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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55 불교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상권

by Kay/케이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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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상권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상권


서진(西晉) 월지(月氏) 축법호(竺法護) 한역
최봉수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유야리(維耶離)의 큰 나무가 있는 중각정사(重閣精舍)에서 큰 비구중과 함께 계셨다. 비구 1만 명은 모두 계율을 배워 구족하였고 밝게 깨달아 알고 거룩하게 통달한 이들이었다.
보살 2만 명은 모두 불퇴전(不退轉) 보살이었고 여러 가지 총지(摠持)를 체득하였고 변재에 걸림이 없었으며 빠짐없이 신통을 얻어 분별하여 이해함이 분명하였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안정되었고 심성은 삼매에 나아가 매우 굳세고 강하며 마음속에 지혜가 풍부하여 선권방편을 잘하여 피안에 건너 간 자들이었으니, 그 이름은 의행(意行)보살ㆍ길의(吉意)보살ㆍ상의(上意)보살ㆍ지의(持意)보살ㆍ증의(增意)보살ㆍ금강의(金剛意)보살ㆍ무한의(無限意)보살ㆍ법의(法意)보살ㆍ자씨(慈氏)보살ㆍ박수(溥首)보살ㆍ구쇄(鉤瑣)보살 등이었다. 그리고 제석천과 범왕과 사천왕과 여러 천자를 비롯하여 1만 4천 사람이 모두 와서 모였다.
그때 세존께서 무앙수(無央數)의 백천 대중의 권속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을 위하여 경(經)을 설하고 계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몸과 목숨을 놓아 버리시고자 스스로 기약하기를 3개월 뒤에 마땅히 멸도를 취하려 하셨다.
이에 구쇄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다시 정돈한 다음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한 뒤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너무하십니다, 여래께서는 목숨을 버리시고자 3개월이 지난 뒤에 마땅히 반열반하시려고 하시다니. 세존이시여, 여러 보살이 보호할 것과 보살이 구제하고 섭수할 것과 보살이 설할 것, 보살이 드러낼 것, 보살이 심어야 할 여러 덕의 근본에 대하여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단절되지 않게 하시고 법의 눈으로 은혜를 베푸시어 성스런 대중을 제도하시고 뭇 중생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시어 무위도(無爲道)를 넘어서게 하십시오. 여래께서
멸하신 뒤에도 법의 윤택함이 널리 보살 대사에게 입혀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가 폐쇄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않고 경을 듣고 승단을 공양하여 요긴한 뜻을 세우게 하십시오. 마음의 뜻을 견고하게 하고 법을 준수하게 하고 마땅함을 따르게 하십시오. 그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에 있어 깨닫고 도달하지 못한 바가 없도록 하십시오. 몸으로 요해하여 그 귀의한 바에 수승하고 월등한 것이 많도록 하십시오. 항상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품고 스스로 정화하여 범하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개탄스럽고 슬프게 생각한 것이 위의를 구족하도록 하십시오. 건립한 것이 용맹스러워 힘듦과 더러움을 항복받고 제압하도록 하십시오. 여러 애욕의 때를 조복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도록 하십시오. 대중의 모임에서 노닐더라도 어려운 것을 기피하지 않으며 놀라지 않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天中天]이시여, 어떻게 해야 보살 대사는 온갖 덕을 점점 늘려가며 지혜에 있어 결핍되지 않으며 선정을 어기지 않게 됩니까? 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결핍되거나 폐쇄되지 않습니까? 안의 성품에서 크고 굳세게 벗을 맺어 궁극적으로 멸도에 이르게 됩니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서로 도와 부처님 법을 준수하되 삿되거나 허위인 것이 없겠습니까?
항상 바른 계율을 수호하며 듣는 바에 미혹되지 않겠습니까? 청정한 세 가지 금기를 거두어 항상 인욕할 수 있겠습니까? 매번 행동마다 마음을 평등이 하여 거칠거나 교만함이 없고 중생에게로 향할 수 있습니까? 정진을 잘 닦아서 마음에 나태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성취해 마치겠습니까?
한 마음으로 선정을 행하되 그 마음이 안온하고 길상스럽겠습니까? 일체의 여쭈어 볼 바에 대해 통효하고 요달하고 바르게 수용하겠습니까? 뜻이 강건하고 지혜와 사견과 예순두 가지 의혹을 떠나겠습니까?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경전에 대해 밝게 단련하고 통달하게 되겠습니까?
마땅히 구제하고 용납할 바에 대해 네 가지 은혜를 행하겠습니까? 천상과 세간에 대해 널리 제도하고 많이 수호하겠습니까? 애락을 멀리 떠나고 항상 무상함을 생각하겠습니까? 마음을 문지방처럼 보호하여 여러 신통과 지혜에 머물겠습니까? 뜻이 성문과 연각을 그리워하는 데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법의 가르침을 널리 천명하여 악마와 원수 및 여러 외도들을 항복시키고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면 마땅히 법왕께서 강설하고 교화하신 바를 베풀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교법과 교훈을 숭상하고 그것에 순응하며 천신과 인간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법으로써 업을 삼겠습니까? 의복과 음식을 탐하지 않아 애욕이 없도록 하겠습니까?
일체를 널리 제도하여 진에와 원한을 제거하겠습니까? 군생들을 불쌍히 여겨 어리석음을 소멸시키겠습니까? 모든 악마의 티끌과 때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권화와 방편을 행하여 가없는 지혜로 부분적으로, 또는 두루 권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나라연(那羅延)진(晋)나라 말로 구쇄 역사(鉤鎖力士)이다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다. 불쌍히 생각한 것이 많고 안온하게 하는 바가 많고 여러 천신과 세간의 인민을 슬프게 여겨 여래에게 마땅히 질문할 만한 이러한 것들을 묻는구나. 잘 듣고 잘 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보살은 그 행하는 바가 뛰어나고 특이하며 한량없는 덕을 갖추었다.”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구쇄보살과 모인 대중들은 가르침을 받아 청취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삼매가 있으니 그 이름이 등집중덕(等集衆德)이다. 만일 보살로서 이 정(定)에 이른 자는 온갖 덕이 점점 늘어나고 지혜가 결핍되지 않고 선정을 어기지 않는다.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찍이 막히거나 폐쇄된 적이 없고 마음의 성품이 크고 굳세어 일찍이 부처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리고 항상 경전의 법을 듣고 성스런 대중을 공양하여 네 가지 은혜를 행한다. 그는 그렇게 한 뒤에 군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때 세존은 등집중덕삼매에 대해 찬탄하시고 그 이름을 선양하신 뒤에 침묵하시고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유야리(維耶離)의 큰 성에 한 대역사(大力士)가 있었는데 이름을 유마라체이(維摩羅嚔移)진나라 말로 이구위(離垢威)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역사이다. 이 천하에서 힘과 세력이 강성하여 필적할 자가 없다. 그런데 일찍이 듣건대 사문 구담이 용맹한 세력이 한량없고 그 힘이 우뚝 솟아 있는데 총괄하여 요약하면 열 가지라고 한다. 몸과 여러 뼈가 마치 구쇄(鉤鎖:那羅延)와 같고 자재함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가서 그 도를 시험하고 관찰하여 나와 비교해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유야리성을 나섰다. 그는 큰 숲속에 2층으로 되어있는 정사(精舍)를 찾아 가서 세존을 뵙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래께서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 권속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위하여 경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 큰 모임을 비추며 임하고 계신 것이 마치 수미산이 대해를 뚫고 드러나 있는 것과 같았고 위엄을 갖춘 용모와 신비한 광채가 휘황찬란함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마음에 뛰어오를 듯한 기쁨을 품게 되어 스스로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부처님은 그 역사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교만과 잘난 체하는 그의 허물을 치료하고 제거하시고자 하여 현자 대목건련(大目乾連)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과거 보살일 때에 형제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 화살이 이른 곳에 가서 지금 그것을 가지고 오너라. 석가족의 여인 구이(瞿夷)가 쓰는 곳에 충당하고자 한다.”
목련이 대답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그때에 화살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이에 부처님은 오른쪽 손바닥에서 빛을 방사하여 그 빛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셨다. 그런데 그 부처님 국토에 진산(鎭山)인 철산(鐵山)과 대철위산(大鐵圍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화살이 뚫고 들어가 있었다. 목련은 빛을 따라 찾다가 마침내 화살이 있는 곳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정녕 화살을 보는가?”
“이미 보았습니다.”
“가서 가지고 오너라.”
그때 목건련은 스스로 신족(神足)을 드러내었으니 일체 중생 가운데서 보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용맹한 장부가 팔을 굽혔다 펴는 것같이 짧은 시간에 대철위산에 이르러 부처님의 화살을 뽑고자 하였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진동하였지만 화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일체의 천신ㆍ용ㆍ귀신ㆍ제석천ㆍ범왕으로서 숙연해지지 않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아난이 의복을 정돈하고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까닭에 땅이 흔들립니까? 온 세상이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에 화살을 쏘아 화살이 철산을 뚫고 들어가 있는 것을 기억해서 이다. 목련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가 신력을 다하였건만 화살은 뽑히지 않아, 삼천대천세계가 그 때문에 흔들리지만 얻지 못한 것이다.”
아난이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즉시에 허락하시어 도의 힘으로 그것을 돕게 하셨다. 그러자 곧 성스런 뜻을 받들어 뽑아내어 화살을 가지고 되돌아와 부처님께 바쳤다.
목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셨을 때 화살을 쏘아 철위산을 뚫고 들어가게 하셨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을 쓰신 것입니까? 신족(神足)의 힘을 쓰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이지 신족의 힘이 아니다. 만일 신족의 힘을 사용했더라면 그 화살은 마땅히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목련이 다시 말씀드렸다.
“어떻습니까? 보살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으로도 화살을 쏘아 철위대산을 뚫고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력의 공덕이 도와서 섭수하고 취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열 마리의 평범한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바른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바른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용같은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용같은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의 힘이 하나의 요술을 부리는[術事]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술사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푸른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푸른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보묘(普妙)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마리의 보묘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대신(大臣)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마리의 대신 코끼리의 힘이 한 명의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대(大)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대역사의 힘이 한 명의 상(上)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상역사의 힘이 반(半) 구쇄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반 구쇄 역사의 힘이 한 명의 구족한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구족한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대(大)구쇄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대구쇄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법인(法忍) 보살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법인 보살의 힘이 한 명의 구경(究竟) 보살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구경 보살의 힘이 한 명의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의 공덕의 힘보다 못하다. 그는 태어나 땅에 떨어지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방향의 세계에도 현재 여러 부처님이 건립한 국토가 있으니 그곳은 구경 보살이 노니는 장소이다. 그는 땅에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는다. 그 땅 아래로 6백 80만 유연(由延:유순)에 이르러서 그 아래를 다하여 수계(水界)를 얻는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이 각각 수레의 바퀴통쇠 정도의 크기라는 것을 분별한다. 또한 그는 위로는 범천에 이르는데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 그 세계는 손상되는 일이 없고 괴롭혀지거나 피해를 입는 일도 없다. 구경 보살의 위신력과 세력이 우뚝 솟은 것이 그와 같다.
그런데 열 명의 구경 보살의 힘이 한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의 힘보다 못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세존의 부모로부터 받은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여러 보살이 숙명에 지은 덕으로써 본래 수기를 받는 것도 신족과 도력의 변화는 아니다. 만일 보살이 신변과 공덕의 힘을 드러내어 보인다면 도량으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신족의 힘에 의해 한 발가락으로 항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의 세계를 들어 올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신족의 힘을 사용하여 수승하고 특이한 한량없고 가없는 여러 부처님 국토를 내려놓고 그러면서도 여러 중생에게 괴롭힘이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신덕변화(神德變化)에 의한 한 발가락의 힘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래의 신족 변화의 힘은 이것을 넘어서니 한량없고 끝없고 불가사의하다. 만일 여래가 신변과 부처님의 위엄을 두루 갖추어 시현한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보고서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외도의 술법을 쓰는 대중이나 사악한 이학(異學)들은 어떻겠느냐?
또한 목건련아, 보살이 불수(佛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네 가지 대종(大種)을 포섭하여 한 가지 대종으로 세운다. 이렇게 한 가지 대종으로 세운 뒤에도 세계에는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없다.
그때 폐마(弊魔:악마 파순)가 도량에 이르렀는데, 셀 수 없는 억백천의 흉악하고 패악무도하여 당하기 어려운 관속(官屬)들과 함께 왔다. 그러나 여래는 그 모두를 절복시켰으니, 무엇으로 그렇게 했는가? 평등의 힘이다.

또한 열 가지 힘이 있어 항상 큰 자애와 슬퍼하는 마음을 더하여 중생들이 훼손되고 저촉되는 바가 없게 한다. 어떤 것들이 열 가지 힘인가? 첫째, 경우 아닌 것과 경우인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둘째,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셋째, 한마음과 해탈문과 정의(定意:三昧)와 정수(正受:入定)를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넷째, 여러 사람의 감관에 갖가지 차별과 차이가 있음을 보고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다섯째, 다른 군생(群生)들이 마음과 뜻으로 사념하는 바를 보고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여섯째, 갖가지 몸이 있고 셀 수 없는 형체가 있는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일곱째, 온갖 무리들의 이런 저런 소행들이 좋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여 동일하지 않는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여덟째, 도의 눈이 철저하여 윤회하는 거취를 본다. 곧 여기서 죽어서 저기서 태어나고 저기서 죽어서 여기에 태어나며 이름은 무엇이고 성씨는 무엇이고 부모 형제는 어떠한가를 안다. 그리고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악을 저지르고 성인과 현자를 비방하고 사견으로 전도되어 마침내 악취(惡趣)에 떨어지거나 또는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성인과 현자를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받들고 순응하여 마침내 선한 곳에 떨어지니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아홉째, 도의 귀가 뚫려 천상과 세간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고 지옥과 아귀와 날짐승과 길짐승과 기어 다니는 무리의 숨소리도 듣는다. 또한 시방의 여러 부처님 세계에 이러한 소리가 있든 이러한 소리가 없든 집착함이 없으니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열째, 마음으로 다섯 거취와 일체의 본래 궁극을 본다. 여러 누(漏)가 모두 다하여 티끌과 때가 없다. 윤회를 빠짐없이 단절하였으니 신비하고 진실하고 성스럽게 도달하고 명색의 근원을 요해한다.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이것이 바로 열 가지 힘이다.
그런데 여래의 힘은 다시 이것을 넘어가 불가사의하니, 시방에 대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이 통하고 꿰뚫는 것이다.”
이에 이구위(離垢威) 역사는 부처님 세존으로부터 이러한 보살의 부모에게서 받은 여러 힘에 관해서 듣고 그 괴이하고 일찍이 없었던 일에 대하여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선한 마음이 생겨나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걸친 뒤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금 저는 세존께서
보살일 때 부모에게서 받은 힘 및 열 가지의 힘에 대해서 설하신 것을 듣고 잘난 체 하는 것과 교만과 스스로 크게 여기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저는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하며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큰 위안을 획득하게 하십시오. 불쌍히 여기시어 저에게 열 가지 힘을 얻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구족하신 것과 다름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그때 모인 대중들은 그 역사가 넓고 크게 서원하는 것을 듣고, 가득 찬 일만의 사람들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를 내어 노래하며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도의 힘을 얻게 하시고
또한 여래와 같은
진실한 등정각에 이르게 하소서.

이에 구쇄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지금 대성(大聖)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등집중덕삼매를 칭찬하고 찬탄하신 뒤 침묵하셨습니까? 여래께서는 등집중덕정의(等集衆德定意)를 분별하고 강연해 주십시오. 그리고 보살 대사의 여러 가지 행(行)을 밝히시어 뜻을 일으킨 자로 하여금 이 정(定)에 이르게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초발의(初發意) 보살로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이르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존귀한 정(定)을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발의가 존귀한 정을 지니면 빠짐없이 두루 일체의 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역사야, 냇물의 흐름과 샘의 근원과 강과 하천의 거대한 흐름은 모두 바다로 돌아간다. 그와 같이 심은 공덕으로서의 보시와 지계 또는 닦은 평등과 사유도의 지혜 또는 유루와 무루 또는 세속의 업과 출세간의 것 또는 천상과 인간에서 세운 복덕들이 모두 초발의 보살의 행으로 돌아가고 흘러간다.
그러므로 족성자(族姓子)나 족성녀(族姓女)가 온갖 복을 거두어들이고자 한다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땅히 뜻을 일으키도록 하라. 비유하면 수미대산ㆍ철위산ㆍ설산ㆍ흑산 그리고 여러 약초와 나무 및 여러 총림ㆍ고을 지역ㆍ큰 지방ㆍ군국(郡國)의 현과 읍
그리고 사천하와 해와 달의 운행과 비추임 등이 모두 삼천대천세계 속에 포섭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역사야, 범부이든 서민이든 이적(履跡:유학)이든 무착(無著:무학)이든 연각이든 중생을 돕는 보살이든 여래든 처음으로 뜻을 일으켜 보살이 된 자는 이러한 성대(聖大)한 복덕 속에 빠짐없이 통하여 들어간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만일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킨다면 곧 빠짐없이 여러 덕을 포용하고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네 가지 지역의 군생들의 무리에서 전륜성왕이 높은 자리에 거하여 공과 복이 수승하여 사천하의 온갖 보통 백성들이 복을 누리게 하며, 전륜성왕의 덕이 동등하여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 복덕을 합하면 우뚝 솟은 덕이 한 전륜성왕의 덕인 것이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덕이 각각 모두 전륜성왕과 같고 그러한 한 명 한 명의 성왕을 다시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의 수로 배가하여 그러한 여러 복덕을 모두 모아 한 사람의 덕으로 삼는다.
또한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에 있는 백성들이 각각 지은 덕을 그 한 사람과 같게 하여 모두 모은다면, 구쇄야, 네 뜻에는 어떠하냐? 정녕 그 복덕을 측량할 수 있겠느냐?”
구쇄가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성왕의 덕을 헤아리는 것도 불가사의합니다. 하물며 일체가 전륜의 덕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한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중생들의 한량없는 복덕을 합하여도 한 명의 초발의 보살에게 비하면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첫 번째로 초발의 보살이 등집중덕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범천은 1천 세계에서 항상 자애를 즐거이 행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1천 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일곱 보배로써 보시한다고 하자. 이것을 범천이 1천 세계에서 자애를 행한 것에 비유한다면 그 자애를 행한 것의 복덕이 수승하다.
또한 3천 세계 또는 5천 세계 또는 1만 세계 또는 10만 세계에 이르도록 범천은 두루 그 자애를 행한다. 그리고 10만 세계를 주위에 두루 충만시킬 만한 일곱 보배를 가지고 보시하여 심은 복덕이 있다고 하자. 이것으로 범천이 10만 세계에 자애를 행한 것과 비교하면 자애를 행한 복이 많아 측량하거나 한계를 지을 수 없다.
또한 만일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무리들이 각각 그 복덕을 범천이 10만 세계에서 자애를 행한 것과 같게 하여 자애의 마음을 행하는 것이 두루 군맹(群萌)에게 미친다고 하자. 그때의 복덕을 계산하여 초발의 행자가 존귀한 자애의 복을 짓는 것에 비교하면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도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발의 보살의 뜻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있으면 그 덕은 가히 한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보고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큰 도에 뜻을 일으킨다면 일체의 덕을 구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족성자 또는 족성녀가 두루 충만한 한량없는 복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역사야, 이것이 두 번째로 등집중덕정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동방의 세계가 허공에 덮여 있다. 그 허공의 멀고 가까움을 한계 짓고 측량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한계 지을 수 없고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으니 그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 비유를 인용하여 지자로 하여금 이해하고 나아가게 하려 한다. 시방세계를 덮고 있는 허공은 그 궁극을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등집중덕정의의 복덕과 공덕도 마치 그와 같으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한량없이 점점 더해져서야 구족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여러 도덕으로써 그 마음을 장차 보호하고 큰 정진으로써 행하는 바를 충분히 성취한다.
곧 아래로 물의 끝에 이르고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는 삼천대천세계에 그곳을 가득 채우는 겨자씨가 있다. 어떤 사람이 한 개 한 개의 겨자씨를 한 부처님 국토로 삼아 동방으로 지나가며 만나는 수많은 부처님 국토에 대해 각각 한 개의 겨자씨를 놓는다고 하자. 그렇게 한 개씩 한 개씩 하여 겨자씨를 다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도 동방 세계의 궁극적인 끝을 얻을 수 없다.
또한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세계를 가득 채우는 겨자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겨자씨들을 모두 취하여 하나하나 부수어서 그 각각을 다시 항하의 모래알 수를 한계로 하여 만든다.
구쇄야, 네 뜻에는 어떠하냐? 정녕 어떤 사람이 그 부서진 겨자씨의 수를 셈하고 헤아리고 분별하여 알 수 있겠느냐?”
구쇄가 답하였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한 겨자씨가 부서져 나누어진 것을 한계로 하여도, 비록 사리불 같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천하의 염부제를 두루 가득 채울 만큼 있다고 해도, 그리고 한 겁에 걸쳐서 그것을 셈하고 그것을 헤아려도 겨자씨의 수를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세계의 겨자씨를 부순 것의 수효에 대해서는 어찌 알기를 바라겠습니까?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 겨자씨를 가지고 부처님 국토 마다 하나씩 놓고 지나가고 그러한 비유로 부서진 겨자씨를 모두 다하여 남는 것이 없게 하여도 동방의 세계는 궁극에 이를 수 없으며 그 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남방도 그러하고 서방도 그러하고 북방도 그러하고 동남방도 그러하고 서남방도 그러하고 서북방도 그러하고 동북방도 그러하고 윗방향과 아랫방향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하다, 구쇄야. 시방세계에 있는 허공과 같이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모두 일곱 보배로 두루 그 가운데에 보시하되 빠짐없이 충만 시키고 다하게 하여 보시한다면 얻는 공덕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한량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 초발의 보살이 자애를 행한 덕은 이 보시를 넘어선다. 동방의 한계 지을 수 없는 세계를 가득 채우는 일곱 보배의 복을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 미치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 건너가 그 궁극적인 끝을 얻을 자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보살의 자애는 허공과 같아 덮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보살이 그렇게 행한 큰 자애를 덮는 것이라면 그것도 끝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중생이 형태를 받아 몸을 세워서 두루 다닌 부처님 국토와 머무른 세계가 아주 많은 것과 같으니 보살은 자애를 행하여 이 군맹으로 하여금 모두 전륜왕을 성취하게 한다. 또한 제석천과 범왕의 복과 같은 수의 공덕을 구족하게 하고 실천하게 한다.
또한 보살 대사가 건립한 정화된 성품과 솔직함과 사특하지 않음을 헤아리고 중생을 건지기 위해 큰 슬픔에 머물고 항상 일곱 걸음을 갈 때마다 자애와 슬픔을 행한다.
이와 같이 섭수하고 취한 공훈은 여러 군생과 종족들이 제석이 되고 범왕이 되고 전륜왕이 되어 얻은 복과 경사를 넘어선다.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세 번째로 등집중덕정의에 들어간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세계 일체 중생의 위신과 공덕을 모두 전륜왕 또는 제석천 또는 범왕의 경사스러운 공덕과 같이 우뚝 솟게 한다고 해도 초발의 보살의 자애에 비교할 수는 없다.
시방에 있는 일체의 중생들을 모두 제석천 또는 범왕 또는 전륜성왕이 되게 하고 그것을 백천만 배 한다고 해도 보살이 큰 자애와 슬픔을 행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다.
또한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의 범주에 드는 일체를 모두 청신사가 소유한 공덕과 같게 만들어도
사리불의 복과 밝은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해도 상응하지 못하고 미칠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모두 사리불의 지혜 및 공덕과 동등하게 하여 다르지 않게 하여도, 이쪽을 연각의 지혜 및 공덕에 비교하면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하여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다시 삼천대천세계에서 노닐고 거주하는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연각의 덕과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하여 동등하게 해서 차이나거나 특이한 것이 없게 하여도, 5겁을 생하여 행한 보살에 비하고자 하여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억 배ㆍ수억만 배를 하여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이것이 곧 네 번째로 등집중덕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경을 설할 때에 2만 2천 사람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고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다. 그 큰 광명이 두루 억백천 나유타의 세간을 비추었고 여러 천상의 기악(伎樂)이 연주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울었다. 그리고 천상의 꽃을 내려 도량을 두루 덮었는데 부처님 위로 분분히 내리면서 모인 대중들의 주위에 두루하여 무릎까지 쌓였다. 제석천ㆍ범왕ㆍ사천왕ㆍ용ㆍ귀신들이 모두 노래하고 찬탄하며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족성자 또는 족성녀로서 마음에 지극한 정성을 품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고 대성께서 강설한 대로 향하는 자는 저희들이 가서 여쭙고 의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큰 도에 뜻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등집중덕정의삼매를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한량없는 일체의 공덕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때 이구위 역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해야 등집중덕정의를 성취하고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한 법을 닦는다면 이 정에 이르게 된다. 어떤 것이 한 가지 법인가? 마음을 일으켜 여러 신통의 지혜를 익히는 것이니 이것이 이 정을 체득하는 한 가지 법이다.
다시 두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법인가? 법을 듣고 그것에 대해 여쭙고 의논하되 싫어하지 않는 것과 들은 대로 그 도리를 수용하고 사유하고 살핀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죄악을 소멸시키는 것과 선한 업을 권하고 모으는 것, 그리고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금기와 계율의 청정함, 보는 바의 청정함, 그 마음의 청정함, 지혜의 청정함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다섯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말하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러운 것, 뜻의 성품이 견고한 것, 그 뜻이 솔직하여 속이거나 아첨하지 않는 것, 그 마음이 청정하여 차별 없음을 건립하는 것,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것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다시 여섯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착한 벗을 따르고 악한 벗을 멀리하는 것, 온갖 모임을 버리고 폐쇄하는 것, 고요하고 편안히 명상을 익히는 것, 큰 자애를 따르고 행하는 것,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이다.
다시 일곱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고요히 분별하는 것을 건립하는 것, 상응하는 과보를 사유하고 관찰하고 제거하는 것, 연기에 입각하여 견해를 구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 죄와 복이 모두 서로 관계된 것에 말미암는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것, 이익으로 맺히고 막힌 데서 이끌어 평등한 것에 이르게 하는 것, 도의 법을 사용하는 까닭에 도리를 갖춘 도에 들어가는 것, 화나게 하고 꾸짖는 것을 참아서 마음에 한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일곱 가지이다.
다시 여덟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몸의 행이 담백한 것, 입의 말이 정숙하고 침묵하는 것, 마음의 사유가 고요한 것, 느낌[痛痒]을 관찰하고 여러 법을 살피는 것, 악의 뿌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상념하지 않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악의 뿌리가 치성하게 일어났으면 염에 따라 제거하는 것, 선의 뿌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따를 것을 사유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 선의 뿌리가 넓고 성하게 일어났으면 장차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이다.
다시 아홉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아홉 가지인가? 과거의 법을 관찰하되 무상함을 아는 것, 미래의 법을 관찰하되 생한 바가 없음을 아는 것, 지금 현재의 법을 관찰하되 두 가지가 아님을 아는 것, 삼세에 이르러 들어가 모두 평등함을 아는 것, 모든 법이 마치 법인(法忍)과 같음을 아는 것, 공성에 집착하지 않는 것, 무상(無相)을 분별하는 것, 원하는 것을 떠나는 것, 생한 것이 있다면 구호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홉 가지이다.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무아에서 벗어나는 것, 목숨이 없음을 인지(忍知)하는 것, 사람이 없다는 것과 무상하다는 구절의 자취를 요지하는 것, 일체의 생겨난 것이 모두 괴로움이며 근심임을 요지하는 것, 무위의 고요함이 곧 구호되는 것임을 요지하는 것, 전도를 떠나는 것, 중생을 건지는 것, 경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 법을 들은 대로 찾고 받들고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이 행해야 하는 열 가지 법이다. 이것으로 등집중덕삼매의 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 대사가 공덕과 효험을 누적하여 끝없는 큰 덕을 이루고 또한 이 정의를 얻고 듣습니다. 여러 덕과 바르고 진실한 행을 결정지으려면 마땅히 이 정을 들어야 합니다. 불가사의한 공덕의 복을 획득하고 창달하려면 마땅히 이 정을 들어야 합니다. 큰 보배가 다하거나 소모되지 않게 하려면 마땅히 이 정을 배워야 합니다.”
이구위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 대사는 무엇으로써 큰 바다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습니까? 그리고 불가사의한 경사[慶]를 얻고 폐쇄할 수 없는 공덕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세 가지 일이 있으니 큰 바다와 같이 다함이 없는 복덕을 얻게 하고 생각하기 어려운 경사와 폐하지 못하는 공덕에 이르게 한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보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금기와 계율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널리 들으며 권태로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족성자야,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보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땅히 재물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재물로써 유혹하여 정진하고 교화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려 하지 않는다면 받을 자는 그 물건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받는 자가 취한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의 권속들에게 결코 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구걸하는 자가 구하고 찾는 바가 있다 해도 받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국왕의 재물이든 보배든 경영하는 산업이든 주택이든 집이든 권해서는 안 되니 만일 구걸하는 자가 구하고 찾는 바가 있다면 그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어야 한다.
또한 족성자야, 보살 대사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몸과 목숨을 은혜롭게 보시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코끼리ㆍ마차ㆍ의복ㆍ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눈ㆍ귀ㆍ코ㆍ입ㆍ팔ㆍ다리ㆍ손ㆍ발ㆍ살ㆍ머리털ㆍ살점ㆍ피 등을 그 요구하는 대로 각각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한을 품지 않을 것이며 인욕하며 베풀 것이다. 그리고 이미 보시한 일이 있어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은혜로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탐착하거나 사모하는 일이 없이 중생에게 공급할 것이다. 중생도 은혜를 획득하여 결핍된 것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서도 군맹의 무리들의 욕구를 섭수하고 취할 것이다. 부처님의 도를 얻었을 때는 경의 법을 설하여 속히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아 그 몸이 다하더라도 온갖 악을 범하지 않는다. 생명을 해쳐 자신의 몸을 양육하지 않는다. 목숨 때문에 선하지 않은 일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물과 사업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훼손을 입히지 않는다. 권속 때문에 원한 맺고 소송하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치성하게 하지 않는다. 처와 자식을 양육하느라고 다른 아이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기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지 않는다. 만족하여 멈추어야 할 것임을 알고 나서 곧 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 뜻으로 여러 불선한 일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런 저런 선하지 않은 것을 다시 범하겠는가?
그리고 탐욕과 질투를 제거하여 여러 악을 버린다. 항상 만족하여 멈추는 것을 알기에 바르고 진실한 것을 행한다. 다른 마음이 없으므로 곧 평등함에 이른다. 평등함에 이르렀으므로 온갖 사악함이 없고 곧 자애의 마음을 획득한다. 자애의 마음을 익혔으므로 곧 착한 벗을 만난다. 이미 착한 벗을 얻었으므로 곧 고요함의 법을 얻어 듣게 된다. 이미 고요함에 대해 들었으므로 곧 행을 건립하게 된다. 행을 건립한 뒤에 곧 중생들을 교화한다. 이미 중생을 교화했으므로 곧 고요함과 도리를 강설하고 건립한다.
그런데 만일 보살이 중생을 위하지 않고 고요함을 닦지 않으면 미묘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미묘하지 않다면 도의 눈을 얻지 못한다. 도의 눈을 얻지 못하면 권화방편을 잘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일체 중생의 근본이 나아가는 곳을 보지 못한다.
족성자야, 이것이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성이 널리 들리는 것을 얻게 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니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족성자야, 안과 밖의 법을 관찰하되 그것이 하나로 동일하다고 염(念)해야 한다. 안의 지대(地大)를 살피고 밖의 지대를 살펴서 둘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초목이나 기와나 돌의 무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 상념도 있을 것이 없다. 4대(大)로 합성되었으니 견고한 것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끊고 자르고 부수고 깨뜨리고 주워서 취하고 가지고 간다 해도 자재를 얻을 수 없으니 그러한 상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해 탐욕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 수명을 아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분노의 뜻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서 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중생에게 더욱더 자애로 대하고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비유하면 족성자야, 큰 약초 나무는 그 뿌리ㆍ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가져가도 그 나무는 ‘누가 나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가지고 가는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나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약초 나무는 전혀 생각하는 것도 표상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온갖 사람들에 대해 분노나 한(恨)을 지니지 않는다. 질병에 걸린 자는 그 약을 먹고 즉시에 쾌유될 뿐이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몸은 4대가 모여 이루어진 집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마치 약초 나무와 같이 어떤 중생이 나의 몸에서 머리ㆍ눈ㆍ몸체ㆍ팔ㆍ다리ㆍ어깨ㆍ손ㆍ발ㆍ골수ㆍ두뇌ㆍ피ㆍ살점 등을 가져가려 한다면 뜻대로 그것을 주어야 한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이 보시를 통해 얻은 덕은 다함이 없다. 그렇게 보시를 한 다음에 인색하고 탐욕 있는 자로 하여금 은혜롭게 베풀 수 있도록 하려는 까닭에 그에게 권하고 돕는 것이다. 그리고 빈궁한 자는 교화하여 큰 재물을 볼 수 있게 하고 복이 적은 자는 교화하여 덕을 구족하게 한다.
그리고 아직 도에 뜻을 일으키지 않은 자는 보살을 행하게 하니 착한 일의 근본을 권하고 가르쳐서 청정하게 만들고자 해야 한다. 일체의 복과 경사로써 중생을 권하고 교화해야 하며 청정함으로써 인도하고 보시로써 인도하여 빨리 도에 다다르게 하고 다함이 없는 것을 얻고 그것에 이르게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보시가 다했다고 하는가? 보살의 보시에 네 가지 다하는 일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권하고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법을 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비천한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 악한 벗을 가까이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행이 있다. 그것으로 보살의 보시를 빠르게 도에 접근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권하고 돕는 바가 많은 것, 권화와 방편을 행하는 것, 법을 건립하는 것, 선한 벗을 늘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이 있어 보살의 보시를 허망하지 않게 한다. 어떤 것들이 세 가지인가? 보살의 뜻을 일으킨 자가 애민하는 것이 많은 것, 일체 중생의 무리를 섭수하고 보호하는 것, 여래의 가르침과 명령을 잘 받들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고자 할 때는 마땅히 세 가지 법을 건립해야 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부처님 법에 머물러 세우는 것, 정성들여 중생에게 강설하고 권하는 것, 중생을 크게 안온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허망하지 않게 성실히 살펴서 보시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큰 자애와 큰 슬픔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를 거두는 일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아끼고 탐내는 것과 질투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에 돌아갈 바가 있게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지혜의 구족과 성스런 통달이 주위에 충만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에 나아가는 것이 있게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다함이 없는 혜(慧)에 이르는 것과 일어남이 없는 혜로 나아가는 것이다.1) 이것이 두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에는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넷인가? 보시를 동등하게 주되 보답을 생각하지 않는 것, 선정을 조절하여 안온하고 고요한 것, 보시한 바가 구족되는 것, 그 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다함이 없는 덕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와 같은 모습의 보시에서 정진하고 행해야 한다.”
이구위 역사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여래께서 분별하시고 강설하신 대로 여러 보살의 법과 여러 부처님의 경전을 간직하고 보호하는 것을 보살 대사가 그와 같이 행한다면 마침내 바르게 통달한 지혜와 복덕을 훼손하거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보시한다면 그의 공덕의 복이 구족되고 성취되고 충만하는 것도 역시 마땅히 그와 같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그러하다. 과연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뜻을 일으킨 자가 그와 같이 보시를 행한다면 다함이 없는 덕의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빈궁하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업에서 큰 재물을 얻을 것이니 이들 부류는 법의 재물을 구족할 것이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니 일곱 가지 보배의 무궁한 덕을 구족하고 몸을 장엄하는 백 가지 상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여러 군맹을 위하여 복덕과 경사의 밭이 되고 그것으로 중생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일컬어 보살의 계율과 금기의 덕이라고 하는가? 계율과 금기를 지키니 일찍이 위배하거나 버리는 일이 없다. 계율을 범하는 자를 보면 슬픔을 일으킨다. 금기를 받드는 자를 보면 견고하게 준수하고 행한다.
그리고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을 정화하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을 보호하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을 정화한다. 이 열 가지 선한 일을 마땅히 순응하고 받들어 행한다. 이 계율의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개도하고 교화한다.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는다. 금기와 계율로써 스스로를 포상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또한 계율 때문에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다.
항상 금기와 계율로써 스스로 선정을 조절한다. 절도와 한계를 풀어놓지 않으니 만족하여 멈출 줄 안다. 현자와 성인들 가운데 머물러 그 마음을 스스로 보호한다. 나태하여 못쓰게 된 자를 보아도 그 틈을 살피지 않는다. 수고스럽게 찾아온 병든 자에게 하는 보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희망하는 바가 없으니 그것으로 구경(究竟)을 삼지 않는 것이다.
말한 바대로 행하여 침범하는 바가 없다. 여러 가지 행하는 바에 있어서 생사의 일이 몹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바가 없고 구하고 희망하는 것도 없앤다.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하며 자애의 마음을 준수한다. 자애를 행하는 자든 자애가 없는 자든 두루 동등하게 구제하고 보호하니 그 마음을 잃지 않는다.
계율의 품목에서 차이를 내지 않고 다른 승(乘)에 뜻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도와 승으로써 다른 사람을 권하고 일으킨다. 안온하지 않은 바가 없고 하늘을 섬기지 않는다.
여러 가지 계율과 금기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흔들려 불안한 자를 권하고 위로하여 안온하게 한다. 고립된 의혹을 치료하고 제거하여 한을 품지 못하게 한다. 태어난 곳에서 자재함을 얻어 몹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바가 없다. 노닐고 이르는 곳에서 모자라거나 줄어든 바가 없다. 가령 생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지 않는다. 마음을 닦고 건립하고 정진하고 섭수하고 스스로 검토한다. 행한 바가 어지럽지 않으며 즐거운 바도 없고 무서워하는 바도 없음을 배운다.
족성자야, 보살이 행하는 계품(戒品)의 업은 비록 몸과 목숨이 위험하다 하더라도 마침내 계율을 훼손하지 않는다. 나라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제석천과 범천 등 천상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재물과 이익과 보답을 경험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권속ㆍ부귀ㆍ안색ㆍ용모ㆍ포상ㆍ찬탄ㆍ명예ㆍ칭찬을 위한 것도 아니다. 또한 세력과 침상과 긴 걸상과 좌구와 질병에 필요한 의약품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탐내어 기대는 것도 아니다.
안과 밖에 의지하여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그리워해서도 아니다. 후세를 기대해서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집착해서도 아니다.
또한 색(色)ㆍ통양(痛痒:受)ㆍ사상(思想:想)ㆍ생사(生死:行)ㆍ식(識)에 탐욕을 내어서도 아니다. 또한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마음을 믿어서도 아니다. 또한 음(陰)과 종(種:界)과 여러 입처(入處)에 의지해서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지옥을 두려워하여 제도받고 보호받기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축생을 꺼려해서도 아니고 아귀를 두려워해서도 아니고 귀신을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궁핍하고 위험하고 가진 것이 없는 까닭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오직 부처님 도를 건립하는 데 있다.
만일 법을 들은 자로서 받들고 행하기를 생각하고 욕구하면 이미 성스런 온갖 덕을 본받아 건립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태어남ㆍ늙음ㆍ죽음ㆍ근심ㆍ병ㆍ고뇌ㆍ힘듦ㆍ괴로움의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고 해탈하고 제거하게 하고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재물과 사업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군맹을 안온하게 하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뭇 사람들을 제도하고 이런 저런 무리들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부처님 법을 즐거워하여 차이나고 특이한 것에 이르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그리고 법륜을 굴리는 것을 사모하고 성스런 무리들을 장차 양육하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끊어지지 않게 하고 법과 교훈이 폐기되지 않게 하고 온갖 의론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戒]ㆍ삼매[定]ㆍ지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의 품목들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킨다. 응당 여섯 신통을 찾아 그것에 도달하려는 까닭에 그렇게 한다.
준수해야 할 계율은 범하지 말아야 하고 결핍되지 않게 해야 하고 훼손되지 않게 하며 사악한 업이 없도록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응하여 잃는 바가 없다. 그리하여 마땅히 평등하게 삼매에 순응하며 행한다. 지자(智者)가 찬탄하고 부처님이 찬탄한 것을 배반하거나 위배하는 바가 없다. 교화하는 법을 따라서 받들고 행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 사람이 그와 같이 계율의 품목을 항상 준수하며 빠짐없이 구족하면 그러한 보살은 열 가지 법의 일을 잃지 않는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그런 뒤에 마땅히 전륜성왕의 지위를 얻으니 끝내 성왕의 가르침에 대해서 차이내거나 착오를 일으키지 않고 수행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도를 받들고 선양하며 방일하지 않는다.
둘째, 제석천으로 임하게 되면 그 지위를 맞이한 다음에는 잃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부처님의 도를 받아들여 방일하지 않는다. 셋째, 범천으로 올라가 태어나면 속이거나 다르게 하는 것이 없다.
범천에 있으면서 부처님 친견하기를 원하니 차질이 없다. 항상 세존을 만나 마음에 기쁨과 흐뭇함을 품는다.
넷째, 들은 경전을 일찍이 단절한 적이 없게 된다. 다섯째, 듣고 수용한 부처님 법을 일찍이 잊어버린 적이 없게 된다. 그리고 들은 대로 즉시 받들고 행한다. 여섯째, 보살과 성스런 대중의 지혜를 인식하고 생각하여 잃는 바가 없게 된다. 일곱째, 말솜씨가 한량없어 부족한 적이 없게 된다.
여덟째, 보살이 본래 서원하던 바가 있으니 건립한 일을 얻으면 항상 여러 부처님과 바른 장부들을 위하여 보답한다. 아홉째, 그 부처님과 제자들이 인도하는 바를 보고 허물지 않는다. 열째, 신통을 재빨리 획득하고 여러 민첩한 지혜를 구족한다.
계율과 금기를 지키되 그와 같다면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법의 행이라고 한다.
보살 대사가 이러한 계율의 품목에서 퇴전하지 않고 지키면 여러 천신과 용신이 함께 호위한다. 그리고 장차 이 금기와 계율을 지키고 노래하고 찬탄하고 지키는 자는 여러 귀신 대중이 모두 귀의하여 받들고 섬기고 용신이 모두 공경한다. 그리고 세간의 백성들도 공양하고 순응한다. 여러 부처님 세존들이 항상 그를 만나고자 하며 여러 밝은 지자(智者)들이 함께 으뜸으로 여기고 숭앙한다.
그는 세간을 불쌍히 여겨 자애의 마음을 행한다. 그렇게 중생을 위하여 이 금기와 계율을 지킨다. 그리하여 이 보살은 네 가지 거취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한가하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부처님이 안 계신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사악한 견해를 일으켜 어둡고 막힌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또한 일체의 악한 거취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계의 품목을 지키면 이러한 덕을 체득하게 된다.
다시 네 가지 잊지 않는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부처님의 도를 잊지 않는 것, 마음으로 부처님을 버리지 않는 것, 법을 들은 대로 마침내 잃어버리지 않는 것, 선정을 잃지 않으니, 뜻으로써 셀 수 없고 한량없는 여러 겁을 염하는 것이다. 보살이 만일 이 계율의 품목을 지키게 되면 이러한 덕을 체득하게 된다.
다시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 빛과 같이 관찰하는 것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즉시 밝은 법을 관찰하는 것을 얻는 것, 독과 칼과 공포와 두려움과 질병에 대하여 밝은 사람을 얻는 것, 캄캄하고 어두운 생각을 빠짐없이 제거하는 것, 그의 여러 공덕을 혼란하게 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만일 보살이 금기와 계율을 지키고 이러한 가르침에 순응한다면 열 가지 두려움을 초월하고 건너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지옥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축생ㆍ아귀ㆍ빈궁한 자ㆍ칭명할 수 없는 세계ㆍ악마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성문ㆍ연각이 나아가는 적멸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여러 천신과 인간의 태를 받아 태어나는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용신ㆍ귀신ㆍ건달바ㆍ아수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의 여러 가지 두렵고 어려운 것을 멀리 떠나는 것, 독ㆍ칼ㆍ매ㆍ불ㆍ뱀ㆍ사자ㆍ호랑이ㆍ이리 등의 여러 어려운 것들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사견을 제거하고 계율의 품목을 지켜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의 법이니 이 열 가지를 어려움을 면하고 넘어서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족성자야, 계율이 부처님의 법에 확립되면 그것으로써 광명을 삼게 된다. 부처님의 법은 곧 계율에서 보살의 도를 확립한다. 만일 계율을 받든다면 정의(定意)의 연(緣)에 가깝게 된다. 그리고 금기와 계율로부터 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의 일을 얻는 데에 이른다.
무엇을 일컬어 계율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에서 모두 영원히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라고 하는가? 죄와 복에 연결된 것이다. 삼계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티끌에 시달리는 일인데, 마땅히 무엇으로 이 여러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건널 수 있는가? 염하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고 사의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행하는 바도 없고 일으키고 세우는 바도 없고 역시 사유하는 바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일체법에서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 대사가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아직 멀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청정한 계율의 품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천에 가서 이르게 하는 것도 스스로의 애욕의 티끌에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더라도 역시 애욕의 티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곧 삼계에 거처하는 자에게는 청정한 계율의 품목이란 없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삼계에 있는 것이 모두 티끌에 시달리는 것이어서 세존께서 청정한 계율의 품목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보살이 애욕의 티끌을 떠나 청정한 계율을 체득할 수 있겠으며, 삼계에 머무르면서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아는가? 보살이 되는 자는 몸이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또한 계율을 훼손하는 일도 없고 또한 머무는 바도 없다. 단지 온갖 사람들이 삼계에 집착하는 까닭에 계율을 범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두 가지 일로써 선한 일을 행하고 교법을 권한다. 삼계의 때를 제거하고자 하는 까닭에 삼계에 처하여 훌륭한 권화와 방편을 베푼다. 보살 대사에게는 스스로는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삼계에 지금 존재하면서 그것으로 군맹의 무리들을 개도하고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구위야, 비유하면 어떤 선남자가 허공에 그림을 그리거나 문자로 쓰되 그것을 모두 드러낸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일으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 자신은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으면서도 삼계에 나타나 중생을 개도하고 교화하는 것이다.”
그때 이구위는 게송으로 찬탄하며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보살이 일으키고 구족하는 것은
그 궁극의 끝이 없으니
대비(大悲)를 행합니다.

이미 해탈의 문을 드러내어
온갖 성곽 등으로
다시 돌아 들어가서
의혹의 그물에 걸려 있는
중생들을 가르칩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몸에 질병이 일어나면
그 위험과 해악을 치료하고 제거하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과 동등하여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세존이시여
오늘 해악을 제거하고
세간에 접근하여 도를 청정히 하니
보살은 이 해탈에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과 여러 이학(異學)을 권화하고
그 방편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구제합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보살 대사만이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니
성문과 연각이 미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문과 연각에는
대비가 없으며
권화와 방편을 구족한
그러한 행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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