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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57 불교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하권

by Kay/케이 2024.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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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하권

 

등집중덕삼매경 하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최봉수 번역


“다시 구쇄여, 보살이 준수해야 할 것은 색이 공하다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색은 자체가 공하기 때문입니다. 또 통양(痛痒:受)과 사상(思想:想)과 생사(生死:行)와 식(識)이 공하다고 보지 말아야 하니, 식은 자연히 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색이 공하다고 보지 않게 해야 하니 색은 바로 공하기 때문입니다. 근본과 지말이 다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통양ㆍ사상ㆍ생사ㆍ식이 또한 공이 됩니다. 다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과 지말이 다 공해집니다. 그러므로 식은 공이고 또한 자연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미 다 소진했다면 일체의 모든 법도 또한 다시 마땅히 소진합니다. 만일 모든 법이 소진하면 색도 또한 마땅히 소진합니다. 통양ㆍ사상ㆍ생사ㆍ식도 그러하니 식도 곧 소진합니다.
만일 일체의 여러 색이 소진한다면 또한 일체의 모든 법도 또한 마땅히 소진합니다. 만일 모든 법이 소진한다면 식도 또한 마땅히 소진할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한다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보살이여, 보살이 행하는 것에 입각하면 범부의 법을 단절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면서 행합니다. 부처님 법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러하니 힘써 생사에서 제도하지 않으면서 행합니다. 또한 멸도하는 일을 구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하지 않은 법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여러 선한 법의 유래도 관찰하지 않습니다. 지혜에 입각하지 않는 까닭에 식별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식별을 사용하지 않는 까닭에 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법계(法界)를 파괴하지 않으며 행합니다. 그리하여 믿고 기뻐하는 바가 있어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족성자여, 만일 보살 대사가 실천하고 실행하되 법계가 한량없고 인계(人界)가 무한하다면
법계와 혜계(慧界)와 인계(人界)가 무한하다는 것을 모두 믿고 이해하여 빠짐없이 소진해야 합니다. 법계에서 행하든 인계에서 행하든 그것에는 둘이 없습니다.
법계에 입각하면 손실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소진되는 것도 없습니다. 모습도 그와 같으며 인계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런데 인계는 모습이 있는데 법계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계와 더불어 이 모습이라는 것도 곧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일체법이 모두 모습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인계를 소진하지 않지만 행하는데 늘어나는 바도 없습니다. 핵심되는 사상(思想)은 없으면 없을수록 흥기하고 발흥합니다. 전도된 일과 속여서 미혹하게 만든 모습이 그 가운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행하는 자는 애욕이 소진된 것을 제거하지도 않으며 생하는 것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명성을 듣지도 않고 상주하는 것을 헤아리지도 않고 또한 무너뜨리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자아와 인간과 목숨을 멸진하거나 제거하지 않습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이러한 보살의 행에 관한 품을 설하였을 때 백천(百千) 천자가 법인을 얻었다.
그때 이구위보살은 찾고 아뢰고 받아들인 뒤 큰 음성을 내어 찬탄하고 노래하며 말씀드렸다.
“일체의 인간과 군맹의 무리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고 그 이익과 도리를 두루 획득하되 부처님 세존과 같도록 하려면 모두 이 삼매의 정을 믿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때 마왕 파순이 박수 동진에게 말하였다.
“나도 보살이 행하는 대로의 보살도에 대해 감히 찬탄할 수 있겠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악마가 말하였다.
“일체 인간들의 행이 곧 보살행입니다. 여러 성문과 보살의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아래로 집에 거주하는 자들이 익히고 있는 일체의 음습한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일체 악마의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모두 그 가운데서 함께 거처하기에 일체가 모두 그 보살이 배울 바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에 구쇄보살이 악마가 있는 곳에 가서 말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빠짐없이 두루 배워야 합니까?”
악마가 답하였다.
“8만 4천 종류의 중생의 행이 있습니다. 그 중 2만 1천은 탐욕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성냄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어리석음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등분(等分)에 속한 행입니다. 이들 종류가 모두 빠짐없이 보살의 행에 두루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탐욕의 행을 행할 때 탐욕을 떠나면서 행해야 하고 성냄의 행을 행할 때 성냄을 떠나야 하고 어리석음의 행을 행할 때 어리석음을 떠나야 하고 등분의 행을 행할 때 등분을 떠나면서 다만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두루 일체 중생의 행을 준수한다면 곧 군맹의 행을 관찰할 수 있고 일체 중생들을 개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악마에게 질문하였다.
“어째서 일체 악마의 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보살은 모두가 여러 악마의 마음의 흐름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으킨 것으로 일으킨 것을 삼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일이 가르친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악마의 행을 깨닫고 요지하면서 중생의 행을 교화하는 것이고 그 행을 보면서도 그 행을 닦지는 않는 것이며, 홀로 악마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악마의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을 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악마를 다스리고 교화할 방법을 마땅히 닦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마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악마의 사건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다시 악마에게 질문하였다.
“어째서 일체 성문과 연각의 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여러 성문과 연각을 위하여 경의 법을 강설하고 소원을 구족시켜 주며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 정진의 행을 준수하고 숭상하고 길게 하고 늘린다면 마땅히 그러한 은혜를 구하는 것이지만 그 승(乘)을 사유하여 멸도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족성자여, 일체의
여러 행은 모두 자연히 그 행이 담백합니다. 보살이 마땅히 믿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을 행한다면 그러한 행은 이미 일체의 행한 바를 넘어선 것이니 진리를 살피는 행과 같습니다.
일체 여러 행에는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또한 일체 여러 행은 무위의 행입니다. 또한 합하고 모인 것이 없으며 일어나는 행도 없고 머무는 행도 없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그와 같은 행을 숭상해야 합니다.”
마왕이 또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그대는 두터운 은혜를 내리어 다시 이 여러 행에 대해 설해 줄 수 있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변재(辯才)가 일체를 모두 제도할 수 있다면 모든 경계가 다 보살행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하는 자는 안계(眼界)와 함께하거나 합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색계(色界)와 합치고 모이는 것이 아니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법과 의계와 합하고 모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왕이여, 마땅히 이렇게 봐야 합니다. 곧 여러 경계를 건넌다면 이름하여 바른 장부[正士]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천자여, 보살이 만일 그와 같이 행한다면 여러 부처님 세존을 속이거나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고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어째서 보살이 행하는 바가 여러 부처님 세존 및 일체법을 속이거나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박수보살이 답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참된 진리는 모든 법이 공임을 요해하고 있습니다. 일체에는 모두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른 것이 없습니다. 만일 보살이 견해의 몸과 여러 부처님 법에 의지하고 기댄다면 아울러 열반을 본다고 한다면 이것이 여러 여래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자여, 여래의 행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일체법에서 생각과 집착이 없어야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보살이 일체법에서 생각하는 바가 있고 생각과 더불어 노닐고 거주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곧 여래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자여, 여래의 자세하고 사실이고 성스러운
진리에는 좇아서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생하는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는 모습도 없고 온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습니다. 본성이 청정하며 본성이 밝게 통달한 것이며 본래 청정한 멸도인 것입니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 형태와 모양이 없습니다. 일체법 또한 모두 그와 같다고 요해해야 하니 내지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모든 법에 대하여 감도 있고 옴도 있고 들어감도 있고 나옴도 있다거나 혹은 일어날 것이 홀연히 나타났을 때 어떤 존재에서 나왔다거나 어떤 모습에 의지한다고 여기거나 혹은 가고 되돌아옴이 있다거나 혹은 세울 바가 있어서 청정함이 없다거나 혹은 티끌에 시달리는 무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윤회하면서 색의 영역을 획득하여 방일한다거나 이런 사념을 하는 이는 곧 여래를 속이는 것입니다.
만일 천자여, 어떤 보살이 공을 동등하게 제어하고 이해하여 일체법을 요해한다면 여러 견해에 대해 사상(思想)이 없게 됩니다. 행할 바를 동등하게 제어하여 일체법을 이해한다면 여러 생각을 빠짐없이 제거합니다. 무원(無願)을 동등하게 제어하여 제법을 분별한다면 삼계를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공과 같다라고 동등하게 제어하여 일체법을 이해한다면 본래 청정한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여 보살이 된 자는 부처님 세존을 속이거나 미혹하지 않게 합니다.”
그때 대성께서 박수를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동진이여, 착하고 착하다.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만일 보살이 행하는 바가 그와 같다면 빨리 수기를 얻게 된다.”
부처님께서 박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과거 정광(錠光) 부처님 시절을 기억하는데 나는 몸소 청정하고 순백한 법을 권하고 돕고 행하였다. 그때 행하는 바에 행이란 없었고 또한 고요함에 들지 않아 수기를 얻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행에 처하는 것을 이름하여 나타난 빛[所現光]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본 뒤에 다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때 색을 차지하는 것이 뜻을 날카롭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더니 바로 정광 여래 대성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본래 청정한 것을 요지하였다. 그러자 즉시에
일체의 모든 법에 결코 일어나는 것이 없음을 두루 요해하였다. 그 뒤에 나에게 수기의 내용을 보이셨다.
‘그대는 미래세에 부처를 이룰 것이니 그 명호를 능인(能仁)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ㆍ불중우(佛衆祐)라고 할 것이다.’
그 세계에서 바로 그때 나는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찾아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수야, 만일 보살이 재빨리 불기법인을 얻고자 욕구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행을 닦아 여러 가지 퇴전하는 것을 구제해야 한다.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하고 이익 되는 업 때문에 정진해서는 아니 된다. 법을 행하여도 처소가 없고 제도하고 해탈하여도 처소가 없고 건너도 처소가 없으니 그렇게 건너고 내지 해탈을 얻는 것이다.”
박수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그런데 법인을 얻을 때 어느 곳에서 얻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색을 얻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얻는 바가 없기에 법인에 이른다. 음(陰)과 종(種:界)과 여러 입처를 얻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상주[常]와 공(空)과 청정(淸淨)과 안온(安穩)과 아울러 자아와 몸을 얻거나 헤아리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다시 일체 제법을 얻지 못하는 것을 영원히 보기에 법인에 이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박수야, 모든 법은 모두 소진하는 까닭에 얻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박수야, 법인은 이르는 것이 없는 것이고 또한 얻는 바도 없다. 세속의 행을 따르고 익히는 까닭에 이름하여 얻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범부의 법도 아니고 유학의 법도 아니고 무학의 법도 아니다. 또한 연각의 법도 아니고 보살의 법도 아니고 부처님의 법에서 행하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법에서 도무지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얻는다고 말한다.
일체의 제법은 또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얻는다고 말한다. 만일 법인이 공(空)이고 무소유(無所有)라면 일체의 생각에서 여러 가지 행한 바가 있다 해도 두려움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모색하고 얻는다고 말한다.
그 법인에는 눈이 없고 또한 안식(眼識)이 없다. 귀가 없고 또한 이식(耳識)이 없다. 코가 없고 또한 비식(鼻識)이 없다. 혀가 없고 또한 설식(舌識)이 없다. 몸이 없고 또한 신식(身識)이 없다. 뜻이 없고 또한 의식(意識)이 없다. 여러 경계에 다함이 없는 까닭에 법인이라고 이름한다. 무위계를 일컬어 법인이라고 한다. 의계가 없으며 내지 그것을 일컬어 법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 빠짐없이 소진하고 모색하니 내지 법인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 법인 및 제법의 소진과 모색에 대하여 설할 때 5백 보살이 불기법인을 얻어 동일한 소리를 내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저희들은 마땅히 등집중덕삼매를 구족하겠습니다. 또한 마땅히 일체법을 두루 준비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심오하고 미묘한 법을 보살은 마땅히 계승하고 순응하며 배워야 합니다. 만일 들은 바가 있는 자라면 마땅히 기뻐하고 믿고 수용하고 간직하고 독송하되 법대로 받들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구쇄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 바를 다 갖추고 온갖 일을 다 성취합니까? 보살은 마땅히 몇 가지 법에서 실천해야 할 온갖 일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다 갖춥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일체법이란 실천할 것이 없다고 안다면 그와 같은 보살은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일체의 제법이 모두 무소유이고 또한 행하는 바가 없으니 제법에 대해 통효하되 그와 같이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앎도 없고 둘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실천을 떠나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해야 될 것이 있을 때 선양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은혜를 얻은 자가 얻은 은혜에 보답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반복이 없는 경지를 만나 더욱 반복해 공부하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마땅히 공양하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겸손하고 자신을 굽히고 보시하는 예를 올린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반복에 대해 알기에 반복을 떠난다면 또한 일을 다 갖추어 일을 다 갖추지 않는 것을 떠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나를 가볍고 손쉽게 여기는 자로부터 업신여김과 손상됨을 당하고도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린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무엇인가를 실천한 자가 실천한 법으로 이루어진 행에 집착하지 않거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의 허물됨을 보지 않으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보시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시켜서 도에 들어가게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보시를 얻지 못하고 도도 얻지 못하고 자아도 얻지 못하고 사람도 얻지 못하고 또한 타인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금기ㆍ계율ㆍ인욕ㆍ정진ㆍ한마음ㆍ지혜를 보호하지 않고 또한 보호하고 권하고 시켜서 도로 나아가게 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보시하여 베풀고 계율을 간직하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한마음이고 지혜를 갖추고 도에 들어가도록 권하고 시킨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앎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고 자아도 없고 남도 없고 또한 얻는 바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염하되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고 이 일을 분별하며 또한 몸ㆍ입ㆍ뜻으로 행한 온갖 선이 있다 해도 역시 얻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상견정진(常堅精進)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저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마땅히 설하여도 되겠습니까?”
박수가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렇게 하십시오.”
박수에게 말하였다.
“만일 한 사람에게라도 권하여 도(道)의 소리를 듣게 하였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며
대승경전[大乘嚴藏]에 때때로 스스로가 익히고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소리와 교법의 소리와 성스런 대중의 소리를 얻게 한 뒤에 관찰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됩니다.
만일 한 중생을 교화하여 계율과 금기를 수용하도록 시키고 부처님과 교법과 성스런 승단에 귀의하게 하여 뜻을 삼보에 두게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되고 보살이 경전을 구족하고 또한 공양한 것이 됩니다.
만일 노닐고 거주하는 곳에서 보시하는 자 또는 받는 자에게 권하고 도와서 이 두 가지 일에 입각하여 뜻을 도에 두게 한다면 이것이 곧 보살의 청정한 중우(衆祐)입니다. 만일 보시하는 자 또는 받는 자로서 이미 이 법을 행하였고 또한 이 두 가지 일을 권하여 교화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모두 보살의 청정한 중우입니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을 사유하고 염하며 또한 경의 법과 성스런 승단과 보살과 중생을 사유하고 염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되며 대승경전에 입각하여 공양을 받은 것이 됩니다.
만일 보살이 자애의 마음과 슬픔의 마음과 기쁨의 마음과 평정의 마음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한 사람의 하열하고 빈궁한 도적을 만났는데 그가 회를 치고 욕을 하고 거침없이 말하더라도 그것을 인내하고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자애의 마음을 계속 행하며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모시고 이익 되는 도리를 늘려 주고자 해서 정진을 더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됩니다.
만일 백 가지 이익 또는 천 가지 이익 또는 백천 가지 이익 또는 억백천 가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다 해도 또한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한 진기한 보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 보배 때문에 일찍이 험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지혜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는 정녕 몸과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뒤에서 나쁜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법을 잊지도 않고 법 아닌 것을 계승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구족하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박수여, 보살이 만일 칠 일 동안 공양이 끊기어 음식을 얻지 못했는데 음식을 받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온다 해도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에 허망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고자 하며
군맹의 무리를 구제하고자 하고 염하니 이것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천하에 물이 두루하고 가득차서 그 땅을 주위로 둘러싸고 있다 해도 마땅히 이것을 넘고 건너서 법을 구하고 청하러 갑니다. 또한 만일 불이 두루 가득하다 하더라도 마땅히 넘고 건너서 법을 구하고 들으러 갑니다.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목숨을 탐내지 않고 수명에 애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陰)과 종(種)과 여러 입처(入處)는 쉽고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여러 부처님 세존을 만나 뵙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경법(經法)을 듣기도 어려우며 법을 아끼고 공경하는 자를 만나기도 역시 어렵다’라고 봅니다. 만일 이러한 관점에 자주 들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입니다.
다시 또 보살이 이 네 구절로 된 게송을 듣고서 환희하고 기뻐서 뛰어오르되 전륜성왕이 되는 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정녕 이 네 구절로 된 게송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하고 기쁘고 즐겁게 만들되 제석천의 지위를 즐거워하지만 않습니다. 정녕 온갖 보시를 건립하여 개와 같은 짐승과 용신 등도 유도하고 교화하지만 범천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을 흔연히 즐거워하되 삼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일곱 보배를 탐내지는 않습니다. 기뻐하고 뛰며 한 가지 덕의 근본을 심고자 원하고 뜻하면서 일체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공양하는 이익을 얻습니다. 보살이 그와 같이 행하고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상견정진보살이 다시 박수에게 말하였다.
“만일 보살로서 항상 견고하게 정진하고 항상 널리 듣기를 구한다면 마음으로 마땅히 이렇게 염해야 합니다. 곧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몸을 조각조각 마디마디 나눈다 해도 오히려 환희하고 스스로 힘써야 한다’고 염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세속의 법에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부처님 도에 뜻을 두고 수행해야 합니다. 정녕 몸과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 대승을 버리지 않고 어리석은 마음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악한 힘을 일으키지 않고 인욕의 힘을 이루어야 입으로 하는 말이 거칠지 않게 되며 모두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끝내 나태 하는 일이 없이 정근의 행을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고 정화하며 중생을 구제하여 법 아닌 것을 실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체의 여러 도무극(度無極:바라밀다)을 두루 구해야 하며 반당(伴黨:朋黨)을 구하거나 중생을 희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혜에 굳게 머물러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끊어지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뜻의 성품이 강건하고 용맹스러워 일체의 실천해야 할 바로서 성취되지 않았거나 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 뜻은 어질고 온화하며 아첨하는 것을 버리며 탐착하고 그리워하는 바가 없으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편의(便宜)한 것을 통효하고 단련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서 있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청정한 계율을 받드는데 귀의하게 해야 합니다.
어른이 질문하면 답하는 말이 부드럽고 사용하는 말에 꾸미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비유하면 땅과 같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구하는 바도 없고 묶고 기대는 바도 없이 그 성품이 순수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답하는 바가 안온하고 설하는 바가 항상 쾌활하고 공경하고 수용하고 잘 단련해야 합니다. 교만함을 버리어 항상 그 뜻을 겸손히 하고 낮추어야 합니다.
말하는 바는 지극히 정성스러워야 하니 화내거나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설한 바는 있는 그대로여야 하니 헐뜯거나 아첨하는 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은 상응해야 하니 평등한 마음을 준수하고 숭상해야 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군맹을 향하고 뜻을 큰 슬픔에 두어야 합니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체의 온갖 덕의 근본을 건립하고 그것에 대해 흔쾌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되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평정을 행함으로써 욕심에서 구제해야 합니다. 재물과 사업을 획득하되 마땅히 안온하게 행해야 합니다. 일체의 여러 가지 탐착과 애욕을 내다버려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어야 하며 소유물에 기대어서도 아니 됩니다. 끝내 자기를 위대하다고 해서는 아니 되니 세 가지 때를 제거해야 합니다. 해탈을 뜻하고 구해야 하며 상념을 떠나야 합니다. 사유하는 바와 집착하는 바가 있어 여러 견해에 떨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62견(見)이 없어야 하며 항상 널리 듣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일곱 가지 재물을 구족하고 그 마음을 항상 강건하고 용맹하게 해야 합니다.
들은 것을 밝게 알아야 하고 일찍이 그것을 싫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마땅히 지혜를 배워 그것에서 건립된 바가 있어야 합니다. 용맹한 데서 머물러 번뇌를 항복시켜야 합니다.
애욕의 때를 떠나고 일체 중생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항상 중우가 되어야 하니 일찍이 버리고 떠나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으로 복의 밭을 성취해야 합니다.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은혜를 입도록 해야 합니다.
연꽃처럼 행하여 여러 세속에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뱃사공처럼 여러 군생에게 네 가지 병의 환난을 건너게 해야 합니다. 뜻을 왕의 도로와 같이하여 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중간의 사람을 경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땅히 샘의 근원이 하천과 강으로 흘러가듯이 설해진 경전이 소진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큰 바다와 같이 행하여, 들어서 얻은 지혜가 포섭한 것에 바닥이 없어야 합니다. 한량없는 덕이 쌓이고 모여야 합니다. 성품이 수미산과 같이 초월하고 드러나서 세간에서 우뚝 솟아 지극히 높아야 합니다.
항상 정진을 즐거워하고 뜻의 성품은 강개(慷愷)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겁이 없고 열등하지 않아야 하며 마음은 문지방과 같아야 합니다. 뜻으로 견고하게 원해야 하니 그 뜻은 학의 털과 같아야 합니다. 그 성품은 조화롭고 항상 존귀한 마음을 행해야 합니다. 중생을 제도하고 인도하며 자재를 닦아야 합니다. 그 의지가 기특하고 품위 있는 곳에 머물도록 권하고 도와야 합니다.
미묘하게 해탈하되 제석천과 같이 행해야 합니다. 중생을 품고 오게 하되 범천과 같이 준수해야 합니다. 권위 있고 청정한 행을 분별해야 합니다. 일체법에서 자재를 얻어야 합니다. 마땅히 항상 자애를 행하여 궁극적으로 멸도해야 하니 행하는 것은 끝내 없어지는 것입니다.
건드리고 범하는 자가 지은 것이나 짓지 않은 것이나 모두 인욕해야 합니다. 엄한 아버지를 대하듯이 마음으로는 수용한 것을 지극히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도반의 무리들과 같이 여러 덕의 근본에 뜻을 두어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뜻으로는 여러 경계에 기대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위험과 해로움이 없이 행하고 자애와 인자함을 닦아 머무는 곳이 상서롭습니다. 태어난 곳에서 또한 장부에게 보시하니 법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여러 선하지 않은 법을 단절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일체의 온갖 선한 법을 받들고 행해야 합니다. 방일하지 않은 것을 준수하고 스스로 방자하고 교만한 일을 제거해야 합니다. 계율을 배우고 정진하되 행하는 바가 견고하고 강건해야 합니다. 방일하지 않고 보살행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이르고 획득하여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 상견정진(常堅精進)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착하고 착하다. 시원하게 보살행을 설하였고
그와 같이 온갖 덕을 건립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체득하려고 욕구한다면 두루 일체의 공덕을 분별하고 여러 죄와 허물을 떠나야 한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보살이 이 등집중덕삼매를 얻는 경우 그 공덕과 서응(瑞應)을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등집중덕삼매를 보살 대사가 획득한다면 악취의 땅을 멀리 떠나게 되며 여덟 가지 액난이 활거하는 곳이 그에게는 없다. 빈궁하고 가난한 것을 제거하고 단절하게 되어 풍요롭고 기름진 것을 공양받으니 자연히 즐거워한다. 여러 감관이 구족되고 서른두 가지 위대한 사람의 특징을 성취하게 된다.
법은 무궁무진하고 변재를 얻으며 총지를 획득하여 항상 뜻을 잃지 않고 일체의 복덕에서 자재한다. 바퀴를 굴리어 기대는 것이나 막히는 것이 없게 한다. 온갖 중생들이 그를 받들고 섬기게 된다. 제석천이 그에게 여쭙는 것을 보게 된다. 범천이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게 된다. 신통을 획득하여 밝게 도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본래의 서원을 얻어 태어나는 것에 자재하다.
권화와 방편과 나아가고 물러서는 지혜를 행하여 선(禪)의 가르침과 지혜를 준수하고 닦는 것을 따르지 않아 일체의 견해를 떠났기에 지극히 존귀하고 특히 귀중하여 성문과 연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여러 공포와 두려움 및 성문과 연각의 지혜를 떠났다. 중생의 여러 근기를 분별해서 중생의 오락하는 여러 견해를 요달하고는 한마음의 해탈문에 속하는 일에 뜻을 둔다. 머물되 처소가 없이 항상 보시한 바에 순응한다. 계율을 건립하여 세 가지 청정함을 지킨다. 인욕을 분별하며 궁극에는 형태란 없으며 아첨 또는 허위의 생각을 떠난다. 강설하고 정진해도 그 뜻에 나태함과 권태로움이란 없다. 선정을 해설하여 항상 고요함을 건넌다. 지혜를 널리 펴고 눈으로 항상
직접 보며 빠짐없이 분별한다.
눈으로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항상 집착한 것을 내다 버린다. 여섯 경로를 제거하여 일찍이 위배되거나 멀어진 적이 없게 된다. 항상 여러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성스런 승단을 받들고 섬기며 힘써 수행한다. 공(空)ㆍ무상(無想)ㆍ무원(無願)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들은 경전에 입각하여 일체의 여러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노래하고 찬송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수용하니 곧 여쭙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여 그것을 잘 분별하고 설해준다. 도솔천에 있으면서도 불퇴전(不退轉)의 법을 버리고 떠난 적이 없다. 일체의 부처님의 국토를 유행하고자 욕구한다면 막히거나 걸리는 것이 없으니 두루 여러 부처님을 뵙게 된다.
악마와 원수를 항복받으니 네 가지 악마가 없다. 심오한 법인을 보며 불퇴전의 법에 거처한다. 신통을 밝히는 일은 도업에 있으니 법은 넓지 않는 것이 없다. 품고 간직해온 것은 적연하고 청백하다. 행한 바에 부처님 법이 구족되어 있음을 보니 불퇴전행(不退轉行)의 나아갈 바를 나타낸다.
막고 걸리는 일체의 집착을 제거한다. 나의 자아의 색이 환상의 현현과 같음을 본다. 일체의 몸을 모두 관찰하니 이길 자가 없고 모든 외도들에게 간직하고 지켜야 할 바른 법과 여러 부처님의 존귀한 경전을 말해준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하는 바에서 열심히 하여 바른 도리를 간직하고 받든다.
부처님의 경계를 드러내어 영원히 단절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한다. 이미 열반에 들었지만 멸도(滅度)하지 않는다.
무소외(無所畏)를 얻었기에 모인 대중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총명하고 밝게 통달하여 실천할 바를 따르고 제거할 것을 잘 제거한다. 일체의 교만과 스스로 위대하게 여기는 것을 제거한다. 환(幻)의 삼매로써 위대한 장엄을 닦으니 감동하는 바가 있다.
만일 광명을 방출한다면 모든 해와 달과 별의 밝음과 불타는 번개를 덮고 가리니 견고하고 강력한 힘을 얻어 그 몸은 구쇄와 같고 그 행은 금강과 같다. 일체의 여러 가지 악하고 결핍된 것을 모두 제도한다. 두루 도량에서 깨끗하게 노니니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부처님이 건립한 몸ㆍ입ㆍ뜻의 청정함으로 악마의 병사를 항복받는다.

신족의 변화로 무극으로 건너간다.
일체 여러 부처님 국토를 진동시킨다. 총명한 지혜를 얻어 법의 도리의 뜻을 분별한다. 변재가 구족되고 지혜에 막히거나 걸리는 것이 없다. 여러 중생을 위하여 정진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부처님 일을 일으키고 드러내는 데 방일(放逸)한 적이 없다. 여러 신통한 지혜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드러낸다.
그와 같이 구쇄야, 보살이 이 등집중덕삼매를 얻는다면 이 여러 보살의 서응(瑞應)을 인연으로 나타난 위의의 모습이 그와 같고 온갖 덕과 명예로운 일이 우뚝 솟은 것이 그와 같다.”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모든 일체 중생의 무리들이 함께 다 같이 이 등집중덕삼매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만일 이 정을 얻는 자라면 온갖 덕과 명예가 당당한 것이 그와 같으니 이것은 성문과 연각이 미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에 대해 듣고서 믿지 않는다면 악마에 의해 괴롭혀져 굳어진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구쇄야,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를 믿는다면 그 명성과 덕의 공훈이란 불가사의하다. 그는 부처님의 가호를 받게 된다.”
그러자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얻고자 의욕을 낸다면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해야 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얻으려고 의욕을 낸다면 일찍이 범부의 법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일이 없는 그러한 행을 행해야 합니다. 부처님 도의 법에서 실천하고 실행하는 자는 얻는 바가 없습니다. 만일 행하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이러한 행을 실천해야 하니 곧 법도 없고 봄도 없고 또한 근심하는 바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이 시종 찬탄하는 이러한 정을 얻고자 한다면 생사에 더럽혀지지 않고 무위를 얻어야 하며
성문 또는 연각의 승에서 멸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구쇄여,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온갖 덕을 구족해야 하고 배워야 할 금기와 계율에 대해서 마땅히 배워야 합니다. 또한 유루의 복을 상념해서도 안 되고 무루의 복을 상념해서도 안 됩니다. 죄 없는 것을 상념해서도 안 되고 죄를 상념해서도 안 됩니다. 있는 것도 안 되고 없는 것도 안 되며 집착도 안 되고 멀리하는 것도 안 되며 가는 것도 안 되고 오는 것도 안 되며 세간도 안 되고 출세간도 안 되니 일찍이 그러한 여러 상념을 품었던 적이 없어야 합니다.
법계를 동등하게 제어해야 하며 온갖 덕을 믿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복이 있든 복이 없든 상주하든 무상하든 염이 있든 염이 없든 시종 집착하고 있는 모습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일체의 사람들이 온갖 덕 속으로 노닐고 들어가도록 해야 하지, 단 한 사람이 행복 속에 노닐고 거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덕이 중생의 처소로 두루 들어가야 합니다. 유루의 복이든 무루의 복이든 분별하지 말아야 하니 분별로써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일체 부처님의 덕이 곧 한 부처님의 덕입니다.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곧 교화받을 자에게 여러 부처님 법을 설함에 차이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이것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곧 유학의 복이든 무학의 복이든 연각의 복이든 보살의 복이든 여래의 복이든 이것은 곧 상주하는 것이 못 되고 형태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일체의 복덕이 흘러 모이는 곳을 즐겁게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여러 형색이 있으니 모두 4대(大)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 보살의 법도 역시 그와 같으니 모두가 중생을 건져서 해탈문에 이르게 하고 동등한 복을 받들고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행하는 자든 흥기하여 번성하는 자든 모두 무상하고 소진하는 법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라면 네 가지 한량없는 것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인계(人界)가 한량없는 것, 부처님의 국토가 무한한 것, 부처님의 지혜가 끝이 없는 것, 중생의 행에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라면 네 가지 불가사의한 것을 권하고 도와야 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죄와 복에 상응하는 댓가가 불가사의한 것, 중생의 행이 불가사의하되 나아가는 길에 차별이나 특이한 것이 없는 것, 여러 보살의 지혜가 불가사의하니 신족(神足)과 세력과 해탈문이 그것이요, 모든 보살이 나아가는 길은 불가사의하니 생하는 바가 청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삼매에서 소진함이 없는 것을 보는 자라면 마땅히 네 가지 법을 행해야 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보살의 복을 건립한 곳에 머무르니 소진할 수 없는 것, 온갖 행을 구족하니 역시 소진할 수 없는 것, 변재가 걸림 없으니 또한 소진할 수 없는 것, 지혜로 도달한 바가 또한 소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열심히 법에서 정진하니 온갖 덕의 근본을 쌓는 데에 있어서 결코 싫어하는 일이 없는 것, 마땅히 부지런히 행할 것을 생각하여 들음에 싫어함이 없는데 들어가고 또 그렇게 경전을 설해야 하는 것, 마땅히 부지런히 행할 것을 생각하여 다함이 없는 온갖 선한 덕을 권하고 도와야 하는 것, 여러 부처님 국토를 관찰하여 그 장엄한 것을 보고 그것으로 자기의 국토에 들어가 청정함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구쇄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비유하면 유리명월(琉璃明月)이라는 보배 구슬이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금 그릇이든 은 그릇이든 수정 그릇이든 자거 그릇이든 유리명월이라는 보배 구슬은 그릇의 위덕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박수여,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집에 머물러 있는 자이든 출가하여 사문이 되어 머무는 자이든 법계에서 헤아리면 자연의 행에는 두 가지 해탈문이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박수여, 보살은 어떤 행에서 준수하고 수행해야 합니까? 그리하여 삼매를 잃지 않으며 소진함이 없는 복덕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보살이 마땅히 행해야 할 네 가지 일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과 수명을 아끼지 않으며 모든 공양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 공ㆍ무상ㆍ무원을 행하고 성문승과 연각승에 뜻을 두지 않으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그 행을 사유하는 것, 상응하는 것이든 상응하지 않는 것이든 사유한 것과 생각한 것을 여러 신통한 지혜에 입각하여 내다 버리는 것, 일체 중생이 동등하게 들어가서 자아와 사람과 수명에서 건너게 해야 하니 그것들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이 삼매는 나중에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리고 보살이 이 경권을 취하여 몸에 간직하고 품으며 또한 인욕을 일으킨다면 집에 거주하는 자이든 출가한 자이든 배움을 인연으로 하는 것이며 배우며 행하는 것이 됩니까?”
박수가 구쇄에게 답하였다.
“나중에 이 삼매를 얻는 자는 그 이름을 들었다 해도 곧 집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니 출가를 인연으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쇄여, 그러므로 만일 보살이 삼매에 머문다면 곧 존재하는 두 가지 생각을 떠나서 노닐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목숨과 지혜에 소진함이 없으니 궁극에 이르도록 잃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개도하고 교화하되 싫어함이 없으며 보살의 형태와 유형을 스스로 시현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흘러 모이는 곳에서 머물되 그렇게 머문 모든 것에 끝이란 없으며 또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해와 달이 노니는 곳은 그 모두가 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그와 같이 관찰하여 기대어 행하는 것이란 없으니 만일 집의 땅에 머물러 집을 따라 의지하고 기대어 출가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출가한 것입니다. 다시 출가의 덕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행하니 이 두 가지 일에서 또한 그리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내놓는 것은 모두가 집착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얻는 것이 없는 자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일이 있어 행하니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존귀한 자를 위하고 연장자를 위하는 것, 최승(最勝)자를 위하는 것, 일체의 여러 가지 견해의 일을 버리고 제거하는 것, 그리고 일체의 여러 가지 부처님의 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일이 있어 행합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자애ㆍ슬픔ㆍ기쁨ㆍ평정[護]이니,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그는 이 네 가지 범행을 받들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이라고 일컫습니다.
다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유행하고 거처하는 곳이 취락인 경우, 집이나 방이 유행하고 거처하는 곳인 경우, 다시 한가한 곳에서 거처하고 유행하는 경우, 선반 같은 누각과 여러 층이 있는 집에서 행을 실천하니 그것을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하는 것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박수가 구쇄에게 말하였다.
“이 네 가지 범행을 받들고 수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나는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러 천신과 인간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는 네 가지 범행이야말로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범행은 곧 그 정상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은 청정하게 행하니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토에서 자신의 몫과 호위와 음식을 받는데 그 위신력이 정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네 가지 범행을 보지 못하는 자는 곧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의 행을 멀리 떠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다시 청정한 범행을 닦는다면 모두 빠짐없이 네 가지 범행을 원인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현자와 성인의 지혜를 일으키고 얻게 됩니다. 세간에서 스스로 신견(身見)을 이루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자라면 사람이라는 생각을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어떻게 보살은 자애의 마음을 받들어 행해야 합니까? 무엇을 일컬어 슬픔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컬어 기쁨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컬어 평정이라고 합니까?”
박수가 답하여 말하였다.
“환사(幻事)로써 일체 중생의 무리를 구호하는 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군맹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여러 중생에게 멸도를 얻게 하는 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중생계가 공임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법계와 중생계가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님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 군맹의 계에 집착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요지하는 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계에 왔다고 하나 온 것이 없음을 믿고 이해하고 요지하는 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일체의 중생에게 나의 자아가 없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중생이 빠짐없이 담백하다 해도 무서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여러 법과 법계가 평등하다고 해도 두려움을 품지 않으니 이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 부처님의 국토가 소진됨이 없는 국토임을 믿고 이해하고 분별하니 이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위험과 해로움의 모습이 없는 것을 자애라고 합니다. 동등하거나 필적할 만한 모습이 없는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모습이 없는 것을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름도 없고 집착하는 모습도 없는 것을 평정이라고 합니다.
다시 구쇄여, 자애지만 큰 자애가 아닌 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슬픔이지만 큰 슬픔이 아닌 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그 무엇을 큰 자애가 아니라고 합니까? 비유하면 성문이 곧 ‘여러 중생에게 모두 안온함을 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문의 자애는 큰 자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큰 자애라고 합니까? 만일 군맹의 무리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지니고 그것으로 온갖 고뇌와 환난을 모두 제도하고 해탈시킨다면 이것이 큰 자애입니다.
그 무엇을 큰 슬픔이 아닌 슬픔이라고 합니까? 보통 존재들의 무리는 5취(趣)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불쌍하고 슬프게 여기면서 생사하는 가운데서 꺼내어 구제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큰 슬픔이 아닌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큰 슬픔이라고 합니까? 만일 5취에 생사하는 중생들을 본다면 그 태어난 곳에 가서 슬퍼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스스로 몸의 편안함을 버리고 5취에서 구호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큰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마땅히 이렇게 봐야 합니다. 곧 성문에게 자애가 있다 해도 큰 자애가 아니며
또한 슬픔이 있다 해도 큰 슬픔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보살이라면 마땅히 큰 자애와 큰 슬픔을 구족하고 행해야 합니다.”
박수가 이러한 이야기를 설하였을 때 8천의 천인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함께 찬탄하며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마땅히 저 박수가 설한 대로 이행을 받들고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10만 천인들이 이 삼매를 얻었고 8천 보살이 불기법인을 얻었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설해 주십시오. 백 가지 복을 지닌 상호가 있으니 어떤 공덕을 지었기에 부처님 세존께서는 그러한 상호를 성취하셨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에 가득 찬 중생에게 구족된 공덕이 있는데, 그것을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전륜성왕 한 몸의 덕이다. 이 여러 중생이 소유한 공덕을 모두 전륜성왕과 같게 하여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제석천 한 몸의 복이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일체 중생들은 복덕이 구족하여 성취된 것이 제석천과 같은데, 제석천의 복과 같은 이 중생들의 복을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한 범천의 복에 미친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중생의 무리들이 지닌 복덕은 각각 범천과 같고 동등한데, 그 복을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한 성문의 복을 이룬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중생의 무리들이 지닌 공덕은 각각 성문과 같은데, 그 복을 빠짐없이 합하여 구족하고 갖추게 한다면 그것이 합해졌을 때 한 연각의 복이 된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일체 중생들이 지닌 복덕을 각각 연각과 같게 하여 빠짐없이 갖추고 구족하게 한 다음 합한다면 그것이 한 보살의 복을 이룬다. 그러나 보살의 복은 오히려 이것을 넘어서니 측량할 수 없고 한계 지을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등집중덕삼매의 정을 체득한 자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는 중생들을 모두 역시 등집중덕삼매의 정을 얻게 하여 이 중생들이 지닌 삼매의 덕을 합하고 모은다면 그것으로써 하나의 막히지도 걸리지도 않는 사사(祠祀)를 이루며 하자가 없는 지혜를 이루며 생각과 집착이 없는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쇄야, 이렇게 비교된 지혜가 가히 사사를 이루게 된 것인데 그것을 모두 빠짐없이 합하고 모은 것이 법사(法祠)를 이룬다. 그리고 그 복을 선택하여 합한 것이 여래의 대인상(大人相)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서른두 가지 상호는 그와 같이 비교하고 유추해야 하는 것이니, 각각이 그와 같이 이루어져 여래의 몸의 상호가 구족된 것이다. 그것은 일체 중생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래의 몸에 있는 백 가지 복의 상호는 불가사의하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백 가지 복과 공덕을 지닌 대인상에 대해서 설하실 때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다. 그 큰 광명이 두루 세계를 비추었고 천상의 꽃을 내렸다. 그리고 여러 천상의 기악(妓樂)이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울었다.
그러자 여러 천신과 세간의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에 괴이해 하면서도 기뻐 뛰어오르며 환희하였다. 그리하여 각자 합장한 채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소리 높여 찬탄하며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족성자 또는 족성녀가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켜 선한 이익을 갖춘 끝없는 경사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와 같이 비교되는 백 가지 복을 지닌 상호를 얻어 빠짐없이 구족하고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곧 제석천과 범천과 사왕천 및 일체의 성문과 여러 연각들을 넘어서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그가 이 등집중덕삼매를 듣는다면 통쾌하고 통쾌한 일이니 보살의 이익을 얻은 것이 됩니다.
만일 그 이름을 들었다고 해도 그 덕에 미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이 듣고 믿고 즐거워하고 받들고 행한다면 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를 구족하여 유행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그 땅의 중생을 옹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 경전이 유행되는 것이 있다면 그 땅은 부처님께서 건립한 곳이라고 헤아려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를 가득 채운 불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그 가운데를 통과하여 이 법을 듣고자 하고 이 경을 듣고자 한다면 큰 안온함에 돌아갈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천자여. 너희가 말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에 대해서 듣고도 즐거이 믿지 않고 들은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마에 의해 괴롭혀져 굳어진 것이다.
그리고 보살로서 이 삼매를 듣는 것에 이르지 못했고 또한 수용하지도 간직하지도 읊지도 독송하지도 설하지도 않는 자라면, 나는 그를 들은 것이 많은 지혜로운 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천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여래의 성스런 취지로 이 법을 건립하셨습니다. 후세에도 두루 얻게 되고 선포되도록 하십시오.”
그때 세존은 미간의 상호와 육계의 상호[髻相]에서 빛을 방사하셨고 그 빛은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이어서 그 빛은 자연히 소리를 내며 찬탄하고 노래하였다.
“여래께서는 이미 이러한 법을 건립하셨다.”
그때 세존께서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반열반에 들 텐데 석 달 남짓 남았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권하고 돕고자 하였기에 나는 너에게 이 경전을 부촉한다. 너는 마땅히 수용하고 간직해야 하며 모이는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널리 분별하여 설해주어라. 만일 사람이든 보살이든 이 삼매를 배우고 간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멸도하지 않으며 법이 멸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난아, 그 법을 수용하여 행하는 사람은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 되고 만일 모이는 대중을 위하여 강론하고 강설하는 자라면 이것은 법을 보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현자 아난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일 겁 또는 일 겁 이상을 더 머무십시오. 천상과 세간을 많이 불쌍히 여기시고 많이 슬프게 여기시고 많이 안온하게 해 주십시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근심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너에게 내가 설하지 않았느냐? 이 법을 구족한 자에게는 부처님이 영원히 머무시는 것이다. 또한 여러 부처님 세존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으로써 마땅히 여래를 볼 수는 없으며 상호로써도 아니니 바로 이 법을 볼 때에야 부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와 같이 설하시자 구쇄보살ㆍ박수보살ㆍ이구위보살과 여러 보살들 그리고 현자 아난을 비롯한 대성문들 그리고 일체의 모인 대중들과 여러 천신ㆍ용ㆍ건달바와 세간의 사람들과 아수라들로서 환희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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