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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466 법원주림(法苑珠林) 23권

by Kay/케이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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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23

 

 

법원주림 제23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14. 참괴편(慚愧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3세(世)는 바퀴처럼 구르고 6도(道)는 돌고 돈다. 만일 어떤 한 조각 신명(神明)이 있다면 이 많은 곳을 거쳐가지1)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 생(生)을 받았다면 일정하게 정함이 없어서 지혜롭거나 어리석으며, 받은 성품이 같지 않아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선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이 있고 악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이다. 다만 범부의 법은 서로 미혹하여 후회함에 있으므로 만일 그것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도가 끊어지고 말 것이다. 이치로는 마땅히 밤낮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부지런히 닦으면, 부끄러움이 아득하게 비어 은밀하게 드러남을 사절할 것이다. 원래 무지(無智)는 부처님[至眞]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으로서 번뇌가 무성하고 결루(結漏)를 번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라건대 하나의 선(善)이나마 빌려서 온갖 결박을 없애 버리고 두터운 어두움을 쓸어내어 활연(豁然)히 청정하라.
그러므로 위대한 성인은 간절하게 모든 승속을 제어하여 응공(應供)이신 부처님께 깊이 참회하게 한다. 함부로 복밭[福田]이라는 이름을 받으면 우러러 사문에게 부끄럽고, 부질없이 걸사(乞士)라는 이름을 받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보살의 널리 제도하는 능력이 없고, 물러나서는 성문의 스스로를 조복하는 덕이 모자라므로, 스승님[師僧]을 욕되게 하고 단월을 저버리게 되니, 국왕의 땅에 감히 다니지 못하고 부모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일은 깨진 병과 같고 이치는 볶은 씨앗과 같으며, 또한 잘린 다라(多羅, tla)나무 같은데, 어찌 거듭 생겨날 수 있겠는가. 쪼개진 돌이 이미 흩어져 마침내 다시 합쳐질 수 없고,
귀신은 항상 발자취를 쓸어버리면서 “이 나쁜 놈아” 하고 외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꾸짖으시며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내 제자가 아니다. 세상의 복밭이 될 수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예배를 받을 수 있겠는가.”
가깝게는 사람과 천인의 길을 막고 멀게는 성인의 도를 방해하니, 이러한 죄의 더러움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출가인으로 있으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세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구제 받을 것인가. 그러므로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잘못하면 여러 겁이 흘러가 버린다. 복본(服本)을 다시 대하면 도리어 우본(遇本)과 같을 것이니, 지금 마땅히 부끄러움의 물로 의식의 번뇌2)를 씻어 버려야 한다. 발로참회(發露懺懷)의 칼을 들고 죄를 숨기고 덮는 그물을 찢어 우러러 과거의 현인들에게 부끄러워하고 나중에 오는 대덕[後德]들에게 깊이 부끄러워하며, 정성을 다해 참회하기를 미래가 다하도록 하라. 일체의 범부와 성인을 보거든 공경하여 모두 부처님과 같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제 마음을 억눌러서 빈천하기가 천인과 같다고 생각하며, 모든 허물에 있어서는 한 찰나에도 사사롭게 숨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선에 있어서는 항상 닦아 배우려는 뜻을 내어라. 이런 마음을 대충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함[慚愧]이라 한다.

(2) 인증부(引證部)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두 가지 착한 법[白法]이 있어서 중생들을 잘 구제하니, 첫째는 참(慚)이요 둘째는 괴(愧)이다. 참은 스스로 악을 짓지 않는 것이고, 괴는 남으로 하여금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참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는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참은 사람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는 하늘에 부끄러워하는 것이니, 이것을 참괴라고 한다. 참괴가 있기 때문에 부모와 사장(師長)과 일체 승속[道俗]과 사람과 비인(非人)을 잘 공경하고 또 삼보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모든 악업을 멸할 수 있다.”
또 『가연론(加延論)』에서 말하였다.
“【문】어떤 것을 무참(無慚)이라 이름하는가?
【답】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피해야 할 것을 피하지 않으며, 불선(不善)을 공경하고 불선과 왕래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참이라 한다.
【문】어떤 것을 무괴(無愧)라 하는가.
【답】부끄러워해야[羞]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쁜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무괴라고 한다. 또 불선과 왕래하는 것을 무참이라 하고, 악한 일에서 두려워함을 보지 않는 것을 무괴라고 한다. 이 앞의 이름을 반대로 뒤집었기
때문에 참괴라고 한다.”
또 『신바사론(新婆沙論)』에서는 말하였다.
“세간의 중생[有情]들은 무참(無慚)이라고 봐야 하는 것을 무괴(無愧)라고 하고, 무괴라고 봐야 하는 것을 무참이라고 한다. 이는 두 가지를 말하지만 그 실체는 하나다. 지금 본질[性]과 현상[相]의 차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저 의심하는 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앎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무참과 무괴라 하는가? 이른바 나와 남을 관찰하여 부끄러워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범하기를 생각하고, 범한 뒤에는 법대로 벗어나지 못하여 갖가지 싸움과 다툼을 좋아하면 이것을 무참과 무괴라고 이름한다.”
또 『유교경(遺敎經)』에서 말하였다.
“참괴는 쇠갈고리와 같아 사람의 비법(非法)을 잘 제지한다. 그러므로 비구는 마땅히 항상 참괴하여 잠깐이라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참괴를 떠난다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다. 참괴가 있는 사람은 선법(善法)이 있고, 참괴가 없는 사람은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또 『지도론』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 참괴할 줄 아는 사람
발우를 가지고 중생들에게 복을 짓는 이가
어떻게 제멋대로 욕망과 번뇌로
5정(情)에 빠져 잠길 것인가.


갑옷을 입고 칼과 무기를 들고도
도적을 보고는 달아나는구나.
이렇게 겁 많고 나약한 사람은
온 세상의 비웃음을 받는 것처럼.

저 비구도 걸사(乞士)가 되어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도
5정(情)의 말굽에 짓밟힌다면
남에게 웃음 사는 것도 이와 같아라.

또 마치 부귀를 누리는 사람이
좋은 옷으로 몸을 장엄하고도
의식을 빌리려고 돌아다니면
여러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처럼.

저 비구가 좋은 장식 없애 버리고
형상을 훼손하고 마음을 거두어들였으면서도
또다시 욕락을 구한다면
남에게 웃음 사는 것도 이와 같아라.

이미 5욕락을 버리고
없애 버려서 다시는 돌아보지 말 것을.
어째서 그것을 다시 얻으려 하는가.
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이와 같이 욕락을 탐하는 사람
본원을 보기를 알지 못하고.

【문】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어떻게 다른가?
【답】자유로운[自在]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면 뒤집어서 무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 두렵다고 보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한 자유로운 이에게 두려움이 없는 것도 무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 두렵다고 보지 않는 것을 무괴라 한다. 또한 공경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3) 또 번뇌를 싫어하여 천하게 여기지 않으면 무참이고, 악행을 싫어하여 천하게 여기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악을 짓고도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면 무참이고, 악을 짓고도 남을 돌아보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악을 짓고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악을 짓고도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악을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악을 짓고도 거만하면 무괴이다. 또 자기 혼자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남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만약 적은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만약 많은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만약 악취(惡趣)의 유정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만약 선취(善趣)의 유정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만약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지혜로운 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만약 비천한 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만약 존귀한 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재가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출가자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친히 가르치지 않은 궤범(軌範)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친히 가르친 궤범에 대해서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악행을 했을 때에 하늘에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참이고, 악행을 했을 때에 사람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모든 악의 원인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면 무참이고, 모든 악의 결과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괴이다. 또 탐욕 등의 류(流)는 무참이고, 우치 등의 류(流)는 무괴이니, 이상을 무참과 무괴의 차별이라 한다.
이런 두 가지 법은 오직 욕계의 번뇌[繫]이니 이것은 오직 불선(不善)으로서, 일체 불선의 심(心)과 심소(心所)에 다 두루 상응하는 것이니, 오직 자성(自性)만은 제외된다.”[앞의 악을 각각 뒤집으면 참괴라고 이름한다.]
또 『유가론』에서 말하였다.

또한 좋고 추한 것 분별 못하고
목마른 애욕에 미쳐 날뛰네.

참괴는 저 법을 존중함으로
일체 모든 것을 다 버려 버렸으니
어질고 지혜로운 이는 그것 친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하여 가까이하네.

모든 욕락을 구할 때는 괴로워하고
그것을 얻고 나면 두려움 많으며
그것을 잃을 때는 근심과 괴로움을 품으니
그 어느 것도 즐거운 것 없다네.
모든 욕락의 환란은 이와 같아서
어떻게 버려야만 할 것인가.
복된 선정의 즐거움 얻으면
그 어느 것에도 속지 않으리.

욕락에 집착하여 싫어할 줄 모르는데
무엇으로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
만일 부정관(不淨觀)을 얻기만 하면
이런 마음은 저절로 없어지리라.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계를 깨뜨리고 욕심이 많아 악법을 행하면 실은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자칭한다. 그것은 마치 여우[野干]가 사자 가죽을 쓴 것과 같고, 또 가짜 보배가 속이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또 『장엄론(莊嚴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미 잿빛 옷[壞色衣]을 입었다면
마땅히 선법을 닦아야만 하네.
그 옷은 훌륭한 적멸에 마땅하나니
언제나 그 마음 부드럽게 다스리기를 생각하라.

어찌하여 이런 옷 입었으면서
눈알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눈썹을 찌푸리고 또 뺨을 뿌루퉁하게
분노하는 모습을 나타내는가.

분노란 출가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머무를 곳이 아니고
미워함은 백정의 칼과 같으며
성냄이란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네.

경박하고 천한 집과
더럽고 추한 종자
추악한 말의 짝은
마음의 숲을 태우는 사나운 불꽃이라네.

악도의 업을 보여 주는
싸움과 원망은 해치는 문이고
나쁜 평판은 평상이 되니
이런 것들 악의 근본을 빨리 짓는다.

부디 스스로 잘 관찰하라.
출가한 이의 그 모습을.
마음과 모습이 걸맞으면
이것이 서로 걸맞음이 아니겠는가.

비구들의 떳떳한 법은
남에게 걸식하여 살아가는 것이니
어떻게 신자의 보시를 먹으면서도
그렇게 사나운 성을 내는가.

남의 음식이 내 뱃속에 있는데
어떻게 그 성을 내어서
저 신자들의 그 보시를
그저 헛되이 없애 버리려 하는가.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여
아홉 구멍에서 늘 더러운 것이 흐르고
더러운 냄새 아주 심하니
이것은 온갖 고통의 그릇이라네.

이 몸이란 지극히 더러운 것
부스럼과 종기의 무더기이니
만일 이것과 접촉할 때면
커다란 고뇌가 생기네.

이 몸은 저 화살의 과녁과 같아
과녁 있으면 곧 화살이 꽂히네.
몸이 있으면 온갖 괴로움 더하고
몸이 없으면 그러한 괴로움도 없다네.


모기와 등에와 파리 등 독충이
모두 다 사람을 쏘아 죽일 수 있으니
부디 부지런히 더욱더 정진하여서
이 몸을 아주 멀리 떠나 버리도록 해야만 하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것은 도인이나 속인이나 항상 마음을 먹고 바른 생각이 눈앞에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그만 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곧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부끄러움[慚愧]이 생기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치 저 4과(果)를 얻은 사람들이 비록 총보(總報)는 받지 못하더라도 별보(別報)는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앙굴마라(鴦崛魔羅)가 백인을 죽였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을 만나 아라한이 되었지만 방 안에 있을 때 지옥의 불이 털구멍으로부터 일어나 지독한 고통을 받은 것과 같다.”
하물며 외도와 범부로서 대치(對治)하지 못함이겠는가. 그들은 한 가지 업을 지음에 따라 반드시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악한 인연을 만나면 곧 잃기는 쉬운 것이니, 악은 많고 선은 적어 하루 동안에도 죄를 생각함은 백천 가지인데, 선한 생각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에서 말하였다.
“죄와 복은 서로 얽혀 있지만 그 도리는 분명하여 뒤에는 반드시 죄복의 과보를 받아 낱낱이 없어지지 않아서 한 가지 생각은 한 가지 몸을 받는다. 즉, 선한 생각은 천상이나 인간의 몸을 받고, 악한 생각은 3악도의 몸을 받는다. 백 가지 생각은 백 가지의 몸을 받고, 천 가지의 생각은 천 가지의 몸을 받는다. 하루 낮 하룻밤에 생사의 뿌리를 심어 나중에는 반드시 8억 5천만의 온갖 종류[雜類]의 몸을 받으므로 백년 동안에 심어 후세에 받는 몸은 그 수를 헤아리기 매우 어렵다. 혼신(魂神)이 심은 과보를 따라 받는 몸은 삼천대천의 국토에 두루하며, 그 몸의 뼈와 가죽과 털도 대천 국토의 땅에 두루하여 빈 곳이 없을 것이다.”
또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무수한 겁 이전부터
생사의 길을 오가면서
몸을 버리고 또 몸을 받아
태에 드는 법을 떠나지 않았네.


내가 거쳐 지내 온 것을 생각하여
다른 것 그만두고 한 가지만 말하지.
나는 오로지 새하얀 개의 몸을 받아
수억의 수미산처럼 내 뼈를 쌓아서

예리한 바늘로 땅에 꽂을 때
그 어디라도 내 몸 닿지 않는 곳 없었네.
하물며 여러 빛깔 개에 있어서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리.
그러므로 나는 내 마음 거두어
방일을 탐해 집착하지4) 않았네.

또 『제위경(提謂經)』에서 말하였다.
“마치 어떤 사람이 수미산 위에서 가는 실을 밑으로 내리고, 또 한 사람은 밑에서 바늘로 그 실을 받아 꿰려고 할 때 중간에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그 실에 불면 그 실을 바늘구멍에 꿰기는 매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운 것은 이보다 더하다.”
또 『보살처태경』에서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이 바다에 떠 있는 나무 구멍을
그래도 어느 때고 만날 수야 있겠지만
사람으로 한 번 목숨을 잃으면
억 겁 동안에도 이보다 다시 얻기 어렵네.

바다는 깊고도 드넓어서
330에 또 여섯인데
그 바다에 바늘 하나 던지고서
찾는다면 그래도 찾을 수야 있지만
한 번 잃은 사람의 목숨은
이보다도 더 얻기 어렵네.

또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어려움을 떠나기 어렵고
인간에 나기는 어려운데
이미 모든 어려움을 떠나 버렸다면
부디 언제나 정진해야만 하네.

나는 옛날에 들었다. 어떤 아이가, 경전에서 말한 눈먼 거북이 물에 떠 있는 나무 구멍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일부러 널빤지에 구멍을 뚫고서는 머리에 이고 가서 연못에 던졌다. 그리고 제가 그 연못에 들어가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면서 그 구멍에 머리를 넣으려 했다. 그러나 물이 널빤지를 떠돌리기 때문에 그 구멍에 맞출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몹시 짜증을 내었다.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움을 부처님께서는
큰 바다로 비유하셨다. 물에 뜬 나무 구멍은 적고 눈먼 거북은 눈이 안 보여 1백 년에 한 번 나오니, 실로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연못은 작고 널빤지의 구멍은 크며, 또 나는 두 눈이 있고, 하루에 1백 번을 고개를 넣는데도 그래도 맞추기 어려운데 하물며 저 눈먼 거북이 맞출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곧 게송을 외웠다.

거대한 바다는 지극히 드넓고
물에 뜬 나무 구멍은 또 작으며
백 년에 한 번만 나오는데
그것 만나기 매우 어렵네.

나는 지금 이 연못은 작고
물에 뜬 나무 구멍은 아주 크며
자주자주 내 머리 낸다고 하여도
나무 구멍을 만나기가 어렵네.

눈먼 거북이 뜬 나무를 만나
구멍에 맞추기 매우 어려운데
악도에서 다시 사람의 몸을
만나기 어려움도 또한 이와 같아라.
나는 지금에 사람 몸 만났으니
마땅히 방일하지 않으리니
항하의 모래알과 같은 모든 부처님을
일찍이 한 번도 만나뵙지 못하였구나.

오늘에야 비로소 듣게 되었네.
10력을 지니신 세존의 말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묘한 법을
나는 반드시 닦아 행하리.

만일 그것을 잘 닦아 익히면
구제하는 일 매우 클 것이니
남이 지어서가 아니라 내가 얻는 것
그러므로 스스로 정근해야 하리라.

만일 8난이 있는 곳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곳에서 떠날 수 있을까.
세간의 업을 쫓아다니면
저 악도에 떨어지리라.

나는 지금 그것을 피해서
3유(有)의 감옥을 벗어났으니
만일 이 감옥을 벗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탈을 얻을 수 있으랴.

축생 세계에서 몇 겁을 지내서
그것은 대단히 오래이고 길었었네.
지옥과 또 저 아귀 세계에서
어두움의 고뇌가 매우 깊었나니
내가 만약 지금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수 있으리.

험하고 어려운 저 악도에서
나는 지금에야 사람 몸 얻었다네.

괴로움의 한계를 다 벗어나지 못하고
3유(有)의 감옥을 떠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방편을 힘써 닦아서
3유의 감옥을 떠나야만 하리라.

나는 지금 출가하기를 구하나니
반드시 해탈을 얻게 하소서.”

또 『죄업보응경(罪業報應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물은 흘러서 언제까지나 가득 차지 않고
불은 왕성해도 오래 타지 않으며
해는 떴다가 잠깐 사이에 떨어지고
달은 둥글다가 다시 이그러지네.

그러나 부귀와 저 영화는
무상하기가 이보다도 훨씬 더하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사람의 몸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것이니, 잃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사람의 몸은 찰나찰나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니, 마치 돼지나 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이 수명을 보아라. 언제나 한량없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찰나찰나에 자꾸만 줄어들고 늘어남이 없는 것이니, 마치 사나운 물이 잠깐이라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고, 또한 아침 이슬의 기세가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죄수가 형장을 향해 걸음걸음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마야경(摩耶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백정[旃陀羅]이
소를 푸줏간으로 몰고 갈 때
걸음걸음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과 같지만
사람 목숨은 이보다 더 빠르다네.

위대한 성인이 이미 돌아가셨기에 체달함이 뚜렷하거나 밝지 못하여 비록 부분적으로 무생법인[無生]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3상(相)으로 옮겨서 흐르는 것인데, 하물며 범부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이치가 청정한 경지와 격차가 나겠는가. 선악이 한데 뒤섞여 밝고 분명하게 나뉘지 못한데, 어떻게 더러움에 얽매인 허물과 애욕에 물든 과실을 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출가하여 도에 들어갔다는 아름다운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곧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재가자[自衣]로 집에 있다는 허물을 듣는다고 해서 전혀 그 선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안으로 그 행을 닦는다면 출가의
아름다움과 같을 것이고, 만일 안으로 그 믿음에 어긋난다면 한갓 머리만 깎았을 뿐인 것이다. 재가자는 여러 권속이 있고 공사(公私)의 일에 분주하며, 살아가는 쓰임새가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인색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문의 청정한 행은 홀로 우뚝히 서서 다만 3의(衣)와 6물(物)만 필요하고 심지어는 백분의 일만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바깥으로부터의 인연만 막는다면 무슨 쌓아 둘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경률(經律)이 모두 꾸짖는 것으로서 성인의 가르침에 분명히 있는 것이다.
만약 법과 재물을 아까워해서 어리석고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지 않으면 지혜의 종자를 이루지 못해 성인의 태(胎)를 잃게 될 것이고, 나아가 조그만 죄에도 오히려 큰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고 조심하여 노소를 공경하고 스스로 뽐내어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큰 죄를 모두 다 범하면서 논밭과 집을 널리 축적하고 분수에 넘치게 저축하여 세속 일을 부지런히 경영하면 이것은 틀림없이 극히 악한 것이니 어찌 다 말할 것 있겠는가.
지금은 우선 중하(中下)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즉, 배움과 식견이 얕으면서도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하고 큰 교만을 일으켜 분수에 맞지 않는 자세로 일체를 업신여기고 천지를 싸잡으며, 윗어른[師長] 앞에서 다리 뻗고 걸터앉고 존귀한 사람 곁에서 큰 소리로 꾸짖는 이가 있지만, 도의 근본에 화합하고 공경하며 따르는 이를 스님[僧]이라 하는데, 이미 그 마음과 외형이 그것과 어긋나거늘 어찌 승보(僧寶)가 되겠는가.
혹 어떤 사람은 오로지 외전(外典)만을 읽으며 거문고와 바둑을 좋아해 빠지고 시서(詩書)를 읽고 외우면서 한갓 세월만 허비하는데, 불교[內敎]의 법의 약으로 그들을 구해 살리는 것이 급한 일이다. 문장의 오묘한 이치는 깊으며, 화려하게 수식된 말[詞華]은 그윽하고 드넓어 한 구절만 잘 알면 한량없는 뜻을 설명할 수 있다. 신구(新舊) 경론(經論)의 그 권축(卷軸)이 수천인데, 일찍이 한 구절의 이치도5) 연구하지 않으면서 외서(外書)의 바쁘지 않은 일만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운다. 만일 재가자들이 내가 무지하여 세상 경전을 배우지 않는다고 웃을까 두려워한다면, 속인들이 내게 불경의 뜻을 물어 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안에 있어 바깥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데도, 안에 있으면서 안의 것은 알지 못한다면 그 치욕은 더욱 심할 것이니, 이것은 실로 시대가 장차 말법(末法)이요, 사람의 운명이 더욱 촉박해지기 때문이다. 무상(無常)한데도 팔짱만 끼고
아침에 저녁의 일을 도모하지 않으니, 한 번 저승길에 들어가면 여러 겁을 지내도 벗어나기 어려울까 두려우며, 불법을 다시 만나기는 생각해도 그 길이 없다.
비록 경률(經律)에 있어서 그 한 부분쯤 외도를 배우는 것은 외도를 조복시키기 위함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먼저 불전[內典]을 잘 알고 겸해서 외전을 알게 하면 임기응변의 예리한 변설로 말만 했다 하면 경전에 관계될 것이요, 불전과 외전을 널리 연구해야 비로소 큰 스승이 될 만한 것이며, 경에서 말한 것처럼 외도를 조복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제 분수를 헤아리면 아무 일에도 능함이 없다. 그리하여 그 정신은 항상 어리석음에 덮여서 미련하며,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힘이 없는데 어떻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겠으며, 빛깔과 냄새도 통하지 못하는데 콩과 보리를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원컨대 가만히 스스로 물러앉아 반성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출가한 사람은 마땅히 지혜와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구할 것이며, 외도의 전적인 로가야(路伽耶)6) 등을 읽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항상 산이나 연못의 한적하고 고요한 방에 있으면서 선정을 닦고 예배하고 경을 외우며 삿됨을 끊고 바름을 나타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너희들이 숭상해야 할 것이다.’”
또 『숙가경(叔迦經)』에서 말하였다.
“숙가(叔迦) 바라문의 아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집에 있는 속인도 복덕을 잘 닦으면 그 선근이 출가한 사람보다 나을 수가 있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문제에 대해 나는 결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 출가자도 혹 선근을 닦지 않으면 그는 재가자보다 못할 것이고, 재가자도 선근을 잘 닦으면 그는 출가자보다 훌륭할 것이다.’”
또 『삼천위의(三千威儀)』에서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첫째는 좌선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갖추면 이 사람은 출가한 사람의 법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대로 행하지 못하면 그는 헛되게 살다가 헛되게 죽으며, 오직 죄를 받을 인(因)만이 있을 뿐이다.”
또 『백유경(百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불과 찬물을 쓸 일이 있어서 곧 불씨를 재 속에 묻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불 위에 두었다.
그 뒤에 불을 취하려 했으나 불은 다 꺼졌고 찬물을 취하려 했으나 물은 데워졌다. 그래서 불과 찬물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세간 사람은 도를 구하려고 불법에 출가하지만, 출가하고도 다시 처자의 5욕락을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공덕의 불을 잃고 아울러 계율의 물을 잃고 마는데, 욕심을 생각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성문 제자는 어리석어 계를 깨뜨리고 싸우기를 좋아하며 12부경(部經)을 독송하기를 버려 두고 갖가지 외도의 책들의 문장과 게송을 손으로 쓸 것이며, 온갖 부정한 물건을 받아 쌓아 두면서 이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전단향을 나무나 기왓장과 바꾸고 금을 놋쇠[鍮石]와 바꾸며, 은을 백랍(白鑞)과 바꾸고 비단을 베옷[氀褐]과 바꾸며, 감로를 독약과 바꾸는 것이다.”
또 『유교경(遺敎經)』에서 말하였다.
“낮에는 부지런히 마음으로 선법을 닦아 익혀 그 때를 잃지 말고, 초저녁과 새벽에도 또한 그렇게 하여 폐하지 말며, 한밤중에는 경전을 외움으로써 스스로 살아가라. 그리하여 잠 자는 인연으로 한평생을 헛되게 보내서 아무것도 얻음이 없게 하지 말아라. 이것에 의지해 도를 행하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와 나아가 보리를 얻을 것이며, 이 같은 행자는 사범(師範)이 될 수 있고 진실한 복밭[福田]으로서 신도의 보시를 소화시킬 만할 것이다.”
또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마치 사람이 해를 쳐다보면 그 눈이 밝고 깨끗하지 못한 것처럼, 외도의 서론(書論)을 생각하고 구할 때는 혜안(慧眼)을 깨끗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사람이 달을 쳐다보면 그 눈이 밝고 깨끗한 것처럼, 불법의 경론을 생각하고 구할 때는 혜안을 밝고 깨끗하게 한다. 만약 외도나 속서를 생각하고 구하면 원숭이를 때리면
오직 더러운 것만 나오는 것과 같고, 만약 불법을 생각하고 구하면 진금(眞金)을 단련할 때 단련하면 할수록 더욱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또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여래의 정경(正經)은 읽고 외우지도 않고서 세전(世典)의 문송(文頌)과 서소(書疏)를 읽고 외우면 죄를 범한다.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이론으로 사견(邪見)을 깨뜨리기 위하여서나 혹은 2분쯤 불경과 1분쯤의 외서(外書)를 보는 것이다. 왜냐 하면, 외전은 허망한 법이요 불법은 진실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세상 일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장으로 따져 본다면,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만약 한결같이 안의 것을 폐하고 밖의 것을 찾으면 죄를 얻는다. 비록 이치와 행을 알기 위해서라도 잠깐 익히면 되는 것이다. 외도를 조복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그것을 떠나 안의 업을 닦고 더욱 늘어나게 하기를 힘써야 하고, 만약 거기에 치우쳐 탐착하면 정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버려 두고 배우지 않고서 외도의 사론(邪論)과 세속의 경전들을 익힌다면, 이것은 중다범(衆多犯)을 범하고 염오기(染汚起)를 범한다고 이름한다. 만약 아주 총명한 사람으로서 빠르게 수학하여 부동지(不動智)를 얻은 뒤에 나날이 2분쯤 불법을 배우고 1분쯤 외전을 익힌다면 이것은 범함이 아니다. 만약 세전과 외도와 사교(邪敎)를 사랑하고 즐겨서 버리지 않거나 버리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중다범을 범하는 것이고 염오기를 범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읊노라.

겨울 여우는 풍성한 솜털을 다듬고
봄 누에는 가벼운 실을 자아내니
외형이 번잡하면 도리어 막힘이 되고
내심은 도리어 스스로를 속인다.

어린애는 배 두드리고 노래 부르며
한평생에 가장 젊은 소년 시절에
수레를 몰아 협객을 따르고
술을 따르며 요염한 계집을 희롱하도다.

다만 눈앞의 좋은 일만 생각하거니
어찌 후세의 슬픔을 알 건가.

두려워 삼가면서 한 번 부끄러워함으로써
사랑하는 그 정을 영구히 하직하네.

원컨대 진실과 허망의 근본을 잘 분별하여
더러움과 깨끗함이 스스로 갈라지기를
다섯 가지 번뇌에 덮여 있음을 부끄러워하지만
어찌 그 4의(依)와 같음을 알 것인가.

15. 장도편(獎導篇)[여기에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생신부(生信部)
업인부(業因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귀천은 항상하지 않고 부귀는 정해짐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물과 불이 서로 번갈아 오고 추위와 더위가 바꿔 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큰 부자를 보면 방은 따뜻하고 옷은 풍부하며, 사람이 넉넉하여 수고롭게 구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저절로 생긴다. 또 빈궁한 사람을 보면 굶주리고 고달프며 애써 구하면서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잠들어 몸은 허약하고 초췌해지고 심정은 피로하고 괴로워진다. 비록 조금 얻은 것이 있더라도 백방으로 다 흩어지고 마는데, 종일토록 넉넉하기를 원하지만 한 번도 잠깐이나마 있어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은 다 이 고통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시하기를 권장하고 힘을 다해 복을 닦으라 하는 것이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갖옷을 입고 패물을 차되 곱고 빛나며 향기롭고 정갈하며, 봄과 가을의 절기를 따라 춥고 따뜻하며 서늘하고 온화하면 사계절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그 따라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한 자의 베도 완전하지 못하고 한 길[丈]의 비단은 다 낡고 떨어져 시꺼멓게 때가 묻고 기름때에 절어 냄새가 나고,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모시옷을 모르고, 얼음과 눈 속에서도 따뜻한 명주옷을 모르며, 심지어는 그 목도 가리지 못하니, 남녀가 발가벗고 섞이는 것은7) 창피스러울 뿐만 아니라 실로 부끄러운 것인데, 이런 고통을 당한다면 어찌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권장하여 그에게 복을 닦게 하려는 것이니, 마땅히 의복이나 주택 등을 보시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여러 사람에게는 다 있는데 내게만 홀로 없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자꾸 복을 닦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맛있고도 진귀한 요리도 모두 겸하여 상을 붙이고 또 포개며 자리를 펴서 기름진 맛에 향기까지 빠짐없이 넘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현미밥도 충족하지 못하고, 명아주나 콩잎 국도 항상 모자라며, 소금과 매실은 일찍부터 두 가지가 다 없고, 고기와 채소는 두 가지가 없는 지 이미 오래되었다. 게다가 날마다 미음과 죽을 잇따라 먹을 때도 거기에 수과(水菓)를 섞고 초채(草菜)를 넣으니, 노랗게 쇠약하고 몹시 곤궁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다. 만약 이런 고통을 당한다면 어찌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권장하여 그에게 복을 닦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음식과 음료수를 보시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여러 사람들은 모두 풍족한데 나만 홀로 곤궁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자꾸 복을 닦아야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화로운 자리에 출세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고 자유자재하게 노닌다. 다닐 때는 천인과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머무를 때는 귀신들도 공경하고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비루하고 하천하여 사람들이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아서 살아도 그 삶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그 죽음을 알지 못하며, 시궁창 도랑 곁에서 곤란을 당하고 진흙탕 속에서 앉고 눕는다. 비록 꾸짖는 소리는 있으나 도리어 두들겨 맞는 고통이 닥치며, 귀신만이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까지도 독기를 더한다. 만약 이런 고통을 당한다면 어찌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권장하여 그에게 복을 닦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교만을 버리고 겸손과 공경을 받들어 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은 항상 귀한데 나만 홀로 천해서 되겠는가. 그러므로 용맹스럽게 복을 자꾸 닦아야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얼굴이 단정하고 말소리는 기운이 차서 항상 남을 널리 이롭게 하려 하며, 인자하고 널리 사랑하여 그 말이 남을 해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얼굴이 추하고 말이 거칠고 사나우며 오직 제 이익만 알고 남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남은 인욕하기 때문에 훌륭하게 되고, 자신은 성을 많이 내기 때문에 악을 불러들인다. 만약 이런 고통을 당한다면 어찌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권장하여 그에게
복을 닦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분노를 없애고 인욕을 봉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여러 사람을 항상 훌륭한 자리에 있게 하고, 나만 영구히 깨끗한 인연에서 떨어져 있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복을 닦아야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의지의 힘이 굳세고 병이 적어서 항상 도를 수행해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몸이 허약하여 병이 많으며 기력이 쇠약하고 나약해 조금만 움직여도 곧 피로가 더하며 자거나 앉아도 편하지 않다. 이런 악을 보면 진실로 멀리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장하여 복을 닦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의약을 보시하여 항상 남을 구제해야만 한다. 어찌 여러 사람들은 다 병이 없는데 나만 오래도록 병에 빠져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용맹스럽게 복을 자꾸 닦아야 하느니라.
무릇 이런 일은 진실로 권해야만 하는 것이니, 만일 서로 권하지 않는다면 공부하는 사람이 부지런하지 않을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집에 사는 것은 감옥에 있는 것과 같고 처자는 형틀과 사슬 같으며, 재물은 무거운 짐과 같고 친척은 원수와도 같다. 그런데 하루[一日一夜] 동안 청정한 계를 지니고 여섯 때에 도를 행하며, 아울러 해마다의 3장재(長齋)와 달마다의 6재를 지내며, 채소로 밥맛을 절제하고 몸과 입과 마음의 3업을 바깥 인연으로 치달리지 않게 단속하고, 오로지 세속 벗어나기를 숭상하고 부처님의 법을 높이 사모하며,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결함이 없고, 앉고 누워도 실수가 없으며, 밤에는 밝은 모양에 마음을 두고 낮에는 깨끗한 법을 생각하며, 사문을 깊이 공경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속을 이롭게 하라. 만약 이렇게 하면 비록 가정에 머물러 있더라도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불법이 다하려고 할 때 재가자[白衣]가 법을 보호하면, 선을 닦아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공중에서 눈이 떨어지는 것과 같고, 비구가 계율을 어기어 악도에 빠지는 것은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니, 고통 속에서 복을 닦으면 그 복이 가장 크고, 복 속에서 죄를 지으면 그 죄가 가볍지 않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들어가면 즐거움 가운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에서 괴로움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괴로움 가운데 괴로움을 안다.”
이 말로 증험할 수 있으니 바라건대 반성하기 바란다.
또 『법구경(法句經)』에서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음욕보다 더 뜨거운 것 없고
성냄보다 더 독한 것 없으며
몸보다 더 괴로운 것 없고
적멸(寂滅)보다 더 즐거운 것 없다.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아주 오래전 무수한 세상 이전에 5통(通) 비구가 있었는데 이름을 정진력(精進力)이라고 했다. 그는 산 속 나무 밑 한적한 곳에서 도를 구하고 있었다. 그 때 네 마리 짐승들이 그의 곁[左右]에서 항상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니, 첫째는 비둘기였고, 둘째는 까마귀였으며, 셋째는 독사였고, 넷째는 사슴이었다. 이 네 마리 짐승들은 낮에는 다니면서 먹이를 구하고 밤이면 돌아와 잤다. 그들은 어느 날 밤에 서로 이야기했다.
≺이 세간에서 무엇이 제일 괴로운가?≻
까마귀가 말했다.
≺굶주리고 목마름이 제일 큰 고통이다.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는 몸이 나른하고 눈이 침침해지며 정신이 가물거린다. 몸이 그물에 걸리고 창과 칼날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들의 몸이 상하는 것은 모두 다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주리고 목마름이 가장 괴로운 것이다.≻
비둘기가 말하였다.
≺음욕이 가장 괴롭다. 색욕이 솟구쳐 일어날 때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망치고 목숨을 잃는 것은 모두 다 그 때문이다.≻
독사가 말하였다.
≺분노가 가장 괴로운 것이다. 독한 마음이 한 번 일어나면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고, 남을 죽이고 또 자신을 죽인다.≻
사슴이 말하였다.
≺두려움이 제일 괴로운 것이다. 나는 숲 속에 있을 때 마음이 늘 불안하다. 사냥꾼과 호랑이 등을 두려워하여 무슨 소리만 나는 것 같아도 곧 달아나다가 구렁텅이에 빠진다. 모자가 헤어지고 간담이 벌떡벌떡 뛴다. 그러므로 말하는데 두려움이 가장 괴로운 것이다.≻
비구는 이들의 말을 듣고 곧 말하였다.
≺너희들의 이야기는 다 곁가지일 뿐이고 고통의 뿌리는 캐내지 못한 것이다. 천하의 괴로움은 몸이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몸은 괴로움의 그릇으로서 근심과 두려움이 한량없다. 그 때문에 나는 속세를 버리고 도를 배워서
마음속 번뇌를 없애고 생각을 끊어 4대(大)를 탐하지 않고, 고통의 근원을 끊으려고 열반에 뜻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큰 고통의 근본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몸보다 더 큰 걱정거리는 없다.”

(3) 생신부(生信部)
『나선비구문불경(那先比丘問佛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미란왕(彌蘭王)은 아라한인 나선(那先) 비구에게 물었다.
‘사람이 세상에 있을 때 악을 지어 1백 세에 이르러 죽으려 할 때에 염불을 하면 죽은 뒤에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 한 번 살생하면 죽어서는 지옥[泥梨]에 들어간다고도 합니다만 나는 이 말도 믿지 않습니다.’
나선 비구가 왕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조그만 돌을 물 위에 놓으면 그 돌은 뜨겠습니까, 가라앉겠습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그 돌은 가라앉습니다.’
나선이 말하였다.
‘만약 큰 돌 1백 개를 배에 실어 놓으면 그 배가 가라앉겠습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가라앉지 않습니다.’
나선이 말하였다.
‘배 안의 1백 개의 큰 돌은 배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본래 악이 있더라도 한때에 염불하면 그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 곧 천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믿지 않습니까? 그 조그만 돌이 가라앉은 것은 마치 사람이 악을 짓고도 불경을 알지 못하여 죽은 뒤에 곧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이 말을 믿지 않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훌륭하고 휼륭합니다.’
나선 비구가 말하였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죽어 한 사람은 제7 범천(梵天)에 태어나고 한 사람은 계빈국(罽賓國)에 태어났다면, 이 두 사람이 그 멀고 가까운 것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죽어서는 한꺼번에 함께 간 것과 같습니다. 또 만약 한 쌍의 새가 한 마리는 높은 나무에 앉고 한 마리는 낮은 나무에 앉는다면, 이 두 마리 새가 한꺼번에 날아서 그 그림자가 함께 땅에 비친 것과 같습니다.’
나선 비구는 이어 말하였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악을 지어서 받는 재앙은 크고, 지혜로운 사람이 악을 지었더라도 받는 재앙은 작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불에 달궈진
쇠가 땅에 있을 때 한 사람은 그것이 불에 달궈진 쇠인 줄 알지만 한 사람은 알지 못해서 두 사람이 함께 그것을 가질 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손이 많이 데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손이 적게 데이는 것처럼, 악을 지음도 이와 같아서 어리석은 사람은 참회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받는 재앙이 크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짓고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날마다 참회하기 때문에 그 받는 재앙이 적은 것입니다.’”
또 『사품학경(四品學經)』에서 말하였다.
“범속(凡俗)의 사람은 어떤 때에 축생보다 못하고 축생이 도리어 사람보다 나은 경우가 있다. 왜냐 하면 사람이 죄 짓기를 그치지 않다가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가고, 지옥의 죄가 끝나면 처음에는 아귀가 되며, 아귀의 죄가 끝나면 다시 축생이 되고, 축생의 죄가 끝나면 다시 사람이 된다. 그것은 축생의 죄를 마치면 곧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짓고 3존(尊)의 가르침을 받들어 3악도를 오래도록 떠나고 천상과 인간의 복을 받은 뒤에는 오래도록 해탈해야만 할 것이다.”
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에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는 빈궁하여 보시하기 어려운 것이고, 둘째는 부귀하여 도를 배우기 어려운 것이며, 셋째는 수명을 늘려 죽지 않기 어려운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경전을 보기 어려운 것이며, 다섯째는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또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세상에는 열여덟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부처님 세상을 만났더라도 사람 되기 어려운 것이며, 세 번째는 바로 사람이 되었더라도 중국(中國)에 태어나기 어려운 것이고, 네 번째는 바로 중국에 태어났더라도 좋은 가문에 태어나기 어려운 것이며, 다섯 번째는 바로 좋은 가문에 태어나더라도 4지(支) 6정(情)을 완전히 갖추기 어려운 것이고, 여섯 번째는 바로 4지 6정을 완전히 갖추었더라도 재산을 얻기 어려운 것이며, 일곱 번째는 바로 재산은 얻었더라도 선지식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여덟 번째는 바로 선지식을 만났더라도 지혜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며, 아홉 번째는 바로
지혜를 갖추었더라도 착한 마음을 갖추기 어려운 것이고, 열 번째는 바로 착한 마음을 얻더라도 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열한 번째는 바로 보시를 잘 하더라도 어질고 착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얻기 어려운 것이고, 열두 번째는 바로 어질고 착한 이를 얻고 덕이 있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가 있는 곳까지 가기 어려운 것이며, 열세 번째는 바로 그가 있는 곳까지 가더라도 적당함을 얻기 어려운 것이고, 열네 번째는 바로 적당함을 얻더라도 설법을 듣기 어려운 것이며, 열다섯 번째는 바로 설법을 듣더라도 올바로 아는 지혜를 얻기 어려운 것이고, 열여섯 번째는 바로 알더라도 심오한 경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며, 열일곱 번째는 바로 심오한 경전을 받아들였더라도 그 말한 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것이고, 열여덟 번째는 바로 심오한 경전을 받아들이고 그 말한 대로 수행하더라도 성과(聖果)를 증득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것을 열여덟 가지의 어려움이라고 한다.”

(4) 업인부(業因部)
『불설태자쇄호경(佛說太子刷護經)』에서 말하였다.
“아사세왕(阿闍世王)의 태자 쇄호(刷護)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단정한 얼굴을 얻었으며, 또 무슨 인연으로 여인의 배에 들어가지 않고 연꽃 속에서 화생(化生)하였으며, 또 무슨 인연으로 전생의 일을 알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욕을 잘하기 때문에 그 얼굴이 아름답고, 음탕하지 않기 때문에 화생할 수 있으며, 태어난 지 7일 만에 전생의 무수한 일을 알게 된다.’
‘어떤 인연으로 몸에 32상(相)이 있고, 무슨 인연으로 80종호(種好)가 있으며, 어떤 인연으로 부처님의 몸을 보는 사람이 싫증을 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본래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갖가지 온갖 물건을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부모ㆍ스승ㆍ인민들에게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32상을 얻었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시방의 곤충 무리들을 갓난아이처럼 보아 모두 다 제도하려 하였기 때문에 80종호를 얻었으며, 원수를 부모처럼 보아 평등한 마음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보는 사람이 싫증을 내지 않는다.’
‘또 어떤 인연으로 심오한 경전의 지혜와 다라니행(陀羅尼行)을 알았고, 또 어떤 인연으로 삼매8)와 선정을 알아 마음의 편안[安隱]을 얻었으며, 또 어떤 인연으로 부처님께서 선(善)을 말씀하시면 그것을 듣는 사람이 모두 기쁘게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기꺼이 경전을 베껴 쓰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외우고 배우며 물었기 때문에 심오한 경전의 지혜와 다라니행을 얻었으며, 또 늘 온 마음을 기울여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삼매를 얻어 편안하며, 하는 말이 아주 정성스럽기 때문에 그 말하는 사람은 모두 믿음직하고, 말을 듣는 사람도 기뻐한다.’
‘또 어떤 인연으로 나쁜 곳에 태어나지 않고 또 어떤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나며, 또 어떤 인연으로 애욕을 탐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세세생생토록 불법과 스님들을 믿었기 때문에 여덟 가지 나쁜 곳에 태어나지 않고, 계를 지켜 빠뜨림이 없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며, 경전의 가르침에 본래 공(空)함을 알았기 때문에 탐욕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인연으로 보살은 그 몸과 입과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하는 것이 다 청정하고, 또 어떤 인연으로 마군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며, 또 어떤 인연으로 사람들이 감히 삼보를 비방하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삼보를 기꺼이 좋아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얻었고, 정근하여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마군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였으며, 하는 일이 모두 아주 정성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삼보를 비방하지 못한다.’
‘또 어떤 인연으로 보살은 좋고 높은 소리를 얻어 범천의 소리와 같고,
또 어떤 인연으로 여덟 종류의 음성을 가지며, 또 어떤 인연으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모두 다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세세생생토록 아주 성실하여 속이지 않았기 때문에 좋고 높은 소리를 얻어 범천의 소리와 같았고, 세세생생토록 욕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덟 종류의 음성을 얻었으며, 세세생생토록 이간질하는 말과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을 모두 다 잘 안다.’
‘또 어떤 인연으로 수명이 길고, 또 어떤 인연으로 몸에 병이 없으며, 또 어떤 인연으로 가족이 화목하여 헤어지지 않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살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 수명이 길고, 칼이나 막대기 등으로사람을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후생에 사람이 되어 병이 없으며, 싸우는 이를 보면 그들을 화해시켜 기쁘게 해주었기 때문에 후생에 사람이 되어 가족과 헤어지지 않게 한다.’
‘또 어떤 인연으로 재물이 흩어지지 않게 되고, 또 어떤 인연으로 도적을 맞지 않으며, 또 무슨 인연으로 존귀한 자리를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하고 즐거우며, 기쁘게 보시하여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물을 잃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질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귀한 자리를 얻게 된다.’
‘또 어떤 인연으로 천안을 얻어 환하게 보고, 또 어떤 인연으로 천이(天耳)를 얻어 환하게 들으며, 또 어떤 인연으로 세간의 죽고 사는 일을 압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뜻으로 등불을 밝혀 부처님 앞에 공양하였기 때문에 천안을 얻어 환하게 보고, 부처님과 절 앞에서 기꺼이 음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에 천이를 얻어 환하게 들으며, 기쁘게 선정을 했기 때문에
세간의 죽고 사는 변화를 안다.’
‘또 어떤 인연으로 4신족(神足)으로 날아다니고, 또 어떤 인연으로 전생의 무수한 겁 동안의 일을 알며, 또 어떤 인연으로 3불신(佛身)을 얻어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십니까?’
부처님께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수레와 말과 배 등을 보시기를 즐겨 하여 삼보와 사람들에게 드렸기 때문에 4신족으로 날아다니고, 항상 모든 부처님의 삼매를 오로지 생각하고 기쁘게 사람들을 교화했기 때문에 전생의 무수한 겁 동안의 일을 기억하며, 보살이 불퇴전[阿惟越致]의 도를 얻었기 때문에 생사의 뿌리를 끊고 불도를 얻은 뒤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게송으로 읊노라.

망망하고 거친 우주에
꿈틀거리면서 밝음을 몰라
괴롭게 살면서 즐겁다고 하고
힘쓰지 않고 권하지도 않네.

그 이치를 따르지 않고
헛되이 망상을 전하며
밖으로는 망상의 경계를 따르고
안으로는 마음의 밝음을 어기네.

사랑으로 달래어 미혹을 되돌리고
정성을 다해 밝음을 열며
신령스럽게 통해서 빛을 토하고
가만히 오묘한 메아리로 돕네.

마음으로 올바른 깨달음에 귀의하면
깨달음의 나루를 건네서 복을 상주어
그들을 어루만져 깨닫게 함이 있으면
그 공은 먼 과거를 뛰어넘으리라.”

감응연(感應緣)[간략히 세 가지 증험만 인용한다.]

진(晋)나라 축장서(竺長舒)
송(宋)나라 형회명(邢懷明)
송나라 왕숙달(王叔達)

①진(晋)나라 축장서(竺長舒)
진(晋)나라의 축장서(竺長舒)는 그 선조가 서역(西域) 사람으로 대대로 재물이 많아 모두 부자였다. 진나라 원강(元康) 때에 축거(竺居)가 낙양(雒陽)으로 이사해 왔다. 장서는 지성으로 불법을 받들었고, 더욱 『관세음경(觀世音經)』 외우기를 좋아했다.

그 뒤에 이웃집에서 불이 났는데, 장서의 집은 모두 초가이고 또 곧바로 바람을 향해 있었으므로 그는 생각하였다.
‘만일 불길이 가까이 닥쳐 오면 비록 물건들을 끄집어 낸다 하더라도 성한 것이 얼마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에게 명령했으나 막을 물건도 없었거니와 또 물을 길어다 끄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오직 지심으로 『관음경』을 외웠다. 조금 뒤에는 그 이웃집이 불탔는데, 장서의 집과는 울타리 하나 사이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저절로 방향이 바뀌어 불이 집 옆에서 저절로 꺼졌다. 그 때에 모두들 신령스럽다고 했다.
그 마을에 경박하고 심술궂은 소년 4, 5명이 모두 헐뜯고 비웃으면서 말하였다.
“바람이 어쩌다가 저절로 돌았지, 이 무슨 신령스럽다 하느냐. 맑은 날 저녁을 기다려 이 집에 불을 놓을 것이니, 으레 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뒤에 날이 몹시 가물고 또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이 소년들은 몰래 횃불을 묶어 그 집 위에 던졌는데, 세 번을 던졌으나 세 번 다 꺼졌다. 이에 그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제각기 도망쳐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새벽에 그들은 모두 장서 집으로 가서 어제의 일을 다 이야기하고는 이마를 조아려 사과했다. 장서는 답하였다.
“나도 신이 없는 줄 안다.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불렀으니 그 위령(威靈)이 도운 것일 것이다. 그대들도 다만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지성으로 믿으면 될 것이다.”
그 뒤로 그 이웃과 고을 사람들은 다 그를 공경하고 이상히 여겼다.

②송(宋)나라 형회명(邢懷明)
송(宋)나라의 형회명(邢懷明)은 하간(河間) 사람이다. 송나라 대장군(大將軍)으로 참군(參軍)하여 일찍이 남군(南郡)의 태수(太守)인 주순(朱循)을 따라 북방을 치러 갔지만, 모두 패하기만 했다. 그 때에 틈을 엿보아 길을 찾아 돌아올 때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있었다. 3일이 지났지만 그래도 적군이 쫓아와 붙잡을까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비가 내릴 듯 구름이 어둡게 깔렸는데 새벽이 되어 보냈던 사람들이 갑자기 와서 놀라면서 말하였다.
“멀리서 아주 환한 불빛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는데, 여기 오자마자 도로 어두워지니 무슨 까닭입니까?”
주순 등은 놀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회명은 전부터 불법을 받들어 왔다. 싸움터에 나온 뒤로는
늘 『관세음경』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쉼없이 읽었는데, 그 날 저녁에도 바로 가만히 외웠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것은 『관세음경』의 신력이라 생각했다. 그 뒤로는 모두 항상 마음으로 기도하고 드디어 전쟁터에서 벗어나 서울로 돌아왔다.
원가(元嘉) 17년에 어떤 사문이 회명에게 와서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보니 이 마을과 당신 집에 특히 피 기운[血氣]이 있습니다. 여기서 피해 옮겨 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곧 떠났다. 회명이 쫓아가 보았으나 그는 문을 나서자 마자 곧 사라져 버렸다. 회명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20일이 지나 이웃집의 장경수(張景秀)가 그 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을 죽였다. 회명은 그것이 피 기운의 징조라 생각하고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 때 유빈(劉斌)과 유경문(劉敬文)이 대문을 나란히 하여 한 마을에 같이 살았는데 그 해에 그들이 모두 유담(劉湛)의 무리라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한다.

③송나라 왕숙달(王叔達)
송나라 왕구(王球)의 자는 숙달(叔達)이고 태원(太原) 사람이다. 배릉(涪陵)의 태수(太守)가 되었다가 원가(元嘉) 9년에 그 고을을 빼앗긴 죄로 감옥에 갇히어 수갑을 찼는데 자물쇠가 매우 견고했다.
숙달은 전부터 정진해 왔는데,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되어서는 정성이 더욱 지극했다. 감옥에 갇힌 1백여 명이 모두 굶주렸으므로 숙달은 매번 밥 때마다 자기 몫을 모두 나누어주었다. 날마다 재계를 지키고는 지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했다. 어느 날 밤 꿈에 그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어떤 사문이 경전 한 권을 주었다. 그 제목에 광명안행품(光明案行品)이라 되어 있었다. 아울러 여러 보살의 이름이 있었다. 숙달은 그것을 펴 읽어보았다. 첫 번째 보살의 이름은 잊어버렸고, 두 번째는 관세음이었으며, 세 번째는 대세지(大勢至)였다. 또 한 수레바퀴를 보았다. 그 사문은 말하였다.
“이것은 5도(道)의 수레바퀴입니다.”
그가 꿈을 깨자 수갑이 모두 풀렸다. 그는 그것이 관세음의 신력임을 알고 더욱 정진하여 이로 인해 자물쇠로 수갑을 열고 사흘이 지나 용서를 받아 풀려났다.[이상 세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16. 설청편(說廳篇) ①[여기에 8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의식부(儀式部)
간중부(簡衆部) 점돈부(漸頓部) 법시부(法施部)
보은부(報恩部) 이익부(利益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스승과 제자간의 의리가 귀중함에는 혜학(慧學)이 제일 낫고, 올바른 방편으로 닦음에는 많이 들음[多聞]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마명(馬鳴)은 장차 끊어지려는 기강을 떨쳤고, 용수(龍樹)는 크고 작은 변설을 일으켰으니, 슬기로운 발자취가 밝게 비치고, 맑은 이론[淸論]이 아름답고 뛰어났다. 이것은 실로 명수(名數)를 아울러 거느려 묵은 의심을 눈 녹이듯이 씻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고도 말해 주지 않음은 석가모니부처님[尼父]께서 근심하신 것이고, 이치를 깨닫지 못함은 석존(釋尊)께서 경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법을 공양하는 것이 모든 공양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
그러므로 외서(外書)에서는 말하였다.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밑천이다. 말을 듣고 틀림이 없으면 이치가 정부(情腑)를 뛰어넘고, 들음과 말함이 종지를 어기면 조금도 통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 상(象)이 없으면 6효(爻)가 떨어지고, 한 말에 실수가 있으면 여러 겁 동안 재앙을 받는다. 그러므로 법을 전하기가 쉽지 않고, 받아 들음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성인이 떠나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미묘한 말씀이 차츰 어두워져감으로써 한 말씀과 한 들음도 실로 행하기 어려운 것이니, 명예와 이익에 마음을 두면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중론(中論)』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실한 법과 그것을 말하는 이와
또 듣는 사람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같이 남과 죽음은
한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네.

또 『십지론(十地論)』에서 말하였다.
“말하고 듣는 두 사람이 법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각각 두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평등하게 말하지 않는 허물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허물이다.”

그러므로 『대집경(大集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일 모든 중생들 속에 법의 그릇될 이가 없으면
여래께서는 저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捨心] 닦고
큰 방편 베풀고 오는 때를 기다려
저들로 하여금 참으로 해탈을 얻게 하시네.

『대장엄론(大莊嚴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들음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데
듣지 못하더라도 헐뜯지 말라.
한량없는 다른 듣지 못한 이들
이들을 비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음의 업을 짓는 것이네.

『보성론(寶性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어리석음과 아만으로
조그만 법을 즐겨 행하고
참법과 또 법사를 비방하면
모든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는다네.

밖으로 위의 있는 모양 나타내면서
여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법과 또 법사를 비방하면
모든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는다네.

지금 처음으로 배우는 출가와 재가[黑白]의 어린이들을 보면 출발부터 미혹하여 글과 뜻에서 충분하다는 생각을 일으켜 스스로 뽐내고 남을 업신여겨 더욱 남에게 멸시를 더한다.
그러므로 『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글을 따라 뜻을 취하는 것에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바른 믿음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용맹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들을 속이는 것이고, 넷째는 법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다섯째는 법을 비방하는 것이다. 설법하는 사람도 오히려 제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데 하물며 듣는 사람이 믿음을 잘 일으킬 수 있겠는가. 만일 깨끗한 마음으로 설법하면 비록 그것이 생사라 하더라도 열반으로 변할 것이고, 만일 더러운 마음으로 설법하면 비록 그것이 열반이라 하더라도 생사로 변할 것이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대승(大乘)을 감로(甘露)라고 하지만, 또한 독약이라고도 이름한다. 잘 소화하면 곧 감로가 되고, 소화하지 못하면 곧 독약이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독약을 우유에 넣으면 곧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보성론(寶性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아는 것 없고 선지식이 없으면
나쁜 벗이 바른 행을 해친다.
만일 거미가 우유에 떨어지면
이 우유는 곧 독약이 된다.

또 『십륜경(十輪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찰제리와 전다라 등으로서 어떤 이가 불법[我法]에 의지해 출가하여 혹 성문(聲聞)이나 벽지불, 내지 대승을 설법하는 법사가 되더라도 정법을 비방하고 욕하고 속이며, 법사를 힐난하고 괴롭힌다면, 이 인연으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불법에 의지해 출가하여서도 자주 성을 내어 내가 말한 법을 욕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고, 탑과 절과 승방 등을 부수고 비구를 죽인다면, 전에 닦은 모든 선근이 다 없어지며,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는 사지가 다 불에 타는 듯 아프고, 그 혀는 잡아 묶은 것 같아 여러 날 동안 말하지 못하다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3) 의식부(儀式部)
『삼천위의(三千威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가 독경함에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먼저 부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법(經法)에 예배하고 법좌에 올라야 하는 것이며, 셋째는 먼저 한 발로 아승제(阿僧提)를 밟고 올라가 바로 앉아야 하는 것이고, 넷째는 윗자리를 향해야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먼저 손으로 자리를 짚고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자리에 앉은 뒤에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법의(法衣)를 바르게 하여 편히 앉아야 하고, 둘째는 건추(揵椎) 소리가 그치면 먼저 게송으로 찬탄해야 하며, 셋째는 인연을 따라 읽어야 하고, 넷째는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자리 위에서 성내지 않아야 하며, 다섯째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앞에 벌여 놓아야 하는 것이다.
또 경을 물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법답게 평상에서 내려와 물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리에 같이 앉아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셋째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곧 물어야 하는 것이고, 넷째는 다른 인연을 마음에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비록 알았더라도 머리를 땅에 대고 예배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오는 것이다.”
또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법사가 사자좌(師子座)에 앉는 데 네 가지 법이 있는데,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고좌(高座)에 오르려 할 때에는 먼저 대중을 공경하게 예배한 뒤에 올라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 속에 여자가 있으면 부정(不淨)을 관(觀)해야 하는 것이며, 셋째는 위의를 갖추고 바라보매 대인(大人)의 상이 있어야 하고, 법음(法音)으로 설법하며 얼굴빛은 부드러워 사람들이 다 믿게 하며, 외도의 경전을 말하지 않으며 겁내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이고, 넷째는 욕설로 힐난하더라도 인욕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들에게 나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문자를 법(法)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들이 내게서 법을 듣고는 아뇩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듣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고, 넷째는 이익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 말하였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사부 대중은 어느 때에 소리를 내서는 안 됩니까? 혹 몸이나 입이나 나무, 돌 소리와 또 다른 소리들을.’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때에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즉, 부처님께 예배할 때와 설법을 들을 때와 대중이 모였을 때와 걸식할 때와 음식을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때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됩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때는 제천(諸天)이 오기 때문이다. 저 제천들은 항상 청정한 마음과 더러움이 없는 마음과 텅 빈 마음과
바라밀을 따르는 마음과 불법을 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저런 소리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 흩어져 돌아가 버린다. 저 제천들이 가 버리기 때문에 온갖 악귀들이 와서 이익되지 않게 하고 편안하지 않게 한다. 저들은 여기 와서 모든 우환을 일으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고 또 서로 침해한다. 그러므로 문수사리여, 부디 고요히 부처님께 예배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몸과 입과 나무 돌
그 밖의 다른 소리도 안 내고
고요히 부처님께 예배하는 이
그는 여래의 칭찬 받는다네.”

또 『불본행경(佛本行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모든 제자들을 제재하여 자질이 우둔하고 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청을 받고 가서 설법하지 못하게 하리라. 지금부터 만일 설법하러 가려면 그는 반드시 오묘한 행을 갖추어 여러 대중 가운데서 훌륭한 행을 성취하고 경전[修多羅]을 많이 알며 또 계율[毘尼]을 알고 마등가(摩登伽)를 아는 사람, 마땅히 문자를 분명히 알고 변재를 갖춘 사람을 뽑아서 설법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아랫자리로부터 차례로 보내어 대중을 위해 설법하게 하였다. 만약 첫째가 모자라면 둘째에게 청하고, 둘째가 모자라면 셋째에게 청하고, 셋째가 모자라면 넷째에게 청하고, 넷째가 모자라면 다섯째에게 청하여 나아가 조금이라도 설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차례로 청하여 설법하게 하리라.’
그 때 대중은 그 법사가 변재를 다 갖추어 잘 설법하는 것을 보고 곧 향과 꽃을 가지고 그에게 흩뿌렸다. 그러나 여러 비구들은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이다. 출가한 사람은 바르는 향ㆍ가루향 및 여러 향과 화만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헐뜯으며 말하였다.

‘이들 비구는 이런 공양도 받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 나은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여러 비구들은 이 같은 일을 모두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재가[白衣]의 시주[檀越]가 기쁜 마음으로 경사를 위해 갖가지 향과 꽃과 바르는 향, 가루향 및 온갖 화만을 법사 위에 흩뿌리면 그것을 받아야만 한다.’
이 재가 시주들은 드디어 갖가지 재보와 물건과 가사 등을 가지고 법사에게 보시했다. 그러나 이 비구들은 두렵고 부끄러워하며 그 물건을 받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또 그것을 비방하며 말하였다.
‘이 사문 석자(釋子)들은 약간의 가벼운 물건도 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좋은 물건이겠는가.’
그리하여 여러 비구들은 이 같은 일을 모두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속인이 온갖 재물과 가사 등을 가지고 법사에게 바쳐 보시하면 나는 그들의 기쁨을 위해 그 보시를 허락한다. 그리고 너희들로서 그것이 필요하면 받고 필요하지 않으면 돌려주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그 때 비구들은 경전 가운데의 중요한 의미를 취해 대중을 위해 설법할 때 차례에 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경률에 위배될까 염려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편리함을 따라 모든 경전 가운데서 중요한 뜻을 취하고 문구를 안배하여 남을 위해 설법하는 것을 허락한다. 다만 중간 뜻을 취함으로써 경전의 근본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불본행경』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비구들이 한 방에 모여서 두 비구가 설법하였다. 그 때문에 서로 방해가 되어 곧
두 방을 만들고 각기 따로 설법했다. 그래도 여전히 서로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이 방 안의 비구들을 끌고 저 방으로 가고, 저 방 안의 비구들을 서로 이끌어 이 방으로 왔다. 그래서 서로 왕래가 뒤섞여 드디어 대중을 어지럽혀, 어떤 사람은 왔다갔다하면서 법사(法事)를 중단하기도 하고, 어떤 비구는 이 법문에 대해 설법을 기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에 여러 비구들이 이를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는 한 방에서 두 사람이 설법해서는 안 되고, 두 방에서도 서로 가까이 소리를 맞대어 설법해서는 안 되니, 그것은 서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저기로 가지도 못하고 저기서 여기로 오지도 못하며, 또 사문을 미워해서 그 설법을 듣지 않아서도 안 된다. 만일 사문을 미워하면 법대로 다스릴 것이다.’”[또 『사분율(四分律)』에서도 한 방에서 두 법사가 설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울러 높은 자리에서 서로 가까이 나란히 앉아 게송을 읊거나, 두 가지 소리로 합창하는 것을 다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계율에서도 법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재가들이 흩뿌리는 꽃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꽃이 몸에 붙으면 곧 떨어 버리라고 했다.]
또 『선견율(善見律)』에서 말하였다.
“법사가 사람들을 위해 설법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이 여자이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이빨을 드러내어 웃지 말라. 만일 웃는 사람이 있으면 곧 쫓아내어라. 왜냐 하면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금구(金口)로 설법하시는 것이니, 너희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쫓아내는 것이다.”

(4) 위법부(違法部)9)
『불장경(佛藏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미래의 비구들은 외경(外經) 읽기를 좋아하여 설법할 때에는 문장을 잘 꾸며 대중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 때에 악마는 사람들을 미혹시켜 선법을 장애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음성이나 말이나 곱게 꾸민 문장에 탐착하거나,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외도의 경전 읽기를 좋아한다면, 악마는 그들을 모두 미혹시켜 그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악마에게 미혹되어 슬기의 눈이 가리고 덮여 이익을 깊이 탐하여 저 외서(外書) 보는 것이, 마치 여러 장님들이 속이는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모두 다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죽을 것이다.
또 사리불이여, 부정하게 설법하는 사람은, 여래가 중생들의 마음이 가는 것에 딱 맞추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위해 설법한다. 이런 사람은 현세에서 다섯 가지 잘못을 범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설법할 때에 두려움을 가지고 남이 나를 비난할까 겁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으로는 근심하고 겁을 내면서 겉으로는 남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는 범부로서 참다운 지혜가 없는 것이고, 넷째는 그 설하는 것이 부정하여 다만 말만이 있을 뿐인 것이며, 다섯째는 말이 순서가 없고 곳곳에서 뽑아 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런 범부는 지혜가 없어 마음에 결정함이 없고 다만 명예와 소문만 구할 뿐, 마음에 의심을 가지고 남에게 설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몸소 법을 깨닫지 못했으면서 높은 자리에 있고 자신이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면 법에 따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네 종류의 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어떤 새는 소리는 좋은데 모양이 추하니, 이는 말하자면 구시라새[拘翅羅鳥]이다. 둘째, 어떤 새는 모양은 좋은데 소리가 추하니, 이는 말하자면 새매[鷙鳥]이다. 셋째, 어떤 새는 소리도 추하고 모양도 추하니, 이는 말하자면 흙올빼미[土梟]이다. 넷째, 어떤 새는 소리도 좋고 모양도 좋으니, 이는 말하자면 공작새[孔雀鳥]이다.
세간에도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잘 관찰해 알아야만 한다. 무엇이 네 종류인가. 첫째, 어떤 비구는 얼굴과 용모가 단정하고 위의를 성취했지만, 모든 법을 외워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다 좋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모양은 좋으나 소리가 좋지 못한 사람이다. 둘째, 어떤 사람은 소리는 좋으나 모양이 추하니, 드나들고 가고 오는 위의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널리 설법하기를 좋아하며, 정진하고 계를 지니며,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다 좋아서 이치가 깊으니, 이런 사람은 소리는 좋으나 모양이 추한 사람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소리도 추하고 모양도 추하니, 말하자면 그는 계를 범하고 정진하지 않으며, 많이 듣지도 않고 들은 것도 곧 잊어버린다. 이런 사람을 소리도 추하고 모양도 추한 사람이라 한다. 넷째, 어떤 사람은 소리도 좋고 얼굴도 좋으니, 말하자면 비구가 얼굴과 용모가 단정하고 위의를 구족하고 또 정진하고 선법을 수행하며 많이 듣고 잊어버리지 않으며, 처음과 중간과 나중도 좋게 잘 외운다. 이런 사람을 소리도 좋고 모양도 좋은 사람이라 한다.’”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종류의 구름이 있는데,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어떤 구름은 천둥을 치면서도 비는 내리지 않고, 둘째 어떤 구름은 비를 내리면서도 천둥은 치지 않으며, 셋째 어떤 구름은 비도 내리고 천둥도 치며, 넷째 어떤 구름은 비도 내리지 않고 천둥도 치지 않는다.
이 네 가지 구름을 닮은 세간의 네 가지 사람이 있다. 첫째, 어떤 비구를 천둥을 치면서도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비구는 높은 소리로 12부경을 익혀 외우면서 그 뜻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널리 설법하지 않으니, 이를 천둥을 치면서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둘째, 어떤 비구를 비를 내리면서도 천둥을 치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비구는 얼굴과 용모가 단정하고 위의를 구족하였지만 많이 듣고도 높은 소리로 12부경을 다 익혀 외우지 않으며, 또 남에게서 들은 것을 잊지도 않고 선지식을 즐겨 따르며 남을 위해 즐겨 설법한다. 이를 비를 내리면서도 천둥을 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 어떤 이를 비도 내리지 않고 천둥도 치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얼굴도 단정하지 않고 위의도 갖추지 못하고 선법을 닦지도 않고 많이 듣지도 못하고 남을 위해 설법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비도 내리지 않고 천둥도 치지 않는다고 한다. 넷째, 어떤 이를 비도 내리고 천둥도 치는 것이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얼굴도 단정하고 위의도 다 갖추고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고 남을 위해 설법도 잘하며 남에게 권해 잘 받들게 한다. 이런 사람을 비도 내리고 천둥도 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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