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4권
법원주림 제24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16. 설청편 ②
(5) 간중부(簡衆部)
대개 법사가 자리에 오를 때는 먼저 삼보께 예경하여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한 뒤에 때를 관찰하고 사람을 가리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먹은 뒤에 설법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은경(報恩經)』에서 말하였다.
“듣는 사람이 앉고 설법하는 사람이 섰을 때는 설법해서는 안 된다. 만약 듣는 사람이 설법하는 사람의 허물을 말하면 설법해서는 안 되며, 듣는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지 않거나, 문자를 의지하고 뜻을 의지하지 않거나, 불료의경(不了義經)을 의지하고 요의경을 의지하지 않거나, 망식[識]을 의지하고 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모두 설법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의 청정한 법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설법하는 사람이 법을 존중하고 법을 듣는 사람도 법을 존중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청정한 설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함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듣는 이의 단정한 마음 목마른 이가 물을 마시듯
한마음으로 모든 말의 뜻을 깨달아 들어가
법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마음으로 자비와 환희가 넘치면
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설법할 만하리라.
또 『오분율(五分律)』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신의 탐욕을 없애 버린 마음과 스스로를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과 대중을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과 자애로운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과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 등 이런 마음을 세우고, 나아가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이라도 설명하여 앞사람을 여실히 알게 하면, 그는 언제나 안락하고 이익이 무량할 것이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이가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베껴 쓰고 설명할 때, 설법할 때가 아니고 나라[國]가 아니고 청하지 않는데도 설법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칭찬하며
아무 데서나 설법한다면, 도리어 불법을 멸망시키고, 나아가 무량한 사람을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할 것이니, 중생의 악지식이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다섯 가지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법을 물어와도 다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된다. 첫째는 시험하려는 물음이고, 둘째는 의심이 없는 물음이며, 셋째는 범하고도 뉘우치지 않고 일부러 하는 물음이고, 넷째는 말을 듣지 않으면서 일부러 하는 물음이며, 다섯째는 힐난하기 위해 일부러 하는 물음이니, 모두 다 답해서는 안 된다.
만일 앞사람이 실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앞의 뜻을 갖추지 않은 채, 선을 일으키고 악을 없애려 한다면 법사는 그 근기와 방편을 따라 좋은 마음으로 설법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아는 것이 분명하지 않거나 혹은 그 법에 의심이 있다면 설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앞사람에게 잘못 전하는 실수가 있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니, 그것은 피차가 다 죄를 짓는 것이다.”
또 『백유경(百喩經)』과 『비담론(毘曇論)』에서 말하였다.
“문답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정답(決定答)이다. 비유하면 어떤 이가 ‘모든 생이 있는 것은 모두 다 죽는가?’ 하고 물으면, 이것은 결정답이다. 둘째는 ‘죽는 자는 반드시 생(生)이 있는가?’ 하고 물으면, 이것은 분별답(分別答)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애욕이 다한 자는 생이 없으나 애욕이 있으면 반드시 생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분별답이라 한다. 셋째는 어떤 사람이 ‘인간이 제일 뛰어난가?’ 하고 물으면, 이것에는 되묻기를 ‘너는 3악도에 대해 묻는가, 제천에 대해 묻는가?’라고 하며, 만일 3악도에서 묻는다면 실로 인간이 제일 뛰어날 것이나, 만일 제천에서 묻는다면 인간이 꼭 그렇지 않을 것이니, 이런 것을 반문답(反問答)이라 한다. 넷째는 14난(難)을 묻거나, 혹은 ‘세계와 중생은 한계가 있는가 없는가, 시종(始終)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에 대한 답은 치답(置答)이어야 한다.
논(論)에서 묻기를 ‘만일 모든 외도를 논한다면 그들은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다’고 할 때는 4론(論)에 관계하지 않고 오직 한 분별론(分別論)만이 될 것이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답게 머무르는 사람은 나와 남을 다 이롭게 하고, 법답게 머무르지 않는 사람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법답게 머무르는 사람은 8지(智)가 있다. 무엇이 8지인가. 첫 번째는 법에 대한 지혜이고, 두 번째는 이치에 대한 지혜이며, 세 번째는 때에 대한 지혜이고, 네 번째는 족함을 아는 지혜이며, 다섯 번째는 나와 남에 대한 지혜이고, 여섯 번째는 대중에 대한 지혜이며, 일곱 번째는 근기에 대한 지혜이고, 여덟 번째는 상하(上下)에 대한 지혜이다.
이런 여덟 가지 지혜를 구족한 사람은, 그의 모든 말이 16사(事)를 완전히 갖춘다. 즉, 첫 번째 때에 맞는 말이고, 두 번째 지극한 마음의 말이며, 세 번째 차례에 맞는 말이고, 네 번째 화합하는 말이며, 다섯 번째 이치를 따르는 말이고, 여섯 번째 즐겁게 하는 말이며, 일곱 번째 뜻을 따르는 말이고, 여덟 번째 대중을 업신여기지 않는 말이며, 아홉 번째 대중을 꾸짖지 않는 말이고, 열 번째 법다운 말이며, 열한 번째 나와 남을 다 이롭게 하는 말이고, 열두 번째 산란하지 않은 말이며, 열세 번째 이치에 맞는 말이고, 열네 번째 진정한 말이며, 열다섯 번째 말하고도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고, 열여섯 번째 말하고도 내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들을 줄도 아니,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16사(事)를 두루 갖춘다. 즉, 첫 번째 때에 맞는 들음이고, 두 번째 즐겨 들음이며, 세 번째 지극한 마음으로 들음이고, 네 번째 공경하여 들음이며, 다섯 번째 허물을 찾지 않는 들음이고, 여섯 번째 논란하려 하지 않는 들음이며, 일곱 번째 이기기 위하지 않는 들음이고, 여덟 번째 들을 때 설법하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며, 아홉 번째 들을 때 법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고, 열 번째 들을 때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며, 열한 번째 들을 때 5개(蓋)를 멀리 떠나는 것이고, 열두 번째 들을 때 수지 독송하기 위해서이며, 열셋 번째 들을 때 5욕(欲)을 제거하기 위해서이고, 열네 번째 들을 때 신심을 갖추기 위해서이며, 열다섯 번째 들을 때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서이고, 열여섯 번째 들을 때 어리석음의 뿌리를 끊기 위해서이니라.
선남자야, 이상의 8지(智)를 갖춘 사람은 잘 말하고 잘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나와 남을 다 이롭게 할 수 있으나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또 설법하는 사람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정한 사람이고, 둘째는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청정하지 않은 사람은 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익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고, 둘째는 갚음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며, 셋째는 남을 이기기 위해 설법하는 것이고, 넷째는 10보(報)를 위해 설법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의심하면서 설법하는 것이다.
청정하게 설법하는 사람도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먼저 시식(施食)한 뒤에 설법하는 것이고, 둘째는 삼보를 증장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타의 번뇌를 끊기 위해 설법하는 것이고, 넷째는 사정(邪正)을 분별하기 위해 설법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듣는 사람을 가장 훌륭하게 하기 위해 설법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청정하지 않게 설법하는 사람을 더러움[垢穢]이라 하고, 법을 판다고 하며, 또 오욕(汚辱)이라고도 하고, 또 실의(失意)라고도 한다.’” [청정하게 설법하는 사람은 앞의 것을 뒤집으면 곧 그것이다.]
또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록 천 문장을 외우더라도
그 글귀 뜻이 바르지 못하면
한 요긴한 글귀를 듣고
뜻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못하다네.
비록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옳지 않으면 무슨 이익 있으랴.
한 옳은 이치를 듣고 행하여
구제받는 것보다 못하다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외워도
알지 못하면 무슨 이익 있으랴.
한 법구를 듣고 행하면
그 도를 얻을 수 있네.”
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법을 받는 사람에게 주법(呪法)을 행해 끊이지 않도록 하려면 저 모든 법사는 설법하려 할 때 얼굴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먼저 주문을 외워야 한다.
다냐타 타가나 아가남가나 가나가나나가 가가나가 아가가나가 가나가나
恒絰他 陁迦那 阿迦男迦那 迦那迦那那迦 迦迦那迦 阿迦迦那迦 迦那迦那
가나아가나 가가나 바비살데 야타바비살 야타가가나 다타바비살데 다타마
迦那阿迦那 迦迦那 婆鼻殺帝 夜他婆鼻殺 夜他伽伽那 多他婆鼻殺帝 多他摩
가사 나가사가가사
迦舍 那迦舍迦迦舍
그 때 법사는 권속들에게 둘러싸여 이 주문의 가호(加護)와
방편을 얻어 그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설법이 끊어지지 않고, 욕심과 집착을 없애 버리며, 모든 청중들을 나찰녀들에게 붙들리지 않게 하고, 법사의 쓰임새도 장애를 받지 않는다.”
(6) 점돈부(漸頓部)
『백유경(百喩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한 마을이 있었는데, 왕성(王城)에서 5유순(由旬) 떨어져 있었다. 그 마을에 좋고 훌륭한 물이 있어서 왕은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날마다 그 훌륭한 물을 보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피곤하고 괴로워 모두 그 마을을 버리고 멀리 이사 가려 했다. 그래서 촌주(村主)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를 떠나지 마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왕에게 말씀드려 5유순을 3유순으로 만들어 여러분이 오가기에 피곤하지 않게 할 것이오.’
그리고 곧 왕에게 말씀드려 왕은 그것을 3유순이라 고쳤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것은 본래부터 5유순이고, 아무 변한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왕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끝내 그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도 이와 같다. 바른 법을 수행하여 5도(道)를 건너 열반성(涅槃城)으로 향할 때 피곤하다는 생각을 내어 그것을 버리려 하고는 모두 생사의 멍에를 메고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여래 법왕께서 큰 방편을 가지고 1승법(乘法)을 3승으로 나누어 설법하실 때 소승(小乘)의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행하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선을 닦고 덕을 증진시켜 생사를 건너기를 구한다. 이 말을 들은 뒤에 ‘3승은 없고 여전히 1승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이들은 끝내 이것을 버리려 하지 않는데, 이것은 저 마을 사람들과 같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비유하자면 해의 광명이 나와서 먼저 일체의 대산왕(大山王)을 비추고, 다음에는 일체의 대산을 비추며, 다음에는
금강보산(金剛寶山)을 비추고, 그 뒤에서야 일체 대지를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햇빛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먼저 저 대산왕을 비추고 차례로 대지를 두루 비추리라.’
다만 산과 땅에는 높낮이가 있기 때문에 비춤에 선후가 있을 뿐이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이와 같아서 무량 무변한 법계와 같은 지혜의 해를 성취하여 한없고 걸림없는 지혜의 광명을 항상 비추어 보살 등 모든 대산왕을 먼저 비추고, 다음에는 연각을 비추며, 다음에는 성문(聲聞)을 비추고, 다음에는 결정 선근의 중생들을 비추어 교화받을 만한 이에게 비추며, 그 뒤에야 일체 중생을 다 비추고, 나아가 사정취[邪定]를 위해 미래의 이익의 인연을 짓는다. 그러나 여래의 지혜의 햇빛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먼저 보살을 비추고 차례로 사정취를 비추리라.’
다만 지혜의 햇빛을 비추어 일체를 두루 비출 뿐이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해와 달이 나와 세간, 내지 높은 산 깊은 골짜기까지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의 해와 달도 이와 같아서 일체를 두루 비추어 밝히지 않는 곳이 없지만, 다만 중생들이 바라는 선근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여래의 지혜의 광명이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이다.”
(7) 법시부(法施部)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들에게 법을 보시하려면 마땅히 저 『결정왕대승경(決定王大乘經)』에서 법사의 공덕을 찬탄하고 법의 의미와 계율에 따라 수행함을 설명한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설법하는 사람은 4법(法)을 행해야 한다. 무엇이 4법인가. 첫째는 널리 많이 배워 일체의 말과 장구(章句)를 잘 지니는 것이고, 둘째는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의 생멸하는 상을 결정코 잘 아는 것이며, 셋째는 선정과 지혜를 얻어 모든 경전의 법에 따라 다툼이 없는 것이고,
넷째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선업을 바로 행하면서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을 위해 한 게송의 법이나마 설명하여 그로 하여금 부처님을 깨끗이 믿게 한다면, 그는 목숨을 마치고 응성천(應聲天)에 태어나서 갖가지로 향락을 누리고 하늘에서 떨어져서는 업에 따라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만일 재물을 위해 남에게 설법해 주고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서 그 재물을 취하거나, 혹은 술을 마시거나 혹은 여인과 함께 마시고 먹으면서 기생처럼 스스로 팔아 재물을 구한다면, 이런 법시는 그 과보가 아주 적다. 그리고 천상에 나면 지혜조(智慧鳥)가 되어 게송을 잘 외우는데 이것을 하품(下品)의 법시(法施)라고 한다.
무엇을 중품 법시라고 하는가. 명예를 위하고 남을 이기기 위하며, 다른 큰 법사를 이기기 위하여 남에게 설법하거나, 혹은 질투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설법하면 이런 법시는 그 과보도 적고, 천상에 나서도 중간 정도의 과보를 받거나, 혹은 인간에 나면 이것을 중품 법시라고 한다.
무엇을 상품 법시라고 하는가. 청정한 마음으로 중생들의 지혜를 증진시키기 위해 설법하며, 재물을 위하지 않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바른 법에 머무르게 하면, 이런 법시는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여 가장 최상이 되며, 나아가 열반에 이르러 그 복이 다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상품 법시라고 한다.”
또 『가섭경(迦葉經)』에서 말하였다.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세계를
보배로 가득 채워
그것으로 보시한다고 해도
얻는 공덕은 적고
한 게송의 법이나마 설명하면
그 공덕은 매우 크니라.
삼계의 모든 즐거움 거리를
한 사람에게 모두 보시한다고 해도
한 게송의 보시보다 못하리라.
이 공덕은 가장 훌륭하니라.
이 공덕은 저것보다 훌륭하여
모든 고뇌에서 떠날 수 있으리라.
항하의 모래알 같은 세계에
보배를 가득히 채워
모든 여래에게 보시하여도
하나의 법시보다 못하리니
보배를 주는 복이 많다고 해도
한 법의 보시보다 못하며
한 게송의 복도 훌륭하니
하물며 많은 게송은 생각하기도 어려우니라.”
또 『십주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재가인은 재물을 보시하고 출가인은 법을 보시하라. 왜냐 하면 재가인의 법시는 출가인에 미치지 못하며, 법을 듣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재가인은 믿음이 천박하기 때문이다. 또 재가인은 재물이 많고 출가인은 모든 경을 독송하고 통달하여 남에게 설법하면서 대중 앞에서도 겁이 없어서 재가인이 미치지 못한다. 또 법을 듣는 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도 출가인보다 못하며, 또 설법하여 사람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도 출가인보다 못하다.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먼저 스스로 법을 닦아 행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 가르쳐라.
그래야만 이렇게 말할 수 있네.
‘그대는 나의 행을 따르라’라고.
몸소 선을 행하지 않고
어떻게 남을 선하게 하겠으며
제가 적멸(寂滅)하지 않고
어떻게 남을 적멸하게 할 것인가.
또 출가인이 재물을 보시하면 다른 선을 방해하니, 수행처[阿練若處]를 떠나면 반드시 마을에 가서 속인들과 일을 함께 하므로 말이 많아 3독(毒)을 일으키며, 6도(度) 등에 마음이 엷어지고, 나아가 5욕을 탐하여 계를 버리고 속가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혹은 계율을 어기고 무거운 죄를 짓기 쉬우니, 이것을 죽음 등 모든
번뇌의 고통이라 한다. 이 인연으로 출가인에게는 법시를 찬탄하고, 재가인에게는 재시(財施)를 찬탄하는 것이다.”
또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말하였다.
“설법에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 법시는 나와 남이 다 이롭지만 재시는 그렇지 않다. 둘째, 법시는 중생들을 삼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재시는 욕계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셋째, 법시는 법신을 이롭게 하지만 재시는 색신을 자라고 키울 뿐이다. 넷째, 법시는 무궁하게 자라나지만 재시는 반드시 다할 때가 있다. 다섯째, 법시는 무명을 끊을 수 있지만 재시는 단지 탐심을 조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재시는 법시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법시에는 스스로 계단이 있다. 만일 아는 바를 남에게 알리지 않고, 남이 자기보다 나을까 두려워해 감추어 두고 말하지 않으면 그는 앞으로 언제나 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만일 법을 아까워해서 설법하지 않는다면 그는 항상 변두리의 불법이 없는 곳에 태어날 것이며, 법을 아까워해서 남의 슬기를 막는다면 그는 법을 파는 것만 못해서 다른 사람이 도리어 이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
또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만일 단지 남을 위해서만 설법한다면 이것을 이타(利他)라 하며, 이 사람은 비록 스스로는 법행(法行)을 따르지 않지만 남을 위해 설법하기 때문에 자기도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 법시에 대략 3품(品)이 있다. 하품의 법시는 보시의 법을 말하면서도 지혜를 말하지 않는 것이고, 중품의 법시는 계율을 말하는 것이며, 상품의 법시는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혜를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이치를 관(觀)하게 하여 번뇌[惑]를 끊는 지혜를 얻게 하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두 번뇌[障]를 끊고 생사를 벗어나 보리와 열반의 즐거움의 과보를 이루게 한다. 나아가 다만 소승만을 말해서라도 한 사람을 교화해 아공[生空]을 관(觀)하게 하며,
신해(信解)로 행에 의지해 비록 도는 얻지 못하더라도 한 염부제 안의 중생을 교화시켜 10선(善)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것은 신해하는 사람이 성도(聖道)를 알고 닦으면 곧 벗어날 인연이 있어 반드시 열반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에서 말하였다.
“이 염부제 안에 있는 물과 육지와 공중으로 다니는 중생들이 모두 사람의 몸을 얻고,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중생들을 가르쳐 5계와 10선에 편히 머물게 한다면, 그가 얻는 공덕도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가르쳐 신행(信行)을 얻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또 『십주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4법이 있어서 지혜를 잃게 하는데, 보살은 그것을 멀리 떠나야 한다. 어떤 것이 4법인가. 첫째는 법과 법을 설하는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요긴한 법을 몰래 숨겨 두며 아까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즐기는 사람을 방해하여 그 들으려는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고, 넷째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자기를 높이고 남을 낮추는 것이다.
또 4법이 있어 그 지혜를 얻게 하니, 항상 그것을 닦아 익혀야 한다. 어떤 것이 4법인가. 첫째는 법과 설법하는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고, 둘째는 들은 법과 독송하는 것을 그대로 남에게 설법하면서도 그 마음이 청정하여 이양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많이 들으면 지혜를 얻기 때문에 그것을 부지런히 구해 쉬지 않기를 머리에 붙는 불을 끄는 것처럼 하는 것이며, 넷째는 법을 들으면 잊지 않고 말대로 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말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8) 보은부(報恩部)
또 『선공경경(善恭敬經)』에서는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남에게서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을 듣고 그것을 적거나 혹은 종이[竹帛]에 베껴 쓰고 거기 있는 이름대로 저 화상과 아사리 등을 여러 겁 동안 어깨에 얹거나 때로는 등에 짊어지거나 혹은 항상 정수리에 이고 다니며,
또 일체의 음악거리로 이 스승들에게 공양하는 등 이런 일로도 오히려 스승의 은혜를 모두 다 갚지 못할 것이다. 만일 오는 미래 세상에 이 화상에 대해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 항상 그 허물을 말한다면, 나는 ≺그는 어리석어 많은 고통을 받고 오는 미래 세상에서는 반드시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나는 너희들에게 항상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이와 같은 훌륭한 법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니, 이른바 삼보의 매우 깊은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또 『범망경(梵網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불자들아, 견해가 같고 수행이 같은 대승 법사가 함께 걸어와서 승방이나 집이나 성읍으로 들어올 때 만약 백 리나 천 리 밖에서 오는 것을 본다면, 올 때는 맞이하고 갈 때는 배웅하며 예배하고 공양하되 날마다 세 끼로 공양하며, 날로 2, 3냥씩 돈을 들여 온갖 맛있는 음식과 자리로 공양하고 일체의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어라. 그리고 항상 법사를 세 때로 청하여 설법을 듣고 날마다 세 때로 공양하되 성내는 마음이나 괴롭히려는 마음을 내지 말며,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고 법을 청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구죄(輕垢罪)를 범하는 것이다.”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만일 우바새가 6중계(重戒)를 받아 지닌 뒤에 40리 안에 설법하는 곳이 있을 때 거기 가서 법을 듣지 않으면 그것은 실의죄(失意罪)를 범하는 것이다.”
또 『대방등다라니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부모나 처자가, 자기가 도량에 가는 것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부모 등 앞에서 갖가지 향을 피우고 길게 꿇어앉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하라.
‘저는 지금 도량에 가고 싶습니다. 가엾이 여겨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갖가지로 간청하고 깨우치며 알맞게 설법하라.
이렇게 세 번 청해 그래도 들어 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자기 집에서 가만히 명상하고 경전을 외워라.”
또 『정법념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설법하는 법사에게 공양한다면 이 사람은 곧 현세의 세존께 공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 사람이 이렇게 장소를 따라 공양하면 발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나아가 아뇩보리를 얻을 것이니, 설법하는 법사께 공양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법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조복하고, 마음을 조복했기 때문에 무지로 흘러다니는 어두움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법을 듣는 것을 떠나서는 그 마음을 조복할 수 있는 아무런 법도 없다.”
또 『승사유경(勝思惟經)』에서 말하였다.
“죄업도 일으키지 않고 복업도 일으키지 않으며 무동업(無動業)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라 한다.”
또 『화수경(華手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꽃이나 향이나 옷이나 음식이나 탕약 등으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이를 참다운 공양이라 하지 않는다. 여래께서 도량에 앉아 계실 때 거기서 얻은 미묘한 법을 능력에 따라 수학하면 이를 참다운 공양이라 한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약 꽃이나 바르는 향
옷이나 음식이나 탕약 등
이런 것으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이를 참다운 공양이라 하지 않네.
여래께서 도량에 앉아
얻으신 미묘한 법
만약 이를 잘 배워 닦으면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공양이라 하네.”
또 『십주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이 꽃과 향을 내려도 그것은 여래를 공양 공경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 만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등이 일심으로 방일하지 않고 성인의 법을 친근하게 닦아 익히면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또 『보운경(寶雲經)』에서 말하였다.
“재시(財施)로 부처님께 공양하지 말라. 왜냐 하면 여래의 법신은 재시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법시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불도를 갖추는 것이 되니, 법 공양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또 『선공경경(善恭敬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비구가 하안거를 거듭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법구(法句)를 잘 알지 못한다면, 그도 남을 따라 의지해야 한다. 왜냐 하면 자기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이 의지하는 스승이 되겠는가. 가령 백 번의 하안거를 지낸[百夏] 늙은 비구라도 사문의 비밀스러운 일을 잘 알지 못하고 법률 등도 알지 못한다면, 그도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만일 비구가 스승에게 법을 받았다면 그 스승에 대해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켜야만 한다.
그리고 스승의 법을 받으려 할 때에는 그 스승 앞에서 함부로 웃지 말고 이빨을 드러내지도 말며, 발을 대지도 말고 발을 보지도 말며, 발을 움직이지도 말고 그 다리를 넘지도 말며, 스승이 묻지도 않는데 문득 말하지도 말며 분부하는 일은 모두 어기지 말라. 그리고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스승에게서 3주(肘)쯤 떨어져 있다가 앉으라 하면 곧 앉아 그 분부를 어기지 말라. 그 스승에 대해 자비스러운 마음을 일으키며, 만약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여쭈어 보아 스승이 허락한 뒤에 결정을 청하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하루 세 때에 문안을 가야 하는데, 만일 세 때에 문안을 가지 않으면 이 스승은 그를 법답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만약 문안을 갔다가 스승이 보이지 않으면 흙덩이나 나무 조각이나 풀잎으로 그 증거를 표시해 두어야 하며, 스승이 방에 계시는 것을 보면 그 때 이 학인(學人)은 일어나 지극한 마음으로 방을 세 번 돌고 스승께 정례한 뒤에 비로소 돌아온다. 만약 스승이 보이지 않으면 모든 일을 그만두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대소변은 예외이다.
또 제자는 스승 앞에서는 거친 말을 쓰지 말며, 스승의 꾸지람을 들어도 대들지 말라. 스승이 앉거나 누우려면 먼저 자리를 깔고 닦아 먼지와 나쁜 벌레들을 없애 버리며, 스승이 앉거나 눕거나 내지 일어나면 송주의 업[誦業]을 닦아야 한다. 그 때 그 학인은 해가 동쪽에서 뜨면 곧 스승에게로 가며, 때를 잘 알고는 스승에게 자주 가서 물을 것을 물어야 한다.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또 제자는 스승 앞에서는 가래침을 뱉지 말며, 절 안을 다닐 때에는 스승을 공경하기 때문에 가사로 어깨를 덮거나 머리를 싸지 말라. 날이 더울 때에는 하루 세 때로 가서 부채로 스승을 부쳐 드리며, 세 때로 물을 드려 목욕하게 하라. 또 세 때로 찬 음료수를 스승께 마시게 하며, 스승이 무슨 일을 하면 힘껏 그것을 도와 줘야 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오는 세상에 모든 비구들이 혹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스승의 장점과 단점을 말한다면, 그는 수다원이 아니고 범부도 아니며, 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이같이 다스려야만 한다. 스승이 실로 허물이 있어도 오히려 말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허물이 없음이겠는가.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스승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나는 말하노니, 그 사람은 추박(推撲)이라는 한 작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거기 떨어져서는 한 몸에 머리가 네 개 달린 몸이 되어 온몸이 모두 불에 타서 마치 불덩이와 같아 큰 사나운 불꽃을 내어 타면서 쉬지 않고 타고 또 탈 것이다. 또 그 지옥에는 구채(鉤柴)라는 온갖 독충이 있어서 그 혀를 항상 물어뜯을 것이다.
그 어리석은 사람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고는 축생들 가운데에 태어날 것이니, 그것은 다 옛날 그 스승을 욕한 혀의 허물 때문이며, 그 때문에 항상 대소변을 먹을 것이다. 그 몸을 버리고는
비록 인간에 태어나더라도 변두리에 나서 온갖 악을 지을 것이고, 사람의 몸을 얻더라도 피부가 사람 같지 않아 사람의 형색을 갖추지 못하며, 항상 지극히 비천한 비방과 욕을 먹을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을 떠나 항상 지혜가 없을 것이다. 거기서 죽어서는 다시 지옥에 떨어져 또 무량 무변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9) 이익부(利益部)
『정법념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법에 열 가지 공덕이 있어서 많은 이익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때와 곳이 구족한 것이고, 둘째는 분별하여 알기 쉬운 것이며, 셋째는 법과 상응한 것이고, 넷째는 이양을 위함이 아닌 것이며, 다섯째는 마음을 조복하기 위한 것이고, 여섯째는 그를 따라 설법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보시에 과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생사의 법에 온갖 장애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천상에서 퇴락함을 말하는 것이고, 열째는 업의 과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설법하는 사람에게 이 10법이 있으면 설법을 듣는 사람에게 많은 공덕과 이익과 안락과 나아가 열반을 얻게 해줄 것이다. 만약 법의 공덕을 들으면 깊은 마음을 성취하고 신심이 청정하여 한결같이 청정한 마음으로 삼보를 믿을 것이다. 법을 듣는 곳에 나아가 바른 법을 들으면 발을 한 번 들 때마다 다 깨끗한 복이 생길 것이다.”
또 『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보살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마치 큰 스승과 같이 하고, 바른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며, 여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자기 목숨과 같이 하고, 존중하는 스승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중생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외아들과 같이 하며, 가르침을 주는 아사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내 눈과 같이 여기고, 바른 행을 좋아함을 일으키기를 내 눈과 귀와 몸과 머리와 같이 하며, 바라밀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내 손이나 발과 같이 하고, 법사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귀중한 보배와 같이 하며, 구하는 바른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좋은 약과 같이 하고, 죄상을 듣고 기억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를 마치 좋은 의사와 같이 하라.”
또 『승가타경(僧伽吒經)』에서 말하였다.
“일체용(一切勇)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을 듣는 중생은 몇 겁 동안이나 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수명은 80겁을 채울 것이다.’
일체용이 말씀드렸다.
‘그 1겁의 양(量)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큰 성(城)과 같은데, 너비가 12유순이요 높이는 3유순이다. 그 안에 깨를 가득 채우고, 어떤 오래 사는 사람이 1백 년을 지나 하나씩 집어 간다. 이렇게 해서 그 성 안의 깨가 다 없어져도 겁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또 큰 산과 같아서 너비가 25유순이고 높이는 12유순이다. 어떤 오래 사는 사람이 백 년을 지나 가벼운 비단으로 한 번씩 그 산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렇게 해서 그 산이 다 없어져도 그 겁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한 겁의 양이다.’
그 때 일체용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한 번 발원해도 이런 복덕의 무더기를 얻어 수명이 80겁이 되는데, 하물며 불법 안에서 모든 행을 두루 닦음이겠습니까?’”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4법을 떠나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 4법인가. 첫째는 좋은 벗과 친한 것이고, 둘째는 마음을 오로지해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매어 깊이 생각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답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듣는 인연은 큰 반열반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의 눈을 뜨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다. 첫째는 눈이 없는 사람이고[범부에 비유함], 둘째는 외눈인 사람이며[성문에 비유함], 셋째는 두 눈이 있는 사람이다.[보살에 비유함]
눈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법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고, 외눈인 사람 비록 잠깐 법을 듣더라도 그 마음이 거기 있지 않은 사람이며, 두 눈이 있는 사람은 전심으로 듣고 그대로 수행하는 사람이다. 법을 듣기 때문에 세간에 이런 세 가지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사위국 급고독정사(給孤獨精舍)에서 여러 천(天)과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금강(金剛)이라는 과부 딸이 있었다. 부모는 그녀를 가엾이 여겨 좋은 집을 따로 지어 주고 5백의 기녀(妓女)들을 보내어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에게는 도승(度勝)이라는 한 늙은 하인이 있었다. 도승은 항상 시장에 다니면서 연지와 분과 꽃과 향을 샀다. 어느 때 그는 무수한 남녀 대중이 각각 향과 꽃을 가지고 성을 나서서 부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곧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삼계에서 가장 높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을 제도해 다 열반을 얻게 하신다오.’
도승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 나는 늙어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전생에 지은 복이다.’
그리고 곧 향을 나누어 판 돈으로 좋은 꽃을 사 가지고 그들을 따라 부처님께 가서 예배한 뒤에 물러서서 부처님께 꽃을 흩뿌리고 향을 피우고 일심으로 법을 들었다. 그리고 시장을 지나면서 향을 샀다. 법을 들은 공덕과 전생의 인연으로 인하여 향기는 더욱 높고 무게는 전의 갑절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늦었다고 모두 나무랐다. 도승은 그 말을 듣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삼계에서 가장 존귀하신 성사(聖師)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위없는 법고를 두드려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므로 무수한 사람들이 그 법을 들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 가서 법을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 때문에 이렇게 늦었습니다.’
금강의 무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가장 뛰어나고 묘하여 세간에서 듣지 못했던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도 한탄하였다.
‘우리는 무슨 죄로 떨어져 있어 듣지 못하는가?’
그리고는 도승에게 말하였다.
‘시험삼아 우리를 위해 그것을 말해 보도록 해라.’
도승은 말하였다.
‘저는 몸이 천하고 입이 더러워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설법하는 의식은 먼저 높은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승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성인의 뜻을 다 이야기했다. 5백 시녀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각각 옷 한 벌씩을 벗어 쌓아 높은 자리를 만들었다. 도승은 목욕한 뒤에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알맞게 설법했다. 금강과 그 5백의 시녀들은 의심의 맺힘이 풀리고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그리고 그 설법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잘못하여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한꺼번에 다 타 죽어 모두 천상에 태어났다. 왕은 사람들을 데리고 불을 끄러 왔다가 그녀들이 다 죽은 것을 보고 시체를 수습하여 관에 넣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왕은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부처님께 예배한 뒤에 합장하고 말씀드렸다.
‘금강 등은 불행히도 잘못하여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모두 타 죽었으므로 이제 장례를 치렀습니다. 무슨 죄로 그들은 이 화재를 만났습니까? 세존께서는 듣지 못한 그 일을 밝게 말씀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바라내성(波羅柰城)이라는 곳에 사는 어떤 장자(長者)의 아내가 5백 인의 시녀를 데리고 성 밖의 큰 사당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성질이 몹시 까다롭고 급해서 다른 종족의 사람들은 그 근처에 가지도 못하였는데, 누구든지 가면 친소를 불문하고 그를 붙들어 불 속에 던졌습니다. 그 때 가라(迦羅)라는 벽지불이 산중에 있으면서 새벽에는 나가 걸식하고 저물면 산으로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가라가 걸식하려고 그 사당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그를 보자 잔뜩 화를 내어 함께 가라를 붙잡아 불 속에 던졌습니다. 온몸이 불에 타자 그는 신통을 부려 허공으로 날아올라갔습니다. 그녀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면서 길게 꿇어앉아 우러러보고 사과했습니다.
≺여자들이 어리석어 지진(至眞)님을 몰랐습니다. 미혹하고 교만하여 신령님을 비방하고 욕되게 했습니다. 저희들의 잘못과 죄악이 산과 같이 크오니 원하옵건대 그 높은 덕을 내리시어 이 무거운 재앙을 소멸시켜 주십시오.≻
그는 이 소리를 따라 곧 내려와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녀들은 탑을 세우고 그 사리를 공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왕을 위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리석어 악업을 지으면서도
그런 줄을 스스로 모르고
재앙을 쫓아 스스로 타 버리니
죄를 이룸이 치연하여라.
어리석어 갈 곳을 바라보지도 않고
괴로운 곳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다가
재액의 땅에 떨어지게 되어서야
비로소 저의 불선을 안다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장자의 아내는 지금의 왕의 딸 금강이고, 그 5백 인의 시녀는 지금의 저 도승 등 5백의 기녀입니다. 죄와 복은 사람을 쫓아 언제고 반드시 나타나며, 선과 악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설법하실 때 모든 노소들은 다 도의 자취를 얻었다.”
또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아서가왕(阿恕伽王)은 도인을 시켜 설법하게 하고는 부녀자들은 장막을 가리고 그 밖에서 법을 듣게 했다. 그 때 법사는 부녀자들을 위해 설법할 때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 것을 설명했다. 어떤 여자가 왕의 법을 범하는 줄 알면서 장막을 제치고 법사 앞으로 나와 법사에게 물었다.
‘여래 대각께서 보리수 밑에서 모든 법을 깨달으실 때에 보시와 지계만 깨달으셨습니까, 또 다른 법도 깨달으셨습니까?’
법사는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유루(有漏)의 법은 다 괴로운 것으로서 마치 녹은 쇠와 같고, 이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생겨 마치 독한 나무와 같으며, 8정도를 닦음으로써 괴로움의 집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이 여자는 이 말을 듣고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그리고 칼을 목에 매고 왕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저는 오늘 대왕님의 중한 법을 범했습니다. 대왕님은 법으로써 저를 다스려 주소서.’
왕이 물었다.
‘너는 무슨 법을 범했느냐?’
그녀가 대답하였다.
‘저는 대왕님께서 금하시는 법을 어기고 도인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갔습니다.
마치 목마른 소가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것처럼 저는 실로 불법에 목이 말랐었습니다. 그래서 당돌하게 법을 들었던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너는 그 설법을 듣고 과연 무슨 소득이 있었느냐?’
그녀가 대답하였다.
‘그 법을 듣고 4성제[眞諦]를 보았고, 5온[陰]ㆍ12처[入]ㆍ18계[界]를 알았고, 모든 대(大)에는 다 아(我)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에게 예배했다. 그리고 곧 칙령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장막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법을 즐겨 들으려는 자는 법사에게 바로 가서 마주 보고 법 듣는 것을 허락한다.’
찬탄하였다.
‘기특하구나. 내 궁중에 사람 가운데 보배가 나왔구나.’
이 인연으로 법을 들으면 큰 이익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반차라국(般遮羅國)의 바사닉왕은 5백 마리의 기러기를 기환정사(衹桓精舍)로 보냈다. 여러 스님들이 밥 먹을 때가 되어 걸식하러 가자, 기러기들은 스님들이 그 앞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한 음성으로 설법하면 여러 중생들은 각각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 때 기러기들도 스님들의 말을 알고 그 법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못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뒤에 털과 깃이 더욱 자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사냥꾼이 그들을 잡으려고 그물로 덮쳤다. 한 기러기들이 소리를 내자 여러 기러기가 다 화답했는데, 법을 들을 때의 소리였다. 그들은 죽어 이 선심으로 인하여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
천상에 태어나는 법에는 3념(念)이 있는데, 첫째는 본래 온 곳을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결정코 어디서 태어날까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전에 어떤 업을 짓고 이 천상에 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만히 생각했다.
‘과거의 인(因)에 다른 선(善)은 없고 오직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들은 것뿐이다.’
그리하여 그 5백 천자(기러기)는 곧 부처님 곁으로 내려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다.
바사닉왕은 우연히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왔는데,
전에는 항상 5백 마리 기러기가 부처님 앞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날에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자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기 있던 그 기러기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기러기들을 보고 싶어하십니까? 전의 그 기러기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가 사냥꾼에게 죽음을 당해 목숨을 마치고는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좋은 천관(天冠)을 쓴 얼굴이 단정하고 뛰어난 이 5백 천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오늘 법을 듣고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습니다.’
왕은 부처님의 이 말을 듣고 다시 여쭈었다.
‘이 기러기들은 어떤 업연으로 축생에 떨어졌다가 거기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태어나서 오늘 도를 얻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가섭불 때에 5백 명 여자들이 다 함께 계를 받고는 마음 씀씀이가 견고하지 못해 받은 계를 범하고 계를 범한 인연으로 축생에 떨어져 기러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를 받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고 도를 얻었습니다. 기러기로 있을 때 법을 들은 인연으로 지금 천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또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사문이 밤낮으로 경을 외웠다. 어떤 개 한 마리가 상 밑에 엎드려 일심으로 경 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밥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가 목숨을 마치고는 사람의 몸을 얻어 사위국(舍衛國)의 어떤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라나서 사문이 걸식하는 것을 보고 곧 밥을 가지고 가서 사문에게 주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뒤에는 비구니가 되어 아라한[應眞]의 도를 얻었다.’
게송으로 읊노라.
왕의 도리는 바깥을 다스리고
신(神)의 도는 안을 편안케 하는데
법황(法皇)은 바른 법 깨달았으니
이 이야말로 최상의 종사(宗師)이시네.
삼가 현묘한 가르침을 받들어
덕을 높이고 빛을 떨치며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으니
꽃다운 잎이 빼어나게 무성해지네.
4제(諦)를 느끼어 깨닫고
3달(達)을 즐기며 기뻐하며
금첩(金牒)을 열어 경계하고
신묘한 작용을 열어 가르치시네.
공(空)과 유(有)를 나란히 비교하여
현묘한 분은 깊고 아득한데
버릴 것 없는 것까지 버리나니
지극한 도는 끝이 없구나.”
감응연(感應緣)
송(宋)나라 사문(沙門) 축도생(竺道生)
송(宋)나라 거사(居士) 비숭선(費崇先)
위(魏)나라 사문 천축륵나(天竺勒那)
제(齊)나라 사문 석승범(釋僧範)
수(隋)나라 사문 석담연(釋曇延)
수(隋)나라 사문 석혜원(釋慧遠)
수(隋)나라 사문 석법언(釋法彦)
당(唐)나라 사문 석도종(釋道宗)
당(唐)나라 사문 석도혜(釋道慧)
①송(宋)나라 사문 축도생(竺道生)
송(宋)나라의 장안(長安) 용광사(龍光寺) 축도생(竺道生)의 본성은 위(魏)요 거록(鉅鹿) 사람이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총명하고 예리하며 신이로웠다. 나이 15세[志學]에 곧 법좌에 올라 음률처럼 조화로운 법문을 토했으므로 승속이 높게 여기고 감복했다. 구족계[具戒]를 받을 나이에 이르러서는 기량이 날로 깊어갔으며, 성품은 날카롭고 신기(神氣)는 맑고 온화했다.
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고요히 7년 동안 지내면서 그 뜻을 구할 때는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결은 혜해(慧解)로 근본을 삼았다. 그러므로 뭇 경전을 연구하고 온갖 논문을 참작하였으며, 법을 따라 만리를 가도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뒤에 혜예(慧叡)와 혜엄(慧嚴)과 함께 장안(長安)에 가서 구마라집 법사에게서 공부를 받을 때는 서울[關中]의 스님들이 모두 그를 신오(神悟)라고 했다.
그 뒤에 경도(京都)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있을 때는 송나라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깊이 그를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태조는 법회를 열고 친히 대중과 함께 자리에 있었는데, 음식을 내리는 것이 조금 늦어지자 모두 날이 저물까 걱정했다. 황제가 말하였다.
“이제야 한낮이다.”
도생이 말하였다.
“해가 하늘에 빛나고 황제께서 이제야 한낮이라 하시는데 어찌 한낮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발우를 들고 밥을 먹으니, 이에 대중들이 다 따르면서 모두 서로 은밀한 마음이 맞은 것에 탄복했다. 뒤에 진속(眞俗)을 교열하고 인과를 연구하고는, 이에 “선악은 과보를 받지 않고 단박에 깨달아 부처가 된다[善不受報頓悟成佛]”고 주장하였다. 또 『이제론(二諦論)』과 『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ㆍ
『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ㆍ『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ㆍ『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을 때는 과거의 학설을 다 포섭하고 오묘하게 깊은 뜻이 있었으므로 단지 문장에만 얽매어 있는[守文] 무리들은 대부분 그를 꺼리고 미워하여 목숨을 빼앗으라는[與奪] 소리가 어지럽게 일어났다.
또 6권의 『열반경[泥洹經]』이 경도(京都)에 먼저 전해져 왔으므로 도생은 그 경의 이치를 낱낱이 분석하여 깊고도 은미한 곳에까지 사무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일천제인(一闡提人)도 모두 다 성불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는 『열반경』 대본(大本)이 전해지지 못했는데 혼자만 밝히고 먼저 주장을 했으므로 혼자서 대중의 반대를 당했다. 그리하여 옛 학자들은 그것을 삿된 학설이라 하여 비방과 분노가 대단히 심했고, 드디어는 대중들이 드러내 놓고 배척하여 쫓아내려 했다. 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을 바르게 하고 맹세하였다.
“만일 제 주장이 경의 뜻에 어긋난다면 지금 당장 제 몸에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시고, 만일 실상(實相)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제가 목숨을 버릴 때 사자좌(師子座)에 앉도록 해주길 원합니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고, 옷소매를 떨치고 떠나갔다. 처음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으로 갔는데, 한 열흘 동안에 학도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 해 여름에 천둥이 치고 청원사(靑園寺) 불전(佛殿)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서쪽 벽에 그 그림자가 빛났다. 그래서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라고 고쳤다. 그 때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용이 이미 떠나 버렸으니 도생도 반드시 가겠구나.”
얼마 뒤에 도생은 여산(廬山)으로 가서 바윗굴에서 세월을 보내니, 산중의 스님들이 모두 공경하고 받들었다. 그 뒤에 『열반경』 대본(大本)이 남경(南京)으로 왔는데, 과연 거기에 “천제(闡提)도 모두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였으니, 전에 도생이 한 말과 꼭 들어맞았다. 도생은 이 경을 얻어서는 곧 강설을 시작했다.
송나라 원가(元嘉) 11년(434) 11월 경자(庚子)에 도생이 여산의 정사에서 법좌에 오르니, 신색(神色)이 환하였고 덕스러운 음성으로 유창하게 강론을 여러 번 하여 오묘한 이치를 다 드러내니, 보고 듣는 대중이 모두 깨치고 기뻐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하자 갑자기 불자(拂子)가 힘없이 떨어지면서 도생은 단정히 앉아 책상을 기대어 입적하니,
안색은 변하지 않아 마치 선정에 든 것과 같았다. 승속이 모두 놀라고 한탄하면서 멀고 가까운 사람들 모두가 슬피 울었다. 이에 서울과 각 고을의 스님들은 마음속으로 과거의 질투를 부끄러워하면서 믿고 감복하였으니, 그 신기로운 식견의 지극함과 상서로운 징조가 그러하였다. 그리고 여산의 언덕에 장사했다.
처음에 혜예와 혜엄과 혜관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천진(天眞)을 발휘하였고, 혜엄과 혜관은 그 흐름을 얻었으며, 혜의(慧義)는 교만하였고, 구연(寇淵)은 어눌하였다.”
도생과 혜예만을 홀로 천진한 눈이라 표현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 사람 중에서 빼어났던 것이다.
처음에 서울[關中]의 승조가 『유마경(維摩經)』을 주석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즐겨 읽었는데, 도생이 이에 다시 깊은 뜻을 캐어 내고 새롭고 다른 것을 발현하고, 또 모든 경전의 뜻을 해석하니, 세상이 다 이것을 보배로 삼았다. 왕은 가만히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견주어 곧 전기(傳記)를 만들고, 그 유덕(遺德)을 표창하였다. 그리고 그 때 사람들은, 도생이 “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이 말의 증거가 있음과 “단박에 깨달음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말 등도 시대의 헌장(憲章)이다.
송나라 태조가 일찍이 도생의 “단박에 깨달음”의 뜻에 대해 말했을 때 사문 승필(僧弼) 등이 크게 힐난했다.
태조가 말하였다.
“만일 죽은 사람을 살아나게 할 수 있다면 그가 어찌 그대들에게 굴복하겠는가?”
또 용광사의 사문 보림(寶林)은 처음에는 장안(長安)에서 공부하였고, 뒤에는 도생의 모든 학설을 조술(祖述)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그를 서현(逝玄)이라 불렀다.
도생은 『열반기(涅槃記)』ㆍ『주이종론(注異宗論)』ㆍ『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는데, 보림의 제자 법보(法寶)도 내외(內外)의 학문을 아울러 알아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짓고 또 도생의 학설을 조술했다. 또 근대의 석혜생(釋慧生)도 용광사에 있으면서 나물밥을 먹고 모든 경에 능통했으며, 또 초서와 서예를 잘 썼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같은 절에서 서로 계승했다 하여 그들을 크고 작은 2생(生)이라 했다.[위의 증험은 『양고승전』에 나온다.]
②송(宋)나라 거사 비숭선(費崇先)
송나라 비숭선(費崇先)은 오흥(吳興) 사람이다. 젊어서 불법을 매우 믿다가
나이 30세가 되어서는 더욱 돈독하게 정근하였다. 태시(泰始) 3년(467)에 보살계를 받고 사혜원(謝慧遠)의 집에서 재(齋)를 드릴 때에는 24일 동안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경을 들을 때마다 늘 까치꼬리 향로를 무릎 앞에 두고 있었다. 첫 재(齋)의 사흘째 저녁에는 용모와 옷이 비범한 어떤 사람이 바로 와서 그 향로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숭선은 무릎 앞을 보았으나 향로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다시 자세히 이 사람을 보았으나 향로를 들고 가는 것이 매우 분명했다. 숭선은 비로소 이 신이(神異)함을 깨닫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가 입은 옷은 새로 빤 것이어서 조금도 더러움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곁에 가래받이 그릇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치우고 다시 보니, 이 사람은 향로를 가지고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자리에 오기 전에 두 향로는 벌써 와서 하나가 되어 있었으니, 그렇다면 이 사람이 들었던 향로는 본 향로의 그림자였단말인가.
숭선은 또 그 사람의 말을 들었다. 즉, 복원사(福遠寺)의 승흠(僧欽)이라는 비구니는 매우 정진하여 도를 얻었다고 했다. 그는 그 비구니를 만나기를 원했으나 아직 가지는 못하고 마음을 쏟기에 매우 지극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집에서 재를 올리게 되었는데 깊은 밤중에 갑자기 한 비구니를 보았다. 근엄한 용모에 붉은 삼베 가사를 입고 재석(齋席) 앞에 바로 서 있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다. 숭선이 그 뒤에 이 비구니를 만났는데, 그 용모와 입은 가사가 전에 창 앞에서 본 것과 같았다.[이 증험은 『명상기』에 나온다.]
③위(魏)나라 사문 천축(天竺) 륵나(勒那)
원위(元魏) 때에 천축(天竺)의 사문 륵나(勒那), 즉 위나라 말로 실의(實意)라 하는 이가 있었다. 이 서국(西國) 사람은 그 씨족(氏族)을 모른다. 그는 3장(藏)에 두루 통달하고 총지(總持)에 깊이 들어갔다. 위나라 영평(永平) 초년(508)에 동하(東夏)로 오자 선무황제(宣武皇帝)는 늘 그를 청해
『화엄경』을 강의하게 했다. 그는 『화엄경』을 열람하면서 정진하여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홀(笏)을 들고 명부를 쥐고 나타나 마치 대관(大官)과 같은 형상으로 말하였다.
“천제(天帝)의 명으로 법사를 청해 『화엄경』을 강하라 하여 왔습니다.”
륵나가 말하였다.
“지금 이 법석(法席)도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 강경을 마치기를 기다려 다시 오시면 그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법사(法事)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강(都講)과 향화(香火)와 유나(維那)와 범패(梵唄) 등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 사자(使者)는 청대로 하겠다고 했다. 강의를 듣는 여러 스님들을 보자 법회가 곧 끝나려 했다. 그 사자는 다시 와서 말하였다.
“천제의 명령으로 맞이하러 내려왔습니다.”
륵나는 빙그레 웃고 기뻐하면서 대중에게 하직하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법좌에서 입적하였고, 도강(都講) 등 네 사람도 동시에 입적하였다. 위나라의 도속들로서 이 이변을 보고 듣고 모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④제(齊)나라 사문 석승범(釋僧範)
제(齊)나라 서울 동쪽 대각사(大覺寺)의 사문 승범(僧範)은 성이 이(李)씨이고, 평향(平鄕) 사람이다. 그는 모든 글을 잘 알았으므로 세상에서 부고(府庫)라고 했다. 만년(晩年)에 출가하여 경론을 다 외웠으며 말과 실행이 서로 맞고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내렸다.
일찍이 교주(膠州)의 자사(刺史)인 두필(杜弼)이 서울의 현의사(顯義寺)에서 겨울에 승범을 청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했다. 화엄의 6지(地)에 이르자 갑자기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부도(浮圖) 동쪽으로부터 돌아 법당에 들어와서는 법좌를 마주 대해 땅에 엎드려 법문을 들었다. 강설이 끝나자 천천히 나와 탑 서쪽을 돌아 날아갔다.
또 이 절의 여름 강의에는 참새가 와서 자리 서남쪽에 엎드려 90일 동안 계속해서 법문을 모두 들었다.
또 일찍이 제주(濟州)에 있을 때에도 올빼미 한 마리가 날아와 강설을 다 듣고 떠났다.
또 어떤 스님이 성을 내면서 승범을 보고 욕하였다.
“가두(伽斗)야, 네가 무엇을 아느냐.”
그러다가 그 날 밤에 귀신에게 두들겨 맞아 거의 죽을 뻔했다.
만일 그 도가 명부(冥府)에까지 미치지 않았다면 그 감응이 어찌 이러하겠는가.
천보(天保) 6년(555) 3월 2일에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나이가 80세였다.
⑤수(隋)나라 사문 석담연(釋曇延)
수(隋)나라 서울 연흥사(延興寺)의 석담연(釋曇延)의 성은 왕(王)씨이고, 포주(蒲州)
만천(萬泉) 사람이다. 대대로 세력 있는 집안으로 제(齊)나라, 주(周)나라에 내리 벼슬했다. 그 성질이 글을 좋아했으므로 고을과 나라에 이름이 났으며, 현묘한 뜻을 연구해 환히 알아 틀림이 없었다. 『열반대소(涅槃大疏)』를 지으려 했으나 범부의 생각에 걸릴까 두려워해 자나 깨나 정성껏 기도하면서 아름다운 징험을 얻기를 원했었다.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흰 옷을 입고 흰 말을 탔는데 그 말 꼬리가 땅에 끌렸다. 그리고 그는 경(經)의 뜻을 일러 주었다. 담연이 손을 뻗어 말갈기를 잡고 그와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반드시 마명(馬鳴)보살이 내게 이치의 실마리를 준 것이다. 말갈기를 잡은 것은 그 종지(宗旨)를 알았다는 것이니, 그 사실을 알아볼 만하구나.’
이런 징조를 얻었지만 그래도 이치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경소(經疏)를 가지고 진주(陳州)의 인수사(仁壽寺) 사리탑 앞에 가서 향을 피우고 맹세하였다.
‘담연은 범부의 도량으로 성인의 마음을 우러러 헤아려 전석(銓釋)을 이미 마쳐 자세한 것은 다른 책과 같습니다. 만일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데가 있사오면 밝은 영감을 보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만일 감응이 없으시면 맹세코 남에게 전해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열반경』 경전 모두가 광명을 발하여 밤새껏 징조를 나타내어 승속이 모두 경사라고 칭송하였다. 또 탑 속의 사리도 광명을 발하여 사흘 밤 사흘 낮으로 그 빛이 끊이지 않아 위로는 은하수를 밝히고 아래로는 산과 강을 비추어 온 고을 사람들이 그 광명을 바라보고 달려와서 모두 배알하였다. 이런 징조가 나타나자 모두 감복하고 그것을 전해 받았다. 임금과 신하의 덕이 중하였으므로 모처럼 이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수나라 개황(開皇) 8년(588) 8월 13일에 연흥사에서 목숨을 마치니 나이는 73세였다.
⑥수(隋)나라 사문 석혜원(釋慧遠)
수(隋)나라 서울 정영사(淨影寺)의 석혜원(釋慧遠)의 성은 계(季)씨이고, 돈황(燉煌) 사람이며, 뒤에 상당(上黨)의 고도(高都)에 살았다. 3장(藏)에 두루 통달하였고, 모든 학파[九流]를 환히 알았다. 천성이 명랑하고 행동이 온화하며 강도(講導)를 업으로 삼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귀의했다.
옛날 청화(淸化)에 있을 때부터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법을 듣는 것으로 의무를 삼았다. 개황(開皇) 7년(587)에 임금의 명령으로 혜원이 서울로 가자,
거위는 그 절의 처마 밑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슬피 울어 대중이 모두 그것을 가엾이 여겼다. 사람을 시켜 그를 데리고 서울 정영사에 가서 대문에 이르러 놓아 주었더니, 거위는 기뻐하여 소리를 치면서 먼 데 있는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여전히 강법을 들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며, 다만 법회의 종소리만 들으면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모두 강당에 들어갔고, 들어간 뒤에는 소리를 죽이고 엎드려 들었다. 그리고 스님들이 모두 흩어지면 그도 강당에서 나와 날개를 치며 울었다. 그러나 속인과 스님들이 함께하는 포살의 종소리가 나면 끝내 들어가 듣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혜원이 강설할 때는 법에 의해 가만히 듣다가도 중단하거나 다른 말이 있을 때는 곧 소리를 지르고 날개를 치며 강당을 나왔다. 그러므로 진실로 도는 사람에 의해 퍼진다는 것을 신령스런 새의 아름다운 경험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법을 체득하지 않고 법좌에 오르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이 말도 또한 일리가 있지만, 그저 일률적으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개황(開皇) 때에 정영사에서 죽었다.
⑦수나라 사문 석법언(釋法彦)
수나라 서경(西京) 진적도량(眞寂道場)의 석법언(釋法彦)의 성은 장(張)씨이고 치주(治州)에 우거(寓居)해 있으면서 큰 법을 일으킬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 총명은 멀리 떨쳐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아주 뛰어났었다. 3장(藏)에 두루 통달했으나 특히 『대론(大論)』의 아름다움을 전했으므로 두루 다니면서 법회를 열 때에는 아무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개황(開皇) 16년(596)에 임금님은 영을 내려 법언을 대론중주(大論衆主)로 삼아서 진적사(眞寂寺)에 머무르게 했다. 진장(鎭長)ㆍ인화(引化)ㆍ인수(仁壽)가 탑을 세울 때에도 명령하여 그 사리를 여주(汝州)로 보내었고, 4년에 또 명령하여 사리를 기주(沂州) 선응사(善應寺)로 보내었다. 탑을 세우려고 땅을 10여 자쯤 파자 금모래가 나와 그것을 일구어 순금으로 만드니 두 되쯤 되었고, 그 광채는 햇빛을 압도했다.
또 감응한 누런 소가 나타나 스스로 탑 앞에 와서 앞 무릎을 구부리고 두 번 절하고 섰다가 몸을 돌려 문제(文帝)에게 한 번 절하고 그림자를 따라 또 한 번 절했다. 사리를 돌함에 넣을 때는 3만여의 사람들이 다 하늘의 5색 구름을 보았는데, 길이가 10여 길이고 너비는 3, 4길이었다.
사방을 도는 흰 구름 모양은 마치 비단 같았으며, 탑 위 바로 공중에 와서는 오시(午時)에서 미시(未時)까지 있다가 비로소 사라졌다. 그 뒤에도 5색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왔는데, 그 모양은 이전의 것과 같았다.
또 감응한 검은 학 다섯 마리가 서북쪽에서 와서 탑 위를 네 번 돌고 갔다가 다시 왔다. 또 감응한 흰 학이 탑 위를 오랫동안 돌다가 갔다. 또 감응한 5색 뱀이 사리함 3자 밖을 돌면서 머리를 사리를 향하여 놀라게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여러 번 했다.
그리하여 자사(刺史) 정선과(鄭善果)는 왕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은 들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만물을 기르니 건상(乾象)이 그 능력을 나타내고, 땅에 순종하고 백성을 기르니 곤원(坤元)이 그 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도당(陶唐)이 몸을 다스려 게으르지 않으니 복기(伏氣)가 상서로움을 드러냈고, 하후(夏后)가 수토(水土)로 공을 이루니 현규(玄珪)가 석(錫)을 알렸으니, 비로소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는 그 영향(影響)인 신(神)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폐하(陛下)께서는 계획을 잡아 천자(天子)의 지위를 얻으시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시니, 천하에는 티끌이 없고 덕의 교화는 모두가 하나이며, 큰 광명을 머금어 자비는 끝이 없고 하늘과 부처가 굽어 보시어 이런 영화와 상서로움을 내리셨습니다. 탑의 터 여섯 군데에서 모두 신이한 모래를 얻으니, 그 광채가 서로 비추어 모두 금보배와 같습니다. 소가 예배하는 것은 태고에도 없던 일인데, 구름이 5색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보겠습니다. 또 감응한 뱀은 온갖 채색의 형상으로 탑 터에서 돌고, 학은 검고 흰 빛을 날려 하늘 끝에서 배회했습니다. 헌황(軒皇)의 큰 상서로움은 헛되이 옛 책에 전하고, 한제(漢帝)의 경사스런 징험은 한갓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 덕이 삼보보다 높고 도가 모든 임금보다 뛰어남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경사를 불러오고 신령스런 기적을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이에 크게 기뻐하여 별기(別記)를 지었다.
법언은 대업(大業) 3년(607)에 그 살던 절에서 입적하니, 나이는 60세였다.
⑧당(唐)나라 사문 석도종(釋道宗)
당(唐)나라 서경(西京) 승광사(勝光寺)의 석도종(釋道宗)의 성은 손(孫)씨이고, 내주(萊州) 즉묵(卽墨) 사람이다. 3장에 다 밝았으나 『대론(大論)』에 더욱 정통했다. 『대론』을 강설할 때마다 하늘에서 온갖 꽃이 내려와 강단을 돌다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땅에는 떨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가 다시 돌아갔다. 그래서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이런 상서를 보기를 바랐었다.
그는 무덕(武德) 6년(623)에 살던 절에서 입적하니, 나이는 71세였다.
⑨당(唐)나라 사문 석도혜(釋道慧)
당나라 포주(蒲州) 인수사(仁壽寺)의 석도혜(釋道慧)의 성은 장(張)씨이고, 하동(河東) 우향(虞鄕) 사람이다. 정신의 기운은 높고도 원대하며 도량은 허통하고 대범하며 상대의 기질을 잘 알아 다스리는 방편에 통달했다. 여러 경전에 두루했으나 특히 『열반(涅槃)』ㆍ『섭론(攝論)』을 정신이 깃드는 집으로 삼았다.
정관(貞觀) 2년(628) 겨울에 어떤 사람이 『열반경』의 강설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곧 죽을 것을 미리 알고 간곡히 청을 들어 주지 않다가 그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정중히 맞이하므로 그가 온 뜻을 피하지 못하고 곧 가서 법좌에 올랐다. 제목을 시작하다가 사부 대중에게 슬프게 말하였다.
“생각하면 성인이 떠나신 지 오래되어서 미묘한 말씀조차 끊어졌으니 어리석은 사람이 전하는 것은 사범(師範)이 될 수 없소. 다만 신심으로 귀의하여 스스로 알고 깨치시오. 지금 이 자리의 강설은 운하게(云何偈) 뒤에서 그치겠소. 다만 세계는 법대로 그러하여[法爾]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오. 시일이 이미 촉박했으니 각각 조심하시오.”
문장을 따라 강설해 나가다가 그 게송이 시작되자 갑자기 생각을 잊고 병도 없이 목숨을 마치니, 나이는 75세였다.
그 해 12월에 시신을 왕성(王城)으로 보내어 자오(子午) 골짜기의 남산 밑으로 가니, 온 고을 사람들이 마치 그 부모를 잃은 듯 모두 울부짖었다. 그날 밤에 눈이 내려 3, 4리를 덮었으므로 길을 쓸고 걸어가 산 고개에 시신을 두었다. 초저녁에 갑자기 이상한 꽃이 시신을 둘러싸고 그 주위에 솟아 나와 5백 송이 정도였는데, 길이는 2자 남짓하며, 곱게 피어난 것이
관동꽃 같았으나 모양이 전연 달랐다. 사람들은 놀라고 서러워하여 기쁨과 슬픔이 온 산을 시끄럽게 했다. 그 꽃을 꺾어 가지고 성내로 들어가 노인들에게 보이고 물병에 꽂아 두었더니, 이듬해 5월이 되어서도 시들지 않았다. 그의 전생 복의 힘이 아니라면 어찌 신불(神佛)의 아름다운 감응을 느낄 수 있겠는가.
진주(晋州)의 어떤 사람은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조금도 불법을 믿지 않았다. 어떤 이가 도혜의 이 감응을 그에게 전했다. 그는 곧 산으로 가서 찾아 보았으나 오직 빈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는 후회하고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살아서 깨우침을 받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아름다운 상서로움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저만 왜 감응이 없습니까? 반드시 신도(神道)가 있을 것이니, 원컨대 징조를 보여 주소서.’
이 말을 마치자 땅에서 기이한 꽃이 솟아나 다시 2자쯤 자랐다. 그는 이 아름다운 감응을 기뻐하면서 발심이 오래도록 견고하였다.[이상 여덟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에 나온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4469 법원주림(法苑珠林) 26권 (0) | 2024.07.08 |
---|---|
[적어보자] #4468 법원주림(法苑珠林) 25권 (2) | 2024.07.08 |
[적어보자] #4466 법원주림(法苑珠林) 23권 (0) | 2024.07.08 |
[적어보자] #4465 법원주림(法苑珠林) 22권 (0) | 2024.07.07 |
[적어보자] #4464 법원주림(法苑珠林) 21권 (0) | 2024.07.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