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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3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1권

by Kay/케이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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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1

 

 

대지도론 제71권

50. 대사기품(大事起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큰일[大事]을 위하여 일어나고 불가사의한 일[不可思議事]을 위하여 일어나며, 명칭할 수 없는 일[不可稱事]을 위하여 일어나고 한량이 없는 일[無有量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무등등한 일[無等等事]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깊은 반야바라밀은 큰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다섯 가지 바라밀이 포함되어 있으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가 포함되어 있고 4념처로부터 8성도분까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일체종지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관정(灌頂)한 왕은 그 국토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므로 관청 일은 모두 대신(大臣)에게 맡기고 국왕은 안락하게 지내면서 아무 일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있으며, 반야바라밀은 그 일을 이룩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무등등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을 취하지 않고 물질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룩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느니라. 나아가 일체종지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고 수다원의 과위로부터 아라한의 과위까지와 벽지불의 도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룩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물질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이룩되며, 어떻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이룩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릇 이 물질을 취할 수도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릇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나도 또한 이 물질을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나도 또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및 일체종지를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나는 또한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인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을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나니, 보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부처님의 법과 여래의 법과 자연의 법과 일체지인의 법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때에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어서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사유나 비교로써는 알 수 없고, 미묘하고 선교한 지혜로써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얻은 이라야 알 수 있으며, 이들만이 이 반야바라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살이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였고 선근을 많이 심었으며 선지식(善知識)을 따랐으므로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설령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모든 중생이 모두 신행인(信行人)ㆍ법행인(法行人)이 되고 팔인(八人)이 되며,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짓는다 하여도, 이 보살이 하루 동안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욕망을 참고 사유하고 헤아리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행인ㆍ법행인과 팔인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덕과 단덕이 곧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천자들아, 신행인과 법행인과 8인과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까지와 벽지불이 곧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이니라.
천자들아,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써서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억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빨리 열반을 얻으리니,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그 밖의 경전을 1겁이나 또는 1겁이 채 안 되는 동안 행하는 것보다 뛰어나느니라.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으뜸가고 묘한 법이 널리 설해져 있기 때문이니, 이 신행인ㆍ법행인과 팔인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벽지불이 배워야 할 바요, 보살마하살도 배워야 할 바이며, 배운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이때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다 함께 소리를 내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마하(摩訶)바라밀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불가사의하고 칭할 수 없고 한량이 없고 무등등한 바라밀이라 하나니, 신행인과 법행인과 8인은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벽지불을 성취하게 되고,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보살마하살을 성취하게 되며, 이 깊은 반야바라밀 안에서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나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또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이때 모든 욕계ㆍ색계의 천자들은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부처님을 돌고는 떠나갔으며, 떠나간 지 오래지 않아 홀연히 보이지 않더니 저마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하는 이면 어디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났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하면, 마음이 침몰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기뻐하면서 듣기를 좋아하고 들은 뒤에는 기억하며, 끝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서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안에도 끝내 버리거나 잊지 않으면서 항상 법사를 따르리니, 마치 갓 낳은 송아지가 그 어미소를 떠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기 위하여 끝내 법사(法師)를 멀리 여의지 않으며, 나아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바른 소견에 통달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보살은 인도(人道) 안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이 인간 안에 와 났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는 전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써서 받아 지니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는 번기ㆍ일산으로 공양했기 때문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인간 가운데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 안에 와 나서는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고 이해한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릇 어떤 보살마하살로서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고서 다른 세계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는 이 세간으로 와 나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즉시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는 이도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보살로서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고 다른 세계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며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즉시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는 이가 있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다른 국토[他方]에 계신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믿고 이해하면서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와 났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바로 전생에 공덕을 성취한 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미륵(彌勒)보살마하살로부터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으며 그런 선근의 인연 때문에 이 세간에 와 난 이도 있느니라.
수보리야, 다시 어떤 보살마하살은 전생에 비록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는지라 인간 안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는 마음에 의심과 후회가 있어 깨치기 어렵느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은 보살은 전생에 비록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다 하더라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하여 뉘우침과 후회를 내며 깨치기 어려운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선바라밀(禪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전생에 비록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며, 지금 세상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는 것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전생에 비록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므로 이 인간 안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어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며 깨치기가 어렵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전생에 비록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과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으므로
이 인간에 와 나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어도 역시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과 후회가 생기며 깨치기가 어렵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전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그 안의 일을 묻지도 않으면서 행하지도 않았으므로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났을 때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하루ㆍ이틀ㆍ사흘ㆍ닷새 동안은 그 마음이 견고하여 무엇으로도 파괴될 수 없다 하여도, 만일 들었던 법을 여읠 때에는 이내 물러나고 상실하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전생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을 때에 비록 그 안의 일을 물었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어느 때는 듣고 싶어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듣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하면서, 마치 가벼운 털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듯 그 마음이 경솔하여 견고하지 않으며 뜻이 어지럽고 안정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이 보살은 뜻을 낸 지도 오래지 않고 선지식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지도 않았고 전생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았으며,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고 선바라밀을 배우지 않았으며, 비리야바라밀을 배우지 않고 찬제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시라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고 단바라밀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배우지도 않았고,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배우지도 않았으며,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5신통과 부처님의 10력을 배우지 않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배우지도 않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새로 대승(大乘)의 뜻을 내었으나 믿음이 적고 즐거움도 적기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쓸 수도 없으며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거나 해설하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도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고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지도 못하며 해설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으면 역시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보호되지도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도 못하느니라.
이 사람은 또한 깊은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지 않으니, 이런 이는 2지(地), 곧 성문의 지위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느니라.
왜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않으며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설하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기 때문이니, 이런 이 역시 깊은 반야바라밀에 보호되지 않느니라. 또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2지(地) 가운데 하나의 지에 떨어질 것이니라.”
【論】【문】위에서 누누이 이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은 인연을 말씀하셨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거듭하여 말씀하시는가?
【답】곳곳에서 매우 깊은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이익된 것이 많이 있는데도 범부는 그런 줄을 모르고 거듭하여 말씀하신다고 여긴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나라의 왕에게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여러 해 천신지지(天神地祇)1)에 기도를 했는데도 해가 지나도 효험이 없다가 마침 왕이 밖으로 출행(出行)하고 없을 때에 그 부인이 남아를 해산한 것과 같다.
그 소식을 가지고 간 이가 왕에게 아뢰기를 “대부인(大夫人)께서 남아를 낳으셨습니다”고 하자, 왕은 듣고 기뻐하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열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그 사자(使者)가 왕에게 말하기를 “조금 전까지 아뢴 말씀을 왕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말하기를 “나는 잘 들었다. 하도 오랜만에 원이 성취됐으므로 마음속이 기쁘고 그 말이 듣기 좋아서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고 하면서, 곧 관리에게 명하여 이 사람에게 백만 냥의 돈을 주게 하였으니, 한 번 말할 때의 값을 10만 냥씩 쳐 준 것이다. 왕이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적에 그의 말마다 그 속에는 이익이 있었던 것이요, 거듭하여 말한 것이 아닌데도 모르는 사람은 거듭하여 말했다고 여긴다.
곳곳에서 매우 깊음을 말씀할 때도 역시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보살과 수보리에게
큰 이익이 있음을 알도록 해주신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깊은 반야를 들으면서도 그 맨 밑까지 얻지 못하고 갈수록 심히 깊다함을 깨달을 뿐이며, 듣는 이들은 곳곳에서 매우 깊은 법을 들으면 선정과 지혜의 이익 등을 얻고 있는데도 범부들은 거듭하여 말씀하신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깊고 얕은 것은 일정함이 없고 중생에 따라 다르다. 이해한 이는 깊은 것이 없거니와 이해하지 못한 이는 깊다고 여긴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두루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항상 ‘매우 깊다’고 말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매우 깊다고 말씀하시나 그 매우 깊은 모양이 일정한 모양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일정하게 매우 깊다면 능히 행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말씀하시되 “보살이 반야가 매우 깊다고 여기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은 인연을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 하신다.
이른바 ‘큰 일[大事]을 위하여 일어났고, 나아가 무등등한 일[無等等事]을 위하여 일어났다’고 함의 큰일 등에 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큰일 등에 관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포함한다”고 하신 것이다.
【문】다섯 가지 바라밀 등은 저마다 그 모양이 다르거늘 어찌하여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시는가?
【답】여기에 대한 설명은 경전에 다 포함되어 있다.
또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은 반야바라밀과 화합하여 방편으로 회향(迴向)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법으로 부처님의 도에 이르게 된다.
관정왕(灌頂王)은 부처님과 같은 이요, 국사(國事)는 바로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며, 대신(大臣)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맡기고 의지하여 갖가지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선정에 편히 계시면서 쾌락을 누리고 할일이 없으신 것이다. 또 마치 마른 초목을 없애려고 할 때 불을 붙여 던져 놓으면 그 불의 힘으로 모두가 다 타버리므로 사람은 그것을 치울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물질 등의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포함하고 있다 한다. 처음에 물드는 것[染]을 취(取)한다 하고
갈애를 내는 것을 집착[著]한다고 한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떻게 반야는 물질 등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포함하고 있다 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네 개의 답(答) 가운데서 반문(反問)하시면서 대답하시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혜의 눈으로써 이 물질 등의 법을 취할 수도 있고 집착할 수도 있다고 보느냐”고 하셨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지혜의 눈으로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고 한량이 없고 불가사의한 모양을 본다 하면 어떻게 취하고 집착할 만하며 정해진 물질의 모양[色相]이 있다고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며, 부처님께서는 그가 하는 말을 옳다고 여기면서 “그대는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으므로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보지 못하거니와 나는 일체지를 지닌 이로되 역시 물질 등의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고 하시고 이 때문에 칭찬하시면서 “훌륭하다”고 하셨다.
이때에 모든 천자들은 반야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를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이 모두 신행(信行)ㆍ법행(法行) 내지는 벽지불이 되어 지(智)와 단(斷)을 짓는다면……”이라고 했다. 이 지는 10지(智)이다. 단은 두 가지의 단이 있나니, 남은 것이 있는[有殘] 단과 남은 것이 없는[無殘] 단이다. 배울 것이 있는 사람[有學人]은 남은 것이 있는 단이요,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人]은 남은 것이 없는 단이다.
이 보살이 하루 동안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모든 성현의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은 모두 보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기 때문이다.
【문】만일 모든 성현의 지덕과 단덕이 곧 무생법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답】신행(信行) 등의 사람은 대비(大悲)가 없고 중생들을 버리기 때문에 못하다는 것이니, 방편의 힘도 없고 열반에서 스스로 되돌아올 수가 없다. 비유하건대 마치 모든 물들이 항하(恒河)에 모여들어 다 함께 큰 바다에 들어가는데 바다에 들어갈 때에 물살이 센 곳에 중생이 있게 되면 그는 되돌아올 수가 없고 오직 큰 힘을 지닌 이라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그 밖의 모든 성현들이 지덕ㆍ단덕을 성취했다 해도
보살이 처음에 무생법인을 얻으면 그 힘이 그보다 더하나니, 이 때문에 수승하다고 한다. 비록 지단(智斷)의 공덕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보살이 처음 얻는 법인에 미치지 못함은 마치 대신의 공업(功業)이 크다 하더라도 태자(太子)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은 바로 소승의 첫 문이요, 보살의 법인은 대승의 첫 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이 마침내 이루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보살이 처음 도에 들어가는 문[初入道門]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처님을 이루는 것이랴.
【문】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은 소승이요, 보살은 대승이거늘 어떻게 2승(乘)의 지단(知斷)이 곧 보살의 무생법인이라 하시는가?
【답】반연할 것[所緣]이 동일하고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도 또한 동일하거니와 예리하거나 둔한 지혜만이 다르다. 또 한량없는 공덕과 대비의 마음으로 수호하기 때문에 그 밖의 갖가지 해설보다 뛰어난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을 찬탄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다.
하(下)는 반야바라밀을 듣고 곧바로 믿으면서 받아들이되 그 안의 이치를 묻지 않는 이요, 중(中)은 들은 뒤에 그 이치를 물으면서도 행하지는 못하는 이며, 상(上)은 듣고 이해하면서 능히 행하는 이다.
하는 비록 사람 몸이 되어 반야를 듣는다 하더라도 의심하고 후회하면서 깨치기가 어려운 이니, 근기가 둔하고 복이 박하기 때문이다. 중은 사람 몸을 받아 반야를 듣고는 일심으로 믿고 좋아하면서 그 이치를 잘 알아 하루에서 나흘이나 닷새까지는 마음이 견고하지만 그날을 지난 이후에는 믿고 좋아하지 못하며, 혹은 듣고 싫어하기도 하고, 혹은 들으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생에 비록 그 이치를 이해하기는 했으나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기가 둔하고 복이 박하기 때문이다. 상은 사람 몸을 받아 반야를 들으면 마음으로 곧 깊이 이해하며 믿고 좋아하면서 버리지 않으며 항상 법사를 따르는 이다.
앞의 두 보살은 높은 지위[上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2승에 떨어져야만 하니, 반야의 수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런 일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후품(後品) 가운데서 비유를 드시는데,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배가 침몰될 적에 만일 의지할 것을 얻으면 건너갈 수 있거니와 만일 의지할 것을 얻지 못하면 건너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51. 비유품(譬喩品)을 풀이함

【經】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배가 침몰될 때에 그 배에 탔던 사람이 만일 나무토막이나 기물(器物)ㆍ공기주머니[浮囊]를 잡지 못하고 또는 죽은 시체라도 붙잡지 못하면, 수보리야, 이 사람은 저편 기슭에 이르지 못하고 바다 속에 빠져서 죽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배가 침몰될 때에 그 배에 탔던 사람이 나무를 붙잡았거나 기물이나 공기주머니 또는 죽은 시체라도 붙잡는다면 이 사람은 끝내 빠져 죽지 않고 안온하고 장애 없이 저편 기슭에 도달할 수 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도 그와 같아서 만일 믿고 좋아함만 있을 뿐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거나 선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거나, 나아가 일체종지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고 바르게 기억하지도 않으면, 수보리야, 이 선남자는 중도(中道)에 시들며[衰耗] 이 사람은 일체종지에 이르지도 못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서 증득하게 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까닭에 믿음이 있고 참음이 있고 맑은 마음이 있고 깊은 마음이 있으며, 의욕이 있고 이해가 있고 버림이 있고 정진이 있다면, 이 사람은 깊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서사하여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며 바르게 기억할 것이니라.
이 선남자ㆍ선여인에게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까닭에 모든 믿음[信]ㆍ참음[忍]ㆍ청정한 마음[淨心]ㆍ깊은 마음[深心]ㆍ의욕[欲]ㆍ이해[解]ㆍ버림[捨]ㆍ정진(精進)이 있으니, 깊은 반야바라밀에 보호를 받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에 보호되기 때문에 마침내 중도에서 시들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남자나 여자가 굽지 않은 질그릇 병에 물을 담으면 이 병은 오래지 않아 부스러져 버릴 줄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이 병은 아직 구어지지 못했으므로 도로 흙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이 있고 참음이 있고 청정한 마음이 있고 깊은 마음이 있고 의욕이 있고 이해가 있고 버림이 있고 정진이 있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에 수호되지 못하며,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하면, 수보리야, 이 사람은 중도에 시들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질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남자나 여인이 잘 구워진 질그릇 병에다 강이나 우물이나 못이나 샘에서 물을 담아간다면 이 병에는 물이 잘 담겨 있을 줄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이 병은 잘 구워졌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서 모든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이해와 버림과 정진이 있으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선정ㆍ정진ㆍ인욕ㆍ계율ㆍ보시 내지는 일체종지에 수호되는 까닭에 수보리야, 이 사람은 중도에서 시들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닷가에 배가 있을 적에 잘 보수하지 않고 재물을 가져다 그 위에 싣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이 배는 중도에 가다가 파괴되어 침몰하면서 배와 재물이 다 흩어져서 없어지리니, 이것은 바로 장사꾼들이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중한 보물들을 잃는 것이라고 알지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마음에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버림과 정진이 있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까지 수호되지 못하는 까닭에 수보리야, 이 사람은 중도에서 시들어 크고 값진 보물을 잃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크고 값진 보물[大珍寶]이란 이른바 일체종지요, 시든다 함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지혜와 방편이 있으므로 바닷가에서 큰 배를 잘 수리한 뒤에야 물에다 띄워 놓고 재물을 그 위에다 싣고 가는 것과 같으니, 수보리야, 이 배는 중도에서 파괴되지도 않고 반드시 안온하게 목적한 곳에 도달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이해와 버림과 정진이 있으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선정ㆍ정진ㆍ인욕ㆍ지계ㆍ보시 내지는 일체종지에 수호되기 때문에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될 것이요, 중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이가 120살이라 늙어서 쇠약한데다 풍병ㆍ냉병ㆍ열병과 그 합병증이 있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평상에서 일어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혹 일어난다 해도 어떻게 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이 사람이 설령 일어난다 해도 10리(里)나 20리를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늙고 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아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마음에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이해와 버림과 정진이 있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중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질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마치 앞의 120살 노인은 늙고 쇠약한 데다 풍병ㆍ냉병ㆍ열병과 그 합병증을 앓고 있으므로 이 사람이 일어나 가려고 하면 양쪽에서 건강한 사람들이 저마다 한 팔씩 부축하고는 말하기를 ‘어려워하지 마시고 가고 싶으신 대로 가십시오. 우리들 두 사람이 잘 붙잡고 놓지 않겠습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과 참음과 청정한 마음과 깊은 마음과 의욕과 이해와 버림과 정진이 있으면 그는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므로 이 사람은 중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목적한 곳에 이르게 되나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論】해석한다. 보살에는 두 종류가 있나니, 첫째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은 이요, 둘째는 비록 아직 실상을 얻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도 가운데에 믿음이 있고 참음이 있으며, 청정한 마음이 있고 깊은 마음이 있으며, 의욕이 있고 이해가 있으며 버림이 있고 정진이 있는 이다.
믿음[信]이란 죄복의 업 인연과 과보를 믿으면서 6바라밀을 믿고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록 부처님 도를 믿으면서 생각하고 헤아린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참아내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참음[忍]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참는다 하더라도 삿된 의심을 아직 못 끊기 때문에 마음이 흐리고 깨끗하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청정함[淨]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믿고 참으면서 마음이 청정하다 하더라도 얕은 것이 있고 깊은 것도 있나니, 이 때문에 깊은 마음[深心]이라 한다.
네 가지 일의 인연 때문에 일심으로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으려 하면서 그 밖의 일은 바라지 않나니, 이 때문에 의욕[欲]이 있다고 한다.
분명하게 결정하면서 위없는 도를 아는 것을 큰 것으로 삼고 그 밖의 세간의 일은 작은 것으로 삼나니, 이 때문에 이해[解]가 있다고 한다.
의욕[欲]과 이해[解]로 마음을 다스려서[定心] 재물을 버리며 그리고 모든 나쁜 마음과 간탐과 성내는 등의 번뇌를 버리나니, 이 때문에 버림[捨]을 말한다. 버렸기 때문에 항상 정진(精進)할 수 있고,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이 있게 된다.
만일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고 몸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마칠 때에 삿된 이에게 파괴당하면 보살의 도를 잃게 되며, 세간의 공덕 때문에 세간의 과보를 받고 그런 뒤에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므로 위없는 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배는 수행하는 이의 몸을 말하고 공기주머니[浮囊] 등의 물건은 반야의 방편을 말하며, 병(甁)은 보살의 도를 말하고, 반야의 방편은 물을 말한 것이니, 아직 반야의 방편과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6바라밀 공덕의 물을 받아 지니면서 위없는 도에 이르지 못한다.

‘배를 보수하지 않는다’ 함은 이 보살이 방편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 등의 공덕은 보물이요, 이 다섯 가지 바라밀 등의 모든 착한 법은 배[船]이며, ‘배와 보물이 처소를 달리하면서 흩어진다’는 것은 본래의 서원과 어긋나면서 혹은 인간ㆍ천상의 즐거움을 받기도 하고, 혹은 2승(乘)에 떨어지는 것이다.
‘큰 이익’이라는 것은 이른바 일체지(一切智) 등 부처님 법의 보배이다. ‘늙고 병든 사람’은 바로 믿음 등의 공덕이 있는 보살이다. 62종의 삿된 소견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늙음이라고 말하며, 108 등의 모든 번뇌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병이라 한다.
‘평상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함은 ‘삼계(三界)의 평상으로부터 일어나 나는 부처님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삿된 소견과 번뇌의 인연 때문에 보살의 도를 이루지 못한다.
‘두 사람’이라 함은 반야와 방편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삿된 소견과 번뇌와 쓸모없는 이론을 없애면서 필경공(畢竟空) 가운데에 이르게 하며, 방편으로는 장차 필경공마저도 벗어나게 한다.
【經】그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그대는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부처님에게 이런 일을 묻는구나.
수보리야,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마음으로써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욕됨을 참고 정진하며 선정에 들고 지혜를 닦는다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보시할 때에 생각하기를 ‘나는 바로 시주(施主)요, 나는 이 사람에게 보시하며 나는 이 물건을 보시한다. 나는 계율을 지니고 나는 인욕을 닦으며, 나는 정진하고 나는 선정에 들며, 나는 지혜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런 보시가 있고, 이것이 나의 보시이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이런 지혜가 있고, 이것이 나의 지혜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단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니 이 언덕[彼岸]과 저 언덕[彼岸]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나니, 왜냐하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이 언덕을 알지 못하고 저 언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이 사람은 단바라밀로부터 일체종지까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며 살바야(薩婆若)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부처님 도를 구하는 사람에게 방편이 없는 것이더냐?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사람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방편이 없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닦는다면 이 사람은 생각하기를 ‘나는 보시한다, 이 사람에게 보시한다, 이 물건으로써 보시한다’고 하며, ‘나는 계율을 지니고 인욕을 닦으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선정에 들어가며 이처럼 지혜를 닦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런 보시가 있고, 이것이 내가 한 보시이다’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보시로써 스스로 뽐내느니라. ‘이런 계율이 있고 이것이 내가 지닌 계율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런 계율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런 인욕이 있고 이것이 나의 인욕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런 인욕으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런 정진이 있고 이것이 내가 한 정진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런 정진으로써 스스로 뽐내며, ‘이런 선정이 있고 이것이 내가 닦는 선정이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뽐내며, ‘이런 지혜가 있고 이것이 내가 닦은 지혜이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뽐내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단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읜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의 모양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찬제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의 모양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선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언덕을 알지 못하고 저 언덕을 알지 못하면, 이런 사람은 단바라밀에 보호받지 못하고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에 보호받지 못하며, 나아가 일체종지에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성문의 도(道) 가운데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면서 살바야(薩婆若)에 이르지 못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성문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기도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수호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 가운데에 떨어지지도 않고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겠느냐?
수보리야, 보살은 처음부터 방편의 힘으로써 보시하되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 없이 보시하며, 나아가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 없이 지혜를 닦느니라. 이 사람은 ‘나에게는 이런 보시가 있고, 이것이 바로 내가 한 보시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런 보시로써 스스로 뽐내지 않느니라.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이 하느니라.
이 보살은 ‘나는 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이 사람에게 이런 물건으로써 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계율을 지니며 이런 계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인욕하며 이런 인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정진하며 이런 정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선정을 닦으며 이런 선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지혜를 닦으며 이런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단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단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찬제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며,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선바라밀의 모양이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 보살마하살은 이 언덕을 알고 저 언덕을 아느니라. 이 사람은 단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고, 시라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며, 찬제바라밀에 보호받게 되고, 비리야바라밀에 보호받게 되며, 선바라밀에 보호받게 되고, 반야바라밀에 보호 받게 되며, 나아가 일체종지에 보호 받게 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고 살바야에 이르게 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보호받게 되므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으며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느니라.”
【論】해석한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다시 허물이 되는 행의 인연을 말씀하셨다. 보살은 비록 믿음[信]의 착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역시 가장 높은 법을 얻지 못하나니, 이른바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분별함이 없고 모양을 멀리 여의었기에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데도 분별하고 집착하면서 행하니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위에서 부처님께서는 비록 방편이 없는 이치는 말씀하셨으나 방편이 없는 이름은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일을 분명히 알게 하려고 수보리에게 명하시되 “어떤 것이 방편이 있고 방편이 없는 것이더냐”고 하시고, “안으로는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온갖 법이 공한 줄 관하면서 모양을 취하지 않는 것이 반야의 방편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로 보살을 수호하기 때문에 방편이 있다”고 하신다.
‘수호한다’ 함은, 다섯 가지 바라밀 편에서는 공덕의 힘을 얻는 것이요, 반야바라밀 편에서는 지혜의 힘을 얻는 것이니, 이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도(道)를 잃지 않는다.

52. 선지식품(善知識品)을 풀이함

【經】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새로 배우는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새로 배우는 보살마하살이 만일 반야바라밀과 선(禪)ㆍ정진(精進)ㆍ인욕(忍辱)ㆍ지계(持戒)ㆍ단(檀) 바라밀을 배우고자 하면 먼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해서 공양해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그에게 가르치기를 ‘그대 선남자여, 모든 보시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시오. 선남자여, 모든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시오.
그대는 물질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며, 단바라밀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고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마시오.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를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고 4념처(念處)와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며,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5신통(神通)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말고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18불공법까지를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물질을 취하지 않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취하지 않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며, 단바라밀로부터 반야바라밀까지를 취하지 않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요,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를 취하지 않고 4념처로부터 18불공법까지를 취하지 않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오.
선남자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을 탐내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선남자여, 이 물질은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탐내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선남자여,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탐내지 말고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를 탐내지 말며, 4념처로부터 8성도분까지를 탐내지 말고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5신통을 탐내지 말며,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일체종지까지를 탐내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일체종지는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선남자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를 탐내지 말고
벽지불의 도를 탐내지 말며, 보살의 법위(法位)를 탐내지 말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탐내지 말아야 하니,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이오’라고 하느니라.”
【論】【문】수보리는 새로 배우는 보살의 행할 것을 물었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보살이 오랫동안 행하는 미묘한 일인 이른바 온갖 법을 취하지 않는 것과 온갖 법의 성품은 공하다는 일로써 대답하시는가?
【답】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보살이 얻을 것이요, 둘째는 작은 보살이 배울 것으로서 마음을 조복시켜 인욕하고 지혜로써 발심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다만 작은 보살이 배울 공만을 설명한다.
또 진실한 지혜의 기분(氣分)이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보살로 치거니와 만일 없으면 비록 오랫동안 그 밖의 공덕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보살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께서는 성문 법 중에서 정법(頂法)의 모양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3보(寶)에 대하여 조그마한 믿음이 있으면 이것을 정법이라 한다. 이 믿음은 난법(煖法)보다 뛰어나며 선정을 닦아 생기는 색계(色界)의 마음으로써 부처님의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는 것이니, 이것은 작은[小] 것인데도 범부에 있어서는 큰[大]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새로 뜻을 낸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기미(氣味)를 얻기 때문에 교화를 받을 수 있고, 새로 배우는 이[新學]라 이름하며, 다섯 가지 바라밀의 공덕을 넘어서니, 범부에 있어서는 큰 것이나 부처님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곧바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면서 먼저 선지식을 가까이해서 공양하라고 가르치셨으니, 선지식은 그들을 위하여 다섯 가지 바라밀의 공덕을 설명하는 것이다.
선지식은 비록 갖가지로 교화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다만 그는 법을 파괴하지 않는다고만 일컬을 뿐이니, 이른바 물질 등의 모든 법을 탐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금시조(金翅鳥)의 새끼가 처음 태어나서도 한 수미산(須彌山)으로부터 다른 한 수미산에 이르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처음 배우는 이조차도 이와 같은 깊은 지혜를 내거늘
하물며 오래전부터 배운 이겠는가.
또 마치 작은 불로도 태울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불이겠는가.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새로 배우는 때에도 반야로써 세간의 법을 굴려 마침내 공하게 하고 모든 번뇌를 태울 수 있거늘 하물며 힘을 두루 갖춘 이겠는가.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어려운 일을 능히 하오니, 온갖 성품이 공한 법 가운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려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어려운 일을 능히 하나니, 온갖 성품이 공한 법 가운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려 하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온(安隱)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니라. 세간을 안락(安樂)하게 하기 위하고 세간을 구제(救濟)하기 위하며, 세간의 귀의(歸依)할 데가 되기 위하고 세간의 의지(依止)할 데가 되기 위하며, 세간의 섬[洲]이 되기 위하고 세간의 길잡이[將導]가 되기 위하며, 세간의 궁극의 도[究竟道]를 위하고 세간의 나아갈 곳[趣]이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6도(道)의 중생을 구출하여 두려움이 없는 언덕[無畏岸]인 열반의 처소에 다다르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락(安樂)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의 갖가지 근심과 걱정과 괴로움에서 구출하여 두려움이 없는 언덕인 열반의 처소에 다다르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구제(救濟)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이 나고 죽는 동안의 갖가지 고통에서 구제하고 또한 이 고통을 끊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설법하며 중생들이 법을 듣고 점차로 3승(乘)으로써 해탈하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귀의(歸依)할 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양과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법에서 구출하여 두려움이 없는 언덕인 열반의 처소에 다다르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귀의할 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의지할 곳[依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온갖 법의 의지할 데가 없음[無依處]을 설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의지할 곳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온갖 법은 의지할 곳이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이 상속(相續)하지 않는 것이 곧 물질의 생김이 없는[無生] 것이요 물질이 생김이 없는 것이 곧 물질의 소멸하지 않는[不滅] 것이며, 물질이 소멸하지 않는 것이 곧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의지할 곳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궁극의 도[究竟道]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물질의 궁극의 모양[究竟相]은 그것이 물질이 아니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의 궁극의 모양은 이것이 일체종지가 아니다’라고 이러한 법을 설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마치 궁극의 모양에서와 같이 온갖 법의 모양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궁극의 모양과 같다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물질의 궁극의 모양 가운데서는 분별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마지막 모양 가운데서는 분별이 없으며, 나아가 일체종지까지의 마지막 모양 가운데서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이것이 바로 물질이요, 이것이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며, 나아가 이것이 바로 일체종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물질의 궁극의 모양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의 궁극의 모양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나니, 이른바 그것이 바로 물질이요
나아가 그것이 바로 일체종지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에게 하기 어려운 일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양을 관찰하면서 마음이 침몰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이 모든 깊은 법을 나는 이와 같이 알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며, 이와 같이 고요히 사라진 미묘한 법을 중생들에게 설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궁극의 도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섬[洲]이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강이나 하천이나 큰 바다에서 사면으로 물이 끊어져 있는 것을 바로 섬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물질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앞뒤의 끝[際]이 끊어지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앞뒤의 끝이 끊어지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앞뒤가 끊어졌나니, 이 앞뒤의 끝이 끊어졌기 때문에 온갖 법도 또한 끊어졌느니라.
수보리야, 이 온갖 법의 앞뒤의 끝이 끊어졌기 때문에 곧 그것이 고요히 사라진[寂滅] 것이요, 곧 그것이 묘한 보배[妙寶]이니, 이른바 공하여 얻을 것이 없고 갈애가 다하여 남은 것이 없으며 욕망을 여읜 열반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고요히 사라진 미묘한 법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니,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섬이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길잡이[將導]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을 위하여 ‘물질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설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설하며,
‘12처(處)와 18계(界)와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5신통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설하고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까지와 벽지불의 도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설하며,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종지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고 설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길잡이가 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論】해석한다. 수보리는 희유하다는 마음을 내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모든 보살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대비(大悲)를 아직 갖추지 못했으며 아직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모든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알아 위없는 도의 마음을 내고 있으니, 이 일이야말로 매우 어렵습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그러하느니라”고 하시고 다시 보살의 희유한 인연을 찬탄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은 세간의 안온을 위하여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안온하다’ 함은, 온갖 번뇌를 깨뜨리고 마지막까지 변하거나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좋은 약은 병을 낫게 하므로 달고 쓴 것을 묻지 않으나 마침내는 병을 없애고 안온하게 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온하게 하신다.
‘한 세상이나 두 세상만의 세간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다’고 함은, 어떤 법은 비록 안온하다 하더라도 즐겁지 않으며 어떤 법은 이 세상에서는 괴롭지만 뒷세상에서는 즐거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쓴 약을 먹으면 뱃속은 안온하지만 입 안은 좋지 않은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과 뒷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주신다”고 한다.
6도(道)는 무상(無常)한 모양이기 때문에 안온한 데가 아니니, 이 때문에 “6도를 벗어나는 것을 안온하다고 한다”고 설한다.
‘세간의 즐거움’이란 인연(因緣)에 집착하기 때문에 오래된 뒤에는 반드시 근심과 고뇌를 생기게 하므로 즐거움이라 하지 않는다. 열반의 즐거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근심과 고뇌를 여의는 것을 즐거움이라 한다’고 설한다.
‘세간을 구제한다’ 함은, 사람이 원수나 도둑에게 쫓길 적에 친척이나 또는 관청의 힘으로 구제받는 것처럼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나쁜 죄나 모든 번뇌의 인연이나 악마의 백성에게 쫓길 적에는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법을 설하여 구호하신다.
‘세간이 귀의한다’ 함은, 마치 사람이 폭풍이나 소나기를 만나면 반드시 집 안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세간의 갖가지 삿된 소견과 번뇌와 몸과 마음의 안팎의 고뇌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등의 모든 근심과 고뇌가 있을 적에는 만일 부처님께 귀의하면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인연으로 그의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을 구제해 주신다.
‘의지하는 곳[依處]’이라 함은,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화합하는 인연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이 없고 의지할 수가 없거니와 중생은 괴로움에 핍박당할 적에는 부처님께로 와서 의지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의지함이 없는[無依止] 법을 설하신다.
‘의지함이 없는 법’이라 함은 바로 진실이니, 이른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물질 등의 5중(衆)은 소멸하면서 다시 상속(相續)하지 않나니, 상속하지 않는지라 그것은 곧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곧 그것은 마침내 공하여서 곧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문】만일 의지할 처소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의지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가?
【답】의지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애견(愛見) 등의 모든 번뇌로써 유위의 법에 의지하는 것이요, 둘째는 청정한 지혜로써 열반에 의지하는 것을 말하나니, 번뇌의 소견 때문에 의지하는 데가 없다고 말한다.
‘궁극의 도[究竟道]’라 함은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요 필경공이다. 물질 등의 법은 전제(前際) 안에도 없고 후제(後際) 안에도 없다. 현재(現在) 가운데서 범부는 억상분별(憶想分別)로 초래된 업과보(業果報)의 모든 정력(情力) 때문에 뒤바뀐 소견이 있거니와 성인은 지혜의 눈으로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고 관찰한다. 전제와 후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찰한다. 만일 먼저와 나중이 없다면 어떻게 중간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면 중생은 궁극의 첫째가는 도[第一道] 안에 편안히 있게 된다.

‘세간의 섬[洲]’이라 함은, 섬의 사면에는 땅이 없는 것처럼 물질 등의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앞뒤를 모두 얻을 수 없다. 중간도 마치 궁극의 도 가운데서 파괴한 것처럼 앞뒤의 공한 데에 들기 때문에 중간도 또한 공하다.
‘물[水]’이라 함은 3루(漏)2)와 4류(流)3)이다. 모든 번뇌와 업의 과보 안에는 온갖 법이 마침내 공하므로 취할 것이 없다. 이른바 열반이며, 이것이 바로 섬[洲]이다. 중생이 4류의 물속에 빠져 있을 적에 부처님께서는 8정도(正道)의 배로써 열반의 섬 위에 끌어다 놓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을 대하면서 제도하므로 길잡이[將導]라 한다.
【經】“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세간이 향하는 곳[趣]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을 위하여 ‘물질은 공을 향한다’고 설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공을 향한다’고 설하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공을 향한다’고 설하느니라. 중생들을 위하여 ‘물질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설하나니, 왜냐하면 이 물질의 공한 모양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설하나니, 왜냐하면 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공한 모양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일체종지는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설하나니, 왜냐하면 이 일체종지의 공한 모양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세간이 향해 가는 곳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느니라.
온갖 법은 공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공한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모양 없음[無相]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양이 없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지음 없음[無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지음 없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일어남이 없음[無起]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일어남이 없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있는 것이 없고[無所有]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고[不滅], 더럽지도 않고[不生], 깨끗하지도 않음[不淨]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고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꿈[夢]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꿈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허깨비[幻]를 향해 가며, 메아리[嚮]를 향해 가며, 그림자[影]를 향해 가며, 변화한 것[化]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변화한 것 등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한량없고 끝이 없음[無量無邊]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한량없고 끝이 없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주지도 않고[不與] 취하지도 않음[不取]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주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들지를 않고[不擧] 내리지도 않음[不下]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들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더하지도 않고[不增] 덜하지도 않음[不減]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음[不去]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들어가지 않고[不入] 나오지도 않고[不出] 합하지도 않고[不合] 흩어지지 않고[不散] 달라붙지도 않고[不著] 끊어지지도 않음[不斷]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들어가지도 않고 나아가 끊어지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나[我]와 중생(衆生)과 수명(壽命)과
사람[人]과 일어나는 이[起者]와 일어나게 하는 이[使起者]와 짓는 이[作者]와 짓게 하는 이[使作者]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나에서 아는 이, 보는 이에 이르기까지는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항상 있는 것[有常]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항상 있는 것도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즐거운 것[樂]과 깨끗한 것[淨]과 나[我]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즐거운 것과 깨끗한 것과 나를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항상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ㆍ깨끗하지 않음[不淨]ㆍ나 없음[無我]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과 깨끗하지 않은 것과 나 없음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탐욕의 일[欲事]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탐욕의 일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성내는 일[瞋事]ㆍ어리석은 일[癡事]ㆍ삿된 소견의 일[見事]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일과 삿된 소견의 일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여(如)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 가운데서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불가사의(不可思議)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법성과 실제와 불가사의한 가운데서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평등[平等]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평등한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동요 없는 모양[不動相]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동요하지 않는 모양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물질[色]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물질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을 향해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12처(處)와 18계(界)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단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시라는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찬제는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비리야는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선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는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내공(內空)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내공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외공(外空)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외공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과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내외공(內外空)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내외공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나아가 온갖 법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무법유법공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4념처(念處) 내지는 8정도분(正道分)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4념처 내지 8성도분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종지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일체종지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다원의 과위 내지 벽지불의 도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을 향해 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다원 내지 부처님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그 누가 믿고 이해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먼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하였고
선근이 무르익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선지식(善知識)을 따랐었나니, 이러한 사람들은 깊은 반야바라밀을 잘 믿고 이해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하는 이는 어떠한 성품[性]과 어떠한 모양[相]과 어떠한 모습[貌]을 하고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고 여의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성품과 모양과 모습이리니, 이런 보살마하살이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능히 믿고 이해하느니라.”
【論】【문】위의 여러 가지 일에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셨으면서 이제 향하는 곳[趣]에 대해서는 무엇 때문에 자세히 말씀하시는가?
【답】향하는 곳이란 통틀어 위의 아홉 가지 일이 모이는 데요 귀착점이니, 이 때문에 많이 설명하신다.
또 안락(安樂) 등과 향하는 곳이란 모두가 동일한 뜻이며 다 같이 중생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일마다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다할 수가 없을 것이며 향하는 일은 맨 뒤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신 것이니, 그 밖의 것도 모두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알아야 한다.
‘물질 등 법은 공을 향한다’ 함은, 허공이 마치 이름만 있고 법이 없는 것처럼 물질 등의 법도 또한 그러하여 마침내는 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모든 법의 궁극의 모양[究竟相]은 반드시 공이기 때문이니, 그 밖의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마치 사람이 처음에 착한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된 뒤에야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때에는 허공과 다름이 없나니, 앞에서의 것들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다만 범부는 뒤바뀐 과보 때문에 다르게 볼 뿐이니, 온갖 법은 공 등의 모든 모양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마치 사람이 허공을 벗어나려 해도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我] 등의 열여섯 가지 이름은 모두가 5중(衆)의 화합으로 인하여 임시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며 진실한 법이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과 향하는 것이 아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항상함[常]ㆍ청정함[淨]ㆍ즐거움[樂]ㆍ나[我] 등의 네 가지 뒤바뀜이 네 가지 성행[四聖行]을 파괴한다면, 여여한 항상함[如常] 등의 네 가지 법은 얻을 수 없으니,
뒤바뀐 생각이기 때문이듯이 물질 등의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다.
항상함 등을 얻을 수 없듯이 무상함 등도 항상함 등에서 나오기 때문에 또한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항상함 등을 향하고 무상함 등으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이 법은 매우 깊고 미세하거늘 그 누가 믿고 이해하겠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오랫동안 수행한 등의 인연으로 믿을 수 있다”고 하신다.
다시 묻기를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 등은 어떤 모양이 있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이 사람은 3독(毒)의 마음을 여의었으며 또한 여읜 것조차도 보지 않나니, 깊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었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문】이 사람은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했거늘 어떻게 3독을 끊은 이라 하시는가?
【답】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까지 끊은[根本斷] 것이요, 둘째는 조금만 끊은[薄少斷]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조금만 끊은 것을 말씀하신다. 수행하는 이는 ‘이것이 끊는 것이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분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번뇌의 모양은 뒤바뀌어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곧 끊음이니, 이 때문에 ‘여읜다[離]’고 말한다.

53. 취일체지품(趣一切智品)을 풀이함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마하살로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이해한 이는 어디로 향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이해한다면 일체종지로 향하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이 일체종지로 향할 수 있다면, 온갖 중생들이 귀의할 곳이 되나니,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닦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곧 온갖 모든 법을 닦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닦을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며, 수행[修]과 수행이 파괴됨[壞修]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 법을 파괴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壞修] 것이더냐?”
“세존이시여, 물질이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ㆍ12처(處)ㆍ18계(界)가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며, 나 내지는 아는 이ㆍ보는 이가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단바라밀이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이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며, 내공으로부터 무법유법공까지와 4념처로부터 18불공법까지와 수다원의 과위로부터 일체종지까지가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물질이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고 나아가 일체종지가 파괴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파괴되는 것이 되느니라.”
이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아비발치(阿鞞跋致) 보살마하살이라면 마땅히 경험으로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집착하지 않으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인 줄 알아야 하며,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에 집착하지 않고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論】【문】반야바라밀은 향하는 것도 아니고 향하지 않는 것도 아니거늘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반야를 행하는 이는 어디로 향해 가는지요”라고 물으며, 또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살바야(薩婆若)로 향한다’고 대답하시는가?
【답】외도(外道)는 말하기를 “모든 법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하고 전생에서부터 금생에로 들어오며, 이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런 항상하다[常]는 뒤바뀜을 파괴하기 위하여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수보리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묻고 부처님께서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대답하신다. 반야바라밀은 끝내 공한 것이라 모든 법에 대하여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나니, 막힘[障]도 없고 거리낌[礙]도 없는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같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깊은 반야바라밀을 이해하는 이는 일체종지로 향한다’고 한다.
수보리가 ‘보살로서 반야바라밀을 아는 이는 온갖 중생이 귀의할 데’라고 말한 것은 마치 아들이 고뇌로 핍박을 받을 때는 곧 부모에게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문】무엇 때문에 보살로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이해하는 이만이 중생이 귀의할 데라 하는가?
【답】보살은 중생들 가운데서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항상 반야바라밀을 닦아 익히고, 닦기 때문에 온갖 모든 법을 이해하면서 모두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나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온갖 법을 닦는 것이다.
반야는 정해진 실체로서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경에 말하기를 “닦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고 한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온갖 모든 관(觀)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받지 않나니, 이것을 바로 ‘수행을 받지 않는다[不受修]’고 한다.
‘수행이 파괴된다[壞修]’고 함은, ‘온갖 법은 덧없어서 흩어지고 파괴되기 때문에 수행이 파괴된다’고 한다. 파괴될 수 있는 법은 이른바 물질 등 내지는 일체종지까지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하는 말을 옳다고 하신다.
상품(上品)에서는 아직 아비발치 보살의 성품과 모양과 모습을 말씀하지 않으셨거니와 지금은 시험삼아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집착하는가, 않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만일 집착하고 있다면 곧 아니요, 만일 집착하지 않고 있다면 곧 그것이 그 모양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에게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온갖 법이 필경공(畢竟空)임과 반야 또한 원래 공함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반야도 공한 줄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전 가운데서 ‘시험삼아 집착하는가,
않는가를 알아보라’고 하신다.
【經】“만일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다른 사람의 말을 긴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않느니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면 탐내는 마음[欲心]과 성내는 마음[瞋心]과 어리석은 마음[癡心]에 끌리지 않고,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면 6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며,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을 들을 때에 마음이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으면서 기뻐하고 듣기 좋아하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이런 보살은 전생에 이미 이 깊은 반야바라밀 안의 일을 물었으며 그런 뒤에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는 줄 알아야 하리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큰 위덕(威德)이 있기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으면서 기뻐하고 듣기 좋아하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한다면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종지를 수순(隨順)하는 마음으로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일체종지를 수순하는 마음으로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으로써 수순하는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모양이 없고[無相] 지음이 없고[無作]
있는 것이 없고[無所有] 나지 않고[不生] 없어지지 않고[不滅] 더럽지 않고[不垢] 깨끗하지 않는[不淨] 것으로써 수순하면서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며, 마치 꿈ㆍ허깨비ㆍ아지랑이ㆍ메아리ㆍ변화와 같은 것으로써 수순하는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공으로써 수순하고 나아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써 수순하는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어느 법의 물질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일체종지를 행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곳에는 짓는 법이 없고 파괴되는 법도 없으며 어디서 온 데도 없고 또한 가는 데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기 때문이니, 이 법은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느니라.
만일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면 이 법은 얻을 수가 없어서 물질로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로도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물질이 곧 살바야요 살바야가 곧 물질이며, 나아가 일체종지가 곧 살바야요 살바야가 곧 일체종지이기 때문이니, 물질의 여한 모양[如相] 내지는 일체종지의 여한 모양, 이는 모두 일여(一如)이어서 둘이 없고 구별도 없느니라.”
【論】해석한다. 아비발치 보살이 말하는 일은 다른 이가 한 말 가운데서 기억한 것이 아니다. 이 가운데에는 진실한 것과 진실하지 않은 것이 있나니,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在家] 사람은 5욕(欲)에 집착하여 속임수를 쓰고 청정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며, 출가한 외도(外道)는 모든 삿된 소견으로 진실하지 않는 데에 집착한지라 이들이 말한 것은 모두 진실한 일이 없나니, 이 때문에 믿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었기 때문에 아무리 부처님 몸이 와서 모든 법의 실상을 파괴하는 말을 한다 해도 믿지 않으며, 무위(無爲)의 법을 얻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고 정중하면서 다시는 다른 데로 옮아가지 않는다.

이 보살은 비록 아직 부처님 도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탐욕 등의 모든 번뇌를 꺾고 얇게 했으므로 끄달리지 않으면서 마음에는 항상 6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착한 법의 과보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항상 좋아하면서 6바라밀을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깊은 반야를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기뻐하면서 듣고는 읽고 외우려 하며 뜻을 물으면서 닦아 익힌다.
마치 격렬한 천둥소리에 작은 새들은 두려워하고 죽게 되거니와 공작새 등의 큰 새는 기뻐하면서 춤을 추며 놀듯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삿된 소견 지닌 범부는 듣고 두려워하거니와 아비발치 보살은 아무리 들어도 기뻐하면서 마음에 싫증냄이 없나니, 이 때문에 “기뻐하면서 듣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 보살은 과거 세상에 이미 반야바라밀을 들었고 많은 모든 복덕과 지혜를 쌓았기 때문에 큰 위덕이 있으며 큰 위덕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이 보살이 비록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비록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반야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거늘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일체종지를 수순(隨順)하는 마음으로써 하느니라”고 하신다.
【문】이 보살은 아직 일체종지를 얻지 못했거늘 어떻게 수순할 수 있는가?
【답】그 때문에 말씀하시되 “필경공에 수순하는 마음이면 곧 일체종지에 수순하는 마음이다”고 하신다. 일체종지는 바로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다.
부처님께서는 후품(後品) 중에서 말씀하시되 “온갖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 바로 일체종지이다”고 하신다. 이 때문에 ‘필경공에 수순하면 곧 일체종지에 수순하는 것이다’고 한다. 모양[相] 없음, 지음[作] 없음, 허공, 생김[生] 없고 소멸함[滅] 없음, 더러움[垢] 없음, 청정함[淨] 없음, 꿈과 같음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다.
그때에 수보리는 묻기를 ‘필경공에 수순하는 마음으로 어떠한 법을 관(觀)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물질 내지는 일체종지를 관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지혜로써 진실한 일을 구하려 할 적에 물질 등의 유위(有爲)의 짓는 법은 모두가 허망하거니와 일체종지는 바로 진실한 법이요, 진실한 법이기 때문에 유위의 법을 지나며 유위의 법을 지나기 때문에 이 법은 지음이 없다고 하느니라”고 하신다.
지음이 없다[無作]는 것은 파괴가 없는[無壞] 법이다. 파괴가 없는 이 법은 6바라밀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 데도 없다”고 하고, 부처님의 법 중에 들지 않기 때문에 “가는 데도 없다”고 한다.
유위이면서 거짓되고 속이기 때문에 무위의 법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에 또한 머무르지 않으며, 5중(衆)이 화합하기 때문에 6도(道)의 수괴(數壞)가 있게 되거니와 5중이 상속(相續)하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다. 헤아릴 수 없고 한량이 없기 때문에 곧 언어(言語)의 길이 끊어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물질 등의 모든 법을 행하는 것으로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스스로 그의 인연을 말씀하시되 “물질 등의 모든 법이 곧 살바야(薩婆若)요, 살바야가 곧 물질 등의 모든 법이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물질 등 모든 법의 여(如)는 곧 살바야의 여요, 살바야의 여는 곧 물질 등의 모든 법의 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여는 둘이 없고 구별도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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