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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1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69권

by Kay/케이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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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69

 

 

대지도론 제69권

47. 양불화합품을 풀이함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신심(信心)도 있고 선행(善行)도 있으므로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받으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게 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신심도 없고 파계(破戒)와 악행(惡行)을 하면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받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신심도 있고 선행도 있는데, 법을 설할 이가 신심도 없고 파계와 악행을 해서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한 이는 온갖 것으로 잘 보시하면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는데, 법을 들을 이가 인색하면서 보시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온갖 것으로 잘 보시하면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는데, 법을 설할 이가 법에 인색하면서 보시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설법하는 사람에게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살림에 필요한 것을 공양하려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그런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법을 들을 사람에게 의복과 기타 살림에 필요한 것을 공양하려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그런 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쉽게 깨치는데, 법을 들을 이가 어둡고 둔하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쉽게 깨치는데, 법을 설할 이가 어둡고 둔하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12부경(部經)이 그렇게 차례지어진 이치, 이른바 수투로(修妬路)에서 우파제사(優波提舍)에 이르기까지를 아는데, 법을 들을 이가 12부경이 그렇게 차례지어진 이치를 알지 못하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12부경이 그렇게 차례지어진 이치를 아는데, 법을 설할 사람이 12부경이 그렇게 차례지어진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6바라밀을 성취했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6바라밀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6바라밀이 있는데, 법을 설할 이가 6바라밀이 없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6바라밀에서 방편의 힘이 있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6바라밀에서 방편의 힘이 없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6바라밀에서 방편의 힘이 있는데, 법을 설할 사람이 6바라밀에서 방편의 힘이 없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사람은 다라니(陀羅尼)를 얻었는데, 법을 들을 사람은 다라니가 없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다라니를 얻었는데, 법을 설할 이가 다라니가 없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고 바르게 기억하게 하려 하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려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읽고 외우며 해설하려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반야바라밀을 쓰도록 하지 않고 나아가 해설하도록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탐욕ㆍ성냄ㆍ게으름ㆍ들뜸ㆍ후회ㆍ의심을 여의었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탐욕ㆍ성냄ㆍ게으름ㆍ들뜸ㆍ후회ㆍ의심이 있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탐욕ㆍ성냄ㆍ게으름ㆍ들뜸ㆍ후회ㆍ의심을 여의었는데 법을 설할 사람이 탐욕ㆍ성냄ㆍ게으름ㆍ들뜸ㆍ후회ㆍ의심이 있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적에 어떤 사람이 와서 3악도(惡道) 중의 고통의 참혹함을 설명하면서
‘그대는 어째서 이 몸으로 괴로움이 다하는 열반에 들지 않고 무슨 필요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의지하려 하는가’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할 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사천왕(四天王)의 모든 하늘을 찬탄하고 삼십삼천(三十三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타천(兜率陀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ㆍ범천(梵天)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을 찬탄하며, 초선(初禪)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을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욕계(欲界) 안에서는 5욕의 쾌락을 받고 색계(色界) 안에서는 선정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받으며 무색계(無色界) 안에서는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받기는 하되 이런 일도 역시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나가 없어서[無我] 변하는 모양이요 다하는 모양이요 흩어지는 모양이요 여의는 모양이요 소멸하는 모양이거늘 그대는 어째서 이 몸 가운데서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취하지 않은 채 무엇하러 이 세간의 생사 가운데서 갖가지 고통을 받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있는가’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한 몸뿐이라 매임[累]이 없고 자유자재하여 거리낌이 없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한 몸뿐이라 매임이 없고 자유자재하여 거리낌이 없는데, 법을 설할 이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가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면 그대에게 반야바라밀을 주어서 쓰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도록 하겠거니와 만일 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대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여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읽고 외우고 해설하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재물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주어서 쓰고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도록 하려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이런 인연 때문에 그로부터 받으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재물의 이익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읽고 외우고 해설하려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이런 인연 때문에 주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읽고 외우거나 해설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생명이 위험한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따라가려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은 이는 생명이 위험한 다른 지방으로 가려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기아로 곡식은 귀하고 물은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들을 이는 기아로 곡식은 귀하고 물은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풍요하고 쾌락이 있는 다른 지방으로 가려하고 법을 들을 이가 그를 따라가려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이양을 위하여 나를 따라 가는데 그대는 잘 생각하셔서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뒷날 후회가 없게 하시오’라고 할 적에 이 조그마한 인연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며, 법을 들을 이가 그의 말을 듣고 싫증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가려고 하지 않는구나’라고 하면서 그만두고 따라가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가 넓은 들판을 지나가려 할 적에 도둑의 두려움과 전다라의 두려움과 사냥꾼의 두려움과 거친 짐승과 독사의 두려움이 있는 데도 법을 들을 이가 따라가려 하므로 법을 설할 이는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려 하는가. 그 안에는 도둑의 두려움에서 독사의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많은 두려움이 있다’라고 하자, 법을 들을 이가 그런 말을 듣고는 ‘그는 함께 반야바라밀을 쓰고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며 마음으로 싫어하면서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데, 이런 조그마한 인연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단월(檀越)들이 많이 있으므로 자주 찾아가는데 이런 인연으로써 법을 들을 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이 있어서 그에게 가보아야겠다’고 하자, 법을 들을 사람이 그의 뜻을 알고 곧 그만두어버리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論】【문】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계율을 범하는데 혹 이런 일은 있을 수 있거니와 만일 믿지 않으면 어떻게 그로부터 법을 받을 것인가?
【답】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이 이른바 필경공임을 믿지 않으면서도 다만 이름만을 구하려고 짐짓 읽고 외우며 널리 해설할 뿐이니, 마치 부처님의 제자가 외도의 경서(經書)를 믿지 않으면서도 역시 남을 위해 강설(講說)하는 것과 같다.
또 깊은 마음으로 반야를 믿고 좋아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지 아예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자의 법으로는 마땅히 스승에게 공양하고 온갖 것을 바쳐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스승이 잘 보시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제자는 생각하기를 ‘스승은 조그마한 물건조차도 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몸을 버리겠는가. 비록 보시를 찬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속임수이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는 4사(事)1)로써 스승에게 공양하려 하는데, 스승이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므로 받지 않기도 하고 혹은 법을 파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부끄러이 여기면서 받지 않기도 한다.
혹 스승은 아는 것이 많고 모자란 것이 없으므로 제자에게 물건을 공급하게 되면 그 제자는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내가 스승의 옷과 밥을 탐내는 까닭에 법을 받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고 할 것이며, 혹은 ‘나 자신의 복덕이 박하기 때문에 주는 것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하기도 하리니, 이런 마음들은 비록 좋기는 하나 반야바라밀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에 역시 이것도 악마의 일이다.
‘스승은 근기가 둔하다’ 함은, 이 사람은 바로 경을 독송하는 스승이요 뜻을 해설하는 스승은 아니다. 12부경(部經)도 바로 경을 독송하는 스승이다.
또 ‘스승에게 6바라밀이 있다’고 함은, 스승이 생각하기를 ‘제자는 죄인이요 근기가 둔하므로 6바라밀을 행할 수 없다.
세간의 일에 집착하므로 다만 제자라고 이름할 뿐이요, 진실한 일이란 없다’고 한다. 이 스승은 제자가 반야를 듣고 나서 뒷날 큰일을 이룬다는 것을 모르고 다만 바로 눈앞에 6바라밀이 없는 것만을 보고 교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도 역시 생각하기를 ‘6바라밀의 이치는 나도 행할 수 있다. 다만 스승은 입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행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는 스승이 몸을 바꾸어 장차 큰일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모르며, 또 스승에게는 독송하는 이익의 인연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제자는 곧장 믿으면서 착한 법에 집착하거니와 스승은 법에 집착하지 않고 방편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고 있으므로 제자는 생각하기를 ‘6바라밀을 깊이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느냐 하면, 스승은 때로는 6바라밀을 찬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6바라밀을 깨뜨리기도 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제자에게 방편이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만일 제자는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스승에게는 다라니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스승이라 하겠는가?
【답】다라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제자는 문지(聞持)다라니를 얻었으므로 능히 지니고 능히 독송하기는 하되 그 뜻을 해설하지 못하지만 스승은 그를 위하여 해설하여 준다. 또 제자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다라니의 이치를 얻었으면서도 차례대로 독송할 수 없기도 하며 혹 스승은 문지다라니를 얻었으나 아직은 대비(大悲)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를 업신여기면서 교화하거나 인도하지 않기도 한다.
【문】제자는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싶어 하는데 스승이 주지 않는 일은 혹 있을 수 있지만 어떻게 스승이 법을 주려 하는데 제자가 받으려고 하지 않는가?
【답】앞에서 대답한 것과 같다. 제자가 스승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법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또 스승은 그 앞에 있는 사람을 교화하여 제자를 삼으려고 하지만 이 사람이 혹은 삿된 소견이나 모든 악한 인연 때문에 교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또 온갖 중생들은 행하는 법이
같으면 화합하는데, 한 사람은 5개(蓋)를 여의었고 한 사람은 여의지 않았으면 그 때문에 상대방을 업신여기게 되며 상대방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한다. 온갖 으뜸가는 법들은 모두가 그렇다.
또 반야바라밀을 서사하고 독송하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한 사람은 3악도(惡道)를 꾸짖고 한 사람은 모든 하늘을 찬탄하게도 되나니, 이 일도 앞에서의 대답과 같다. 비록 그것이 선행(善行)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대승(大乘)을 무너뜨리고 소승(小乘)의 법을 주는 것이 된다.
또 스승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면서 여러 대중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므로 그 스승은 생각하기를 ‘제자는 비록 잘 제도될 수 있기는 하나 도중(徒衆)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고 하면서 스승은 착한 법에 깊이 집착하여 그 제자를 버리게 된다. 제자가 한 몸뿐인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또 법을 설할 이는 그의 뜻에 ‘만일 제자가 나의 뜻을 따라 행한다면 가거나 머무르거나 간에 때때로 방문하는 등의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법을 들을 이는 다만 그로부터 법의 이익만을 구하려고 할 뿐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지 못하므로 이런 일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때로 법을 들을 이는 그의 뜻을 따라 가고 오고 하면서 방문하기도 하나 법을 설할 이가 허락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무엇 하러 이런 일로 공덕을 까먹겠는가’라고 하므로 법을 들을 이가 천하게 여기면서 좋아하지 않게 되나니, 이런 일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또 스승은 이양(利養)을 위하여 법을 주려고 하므로 제자가 마음에 그 스승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경법(經法)을 팔려고 하는 것일까”라고 한다. 제자도 또한 그와 같아서 재물과 이양을 위하여 반야를 독송하는지라 청정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스승은 그 제자의 마음을 알면서 이와 같이 천하게 여기므로 서로가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또 스승이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할 적에 험난한 길을 지나갈 것이므로 그 제자는 몸과 목숨이 아깝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내 몸이 있은 연후에야 법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제자가 가려 할 적에도 역시 그와 같으며, 굶주리고 곡식이 귀하며 물이 없는 곳으로 갈 적에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스승이 풍요하고 안락이 있는 데로 가려 할 적에
제자가 스승을 따라가려 하면 혹은 부끄러워하면서 데리고 가려 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제자가 쾌락에 빠져 멀리 가려 하지 않기도 한다. 혹은 길이 너무 멀기도 하고 혹은 스승은 그 나라를 잘 알지만 제자는 잘 모르므로 말하기를 “스승은 그 나라를 찬미하고 계시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스승을 염려하면서 “음식을 탐하기 때문에 간다”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 때문에 스승은 제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들었던 대로 그 국토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다. 잘 생각한 뒤에 가고 싶거든 갈 것이요, 재물의 풍요와 쾌락 때문에는 가지 말라. 그곳에 가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
스승은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 국토에 풍요와 쾌락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는 것이요 법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스승은 좋은 마음으로 제자를 말리기는 하나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인연인 줄 모르고 있다. 제자도 이 말을 듣고 스승을 공경하기 어려워 대답하지 못하면서 멈추어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스승은 또 먼 나라로 가려 할 적에 그 중도에는 갖가지 범과 이리와 도둑들이 있으므로 제자에게 말하기를 “그곳에는 많은 재난이 있으니, 너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갈 것을 중지한다. 그 스승은 다만 그곳에 재난들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자를 말리지만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인연임은 모르고 있다.
【문】만일 먼 나라에 재난이 많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가는 것인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스승은 그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땅에서 사는 것이 익숙하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고,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곳에는 좋은 스승과 경서가 있으므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부러 가는 것이다”고 한다.
그 스승은 생각하기를 ‘나 자신은 죽어도 되거니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잘못되게 하겠는가’라고 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제자를 말리면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스승에게는 아는 이와 단월들이 많이 있으므로 마음에 애착을 내거니와 제자는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므로 단월들에 집착하지 않으며, 스승은 항상 때때로 단월을 방문하거니와
제자는 다만 법만을 구하려 하면서 이런 일들에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 스승은 그런 뜻을 알므로 말하기를 “나에게는 일이 있어서 너를 위해서 설법할 수 없다”고 하나니, 제자는 그 말을 들은 뒤에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스승은 세속의 인연을 귀히 여기고 법에 대해서는 귀히 여기지 않는구나”고 한다. 이런 일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經】“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비구의 형상을 짓고 와서 방편으로 이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면서 그로 하여금 써서 지니거나 읽고 외우고 해설하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 없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악마가 비구의 형상이 되어 방편으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면서 써서 지니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게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마가 비구의 형상으로 되어 와서 선남자ㆍ선여인의 마음을 파괴하여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설하고 있는 경이 곧 반야바라밀이지 그 경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가운데서 모든 비구를 파괴할 때에 아직 수기(授記)를 받지 못한 보살은 곧 의심에 떨어지게 되느니라. 의심에 떨어지기 때문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하거나 받아 지니지도 못하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게 되나니,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魔事]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비구의 몸으로 되어 보살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만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실제(實際)를 증득하고서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ㆍ벽지불의 도를 얻게 된다’고 하여, 이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을 해설할 때에
많은 악마의 일이 있으면서 반야바라밀에 장애를 일으키나니,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것을 깨달아 알며 안 뒤에는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악마의 일이고 장애이기에 보살은 마땅히 깨달아 알고 안 뒤에는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과 유사한 모든 악마의 일이 일어나며, 선바라밀(禪波羅蜜)ㆍ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ㆍ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ㆍ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ㆍ단바라밀(檀波羅蜜)과 유사하게 악마의 일이 일어나나니, 보살은 이것을 깨달아 알며 안 뒤에는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을 이 보살마하살은 악마의 일인 줄 알면서 이것을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과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문인 이 법으로써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ㆍ벽지불의 도를 얻나니, 이와 같은 모든 경을 악마가 비구의 형상으로 되어 와서 방편으로 보살마하살에게 주느니라. 이처럼 화합하지 못한 까닭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부처님 몸이 되어 한 길 되는 금빛 광명을 번쩍거리면서 보살에게로 오면 이 보살이 탐착하게 되나니, 탐착하기 때문에 살바야(薩婆若)를 줄어서 없어지게[耗減] 하느니라. 이처럼 화합하지 못한 까닭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부처님의 몸이나 비구승으로 변해 보살에게로 왔을 적에 이 보살은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장차
오는 세상에 이와 같이 비구승을 좇아 법을 설해야 한다’고 하면 이 보살은 악마의 몸을 탐착하기 때문에 살바야를 줄어서 없어지게 하나니, 그로 인하여 반야바라밀을 다 쓰지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수없는 백천만억의 보살이 되어서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선남자ㆍ선여인에게 가리켜 보여 줄 적에 선남자ㆍ선여인은 그들을 보고 나서 탐착하며, 탐착하기 때문에 살바야를 줄어서 없어지게 하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 못하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물질[色]이 없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없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에 만일 물질이 없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면 이 가운데는 부처님도 없고 성문도 없고 벽지불도 없고 보살도 없나니, 왜냐하면 온갖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면서 바르게 기억할 때에는 많은 장애가 일어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염부제(閻浮提) 안에 있는 진귀한 보배인 금ㆍ은ㆍ유리ㆍ자거ㆍ마노ㆍ산호 등의 보배에는 재난도 많고 도둑도 많은 것처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도 도둑이 많고 많은 장애가 일어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염부제 안에 있는 진귀한 보배인 금ㆍ은ㆍ유리ㆍ
자거ㆍ마노ㆍ산호 등에는 도둑도 많고 장애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ㆍ선여인도 그와 같아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는 도둑도 많고 많은 장애가 일어나며 많은 악마의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어리석은 사람은 악마의 부림을 받기 때문이니,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그것을 파괴하고 멀리 여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적으므로 이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그것을 파괴하고 멀리 여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큰 법[大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 못하고 받지도 못하며 읽지도 못하고 외우지도 못하며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고 말씀대로 수행하지도 못하며 또한 다른 사람을 파괴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못하게 하고 나아가 말씀대로 수행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새로 대승의 뜻을 낸 선남자ㆍ선여인이 악마에게 부림을 받으면 선근을 심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하며 선지식(善知識)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장애를 일으키느니라.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지혜가 적으므로 마음에 큰 법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지도 못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지도 못하나니, 악마의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적에 악마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고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완전히 갖추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게 되며, 또한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과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완전히 갖추게 되며,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종지를 완전히 갖추게 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시방에 현재 계신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들도 또한 이 선남자ㆍ선여인을 도와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쓸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있게 하며, 시방에 있는 아비발치(阿鞞跋致)의 모든 보살마하살도 또한 이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을 옹호하고 도와주느니라.”
【論】해석한다. 악마가 큰 사문(沙門)의 형상이 되어 정중한 위덕이 있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받아들이게 하며 많은 경전을 가지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와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란 나의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진실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대들이 먼저 들었던 것은 진실하지도 않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아니다”고 한다.
그가 먼저 들었던 경을 헐뜯으면서 갖가지로 자기가 말한 바를 찬탄할 적에 근기가 둔한 보살은 그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삿된 소견을 내거니와 만일 근기가 예리하면서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한 이는 의심을 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필경공(畢竟空)과 모양이 없는[無相] 지혜는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때로는 악마가 보살에게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에서 3해탈문(解脫門)을 널리 해설하지만 다만 이것은 공일 뿐이다. 그대는 항상 이 공을 익히는데 그 안에서 증득하거나 증득하지 못하거나 간에 어떻게 부처님이 되겠는가. 부처님이 되는 법은 먼저 보시와 지계(持戒) 등을 행하고 32상(相)의 복덕을 닦아 도량(道場)에 앉을 때에야 비로소 공이 유용한 것이다”고 하면, 보살은 혹은 믿기도 하고
혹은 의심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여의게 된다.
【문】어떻게 6바라밀과 유사한 것을 악마의 일이라 하시는가?
【답】유사[相似]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면 이것을 바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과 유사하다고 한다. 자비가 없고 부처님 도를 구하지 않으면서 다만 자신만이 제도되려 하니, 비록 이것도 좋은 일이기는 하나 보살의 도를 파괴하기 때문에 악마의 일이라 한다.
【문】만일 보살이 부처님 몸을 보면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거늘 어떻게 악마의 일이라 말하는가?
【답】온갖 번뇌로 모양을 취하는 것은 모두가 악마의 일이다. 이 작은 보살은 아직 부처님 몸을 뵈올 수가 없는데도 악마가 부처님의 묘한 형상이 된 것을 보고 보살은 마음에 집착하면서 이 좋은 몸 때문에 도를 행하는 것이다. 마치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 천녀(天女)의 형상을 보고 마음 깊이 염착(染着)하면서 천자(天子)가 될 수 없으므로 답답해 죽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악마는 자기의 원을 만족시키고 보살은 비록 조금의 청정한 마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상(實相)의 지혜를 잃은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조그마한 금으로 그를 속이자 그에게 속아서 그 값진 보배를 버리고 천한 물건을 취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로 줄어서 없어지게[耗減] 함이라고 한다.
악마가 부처님 몸이 되어 여러 비구들을 거느리고 많은 보살들에게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역시 위에서와 같나니,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물질 등의 온갖 법은 자성(自性)이 공하다”고 하신다.
또 모여 있는 대중들이 의심을 내면서 “반야바라밀은 바로 가장 높은 법[無上法]이어서 많은 이익이 있거늘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미워하고 시새우는 것일까”라고 하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되 “염부제의 금ㆍ은 등에는 많은 원수가 있고 많은 도둑이 있으므로 나타난다[出]고 하지 기와나 돌 따위와 같이 생겨난다[生]고 하지 않는다. 반야바라밀은 부처님 법장(法藏) 중의 묘한 보배요 미묘하고 심히 깊건만 게으르고 근기가 둔한 이는 이해하지 못하므로 비방을 한다. 악마는 반야바라밀로써 많은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마는 도적[怨賊]이 된다.”고 하신다.
수보리는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가 말할 바를 진술하면서 “반야를 헐뜯고 파괴하는 이는 세존이시여, 미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악마에게 부림을 당해 자유롭지도 못하고 지혜가 적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을 통달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큰 마음[大心]도 없고 청정한 법 맛[法味]을 모르면서 다만 세 가지 모양인 즉 맛을 탐내고[貪味] 음욕(婬欲)을 내며 성을 내는[瞋恚] 것만을 알 뿐이니, 마치 축생(畜生)의 법과 같으므로 반야바라밀을 주게 되면 장애가 일어납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하는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를 서사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한다면 악마의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위신력이요 또한 그것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의 옹호를 받으면서 다섯 가지 바라밀[五波羅蜜]에서 일체종지까지를 두루 갖추는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신다.
또한 그것은 시방에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악마는 바로 욕계(欲界)의 주인이어서 세간의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바로 세간에서 나고 죽고 하는 근본이다.
색계(色界)의 모든 하늘은 비록 삿된 소견이 있다 할지라도 항상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서 파괴될 것이 있을 수 없고 무색계(無色界) 안에서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또 마음이 미세하여 짓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아래의 모든 하늘은 세력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파괴할 수 없거니와 이 악마는 전생에 지은 업의 인연의 힘과 또한 머무르고 있는 곳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것을 탈취하는 것이니, 이 가운데서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를 악마라 한다. 이 악마의 모양은 좋은 일을 파괴하는 것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은 복덕과 지혜가 희박하기 때문에 몸을 아낀다. 만일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를 옹호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모든 하늘은 악마의 일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보살은 혹은 깨닫기도 하고 깨닫지 못하기도 하나니, 마치 도둑들이 성(城)을 포위하고 있을 때에 어른들은 수호하고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악마의 일을 간략하게 해설하면 이와 같거니와 자세히 설명한다면 한량없고 끝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뜻은 수행하는 이들로 하여금 반야의 큰일을 성취하게 하려 할 뿐이니, 이 때문에 스승과 제자들은 화합해야 되며 온갖 삿된 일은 헤아리지 않아야 한다.

48. 불모품(佛母品)을 풀이함①

【經】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마치 자식이 있는 어머니와 같으니, 아들이 다섯이든 또는 열ㆍ스물ㆍ서른ㆍ마흔ㆍ쉰ㆍ백ㆍ천이든 그 어머니가 병을 얻으면, 그 여러 아들들은 저마다 부지런히 치료의 방도를 구하면서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어머니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면서 모든 병환의 괴로움과 좋지 않은 일들이 없도록 할까. 바람ㆍ한기ㆍ냉기ㆍ열기나 모기ㆍ등에ㆍ독사 따위가 어머니의 몸을 해친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근심거리이다’고 하고, 그 아들들은 항상 좋은 것만을 구하여 그 어머니께 공양하는 것과 같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어머니는 우리들을 낳아 길러 주고 우리에게 세간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과 같으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항상 불안(佛眼)으로써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고 있나니,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모양을 보여 주기 때문이니라.
시방에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도 또한 불안으로써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고 계시나니,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낳고 모든 부처님께 일체지(一切智)를 주며 세간의 모양을 보여 주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불안으로써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고 계시느니라.
또 반야바라밀은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을 낳고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낳으며,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낳고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일체종지를 낳으니, 이와 같이 하여 반야바라밀은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부처님을 낳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고 지금도 얻으며 장차에도 얻을 테지만, 모두가 깊은 반야바라밀의 인연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불안으로써 이 사람을 보고 계시느니라.
수보리야, 이러한 보살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수호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낳고 세간의 모양을 보여 줍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어떻게 모든 부처님을 낳고 어떻게 세간의 모양을 보여 주는지요? 어떻게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로부터 나오시고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모양을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18불공법까지와 일체종지를 내나니, 수보리야, 이 모든 법을 얻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때문에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나오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5중(衆)이 바로 세간의 모양이다’라고 말씀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5중의 모양을 말하며, 어떻게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5중을 보여 주는지요?”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5중이 깨지는 것[破]을 내보이지 않고 5중이 무너지는[壞]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나는 것을 내보이지 않고 없어지는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더러운 것을 내보이지 않고 깨끗한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더한 것을 내보이지 않고 덜한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들어가는 것을 내보이지 않고 나오는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과거를 내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보이지 않고 현재를 내보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공한 모양은 깨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모양이 없는 모양[無相相]과 지음이 없는 모양[無作相]도 깨어지거나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일어나지 않는 법[不起法]과 나지 않는 법[不生法]과 아무것도 없는 법[無所有法]과 법의 성품[法性]의 깨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모양을 이와 같이 내보여 주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깊은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모양을 능히 내보인다’고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한 바를 모두 아시느니라.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중생도 없고 중생이란 이름도 없으며, 물질도 없고 물질이란 이름도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란 이름도 없으며, 눈[眼]도 없고 뜻[意]에 이르기까지도 없으며, 안식(眼識)도 없고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도 없으며, 안촉(眼觸)도 없고 의촉(意觸)에 이르기까지도 없느니라. 나아가 일체종지도 없고 일체종지라는 이름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에서는 세간의 모양을 보여 주느니라.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에서는 또한 물질을 보이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보이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까지도 보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오히려 반야바라밀조차 없거늘 하물며 물질 내지는 일체종지이겠느냐.
다시 수보리야, 온갖 중생의 이름과 범주[數]로서 빛깔이 있거나[有色] 빛깔이 없거나[無色] 생각이 있거나[有想] 생각이 없거나[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거나[非有想非無想] 간에 또한 이 세계[此間世]와 두루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을 거두거나 마음이 어지럽거나 간에 이 거두어진 마음[攝心]과 어지러운 마음[亂心]을 부처님께서는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의 모양을 아느냐 하면, 법 모양[法相]으로써 아느니라. 어떠한 법 모양으로써 아느냐 하면, 수보리야, 이 법 모양 가운데서는 오히려 법 모양이라는 모양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이런 법 모양으로써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아느니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수보리야, 다하는 모양[盡相]으로 알고 물듦이 없는 모양[無染相]으로 알며, 소멸하는 모양[滅相]으로 알고 끊어지는 모양[斷相]으로 알며, 고요한 모양[寂相]으로 알고 여의는 모양[離相]으로 아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물든 마음[染心]을 물든 마음인 줄 여실히 알며 성내는 마음[瞋心]ㆍ어리석은 마음[癡心]을 성내는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물든 마음을 물든 마음인 줄 여실히 아시고 성내는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을 성내는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든 마음의 여실한 모양[如實相]이면 물든 마음의 모양이 없나니, 왜냐하면 여실한 모양 가운데서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心數法]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는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여실한 모양이면 성내는 모양도 없고 어리석은 모양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실한 모양 가운데서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성내는 마음ㆍ성내지 않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ㆍ어리석지 않은 마음을 얻겠느냐.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물든 마음을 물든 마음인 줄 여실히 알며, 성내는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을 성내는 마음ㆍ어리석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물듦이 없는 마음[無染心]을 물듦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ㆍ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을 성냄이 없는 마음ㆍ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중생의 물듦이 없는 마음을
물듦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시고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시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마음의 물듦이 없는 모양 가운데서는 물드는 모양과 물들지 않는 모양을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두 마음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물듦이 없는 마음을 물듦이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야, 이 성냄이 없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의 모양 가운데서는 어리석은 마음과 어리석지 않은 모양을 얻을 수 없나니, 왜냐하면 두 마음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의 성냄이 없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넓은 마음[廣心]을 넓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넓은 마음을 넓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는지요?”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의 마음의 모양이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으며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줄 아느니라. 마음의 모양은 여의기[離] 때문에 이 마음은 넓지도 않으며 또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마음은 성품[性]이 없기 때문이니, 그 무엇이 넓게 하고 그 무엇이 좁게 하며 나아가 오게 하고 가게 하겠느냐.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넓은 마음을 넓은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큰마음[大心]을 큰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큰마음을 큰마음인 줄 여실히 아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마음의 오는 모양[來相]과 가는 모양[去相]을 보지 않으며
중생들의 마음의 생기는 모양[生相]과 소멸하는 모양[滅相]과 머무르는 모양[住相]과 달라지는 모양[異相]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마음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 그 무엇이 오고 그 무엇이 가며 그 무엇이 생기고 소멸하고 머무르고 달라지겠느냐.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큰마음을 큰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을 한량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을 한량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이 중생들의 마음이 머무르는 것도 보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보지 않는 줄 아느니라. 왜냐하면 이 한량없는 마음의 모양은 의지하는 데가 없기 때문이니, 그 무엇이 머무르거나 머무르지 않는 곳이 있겠느냐.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을 한량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볼 수 없는 마음[不可見心]을 볼 수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볼 수 없는 마음을 볼 수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은 모양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모양이 없는 줄 여실히 아나니, 제 모양[自相]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마음은 5안(眼)으로도 볼 수 없는 줄 아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중생들의 볼 수 없는 마음을 볼 수 없는 마음인 줄 여실히 아느니라.”
【論】해석한다. 위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들이 반야바라밀을 옹호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 악마가 그의 틈[便]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자,
이 모임 가운데서 들은 이들은 이 일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어서 모든 법과 중생에 대하여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거늘 무엇 때문에 반야를 써서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는 이를 옹호하는 것일까’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마치 아들이 은혜를 알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를 수호하는 것처럼 반야는 바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므로 만일 악마들이 장해를 일으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려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비록 고요히 사라진 모양을 행한다 하더라도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은분(恩分)을 아는 까닭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시고 불안(佛眼)으로 언제나 보시면서 이 반야를 행하는 이를 수호하여 더욱 이익되게 하고 부처님 도를 잃지 않게 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성현과 성현의 법은 모두가 반야 가운데서 나온다”고 하셨다.
【문】수보리는 네 가지를 물었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일만을 대답하시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 가운데서부터 출생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답】“반야는 모든 부처님을 낳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로부터 출생한다”고 하면 뜻에는 다른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법은 화합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내고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낸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과 뭇행을 실천하면 부처님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짓는 이[作者]를 말하고, 두 번째는 법(法)을 말한 것이다. 만일 ‘부러진 나뭇가지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거나 ‘부러진 나무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이 일은 동일하기 때문에 따로 대답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을 낸다’고 하면 곧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그 밖의 경에서는 ‘5중(衆)은 파괴되기 때문에 세간이라 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5중이 파괴되거나 나고 없어지는 등이 없다는 것을 보인다’고 하시는가?
【답】그것은 소승(小乘)의 일이요 여기서는 바로 대승(大乘)의 일이다. 소승의 법에서는 무상(無常)함을 많이 말하거니와 대승의 법 가운데서는
법공(法空)을 많이 말한다. 소승의 법 가운데서는 먼저 무상을 말하고 그 뒤에 법공을 설명하거니와 대승의 법 가운데서는 처음부터 곧 법공을 말한다. 소승의 법 가운데서는 무상을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거니와 대승은 그렇지가 않다. 이 때문에 ‘파괴 등이 없다’고 설명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은 결코 파괴되지 않으니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은 등으로 세간의 모양을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또 5중(衆)을 세간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몸은 형색이 있어서 알기가 쉽거니와 그 밖의 마음에 속한 법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알기가 어렵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한 바를 모두 아나니, 깊은 반야 안에서는 비록 중생과 물질 등의 법 내지는 일체종지가 없다 하더라도 반야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한 바를 아는 것이다”고 하신다.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물질 등의 법 내지는 일체종지를 내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반야의 모양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물질 등의 법이겠는가”라고 하신다.
또 ‘반야바라밀이 세간을 보인다’고 함은, 빛깔[色]이 있거나 빛깔이 없는 온갖 중생 중에서 ‘빛깔이 있는 것’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중생이요, ‘빛깔이 없는 것[無色者]’이란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을 말한다. ‘생각이 있는[有想] 것’은 무상천(無想天)과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을 제외한 그 밖의 생각 있는 중생을 말한다.
‘생각이 없는[無想] 것’이란 바로 생각이 없는 중생이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非有想非無想]는 것’은 바로 유정처천(有頂處天)이며, ‘이 세계라는 것’은 바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요, ‘시방에 두루하다는 것’은 그 밖의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니, 이런 세계에 있는 6도(道) 중의 3세(世) 중생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아신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이런 말씀을 듣고 나서 의심하고 괴이 여기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고요히 사라진[寂滅] 모든 법공(法空)을 행하시기를 좋아하거늘 이제 어떻게
시작도 없고 가없는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ㆍ어지러운 마음ㆍ부처님 마음ㆍ한 중생의 마음 등 한량없는 종류를 아신다 하시며 어떻게 일시에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아시는 것일까’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떻게 아시는지요”라고 묻는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지혜 때문에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안다”고 하신다.
수보리는 다시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실상인지요”라고 묻고, 대답하시되 “이른바 필경공 때문이니라. 이 필경공에서는 필경 공한 성품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이겠느냐”고 하신다.
【문】모든 법의 실상인 필경공 가운데서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도 분별함이 없거늘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마음을 아시는가?
【답】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되 “제법실상의 성품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이 지혜로써 중생들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아신다. 왜냐하면 만일 공한 성품으로서 얻을 수 있다면 힐난이 있어야겠거니와 공한 성품으로서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힐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부처님께서는 온갖 생각과 분별과 허망한 법에서 뛰어나 실상에 편히 머무르면서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여실히 아시거니와 중생들의 마음은 허망한 법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에 다른 중생들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는 간략하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시는 것을 말씀하고 다음에는 중생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인 이른바 3독(毒)을 분별하신다.
3독이 없는 이는 광대하고 한량없어서 나타났다[出]ㆍ사라졌다[沒]ㆍ굽혔다[屈]ㆍ폈다[申] 하는 등을 볼 수 없는데도 수보리는 일마다 모두 묻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법의 실상 때문에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안다”고 답하시고, 다음에는 “다하고 물듦이 없고 소멸하고 끊어지고 고요히 여의기 때문에 안다”고 하신다.
다한다[盡]는 것은 무상한 지혜[無常慧]이다. 보살은 이 무상한 지혜를 행하여 마음으로 온갖 세간의 물듦[染]을 여의게 된다. 세간의 도(道)로써 결사(結使)를 막아 없애는 이것을 바로 소멸한다[滅]고 하고, 무루의 도[無漏道]로써 끊기 때문에 끊어진다[斷]고 하며, 모든 결사를 끊은 뒤에 열반의 고요히 사라진 모양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며
모든 법의 실상으로써 다른 이의 거두어진 마음과 어지러운 마음을 안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실상이다.
또 이 마음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한다. 미래는 아직 없기 때문에 알 수 없고 현재는 생각마다 멸하여 머무르는 때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인데도 범부는 모양을 취하여 분별하면서 3세(世) 가운데서 생각과 허망한 소견으로 마음에 생각한 바를 안다고 여긴다.
다하는 문[盡門]으로써 관찰한다면 곧 그것은 필경공이다. 필경 공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고 이때에 도를 얻어 모든 법의 실상을 아니, 온갖 법에 대하여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다른 이의 마음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물든 마음[染心]’이라 함은, 온갖 법이 법의 성품 가운데에 들어가면 모두가 청정해지나니, 이 때문에 물든 마음의 실상 가운데는 물드는 마음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여실(如實)한 가운데서는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법도 없거늘 하물며 물든 마음이겠는가.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도 또한 그와 같다.
물듦이 없는 마음[無染心]의 모양 가운데서는 이 안에 물드는 마음의 모양이 없다. 물든 마음은 본래부터 없기 때문에 또한 물들지 않는 마음도 없으며, 물듦이 없는 마음은 바로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어서 분별할 것도 없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수보리야, 두 마음은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의 법은 마음과 마음이 차례대로 생긴다”고 하신다. 물듦이 없는 마음이 생길 때에는 물드는 마음은 없나니, 왜냐하면 과거의 물든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있지 못하며 현재에 물든 마음이 없으면 곧 물이 들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드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또한 물들지 않는 마음도 없나니, 상대의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물듦이 없는 실상 가운데는 물든 마음이나 물들지 않는 마음이 없나니, 성냄이 없는 마음과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또한 그와 같다.
넓거나 좁거나 더하거나 덜하는 마음은 모두 중생이 모양을 취하여 분별한 것이거니와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고 생각생각마다 소멸하면서 넓고 좁고 더하고 덜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은 성품의 모양[性相]이 없기 때문에 넓거나 좁은 것 등은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넓고 좁은 것과 더하고 덜한 것과 크고 작은 것의 이치는 4무량심(無量心)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이라 함은 넓은 마음[廣心]과 큰마음[大心]은 곧 한량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한다. 또 열반의 한량없는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다고도 하며, 마음의 모양은 취할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한다.
눈이 있고 빛깔이 있어서 인(因)과 연(緣)이 되기 때문에 안식(眼識)이 생기는데 이 식(識)은 눈에 있지도 않고 빛깔에 있지도 않으며 그 중간에 있지도 않고 이것에 있지도 않으며 저것에 있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머무르는 곳이 없다. 만일 진실로 머무르는 곳이 없다면 어떻게 짓는 일에 있어서 아름답거나 추함이 있겠는가.
마치 꿈에서 본 일은 그 실체로서의 정해진 모양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의지한 데가 없고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한다. 광대(廣大)하다는 것도 이러한 이치에 따라 분별하고 설명하여야 한다.
【문】만일 마음은 볼 수 없다고 안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볼 수 없는 마음을 여실히 안다”고 말씀하시는가?
【답】어떤 좌선(坐禪)하는 사람이 기억하고 분별하면서 이 마음을 아는 것은 마치 청정한 구슬 안에서 실[縷]을 보고 흰 뼈만 남은 사람 가운데서 마음을 보는 것과 같아서 차례로 이어지면서 생기고 혹 때로는 마음은 몸에 있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반연에 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무변식처(無邊識處)에서는 의식이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만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허망함을 파괴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여실히 중생의 마음을 아나니, 중생의 마음은 자기 모양이 공하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모양이다”고 하신다.
또 부처님께서는 5안(眼)으로써 이 마음을 관찰하셔도 얻을 수 없다.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은 빛깔을 반연하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처음 배우는 이[初學]의 법안(法眼)은 모든 법의 착함과 착하지 않음과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등을 분별하며 알되 이 법안이 실상(實相) 가운데에 들어가면 분별이 없는 것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온갖 법은 아는 이[知者]도 없고 보는 이[見者]도 없으니, 이 때문에 보지 못해야 하고,
불안(佛眼)은 고요히 사라진 모양을 관찰하기 때문에 보지 못해야 한다. ‘중생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여실히 보되 범부들이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
또 5안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 생기는데, 이 모두는 짓는 법이라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나니, 부처님께서는 믿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5안으로써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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