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장부론(大丈夫論) 하권
대장부론 하권
제바라 지음
도태 한역
김월운 번역
15. 발보리심품(發菩提心品)
보시하는 일이 일체 중생의 친구가 된 사람은 일찍이 잠깐 동안이라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적이 없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대비의 마음은 일체 것을 두루 반연하여 반연하지 않는 것이 없다. 대비의 마음이 두루한 까닭에 나중에 부처가 될 때에 일체종지(一切種知)를 얻기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대비의 마음 때문에 성품의 해탈을 버리고 보리의 마음을 낸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은 부처님만이 그 한계를 헤아려 아신다. 하물며 보리의 행으로 해탈을 얻는 즐거움이겠는가? 최초의 한생각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면 마치 온누리의 흙과 온누리의 금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최초에 보리심을 낼 때에 모든 번뇌를 맑히고 일체 공덕을 일으킨다. 보리는 발심의 결과이니, 일체 중생이 즐거움을 구하게 하기 위해 보살은 이미 보리심을 발했다.
아직 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이 묻되 ‘해탈이란 어떤 것인가?’하는데 왜 묻는가 하면 발심한 이는 해탈에서 오는 것같이 여기기 때문에 묻기를 ‘어떤 것이 해탈의 모습인가. 해탈에게로 갔으므로 해탈에서 왔단 말인가?’ 한다.
이미 원을 세운 사람이 대답하되 ‘보리심을 발할 때에 기뻐하고 상쾌해 하는 것이 해탈과 같다. 그러므로 알 수 있다’ 한다.
부처님들께 공양하려 하거든 보리심을 내어라.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견고한 보리심을 내어라. 보리심을 내는 일밖에는 보리에 이르는 방법이 없다. 만일 보리심이 없다면
부처의 과위를 얻을 수 없고, 부처의 과위를 얻지 못하면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
일체 중생에게 큰 즐거움을 주려거든 보리심을 내어라. 왜냐 하면 보리심은 일체 중생의 즐거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일체 색은 4대(大)를 떠나지 않고, 일체 즐거움은 보리심을 떠나지 않는다. 이상하구나. 어찌하여 생사의 고통은 겁내지 않으면서 두려움 없는 보리심을 두려워하는가?
만일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쉬게 하려면 보리심을 내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첫 지식(止息)의 원인이니 처음 지식의 원인에서 위없는 지식을 얻는다. 재물을 얻는 이익은 공덕을 얻는 이익만 못하고 공덕을 얻는 이익은 지혜를 얻는 이익만 못하고 지혜를 얻는 이익은 보리심을 얻는 이익만 못하다.
만일 방일하고 게을러서 보리심을 생각지 않는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가? 분명히 알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곧 큰 보리심이다. 부처의 지혜로 향해 나아가려면 보리심을 일으켜라.
번뇌의 결박에 가려진 이는 해탈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업보에 끄달린 이는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어떤 것이 삿된 길이며,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 애욕에 끄달려서 네 가지 공(空)으로서 해탈이라 여기면 삿된 길이라 하고, 보리심을 일으켜 8정도(正道)를 행하면 바른 길이라 한다.
부귀의 과보를 받고자 하거든 보시를 행하고, 즐거운 과보를 받고자하거든 대비심을 행하고 중생을 구제하여 안락하게 하려거든 굳게 보리심을 일으켜라.
복을 지으려는데 세 가지 얻기 어려운 일이 있으니, 첫째는 착한 벗을 가까이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자비심을 멀리 여의지 않는 일이요, 셋째는 부처의 지혜를 공경하고 숭상하는 일이다.
아직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이는 보리심을 일으켜라.
만일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다.
16. 공덕승품(功德勝品)
사람들은 재물을 가지고 동일한 복전(福田)에다 보시를 하여도 마음이 같지 않아서 과보를 받는 데는 갖가지 차별이 있으니, 3계의 즐거움을 얻는 이도 있고, 적멸의 즐거움을 얻는 이도 있고,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을 얻는 이도 있다.
생각과 원이 훌륭하고 과보를 받는 것이 같지 않으니, 애욕의 마음으로 복을 짓는 이는 과보를 받을 때에 어리석고, 자비심으로 복을 짓는 이는 과보를 받을 때에 지혜롭고, 보리심을 무너뜨리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복을 짓는 이는 복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하다. 그 밖에 닦는 복은 비슷한 복이라 하여 제1의 복이 되지 못한다. 한 맛[味]의 지혜를 닦는 것은 가장 제1의 복이라 할 수 있다.
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3보의 종자는 끊이지 않는다. 업을 알고 과보를 알고, 부처님의 자비에 귀의할 줄 알고, 내가 복 짓는 행이 악을 행하는 것같이 매우 부끄러운 것임을 헤아려 알라.
착한 대장부는 인간과 하늘의 세간에 아무도 구제할 이가 없는 것을 보고는 자기만을 위해서 복을 닦지 못하나니, 생사의 고통은 차마 듣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눈으로 보겠는가? 중생이 몸을 받는 것은 지극히 싫어할 만한데 어찌 나를 위해 복을 짓고, 업을 쌓겠는가? 자비심이 있는 이는 차마 못할 일이다.
찰나 사이에도 자비심을 여의지 않고 중생의 친한 벗이 되어야 하거늘 어찌 나를 위해 복을 짓겠는가? 공덕의 맛을 아는 이라면 자유로이 복을 지어서 남에게 은혜 갚는 훌륭한 맛을 얻으리라. 꿈속에서라도 자기를 위해 복을 짓지 않거늘 하물며 깨었을 때이랴. 지혜로서 허물됨을 보고 끝내 유위의 법을 구하기 위해서 복을 짓지 않는다.
자비심이 있는 이는 끝내 해탈을 위해 복을 짓지 않는다. 지혜로운 이는 유위의 법을 구하는 업을 버리고, 자비심이 있는 이는 해탈의 업을 버린다. 무슨 까닭인가? 자비심이 있는 이는 남을 이롭게 하려는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지혜로서
평등하게 복을 지으면 원인의 복과 결과의 복에서 같을 이가 없나니, 10력(力)의 지혜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을 버리는 이를 은혜를 저버린 자라 한다. 오직 나만이 아나니, 부처님을 따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은 내가 복 짓는 일의 동무이니, 설사 으레 받을 과보이지만 혼자만 누리면 은혜를 저버린 자라 한다. 지극히 얻기 어려운 즐거움을 어찌 혼자서 누릴 수 있으랴. 이런 사람은 모든 대중에게 버림을 받고 설사 천 열반의 즐거움을 얻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것만 못하나니 천 열반보다 더 수승하다. 해탈의 즐거움까지도 혼자 받을 수 없나니, 무슨 까닭인가? 세간 중생들이 귀의할 곳 없고 구제할 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해탈의 즐거움도 누리지 않거늘 하물며 위없는 보리이겠는가?
17. 승해탈품(勝解脫品)
다시 이 밖에 삼매와 정혜(定慧)의 경계가 있어 중생들 모두가 부처가 되게 한다. 이 삼매가 있으므로 해탈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두타(頭陀:수행자)는 일체 허물을 제거하여 적멸이 입안에 있는 것 같다. 참된 구제자(救濟者)는 중생의 괴로움 때문에 적멸을 증득하지 않을 뿐이다.
선정과 지혜에서 자비가 생겨
세간 중생의 고통을 본다.
세간의 참된 구제자는
끝내 해탈하지 않는다.
바다의 조수가 한도를 넘지 않는 것같이, 자비를 닦는 이는 백 겁을 고행하여 만약 한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면 끝내 생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의 힘이 능히 해탈을 얻을 수 있지만 중생 때문에 생사에 머물러 있다.
세 가지 보시에 대하여 항상 명절 때와 같이 좋아하고 자기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고 남을 위해 즐겁게 하며 밤낮으로 생사 속에 머물지 않아 기쁘고 상쾌함이 열반과 같다.
보살은 항상 중생을 위해 이익 되는 업을 지어
기뻐하고 좋아하는 자미가 있다. 보살은 꿈속에서도 기뻐하는 즐거움을 얻는데 해탈보다 뛰어나다.
보살은 남을 기쁘게 하는 자미를 얻었는데 중생들은 그 자미를 얻지 못해서 해탈의 길을 택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해탈을 얻어 남을 기쁘게 하는 즐거움과 자미를 알면 반드시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생사를 두려워해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해탈을 구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것은, 보살이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몸을 받아 태어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니,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 하나만이 괴로움을 받는다면 열반에 들겠지만 일체중생이 모두 괴로움에 시달리거늘 어찌 중생을 버리고 열반에 들겠는가. 자기의 괴로움을 본다면 열반에 들겠지만 자비한 이가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모두가 마음에 걸리거늘 어떻게 중생을 버리고 열반에 들겠는가? 만일 남을 즐겁게 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이 곧 열반이거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생사이다.
중생들에게 평등한 자비를 가지고 남을 즐겁게 함으로써 기뻐하는 것은 곧 열반이니, 부처님께 칭찬을 받고 만일 해탈을 얻어 한 사람을 이롭게 하였을 때의 기쁨같이 하면 지혜로운 이에게 사랑을 받는다. 만일 남에게 중대한 즐거움을 주고도 공을 따지지 않으면 그것은 곧 해탈이다.
자비한 이는 남을 즐겁게 하고도 과보를 바라지 않나니, 이와 같이 한다면 곧 해탈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곧 생사이다. 자기를 위해서 즐거움을 구하면 괴로움이요, 자기의 즐거움을 버리고 남을 위해 즐거움을 구하면 열반이다. 세간의 중생들은 괴로움을 무찌르는 것으로 해탈이라 하지만 자비를 닦는 이는 남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으로써 가장 훌륭한 해탈로 여긴다. 남의 괴로움을 없애 주면 양쪽이 모두 쾌락을 얻는데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두 가지 해탈에서 한 해탈만을 취하겠는가?
세간 사람들이 말하되 “지혜 있는 이는 해탈을 얻는다” 하는데 보살은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남을 구제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해탈을 취하겠는가? 자기도 즐거움을 얻고 남을 위해서도 즐겁게 한다. 3계 안에서 가장 훌륭한 즐거움은 해탈의 즐거움이다’라고 한다.
보살이 중생을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은 남이 자신을 위해서 해탈을 얻는 즐거움보다 더 훌륭하다.
18. 요익타품(饒益他品)
세간의 중생은 자기의 쾌락을 위해 생사 속에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보살은 마음을 푹 쉬고, 자비한 마음으로 남을 이롭게 한다.
생사 속에서는 물리치는 법[對治法]을 제하고는 다른 즐거움이 없지만,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제하고는 딴 즐거움이 없다.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을 얻고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임을 좋아한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즐거움이 곧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임을 알고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이 곧 자기를 이롭게 하는 즐거움임을 아나니, 남을 이롭고 즐겁게 할 때가 곧 자기의 즐거움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즐거움을 보면 괴로워하고 중간 사람은 자기가 괴로울 때 괴로움을 느끼고, 상등 사람은 남의 즐거움을 볼 때에 자기도 기뻐하고 남의 괴로움을 볼 때에 자기도 괴로워한다.
보살의 네 가지 거두는 법[四攝法]에는 남과 이익을 함께하는 법[同利]이 있다. 무엇이 이익을 함께하는 것인가? 남이 괴로울 때 괴로워하고 남이 즐거울 때 즐거워한다. 이것이 이익을 함께하는 법이니, 자비한 마음이 평등하여 남이란 생각이 없다.
보살은 중생과 같이 괴로워하고 중생과 같이 즐거워하는데, 특히 자기 혼자서 걱정을 한다. 왜냐 하면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도 보지 않고, 미래도 보지 않고, 오직 중생의 뜻에 따라 괴로움을 멸하는 일을 할 뿐이다.
보살은 자기의 뜻이지만 남의 뜻과 같이 여긴다. 세간의 중생은
남에게 이익을 주고는 과보 받기를 바라거니와 보살은 남에게 이익을 주어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
보살은 비록 자비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나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에게 더욱 이익을 주고, 그들에게 이익을 줄 때에 속으로 기뻐한다. 몸과 목숨을 버릴 때에 기뻐하는 것은 평등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평등하지 못함이라 한다. 미운 이에게 배(倍)나 이익을 주는 것은 소문난 자비의 마음이라야 할 수 있다.
보살은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자비한 마음을 낸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중생에게 배나 가엾은 생각을 내나니, 비유컨대 큰 부자에게 외아들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치는 것같이, 보살이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것도 이와 같다.
나쁜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자기보다 좋은 것 가지는 것을 싫어하면 이는 은혜를 등진 사람이라 한다. 일체 미운 중생은 보살에게 대하여 똑같이 악하고, 보살은 미운 중생에게 똑같이 자비롭다. 세간 중생들은 은혜에 보답하는 이를 만나면 기뻐하는데 보살이 미워하는 중생에게 이익을 주면 그 즐거움은 이보다 배나 더하다.
세간 중생들은 남을 꾸짖었을 때 남이 보복하지 않으면 몹시 기뻐하는데 보살은 남의 꾸지람을 들을 때에 몹시 기뻐한다. 애착의 마음이 있는 이가 3계 안에 널리 두루 하듯이 보살의 자비한 마음도 3계에 두루 한다.
중생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한량없는 큰 고통에 얽매이고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을 위해 한량없는 큰 고통에 얽매인다.
일체 중생은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하나니, 모두가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으려 하며 남에게 이로움과 즐거움을 주려는 것을 훌륭하게 여긴다.
유위의 이익이 자기에게로 향하는 것이 슬픔의 원인이기도 하고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거니와 이익이 남을 향하면, 보는 즉시 슬픔과 기쁨을 일으키나니, 스스로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슬픔을 내는 까닭이요,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면 기쁨을 내는 까닭이다.
네 가지 한량없음[四無量]이란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다.
네 가지 한량없음을 닦는 이는 능히 세간 법과 세간 밖의 법과 함께하는데 세간 법과 세간 밖의 법과 네 가지 한량없음은 모두 한 경계이다. 무슨 까닭인가? 똑같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똑같이 동일한 위없는 보리의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자비한 이는 능히 남을 이롭게 하고 지혜로운 이는 능히 버리나니, 희유(稀有)하다는 마음도 내지 말고 높고 낮다는 마음도 내지 말라.
19. 승시타고품(勝施他苦品)
보살은 남이 괴로워함을 볼 때가 가장 괴롭고 남이 즐거워함을 볼 때가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남을 이롭게 한다. 어리석은 중생은 남의 괴로움을 볼 때에 자기는 즐겁다 하고 남의 괴로움을 보면서도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고 남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기의 고생으로 여기지 않으나, 어리석은 중생은 자기의 적은 즐거움을 위해 남을 크게 괴롭힌다.
현명한 사람은 남에게 적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자기는 큰 고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는 이는 조그마한 즐거움의 인연을 짓고 큰 즐거움을 얻을 때에 기뻐하기는 하지만 보살이 조그만 즐거움으로 남을 이롭게 했을 때에 기쁜 마음에는 미치지 못하나니, 그보다 훨씬 지난다.
보살은 남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 몸으로 대신해 주나니 몸은 비록 고통을 받으나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이 쾌락해서 몹시 기뻐한다.
보살의 자비한 마음은 자재한 즐거움을 얻어서 3계의 모든 괴로움의 핍박을 받지 않나니, 보살은 자비의 감로(甘露)를 마셨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의 핍박을 받지 않는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남을 대신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볼 때에 좋아하고 남이 즐거워하는 것을 볼 때에 괴로워하지만 보살은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괴로워하고, 남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즐거워한다. 자비심이 있는 이는 남이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면 여름 햇빛같이 뜨겁거니와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를 막론하고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볼 때엔 모두가 싫어하여 여읠 생각을 내고 근심과 걱정을 해야 한다.
자비심이 있는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깊이 내어 결정적인 생각을 하되 ‘일체 중생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 한다. 보살은 다시 생각하되 ‘일체 중생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 한다. 보살은 다시 생각하되 ‘만일 큰 정진을 하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 큰 고통을 깨뜨리랴’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과 이익을 같이 하고, 고락을 모두 같이 하나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애써야 보리를 이룬다.
보살은 생각하되 ‘네가 보리를 얻은 뒤엔 일체 중생에게 주고, 다시 생사의 가운데로 돌아가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보리에 이르면 다시 버려 중생에게 주리라’ 한다. 그러나 얻을 바는 없다.
보살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四攝法]을 행하되 끝내 피로해 하지 않나니, 마치 땅덩이가 일체 물건을 바치고 있으나 끝내 피로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의 몸을 위하는 이는 스스로의 즐거움을 받을지라도 피로한 생각을 내거니와 보살은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피로한 생각을 내지 않는다. 보살이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아비지옥의 고통을 당할지라도 열반의 즐거움같이 여기는데 그 밖에 딴 고통을 어찌 피로해 하겠는가? 만일 한 중생이 즐거움을 받게 하기 위해 자기가 끝없는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라도 항상 용맹한 생각을 내어 그들을 즐겁게 하되 피로한 생각을 내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남을 위해 즐거움을 주기에 피로한 생각을 내지 않는가? 보살은 일체 중생을 보되 남이란 생각을 내지 않고, 도무지 자기와 같이 여긴다. 중생은 번뇌에 집착되었으므로 어디서나
남을 해치고자 하고, 자비심으로 유지되는 이는 온갖 고통을 몽땅 대신 받고자 한다.
보살은 남의 핍박당하는 고통을 대신 받되 괴로운 이가 해탈의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같이 한다. 보살은 남을 대신해서 핍박당하는 고통을 받기를 좋아할 때에 대비의 마음이 맑아진다. 지혜로써 남이 고통 받는 것을 볼 때에 자비한 마음이 그 속에 있다. 자비한 마음이 머무는 곳에 괴로움이 머무를 수 없다.
또 자비한 이는 일체 중생을 위해 괴로움에 얽히나 이와 같이 남을 위해 이익과 즐거움을 줄 때에 기뻐함은 해탈의 즐거움보다 더하다. 보살은 남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 자기의 고통과 같이 여기고 자기가 즐거움을 얻은 뒤엔 남에게 주고자 하여 열반보다 수승한 것으로 느낀다.
자비한 이는 항상 자기는 고통을 받고 남에게는 즐거움을 주고자 하나니, 자비와 괴로움은 잠시도 함께 머무르지 못한다.
나쁜 짓을 하는 이는 남이 괴로워함을 볼 때에 멀리 피하려 하고 남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면 좋아하지 않지만 보살은 남이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볼 때에 멀리 피하려 하지 않는다.
애착이 없는 이에게는 일체 괴로운 업이 없나니, 무슨 까닭인가? 남의 고통을 제해 주고 큰 기쁨이 생기기 때문이다. 보살은 남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을지라도 반드시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남이 다른 이에게 조그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보면 몹시 기뻐한다. 무슨 까닭인가? 성품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보살은 남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자기도 즐거워하는데 남이 다른 이에게 조금의 즐거움을 줄 때인들 어찌 기뻐하지 않으랴.
20. 애비품(愛悲品)
어떤 사람이 몸과 마음이 항상 심한 고통에 얽매였음을 알지 못하면 다른 이의 마음 속의 고통을 알 수 없다. 자비가 없는 이는 못할 짓이 없다. 다른 이가 쇠퇴하고 불행한 것을 보아도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면, 이런 이는 지극히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 한다. 만일 중대한 은혜를 입었더라도 언제 기억해 보겠는가?
죽음에 당한 이는
비록 좋은 약이 있으나 지극한 고통으로 여기나니, 지극히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요, 복덕이 없는 이는 자비의 좋은 약을 만나더라도 지극히 괴롭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은 큰 부자이면서도 자기 혼자 먹고 남에게 주지 않으면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같이 지혜와 지식이 있으나 자비가 없으면 역시 남에게 비난을 받는다.
괴로워하는 중생을 보고서도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기 어려우면 공덕의 그릇이 아니니, 마치 깨진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는 것 같다. 자비심이 있는 이는 괴로워하는 중생을 보면 비록 구제하지는 못하나 ‘괴롭구나. 중생이여’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생들이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때문에 병들어서 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고통이 항상, 뭇 고통을 몰고 핍박하는 것을 보면 탄식하되, ‘괴이하구나. 중생이 이 큰 고통에 빠졌구나. 세간 중생은 몸도 괴롭고 마음도 괴롭고 항상 번뇌의 업 때문에 파괴되니 아, 괴이하구나’ 한다.
세간 중생을 핍박하는 고통에 대해 어떤 보살이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내지 않겠는가? 몸이 급한 물결에 휩쓸리듯 생사에 빠져서 무궁한 세월을 보낸다. 두려운 큰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은 항상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에 시달리고, 변천의 괴로움[行苦]에 시달리고, 무너지는 괴로움[壞苦]에 시달린다. 한 가지 괴로움만 보아도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내기에 족하거늘 하물며 세 가지 고통이 구족함에서이랴.
어리석은 중생은 항상 백ㆍ천 가지 괴로운 고통을 받나니 한 가지 괴로움을 보아도 가엾이 여기는 생각을 내야 되거늘 하물며 백ㆍ천 가지 고통들이겠는가?
분명히 알라. 세간의 온갖 고통에서 낱낱 고통에 대하여 아직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지 않은 이는 당장에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고, 이미 낸 이는 더욱 자라게 해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한량없는 고통에 대해서이랴.
세간의 갖가지 고통에 관한 말을 들으면 돌이라도 부드러워질 것이거늘 하물며 마음 있는 이가
가엾다는 생각을 내지 않겠는가? 세간의 슬피 우는 소리를 들으면 죽은 나무라도 꽃이 필 것이거늘 하물며 마음 있는 이가 가엾다는 생각을 내지 않겠는가.
세간의 괴로움은 한 맛인데 마음이 부드러운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기 쉽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 이는 보리를 얻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
21. 각오녕장부품(覺悟儜丈夫品)
자비한 마음은 지극히 풍부하여
남을 이롭게 하고는 기뻐하거니와
자비한 마음이 빈궁한 사람은
이 즐거움을 바라지 못한다.
어리석은 이가 애욕에 자재하면
자비한 마음은 사라져 가나니
자비한 마음이 사라진 뒤엔
뭇 고통이 모두 모여 온다.
애욕에 자재한 이는 생사 속에서 괴로움을 나누어 남에게 주려 하여 생사와 함께 소용돌이친다. 자비한 마음이 있는 이는 세간 중생에게 적멸의 즐거움을 나누어 그와 함께 간다. 애욕의 마음이 있는 이는 3계를 좋아하고 애욕의 허물을 아는 이는 열반을 좋아하고 남을 이롭게 하려는 이는 자비한 마음을 좋아한다.
애욕에 자재한 이는 항상 세간을 좋아하나니, 몸을 받는 것이 자기의 즐거움만을 위하기 때문이요, 자비에 자재한 이는 항상 몸을 받아 태어나기를 좋아하나니,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애욕에 자재한 이는 항상 자기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으로써 자기를 결박하고 자비한 마음을 가진 이는 항상 남을 이롭게 하려는 것으로 자기를 속박한다. 애욕에 자재한 이는 항상 자기의 즐거움을 좋아하기에 피로함이 없고 자비한 마음이 있는 이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피로함이 없다. 어리석어서 작은 것을 사랑하는 이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남도 사랑하지 않거니와 보살은 자기까지도 사랑한다. 어리석은 중생은 항상 나를 위한다 하나 사실은 남을 위하는 것이다.
22. 대장부품(大丈夫品)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오직 한 가지 일에 쫓기나니 항상 남을 위하는 일의 괴로움이 닦쳐 와서 핍박할 뿐이요, 다른 일이 없다. 이것이 자비의 덩어리를 성취한 것이라 한다.
열반 버리기를 괴로움 버리듯 하고, 유위의 몸 받기를
해탈 받듯 하여, 세간에 이익을 주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라 한다. 열반의 공덕과 생사의 허물을 알았지만 유위의 법을 버리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가 대비의 공덕이다.
어디서나 애욕을 여의고, 열반으로써 본체를 삼았으되 열반을 취하지 않으면 용맹하고 건장한 이라 한다.
대비의 인연 때문에 능히 생사 속에 들어가서 두루두루 왕래하며, 유위의 법은 모두가 멸하는 것으로 관찰하고 중생은 괴로운 것임을 알아서 구호자가 되고 의지할 곳이 되어 준다. 마음에 대비를 지녀, 자기의 몸을 싫어하고 열 가지 힘[十力]을 갖춘 몸을 구하며, 대비가 머무르는 곳에 머무르고 공덕에 머무르지 않는다.
전륜왕에게 천 명의 아들이 있지만 좋은 상호를 갖춘 아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같이 부처님도 일체 중생 가운데서 자비한 마음이 있는 이를 사랑한다.
오직 복만을 짓고 지혜도 자비도 없는 이를 장부라 하고, 복도 있고 지혜도 있는 이를 좋은 장부라 하고, 복과 지혜를 닦고, 자비도 닦으면 대장부이니, 자비한 이를 지켜보아서 자비가 있는 이거든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자비한 이에게 경례하면 일체 공덕을 갖춘다.
23. 설비품(說悲品)
세간의 인간ㆍ하늘ㆍ아수라 들은 몸을 받되 갖가지 괴로움이 있거니와, 보살로써 자비가 골수에 사무친 자는 온갖 착한 법에서 자비가 으뜸이 되는 줄 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알라. 마치 온갖 글자가 실담(悉曇:범어의 자모)으로써 바탕을 삼는 것과 같다.
온갖 착한 법이 모두가 대비(大悲)속에 들어가니, 마치 한 채의 집에 여러 물질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만일 허공이 맑은 것을 보면 대비의 맑음을 보고 허공이 끝없음을 보거든 대비도 끝없음을 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장에 나를 보려거든 대비(大悲)를 공경하고, 나를 보려거든 3계가 모두 고통을 받고 있음을 관찰하라’ 괴로움이 끝없는 까닭에 대비도 끝없고
괴로움이 머무는 까닭에 대비도 머무른다.
‘대비가 머무른다’ 하니, 대비가 어디에 머무르는가? 일체 중생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 따위 갖가지 괴로움 덩어리와 권속(眷屬)들 사이에 머무른다.
대비의 마음이 있는 이는 남의 고통을 아나니, 이것이 부처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세 가지 보시가 있어 일체 공덕으로 몸을 기르나니, 마치 유모와 같다. 이것이 대비이다.
24. 시비정품(施悲淨品)
설산에서 온갖 약(藥)이 나는 것같이, 대비의 설산에서 세 가지 보시가 나온다. 온갖 공덕에서 대비를 제하고는 어떤 법도 세간을 위해 약이 되어 주지 못한다. 보시는 자비의 본체(本體)로서 세간을 위해 갖가지 즐거움이 되어 준다.
위없는 과보는 세 가지 보시로 이뤄진 결과이고, 대비는 세 가지 보시의 원인이다. 중생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낳아 주시고, 여래는 일체 중생의 위없고 가장 훌륭한 귀의할 곳이니, 뉘라서 공경하지 않으랴. 능히 세 가지 보시를 할 마음을 내면 이것이 대비이다.
보살의 대비는 공덕이 가장 많아서 마음 속에 머무는 데 오직 한 가지 만이 멀리 여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나니, 항상 남을 이롭게 하기에 피로함이 없는 일이다.
세간이나 세간 밖의 즐거움과 남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이 모두가 대비에서 나오나니, 그러기에 내 이제 대비로써 세간을 이롭게 하는 대비한 이를 공경한다.
나는 갖가지 공덕도 공경한다. 진실로 전부터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공덕이 가장 훌륭하니 남을 이롭게 하는 일과 자기를 맑게 하는 자비이다. 대비는 보시를 맑게 하나니, 그러기에 내 이제 보시로써 대비를 장엄하는 이를 공경한다.
나는 또한 모든 유정을 가엾이 여기는데 있어서 대비의 뜻을 같이 하는 이를 공경하며, 또한 대비로 마음의 본체를 맑히고 보시로 업의 길도 맑히는 자를 공경한다. 마음의 본체를 맑히거나
업의 길을 맑히는 것은 곧 열반의 길을 맑히는 것이며 위없는 보리의 길을 맑히는 것이다.
대비는 보시를 맑게 하나니, 대비가 없는 이는 보시를 더럽힌다.
보시가 대비를 맑히고 대비가 보시를 맑히면 이것이 세간의 단정이라 한다.
대비는 믿음과 공경을 내나니, 마치 땅덩이가 여러 꽃에 싸여 장엄된 것 같이 대비도 그렇다. 세간 중생은 번뇌의 햇살에 쪼들리는데 대비의 마음을 얻은 이는 모두가 서늘한 즐거움을 얻으니, 마치 무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바람을 만나면 모두 그치는 것과 같다.
25. 애비승품(愛悲勝品)
보시는 취함[取]을 인연으로 하고, 취함은 애욕[愛]을 인연으로 한다. 애욕이 있으면 취함이 있고, 애욕이 없으면 취함이 없다.
대비가 있으면 반드시 버림(보시)이 있고, 대비가 없으면 버림도 없다. 애욕 때문에 취함이 늘고, 버리기 때문에 대비가 는다. 사랑스럽고 은혜로운 이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잘못이요. 원망스러운 이에게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더하라. 애정이 늘어나서 자기가 즐거우면 남을 해치게 되고 대비가 늘어서 남에게 즐거움을 주면 자기는 괴롭다.
애욕이 늘어서 남을 해치는 이는 드물지 않고, 대비한 마음을 가진 이가 자기의 몸과 목숨을 버려 남에게 주는 것은 드【문】일이다.
애착이 있는 이는 어리석고 천한 사람이라 하여 항상 빈궁에 빠져 온갖 고통을 받거니와 자비의 공덕이 있는 이는 항상 부귀를 누린다. 탐욕과 애착이 있는 이가 끊을 수가 있겠는가. 만족함을 알아 그칠 때에 지혜를 얻으면 끊어지고 만족함을 알게 된다.
자비한 마음을 얻은 이는 그칠 줄을 모르나니, 항상 남에게 보시하기 때문이다. 애착의 마음이 있는 이는 온갖 괴로움을 불러모아 큰 괴로움 덩어리를 이루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 이는 온갖 공덕을 낸다.
자비스러우면서도 더러운 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자비스러워도 남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도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자비스러워도 보리를 구하려 하지 않는 것도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애착의 마음은 온갖 고통을 내고, 자비의 마음은 온갖 즐거움을 낸다. 자비에 의해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면 수승한 업이다 하나니, 자비로운 마음이 있는 이는 일체 중생에게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26. 지비해탈품(智悲解脫品)
지혜와 자비 두 가지에서 어느 것이 수승한가? 지혜로운 이는 자기만이 귀의하고, 자비한 이는 남까지도 위없는 도에 귀의하게 한다.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지혜로운 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어도 역시 지혜로운 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나니, 능히 위없는 도를 장애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마음과 상응하지 않아 능히 위없는 도를 장애하는 지혜를 보살은 지혜 없는 사람이라 한다.
잠깐 사이에라도 생사를 좋아하지는 않으나 자비는 해탈을 희망하지 않게 한다. 해탈의 맛은 감로(甘露)와 같은데 자비한 이는 맛이 없다고 여긴다. 마치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간이 맞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이 해탈이 아무리 감미로우나 자비의 마음이 없으면 보살은 맛이 없다고 여긴다.
만일 대비한 이가 해탈과 별해탈(別解脫:계율)과 함께한다면 모두가 경례하여야 하나니, 대비가 부처님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해탈이란 영원히 남음이 없고 온갖 일이 모두 멸하는 것이요, 자비한 마음이란 좋은 주문(呪文)이 죽은 이에게 주력을 주어 깨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 몸을 받으면 이는 항상함[常]의 허물이요, 만일 해탈을 취하면 아주 없어짐[斷]의 허물이요, 이 두 가지 허물을 여의면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만일 부처가 없다면 해탈이 없고, 자비가 없으면 부처도 있을 수 없다. 자비는 능히 해탈을 내나니, 이 까닭에 보살은 자비를 취한다. 자비의 본체는 하나이나 두 가지 일을 하나니, 하나는 중생을 구제하고 또 하나는 부처가 될 종자 지혜를 내는 것이다.
27. 발원품(發願品)
보살은 생각하되 ‘일체 중생은 모두가 한량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일체 종자 지혜를 이루고, 일체 중생의 한량없는 공통한 괴로움을 없애 주리라’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이 한량없고 끝없는 생사의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평등한 자비심을 일으키고, 어리석고 무지해서 해탈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놓아주려는 마음[放捨心]을 내게 하고 ‘세간의 큰 괴로움 덩어리는 나로 하여금 훌륭한 자비심을 내게 하는구나’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내가 자비심을 가지고 괴로운 중생을 관찰하건대 아직 보리의 도를 얻지 못했으니 내가 어찌 하여야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의 도를 얻게 하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일체 세간에서 내가 가장 복이 적다. 나는 이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겠구나’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3계의 중생에게 큰 친구가 되어 주리라. 그러나 그들은 항상 몸과 마음의 고통에 쪼들리고 있으니 나는 지금 헛되이 악하게 산 사람이라 불리워야 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태어난 이래 아직도 세간의 고통을 깨뜨려 주지 못했고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런 몸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일체 중생의 친한 벗이니, 원수를 잘 양육해서 큰 이익을 주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일체 중생은 모두가 나에게 단정한 업을 짓게 해 주었으니 한 중생이라도 단정하지 못한 마음을 짓지 않게 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되 ‘남을 이롭게 한다고 말하지만, 남이라는 모습을 찾아도 전혀 얻을 수 없고 자기와 꼭 같을 뿐이니, 무엇이 남을 위하는 것이겠는가?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서원을 세우나니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의 고통이 일시에 내게로 몰려와 항상 그들을 위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되 고통으로 여기지 않으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보리도(菩提道)에 머물러서 온갖 고통을 내가 모두 감당하리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중생이 생사의 고통바다에 빠졌는데 내가 구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비록 무거운 번뇌가 있어서 보리의 도를 얻기 어렵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비와 지혜, 두 가지만 있으면 마음은 끝내 피로하지 않으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선서(善逝:부처님)께서 행하신 도를 나는 지금 알맞게 따라 가리라. 나는 지금 세간에서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에게 베풀면서 생각하기를 나도 저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리라.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지금 세간 중생들의 의지가 되었으니, 큰 서원을 세워야겠다. 원컨대 큰 장엄의 지혜를 닦아서 좋은 반려자로 삼으리라. 나는 지금 부처 지혜의 어금니가 나려 하는구나’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중생의 고통을 멸해 주고 일체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무엇이든지 하려 할 때엔 나는 항상 자비한 마음의 분부를 따르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생사의 고통은 듣기만 하여도 싫은 생각이 나는 것이나, 자비한 이는 세간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까닭에 자비심의 힘에 따라 도리어 생사의 문턱으로 향해 들어간다’라고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생사의 괴로움은 지극히 싫어할 만한 것이어서 속히 열반에 들고자 하지만 자비로운 이는 말하기를, 괴로워하는 중생이 아직 제도되지 못했는데 어찌 그들을 버리고 떠나는가 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유위의 고통에 열반의 즐거움이 구족돼 있다. 나는 지금 생사의 유위의 고통이 열반의 무위의 즐거움임을 알았으니 자비한 마음으로 항상 세 가지 보시를 좋아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모든 유위의 세계를 심히 두려워하지만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세계에 즐거이 뛰어들리라’ 한다. 자비한 마음이 보살에게 말하되 ‘나는 당신을 오래도록 생사 속에 묶여 있게 하여 놓아주지 않겠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해탈의 즐거움까지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나니, 자비한 마음이 나를 가로막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생사 속의 견고하지 못한 즐거움이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온갖 즐거움 가운데서 제1의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열반이라고 하셨다. 이 열반이 즐겁기는 하나 나의 지혜는 찾아가지 않으리니 나의 지혜가 찾으러 가지 않는 까닭은
자비한 마음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지금 열반을 공경하고 숭상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열반에는 생ㆍ노ㆍ병ㆍ사가 없기 때문이다. 열반이 즐겁기는 하나 자비한 마음에 끌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찾아갈 수 없다. 자비한 마음은 부처님들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그 자비한 마음을 버리고서 열반으로 향하지 못한다. 설사 열반이 내게로 닥쳐온다 하여도 증득하지 않겠거늘 하물며 중생을 버리고서 열반으로 향하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도 열반으로 향하고자 하나 자비한 마음은 부처님 어머니로서 나에게 젖줄을 주셨거늘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설사 위없는 보리일지라도 중생에게 이익을 주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까지도 구하려 하지 않겠거늘 하물며 열반이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열반에 향하지 말아야 하나니, 귀의할 곳이 없는 중생을 버리기 때문이다. 자비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게 한다. 열반은 생명이 끝나는 경지인데 생명이 없으면 어찌 중생을 구제하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생명을 받는 데 두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중생을 구제하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해탈을 얻는 즐거움인데 어찌 두 가지 즐거움을 버리고서 한 가지 즐거움만을 취하겠는가’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일체 범부는 모두가 일체종지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일체종지를 범부는 쉽게 얻는다. 그러므로 나는 범부를 사랑할지언정 해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괴로운 중생이 있는 곳마다 자비한 마음이 생겨나고 자비한 마음이 자란다. 그러므로 나는 유위의 세계 속에 머물러야겠다’ 한다.
보살은 자비한 마음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로 하여금 청정함이 늘어나게 해주고, 일체 중생으로 모두가 청정함을 얻고, 모두가 늘어날 수 있게 하자’ 한다.
보살은 또 자비한 마음에서 말하기를 ‘중생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 백ㆍ천 가지 고통에 쪼들리니 오늘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안락을 얻게 하고 나와 함께 이 일을 갖추도록 하자’ 한다.
보살은 또 자비한 마음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애욕에 속박되고, 죽음에 끄달리고 있다. 세간을 살펴보건대 귀의할 곳이 없으니,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 갖가지 괴로움을 받자’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대장부를 좋아한다. 중생이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열반의 즐거움을 버리자. 중생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일에 힘쓰자’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중생을 구제하는 길로 향하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결정적인 지혜를 얻고 수기를 받나니, 수기를 받은 이를 나는 공경하고 공양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부처님은 두루 청정한 눈[遍淨眼]을 얻으셔서 나로 하여금 당장에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청원하되 저에게 수기를 주옵소서 하는구나’ 한다.
28. 등동발원품(等同發願品)
시방의 부처님들이 나타나 계시는 뜻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심이니, 나는 이제 보리의 원을 세웠다. 일체 중생이 하는 일을 나는 모두 감당해냈다.
부처님들의 대비(大悲)는 모두가 우리들에게 맞으니 좋구나. 나에게 있는 지혜와 복은 나로 하여금 의지할 곳 없는 이에게 해탈을 얻도록 하게 하소서. 세존이시여, 나로 하여금 언제나 작은 지혜를 좋아하지 않게 하시고 세존이시여, 나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이 열 가지 힘을 구족하게 하소서.
중생들의 번뇌의 불길이 번성하여 마음을 태운다면 저로 하여금 바른 법의 물로써 중생들의 번뇌의 불길을 끄게 하소서. 마와 원수를 무찔러 현명한 지혜를 얻고, 법륜(法輪)을 굴려 일체 중생의 번뇌를 소멸하오리이다.
일체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도 나는 모두 일시에 법륜을 굴리리라. 온갖 지은 복은 모두 이에 쓰고, 이 복덕으로써 내가 가장 훌륭한 법신을 얻으리라. 마치 허공이 온갖 곳에 두루하는 것같이 두 가지 몸을 얻어 세간을 교화하리라.
나의 이 복덕으로써 부처님과 화합하여 구제할 이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리라. 갖가지 번뇌의 제각기 다른 모습은 괴로움이 되어서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데 나의 복이 지혜의 힘으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멸하리라.
나의 이 복으로써 일체 중생이 허공계(虛空界)에 가득하더라도 그들에게 한맛의 즐거움이 되어주고 나의 소원이 원만하여져서, 도적의 무리가 공덕을 겁탈하는 일을 막아 주어지이다. 세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나의 이 복덕으로써 일체 중생을 구호하고 가려 주리라.
세간이 얼마나 머무는가에 따라 나의 착한 법도 머무르고, 나의 착한 법 때문에 일체 세간과 세간 밖이 모두가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고 항상 일시에 일체 중생과 화합하리라.
보살은 생각하되 ‘지금부터는 항상 구걸하는 이의 청을 따르리라. 지금부터는 항상 나의 몸에 대하여 확실히 믿는 마음을 내게 하고 남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게 하자. 그리고 갖가지 소원에 따라 모두 만족하게 하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내가 지금부터 보리를 얻기까지 어느 한 몸도 부처님을 뵙지 않는 때가 없으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내가 지금부터 나고 죽는 긴 소용돌이에 빠져서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 때일지라도 잠시도 자비한 마음을 여의지 않으리라’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내가 부처를 이룰 경지에 가까웠을지라도 밖의 중생들이 받는 온갖 괴로움이 지극한 것을 보면 나는 치가 떨리어 내가 모두 대신 받으리라. 나의 이 몸으로 뼈에 사무치는 자비심을 얻고 나의 몸이 몸으로 부처님 지혜의 해탈을 얻게 되어지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의 자비한 마음이 허공 같아지이다. 산ㆍ강ㆍ숲ㆍ새ㆍ짐승 따위 온갖 것이 모두 허공에 의해서 머무는 것같이, 일체 중생이 언제나 나의 자비 속에 들어지이다. 나는 일체 중생에 의해서 나의 선근(善根)이 성립되었으니, 나의 이 선근을 일체중생에게 돌려주어 해탈의 과위를 얻게 하여지이다. 온갖 도로ㆍ다리ㆍ배ㆍ방위[向方]들은 모든 중생이 함께 가지는 것과 같이 나의 이 선근도 일체 중생이 공동으로 가질지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땅ㆍ물ㆍ불ㆍ바람은 일체 중생이 공통으로 갖는 것과 같이 내가 닦은 온갖 선근도 일체 중생이 공동으로 가질지이다. 나는 일체 중생을 인하여 얻은 선근을 일체 중생에게 돌려주어 걸림 없는 지혜를 얻게 되어지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내가 닦은 모든 선근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악마의 경계를 여의고 부처의 경계에 들게 하며 나로 하여금 지혜를 얻어 항상 열 가지 바라밀과 부처의 지혜가 눈앞에 나타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쾌락을 얻어 요동치 않는 마음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의 온갖 걱정근심은 서로서로 구제하게 되어지이다’ 한다.
보살이 복덕(福德)에게 말하되 ‘일체 중생이 무명에 가리워져서 자기의 고통과 남의 고통을 알지 못하니, 네가 잘 깨우쳐 주라’ 한다.
보살이 보시하기 위해 맑은 물을 돌릴 때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애욕의 목마름을 제하고 위없는 도의 자비를 얻게 하나니, 내가 물을 보시할 때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애욕의 종살이를 벗어나서 항상 자유를 얻고, 법의 재물이 풍부하여지이다. 나의 복덕이 강물과 같을지이다. 자비한 마음은 더러움 없는 꽃이니, 계행을 지킴으로써 밑둥을 삼는다. 보시는 빨리 흐르는 물과 같아서 중생의 목마른 고통을 덜어 주고, 나의 자비한 마음은 항상 큰 강물과 같을지이다’ 한다.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의 자비심은 바다와 같고, 맑은 계행은 조수와 같고, 인욕은 파도와 같고, 지혜는 바다벌레의 운동과 같고, 자비한 마음은 한 맛의 물과 같을지이라. 무릇 내가 보시한 공덕은 자비한 마음의 바다를 이루고, 보시의 복덕으로 자비의 감로를 얻어 중생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을 제하게 되어지이다’ 한다.
29. 승발원품(勝發願品)
만일 내가 한 중생에게 자비한 마음을 일으켜 이익과 즐거움을 줄 때에 대비심이 견고해지게 하시고, 대비로써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어
일체 중생의 괴로움이 모두 밀려와서 나를 핍박하게 하소서. 나의 지금 이 두려움 없는 보시의 복으로써 일체 중생이 모두가 대비를 얻게 하소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욕의 공덕으로써 오는 세상의 도병겁(刀兵劫) 때에 나의 자비한 마음으로써 일체 중생의 성냄을 멸하게 하소서.
밥을 보시한 공덕으로 기근겁(肌饉劫)이 닥쳐왔을 때에 음식이 일체 중생에게 풍족하게 하소서. 물을 중생에게 보시한 공덕으로 자비한 마음을 성취하여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소서. 옷을 중생에게 보시한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부끄러움을 알게 하소서. 등불을 부처님께 보시한 공덕으로 내가 장래에 부처님의 해[佛日]를 얻어 온갖 어둠을 멸하게 하소서.
눈을 보시한 공덕으로 내가 장래에 일체 중생이 속히 불안(佛眼:부처 눈)을 얻는 것을 바라게 하소서. 내가 머리를 보시한 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이 보리심에 향하게 하소서. 내가 약을 보시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생ㆍ노ㆍ병ㆍ사를 제거하게 하소서.
내가 중생들에게 시봉한 공덕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위없고 누(漏:번뇌)없는 보리의 도를 이루게 하소서. 내가 꽃과 깃대와 일산으로써 부처님 탑에 공양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높고 훌륭한 복을 얻게 하소서. 내가 깃발을 사리에 공양한 공덕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들이 어둠을 제거하고 광명을 얻게 하소서. 방울 소리를 공양한 인연으로 일체 중생들이 범음성(梵音聲)을 얻게 하소서. 향과 꽃과 영락으로써 공양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든 결사(結史)의 때와 번뇌의 더러움을 제거하게 하소서. 3보에 공양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이 항상 3보를 만나서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게 하소서.
내가 험난한 길에서 여러 상인들을 위해 온갖 험난함의 두려움을 제거해 준
공덕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생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내가 중생들을 바다의 재앙에서 건져 준 공덕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소서. 나의 맑고 착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네 가지 악마를 무찌르고 정각을 이루게 하소서.
내가 3보리(菩提)를 얻을 때에 중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중생들을 안위시키려는 까닭에 이런 말을 하리라. 이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위없는 보리를 얻게 하소서.
일체 중생의 보리가 곧 나의 보리인데 일체 중생은 어리석음에 가리웠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얻게 하리라. 이 공덕에 의하여 일체 중생은 나보다 앞에 성불하고 나는 마지막에 성불하리라.
내가 생사 속에서 왕래한 인연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를 이루게 하소서. 내가 착한 마음을 일으킨 공덕의 인연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의 지혜를 얻게 하소서.
만일 보고, 듣고, 지니고, 읽는 이가 있으면 모두가 위없는 보리의 원인이 이루어지이다. 나는 일체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의 소원은 일부러 채우지 않으리라. 내가 괴로운 중생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 공덕에 의하여 일체 중생이 모두가 부처를 이루게 하고 기꺼이 우러러뵈오리라.
설사 내가 온갖 착한 행을 닦아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를 이루게 한다 하여도 듣기를 좋아하지 않겠거늘 하물며 행할까보냐.
보살이 공덕에게 말하되 ‘네가 중생들을 옹호해서 의지할 곳이 되어 주지 못한다면 나는 너나, 너에 의해 생기는 과보까지도 희망하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중생을 위해서 복을 닦았을지언정 자기를 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들이 다한다면 나의 선생은 허공과 같으리니, 하루 세 때에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보시할 때엔 보리의 마음으로써 시행하리라’ 한다.
수승한 장부가 자비한 마음으로 서원을 세우면 이것은 자비한 마음을 말한 것이라 하고, 또한 다섯 가지 설법이라고도 하고 중생을 구호한다고도 하고, 통틀어 말하건대 대장부가 어진 일을 행한다고 한다. 게송이 5백이 있는데 옛날 책에는 8백이 있었다. 아사리(阿闍梨:교수사)인 독자부(犢子部:고대 인도에 있는 불교의 종파)의 제바라(提婆羅)대보살은 남쪽 나라에 태어나셨는데 그가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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