사(突厥寺)를 지었다.

주나라 고조(高祖) 무(武)황제이름은 옹(邕)이다.
기회를 응하여 말을 어거하고 거울을 쥐고 하늘에 올랐으니 위에 오르고 아래를 격(格)하는 교훈과 하늘을 경(經)으로 하고 땅을 뜻으로 하는 법칙을 하였다.
5위(緯)의 다른 곳은 하늘의 끌어줌으로써 어거하였고 4유(維)가 근본을 잃자 땅의 축(軸)으로써 끌어주어서 풍속을 옮겨 바꾸고 위를 편히 하고 백성을 다스렸으니 도가 진문(震門)에 미쳐서 소화(昭華)에서 베풀어 순(舜)에게 옥(玉)을 주었으며, 공이 이궐(伊闕)에 열렸기에 소하(疎河)에서 내리어 우(禹)에게 규(珪)를 주었다. 산과 하수가 신령함을 본받음에 중앙과 지방이 복을 이루었다.
무성(武成) 2년에 문황제를 위하여 비단으로 짠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니 높이가 한 길 여섯 자였다. 아울러 보살상과 성승(聖僧)의 상과 금강신의 상과 사자들의 상을 조성하여 보배 탑의 주위에 2백20구의 상을 두르니, 구름이 용의 기상을 도모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갑자기 조직(組織)의 공교를 이루었으며, 물이 강의 물결을 씻지 아니함이 없어서 칼을 가지고 제조함을 빌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정토(淨土)의 신광(神光)을 비추고 화불(化佛)의 원만한 진영(眞影)을 열었다. 이어서 서울에 영국사(寧國寺)ㆍ회창사(會昌寺)ㆍ영녕사(永寧寺)의 세 절을 지으니 높은 누각이 중천(中天)의 대에 솟은 듯하고 겹집인 문이 열선(列仙)의 장관을 이루어서 구름 같은 기와와 연꽃 무늬의 서까래와 수놓은 기둥과 문채 있는 망대와 여름 지게문과 가을 창과 연꽃 못과 사과나무 동산 등 곳곳이 정결하고 하나하나가 곱고 화려하여서 보는 자가 돌아가는 것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릇 1천8백 인의 승니를 득도시켰으며 베껴쓴 불경과 논서는 1천7백여 부였다. 그러나 뒤에 장빈(張賓)을 만났기에 처음으로 착하지 못한 것을 하였다.

주나라 효선황제(孝宣皇帝)이름은 하(賀)이다.
불일(佛日)을 거듭 높인 것이 뒤에 빛나고 앞을 뛰어넘었다. 소상(塑像) 4감(龕) 1만여 구를 조성하였으며 『반야경』 3천여 부를 베껴썼고 6재(齋)일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며, 8계(戒)를 넘지 않아서 긴 밤과 맑은 새벽에 경행하면서 외우고 염(念)하였다. 네 가지 큰 원을 세우고 바른 깨달음에 뜻을 두었다.
위는 주나라 우문씨(宇文氏)의 다섯 임금에 20년이다. 절은 도합 9백31개이고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네 명이고 번역한 부수가 16부였다.

수(隋)나라 고조(高祖) 문(文)이름은 견(堅)이다.
1천 해의 운수에 응하여서 1백 임금의 끝에 해당한다. 현묘한 덕은 신명에 통하였으며 지극한 공은 조화(造化)를 에워쌌다. 읍하고 사양하는 처음에 융의(戎衣)를 움직이지 않았으며 추대함을 즐기는 때에 뭇 공적이 다 화하였다. 이에 선기(璿璣)를 쥐고 건상(乾象)을 운반하며 문창(文昌)을 밟고 북두(北斗)와 북극(北極)을 가지런히 하였다.
하늘을 경(經)으로 하고 땅을 위(緯)로 하는 업이 자미성(紫微星)에 거듭 빛나고, 어질고 성하며 성스럽고 밝은 자세는 해와 달에 연하여 빛났다. 지극한 덕은 사람과 귀신에 미치고 신비한 교화는 음과 양에 합하였으며, 위엄은 9위(圍)에 떨쳤고, 은택은 사해를 적시어서 3황(皇)의 무성한 서통(緖統)을 이었고, 5제(帝)의 아름다운 자취를 찬술하였으니, 문경(文景)과 성탕(成湯)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겠다.
그러기에 현묘한 거북과 붉은 참새와 상서로운 사슴과 상서로운 용이 강한(江漢)에 모두 모이고 난포(蘭圃)에 함께 노닐어서 추우(騶虞)를 편하고 즐거운 데 이르고 기린을 부하고 창성한 데 내리게 하였으며, 동쪽의 가자미와 서쪽의 비익조[鶼] 상원(上苑)에 어지러이 많이 있고, 붉은 까마귀와 푸른 봉황새가 화림(華林)에서 밝게 빛났으며, 궁전과 궁궐에서는 신령스러운 지초[芝]가 나고 기둥과 기초는 아름다운 옥으로 이루어졌으며, 돌은 기이한 글자를 열었고 산에서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으며, 단 이슬은 단술을 드리우고 샘에서는 빛나는 별이 솟았으며, 빛나는 물결은 우물에 뜨고 붉은 풀은 무더기로 났으며, 아름다운 싹은 합하여 빼어나고 절름발이가 능히 걸으며 벙어리가 능히 말을 하였다.
자비가 9은(垠)에 흡족하고 은택이 8표(表)에 윤택하여서 밝은 계산은 지나간 일을 변하는 데 합하고, 그윽한 계산은 앞으로 올 것을 안다. 이에 성스럽고 신기하며 능함이 많고 재주가 많으며, 무위(無爲)의 정사는 이(離)와 연(連)을 멀리 여의었고 도가 있는 풍도(風度)는 염제(炎帝)와 소호[昊]에 비긴다.
듣고 생각함에 송사를 쉬게 하니 비옥(比屋)을 가히 봉하겠고, 크게 보호함을 마음에 두니 인재를 등용하는 데 생각을 두어서 삼보에 기둥과 대들보가 되고 4생(生)을 이고 진다.
개황(開皇) 3년에 조명을 내리기를 ‘짐이 성교(聖敎)를 공경하고 숭상하여서 생각이 신우(神宇)에 있으니 그 주(周)나라 왕조 때 폐지되었던 절을 다 수리하여 복구하여라’ 하니, 경조(京兆)의 태수 소위(蘇威)가 칙명을 받들어서 경성의 안에 형상이 뛰어난 땅을 가려서 가람(伽藍)을 안치하였다. 이에 경성의 안에서는 넓고 좁음을 묻지 아니하고 스님들의 행적이 있는 곳에는 다 절을 세우도록 허락하였으며, 아울러 공평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옛날에 고조(高祖)가 후위(後魏) 대통(大統) 7년 6월 계축(癸丑)에 동주(同州)의 반야니사(般若尼寺) 신니(神尼)의 방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에 바른 기운이 명부(冥符)하여서 붉은 빛이 집에 가득하고 뜬 빛이 문에 넘쳤으며 붉은 불꽃이 하늘을 비추었다. 그래서 그를 안에서 보는 자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서로서로 금지하고 약속하여 외부에 소문이 남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붉은 기운이 사흘 동안 뜰에 찼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이 다 붉은 빛을 이루었으며 사방의 이웃들이 바라보니 기운이 마치 도는 일산과 같았고 혹은 높은 누각과 같았다.
다시 경풍(景風)과 감로(甘露)가 있어서 이삭을 합치고 가지를 연하였고, 연못에는 이상한 꽃이 피고 숲에는 기이한 과일이 났으며, 독한 벌레들은 숨고 길한 새들은 날개치며 울었다. 인하여 신니(神尼)가 보호하여 가지고 보양(保養)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오름에 옛날에 살던 곳을 기억하여 개황(開皇) 4년에 태조(太祖) 무원(武元)황제와 원명(元明) 황태후를 위하여 반야의 옛 터에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지었다.
반야사는 지난번에 건덕(建德)을 만나서 안과 밖이 황량하였기에 한 치쯤 되는 평고대[梠]와 한 자쯤 되는 서까래가 땅을 쓴 듯이 다 없어졌는데, 이에 규모를 개척하여 윤환(輪煥)을 갖추고 더하니 일곱 겹이 두루 뻗쳤고 1백 두공[拱]이 서로 지탱하였으며 감실(龕室)은 높고 훤칠하고 난간과 집은 연하여 늘어섰으며 황금 소반은 구름 밖의 이슬을 받았고 보배 방울은 하늘 위의 바람에 흔들리었다.
또 태조께서 전에 수주(隋州)를 맡았었기에 그곳에 또한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지었으며, 경사(京師)에는 대흥선사(大興善寺)를 지어 크게 신령스러운 탑을 열고 널리 천궁(天宮)을 두었으니, 불상의 시설이 허공에 기대어 있고 매화의 들보가 멀리까지 뻗어 있으며 벽당(璧瑭)이 채색을 빛내고 옥으로 만든 편액이 빛남을 머금었다. 그림 두공이 구름을 받들고 붉은 두공[櫨]이 해를 받들었으며 바람은 보배 방울에 어울리고 비는 구슬 깃발을 적시었다. 숲에는 7각(覺)의 꽃이 피었고 연못에는 여덟 공덕의 물이 솟구치었다. 6대덕(大德)과 사해에 이름 있는 스님들을 불러서 항상 3백여 명의 사람이 있었으며 네 가지의 일로 공양하였다.
개황 5년에 대덕 경법사(經法師)를 청하여 보살계를 받으면서 그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이들을 석방하면서 지시를 내리기를 ‘짐이 일찍부터 복이 많음을 응하여 공손히 보명(寶命)을 이었다. 이제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깨달은 분에게 귀의하여 뛰어난 과보를 돈독히 높이고자 한다. 그래서 금월 23일에 경법사를 청하여 대흥선전(大興善殿)에서 보살계를 받는다. 그런데 보살의 가르침은 해탈을 우선으로 삼고 계행의 근본은 자비로써 시초를 삼는다. 이제 감옥에 갇힌 이들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니 귀양가는 죄 이하는 다 용서하여 석방하여라’ 하니, 천하의 가벼운 죄수로서 석방받게 된 자는 2만 4천9백여 명이고 사형에서 감형을 받은 자가 3천7백여 명이다. 이빨을 머금고 머리카락을 인 자들이 서로 나아가 춤추고 뛰었으며 문마다 복을 받고 사람마다 경사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이 어리석은 마음을 바꾸어 지혜의 해를 밝힘으로써 생(生)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같이 착한 데로 옮길 줄 알게 함이었다.
그 해에 칙명을 내리기를 ‘부처님은 바른 법으로써 나라의 임금에게 부촉하였다. 짐은 사람 가운데 높은 이로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았으니 지금부터는 짐의 한 세상이 마쳐질 때까지 매달 스물일곱 분의 스님들을 청하여 순서에 따라 경을 읽는 스님 네 명과 대덕 세 사람씩 대흥선전에서 일체경을 읽게 하여라’라고 하여 비록 날마다 1만 기틀을 살피지만 귀로는 법의 맛을 알게 하였으며 매일 밤 도를 행하였다. 그리고 황후와 궁의 사람들이 친히 경 읽음을 들어서 만일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세 분의 대덕에게 묻게 하였다.
또 박주(亳州)에 천거사(天居寺)를 짓고 병주(幷州)에 무덕사(武德寺)를 짓는 등 앞뒤로 각기 12원(院)을 지어서 사방으로 여사(閭舍) 1천여 칸을 두루하게 하고 3백여 명의 스님들을 공양하게 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내신 곳 45주(州)에 전부 대흥국사를 지었으며 인수궁(仁壽宮)에도 삼선사(三善寺)를 짓고 헌(獻)황후를 위하여 동선정사(東禪定寺)를 지으셨다.
또 조명을 내리기를 ‘만일 능히 맑고 빈 것을 높이 밟아서 출세간의 도를 부지런히 구하는 이가 있으면 이는 다 장려하고 권고할 것이니 교훈을 주고 모범을 드리워야 한다. 산 골짜기는 한가하고 멀어서 빈 것을 품고 이상한 것을 감추는 곳이다. 숨어사는 이가 좋아하고 신선과 성인이 사는 곳이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나가고 향하는 자가 많다. 돌과 샘에 깃들여 쉬고 바위와 숲에 가고 오는 이는 몸으로 기다리는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급해 주어라. 5악(嶽)과 모든 주의 이름난 산 아래에 각기 스님들의 절 하나와 토지, 전장(田莊)을 두어라’고 하였다.
인수(仁壽) 원년에 문제(文帝)와 헌후(獻后)와 궁인(宮人)들이 다 사리가 널리 광명을 놓음을 보고 감동하여서 다듬잇돌과 막대기로 쳐서 시험하여 보았지만 완연히 손상됨이 없었다. 그래서 40주(州)에 각기 보배 탑을 지으니 빛과 밝음이 나타나 발하고 신통 변화가 보통과 달랐다. 이는 모두 왕소(王劭)가 기록한 것과 같다.
개황의 처음으로부터 인수의 말년까지 득도시킨 승니는 23만 사람이고 해내(海內)에 지은 절은 3천7백92개이고 경과 논을 베껴 쓴 것이 46장(藏) 13만 2천86권이고 옛 경전을 수선한 것이 3천8백53부이고 금동(金銅)과 전단향나무와 비단과 상아와 돌로 조성한 크고 작은 불상들이 10만 6천5백80구(軀)이고 옛 불상을 수선한 것이 1백50만 8천9백40여 구이고 궁내(宮內)에서 항상 자수(刺繡)하여 짜서 조성한 불상 및 화상과 오색의 구슬 깃발과 오채(五彩)로 그린 깃발 등은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다. 24년 동안 영조(營造)한 공덕과 홍양(弘揚)한 것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검은 머리들[隸首]이 이를 알 수가 없다.

수나라 양제(煬帝)이름은 광(廣)이다.
하무(下武)에서 이어 응하여 큰 업을 이었으니 지극한 덕은 억조 창생에게 빛나게 입히고, 신비한 교화는 여원(黎元)에게 크게 흡족하였다. 바람을 점치고 비를 기다리는 시골에서 산을 타고 건너와서 삭(朔)을 청하였고 나무를 서리고 모래가 흐르는 땅에서도 바다를 건너와 보배를 바치었다.
밖으로는 9류(流)를 통달하고 안으로는 3장(藏)을 궁구하여서 진여(眞如)의 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조화(造化)의 그윽한 근원을 다하였으니 물리(物理)에 체달(體達)함이 전대보다 뛰어나고 정(情)을 반연함이 옛날보다 훌륭하였다.
매양 정호(鼎湖)의 거가(車駕)가 너무 멀어서 추모하기 어려우며 장릉(長陵)의 혼이 유유하여 길다. 이에 정업(淨業)을 일으키어 복전(福田)을 심으려 하여 대업(大業) 원년에 문황제를 위하여 서선정사(西禪定寺)를 지으니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준비가 큰 모범이었다. 뜻과 같은 대(臺)를 일으켜서 신통의 집을 벌려 놓으니 인사(仁祠)는 은한(銀漢)을 끊은 듯하고 영찰(靈刹)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보배 나무는 여덟 줄이요 고루 요령은 4각(角)이었다. 가파른 3층의 누각에는 저절로 울리는 종을 달았고 보호하는 1천 잎의 연꽃에는 날아오는 좌석을 받쳤다. 색(色)은 낭야(琅琊)의 궁전을 머금은 듯하고 높이는 노공(魯恭)의 궁전을 넘는다.
온 세상이 보배로 여기는 모든 문물(文物)을 갖추었다. 또 고양(高陽)에 융성사(隆聖寺)를 지었는데, 비문은 비서랑(秘書郞)인 우세남(虞世南)이 지은 것으로서 그렇게 향각(香閣)을 꾸며서 멀리 임하니 화대(花臺)와 상거한 듯 침침하였다. 금물결이 밤에 올라와서 벽당(璧璫)의 옆에서 배회하였고 옥으로 된 끈이 새벽에 구슬 그물의 사이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비고 흰 것을 방의 장막에서 맑히고 바람과 구름이 난간과 창에서 일어나며 신령스러움은 선실(禪室)에 서리고 불상을 화성(化城)에 설치하였으며 솟은 탑과 보배의 대가 극히 신통 변화를 도모하였다.
또 도량에서 무차(無遮)의 큰 모임을 베풀고 청신사와 청신녀 1백 20인을 득도시켰다. 그리고 문황제를 위하여 공경히 금동으로 석가모니불 좌상 1구를 조성하니 배광(背光)에서 가부(跏趺)한 곳까지가 통틀어 일곱 자 두 치였는데 아직 장엄을 아니하였는데도 정수리는 감취(紺翠)의 빛이 얽히어 있고 몸에는 자금색(紫金色)이 빛났으며 큰 광명을 놓으니 당(堂)과 집[宇]이 빛났다. 이미 아름다운 상서로움을 감득(感得)하고서 여러 주와 군에 칙명을 내려 각기 도사(圖寫)하게 하였다.
또 병주(幷州)에 홍선사(弘善寺)를 짓고 그 옆의 용산(龍山)에 아미타불의 좌상을 만드니 높이가 1백30척이었으며 양주(楊州)에 혜일도량(慧日道場)을 짓고 경사(京師)에 청선사(淸禪寺)와 일엄사(日嚴寺)와 향대사(香臺寺)를 지었으며, 또 아홉 궁을 희사(喜捨)하여 9사(寺)를 지었으며 태릉(泰陵)과 장릉(莊陵) 두 곳에도 아울러 각각 절을 지었다.
진(陳)나라를 평정한 뒤에 양주에서 옛 경전을 보수하였으며 아울러 신본(新本)을 베껴쓰니 합쳐서 6백12장(藏), 2만 9천1백73부, 90만 3천5백80권이었다. 그리고 옛 불상을 보수한 것이 10만 1천 구이고 새로운 불상을 주조한 것이 3천8백50구이며, 득도시킨 승니는 1만 6천2백 인이었다.
위에 말한 것은 수의 임금 양씨(楊氏) 두 임금의 37년이며 절은 3천9백85개이고, 득도시킨 승니는 23만 6천2백 인이며, 불경을 번역한 사람이 26인이고, 번역된 부수가 82부였다.
그런데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불교가 창성함을 만났으니, 문제는 신령스러운 거둥을 처음 여시어 정서(禎瑞)를 거듭 누리셨고, 양제는 보력(寶曆)을 이어 응한 뒤에 불교를 일으켜 세운 것이 더욱 많았다.
옛날 번저(蕃邸)에 있을 때부터 네 개의 도량을 세우셨고 불교와 도교를 쌍으로 표하시어 안과 밖을 자급(資給)하였으며 등극하신 뒤로 더 넓혀서 드날렸으니 한 재주[藝]로 유생(有生)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세 번 불러 별관(別館)에 살게 하였으며, 네 가지의 일로 공양한 것이 2천여 인이었다.
해마다 여러 휘일(諱日)에는 큰 재를 널리 세웠으며 각기 승니를 득도시켜 길이 충당하는 것이 상식(常式)이 되었다. 대업의 끝에 요사한 도적들이 발생(勃生)하였기에 비록 교루(郊壘)에 근심이 많았고 전쟁이 다투어 일어났지만 그러나 불교를 높여 공경함이 한결같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러짐이 없어서 부처님의 이치를 크게 찬양하여 여러 명갈(銘碣)에 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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