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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56 불교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중권

by Kay/케이 2024.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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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중권

 

등집중덕삼매경 중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최봉수 번역


그때 세존이 다시 이구위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보살은 이와 같은 행적에 대해 듣는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받들고 행해야 한다. 어떻게 존귀한 어른으로부터 들을 것을 구하고 들을 것을 여쭈어야 하는가? 항상 공경하고 교만함을 없애버려야 한다. 언어가 부드럽고 화평하며 마음이 인자하고 조절되어 있어야 한다.
법에 대해서는 의약(醫藥)과 같다고 관찰하고 생각해야 한다. 스승과 화상에 대해서는 세존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스스로 그 몸을 관찰하되 법의 약을 사유하고 선택하여 의왕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여러 중생들에 대해서는 질병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하고 법을 구하는 데 열심히 할 뿐, 마땅히 몸에 대해 애착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탐하지 않고 수명에 기대지 않는다. 착용할 의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경전을 좋아하고 법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고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법의 도리를 이익할 것을 지향하고 재물의 이익은 경시하여 내다 버려야 한다. 장차 법의 보배를 보호하고 세속의 진귀한 것을 떠나야 한다. 법을 이익 되게 하려는 까닭에 일체 세간의 재물을 멸진하고 제거해야 한다. 법의 보배로써 이익을 삼고 평범한 세속에서 그리워하는 진귀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
중생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과 애욕과 일체의 하자를 제거하고자 하여 항상 마땅히 바른 법의 경전을 그리워하고 구해야 한다. 일체 중생의 무리들을 건지어 모두 멸도에 이르게 하고자 하여 바른 법으로써 마땅히 보호하고 간직하고 인도해야 한다. 바른 법의 경전으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자는 일체의 행해야 할 덕의 근본을 두루 획득하고 장차 키워야 한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도를 구하고자 하거나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르러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법의 기둥을 굳게 세우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널리 배워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족성자야, 산 중의 왕인 수미산(須彌山)은 천상의 큰 기둥이다. 만약 천상의 높은 기둥이면 우뚝 솟아 덮고 가리는 바가 많고
도리천까지 솟아 있어 도리천에 의해 장엄히 장식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보살 대사는 널리 보고 널리 듣는 것으로 지혜의 기둥을 삼는다. 노닐고 거주하는 곳이 천상이든 세간이든 그 빛이 웅장하게 비춘다. 만일 족성자야, 어떤 보살이 부처님 도를 뜻하고 원하여 ‘나는 마땅히 성불하겠다’고 하면 권화와 방편을 깨달아 널리 듣고 항상 정진을 닦아 익혀야 한다. 일체의 중생이 사악한 앎에 머물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지혜의 등불을 설치해야 한다.
만일 보살이 널리 듣는 수행에 들어갔을 때에 아울러 정진하여 지혜를 구한다면 중생에 대한 앎을 구족하게 되어 할 바를 다해 마치게 된다.”
그때 여러 천신들이 그 사람을 위하여 소리를 높여 찬탄하였다.
“환희롭고 선한 마음이 생하였다. 지금 이 바른 장부는 이와 같이 도리의 모습을 보이었다. 그는 널리 듣는 것의 힘으로 열 가지 힘에 이를 것이다.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르러 여러 감관이 밝게 통달할 것이다. 그와 같은 도리의 이익으로 보살행을 위할 것이다. 지혜의 칼을 잡아 티끌에 시달리는 우리의 일체의 애욕을 끊을 것이다.
만일 보살에게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이 있고 또한 밝은 지혜로 경전에 설해진 법을 감히 당해낸다면 중생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과 위험과 액난을 제거할 것이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을 지닌다면 법을 설하여 애욕을 멸진하고 제거할 것이다.
그와 같이 이 보살은 예전의 세존께서 노닐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가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이 있다면 악마와 그 관리 권속을 항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감당하여 열두 가지 일[事:行相]을 갖춘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이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 대사는 널리 듣는 것에서 정진하여 성스런 통달을 확립한다. 그리고 그때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온갖 악마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가능한 것들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지금 이 보살은 우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본래 마음을 위배한다. 우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족성자야, 듣는 것으로부터 앎을 획득하니 앎은 티끌에 시달리는 무리에 있어서 최상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에게는 애욕의 티끌이 없으니 악마가 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만일 보살이 널리 듣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들어가며 경전을 분별하고 법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그것으로부터 이미 가르쳐 줄 수 있는 궁극에까지 간 것이 된다. 그리하여 온갖 악마를 항복받고 제압하니 곧 애욕의 티끌이라는 악마와 음의 덮개라는 악마와 일어나고 멸함의 악마와 천마와 그 권속의 악마이다. 이것이 네 가지 악마인데 자연히 절복된다.
또한 족성자야, 옛날의 여러 보살들조차 널리 듣는 것에 들어가서 법의 도리를 분별하고 경전을 좋아하고 즐거워했으니, 지금 대강을 들어서 핵심 되는 것을 간략히 설하겠다.
아주 오래 전 먼 과거세의 시절이 있었으니 헤아릴 수 없는 겁 이전이며 측량이고 한계 지을 수가 없으며 널리 두루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이전이었다. 그때의 겁 가운데 한 선인이 있었으니 이름이 울달(鬱怛)1)이었다.
그는 나무 수풀 속에 거주하면서 다섯 신통을 얻었다.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고 자애와 슬픔과 기쁨과 평정을 행하였다. 그윽한 숲 속에서 노닐고 거처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자애의 마음을 행하니 그 몸이 부드럽고 항상 희열에 젖어 있고 안온하다. 그러나 자애로써 중생의 자재한 애욕을 멸진하고 제거할 수는 없다. 티끌에 시달리는 일인 애욕을 끊고 멀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자애만으로 성인과 현자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도 없고 복덕에 이를 수도 없고 현자 및 현자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도 없고 복덕에 이를 수도 없고 현자 및 성인과 동등한 관점에 이르러 성취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스스로 생각하였다.
‘항상 두 가지 일로써 의존해야 현자와 성인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다른 자의 소리를 듣고 성찰하는 인연과 그것을 사유하고 고요하게 뜻을 두는 행이다.’
곧 환희하여 큰 정진을 일으켰다. 그리고 법으로 들어가서 생각하였다.
‘나는 어디에서 이 교설을 들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법 때문에 경전을 욕구하여 고을과 나라와 현과 읍과 마을과 촌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경전을 욕구하였으나 오래도록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천마가 그 장소에 와서 말하였다.
‘족성자여, 나는 부처님께서 받들고 보호하는 독송(讀誦)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족성자여,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핍박하여 한낮의 폭염 속에 드러내고 그 귀로 스스로 받들고 음성을 듣고 나서 그 뒤에 그와 같은 여러 게송을 글로 쓸 수 있다면 그대는 이 네 구절로 끊어지는 게송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족성자야, 울달 선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셀 수 없고 한계 지을 수 없는 겁 이래로 이 몸을 포기하고 잃어가면서 감옥과 매질과 채찍질과 날카로운 칼의 괴로움도 즐거워하였다. 마디마디 몸이 잘리어 형체가 제 모습을 잃어가고 흩어졌으니 피부와 살점이 잘리고 끊어졌다. 그러면서도 애욕 때문에 결박에 묶이는 경우에 이르렀다. 그와 같은 환난을 만난 것이 셀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몸이 쓰이지 못했으니 위태로운 느낌이란 쓸 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몸으로 일체에 이익 되는 것을 더한 적이 없었다. 만일 이미 군생(群生)을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이 견고하지 못한 몸으로써 경전을 구하여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이익을 획득하여 마음으로 희열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땅히 그 천인을 따른다면 일찍이 만나지 못했던 경전의 뜻을 듣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간에서 제일가는 존귀한 마음을 일으키고 공경하고 삼가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그 몸을 잘랐다. 그리고 해 아래에 스스로 드러내어 친히 가르침을 받아[親炙] 귀로 소리를 듣고자 하여 천인에게 말하였다.
‘원하건대 천인이여, 부처님께서 받들고 보호하는 독송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연설해 주십시오. 나는 법을 공경하는 까닭에 몸을 던지고 버리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인연으로 들은 것을 함께 모으고자 합니다.’
그때 족성자야, 울달 선인이 법을 공경하고 삼가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와 같이 우뚝 솟은 것을 보고는 그 천인은 안색이 참담하고 초췌해졌다. 그 공덕을 보기 어려워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울달 선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장차 시련이 없이 어찌 내가 이 게송을 듣겠는가? 법을 공경하고 받들며 그것에 순응하는 까닭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경전을 합치고 모으고 공경하면서 심은 덕의 근본은 그 공을 잃지 않을 것이며 속임수와 미혹함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령 내 몸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허망하지 않다면 그리고 솔직하고 아첨하지 않고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면 그리고 몸과 목숨에 탐착하지 않고
그 육체적인 수명을 버린다면 그 성실한 진실로 말미암아 이 법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현세에 다른 방위의 부처님 국토 가운데 법을 받들고 닦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면전에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를 보고 경의 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원을 세운 뒤에 입으로 다시 말하였다.
마침 그때 아래 방향으로 부처님의 국토를 서른두 번 지나 간 뒤에 한 세계가 있었는데 이름을 보등이구(普等離垢)라고 하였다. 그곳의 부처님의 명호는 무구칭왕(無垢稱王)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었으니 지금 현재에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그때 그 부처님께서 울달 선인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셨고 또한 염부제의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비유하면 용감한 장부가 팔을 굽혔다가 펴는 것처럼 짧은 시간에 그 부처님 세계로부터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리고 울달 선인의 앞에 멈추어 서셨다.
그리고 5백 보살과 함께 그 여래는 세간에 나타나셔서 자연스럽게 큰 광명으로 두루 비추셨다. 천상의 꽃을 취하였고 백 천의 기악이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울렸다. 그리고 여러 보살도 그 숲 속에 모였다.
그때 장엄한 나무의 모든 뿌리와 밑둥과 줄기와 마디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법의 소리를 내었다. 울달2) 선인은 그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듣고 그 형상을 보면서도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몸이 즉시에 이전과 같이 회복되어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에 울달 선인은 무구칭왕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친견하고 그 상호가 우뚝 솟은 것이 수미산과 같음을 보았다. 그 위신력의 광명이 해와 달을 넘어가며 신비하고 미묘하게 통달하여 천신과 인간 가운데서 존귀하신 것을 보았다. 여러 감관이 고요하고 안정된 것이 허공과 같아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뛸듯이 기뻐하며 선한 마음이 드러나고 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복을 정돈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뒤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의 세존이시여, 안주하시는 대성이시여,
저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성스런 승단에 귀의합니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법을 설해주십시오. 경을 듣는다면 건립하고 받들어 행할 것이며 중생의 탐착하고 취착하는 행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견해를 일으키어 경전을 설할 것입니다.’
그때 족성자야, 그 무구칭왕 여래ㆍ지진ㆍ정등각은 선인을 인연으로 하여 여러 천자와 여러 보살을 위하여 이 등집중덕삼매의 정(定)을 분별하여 설하셨다. 그러자 모인 대중 가운데서 이미 과거에 도리와 이치에 입각해 짓고 행하고 닦고 다스린 8천의 천자가 곧 법인(法忍)을 체득하였다.
울달 선인은 이 삼매에 관해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고 환희하며 미묘한 가운데에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다함이 없는 변재를 얻었다. 그때 그 여래는 여덟 문장의 구절을 설하시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다시 포섭하고 취하셨다.
어떤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본래 청정하니 생각과 집착으로부터 근원에 이르면 자연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법은 무루(無漏)이니 일체의 여러 누(漏)가 모두 다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제법에는 집착함이 없으니 모두가 일체의 집착할 바를 건넜기 때문이다. 넷째, 제법은 허망하지 않고 또한 나와 남이 뚜렷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여러 법문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법은 어떠한 문(門)이라도 되니 일체의 여러 법문은 두루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제법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니 제법은 오는 것을 부수고 또한 일체의 거취를 단멸하고 제거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제법은 평등하니 삼세라고 해도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덟째, 그리하여 두 가지란 없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문장의 구절을 설한 것이니 일체를 계몽하고 제도하고 싫어하게 하여 온갖 환난을 없앤다.’
부처님께서 울달 선인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여덟 문의 구절이 있으니 둘이 없음에 이른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제법은 임시로 호칭되는 것이니 이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법은 모양과 색을 지니는 것이니 이름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셋째, 제법은 합해지고 모여진 것이니 문자에 의지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넷째, 제법은 스스로를 식별하는 것이니 자의적인 데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법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무명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제법에는 다함이 있으니 익히고 행한 것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일곱째, 제법에는 문을 건립할 처소가 없으니 머무는 것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제법은 평등하니 문을 향하여 하나로 정진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구절의 문이니 본래 둘이 없으면서도 둘에 이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울달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여덟 정진의 구절이 있으니 다함이 없는 것에 이르게 하여 자재로움을 얻게 한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없다[無]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수습하는 일로서 권하고 돕고 주문을 외우고 서원하여 수습해야 할 경전이 본래 없었던 곳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저것[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행하는 구절로서 궁극적인 법의 도리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아니다[不]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준수하는 구절로서 명색을 제거하기 위하여 법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경전에서 설한 법은 모두 버릴 것을 명한다. 넷째, 남이다[他]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받들어서 고요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섯째, 여섯[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에 뜻을 두어 경의 법을 강설하여 일체의 여러 가지 막히고 걸리는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여섯째, 본래 없다[無本]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염하는 구절로서 여래의 본래 없는 법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일곱째, 원인[因]이라는 것이다. 정진하여 일체의 연고가 되는 법을 드러내어 죄와 복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덟째, 동등하다[等]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의 삼매로서 제법의 분별과 거취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정진의 구절이니 변재가 다함이 없다.’
부처님께서 울달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미묘한 법의 구절을 이루는 여덟 가지 법이 있으니 제법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요달한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공성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의지하는 바가 없이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무상(無相)이라는 인(印)의 구절이니, 건립하는 바가 없이 경전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무원(無願)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의지하지 않고 기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구하지 않으면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넷째, 궁극적인 끝이라는 인의 구절이다. 이것은 본래 공성이라는 구절이니
동등하게 제어하면서 경전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섯째, 법계라는 인의 구절이니, 제법을 동등하게 제어하면서도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섯째, 본래 없다는 인의 구절이니, 이것은 제법에 현재 들어가는 것이다. 일곱째, 여(如)와 같다는 인의 구절이니, 과거ㆍ미래ㆍ현재를 제거하면서 본래의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덟째, 멸진(滅盡)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궁극적인 멸진과 제법의 영원한 제거에 의해 본래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인의 구절이니 모두 빠짐없이 제법을 평등하게 분별하여 성취할 수 있게 한다.
울달이여, 그러므로 자재의 구절과 문의 구절과 정진의 구절과 여러 인(印)의 구절에 대해 항상 안온하고 상세하게 그 구절을 행하고 정진하며 배워야 한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그 무구칭왕은 질문한 바를 분별하고 이러한 앎을 남긴 뒤 그 세계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른 보살 곧 오천억 백천해 나유타 보살도 그 잠깐 사이에 스스로 뜻을 일으키고 나서 짧은 시간에 자신들의 부처님의 국토로 돌아갔다. 그러나 비록 돌아갔다 하더라도 감도 없고 옴도 없으니 그 국토의 인민들은 여래가 가고 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족성자야, 울달 선인은 다함이 없는 변재를 얻어 그 뜻이 의혹하거나 망령되지 않고 또한 잃는 바도 없었다. 또한 여러 천신이 옹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천신을 구호하고 온갖 악마를 항복시키고 외도와 이학(異學)들도 항복시켰다. 지방과 나라와 현과 읍과 고을과 성과 큰 지방으로 들어가 일체의 사람들을 위하여 경의 법을 강설하였다.
곧 이 등집중덕삼매를 분별하고 연설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천 년이 가득 차도록 이 경전을 선양하고 드러내어 8만 4천의 군맹의 무리들을 개화시켜 성문으로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8만 4천의 보통 존재들을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8만 4천의 보통 사람들을 권하고 도와서 뒤에 모두 전륜성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8만 4천의 중생으로 하여금 제석천이 되게 하고 범천이 되게 하고 자애를 닦게 하고 슬픔을 닦게 하고 기쁨을 닦게 하고 평정을 닦게 하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얻었다.
울달 선인은 뒤에 선인으로서 죽게 되자 무구칭왕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의 국토에 태어났다. 그리고 1만 4천 천자와 함께 보등무구 세계에서 머물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그때의 울달 선인이 다른 사람이라고 알려고 하는가? 그렇게 보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극한 정성으로 올바른 서원을 건립하자 아래 방향의 세계에 계시던 무구칭왕 여래가 나에게 와서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법을 즐거워하는 보살에게는 여래가 일찍이 멸도를 취하는 일이 없다. 바른 법의 가르침도 멸진하지 않는다. 그 법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보살이 되면 다른 방위의 세계에 있는 부처님 세존이 곧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만일 바위 위에 있든지 나무 밑에 있든지 한가한 곳에 혼자 거주하든지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든지 즉시에 총지문(總持門:다라니문)을 얻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손바닥 위에 놓이기도 하고 어깨에 걸친 천조각 위에 나타나기도 한다. 머리 위에 있기도 하고 정수리 위에 있기도 하니, 가까이 있어 멀지 않다.
법을 즐거워하는 보살은 이미 일찍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을 보았던 자이다. 그리고 천인들이 그 변재를 일으키니 그는 또한 변재의 지혜를 따르고 받아들이려 한다.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이 경전에 있어 궁극에 이르도록 다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여러 부처님 세존 및 여러 천인들이 그 서원을 빼앗지 않으며 도에서 건립한 바는 자재를 얻은 것과 같아,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백 세이든 천 세이든 일 겁이든 일 겁이 지나든 자신의 욕구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늙음과 병과 죽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 그 뜻이 머무는 바는 견고하고 강건하고 오래되고 굳은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변재의 지혜를 제어한다. 또한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일찍이 타인을 범하려는 뜻을 일으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구위야, 이 널리 듣는 것이 쌓게 되는 행에 대하여 들었다면 준수하고 받들고 정진하여 이러한 이름의 덕을 잡고 획득해야 한다. 또한 이것을 더 넘어가서 셀 수 없이 배가해야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두루한 복덕의 곳간을 얻으려 하고 그것에 이르려 욕구한다면 그는 경사[慶]가 끝이 없고 기존의 복록이 무궁하게 되고 보살의 두터운 공덕은 한량없고 측량하거나 한계를 지을 수 없고 그 궁극이나 그 끝을 다할 수 없다.
이구위야, 큰 바다의 물은 그 물방울을 셀 수 있고 그 한량을 측정해 알아서 그 바닥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일으키는 세 가지 일인 계율을 지키는 것과 널리 듣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는 그보다 더 수승할 수 없고 그 끝을 결코 한계 지을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는 오히려 측량하여 그 무게를 알 수 있고 아울러 그 끝을 다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일으키는 세 가지 일인 계율을 지키는 것과 널리 듣는 것과 보시의 도는 한계를 지을 수 없고 양을 잴 수 없다.
족성자야, 이것이 세 가지 일을 행하는 품이다. 그런데 세 가지 일 가운데 널리 듣는 것이 존귀하다. 수승하고 장대하고 필적할 만한 범주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그것은 수미산왕과 같으니 계율을 지키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는 수미산 곁에 있는 겨자와 같다. 그러므로 널리 듣는 것은 수미산의 왕과 같다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새가 허공에 높이 날아올라 그림자로 가리는 것이 어찌 허공과 같을 수 있겠는가? 계율을 지키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라는 것은 그와 같다. 또한 비유하면 허공이 크고 넓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널리 듣는 것의 덕도 그와 같다.
왜냐하면 족성자야, 보시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빈궁함을 떠나는 것과 거대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계율에도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악취(惡趣)에서 제도되는 것과 천상으로 올라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널리 듣는 것에도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성스러운 지혜를 얻는 것과 사악한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라는 것은 여러 누(漏)와 받는 바 음(陰)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계율을 간직한다는 것도 받는 바 음 역시 누와 함께 한다. 그러나 널리 듣는다는 것은 여러 누도 없고 또한 음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구위야, 이것을 일컬어 보살은 응당 널리 듣는 것에 상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시와 계율과 널리 듣는 것에 대하여 설하셨을 때 3만 2천의 군생들이 본래 심었던 온갖 덕으로 말미암아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5백 비구가 누를 다하고 마음이 해탈하여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그때 이구위 역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은 몇 가지 법을 행하면 빨리 생겨남이 없는 법인[不起法忍:無生法忍]을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의 행이 있어 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몸을 그림자와 같다고 관찰하여 해탈을 얻는다. 둘째, 모든 법에 대해 메아리와 같다고 관찰한다. 셋째, 그 마음이 환화(幻化)와 같다고 밝게 아는 것이다. 넷째, 온갖 법이 모두 멸진으로 돌아간다고 관찰한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 재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자애를 널리 닦고 크게 하여 여러 중생에게 더한다. 그리하여 설령 유학(有學)인 자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깨달아 이해하도록 권한다. 둘째, 일체의 제법에 다함이 없음을 기필코 알고 어떤 일도 조작하지 않는다. 셋째, 여러 부처님의 법을 모두 다 두루 보되 육안(肉眼)에 의하지도 않고 천안(天眼)도 아니고 또한 법안(法眼)에 의해서도 아니니 의지하거나 기대는 바가 없다. 넷째, 마음이 들어가는 바를 분명히 깨닫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을 보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인연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되 아까워하지 않는 것, 사견을 포기하여 버리는 것, 청정한 금기를 받는 것, 고요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인욕을 준수하는 힘으로 모든 법에 들어가는 것, 모두 알며 다하도록 찾는 것, 정진을 숭상하는 것, 담백한 법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선정을 체득하여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 지혜를 관찰하니 가볍게 희론하지 않는 것, 권화 방편을 섭수하여 중생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 행할 바를 모두 갖추니 동등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항상 큰 자애를 행하여 중생을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하는 것, 큰 슬픔을 구족하여 윤회를 싫어하지 않는 것, 큰 기쁨을 행하여 법을 흔연히 즐거워하는 것, 큰 평정을 행하여 여러 가지 기댈 만한 집착을 제거한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세 가지 해탈문을 부분마다 증명하는 것,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를 제거하는 것, 삼계를 넘어서는 것, 일체법이 본래 청정하여 더러운 것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구위야, 이것이 네 가지 법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 대사는 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설하실 때 이구위보살이 불기법인을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환희하고 기뻐서 허공으로 뛰어올랐으니 땅에서 넉 장 아홉 척을 나아갔다. 그리고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고 큰 광명이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천상의 꽃이 내리고 백천 가지의 기악이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울렸다.
그때 세존은 이구위보살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는 때마침 흔연히 미소를 지으시니 오색의 광명이 입에서 나왔다. 그것은 시방의 셀 수 없는 부처님 국토를 비추고 다시 돌아와 세 번 돌고는 정수리로 들어갔다. 이에 현자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복을 정돈한 뒤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 뒤에 합장한 채 부처님께 게송으로 찬탄하며 말씀드렸다.

존귀하고 청정한 지혜를 얻으시어
그 눈은 깨끗하고 밝고 훌륭합니다.
여러 감관은 고요하고 안정되며
담백하시어 피안으로 건넜습니다.

광명이 일곱 척을 비추이고
금색의 얼굴이 신비하고 우뚝 솟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원하건대 분별해 주소서.

여러 천신과 인간의 행을 아시고
그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를 아시니
삼세에 걸쳐 청정하게
그 모습과 종류에 대해 보십니다.

그 지혜는 항상 통달하여
막히거나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셨는지
달과 같은 자비로써 설해 주소서.

과거세의 하늘 중의 하늘
미래세의 세존

지금 현재의 시방의 부처님은
지혜가 통달하여 끝이 없습니다.

수행하신 바는 모두 청정하고 순백하니
온갖 병을 치유하십니다.
일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니
원하건대 분별하여 설하소서.

이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 있어
그 몸이 두루 주위에 가득하니
셀 수 없는 국토에 있어
음성이 빠짐없이 이릅니다.

마음으로 일체의 사람을 향하되
항상 큰 자애를 크게 드리웁니다.
가장 수승하신 슬픔으로써 설해 주소서.
그 미소의 뜻을 부연하십시오.

궁구하시고 단련하신 법이 있으니
고요하여 달처럼 노니십니다.
달리 비유가 없으니 환상의 화작과 같으며
자연히 꿈과 같습니다.

획득하고 도달한 이익이라는 것은
항상 비에 피어오르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다른 사자란 없는 유일한 사자시여.

공성을 알아 생각이 없으시며
원(願)과 해탈의 문을 넘어서 건너셨으며
제법은 자연스럽게
궁극적인 도리를 명료히 드러냅니다.

고요하고 침묵하며 항상 조화롭고 안정되니
노닐듯이 거닐되 허공과 같습니다.
원하건대 부처님은 그 뜻을 분별하소서.
무엇을 치료하고자 느끼셨기에 지금 웃으십니까?

누가 미묘한 마음을 일으켜
그 뜻으로 존귀한 깨달음의 지혜를 원합니까?
누가 지금 힘으로 악마를 제거하며
응당 나무의 왕 아래에 앉겠습니까?

누가 오늘 가장 수승한 자로서
옹호를 받게 되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흔연히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큰 영웅이시여, 말씀을 일으키어 남기소서.

여러 성문의 무리는
능히 이 땅을 밟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연각도
이 길을 감히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 부처님의 경계이어서
그 덕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무엇을 느끼셨기에 혼연히 미소를 지었습니까?
수승한 분이시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그것을 설하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정녕 땅에서 솟아올라 넉 장 아홉 척을 떠나 허공에 머물러 있는 이구위를 보는가?”
이에 대해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구위 역사 보살은 삼백의 헤아릴 수 없는 나유타의 겁을 지나서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체득할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그 명호를 역엄정왕(力嚴淨王)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위(天人師爲)ㆍ불중우(佛衆祐)라고 할 것이다.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하는 동방의 세계에 머물 것이며
겁의 이름은 정탄(淨歎)이라고 할 것이다.
역엄정왕 여래의 청정한 세계는 부유함과 즐거움이 치성하며 인민은 안온하고 쌀과 곡식은 흔하게 널려 있다. 그 쾌락은 미치기 어렵고 여러 천신과 인민이 셀 수 없이 늘어간다. 그 국토의 백성이 입는 의복과 먹는 음식과 거주하는 집은 비유하면 욕계의 네 번째 하늘인 도솔천(兜率天)과 같다.
그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되 기이하고 특별한 다른 종류의 말씀은 없다. 오직 대승장경[菩薩篋藏]뿐이다. 그 부처님 국토에는 성문과 연각이란 이름조차 없으니 모두 순수한 보살로서 법인을 체득한 자들이다. 그 여러 보살의 무리는 매우 많아서 끝이 없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으니 그 국토에는 여덟 가지 곤란한 것이 없다. 온갖 악마를 항복받고 원수의 적들을 억제한다. 그리고 사악한 여러 외도와 이학(異學)의 무리들이 없다. 그 부처님 세계의 땅은 감색의 유리로 되어 있고 자마(紫磨) 황금이 그 사이에 나뉘어져 섞여 있다.”
그때 이구위보살은 허공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절하고는 세존께 귀의하였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출가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괴이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대성께서 경전을 강설하시는 것에 맞추어 허공에 있는 저 여러 천신들로서 명성과 덕망이 높고 미묘한 자들은 모두 여래께 왔습니다. 그리고 여래를 친견한 뒤 즉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과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세존께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던지며 스스로 귀의하고 있습니다.
대성이시여, 이 이구위 역사의 스스로 위대하다고 여기는 교만마저도 교화 하셔서 그로 하여금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위대한 법을 체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중생의 무리들을 위하여 경의 법을 연설하시어 교만과 방자함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구위보살 대사는 몇 분의 부처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에게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었기에
빨리 이와 같은 신통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이구위 역사 보살은 일찍이 62억의 여러 부처님 대성을 만나 공양하였고 온갖 덕의 근본을 심었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건립하였다. 다시 셀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을 항상 받들어 섬기고 범행을 청정히 닦았던 것이다.”
다시 구쇄가 아뢰었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구위 역사는 어느 곳에서 덕이 없는 근본을 심어서 도에의 뜻을 잊었기에 마음으로 교만과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성품을 품고 세존이 계신 곳으로 와서 시험해보려고 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일의 법이 있다. 그것이 보살이 행할 때 도에의 뜻을 잊게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마음으로 교만을 품는 것, 법을 공경하지 않는 것, 훌륭한 스승을 가볍고 쉽게 여기는 것, 뒤에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성문의 승(乘)을 다시 익히고 즐거워하며 그들과 함께 돌아가는 것, 하천하게 제도하는 것에 뜻을 두어 즐거워하는 것, 보살을 비방하는 것, 법을 가르친 스승의 은혜를 잊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아첨하는 것, 법을 업신여기는 것, 두 가지 일로 스스로 생활하는 것, 이양을 추구하여 받들고 모셔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악마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것, 죄에 덮여 있는 것, 법을 가리고 덮는 것, 뜻과 성품이 겁 많고 약한 것이다. 구쇄야, 이 네 가지 법이 보살로 하여금 도에의 뜻을 잃어버리게 한다.
구쇄야, 또 이구위는 무엇 때문에 보살로서 행하다가 도에의 뜻을 잃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듣도록 해라.
옛날 과거세에 이 현겁 가운데에 최초로 한 부처님이 계셨다. 명호는 구루진(拘婁秦)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었다. 그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였을 그때 재물이 많고 세력이 크고 성이 귀하고 지극히 부유한 바라문이 있었다. 그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악마에 의해 미혹당하여 스스로 높다고 여겼다.
그는 여래께서 긴 밤 동안 이익이 되는 법을 설하시는데도 찾아가 뵈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여러 장자들과 함께
싸우고 다투고 욕하며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또한 법을 보지 못하였으며 법을 설하는 스승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그 가르침을 공경하거나 계승하거나 순응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는 현세에서 다섯 가지 법을 어긴 것이다. 어떤 것들이 다섯 가지인가? 부처님을 떠나서 다시 친견하지 못하고 법을 듣지 않는 것, 다시는 보살의 업을 건립하지 않고 다시 자문하지도 않는 것, 마땅히 행할 것인데도 다시 온갖 덕의 근본을 망실하는 것, 도의 마음에 대하여 견고한 뜻이 없는 것, 선하지 못한 것을 섭취하여 즉시 도를 행하려는 마음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법에서 행하는 것을 떠났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그때 유명하고 훌륭하고 재물 많고 세력이 크고 성(姓)이 귀한 그 바라문의 아들이 누군지 너는 알고자 하는가? 어찌 그가 다른 사람이었겠는가? 너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의 이구위보살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 있을 때에 자신이 위대하다고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도를 닦으려는 뜻을 망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시 과거의 삶에서 덕의 근본과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을 보호하였고 다른 복이 있어 다시는 여러 신통한 지혜를 비방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되고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스런 취지를 계승하여 온갖 악을 짓지 않았다. 부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문득 스스로 일어나 와서 자기의 힘을 여래와 비교하려 한 것이다.
또한 세존이 보살의 힘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 곧 스스로를 높이는 것과 교만함과 방자함을 버렸다. 그리고 과거 세상에서 심어 왔던 온갖 선한 일의 근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법인(法忍)에 문득 이르렀다. 그리고 위신력과 신통한 지혜를 갖추었으면서 상념하는 바는 없는 것이다.”
그때 역사 구쇄보살이 이구위에게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어떤 법을 일으켰기에 법인에 이르렀습니까?”
“일체의 범부의 법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일으켰습니까?”
“일으킨 것은 후에 궁극에 이른다 하더라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으킨 것은 항상 의지하고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할 수 없고 또한 증득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범부의 법과 부처님의 법에는 어디에 차이가 있습니까? 정녕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임시로 호칭하여 이름한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리3)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범부의 법은 무엇으로 그 도리를 이해해야 합니까?”
“상주하는 것이란 없으며 상념도 없습니다. 전도된 것도 없으니 그것이 도리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이른바 도리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구쇄여, 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또한 범부의 법을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부처님 도의 법을 획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무엇을 법의 도리라고 합니까?”
“둘이 없다는 도리가 모든 법의 도리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바른 견해란 두 가지 인연에 말미암습니다. 하나는 타인에게서 듣는 것이고 둘은 사유하는 것이니, 그 행동은 거기에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이구위가 질문하였다.
“구쇄여, 여래께서는 단지 핵심이 되는 도리에 귀의하시는 까닭에 도리가 곧 핵심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인연으로 핵심이 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미사여구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에게 질문하였다.
“가르침은 단지 핵심의 도리만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침내 보살의 미사여구를 훼손하거나 부수어 버리는 것 아닙니까?”
“잃어버린다든지 스스로 훼손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비록 미사여구의 도리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가 체득한 것에는 획득한 바가 없습니다. 그 보살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법에는 획득한 바가 없습니다. 그 보살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법의 도리를 설한 것입니다. 총기 있고 명철한 까닭입니다.
그는 체득하지도 않고 도리의 보답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에 자재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존귀하고 훌륭하니 동등하거나 필적할 만한 자는 없습니다. 분별할 수 있는 한계까지 분별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소멸하고 멸도합니다. 과거와 미래에 영원히 고요하니 이것이 모습의 도리입니다. 세존께서 설한 것에 입각한 까닭입니다.
구쇄여, 그 도리에 귀의한다는 것은 곧 법을 제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한 것도 없고 제어한 것도 없다는 것은 버리지도 않고 제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생각한 바가 없다는 것이 곧 견고한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견고한 것을 일컬어 도리라고 합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그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 그 방향을 계교할 수 있습니까?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은 곧 핵심되는 일체법에 돌아가는 것입니까?”
“족성자여, 있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인연으로 합니까?”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고 일체는 모두 공이며 모든 법은 담백한 것입니다. 만일 공의 도리에 입각해 핵심에 돌아간다면 핵심도 담백한 것이고 도리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성자여,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법에 돌아가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였다.
“족성자여,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다고 말씀하시거나 요지하신 것 아닙니까?”
답하였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에서 본래 도리의 근원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핵심에 돌아가게 되면 그것이 궁극적인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문(門)은 제일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한 대로 마땅히 그대로의 것과 장소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법은 없으며 또한 법이 아닌 것도 없습니다. 또한 일어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 현자와 성인의 도에는 두 가지 도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짓는 바도 없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만드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이 하면 보살의 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에는 만드는 바가 없고 도리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또한 옳은 것은 착란되지 않습니다.”
이구위가 이러한 이야기를 설할 때에 5백 비구와 8백 천자가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이구위보살이 구쇄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여래께서 설하신 바는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이니 미사여구를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도리를 헤아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행이 없습니다. 그 도리의 궁극에 이른 자에게는 또한 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이 도리를 설하신 것입니다.
단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갈 뿐 미사여구를 취하지 않습니다.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 것이 아울러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본래 청정하고 평등하니 뜻의 성품은 자연스러워 초월하는 것마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단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갈 뿐 미사여구를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족성자여, 여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 일에 의하여 바른 견해를 일으키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살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찰한 것에 입각해 사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교법과 계율에 대해 널리 듣지 못한 자는 비록 삼매에 순응한다 하더라도 윤회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높이 여기는 교만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법과 계율을 듣고 살펴라. 그리고 널리 듣고 많이 권하고 돕도록 하라. 경의 법을 들은 것을 빠짐없이 받들고 행하여라. 치료해야 할 자를 정화하여 현자와 성인의 도에 이르게 하라.’”
다시 질문하였다.
“비구는 어떻게 치료하는 행위를 사유합니까?”
“법으로써 치료하고 행하지만 또한 행한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핵심되는 일을 사유하는 것이니 여기에 치료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족성자여, 이것이 치료하는 행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다시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치료하고 행한다면 음성을 일으키지도 않아야 하고 나의 자아라는 것을 일으키지도 않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행하게 되는 거처에 대해 강설합니다만 가는 자라고 설하든 돌아오는 자라고 설하든 일체는 모두 가는 일도 없고 얻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과거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을 닦았다는 것도 없고 미래에 그러할 것이라는 것도 없고 현재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을 닦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일컬어 핵심을 사유하는 자는 그것으로써 치료하고 행한다고 합니다.
만일 모든 법을 보되 일체가 자연히 빠짐없이 돌아가 멸진하는 것을 본다면, 또는 그렇게 모든 법을 수용한다면 핵심을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이 있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고 동일한 모습이었음을 살피고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자연히 본래부터 청정하게 일어난 것임을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게 멸도된 것이라고 관찰하고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또한 고요하지도 않고 관찰한 바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관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관찰한 바라고 하지만 관찰한 바도 없고 또한 본 바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보는 것이 없고 관찰한 바도 없다면 본 바도 그와 같아 역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세존이 이구위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족성자야. 설한 바가 있다면 마땅히 네가 설한 것과 같아야 한다.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법에 있어 허망하지 않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법에 있어 음(陰)과 덮개[蓋]가 없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이 법이라는 것도 없고 해탈문도 역시 없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행한 법이 있다 해도 제거하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 또한 행한 바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다. 이것이 곧 동등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인 것이다. 일체법을 평등하게 보는 까닭에 평등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 분명하다.”
다시 여쭈었다.
“어찌하여 일체의 모든 법이 평등하지 않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과 같다. 또한 족성자야, 이 모든 법이라는 것에는 흔쾌히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다. 과거 또는 미래에 있어 평등하니 또한 생하는 바도 없다.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또한 생하는 바도 없고 존재하는 바도 없다. 보는 바를 넘어서지도 않고 고요함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바도 없다. 또한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말한 바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말하고 행한 바도 없고 생하는 바도 없다. 또한 보는 것도 없고 또한 넘어서는 것도 없어 평등하고 고요하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평등한 것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다시 여쭈었다.
“무엇 때문에 고요함에 평등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답하셨다.
“나의 자아에 대해서도 평등하고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하다. 일체의 모든 법은 형상이 없고 또한 훼손되는 바도 없다. 이것을 일컬어 고요함에 평등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것에 이르렀으며 고요함에 바르게 들어갔습니다. 모습으로 말미암은 것은 본래 깨끗이 멸도된 것입니다. 보살은 모두 그와 같이 모든 법을 압니다. 만일 이것을 듣고 믿고 이해하는 자는 어디에서 노닐고 거주한다 해도 중도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보살은 훌륭한 권화와 방편으로 즐거움을 삼아야 한다. 권화와 방편을 닦고 구족하고 행해야 한다. 일체의 마음을 일으켜 노닐고 거처할 네 가지 법에 돌아가야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큰 자애를 행하고, 끝없는 슬픔을 지니고, 여러 신통한 지혜를 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절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만일 이 법을 받들고 선양하고 닦는다면 고요함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거취의 모습은 일체가 본래 청정하여 빠짐없이 멸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여러 법의 행을 고요하게 하는데 이르니 이것을 듣고서 믿고 즐거워하면 어디에서 노닐고 거주한다 해도 중도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근원을 분별하니 그는 곧 적막하지만 담백한 것조차 없으며 또한 타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의 중생을 포기하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구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어디에서 보살은 순수하고 정숙합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고요함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에게 여러 견해가 없고 또한 상념도 없다면 이것이 순수하고 정숙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성문과 일체의 중생은 평등을 닦지 않으며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떠난다. 또한 대승의 행을 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러 신통한 지혜를 의심하고 무원(無願)을 떠난다. 또한 고요한 경지로 멸도에 들어가지 않는다. 곧 그 가운데서 보살의 마음을 증득하려 하면서도 뜻은 성문과 연각에 있어서 멸도에 들어간다.
또한 족성자야, 보살이 만일 고요한 모습에 들어간다면 모두 일체의 제법을 분별한다. 발흥하는 것이 있다면 일체가
모두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신통한 지혜를 일으키고 그것에 거주하기 위하여 대승을 준수하고 수습한다. 일체의 군맹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긴다. 두루 일체를 보아 뜻과 함께 원을 갖춘다. 일찍이 타인이 바라는 바를 단절케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곧 보살을 헤아려 보면 모두 고요함에서 순수하고 정숙하게 노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보살의 행은 차이나고 특별합니다. 모두가 성문 및 연각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금 박수(溥首) 동진(童眞)이 모임 가운데에 있는데 조용히 앉아 있을 뿐 이 삼매에 대하여 강설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문수사리가 마음속에서 사념하는 바를 살피시어 마음으로 박수 동진에게 요청하면서 관찰해 주십시오.”
그러자 박수 동진이 구쇄보살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행할 때는 공덕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양(利養) 때문도 아니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재산과 사업 때문도 아니고 명성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덕을 찬탄 받고 그 공적을 선양받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의복ㆍ음식ㆍ걸상ㆍ잠자리ㆍ병에 필요한 의약품 때문도 아닙니다. 생활을 위한 업 때문도 아니고 국왕과 대신의 상과 하사물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쇄가 다시 물었다.
“박수보살이여, 어떤 이유 때문에 보살도를 행합니까?”
박수가 답하여 말하였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법의 도리로써 군중을 개화하는 것입니다. 대승을 뜻하는 까닭에 허망한 여러 가지 힘들고 애쓰는 환난을 제거합니다.
고요함을 일으키는 까닭에 애쓰고 괴로운 바를 참습니다. 그리고 중생이 편안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욕구합니다. 의심이 없으며 희망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집착하는 바도 없고 의지하는 바도 없고 수용하는 바도 없고 오로지 거처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좋다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나의 자아라는 사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퇴전하지도 않고
다시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만일 모든 법에 흔들리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면 가만히 있지도 진동하지도 않으며 장차 간다는 것도 없습니다. 위험과 해로움도 없고 환희하는 것도 없습니다. 수척하지도 않고 자기 홀로 용맹하지도 않습니다. 승리하는 자도 없고 굴복하는 자도 없습니다. 넘어가는 것도 없고 초췌하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바가 없으며 무서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습니다. 졸속하지도 않고 조폭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위대하다는 것도 없습니다.
또한 마음과 뜻이 없으면서 항상 적막한 곳에 거처합니다. 항상 무념으로 머물면서 동일한 도리와 일승과 하나의 가르침과 동일한 형상으로 항상 동등한 행을 실천합니다. 빠짐없이 중생을 구호하고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박수가 말하였다.
“족성자여, 보살의 소행은 그와 같이 비교할 만합니다. 그런 까닭에 행을 세우는 것입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어디에 보시하는 것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그 보살이 멸진을 행하지 않는다 해도 일어나는 것도 없고 또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여러 가지가 멸진하게 되니 그것은 마땅히 멸진할 것으로서 멸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과거와 미래를 염(念)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생하는 바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또한 총명하게 행을 세운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여, 보살 대사는 과거의 뜻을 멸진하려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미래의 뜻을 일으키고 행하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뜻에서 머무는 바도 없고 행하는 바도 없습니다. 마음이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여, 보시가 바로 도의 마음이니 중생과 여래에는 둘이 없습니다. 계율을 간직하는 것과 인욕과 정진과 한 마음과 지혜가 바로 도이니 중생과 여래에게는 둘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항상 이 여섯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을 준수하여 그것에서 행한 바가 있다면 그 행의 모습에서는 윤회를 근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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