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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08 법원주림(法苑珠林) 65권

by Kay/케이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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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65

 

법원주림 제65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75. 방생편(放生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평범한 잡된 무리도 모두 삶을 탐하고 미련하여 미혹된 무리도 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숲을 잃은 곤궁한 호랑이는 목숨을 여막 안에 맡기고, 깃을 잘린 놀란 새는 몸을 책상 곁에 던진다. 심지어 양생(楊生)이 새를 기를 때 어찌 옥환(玉環)에 뜻이 있었겠으며, 공씨(孔氏)가 거북을 놓을 때 본래는 금인(金印)에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한 기약이 어그러지지 않아 그런 과보가 이르렀던 것이니, 그러므로 인과의 업행은 화하여 해[日]와 같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큰 자비의 교화는 괴로움의 구제를 처음으로 삼고 큰 서원의 마음은 중생 제도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다만 5부(部)의 유명한 종족이 다 솥을 벌여 놓음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3시(市)의 뛰어난 사람이 모두 칼을 두드림으로써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중생이 무슨 죄가 있기에 억울하게 잔혹한 벌을 당하고, 함식(合識)은 허물이 없으면서 함부로 절이고 삶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한의 영혼이 끊이지 않고 고통의 과보가 서로 갚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다 함께 자비의 행을 닦아 두려워하는 것들을 다 살도록 놓아주어 비록 저 날짐승과 물고기라도 마음대로 마시고 쪼게 하고, 자색 비늘과 붉은 꼬리들로 하여금 다 강호(江湖)를 잊게 하며, 비단 가슴과 푸른 깃 등을 하늘에 소요하게 해야 한다. 혹 3귀(歸)를 듣고 도를 깨치면 눈먼 용과 무엇이 다르며, 4제(諦)를 듣고 천상에 나면 다시 앵무새와 같을 것이니, 다 함께 오래 사는 기초를 놓고 모두 항상 사는 과보를 부르게
하라.

(2) 인증부(引證部)
『범망경(梵網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불자가 자비심으로 방생하면, 모든 남자는 다 내 아버지요, 모든 여자는 다 내 어머니이다. 나의 생(生)이란 근본이 없는 생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6도(道)의 중생은 다 내 부모이다. 그런데 그것을 죽여 먹으면 그것은 내 부모를 죽이는 것이요, 또 내 옛 몸을 죽이는 것이다. 일체의 땅과 물은 다 내 전생의 몸이요, 일체의 불과 바람은 다 내 본래의 몸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生)마다 생을 받는 방생을 행하라.
세상 사람이 축생 죽이는 것을 보거든 부디 방편으로 구제하여 그 고난을 풀어 주고 항상 교화하며 보살계를 강설하여 중생을 구제하라. 부모나 형제가 죽는 날에는 법사를 청해 보살계와 경률을 강설하여 그 명복을 빌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든 부처님을 만나 보고 인간이나 천상에 나게 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느니라.”
또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일체 도인과 속인의 7중(衆)들은 다 물을 걸러서 마시고 써야 한다. 만일 걸러서 얻은 물이면 손바닥의 가는 무늬를 보듯 자세히 살펴보라. 살펴볼 때는 큰 코끼리가 대를 실은 수레를 돌리는 그 동안에 쓸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물을 거르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면 내가 걸러 벌레를 잡아 본래 물을 가져온 곳에 갖다 두라. 만일 물을 가져온 곳이 멀거나 가깝거나 거기 있는 못이나 우물이 7일 동안 마르지 않는 것이면 그 벌레를 거기에 넣어 주라. 만일 그 물벌레가 있는 줄을 알면 그릇이나 노끈을 남에게 빌려 주지 말고 못이나 강물에 벌레가 있으면 큰 소리로 외쳐라.
‘이 물에는 벌레가 있다.’
만일 누가 그 까닭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장자여, 직접 이 물을 보시오.’
만일 그가
친우이거나 스승 같은 사람이거든 이렇게 말하라.
‘여기는 벌레가 있으니 물을 걸러서 써야 한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어떤 두 비구는 일찍이 부처님을 뵈온 적이 없으므로 먼 북쪽에서 부처님을 뵈오려 왕사성으로 떠났다. 도중에서 목이 말랐으나 벌레가 있는 물을 만났다.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은 말하였다.
‘우리 같이 이 물을 먹자.’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말하였다.
‘벌레가 있는데 어떻게 먹겠는가?’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은 말하였다.
‘내가 만일 먹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그러면 부처님을 뵐 수 없다.’
그는 그 물을 먹고 떠났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계율을 지키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고 드디어는 목이 말라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죽자 곧 삼십삼천에 나서 원만한 몸으로 먼저 부처님께 가서 그 발에 예배하고 부처님은 그를 위해 설법하셨다. 그는 법눈이 깨끗해져 3귀계를 받은 뒤에 천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물을 마신 사람은 뒤에 와서 부처님을 뵈었다. 부처님께서는 4중(衆)에게 설법하신 뒤에 옷을 헤쳐 그 금색의 몸을 이 비구에게 보이시면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너는 내 육신을 보고자 하지만 그것이 어찌 계율을 지니는 것만 하겠는가. 먼저 내 법의 몸과 지혜의 몸을 보아라.’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20리 밖을 나가는 비구로서 물을 거르는 주머니를 가지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것이요, 자기는 없더라도 동행하는 이에게 그것이 있으면 여행을 허락한다.’
또 출정(出征) 나가는 군인과 교화하러 다니는 어떤 비구니가 있었다. 군인들은 다 활을 물 거르는 주머니 안에 두고 그것으로 물을 걸렀다. 어떤 관리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크게 화를 내어 그들을 죽이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은 조그만 벌레를 보고도 겁을 내어 죽이지 못하거늘 어찌 적을 죽이려 하겠는가?’
군인들은 변명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다.
‘만일 벌레들이 나라에 해를 끼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 죽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 원한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걸러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다 놓아주었다. 이 수행하는 사람의 자비의 선근으로 말미암아 도적은 다 와서 투항하였다.”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하룻밤을 지낸 물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조그만 벌레들이 생겼을까 염려되므로 거르지 않았거든 마시거나 쓰지 말라. 이것을 세지불살계(細持不殺戒)라 하느니라.”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지난 옛날 세상에 백성들이 병이 많아 누렇고 하얗게 여위었다. 보살은 그 때 붉은 고기가 되어 그 살을 병자들에게 보시하여 그 병을 고쳐 주었다.
또 옛날 보살은 새가 되어 숲 속에서 살았다. 어떤 사람이 깊은 물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기서 물귀신의 덫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보살은 향산(香山)에 가서 약초(藥草)를 캐어 와서 그 덫에 붙여 덫의 노끈이 모두 삭아 사람은 거기서 벗어났다. 보살은 전생에 이런 일이 무량하여 구제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본생경(本生經)이라 한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옛날 설산(雪山) 밑의 위덕(威德)이라는 사슴 왕은 5백 마리 사슴의 왕이 되었다. 그 때 사냥꾼은 곡식과 덫을 놓았다. 사슴 왕은 앞서 가다가 오른 다리가 덫에 걸렸다. 사슴 왕은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지금 이 모양을 보이면 어느 사슴도 감히 곡식을 먹지 않을 것이니, 이 곡식을 다 먹어 버려야겠다.≻
사슴 왕은 그 다친 다리의 모양을 보였다. 그 때 다른 사슴은 다 가고 오직 암사슴 한 마리만이 있어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왕은 아십시오
저기 사냥꾼이 옵니다.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그 덫에서 벗어나시오.

그리고 암사슴은 사냥꾼을 보고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당신은 예리한 칼로
나를 먼저 죽이시오.
그리고 원하노니

저 사슴 왕을 놓아주시오.

사냥꾼은 이 말을 듣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 다음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으리.
또 저 사슴 왕도 죽이지 않고
너와 사슴 왕을 놓아주리니
어디로든지 마음대로 가라.

사냥꾼은 곧 사슴 왕을 놓아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사슴 왕은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때의 그 5백 사슴은 바로 지금이 이 5백 비구이니라.’
그리고 그 때 기러기 왕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그것을 잡았다. 함께 있던 기러기가 기러기 왕을 대신해 제 목숨을 버리려 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다. 사냥꾼은 가엾이 여겨 그 두 마리를 다 놓아주었다. 기러기는 그 뒤에 보배를 구해 그 은혜를 갚았으니, 그 대의(大意)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왕은 사슴의 말을 듣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진실로 짐승일 뿐이니
이름은 사람 머리 사슴이다.
너는 비록 사슴의 몸이나
이름은 사슴 머리 사람이구나.

이치로 따져 말한다면
형상만으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만일 자비심만 가졌다면
비록 짐승이나 실은 사람이다.

나는 지금부터
고기는 일체 먹지 않으리.
나는 무외(無畏)의 보시로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하리.”

또 『선견율』에서 말하였다.
“목건련은 아육왕을 위해 본생경(本生經)을 연설했다.
‘대왕님, 옛날 자고새 한 마리가 조롱(鳥籠)에 갇혀 시름하면서 크게 울 때에 그 동류들이 몰려와 사람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자고새는 도인에게 물었습니다.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도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울 때에 그들을 죽일 마음이 있었느냐?≻
자고새가 말하였습니다.
≺내가 울 때 친구들이 모여 온 것이요, 나는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인은 말하였습니다.
≺죽일 마음이 없었으면 네게는 죄가 없다.≻
그리고 다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업이 같다고 해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같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 아니다.
선(善)한 사람은 마음을 잘 거두어 머무나니

죄가 함부로 네게 오는 것이 아니니라.’”

또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향산(香山)에 선인들이 사는 곳이 있었고, 그 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못이 있었다. 한번은 자라 한 마리가 그 못에서 나와 먹이를 먹고 햇볕을 받으며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그 때 향산의 원숭이들이 못의 물을 먹으려고 언덕에 올라왔다가 이 자라가 입을 벌리고 자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원숭이는 음심(婬心)이 동해 그 신생(身生)을 자라 입 안에 넣었다. 자라는 놀라 깨어나면서 입을 닫아 그것을 육갑(六甲) 속에 감추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상(相)에 집착하나니
그것은 마치 자라한테 물린 것 같다.
지조 잃으면 마라(魔羅)에게 붙들려
도끼를 쓰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때 자라는 급히 원숭이를 붙잡고 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원숭이는 황급하여 생각했다.
≺만일 물에 들어가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원숭이는 아프고 힘이 빠져 자라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물에 떠서 이리저리 돌고 끌려 어떤 험한 곳에 이르러 자라는 벗듯이 누웠다. 원숭이는 두 손으로 자라를 안고 생각했다.
≺누가 나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까?≻
원숭이는 일찍부터 저 선인이 사는 곳을 알기 때문에 말하였다.
≺저이가 나를 구해 주리라.≻
원숭이는 자라를 안은 채 그리로 갔다. 선인은 멀리서 이들을 보고 생각했다.
≺아아, 이상하다. 저 원숭이는 무엇 때문에 장난을 하는가?≻
원숭이는 일부러 선인에게 말했다.
≺바라문 선인님, 어떤 보물을 발우에 가득 담아 오십니까? 무엇을 믿고 내게 오십니까?≻
그리고 원숭이는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어리석은 원숭이
죄 없는 남을 괴롭혔다.
재액을 구제하실 현사(賢士)님이여,
내 목숨은 오래지 않다.

바라문님, 만일에 오늘
나를 구해 주지 않으신다면

잠깐 동안에 이 신생(身生)이 끊겨
곤액(困厄) 그대로 산으로 돌아가리.

그 때 선인은 게송으로 답하였다.

나는 너로 하여금 그것 벗어
저 산 속으로 돌아가게 하겠지만
염려스럽다, 너희 원숭이 성질
또 그런 짓을 다시 할까를.

그 때 선인은 저들을 위해 그 전생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라야, 너는 전생에
그 이름을 가섭이라 했고
원숭이야, 너는 전생에
그 이름을 교진여라 했었다.

과거에도 그런 음욕을 행했거니
이제는 그런 버릇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가섭은 교진여를 놓아
저 산림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자라는 이 말을 듣고 곧 원숭이를 놓아주었느니라.’
게송으로 말하였다.

친한 이 모두 내 권속인데
세대가 달라 서로 속이지만
다만 현재의 즐거움만 구하고
오는 고통의 근본임을 모른다.

나를 끌고 3도(塗)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게 하거늘
스스로의 자비로 놓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리.”

감응연(感應緣)[한 가지 증험만 인용한다.]
당(唐)나라 위군(魏郡)의 마가운(馬嘉運)
당(唐)나라 위군(魏郡)의 마가운(馬嘉運)은 정관(貞觀) 6년(632) 정월에 집에 있다가 날이 저물어 대문을 나갔다. 갑자기 어떤 두 사람이 각각 말 한 마리씩을 붙들고 문 밖 나무 밑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가운은 물었다.
“당신네는 누구십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동해공(東海公)이 우리를 보내어 마생(馬生)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가운은 평소에 학식이 있어 그 이름이 온 고을에 다 퍼졌으므로 항상 대사(臺史)와 사방의 귀인들이 그를 청했다. 그런 줄 알기 때문에 괴이히 여기지 않고, 그 사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말이 없습니다.”
저들은 말하였다.
“말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것으로 마생을 모시겠습니다.”
가운은 나무 밑에서 말에 올랐으나 가운의 몸은 나무 밑에 거꾸로 누워 있었다. 조금 있다가 어떤 관리가 가운을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남녀 수십 인이 문 밖에서 무엇을 하소연하는 듯했다. 어떤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가운과 아는 사이로서, 그 고을의 장공근(張公瑾)의 첩이었다. 그녀의 성은
원(元)씨로서 손에 한 장의 문서를 들고 가운에게 말하였다.
“마생은 아직도 나를 아시겠습니까? 옛날 장총관(張總管)과 노실 때에 늘 자주 뵈었습니다. 총관은 무례하게도 이유 없이 나를 죽였으므로 나는 천조(天曹)에 호소한 지 3년이온데 왕천주(王天主)가 되어 공근을 구호하여 지금 항상 보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원한을 풀었으나 관리가 지금 오래지 않아 쫓아올 것입니다. 나는 혼자 억울하게 당했습니다만 마생은 왜 여기 오셨습니까?”
가운은 전에 원씨가 피살된 줄을 알았으나 지금 보고 비로소 죽은 것을 확실히 알았다. 사자가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말하였다.
“동해공이 지금 주무시므로 뵈올 수 없습니다. 저 곽형사(霍刑司)에게로 가시오.”
가운이 형사를 만났는데, 그는 곧 익주(益州)의 행대랑(行臺郞) 중의 곽장(霍璋)이었다. 그는 가운을 보자 맞이해 자리에 앉히고는 말하였다.
“이 부(府)의 기실관(記室官)이 지금 공석이어서 동해공이 그대의 재학(才學)을 듣고 그 자리에 앉히려는 것입니다.”
가운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처자를 거느리고 가난하게 살 뿐이요, 벼슬은 원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곽장은 말하였다.
“학문이 없어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는 사이라 내가 천거하여 되도록 하겠소.”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동해공이 지금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운을 데리고 들어갔다. 한 사람이 청사에 앉았는데 살이 찌고 키가 작으며 얼굴빛은 검었다. 그는 가운을 앞으로 불러 말하였다.
“그대의 재학을 듣고 기실(記室)을 맡기고 싶은데 할 수 있겠소?”
가운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시골 늙은이로서 경학(經學)을 후생(後生)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을 뿐이요, 기실 벼슬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동해공은 말하였다.
“곽장을 아시오?”
가운은 대답했다.
“예, 압니다.”
그는 곧 곽장을 오라 하여 가운의 재술(才術)을 물었다. 곽장은 말하였다.
“평생에 그 경학은 알지만 문장 짓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동해공은 물었다.
“문장을 잘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가운은 대답했다.
“진자량(陳子良)이라는 사람이 문장을 잘합니다.”
동해공은 말하였다.
“이 마생은 놓아 돌려보내라.”
그리고 곧
자량을 데려오라 했다. 가운은 하직하고 나와 곽장과 헤어질 때 곽장은 말하였다.
“자네는 돌아가거든 우리 집 개한테 말해 주시오.
‘나는 임종 때 너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타던 말을 팔아 그것으로 부도(浮屠)를 세우라고. 그런데 왜 너는 말을 팔아 네 마음대로 써 버렸느냐? 빨리 내 말대로 부도를 세우라.’
내가 말한 우리 집 개란 내 맏아들을 두고 한 말이오.”
가운은 물었다.
“내가 아까 장공근의 첩을 만났는데, 그녀가 말한 천주(天主)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곽장은 말하였다.
“공근의 고향에서 사람의 왕이 5계를 받들면 죽어서 천주가 된다 하오. 그것이 항상 공근을 구호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으나 이제는 면하지 못할 것 같소.”
이렇게 말하고 이별하면서 사람을 시켜 가운을 전송했다. 어떤 험한 오솔길에 이르러 그는 가운에게 말하였다.
“이 길을 따라 돌아가십시오.”
이상은 다 가운이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그 해 7월에 면주(綿州)의 진자량(陳子良)이 갑자기 죽었다가 하룻밤을 지내고 깨어나 말하였다.
“나는 동해공을 보았는데 그는 나를 기실(記室)로 쓰고자 했으나 나는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못한다고 사양했다.”
오(吳)나라에 진자량(陳子良)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가 죽고, 또 공근도 갑자기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뒤에 가운은 어떤 사람과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관부(官府) 사람을 보았다. 가운은 황급히 달아나다가 한참 만에야 진정했다. 동행하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가운은 말하였다.
“동해공의 사자를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사람을 붙들러 익주(益州)로 가려 한다’ 하고는, 다시 ‘진자량이 그대를 걸어 고소했으므로 그대 때문에 곽사형이 큰 꾸지람을 들었다. 그대는 거의 면하지 못할 뻔했으나 그대는 목숨을 살린 복이 있기 때문에 면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 가운이 촉(蜀)나라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못의 고기를 모두 훑어 잡으려는 것을 보고, 그 때 가운이 남에게 글을 가르치고 받은 비단 수십 필로 그 고기를 사서 살려 주었는데, “목숨을 살렸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정관(貞觀) 때에 왕은 구성궁(九城宮)에 있으면서 이 말을 듣고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을 시켜 이 일을 조사하여 문분이 이 일을 적어 왕에게 아뢰었다 한다.
그 뒤에 가운은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이
벼슬로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에 있다.]

76. 구액편(救厄篇)[여기에는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보살부(菩薩部) 유수부(流水部)
상주부(商主部) 수왕부(獸王部)

(1) 술의부(述意部)
자비는 큰 힘의 보시요, 복을 비는 것은 걱정을 없애 달라는 청이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는 것은 여러 성인이 다 그런 것이지만 관세음보살만이 홀로 그 이름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불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몸이 문드러지고 바다에 떠돌면 사는 생명이 없게 된다. 그러나 순식간에 말하고 생각하여 귀향(歸向)하면 큰 바다도 말릴 수 있고, 뜨거운 불에 찬 기운이 돌며 목에 칼을 받아도 그 칼날이 다치게 하지 못하며,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몸에 아무 상처가 없고 감옥에서 형틀을 쓰고 있더라도 몸이 저절로 풀린다. 이런 힘을 얻은 일은 다 이루 말할 수 없다. 만일 지성으로 자신을 제어하면 반드시 영험을 얻을 것이나 만일 들떠 방종하면 액난을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2) 보살부(菩薩部)
『승가라찰경(僧伽羅刹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어떤 보살이 산에 살면서 자비심을 가지고 단정히 앉아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새가 그 정수리에서 알을 까는 줄 알고는, 알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을 때도 조심하고 다닐 때도 머리를 흔들지 않았다. 병아리가 날개는 생겼으나 아직 날지 못했으므로 끝내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옛날 도를 구할 때 무수히 고생했다. 그 때 보화(寶華)라는 왕태자가 있었다. 그는 얼굴이 단정하고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그는 동산에 놀러 나갔다가
나병 환자를 만나 그에게 물었다.
≺어떤 약을 쓰면 그대 병이 낫겠는가?≻
병자는 답하였다.
≺사람의 골수와 피를 내 몸에 바르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태자는 이 말을 듣자 곧 자기 몸을 베어 그 골수와 피를 내어 그에게 지심으로 주었으므로 마음에 회한(悔恨)이 없었다.
아난아, 그 태자는 곧 지금의 이 나이니라. 4대해(大海)의 물은 말[斗]로 헤아릴 수 없나니, 그것은 정각(正覺)을 얻기 위해서이니라.’”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광야(曠野)보살은 귀신의 몸으로 나타났고, 산지(散脂)보살은 사슴의 몸으로 나타났으며, 혜거(慧炬)보살은 원숭이의 몸으로 나타났고, 이애(離愛)보살은 암양의 몸으로 나타났으며, 진루(盡漏)보살은 거위 왕의 몸으로 나타났다. 이런 5백 보살 등은 각각 갖가지 몸으로 나타나 그 몸에서 다 큰 광명을 내었다. 이 여러 보살들은 각각 손에 등불을 들고 시방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7불 이래 이런 여러 부처님들을 위해 다 함께 그 권속이 되었다. 그리하여 5계를 받고 보리심을 내었다. 그들은 일체 중생을 조복받아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려고 그런 몸을 다 받은 것이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아라한 도인은 한 사미를 길렀는데, 이 사미가 7일 뒤에는 반드시 목숨을 마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여가를 주어 집에 돌려보내면서 7일 다음 날에는 꼭 돌아오라 했다.
이 사미는 스님에게 하직하고 집에 돌아가다가 도중에서 개미들이 물을 따라 떠내려가면서 곧 죽게 된 것을 보았다. 그는 자비심을 내어 가사를 벗어 거기에 흙을 담아 물을 막고는, 그 개미들을 집어 마른 곳에 갖다 두어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7일 다음 날에 스승에게로 돌아갔다.
스승은 괴상히 여겨 선정에 들어 천안(天眼)으로 관찰했다. 그제서야 그것은 다른 복이 아니요, 개미를 구해 준 인연 때문에 7일 만에 죽지 않고 연명하게 된 것을 알았다.”[또 묵은 탑을 수리해도 연명할 수 있고, 또 가람의 담장에 구멍난 것을 보수해도 연명할 수 있다.]

(3) 유수부(流水部)
또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유수(流水) 장자는 천자재광왕국(天自在光王國) 안에서 일체 중생들의 병을 고쳐 다 낫게 했다. 그 때 장자의 아내 수공룡장(水空龍藏)은 두 아들을 낳아 첫째 이름을 수공(水空)이라 했고, 둘째 이름을 용장(龍藏)이라 했다.
어느 때 장자는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차츰 노닐면서 어느 빈 못에 이르러, 여러 새와 짐승이 많은 고기와 피를 먹고 자꾸 달리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이 새와 짐승들은 무엇 때문에 자꾸 달리기만 하는가?’
장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가 어떤 못에 물이 말라 있고, 그 못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장자는 그것을 보고 큰 자비심을 내었다. 그 때 어떤 수신(樹神)은 반 몸을 나타내고 말하였다.
‘착하다 장자여, 이 고기들은 참으로 가엾다. 너는 저들에게 물을 주라. 그 때문에 네 이름을 유수(流水)라 한 것이다.’
장자가 물었다.
‘이 고기들은 모두 몇 마리나 되는가?’
수신은 답하였다.
‘모두 만 마리는 될 것이다.’
장자는 그 많은 숫자를 듣고 더욱 큰 자비심이 일어났다. 이 빈 못은 햇볕에 쪼이고 있으므로 만 마리의 고기들은 곧 죽게 되어 있었다. 장자는 사방으로 물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다가 큰 나무를 보고 그 가지와 잎을 꺾어 가지고 돌아와 못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또 빨리
먼 곳에 가서 수생(水生)이라는 큰 강을 발견했다. 여러 악인들이 이 고기를 잡기 위해 그 물을 다른 데로 돌려 흘러 내려오지 못하게 해 놓았다. 그러나 그 돌려 놓은 곳이 험준해서 다시 고치기가 어려웠다. 장자는 빨리 왕에게 가서 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말하였다.
‘대왕님, 큰 코끼리 20마리만 빌려 주시면 우리가 물을 싣고 가서 저 고기들을 구제하겠습니다.’
왕은 대신에게 명령하여 빨리 빌려 주라 했고, 자신도 직접 우리로 나와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했다. 그래서 유수 장자와 두 아들은 20마리 코끼리를 몰고 성(城)을 보수하는 사람에게 가서 가죽푸대를 빌렸다. 그리고 물을 돌린 상류로 가서 가죽푸대에 물을 넣어 코끼리에 싣고 빈 못으로 빨리 가서 물을 부어 못물은 드디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자가 못가를 거닐 때 이 고기들도 언덕을 돌면서 그를 따랐다.
장자는 다시 생각했다.
‘이 고기들은 왜 나를 따라올까? 반드시 배가 고파 내게 먹이를 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유수 장자는 그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집에 가서 아버지께 여쭙고 집에 먹을 것이 있는 대로 다 코끼리에 싣고 빨리 돌아오느라.’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집에 가서 위의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아뢴 뒤에, 음식을 코끼리에 싣고 아버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장자는 기뻐하면서 그 음식을 받아 못에 던져 주어 고기들을 한껏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경전에, 만일 어떤 중생이 임종 때에 보승(寶勝)여래의 이름을 들으면 곧 천상에 난다 하였다.’
그는 곧 물에 들어가 말하였다.
‘나무 보승여래 십호(十號) 명자(名字).’
그리고 다시 고기들을 위해 이 매우 깊고 미묘한 법과 12인연을 설명했다. 그리고 유수 장자와 그 아들은 집에 돌아왔다.
또 그 뒤에
손님이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그 때 만 마리 고기는 같은 날에 목숨을 마치고 곧 도리천에 나서는 가만히 장자의 은혜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 이 만 명의 천자는 만 개의 진주와 천상의 묘한 영락을 그 장자의 머리맡에 두고, 또 만 개는 발치에 두고, 또 만 개는 오른쪽 옆구리 곁에 두고, 또 만 개는 왼쪽 옆구리 곁에 두었다. 그리고는 만다라꽃과 마하만다라꽃을 내려 무릎까지 묻히도록 쌓고 갖가지 음악을 울려 묘한 소리를 내었다.
염부제에서 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나고 또 유수 장자도 잠에서 깨었다. 이 만 명의 천자들은 다 허공에서 노닐면서 이 나라 안에 하늘 꽃을 내리고 또 못에도 하늘 꽃을 내리고는 곧 사라져 도리천으로 돌아갔다.”

(4) 상주부(商主部)
『대비경(大悲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큰 상주(商主)가 보배를 캐기 위해 여러 상인들을 데리고 큰 바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보배를 캐어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갑자기 배가 부서졌다.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매우 걱정하면서 어떤 자는 선판(船板)을 붙잡고 있다가 죽었고, 어떤 자는 물에 떠 있다가 죽었다.
나는 그 때에 그 상주가 되어 큰 바다에서 부낭(浮囊)으로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 그 때 어떤 다섯 사람이 상주를 부르면서 말하였다.
≺보살 상주님, 원컨대 우리에게 무외(無畏)를 보시해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 상주는 말하였다.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나는 그대들을 이 바다에서 무사히 건너가게 하겠소.≻
아난아, 그 때 상주는 예리한 칼을 차고 생각했다.
≺바다의 법으로는 시체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만일 내가 내 목숨을 버린다면 이 상인들은 반드시 이 바다의 어려움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상인들을 불러 자기 몸을 잘 잡으라 했다. 어떤 상인은 그의 등에 업혔고, 어떤 자는 그의 어깨를 안았고, 어떤 자는 그의 넓적다리를 붙잡았다. 그 때 상주는 저들에게 무외를 보시하기 위해 큰 자비와 큰 용맹을 일으켜 곧 예리한 그 칼로 자기 목숨을 끊고 빨리 죽음을 취했다. 그러자 바다는 그의 시체를 떠밀어 언덕 위에까지 올려다 놓았다. 이때 다섯 상인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 즐거워하면서 염부제까지 돌아왔느니라.
아난아, 그 때의 그 상주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그는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다섯 상인은 바로 지금의 이 다섯 비구이다. 이 다섯 비구는 옛날에도 큰 바다에서 해탈을 얻었고, 지금 또 이 생에서 생사의 큰 바다에서 해탈을 얻었으니, 나는 이들을 무외열반의 저 언덕에 안치했느니라.”

(5) 수왕부(獸王部)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옛날 무량한 아승기겁 이전에 큰 수림에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었다. 들불이 일어나 삼면은 다 타는데 오직 한 면만은 물 건너 있었다. 여러 짐승들은 몹시 다급했으나 도망갈 길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때 몸이 크고 힘이 센 큰 사슴이 되어 앞다리를 이쪽 언덕에 걸치고 뒷다리를 저쪽 언덕에 걸쳐 그 짐승들을 내 등을 밟고 건너가게 했다. 그래서 등의 껍질과 살이 다 문드러졌으나 자비의 힘으로 죽을 때까지 참았다. 최후에 토끼 한 마리가 왔다. 나는 힘이
다 빠졌으나 억지로 힘을 내어 참으면서 그것을 지나가게 했다. 토끼가 지나가자 나는 척골이 부러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는 일이요 지금만이 아니다. 그 때 건너간 자들은 지금의 이 제자들이요, 최후의 그 한 마리 토끼는 바로 지금의 저 수발타이니라. 이 부처님께서는 세세생생을 즐겨 정진을 행하면서 지금도 쉬지 않느니라.’”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먼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었다. 여래께서는 인지(因地)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큰 고기가 되니 길이가 5백 유순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으로서 고기가 먹고 싶은 자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불문하고 다 와서 그것을 먹었다. 그런데 먹으면 다시 살이 생기고 하여 12년을 지내도록 그 살과 피를 보시하였다.”
또 『수생경(受生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보살은 자라 왕이 되어 큰 바다에 살면서 여러 동류(同類)를 교화하여 그 새끼들은 다 어진 덕을 닦았다. 왕이 스스로 자비를 행해 중생을 구호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바다는 깊고 넓어 그 끝을 한정하기 어려웠으나 자라 왕은 두루 다니면서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느 때 자라 왕은 바다에서 나와 바닷가에 누워 쉬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그 동안 단단하고 말라 마치 육지와 같았다. 멀리서 온 상인들은 그 등 위에서 나무를 쪼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거기에 소와 말을 매기도 하며 돌을 실은 수레를 그 위에 두기도 하였다. 자라 왕은 바닷물로 달려 들어가고 싶었으나 잔인할까 두려워 억지로 참았지만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편을 써서 화독(火毒)을 없애기 위해 물이 얕은 곳으로 들어갔으나 대중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상인들은 조수가 넘쳐드는가 생각하고 매우 두려워하여 슬피 울면서 하늘에만 귀명(歸命)하여 구제를 빌었다. 자라 왕은 그들을 더욱 가엾이 여겨 말하였다.
‘부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몸이 불에 타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려고 물에 들어간 것이지 일부러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마땅히 서로 편안하여, 마침내 위태롭지 않았다. 대중은 이 말을 듣고야 살아날 줄을 알고 모두 큰 소리를 내어 말하였다.
‘나무불(南無佛).’
자라 왕은 자비심을 내어 다시 그 갖가지 보배를 지고 물가에 옮겨 놓았다. 대중은 위기를 벗어나 모두 기뻐하면서 자라 왕의 그 덕을 찬탄하였다.
‘당신은 큰 교량이 되어 많은 사람을 건네 주시고 그 수행은 큰 배가 되어 삼계에 뛰어납니다. 만일 불도를 얻으시거든 부디 다시 생사의 고액에서 구제해 주십시오.’
자라 왕은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여래의 말씀과 같다.’
그들은 각자 헤어져 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자라 왕은 바로 지금의 이 나요, 그 5백 상인들은 바로 지금의 사리불 등 5백 제자이니라.’”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죽음의 고통을 받아야 할 범법자를 보고 재물로써 그 목숨과 바꾸어 그를 해탈시키고도 은혜 갚기를 바라지 않으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는 환희천(歡喜天)에 날 것이요, 천상에서 사람의 몸을 받으면 왕난(王難)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계율을 지키는 중생으로서 큰 화재가 일어나 중생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물로 불을 꺼서 중생을 구제하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는 행도천(行道天)에 나서 갖가지 즐거움을 받을 것이다.”
또 『도구자경(度拘子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나라에 쌀값이 폭등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 때 어떤 사문은 성내에 들어가 여러 집으로 걸식하러 다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다음에 어떤 큰 부호의 장자 집에 가서 거칠고 맛없는 밥을 얻어먹고 막 문을 나오려는데 어떤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개 한 마리를 안고 잡아먹으려고 가다가 이 사문을 보자 기뻐하며 예배했다. 사문은 그를 위해 오래 살기를 축원해 주었다. 그리고 사문은 그가 개를 잡아먹을 것임을 알고 일부러 물었다.
‘그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답하였다.
‘이번에는 빈 걸음이라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사문은 또 말하였다.
‘나는 벌써 보았는데 왜 숨기십니까? 살생하는 죄는 매우 중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밥과 그 개와 바꾸어 그것을 살려 주면 당신의 목숨은 무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였다.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잡아서 우리 식구가 다 함께 먹을 것인데 어찌 당신의 그 적은 밥으로 대신하겠습니까?’
사문이 아무리 회유하고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면서 들어줄 것 같지 않았으므로 사문은 다시 말했다.
‘만일 들어주지 않으려면 그 물건이라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는 곧 개를 내어 사문에게 보였다. 사문은 밥을 떠서 개를 먹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축원을 해 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개야, 너는 내 죄로 개가 되어 자유롭지 못하고 사람에게 잡아먹힌다. 나는 너로 하여금 세세생생에 죄를 멸하고 복이 생겨 개의 몸을 버리고 사람이 되어 어느 세상에서나 3보의 법을 만나게 하리라.’
개는 밥을 얻어먹고 기뻐 날뛰면서 귀의할 줄을 알았다. 백정은 개를 끌고 가서 여럿이 같이 먹었다. 개는 목숨을 마치고 어느 부호인 장자의 집에 태어나게 되어 땅에 떨어지자마자 이내 자비심이 생겼다.
그 때 이 사문은 그 장자의 집에 걸식하러 갔었는데 장자의 아들(개)은 이 사문을 보자, 곧 전생의 인연을 알고는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했다. 그리고 온갖 맛난 음식을 공양한 뒤에 그 부모에게 청했다.
‘나는 이 스님을 따라가 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렵니다.’
부모는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허락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우리 집에 아들이라고는 너뿐이다. 우리는 너에게 뒤를 잇게 하여 우리 집 주인을 만들려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집을 버리고 떠나려 하느냐?’
그러나 아들은 음식도 먹지 않고 울면서 말하였다.
‘만일 허락해 주시기 않으면 나는 곧 죽고 말겠습니다.’
부모는 이것을 보고
곧 허락하여 따라가게 했다. 아들은 스승을 따라가서 도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종류의 법의를 입고 불경을 외워 그 뜻을 잘 알고 곧 삼매를 얻어 퇴전(退轉)하지 않는 자리를 얻고 일체를 교화하였다. 그리고 큰 보리심을 내었다.
‘부처님 세상은 만나기 어렵고 경전의 도는 듣기 어려우므로 만일 만나게 되면 누구나 다 제도를 얻을 것이다. 축생도 도를 얻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과(果)를 얻지 못하겠는가? 비록 계를 범함으로써 다시 부끄럼이 생기더라도 희고 깨끗함이 오면 검고 더러운 것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라바(羅婆)라는 새는 매한테 잡혀 허공으로 오르면서 크게 울부짖었다.
≺나는 지각이 없어 이런 고난을 당한다. 나는 공연히 부모의 경계를 떠나 다른 곳에서 놀았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왜 지금 남에게 붙들려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매는 라바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떤 경계에서 자유를 얻는가?≻
라바는 답하였다.
≺나는 밭두덕에 내 경계가 있는데 거기 있으면 고난도 면할 수 있다. 거기가 부모의 경계다.≻
매는 라바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겨 말하였다.
≺너를 놓아주어 돌아가게 할 것이니, 그 밭두덕에서 이 고난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라바는 매의 발톱에서 벗어나 밭두덕의 큰 흙덩이 밑으로 들어가 편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흙덩이 위에서 매와 한 번 싸우려 하자 매는 크게 성을 내어 말하였다.
≺저 조그만 놈이 나와 감히 싸우려 한다.≻
매는 바로 날아 내려가 마구 덮쳤다. 이때 라바는 흙덩이 밑으로 들어가고 매는 나는 그 힘에 흙덩이에 가슴을 부딪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라바는 흙덩이 밑에서 위를 쳐다보고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매가 힘을 다해 내려올 때에
라바는 흙덩이를 의지하였다.
성내는 그 맹렬한 기세는
재화를 불러 제 몸을 부수었다.

나는 모든 것 잘 통달해
스스로의 내 경계에 의지하여
원수를 갚고 기뻐하면서
나의 이 힘을 기꺼이 관찰한다.

아무리 네게는 흉하고 어리석은
백천 용상(龍象)의 힘이 있어도
나의 이러한 지혜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은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고
목숨 있으면 위험을 겁낸다.
고기가 마른 못에 시달리면서
흐르는 물 만나기 어려움과 같다.

친하거나 멀거나 다 부모인데
어찌 서로들 속일 수 있으랴?
자비로 고난을 구제해 주면
복의 과보는 스스로 따라오리.”

감응연(感應緣)[대략 열다섯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秦)의 사문 석도경(釋道囧)
진(晋)의 거사 여송(呂竦)
진(晋)의 거사 서영(徐榮)
진(晋)의 거사 장숭(張崇)
진(晋)의 장군(將軍) 왕의(王懿)
진(晋)의 엄맹(嚴猛)의 부인
진(晋)의 주자장(周子長)
송(宋)의 사문 축혜경(竺慧慶)
송(宋)의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
송(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주(周)의 사문 석헤진(釋慧瑱)
주(周)의 사문 석승실(釋僧實)
진(陳)의 사문 석혜포(釋慧布)
당(唐)의 사문 석지총(釋智聰)
당(唐)의 거사 서선재(徐善才)

진(秦)의 사문 석도경(釋道囧)
진(秦)나라 사문 석도경(釋道囧)의 고향과 씨족(氏族)에 관한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요진(姚秦) 홍시(弘始) 18년에 그는 도의(道懿)를 스승으로 삼았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하남(河南)의 곽산(霍山)으로 가서 종유(鍾乳)를 캐기 위해 동학(同學)인 도랑(道朗) 등 네 사람과 동행했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더듬으면서 3리쯤 들어갔다가 한 깊은 물을 만나 나무를 걸치고 건너가게 되었다. 도경이 제일 먼저 건너고 뒤의 사람들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때 불이
또 꺼지고 사방은 깜깜한데, 도경은 저들을 생각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그러나 도경은 옛날처럼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발원했다.
‘만일 내가 길에까지 나갈 수 있게 해 주시면 백인회(百人會)에 공양하여 그 위신(威神)에 보답하겠습니다.’
하룻밤을 지낸 뒤에 조그만 불빛이 마치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더니 조금 있다가 굴 안이 다 환히 밝아졌다. 이리하여 그는 길을 발견하고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신령스런 일을 자주 보았다.
원가(元嘉) 19년(442)에 임천강왕(臨川康王)은 광릉(廣陵)의 진영을 맡고는 도경을 청해 공양하고 그 해 9월에 서재(西齋)에서 10일 동안 관세음보살의 재를 올렸다. 9일째 되는 날 밤 4경(更)이 끝날 때 다른 스님은 다 자고 도경만 일어나 관음에게 예배하고 돌아와 좌선하려 했다. 갑자기 사방 벽(壁)에 무수한 스님이 반 몸을 드러냈는데, 한 부처님은 나계(螺髻)가 분명한 것을 보았다. 또 어떤 키가 큰 사람은 위가 편편한 두건을 쓰고 베옷을 입고 손에 긴칼을 들었는데 그 상은 매우 장대하고 이상했다. 그는 향을 집어 도경에게 주었다. 그러나 도경이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자 벽 안에 있던 스님이 도경에게 말하였다.
“도경께서는 그것을 받아 주인을 보호하시오.”
그리고 이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다른 대중 스님은 전연 보이지 않고 오직 거기 안치된 석가 부처님의 행상(行像)이 있을 뿐이었다.

진(晋)의 거사 여송(呂竦)
진(晋)나라 여송(呂竦)의 자는 무고(茂高)요, 연주(兗州) 사람이니 시풍현(始豊縣)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 고을 남쪽에 있는 시내는 흐르는 물이 급하고 언덕은 높으며 돌아나가는 굽이는 마치 서로 얽힌 것 같았다. 또 큰돌이 많아 낮에도 지나가는 나그네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송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버지가 배를 타고 시내 복판을 갈 때 한 10리쯤 가서 날이 저물고 갑자기 풍우가 일어나 칠흑처럼 어두워 동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자기는 물에 빠져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또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불빛이 언덕에 이르러 마치 사람이 횃불을 든 것처럼 온 시내가 환했으며, 멀리 집으로 갈 때에는 불이 항상 앞에서 인도했는데 그것은 배에서 10여 보쯤 떨어져 있었다.”
그 뒤에 여송이 희가빈(希嘉賓)과 사귀어 놀았는데 이것은 희가빈이 전한 말이다.

진(晋)의 거사 서영(徐榮)
진(晋)나라 서영(徐榮)은 낭야(琅邪) 사람이다. 동양(東陽)에 갔다가 경정산(經定山)으로 돌아올 때 뱃사공이 익숙하지 못해 잘못하여 배가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물결에 휩쓸려 거의 물에 빠지게 되었다. 서영은 오직 지심으로 관세음보살만 불렀다. 잠깐 사이에 수십 명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끄는 것 같았다. 배는 소용돌이 속을 빠져 나와 평류(平流)로 돌아와 강을 따라 내려갔다. 날이 저물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풍우가 매우 거세어 갈 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결은 더욱 몰아쳤다. 서영은 『관음경』을 끊이지 않고 외웠다. 조금 있다가 산머리에서 환한 불빛이 보였다. 키를 그리로 향해 돌려 바로 운포(運浦)에 이르러 배는 무사하였다. 다시 돌아볼 때 그 불은 아주 보이지 않았다. 동행이 이상히 여겨 이것을 사람의 불이 아니라 생각하고 이튿날 아침에 그 갯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산 위에 있던 그 불은 무슨 불이었습니까?”
여러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그처럼 풍우가 쳤는데 불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신광(神光)임을 알았다.
그 뒤에 서영은 계부(稽府)의 도호(都護)가 되었는데, 이것은 사부(謝敷)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또 서영과 배를 같이 탔던 스님 지도온(支道蘊)은 착실한 사람으로서 그도 이것을 직접 보고 뒤에 부량(傅亮)에게 말했는데, 서영의 이야기와 꼭 같았다.

진(晋)의 거사 장숭(張崇)
진(晋)나라 장숭(張崇)은 경조(京兆)의 두릉(杜陵) 사람으로서 젊어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진나라 태원(太元) 때에 부견(符堅)이 패망하자 장안의 백성 천여 집이 모두 남쪽으로 달아나 진나라로 귀순했다. 그러나 진수(鎭戍)에 붙들려 모두 유구(流寇)라 오인되어 남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자녀들은 사로잡혔다. 장숭 등 다섯 사람은
손발에 수갑을 채인 채 깊은 구덩이로 끌려가서 허리까지 묻히어 서로의 거리가 20보쯤 되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저들은 말을 달리면서 이들에게 활을 쏘아 죽임을 오락으로 삼게 되었다. 장숭은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는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만 오로지 생각했다. 밤중에 갑자기 수갑이 저절로 풀려 몸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곧 달아나 거기서 벗어났다.
장숭은 다리가 아파 동행과 함께 어느 절에서 잘 때도 늘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지심으로 예배한 뒤에 돌 하나를 앞에 놓고 발원했다.
‘지금 강동(江東)을 지나가려고 진제(晋帝)의 난리를 호소하나이다. 무리가 당한 원혼(冤魂)을 다스려 그 처자를 구제해 주소서. 만일 내 소원이 이루어지겠으면 이 돌이 두 조각이 되어지이다.’
이렇게 발원하고 예배를 마치자 돌은 곧 두 조각이 났다. 장숭은 드디어 경사(京師)에 도착하여 백호준(白虎樽)을 열고 원혼들을 벌여 놓았다. 진제는 이들을 다 용서하고 이미 남에게 팔린 자는 모두 호적에 편입시켰다.
이 사실은 지생(智生) 스님이 직접 본 것이다.

진(晋)의 장군(將軍) 왕의(王懿)
진(晋)나라 왕의(王懿)는 자는 중덕(仲德)이니 태원(太原) 사람으로서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있었다. 그 집은 대대로 불법을 신봉했다. 그 아버지 묘(苗)는 부견(符堅) 때에 중산(中山) 태수(太守)로 있다가 정령(丁零)에게 죽었다. 중덕이 그 형인 원덕(元德)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방으로 돌아올 때 산은 험준하고 주리고 피곤한데 양식까지 떨어져 어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직 3보(寶)만 생각하였는데 그 때 갑자기 한 소년이 푸른 소를 몰고 오다가 중덕 등을 보고는 각각 밥 한 그릇씩 주고 이내 사라졌다.
그 때는 마침 장마라 큰물이 났다. 중덕은 앞을 바라보았으나 물이 하도 넓어 어디가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너갈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갑자기 흰 이리 한 마리가 그 앞을 돌아 물을 건너갔다. 돌아오는 것이 마치 길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 번을 되풀이했다. 이에 중덕은 그 이리를 따라 물을 건너는데 물은 겨우 무릎까지 올라왔다. 이윽고 육지에 올라 진(晋)나라로 돌아왔다.
뒤에 그는 왕구상서(王丘尙書)를 거쳐 서주(徐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한번은 재(齋)를 베풀기 위해 미리 도량을
소제하고 향과 꽃을 준비하고 불경과 불상을 벌여 놓았다. 갑자기 법당에서 독경하고 창패(唱唄)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맑고도 유창했다. 중덕은 급히 가 보았다. 다섯 스님이 불전에 앉았는데 그 위용과 거동이 신기하고 뛰어났었다. 중덕은 비범한 스님들이라 생각하고 매우 기뻐하고 공경했다. 그 스님들이 얼굴을 돌려 바라보는데 모두 친우 같았으며, 말을 나누기 전에 갑자기 몸을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갔다. 많은 친척과 손님들은 다 이것을 보고 모두 기뻐하면서 불법을 더욱 신봉했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진(晋)의 엄맹(嚴猛)의 부인
진(晋)나라 때 회계(會稽)에 사는 엄맹(嚴猛)의 부인은 나물캐러 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엄맹이 숭중(嵩中)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그 부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당신이 지금 떠나면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도와드리리다.”
둘이서 한참 가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엄맹을 향해 뛰어왔다. 부인이 손을 들어 호랑이를 가리키면서 막는 시늉을 했다. 조금 있다가 두 호인(胡人)이 창을 메고 지나갔다. 부인이 손가락질하자 호랑이는 곧 호인들을 덮쳤고 남편은 화를 면하였다.[한 가지 증험은 『이원록(異苑錄)』에 나온다.]

진(晋)의 주자장(周子長)
진(晋)나라 주자장(周子長)은 무창(武昌)의 오장포(五丈浦) 동쪽 언덕 위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다. 함강(咸康) 3년(337)에 자장은 새개포(塞開浦) 중수(中愁)의 집으로 갔다. 집에서 오장까지는 몇 리 거리에 있었다. 마침 날이 저물었다. 오장까지 오기 전 1리쯤은 원래 빈 언덕이었는데 네 겹으로 둘러싼 기와집이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문지기가 자장의 머리를 붙잡았다. 자장은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 제자인데 왜 나를 붙잡느냐?”
문지기는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경을 외울 줄 아는가?”
자장은 답하였다.
“전에 『사천왕경』과 『녹자경(鹿子經)』을 외웠다.”
그는 곧 3, 4번 외웠으나 문지기는 여전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귀신임을 알고 바로 꾸짖었다.
“이 무창의 미련한 귀신아, 나는 네게 내가 부처님 제자라고 말했고, 또 너를 위해 경전을 몇 번 외우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나를 놓지 않느냐?”
그제서야 귀신은
자장을 놓아주고 집은 곧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귀신은 여전히 쫓아왔다. 자장이 집문 앞을 지나려 하자 귀신이 앞을 막아 들어가지 못하였고, 또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귀신을 끌고 한계사(寒溪寺)로 가면서 곧 귀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또 꾸짖었다.
“이 무창의 미련한 귀신아, 이제 너를 데리고 저 절의 화상(和尙) 앞에 갈 것이다.”
귀신도 자장의 가슴을 잡고 서로 끌어 오장의 못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 뒤에서 어떤 귀신들이 이 귀신을 보고 말하였다.
“서장(西將)을 놓아주고 우리를 끌고 절에 가라.”
이 귀신은 자장을 놓아주었다. 자장은 일부러 뒤의 귀신에게 말하였다.
“저 절에는 참 도인들이 있다. 그래도 두렵지 않는가?”
뒤의 한 귀신이 낮은 말로 말하였다.
“그대는 조금 전에 성동(城東)에서 도인을 만났는데 왜 놓쳤느냐?”
그러자 모두 함께 웃었다. 자장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3경(更)이 지났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영귀지(靈鬼志)』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축혜경(竺慧慶)
송(宋)나라 사문 축혜경(竺慧慶)은 광릉(廣陵) 사람으로서 경전에 밝고 행을 닦았다. 원가(元嘉) 42년(435)에 형양(荊陽)에 큰 홍수가 나서 냇물과 언덕이 편편했다. 혜경은 여산(廬山)으로 들어가려고 배를 탔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다른 배는 이미 포구(浦口)에 정박했으나 오직 혜경이 탄 배만은 아직 대지 못하고 강 복판으로 휘몰렸다. 바람은 빠르고 물결은 몰아치므로 혜경은 고요히 빠져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바른 마음과 단정한 생각으로 『관음경』을 외웠다. 물가 사람들이 그 배를 바라볼 때, 바람을 맞이하여 물결을 끊는 것은 마치 수십 명 사람이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바로 위의 언덕에 대어 배에 탄 사람이 다 무사히 건넜다.

송(宋)의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
송(宋)나라 초년에 황룡사(黃龍寺)의 사문 담무갈(曇無竭)은 『관음경』을 외우면서 부지런히 고행을 닦았다. 25인의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의 나라를 찾아갈 때 흉년에 대비하고 곧은 뜻은 더욱 견고했다. 천축(天竺)의 사위국에 이르러 길에서 산에 사는 코끼리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음경』을 외우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귀명(歸命)했다. 그 때 어떤 사자가 숲 속에서 나오자 코끼리들은 다 놀라 달아났다.
그 뒤에 또 들소 한 떼가 소리치며 달려와서 곧 해치려 했다. 무갈은 또 전처럼 귀명했다. 어디서 큰 솔개가 날아와 소들은 놀라 다 흩어졌다. 그래서 화를 면했었다.[위의 두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송(宋)의 사문 석법진(釋法進)
송(宋)나라 고창(高昌)의 석법진(釋法進)[혹은 도진(道進)]은 성은 장(張)씨요 양주(凉州)의 장액(張掖)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덕이 있었으므로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신임을 받았다. 몽손이 죽고 그 아들 경환(景環)이 오랑캐에게 패하게 되어 법진에게 가서 물었다.
“고창을 치려는데 이길 수 있겠습니까?”
법진은 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다만 흉년이 걱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군사를 돌려 곧 평정했다.
3년 뒤에 경환이 죽고 그 아우 안주(安周)가 뒤를 이었다. 이 해에 흉년이 들어 죽는 자가 무수했다. 안주는 전부터 법진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법진은 자주 안주에게 청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했다. 그러나 나라의 재물이 자꾸 말라가서 다시 청할 수 없었다. 법진은 이에 목욕한 뒤에 칼과 소금을 준비하여 깊은 굴 속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차례로 3귀계(歸戒)를 주었다. 그리고 옷과 발우를 나뭇가지에 걸어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 맨몸을 던지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보시합니다. 모두 함께 먹으시오.”
그러나 대중은 비록 주리기는 하나 의리가 있어 차마 먹을 수 없었다. 법진은 자기 손으로 살을 베고 버티어 서서 소금을 찍어 그것을 먹었다. 두 다리의 살이 다하고 마음이 흐리어 더 벨 수 없어지자 인해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내 껍질과 살을 가지십시오. 며칠은 더 부지할 것입니다. 만일 왕의 사자가 오면 반드시 가져갈 것이니 감추십시오.”
그러나 대중은 아무도 그것을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법진의 제자들이 찾아오고 또 왕의 사자도 왔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곧 가마에 메고 궁중으로 돌아갔다. 안주는 영을 내려 3백 석의 보리를 내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주고 따로 창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휼했다. 이튿날 새벽에 그의 숨이 끊어져 성의 북쪽으로 나가 화장할 때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러 7일 만에야 그쳤다. 시체는 다 타고 없었으나 오직 혀만이 타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 3층탑을 세우고 그 오른편에 비를 세웠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주(周)의 사문 석혜진(釋慧瑱)
주(周)나라 상당원(上黨元)의 개부사(開府寺)의 석혜진(釋慧瑱)은 그 씨족(氏族)은 알 수 없다. 그는 계율을 굳게 받들고 참선과 참회를 업으로 삼았다. 주나라 건덕(健德) 6년에 나라에서 불법을 멸할 때에 혜진은 경상(經像)을 안고 깊은 산에 들어갔는데 도적을 만나면 겁탈 당할 염려가 있었다. 전연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키는 10자가 넘고 수염과 얼굴은 아름다우며 종과 옷을 갖추었고 갈기가 붉은 흰말을 타고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혜진의 앞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말하였다.
“오늘밤에 도적이 닥칠 것이니 스님은 어디로 피하십시오.”
혜진은 벼랑 밑에 있었으므로 다른 길이 없었다. 혜진은 그것을 산신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 불법이 무너지고 빈도(貧道)는 몸둘 곳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여기 와서 단월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적이 온다 하니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구나. 또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그 산신은 말하였다.
“스님이 이미 멀리서 제자를 찾아오셨으니 제자도 또한 스님을 잘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여기 계십시오.”
그리고 그만 어디로 사라졌다. 그날 밤에 눈이 내려 10자 남짓 쌓여 길이 막혔으므로 드디어 도적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뒤에 눈이 그치고 길이 트이자 도적은 다시 왔다. 산신은 산 밑에 있는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도적이 혜진 스님을 해치려 한다. 그대들은 급히 가서 그 스님을 구하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도적을 치러 가자 도적들은 다 놀라 달아났다. 이 뒤로 혜진은 늘 산신을 의지하여 산에서 수행했는데, 그 최후는 알 수 없다.

주(周)의 사문 석승실(釋僧實)
주(周)나라 경사(京師)에 있는 대추원사(大追遠寺)의 석승실(釋僧實)은 성은 정(程)씨이니 교양(僑陽) 영무(靈武)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단아하고 맑았으며 고상하여 여럿과 어울리지 않았다. 위효문(魏孝文) 대화(大和) 말년에 경사에서 낙양(洛陽)으로 가서 늑주(勒主)
삼장을 만나 3학(學)을 배웠다. 3학을 다 통달하고는 주로 구차제정(九次弟定)으로 마음을 다루었으므로 선정(禪定)을 얻고 물은 맑고 깨끗하며 선림(禪林)은 울창하였다. 이리하여 경화(京華)의 교화가 오래일수록 더욱 번성하였다.
하루는 스님들이 낮잠 자는 정오에 갑자기 종각(種閣)에 올라가 종을 급히 쳤다. 스님들이 괴상히 여겨 방에서 나와 그 까닭을 묻자, 승실은 말하였다.
“스님들은 모두 향을 준비하고 법당으로 모이시오.”
스님들이 모이자, 또 승실은 말하였다.
“스님들은 다 마음을 다해 불사를 닦으시오. 모두 『관음경』을 외워 강남(江南)을 구제하시오. 양국(梁國)의 그 절의 강당이 지금 무너지려 하오. 도인과 속인을 불문하고 모두 함께 구제해야 하겠소.”
그 때 양도(楊都)의 강당에는 법을 논의하기 위해 천 명의 도속(道俗)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갑자기 서북에서 이상한 향내가 나고, 또 공중에서 독경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리며 구름이 모여 북문으로 들어왔다가 남문으로 바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모두 놀라 강당에서 나와서는 신 신는 것도 잊고 소리나는 곳으로 쫓아갔다. 사람들이 다 나오자 이내 강당은 무너졌다. 이리하여 대중은 다 완전히 그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양(梁)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주(周)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아보고 과연 그러했음을 알았다. 이리하여 양왕은 세 번이나 승실 스님을 청했으나 주왕이 보내 주지 않았으므로, 양왕은 멀리서 예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해 보물과 나무껍질의 납의(納衣)와 3의(衣)ㆍ궤(机)ㆍ불자(拂子)ㆍ집물(什物) 등만을 보냈다. 승실은 다른 것을 다 흩어 보시하고 오직 납의와 궤만 간수해 두어 현재도 그 절에 있는데, 스님들이 서로 관리하고 있다.
보정(保正) 3년 7월 18일에 대추원사에서 죽으니 나이는 88세였다. 조야(朝野)가 다 놀라고 한탄했으며, 사람과 하늘이 다 얼굴빛을 변하고 두 나라가 모두 애통해 했다. 그 분묘는 지금 그 동산 안에 있다.

진(陳)의 사문 석혜포(釋慧布)
진(秦)나라 섭산(攝山)에 있는 서하사(栖霞寺)의 사문 혜포(慧布)는 성은 학(郝)씨며 광릉(廣陵)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지조가 높고 도량이 크며
수행이 뛰어나 왕의 신임을 받았다. 혹 어떤 사람이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하면 그는 그에게 말하였다.
“세계의 깨끗한 것이 내 소원이 아니다. 지금 내가 기원하는 것은 중생 교화뿐이다. 무엇 때문에 연꽃 속에서 10겁 동안 쾌락을 누리겠는가? 그보다는 3도(道)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낫느니라.”
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의 목숨은 다시 35년에 있다. 다만 늙고 약했으니 세상에 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나는 항상 3보가 없는 변두리에 나서 대중을 위해 불사 짓기를 원할 뿐이다. 잘 계십시오. 부디 노력하십시오.”
이리하여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목숨이 곧 끊어지려 했다. 왕이 의사를 보내 진찰하려 했으나 팔을 오그리고 허락하지 않았고, 심(沈) 황후가 향과 편지를 전했으나 그것도 받지 않았다. 임종 때에는 다음 결사(訣辭)를 남겼다.

오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거니
저녁에 죽은들 무슨 걱정 있으랴?
났지만 아무 난 것 없나니
죽어도 죽는 것 없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전에 대지가 잇따라 진동하고 7일 만에 죽었다. 시체를 숲으로 옮기자 산이 또 진동했다. 태사(太史)는 아뢰었다.
“도를 얻은 사람의 별이 바로 지금 사라졌습니다.”
그는 처음 떠나려 할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어젯밤 꿈에 두 보살이 나를 맞이하러 왔는데, 하나는 생신(生身)이요 하나는 법신(法身)이었으므로 나는 이내 가기를 승낙했으며, 조금 있다가 모든 하늘이 또 나를 영접하러 왔으나 나는 거기 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었다.”
흐르는 광명이 간(★) 선사의 방을 환히 비추므로 선사는 괴상히 여겨 나가 보았다. 어떤 두 사람이 혜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이 바로 보살인 줄 몰랐던 것이다. 다만 전에 이야기한 것과 꼭 맞았을 뿐이었다.
혜포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귀신을 보는 어떤 사람은 번기와 꽃이 절에 가득하고 광명이 불꽃을 살리는 것을 바라보고 그 까닭을 몰랐다가 절에 가서 보고야 비로소 혜포가 죽은 줄을 알았다.
진(陳)나라 정명(禎明) 원년(587) 11월 23일에 본사에서
죽으니 나이는 70여 세였다.

당(唐)의 사문 석지총(釋智聰)
당(唐)나라 윤주(潤州) 섭산(攝山)에 있는 서하사(栖霞寺)의 석지총(釋智聰)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전에는 양주(楊州)의 백마사(白馬寺)에 있다가 뒤에는 강을 건너 양주 안락사(安樂寺)에 있었다. 왕이 죽은 뒤에 돌아가기를 생각했으나 계책이 없어 강가의 갈대밭 속에 숨어 『법화경』을 외우고 있을 때 7일 동안은 배고프지 않았고, 항상 호랑이가 와서 돌고 있을 뿐이었다.
먹지 않은 지 여러 날을 지나 지총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 목숨은 잠깐이다. 너나 먹어라.”
호랑이가 갑자기 말하였다.
“천지가 개벽된 뒤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갑자기 한 8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겨드랑 밑에 배를 끼고 와서 말했다.
“스님은 강을 건너시려는 모양인데, 서하사에 가서 계시려거든 이 배를 타십시오.”
호랑이 네 마리가 한꺼번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지총은 말하였다.
“위난을 구제하려면 바로 지금이다. 이 네 마리 호랑이를 맞이하리라.”
이리하여 남쪽 언덕에 이르자 노인과 배는 간 곳이 없었다. 지총은 네 마리 호랑이를 데리고 서하사로 가서 사리탑 서쪽에 있었다. 지총은 거닐기도 하고 참선도 하면서 맹세코 눕거나 자지 않았으므로 80명 대중이 모두 절 밖에 나가지 않았다. 무슨 나쁜 일이 있을 때는 호랑이 한 마리가 절에 들어와 큰 소리로 대중에게 알렸으므로 이 때문에 모두 놀라 깨달았으니, 항상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떳떳한 법이 되었다.
정관(貞觀) 23년(649) 4월 8일에 음식을 조금 먹고 지관사(止觀寺)에 가서 대중에게 하직을 고한 뒤에 본방으로 돌아와 편안히 앉아 죽으니, 이상한 향기가 온 단양(丹陽)에 퍼져 넘쳤다. 나이는 99세였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당(唐)의 거사 서선재(徐善才)
당(唐)나라 무덕(武德) 초년에 예천현(醴泉縣)의 서선재(徐善才)는 일생 동안 항상 재계를 닦고 『관음경』을 천 번 이상 외웠다. 경사(京師) 연흥사(延興寺)의 현완(玄玩) 율사 곁에서 공덕을 닦기 위해 『일체경』을 삼가 조성했다.

무덕 2년(619) 11월에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오랑캐의 도적을 만나 여주(驪州) 남쪽 경계에 있는 저들의 소굴로 잡혀갔다. 잡혀온 수천 명을 모두 결박하고 큰 벼랑으로 끌고 가서 사람을 시켜 차례로 죽여 그들의 머리는 다 벼랑 밑으로 떨어졌다. 선재는 이 광경을 보자 자신도 면하지 못할 줄을 확실히 알고는 오직 관세음보살만 생각하면서 잠깐도 그치지 않았다.
선재의 차례가 되었다. 처음에 칼로 내리칠 때는 그 칼을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몰랐다. 칼에 치일 때는 신시(申時)쯤이었는데, 저녁에 깨어나자 자신은 깊은 시냇가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있고, 언덕과는 3백여 자쯤 떨어져 있었다. 선재는 혼자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는 비로소 오늘 죽게 되었던 일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무슨 인연으로 죽지 않고 완전한 몸으로 나무 위에 있을까?’
그리고는 손으로 목을 만져 보았을 때 조금 아플 뿐, 조금도 다친 데는 없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힘으로 신명이 완전해진 것을 알았다.
그 때는 보름이라, 하늘은 맑고 달은 밝은데 옷이 없고 또 며칠을 굶었기 때문에 몹시 주림과 추위를 느꼈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에서 내려와 시내를 끼고 동으로 2리쯤 가서 그 시내 안에서 한 벌의 양가죽옷과 한 켤레의 신을 얻어 그것으로 추위를 면했다. 다시 1리쯤 가서는 한 발우에 복숭아와 대추를 얻었는데, 그것은 푸르고 붉고 흰 것이 마치 방금 딴 것과 같았으며, 한 되 남짓한 그것을 먹고서 주림을 면했다. 관세음보살의 신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한 겨울에 싱싱한 복숭아와 대추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주림과 추위를 면하고 또 기력이 회복되어 차츰 남쪽 언덕까지 올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도적의 진영은 몇 리를 뻗어 있었고, 사람과 짐승의 시끄러운 소리는 아직 모두 잠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선재는 남쪽 언덕에 오기는 했으나 도적이 쫓아올까 걱정되어 집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50리쯤 가서야 도적이 멀어진 것을 알고 심신이
다 안정되어 어떤 나무 밑에서 쉴 때, 가부하고 앉아 관음을 염송(念誦)하다가 며칠 동안 시달린 끝이라 어느 곁에 4경(更)까지 앉아 쉬었다. 갑자기 정신을 차려 눈을 뜨니 커다란 푸른 이리 한 마리가 선재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입으로 선재의 코를 떠받치고 있었다. 선재는 이것을 보자 다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만일 이것이 내 원수이거든 나를 잡아먹고 묵은 원한을 풀음으로써 각각 맺힌 원한을 버리고 인자한 마음을 내어라. 또 만일 관세음보살이시면 이 제자를 구제해 편안하게 하소서.’
이렇게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는 그것은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 선근의 힘은 인연을 따라 감응을 나타내므로 그 이익이 무궁한 것이다. 지금에 경전을 외우고도 그 힘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실로 경박한 마음 때문이요, 또 과거와 현재에 지은 악이 서로 돕기 때문에 느끼기 어려운 것이니라.
선재가 무사히 집에 돌아가 그 남은 복숭아와 대추를 도속(道俗)들에게 보이니, 그들은 다 거짓 아닌 사실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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