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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1권
별역잡아함경 제11권
역자 미상
19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다.
당시 우척(優陟)이라고 하는 범지(梵志)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온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끝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우척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는 나는 처음부터 대답하지 않는다.”
우척이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내가 ‘세계는 끝이 있는 것입니까, 끝이 없는 것입니까?’라고 여쭈면 모두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항상 법을 설해서 의문을 풀어 줄 때는 어떻게 대답해 주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척이여! 나는 온갖 법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문(聲聞) 제자들을 위하여 바른 도를 분별해 주고 온갖 괴로움을 그 끝까지 없애 주노라.”
우척이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께서 ‘온갖 법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바른 도를 말씀하셔서 온갖 괴로움을 그 끝까지 없애 주신다’고 하니, 그렇다면 당신이 얻은 도는 온갖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니, 얼마나 있어야 이 도를 행하겠습니까?”
그러자 여래께서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셨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역시 그와 같이 여쭈었으나, 여래께서는 잠자코 모두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때 아난이 부채를 들고 부처님을 모시고서 부처님께 부채질을 하다가 저 우척이 여쭙는 것을 듣고는 곧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나중에 질문한 것도 앞서와 다름 없으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잠자코 당신에게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오.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하나의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변방을 지키는 데에 성이 있는데, 그 담과 성벽이 튼튼하고 난간과 문지방과 문들도 다 견고하며, 길거리와 골목과 마을과 시장의 거리와 관청과 시장의 점포가 두루 배치되어서 서로 혼잡하지 않았습니다.
이 성에는 오직 하나의 문만 있는데, 그 문을 지키는 사람은 총명하고 슬기롭고 잘 기억하는 힘[大念力]이 있어서 손님과 아는 사람과 여러 사람들을 분별하여 아는 사람만 들어오게 하고 모르는 사람은 금지합니다.
당시 성 안에 있던 어떤 사람이 성을 나가려고 했는데, 나가는 길목을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두루 살폈지만 다른 출구가 있지 않고 오직 이 하나의 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성문을 지키는 슬기로운 이는 비록 성 안에 있는 여러 가지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 중에 성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만은 알아서 모두 그 문으로 나가도록 합니다.
이처럼 우척이여! 여래도 그와 같아서 비록 생각의 분별을 모두 갖추지는 않으셨지만, 나가고 들어올 때 모두 그 문으로 말미암는 것을 아십니다. 이처럼 여래께서는 과거의 괴로움과 현재ㆍ미래의 괴로움의 끝까지 모두 이 도로 말미암음을 아시고서 괴로움을 없애게 되는 겁니다.”
우척 범지는 아난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20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迦蘭陀) 죽림(竹林)정사에 계셨다.
당시 존자 부나(富那)가 영축산(靈鷲山)에 있었는데, 많은 외도(外道)와 범지(梵志)들이 그 처소에 와서 존자 부나에게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존자 부나에게 여쭈었다.
“우리들은 모두 사문 구담께서 ‘중생이 죽으면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 이 일은 어떻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한 바로는 부처님께서는 결코 ‘중생이 죽으면 여기서 죽었다가 저기서 태어나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로 중생이라는 모습을 보지 않으니, 왜냐 하면 범부들이 허망한 생각에서 나온 교만함으로 중생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교만을 끊으셨고 교만(驕慢) 끊는 것을 찬탄하시므로 중생이란 생각[想]이 없습니다.”
그러자 모든 외도들은 존자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도 않고 비방하거나 헐뜯지도 않고서 즉시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나는 부처님 처소를 찾아갔다.
부처님 처소에 와서는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외도들이 묻는 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이 모든 외도들이 ‘세존께서 〈중생이 죽으면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 이 일은 어떻습니까?’ 하기에, 제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한 바로는 부처님께서는 결코 〈중생이 죽으면 여기서 죽었다가 저기서 태어나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로 중생이라는 모습을 보지 않으니, 왜냐 하면 범부들이 허망한 생각에서 나온 교만함으로 중생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교만을 끊으셨고 교만 끊는 것을 찬탄하시므로 중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나가 또 말하였다.
“제가 외도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했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을 어기거나 비방하면서 보태거나 빼지 않았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법대로 말한 것입니까, 법대로 말하지 않은 것입니까? 법과 틀리게 말한 것입니까, 법과 틀리지 않게 말한 것입니까? 불법을 함께 닦는 이에게 비난과 질책을 받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은 진실해서 헐뜯거나 비방하지도 않고, 보태거나 빼지도 않아서 내가 말한 바와 다름없나니, 이는 법대로 말한 것이지 법과 틀리게 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법을 함께 닦는 이로서 너를 비난하고 질책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본시부터 일체가 모두 아만(我慢)의 해침을 받은 것이라서 중생의 번뇌가 모두 아만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만을 좋아하고 아만을 알지 못하나니, 아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둥근 고리의 단초(端初)를 알 수 없는 것과 같고, 또한 헝클어진 실의 그 끝 머리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또 헝클어진 삼실과 같고, 또한 패배를 당한 군대가 어지럽게 달아나는 것과 같다. 결국 중생이 어디에서도 어지럽고 안정되지 못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쉴 새 없이 흘러 다니고 생사에 유전(流轉)하면서 빠져 나오질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또 부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아만을 온갖 중생들이 없애지 못하고 있으니, 이 아만의 상(相)을 모두 없애서 소멸시키면 그것이 다 흩어지고 없어지리라.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인간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와 악마의 세계와 범천의 세계와 사문ㆍ바라문ㆍ천상ㆍ인간의 대중 속에서 오랫동안 뜻[義]을 얻고 구제되어서 안락을 얻으리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20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존자 아난이 그날 밤중에 다발(多跋) 강에 가서 옷을 벗어 언덕 위에 둔 채 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었는데, 목욕한 후에는 하나의 목욕 옷을 걸치고서 물 밖으로 나와 물기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구가나제(具迦那提)라는 외도가 그 강으로 오고 있었는데, 존자 아난은 그가 오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외도 또한 존자의 소리를 들었다.
외도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사문입니다.”
“사문은 매우 많은데, 지금 당신은 어떤 사문이시오?”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석가의 제자입니다.”
외도가 말하였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나의 질문을 들어 주십시오.”
아난이 말하였다.
“묻고 싶으면 물으시오. 들어 보아야 알겠습니다.”
외도가 물었다.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는 것입니까?”
아난이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외도가 또 물었다.
“나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 않습니까,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까?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까?”
아난이 또 말하였다.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도 부처님께서는 모두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외도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는 일과 나아가 태어남도 아니고 태어남 아님도 아닌 일을 물었는데도 모두 대답하지 않으니, 당신은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합니까?”
아난이 말하였다.
“그와 같은 일들을 나는 모두 알아 볼 수 있으며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도가 말하였다.
“당신이 알아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내가 알아 보는 것은 그들의 처소를 보며, 중생의 행위를 보며, 나아가서는 그들이 태어난 유래를 알아 보며, 업에 얽매여서 행동하고 동작하는 것을 알아 보며, 번뇌의 결박이 먹[墨]이 뭉친 것처럼 보며, 배움이 없는 어리석은 범부는 소견의 결박과 상응해서 미래에도 길이 나고 죽는 걸 봅니다. 내가 알아 보는 그 사실이 이와 같으니, 어찌 알아 보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외도 구가나가 즉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의 이름은 아난입니다.”
외도는 또 말하였다.
“거룩하고, 거룩하십니다. 위대하신 스승의 제자이군요. 나는 지금 서로 함께 말하면서도 당신이 아난임을 알지 못했으니, 내가 만약 당신을 알았다면 결코 서로 논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외도는 아난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20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당시 장자 수달다가 부처님께 와서 친근하고 공양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는 또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내가 그곳에 간다면, 시간이 아직 이르므로 여래께서는 아직 선정에서 일어나시지 않았을 것이니, 나는 지금 저 외도들이 있는 곳에 먼저 가 보아야겠다.’
그리고는 즉시 그곳에 가서는 함께 서로 위문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다.
외도들이 수달다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 사문 구담께서 어떠한 견해를 갖고 계신지 나에게 말해 주시오.”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는 미칠 수 없나니, 그분이 알아 보시는 것은 나의 분수 밖에 있습니다.”
외도들이 말하였다.
“당신이 부처님의 견해를 모른다면, 그렇다면 비구들의 견해는 알고 있습니까?”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그런 일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외도들이 또 말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결국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만약 조그만한 견해라도 있으면 말해 주시오.”
수달다가 또 말하였다.
“당신이 먼저 당신의 견해를 말한 후에야 나도 나의 견해를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외도들이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는 바로는 중생의 무리가 항상하니, 이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또 어떤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는 바로는 모두가 다 무상이니, 이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또 어떤 이가 말하였다.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며, 항상함도 아니고 무상함도 아니니, 오직 이것만이 옳고 그 밖의 것은 거짓말입니다.
세계는 끝이 있고, 세계는 끝이 없으며,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몸이 곧 목숨이고, 목숨이 곧 몸이며,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며, 중생의 신아(神我)도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지 아니하며,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나기도 하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자여! 우리가 보는 바로는 여기에서 죽으면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닙니다.”
그리하여 모든 외도들이 제각기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말하고서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말해야 합니다.”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내가 보는 바로는 온갖 중생은 모두 유위(有爲)이니, 모든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있는 것이다. 인연이라고 말한 것은 곧 업(業)이니, 만일 인연의 화합을 빌려서 있다면 바로 무상한 것이며, 무상은 곧 괴로움인 것이며, 괴로움은 곧 내가 없는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인해 나는 온갖 소견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을 두지 않습니다.
당신네들 여러 외도들은 ‘온갖 법은 항상하니,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는데,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뭇 괴로움의 근본이 됩니다. 이러한 온갖 삿된 소견에 집착하면 괴로움과 상응하여 크나큰 괴로움을 견디면서 나고 죽음 속에서 끝없이 괴로움을 받나니, 이 모두가 있다[有]는 생각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계도 항상하다’고 하며, 나아가 ‘죽은 후에 저기에 태어남도 아니고
저기에 태어나지 않음도 아니다’라고 하는 온갖 소견도 사실은 유위의 업으로서 인연이 모여 화합한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무상을 알아야 하고, 무상은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은 곧 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다시 어떤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장자여! ‘중생이 업이 모인 인연의 화합으로 있으니, 모두 다 무상하고, 무상함은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은 곧 내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당신도 지금 온갖 괴로움의 근본을 짓고 괴로움과 상응함으로써 나고 죽음 속에서 끝없이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온갖 모든 소견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도 그와 같은 소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저 외도는 수달다를 칭찬하여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장자여. 당신은 그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수달다는 저 소견을 달리하는 외도들 속에서 사자후를 함으로써 외도들의 삿된 소견을 지닌 마음을 모두 쉬게 하고,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자기의 견해로 외도들과 함께 말했던 것을 부처님께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곧 그를 칭찬하면서 말씀하셨다.
“잘하였도다! 마땅히 그렇게 모든 외도들을 꺾어서 패배시킨 뒤에 바른 법의 바퀴를 더욱 치성하게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20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당시 장조(長爪)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한쪽에 앉은 후 이러한 말을 하였다.
“저는 지금 온갖 법에 대해서 인식하여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장조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온갖 법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인식함을 보고 있는가?”
장조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게 보는 것을 제가 또한 인식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장조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만약
그렇게 보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나는 모든 법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대에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도록 하였는가?”
부처님께서 또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알거나 볼 때 인식하지 않음이 바로 보는 것이며, 이 보는 것을 끊으면 이미 보는 것을 버림이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이미 구토한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여타의 보는 것 속에서 차례가 없는 것이니, 문득 취하지를 못하고 문득 불생(不生)이다.”
장조 범지는 또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당신께서 말한 그러한 소견을 나는 이미 끊었고 이미 그러한 소견을 버렸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구토함과 같습니다. 곧 모든 소견에서 차례가 없어서 취하지도 못하고 생(生)하지도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장조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다면 많은 중생이 그대의 소견과 같아서 역시 그렇게 논할 것이다.
모든 외도와 사문과 바라문이 그러한 소견을 버리고 다른 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를 작은 지혜라 칭하고, 지극히 천박해서 또한 어리석음이라고 칭한다.
범지여! 세상의 중생들은 모두 세 가지 소견에 의지하고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첫째는 내가 온갖 것을 인식한다고 함이요, 둘째는 온갖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함이요, 셋째는 내가 조금은 인식하고 조금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현의 제자는 첫 번째 소견을 관찰하되, ‘능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일으켜서 항상 이러한 3독(毒)에 얽히고 속박된 채 멀리 여의지 못하므로 환란과 손해가 생기고 번뇌를 낳음으로써 해탈을 얻지 못하고 애욕을 좋아하여 속박과 집착을 지키고만 있다’고 하나니, 이것을 인식함이라고 칭한다.
만약 인식하지 않는 것이라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일으켜서 항상 그러한 3독에 속박된 채 멀리 여의지 못하므로 해탈을 얻지 못하며, 애욕을 좋아하고 항상 애욕에 집착해서 속박과 집착을 지키고만 있으니, 이것을 인식하지 않음이라고 칭한다.
또 조금은 인식하고 조금은 인식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인식함은 위에서 인식함을 설명한 것과 같고, 인식하지 않음은 위에서 인식하지 않음을 설명한 것과 같다.
성현의 제자로서
만약 인식함을 말한다고 설하면 문득 두 소견이 서로 다투는 것이며, 만약 인식하지 않음을 말한다고 설하면 또한 저 두 소견이 서로 다투는 것이며, 만약 조금은 인식하고 조금은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역시 두 소견이 서로 다투는 것이니, 자기 소견이 다른 이와 다르기 때문에 문득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만약 논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서로 헐뜯고 해치며, 서로 논쟁을 일으켜서 헐뜯고 해치는 일이 생기므로 소견을 허물로 여기는 것이며, 온갖 논쟁을 낳기 때문에 문득 그 소견을 버리고서 다른 소견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서 능히 소견을 끊고 소견을 여의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구토하는 것과 같아서 온갖 소견에 대해 차례가 있지 않으므로 취하지도 않고 생(生)하지도 않는 것이다.
성현의 제자로서 만약 인식함을 말하거나, 인식하지 않음을 말하거나, 조금은 인식하고 조금은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범지여! 이 색(色)의 현현은 4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성현의 제자는 이 몸을 무상하다고 보며, 이미 무상하다고 보았으면 즉시 애욕을 여의니, 이 몸의 소멸을 보는 것이 곧 버리고 여의는 것이다.
만약 몸의 무상함을 보면 문득 몸에 대한 애욕을 떠나며, 문득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며, 몸이라는 소굴을 여의며, 몸에 대한 결정된 생각을 없앤다.
범지여! 수(受)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즉, 괴로움의 느낌과 즐거움의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은 무엇을 원인으로 삼고, 무엇을 쌓임[習]으로 삼으며, 무엇을 인하여서 생기고 어느 곳에서 나오는가?
촉(觸)이 원인이 되었고 촉으로 인하여 쌓임이 생기니, 쌓임은 촉으로부터 생기고 촉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만약 촉이 없어지면 수(受)가 없어져서 뜨거움을 여의고 시원함을 얻는 것이 마치 해가 지는 것과 같다.
몸과 목숨에 대해서도 몸을 받을 적에는 이 몸이라는 것을 알며, 목숨을 받을 적에도 이 목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실답게 아는 것이 착오가 없다.
성현의 제자는 즐거움의 느낌을 받을 적에도 몸은 반드시 무너진다고 알며, 괴로움의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받을 적에도 몸은 반드시 무너진다고 알며, 즐거움의 느낌과 화합이 아닌 느낌과 괴로움의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을 적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것을 느낌과 화합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른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함께 하면서도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인 온갖 고통의 쌓임과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존자 사리불이 출가한 지 반달 만에 여래의 곁에 서서 여래를 모시고 부처님께 부채질을 하고 있었는데, 여래께서 번뇌를 끊음과 애욕을 떠나는 법을 말씀하시자, 사리불은 ‘이와 같이 모든 법은 무상하다’고 관찰해서 즉시 애욕을 떠나고 성취하게 되어서 온갖 소견을 버리고 생(生)함도 없고 번뇌[漏]도 다해서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장조 범지도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의 눈이 청정하게 된 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그는 이미 믿는 마음을 얻게 되자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디 세존께서는 저의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여래께서 즉시 출가를 허락하시자, 그는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아라한(阿羅漢)의 도를 성취하였다.
20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수마갈타(須摩竭陀)못의 언덕에 계셨다.
당시 사라부(奢羅浮) 범지가 대중 속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나는 석가가 말한 교법을 아노니, 나의 지견(知見)이 저 석가보다 낫다.”
그때 많은 비구들은 성 안에 들어가서 걸식하다가 사라부 범지가 그 못의 언덕에서 “나는 석가가 말한 교법을 아노니, 나의 지견이 그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을 들은 여러 비구들은 절에 돌아와서 옷과 발우를 거두고 손과 발을 씻은 후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늘 성에 들어가 걸식한 후 먹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도중에 수마갈타의 못을 지나다가
사라부라고 하는 한 범지가 못의 언덕 위에서 대중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나는 석가가 말한 교법을 아노니, 내가 아는 것이 그보다 낫다.’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저 못의 언덕에 가시기 바랍니다.”
여래께서는 잠자코 허락하신 후 비구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서 저 수마갈타의 못으로 가셨다.
사라부는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에 앉으면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참으로 ‘나는 석가가 말한 교법을 아노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보다 낫다’고 말을 했는가?”
그러자 범지는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으로 침묵한 채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그대가 안다면 그대 뜻대로 말할 것이며, 알지 못한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고 설명해서 그대로 하여금 만족스럽게 할 것이며, 그대가 지금 갖추어서 말한다면 나는 그대의 기쁨을 도와 주겠노라.
범지여!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그에게 ‘그대는 어떠한 일로 여래를 아라하ㆍ삼먁삼불타가 아니라고 말했느냐?’고 묻겠다.
그러면 그 중생은 진리를 알지 못해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으므로 다시 세속의 딴 말과 온갖 잡담을 그 속에 섞어 말하면서 교만하고 잘난 체하고 헐뜯고 해치는 마음을 내게 되겠지만, 결국 그와 같은 물음에 잘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한 채 부끄러워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 재주를 잃어버리니, 그대가 지금 그와 같도다.
또 어떤 사람이 ‘사문 구담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허물이 있는 법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그에게 ‘어떤 지혜로 그와 같은 일을 아느냐?’고 묻겠다. 그러면 그는 능히 대답하지 못하므로 그 밖의 세속 말을 그 속에 섞어 말하다가 말이 막히고 이치에 굴복 당하면 부끄러워하여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으면서 말재주를 잃게 되리니, 지금 그대가 다를 바 없다.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사문 구담의 제자들은 훌륭한 회향이 없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그에게 ‘그대는 무슨 법으로 그러한 일을 증거해서 아는가?’라고 묻겠다. 그러면 그는 능히 대답하지 못하므로 다시 세속의 딴 말을 그 속에 섞어 말하다가 말이 막히고 이치에 굴복 당하면 부끄러워하여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서 말 재주를 잃게 되리니, 그대가 지금 그와 같다.”
그때 사라부와 함께 범행을 닦는 이가 사라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무슨 까닭으로 침묵한 채 대답하지 못하는가? 그대가 옛날에 항상 많은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의 지견이 구담의 교법보다 뛰어나다’고 하였으니, 그대는 지금 마땅히 사문 구담에게 따지고 물어야 할 텐데도 어찌하여 도리어 사문 구담이 그대에게 반문하여 그대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따지고 있으며, 또 ‘그대가 말한 것이 구족하면 나는 그대의 기쁨을 도와서 좋다고 칭찬할 것이며, 그 말이 구족하지 못하면 나는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고 설명해서 만족을 얻도록 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있는가?”
사라부는 그 말을 듣고도 침묵한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수마갈타못의 언덕에서 사자후를 하시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왕사성으로 돌아오셨다.
부처님께서 떠나신 후 사라부와 함께 수행하는 이들이 갖가지로 그를 꾸짖으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뿔이 끊어진 소가 외진 곳에서 우는 것처럼, 그대도 지금 그와 같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는 사자후를 하지만
사문 구담 앞에서는 잠자코 아무 말도 못하는구나. 또한 동녀(童女)가 남자 소리를 하려고 하지만 능히 하질 못하고 도로 여자 소리만 하는 것처럼, 그대도 또한 그와 같아서 구담의 사자후를 배우려고 하지만 능히 이루질 못한다. 또한 암놈 야간(野干)이 사자의 우는 소리를 하려고 하나, 그에게서 나는 소리는 야간의 소리만 될 뿐 끝내 사자의 소리를 이루지 못함과 같다.”
이처럼 함께 수행하는 이들이 갖가지로 사라부를 꾸짖고는 제각기 사방으로 흩어졌다.
20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중소(重巢)라는 범지가 저 수마갈타(須摩竭陀)못 언덕 위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대중 속에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말한 게송을 누구라도 능히 분별해서 그 뜻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의 제자가 되겠다.”
당시 여러 비구들이 식사할 때가 되어서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서 왕사성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했는데, 걸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도중에 수마갈타못 언덕을 지나다가 저 범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곧 절에 돌아와서 옷과 발우를 거두고 손과 발을 씻은 후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마갈타못 언덕에 있는 범지 중소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말한 게송을 누구라도 능히 분별해서 그 뜻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의 제자가 되겠다.’
부디 세존께서는 그 못에 가 보십시오.”
여래께서는 잠자코 허락하신 후 여러 비구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서 그 못에 가셨다.
범지 중소는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높은 자리를 마련한 뒤 부처님께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이 자리에 앉으소서.”
여래께서는 그 자리에 앉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듣건대 그대 스스로 ‘내가 지은 게송을 누구라도 분별해서 그 뜻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
범지가 대답하였다.
“실로 그렇습니다, 구담이시여.”
부처님께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지은 게송의 구절을 지금 나를 위하여 외우라.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고 설명하리라.”
그러자 범지 중소는 다시 높은 평상을 깔고 그 위에 앉아서 스스로 게송을 말하였다.
만일 비구로서
석가의 제자라면
마땅히 법답게 하여서
청정하게 생활하고
온갖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아야 하리.
착하지 못한 법을
마땅히 모두 멀리 여의고
뜻을 청정하게 지키며
받은 계율 잘 수호하고
이와 같이 조복해서
선정과 지혜를 따르리.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만약 그렇게 알맞게 해서
따르고 실천 수행하면
착한 대장부 중에서도
그대가 가장 훌륭하리라.
비구가 고요한 곳에 처하면서
청정하게 스스로 조복하고
중생들을 해치지 않고
온갖 악을 멀리 여읜다면
이와 같이 조복하는 자는
선정과 지혜를 따르리라.
부드럽고 착한 마음에서
몸과 입으로 나쁜 짓 짓지 않고
3업(業)을 잘 껴잡을 수 있다면
선정과 지혜에 따른다고 칭하리.
세상의 복밭이 되기 위해서
발우 가지고 집마다 걸식하며
마음을 단속하고 염처(念處)를 닦아서
겸손하고 자기 몸을 낮추고
애욕을 버리고 탐냄을 버리면
그 때문에 두려움 없음 얻네.
그때 범지 중소는 게송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 구담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아시는구나. 나는 지금 삼보(三寶)에 귀의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디 여래께서는 제가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허락하시자 그는 출가해서 도를 위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사문이 되어서는 부지런히 닦고 익혀서 온갖 번뇌를 끊고 아라한을 성취하였다.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20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마침 마갈제국에 있는 외도들이 수마갈타못 위에 모여서 서로 이러한 의논을 하였다.
“이것이 바라문(婆羅門)의 진리이며, 이것이 바라문의 진리이다.”
그때 여래께서는 정사에 계시면서 고요하고 청정한 하늘 귀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곧 선정에서 일어나 저 수마갈타못 위로 가셨다.
여러 바라문들은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위하여 자리를 깔아 놓고 부처님께 아뢰었다.“자리에 앉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여기에 모여서 무슨 의논을 하였는가?”
바라문들이 각기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아셔야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 여기에 모여서 서로 ‘이것이 바라문의 진리이며, 이것이 바라문의 진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도다. 내가 옛날 도를 구하여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성취할 때 이미 증득하여 알았나니, 그 요점을 말한다면 일체 세간이 세 가지 진리[三諦]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무엇이 세 가지인지 분별하겠다.
이른바 온갖 것을 죽이지 않음이니, 이 말은 진실해서 허망한 말이 아니다. 이 일이 진실하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서 모든 중생에게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야 하니, 이것이 바라문의 첫째 진리이다. 나는 이를 이미 알고서 널리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말해 주었도다.
또 바라문이여! 온갖 괴로움과 쌓임은 바로 생멸(生滅)하는 법이니, 이와 같은 말은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다. 이 일이 진실하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여 그 속에서 항상 마음을 닦으면서
생멸의 모습을 지어야 하니, 이와 같이 머문다면 이것을 바라문의 둘째 진리라고 말한다. 나는 이 생멸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에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해서 항상 중생들을 위하여 그와 같은 법을 말해 주었도다.
또 바라문이여! 셋째의 진리는 나와 내 것을 떠나서 진실로 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세 가지 법상(法相)을 여의는 자는 온갖 악을 멀리하게 되니, 이 일이 만일 진실하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서 온갖 나쁜 짓을 버리려 해야 하고, 마땅히 그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외도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셨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온갖 악마에게 덮여 있으니, 이 대중의 어느 한 사람도 내 말을 믿어서 배움에 뜻을 둘 생각과 범행을 닦을 마음을 내지 않는구나.’
여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신 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부처님께서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마갈타못의 귀신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컨대 물에다 획을 그어서 흔적을 구하려는 것과 같으며
메마른 땅에다 씨앗을 뿌려 싹이 나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좋은 향으로 악취를 훈습하는 것과 같으며
물로 방축을 적시어 부드럽게 하는 것과 같네.
저 철퇴를 불어서 묘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으며
한겨울에 아지랑이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저 외도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미묘한 법을 들어도 믿고 받아들이질 않네.
바라문들은 이 못의 귀신이 말하는 게송을 듣고는 다투어 부처님의 뒤를 따라와서 출가를 요청하니, 부처님께서는 즉시 그것을 허락하셨다.
이미 출가한 그들은 부지런히 도를 닦아서 아라한의 과위를 성취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207
그때 존자 아난이 구섬미국(拘睒彌國)의 구사라(瞿師羅) 동산에 있었다.
당시 문타(聞陀)라는 범지(梵志)가 있었는데, 그는 아난의 처소에 와서 문안하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당신은 무슨 일로 저 사문 구담의 법에서 출가하여 도를 배웁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 악을 끊고 선(善)을 낳고 싶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 법에서 출가하여 도를 배웁니다.”
범지가 또 말하였다.
“어떠한 악을 끊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 없애고 싶습니다.”
범지가 다시 말하였다.
“당신들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 없애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부처님 법에서는 그와 같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끊는 법이 있어서 몸과 마음을 금하고 다스립니다.”
범지가 또 말하였다.
“그와 같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어떤 허물이 있기에 당신들의 법에서 금하고 다스립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애욕에 물들고 집착하면 괴로움을 낳게 되어서 현재 세상에 나쁜 법이 더 늘어나게 하고,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미래 세상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냄과 어리석음에 집착하면 능히 자기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또한 남의 마음까지 무너뜨려서 나와 남이 함께 괴롭게 되며, 현재 세상에 온갖 악만 늘어나게 할 뿐 아니라 미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온갖 악만 늘어나게 합니다.
또 탐욕에 물들고 집착하면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멀게 하나니, 탐욕의 그 인연이 지혜를 미약하게 만들어서 온갖 착함을 줄어들게 하고, 열반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3명(明)과 6신통(神通)을 얻지 못하게 하고, 보리(菩提)의 도를 떠나게 만듭니다.
탐욕처럼 성냄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니, 우리들은 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그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금하고 끊습니다.”
범지가 다시 물었다.
“다시 어떤 도를 닦고 늘려야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습니까?”
아난이 대답하였다.
“여덟 가지 거룩한 도가 있나니, 이른바 바른 소견과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활과 바른 노력과 바른 선정과 바른 기억과 바른 생각입니다.
이 여덟 가지로써 능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고 열반에 나아갑니다.”
범지가 또 말하였다.
“그와 같은 도야말로 아주 좋은 법이니, 그를 닦고 늘리면 능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겠습니다.
아난이여! 나는 지금 볼일이 아주 많아서 돌아갈까 합니다.”
아난이 그에게 말하였다.
“마땅히 알아서 하시오.”
범지는 아난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20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존자 사리불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여래께서는 사리불을 위하여 갖가지로 설법하여 보여 주시며, 가르쳐 주시며, 이롭게 하시며, 기쁘게 하시고서 잠자코 계시었다.
사리불은 부처님께서 잠자코 계시는 것을 보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자기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머물던 곳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우척(優陟)이라는 범지를 만났는데, 우척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십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범지여! 나는 오늘 세존의 처소에 가서 설법을 듣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우척이 다시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까지 교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떼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 법 듣기를 싫어하질 않아서 어린아이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어린아이는 점점 자라면 어머니의 젖을 떼기 때문입니다.”
우척이 또 말하였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법을 듣는 것을 여의고 있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당신의 법에서는 비록 가르침은 있지만 옳은 이익이 없으며, 그릇된 도를 행하기 때문에 벗어나는 법이라고 칭하지 못하며, 보리에 이르지 못하는 무너지고 패망하는 법이라서 한 법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스승은
여래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가 아니니, 당신은 지금 빨리 저 삿된 스승의 교법을 버려야 합니다.
비유컨대 못된 소가 성질이 경솔하고 조급하여 치받기를 좋아하고, 더군다나 젖이 적어서 그 소에서 생긴 송아지도 그 모양이 아주 작고 자주 어미 소를 떠나 멋대로 방일하듯이, 당신의 스승도 옳은 교법이 없는 것이 역시 그와 같습니다. 즉, 그 뜻과 성질이 경솔하고 조급해서 말하는 교법도 옳은 이익이 없고, 있는 제자들도 유치하고 지혜가 없으며, 그 스승을 멀리 떠나 멋대로 방일하면서 저마다 ‘나는 이미 가르침의 법을 여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래의 법에서는 옳은 가르침이 있고, 옳은 가르침이 있어서 훌륭한 벗어남이 있으니, 보리에 나아가서 삿된 소견에게 파괴를 당하지 않고 온갖 착한 법이 있어서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존께서는 바로 여래ㆍ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이시라서 여러 제자들도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습니다.
마치 착한 소가 그 성질이 경솔하지 않고 치받지 않으며, 더군다나 젖이 많아서 그에게 생긴 송아지도 몸이 나날이 자라면서 어미 소를 따라다니지만 끝내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범지 우척은 사리불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은 좋은 이익을 얻으셨고, 받은 가르침도 세상을 벗어나는 법으로써 보리에 나아가며, 훌륭한 벗어남이 있어서 열반에 도달하며, 저해하거나 파괴할 수 없고 의지하거나 믿을 만한 것이 있으니, 당신의 스승 세존께서는 바로 여래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이십니다.”
이 말을 하고는 서로 각기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20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당시 우척이라는 범지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문안하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구담이시여!
옛날에 외도들이 저 큰 강당에 모여서 서로 논의를 하다가 ‘사문 구담은 조용한 곳에 계시면서 그 마음을 닦고 껴잡아서 지혜와 변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때 함께 논의하다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상응하고, 이것은 상응하지 않으니, 비유컨대 늙은 소가 눈까지 없는 것과 같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라서 지니고 있는 교법이 매우 비루하고 눈이 멀어서 지혜눈이 없는데, 사문 구담은 큰 지혜가 있어서 조용한 곳에서 그 마음을 닦고 껴잡는다.’
구담이시여! 당신은 지금 제자를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불법에서는 동남(童男)ㆍ동녀(童女)가 함께 모여 즐기고 놀면서 뜻대로 춤추고 노래하면, 이를 이름하여 상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나이가 팔십이 넘어서 멀리털이 희고 얼굴도 쭈그러지고 치아도 모두 빠졌는데도 오히려 노래하고 춤추고, 목우(木牛)와 목마(木馬) 놀이를 하고, 비파와 공후와 꽹과리와 피리로 놀이를 하며, 작은 수레[小車]와 제기 차는 짓 등등을 한다면, 그와 같은 노인이 하는 일은 상응하지 않는다고 칭하리니,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범지가 대답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은 유치하고 어리석어서 지혜가 없는 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불법에서는 서로 상응하고 서로 따르는 것이 동자의 유희와 같다. 범지여! 성현의 법 안에서는 동자의 유희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우척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비구가 착한 법을 닦고 모읍니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의 법은 반드시 온갖 착하지 못한 나쁜 법을 여의고서 온갖 착한 법을 닦으며, 조복되지 못한 것을 조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며, 선정 얻지 못한 것을 선정 얻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며, 해탈 못한 것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며, 끊지 못한 것을 끊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며, 알지 못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며, 닦지 않는 것을 닦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닦고 모으며, 얻지 못한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은다.”
범지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조복되지 못한 것을 조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이 조복되지 못하고, 나아가 의식[意]이 조복되지 못한 것을 조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은다.”
범지가 말하였다.
“어떤 것이 해탈하지 못한 것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해탈하지 못한 것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이다.”
범지가 말하였다.
“어떤 것이 악을 끊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욕심과 무명(無明)과 애착을 끊으려고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이다.”
범지가 말하였다.
“어떤 것이 알지 못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름과 색(色)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이다.”
범지가 말하였다.
“어떤 것이 닦지 못한 것을 닦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정과 지혜를 닦지 아니하여 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반드시 부지런히 닦고 모으는 것이다.”
범지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비구의 수행은 매우 진실합니다. 저는 지금 볼일이 많사오니 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서 할지어다.”
범지 우척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21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그 나라에 이름이 시복(尸蔔)인 범지가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 처소에 와서 문안하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구담이시여! 배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이름하여 배움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배우기 때문에 배움이라고 칭한다.”
범지가 또 물었다.
“어떻게 배우기 때문에 배움이라고 칭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시로 닦고 배워서 계행을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배움이라고 말하며,
수시로 닦고 배워서 마음을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배움이라고 말하며, 수시로 닦고 배워서 지혜를 더 향상시키기 때문에 배움이라고 말한다.”
범지가 또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만약 어떤 아라한이 온갖 번뇌를 다 없애서 할 일을 이미 끝내고, 무거운 짐을 놓아 버려서 자기 이익을 얻으며, 마음의 자재로움을 얻어서 다시는 번뇌가 없으며,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었다면, 그 때에는 마땅히 무엇을 배웁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아라한이 온갖 번뇌를 다 없애고 바른 소견으로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면, 그 때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다 끊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배울 것 없는[無學] 이라고 말한다. 만약 저 아라한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다 없애고 다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악을 짓지 않으면 더 나아가서 구할 것이 없나니, 그러한 뜻에서 배울 것 없는 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범지 시복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나갔다.
2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 죽림정사에 계셨다.
범지 시복이 부처님 처소에 와서 문안하기를 마치고 한쪽에 앉아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구담이시여! 어떤 바라문이 ‘업을 짓는 것은 모두 과거에 본래 지었던 인(因)을 따르는 것이니, 현재 세상에서 짓는 모든 업도 과거의 착하지 못한 인(因)을 증대시킬 뿐이다. 만약 업을 짓지 않으면 곧 나고 죽음의 다리[橋]를 무너뜨려서 네 가지 흐름[四流]이 영원히 끊어져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며, 업이 다했기 때문에 괴로움도 다하게 되고 괴로움이 다하므로 괴로움의 변제(邊際)도 다한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시복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처럼 저 사문과 바라문들이 ‘업을 짓는 것은 모두 과거 본업(本業)의 인연을 따르는 것이며, 나아가
괴로움의 변제도 다한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떠한 인연으로 현재 세상에 갖가지 풍병ㆍ냉병 등이 있으며, 네 가지 요소[四大]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것인가? 또 이런 것은 자기가 만든 것인가, 남이 만든 것인가?”
시복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남이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시복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떤 것을 자기가 만든 것이라 하는가?
언제나 수염과 머리털을 뽑으며, 혹은 손을 들고 서서 평상에 앉아 있지 않으며, 혹은 퍼질러 앉는 것을 업으로 삼기도 하며, 혹은 가시덤불 위에 눕기도 하며, 혹은 엮은 서까래에서 앉고 누우며, 혹은 재와 흙에 앉고 누우며, 혹은 소 똥으로 땅을 바르고 그 속에서 앉고 누우며, 혹은 한 발을 들고 섰기를 날마다 더 오래하며, 한여름에 5열(熱)로 몸을 지지며, 혹은 나물을 먹거나 피[稗]만을 먹으며, 혹은 사루가(舍樓伽)를 먹거나 지게미를 먹으며, 혹은 기름 찌꺼기를 먹기도 하며, 혹은 소 똥을 먹기도 하며, 혹은 매일매일 세 번씩 불[火]을 섬기며, 혹은 겨울철에 얼음을 알몸에 대기도 하는 등 한량없이 몸을 괴롭히는 법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거늘 어찌 남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라 말하겠는가?
만약 남이 손과 발과 칼과 곤장과 기왓장과 돌멩이로 치거나 던졌다면, 그와 같은 괴로움은 남에게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세상 사람 중에는 네 가지 요소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풍병이나 냉병과 같은 병이 생기나니, 그런 병이 있는 것은 현재 보고 있는 사실인데, 어찌하여 저 바라문들은 ‘이것으로써 능히 괴로움의 끝이 다한다’고 하는가? 이는 바로 자기가 짓는 허물이니라. 그와 같은 허물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 허망한 말을 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인연으로 능히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을 받게 하니, 무엇이 다섯인가? 이른바 탐욕과 성냄과 들뜸과 뉘우침과 의심하는 것인데, 이 다섯 가지 법이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현재의 세상에서 몸과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또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서 현재의 세상에서
능히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항상 쾌락을 누리고 괴로움을 받지 않게 하나니, 무엇이 다섯인가? 이른바 탐욕의 마음 따위를 끊을 수 있으면, 현재에 능히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법의 쾌락을 누리게 한다. 왜냐 하면 탐욕과 성냄과 들뜸과 뉘우침이 있어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괴로움을 받게 한 것이니, 만약 이를 끊어 없앨 수 있다면 곧 쾌락을 누리고 근심 걱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와 같은 탐욕과 성냄과 들뜸과 뉘우침을 끊어 없애야 하니, 만약 이를 끊어 없애면 치열함도 없고 괴로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절을 기다릴 것도 없이 즉시 해탈을 얻어서 반드시 열반에 들 것이니, 시복이여! 이를 현재에 얻는 법이라고 한다.
또 현재에 얻는 법이 있나니, 이른바 바른 소견과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활과 바른 방편과 바른 뜻과 바른 생각과 바른 선정이다.”
이 법을 말씀하시자, 범지 시복은 티끌과 때를 멀리 여의면서 온갖 법에서 법눈의 청정함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미 도를 얻자 즉시 의복을 정돈하고는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디 여래께서는 자비와 연민으로 저의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곧 그에게 출가를 허락하시니, 그는 출가하여 조용한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21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라건타(那羅健陀)의 치첩(置疊) 마을 암바라(菴婆羅)숲 속에 계셨다.
그 마을에 이름이 나리바력(那利婆力)인 범지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아주 많아서 이미 120세나 되었으므로 마을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를 참다운 아라한이라고 여기면서 모두가 공경하고 공양하였다.
그런데 그 범지와 친한 벗으로 복이 다하여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태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천자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내가 지금 나리바력에게 부처님 처소에 가라고 권하면,
그는 마침내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천자는 즉시 저 늙은 범지의 처소로 가서 거룩한 광명으로 매우 찬란하게 두루 비추고는 즉시 범지에게 말하였다.
“어떤 것이 자기에게 실제로는 원수인데도 거짓으로 친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며, 어떤 것이 자기와 친한 벗을 자기 몸처럼 보는 것이며, 어떤 것을 끊음이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심한 괴로움이 없는 것인가?이 문제를 그대는 지금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발설하지 않되, ‘만약 그와 같은 이치를 능히 아는 이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의 처소에 가서 출가하기를 청하고 범행을 깨끗이 닦겠다.’고 하시오.”
천자는 이렇게 말한 뒤 즉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범지 나리바력은 그 말을 듣고 곧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의 처소에 가서 그와 같은 질문을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어떤 것이 자기에게 실제로는 원수인데도 거짓으로 친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며, 어떤 것이 자기와 친한 벗을 자기 몸처럼 보는 것이며, 어떤 것을 끊음이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심한 괴로움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부란나가섭은 그의 마음속 생각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그는 또 산사야비라지자(刪闍耶毘羅胝子)의 처소에 가서 똑같이 마음속으로 질문하고, 나아가 니건타야제자(尼揵陁若提子)의 처소에서도 똑같이 마음속으로 질문하였지만, 저 야제자도 그의 생각을 알지 못했으니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범지 나리바력은 6사(師)의 처소를 두루 다녔지만 그들은 모두 그와 같은 질문을 알지 못하였다.
범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들이 대답하질 못하니, 내가 어찌 그들의 법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겠는가? 세속에 되돌아가서 5욕락을 받는 것만 못하다. 나는 지금 집안 살림이 매우 넉넉하니 차라리 집에 있으면서 보시나 하고 복이나 지어야겠다.’
그는 또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사문 구담의 처소에도 가 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처님 처소로 가다가 도중에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사문 구담은 젊은 나이에 출가한 사람이다. 부란나 등 6사는 모두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인데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늘, 하물며 저 사문 구담은 나이가 어리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배웠던 시일도 많지 않은데 그와 같은 이치를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도중에서 수레를 돌려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또다시 생각하였다.
‘나는 옛적에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늙은 범지로부터 〈집을 떠난 사람은 나이가 비록 어리더라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나이가 비록 어리더라도 큰 신통과 큰 지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 후 부처님 처소에 와서 공손히 문안하고 한쪽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네 가지 질문을 말없이 생각하였다.
‘어떤 것이 자기에게 실제로는 원수인데도 거짓으로 친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며, 어떤 것이 자기와 친한 벗을 자기 몸처럼 보는 것이며, 어떤 것을 끊음이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심한 괴로움이 없는 것인가?’
그때 세존께서는 그 범지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외진 곳에서는 극도로 헐뜯으며
백천 가지로 비방하면서도
면전에서는 칭찬한다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을 판별할 수 있다면
모두 거짓이요 진실하지 못하나니
그런 자야말로 원수요 사기꾼이라고
슬기로운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네.
말할 적에는 거짓으로 친한 척하지만
하는 일마다 이익이 없으면
이런 자야말로 원수요 사기꾼이라고
슬기로운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네.
어떤 것을 친한 벗에 대하여
자기 몸처럼 아낀다고 하는가.
마땅히 친한 벗에 대해서는
그의 허물을 보지 않아야 하고
친한 벗과는 마음과 염원이 같고
서로 생각하면서 늘 잊지 않나니
이와 같이 친한 벗이라면
남에게 저해를 받지 않으니
마땅히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기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네.
무슨 일로 끊음을 말했는가.
끊으면 기쁨과 즐거움을 낳을 수 있고
또한 수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서
적멸의 자리에 이르게 되며
수승한 과위를 능히 닦아서
대장부로서 바른 도를 향하게 되니
이러한 뜻에서 끊는 것이네.
어떤 것이 심한 고통이 없는 것인가.
고요한 적멸의 맛을 얻어서
큰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니
그 때에는 심한 괴로움 없애서
온갖 악을 멀리 여의고
법의 기쁜 맛에 들어가리니
이를 이름하여 심한 고통 없음이라고 하네.
범지는 이 게송을 듣고 나서 의복을 정돈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디 세존께서는 저의 출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여래께서 즉시 그의 출가를 허락하시자, 그는 출가하여 부지런히 도를 닦아서 아라한이 되었다.
213
수발타라(須跋陀羅)에 대해서는 게송을 모은 그 속에서 설한 것과 같다.
우척(優陟)과 분닉(分匿)과 구가나(俱迦那)
수달다와 장조와 사라부
중소와 세 가지 진리와 문타
두 번 나온 우척과 시복
또 시복과 나라바력가
수발타라 등 열다섯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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