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2권
대장엄론경 제2권
마명보살 지음
후진삼장 구마라집 한역
4
다음으로 법을 들음[聽法]이니, ‘법을 듣는다’는 것은 큰 이익이 있고 그 지혜를 늘리고 넓혀서 능히 마음과 뜻을 모두 다 조복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사자국(師子國)에서 어떤 사람이 마니(摩尼) 보배를 얻었는데, 크기가 사람 무릎만 하며 수승하고 미묘해서 세상에 드문 것이라, 왕에게 갖다 바쳤다. 왕이 그 구슬을 받아서 자세히 보고는 게를 설하였다.
옛날부터 여러 국왕들은
보배를 쌓아 이름을 구하려고
많은 손님들을 불러 모아
보배를 꺼내어 스스로 우쭐하다가도
왕위를 물러나 목숨이 끝날 때엔
보배는 버려 두고 홀로 떠나가나
오직 선하고 악한 업(業)만이
몸을 따라가서 떨어지지 않으니
마치 벌들이 꿀을 만들어도
다른 이가 가져가서 자기는 없는 것처럼
재보(財寶)도 또한 이와 같아서
다른 이를 돕고 자기를 따르지 않네.
옛날의 국왕들도 모두 이와 같아서
그 재보에 속아 넘어가
가득 쌓아 놓고 남을 대접했으나
무엇 하나도 자기를 따르는 것은 없었네.
내가 이제 마땅히 스스로를 위해서
반드시 보배가 나를 따르도록 하려면,
오직 부처님 복밭 가운데에서
모든 공덕을 지어야 할 뿐이니
나를 따라서 후세까지 이르는 것은
선한 과보만이 썩어 없어지지 않네.
목숨이 끝날 때에 이르면
일체를 모두 버리고 가야 하네.
넓은 궁실과 사랑하는 사람들
대신들과 용맹한 장수들이
슬퍼하며 죽은 이를 보내지만
무덤까지 왔다가는 집으로 돌아가네.
코끼리ㆍ말ㆍ보배ㆍ수레와
진귀한 노리개며 창고의 보물들
백성들과 많은 성곽
유원지에서 즐겁게 놀던 곳을
정처없이 버려 두고 홀로 떠나가니
그 무엇도 따라오는 것 없네.
왕이 게를 설하여 마치고는 곧 탑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이 보배 구슬을 탑의 문설주 위에 걸어 두었는데, 그것이 밝게 드러내 비추는 것이 마치 큰 별과 같았다. 만약 해가 떠서
왕의 궁전을 비출 때면 찬란하게 서로 반사해서 보통 때보다 몇 배나 더 밝았다. 구슬의 광명이 매일매일 항상 그러하다가 어느 하루는 갑자기 밝은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 가보니 보배 구슬은 보이지 않고 다만 문설주 아래에 피가 흘러서 땅을 더럽히고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서 찾아가니 가타라(迦陁羅) 숲에 이르렀는데, 숲까지 채 못 가서 구슬을 훔쳐간 사람이 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구슬을 훔칠 때 문설주에서 떨어져 정강이 뼈가 부러졌기 때문에 이렇게 피를 흘렸던 것이었다. 곧 이 사람을 잡아서 왕에게 데려가니, 왕이 처음 보았을 때는 매우 화가 났으나 그의 다친 상처를 보고는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인자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쯧쯧, 이놈아. 너는 어리석게도 부처님의 보배 구슬을 훔쳤으니 장차 미래세엔 반드시 나쁜 갈래[惡趣]에 떨어질 것이다.”
게를 설하였다.
괴이쩍구나, 매우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큰 악업(惡業)을 저질렀으니
마치 매와 몽둥이는 무서워하는 사람이
도리어 베어 죽임[斬害]을 당하는 꼴이로다.
가난하고 궁핍함의 고통을 두려워해서
이 어리석고 미친 생각을 일으켰으니
조금 가난한 것을 견디지 못해
끝없는 고통을 길이 받게 되었구나.
그때에 한 신하가 이 게를 듣고는 곧 왕에게 아뢰었다.
“왕께서 하신 말씀은 진실되어 허망하지 않습니다.”
곧 게를 설하였다.
탑에 있는 인간 세상의 보배를
어리석음 때문에 잠시 훔쳤으나
이 사람은 한량없는 겁 동안
끝내 삼보를 만날 수 없으리.
옛날에 어떤 사람은
신심(信心)으로 기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귀에 있던 수만화(須曼花)를
받들어 불탑에 바쳤네.
그 뒤로 인간ㆍ천상의 백억 겁 동안
항상 커다란 쾌락을 받았거늘
십력(十力)을 갖추신 세존의 탑에서
보배를 훔쳐 자신을 도모했으니
이러한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리.
또 어떤 한 신하는 분개하여 말하였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그 죄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꾸짖거나 책망할 필요 없이 극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인데, 무엇하러 또다시 죽이겠느냐. 만약에 사람이 땅에 쓰러져 있다면, 마땅히 일으켜 세워야 하느니라.”
곧 게를 설하였다.
이 사람이 이미 죄를 범하였으므로
빨리 구제해 주어야 마땅하리니,
내 이제 재보를 내려
참회시키고 복을 닦게 해서
장래에 받게 될 큰 고난을
벗어나 여읠 수 있게 하리라.
내가 장차 돈과 재물을 주어서
저를 불탑에 공양하게 한 뒤에도
만약에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는다면
죄과(罪過)는 끝내 없어지지 않으리라.
마치 땅 때문에 쓰러진 사람을
다시 땅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부처님으로 인하여 얻은 죄이니
또한 부처님으로 인하여 없애야 하리라.
그리고는 왕이 곧바로 돈과 재물을 크게 내려서 그로 하여금 불탑에 나아가 참회하고 많은 공덕을 짓게 하였다. 그때 보배 구슬을 훔친 자는 생각하였다.
‘이제 만약 대왕께서 불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의 죄를 따져서 참수형에 처했을 것인데, 이 무거운 죄를 용서해 주시니 이 왕은 진실로 대인(大人)이시다. 석가여래께서는 진실로 위대한 분이시라 삿된 소견을 능히 조화(調化)하시니, 국왕이 이와 같은 일을 베푸시는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 탑이 있는 곳으로 기어가서 절을 향해 합장 귀명(歸命)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비(大悲)하신 세존이시여, 세간을 진실로 구제하시는군요. 비록 열반에 드셨지만 오히려 저에게 재물을 주어 구하도록 명령하실 수 있으시니, 세간에서는 모두 다 ‘진실된 구제자[眞濟]’라 부릅니다. 명칭이 모든 세계에 널리 들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의 생명을 구제해 주시니 ‘진실된 구제자’란 이름이 헛되이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곧 게를 설하였다.
세간에서 진실된 구제자라 일컬으니
이 이름은 실로 헛되지 않아
제가 이제 구제를 받음으로써
진실된 구제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세간은 모두 번뇌가 들끓어서
답답하고 뜨거움에 허덕임이 많은데,
자비하신 부처님의 서늘한 달[月]로
그 고뇌를 다 비추어 제거하시네.
여래께서 세간에 계실 때
저 벌판의 귀신들 처소에서
우두머리[首長者]를 구제해 주심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제 이미 열반하신 뒤에도
남기신 법으로 위액(危厄)을 보살피사
저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심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세간의 공장(工匠)이
기이하고도 교묘하게 성인의 마음에 합치되어
오른손을 들고 계신 형상으로 그려서
안위(安慰)하시는 모습을 나타내 보였을까.
겁 많은 사람은 보기만 하여도
그 두려움이 다 제거되니
하물며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구제하신 중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제 큰 고액(苦厄)을 만났으나
형상만으로도 나를 구제하여 죄를 면하게 하시네.
5
다음으로 ‘욕심이 적다[少欲]’는 것은 비록 재물이 있으나 마음에 애착(愛着)이 없는 것을 그렇게 이름하여 칭한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떤 우바새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바라문의 법을 믿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때 그 친구가 잘 믿는 바라문이 떨어진 옷을 입은 채 고행을 한다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지기도 하고 항상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더러운 똥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친구가 곧 우바새를 불러 말하였다.
“그대는 이리 와서 바라문을 보아라. 청정한 몸으로 스스로 고행하는 높은 선비로서 욕심이 적어 만족함을 아는, 이와 같은 사람을 그대는 일찍이 본 적이 있는가?”
우바새가 말하였다.
“그러한 고행으로 높은 체하는 사람이 바로 자네를 속이는 것이네.”
친구와 함께 바라문에게 가서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구하기 위하여 고행하는 것인가?”
바라문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고행하는 것은 왕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오.”
그때 우바새가 친구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금 온 국토의 창고에 있는 값진 보물을 다 제 마음대로 사용하고, 맛난 음식을 탐내어 먹으며, 궁인ㆍ시녀 등 아리따운 여색과 갖가지 음악으로 즐기려고 하는 것이네. 대신이나 장자(長者)도 여러 가지 재보(財寶)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뜻에 흡족하지 않아서 일체의 대지와 인민과 값진 보물을 다 희구하는 것인데, 어찌 욕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칭하겠는가? 그대는 다만 몸으로 고행을 행하는 것만 보고서 욕심이 적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 사람이 구하는 바가 끝내 만족함이 없음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네.”
곧 게를 설하였다.
이른바 욕심이 적다는 것은
반드시 낡은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일러 욕심이 적다고 하지 않으니
이 사람은 지금
마음이 큰 강과 바다 같아서
욕심 내어 구함에 만족함이 없거늘
어찌 욕심이 적다 하겠는가.
이제 이러한 고행을 닦는 것은
오욕(五欲)을 탐하고 갈망하기 때문이니
이 사람은 실로 허망하고 거짓되어서
욕심이 적다는 허울만을 나타내는 것이라.
탐욕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지
사실은 욕심이 적은 사람이 아니네.
이 게를 설하고 나서 우바새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이 사람은 모든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어서 선인(仙人)이나 성인(聖人)이 행하는 바는 조금도 없으니,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하네. 무릇 ‘욕심이 적다’는 것은 돈이나 재물, 많은 보물에 있는 것이 아니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은 부자여서 국토와 코끼리, 말, 일곱 가지 보배를 모두 가졌지만 오히려 욕심이 적은 이라고 불렸으니, 왜 그런가 하면 비록 재보가 있었지만 마음에 탐착하지 않고 성인의 도를 즐거워했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비록 부유해서 일곱 가지 보배가 넘쳐 흘러도 마음에 희구(希求)함이 없으면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비록 재보가 없어도 희구하여 만족할 줄을 모른다면 욕심이 적어 만족함을 안다고 할 수 없네.”
곧 게를 설하였다.
만약 의복과 음식이 없는
벌거숭이 니건(尼乾)1) 따위들이
일부러 애써 괴롭히는 것을
고행이라고 한다면
아귀나 축생들이
빈궁과 고뇌로 말미암아
온갖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도
역시 고행이라 해야 마땅하리니.
저 사람도 이와 같아서
헛되이 스스로를 피로하게 해서
허울은 비록 고행하는 것 같지만,
탐착하는 마음을 품고 있네.
바라고 구하여 만족할 줄을 모르기에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없네.
비록 많은 보물들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성인의 도를 즐겨 수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욕심이 적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저 농부들이
곡식을 밭에 심기만 하고서
많은 수확을 거두려고 욕심을 부린다면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네.
몸에 몹쓸 종기가 나서
치료에 많은 도구들이 필요하더라도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어야만
이것을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있네.
몹쓸 종기를 치료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자를 조금 얻을지라도
후세의 몸 받으려는 탐심이 없어야만
이것을 진실로 욕심이 적다고 할 수 있네.
마음에 아첨하고 왜곡됨이 없고
또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비록 생활에 필요한 도구가 있어도
명망과 실지의 공덕을 갖추어서
능히 이와 같은 일이 있어야만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욕심이 적은 것이네.
6
다음으로 비록 계율을 지키더라도[持戒] 인간과 천상의 욕락(欲樂)을 위해서라면, 계율을 깨뜨리는 것[破戒]이라고 한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떤 한 사문(沙門)이 바라문과 함께 빈 숲속에서 여름 한 철의 안거(安居)를 같이하였다. 그때 사문이 자주 바라문의 처소에 왕래하면서도 각자의 할 일을 할 뿐, 친하거나 멀리하지 않고 그 중간에 처하였으니, 왜냐 하면 친밀히 할 경우엔 그가 교만한 마음을 낼까 염려되고 멀리할 경우엔 증오(憎惡)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었다.
곧 게를 설하였다.
막대기를 한낮에 꽂아 두면
세우거나 눕히거나 그림자가 없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두면
그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처럼
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친하고 소원함의 중간을 취해야 하니,
서로가 점점 익숙해진 뒤에야
그를 위해 묘법을 설해 주리라.
‘이 바라문은 지혜가 없어서 어질고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못하니 받들어 섬기기[供事]가 지극히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그를 친히 해서도 안 되고 멀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은 사람을 섬기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받들어 섬길 줄 모르는 것도 또한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방편으로 서로가 익숙해지고 가까워져서 점점 서로 믿음을 체득한 뒤라야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비구가 바라문에게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 때문에 해를 향해 손을 들고 잿더미[灰土] 위에 누워 있으며, 벌거벗은 채 풀을 먹고, 밤낮으로 눕지도 않고 발을 들고 서 있는 이런 고행을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구하기 위함인가?”
바라문이 대답하였다.
“장차 국왕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오.”
이 바라문이 얼마 뒤에 몸에 병을 얻어 의사에게 가서 치료할 방법을 물으니, 의사의 대답이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하므로 이에 바라문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나를 위해 시주의 집에 가서 고기를 조금 얻어다가 나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겠소?”
이때에 비구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이제 그를 교화할 때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양 한 마리를 요술로 만들어[化作] 그의 곁에 묶어 두었다.
바라문이 비구에게 물었다.
“그대가 나를 위해 얻어 온 고기가 이제 어디에 있는가?”
비구가 답하였다.
“양이 바로 그 고기네.”
바라문이 크게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어떻게 양을 죽여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이에 비구가 게를 설하여서 대답하였다.
그대 지금은 양 한 마리를 가엾이 여겨
오히려 죽이려 하지 않지만
후에 만약 왕이 된다면
소와 양과 돼지
닭과 개와 들짐승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죽이고 해쳐서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대를 위해
주방장[廚宰]들이 음식을 만들어 바칠 것이며
그대가 만약 화가 날 때엔
머리를 베고 손발을 끊고
눈을 도려내는 그러한 일까지
당연히 명령하리니.
그대 지금은 양 한 마리를 가엾이 여기지만
앞으로는 많은 살해를 하려고 하니
만약에 진실로 자비한 마음이 있다면
왕이 되기를 구하는 그 마음을 버려야만 하네.
마치 사람이 사형[刑戮]을 당하게 되면
고통을 두려워해서 술을 많이 마시듯이,
아름다운 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사나운 불이 장차 일어나려고 하듯이,
또 죄인 다스리는 쇠고랑을 가진 자가
함부로 사람 묶어 매기를 좋아하듯이,
왕의 지위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항상 두려워하고 겁내는 마음이 있나니.
그 위력으로 모두가 모셔 따르고
진귀한 보물로 장엄하여
뒷날의 허물과 근심[過患]을 돌아보지 않으니
범부는 이것을 탐내어 구하다가
얻고 나면 갖은 죄악을 저지르게 되어
3악도(惡道)에 떨어지네,
마치 나방이 불빛을 탐내어서
그 속에 날아들어 스스로 타죽는 것처럼.
비록 5욕락(欲樂)을 다 갖추고
이름을 널리 떨치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어서
근심 고통만 더욱 깊어 가리라.
마치 독사를 잡는 것과
바람을 거슬러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위해(危害)를 버리지 않고 있다가
또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네.
왕이 둘러 보러 나갈 때엔
머리 위에 하늘 갓을 쓰고
뭇 보배와 영락,
가장 좋은 미묘한 의복으로 장엄하고
이름난 말과 보석으로 치장한 수레를
타고서 둘러 보러 나가니
백천의 무리가 앞뒤로 따라서
그 위세 매우 치성(熾盛)하지만
만약 적과 전쟁을 치를 때라면
보배 갑옷으로 그 몸을 가리고서
이기면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해칠 것이며
지면 자기의 목숨조차 잃어버리네.
미묘한 향을 몸에 바르고
제일 좋은 옷에다가 향내를 풍기며
먹는 모든 안주와 음식은
백 가지 맛으로 입맛대로 먹고
필요한 바를 다 뜻대로 하여도
거스를 자가 없기는 하지만
가고 오거나 앉고 눕는
거동이 모두 의심 나고 두려워서
친구도 또한 믿지 못하니,
비록 다시 친구를 사귄다 하여도
항상 위태롭고 두려워하는 마음 있거늘
어떻게 즐겁다고 할 수 있으랴.
물고기가 낚시밥을 삼키는 것처럼
예리한 칼에 꿀을 바르고
또한 그물을 펼쳐 놓은 것처럼,
물고기와 짐승들 그 맛을 탐하여
닥쳐올 고통과 근심을 돌아보지 않으니.
부귀(富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끝내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는데,
지옥은 담과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곳의 집과 땅은 모두 활활 타올라
죄인은 그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온몸을 불에 태워
한량없는 고통을 다 받네.
그대는 스스로 잘 생각해 보라.
즐거움은 얼마 되지 않으면서
고통과 근심은 너무 많으니
그러므로 그대는 고통을 먼저 생각하지
귀하게 되어 마음대로 하기를 구하지 말라.
그대의 바라고 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해탈하기를 구해야만
많은 고통이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
바라문이 이 게를 듣고는 잠잠히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합장하고 비구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여, 훌륭한 말솜씨[辯才]로 내 마음을 깨우쳐 주시는군요. 설령 저 삼십삼천2)의 왕이 된다 하더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곧 게를 설하였다.
착한 생각과 교묘한 방편
밝은 지혜로 능히 관찰하여
나를 위해 삿된 바람을 제거해 주고
바르고 참된 길을 보여 이끄네.
착한 벗이란 당연히 이와 같기에
세간에서 모두 칭찬하는 것이니
항상 이 벗을 가까이하여
다툼과 고뇌에서 벗어나리라.
나의 마음을 잘 이끌어서
삿된 것을 돌려 바른 길에 들게 하고
나에게 선악의 상(相)을 보여서
해탈할 수 있도록 하네.
7
다음으로 삿된 길에 의지하는 자는 뭇 고뇌와 환란을 겪고, 바른 길을 닦는 자는 신심(信心)과 명칭(名稱)이 더욱 늘어나니, 지혜 있는 사람은 마땅히 삿됨과 바름을 관(觀)해야 한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한길 가에서 고행하는 시늉을 하는데, 사람이 있을 때는 가시덤불 위에 누워 있다가 아무도 없을 때는 다른 곳에 따로 머물렀다. 이것을 본 다른 한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가만히 가시덤불 위에 누워 있어도 될 텐데, 왜 하필이면 온몸에 그 많은 상처를 내었는가?”
이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매우 화를 내며 가시덤불 위로 몸을 던져 전보다 더 심하게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때에 한 우바새가 그 옆에 서 있었는데, 이 고행하는 사람이 보고서 더욱 심하게 일부러 온몸을 굴렸다. 우바새가 곧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전에는 조그마한 가시덤불 위에서 몸을 굴리다가 이제는 성냄[瞋恚]의 가시로 자신을 찌르니, 가시덤불에 찔리는 것은 다치고 훼손됨이 매우 적지만 탐욕과 성냄[瞋心]에 찔리는 것은 깊고도 예리하네. 가시덤불에 눕는 것은 고통이 한 세대에 그치지만 탐욕과 성냄에 찔리는 고통은 한량없는 세상의 몸에까지 미치며, 가시에 몸을 찔린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만 탐욕과 성냄에 찔린 상처는 몇 겁이 지나도 낫지를 않네.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그 깊고도 독한 가시를 빨리 제거해야 하네.”
곧 게를 설하였다.
그대는 이제 그대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은 독한 가시를 뽑되,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써
탐욕과 성냄의 가시를 끊어야 하리니.
탐욕과 성냄의 가시가 깊이 박힌 사람은
세세토록 어리석음과 삿된 소견이
사라지지 않아서
바르고 참된 길을 알지 못하네.
몸을 괴롭혀 가시덤불에 누워서
고통으로 고통을 여의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가시덤불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멀리 피해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네.
유독 그대만 이러한 고행을
굳이 버리지 않고 계속하는가.
나는 이와 같은 일을 보고서
바름과 삿됨이 있음을 알았으니
그러므로 대비심으로 모든 고통을 뽑아 버리시고
바른 길을 열어 보이시는
10력(力)을 갖추신 세존께
거듭해서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네.
저 삿된 길을 헤매는 중생을 건지시어
8정도(正道)로 인도하시지만,
외도의 삿된 소견 중생들은
쓸데없는 고행에 속아넘어가서
끝까지 고행을 믿고 집착해
유전(流轉)함에 다함이 없네.
지혜로운 모든 이들은
이를 보고 믿음이 배로 늘어나지만
외도들은 너무도 어리석고 미혹되어
고통이 다하면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하네.
세간을 벗어난 큰 선인(仙人)의 말씀은
모든 것을 다 구족하고 있어서
8정도를 닦을 수 있으니
도를 닦았기 때문에 해탈한 것이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편안하고 즐거움으로 해탈을 얻는 것이지
그대 외도들처럼
고행을 행하여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니
모든 선한 업이나 악한 업이
다 마음을 의지해 조작되는 것인즉
그대는 마음[心意]을 조복해야 마땅하지
어째서 헛되이 몸을 괴롭히는가.
몸이란 번뇌[結使]의 덩어리인데
망령되게 갖가지 고행을 닦으니
이 괴로움으로 도를 닦는 자에겐
지옥이 바로 도이리라.
그러나 이 지옥에서는
베고 끊고 똥ㆍ오줌에 더럽히고
이글거리는 불꽃에 태우고 지지는
혹독한 온갖 고통을 다 받네.
저이가 비록 그러한 고통을 다 받더라도
고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지혜로 3업(業)3)을 흩어 버려
모든 번뇌[垢穢]를 다 소멸하네.
석가모니부처님의 교법은
일체의 사람들을 교화해서
하늘의 단 이슬[甘露]을 구하게 하시고,
또한 지관(止觀)을 선설하시며
다시 지혜로 장엄하신 그 수행을
참다운 고행이라 할 것이네.
어찌 한낱 몸을 괴롭혀
아무 이익도 없는 고행을 행할까.
지혜를 갖춘 이 고행이야말로 길고도 멀며
깊고도 넓어 끝이 없는 고행이라.
비유하면 나쁜 아들은
효(孝)를 행할 수 없는 것처럼
온갖 죄와 번뇌만을 저지르기에
그로 말미암아 뭇 고통을 받는 것이네.
이제 그대 외도들이
고행을 한다면서 말하기를
모든 선인(仙人)들도 고행을 닦아서
다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하네.
나 우바새로서 게를 설하여
그대 외도들에게 대답하노니
여러 선인들이 천상에 태어나심은
가시에 누운 것으로 인(因)해서가 아니네.
보시ㆍ지계와 진실한 말로 말미암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네.
그대 비록 고행을 한다 하지만
도무지 아무런 이익이 없네.
마치 농부가 봄에
종자를 심지 않아서
가을이 되어도 거두어들일
열매가 없는 것과 같이
그대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선근(善根)의 씨앗을 심지 않고
다만 모든 고행을 닦기만 하니
끝내는 거둘 것이 하나도 없네.
무릇 도를 닦으려는 자는
이 몸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기에,
맛있는 음식으로
몸과 목숨[軀命]을 충족시켜야 하네.
기력을 충분히 채워야
계(戒)ㆍ정(定)ㆍ혜(慧)를 닦을 수 있지
음식을 끊고 기갈에 시달리면
몸과 마음이 다 지치고 피곤해지네.
마음이 오로지 선정[定]에 들도록 하지 못하면
어떻게 성과(聖果)를 얻을 수 있으리요.
비록 갖가지 맛난 음식을 먹더라도
맛난 맛을 탐하여 집착하지 않고
다만 계율과 진실한 말
보시와 인욕, 선정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선근의 씨앗이 되어
마침내 선한 과보를 받을 것이네.
몸은 비록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더라도
마음이 만약 맛난 음식에 있다면
그 고행 자체가 달갑지 않겠거늘
하물며 선한 과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죽이고 해칠[殘害] 마음이 있으면
남을 두려워 떨게 만들고,
만약 죽이고 해치려는 마음을 제거하면
능히 두려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법을 행한다[行法]고 이름하니
만약 다시 죽이고 해치려는 마음을 낸다면
법이 아니라[非法]고 부를 것이네.
맛난 맛을 충족(充足)한 자가
끝내 남을 해칠 뜻이 없으면
해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설사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매우 선한 과보를 얻으려 할지라도
그대처럼 스스로 굶주리고
목마름[飢渴]과 졸음[睡眠]에 허덕인다면
또한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이네.
외도들이 또 말하기를,
그대처럼 자비심을 일으킨다 해도
반드시 이익이 되어서
큰 과보를 얻는 것도 아니네.
우리들이 굶주리고 졸음에 빠지는
그 일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그에게 이익은 없으나
선한 과보를 얻을 수는 있네.
나 우바새로서 대답하노니
자비심으로 성냄[瞋]과 해침[害]을 제거하면,
성냄과 해침을 제거했기 때문에
선한 과보를 얻을 수 있지만
그대들의 법은 일부러 고행을 일삼아
성냄을 더욱 증장하기 때문에
곧 몸ㆍ입ㆍ뜻으로 악업(惡業)을 지으니
어떻게 선한 과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비심이란 그런 것이 아니어서
자비심을 일으키는 그때에 이미
성냄과 해침을 제거해 없애 버리니
성냄과 해침이 없기 때문에
몸ㆍ입ㆍ뜻으로 선업(善業)을 일으키는 것이네.
아무런 이익이 없는 고행이
어떻게 자비로운 선업과 같다고 하겠는가.
비유하면 마치 사자의 울음 소리에
모든 짐승들이 그 앞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여래의 걸림없는 변재(辯才)와
그 일도 그러하여
일체의 모든 외도들이
감히 대항할 자가 없으니
법을 설하여 외도를 꺾는다면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잠잠하기 마련이네.
8
다음으로 몸과 입의 업이 자유롭지 못함은 분명히 그 뜻 가짐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떤 비구니가 사가라국(賖伽羅國)에 갔는데, 그 나라에 한 바라문이 5열(熱)로 몸을 지져서 이마 위엔 물이 흐르고 가슴과 겨드랑이에는 땀이 마구 솟으며, 목구멍은 바싹 마르고 입술과 혀는 다 타서 침이나 진액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마치 녹은 쇠와 같고 누런 머리털처럼 시뻘겋게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사방에 두고 여름 날씨 같은
열기 속에 이리저리 뒹구니, 피할 만한 곳이 없어서 시루 안의 떡처럼 온몸이 익어 문드러졌다. 이 바라문은 항상 낡은 베옷을 입은 채 5열로 몸을 지졌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누갈자(縷褐炙)라고 불렀다.
그때에 비구니가 이 일을 보고 나서 말하였다.
“그대는 지져야 할 것은 지지지 않고, 지지지 않아야 할 것은 지지고 있구나?”
누갈자가 이 말을 듣고서 매우 심하게 성을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소롭다, 까까머리여. 무엇을 지져야 한단 말인가?”
비구니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지져야 할 곳을 알고 싶다면, 그대는 다만 성내는 마음을 지져야 할 것이니, 마음을 지질 수만 있다면 바로 이것을 진정한 지짐이라 부를 것이네. 마치 소가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소를 채찍질해야지 수레를 때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몸은 수레와 같고 마음은 소와 같기 때문에, 그대는 마땅히 마음을 지져야지 어째서 몸을 못살게 구는가. 또한 몸이라는 것은 숲 같고 담[牆] 같아서, 비록 다시 태우고 지진다 하더라도 장차 무엇으로 메꾸겠는가?”
곧 게를 설하였다.
마음이란 성(城)의 주인 같아서
성의 주인이 화를 내는 마음으로
성을 구하고자 하나
아무런 보탬이나 이익이 없네.
마치 사자는
어떤 사람이
혹시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지면
저 사자는 바로 그 사람을 쫓아가지만,
어리석은 개는
어떤 사람이 기왓장이나 돌로 때리고 던지면
곧 기왓장이나 돌을 따라가서
근본을 찾을 줄 모르는 것과 같이
말하자면 사자는
지혜로운 사람이
그 근본을 구해
번뇌를 없애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개는
바로 이 외도가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질 뿐
마음의 근본을 모르는 것과 같네.
바라문이 말하기를
마음을 어떻게 불에 지지냐고 하지만
나 비구니로서 대답하건대
4제(諦)4)의 지혜는
네 개의 불덩어리와 같고
도를 닦는 것은 햇빛과 같으니
지혜로운 자는
사제의 불과
도를 닦는 청정한 햇빛과
다섯 가지 법으로 마음을 지질 뿐.
이 몸이라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데
무엇 때문에 몸을 괴롭게 하겠는가.
만약 괴롭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몸을 괴롭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괴롭게 해야 하네.
오고 가고 앉고 눕는 것이
몸이 아닌 마음의
심부름일 뿐이어서
고(苦)는 몸이 지은 것이 아니요,
그 허물이 마음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몸을 괴롭게 하겠는가.
마음이 만약 몸을 떠난다면
몸은 나무나 돌 같은 것이므로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그 마음을 꾸짖지
몸을 괴롭히지는 않는다네.
또 그대가
이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지는 것을,
도를 얻기 위한
고행이라고 한다면
지옥의 중생들은
고(苦)를 받음이 한이 없으니
갖가지 시달림으로
또한 도를 얻어야 마땅할 것이네.
바라문이 말하기를
이 고행은
발심하여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를 닦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지옥의 중생들은
핍박을 당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네.
그러므로 도를
닦는다고는 말해서는 안되네.
나 비구니로서 대답하건대,
만약 스스로 발심한 것이기에
복을 얻는다고 한다면,
어린아이가 불을 잡고 있는 것도
또한 복을 얻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대가 일부러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지는 것도
또한 복이 없는 것이네.
바라문이 말하기를,
젖먹이 어린아이의 행동은
지혜가 없어서
복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는 지혜가 있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지는
이러한 고행을 행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복이 있네.
나 비구니로서 대답하건대,
만약 지혜가 있어서
고행을 닦아
곧 복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주를 캐는 사람이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낸다면
진주를 얻을 수 있고
또한 복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바라문이 말하기를,
탐내는 마음 때문에
비록 피를 낸다 하여도
복이 될 수는 없다고 하고
나 비구니로서 대답하건대,
그대가 고행을 행하는 것도
천상의 즐거움을 탐해서이니
또한 응당 복이 없어야 할 것이네.
만약 탐내어 구하기 때문에
과보가 없다고 한다면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과보가 없어야 마땅할 것이며,
만약 어부나 사냥꾼에게
과보가 없다면
그대가 지금 행하는 이 고행도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과보를 받을 수 없을 것인데,
어째서 그대는 지금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굴려서
고행으로
천상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가.
우리 부처님 법에는
다섯 가지 열로 몸을 지져
고행을 받는 법으로
저 천상의 즐거움을 얻는
그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네.
천상의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진실된 말[實語] 등과 같은
모든 선한 공덕을 닦아야
비록 다시 탐내고 두려워하더라도
천상에 태어나는 즐거움을 얻을 것이네.
마치 약을 복용하는데
혹 탐심을 내고 혹 겁을 내어도
이미 마시고 난 뒤에는
약의 힘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과 같네.
진실된 말과 모든 공덕에
머무르는 자라면
혹 탐심을 내고 혹 겁을 내더라도
반드시 천상의 즐거움을 얻을 것이네.
그때에 바라문은
말이 궁색하고 이치에 꺾여서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잠자코 가만히 있었네.
그때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 법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을 내어서
바른 법[正法]을 깊이 즐거워하고
각각 서로 찬탄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부처님 법이여.
큰 지혜의 힘이 있어서
깊고 깊어 헤아리기 어렵고
외도의 지혜는
너무나 천박하네.
마치 터지는 불꽃[爆火]이
몸에 닿으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네.
불법의 폭화도
이와 같아서
바라문에게 닿으면
그들을 두려워 떨게 할 수 있네.
우리들은 이제
불법의 좋고 훌륭한
논(論)을 들었으니
다 함께 부처님
열반하신 곳을 향하여
공경하고 예배드려야 마땅할 것이며
세존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펼쳐서 설하신 법(法)에
귀명(歸命)5)해야 하리라.
지혜가 얕은 여인도
부처님의 단 이슬[甘露]을 마시면
큰 무리들 가운데서
두려움 없이 법을 설하리니.
그 누가 부처님 말씀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이 비구니도
지혜가 보잘 것이 없지만,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번뇌를 없앴기에
이 바라문들이
대꾸하지 못하고
잠자코 가만히 있도록 하였도다.
9
다음으로 탐욕[欲]이란 뭇 새들이 고깃덩어리를 서로 다투는 것과 같으니,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재물이 근심임을 깊이 알아서 탐내어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수파다(修婆多)라는 나라에 어떤 비구가 있었는데, 무너져 내린 담벽에서 묻혀 있던 큰 구리 항아리 속에 금전(金錢)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한 가난한 우바새를 데리고 가서 그곳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보물을 취하여 생계를 도와도 됩니다.”
그때 우바새가 비구에게 물었다.
“언제 이것을 보았소?”
비구가 답하였다.
“오늘 처음 보았소.”
우바새가 말하였다.
“내가 이 보물을 발견한 것은 오늘이 아니고 벌써 오래 전이지만, 나는 사용하지 않았소. 이제 내 말을 잘 들어 보시오. 보물로 말미암아 모든 허물과 근심이 생기니, 만약 이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왕이 듣게 된다면, 혹 죽게 될 수도 있고, 혹 귀양을 가거나 잡혀서 갇히게 되는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오.”
곧 게를 설하였다.
내가 이 보물을 발견한 지가
해[年]를 지나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 보물의 극심한 해독은
저 검은 독사보다 더하네.
그러므로 이 보물에 대해
도무지 탐심(貪心)이 없을 뿐더러
보기를 독사 보듯 해서
재보(財寶)라는 생각을 내지 않았네.
잡혀서 갇히거나 귀양을 가거나
혹 어떤 때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는
일체의 모든 재난과 해로움이
모두 이 보물로 말미암아 생겨나네.
갖가지 고통을 불러일으키니
해로움이 매우 두려워할 만하여
나는 보물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갈 생각조차 하지 않네.
중생들은 미혹되어 보물에 집착해서
그것을 일러 진귀한 완구(玩具)라 하니
보물이 바로 위험하고 해로운 물건인데도
망령되게 좋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이와 같은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데
이 보물을 어디에 쓸 것인가.
이 더러운 피고름의 몸뚱이로
나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가다가
언젠가는 없어지고야 말 터인데
진귀한 보물을 어디에 쓸 것인가.
마치 불을 섶에 던지면
그칠 줄 모르고 한없이 타듯이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바라고 구하여 만족할 줄 모르네.
그대가 만약 나를 가엾이 여긴다면
나에게 욕심을 적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인데,
어쩌자고 이 재보(財寶)를
나에게 보이면서 일러 주는가.
욕심이 적어 만족함을 알면
큰 이익과 즐거움이 생길 수 있으나
만약 재보에 욕심이 많다면
모든 근(根)이 항상 흩어져 어지러울 것이네.
탐심은 본래 만족함이 없고
희망이란 고뇌를 더할 뿐이니
그러므로 재보에 욕심 많은 사람은
늘 탐욕의 생각을 내기 마련이라.
이익을 탐내어 끝이 없음이
마치 마갈어(摩竭魚)6)의 입과 같지만
저 욕심이 적은 사람은
탐내어 구하는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왕의 생일 잔칫날[節會]을 만난 듯이
마음이 항상 기쁘고 즐겁다네.
그때 우바새가 소욕지족(少欲知足)하는 법을 찬탄하자, 저 비구도 희유(希有)하다는 생각을 내어 이렇게 찬탄하였다.
“훌륭하도다, 훌륭해. 참으로 장부(丈夫)로다. 비록 법복(法服)을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소욕법(少欲法)을 알고 있으니, 이 소욕법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것이네.”
비구가 또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한 말을 총괄하여 말하자면 나를 깊이 꾸짖어서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 집에서 처자 권속과 노복을 거느리고 있는 처지인 만큼 으레 재보를 탐내어 구해서 자신의 생활을 도모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소욕법을 찬탄하니, 설사 어떤 사람이 쇠로 혀를 삼는다 해도 욕심이 적어 만족함을 아는 것을 꾸짖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비록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몸에 법의(法衣)를 입어 모습은 사문(沙門) 같지만, 그러나 실상은 사문의 법을 알지 못하여 이제 그대에게 욕심 많게 하는 일을 가르치고 법왕께서 찬탄하신 소욕법이 바로 모든 선(善)의 근원임을 일러 주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수다라(修多羅) 중에 또한 욕심 적은 것이 사문의 근본이 됨을 설하셨으니, 여래께서 예전에 걸식을 마치신 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어떤 때는 여러 비구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어떤 때는 물 속에 두어서 벌레들의 먹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때마침 두 비구가 걸식한 것이 부족해서 굶주린 기색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남은 밥이 있으니 너희들이 먹겠느냐?’라고 하시니, 한 비구가 말하기를 ‘여래 세존께서 욕심이 적은 것의 커다란 공덕을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이제 어떻게 이 음식을 탐내어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 비구는 ‘여래 세존께서 남기신 음식이라면 이런 기회를 만나기 어려울 뿐더러, 범천왕과 제석천왕 등이 모두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니, 제가 이제 이 음식을 먹는다면 안색과 기력을 더하고 몸이 안락하며 훌륭한 변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음식은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데 어찌 제가 먹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세존께서는 먹지 않겠다는 이만을 칭찬하시어 ‘훌륭하도다, 비구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아서 소욕법을 행하는구나’라고 하시고, 다른 한 비구는 비록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부처님께서 남기신 음식을 먹겠다고 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소욕법은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신 교계(敎戒)의 근본입니다.”
곧 게를 설하였다.
법의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욕심이 적어야 함을 알아야만 하니
이와 같은 소욕법이야말로
성스럽게 장엄하는 영락(瓔珞)이며
금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버리고
근심 없이 쾌락하게 되므로
이것이 바로 큰 열반의 집에
들어가는 첫 문이며
마군들을 막고 제어하는
요새의 좁은 길이므로
이것이 곧 마군의 경계를 벗어나는
더없는 인봉(印封)이네.
계율을 지킴[持戒]이 큰 바다라면,
욕심이 적음[少欲]은 바다의 물결과 같아서
능히 뭇 공덕의
치밀한 덮개가 되니
탐내어 구하다가 피로한 자,
이곳에 이르러 휴식할 수 있고
욕심이 적음을 가까이했던 자는
마치 젖소의 젖으로부터
소락(酥酪)과 제호(醍醐) 등이
나오는 것처럼,
욕심이 적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공덕을 다 자라나게 하네.
손을 펴서 보시하는 자도
그 손 장엄하고 수승하다 하겠지만
받는 사람의 욕심 내지 않는 손이
저보다 더 장엄하고 수승하며
어떤 이가 보시라는 말만 하여도
그 말의 값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받는 이의 족하다는 말이
저보다 더 헤아릴 수 없는 값어치이네.
만약 법을 얻으려 한다면
욕심이 적음을 가까이해야만 하리니
십력(十力)께서 설하시길, 욕심 적음이
곧 성종(聖種)의 법이라 하셨네.
욕심이 적어서 재물을 초월하면
계(戒)ㆍ문(聞)ㆍ혜(慧)가 증장하니
이와 같은 소욕법이
출가한 이의 법식(法食)이니라.
비록 갈애(渴愛) 등이 있더라도
끝내 어지럽히고 괴롭게 할 수 없으니
후세의 즐거움은 그만두고라도
현재 바로 안락함을 얻을 것이네.
10
다음으로 무릇 만족함을 안다면 가난해도 부자라 하겠지만, 만족함을 모른다면 비록 부자라 해도 이는 가난한 것이니, 만약 성인의 지혜가 가득하다면 이를 곧 큰 부자라고 할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 우바새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깔보며 ‘가장 가난한 자’라고 하였으나, 우바새는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만족함을 아는 법[知足法]을 좋아하였으므로, 곧 법상(法相)에 수순하여 게를 설하였다.
병 없는 것이 제일가는 이로움이고
만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가는 부자며
좋은 벗이 제일가는 친구고
열반이 제일가는 즐거움이네.
그때에 우바새가 게를 설하고 나서 저 사람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족함을 아는 것이 곧 부자인데, 그대는 지금 무슨 이유로 나를 가난하다고 하는가?”
다시 게를 설하였다.
비록 많은 보물을 지니고
생활에 필요한 도구가 풍요롭더라도
3보(寶)를 믿지 않는 자라면
그를 가장 빈궁하다 할 것이며
비록 아무런 보물도,
생활에 필요한 도구도 없지만
삼보를 믿을 수 있는 자라면
그를 제일가는 부자라고 할 것이니
나는 이제 삼보를 공경하고
믿음으로 진귀한 완구(玩具)를 삼거늘
그대는 무슨 인연으로
나를 빈궁하다 하는가.
제석(帝釋)이나 비사문(毘沙門)이
비록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어도
보시할 때에 이르러선
일체를 남김없이 희사하지 못하지만
나만은 만족할 줄 알아서
그 어떠한 재보에도
탐착하는 마음이 없기에
일체를 모두 희사할 수 있네.
부귀한 이들의 창고에는
진귀한 보물이 많이 있으나
물과 불과 도적들이
모두 다 빼앗아 갈 수 있으니
저이가 만약 보물을 다 잃어버린다면
곧 큰 고뇌가 생겨나서
훌륭한 의사나 미묘한 약도
저이의 고통을 치료할 수 없지만
나는 믿음으로 보물을 삼기에
빼앗아 갈 수 있는 자가 없으므로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워서
모든 근심과 걱정, 괴로움이 없다네.
이 게를 설하고 나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네. 비록 창고에 코끼리와 말, 일곱 가지 보물과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다 하더라도 만족함을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를 가난하다 할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만족함을 아는 것이 최고의 부자라고 하셨네.”
뭇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모두 찬탄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지혜가 있는 바른 말이니, 과연 대장부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기 서로 말하였다.
“오늘 이후로는 비록 재보가 없더라도 신심만 있다면 우리가 그를 보고 부자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돈이나 재물을 모은다면, 그것은 모두 쾌락을 위해서며, 처자식이나 권속들에게 공급해서 부족함이 없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즐거움은 바로 현세의 몸만을 위한 것입니다. 신심(信心)이라는 보물을 가진 이는 세세생생[累世]토록 사람과 하늘 가운데 태어나 재보를 마음대로 할 것이니, 그러므로 신심이 바로 제일가는 재보임을 알겠습니다.
이와 같이 신심이라는 재보는 생사중에 있더라도 항상 쾌락을 느껴 아무런 고뇌가 없지만, 금이나 은 같은 진귀한 보물은 재앙과 근심을 일으켜 밤낮으로 걱정하거나 남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해서 마침내 여덟 가지 위란(危亂)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탐내고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세세생생토록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신심이 있기 때문에 계율의 재보와 보시의 재보, 선정의 재보, 지혜의 재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신심이 없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여러 재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심이라는 재보가 제일인 만큼, 우리도 이 재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큰 부자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으니, 우리가 옛날에 선업(善業)을 깊이 쌓았기 때문에 지금 신심으로 말미암아 만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게를 설하였다.
신심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을 저지르지 않기에
일체의 공덕이란 공덕은
신심으로 사명(使命)을 삼으며
신심은 또한 물살과 같아서
빨리 흐르고 빨리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선한 법에 빨리 이르게 하나니
아무리 많은 재보가 있더라도
신심이라는 큰 부자는 이길 수 없고
비록 재보가 많은 부자라도
한번 잃어버리면 곧 빈궁하게 되네.
만일 그 목숨이 끝날 때면
다 버리고 홀로 가는 것이어서
후세(後世)에까지 따라오는 것이 없지만
신심이라는 재보는 없어지지 않고
항상 스스로 따라다녀서
여러 겁에 걸쳐 쾌락을 받는다네.
세간 사람들은 재보를 쌓기 위해
그것에 탐욕을 일으키지만
신심이란 재보는 그런 것이 아니어서
보는 사람마다 환희심을 내므로
모든 재보란 재보 가운데
신심이란 재보가 가장 으뜸이라.
이 이치를 나타내 보이신 이,
바로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우리도 가난하게 되지 않으려면
신심이란 재보가 가장 수승하니
다른 것은 재보라 할 수 없고
신심만이 진실한 재보이므로
신심으로 보시하는 이는
재물이 항상 늘어나게 되고
신심으로 보시하지 않는 이는
과보가 더욱 적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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