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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2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0권

by Kay/케이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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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0

 

 

대지도론 제70권

48. 불모품을 풀이함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나오고[出] 빠지고[沒] 굽히고[屈] 펴는[伸] 중생의 심수(心數)1)를 여실히 아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나오고 빠지고 굽히고 펴는 중생의 심수를 여실히 아시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오고 빠지고 굽히고 펴는 등 온갖 중생의 심수는 모두가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 의하여 생기느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이런 가운데서 나오고 빠지고 굽히고 펴는 중생의 심수를 아느니라. 이른바 정신[神]2)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다는[常] 견해로서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色]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무상(無常)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느낌[受]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느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느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느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생각[想]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생각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생각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생각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지어감[行]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지어감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지어감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지어감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분별[識]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무상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분별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분별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정신과 그리고 세간은 항상한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분별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있다[有邊]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없다[無邊]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 의지하는 견해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정신은 곧 몸이라고 보는 견해도 물질에 의지하는 것이요, 정신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바로 물질에 의지하는 것이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 의하여 보는 견해도 그와 같다.
죽은 뒤에 그러하게 가는[如去] 것3)이 있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죽은 뒤에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죽은 뒤에 혹 그러하게 가는 것이 있기도 하고 혹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기도 하다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죽은 뒤에 그러하게 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나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허망한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물질에 의지한 견해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 의지하는 견해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나타나고[出] 사라짐[沒], 굽히고[屈] 펴는[申] 심수를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물질의 모양[色相]을 아느니라. 어떻게 물질의 모양을 아느냐 하면, 마치 여[如]는 파괴되지도 않고 분별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으며 쓸모없는 이론도 없고 얻는 것도 없는 것처럼 물질의 모양도 역시 그와 같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을 아느니라. 어떻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을 아느냐 하면, 마치 여[如]는 파괴되지도 않고 분별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으며 쓸모없는 이론도 없고 얻는 것도 없는 것처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도 그와 같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여한 모양[如相]과 중생의 심수(心數)가 나타나고 숨고 굽어지고 펴지는 여한 모양[如相]과 이 5중(衆)의 여한 모양과 모든 행의 여한 모양, 곧 온갖 법의 여한 모양을 아느니라.
어떤 것이 온갖 법의 여한 모양이냐 하면, 이른바 6바라밀의 여한 모양이니라. 6바라밀의 여한 모양은 곧 37품(品)의 여한 모양이요, 37품의 여한 모양은 곧 18공(空)의 여한 모양이며, 18공의 여한 모양은 곧 8배사(背舍)의 여한 모양이니라.
8배사의 여한 모양은 곧 9차제정(次第定)의 여한 모양이요, 9차제정의 여한 모양은 곧 부처님 10력(力)의 여한 모양이며, 부처님의 10력의 여한 모양은 곧 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대자대비(大慈大悲)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의 여한 모양이요, 18불공법의 여한 모양은 곧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여한 모양이니라.
일체종지의 여한 모양은 곧 착한 법[善法]ㆍ착하지 않은 법[不善法]ㆍ세간의 법[世間法]ㆍ출세간의 법[出世間法]ㆍ유루의 법[有漏法]ㆍ무루의 법[無漏法]의 여한 모양이요, 유루법ㆍ무루법의 여한 모양은 곧 과거ㆍ미래ㆍ현재 법의 여한 모양이며, 과거ㆍ미래ㆍ현재 법의 여한 모양은 곧
유위법(有爲法)ㆍ무위법(無爲法)의 여한 모양이니라.
유위법ㆍ무위법의 여한 모양은 곧 수다원 과위[須陀洹果]의 여한 모양이요, 수다원 과위의 여한 모양은 곧 사다함 과위[斯陀含果]의 여한 모양이며, 사다함 과위의 여한 모양은 곧 아나함의 과위[阿那含果]의 여한 모양이요, 아나함 과위의 여한 모양은 곧 아라한 과위[阿羅漢果]의 여한 모양이며, 아라한 과위의 여한 모양은 곧 벽지불도[辟支佛道]의 여한 모양이니라.
벽지불도의 여한 모양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여한 모양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한 모양은 곧 모든 부처님의 여한 모양이니라. 모든 부처님의 여한 모양은 모두가 하나의 여한 모양[一如相]이어서 둘이 아니고[不二] 구별되지 않으며[不別] 다하지도 않고[不盡] 파괴되지도 않나니[不壞], 그것을 바로 온갖 모든 법의 여한 모양[如相]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여한 모양[如相]을 얻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낳고 세간의 모양을 내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의 모양[如相]은 같지 않은 모양[不如相]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모양[不異相]도 아닌 줄을 아나니, 이 여한 모양을 얻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법의 모양은 같지 않은 모양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모양도 아니어서 매우 깊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것으로써 사람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 누가 이를 믿고 이해하는 것인지요?”
“오직 아비발치(阿鞞跋致)의 보살과 바른 소견[正見]을 완전히 갖춘 사람과 번뇌가 다한 아라한만이 믿고 이해하니, 왜냐하면 이 법은 심히 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여는 다함이 없는 모양[無盡相]이기 때문에 매우 깊으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어느 법이 다함이 없는 모양이기에 매우 깊은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이 온갖 모든 법의 여(如)를 얻고 나서야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느니라.”
【論】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들의 짓고 행한 바와 예순두 가지 사견 등의 모든 삿된 소견과 아흔여덟 가지 번뇌[結使] 등의 모든 번뇌를 모두 아신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나오고, 빠지고, 굽히고, 펴는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안다”고 한다.
집에 있는 이[在家者]는 애욕[愛] 등의 모든 번뇌에 빠지기 때문에 빠진다[沒]고 하는데, 그것은 96종의 삿된 소견을 말한다. 반면 집을 떠난 이[出家者]는 나온다[出]고 한다.
또 항상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빠진다고 하며, 무상한 줄 알면서 두려워하며 도[道]를 구하기 때문에 나온다고 한다.
또 96종의 도법(道法)을 받으면 바른 도[正道]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세간에 빠져 드는 것이다. 굽힌다[屈] 함은 욕계(欲界)를 여의지 않는 것이요, 편다[伸]함은 욕계를 여의는 것이니, 색계(色界)를 여의고 여의지 않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마치 사람이 맑은 못 위에 서서 고기가 노는 것을 보면, 어떤 고기는 항상 물속에서만 있기도 하고 어떤 고기는 잠시 동안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기도 하며 어떤 고기는 나와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보기도 하고 어떤 고기는 나와서 저쪽으로 건너가려 하다가 언덕에 가까이 와서는 도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불안(佛眼)으로써 시방의 6도(道) 중생을 관찰할 때, 어떤 이는 항상 5욕(欲)에 집착하여 모든 번뇌가 마음을 가려서 벗어나기[出]를 구하지 않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좋은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계율을 지니면서도 삿된 의심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에 도로 빠져 들기[沒]도 한다.
어떤 사람은 5욕에서 벗어나 난법(煖法)과 정법(頂法) 등을 얻고 네 가지 진리[四諦]를 관찰하면서도 진실한 법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도로 빠져 들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5욕을 여의고 이에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렀으면서도 열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도로 빠져 들기도 한다.
어떤 것이 나오고[出] 빠지고[沒] 굽히고[屈] 펴는[伸] 등의 모양이냐 하면,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정신[神]과 그리고 세간(世間)이 항상하다[常]’는 것이다.
정신에 대해서는 범부들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나라는 마음[我心]을 따라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정신이 있다고 헤아린다.
외도(外道)가 말하는 정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항상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만일 정신이 항상하다고 헤아린 이면 항상 복덕을 닦아
뒤에 과보를 받기 때문에 혹은 도를 행하기 때문에 정신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거니와 만일 정신이 무상하다고 여기는 이면 이번 세상에서 명예와 이양을 얻기 위하여 짐짓 하는 일이 있다.
항상하다, 무상하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신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미세하면서 항상 머무르는[細微常住] 것이요, 둘째는 현재 존재하면서 짓는[現有所作] 것이다. 현재 존재하면서 짓는 것은 몸이 죽을 때에는 무상하게 되거니와 미세한 정신은 항상 있는 것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신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다.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가운데에는 다 같이 허물이 있다. 만일 정신이 무상하다면 곧 죄와 복이 없으며 설령 항상하다 해도 역시 죄와 복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항상하다면 고통과 쾌락이 다르지 않으리니 마치 허공을 비가 적시지 못하고 바람이나 해로 말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무상하다면 고통과 쾌락이 변하리니, 마치 바람과 비가 소의 가죽 안에 있으면 가죽이 문드러져 못쓰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라는 마음 때문에 반드시 정신이 있다고 말하지만 다만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닐 뿐이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네 가지 삿된 소견은 모두가 5중(衆)을 반연하며, 오직 5중에 대하여 잘못 헤아려 그것을 정신이라 할 뿐이다”고 하신다.
정신과 세간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세간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5중(衆) 세간이요, 둘째는 중생(衆生)세간이며, 셋째는 국토(國土)세간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 세간을 말하나니, 5중세간과 국토세간이다. 중생세간은 곧 정신[神]이다. 세간의 모양 가운데서도 역시 네 가지의 삿된 소견[四種邪見]이 있다.
【문】정신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착오가 있겠거니와 세간은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정신의 삿된 소견과 같을 수 있는가?
【답】다만 세간에 대하여 일으키는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모양을 파괴할 뿐이요 세간을 파괴하지는 않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눈 없는 사람이 뱀을 얻으면 그것을 영락(瓔珞)이라 여기거니와 눈 있는 사람은 그것이 뱀이요 영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이 항상하다는 뒤바뀜[顚倒]을 깨뜨리는 것이요, 세간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무상함을 보기 때문에 무상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죄와 복은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요,
과거의 일로 인하여 지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두 가지에는 모두 허물이 있기 때문이요, 항상 있는 것도 아니요 무상한 것도 아니라 하는 데에는 세간을 집착하는 허물 때문이다.
‘세간은 끝이 있다[有邊]’고 함은, 사람이 세간의 근본을 구한다 해도 그 시초를 얻지 못한다. 그 시초를 얻지 못하면 중간도 없고 나중도 없으며 만일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얻지 못하면 세간은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간은 시초가 있어야 하며 그 시초가 곧 끝[邊]이다.
선정을 얻은 이는 전생을 아는 지혜[宿命智]의 힘으로 8만 겁의 일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초과한 그 이상은 더 알지 못한다. 다만 몸의 시초가 되는 중음(中陰)의 의식[識]만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이 식은 인(因)이 없어서도 안 되고 연(緣)이 없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인과 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니, 전생 일을 아는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것이요 다만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분별할 뿐이다.
법이 있으므로 세간의 성품[世性]이라 하나 5정(情)으로 알 것이 아니니,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성품 가운데서는 처음에 깨달음[覺]이 생기니, 깨달음은 곧 중음의 의식이다. 그 깨달음으로부터 나가 생기고 나로부터 다섯 가지의 작은 티끌[微塵]이 생기나니 이른바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이다.
소리의 작은 티끌로부터 공대(空大)가 생기고, 소리와 촉감으로부터 풍대(風大)가 생기며, 빛깔과 소리와 촉감으로부터 화대(火大)가 생기며, 빛깔ㆍ소리ㆍ촉감ㆍ맛으로부터 수대(水大)가 생기며, 빛깔ㆍ소리ㆍ촉감ㆍ맛ㆍ냄새로부터 지대(地大)가 생기며, 허공[空]으로부터 귀[耳根]가 생기며, 바람[風]으로부터 몸[身根]이 생기며, 불[火]로부터 눈[眼根]이 생기며, 물[水]로부터 혀[舌根]가 생기며, 땅[地]으로부터 코[鼻根]가 생기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점점 세밀한 것[細]으로부터 거친 데[麤]로 이른다.
세간의 성품[世性]이라 함은, 세간의 성품으로부터 그 이후에는 거친 데에 이르고 거친 데로부터 세밀한 것이 전변되어 나오며 도로 세간의 성품에 이르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진흙 덩어리 속에는 병이나 항아리 등의 성품이 갖추어져 있어서 진흙으로 병을 만들었다가 병을 부숴버리고 항아리를 만드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바뀌고 변하여도 도무지 잃는 것이 없다. 세간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바뀌고 변하여 거친 것이 되며 세간의 성품은 항상한 법이라 어디서부터 오는 데도 없다. 마치 『승가경(僧佉經)』에서 세간의 성품을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간의 맨 처음이 되는 끝을
작은 티끌[微塵]이라 한다. 작은 티끌은 항상한 법이라 깨뜨릴 수도 없고 태울 수도 없으며 문드러지게 할 수도 없고 무너지게 할 수도 없나니, 미세하기 때문이다. 다만 죄복의 인연을 기다려 화합하기에 몸이 있을 뿐이다. 하늘이나 지옥 등에서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인연이 다하면 곧 흩어지고 무너져버린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연(自然)으로써 세계의 시초를 삼나니, 빈(貧)ㆍ부(富)ㆍ귀(貴)ㆍ천(賤)은 서원[願]과 수행[行]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천주(天主)4)가 곧 세계의 시초이어서 길흉(吉凶)ㆍ화복(禍福)과 천지의 만물을 지으며 이 법이 소멸할 때에는 하늘이 도로 거두어 간다”고 하나, 이와 같은 삿된 인(因)이 바로 세계에 관해 갖는 변견(邊見)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생들은 세상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다가 모두 저절로 그 끝에 이르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산 위에서 실타래를 던지면 그 실이 다 풀어지면서 저절로 정지하는 것처럼 죄를 받고 복을 받는 것도 다하는 데로 모여 돌아가나니, 정진이나 게으름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토와 세간은 8방(方)에는 끝이 있되 오직 위와 아래만은 끝이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래로는 18지옥에 이르고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므로 위와 아래는 끝이 있지만 8방에는 끝이 없다”고 하나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세계의 끝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생의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하며, 또 정신[神]에 대해서는 설명하면서 “몸속에 있는데 마치 겨자씨만큼 하고 또 쌀알만큼 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혹 한 치[一寸]만 하다. 큰 사람은 정신이 크고 작은 사람은 정신이 작다. 정신은 물질의 법[色法]으로서 분(分)을 갖는다. 그 때문에 정신은 끝이 있다”고 한다.
‘끝이 없다[無邊]’고 함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신은 허공에 두루하게 차서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몸의 처소를 얻으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닫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정신은 끝이 없다고 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토세간은 시초가 없다. 만일 시초가 있다면 인연도 없어야 하고 뒤도 또한 다함이 없어야 한다. 항상 몸을 받으니 그렇다면 열반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로 ‘끝이 없다’고 한다.
또 “국토세간은 시방에 끝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정신세간[神世間]과 국토세간은 끝이 없다.”고 한다. “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신세간은 끝이 없고 국토세간은 끝이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정신세간은 끝이 있지만 국토세간은 끝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은 정신은 물질[色]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위와 아래는 끝이 있지만 8방(方)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통틀어서 위의 두 가지 법을 일컬어 ‘끝이 있다, 끝이 없다’고 한다.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고 함은, 어떤 사람은 세간에 끝이 있다 해도 허물이 있고 끝이 없다 해도 허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끝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끝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나니,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邊非無邊]는 데에 집착하여 세간의 실체로 삼는다.
‘정신이 바로 몸이다’ 함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이 곧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 몸을 나누고 쪼개면서 정신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한다.
또 아름답고 추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받는 것은 모두가 몸이니, 이 때문에 ‘몸이 곧 정신’이라고 한다.
‘몸과 정신은 다르다’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신은 미세하여 5정(情)으로도 얻지 못하고 또한 범부가 볼 수 있는 바도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청정해지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볼 수 있나니, 이 때문에 몸이 다르고 정신이 다르다”고 한다.
또 만일 몸이 곧 정신이라면 몸이 소멸하면 정신도 소멸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삿된 소견이다. 몸과 정신이 다르다면 몸은 소멸해도 정신은 항상 존재할 것이므로 이것은 바로 치우친 소견[邊見]이다.
‘죽은 뒤에 그러하게 가는 것[如去]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문】앞에서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을 설하는 것은 곧 뒷세상이 있다, 혹은 없다는 것이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따로 그러하게 가는 것[如去]에 대한 4구(句)를 말씀하시는가?
【답】위에서는 통틀어 온갖 세간의 항상하다거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하셨으나 뒷세상이 있다거나 없다는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게 된다. ‘그러하게 간다’ 함은 마치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이 세상을 떠나 후세에 이르는 것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 세상 어디서부터 오는 데도 없고 멸한다고 해도 또한 가는 데도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과 정신이 화합하여 사람이 되는데 죽은 뒤에는 정신은 가지만 몸은 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바로 그러하게 간다거나 그러하게 가지 못한다[不如去]고 한다.
‘그러하게 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하게 가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如去非無如去]’ 함은, 간다거나 가지 않는다는 것에 허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정신을 버리지 못하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닌 데에 집착하고 있나니, 이와 같은 모든 삿된 소견과 번뇌 등을 바로 나오고, 빠지고, 굽히고, 펴는 마음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삿된 소견을 지닌 이는 갖가지의 도(道)로써 벗어나기[出]를 구해도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려고 하는데도 빠지기[沒] 때문이다.
삿된 소견의 힘으로는 대개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열네 가지 일[十四事]을 설한 것이다. 외도(外道)가 비록 갖가지로 생각하고 분별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5중(衆)을 반연하고 5중에 의지한 것으로서 정신이란 없으며 무상한 것이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5중이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쓸모없는 이론이 없는 것을 알며 다만 5중의 여(如)를 아시니 거짓되고 뒤바뀌게 보는 범부의 견해와는 같지 않을 뿐이다.
5중의 여와 같이 온갖 법의 여도 또한 그와 같다. 왜냐하면 두 가지의 법은 온갖 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이다.
5중은 유위의 법이요, 5중의 여(如)는 곧 무위의 법이다. 5중을 관찰하고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능히 6바라밀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5중의 여는 곧 온갖 법의 여라고 설명한다.
온갖 법의 여는 곧 6바라밀의 여이다.
6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진실한 도를 구하면서 5중이 무상하고 공하다고 관하여 37품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 등을 낸다. 이것은 성문의 도[聲聞道]이니, 안 뒤에는 곧장 더 지나가서 18공과 10력(力) 등 모든 부처님의 법을 행하면서 모두 바르게 5중을 관찰한다.
5중의 여(如)는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이 모두는 모든 법의 여(如)이다. 이 때문에 착한 법의 여는 곧 착하지 않은 법의 여이며 착하지 않은 법의 여는 곧 그것이 착한 법의 여라고 설명한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도 또한 그와 같나니,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착한 법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여한 모양[如相]도 또한 그러하여서 모두가 일여(一如)의 모양이라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진실을 구하여 필경공(畢竟空)에 이르면 다시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 모든 법의 여(如)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내며 세간의 모양을 능히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보리는 희유한 일이라고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온갖 모든 법의 여(如)는 심히 깊습니다. 3세(世)와 시방(方)의 모든 부처님의 여를 따르고 어기지 않나니, 곧 그것이 모든 법의 여입니다”고 한다.
이 모든 법의 여를 이해하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갖가지로 법을 설한다. 이 심히 깊은 여는 알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나니, 아비발치의 보살로서 법위(法位)에 들어 수기(授記)를 받은 이라야 믿을 수 있다.
‘바른 소견[正見]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세 가지 도[三道]를 얻은 사람이며,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이면 아비발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두가 아비발치 가운데에 포함되나니, 그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온갖 법은 다함이 없기[無盡] 때문에 이 여(如)도 다함이 없다”고 하신다. 여는 다함이 없기 때문에 성인의 도를 얻은 이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무위의 법 가운데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수다원의 모든 도(道)가 있으며 스스로 얻을 법을 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거니와 범부는 거짓되고 뒤바뀐 법에 집착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법의 여를 얻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하고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사람이라 하나니, 능히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이르게 한다”고 하신다.

49. 문상품(問相品)을 풀이함

【經】그때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모든 욕계(欲界)의 천자(天子)와 색계(色界)의 천자들이 멀리서부터 꽃과 향을 뿌리면서 부처님께로 와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서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습니다. 어떤 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인지요?”
부처님께서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천자들아, 공한 모양[空相]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며, 모양[相]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일어남[起]이 없고 남[生]이 없고 없어짐[滅]이 없고 더러움[垢]이 없고 깨끗함[淨]이 없고 존재하는 법[所有法]이 없으며 모양도 없고 의지함이 없는 허공의 모양이 바로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니라.
모든 천자들아, 이와 같은 등의 모양이 바로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세간의 법으로써 말하는 것이지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로써 말하는 것은 아니니라.
모든 천자들아, 이 모든 모양은 온갖 세간의 하늘이나 사람이나 아수라로서는 파괴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이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수보리들도 역시 이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모든 천자들아, 모양은 모양을 파괴할 수 없고 모양은 모양을 알 수 없으며, 모양은 모양이 없는 것을 알 수 없고 모양 없는 것은 모양을 알 수가 없느니라. 이 모양은 곧 모양 없는 모양이니라. 모양이 없어 모양과 모양 없음을 모두 알 바가 없나니, 이른바 아는 이[知者]와 아는 법[知法]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천자들아 이 모든 모양은 물질이 만든 것이 아니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만든 것이 아니며, 단바라밀(檀波羅蜜)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과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과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과 선바라밀(禪波羅蜜)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만든 것이 아니며, 내공(內空)이 만든 것이 아니고 외공(外空)이 만든 것이 아니고 내외공(內外空)이 만든 것이 아니고 무법공(無法空)이 만든 것이 아니고 유법공(有法空)이 만든 것이 아니고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 만든 것이 아니며, 4념처(念處)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나아가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모든 천자들아, 이 모든 모양은 사람이 가질 것[所有]이 아니고 비인(非人)이 가질 것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니며, 유루(有漏)도 아니고 무루(無漏)도 아니며,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허공의 모양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으니,
이 사람의 질문을 올바르다 하겠느냐?”
모든 천자들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허공은 모양으로 설명할 만한 것이 없으니, 허공은 작위가 없고[無爲] 일으키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양[相]과 성품[性]은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는 여실(如實)히 모양과 성품을 얻었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하느니라.”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얻으신 모든 모양과 성품은 매우 깊습니다. 이 모양을 얻기 때문에 무애지(無礙智)를 얻으시고, 이 모양 안에 머물러 반야바라밀로써 법의 제 모양[自相]을 쌓으시는 것입니다.”
이어 천자들이 말씀드렸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행하신 곳이며, 이 도(道)를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시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뒤에는 온갖 법의 모양인 물질의 모양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 내지는 일체종지의 모양을 통달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천자들아,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惱壞相]이 바로 물질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無相]을 얻었느니라.
깨닫는[覺] 것은 느낌의 모양이요, 취하는[取] 것은 생각의 모양이며, 일으켜 짓는[起作] 것은 마음작용으로 나타나는 모양[行相]이요, 요별(了別)하는 것은 분별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능히 버리는[能捨] 것은 단바라밀의 모양이요, 뜨거운 번뇌가 없는[無熱惱] 것은 시라바라밀의 모양이며, 변하여 달라지지 않는[不變異] 것은 찬제바라밀의 모양이요, 조복할 수 없는[不可伏] 것은 비리야바라밀의 모양이며, 마음을 가다듬는[攝心] 것은 선바라밀의 모양이요, 버리고 여의는[捨離] 것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마음에 번거로움이 없는[無所嬈惱] 것은 바로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세간을 벗어나는[出世間] 것은 37품(品)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괴로운[苦] 것은 무작[無作] 해탈문의 모양이요, 여의는[離] 것은
공해탈문의 모양이며, 고요히 사라진[寂滅] 것은 무상(無相) 해탈문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수승한[勝] 것은 10력(力)의 모양이요, 두려워하지 않는[不恐怖] 것은 무소외(無所畏)의 모양이며, 두루 아는[遍知] 것은 4무애지(無礙智)의 모양이요, 다른 사람으로서 얻지 못하는[餘人無得] 것은 18불공법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모양이요, 진실한 것은 착오가 없는[無謬錯] 모양이며, 취할 것이 없는[無所取] 것은 항상 버리는 모양이요, 현재에 환히 아는 것은 일체종지의 모양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양 없는 것을 얻었느니라.
이와 같아서 모든 천자들아, 부처님께서는 온갖 모든 법의 모양 없는 것을 얻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부처님을 무애지(無礙智)를 지닌 이라 하느니라.”
【論】【문】위의 곳곳에서 이미 공하고 모양이 없으며, 지음이 없고 나아가 일으킴도 없고 있는 것이 없음이 반야의 모양임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모든 천자들은 무엇 때문에 다시 “어떤 것이 반야의 모양입니까”라고 묻는 것인가?
【답】부처님께서는 비록 곳곳에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으나 혹은 공 등을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有]를 말씀하기도 하며, 혹은 과보(果報)를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죄복(罪福)을 말씀하기도 하는 등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정확히 어느 것이 반야의 모양이냐’고 묻는 것이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마치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모양으로서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며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바로 그 모양을 두루 아실 뿐이다. 모든 천자들이 비록 예리한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모든 천자들 중에서 나중에 온 이들은 듣지 못한 이도 있기 때문에 묻는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천자들에게 대답하시되 “공 등은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다”고 하신다. 공한 모양[空相]이라 함은 내외공(內外空) 등의 모든 공이다. 만일 모든 법이 공하다면 곧 그것은 남녀(男女)나 길고 짧은 것이나 아름답거나 미운 등의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모양이 없는 모양[無相相]이라 한다.
만일 공하여 모양이 없다면 다시 원(願)을 내면서 뒷세상의 몸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지음이 없는 모양[無作相]이라 한다.
이 세 가지 해탈문은 바로 처음 반야바라밀의 모양에 드는 것이며, 3승(乘)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의지할 것도 없는 허공 등을 함께 지니니, 이는 바로 반야바라밀의 깊은 모양이다.
위의 세 가지 해탈문 가운데에는 “모양이 없고“ 즉 남녀 등의 바깥 모양도 없으며, “있는 바도 없고” 아래의 “모양이 없는 모양”은 온갖 법의 모양이 없다. 공은 비록 하나이지만, 사람의 근기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어서, 들어감에도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차별하면서 공을 설명하게 된다. 나는 것도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도 없는[無滅] 등의 논의(論義)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천자들이 반드시 ‘만일 반야바라밀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다면 어떻게 설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설한다면 그것은 곧 모양이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의 위덕(威德)이 크시기 때문에 감히 따지지를 못하는 줄 아시고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들을 위하여 설하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세속의 이치[世諦]로써 공 등의 모든 모양을 말씀하신 것이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諦]로써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첫째가는 이치로써 말씀하신다면 마땅히 따져야 하겠거니와 세속 이치로써 말씀하므로 따지지 않아야 한다.
또 비록 공을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하지도 않고 모양을 취하면서 법을 보이지도 않으신다. 혹은 옳고 그르다 하는 온갖 법은 동일한 모양이어서 분별이 없나니, 이 때문에 다시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른바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다면 어느 한 법도 이런 모양에 들지 않은 것이 없나니, 이 때문에 ‘온갖 세간은 파괴할 수 있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 등이 바로 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달라서 서로가 어긴다면 파괴할 수가 있다. 마치 물은 불을 끌 수 있으나 불은 자신의 불을 끄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입으로는 여실(如實)함을 말하면서 파괴하려 하는 이조차도 끝내 파괴할 수 없거늘 하물며 진실하지 않는 이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소경이 값진 보배를 밟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값진 보배가 아니라 해도 마침내 그것이 값진 보배가 아니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어서 모양이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모양은 모양을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양은 모양을 파괴할 수 없다고 함은, 어떤 법이 있을 적에 모든 법의 화합을 흩어버린다 해도 마침내는 파괴된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나니, 마치 도끼로 나무를 팰 적에 조각조각으로 쪼갠다 해도 마침내는 잃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 모든 법에 일정한 모양이 없음은 마치 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이 화합하기 때문에 나무라 하고 그 나무는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파괴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등을 ‘모양이 모양을 파괴할 수 없다’고 한다.
【문】물질 등의 모든 법은 지각[覺]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없겠지만, 마음에 속한 법은 앎의 모양[知相]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답】이 가운데서는 실상(實相)으로써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부가 허망하게 아는 이 지혜는 유위(有爲)의 법이기 때문에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거니와 허망한 법은 실로 아는 것이 있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버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든다.
만일 지혜로 항상하다는 것과 무상하다는 것 내지는 공하고 고요히 사라진 것 등을 안다면 위에서 이미 널리 파괴하고 없앴으므로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와 같다면 어떻게 아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모양은 모양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모양은 모양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함은, 안에는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바깥이 공하기 때문에 알 만한 법은 없다. 밖으로 연(緣)이 없다면 어떻게 지혜가 생기겠는가. 이 때문에 ‘모양은 모양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칼이 비록 날카롭다 하더라도 허공을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모양 없는 것은 모양을 알 수 없다’고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안의 지혜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거니와 밖의 반연되는 법은 일정한 모양이 있으므로 마음은 그 반연할 것에 따라 생긴다. 이 때문에 모양 없는 것은 모양을 알지 못해야 한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칼이 없으면 비록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칼로서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모양은 바로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모양과 모양 없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다’고 함은, 모양은 모양에 들어가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먼저부터 모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양은 모양 없는 것에도 들어가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모양이 들어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양과 모양 없는 것을 여의면 다시는 들어갈 만한 곳이 없다.
또 모양[相]과 모양이 될 것[所相]의 법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니, 모양이 될 것으로 인하여 모양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먼저 모양이 있으면서 모양이 될 것이 없다면 곧 모양이 없나니, 원인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 모양이 될 것이 있으면서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모양이 될 바가 있겠는가. 원인이 되는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또 모양과 모양이 될 바는 일정하지 않나니, 모양이 때로는 모양이 될 것이 되고 모양이 될 것이 때로는 바로 모양이다. 그 때문에 모양은 일정하지 않나니,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모양이 될 것도 또한 없다. 만일 모양이 될 것이 일정하지 않다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모양도 또한 없다. 이 때문에 ‘이 모양은 바로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이 모양과 모양 없는 것은 얻을 수 없다’고 하나니,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앞의 설명과 같이 공 등의 모든 모양은 바로 진실이다. 왜냐하면 이 모양은 5중(衆)으로서 짓는 것이 아니요, 6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로서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작위[爲]가 없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법이 없으며 또한 사람이나 비인(非人)이 짓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라 함은 보살이나 모든 부처님 등이요, 비인이라 함은 모든 하늘이다.
이 모양은 필경 공하기 때문에 유루(有漏)도 아니요 무루(無漏)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니다. 먼저 비록 무위(無爲)의 모양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다만 유위(有爲)를 깨뜨리기 위하여 무위를 설명했을 뿐이니, 무위도 또한 정해진 모양이 없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듣는 이는 생각하기를 “만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모양을 듣지 못했으리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에서 가장 으뜸가기 때문에 마땅히 이런 모양을 지으셔야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하늘에게 말씀하시되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런 모양은 항상 머물러 있나니, 부처님께서는 이 모양을 잘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이른다”고 하신다.
그때에 여러 천자들은 기뻐하면서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모든 모양은 매우 깊어서 비록 모양을 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행하면 그 사람에게 위없는 과보를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양을 얻으셨기 때문에 온갖 법에서 장애 없는 지혜[無礙智]를 얻으셨나니, 만일 모든 법을 일정한 모양으로 분별한다면 그것은 바로 장애 있는 지혜[有礙智]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 안에 머무르면 통달하여 장애가 없고 모든 법의 저마다의 구별된 모양을 말할 수 있나니, 이른바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惱壞相]은 바로 물질의 모양이요, 나아가 현전지(現前知)로써 분명히 아는 것은 바로 일체종지의 모양입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뜻을 옳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모든 모양을 분별하시되 “범부들이 아는 모든 모양은 각각 다르거니와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모두 공한 모양인 줄 안다”고 하신다. 공한 모양 그것이 곧 모양이 없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 모양이 없는[無相] 것을 얻으신 것이다.
‘얻는다[得]’고 함은 아는 것이며, 견줄 데 없이 두루 알기 때문에 얻는다고 하나니, 이 모든 법의 모양은 이제 바뀌어서 반야바라밀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經】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모양을 보이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법에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이 법을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느니라.
어떤 것이 이 법이냐 하면,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이 반야바라밀을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나니,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出生)시키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짓는 것을 아는 사람[知作人]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짓는 것을 아는 자에 대해 정곡으로 묻는다면 부처님보다 더한 이는 없다고 바로 답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짓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부처님이 타고 온 법과 부처님이 좇아 나온 도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 이 승(乘)과 이 도(道)를 부처님이 도로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받아 지니면서 수호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부처님께서는 짓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의 지음이 없는 모양[無作相]을 아나니, 짓는 이[作者]가 없기 때문이요, 온갖 법은 일어남이 없으니 그 형상과 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온갖 법의 지음이 없는 모양을 알며 또한 이런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짓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온갖 법의 나지 않음[不生]을 아나니,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며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아는 이[知者]도 없고 보는 이[見者]도 없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며 세간의 모양을 보이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온갖 법은 실로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느니라. 어찌하여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다고 하느냐 하면 온갖 법은 공하고 거짓이며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온갖 법은 어찌하여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느냐 하면, 온갖 법은 의지한 데도 없고 매인 데도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온갖 법은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나니, 물질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모양을 보이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모양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물질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모양을 보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모양을 보이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물질을 반연하여 분별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물질의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에 보인다 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식을 반연하여 분별을 내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반연하여 분별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일체종지를 보지 않기 때문에 보인다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냐 하면,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함[世間空]을 보이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세간의 공함을 보이느냐 하면, 5중(衆)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12입(入)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18계(界)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12인연(因緣)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아견(我見)의 근본인 62견(見)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10선도(善道)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 세간의 공함을 보이느니라.
37품(品)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6바라밀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내공(內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외공(外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내외공(內外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무법공(無法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유법공(有法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유위 성품[有爲性]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무위 성품[無爲性]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부처님 10력(力)의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18불공법(不共法) 세간의 공함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一切種智) 세간의 공함을 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세간의 공함을 알며 세간의 공함을 깨닫고 세간의 공함을 생각하고 세간의 공함을 분별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공함[佛世間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공함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공함을 보이고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공함까지를 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세간의 불가사의함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불가사의함을 보이고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불가사의함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세간의 여읨[離]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의 세간의 여읨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여읨을 보이고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여읨을 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여읨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고요히 사라짐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고요히 사라짐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고요히 사라짐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필경공(畢竟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필경공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이 마침내 공함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이 마침내 공함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성품이 공함[性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성품이 공함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성품이 공함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성품이 공함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무법공(無法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무법공을 보이느냐 하면, 5종세간의 무법공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무법공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무법유법공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무법유법공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무법유법공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세간의 독공(獨空)을 보이느니라. 어떻게 부처님 세간의 독공을 보이느냐 하면, 5중 세간의 독공을 보이며, 나아가 일체종지 세간의 독공을 보이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세간의 모양을 보이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모양을 보이나니, 이른바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의 모양을 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은 금세와 후세의 모양을 낼 수 있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니라.”
【論】해석한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무르신다. 다른 경 가운데서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고 법으로써 스승을 삼는다’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법이란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니라”고 하신다.
온갖 착하지 않는 법 가운데서 삿된 소견[邪見]보다 더한 것이 없다. 삿된 소견 때문에 은분(恩分)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저절로 그러한 은혜를 아는 이여야 한다. 모든 세간의 착한 법 가운데서 가장 으뜸으로서 이 세상에서는 좋은 명성(名聲)을 주고 뒤에는 가장 훌륭한 과보를 준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되 “은혜를 아는 것이 은혜를 보답하는 것 가운데서 첫째이다. 나조차도 오히려 보시와 지계 등의 은혜를 알거늘 하물며 반야바라밀이겠느냐”고 하신다.
또 모든 천자들은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은 마침내 공하나니,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며, 혹 어떤 사람은 탐내지도 않고 귀히 여기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처럼 삼계(三界)에서 존귀한 이조차도 반야바라밀에 공양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느냐”고 하신다.
다시 어떤 사람은 의심을 내면서 “부처님께서는
온갖 세간에 대해서도 마치 허공과 같이 여기어 집착함이 없으신데 무엇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을 탐내면서 존중하고 공양하실까. 마치 탐착하는 것 같구나”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는 탐착하는 마음이 없다. 다만 모든 법의 아름답고 추함[好醜]과 힘과 작용의 많고 적음을 분별해서 알 뿐이다. 이 반야바라밀은 온갖 쓸모없는 이론[戱論]을 끊고 3승(乘)의 도(道)를 열며 뭇 고통 등을 소멸시키면서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이 있다 함을 아나니, 이 때문에 찬탄하고 존중하고 공양하는 것이다”고 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안온한 길을 걸으면서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되면 항상 이 길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지음을 아는 사람’이라 함은, 다른 이가 지은 은혜를 아는 것은 이미 그 밖의 곳에서 설명했거니와 부처님께서 짓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의 지음 없는[無作] 모양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온갖 법의 지음 없는 모양을 알기 때문에 ‘지음 없는 사람’이라 하며 은혜를 알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지음을 모르는 사람’이라 한다. 지음을 아는 사람이거나 지음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간에 아무 허물은 없다.
그때 수보리는 필경공으로써 묻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아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없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모든 부처님의 세간을 보여 주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질문을 옳다 하시고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되 “온갖 법은 공하고 거짓이며 견고함이 없다”고 하신다.
수보리의 뜻에는 “온갖 법은 둔(鈍)한 모양이어서 보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거늘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유독 알거나 볼 수 있느냐”고 하며, 부처님의 뜻으로는 “온갖 법이 다만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법은 공하여 견고하지 않아서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는 그것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
또 온갖 법은 의지하는 데도 없고 매이는 데도 없기 때문에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다면서 갖가지의 문으로 모든 법을 파하면서 공하게 한다. 혹은 항상하다[常]는 것을 파하고 무상함을 행하면서 공에 들기도 하고,
혹은 진실을 파하면서 공에 들기도 하며, 혹은 마침내는 다하기 때문에 공에 들기도 하고, 혹은 온갖 법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공에 들기도 하는 등 이와 같이 하면서 공에 들어간다.
지금은 온갖 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의지하는 데도 없고 매이는데도 없으며, 의지하는 데가 없기 때문에 또한 나거나 없어지는 것도 없나니, 이 때문에 그것이 곧 공이다.
‘매이지 않는다’ 함은, 온갖 법은 실상(實相)이어서 매이지 않고 삼계(三界)를 벗어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삼계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에는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다. 이와 같이 해서 세간을 보인다.
이 반야는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물질 등의 법을 보이는 것이니, 의지하는 데도 없고 매인 데도 없으면서 거짓이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보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물질을 반연하여 분별을 내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반연하여 분별을 내지 않는 바로 이것을 물질 등의 법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문】분별은 내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물질은 어떻게 내지 않는가?
【답】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惱壞相]이 바로 물질이며, 분별로 인하여 구분하면서 아는 것이니, 분별이 없다면 또한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도 없다.
또 온갖 법은 인연(因緣)이 화합함에서 모양이 생기는 것으로서 자성(自性)이 없다. 마치 몸과 분별이 있으면서 모든 대상[緣]에 접촉하여 화합하기 때문에 땅[地]은 견고한 모양인 줄 알고 그 견고한 모양은 몸과 분별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모두가 화합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자성이 없다.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함을 보인다’고 했는데, 세간이란 5중(衆)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말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 법은 크거나 작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간에 공하지 않음이 없다고 관찰하나니,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함을 보인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공함을 보인다’고 했는데, 혹 어떤 사람은 의심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법을 애착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세간의 공함을 보인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모든 법의 항상한 실상이 아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나는 법을 애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모양을 알므로 그 본말(本末)을 헤아리고 생각하며 분별하되 어떤 법도 공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나는 비단 읽고 외우고 다른 이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는 마음속에서 깨닫고 알고 생각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세간의 공함을 말하여 보인다”고 하신다.
이 일단(一段)에서 세간의 공함을 말씀하여 보이는 것은 위에서 자세히 62견(見) 등을 여의는 것에서 설명했거니와 여기서는 다만 5중 내지는 일체종지를 말씀할 때에 모여 있는 이들이 ‘반야바라밀은 바로 필경공’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으로 취하고 집착하므로 이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씀하신다. ‘불가사의하다’ 함은 필경공도 또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필경공을 혹은 여읜다[離] 하기도 하고 혹은 고요히 사라진다[寂滅]고 하기도 하나니, 여읜다는 것은 갈라져서 여기저기 흩어진다[分散]는 것이다. 모든 법은 오래된 뒤에는 남은 것이 없게 되며 또 스스로 그의 성품을 여의는 것이니, 마침내 공한 줄 안 뒤에는 마음에 속한 법도 없고 언어도 없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다고 한다. 필경공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어찌하여 독공(獨空)이라 하는가?
【답】18공(空)은 모두가 인(因)과 연(緣)이 상대한다. 마치 내공(內空)은 안의 법으로 인하여 내공이라고 한 것과 같나니, 만일 안의 법이 없으면 내공도 없다. 18공의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이 독공은 인연도 없고 상대도 없기 때문에 독공이라 한다.
또 독공이라 함은 마치 허공(虛空)ㆍ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열반(涅槃)과 같은 것이다.
세간을 보이되 ‘금세의 모양도 아니고 후세의 모양도 아니다’고 했는데, 어떤 외도들은 금세(今世)만을 말하면서 후세(後世)를 말하지 않거니와 이 사람의 삿된 소견은 단멸(斷滅) 안에 떨어지며, 어떤 사람은 금세와 후세를 말하면서도 ‘금세의 정신[神]이 후세에 들어간다’고 하거니와 이 사람의 삿된 소견은 상견(常見) 안에 떨어진다. 반야바라밀은 두 치우친 소견[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말한다.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죄와 복을 말하며 비록 죄와 복을 말한다 하더라도 항상 삿된 소견을 내지도 않고 또한 공에 대해서도 걸림이 없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 가운데서는 마침내 공하거늘 어떻게 금세와 후세가 있다면서 아주 없다[斷]거나 항상하다[常]고 보겠는가”라고 하신다.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큰 일[大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일[不可思議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칭할 수 없는 일[不可稱事]를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한량없는 일[無量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무등등한 일[無等等]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큰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불가사의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칭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한량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이 큰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큰일이란 이른바 온갖 중생들을 구제하면서 온갖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이 불가사의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냐 하면, 수보리야, 불가사의한 일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법[佛法]과 여래의 법[如來法]과 자연의 법[自然人法]5)과 일체지인의 법[一切智人法]이니, 이 때문에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이 칭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냐 하면, 수보리야 온갖 중생 가운데서는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을 생각하거나 칭할 수 있는 이가 없나니, 이 때문에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칭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이 한량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냐 하면, 수보리야,
온갖 중생 가운데서는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은 헤아릴 이가 없나니, 이 때문에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한량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이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냐 하면, 수보리야, 온갖 중생 가운데서는 부처님과 같을 이가 있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보다 뛰어난 이겠느냐. 이 때문에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만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만이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한 일로서 그것들만을 위해 일어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며, 물질도 역시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역시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며, 나아가 일체종지와 법상(法相)과 법성(法性)도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나니, 이 가운데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얻을 수 없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물질이 불가사의하다는 것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물질이 무등등하다는 것도 얻을 수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가 무등등하다는 것마저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물질이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하다는 것도 얻을 수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가 무등등하다는 것마저 얻을 수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의 한량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한량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한량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물질의 한량을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한량도 얻을 수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물질은 무등등하기 때문에 한량을 얻을 수 없느니라.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며,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무등등하기 때문에 한량을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한 가운데서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를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온갖 법은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하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모든 부처님의 법이 불가사의함은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리는 모양[思議相]을 넘어섰기 때문이요, 칭할 수 없음은 일컫는[稱] 일을 넘어섰기 때문이며, 한량이 없음은 헤아림[量]을 넘어섰기 때문이요, 무등등은 동등한[等等] 일을 넘어섰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인연 때문에 온갖 법도 또한 불가사의한 모양이며, 나아가 무등등하느니라.
수보리야, 불가사의라 함은 이것의 이치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요, 칭할 수 없다 함은 이것의 이치가 칭할 수 없다는 것이며, 한량이 없다 함은 이것의 이치가 그 한량을 알 수 없다는 것이요, 무등등이라 함은 이것의 이치가 같음이 없다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 모든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하느니라. 불가사의라 함은 마치 허공이 불가사의한 것과 같고
칭할 수 없다 함은 마치 허공을 칭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한량이 없다 함은 마치 허공이 한량없는 것과 같고, 무등등이라 함은 마치 허공이 같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고 나아가 무등등하다고 말하느니라. 부처님의 법은 이와 같이 한량이 없으므로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로서는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이 모든 부처님 법의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에 관한 품(品)을 설할 때에, 5백의 비구는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고, 20의 비구니도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다하면서 아라한이 되었으며, 6만의 우바새(優婆塞)와 3만의 우바이(優婆夷)들은 모든 법 가운데서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면서[遠塵離垢] 모든 법 가운데서 법안(法眼)이 생겼고, 20의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이 현겁(賢劫) 동안에 수기(授記)를 받게 되었다.
【論】해석한다. 수보리는 반야의 모양을 깊이 이해하므로 모든 법 가운데에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는지라 마음에 기쁨을 내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큰일을 위하여 일어납니다”고 한다.
‘큰일[大事]’이라 함은 온갖 중생들의 큰 고뇌(苦惱)를 파괴하고 부처님의 위없는 큰 법[無上大法]을 주기 때문에 큰일이라 한다.
‘불가사의(不可思議)’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대답했다.
‘칭할 수 없다[不可稱]’ 함의 일컫는다[稱]는 것은 지혜를 말한다. 반야의 진실한 모양은 매우 깊고 극히 중하거니와 지혜는 가볍고 얇다[輕薄]. 이 때문에 칭할 수가 없다.
또 반야는 많은 것이나 지혜는 적은 것이므로 명칭할 수 없으며, 또 반야는 이익되게 하는 처소가 광대하므로 아직 성취되지 못했을 적에도 세간의 과보(果報)를 주고 성취한 뒤에는 도(道)의 과보를 준다.
또 마지막까지 모조리 알기 때문에 일컫는다 하거니와 반야바라밀은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거나 진실하다거나 거짓이라거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등 그 무엇으로도 일컬어 알 수가 없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해서 ‘칭할 수 없다’는 뜻을 알아야 한다.
‘한량없는 일[無量事]’이라고 함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컫는다는 것이 곧 한량이 있다는 것이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양을 취하는 것을 한량이라 한다”고 한다. 이 반야바라밀은 모양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한량이 없다.
또 보살은 4무량심(無量心)으로 반야를 행하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한다. 또 한량[量]은 지혜(智慧)라 한다. 범부의 지혜와 2승(乘)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는 반야의 한량을 알아 그 끝을 얻는 이가 없으므로 한량이 없다고 한다.
‘무등등(無等等)’이라 함은, 같을 이가 없는[無等] 것을 열반이라 한다. 온갖 유위의 법은 열반과 같은 것이 없다. 열반에는 세 갈래가 있나니, 성문의 열반과 벽지불의 열반과 부처님의 열반이다. 반야는 대승(大乘)의 열반을 주기 때문에 무등등이라 한다.
또 온갖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이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을 무등(無等)이라 하며, 반야바라밀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부처님과 비슷하게 하기 때문에 무등등이라 한다.
또 모든 부처님 법은 제일 미묘한지라 그와 같은 것이 없고 미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짝이 될 수 있는 것도 없나니, 반야바라밀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마음을 얻게 하기 때문에 무등등이라 한다.
또 무등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한다. 어떠한 관(觀)과 어떠한 행(行)으로도 미칠 수 없고 쓸모없는 이론이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같을 이가 없다[無等]고 한다.
보살은 이 무등을 얻어 중생들 가운데서 자비로운 마음을 내기 때문에 무등이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무등등이라는 뜻이다.
수보리는 성문인이라 일체지(一切智)가 없으면서도 이 불가사의한 반야 등을 설명할 수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그가 설한 바를 인가하셨으며,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다섯 가지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중생은 한량없고 끝없이 많지만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세계 안에 계신 작은 티끌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10력(力) 등의 법으로써
모조리 구제하려 하시나니, 이것을 큰일[大事]이라 한다.
또 어떤 보살은 오래전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서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지 않는다.
또 이 보살은 부처님 도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다섯 가지의 일을 받나니, 첫째는 모든 노고(勞苦)를 받아들이고, 둘째는 고요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며, 셋째는 삿된 이들과 어울려 일을 같이하고, 넷째는 사람들을 응접하고 대면하며, 다섯째는 대중들의 모임에 들어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여읜 쾌락을 깊이 얻고서 중생들을 위하여 이 다섯 가지 등의 갖가지 괴로움을 마치 공덕을 받듯 달게 받아들이시니 이것이 바로 ‘큰일’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함은 이른바 부처님의 법[佛法]과 여래의 법[如來法]과 자연인의 법[自然人法]과 일체지인의 법[一切智人法]이다.
‘부처님의 법’에서 부처님이란 각(覺)을 말하는데, 온갖 무명(無明)의 잠 가운데서 맨 처음 깨어났기 때문에 각이라 한다.
‘여래(如來)’라 함은 마치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6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법의 여여한[如] 모양을 얻어 부처님의 도(道)에 와 이르신 것처럼 지금의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도(道)에 오신 것이 모든 부처님 같이 여여하게[如] 오셨기[來]에 여래라 한다.
‘자연인의 법[自然人法]’이라 함은, 성문도 역시 깨달음[覺]이 있고 아는 것[知]도 있지만 다른 이로부터 들었으므로 이것은 바로 제자(弟子)로서의 법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저절로 되신 사람’으로,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일체지인의 법[一切智人法]’이라 함은, 벽지불도 역시 저절로 얻어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았지만 일체지(一切智)는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라 한다.
이 네 가지 법은 어떤 사람도 능히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불가사의하고 명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다고 하며 다시 어떤 법도 이 법과 비슷한 것이 없으므로 무등등이라 한다.
수보리는 내심 새로 배우는 보살들이 이 네 가지 법에 집착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다만 이 네 가지 법만이 불가사의하고 같을 만한 것이 없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불가사의하고 명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이 가운데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물질 등의 온갖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다”고 하신다.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하다’고 함은 바로 위의 일들과 같다. ‘이것을 불가사의라 한다’ 함은 결론을 내리는 구절[結句]이다. 논자(論者)는 이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거니와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간략하게 설명하신다.
불가사의는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는 모양[思議相]을 넘어선 것이요, 그와 같을 만한 모양도 넘어선 것이다. 열반의 법은 불가사의지만 이름이 세속 이치[世論] 때문에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가 있다는 뜻이다.
‘마치 허공이 불가사의한 것과 같다’ 함은, 앞의 품[先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허공의 모양은 불가사의하므로 이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무등등도 마치 허공과 같다’ 함은 허공은 비유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등등이라 한다.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곧 부처님 법의 모양이니, 불가사의하고 명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한 것이 곧 부처님 법의 모양이다. 이 부처님 법을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로서는 아무도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 6도(道) 가운데서 다만 3도(道)만을 설명한 것은 3선도(善道)의 중생조차도 오히려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3악도(惡道)이겠는가.6)
【문】이 품(品)을 설할 때 무엇 때문에 비구니(比丘尼)와 보살은 도를 얻는 이가 적은가?
【답】이 가운데서는 모든 부처님 법을 많이 찬탄한 것이니, 이른바 불가사의하고 명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듣는 이들은 대개가 신근(信根)이 더욱더 불어나는데, 그 때문에 속인은 도를 얻은 이가 많지만, 여인은 비록 믿음이 많다 하더라도 지혜가 적기 때문에 도를 얻은 이 역시 적다.
속인은 세상일에 탐착하고 지혜가 천박하며 근기가 둔하여 번뇌를 다할 수 없거니와 모든 비구들은 믿음과 지혜와 모든 근기가 평등하면서 일심으로 도를 구하기 때문에 번뇌를 다하는 이가 많다.
비구니는 지혜가 적기 때문에 20인이 번뇌를 다하게 되었고 비록 많은 이들이 초도(初道)를 얻어서
속인보다는 뛰어났다 하더라도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인과 다르지 않다.
이 가운데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간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은 매우 깊고 얻기 어려워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또 이 법에 대하여 인연을 심은 이가 적기 때문이다.
‘현겁(賢劫) 동안에 수기를 받을 것이다’고 함은,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겁 동안 네 분의 부처님을 제외한 1천 부처님이 장차 수기를 줄 것이다”고 하며,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며, 현겁 동안에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부처님이 될 것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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