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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0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68권

by Kay/케이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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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68

 

대지도론 제68권

46. 마사품(魔事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6바라밀을 행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한다 함은 부처님께서 이미 찬탄하시면서 그 공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선남자ㆍ선여인이 부처님 도를 구할 적에 모든 장애가 생기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요설변(樂說辯)이 즉시 생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魔事]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요설변이 즉시 생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6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기는 어려운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요설변이 즉시 생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 있어서 악마의 일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요설변이 갑자기 일어나면 이것도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니라.”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요설변이 갑자기 일어나면 이것도 악마의 일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요설(樂說)의 법에 집착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요설변이 갑자기 일어나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의 경을 서사할 때에 젠체하면서 뽐내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경을 서사할 때에 실없이 웃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우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이 경을 서사할 때에 가벼이 웃으면서 공경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이 경을 서사할 때에 마음이 산란하여 안정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이 경을 서사할 때에 저마다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 경 가운데서 재미를 얻지 못하면 곧 버리고 떠나겠다’고 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고 해설하며 바르게 기억할 때에 젠체하면서 뽐내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가까이하고 바르게 기억할 적에 몸을 비틀면서 웃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수행할 때에 함께 서로가 경멸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산란한 마음이 있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마음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 경 가운데서 재미를 얻지 못하면 버리고 떠나겠다’고 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보살은 이 경 가운데서 재미를 얻지 못하면 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은 전생에 반야바라밀과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
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을 오래도록 수행하지 않았느니라.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으면 곧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생각하기를 ‘나에 대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수기가 없으며[無記]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는다’고 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수기(受記)를 주지 않으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을 적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아직 법위(法位) 안에 들지 못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지 않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을 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에는 나의 이름이 없으므로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 보살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께서 그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나의 태어난 곳의 이름이나 마을ㆍ성읍(城邑)의 이름이 없다’고 하고,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또 그 모임 가운데서 일어나 떠나가느니라.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일으킬 때에 그 낱낱 생각마다 1겁(劫)씩을 물러나나니, 그는 처음부터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해야 되느니라.”
【論】해석한다. 온갖 유위(有爲)의 법에는 저마다 증상(增上)이 있다. ‘증상’이라 함은 서로가 어기는 것이니, 서로가 어기면 곧 그것이 원수요 도둑[怨賊]이다. 마치 물이 증상의 힘을 얻으면 불을 끄고 불이 증상의 힘을 얻으면 물을 닳아 없애며, 나아가 초목 같은 것에도 저마다 서로가 해침이 있거늘 하물며 중생이겠는가.
보살마하살은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으므로 비록 중생에게 원한을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생들은 보살에게 원한을 짓기도 한다. 보살의 몸은 유위의 법이기 때문에 장애가 일어난다.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보살의 공덕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모든 하늘의 보호를 받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직 원수나 도둑에 관한 모양은 말씀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먼저는 간략하게 말씀은 하셨으나 지금 수보리는 부처님께 장애되는 일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라고 청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온갖 중생과 온갖 법에 대하여 마음이 평등하다 하더라도 이 보살이 세간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아름답거나 추한 모양과 이롭게 하거나 해치는 모양과 바른 도[是道]와 도 아님[非道]과 장애되는 일을 말씀해 주신다.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헐어 해치거나 장애되지 않게 한다”고 함은, 다만 깨달아 알면서도 그 일을 따르지 않게 할 뿐이다.
어느 것이 원수요 도둑이냐 하면, 간략하게 말하여 중생의 법과 중생이 아닌 법으로 보살의 위없는 도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중생이 아닌 것[非衆生]’이란 병에 걸리는 것과 배고프고 목마른 것과 춥고 더운 것과 때리고 억압하는 것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墜落] 것 등이다. 중생이라 함은 악마와 악마의 백성과 악귀와 삿되게 의심하면서 믿지 않는 이와 선근을 끊는 이와 반드시 얻을 것[所得]이 있다는 이와 실제로 정해진 것으로써 모든 법을 분별하는 이와 세간의 쾌락을 깊이 집착하는 이와 원수와 도둑과 관리와 사자ㆍ범ㆍ이리 등의 나쁜 짐승과 독벌레 등의 중생들이다.
도둑[賊]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안[內]의 것과 바깥[外]의 것이다. 안의 것이란 스스로가 마음으로부터 근심을 내고 법의 맛[法味]을 얻지 못하며 삿된 소견과 의심과 뉘우침과 믿지 않는 등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바깥의 것이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러한 모든 장애되는 일이니,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통틀어 악마[魔]라 하신다.
악마에는 네 가지가 있나니, 번뇌의 악마[煩惱魔]와 5중의 악마[五衆魔]와 죽음의 악마[死魔]와 천자의 악마[天子魔]가 그것이다.
번뇌의 악마라 함은 이른바 108번뇌 등이니, 8만 4천의 모든 번뇌로 분별된다.
5중의 악마라고 함은, 이 번뇌의 업(業)이 화합한 인연으로 이 몸을 얻는데 그것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로서 눈의 감관[眼根] 등의 물질이니, 이것을 바로 물질[色衆]이라 한다.
108번뇌 등의 모든 느낌이 화합한 것을 느낌[受衆]이라 한다. ‘작다, 크다, 한량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과 분별이 화합한 것을 바로 생각[想衆]이라 하며, ‘아름답다, 추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탐욕과 성냄 등의 마음과 상응하거나[心相應] 상응하지 않는[不相應] 법을 내는 이것을 지어감[行衆]이라 하고, 6정(情)과 6진(塵)이 화합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식(識)을 내고 이 여섯 가지의 식이 분별하고 화합하는 한량없고 그지없는 마음을 바로 분별[識衆]이라 한다.
죽음의 악마라 함은, 덧없는 인연 때문에 상속(相續)하는 5중의 수명을 파괴하고 의식[識], 체온[熱]1), 목숨[壽] 등 세 가지 법이 모두 흩어지기 때문에 죽음의 악마라 한다.
천자의 악마라 함은, 욕계(欲界)의 주인이면서 세간의 쾌락을 깊이 집착하며 얻을 것이 있음[有所得]을 쓰기 때문에 삿된 소견을 내고 온갖 성현과 열반의 도법을 미워하고 시새우는 이이니, 이것을 바로 천자의 악마라 한다.
악마[魔]는 진(秦)나라 말로 ‘목숨을 빼앗는 이[奪命者]’라 한다. 다만 죽음의 악마가 실제로 목숨을 빼앗기는 하나 그 밖의 것도 역시 목숨을 빼앗는 인연이 되며 또한 지혜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죽이는 이[殺者]’라고 한다.
【문】5중의 악마 하나에 세 가지 악마가 다 포함되거늘 무엇 때문에 네 가지를 따로따로 말하는가?
【답】실제로 이것은 하나의 악마이지만 그 이치를 분별하기 때문에 네 가지가 된다. 번뇌의 악마는 사람들이 탐욕과 성냄 때문에 죽고 또한 목숨을 빼앗는 인연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목숨을 빼앗는 인연과 가깝기 때문에 따로따로 설명한다.
천자의 악마는 여러 가지 복덕과 업의 인연 때문에 세력이 크고 삿된 소견의 힘 때문에 지혜의 목숨을 빼앗으며 또한 죽음의 인연도 될 수 있나니, 이 때문에 따로 설명한다.
또 덧없음, 곧 죽음의 악마의 힘은 큰 것이라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고 매우 두려우면서 싫어하게 되므로 따로 설명하게 된다.
【문】이 악마는 무엇 때문에 도를 수행하는 이를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는가?
【답】앞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이 품(品) 가운데서는 모두 네 가지 악마에 관한 이치가 있으며 다만 그 경우에 따라 설명할 뿐이다.
또 세 가지 악마는 서로가 멀리 여의지 않는다. 만일 5중이 있으면 번뇌가 있고
번뇌가 있으면 천자의 악마가 그의 틈[便]을 얻나니, 5중과 번뇌가 화합하기 때문에 천자의 악마가 있다.
그러므로 수보리가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이미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셨거늘 이제는 어찌하여 이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 일어난다고 하시는지요”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요설변(樂說辯)이 즉시 생겨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이다”고 하신다.어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높은 자리에서 법을 설할 적에 요설변(樂說辯)이 생기지 않으면 듣는 이들은 근심하면서 “우리들은 일부러 왔는데 법사(法師)는 설법하지 않는구나”라고 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법사는 두려워하는 까닭에 설법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모르기 때문에 설법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자신의 허물이 깊고 중하기 때문에 설법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공양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설법하려 하지 않는구나”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우리들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설법하지 않는구나”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쾌락에 빠졌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듣는 이들의 마음이 파괴되어 자유자재로 설하지 못하므로 악마의 일이라 한다.
또 이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와서 법을 설하려 하고 듣는 이도 와서 들으려고 하며, 게다가 법사가 마음을 내서 설하려고 하는데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 이런 악마의 일을 실제로 경험하기도 한다. 마치 악마가 아난(阿難)의 마음에 들어갔으므로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는데도 세 번을 다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변재(辯才)가 즉시 생기지 않는지요”라고 여쭈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에 6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기는 어려운 일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전생에 행한 인연 때문에 근기가 둔하고 게을렀으므로 악마가 그 틈[便]을 얻었으며, 일심으로 6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요설변이 즉시 생기지 않느니라”고 하신다.
【문】요설변이 즉시 생지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악마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요설변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것 역시 악마의 일이 되는가?
【답】이 법사는 법을 사랑하고 법에 집착하여 명성(名聲)을 구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말하기는 하나
이치가 없다. 이는 마치 달아나는 말은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으며, 또 큰물이 세차게 흐를 적에는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뒤섞여서 내려오는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가 말씀하시되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 설법하는 데에 집착하여 좋아하는 것도 이것은 악마의 일이다”고 하신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교만을 파괴하기 위하여 나온 것인데 이 경을 서사하는 이가 나라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내고 있나니, 그 교만 때문에 몸도 또한 높은 체하게 된다. 이른바 젠체하고 뽐내면서 이 반야바라밀을 서사할 때에는 가벼이 여기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으로 실없이 웃으면서 공경하지 않게 된다.
또 이 반야바라밀은 일심으로 마음을 다잡아도 오히려 얻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물며 산란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겠는가. 서사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부터 받아쓰거나 경전을 베껴 쓰기도 하는데, 한 마음으로 화합한다면 잘 되기도 하지만 혹은 줄 이가 주지 않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이것이 화합하지 않게 된다.
또 이 반야바라밀을 자세히 살펴볼 때에 품(品)마다 모두가 공이라 즐길 만한 곳이 없으므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 경에서 재미를 붙이지 못하겠다’ 하고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쾌락의 근본이니, 이 사람이 그 맛을 얻지 못하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이다.
또 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고 해설하며 바르게 기억할 때에 젠체하고 뽐내면서 실없이 웃거나 산란한 마음으로 화합하지 않기도 하나니, 위에서의 설명과 같다.
‘함께 서로가 경멸한다’ 함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고 바르게 기억할 때에 스승이나 제자들이 서로가 경멸하면서 천히 여기는 것이다. 경을 서사할 때에 다만 버리고 가기만 하는 것은 경멸하면서 천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문】위에서 여러 일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경 가운데서 재미를 얻지 못한다는 것만을 묻고 그 밖의 것은 묻지 않는가?
【답】반야바라밀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범부들이 말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범부들은 재미를 얻지 못한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청정하고
값진 보배더미[珍寶聚]이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허물이 없는데 이 사람은 어찌하여 재미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이 사람은 전생에 6바라밀을 오래도록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보살의 신근(信根) 등 5근(根)이 희박하기 때문에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을 믿을 수 없고 의지하는 법도 없으며 요란한 마음이 생기면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지니신 분인데 어째서 나에게 수기를 주지 않으실까’라고 하면서 버리고 떠나는 것이니라”고 하신다. 그 나머지 것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묻지 않는다.
수보리는 묻기를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수기를 주시지 않은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바로 대비(大悲)가 계신지라 마땅히 가엾이 여기어 그의 마음을 보호해 주시면서 악(惡)에 떨어지지 않게 하셔야 하지 않을까”라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아직 법위(法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비록 중생이 겪은 오래된 일을 모두 아시고 5통(通)의 신선이 되었던 것과 모든 천상에서 난 일도 모두 아실지라도 이 사람이 아직 착한 행과 업의 인연이 없는 것을 보시고 수기를 하시지 않는 것이다.
만일 수기를 하게 되면 부처님을 가벼이 여기고 믿지 않을 것이다. 인연이 없거늘 어떻게 수기를 주겠는가. 이 때문에 법위에 들어간 이에게 수기를 주신다. 이 사람의 이름과 마을 등의 처소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간다면 그 일어날 때 생각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한 생각마다 1겁(劫)씩 물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죄를 다 갚고 마친 뒤에는 도로 사람 몸을 얻지만 처음부터 다시 그 만큼의 겁 동안을 행해야 된다”고 하신다.
【經】“다시 수보리야, 보살이 그 밖의 경은 배우면서 반야바라밀을 버리면 끝내 살바야(薩婆若)에 이를 수 없느니라.
선남자ㆍ선여인이 그 뿌리는 버리면서 가지와 잎사귀만 붙잡는다면 역시 이것은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선남자ㆍ선여인이 배워도 살바야에 이르지 못할 ‘그 밖의 경’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문이 행해야 할 경이니,
이른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문(解脫門)이니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가운데 머무르면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를 얻나니, 이것을 바로 성문이 행할 바로서 살바야에 이를 수 없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그 밖의 경전을 가까이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든 보살마하살을 출생시키며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도 역시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배우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개가 상전한테서 밥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일꾼에게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의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가지나 잎을 붙들어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취하면 이것이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마치 어떤 사람이 코끼리를 보고 싶어 하다가 보고 나서는 도리어 그 발자국만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도 그와 같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취한다면,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큰 바다를 보고 싶어 하다가 보고 나서는 도리어 소 발자국에 담긴 물을 구하면서 생각하기를 ‘큰 바닷물도 이것과 똑같으리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도 역시 그와 같아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취한다면, 이것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장인의 우두머리[工匠]나 그의 제자가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사는 수승한 궁전을 지으려 하면서 해와 달[日月]의 궁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아서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 어느 복덕이 박한 선남자ㆍ선여인이 부처님 도를 구하면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 가운데서 살바야를 구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도 역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보고 싶어 하다가 보았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뒤에 여러 작은 나라의 왕들을 보고는 그의 모습들을 취하면서 말하기를 “전륜성왕이 이런 이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수보리야, 장차 오는 세상에 어떤 복덕이 박한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가지고 그 안에서 살바야를 구하고 있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보살에게 있어서의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배고픈 사람이 온갖
맛난 음식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가서 도리어 60일 묶은 밥을 먹고 있는 것과 같나니,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으면서도 그것은 버리고 가서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취하여 그 가운데서 살바야를 구하고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값을 칠 수도 없는 귀중한 마니주(摩尼珠)를 얻었으면서 그것을 가지고 수정주(水精珠)와 견주는 것과 같나니,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영리하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었으면서 그것은 버리고 가서 성문이나 벽지불이 행해야 하는 경전을 취하여 그 가운데서 살바야를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영리하다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영리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여법(如法)하지 않은 일을 설하기 좋아한다면 반야바라밀을 서사해[書] 완성시킬 수가 없느니라. 이른바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ㆍ법(法)을 설하기를 좋아하고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무색정(無色定)을 설하기를 좋아하며,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을 설하기를 좋아하고 4념처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설하기를 좋아하는[樂說]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불가사의한 모양이요 반야바라밀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不生不滅] 모양이며,
반야바라밀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不垢不淨] 모양이며, 반야바라밀은 어지럽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不亂不散] 모양이며, 반야바라밀은 해설함이 없는 모양이며, 반야바라밀은 말도 없고 뜻도 없는 모양이며, 반야바라밀은 있는 바가 없는 모양이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런 모든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의 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이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이 모든 법의 산란한 마음을 쓰면 이것도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쓸 수가 있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쓸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요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에도 자성이 없기 때문이니,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을 성품[性]이라 하지 못하며, 없는 법[無法]이라면 그 없는 법을 쓸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생각하기를 ‘없는 법이 바로 깊은 반야바라밀이다’ 하면 곧 그것이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보살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문자(文字)로써 반야바라밀을 쓰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 반야바라밀을 쓰고 있다’고 하면, 문자로써 반야바라밀에 집착하는 것으로 이것도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에는 문자가 없기 때문이요, 선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바라밀에는 문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에는 문자가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도 문자가 없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에도 문자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문자 없는 반야바라밀에 집착하거나 나아가 문자 없는 일체종지에 집착하면 이것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읽고 외우고 해설하며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국토 생각이 일어나거나 마을 생각이 일어나거나 성읍(城邑) 생각이 일어나거나 처소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의 스승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는 생각이 일어나거나 부모와 형제자매며 그 밖의 친척을 생각하거나 도둑을 생각하거나 전다라(旃陀羅)를 생각하거나 뭇 여인들을 생각하거나 음녀(婬女)를 생각하는 등 이러한 갖가지 그 밖의 딴 생각을 한다면 장애하는 악마가 그의 생각을 더욱더 일어나게 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쓰는 일을 파괴하며,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을 파괴하나니, 수보리야, 이것도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명예와 공경과 보시와 공양, 곧 의복ㆍ음식ㆍ침상ㆍ의약 등 갖가지 쾌락의 기구들을 얻는 일이 있으니,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의 경을 써서 받아 지니어 읽고 외우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적에 이런 일에 애착하면 반야바라밀을 다 써 마치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느니라. 이것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말씀대로 수행할 때에 악마가 방편으로 그 밖의 깊은 경전을 가져다 이 보살마하살에게 주면 방편이 있는 이라면 그 악마가 준 그 밖의 깊은 경전에 탐착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경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바야에 이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서 방편이 없는 보살마하살은 그 밖의 깊은 경전을 듣고 곧 깊은 반야바라밀을 버리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나는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도를 널리 해설하였나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서 구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지금 선남자ㆍ선여인이 보살의 도를 구하면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버리고는 저 악마가 준 성문이나 벽지불의 깊은 경 가운데서 방편의 도를 구한다면 이것도 또한 보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그 밖의 다른 경전은 배우면서 반야바라밀 등은 버린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성문의 법 가운데서 계율을 받고 법을 배우므로 처음부터 반야바라밀은 듣지도 못했으며 혹 때로는 다른 곳에서 들었기는 하나 먼저 배운 법 가운데에 깊이 집착하면서 반야바라밀을 버리고는 먼저 배운 법 가운데서 살바야(薩婆若)를 구하기도 한다.
또 어떤 성문의 제자는 먼저 반야바라밀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 이치를 알지 못하여 재미를 붙이지 못한지라 성문의 경전으로 보살의 도를 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문의 제자로서 반야바라밀경을 얻었으므로 믿고 받으려 하는데 다른 성문이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면서 말하기를 “이 경은 처음과 마지막이 상응하지도 않고 일정한 모양이 없으니 그대도 마땅히 버려야 한다. 성문의 법 가운데도 무엇인들 있지 않겠는가. 『육족론(六足論)』과 『아비담론(阿毘曇論)』과 그 논의(論議)는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므로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다. 80부율(部律)은 곧 그것이 시라(尸羅)바라밀이며, 아비담 가운데서 모든 선정ㆍ해탈과 모든 삼매(三昧) 등은 분별하는데 이것은 선(禪)바라밀이요 3장(藏)의 본생(本生) 중에서
해탈을 찬탄하면서 보시하고 인욕(忍辱)하고 정진하는 것은 바로 세 가지의 바라밀이다”고 한다.
이와 같은 등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을 버리고 성문의 경 가운데서 살바야를 구하고 있음은 마치 사람이 견고하고 좋은 나무를 구하려 하면서 그 뿌리와 줄기를 버리고는 가지와 잎을 취하는 것과 같나니, 비록 그것이 나무라는 이름은 있기는 하나 사용하는 데에 알맞지 않는 것이다.
또 반야바라밀은 그것이 바로 3장(藏)의 근본이다. 반야바라밀을 얻은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 밖의 일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가지와 잎이라 한다.
또 성문의 경 가운데서 비록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하지 않거니와 반야바라밀의 경 가운데서는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보기도 쉽고 얻기도 쉽다. 마치 사람이 가지와 잎을 붙잡으면 아래로 떨어지거니와 줄기를 붙잡으면 견고한 것처럼 만일 성문의 경에 집착하면 소승(小乘) 가운데에 떨어지거니와 만일 반야바라밀을 지니면 위없는 도를 쉽게 얻나니, 이 때문에 “뿌리와 줄기를 버리고 가지와 잎을 취한다”고 한다.
【문】37품(品)과 3해탈문(解脫門)은 『반야경』 가운데도 있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만 성문ㆍ벽지불의 경이라고만 하는가?
【답】마하연(摩訶衍) 가운데에 비록 이런 법이 있다손 치더라도 필경공(畢竟空)과 합하여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살바야의 대비심(大悲心)을 버리지 않으면서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거니와 성문의 경이면 그렇지 않아서 소승의 깨달음[證]을 위하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성취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이 만일 부처님을 구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개가 주인을 위해 지켜 주고 있으므로 마땅히 주인으로부터 음식을 구해야 하거늘 도리어 노비나 손님에게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나니, 보살도 또한 그와 같다.
개는 수행하는 이에게 비유되고 반야바라밀은 주인에게 비유된다. 반야 가운데에는 갖가지의 이익이 있는데도
버리고 다른 경전에서 구하고 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이제 분명하여 보기 쉽게 하시려고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코끼리와 큰 바다와 제석의 궁전과 전륜성왕과 몹시 귀중한 보배에 대한 비유도 역시 그와 같다.
【문】5욕(欲)은 5개(蓋)를 내고 5개는 지혜를 가리기 때문에 설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되거니와 무엇 때문에 그 밖의 6바라밀 내지는 위없는 도를 즐거이 설하는 것에 대해 ‘법답지 않다[不如法]’고 말씀하시는가?
【답】‘법답지 않다’고 함은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실상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의 법이 없거늘 어떻게 설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만일 일정한 모양이 있다면 마음이 설하기 좋아한다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대비(大悲)의 마음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그 언어에 집착하지 않으며, 얻을 것이 없는 법[無所得法]으로써 중생들에게 마침내 공한 모양과 반야바라밀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쓰고 읽고 외우는 일 등에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6진(塵)의 모양 내지는 위없는 도를 취하기 때문에 ‘법답지 않다’고 한다.
【문】만일 반야바라밀이 마침내 공하고 얻을 바가 없는 법이면 쓰거나 읽거나 외울 수가 없다. 이와 같다면 악마의 일이 있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답】마침내 공하고 있는 것이 없는 것도 또한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아니니, 왜냐하면 이것도 악마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말하되 “만일 이 사람이 있는 것이 없는 것을 반야바라밀의 모양인 줄 안다면 곧 그것은 악마의 일이다. 만일 문자로써 반야바라밀을 쓰고는 스스로가 ‘나는 반야바라밀을 썼다’라고 알고는 이런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그것은 악마의 일이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알면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쓰고 읽고 외우지 않을 것이니, 만일 어떤 이가 와서 파괴한다면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것이다.
또 안으로는 번뇌의 악마[煩惱魔]가 있고 밖으로는 천자의 악마[天子魔]가 있다. 이 두 가지 일의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쓰고
나아가 수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이 국토는 안온하지 않고 저 국토는 풍요와 즐거움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을과 성읍과 처소도 또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그의 스승이 비방 받는 것을 듣고 반야바라밀을 버리면서 스승을 도와 그 불명예를 씻어 주려 하기도 하고, 또는 부모가 병이 들고 관청에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도둑은 두렵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마음을 내기도 하는 것이니, 전다라(旃陀羅)에 대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도둑이나 전다라와 같이 살고 있으면 성을 내는 일이 있게 되고 음녀(婬女)들과 함께 살면 그 때문에 음욕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것이니, 보살은 이런 일을 깨달아 알면서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혹 반야바라밀을 쓸 때에 근기가 둔한 이면 공경과 공양하는 일에 많이 애착하면서 ‘나는 잘 쓰고 잘 따라 행하기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하나니, 이런 이양(利養)에 집착하는 일이 곧 악마의 일이다.
혹 근기가 예리한 이면 악마는 생각하기를 ‘이 보살은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지 않고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받아들인다. 이 사람은 무너뜨릴 수가 없으니, 나는 이제 성문의 깊은 경전으로써 그의 마음을 바꾸어서 아라한이 되게 하여야겠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성문의 경은 비록 깊다 하더라도 탐착하지 말아야 함은 마치 이글거리는 금 구슬이 빛은 아름답고 좋다 하더라도 잡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만일 보살이 방편이 없고 근기가 크게 예리하지 못하면 이 경을 얻고는 기뻐하면서 “이 공하고 모양이 없고[無相] 지음이 없는[無作] 것은 괴로움의 근본을 다해 준다.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 반야바라밀을 버리기에 이것 또한 악마의 일이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도(方便道)를 널리 말씀하시기 때문이니,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관찰하면서도 증득하지 않은 채 대비심으로써 3해탈문(解脫門)을 행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소(酥)를 독에 섞으면 그 독의 세력이 없어지므로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것처럼, 반야도 그와 같아서 보살은 반야 가운데서 위없는 도를 구하면 얻기가 쉽거니와 다른 경에서는 얻기가 어려우니, 다만 독을 먹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문의 경 가운데서 보살의 도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

47. 양불화합품(兩不和合品)을 풀이함①

【經】“다시 수보리야, 법을 들을 사람[聽法人]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면서 읽고 외우고 뜻을 물으며 바르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설할 사람[說法人]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그에게 설하려고 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에게 있어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설할 사람은 마음이 게으르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게 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들을 사람이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두 마음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들을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설할 이가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면 이것도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게 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여 양쪽의 마음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도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사람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살림살이를 보시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데, 법을 들을 사람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며 멀리 여읨[遠離]을 행하고 생각을 다잡아 정진과 일심(一心)과 지혜를 행하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거나 뜻을 물으면서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설할 사람은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며 멀리 여읨을 행하고 생각을 다잡아 정진과 일심과 지혜를 행하는데, 법을 들을 이가 의복ㆍ음식ㆍ침구
ㆍ의약과 살림살이를 보시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읽고 외우면서 뜻을 묻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이는 첫째 아란야(阿蘭若)에 있고, 둘째 항상 걸식(乞食)을 하며, 셋째 누더기[納衣]를 입고, 넷째 한 자리에서만 먹고 거듭 먹지 않으며, 다섯째 바리 안에 있는 밥만으로 만족하고, 여섯째 정오가 지나면 과일즙 따위도 먹지 않으며, 일곱째 무덤 곁에 머물러 있고, 여덟째 나무 밑에 있으며, 아홉째 한데에 앉아 있고, 열째 항상 앉아만 있고 눕지 않으며, 열한째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걸식하며, 열두째 세 가지 옷만을 가지고 있는 등 12두타(頭陀)를 받들고 있는데, 법을 들을 사람은 아란야에 있지도 않고 나아가 세 가지 옷만을 가지지 않는 등 12두타를 받들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읽고 외우면서 뜻을 묻거나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법을 들을 이는 아란야에 있고 나아가 세 가지 옷만을 가지는 등의 12두타를 받들고 있는데, 법을 설할 사람이 아란야에 있지도 않고 나아가 세 가지 옷만을 가지지도 않는 등 12두타를 받들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서사해 지니거나 읽고 외우고 뜻을 물으면서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뭇 인연을 여의면 없는 것이니, 마치 나무를 끌로 비벼 불을 일으킬 적에 끌과 나무 이 두 가지 일의 인과 연으로 불을 얻는 것과 같다. 반야를 서사하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안과 밖의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스승과 제자가 마음을 같이하고 일을 같이하기 때문에 비로소 쓰는 것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법을 들을 사람은 신(信) 등의 다섯 가지 선근이 일어나기 때문에 반야를 써서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데, 법을 설할 이는
5개(蓋)가 마음을 가리었기 때문에 설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문】만일 5개가 마음을 가리었기 때문에 설하려 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스승으로 삼는가?
【답】이 사람은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여 공과 무상(無常)을 관하지도 않으며, 비록 마음으로는 알고 입으로는 설할 수 있을지라도 자신은 행하지를 못하거니와 제자는 비록 반드시 행하고 싶을지라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어야 하나 다시 다른 곳도 없으므로 결국 이 사람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법사에게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반야를 써서 지니게 하고 싶은데, 제자는 신(信) 등의 다섯 가지 선근이 둔하여 일어나지도 못하고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받아써서 지니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려고 하지 못하기도 한다.
【문】만일 받아 지니려고 하지도 않으면 무엇 때문에 법을 들을 이라 하는가?
【답】어느 정도는 듣고 받아서 읽고 외우지만 마침내는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법을 듣는다고 할 뿐이다.
만일 두 사람의 착한 마음이 같아지면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거니와 만일 같아지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으므로 이것을 바로 악마의 일이라 한다.
안으로는 번뇌가 일어나고 밖으로는 천자의 악마[天子魔]가 인연이 되어서 이 반야를 여의게 되나니, 보살은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깨닫고서 막아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일 자기 자신이 상실하면 구족해야 하며 만일 제자가 상실하게 되면 가르쳐 주어서 얻게 하여야 한다.
또 혹은 스승의 자비심이 희박하므로 제자를 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게도 된다. 혹은 물과 흙이 몸에 맞지 않아서 4대(大)가 조화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착한 법이 더 불어나는 것이 없기도 하며 혹은 가뭄이 들어서 흉년이 들기도 하고 혹은 땅이 거칠고 어지러워지는 등 이러한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는데, 제자도 갖가지의 인연이 있어서 따라갈 수 없기도 한다. 이양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는 위에서와 같이 5개(蓋)가 마음을 덮기도 한다.
또 이 두 사람은 믿음이 있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도 한 사람은 12두타(頭陀)로써 계율을 장엄하거니와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문】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답】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은 제자들이 받아 지니는데 12두타는
계율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잘 행하는 이는 계율을 장엄하게 되거니와 행하지 못한다 해도 계율을 범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건대 마치 보시를 잘 행하는 이는 복을 얻거니와 행하지 못한 이라도 죄는 없는 것처럼 두타도 또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면 곧 그것은 악마의 일이다.
‘12두타(頭陀)’라고 함은, 수행하는 이들이 집에서 살면 번거로움과 산란함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처자 권속들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도를 행하는데, 그러나 스승과 제자나 같이 공부하는 이들이 도리어 서로가 인연을 맺어 집착하게 되면 마음이 다시 요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란야의 법을 받아 몸으로 하여금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고 조용한 데에 머무르게 한다.
‘멀리 여읜다[遠離]’고 했는데, 가장 가까워도 3리(里)는 떨어져야 하며 그보다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욱 좋다. 이러한 몸이 멀리 여윔을 얻고 나서는 역시 마음도 5욕(欲)과 5개(蓋)를 멀리 여의게 하여야 한다.
초청을 받아 음식을 먹거나 대중 스님들과 같이 있으면서 음식을 먹거나 간에 모든 번뇌[漏]가 일어나는 인연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초청을 받아 음식을 먹는 이는 “나는 바로 복덕이 있는 좋은 사람이므로 공양을 얻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만일 얻지 못하면 그 초청한 이를 원망하면서 “그는 따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아야 할 이는 초청하고 초청해야 할 이는 초청하지 않는구나”라고 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 자신을 천하게 여기면서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책망하면서 근심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탐내고 근심하는 법은 곧 도(道)를 차단하게 된다.
‘대중 속에서 먹는다’ 함은, 대중 가운데 들어가면 당연히 대중의 법을 따라야 하며 일을 결단하고 사람을 내쫓는 등의 대중의 일과 처분을 처리하게 되므로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수행하는 도에 방해가 있게 된다. 이러한 등의 괴롭고 어지러운 일이 있기 때문에 항상 걸식하는 법을 받아야 한다.
좋은 옷을 입으려는 인연 때문에 사방을 붙쫓아다니면서 삿된 생활[邪命]에 떨어지며 만일 남에게서 좋은 옷을 받으면 친하고 달라붙는 마음을 내고 만일 친하고 달라붙지 않으면 단월(檀越)이 원한을 품는다. 또 대중 가운데서 옷을 얻으면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중 안에서의 여러 가지 허물이 있다.
또 좋은 옷은 그가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면 탐착을 내게 하는 곳이며 좋은 옷의 인연은 도둑의 재난을 초래하고 혹은 목숨을 잃게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우환이 있기 때문에
헌옷을 빨아 기워 입는 법[弊納衣法]을 받게 된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한 끼의 음식을 구하는 것조차도 오히려 많은 방해가 있거늘 하물며 아침 밥[小食]과 점심[中食]과 저녁 밥[後食]을 구하는 것이랴. 만일 스스로 덜어내지 않으면 반나절의 공(功)을 잃으면서 일심으로 도를 행할 수 없다. 부처님의 법은 도를 행하기 위해서요 몸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마치 말을 기르고 돼지를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주 음식 먹는 일을 끊고 한 끼의 음식만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비록 한 끼의 밥만을 먹기는 하나 탐심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먹어 배가 불러서 숨이 찬지라 도를 행함을 방해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양을 조절하여 먹는 법[節量食法]을 받는다.
‘양을 조절한다’ 함은, 간략하게 말하면 3분의 1만큼은 배가 차지 않도록 남겨두면 몸이 가볍고 편안하며 소화하기도 쉽고 병환도 없나니, 몸에 손상이 없으면 도를 행하면서도 그만두는 일이 없다.
마치 경 가운데서 사리불이 말하기를 “나는 다섯 숟갈이나 여섯 숟갈만 먹어도 족하며 거기에 물로 채우면 몸을 넉넉히 지탱할 수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진(秦)나라에서는 점심을 열 숟갈 정도 밖에 먹지 않는 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음식을 조절하여 먹는다 하더라도 정오가 지난 뒤에 음료수를 먹기 좋아하면서 갖가지의 음료와 과일즙과 꿀물 등을 구하여 한없이 먹으면서 일심으로 착한 법을 닦아 익히지 못하나니, 마치 말이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좌우에 있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다가 재갈을 물려 놓으면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되므로 아예 풀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따라 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정오가 지난 뒤에는 음료수도 마시지 않는 법을 받는다.
무상관(無常觀)과 공관(空觀)은 바로 부처님 법에 들어가는 첫 문[初門]이어서 삼계(三界)를 싫어하고 여의게 한다. 무덤 곁[塚間]에는 언제나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흩어져 있으므로 눈으로 직접 덧없음을 보게 되며, 뒤에 혹은 화장하여 불에 태우거나 날짐승ㆍ길짐승이 다 먹어버리면 오래지 않아서 다 없어지게 된다. 이런 시체를 관(觀)함으로 인하여 온갖 법 가운데서 무상하다는 모양과 공하다는 모양을 얻기가 쉽다.
또 무덤 곁에 머물러 있으면 시체가 썩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되므로 부정관(不淨觀)을 얻기도 쉽나니, 9상관(相觀)은 바로 욕망을 여의게 하는 첫 문이다. 이 때문에 무덤 곁에 머무르는 법을 받는 것이다.
부정관과 무상관 등을 관하고 나면 도를 얻게 되고 일을 이룩하므로
그곳을 버리고 나무 아래[樹下]로 이르게 된다. 혹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이면 마음이 크게 싫증내지 않아도 이런 모양을 취하면서 나무 밑에서 생각하기를 ‘부처님 같은 분은 태어나실 때나 도를 이루신 때나 법륜(法輪)을 굴리실 때나 열반하신 때에 모두 나무 밑에 계셨다’고 하면서, 수행하는 이도 모든 부처님의 법에 따라 항상 나무 밑에서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법을 받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혹 나무 밑을 마치 반 집[半舍]이나 다름이 없다고 관하면서 그늘이 가려서 시원하고 좋다고 여기며 또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좋고 저 나무는 이보다는 못하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등의 번뇌를 내게 되므로 한데[露地]에 가서 머무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나무 밑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다. 첫째는 비가 새고 습기가 있으며 땅이 차고, 둘째는 새똥으로 몸을 더럽히고 독충들이 사는 등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는 이런 우환이 없다. 한데에 있으면 옷을 입건 옷을 벗건 간에 마음대로 쾌락을 느끼며 달빛은 공중에서 두루 비추므로 밝고 맑은 마음은 공삼매(空三昧)에 들어가기가 쉽다’고 하게 된다.
몸의 4위의(威儀) 중에서 앉아 있는 것이 첫째이니, 음식이 소화되기 쉽고 호흡이 순조롭게 된다. 도를 구하는 이가 큰일을 아직 마치지 못했으면 모든 번뇌의 도둑이 항상 그 틈[便]을 엿보고 있으므로 편안하게 누워 있지 않아야 한다. 가고 서고 하면 마음이 동요하여 가다듬기 어려우며 또한 오랫동안 견딜 수 없으므로 항상 앉아 있는 법[常坐法]을 받는 것이며 설령 잠을 자려 할 때에도 겨드랑이를 자리에 붙이지 말아야 한다.
수행하는 이는 맛[味]에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 평등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차례대로 걸식을 하면서 가난한 집이건 부자 집이건 가리지 않나니, 그 때문에 차례대로 걸식하는 법[次第乞食法]을 받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알면서 옷으로 몸을 가리되 많이 입지도 않고 적게 입지도 않나니, 그 때문에 다만 세 가지 옷만 가지는 법[俱三衣法]을 받는 것이다.
속인들은 쾌락을 구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옷을 많이 쌓아 두게 된다. 혹 어떤 외도(外道)는 고행(苦行)을 하면서 벌거숭이 몸이 되어 부끄러워함도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은 양쪽의 치우친 일들을 버리고 중도(中道)에 처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머무르는 곳[住處]과 음식을 먹는 곳[食處]은 언제나 유용하기 때문에 일이 많거니와 옷은 날마다 구할 필요가 없으므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 12두타(頭陀)에 대하여 부처님의 뜻은 제자들로 하여금 도의 행[道行]을 따르면서 세간의 쾌락을 버리게 하려고 짐짓 12두타를 찬탄하신 것이니, 이 부처님의 뜻은 두타로써 근본을 삼되 어떤 인연이 있으면 부득이 그 밖의 일을 허락하셨다.
마치 법륜(法輪)을 굴리실 때에 다섯의 비구들은 처음에 도를 얻고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저희들은 어떠한 옷을 입어야 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누더기[納衣]를 입어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계율을 받는 법[受戒法]은 목숨을 다하기까지 누더기를 입고 걸식을 하며 나무 밑에서 머물고 못써서 버린 것을 약으로 쓴다. 옛 4성종(聖種) 가운데서 두타는 곧 세 가지의 일이 된다.
부처님 법에서는 오직 지혜를 근본으로 삼을 뿐이요 괴로움[苦]으로써 우선을 삼지 않나니, 이 법은 모두가 도를 돕고[助道] 도를 따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찬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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