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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14 법원주림(法苑珠林) 71권

by Kay/케이 202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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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71

 

법원주림 제71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80. 죄복편(罪福篇)[여기 4부가 수록되어 있음]

술의부(述意部) 업행부(業行部) 죄행부(罪行部)
복행부(福行部)

(1) 술의부(述意部)
저 선(善)과 악(惡)은 서로 뒤집히고 밝음[明]과 어두움[暗]은 서로 반대가 되는데, 죄(罪)와 복(福)은 은연중에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 눈앞에 있는 일처럼 환하다. 그런 까닭에 악을 이름하여 부추(俯墜:굽혀 떨어진다는 의미)라 하고 선을 이름하여 청승(淸升:맑아서 올라감)이라고 하며, 복을 바로 부요(富饒:풍부하고 넉넉함)라고 하고, 화(禍)를 최절(摧折:꺾이고 끊어짐)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죄와 악의 법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복과 선(善)의 공덕은 꼭 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이 명백하나니 오르고 잠기는 것으로 관찰해 알 수 있느니라.

(2) 업행부(業行部)

自述
이 업행(業行)의 명칭에 대해서는 성인의 말씀이 일정하지 않다. 말하자면 죄행(罪行)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혹 흑흑업(黑黑業)1)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불선업(不善業)이라고 하기도 하며, 범부(凡夫)의 복행(福行)에 대해서는 혹 흑백업(黑白業)2)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선업(善業)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비록 여러 가지이나 실행하는 본체는 다름이 없다.
실행하는 본체란 무엇인가?
『지도론(智度論)』에서 “살해(殺害) 등은 곧 불선업이고, 보시(布施) 등은 바로 선업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말은 곧 죄와 복의 두 가지 행(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살생 등이라고 한 것은 열 가지 악행(惡行)을 모두 취한 것으로서 똑같이 죄업을 짓는 행이라고 말한 것이고, 보시 등이라고 한 것은 수행하는 일 중에서 지계(持戒)와 선정(禪定) 등의 업을 모두 취한 것으로서 이것은 다 세상의 선행이므로 모두 복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세상의 선행 가운데 여덟 번째의 선정이란, 욕계(欲界)의 난선(亂善)3)과 대립시킨 것으로서, 이것을 이름하여 부동행(不動行)이라고 한다. 만약 세간을 초월하는 이관(理觀)4)의 지혜에 대립시키면 이것은 어떤 일을 조건으로 하여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복행이라고 이름한다. 저 『육도경(六度經)』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五度] 가운데에 들어 있는 선정(禪定)을 통틀어 복행이라고 한다”고 한 경우와 같다.
다만 모든 죄와 복에 있어서 사람마다 행하는 것이 같지 않아서 혹 어떤 사람은 오로지 복만 닦는 이도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오직 죄만 짓는 이도 있으며, 혹 어떤 사람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이도 있다. 오로지 복만 닦는다고 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淨心]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보시와 계율 등을 실천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오로지 죄만 짓는다고 한 것은, 자애로움과 윤택하게 하는 것[慈潤]이 없어서 몸과 입과 뜻이 움직이기만 하면 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며, 죄와 복을 함께 행한다고 하는 것은, 복을 닦을 때에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때로는 겸하여 사물에 손해를 끼치기도 하나니, 이것은 곧 욕계의 잡업(雜業)으로서 순수하게 깨끗한 것[純淨]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부정(不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일 죄가 되는 행위를 논하면 크게 나타나는 것[麤顯]을 알 수 있고, 만일 잡업에 대하여 논하면 깨끗한 복이 되는 행위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데 조금 은밀하여 알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복을 닦는 모든 것들이 다 그 외형(外形)에 의거하는 것이라서 일을 하는 중에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는 일마다 다 같으며, 만일 속마음[內心]에 의거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각기 다르고 정밀하고 거친[精麤] 정도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복을 닦는 모든 것은 겉은 같으나 속이 다르기 때문에 순업(純業)과 잡업(雜業), 이 두 가지 업이 똑같지 않다. 만일 마음을 잘 길들이고 자비(慈悲)로 세상을 불쌍하게 여기면, 그런 보시를 따르는 것은 다 큰 선(善)이 되겠지만, 만일 생각[念]을 잘 지키지 못하고 형상만 보고 복을 닦으면 안은 거칠고 밖은 미세하여 오직 잡업만 이룩하게 될 것이다. 저 어리석은 마음에 맞으면 비록 세상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실로 도에 어긋날 것이니, 이것도 깨끗한 복행은 아니다. 복을 닦을 때에 생(生)은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관찰하지 않고, 나[我]라고 하는 착각이 항상 있어서 3성(性)에 두루 통함으로써 온갖 짓는 업이 착각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것은 임시로 성(性)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를 어기는 것이 된다.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세상의 과보를 많이 구하고 또 명예를 많이 구하기 때문에 깨끗한 복이 아니다. 이 순수한 뒤섞인 업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많이 미혹하기 때문에 지금 대략 부분적이나마 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하여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먼저 뒤섞인 업[雜業]에 대해 논하고 뒤에 청정한 복업[淨福]에 대해 밝히겠다. 다만 온갖 뒤섞인 업에는 거칠고 미세한[麤細] 것만 있다. 거친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까지 해롭게 하는 것이고, 미세한 것은 제 자신만을 위해 오직 세상의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먼저 거친 것으로서 뒤섞인 업에 대하여 논해 보겠다. 가령 보시(布施)에 대해 논하면, 혹 어떤 이가 법답지 못하게 재물을 취해 보시한다고 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쳐다가 보시하는 것과 같다. 이로써 얻는 과보는 도리어 항상 쉽게 없어지며, 보시를 하고 난 뒤에 후회하면서 얻는 과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거나, 만약 남의 재물을 빼앗아서 그것을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비록 재물을 얻는다 하더라도 항상 소모되고 말아 재물이 쌓이지 않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보시를 행하고도 남을 해롭게 하는 이가 있으니, 말하자면 보시를 할 때에 선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혹 성을 내거나 혹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는 반드시 악한 세계에 떨어진다. 그는 비록 복의 과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되어 따로 과보를 받게 되고 인간이나 천상에는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큰 보시를 닦고 실천하더라도
성질이 급하고 성을 많이 내거나
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으면
뒤에는 큰 용의 몸이 되리라.

큰 보시를 잘 행하더라도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면
이 업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힘이 아주 센 금시조(金翅鳥)가 되리라.
만약 복을 닦되 세상의 과보를 구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은 재물을 버릴 때에 다가올 과보를 바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혹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무상(無常)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버리거나, 혹은 명예를 위하는 등,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다면, 그것은 자비로써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순수하고 깨끗한 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이런 것을 부정한 보시[不淨施]라고 하였다.
『백론(百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과보를 위한 보시는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과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현보(現報)라는 것은 명예롭고 남에게 공경 받고 사랑 받는 것이요, 후보(後報)라는 것은 후세(後世)에 부(富)하고 귀(貴)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장사꾼이 멀리 다른 지방에 가서 비록 여러 가지 잡된 물품을 가지고 많은 이익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은 중생들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처럼
보시를 하고 과보를 바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실한 자애로움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명예만을 바라거나 혹 미래의 과보만을 위하면, 아무리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깨끗한 업이 아니요, 그 업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얻는 과보도 정밀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보시하거나, 혹은 또 명예를 구해서이거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거나, 어떤 과보를 바라서이거나, 두렵고 무서워서 그 때문에 보시를 행한다면, 그 얻는 과보가 청정하지 못하고 받는 것도 대부분 추하게 되느니라.”
보시의 실천이 이미 그러하므로 지계(持戒) 등 모든 선업이 깨끗하지 못한 것도 다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백론(百論)』에서 말하였다.
“깨끗하지 못한 지계라는 것은 스스로 즐거운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계율을 지켜 천상에 태어나서 천상의 여인들과 즐겁게 놀기를 구하거나, 혹은 인간 세계에서 부귀하게 되어 다섯 가지 욕락[欲]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면, 그것은 음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相]을 덮은 것과 같다. 마음속으로는 남의 여자를 탐내면서 겉으로 거짓 친하고 선한 척하면 이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 미세[細]한 마음으로 깨끗하지 못하게 계를 지키는 것은, 아난(阿難)이 난타(難陀)에게 말하고 나서 게송을 설한 것과 같다.

마치 숫양이 뿔을 맞부딪치면서 서로 싸울 때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다시 물러서는 것처럼
그대가 음욕을 위해 계율을 지킨다면
그 일도 또한 이와 같다네.

마음을 열어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익만을 위하면 얻는 복이 많으리라. 또 보시의 상대로 가난한 이도 있고 병든 이도 있다. 혹 어떤 이는 법을 알면서도 생활이 궁핍한 경우도 있으니, 만일 그런 이들에게 보시하여 이익이 되게 하고 오래도록 선하게 하면, 그 보시는 틀림없이 얻는 복이 많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섯 가지 보시[施]에 대하여 찬탄하시면서 얻는 복이 많다고 하셨다. 이른바 멀리서 온 사람과 멀리 가는 사람과 병들고 수척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 법을 아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시는 현재 세상에서 복을 얻느니라.”
이 보시는 마땅한 것이어서 현재 세상에서 많은 복을 얻나니, 이것은 명예를 구하는 보시와는 같지 않다. 요긴하지 않는 곳에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할애하여 보시한다 해도 깨끗한 과보를 얻지 못한다.
또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따라 기뻐한다는 것은, 만약 온갖 것을 바라서 지극히 거칠고 착하지 못한 짓을 하면,
이것은 곧 미세한 죄[細罪]가 되지만 그래도 그 또한 선(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욕심 여의기를 바라고 또 오로지 다른 사람만을 위한다면 이것은 잡업(雜業)이니, 바로 죄가 된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거친 사람[麤人]에게는 큰 죄[麤罪]가 있고, 섬세한 사람[細人]에게는 미세한 죄[細罪]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잡업은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이니, 바라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이것은 깨끗하지 못한 업이다.
이상 여기까지는 죄와 복을 함께 행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으로 욕계의 깨끗하지 못한 잡업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만일 깨끗한 업[淨業]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앞의 잡업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론(百論)』에서 말하였다.
“깨끗한 보시란,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사랑하고 공경하며 이익이 되게 하면 그가 얻는 복도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경(因果經)』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만일 어느 누구든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으로서
보시할 만한 재물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보시 행하는 것을 볼 때에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라.
따라서 기뻐한 복의 과보는
직접 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공덕의 크기가 대지(大地)와 같지만
자신만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시하면
그가 얻는 과보는 겨자만큼 작다.

액난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을 구제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한 보시보다 낫다.
수많은 별이 아무리 광명이 있다 해도
하나의 밝은 달의 광명만은 못하다.

만일 모든 범부들이 죄와 복을 지으면서 인과(因果)와 선악(善惡)이 아무 성질이 없다[無性]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것은 일은 잃어버리고 그 성질에만 집착함으로써 항상 삼유(三有:三界)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파리는 어느 곳에나 달라붙지 않는 곳이 없지만, 오직 불꽃에만은 달라붙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의 애착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선한 법[善法]이나 선하지 못한 법[不善法]에 모두 집착하고, 나아가 아무 생각이 없는 데까지도 집착한다. 그러나 오직 성질이 공(空)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큰 불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으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나니, 선하고 악한 성질이 없는데도 항상 다섯 갈래의 세계를 윤회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이 없는 중생에 해당한다.”
이상에서는 범부의 죄와 복, 이 두 가지 행업(行業)이 일에 미혹하여 그 성질에 집착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상으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을 마친다.


(3) 죄행부(罪行部)

自述
이것은 성자(聖者)가 뒤의 복행설(福行說)에 나아가기 위하여 먼저 밝힌 것이다.
죄의 행[罪行]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만 이 죄의 행위는 망견(妄見)이 경계에 물들어 나니 남이니[我人] 하고 고집스럽게 결정하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違順]에 집착함으로써 곧 자신과 남[自他]으로 하여금 모두 악한 업을 성취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 말하였다.
“탐욕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지 않으면 마음을 괴롭게 할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나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있고 또 얻은 견해가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탐욕 때문에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비록 다른 경계는 없지만, 그 미혹한 정(情)에 맞는다고 해서 억지 견해로 물들어 집착하는[染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경계를 보고 온갖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꿈과 맞다고 해서 사실이요 거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치로는 실제의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감정의 허망한 견해[妄見]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꿈속에서는 선한 일이 없는데도 그것을 선하다 하고 성낼 만한 일이 없는데도 성을 내며, 두려운 일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계(三界)의 중생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명(無明)의 잠[眠] 때문에 꼭 성낼 일이 아닌데도 성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아무리 별도의 경계가 없다 하더라도 저 미혹한 감정과 어울리면 망견(妄見)이 더러움을 일으키며, 마음 밖에 아무리 지옥 따위의 모습[相]이 없다고 하더라도 악한 업이 이루어졌을 때 허망한 견해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염마라(閻魔羅) 사람은 중생이 아닌데도 죄인이 그들을 보고 이들을 중생이라고 생각하여 손에 벌겋게 달아오른 쇠칼[鐵鉗]을 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악한 업이 이미 다 없어져서 목숨을 마치고 난 뒤에는 염마라의 옥졸(獄卒)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저 옥졸은 곧 중생의 수(數)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기름의 심지가 다하면 등불이 꺼지고 마는 것처럼 업이 다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염라(閻羅)의 옥졸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염부제(閻浮提)의 햇빛이 이미 나오고 나면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처럼, 악한 업이 다할 때에 염라의 옥졸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사나운 눈과 악한 입을 한 중생의
모습과 같은 두려워할 만한 색(色)이 다 없어진다. 또 그림을 그려놓은 벽을 부수면 그림도 또한 따라 없어지는 것처럼 염라 옥졸의 무서운 모습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글로써 인증(引證)하면 중생들이 악한 업으로 인해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할 중생은 자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망령되게 지옥을 보는 것이다.
【문】 지옥을 보는 이에겐 눈에 보이는 옥졸과 호랑이ㆍ이리 따위가 다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지옥에 염라가 있어서 모든 죄인을 판결한다면, 그 경계는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없다고 말하는가?
【답】 그가 지옥의 주인[閻羅]을 보는 것도 또한 바로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인이 지은 악한 업이 마음을 훈습(薰習)함으로써 마음을 변하게 하여 아무것도 없는데 망령되게 보지만 실은 지옥엔 염라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저 지옥에는 지옥의 주인이 없는데 지옥의 중생들은 자연스럽게 업에 의하여 지옥의 주인과 갖가지 고통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일으켜, ‘이것은 지옥이다, 지금은 곧 밤이다, 지금은 바로 낮이다’고 하거나, ‘나는 악한 업 때문에 개를 보고 새를 보며, 혹은 산이 억누르는 것을 본다’고 한다.”
이 글로써 증명하면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여 그 마음으로 하여금 달리 보게 하지만 실로 지옥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 밖에 지옥이 없지만, 악한 업이 이루어졌을 때에 억지로 망령되게 보는 것이다.
【문】 이 고통의 업보(業報)는 이미 선한 일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어찌 바로 선을 이야기해 익히게 하지 않고, 하필 감정에만 맞추어 괴로움의 업을 말하는가?
【답】 선과 악, 인(因)과 과(果)는 그 법이 반드시 서로 대치되는 것이다. 만약 그 탐욕 등이 바로 죄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시 등이 곧 선한 것임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만일 세 갈래 악한 세계가 바로 괴로움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천상 등의 즐거움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범부의 죄행(罪行)을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싫어하게 하고, 선한 데로 돌아가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근기가 둔한 사람이라면 이 괴로운 업을 듣고 그것을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고 이로 인해
마음을 바꾸어 온갖 복업을 닦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근기(根器)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 고통스러운 업을 듣고 그것을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해탈(解脫)을 구하고 이로 인해 마음을 돌려 도관(道觀)을 잘 닦아 곧 미혹한 가운데 세상을 벗어나는 인(因)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일체의 번뇌가 다 부처님의 종자이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운 업을 알고 그 근본을 싫어하여 여의는 것은 선을 일으키는 인연인 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만약 이 악한 업의 죄행을 말하지 않으면, 일체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 실천하여 끊이지 않을 것이니, 비록 정견(情見)에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허물의 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 밖에 따로 업의 고통이란 없는 것이니, 오직 경계가 없는 줄만 알면 마음은 항상 깨끗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비록 탐욕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탐할 만한 법이 있음을 보지 않고, 비록 진에(瞋恚)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성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우치(愚癡)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법은 어리석지도 않고 막힘이 없다는 것을 알며, 비록 중생들에게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두렵고 무서운 괴로움을 보인다 하더라도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 등의 모습[相]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로써 죄행(罪行)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마음일 뿐이요,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음을 증명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감정에 맞추어 방편으로 반드시 업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두 문[兩門]은 바로 실교(實敎)5)에 나아가 죄의 실체가 진실함을 말하면 따로 깨뜨릴 것이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죄가 된다고 결정지어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 진실을 모르고 망령되게 알고 있음을 특별히 밝힌 것이니, 그런 까닭에 반드시 죄행의 뜻을 결정지어 설명한 것이다.

(4) 복행부(福行部)

自述
이것은 복행을 밝힌 것으로서 앞의 죄행(罪行)에 대하여 이 복행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범부(凡夫)로서 욕계(欲界)의 선(善)을 닦는 사람은 다만 어지러운 마음으로 온갖 일의 복을 닦게 하면 결정코 하계(下界)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욕계의 업(業)이라고 말하며, 다섯 갈래 세계[道] 중에서 모두 다 일으킬 수 있다는 것들이다.
먼저 지옥에 대해 서술하겠다.
『아비담(阿毘曇)』에 의거하여
말하겠다.
“지옥의 사람들도 역시 세 가지 착한 업이 있다. 그것은 곧 의지(意地)의 세 가지 선근(善根)이다.
이것은 오직 성취하기만 할 뿐 현행(現行)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므로 법을 많이 듣지 않으면 생각으로 헤아려서[思量] 그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행이 없다.
만일 생득(生得)6)의 선근을 논하면 그런 것은 지옥에도 있는 일이다. 저 선예국왕(仙譽國王)이 5백 명의 바라문(婆羅門)을 죽이고 지옥에 태어났다가 신심을 내어 감로국(甘露國)에 태어난 경우와 같나니, 그러므로 현행임을 알 수 있다.”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또한 지옥에도 선한 현행이 있다고 말했다. 비록 노력하는 일은 없으나 방편으로 선을 일으켜 성인의 도를 닦아서 성인의 도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득(生得)의 선근이 있어야 선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여태까지 일찍이 세간의 신(信)ㆍ정진[進]ㆍ생각[念] 따위를 닦아 왔다. 그러므로 사견(邪見)을 일으켜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이라고 비방하기 전에는 이 선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얻는 것을 생득선(生得善)이라고 말하나니, 이 선근에 의지하여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전생의 업이 있어서 인연을 느끼는 것이 강한 사람은 큰 성인이 나타나서 교화하고 그 괴로움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도에 대한 법을 설명해 방편을 닦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축생이나 용 등에게도 선을 닦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이치[義:교리]를 설명하실 때에 한량없이 많은 새와 짐승들이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천상(天上)에 태어났다.”
또 『비담론(毘曇論)』에 의하면 이러하다.
“귀신과 축생의 열 가지 선행은 율의(律儀)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한 율의는 일체 중생들의 세계에 두루함으로써 귀신은 능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축생들은 어리석고 둔하기 때문에 율의를 내지 못한다”고 하였고, 또 『성실론(成實論)』에서는 “귀신이나 축생 등도 계율을 얻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만일 인간에 대하여 말한다면 북방의 울단월(鬱單越) 사람들은 오직 의지(意地)의 세 가지 선한 업도(業道)만을 성취하지만 현행은 아니다. 그러나 선을 끊지 않기 때문에 겁(劫)이 다할 때에 이르면 사람들은 다 선정을 닦는데, 저들만은 유독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여의지 못한다. 그 이외의
세 방위의 사람들은 다 열 가지 착한 것이 있으나 갖추지 못한 이들도 있다.
또 욕계(欲界)의 여섯 하늘에 대하여 논한다면, 여기에는 출가(出家)나 별해탈계(別解脫戒)7)가 없고, 다만 열 가지 선과 재가계(在家戒)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론(成論:成實論)』에서 말하였다.
“천제석(天帝釋)은 대부분 여덟 가지 계(戒)를 받고 용(龍) 등도 그것을 받는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들에 대하여 논한다면 『비담』에서 논한 것과 같다.
“상계(上界)에 태어나면 하계(下界)는 잃어버리므로 상계에서는 하계의 착한 업을 일으키지 않나니, 그 세계[界地]의 인과(因果)가 끊어지기 때문이며, 몸이 상계에 태어나면 하계의 법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루(有漏)에 의거한 것으로서 하계에 있으면 상계를 이룰 수 있지만, 상계에서는 하계를 잃게 되므로 곧 닦아 일으키지[修起] 못한다는 것이다.
또 『성실론』에 의하면 이러하다.
“상계에서는 하계를 성취하고 또한 겸하여 하계의 선한 업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러 범천(梵天)들이 부처님을 뵙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선행을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바로 욕계의 선한 업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 『비담론』과 『비바사론(毘婆娑論)』 등에 의하면, “범천이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禮讚]은 욕계의 선행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초선천(初禪天)에서 위의(威儀)와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소의(所依)의 무기(無記)는 선이 아니고, 밖의 몸과 입에 의거하면 이것은 상계의 색업(色業)인 것이다.
이상은 욕계 난선(亂善)의 복업(福業)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해 밝힌 것으로서 여기에서 마친다.
두 번째는, 색계 사선천(四禪天)의 선정의 업이 몸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이치를 밝히기로 한다.
만일 귀신이나 축생들 중에서도 성인의 강한 인연을 만나면 능히 도를 깨달을 수 있나니, 그들 또한 닦아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무루(無漏)는 선정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근본은 없지만, 깊은 선정의 정체(正體)에는 반드시 거칠고 얕은 미래의 선정의 마음이 있으니, 이 미래의 선정은 바로 색계의 업이다. 이 미래에 의해 욕결(欲結)을 끊을 때에는 이 업은 초선천인 범천의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인간과 천상에 대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다 색계(色界)의 업을 닦는다. 즉 선정을 닦지 않는 북방의 울단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방위의 사람들과 욕계천은 다 색계의 열 가지 선업을 닦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선정을 얻은 사람의 의지(意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욕이 없는 것과 성냄이 없는 것과 또 바른 견해를 말한다.
만일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한 업을 논하면, 선정의 마음에 의하여 선정과 계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선정과 계율은 곧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선행이다. 그러므로 선정을 얻었을 때에는 색계의 열 가지 선(善)이 있다.
만일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들에 의거해 논하면, 『비담론(毘曇論)』에서 이르기를 “무색계천은 색계 선정의 업을 닦아서는 일으킬 수가 없으니, 상계(上界)에 태어나면 하계(下界)를 버리게 되므로 계지(界地)가 끊어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실론』에 의하면, “무릇 무색계에 태어나더라도 하계인 색계의 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색계 선정의 복업(福業)인 열 가지 선한 업도(業道)가 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일 무색계의 4공정(空定:四無色定)8)의 업이 몸에 의지해 일어나는 이치로써 논하자면, 삼계의 사람과 하늘은 다 닦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 여기까지는 모든 복행은 몸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치에 대하여 밝힌 것으로서 여기에서 마친다.
만일 성인의 복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논한다면, 이것은 범부들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요, 바람[希望]이기 때문에 서술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였다.

인(因)을 찾으면 길은 결국 다른데
취(趣)를 버리는 것은 그래도 가볍다.
고통이 지극하면 즐거움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도리어 고통이 생긴다.

어찌 죄와 복이 다르지 않겠는가?
모두가 감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만일 유루(有漏)의 업을 끊으면
언제나 법신(法身)의 광명을 보리.

감응연(感應緣)[간략하게 한 가지 증험만을 인용하였다.]

당(唐)나라 무덕(武德:高祖의 年號, 618~626) 때에 수주(遂州) 총관부(摠管府) 기실(記室)9) 참군(參軍)10) 공각(孔恪)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가 하루 만에 다시 살아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관리에게 붙들려 관가에 갔더니 거기서 물었다.
‘너는 왜 소 두 마리를 죽였느냐?’
내[孔恪]가 말하였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였다.
‘네 아우가 네가 소를 죽였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내가 말하였다.
‘그러면 왜 아우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곧 내 아우를 불렀는데, 아우는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때였다. 아우가 오자 관리는 그에게 형틀을 씌우고 매우 준엄하게 고문하면서 아우에게 물었다.
‘너는 네 형이 소를 죽였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거짓이냐 사실이냐?’
아우가 말하였다.
‘형이 전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요적(獠賊:오랑캐)을 불러 위로할 때 나를 시켜 소를 잡게 하여 연회를 열었습니다. 실은 나는 형의 명령을 받들었을 뿐,
내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였다.
‘아우를 시켜 소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를 위한 일인데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관리가 말했다.
‘네가 오랑캐들을 불러 소를 잡아 대접하고서 그 공(功)으로 인하여 벼슬을 구하고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어찌 그것을 나라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인해 내 아우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의 일을 증명하기 위해 여기에 오래 붙들어 두고 있었다. 형이 너를 시켜 소를 잡은 것이니 너는 죄가 없다. 이제 너를 놓아주는 것이니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
그 말이 끝나자 아우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할 말을 다하지 못했다. 관리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왜 또 오리를 두 마리나 죽였는가?’
내가 말하였다.
‘전에 현령(縣令)으로 임관되었을 적에 오리를 잡아 관아에 온 손님을 대접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찌 나의 죄가 됩니까?’
관리가 말하였다.
‘관아에 손님으로 온 그 관리는 급료(給料)를 받고 있었으나 오리가 없었으므로 네가 오리를 잡아 그를 대접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의 아름다운 명예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또 물었다.
‘무엇 때문에 또 계란 여섯 개를 삶아 먹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평생 동안 계란은 먹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 기억으로는 내 나이 아홉 살이 되던 때 한식(寒食) 날 어머니가 계란 여섯 개를 주어 그것을 삶아 먹은 것뿐입니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였다.
‘그러면 그 죄를 어머니에게 추국(推鞫)하란 말인가?’
내가 말하였다.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 연유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 계란은 제가 삶아 먹었습니다.’
관리가 말하였다.
‘너는 남의 목숨을 죽였으니, 당연히 그 죄를 네가 받아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말하였다.
‘관부(官府)도 또한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억울합니다.’
관리가 이 말을 듣고 다시 불러 물었다.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
내가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죄는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따지면서 지금까지 닦아 온 복은 전혀 그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리가 주사(主司)에게 물었다.
‘공각에게 무슨 복이 있느냐? 어째서 그 일은 기록하지 않았느냐?’
주사가 대답하였다.
‘그가 지은 복도 다 기록하였습니다. 다만 죄보다 복이 적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이 많고 죄가 적었다면 먼저 복을 받게 하겠지만, 죄가 많고 복이 적으면 먼저 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각이 지은 복은 적고 죄는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복은 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관리가 화를 내어 말하였다.
‘아무리 죄를 먼저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 복을 들추어내어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명하여
주사에게 백 대의 매를 때리게 하였다. 그러자 피가 흘러 땅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야 주사는 내가 지금까지 지은 복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드러내어 보였다.
관리가 나에게 말하였다.
‘너는 먼저 죄를 받아야 한다. 나는 다시 7일 동안 말미를 주어 너를 돌려보낼 터이니, 부디 그 동안 부지런히 복을 짓도록 하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전송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깨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말하고 공각은 그 때부터 승니(僧尼)들을 많이 모으고 도를 닦으면서 참회하고 부지런히 고행(苦行)하였다.
7일이 되자 공각은 집안 식구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조금 있다가 목숨을 마쳤다.
이상은 임(臨)의 형이 수부(遂府)의 권속을 위해 부탁하여 자세히 적은 것이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서 나온 것이다.]

81. 욕개편(欲蓋篇)11)[여기에는 2부가 있다.]

오욕부(五欲部) 오개부(五蓋部)

1) 오욕부(五欲部)[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욕계부(欲繫部) 욕장부(欲障部)
가욕부(呵欲部)
(1) 술의부(述意部)
가만히 여러 경론을 찾아보면 수행하는 사람들[行者]이 도(道)를 닦을 때는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다섯 가지 탐욕은 도를 장해하는 근본이니, 만약 그것을 끊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무엇을 말미암아 성인의 도[聖道]를 증득할 길이 없다.”
그러니 그 근본을 알고자 하면, 대략 세 가지로 기술할 수 있다.
첫째는 안의 다섯 가지 감관[根]이요, 둘째는 바깥의 다섯 가지 대상 물질[塵]이며, 셋째는 이 두 가지에서 발생하는 다섯 가지 인식 작용[識]이다.
이 세 가지를 말미암는 까닭에 더러운 탐욕[欲染]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단련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코끼리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런 코끼리를 타면 마음먹은 대로 가지 않고, 성읍(城邑)을 멀리 벗어나서 텅 비고 넓은 들판으로 제멋대로 가는 등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처럼,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도 역시 이와 같아서 사람을 데리고 열반의 성읍을 멀리 떠나 나고 죽는 벌판으로 가게 될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아첨을 일삼는 신하는 왕을 사주하여 악을 짓게 하는 것처럼,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항상 중생들로 하여금 한량없이 많은 악을 짓게 하느니라.

또 비유하면 못된 자식이 스승[師長]과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온갖 악한 일을 짓는 것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도 이와 같아서 스승님의 좋은 말과 가르침을 듣지 않고 무슨 악이든 다 짓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선남자야, 범부들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하여 항상 지옥ㆍ축생ㆍ아귀(餓鬼) 등의 해침을 받는 것도 또한 원수와 도적들이 착한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다.”
또 『유교경(遺敎經)』에서 말하였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도적의 재화는 그 재앙이 여러 대[世]에 미쳐서 그 해(害)가 매우 무거우니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억제하고 따르지 않으며, 그것 지키기를 도둑을 지키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령 놓아주더라도 모두 오래가지 못해서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대개 개(蓋)에 대하여 논하면, 이것은 가리고 덮어 버린다는 뜻이니, 수행하는 사람을 덮어 장애(障碍)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뜻과 성품을 어둡게 하고 가라앉게[昏沈] 해서 선정과 지혜가 밝아지지 못하게 하여 착한 사람을 덮어 없어지게 하나니, 이것은 바른 도를 닦는 데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개(蓋)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법론(對法論)』에서 말하였다.
“이 개는 선한 성품[善品]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개라고 한 이유이며, 그 마음을 덮어 가리고 모든 착한 성품을 막아 작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개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의 다섯 가지 욕망은 바깥의 다섯 가지 대상 물질[塵]로부터 생겨나고 이 다섯 가지 개는 안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따라서 발생하는 것이다.

(2) 욕계부(欲繫部)

自述
대개 논하건대 다섯 가지 탐욕이란, 이미 그 뿌리가 있어서 곧 다섯 가지 탐욕을 일으키고 중생들을 얽어매어 해탈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범부는 다섯 가지 탐욕에 얽매여 마왕 파순(波旬)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끌고 가게 하나니, 그것은 마치 사냥꾼이 원숭이를 사로잡아 둘러메고 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국왕이 자신의 경계 안에 안주(安住)하면 몸과 마음이 다 안락(安樂)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의 경계에 이르게 되면 온갖 고통을 받는 것처럼, 일체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만약 자신의 경계에 잘 머물러 있으면
안락함을 얻지만, 만약 다른 사람의 경계에 이르면 곧 악마를 만나 온갖 고뇌(苦惱)를 받느니라.”
자기 자신의 경계란 4념처(念處)12)를 말하고, 다른 사람의 경계란 다섯 가지 탐욕을 말한다. 다섯 가지 탐욕이란, 남자와 여자의 몸 위에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접촉 등이 바로 그것이니, 곧 이 다섯 가지 탐욕은 늘 희망하는 것이고, 반드시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평범한 이치이다. 다섯 가지 대상 물질[塵]을 탐하여 집착하는 것을 탐욕[欲]이라 하고, 아울러 의식(意識)이 접촉하여 반연하는 경계를 법진(法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을 바로 진(塵)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행해지는 곳에서 다시금 악한 도적[惡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여섯 가지 큰 도적[大賊]이 일체 인민(人民)들의 재산과 보물을 겁탈하는 것처럼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인 악한 도적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의 좋은 재물[善財]을 겁탈한다. 비유하면 마치 여섯 가지 큰 도적이 만약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면 현재 그 집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을 겁탈하되,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아서 큰 부자로 하여금 졸지에 빈궁하게 만드는 것처럼, 이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인 도적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약 사람들의 감각기관[根]에 들어가면 온갖 착한 법을 다 겁탈 당하여 선법이 다 없어지고 나면, 가난하고 외롭게 되어 일천제(一闡提:斷善根)가 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여섯 가지 대상 물질이 마치 여섯 가지 큰 도적과 같다고 관찰하느니라.”

(3) 욕장부(欲障部)

自述
무릇 논하건대 욕과(欲過)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가지 탐욕의 폐마(弊魔)와 여섯 가지 대상 물질[塵]의 악한 도적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삿된 의혹[邪惑]은 불성(佛性)을 혼미하게 하고 장애하는 것[迷障]이라고 판단하셨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중생들의 다섯 가지 인식 작용[識]은 비록 일념(一念)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루(有漏)요, 또한 이것은 삿되고 전도(顚倒)된 것으로서, 모든 번뇌[漏]를 늘리고 키워서 모든 범부들로 하여금 색(色)에 집착하고, 나아가 인식 작용에까지도 집착하게 한다. 색에 집착하기 때문에 탐하는 마음을 내고, 탐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색에 얽매이며, 나아가서는 인식 작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얽매이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얽매이게 되기 때문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큰 고통과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또 말하였다.
“만일 어떤
보살이 자신은 깨끗한 계율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비록 다시는 여인과 서로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거나 희롱하거나 그 음성을 듣는 것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남자들이 여자를 쫓아다닐 때 그것을 목격하거나 혹은 여자가 남자를 따라다닐 때 그것을 목격하면 문득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낸다. 이와 같은 보살은 그 탐욕의 대상인 법진(法塵)을 성취하여 청정한 계율을 훼손하고 깨뜨리며, 범행(梵行)을 더럽혀서 그 계율을 더럽게 하나니, 그는 깨끗한 계율을 구족(具足)했다고 할 수 없느니라.”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갖가지 부정(不淨)을 관찰한다. 즉 노쇠(老衰)해지는 모든 것 중에서도 여자로 인하여 노쇠해지는 것이 제일 나쁘다. 칼ㆍ불ㆍ천둥ㆍ번개ㆍ원수ㆍ독사 따위는 그래도 잠시나마 가까이할 수 있지만, 여인의 아낌ㆍ시기ㆍ질투ㆍ분노ㆍ아첨ㆍ아양ㆍ더러움ㆍ투쟁ㆍ탐냄ㆍ질투 따위는 가까이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여자와 소인(小人)은 마음이 경박하고 지혜가 얕아 오직 음욕과 친근히 하며, 부귀ㆍ지혜ㆍ덕성ㆍ명예 따위는 관찰하지 않고 오로지 나쁜 욕심만 행하여 사람들의 선근(善根)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질곡(桎梏:수갑과 차꼬)ㆍ가쇄(枷鎖:형틀과 사슬)ㆍ구금ㆍ결박ㆍ감옥 따위는 비록 풀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오히려 그것은 풀기가 쉽지만, 여인의 사슬은 사람을 얽어매어 더러운 집착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으니 온갖 폐단 중에서도 가장 중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게송과 같다.

차라리 뜨겁게 달구어진 쇠뭉치를
눈[眼] 속에서 서서히 굴릴지언정
더러운 마음으로써
삿되게 여색(女色)을 보지 않으리.

웃음을 머금고 갖은 교태를 부리면서
교만하고 수줍은 체하며
얼굴을 돌이켜 곁눈질을 하고
예쁜 말씨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하나니

요사스럽고 더러운 걸음걸이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음욕의 그물 펼쳐 놓으면
사람들의 몸이 모두 빠지고 마네.

앉거나 눕거나 가거나 서 있거나 간에
눈을 흘겨보면서 아양을 부리나니
지혜가 엷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만 거기에 취해 버린다.

큰 칼을 들고 달려드는 적(賊)
이것은 그래도 이겨낼 수 있겠지만
여자라는 도적은 사람을 해치는 데도
그것을 금지하지 못하는구나.
독기를 머금은 저 독사는
그래도 손으로 잡을 수 있지만
사람들을 홀리는 여인들의 애정
부디 그것에 접촉해서는 안 되느니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여인을 마땅히 보지 않아야 하겠지만
만약 그들을 꼭 보려고 하거든

반드시 어머니나 누이처럼 보아야 한다.

부디 샅샅이 관찰해 보아라.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메꾸고 쌓은 것이니
음욕의 불길을 끄지 않으면
마침내 그것에 다 타고 말리라.

여색[色]의 허물도 이미 이러하거니, 그 밖의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 등도 으레 다 이와 같다. 일체 중생들이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나고 죽음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모두가 여색의 결박을 풀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님이 되어 지혜의 눈이 없으니 나고 죽는 구덩이를 보고도 결국은 거기에 빠지고 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인(道人)이나 속인(俗人)들은 탐욕의 근심거리를 관찰하지 않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나니, 언제 다시 돌아와서 이런 잘못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항상 더러운 데에 물들어 잠시도 버리지 못하나니, 계율조차도 오히려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선정과 지혜가 있어서 불성(佛性)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열반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악한 짓을 하고도 곧 후회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우유가 곧 낙(酪)이 되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재로써 불을 덮어놓은 것을
어리석은 사람이 함부로 밟는 경우와 같다.

(4) 가욕부(呵欲部)
『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수행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 탐욕을 꾸짖어야 한다.
‘슬프다. 중생들은 항상 다섯 가지 탐욕에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항상 끊임없이 그것을 구하다가 장차는 큰 구덩이에 떨어져서 더욱 심한 고통을 받되 마치 옴[疥]이 있는 자리를 불로 지지는 것과 같으니라. 다섯 가지 탐욕이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은 마치 개가 마른 뼈다귀를 씹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탐욕이 다툼을 더하게 하는 것은 마치 까마귀가 고깃덩이를 다투는 것과 같으며, 다섯 가지 탐욕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마치 바람을 거슬러 횃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탐욕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마치 사나운 독사를 밟는 것과 같으며, 다섯 가지 탐욕이 실속이 없기는 마치 꿈속에서 어떤 물건을 얻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탐욕이 오래가지 않는 것은 마치 잠깐 동안 빌린 것과 같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혹하여 다섯 가지 욕망을 탐하고 집착하며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다가 후세(後世)에 이르러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그 다섯 가지 욕심은 얻었을 때에는 잠깐 동안 즐거우나 잃어버렸을 때에는 크게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꿀을 바른 칼을 핥는 사람이 꿀 핥기만을 탐하다가 혀를 상하는 줄도 모르는 것과 같다.’
그 다섯 가지 욕심이란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다섯 가지는 선가(禪家)에 직접적인 장애가 되는 것이니, 만약
선정을 닦으려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만 할 것이다.”
첫 번째는 색욕(色欲:형상에 대한 탐욕)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이 색욕 때문에 직접 적국으로 들어가 혼자서 음란한 여자[婬女]인 아범바라(阿梵婆羅)의 방에 있었던 경우와 같다.
또 저 우전왕(憂塡王)은 여색에 물들었기 때문에 5백 명 선인(仙人)의 손발을 끊은 일도 있었다. 이런 갖가지 인연으로 색욕의 허물을 꾸짖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욕(聲欲:소리에 대한 탐욕)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다. 소리의 형상[相]은 멈추지 않아서 들렸다가는 곧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소리의 형상이 무상한 것이어서 곧 변하여 없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음성(音聲)에 대하여 망령되게 즐겁다는 마음을 내어 이미 지나간 소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집착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저 5백 선인의 경우와 같다. 즉 그들이 산 속에 머물고 있을 때에 긴타라 여인이 설산(雪山)에 있는 어느 못에서 목욕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선인들은 그 노랫소리를 듣고 곧 선정(禪定)을 잃어버리고는 심취(心醉)하여 열광적으로 미쳐 날뛰면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공덕을 잃어버리고 그 뒤에 악한 세계에 떨어졌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소리라는 것은 생겨나자마자 사라져서 앞소리와뒷소리가 함께 하지 못하므로 서로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관찰하여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더러워지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모든 하늘의 음악으로도 오히려 어지럽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사람의 소리이겠는가? 이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인연을 바로 성욕(聲欲)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하였다.
“저 5백 명의 선인들이 날아다닐 때에 긴타라 여인의 노래 소리를 듣고 마음이 집착하고 미치고 도취하여 모두들 신족(神足)을 잃어버리고 한꺼번에 땅에 떨어진 일과 같다.”
또 저 성문(聲聞)들이 긴타라왕(緊陀羅王)인 둔륜마(屯崙摩)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며 모든 법의 실상(實相)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수미산(須彌山)과 모든 나무들이 다 흔들리고 대가섭(大迦葉) 등 여러 큰 제자들도 모두 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면서 가만히 있지 못하였다.
천만(天鬘)보살이 대가섭에게 물었다.
“당신은 가장 큰 덕을 지닌 사람[耆年]으로서
두타행(頭陀行)13)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합니까?”
대가섭이 대답하였다.
“나는 하늘이나 인간의 어떤 욕심에도 마음이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의 과보(果報)로 인한 소리와 또 지혜로써 변화시켜 일으키는 소리는 참아낼 수 없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8방(方)에서 일어난 바람이 수미산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만약 겁(劫)이 다할 때에 부는 바람인 비람풍(毘嵐風)14)이라는 바람이 일어나 수미산에 불어오면 썩은 풀처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수라의 거문고는 항상 저절로 소리를 내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 거문고를 타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여기엔 또한 산란한 마음도 없고 거두어들이는 마음도 없다. 이것은 복덕의 과보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법신(法身) 보살도 이와 같아서 분별하는 마음도 없고 또한 흩어지는 마음도 없으며 설법하는 모습[相]도 없나니, 이것은 한량없는 복과 지혜의 인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향욕(香欲:냄새에 대한 탐욕)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냄새에 집착하는 것은 그 죄가 적다”고 한다. 그러나 냄새에 물들거나 집착하면 온갖 번뇌[結使]의 문을 열기 때문에 비록 또 백 년 동안 계율을 지켰다 하더라도 능히 끊어 버려 한 번에 무너지고 만다.
이것은 마치 어떤 아라한의 경우와 같다. 즉 그 아라한은 항상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는 그 발우를 사미(沙彌)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발우를 씻게 하였다. 그 발우 속에는 먹다 남은 밥알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사미가 그 냄새를 맡아보니 매우 향기로웠고, 그것을 먹어 보니 너무도 맛이 있었다. 사미는 곧 방편을 써서 스승의 승상(繩床) 밑에 들어가 두 손으로 상다리를 붙잡고 스승이 용궁으로 갈 때 승상과 함께 용궁으로 들어갔다. 용왕(龍王)은 그 스승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는 아직 도를 증득하지 못했는데 왜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말하였다.
“나는 따라온 줄 몰랐습니다.”
사미는 음식을 얻어먹고 또 용왕의 딸까지 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아름다웠고, 그 몸에서는 묘한 향내가 나서 비할 데가 없었다. 사미는 마음속으로 매우 애착하여 곧 나쁜 서원을 세웠다.
“나는 장차 복을 지어 이 용왕이 살고 있는 궁전을 빼앗으리라.”
용왕이 아라한에게 말하였다.
“다음부터는 이 사미를 데리고 오지 마십시오.”
사미는 그 용궁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일심으로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면서 오로지 소원한 바를 성취하기를 갈구하면서
어서 빨리 용이 되기를 바랐다.
그 때 절 주위를 돌고 있었는데 발 밑에서 물이 나왔다. 그러자 스스로 반드시 용이 될 것임을 알고는 스승이 본래부터 살고 있던 큰 연못가로 가서 가사(袈裟)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못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는 곧 죽어서 큰 용으로 변하였는데, 그 복덕(福德)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그 때 그 용왕을 죽이니, 온 못이 온통 새빨갛게 피로 물들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스승과 여러 스님들이 그를 꾸짖었다. 그러자 그 사미가 말하였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마음의 모습도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스님들을 데리고 못에 가서 관찰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은 다 냄새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과실이다.
또 어떤 비구가 있었다. 그는 숲 속의 연화지(蓮華池) 가를 거닐다가 연꽃 향기를 맡고 그 맡은 냄새에 집착하였다.
그 못의 신(神)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저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서 앉아 있던 그 자리를 버리고 여기 와서 내 향기를 훔칩니까? 향기를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사라졌던 번뇌[結臥]가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 또 다른 어떤 사람이 못 속에 들어가 꽃을 많이 따고 연뿌리도 줄기도 잡아당겨 꺾어서 연못을 휘저어놓고 갔다. 그런데도 못의 신은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비구가 신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너의 연못에 있는 꽃을 다 꺾었는데도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다만 연못 가를 거닐었을 뿐인데, 어째서 갑자기 나를 보더니 향기를 훔쳤다고 꾸짖는가?”
못 신이 말하였다.
“세간의 악한 사람들이야 늘 죄와 번뇌[罪垢]의 더러움 속에 살고 있으면서 저 깨끗하지 못한 곳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과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은 선정을 닦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향기에 집착함으로써 당신의 좋은 일을 그르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흰 천은 선명하고 깨끗하므로 거기에 이물질이라도 묻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보지만, 저 악한 사람은 검은 옷에 검은 점을 찍은 것과 같아서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데 누가 따지겠습니까?”
이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인연을 바로 향욕의 허물을 꾸짖는 것이라고 말한다.
네 번째는 미욕(味欲:맛에 대한 탐욕)의 허물에 대하여 꾸짖은 것이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나는 단지 좋은 맛만 탐하고 집착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죄의 고통을 당하되, 구리 녹인 물을 입에 머금고
벌겋게 단 철환(鐵丸)을 삼키게 될 것이다. 만일 음식을 잘 관찰하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마음으로 굳게 집착하면 깨끗하지 못한 벌레[不淨虫]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
어떤 사미의 경우와 같다.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낙(酪)을 좋아했다. 모든 단월(檀越)들이 스님에게 낙을 공양할 때면 이 사미는 늘 그가 남긴 것을 얻어먹고 마음속으로 애착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버리지 않다가 목숨을 마치고 난 뒤에는 이 남은 낙의 병(甁) 속에 벌레로 태어나게 되었다.
사미의 스승은 아라한이 되어 스님들이 낙을 나눌 때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하여 이 애락(愛酪) 사미를 다치지 않게 하시오.”
여러 스님들이 말하였다.
“이것은 벌레일 뿐인데 무슨 까닭에 애락 사미라고 말씀하십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이 벌레는 본래 내 사미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남은 낙에 대하여 탐내고 애착하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이 병 속에 태어난 것이라오.”
스승이 낙을 분배받자 마침 그 안에서 벌레가 나왔다.
스승이 말하였다.
“낙을 좋아하던 사람아,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왔느냐?”
그리고는 곧 낙을 주었다.
또 한 국왕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월분(月分)이라고 하였다. 그 왕에겐 태자가 있었는데, 그 태자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집착하였으므로 왕의 동산지기가 날마다 좋은 과일을 보내오곤 하였다.
동산 속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 위에는 새가 새끼를 낳아 기르면서 항상 향산(香山)으로 날아가 맛있고 향기로운 과일을 따 가지고 와서 그 새끼를 먹여 길렀다. 한번은 여러 마리 새끼들이 서로 다투다가 과일 하나를 땅에 떨어뜨렸다.
동산지기가 이른 아침에 나갔다가 이 과일을 보고 그 범상치 않은 과일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곧 왕에게 보내 드렸다. 왕은 그 과일의 특이(特異)한 향기와 빛깔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태자는 그것을 보더니만 왕에게 달라고 졸랐다. 왕은 그 아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곧 그것을 그에게 주었다. 태자는 그것을 먹어 보고는 그 과일의 맛에 빠져서 매우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너무 애착한 나머지 날마다 그 과일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왕이 곧 동산지기를 불러 그 과일을 구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동산지기가 말했다.
“이 과일은 종자가 따로 없고 땅에서 주운 것이라서 어디서 난 것인지 그 유래(由來)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자가 자꾸 울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자 동산지기를 나무라면서 재촉하였다.
“너는 어디서든지 그 과일을 구해 오도록 하라.”
동산지기가 그 과일을 주웠던 곳에 이르러 새 둥지를 바라보다가 새가 그 과일을 물어오는 것을 알고는 몸을 가리고 살금살금 나무 위로 올라가서 엿보다가 그 과일을 빼앗아오곤 하였다. 그는 어미 새가 그 과일을 물고 왔을 때에 곧바로 과일을 빼앗아 보내기를 날마다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자 어미 새가 화가 나서 향산에서 독이 있는 과일을 물고 왔다. 그런데도 그 향기와 맛, 그리고 빛깔은 먼젓번 과일과 똑같았다. 동산지기는 그 과일을 빼앗아 왕에게 보냈고, 왕은 그것을 태자에게 주었다. 태자는 그것을 먹고서 얼마 되지 않아 온몸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더니 이내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은 바로 미욕(味欲)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다.
다섯 번째는 촉욕(觸欲:접촉의 느낌에 대한 탐욕)의 허물을 꾸짖는 것이다. 이 접촉은 곧 번뇌[結使]의 원인이요, 이것은 마음을 얽어매는 근본이다. 왜냐 하면 나머지 네 정(情)은 각각 당연히 구분되지만, 이것은 온몸으로 집착하고 그것을 버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항상 중죄(重罪)를 짓게 된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본생(本生:前生)의 인연을 말씀하셨다.
“바라내국(波羅奈國) 어느 산 속에 어떤 선인(仙人)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가을날 달밤에 요강 속의 소변을 씻어내다가 암수 사슴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곧 음심(淫心)이 발동하여 그 요강 속에 정액을 흘렸다. 암사슴은 그것을 먹고 곧 새끼를 배었고, 달이 차자 새끼를 낳았다. 그 모습은 사람과 비슷하였는데 오직 머리에 뿔 하나가 있는 것과 그 발만이 사슴과 흡사할 뿐이었다. 사슴은 산고(産苦)가 있자 선인이 살고 있는 암자 곁에 이르러서 새끼를 낳았다. 자기 새끼를 보고는 사람이라고 여겨 선인에게 맡기고 떠나갔다. 선인이 나와 이 사슴 새끼를 보았을 때 저절로 본래의 인연이 기억나서 그것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는 데려다가 길렀다.
그 사슴이 나이가 들어 장성(長成)하자 부지런히 학문을 가르쳐서 열여덟 가지 대경(大經)15)을 통달하였고, 또 좌선(坐禪)을 배웠으며, 4무량심(無量心:慈ㆍ悲ㆍ喜ㆍ捨)을 수행하여 5신통을 증득하였다.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폭우(暴雨)를 만나 진흙탕에 미끄러졌는데, 그 발이 불편하여 땅에 쓰러지면서 물병[軍持]도 깨고, 또 그 발까지 다치게 되었다. 그는 곧 크게 화를 내어 물병에 물을 담고 주문을 외워 비가 내리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선인의 복덕과 모든 용이나 귀신들까지도 모두 비를 내리게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은 까닭에 오곡(五穀)과 5과(果)가 다 생산되지 못했고, 인민들이 궁핍(窮乏)하여 더 이상 살아갈 길이 없었다. 바라내왕(波羅奈王)은 매우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모든 대신[大官]들을 모아 놓고 비에 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어떤 현명한 신하가 말하였다.
‘항간에 전해지는 말을 들으니, 산 속에 어떤 선인이 살고 있는데 뿔이 하나 달린[一角] 선인이라고 합니다. 그 선인은 발이 불편하기 때문에 산에 오르다가 미끄러지면서 발을 다치고는 크게 화가 나서 12년 동안 비를 내리지 못하게 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만일 12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는 다 망할 것이고, 또한 인민(人民)들도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다.’
왕은 곧 사람을 모집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저 뿔 하나 달린 선인의 신통력을 잃게 하고, 그를 내 백성이 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나라의 반을 그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리라.’
그 때 그 나라에는 선타(扇陀)라고 하는 음녀(淫女)가 있었다. 그녀는 얼굴 모습이 아름답고 단정하며 큰 부자였는데, 그런 그가 이 모집에 응해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선인은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는 선인이 낳은 자식이다.’
음녀가 말하였다.
‘만일 그가 사람이라면 내가 충분히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고는 곧 금(金)으로 만든 소반을 가져다가 좋은 보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반드시 저 선인의 목을 타고 오겠습니다.’
음녀는 곧 5백 대의 수레를 구하여 5백 명의 미녀를 태웠고, 5백 대의 사슴이 끄는 수레에는 갖가지 환희환(歡喜丸)을 실었다. 그 환희환은 온갖 약초를 조합하여 만들었는데, 거기에 색칠까지 하여 흡사 여러 가지 과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갖가지 큰 위력을 지닌 좋은 술을 준비했는데, 색깔과 맛이 물과 같았다. 그녀는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고 숲 속을 걸어갔는데, 그 형상이 마치 선녀(仙女)와 같았다. 뿔 하나 달린 선인이 살고 있는 암자 곁에 초암(草庵)을 따로 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일각(一角) 선인이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그것을 보았을 때, 거기에 있던 모든 미녀들이 다 나와서 맞이하고 아름다운 꽃과 미묘한 향을 선인에게 공양하자, 일각 선인은 크게 기뻐하였다. 모든 여인들은 고운 말씨와 공경하는 말로 선인의 안부를 묻고 일각 선인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좋은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맛있고 깨끗한 좋은 술을 권하면서 그것을 맑은 물이라 하고, 환희환을 주면서 그것을 과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실컷 먹고 모든 여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맛있는 과일과 좋은 물은 처음 먹어 본다.’
모든 여인들이 말하였다.
‘우리가 일심으로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원한 공덕 때문에 이 좋은 물과
맛있는 과일을 얻었답니다.’
선인이 여러 여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그 피부가 그처럼 곱고 또 살이 쪘는가?’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이렇게 맛있는 과일을 먹고, 이렇게 좋은 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살이 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다시 선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하여 여기에 머물러 사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대답하였다.
‘나도 또한 여기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여인들이 말하였다.
‘우리 같이 목욕이나 하십시다.’
선인은 곧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리고 여자들의 부드러운 손길이 몸에 닿자마자 마음이 동요하였고, 그리하여 곧 여러 여인들과 함께 서로서로 번갈아 씻어 주다가 애욕이 더욱 발동하여 마침내는 음사(婬事)를 행했다. 그리하여 그 선인은 곧 신통을 잃었고, 그 때문에 하늘에서는 7일 낮 7일 밤 동안 큰 장마비가 내렸다. 그들은 모두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7일이 지난 뒤에 가져온 술과 음식이 다 떨어지자 선인은 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서 먹었는데, 그 맛이 그리 좋지 못하였으므로 선인은 다시 먼저 것을 찾았다.
그녀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이미 다 먹어서 없어졌습니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가십시다. 여기에서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선인이 말하였다.
‘그 뜻을 따르겠다.’
그리고는 곧 그녀와 함께 떠나 성을 향해 가다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그녀는 그만 길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말하였다.
‘나는 너무 피곤하여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선인이 말하였다.
‘당신이 더 이상 갈 수 없다면 내 목덜미에 올라타시오. 내가 그대를 태우고 가겠소.’
그녀는 먼저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저의 지혜와 능력을 보러 오십시오.’
왕은 곧 수레를 장엄하게 꾸미라고 칙명(勅命)을 내리고는 그 수레를 타고 나아가 그 선인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그녀가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방편(方便)의 힘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선인은 이제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그를 이 성 안에 살게 하시고 잘 공양하고 공경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욕망을 만족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왕은 그 선인을 대신(大臣)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선인은 성안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자꾸만 허약해졌다. 그는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기억하고는 세상의 욕망이 싫어졌다.
왕이 선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즐거워하지 않고 몸이 자꾸만 여위어 가는가?’
선인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다섯 가지 욕망을 누리고 있으나 항상 숲 사이의 한가롭고 조용함과 여러 선인들과 노닐던 곳이 저절로 생각나서 그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은 가만히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억지로 그의 뜻을 어겨 그 마음에 고통을 주게 되면, 그 고통이 극에 달하여 곧 죽고 말 것이다. 나는 본래 가뭄의 걱정을 없애기 위해 그랬을 뿐인데, 이제
그 목적을 이미 이루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억지로 그의 뜻을 빼앗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 그 선인을 놓아 보냈다. 선인이 이미 산 속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정진(精進)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아 다시 5신통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뿔 하나 달린 선인은 바로 지금의 나이고, 그 음녀(婬女)는 지금의 저 야수타라(耶輸陀羅)였느니라. 그 때 그녀는 환희환으로 나를 유혹하였었고, 나는 번뇌[結]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그 유혹에 빠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환희환으로 나를 유혹한다 해도 그 때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알아야 한다. 부드럽고 유연한 촉감의 법은 저 선인도 흔들리게 하였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범부들이겠는가?”
이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인연을 두고 촉욕(觸欲)의 허물을 꾸짖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탐욕에 대하여 잘 꾸짖으면 곧 다섯 가지 덮개[蓋: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

2) 오개부(五蓋部)

【문】 무엇을 다섯 가지 덮개[蓋]라고 하는가?
【답】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이며, 셋째는 수면개(睡眠蓋)이고, 넷째는 도회개(掉悔蓋)이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
첫째, 탐욕개라고 하는 것은, 단정하게 앉아서 선정에 들었다가 마음에 욕각(欲覺)이 생겨 부질없는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그것을 추구하여 그치게 하지 않아 결국 우환(憂患)이 생기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술바가(術婆伽)16)는 왕의 딸[王女]을 사모함으로써 마음속에 애욕이 발동하여 오히려 그 몸을 불살랐고 그 재앙이 천사(天祠)에까지 미쳤거늘, 하물며 탐욕의 독(毒)을 내어 치성(熾盛)해졌으니, 어찌 모든 선한 법을 태우지 않겠는가? 만일 그 마음이 애욕에 집착하면 도(道)를 가까이할 길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지도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서 부끄러움[慙愧]을 아는 사람은
발우를 가지고 중생들을 거두거늘
어떻게 탐욕의 티끌을 놓아두어
다섯 가지 정(情)에 깊이 빠지겠는가?

이미 버린 다섯 가지 탐욕의 즐거움
그것을 버렸거든 돌아보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다시 얻으려고 하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이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모든 탐욕은 구할 때엔 괴롭고
얻었을 때엔 두려움이 많으며
잃었을 때엔 흔히들 열뇌(熱惱)하나니
아무 곳에도 즐거운 곳이 없네.

모든 우환이 이와 같을 뿐이니
어떻게 하면 이것을 버릴 수 있을까?
복된 선정의 즐거움을 얻으면

곧 이런 것에 속임을 당하지 않으리.

두 번째 진에개(瞋恚蓋)라고 하는 것은, 성냄은 바로 모든 착한 법을 잃는 근본이요, 온갖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인연이며, 법요(法樂)의 원수요 선한 마음의 큰 도적이며, 악한 말을 내는 창고요 재앙과 걱정의 칼이며 도끼이다.
만약 도를 닦을 때 생각하기를 ‘이 사람(성내는 사람)은 나를 괴롭게 하고, 나와 절친한 사람을 괴롭히며, 내 원수를 찬탄한다’고 하면서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미래에도 또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면, 이것을 9뇌(惱)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성을 내고, 성을 내려는 생각은 또 마음을 덮어 버리기 때문에 개(蓋)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빨리 버려 더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
『지도론』에서 석제바나(釋提婆那)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쭌 것과 같다.

어떤 물건이 편안함[安隱]을 죽이고
어떤 물건이 근심 없는 것을 죽이며
어떤 물건이 독(毒)의 뿌리가 되어
일체 선(善)을 다 삼켜 없애는가?

부처님께서 다음 게송으로 답하셨다.

성냄을 죽이면 곧 편안해지고
성냄을 죽이면 근심이 없어진다.
성냄이 독의 뿌리가 되고
성냄이 모든 선(善)을 없앤다.

이와 같은 줄을 알고 난 뒤에는 마땅히 자비(慈悲)를 닦고 인욕(忍辱)으로써 성냄을 없애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소리란 공(空)한 것이요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모든 법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으로서 그 성품이 다 공한 것임을 알고, 만약 어떤 사람이 성을 내어 꾸짖거나 때리거나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음을 안다.”
소리를 관찰해 보면 그것은 본래 없는 것으로서 오직 바람 소리만이 인연을 따라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꼭 성낼 만한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논(論: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말을 하려고 할 때에는 입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는데, 그 이름을 우타나(憂陀那)17)라고 한다. 이 바람이 다시 배꼽으로 들어갔다가 배꼽에 부딪치면 메아리가 생겨 나오는데, 메아리가 나올 때 일곱 곳에 부딪쳐 일어나는 것을 말이라고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우타나라고 하는 바람이
배꼽에 부딪쳐 위로 나오고
이 바람이 일곱 군데에 부딪치나니

잇몸과 이와 입술이며

혀와 목구멍과 또 가슴인데
이런 와중에 말이 생겨나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줄을 알지 못하고
미혹하고 집착하여 분노와 어리석음을 일으킨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만약 악한 말로 꾸짖으면, 생각하기를 ‘나무라고 꾸짖는 소리 따위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 소리가 날 때에는 뒤의 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뒤의 소리가 생기고 나면 앞의 소리는 벌써 사라지고 만다. 만약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것을 꾸짖는 소리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바람 소리이거늘 내가 왜 성을 내겠는가?’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중생을 관찰하고 비록 또한 백천 겁(劫) 동안 꾸짖음을 받을지라도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만약 백천 겁 동안 칭찬을 받을지라도 또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음성이 나오고 사라짐은 꿈과 같은 것이요, 메아리와 같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수면개(睡眠蓋)라고 하는 것은, 속마음이 어둡고 산란한 것을 면(眠)이라고 말하며, 다섯 가지 정(情)이 어둡게 가려서 지절(支節)을 방자하게 놀리며, 자리에 누워 깊이 잠이 든 것을 수(睡)라고 말한다. 이 수면의 번뇌[蓋]는 지금 생과 다음 생의 진실한 즐거움을 깨뜨릴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악한 법은 가장 좋지 못한 것이다.
왜냐 하면, 다른 개(蓋)는 감정이 깨달아서 없앨 수 있지만, 수면[眠]이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서 촉감을 느끼지 못하고 느낌이 없기 때문에 제거하여 없애기가 어렵다.
『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잠을 많이 자는 제자들을 다음 게송을 설하여 가르치고 경계해야 한다.”

너희들은 죽어 누워 있는 송장을 끌어안지 말아라.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임시로 사람이라 이름하나니
마치 중한 병을 앓고 몸에 화살을 맞은 것 같아
모든 고통이 다 모였는데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으리.

마치 결박을 당해 끌려가 죽임을 당할 사람과 같아
온갖 재해가 곧 닥쳐오려 하거늘 어찌 잠을 잘 수 있으리.
맺은 원수를 없애지 못했고 재해를 제거하지 못하여
마치 독사와 함께 같은 방에서 자는 것과 같고
또한 전쟁터에 이르러 흰 칼날 사이에 있는 것 같나니
그런 와중에서 어떻게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

수면이란 큰 어둠이 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속이고 속여 사람의 총명을 빼앗는다.
수면은 마음을 덮어 아무것도 못 보나니
이와 같이 크게 잃었는데 어찌 잠들 수 있으리.


네 번째는 도회개(掉悔蓋)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의 동요[口掉:들뜸]이니, 이른바 음영(吟詠)을 좋아하고 기뻐하며, 옳고 그름을 논쟁하고 다투며, 이익 없는 희론(戱論)과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따위이니, 이것을 입의 동요라고 한다.
둘째는 몸의 동요[身掉]이니, 이른바 말을 타고 이리저리 치달리면서 방일하기만 좋아하고 기뻐하며, 힘으로 서로 치고 받으며 팔이나 손가락 또는 손바닥으로 서로 끼는 것 따위이니, 이것을 몸의 동요라고 한다.
셋째는 마음의 동요[心掉]이니, 이른바 심정(心情)이 방탕하고 방종(放縱)한 생각을 반연하며, 문예(文藝)와 세간의 재주나 기술[才技]을 생각하는 온갖 나쁜 각관(覺觀) 따위이니, 이것을 마음의 동요라고 한다.
이 동요의 법[掉法]은 출가(出家)한 사람의 마음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지도론』에서 다음 게송을 말하였다.

너는 이미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었으며
와발(瓦鉢)을 가지고 다니면서 걸식(乞食)을 실행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희도(戱掉)의 법을 즐거워하고 집착하여
감정대로 방일하게 놀아나 법의 이익을 잃는가?

이미 법의 이익도 없거니와 또 세간의 즐거움도 잃어버린다. 이미 그 허물을 깨달았으면 마땅히 빨리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른바 회(悔:참회)라는 것은 만약 동요[掉]하고도 뉘우침[悔]이 없으면 개(蓋)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동요할 때에도 그대로 인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선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전에 한 일을 뉘우치면서 근심과 고뇌가 마음을 덮기 때문에 그것을 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요한 뒤에 그로 인하여 뉘우침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둘째는 크고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이 항상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 독화살이 심장에 들어가 굳게 박힌 채 뽑을 수 없는 것이다.
『지도론』의 게송과 같다.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될 것은 짓고
꼭 지어야 할 것은 짓지 않으면
뉘우침과 괴로움의 불길에 타게 되고
후세(後世)엔 악한 세계에 떨어지리라.

만일 누구든지 지은 죄를 후회하였다면
참회한 뒤에는 다시는 걱정하지 말라.
이와 같이 마음이 늘 안락하면
항상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리.

만일 두 가지 뉘우침이 있고도
또한 지어야 할 것을 짓지 않거나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을 지으면
그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니라.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잘 짓고
온갖 악한 일을 이미 지었으면
그로 하여금 짓지 않게 할 수 없으리.


다섯 번째 의개(疑蓋)라는 것은, 이른바 의심으로 마음을 덮어 버리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에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서도 공(空)하여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보배가 있는 산에 들어가서도 손이 없으면 아무것도 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온갖 의심이 너무 많으면 반드시 선정만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선정을 방해하는 것에 세 가지 의심이 있나니, 첫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첫째,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든 감각기관[根]이 암둔(暗鈍)하고 죄와 허물이 매우 중하니, 아마도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제 자신을 의심하여 선정과 지혜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법을 배우고자 하면, 부디 제 자신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나니, 그것은 전생[宿世]의 선근(善根)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스승을 의심한다는 것은, ‘저 사람(스승)은 위의(威儀)와 모습[相貌]이 저러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그 자신에게도 도가 없는데 어떻게 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을 의심하고 업신여기면서 곧 선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 법을 없애려고 하면 마치 악취(惡臭)가 나는 가죽주머니일지라도 그 속에 금(金)이 있으면, 그 금이 탐나기 때문에 그 가죽주머니를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아서 스승이 비록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또한 그 스승에 대하여 부처와 같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느니라.
셋째,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저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의 마음을 고집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법에 대하여 곧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의심[猶豫]을 내면 곧 그 법에 마음을 깃들이지 못한다.
왜냐 하면 『지도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의혹이 생겨 어느 쪽 길도 선택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 가운데서
의심을 내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네.

의심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을
부지런히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의심은 어리석음에서 생겨나나니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이니라.

선(善)하고 선하지 못한 법 가운데
나고 죽음과 저 열반(涅槃),
정녕 진실한 그런 법이 있나니
부디 그 법에 대하여 의심을 내지 말아라.

만일 너희들이 의혹(疑惑)을 품으면
죽음이라는 왕의 옥리(獄吏)가 결박하리니
마치 사자에게 잡힌 사슴과 같아
거기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이 세상에 있으면서 비록 의심이 있더라도
마땅히 미묘하고 선한 법을 따라야 하나니
비유하면 마치 갈림길을 잘 관찰하여
편하고 좋은 길로 가는 것과 같다네.


【문】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이 한량없이 많고 그지없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다섯 가지 법만을 버리라고 하는가?
【답】 이 다섯 가지 법이 이름은 비록 좁은 것 같으나, 그 뜻은 세 가지 독(毒)을 다 갖추고 있고, 또한 8만 4천 가지 모든 진로(塵勞:煩惱)의 문을 통틀어 포섭하고 있다. 첫 번째 탐욕개(貪欲蓋)는 곧 탐독(貪毒)이요, 두 번째 진에개(瞋恚蓋)는 곧 진독(瞋毒)이며, 세 번째 수면개(睡眠蓋)와 의개(疑蓋)는 곧 치독(癡毒)이요, 끝으로 도회개(掉悔蓋), 이 하나의 개(蓋)는 바로 저 3독을 고루 포함하고 있으니, 모두 합하면 네 부분[分]의 번뇌가 된다. 그 하나 가운데 2만 1천이 있으니, 저 넷 가운데에는 모두 8만 4천 가지 진로의 문이 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이 다섯 가지 개(蓋:번뇌)만 제거하여 없애 버리면, 곧 온갖 선하지 못한 법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부채[債]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과 같고, 또는 중한 병이 나은 것과 같으며,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이 풍부한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같고, 악한 도적의 수중에서 스스로 벗어나 편안하고 걱정이 없는 것과 같으니,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다섯 가지 개(蓋)만 제거하면 그 마음이 청정해지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해나 달도 연기ㆍ구름ㆍ먼지ㆍ안개ㆍ아수라의 손으로 가리는 등 이 다섯 가지 사물이 덮어 버리면 밝고 분명하지 못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유한 일들에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다섯 가지 탐욕은 신식(神識)을 어둡게 하고
다섯 가지 개(蓋:煩惱)는 복의 힘을 가리며
여섯 가지 감각기관[根]은 고통의 업을 이룩하고
여섯 가지 도적[賊]은 마음의 빛을 어지럽힌다.

욕심의 물결은 감정[情]을 따라 일어나고
애욕의 그물은 마음을 따라 짜여진다.
세 가지 독(毒)은 인공(人空)18)을 장애하고
네 가지 흐름[流:瀑流]은 쉬지 않고 흐른다.

지금 비록 고치고 수리하나
참주(斬籌)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황새와 비둘기의 관찰도 아직 끝나지 않았거늘
원숭이를 잡으려고 하니 어찌 넘어뜨리겠는가?

스스로 5욕과 5개를 끊지 않으면
어떻게 멀리 올라갈 수 있으리.
수레를 나란히 해 보배 성(城)으로 가면
다 함께 능인(能仁:佛)의 덕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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