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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949 불교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권

by Kay/케이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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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1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제1권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후진삼장(後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욕심을 여의어 3유(有)1)를 뛰어넘으신
최승존(最勝尊)께 먼저 예배드리고
일체지(一切智)와 단 이슬[甘露] 같은 미묘한 법(法)에도
또한 예경하며

아울러 8배(輩)2) 성중(聖衆)으로서
때 없이 깨끗한 스님이신
부나협(富那脇) 비구와
미직(彌織) 등 여러 논사(論師)와

살바(薩婆)ㆍ실바(室婆) 대중과
우왕정도자(牛王正道者) 등
이러한 여러 논사들에게도
저희들 모두 예경하여 따릅니다.

내가 이제 이 장엄론을
차례차례 해설하여 나타내리니,
듣는 이가 만족하여
이로부터 뭇 선(善)이 자라나며

귀의할 만하고 귀의하지 않아야 하며
공경할 만하고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그 가운데 선한 상(相), 악한 상을
마땅히 분별하여 설하리라.

1

설(說)하여 말하겠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건타라국(乾陁羅國)의 어떤 장사꾼이 마돌라국(摩突羅國)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의 복판에 불탑(佛塔)이 하나 있었다. 장사꾼 무리 가운데 한 우바새(優婆塞)3)가 날마다 그 탑에 가서 공경히 예배를 드렸는데, 탑을 향해 가는 길의 여러 바라문(婆羅門)4)들이 이 우바새가 불탑에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모두 함께 비웃었다. 날씨가 매우 무덥던 어느 날 그 바라문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유롭게 밖으로 나와서 혹은 길 가운데 있거나 혹은 문 옆에 서 있으며, 씻는 사람도 있고 향을 바르는 사람도 있으며, 포행[行]을 하거나 앉아[坐] 있기도 했다.
그때 마침 불탑에 예배드리고 돌아오는 우바새를 바라문들이 보고서 불러 자리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저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과 비뉴천(毘紐天) 등에게 극진히 예경할 줄 모르고, 불탑에 예배하여 번뇌가 없기를 구하는가?”그때 우바새가
곧 답하여 말했다.
“내가 세존의 공덕(功德)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에 불탑을 우러러 공경하고 예배할 뿐이오. 그대들의 천신은 어떤 도덕(道德)이 있길래, 나더러 저들에게 예배하라고 하는 것이오?”
여러 바라문들이 이 말을 듣고는 성난 눈초리로 꾸짖었다.
“어리석은 사람아, 너는 어찌하여 우리 천신이 가지고 있는 신덕(神德)도 모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냐?”
바라문들은 곧 게(偈)를 설하여 말하였다.

아수라(阿修羅)의 성곽(城郭)이
높게 세 겹으로 둘러싸여
허공에 걸려 있고
남녀가 그 안에 가득하여도

우리 천신이 활을 한번 당기면
멀리 저 성곽에 명중되어
한 찰나에 모두 소멸되어 버리니
마치 불이 마른 풀을 사르는 듯하네.

이때 우바새가 이 게송을 듣고 나서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 따위의 일은 내가 비루하고 천박하게 여겨서 예경하여 받들지 않는 것이오.”
그리고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목숨[命]이란 풀잎 위의 이슬 같아서
태어나면 사라지기 마련인데,
어찌 지혜로운 이로서
화살로 해를 끼칠 수 있으랴.

그때 여러 바라문들이 이 게송을 듣고 나서, 모두 한소리로 우바새를 꾸짖어 말하였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저 나쁜 일 저지르기 좋아하는 아수라의 큰 세력도 우리 천신의 덕(德)으로 능히 살해할 힘이 있는데, 어째서 지혜롭지 못하다 말하는가?”
그때 우바새가 꾸짖음을 듣고 나서 긴 한숨을 쉬며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선악을 자세히 관찰할 줄 아는
그러한 지혜로운 이라야
선업을 닦아 큰 과보를 얻고
끝내 안락을 받게 되거늘,
어찌 나쁜 허물 저지른 이에게
도리어 공덕(功德)이란 생각을 내는가.

삿된 소견 이미 자라나서
악을 찬탄해 선이라 여기니
이 악업으로 말미암아
큰 고보(苦報)를 받게 되리라.

바라문들이 이 말을 듣고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치켜들어
사납게 소매를 걷으며 화가 나서 싸울 듯이 달려들면서 말하였다.
“이 어리석은 자야말로 불길하기 짝이 없구나. 우리의 천신을 공경하지 않고 그 누구를 공경한단 말인가?”
그때 우바새는 아주 여유 있는 태도로 말하였다.
“나는 비록 혼자이지만 끝까지 도리(道理)로 대할 것이며, 그대들처럼 힘으로 다투어 설하지 않겠다.”
우바새는 다시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이 공양하는 천신은
해를 끼치기 좋아하는 흉악한 자이니,
그대들이 만약 그를 받들어서
공덕 있는 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사자나 호랑이를 공경하고
괴롭히고 죽이기를 일삼는
악귀나 나찰 따위를
섬기는 것과 같음이라.

어리석은 사람이야 두렵기 때문에
그러한 자를 공경할지도 모르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마땅히 깊이 관찰하리라.

만약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공경을 받을 만하고
공덕이 있는 모든 이들은
끝내 해를 끼치는 마음을 갖지 않나니,

모든 악을 저지르는 자는
해를 끼쳐 무너뜨리지 않음이 없으니
공덕과 죄악을
잘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공덕 있는 이에게 나쁜 마음 일으키고
죄가 있는 이에게 공덕상(功德想)을 내며
해를 끼치거나 핍박하는 자를
어리석은 이는 더욱 공경하여 따르며

공덕 있는 훌륭한 이에게는
도리어 멸시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세간이 모두 뒤바뀌어
공경할 만한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라.

건타라에서 태어난 이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알기에,
여래를 믿을 뿐
자재천 따위는 공경하지 않나니.

그때 바라문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바로 이렇게 말하였다.
“쯧쯧, 간다라여. 그렇다면 여래는 어느 종성(種姓) 출신이며, 어떤 도덕(道德)을 지녔기에 부처라 부르는가?”
그때 우바새가 게를 설하여 대답하였다.

석씨(釋氏) 왕족 출신으로
일체지를 구족하사
뭇 허물을 제거하고
모든 선을 널리 갖추시어

그 어떤 중생도
요익(饒益)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시며
모든 법상(法相)을 깨달으시어
일체를 밝게 통달하신

이러한 큰 선인(仙人)이기에
부처님이라 일컫는다네.


그때 바라문들이 다시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그대가 말하는 큰 선인 부처님도
분명 핍박하고 괴롭히는 일을 하리니,
이 염부제(閻浮提)5) 가운데
첨묵감지타(瞻黙監持陁)와

바새바사타(婆塞婆私吒)와
제석아저야(提釋阿坻耶) 등
이러한 여러 큰 선인들이
명칭을 세간에 떨침은

큰 신주(神呪)의 힘으로
모든 국토를 잔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
그대가 말하는 큰 선인 부처님도
분명 이러한 주문을 지어서

큰 위덕의 힘을 지니고
핍박하고 괴롭히는 일을 하리니,
만약 신주를 지어 해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큰 선인이라 할 수 있으랴.

우바새는 그들이 비방하는 말을 차마 들을 수 없어서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쯧쯧, 나쁜 말을 해 가면서
부처님께 신주가 있다고 비방하지 말라.
최승존(最勝尊)을 훼방(毁謗)하는 자는
뒷날 큰 고보(苦報)를 받으리니.

그러자 바라문이 다시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부처로서 주술(呪術)이 없다면
큰 힘을 지닌 이라 이름 할 수 없고
남을 해치거나 괴롭힐 수 없다면
어찌 큰 선인이라 이름하리요.
우리는 다만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비방한다 하는가.

그때에 여러 바라문들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어 말하되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굴복하리라.

그때 우바새가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상하게 여겨 비웃지 말아라. 그대들이 ‘여래는 큰 공덕이 없고, 또한 큰 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망령된 말이니, 여래는 사실 여래로서 큰 공덕과 큰 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주술을 아주 끊고 끝내 해치거나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으시네.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해설하겠으니 자세히 들으시게.”
곧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욕심[貪]과 성냄[瞋]과 어리석음[癡] 때문에
매우 악한 주술을 부리니,
악한 주술 부릴 때마다
악귀들이 그 말 듣고서
모든 죄 지은 중생들에게
괴롭게 하거나 해치는 일을 저지른다.


부처님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고
자비로써 널리 요익케 하시며
악한 주술을 뿌리째 영원히 제거하시고
여러 선한 일만을 행하시나니.

그러므로 불(佛) 세존(世尊)께선
도무지 괴롭게 하거나 해치는 일이 없고
큰 공덕의 힘으로
한량없는 고통에서 구제해 주시거늘
그대들은 이제 무슨 이유로
부처님께 큰 세력이 없다고 하는가.

그때 바라문들이 이 게를 듣고는 성난 마음이 풀리어 우바새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제 묻고 싶은 것이 조금 있으니 화내지 마시오. 우바새여, 부처님께서 만약 나쁜 주술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으며,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또한 이익되게 할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큰 선인이라 하겠는가?”
우바새가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매우 자비로우셔서 끝내 악한 주술로써 중생들을 손감(損減)시키는 일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일도 없으시며, 다만 중생을 요익케 하기 위해 공양을 받으실 뿐이오.”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대비주(大悲主)께선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항상 그 고뇌를 뽑아 주려 하시니
고뇌 받는 모든 이를 보시고는
자신이 받는 것보다 더 괴로워하시거늘
어떻게 일부러 악한 주술을 부려
괴롭히고 해치는 일을 하시리.

중생은 본래 고뇌에 허덕이고
나고 늙고 병들어 죽음에 핍박 당하니
마치 종기[癰]에 뜨거운 재를 붙인 것 같거늘,
어찌 다시 악한 주술을 더하겠는가.
항상 청량한 법(法)으로
모든 불타는 번뇌[熱惱]를 쉬게 하여 주시네.

바라문들이 이 말을 듣고는 곧 머리를 숙여 생각한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이것은 분명 좋은 일이라 우리도 신심을 내고 싶으니, 건타라여 좋은 점[勝處]을 잘 분별해 주시오. 그대가 이미 굳은 신심을 낸 것이 매우 드문[希有] 일이기 때문에 이제 그대를 찬탄하오. ‘건타라’라는 이름을 헛되이 세운 것이 아니리니, ‘건타’라는 말은 가짐[持]을 뜻하는 것인 바, 선을 가지고 악을 버리기 때문에 이러한 명호를 얻었을 것이오.”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이 신심의 바탕을 가진 이를
바로 훌륭한 장부라 이름하나니,
훌륭한 장부 중에도 뛰어난 이가

진실로 이 건타라이네.

그때 우바새는 생각하기를 ‘이 바라문들도 이제 신심을 내려고 하니 모두 그릇[器]을 이룰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제 다시 부처님의 공덕을 분별해서 설해야겠다’ 하고는, 즐거운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부처님을 믿는 것을 보니 내가 매우 즐겁소. 그대들이 이제 조금이나마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공덕과 죄과를 마땅히 관찰하게 될 것이오.”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부처님의 공덕을 관찰하면
한 번만 보아도 다 만족하나니
계율ㆍ선정ㆍ지혜 그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을 이 없기 때문이라.

산 중에는 수미산이 가장 높고
물로는 바다가 제일인 것처럼,
세간(世間)과 천인(天人) 가운데
부처님 따를 이 아무도 없네.

언제나 이 중생들을 위해서
일체의 고(苦)를 갖춰 받으시어
끝내 버려 두는 일 없이
반드시 해탈하게 하시네.

그 누가 부처님께 귀의하고서
이익을 얻지 못한 이가 있으며
그 누가 부처님께 귀의하고서
해탈하지 못한 이가 있으며

그 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서
번뇌를 끊지 못하겠는가.
부처님께서 신통한 힘으로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니

이름이 두루하고 멀리 들리어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고
부처님만이 사자 같은 소리로
모든 행에 나 없음[諸行無我]을 설하시네.

설한 것이 항상 중도[中]에 처하여
양극단[二邊]에 집착하지 않으시니
천상과 인간에게
모두 이러한 말씀하셨건만

잘 분별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업보를 지을 뿐이라.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에
모든 나라에 탑묘(塔廟)를 세우네.

이 세간에 장엄한 것이
허공의 별과 같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부처님이야말로 최승존(最勝尊)이시라.

여러 바라문들이 이 말을 듣고는 신심을 내는 이도 있고, 출가하는 이도 있으며, 도를 얻은 이도 있었다.


2

다음으로 논(論)을 분별하겠다. 이른바 논이란 것은 곧 법(法)이다. 법에 대하여 마땅히 잘 생각해야 하니, 잘 생각한다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교시가(憍尸迦)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는 승가론(僧佉論)ㆍ위세사론(衛世師論)ㆍ야제쇄마론(若提碎摩論)6) 등 이러한 경론을 잘 분별해 알고 있었다. 그 바라문이 살고 있는 곳은 화씨성(華氏城) 안이고, 그 성 밖의 한 마을에 그의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친구 집에 가니 때마침 친구는 볼일이 있어 나가고 없었다.
그때 교시가 바라문이 그 집 종[家人]에게 말하였다.
“너희 집에 경서(經書)가 좀 있거든 친구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동안 읽게 가져 오너라.”
그때 친구의 부인이 곧 책 중에서 우연히 『십이연경(十二緣經)』을 집어 들어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얻어 나무 숲 사이 한적한 곳에 들어가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명(無明)은 행(行)을 반연하고, 지어감은 식(識)을 반연하고, 식은 명색(名色)을 반연하고, 명색은 육입(六入)을 반연하고, 육입은 촉(觸)을 반연하고, 촉은 수(受)를 반연하고, 수는 애(愛)를 반연하고, 애는 취(取)를 반연하고, 취는 유(有)를 반연하고, 유는 태어남[生]을 반연하고, 태어남은 늙음ㆍ병듦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을 반연하나니, 이것을 집제(集諦)라 한다. 그러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고, 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사라지고, 명색이 사라지면 육입이 사라지고, 육입이 사라지면 촉이 사라지고, 촉이 사라지면 수가 사라지고, 수가 사라지면 애가 사라지고, 애가 사라지면 취가 사라지고, 취가 사라지면 유가 사라지고, 유가 사라지면 태어남이 사라지고, 태어남이 사라지면 늙음ㆍ병듦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의 온갖 고(苦)의 쌓임[集聚]이 사라진다”는 구절을 들었다.
처음에 한 번 읽을 때엔 미처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두 번째 읽고는 곧 나 없음[無我]과 저 외도들의 법이 아견(我見)과 변견(邊見)의 두 가지 소견에 집착해 있음을 깨달았고, 일체의 법에 대하여 나고 죽음[生滅]의 덧없음[無常]을 깊이 알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 말하길 ‘일체 외도의 논리는 죄다 생사(生死)의 법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오직 이 경전에만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의 법이 있구나’ 하였다.
환희심이 나서 갑자기 두 손을 쳐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야 비로소 진실한 논리를 얻었구나, 진실한 논리를 얻었어.”그리하여 단정히 앉아 생각하며 그 이치를 깊이 깨달으니, 얼굴에 기쁜 빛이 나타나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았다.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야 비로소 생사에 얽매여 있음을 알았고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깨달았으며, 외도들이 말하는 모든 논설이 생사를 여의지 못한 매우 허황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불법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실다워서 인(因)이 사라지면 곧 과(果)가 사라진다는 인과가 있음을 말하였으나, 외도의 법은 매우 허망(虛妄)해서 과는 있으나 인은 없다고 말하니, 끝내 인과를 깨닫지 못하고 해탈도 알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옛날을 돌아보건대 이상하고 우습기 짝이 없구나. 어떻게 외도의 법 속에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려 하였고, 외도의 법으로부터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구하려 했던가. 이는 마치 항하(恒河) 강물 속에 빠진 사람이 그 몸과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해서 닥치는 대로 휘어잡아도 결국 물에 빠진 그대로 죽고마는 것과 같다. 나도 또한 저 외도를 만나 생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 법 속에서는 도무지 해탈하는 출세간의 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생사의 강물에 빠진 그대로 이 좋은 몸과 목숨을 잃고서 3악도(惡道)에 떨어질 뻔하였다.
이제 이 논을 보고서야 생사를 벗어나는 길에 수순(隨順)하게 되니, 외도의 경론은 어리석고 미치광이 같은 말[語]로 96종(種) 모두가 허망할 뿐이고, 오직 부처님의 도법만이 지극히 참되고 바른 것이다. 6사(師)7)의 무리와 그 밖의 슬기롭다는 자들이 모두 일체지를 갖춘 사람이라 자칭하지만 그 역시 망령된 말이고, 오직 불세존만이 일체지를 구족한 이로서 진실되어 허망하지 않을 뿐이다.”
그때 교시가가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외도들이 하는 일은
허망할 뿐 진실하지 않아,
마치 아이들이 장난으로
흙을 모아 쌓은 성을

사나운 코끼리가 한번 밟아버리면
여지없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외도들을 깨뜨리는 것도
또한 그와 같네.

그때 교시가 바라문은 불법에 대해 깊이 믿고 경외하는 마음을 내어 외도의 법을 버리고 삿된 소견을 제거하고서 밤낮으로 쉼없이 『십이연경』을 읽고 있었다. 그때서야 앞서 찾아갔던 친구가 다른 여러 바라문과 함께 자기 집으로 돌아와 그 부인에게 물었다.
“친구 교시가가 우리집에 왔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소.”
부인이 남편에게 말하였다.
“저 바라문이 지난번에 경서를 빌려 달라기에 내가 무슨 경인지도 모르고 가져다 주었는데, 그가 책을 받아 앞에서부터 보고 뒤로부터도 보고, 손가락을 튀기며 찬탄했는가 하면, 기뻐하는 얼굴빛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남편이 그 말을 듣고는 곧 그곳으로 갔다. 교시가가 단정히 앉아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때 교시가가 게를 설하여 대답하였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3유(有)를 돌아다니는 것이
저 옹기전의 물레가
끝없이 돌고 도는 것과 같으니

나는 12연(緣)과
해탈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 경에 대해 깊이 희유(希有)하다는 생각을 내지만, 나는 석종(釋種)으로부터 이 경을 얻었기 때문에 장차 그 글자를 물로 씻어 버리고 저 『비세사경(毘世師經)』을 베껴 쓰려 하네.”
교시가 바라문이 이 말을 듣고는 친구를 꾸짖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어쩌자고 이 경을 물로 씻어 버리려 하는가. 이러한 묘법은 진금(眞金)으로 베껴 써서 보배함에 담아 갖가지로 공양해야 하네.”
곧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설령 나에게 재보(財寶)가 있어
진금으로 탑을 만들고
칠보로 그 주위를 장식하며
보배 책상이랑 미묘한 책갑[巾帙]이랑

모든 수승 장엄함을 다 갖추어
정성껏 이 경전을 공양하여
비록 이와 같은 불사를 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나의 뜻에 만족하지 않으리.


그 친구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매우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경 안에 무슨 전에 없던 깊고 묘한 것이 있기에 그대가 하필이면 저 『비세사경』을 누르고 이 경을 진금과 갖가지 값진 보물로 공양하려 하는가?”교시가가 이 말을 듣고 나서 못마땅한 얼굴빛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그대는 지금 왜 불경을 이렇게까지 경멸하는가? 저 『비세사론』은 지극히 잘못이 많은데, 어떻게 부처님 말씀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세사론』 따위는 법상(法相)을 모르고 인과(因果)에 착란을 일으켜서 병(甁)의 인과에 대한 가장 천근(淺近)한 법도 분별할 만한 지혜가 없거늘, 하물며 사람의 몸과 몸의 감관[身根]을 이해하고 인과의 의미를 깨달아 알겠는가?”
그 친구가 교시가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이제 『비세사론』이 인과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 『비세사론』 중에 이르기를 ‘깨진 기왓조각이 병(甁)의 인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인과를 모른다고 말하는가?”
교시가가 말하였다.
“『비세사론』에 그런 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도리에 맞지 않으니, 그대가 이제 생각해 보라. 가령 맨 처음에 실[縷]로 인하여 날[經]과 씨[緯]를 삼은 연후에 옷감을 짤 수 있는 것처럼, 병이나 항아리도 또한 그러하네. 먼저 병이 있기 때문에 그런 뒤에 병 조각이 있는 것이니, 만약 먼저 병이 없다면 어떻게 병 조각이 있겠는가. 또한 병 조각은 쓸모가 없지만 병이나 항아리는 쓸모가 있으니, 그러므로 병 조각은 인(因)이 될 수 없는 것이네. 현재 도공[陶師]이 진흙을 가지고 병을 만들지, 병 조각으로 병을 만들지 않는 것을 보시게. 또한 병이 파괴되어야만 병 조각이 있는 것을 보시게. 만약 병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병 조각이 있겠는가?”
친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처럼 이 『비세사론』이 전혀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한갓 헛되이 힘을 써서 스스로 고통을 겪었을 뿐이란 말인가?”
친구와 함께 온 여러 바라문들도 이 말을 듣고서 마음에 근심이 생겨서 말하였다.
“과연 그러하다면
『비세사론』을 오늘부터라도 믿지 말아야 하는가?”
교시가가 말하였다.
“『비세사론』은 비단 지금에 와서 취하여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도 잘 관찰하는 이라면 으레 믿지 않았네. 왜냐 하면 옛날에 부처님의 10력(力)이 이 세간에 출현하지 않았을 때에는 일체 중생이 다 무명에 덮이고 가리어서 소경처럼 눈이 없었기 때문에 『비세사론』 따위를 그래도 광명이라 생각했지만, 부처님의 해[佛日]가 이미 출현하여 지혜의 광명이 널리 비추는 데야, 아무런 이치도 없는 『비세사론』은 당연히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비유하자면 마치 부엉이가 밤이면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힘을 쓰지만 낮에는 구멍에 숨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비세사론』도 이와 같아서 부처님 해가 이미 출현한 이상 저 논은 쓸모가 없다네.”
친구가 다시 말하였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비세사론』은 불경보다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 불경인들 어찌 『승가론(僧佉論)』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교시가가 말하였다.
“『승가경』은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한 것이 논의(論義)의 전부이니, 첫째는 다짐[誓]이요, 둘째는 원인[因]이며, 셋째는 비유[喩]요, 넷째는 같음[等同]이며, 다섯째는 결정(決定)이다. 그대여, 그러나 『승가경』 중에는 무엇 하나 분명하게 비유한 것이 없다네. 봉우(犎牛)8) 따위의 비유도 분명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법상(法相)을 어찌 명료하게 변론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승가경』에서 말하기를 ‘발라타나(鉢羅陁那)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면서도 항상 있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고 또 곳곳마다 갈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승가경』에서 말한 것처럼 발라타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면서도 그 본체가 항상 일체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고 곳곳마다 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많은 과오를 범하는 것이네. 왜냐 하면 3유(有) 가운데 어느 한 법(法)도 다만 물(物)을 생겨나게만 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으니, 그 때문에 과오가 있는 것이네.
다음으로 ‘모든 곳에 두루하고 곳곳마다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에도 과오가 있으니, 왜냐 하면
만약 먼저 두루하다면 어느 곳으로 갈 것이며, 또 갈 곳이 있다면 두루하다는 것이 곧 두루함이 아닌 것이니, 두 이론이 서로 어긋나서 그 뜻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네. 만약 이와 같다면 이는 곧 무상(無常)한 것이요, 그 경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면서 물을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고 곳곳마다 갈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네.”
친구인 바라문이 이 말을 듣고 나서 교시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미 석종(釋種)과 한편[朋黨]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러나 불경 중에도 또한 큰 잘못이 있으니 ‘생사는 근본[本際]이 없다’라고 하고는, 또다시 ‘일체의 법 중에는 모두 나[我]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때 교시가가 친구에게 말하였다.
“내가 불법에는 생사의 근본이 없고 일체에 나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독실히 공경하여 믿는 것이네. 만약 어떤 사람이 나[我]가 있다고 계교한다면 끝내 해탈의 길을 얻을 수 없고, 나가 없음을 안다면 곧 탐욕이 없으리니 탐욕이 없기 때문에 바로 해탈할 수 있는 것이네. 만약 나가 있다고 계교한다면 곧 탐애(貪愛)가 있게 되고, 탐애가 있기 때문에 생사에 헤매게 되니, 어떻게 해탈의 길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만약 생사에 처음[初]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최초의 몸은 선악을 좇아서 이 몸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선악에 관계없이 자연히 태어난 것일까? 만약에 선악을 좇아서 얻은 몸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몸이 있었다고 할 수 없고, 선악에 관계없이 이 몸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 선악의 법은 어떻게 있게 되었을까? 이와 같은 것들을 그대의 법에서라면 ‘절반은 인(因)으로부터 태어나고 절반은 인으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할 것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네. 우리 불법에서는 ‘처음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잘못이 없네.”
그때에 친구가 교시가에게 말하였다.
“묶임[縛]이 있어야 풀림[解]도 있을 텐데, 그대의 말처럼 ‘나가 없다’고 한다면 묶일 것이 없으니, 묶일 것이 없다면 누가 해탈한다는 것인가?”
교시가가 말하였다.
“비록
나가 없다 하여도 묶임과 풀림은 있는 것이네. 왜냐 하면 번뇌에 덮이기 때문에 묶인 바가 되고 만약 번뇌를 끊는다면 해탈을 얻는 것이므로, 비록 나라는 것은 없지만 묶임과 풀림은 있는 것이네.”
여러 바라문들이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나가 없다면 누가 뒷세상[後世]의 몸을 받는 것인가?”
그러자 교시가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잘 들으시오. 전생[過去]에 지은 번뇌의 업을 따라 현재의 몸과 그 몸의 모든 감관[根]을 얻고, 현재에 지은 모든 업을 따라 이 인연으로 미래의 몸과 그 몸의 모든 감관을 얻는 것이오. 내가 이제 비유를 들어 이 이치를 분명히 말하겠소. 예컨대 곡식의 종자가 뭇 인연의 화합으로 싹을 틔우지만 사실은 이 종자가 그대로 있으면서 싹이 튼 것이 아니고 종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싹이 돋아났으니, 종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것[常]이 아니오. 싹이 돋아나기 때문에 아주 없어지는 것[斷]도 아닌 것처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몸을 받는 이치도 그러하여 비록 나라는 것은 없어도 그 업보만은 잃어 버리지 않는 것이오.”
여러 바라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그대가 말한 ‘나가 없다’는 법을 듣고서 우리 마음의 때를 씻어 버렸으나 그래도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어 이제 물어 보려 하오. 만약 ‘나가 없다’고 한다면 먼저 한 일을 어떻게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오?”
교시가가 대답하였다.
“생각[念]과 느낌[覺]이 마음[心]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삼세(三世)9)의 일을 다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네.”
또 물었다.
“만약 ‘나가 없다’고 한다면,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현재의 마음은 생겨나서 나고[生] 사라짐[滅]이 이미 다른데, 어떻게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가?”
교시가가 대답하였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식(識)이 씨앗[種子]이 되어서 모태(母胎)라는 밭에 들어가고, 사랑의 물[愛水]이 적셔 주어서 한 몸의 나무가 자라나 태어나는 것이니, 마치 호도(胡桃) 씨가 유(類)를 따라 생기는 것과 같네. 이 음(陰)이 업(業)을 지어 뒤의 음[後陰]을 얻지만, 그러나 이 앞의 음[前陰]이 뒤의 음을 직접 내는 것은 아니고, 업의 인연 때문에 뒤의 음을 받는 것이니, 나고[生] 없어짐[滅]이 비록 다르지만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것이네. 마치 어린아이가 병이 나서
약을 유모에게 먹이면 아이의 병이 낫는 것은, 유모가 비록 어린아이는 아닐지라도 약의 힘이 아이에게까지 미쳐서 그런 것처럼, 음(陰)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업력(業力)이 있으므로 곧 뒤의 음을 받아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네.”
여러 바라문들이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읽은 경에서는 다만 ‘무아법’만 말했을 뿐인데, 어쩌면 그대는 이제 그 이치까지 깨달아서 환희심을 내는가?”
그때 교시가가 곧 그들을 위해 『십이연경』을 외우면서 말해 주었다.
“무명(無明)은 행(行)을 반연하고, 행은 식(識)을 반연하며, 내지 태어남[生]은 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을 반연하나니,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내지 늙고 죽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다 사라지는 것이네. 이것은 다 뭇 인연을 따를 뿐 아무런 주재(主宰)가 없으니, 곧 그 가운데서 ‘나 없음’을 깨달은 것이지 비단 경의 문장에서 ‘나 없음’을 설한 것만은 아니네. 다시 말하면 몸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고,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감관의 작용이 있어서 인식하기도 하고 분별하기도 하는 것이니, 내가 이러한 일을 통달해 알았기에 곧 ‘나 없음’을 깨달은 것이라네.”
또 물었다.
“만약 그대의 말처럼 나고 죽어 몸을 받음이 서로 계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면 설령 몸에 대한 고집[身見]이 있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대답하였다.
“몸에 대한 고집 때문에 모든 업을 지어서 5취(趣)10) 가운데 선악의 몸을 받으니, 나쁜 형상으로 태어나는 그때에 모든 고뇌를 받는 것이네. 만약 몸에 대한 고집을 끊으면 모든 업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든 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몸을 받지 않으며,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뭇 근심[患]이 아주 없어져 열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떻게 ‘몸에 대한 고집이 허물이 아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만약에 ‘몸에 대한 고집이 허물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나고 죽음도 없어서 3유(有)에서 나고 죽는 고뇌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허물이 있는 것이네.”
그때 바라문들이 12연(緣)의 뜻을 거꾸로[逆], 바로[順] 관찰하고는 깊이 신심을 내어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품고 간략히 불법을 찬탄하여 게를 설하였다.

여래께서 세간에 계실 때
법을 설하여 모든 의론 부수고,
부처님 해가 세간을 비출 때

삿된 무리들 다 숨어 버리네.

우리들 이제 그 남기신 법을 만나
세존 앞에 있는 듯하니
석종(釋種) 중에도 가장 뛰어난 이로서
모든 법상(法相)을 깊이 깨달으셨네.

이른바 여래라 함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니
거꾸로 바로 모든 법을 관하신
그 명성 두루하고도 가득하다.

부처님 열반하신 곳을 향해
공경히 합장 예배하면서
진실로 대비심을 가지신
불ㆍ세존께 찬탄을 올리며

모든 선인 중에 가장 뛰어나사
세간에 다시 짝할 이 없으신
견줄 것 없는 계율ㆍ선정ㆍ지혜 앞에
저희들은 귀의합니다.

교시가가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제 어쩌면 그렇게도 부처님의 공덕을 깊이 깨달았는가?”
친구가 대답하였다.
“우리도 이제 이 법을 들었기에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알았네. 마치 칠흑같이 검으면서 윤기가 반드르르한 침수향(沈水香)을 사르면 깊은 향내가 멀고 가까운 곳에 다 풍기는 것처럼, 우리가 여래의 선정과 지혜와 몸만 보아도 곧 세존께 큰 공덕이 있음을 아는 것이네. 우리가 지금 비록 부처님을 직접 뵙지는 못하였으나 부처님의 성스러운 자취를 본다면 곧 가장 훌륭하신 분임을 알 수 있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꽃못[花池] 가에서 코끼리의 발자국을 보고는 얼마나 큰지를 아는 것과 같네. 비록 부처님을 뵙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인연론을 보고서 부처님의 성스러운 자취와 공덕을 알았네.”
친구가 깊은 믿음과 깨달음을 낸 것을 보고는 일찍이 없던 일이라고 칭찬하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예전부터 외도의 경전을 읽어 외운 것이 매우 많았을 텐데, 이제 불경을 잠깐 동안 듣고서 그 깊은 이치를 깨달아 외도의 경전을 죄다 버린다는 것은 지극히 드믄 일이네.”
게를 설하여 말하였다.

삿된 소견의 논을 제거하고
바르고도 참된 법을 믿고 깨달은
이런 사람 얻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드문 일이라고 칭탄하네.

다만 그대를 칭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외도의 여러 논들도 칭탄하니
그 이치가 비루하고 얕음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모두 떠나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네.

“저 외도들의 논은 다 잘못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싫어서 떠나도록 하고 불경을 믿고 이해하는 마음을 내게 하였으니, 부처님이야말로 견줄 이 없는 대인이시라, 그 명칭이 널리 시방 불찰에 두루하지만 외도의 삿된 논은 앞뒤로 잘못이 있어서 오히려 아첨하는 말 같은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나. 그러나 그 잘못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로 하여금 외도를 버리고 불법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마치 봄여름에는 사람들이 더운 것을 싫어하여 여의고 싶어하다가도 겨울이 되면 다시 생각하는 것처럼, 외도의 여러 논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여름날의 태양처럼 진실로 응당 버리고 여의어야 하지만 이 논으로 말미암아 불법을 믿는 마음을 내게 되었으니 또한 겨울날에 저 태양을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네.”
그때에 친구가 교시가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겠는가?”
교시가가 말하였다.
“이제 일체의 삿된 논을 버리고 불법을 따라 출가하여 도를 배워야 할 것이네. 왜냐 하면 캄캄한 밤중에 큰 횃불을 켜면 일체의 비둘기[鴿鳥]들이 죄다 떨어지는 것처럼, 부처님 지혜의 등불이 이미 세상에 나왔으니 일체의 외도들은 모두 굴러 떨어져야 마땅하네. 그러므로 이제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자 하네.”
이에 교시가는 친구의 집을 나와서 곧 승방(僧坊)11)을 찾아가 출가하길 구하였고, 출가한 뒤에는 아라한(阿羅漢)의 과위를 얻었으니, 무슨 인연으로 이 일을 설한 것인가? 모든 외도들은 항상 삿된 의론에 홀리고 현혹되어 있기 때문에 『십이연경』을 설해서 그들의 주장을 논하여 꺾어 부순 것이다.


3

다음으로 복밭[福田]을 취하는 것이니, 그 덕을 취할 뿐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떤 단월(檀越)12)이 알고 지내던 도인(道人)13)을 승가람(僧伽藍)14)에 보내어 뭇 스님들을 초청하는데 늙은이만을 청하고 젊은이들은 제외하게 하니, 뒤에 그 도인이 뭇 스님들을 청함에 사미(沙彌)의 차례에 이르러서는 시주의 말대로 제외하였다.
사미가 말하였다.
“어째서
우리들 사미는 초청하지 않습니까?”
답하였다.
“시주가 청하지 않은 것이지 내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인은 곧 게를 설하였다.

늙은이는 묵은 덕[宿德]15)이 있으며
흰 머리털과 주름진 얼굴
긴 눈썹에 이빨은 빠지고
굽은 등뼈에 늘어진 팔 다리라.

시주는 그런 이를 좋아할 뿐
젊은이 보는 것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네.

그때 절에 있던 사미들은 모두 나한(羅漢)이었는데, 마치 사람에게 시달린 사자가 온몸을 떨면서 성을 내는 것처럼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시주는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덕 있는 이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늙은이만을 탐하는구나.”
이때 사미들은 곧 게를 설하였다.

흰 머리털에 주름진 얼굴
이빨 빠진 그런 이만을
장로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고도 지혜가 없는 것이다.

복덕 닦음을 귀하게 여기고
뭇 악을 제거해 없애며
깨끗이 범행(梵行)을 닦는 이라야
비로소 장로라 부를 수 있으리.

우리들이야 그 어떤 헐뜯음[毁]이나 기림[譽]에도
더하거나 덜한 마음을 내지 않지만
다만 저 시주로 하여금
죄과를 얻게 하고

또 복밭이신 스님들에 대하여
비방하고 더하고 덜한 마음 내게 하니
우리들은 빨리 가서
저 시주의 선한 마음 일으켜 주어

나쁜 갈래[惡趣]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저 여러 사미들은
이윽고 신통의 힘으로
늙은이 모습을 변화로 지었으니

머리털은 희고 얼굴에는 주름이 졌으며
눈썹은 길고 이빨은 빠지고
굽은 등에 지팡이를 집고
저 시주의 집으로 갔네.

시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마음에 큰 환희심을 내어
향을 사르고 이름난 꽃을 뿌려
빨리 맞이해 자리에 앉히네.

그때에 이르러 잠깐 사이에
도로 사미의 모습을 나타내니,
시주가 이런 변화 보고는
깜짝 놀라고 감탄해서
하늘의 단 이슬을 얻어 마신 듯
얼굴빛이 홀연히 훤하게 변하였네.

그때에 사미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야차(夜叉)16)도 아니고 나찰(羅刹)17)도 아니오. 먼젓번에 시주께서 늙은이만을 선택하여, 복밭이신 스님들에게
높고 낮음이 있다는 생각을 내서 그대의 선근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기에 이런 모습을 변화로 지어 그대로 하여금 뉘우쳐 고치게 하려는 것이오.”
곧 게를 설하였다.

마치 저 모기가
큰 바닷물을 다 마시려는 것처럼,
세간의 그 누구도
스님들의 공덕을 측량할 이 없고

그 밖의 일체 중생도
스님들의 공덕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대가 혼자 몸으로
저 공덕을 측량하려 하는가.

사미가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뭇 스님들의 늙고 젊은 형상을 비교해 헤아리지 말아야 하오. 모름지기 법을 구하는 이는 형상을 볼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지혜를 보아야 할 것이니, 몸은 비록 어리더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거룩한 도(道)를 얻은 이가 있는 반면, 아무리 늙어도 방일(放逸)하면 이를 어리다 하오. 그대가 한 일은 매우 옳지 못하니, 만약에 손톱으로 온 바닷물을 찍어내려고 한다면 그럴 수가 없는 것처럼, 그대의 지혜로 복밭을 측량해서 높고 낮음을 알려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럴 수가 없는 것이오.
그대는 여래께서 ‘왕자와 뱀과 불과 사미 등 이 네 가지는 그 어느 것도 얕볼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오. 또 세존께서 암라과(菴羅果)18)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길 ‘안이 생 것이라도 밖은 익었거나 밖이 생 것이라도 안은 익은 것처럼, 앞사람의 장단점을 헤아려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한 생각 중에 도를 얻을 수도 있노라’라고 하셨으니, 이런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제 그대의 한 일은 매우 큰 잘못이 있소. 그대가 만약 의심이 있거든 지금 다 물을 것이고, 오늘 이후로는 복밭이신 스님들에 대해 다시는 차별된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오.”
곧 게를 설하였다.

스님들의 공덕의 바다는
그 깊고 넓음을 측량할 이 없으니
부처님도 오히려 백 가지 게송으로
기뻐하고 존경하고 칭찬하셨거늘

하물며 나머지 일체의 사람들이
찬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이 광대하고 좋은 복밭엔
적게 심어도 큰 이익을 얻나니.

석가의 화합한 대중들은
이를 일러 세 번째 보배라 하니
이 모든 대중들에 대하여
얼굴만으로 사람을 취하지 말 것이오.

종족(種族)과 위의(威儀)와 말솜씨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안의 덕을 측량할 수 없으니

모습만 보고 받들어 우러름은 옳지 못하네.

보기엔 모습이 비록 어리고 약하여도
총명하고 덕 높은 이가 있는데,
마음 속의 행(行)을 알지 못하고
이내 곧 경멸하는 마음을 일으키네.

비유하면 크고 빽빽한 숲에는
치자나무[薝蔔]가 이란(伊蘭)과 섞여 있고
많은 나무들이 들쭉날쭉하여도
모두 다름없는 숲이라 말하는 것처럼

스님들 중에 비록 장유(長幼)가 있다 하더라도
분별하는 생각은 내지 않아야 하리니.

가섭(迦葉)이 출가하려 할 때
몸에 걸친 좋은 옷은 버리고
광 속의 거친 옷을 입었지만
오히려 그 값어치는 십만 금이었네.

스님들의 복밭이란 것도
역시 그런 일과 같아서
가장 아랫사람을 공양하는 이가
십력(十力)19) 가진 몸의 과보를 얻는다네.

비유하면 마치 저 큰 바닷물이
죽은 송장을 그냥 두지 않는 것처럼
스님들의 바다도 그와 같아서
계율을 깨뜨린 자를 용납하지 않으니,

여러 범부 스님들 중에
최하의 계율이라도 지킨 이를
공경하고 공양하는 자가
큰 과보를 얻을 수 있네.

그러므로 스님들에 대하여
늙은이에게나 젊은이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공양할 뿐
분별하는 마음은 내지 않아야 하리.

그때에 시주가 이 말을 듣고는, 몸의 털이 다 일어날 정도로 놀라서 온몸을 땅에 던져[五體投地] 참회하였다.
“범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많은 허물이 있으니, 저의 참회를 받아 주시고 또한 모든 의혹을 풀어 주십시오.”
곧 게를 설하였다.

그대들은 큰 지혜가 있어
모든 의심의 그물을 끊었으니
내가 만약 자문(諮問)하지 않는다면
지혜 있는 이라 할 수 없으리.

그때에 사미가 곧 답하여 말하였다.
“마음대로 물으시오. 모든 것을 말해 주겠소.”
시주가 물었다.
“대덕(大德)이시여, 부처님과 스님 중에 누구를 공경하고 믿는 것이 더 수승(殊勝)합니까?”
사미가 답했다.
“그대는 삼보(三寶)가 있음을 모르오?”
시주가 말하였다.
“저도 이제 삼보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러나 삼보 중에 어찌 가장 좋은 하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미가 답했다.
“우리는 부처님과 스님에 대하여 더하고 덜함을 따지지 않소.”
곧 게를 설하였다.


대성(大姓)의 바라문인
돌라사(突羅闍)가
그 어떤 비방이나 칭찬에도 다름이 없으신 부처님께
독약 섞은 음식을 보시했으나,

삼계(三界)의 그 누구도 소화시킬 수 없는
그 음식을 여래는 받지 않으시고
그대로 물 속에 던져 두시니,
연기와 불꽃이 동시에 일어났네.

구담미(瞿曇彌)가 옷을 받들어 보시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스님들에게 보시하라고 분부하셨으니
이러한 인연을 보더라도
삼보는 동등하여 다름이 없다네.

그때에 시주가 이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에 부처님과 스님이 동등하여 다름이 없다면, 어째서 음식을 물 속에 던져 두고 스님들에게는 주지 않으셨습니까?”
사미가 답하였다.
“여래께서는 음식에 대해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여러 스님들에게 덕력(德力)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뿐이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이 음식은 삼계 중에 그 누구도 소화시킬 수 있는 이가 없음을 관(觀)하시고 물 속에 던져 두자 곧 그 물에서 불꽃이 일어났기 때문이오. 그러나 구담미가 옷을 받들어 부처님께 드리자, 부처님은 도리어 스님들에게 주셨는데, 스님들이 받고 나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하오. 스님에게 큰 덕이 있고 큰 명칭을 얻었다면, 부처님과 스님은 다름이 없는 것이오.”
그때에 저 시주가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후로는 여러 스님들에 대하여 늙었거나 젊었거나 다 똑같은 마음으로 공경할 뿐 분별심을 내지 않겠습니다.”
사미가 답하였다.
“그대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오래지 않아 진리의 길을 보게 될 것이오.”
곧 게를 설하였다.

많이 듣고 계율을 지키며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3승(乘)에 나아가는 사람은
과위(果位)와 향위(向位)를 얻을 것이네.

마치 신두하(辛頭河)20)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현성들도
모두 승보의 큰 바다로 들어가네.

마치 저 설산(雪山)에
모든 묘약이 갖추어져 있고
또한 가장 좋은 밭에서
종자를 키워 내는 것처럼
슬기롭고 선한 모든 지인(智人)들도
다 승보로부터 나온다네.

이 게를 설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시주여, 그대는 경전에 있는 아니로두(阿尼盧頭)ㆍ난제(難提)ㆍ금비라(黔毘羅) 이 세 족성자(族姓子)를
듣지 못하였는가? 귀신의 대장인 가부(伽扶)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일체 세계의 하늘이건 사람이건 마군이건 범천이건 간에 이 세 족성자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念)하는 이는 모두 이익과 안락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스님 가운데 세 사람만 염하여도 오히려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대중들이겠소.”
곧 게를 설하였다.

세 사람은 승보를 이루지 못하는데도21)
염하면 이익을 얻게 되나니
저 귀신 대장의 말처럼
승보를 이루지 못하는 세 사람을 염하여도
오히려 큰 이익을 얻는데
하물며 승보를 염하는 자임에랴.

그러므로 그대는 마땅히 알라.
공덕과 모든 선한 일은
다 승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마치 큰 용이 비를 내릴 때
바다만이 그 비를 받아들일 수 있듯이
스님들만이 큰 법비[法雨]를 받을 수 있음도
또한 이와 같다네.

그러므로 그대는 응당
전심(專心)으로 뭇 스님들을 염해야 하리니,
이러한 스님들은
바로 모든 선(善)의 무리이며
해탈한 대중이네.

스님들은 마치 용감하고 씩씩한 군사 같아서
마군의 원수를 다 굴복시키니,
이와 같이 뭇 스님들은
수승한 지혜의 총림(叢林)이라네.

일체의 모든 선행이
그 가운데 모여 있으니
삼승의 해탈로 나아가는
더없이 좋은 동무[伴黨]가 되리.

그때에 사미가 게를 설하여 찬탄하고 나니, 시주와 권속들이 모두 환희심을 내어 수다원(須陁洹)22)의 과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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