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72권
법원주림 제72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2. 사생편(四生篇)[여기에는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회명부(會名部) 상섭부(相攝部)
수생부(受生部) 오생부(五生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선(善)을 행하면 즐거움을 느껴 가까이는 인간 세상이나 하늘 세계에 태어나고, 멀리는 불과(佛果)까지도 성취할 수 있다.
악을 지으면 괴로움을 초래하여 가까이는 3도(塗)에 태어나게 되고, 멀리는 성인의 도[聖道]와 어긋나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않으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4생(生:胎ㆍ卵ㆍ濕ㆍ化)으로 몸의 구별이 있고, 6취(趣:地獄ㆍ餓鬼ㆍ畜生ㆍ人ㆍ修羅ㆍ天)로 형상의 나뉨이 있으며, 밝음과 어둠의 길이 다르고 오르고 잠기는 길도 다르다. 업연(業緣)의 이치는 분명하고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도 변하지 않는 항상한 법칙이 있다.
2) 회명부(會名部)
『반야경(般若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첫째는 난생(卵生)이요, 둘째는 태생(胎生)이며, 셋째는 습생(濕生)이요, 넷째는 화생(化生)이다.”
또 『아함구해십이인연경(阿含口解十二因緣經)』에서 말하였다.
“네 종류의 생(生)이 있다. 첫째는 배에서 태어나는 것[腹生]이니, 이른바 사람과 축생이요[이것은 바로 태생(胎生)이다.], 둘째는 추위와 더위가 화합하여 생겨나는 것이니, 이른바 벌레ㆍ나비ㆍ이ㆍ벼룩 따위이며[이것은 곧 습생(濕生)이다.], 셋째는 화생(化生)이니, 이른바 하늘과 지옥이요, 넷째는 난생(卵生)이니, 이른바 날아다니는 새와 물고기ㆍ자라 따위가 그것이다.”
또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서 말하였다.
“축생이야 한량없이 많지만 간략하게 세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는 물 속에서 사는 것이니 이른바 물고기 따위요, 둘째는 육지에서 사는 것이니 이른바
코끼리 등이 그것이며, 셋째는 허공으로 날아다니는 것이니 이른바 새 등이 그것이다.”
더러는 천안(天眼)으로 온갖 축생들을 볼 때 네 종류의 생(生)이 있다. 어떤 것이 그 네 종류인가? 첫째는 태로 태어나는 것이니, 코끼리ㆍ말ㆍ소ㆍ염소 등을 이르는 것이요, 둘째는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니, 뱀ㆍ거위ㆍ오리ㆍ닭ㆍ꿩 등 온갖 새들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축축한 습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벼룩ㆍ이ㆍ개미 등을 이르는 말이요, 넷째는 변화하여 생겨나는 것이니, 장면룡(長面龍) 따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말하였다.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모든 감각기관[根]이 생기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받았던 모든 감각기관이 소멸되는 것이다.”
또 『선견론(善見論)』에서 말하였다.
“첫째는 형상이 있게 태어나는 것[色生]이요, 둘째는 형상이 없게 태어나는 것[無色生]이다. 형상이 있게 태어나는 것은 무너질 수 있겠으나, 형상이 없는 것은 무너뜨릴 수 없다. 형상이 없이 태어나는 것은 형상이 있게 태어나는 것에 의지하나니, 형상[色]과 마음[心]이 서로 의지하여 임시로 이루어진 것을 생(生)이라고 하며, 앞의 것으로 하여금 뒤의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뒤의 것이 앞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중생들의 불성(佛性)은 5음(陰) 가운데 있으니, 만약 5음을 파괴하면 그것을 살생이라고 말하며, 만일 살생을 하면, 곧 악한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 이 나고 죽음을 의지하기 때문에 4생이 있나니, 알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을 난생(卵生)이라고 말하고, 장부(臟腑)를 갖추어 태어나는 것을 태생(胎生)이라고 말하며, 습기를 빌어 태어나는 것을 화생(化生)이라고 말한다. 중생들이 소속된 것은 이 4생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3) 상섭부(相攝部)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이 욕계(欲界) 가운데 있는 온갖 것은 6취(趣)에 포함된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는 각각 천취(天趣)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그런 까닭에 구별할 수 있으니, 이 욕계는 바로 난지(亂地)이기 때문에 중생들의 잡된 악[雜惡]이 일으킨 업(業)이 순수하지 못하여, 혹은 선하기도 하고 혹은 악하기도 하다. 이렇게 같지 않기 때문에 그 업을 따라 받는 과보에 많은 차별이 있는 것이다. 위의 2계(界)는 바로 결정된 땅[定地]이므로
중생들은 침착하고 고요하여 업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순수하다. 그러므로 많은 갈래[趣]에 차별이 없다.”
【문】 4생과 6취는 서로 무슨 관련이 있는가?
【답】 『비담(毘曇)』에서 말한 것과 같다.
“하늘과 지옥은 한결같이 화생(化生)이요, 귀신의 세계[鬼趣]는 오직 두 가지 생(生)만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 태생(胎生)과 화생이며, 사람과 축생은 각각 4생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에서 물었다.
“4생이 6취를 포섭하는가, 6취가 4생을 포섭하는가?”
곧 스스로 대답하였다.
4생이 6취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6취가 4생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4생에 중음(中陰)이 더 있지만
그것은 6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生)은 넓고 취(趣)는 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생(化生)은 넓기 때문에 2취(趣)와 3취의 일부분을 완전히 포함하나 지옥취는 한결같은 화생이다.
【문】 6욕천(欲天)들은 이미 음욕을 행하는 것이 사람과 같은데 어째서 태(胎)로 태어나는 일이 없는가?
【답】 욕애(慾愛)는 비록 같지만, 행하는 일[行事]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루탄경(大樓炭經)』과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서 말하였다.
“사왕천(四王天)과 도리천(忉利天), 이 두 곳에 사는 이들은 음사(淫事)를 행할 때에 남자와 여자가 몸으로 교접(交接)하는 것이 사람과 같아 차이가 없지만 정액을 쏟아내는 일이 없으니, 그것이 사람과 같지 않은 부분이며, 이 이상의 네 하늘은 한결같이 완전하게 다르다.
염마천(炎摩天)은 음욕을 행할 때 마음으로 기뻐하며, 서로 포옹하거나 혹은 다만 서로 손을 잡기만 해도 구경(究竟)의 즐거움이 되기에 서로 교합(交合)할 것까지도 없고, 도솔천(兜率天)에서는 마음으로 좋아하여 이야기하거나 웃기만 해도 곧 구경의 즐거움이 되기에 서로 포옹할 것까지도 없다.
화락천(化樂天)에서는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구경의 즐거움이 되기에 이야기를 하거나 웃을 것까지도 없으며, 타화천(他化天)에서는 다만 말소리만 듣거나 혹은 냄새만 맡아도 구경(究竟)의 즐거움이 되기에 서로 바라볼 것까지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과 다른 것이다.”
하늘은 화생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변화로 태어나나니, 귀신의 세계[鬼趣]도 화생임을 알 수 있다.
태생이란 잠시 숨어 있는 것[少隱]이니, 저 『정관음경(淨觀音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옛날
왕사성(王舍城)에 어떤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귀신의 정기(精氣)를 받아 그 몸에서 5백 명이나 되는 귀신의 아들을 낳았다.”
또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어떤 귀신이 목련(目連)에게 말하였다.
‘나는 낮에 다섯 아들을 낳고 밤에도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낳는 대로 그것들을 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먹었는데도 끝내 배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태생귀(胎生鬼)라고 한다.”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도 태생과 화생, 이 2생을 다 갖추고 있으니, 배필(配匹)이 있기 때문에 태로 생산하는 것이 있으며, 아수라는 겁초(劫初)부터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화생이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근본녀(根本女) 아수라는 원래 큰 바다의 니란(泥卵)으로부터 축축한 습기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이것은 저 태생이나 화생과 서로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4생(生)도 갖추고 있다.”
사람이 4생을 다 갖추었다고 한 것은, 태생은 현재를 보아 알 수 있으며, 난생은 저 『열반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비사가(毘舍佉)1)의 어미가 한 개의 육란(肉卵)을 낳았는데, 그 안에서 서른두 개의 알이 나왔다.”
또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 말한 것과도 같다.
“【문】 어떻게 인간 세계에 난생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염부리(閻浮利:閻浮提) 땅에 많은 상인(商人)들이 살고 있었는데, 바다에 들어가서 보물을 캐다가 학(鶴) 두 마리를 잡았다. 그 학은 마음대로 변화하여 한 마리가 되기도 하고 따로 떨어지기도 하면서, 함께 유희(遊戱)하고 한 방에 누워 잠을 자면서 서로 교합하여 마침내 알 두 개를 낳았다. 그 알은 점점 습한 기운에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곧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들은 뒤에 자라나서 출가하여 도를 배워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는데, 하나는 이름이 시바라(尸婆羅)였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우발시바라(優鉢尸婆羅)였다.’
【문】 어떻게 인간 세계에 습기로 태어나는 것이 있음을 아는가?
【답】 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정생왕(頂生王)2)과 존자 차라(遮羅)와 존자 우바차라(優婆遮羅), 그리고 또 이녀(梨女)와 나녀(奈女) 등이 곧 그 사실을 증명한다.’
【문】 어떻게 인간 세상에 화생이 있음을 아는가?
【답】 겁초(劫初)의 사람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인의 법을 증득한 사람은 다시는 알로 태어나거나 습기로 태어나지 않는다.
【문】 무슨 까닭에 알로 태어나지도 않고 습기로 태어나지도 않는가?
【답】 알로 태어나는 것이나 습기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축생의 세계에 속한다. 축생은 4생을 다 갖추고 있다. 태로 태어나는 것과 알로 태어나는 것과 습기로 태어나는 것, 이 세 가지는 눈으로 직접 보아 알 수 있을 것이요, 저 변화로 태어나는 것은 『대루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4생의 금시조(金翅鳥)가 다시 4생의 용을 잡아먹는 경우와 같다. 또 변화로 생겨난 것은 4생을 다 먹고, 태로 생겨난 것은 3생을 먹으며[화생은 제외됨], 알로 태어난 것은 2생을 먹고[화생과 태생은 제외됨], 습기로 태어난 것은 또 습기로 태어난 것 하나만을 먹는다[3생은 다 제외됨].”
또 『기세경(起世經)』에서 말하였다.
“큰 바다 북쪽에 모든 용왕과 일체의 금시조왕(金翅鳥王)을 위한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있었으니, 그 나무의 이름은 거타사마리(居吒奢摩離)[수(隨)나라 말로는 녹취(鹿聚)라고 한다]였다. 그 나무 밑둥의 둘레는 7유순(由旬)이나 되었고, 뿌리는 땅속 깊이 20유순이나 되었으며, 키는 1백 유순이나 되었고 가지와 잎은 50유순을 뒤덮고 있었다.
나무 동쪽에는 알로 태어난 용과 알로 태어난 금시조가 살고 있었고, 나무 남쪽에는 태로 태어난 용과 태로 태어난 금시조가 살고 있었으며, 나무 서쪽에는 습기로 태어난 용과 습기로 태어난 금시조가 살고 있었고, 나무 북쪽에는 변화로 태어난 용과 변화로 태어난 금시조가 살고 있었다. 이 네 곳[處]에는 저마다 궁전이 있었는데, 각각 가로와 세로가 6백 유순이나 되었고, 일곱 겹의 담장이 둘러 쳐져 있었으며 7보로 장엄하였다. 또한 묘한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고 모든 새들도 평화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알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알로 태어난 용을 덮치려고 할 때에는 곧바로 거타사마리나무 동쪽 가지 위로 날아가 큰 바닷물을 관찰하고 난 뒤에 다시 날아 내려가서 두 날개로 바닷물을 쳐서 그 물이 2백 유순이나 갈라지게 하고는 그 가운데에서 알로 태어난 용을 물고 바다 밖으로 끌고 나와 여유 있게 잡아먹는다.
알로 태어난 금시조왕은 오직 알로 태어난 용들만 잡아먹을 수 있고, 태나 습기, 그리고 변화로 태어난 용은 잡아먹지 못하며, 만일 태로 태어난
금시조가 알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다시 그 나무 동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와야 한다.
또 태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태로 태어난 용을 잡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 남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와야 하는데, 이때 바닷물이 4백 유순이나 갈라진다. 이 태로 태어난 금시조왕은 오직 알과 태로 태어난 2생의 용만 잡아먹을 수 있고, 습기로 태어난 것과 변화로 태어난 2생의 용은 잡아먹지 못한다.
또 습기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태(胎)3)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도로 그 나무의 동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어야 하고, 또 습기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태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 남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어야 하는데, 그 때 바닷물이 4백 유순이나 갈라진다. 또 습기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습기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 서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어야 하는데, 그 때 바닷물은 8백 유순이나 갈라진다. 습기로 태어난 금시조왕은 오직 알로 태어난 용과 태와 습기로 태어난 용 등만 잡아먹을 수 있고, 변화로 태어난 용은 잡아먹을 수 없다.
또 변화로 태어난 금시조왕이 알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 동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으며, 만일 습기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의 남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으며, 만일 습기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의 서쪽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잡아먹어야 하고, 만일 변화로 태어난 용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곧 그 나무의 북쪽 바다로 들어가서 잡아와야 하는데, 그 때 바닷물은 1천 6백 유순이나 갈라진다. 저 용들은 다 이 금시조왕에게 잡아먹히게 되느니라.”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염부제와 4천하에 금시조가 있는데, 그 금시조의 이름은 가루라왕(伽樓羅王)이다. 이 새는 온갖 새들 가운데서 가장 자유로움을 누리는 새이다. 이 새는 그 업보로 인해 반드시 모든 용을 잡아먹어야 했다.
그래서
염부제에서 날마다 용왕 한 마리와 작은 용 5백 마리를 잡아먹고, 둘째 날에는 불바제(弗婆提)에서, 셋째 날에는 구야니(瞿耶尼)에서, 넷째 날에는 울단월(鬱單越)에서, 각각 염부제에서와 같이 잡아먹는다.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8천 년이나 지나간다.
그 때에 이 새는 죽을 기미가 이미 나타났으니, 모든 용이 독기를 토해내어 그 독으로 인하여 용을 잡아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 새는 굶주림에 몹시 시달려 두루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했으나 끝내 얻을 수 없었고, 또 여러 산을 돌아다니느라 영원히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금강산(金剛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잠깐 머물렀다.
금강산으로부터 곧바로 내려가 큰 물가[大水際]에 이른다. 큰 물가에서부터 풍륜제(風輪際)에 이르러서는 바람에 불려 다시 금강산으로 갔다. 이와 같이 일곱 번 되풀이하고 나서 목숨을 마쳤는데, 그 새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그 독 때문에 열 개의 보배 산[寶山]에서 동시에 불이 일어났다.
그 때 난타(難陀)용왕은 그 산이 타는 것이 두려워 곧 큰비를 내렸는데, 그 빗방울이 수레 축만큼 컸으므로, 그 금시조의 살은 다 흩어지고 오직 심장(心臟)만 남아 있었다. 그 심장은 곧바로 내려가기를 앞에서와 같이 일곱 번이나 되풀이한 뒤에 다시 금강산 꼭대기에 머물렀다. 난타용왕은 그 새의 심장을 가져다가 명주(明珠)를 만들었고, 전륜왕은 그것을 얻어 여의주(如意珠)를 만들었다.”
또 『대루탄경(大樓炭經)』에서 말하였다.
“천하의 모든 용들은 다 세 가지 열기(熱氣) 때문에 타게 되지만, 아뇩달(阿耨達)용왕만은 이 세 가지 열기에 타지 않는다. 세 가지 열기란, 첫째 다른 용왕들은 뜨거운 모래비가 몸 위에 내리면 몸이 태워지고 구워지는 고통이 심하고, 둘째 다른 용왕들은 음심(婬心)을 일으켜 서로 바라보면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서 그 몸을 태워 곧 그는 안색(顔色)을 잃고 뱀의 몸이 되어 못내 두려워한다. 셋째 다른 용왕들은 다 금시조에게 잡혀 먹히므로 모두들 두려워한다. 이렇게 천하의 다른 용들은 다 독한 열기를 받지만 오직 아뇩달(阿耨達)용왕만은 그렇지 않다.”
또 『선견율(善見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용에게는 다섯 가지 사연[事]이 있어서
용의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 사연인가?
첫째는 음사(婬事)를 행할 때이니, 용과 음사를 행하면 다시 용의 몸을 받고, 만약 사람과 음사를 행하면 다시는 용의 몸을 받지 않는다.
둘째는 생(生)을 받을 적에 용의 몸을 여의지 못하고, 셋째는 껍질을 벗을 때이며, 넷째는 잠을 잘 때이고, 다섯째는 죽는 때이니, 이 다섯 가지 일 때문에 용의 몸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문】 네 가지 음식[食]은 서로 어떻게 포함하는가?
【답】 『비담(毘曇)』에서 말한 것과 같다.
“통틀어 말하면 6취(趣)에 다 네 가지 음식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넓고 좁은 것이 있어서 서로 똑같지는 않다. 말하자면, 지옥 세계와 같은 곳에는 단식(段食)이 있으니, 철환(鐵丸)과 구리쇠 녹인 물이 비록 심한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없애 주기 때문에 그것을 단식이라 이름한다.
또 가벼운 결박이 있는 지옥과 같은 데에서는 시원하고 따뜻한 두 가지 바람을 다 갖추고 있어서 그것이 서로 번갈아 몸에 닿기 때문에 그것도 단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직 위의 두 세계[界]에서만은 단식이 없는데, 그 몸이 가볍고 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네 가지 음식은 욕계(欲界)에 있고
4생(生)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세 가지 음식은 위의 두 세계에만 있으니
거기에는 단식이라는 것이 없다.
【문】 아직 알지 못하겠다. 여섯 갈래의 세계에는 어떤 음식이 더 많은가?
【답】 『비담』에서 말한 것과 같다.
“6취 가운데 귀신의 전 세계와 알로 태어나는 중생, 그리고 앞의 세 무색계(無色界)에는 다 사식(思食)4)이 치우치게 더 많다. 왜냐 하면 저 아귀들의 세계 중엔 의행(意行)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알로 태어나는 중생은 알 속에 있을 때에는 어미에 대하여 사념(思念)하기 때문에 알을 부수지 못하며, 앞의 세 무색계에도 의행하여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 사식(思食)이 더 많다.
또 이 인간 세계와 여섯 욕계(欲界)의 한 세계에는 모두 단식(段食)이 치우치게 많다. 왜냐 하면 이 두 곳에서는 반드시 음식에 의지해야만 신명(身命)을 부지하기 때문이다.
또 저 지옥(地獄)의
전 세계와 비상천(非想天)은 다 식식(識食)5)이 치우치게 더 많나니, 왜냐 하면 지옥 세계의 인식 작용[識]은 명색(名色)을 가졌기 때문이요, 비상천의 인식 작용은 이름[名]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저 색계(色界)와 습생(濕生)은 다 촉식(觸食)6)이 치우치게 더 많다. 왜냐 하면 저 색계 중에서는 선정을 닦는 즐거움을 느껴 감촉으로 몸을 유지하기 때문이요, 습생의 중생들은 축축한 감촉으로 인하여 몸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4) 수생부(受生部)
『신비바사론(新毘婆沙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중유(中有:中陰)7)에는 많은 이름이 있다. 혹은 중유라 하기도 하고, 혹은 건달박(健達縛)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구유(求有)라 하기도 하고, 혹은 의성(意成)이라고 하기도 한다.”
【문】 어떤 것을 중유라고 하는가?
【답】 사유(死有)의 뒤에 있고 생유(生有)의 앞에 있으면서, 두 가지 유(有)의 중간에 자체(自體)로 생겨나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문】 왜 중유를 건달박이라고 하는가?
【답】 그것은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오직 욕계(欲界)의 중유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문】 왜 중유를 구유(求有)라고 하는가?
【답】 여섯 처소[處]의 문(門)에서 생유(生有)를 구하기 때문이다.
【문】 왜 또 중유를 의성(意成)이라고 하는가?
【답】 뜻[意]을 따라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른바 모든 유정들은 혹은 뜻을 좇아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업(業)을 따라 태어나기도 하며, 혹은 이숙(異熟)을 좇아 태어나기도 하고[이숙은 구역(舊譯)에서는 과보(果報)라고 함], 혹은 음욕(淫慾)을 따라 태어나기도 한다.
뜻을 좇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겁초(劫初)의 사람과 모든 중유와 색계ㆍ무색계와 화신(化身)들을 말하는 것이다.
업을 좇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지옥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옥의 유정(有情)들은 업에 얽매여 있어서 모면하여 벗어날 수 없고 업을 말미암아 태어날 뿐, 의요(意樂)를 말미암지 않는다.’
이숙을 좇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새들과 귀신 따위를 말하는 것이니, 저들은 이숙의 세력이 가볍고 건강하기 때문에 능히 공중으로 날아다니는데, 혹은 어떤 벽이나 어떤 장애물에도 걸림이 없다.
음욕을 좇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욕계의 여섯 하늘과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유의 몸은 뜻을 따라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의행(意行)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의성(意成)이라고 한다[구역(舊譯)에서는 중음(中陰)이라고 함].”
또 『비바사론(毘婆娑論)』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문】 중유(中有)는 모든 감각기관을 다 갖추고 있는가, 갖추고 있지 않은가?
【답】 일체 중유는 모든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으니, 처음 받은 이숙(異熟)은 반드시 원만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갖추고 있지 않다고도 말하는데, 그것은 마치 도장을 가지고 어떤 물체에 찍으면, 그 형상이 나타나는 경우와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유는 나아갈 세계가 본래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감각기관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고도 말한다.
이 가운데 맨 처음 말한 것이 이치에 가장 잘 맞는 것이니, 이른바 중유는 6처(處)의 문에 위치하여 태어날 곳을 두루 찾기 때문에 감각기관은 반드시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눈[眼] 등을 말한 것이요, 남자와 여자의 근(根)은 제외된다. 색계(色界)의 중유(中有)는 저 남녀의 근이 없기 때문이며, 욕계(欲界)의 중유는 또한 그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차 난생(卵生)과 태생(胎生) 두 종류의 생(生)을 받은 사람은 중유의 위치에 머물러 있을 적에는 남근(男根)이 있으나, 알이나 태 속에 이르면 갖추지 못할 경우가 있나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난생이나 태생의 생을 받을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문】 모든 갈래의 세계 중에 중유의 행상(行相)은 어떠한가?
【답】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밑으로 하고 발을 위로 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가타(伽他:偈頌)로 말하였다.
지옥에 떨어질 때에는
발을 위로 하고 머리는 밑으로 돌아가나니
모든 선인(仙人)들이 열반[寂]을 좋아하여
고행(苦行) 닦는 것을 비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하늘의 중유는 다 발을 밑으로 하고 머리를 위로 한다. 마치 사람이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을 때 그 화살이 위로 올라가서 하늘에 머무르는 경우와 같다. 다른 갈래 세계[趣]의 중유는 다 옆으로 다니나니, 그것은 마치 새가 공중을 날아서 가려고 하는 곳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또 벽 위에 날아다니는 신선을 그릴 적에 온몸이 옆으로 다니면서 장차 태어날[生] 곳을 찾는 것과 같다.
【문】 중유의 행상(行相)은 다 이와 같은가?
【답】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에서 목숨을 마친 이의 말에 의하면, 만약 지옥에서 죽어 다시 지옥에 태어날 때에는 반드시 머리는 밑으로 하고 발을 위로 하여 다니는 것은 아니며,
만약 천상에서 죽어 도로 천상에 태어날 때에도 반드시 발은 밑으로 하고 머리를 위로 하여 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만일 지옥에서 죽어 인간 세계에 태어날 경우는 마땅히 머리를 위로 하여 올라가며, 만일 천상에서 죽어 인간 세계에 태어날 경우는 마땅히 머리가 밑으로 가며, 귀신과 방생(傍生:畜生) 두 세계의 중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따른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또 논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는 태어날 때부터 옷이 있는가?
【답】 색계(色界)의 중유는 모두 옷이 있으니, 색계에는 부끄러워함이 많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바로 법신(法身)의 옷이니, 저 법신이 훌륭한 옷을 갖춘 것처럼 생신(生身)도 또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저 중유는 항상 옷을 갖추고 있다.
욕계의 중유는 대부분 옷이 없으니, 욕계에는 대부분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보살과 깨끗한 필추니(苾芻尼:비구니)로서 받는 중유만은 제외되나니, 항상 최상의 묘한 의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논사(論師)는 이렇게 말한다.
‘보살로서의 중유도 옷은 없고 오직 백정(白淨:깨끗한)의 비구니 등으로서 받는 중유만이 항상 옷을 갖추고 있다.’
【문】 무슨 인연으로 보살로서의 중유는 옷이 없고 백정의 비구니에게만 옷이 있다고 하는가?
【답】 백정의 비구니는 일찍이 의복을 사방 스님들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저 중유는 항상 의복이 있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보살이 과거생(過去生)에 사방 스님들에게 보시한 오묘한 의복과 백정(白淨)의 비구니 등에게 보시한 의복을 부수어 작은 티끌이 되게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비교가 되지 못할 터인데, 어째서 보살로서의 중유는 옷이 없고 백정의 비구니에게만 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저들의 원력이 보살과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백정의 비구니는 사방 스님들에게 옷을 받들어 보시하고 나서 곧 발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생(生)마다 항상 의복을 입고 나아가 중유에 이르더라도 몸을 드러내지 않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으니, 이 원력으로 인하여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의복이 풍족하며, 그들이 최후의 몸으로서 받는 중유도
항상 의복이 있어서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마지막으로 출태(出胎)할 때까지 옷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
가령 저와 같은 몸이 점점 자라나서 뒤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서도 차츰 다섯 가지 옷[衣]을 장만하고 부지런히 바른 수행을 해서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며, 마침내는 뒤에 열반(涅槃)할 때에 이르러서도 곧 이 옷으로 시체(屍體)를 싸서 화장(火葬)하느니라.
보살은 과거 3무수겁(無數劫) 동안 닦았던 갖가지로 수승(殊勝)한 선행(善行)이 모두 무상보리(無上菩提)로 회향(回向)하여 모든 유정(有情: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에 이 행원(行願)으로 말미암아 비록 상호(相好)를 갖추더라도 옷은 없는 것이다. 원력에 다름이 있다고 해서 꼭 힐난할 것은 못 된다.”
또 논(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의 위치[位]에서도 단식(段食)의 힘을 빌어야 하는가?
【답】 색계의 중유는 단식에 의지하지 않지만, 욕계의 중유는 반드시 단식에 의지해야 한다.
【문】 욕계 중유의 단식은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욕계의 중유는 음식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밥을 먹고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물을 마시나니,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중유는 매우 많아서 이루 다 구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니, 계경(契經)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자루에서 쌀[粳米]을 쏟아서 가마솥에 부으면, 그 쌀의 수효는 지극히 조밀(稠密)하겠으나 다섯 갈래 세계의 유정들이 받는 중유(中有)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 그 수량은 이보다 더 조밀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수용하는 온갖 음식은 일체 세간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오직 개에게만 공급해 준다 하더라도 저 한 종류의 중유조차 오히려 다 구제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저 다른 중유들까지 어찌 다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또 중유의 몸은 지극히 미세하고 가볍고 미묘하므로 거칠고 무거운 음식을 먹으면 그 몸이 장차 파괴되어 흩어지게 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하느니라.
‘중유는 냄새만 맡을 뿐, 거친 성질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허물은 없다.’
이른바 복이 있는 사람은 청정한 꽃ㆍ과일ㆍ음식 등의 가볍고 묘한 향기를 흠향(歆饗)함으로써 스스로 살아가고,
만약 복이 없는 사람은 똥이나 그 밖의 더럽고 냄새나는 썩은 음식 따위의 가볍고 미세한 냄새를 흠향함으로써 스스로 살아간다. 또 그들이 먹는 향기는 지극히 적다. 그러나 중유는 아무리 많아도 두루 다 수용할 수가 있다.”
또 논에 의하면 세존께서 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일[事]이 잘 화합되어야만 어머니 태(胎)에 들 수 있다. 곧 부모가 모두 염심(染心)이 있어 화합하고,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고 적당한 상태라서 병이 없으며, 이때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건달박은 그 때 두 마음이 뒤섞인 채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胎藏]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세 가지 일이 화합한다는 것은, 첫째 부모가 서로 사랑하여 화합하는 것이고, 둘째 그 때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어 적당한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하며, 셋째 건달박이 때맞추어 바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염심(染心)이 있어 화합한다는 것은, 부모가 똑같이 음욕을 탐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서로 화합하는 것을 말하고, 그 때에 어머니의 몸이 잘 조절되어 알맞은 상태가 되어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가 음욕을 탐하는 마음을 일으켜 몸과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을 몸이 잘 조절되어 적당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탐심(貪心)을 일으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혼탁(渾濁)해진다. 마치 봄과 여름에 물이 혼탁하게 흐르는 것처럼 제 자신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을 몸의 혼탁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배가 깨끗하여 바람ㆍ열(熱)ㆍ담(痰) 등이 서로 핍박하여 끊어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병이 없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아홉 달, 혹은 열 달 동안 태 속의 아이를 잘 보호하여 그 아이로 하여금 손상되거나 무너지지[損壞]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때라고 말한 것은, 모든 어머니의 몸에 더럽고 악한 일이 생길 때를 말하는 것이니, 날마다 달마다 항상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너무 많으면 습기[稀濕]가 많기 때문에 태를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이것이 너무 적으면 건조하기 때문에 또한 태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이 핏물이 그리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아 건조하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으면 비로소 태를 이룰 수 있으니, 그것을 이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중유(中有)가 태 속에 들어갈 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어머니의 핏물은 최후의 때에 두 방울이 남아 있고, 아버지의 정액은
최후에 한 방울이 남아 그것이 서로 어울리고 뒤섞여 화합해야 비로소 태를 이룰 수 있다.
건달박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곧 중유가 바로 그곳에 나타나 그 앞에 있는 것이요, 다른 곳에 있지 않아서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건달박은 그 때 두 마음이 뒤섞인 채 앞에 나타나 어머니의 태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건달박이 장차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그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애정과 분노의 두 마음이 번갈아 나타나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만일 남자의 중유가 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키며, 만일 여자의 중유가 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애정을 일으키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또 논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는 어느 곳으로부터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는가?
【답】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중유는 걸림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는 곳을 따라 곧 태에 들어간다.’
【문】 만일 중유의 몸으로서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어떻게 이 어머니의 태 속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답】 업(業)의 힘에 구속되기 때문에 이것을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다. 유정(有情)의 업력(業力)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장애하는 물건이 없는 데에 장애가 있게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이것에 대하여 마땅히 힐난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중유가 태에 들어갈 적에는 반드시 생문(生門)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받는 것[受]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뒤에 태어나는 아이가 형이다. 왜냐 하면 먼저 태 속에 들어간 것이 반드시 뒤에 나오기 때문이다.
【문】 보살의 중유(中有)는 어느 곳을 따라 태 속에 들어가는가?
【답】 오른쪽 옆구리로 해서 들어간다. 태 속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바로 알고는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라고 생각할 뿐 음욕(淫慾)으로 사랑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생문을 따라 들어간다. 그것은 모든 난생(卵生)과 태생(胎生)의 모든 법이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논사는 이렇게 말한다.
‘【문】 윤왕(輪王:轉輪聖王)과 독각(獨覺)은 먼저 중유의 자리에서 어느 곳을 따라 태 속에 들어가는가?
【답】 오른쪽 옆구리를 따라 들어간다. 태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바로 알고는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라고 생각할 뿐 음욕과 애욕(愛慾)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생문을 따라 들어간다. 난생과 태생의 모든 법이 마땅히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논사는 말한다.
‘보살은 복과 지혜가 지극히 늘어나 향상(向上)하기
때문에 장차 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뒤바뀐 생각이 없으므로 음욕과 애욕을 일으키지 않는다. 전륜왕과 독각은 비록 복과 지혜가 있다 해도 그다지 증상(增上)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장차 태 속에 들어가려고 할 적에는 아무리 착각이 없다 해도 역시 음욕과 애욕을 일으키나니, 그런 까닭에 태 속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생문을 따라 들어간다.’”
또 그 논에서 『시설론(施設論)』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만약 저 부모의 복업(福業)은 우세한데 자식의 복업이 하열(下劣)하면 태 속에 들어갈 수 없고, 만약 부모의 복업은 하열한데 자식의 복업이 우세하면 태 속에 들어갈 수 없다. 반드시 아버지ㆍ어머니ㆍ아이, 이 셋의 복업이 동등(同等)해야 비로소 태 속에 들어갈 수 있다.
【문】 만일 부(富)하고 귀(貴)한 남자가 가난하고 천(賤)한 여자와 교합(交合)하거나, 혹 부유하고 귀한 여자가 가난하고 천한 남자와 교합한다면, 어떤 중유(中有)가 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
【답】 부유하고 귀한 남자가 가난하고 천한 여자와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열[劣]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 여자에 대해서는 존승(尊勝)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부유하고 귀한 여자가 가난하고 천한 남자와 교합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열하다는 생각을 하고, 남자에 대해서는 존승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가난하고 천한 남자가 부유하고 귀한 여자와 교합(交合)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존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여자에 대해서는 하열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가난하고 천한 여자가 부유하고 귀한 남자와 교합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존승하다는 생각을 하고, 남자에 대해서는 하열하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태위(胎位)에 들어갈 때에도 마땅히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러므로 태 안에 들어갈 때에는 다 평등해야 하는 이치가 있느니라.”
또 논에 의하면 이러하다.
“【문】 중유는 지극히 미세(微細)하여 장벽(牆壁)ㆍ산(山)ㆍ언덕ㆍ나무 등 모든 것이 다 걸림이 될 수 없다면, 피차(彼此)의 중유는 서로 장애가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피차의 중유도 또한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서로 몸을 부딪칠 때에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피차의 중유도 서로에게 장애가 된다. 그것은 서로 만날 때에 피차가 전전(展轉)하면서 서로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중유는 장애가 없다고 말하는가?
【답】 다른 것에 대하여 장애가 없다는 것이지, 중유끼리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문】 피차의 중유 사이에 모두 장애가 있는가?
【답】 저희들끼리 서로 장애한다는 것이지, 다른 종류에 대하여 장애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지옥의 중유는 다만 지옥의 중유에 대해서만 장애가 되고, 나아가 하늘의 중유는 다만 하늘의 중유에 대해서만 장애가 된다는 말이니라.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열(下劣)한 것은 존승(尊勝)한 것을 장애하나니, 거칠고 무겁기 때문이다. 우세한 것은 하열한 것을 장애하지 않나니, 미세하고 가볍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옥의 중유는 나머지 다섯 중유를 장애하고, 방생(傍生 :畜生)의 중유는 네 가지 중유를 장애하며, 사람의 중유는 두 가지 중유를 장애하고, 하늘 중유는 오직 하늘 중유만을 장애한다.’”
5) 오생부(五生部)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菩薩)의 생(生)에는 다섯 가지가 있어서 일체(一切)의 행(行)에 머물면서 일체 중생(衆生)들을 안락(安樂)하게 한다. 그 첫째는 식고생(息苦生)이요, 둘째는 수류생(隨類生)이며, 셋째는 승생(勝生)이요, 넷째는 증상생(增上生)이며, 다섯째는 최후생(最後生)이다.
보살은 원력(願力)이 있기 때문에 기근(飢饉)이 있는 세계에서는 큰 물고기 등의 몸을 받아 그 살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고, 질병(疾病)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큰 의왕(醫王)이 되어 온갖 질병을 치료하여 구제해 주며, 전쟁[刀兵]이 난 세상에서는 큰 힘이 있는 왕[大力王]이 되어 전쟁을 종식시켜 중생을 구제하고, 법으로 사견(邪見)과 악행(惡行)을 교화한다.
이렇게 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을 다 왕생(往生)하게 하나니, 이것을 식고생(息苦生)이라고 말한다.
보살은 큰 원력과 자재력(自在力)이 있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과 하늘ㆍ용ㆍ귀신 등이 서로 번갈아 가며 뇌란(惱亂)하고, 모든 외도(外道)들이 온갖 삿된 견해를 일으키면 그들 속에 출생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여 바른 견해[正見]에 들게 하려고 널리 설법하나니, 이것을 수류생(隨類生)이라고 한다.
보살은 성품으로써 생(生)을 받는데,
세간의 수명과 물질[色] 등의 과보(果報)보다 뛰어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승생(勝生)이라고 한다.
보살은 정심주(淨心住)8)로부터 나아가 최상의 경지인 보살주(菩薩住)에 이르기까지 염부제(閻浮提)에서 자재롭게 생을 받는데, 일체의 생을 받는 곳 중에서 가장 기특(奇特)하나니, 이것을 증상생(增上生)이라고 한다.
최상의 경지인 보살주에서 생을 받아 업(業)을 항복 받고 보리(菩提)의 모든 조건을 더욱 늘려 원만하게 갖추고는 찰리(刹利:刹帝利)나 바라문(婆羅門)의 집안에 태어나서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고 모든 불사(佛事)를 행하나니, 이것을 최후생(最後生)이라고 한다.
세상마다의 보살들은 다 이 다섯 가지의 생(生)을 받아 남음도 없고 위도 없나니, 이로 인하여 아뇩보리를 빨리 얻느니라.”
또 『유가론(瑜伽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의 생에는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 일체의 생을 포섭하고 있으면서, 모든 보살은 죄가 없는 생을 받아 온갖 유정(有情)들을 다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제재생(除災生)이요, 둘째는 수류생(隨類生)이며, 셋째는 대세생(大勢生)이요, 넷째는 증상생(增上生)이며, 다섯째는 최승생(最勝生)이다.
보살은 흉년(凶年)이 들 때에는 큰 물고기 등이 되어 그 살을 제공해 주어 일체 중생들을 다 배부를 수 있도록 해 주고, 혹 전염병[疫病]이 유행할 때에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 모든 질병을 고쳐 주며, 혹 전쟁이 있을 때에는 큰 위력(威力)과 훌륭한 방편[善巧]으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혹 포악한 왕이 그릇된 다스림으로 백성들에게 벌을 주면 큰 원력으로 모든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혹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키면 그 삿된 견해를 없애 주나니, 이것을 제재생(除災生)이라고 말한다.
혹 어떤 보살은 큰 원력으로 다른 중생들[異類]의 세계에 태어나서 방편으로써 교화하고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善)을 행하게 하나니, 이것을 수류수생(隨類受生)이라고 하며, 혹 어떤 보살은 성품을 받아 태어날 때에 그가 받은 수명[壽]ㆍ형색(形色)ㆍ족성(族姓)ㆍ자재(自在)ㆍ부(富) 등이 가장 뛰어나고, 그가 행하는 사업마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다 이롭게 하나니,
이것을 대세생(大勢生)이라고 말한다.
혹 어떤 보살은 10지(地)에 머무르고 시왕(十王)의 과보를 지어 특별하게 뛰어나고, 이미 원만함을 이룩한다면, 이 업으로 말미암아 그가 받은 것이 더욱 늘어나 증상(增上)하게 되나니, 이것을 수증상생(隨增上生)이라고 말하며, 혹 어떤 보살은 이 생에서 보리(菩提)의 자량(資糧)이 이미 지극히 원만해지면, 혹은 매우 부유한 왕가(王家)에 태어나거나 능히 등각(等覺)의 몸으로 나타나서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키나니, 이것을 최후생(最後生)이라고 말한다.
만약 모든 보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에 걸쳐 청정하고 인자하고 어질며[仁賢], 미묘하고 좋은[妙善] 곳에 태어나는 것은 모두 이 다섯 생(生)에 다 포함되므로, 이것을 제외하고 더 좋은 생은 없다. 그러나 오직 범지(凡地) 보살만은 여기에서 제외되나니, 왜냐 하면, 이 가운데에서 취하는 의미는 지혜가 있는 보살의 생은 큰 보리의 과(果)를 의지하여 머물러 있어서 모든 보살로 하여금 보리를 빨리 증득하게 하려고 한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4생(生)은 참으로 변하기 쉽고
5음(陰)의 병은 고치기 어렵다.
목숨은 비록 길고 짧으나
끝내는 한 줌의 흙무덤 되네.
다만 여섯 가지 색(色)만을 미끼로 알지만
마땅히 사방 이웃[隣]을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 윤회의 과보를 슬퍼하라.
무너지지 않는 몸 이루기 어렵다.
감응연(感應緣)[간략하게 두 가지를 인용한다.]
진(晋)의 사문 지도림(支道林)9)
당(唐)의 거사(居士) 신도원방(信都元方)
진(晋)의 사문 지도림(支道林)
진(晋)나라 사문 지둔(支遁)의 자(字)는 도림(道林)이며, 진류(陳留) 사람이다. 싱그러운 기품에 영특하고 빼어남까지 갖추어 도교와 불교[老釋]를 믿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그 스승과 물류(物類)에 대하여 변론(辯論:討論)하곤 하였다.
“계란은 날 것을 사용하더라도 살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 동물[蠕動]을 죽인 것과 같은 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이 죽었는데, 갑자기 그 형상이 지둔의 앞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계란을 땅에 던져 깨 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병아리 한 마리가 그 알을 깨고 나와 돌아다녔다. 지둔은 그것을 보고 깊이 깨닫고 자신이 전에 했던 말에 대하여 후회했다. 조금 있다가
스승과 병아리가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서 나온다.]
당(唐)의 거사(居士) 신도원방(信都元方)
당나라 상주(相州) 부양현(滏陽縣) 사람 신도원방(信都元方)은 젊어서 지조가 있고 고상하였으며, 불교 경전을 매우 좋아하였다. 나이 29세이던 해 현경(顯慶:唐高宗의 年號) 5년(660) 봄 정월에 죽었다. 죽은 지 한 달 남짓하여 그의 형인 법관사(法觀寺) 스님 도걸(道傑)이 아우에 대한 정이 간절하여 어떤 무당[巫] 한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원방(元方)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간청했다.
법관(法觀:법관사 스님 도걸을 이르는 말)도 또한 조금은 법술(法術)을 알고 있었으므로, 곧 부적을 만들고 거기에 원방을 붙여 무당으로 하여금 원방에게 그 동안의 사정을 물어보게 했다. 무당은 문자를 알지 못했으므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시켜 붓을 들게 하고 무당은 원방의 말을 입으로 불러 종이에 쓰게 하였다.
그런데 그와 동학(同學)이었던 빙행기(憑行基)와 함께 평생 먹은 마음을 담은 시 2수(首)를 썼다. 또한 그의 집에도 서계(書啓:편지)가 남아 있었는데, 문리(文理)가 질서정연하였고, 그 말은 너무도 슬펐다. 그 글은 대부분 공덕 닦기를 권유하고, 아울러 염불(念佛)하고 경을 베껴 쓰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살생(殺生)하는 업은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로서 그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되어 있었다.
또 말하였다.
“원방은 지옥에 들어가지 않았고 귀신의 세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명관(冥官:저승 세계의 官府)의 처분을 입어 석주(石州) 이인사(李仁師)의 집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만 농주(隴州) 오산현(吳山縣)의 석명원(石名遠)이라는 사람이 화악(華嶽:華山)에서 아들을 기원하였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 그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또 말하였다.
“생(生)을 받아야 할 기한이 촉박하여 더 이상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월에 수태(受胎)하여 12월에 태어났으니, 바라건대 형님 등은 자비를 베푸시어 그 집에 가서 서로 만나보십시오.”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갔다.
하동(河東)의 설대조(薛大祚)라는 사람이 부양현에 우거(寓居)하고 있었을 때에 그 전임(前任)이었던 오산(吳山) 현령(縣令)이 스스로 말하기를 “명원(名遠)이를 잘 안다”고 하였다.
지력사(智力寺)의 스님 혜영(慧永)과 법진(法眞) 등이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이 이야기는 『명보습유기(冥報拾遺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83. 십사편(十使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회명부(會名部) 미리부(迷理部)
단장부(斷障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들으니, 삼계(三界)의 혼침(昏寢)은 모두 다 10사(使)를 굴택(窟宅:몸을 의탁하여 사는 집)으로 삼기 때문이요, 6적(賊)의 반연(攀緣)은 실로 5주(住)를 맹장(猛將)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된 생각이 허망하게 구성되고, 미혹된 착각이 번갈아 일어나며, 온갖 고통이 다투어 얽고 모든 걱정이 모두 모이게 한다. 그리하여 10사가 마구 치달리고, 10전(纏)이 구속하며, 5둔(鈍)에 잠기기 쉽고 5리(利)는 제어하기 어렵다. 고집(苦集)의 흐름을 따라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항상 떠돌아다니나니, 멸도(滅道:涅槃)의 청허(淸虛)함을 무엇으로 증득하겠는가?
(2) 회명부(會名部)
첫 번째 것[初:10使]의 이름을 풀이하면, 첫째는 신견(身見)이요, 둘째는 변견(邊見)이며, 셋째는 사견(邪見)이요, 넷째는 계취(戒取)며, 다섯째는 견취(見取)요, 여섯째는 탐욕[貪]이며, 일곱째는 성냄[瞋]이요, 여덟째는 어리석음[痴]이며, 아홉째는 거만함[慢]이요, 열째는 의심[疑]이다. 이 10사(使)는 생사(生死)의 근본이 된다. 그런데 범부는 착각하고 미혹하여 이치를 보지 못하고, 망령된 고집이 상속(相續)하여 삼유(三有:三界)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간의 공사(公使:官吏)처럼 죄인을 쫓아다니는 것을 사(使)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지론(持地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쫓아다닌다는 뜻이 전변(轉變)하여 그 명칭을 사(使)라고 한 것이다.”
『잡심론(雜心論)』에서 말하였다.
“사(使)가 쫓아다니는 것이 마치 허공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다.”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10사(使)가 쫓아다니는 것이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삼계 가운데에서 항상 따라다닌다는 의미이다.
이상은 총괄하여 해석한 것[總釋]이요, 이하는 따로따로 해석한 것[別釋]이다.
첫째, 신견(身見)이라는 것은, 또는 아견(我見)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질[色]과 마음[心]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을 몸[身]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여기에 미혹하여 그것이 곧 나[我人]라고 고집하나니, 그 미혹하고 있는 것을 따르기 때문에 신견(身見)이라고 이름하고, 물질과 마음에 미혹되어 아[我]라고 헤아리기 때문에 그 주장하는 바를 따르는 것을 또한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하였다.
“세간에서 생(生)을 받는 것은 다
나[我]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버리면 세간에서 몸을 받아 태어날 곳이 없다. 그런 까닭에 아견은 바로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根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여섯 가지 큰 도적[大賊]이 사람을 겁탈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집안에 있는 사람을 원인[因]으로 하므로, 만약 집안에 사람이 없으면 곧 중간에서 돌아가고 마는 것처럼, 이 여섯 가지 대상 물질[塵]인 도적도 그와 같아서 선법(善法)을 겁탈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몸 안의 존재[內有]를 필요로 한다. 중생들은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ㆍ불공(不空) 등의 현상[相]을 알고 보기 때문에, 만일 안에 이와 같은 현상이 없으면,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이라는 악한 도적은 일체의 선법을 겁탈하지 못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안에 이런 현상이 없지만 범부(凡夫)는 이런 현상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이 항상 와서 선법의 재물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견(我見)이 내는 악(惡)은 선(善)을 소멸시키는 근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하였다.
“인후(咽喉)가 막히는 병이 곧 목숨을 끊어지게 하는 것처럼, 일체의 견(見) 중에서 오직 아견만이 곧 지혜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
둘째, 변견(邊見)이라는 것은, 대개 세간의 인과(因果)는 생겨나고 소멸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서 꼭 끊어지고 마는 것[斷]이라든가 또는 항상 존재하는 것[常]이라고 결정된 것이 아닌데,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치우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변견이라고 한다.
『중론(中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인과는 항상 생겨나고 소멸하고 하면서 계속하여 이어지기 때문에 왕래(往來)가 끊어지지 않는다.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아니요, 서로 계속하여 이어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과는 3세(世)에 상속하는 것이 곧 바른 도리(道理)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세속의 진리[世諦]이기 때문에 중도(中道)를 이룰 수 있고, 5음(陰)이 서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각생각에 소멸하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이 끊어진다는 논리와 항상한 것이라는 논리를 벗어난 것을 중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과는 꼭 끊어지는 것[斷]이라든가 또는 항상 존재하는 것[常]이라고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보(現報) 중에서 범부들이 생각생각에 소멸하고 마는 것임을 관찰하여 알지 못하면,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常見]이고, 생각생각에 생겨나는 것임을 관찰하여 알지 못하면, 그것은 끊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斷見]이다. 만일 미래의 과보에 대해 애착이 다하지 않고, 업(業)을 따라 생(生)을 받되 6취가 결정된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라고 항상 사람으로 있는 것이 아닌데, 이것을 모르고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常見]이다. 만일 죽은 뒤에 다시는 생을 받지 않고 심식(心識)이 아주 끊어진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끊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斷見]이다.”
셋째, 사견(邪見)에 대하여 밝히리라. 이른바 인과가 없다고 비방하여 바른 견해[正]에 어긋나는 것을 삿됨[邪]이라고 말한다.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이치에 어긋난 모든 견해를 다 사견이라고 한다. 오직 이 하나의 견해[見]만을 사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 견해가 가장 악해서 충분히 선근(善根)을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사견(邪見)만을 말한 것이다. 만일 신견(身見)과 변견(邊見) 등을 논한다면 이런 것들은 비록 삿된 것이요 바른 것은 아니나, 이것은 곧 도리에 미혹하여 거룩한 도[聖道]에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될 뿐, 인과를 비방하지는 않으므로 선(善)을 닦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고 그대로 세상의 즐거움만을 느낀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인과를 믿지 않고 반야(般若:지혜) 등을 끊는 막중한 죄는 8만의 부모를 죽인 죄보다 더 중하다.”
이것은 사견으로 말미암아 이런 중대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론(中論)』에서 말하였다.
“사견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은 커다란 사견으로 죄(罪)와 복(福)은 없고 부처와 성현(聖賢)도 없다고 말하면서 선을 버리고 악을 짓는 것이다. 둘째는 열반(涅槃)의 도를 파괴하고 아(我)에 대하여 탐착(貪着)하여 유무(有無)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의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 계취(戒取)에 대하여 밝히리라. 다만 망령되게 계취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 별집(別執)을 따르면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독두(獨頭)요, 다른 하나는 족상(足上)이다. 이른바 독두라고 말한 것은, 다만 계율 지키는 일[持戒]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도(道)라고 주장하고, 혹은 고행(苦行)만을 집착하여 이것을 도라고 주장하며, 혹은 보시(布施)만을 집착하여 이것을 도라고 주장하고, 혹은 여덟 가지 선정[禪]만을 집착하여 이것을 도라고 주장하는 것 등이다. 이들은 다만 행(行)하는 일만을 집착하여 그것이 도가 아닌 줄을 알지 못하고 잘못 도라고 고집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독두계취(獨頭戒取)라고 말하는 것이다.
족상이라고 말한 것은, 즉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시비(是非)를 일삼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참다운 도라고 고집하는 것을 계취(戒取)라고 하나니, 이 뒤의 계취는 앞의 견해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앞의 견해와 뒤의 계취가 근본이 되고, 계취가 의지하는 것을 발[脚足]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뒤의 계취의 마음을 일컬어 족상계취번뇌(足上戒取煩惱)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잘 생각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다. 도법은 알기 어려운 것이니, 모름지기 좋은 벗을 찾아가서 물어야 한다. 믿음을 얻지 못하면 어리석은 마음과 뒤바뀐 착각으로 잘못 집착하여 바른 것을 무너뜨리고 도리어 불선(不善)을 이룩하고 말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도란 오직 지혜로 관찰하는 것이요, 계(戒)와 선정 등의 선(善)은 그저 조건이 되는 도구일 따름이니, 반드시 중생의 몸과 마음은 내[我]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 이지(理智)를 알아야 비로소 도에 나아갈 수 있고, 이것을 벗어난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도에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다른 선을 고집하여 도라고 하면 그들은 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계를 도라고 집착하면 이것은 다 계취(戒取) 번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사론』에서 말하였다.
“도(道)도 중도(中道)도 아닌 것을 다 계취견(戒取見)이라고 말한다.”
또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계를 깨뜨린[破戒] 비구인데도 계를 지키는[持戒] 비구와 비슷한 것 네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 어떤 비구가 계의 경전에 대해서는 잘 갖추어 실천하면서도 나[我]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이 계를 깨뜨렸는데도 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둘째, 어떤 비구가 계율에 대한 경을 잘 외우고 지니면서도 신견(身見)에 대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견해를 여의지 않으면, 이것이 계를 깨뜨렸는데도 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셋째, 어떤 비구가 열두 가지 두타(頭陀)를 다 행하면서도 모든 법이 결정코 있다고 보면, 이것이 계를 깨뜨렸는데도 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넷째, 또 어떤 비구가 중생들을 위해 자애로운 마음을 행하면서도 모든 행(行)에 생겨나는 모습[生相]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곧 놀라고 두려워하면, 이것이 계를 깨뜨렸는데도 계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 글로 증명이 되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비록 계행(戒行)에 의지하여 몸ㆍ입ㆍ뜻에 허물이 없으나 잘못 집착하여 이치를 어김으로써 마음에 도계(道戒)가 없나니, 만일
능히 몸과 마음에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관찰해 보아서 이 지혜가 청정하면 비로소 도계가 있게 될 것이다. 계행이 이미 이러하고 보시(布施) 등도 또한 그러하다.
다섯째, 견취(見取)에 대하여 밝히리라. 여기에도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독두(獨頭)요, 둘째는 족상(足上)이다. 독두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세간 유루(有漏)의 선법(善法)과 유루의 과보(果報)만을 집착하여 이것만이 제일 수승하고 미묘한 선(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니, 이것을 독두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다만 무상천(無想天)의 과보만을 집착하여 열반(涅槃)이라고 헤아려 제일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또 몸 안에 부정(不淨)한 것들을 깨끗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모두 독두견취(獨頭見取)라고 한다. 족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법에 미(迷)하여 시비(是非)를 만들어 자기 견해만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다 그르다고 하면서 곧 마음을 내어 자기 견해만 제일이라고 고집하나니, 이것을 족상견취(足上見取)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신견(身見)을 일으켜 그것을 나라고 착각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뒤에 다시 마음을 내어 앞에서 신견을 제일이라고 고집한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견취를 족상견취라고 말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이것이 이미 앞의 것과 같거늘, 거기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만일 유루(有漏) 세간의 사업(事業)을 고집하여 그것을 도라고 집착하면, 그것을 곧 계취라고 말하고, 만일 이것만이 수승(殊勝)한 것이라고 고집하면, 그것을 견취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사론』에서 말하였다.
“일체의 유류법(有流法)을 성인은 버린다. 그러므로 이 법을 최상(最上)이라 고집하면 그것을 견취라고 말한다.”
또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계를 지니는 것을 가장 청정한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계취의 번뇌[結]라고 하고, 또 자신이 집착하는 것만을 진실이라 하고 다른 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이것도 견취의 번뇌이며, 만일 세간법(世間法)이 제일이라고 하면, 이것도 다 어리석은 사람과 같고, 계취의 견해를 훌륭한 것이라고 고집하면 이것도 다 견취의 번뇌라고 말한다.”
또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문】 이 견취(見取)를 1찰나(刹那)
사이에 어떻게 미루어 헤아리는가?
【답】 성품이 용맹스럽고 영리[猛利]하기 때문에 능히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옛것에 굳게 집착하는 것을, 옛것에 굳게 집착하기 때문에 견(見)이라고 이름한다. 이 견해는 경계에 대하여 치우치게 고집하는 것이 견고하고 단단하기 때문에 성인의 지혜의 칼이 아니면, 그것을 끊어 버리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성인의 지혜의 칼을 잡고 저 견해의 이[齒]를 끊으면 비로소 버리게 할 수 있다. 마치 실수마라(室首魔羅)10)라는 바다에 사는 짐승이 어떤 물건을 물었을 때 칼이 아니면, 놓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저것이 초목(草木) 등을 물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이를 끊어야 비로소 놓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게송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이 가지는 것은
전어(鱣魚)가 물고 있는 물건이다.
실수마라가 문 물건은
칼이 아니면 놓게 할 수 없다.
옛것에 깊이 반연(攀緣)해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성품이 아주 용맹하고 영리해서 반연한 것에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니, 바늘을 진흙에 떨어뜨린 것과 같기 때문에 견(見)이라고 하느니라.”
여섯째, 탐사(貪使)의 허물에 대하여 밝히리라. 탐욕은 너무도 많고 많아서 혹은 제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을 사랑하고, 혹은 처자(妻子)ㆍ가옥ㆍ전원(田園) 등을 사랑하며, 혹은 선법(善法) 사랑하기를 불보리(佛菩提)를 사랑하는 것처럼 한다. 가령 대승(大乘)에 의하면 이것들은 다 사(使)가 아니라고 하고, 또 소승(小乘)에 의하면 선한 탐욕은 사(使)가 아니라고 한다. 다 갖추어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간략히 말할 뿐이다.
일곱째, 진사(瞋使)의 허물에 대하여 밝히리라. 이른바 고뇌ㆍ한(恨)ㆍ질투(嫉妬)ㆍ기뻐하지 않음, 이런 따위의 번뇌를 다 진사라고 한다.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말하였다.
“몸은 마른 나무와 같고 진에(瞋恚)는 불과 같아서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태운다.”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진심(瞋心)은 불과 같아서 일체의 계율을 다 태우고, 진심은 큰 도끼와 같아서 법의 다리[法橋]를 파괴한다. 마음속에 있으면 원수가 집 안에 들어온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진심을 일으키면 모든 선법을 장애(障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악(惡) 중에 이 악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한 번 진심을 일으키면
백천 가지 장애의 법문을 받는다.”
또 『보살지경(菩薩地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모든 보살이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탐욕을 부리더라도 그것을 계율을 깨뜨렸다[毁戒]고 말하지는 않지만, 한 번 진심을 일으키는 인연을 범(犯)하면 이것은 파계(破戒)라고 한다. 진에(瞋恚)의 마음은 능히 중생들을 버리지만, 탐애(貪愛)하는 마음은 능히 중생들을 보호하므로 번뇌라고 말하지 않으며, 중생을 버리는 진심을 중한 번뇌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여래(如來)께서 경(經)에서 말씀하셨다.
“탐심의 번뇌[結]는 끊기 어렵지만 중(重)하다고 말하지 않고, 진심은 끊기 쉽지만 중하다고 말한다.”
이것 또한 다 갖추어 말하기 어려우므로 간략히 말한다.
여덟째, 치사(痴使)의 허물에 대하여 밝히리라.
『비담』에 의하면 이러하다.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의 본체에는 지혜의 밝음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또 『성실론』에 의하면 이러하다.
“삿된 마음[邪心]으로 분별하는 것에는 바른 지혜의 밝음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이라고 한다.”
또 『비담론』에서 말하였다.
“무명사(無明使)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공(不共)이요, 둘째는 상응(相應)이다. 불공이란, 4제(諦:苦ㆍ集ㆍ滅ㆍ道)의 이치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을 반연하면서도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만 무명으로서 일체의 사(使)와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고 한다. 상응무명(相應無明)이란, 앞의 불공무명을 제외한 나머지 일체의 번뇌 가운데 속한 무지(無知)한 마음을 무명이라고 하며, 이것이 다른 모든 사(使)와 화합하므로 상응무명이라고 한다.”
또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무명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취성(取性)이요, 다른 하나는 현기(現起)이다. 취성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운행(運行)에 맡김으로써 미혹한 법이 임시로 모여 어두운 마음이 성품을 취하되, 오직 이것은 도리에 어긋날 뿐이어서 그 성품은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 미세한 무명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과 무기(無記) 중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무성(無性)임을 관찰해야 비로소 점점 제거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선을 행할 때에는 모름지기 무성임을 관찰해야 하나니, 일에 미혹하여 성품에 집착하면 곧 유루(有漏)가 이룩되는 것이다.”
아홉째, 만사(慢使)의 허물에 대하여 밝히리라.
『비담』에 의하면 이러하다.
“만(慢)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만 만(慢)이라고만 이름하나니, 자기만 못한 대상[下境]에 대하여 자기 자신은 높고 다른 사람은 낮다고 하며, 평등한 처지에서 다시 평등하다고 헤아리는 것으로서 이 허물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뽐내는[恃] 것이 없는데 어째서 만이라고 하는가?
『성실론』에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 가운데에는 나라고 하는 상[我相]에 집착하는 허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람의 우세하고 하열(下劣)함은 오직 마음으로 이해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의 우세한 것을 안다면 참으로 허물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모르고 나는 저보다 우세하다고 하거나, 또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면 제 자신에 대해 뽐내는[恃]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慢)이라고 한다. 둘째는 대만(大慢)이니, 평등한 처지에서 제 자신을 크다고 하기 때문에 대만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만만(慢慢)이니, 자신보다 나은 대상[上境]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저보다 낫다고 하면 이 허물은 가장 중하기 때문에 만만이라고 말한다. 넷째는 불여만(不如慢)이니, 남의 행덕(行德)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므로 여러 생 동안 업(業)을 닦아야 비로소 저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현재의 자기는 저보다 못하다고 하면서도 남의 여러 가지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불여만이라고 말한다.
다섯째는 오만(傲慢)이니, 부모(父母)ㆍ사장(師長) 등 자신보다 나은 대상에 대해 공경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만이라고 말한다. 여섯째는 아만(我慢)이니, 몸과 마음에 나[我]라는 것이 없는데도 법(法) 가운데에서 제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아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만 중에서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가장 항복 받아 끊어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서 반드시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제거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모든 어리석은 범부로서 관법(觀法)을 배우지 못한 자는 크거나 작거나 다 아견(我見)이 강하기 때문에 상(相)을 보이는 아만이라고 말한다. 만일 이치를 잘 관찰하여 성인의 학문을 이룬 사람은 아견이 굵게 나타나는 것을 분단(分斷)해서 미세하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상을 보이지 않는 아만이라고 말한다.
일곱째는 증상만(增上慢)이니,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으면서도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성인의 지혜를 바로 증상행(增上行)이라고 하여 이 세상을 벗어나는 증상법 가운데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교만을 내나니, 이것을 증상만이라고 말한다. 여덟째는
사만(邪慢)이니, 여러 악한 사람이 덕이 없으면서도 스스로를 높이고 악을 믿고[恃]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사만이라고 말한다.
이상 여덟 가지 만심(慢心)을 다 만사(慢使)의 번뇌라고 하느니라.
아홉째, 의사(疑使)의 허물에 대하여 밝히리라. 의심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을 의심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밤에 나무를 보고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것 등과 같은 경우이다. 이 일을 의심하는 마음은 나고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소승(小乘)에서는 이것을 사(使)라고 하지 않나니, 번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한(阿羅漢)에게도 이것은 있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아라한은 비록 4제(諦)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으나 모든 법 가운데 곳곳에 다 의심이 있다. 이 모든 일을 의심하는 눈으로 만약 대승(大乘)을 바라본다면 이 어둡고 망령된 마음은 변역생사(變易生死)를 초래하므로 또한 사(使)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는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生滅)하는 것으로서 나[我]라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항상한 나라고 의심하면, 이것을 두고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실론』에서 말하였다.
“【문】 의심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 만약 의심이 많으면 일체 세간(世間)의 일이나 출세간(出世間)의 일을 다 이루지 못한다. 또 법을 의심하면 배워 얻을 수 없고, 스승을 의심하면 그를 공경할 수 없으며, 또 제 자신을 의심하면 지금은 배울 때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만일 이 세 가지 의심을 내면 이것도 또한 도를 장애하는 근본이 된다. 다만 결정된 마음을 내어 배워야 할 뿐이요, 이 세 가지 일[事]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범부는 이 이치를 관찰하지 못하므로 상하(上下)를 따질 필요 없이 모두 10사(使)를 가지고 있다. 상계(上界)에는 비록 크게 드러나는 진사(瞋使)는 없으나, 이 밖에 9사(使)는 어디에나 다 항상 갖추고 있다. 선정을 닦아 얻는 사람은 비록 탐욕의 번뇌[結]는 끊었으나 이 의심의 번뇌[使]가 있기 때문에 출세의 과보를 얻지 못하느니라.
(3) 미리부(迷理部)
自述
이치에 미혹한 것이 똑같지 않은 것은 진실로 중생들이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나고 죽음에 유전(流轉)하면서 번뇌[漏]를 끊지 못하고 세간을 벗어나는 과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10사(使)의 번뇌가 선업(善業)을 장애하고, 4제(諦)의 참다운 법이 곧 이치를
장애하게 되는 것이다.
4제(諦)라고 말한 것은, 첫째는 괴로움[苦]이요, 둘째는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集]이며,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滅]이요, 넷째는 괴로움을 끊는 길[道]이다. 4제의 인과(因果)와 그 차례와 대소(大小)의 같고 다른 것을 자세히 해석하자면 그 글이 너무도 번거롭기 때문에 다 기술하지 않고, 여기에서는 우선 그 이름만을 간략하게 해석하여 그 인과를 알게 하겠다.
생멸(生滅)하는 무상(無常)한 것은 그 이치가 진실로 곧 괴로운 것이니, 이 괴로움이 수행하는 이들을 핍박(逼迫)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라고 말한다. 제(諦)라는 것은 곧 진실이라는 뜻이니, 자세히 살펴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에 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하 3제(諦)에 대한 의미도 이 고제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유루(有漏)의 선악은 다 과(果)를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이치는 원인[因]을 모으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의 진리[集諦]라고 하며, 번뇌가 다 끊어진 곳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이 이치는 실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滅諦]라고 말하고, 이치를 살펴서 막힘을 제거한다는 것이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을 끊는 길의 진리[道諦]라고 말한다.
만일 한 개인에 대해 이 4제를 논한다면, 몸과 마음의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은 다 유루(有漏)의 과보이니, 그러므로 그것은 괴로움의 진리이다. 만일 이치를 관찰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선악(善惡)과 나아가 여덟 가지 선정[禪]이 일어나면, 그것은 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의 진리이다. 만일 몸과 마음이 나고 소멸하는 것이라서 나[我]라는 것이 없음을 관찰하여 알면, 이것은 곧 일의 이치를 관찰하여 아는 지혜[觀智]이니, 이것이 곧 괴로움을 끊는 길의 진리이다. 이 괴로움을 끊는 길의 지혜로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음을 깨달아 의혹[惑]을 끊은 자리가 곧 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이다.
이치에 미혹함이라고 말한 것은, 그에 대한 논설(論說)이 같지 않다.
『비담론(毘曇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은 오직 괴로움의 진리에만 미혹한 것이니, 범부들이 다 괴로움의 과보[苦報]에만 고집하여 그것을 나라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신견은 괴로움의 진리를 반연하여 생기며, 몸이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에 의해 영원히 끊어지는 것[斷]이니, 항상 존재하는 것[常]이니 하고 헤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변견도 또한 괴로움에 미혹되는 것이다. 신견과 변견, 이 두 가지 견(見)은 과처(果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오직 괴로움의 진리에만 미혹한다.”
무릇 죄(罪)와 복(福)을 바로 내가 지은 것이라고 헤아리면, 그는 선악의 업인(業因)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견은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集諦]에 의해 일어나지 않으며,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는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 미혹하지 않는다. 변견이 몸을 의지한 것도 또한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또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이 소멸하는 길[道]을 나라고 하여 아주 끊어지는 것[斷]이라든가 항상 존재하는 것[常]이라고 헤아리지도 않나니, 그 이치가
다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신견과 변견이 오직 고보(苦報)에 의하는 것을, 괴로움의 진리에 미혹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계취(戒取)가 괴로움[苦]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에 미혹하는 것을 논하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은 다만 그 말을 그대로 듣고 믿는다.
“부지런히 고행(苦行)하면 나고 죽음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하면, 그는 이 말의 참뜻은 알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마음을 독려하여 부지런히 괴로움이 공(空)한 것이라고 관찰해야 비로소 나고 죽음을 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곧 이 일 속에서 몸을 괴롭히는 것이 도(道)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괴롭히는 것이 성인의 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계취는 괴로움의 진리에 미혹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도가 아니라고 하고, 다만 계를 지키는 것 등이 곧 복행(福行)이라고 고집하는데, 이것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集因]을 도리어 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계취를 괴로움을 끊는 길의 진리[道諦]에 미혹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로 어리석은 범부는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도라고 집착하는데,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集]에 미혹한 것이다. 다만 저 미혹한 마음은 복행을 괴로움이 발생한 원인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도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의 발생[集]에 미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괴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도라고 헤아리는 것과 같지 않으며, 괴로움을 도라고 하면 그 때문에 괴로움에 미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계취(戒取)는 괴로움에 미혹하기도 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미혹하기도 하지만,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는 미혹하지 않는다. 괴로움의 소멸은 바로 성인의 과(果)이며, 중생은 괴로움의 소멸[滅]에 의혹하여 집착하는 것을 도의 인행(因行)이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계취를 괴로움의 소멸에 미혹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의심에 대해 논하면, 이 세 가지는 다 4제에 미혹한 것이다. 이른바 사견이란 인과(因果)가 없다고 비방하는 것으로서 범부나 성인에 다 통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통미(通迷)라고 한다. 또 견취에 대하여 논하면, 자신에 대한 과보를 제일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苦]에 미혹한 것이요, 일에 대해서 선(善)한 업(業)을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괴로움의 발생[集]에 미혹한 것이며, 범천(梵天)과 무상천(無想天) 등을 열반(涅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의 소멸[滅]에 미혹한 것이요, 저 계취에서 말하는 도를 제일이라고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에 미혹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견취는
4제에 모두 미혹한 것이다.
또 의심에 대하여 논하면, 모든 범부와 성인의 인(因)과 과(果)의 있고 없음을 알지 못하고 의심을 일으켜 결정짓지 못하나니, 그런 까닭에 4제에 모두 미혹한 것이다.
이상에서 이미 밝힌 5견(見)과 의심은 오직 진리의 이치[諦理]에만 미혹했을 뿐이므로 일[事]에 미혹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치에 미혹했기 때문에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았을 때에는 나와 남이 없는 것임을 알았으므로 비로소 나라는 마음을 끊고, 혜관(慧觀)을 증득하여 번뇌가 되는 범부의 인과를 능히 끊는다.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발생[集]은 도(道)가 아닌데 그것을 관찰하여 도라고 알면 비로소 계취를 끊을 것이요,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道]을 바르게 알아 이것이 제일이라고 하고, 유루를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서 싫어해야 할 것임을 알면 비로소 견취를 끊을 것이며, 4제를 봄으로써 의심을 내거나 비방하지 않고, 증득하고 믿어 결정하면 비로소 사견과 의심을 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견(身見)과 변견(邊見)과 계취(戒取)ㆍ견취(見取)ㆍ사견(邪見)ㆍ의심[疑] 등은 이치에 미혹해 생긴 것이며, 다시 이치를 보고 그것을 끊으면 대상 경계[塵境]인 색(色)ㆍ성(聲) 등의 일을 가지고 나다, 남이다 하면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斷]이라느니, 항상 존재하는 것[常]이라는 등을 헤아리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색ㆍ성 등의 일을 비록 바르게 알더라도 내 마음과 내지 의심의 번뇌[疑使]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탐욕ㆍ진에ㆍ우치ㆍ교만 등 네 가지 사(使)에 대해 논하면, 이것들은 견(見)과 수(修)를 통틀어 장애하고, 모두 이(理)와 사(事)에 미혹한 것이다. 말하자면 견(見)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이치에 미혹했다 말하고, 또 일에 의지해서 생긴 것을 일에 미혹했다고 말한다. 견(見)에 의해서 일어난 것을 논하면, 그 탐욕은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견(見)이므로 탐욕이라고 말하는데, 나를 사랑하는 견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더욱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생공(生空)11)을 관찰하여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임을 알면, 그 때는 아견(我見)을 꺼려하여 이 탐욕이 끊길 것이다.
또 진심[瞋]에 대해 논한다면, 나라는 마음이 있을 때,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 진심을 내다가도 뒤에 나라는 것이 정말 없는 것임을 관찰하고, 남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그 때는 생공(生空)이라는 말을 들어도 곧 기뻐하는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를 깨달았을 때에 그 진심은 곧 끊길 것이다. 견(見)에 의해 어리석은 마음[痴心]을 일으켜 그 허물을 보아 알지 못하다가도 뒤에 이치를 깨달았을 때에는 그 어리석은 마음은 곧 끊어질 것이다. 견에 의해 거만한 마음[慢心]을 일으키고 견을 믿고[恃] 제 자신을 높이다가도 뒤에 이치를 깨달았을 때에는 그 거만한 마음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 까닭에 탐욕(貪欲) 등이 견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도 또한
이치에 미혹한 것이므로 이치를 깨달으면 비로소 끊어질 것이며, 다른 견에 의해 일어나는 것도 다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탐욕 등이 일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 것은 대상 경계인 색(色)ㆍ성(聲)ㆍ향(香) 등을 말한다. 이것에 대하여 탐욕을 일으키면 그 결박은 끊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치를 깨달았을 때에 그대로 끊지 못하다가도 뒤에 다시 자꾸 도를 닦으면 그것은 차츰 제거될 것이다. 성냄ㆍ어리석음ㆍ교만 등이 일에 의지하는 것도 다 그러하다. 이상은 10사(使)가 이치에 미혹하는 정도가 같지 않은 것을 밝힌 것이다.
괴로움[苦]의 미혹에 10사(使)가 있고, 괴로움을 끊는 길[道]의 미혹에 8사가 있으며, 괴로움의 발생[集]과 괴로움의 소멸[滅]의 미혹에 각각 7사가 있고, 일의 미혹에 4사가 있으니, 모두 합하면 36사가 된다. 이상은 욕계 범부의 마음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또 색계의 범부에 대해 논한다면 그 마음에는 모두 31사가 있으니, 거기에는 진에(瞋恚)가 없기 때문에 5행(行)에서 각각 그 하나씩 제외된 것이다. 4제(諦)의 수도(修道)를 5행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오직 31사만 있을 뿐이다. 무색계(無色界) 범부의 마음에도 31사가 있으니, 삼계(三界)를 통틀어 말하면 모두 98사가 있다. 즉 4제의 이치에 대해 미혹되는 88종과 삼계의 사실에 대해 미혹되는 10종을 합한 것이다. 이상은 『비담』의 해석에 의한 것이다.
또 『성실론』에 의하면, 10사의 번뇌에 모두 집착하는 성질[取性]이 있으니 다 이치를 통달한 것이다. 즉 4제의 성품이 없는 공(空)에 미혹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4제의 성품이 없는 공을 관찰할 때에 중한 집착의 성질을 끊으면, 그것을 견도(見道)라고 이름하고, 미세한 집착의 성질을 끊으면 그것을 수도(修道)라고 말한다. 이것을 10사의 이치에 미혹한 것과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라.
(4) 단장부(斷障部)
自述
이 10사 번뇌의 끊음에는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이 있다. 대개 사(使)의 성질에 대해 논하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으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입도(入道)에 대해 밝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렵고 쉬운 것만을 말하겠다. 다만 모든 견혹(見惑)은 알기는 어려우나 끊기는 쉬우며 탐욕 등 네 가지 사(使)는 알기는 쉬우나 끊기는 어려울 뿐이다.
견혹은 알기 어렵다고 한 것은 이른바 범부는 항상 이치에 미혹한다는 것이요, 끊기는 쉽다고 한 말은 이치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만일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진리를 잘 관찰하고 배워
처음으로 이치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곧 초과(初果)라고 한다. 즉 먼저 88사(使)를 끊어 없애는데, 다만 처음 이치를 깨달을 때 영리한 근기[利根]가 있고 둔한 근기[鈍根]가 있을 뿐이다.
만일 영리한 근기라면 모든 법을 관찰하여 다 거짓이요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아 나와 남이라는 견해를 내지 않고 한 생각 사이에 88사를 다 끊을 것이니, 이 한 생각을 견도(見道)라고 말한다. 또 만일 그가 둔한 근기라면 4제(諦)를 따로따로 관찰하여 88사를 차례로 끊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론(佛性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영리한 근기라면 한 생각 동안에 4제를 평등하게 관찰하여 88사를 한꺼번에 다 끊을 것이니 그것을 견제(見諦)라고 말하고, 만일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차례로 관찰할 것인즉 처음 생각에는 고제(苦諦)만 보고 다른 3제는 보지 못하여 다만 고제만 끊을 것이다.”
이 글로 증명할 수 있으니, 즉 총별(總別)의 관법(觀法)으로 다 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치우치게 어느 한쪽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경전에 의하면 사람을 가르쳐 도에 들어가게 하려면 대부분 “모든 법이 생멸하는 것이어서 나라는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 모든 번뇌를 끊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고 직설적(直說的)으로 관법을 말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지경(持地經)』에서 말하였다.
“세상에서 생을 받는 것은 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만약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세간에 몸을 받아 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경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연각(緣覺)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4제 법문의 명자(名字)는 모르지만, 다만 사실의 인연을 빌어 생하는 것이 내가 아님[無我]을 관찰하여 곧 모든 번뇌를 끊고 성문(聲聞)에서 벗어난다.”
여기에서 다만 무아관(無我觀)을 짓는 중에 비록 4제의 별해(別解)를 짓지 않더라고 이와 같이 관찰하면, 그 때에 거기에는 4제가 다 갖추어져 있다. 즉 그가 관찰하는 유루(有漏)의 과보(果報)인 몸은 찰나 사이에 나고 죽고 하는 것이므로, 이 이치는 바로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발생[集]으로서 앞의 괴로움으로부터 뒤의 괴로움의 발생이 생기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곧 괴로움임을 깨달은 것이요, 그 때 나라는 것이 없다고 깨달은 것은 곧 일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을 끊은 것이며, 끊어진 것이 다시 생기지 않으면 그것은 곧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는 지혜는 곧 괴로움을 소멸하는 거룩한 길[聖道]이다.
그러므로 오직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관찰했을 때에는 이미 4제가 다 갖추어 있어 번뇌[結]를 끊고 벗어날 수 있으며, 반드시 4제를 따로따로 관찰해야
비로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실론』에서 경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견숙가경(甄叔迦經)』에서 ‘도를 얻는 인연은 다만 4제뿐만이 아니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도에 들어갈 때 반드시 따로따로 관찰하는 것을 요(要)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이 없다고 관찰하는 한 가지 수행을 총관(總觀)해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능히 몸과 마음에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이 도를 보고 모든 견혹(見惑)을 끊을 것이다. 다만 모든 견혹을 제(諦)에 의해 분별하면 삼계(三界)에 모두 88종의 사(使)가 있다.
만일 한 사람의 미혹한 마음을 논하건대, 통틀어 오직 5견(見)과 의심뿐이다. 이 여섯 가지를 어리석은 사람의 편에서 보면 알기 어렵고, 지혜로운 사람의 편에서 보면 끊기 쉽다. 이른바 어리석은 범부로서 선(善)을 배워 닦는 자는 대개 탐욕ㆍ진에ㆍ우치ㆍ교만 등을 알고 싫어하지만, 내 마음과 계(戒) 등에 집착하여 그 허물을 깨닫지 못하나니, 그런 까닭에 알기 어렵고, 알기 어렵기 때문에 경전에서 중(重)하다고 말한 것이다.
『열반경(涅槃經)』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아견ㆍ계취ㆍ의심 등은 모든 중생들이 항상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비유하여 마치 병이 항상 떨어지지 않는 것을 중병이라고 하는 것과 같고, 또 알기 어렵기 때문에 중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성실론』에서 말하였다.
“세간 사람들은 계취에서 그 허물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使)가 결(結)이 된다.”
그러므로 이사(利使)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편에서 보면 끊기 쉽다고 한 것은, 몸과 마음이 나고 죽고 하는 것을 관찰하여 나라는 것이 없음을 나누어 보아 번뇌가 엷어지면, 그 때는 관찰하는 지혜가 법을 끊는 길[道]임을 곧 알고 마음속의 6사(使)가 저절로 아주 없어진다. 또 몸과 마음은 나고 죽고 하는 것이어서 남[人]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져 변견(邊見)이 저절로 끊어지나니, 이치를 보고 성인의 길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믿어 의심하지 않으면 없다고 비방하는 것이 저절로 끊어지며, 지혜가 곧 도요 계율 따위는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곧 계취가 없어지고 견취가 저절로 끊어진다. 그러므로 6사(使)는 알기는 어려우나 끊기는 쉽다고 말한 것이다.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시작 없는 과거 이래로 미혹하고,
끊기 쉽기 때문에 이치를 알면 곧 다 없어진다. 이것은 탐욕 등을 알기는 쉬우나 끊기는 어렵다고 한 것과는 같지 않다. 알기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집착하지 않고, 끊기 어렵기 때문에 아나함(阿那含)도 끊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사(利使)의 이치에 미혹한 사심(邪心)은 성해(聖解)를 직접 가리고 함께 행하여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탐욕 등이 현상을 반연해 따로 일어나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오직 닦고 관찰하는 것만 방해하고 이치에 직접 미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은 성인[小聖]들은 비록 탐욕과 성냄은 있으나 그로 인하여 이치를 알아 의심이 없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업(業) 닦기를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관찰하여 이해하는 것만을 닦아 미혹을 없애고 도에 들어간다. 만일 관행(觀行)을 배우면 비록 우매한 범부라 하더라도 이치를 조금 알 때는 곧 망령되게 집착함이 없지만, 관찰하여 이해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항상 도법(道法)에 미혹하여 비록 모든 선(善)을 닦는다 하더라도 삿된 집착을 없애지 못하며, 다만 망령되게 집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바른 법과 도를 수행하는 이를 비방하는 사람은 그 미혹한 마음으로써 삿되고 바름[邪正]을 알지 못하여 남이 옳거나 자기와 똑같은 것은 알지 못하고, 곧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미혹한 사람은 마음에 도법이 없어서 대부분 세상의 선(善)에 의해 망령되게도 그릇된 현상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였다.
“속가에 있는 사람은 다섯 가지 진(塵)을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속가에 있는 자와 싸움을 일으키고, 출가(出家)한 사람은 모든 견해[見]가 각각 다름으로 말미암아 출가한 사람과 싸움을 일으킨다.”
또 『성실론』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계(戒)를 지키면서 청정하다고 집착하면 이것을 계취결(戒取結)이라고 하며, 제 자신이 집착하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하고 다른 것은 다 망령된 말이라고 하면 이것을 견취결(見取結)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출가한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근본이라고 하고, 또 수순고변(隨順苦邊)이라고도 한다. 또 이 계취(戒取)에 의해 여덟 가지 진실한 성도(聖道)를 버리면, 이것은 바른 도가 아니고 청정한 도도 아니어서 능히 고(苦)를 따르는 허물이 되고 만다.
또 계취는 곧 출가한 사람의 결박[縛]이요, 모든 욕심은 곧 속가에 있는 자의 결박이다. 또 계취는 비록 갖가지로 출가한 사람의 법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공(空)한 것이어서 아무 소득도 없을 것이다.
또 이 계취로 인해 바른 도와 바른 도 수행하는 사람을 비방한다. 또 계취는 곧 모든 외도(外道)들이 교만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런 등의 글의 증명으로 알 수 있다. 계취 등은 오직 세간의 선(善)으로서 나고 죽음의 과보를 부를 뿐이다. 그러므로 수고(隨苦)라고 말할 뿐 참다운 도법이 아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대부분 미혹함이 많아 망령되게 집착하여 죄를 짓는다. 그런 까닭에 비록 10사(使)가 다 선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도를 장애하고 허물을 일으키는 근본을 논하면, 오직 6사만이 마음을 미혹시키는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을 끊지 않으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거칠고 중한 죄를 지어 장차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다.
이상은 10사를 끊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과 쉬움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아득하여라. 사랑하는 왕사성(王舍城)
높고도 높은 반가운 영취산(靈鷲山)
업결(業結)의 삼계(三界)는 지옥이요
영리하고 둔한 10사(使)의 목[頸]이로다.
흐리고 악하면 아래 세계로 가고
번뇌를 끊으면 하늘 위로 오르리.
나에 집착하면 고보(苦報)를 달다 하고
코끼리를 두려워해 우물에 몸 던진다.
발돋움하여 그 교화 부러워하고
생각생각에 마음의 병 고친다.
전생 복으로 석존(釋尊)님 만났으니
큰 신선의 빼어남을 우러러 사모한다.
무명(無明)의 번뇌를 이미 다 파괴했거니
또한 진정(眞正)을 깨달은 것과 같다.
짐을 모두 내려놓으매 즐겁고 빈 마음이여
휴식하고 보니 고요하지 않음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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