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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947 불교 (대장부론/大丈夫論) 상권

by Kay/케이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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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장부론(大丈夫論) 상권

 

 

대장부론(大丈夫論) 상권


제바라(提婆羅) 지음
도태(道泰) 한역
김월운 번역


1. 시승품(施勝品)

바르게 깨달으시고 대자대비한 세존께
공경히 예배하옵나니
그가 정법을 일으켰기에
삼계(三界)의 진정한 구제자이시네.

무리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한량없는 공덕의 근원이신
보살이 본래부터 행하신 것을
제가 이제 조금이라도 말하리라.

내가 이제 중생을 가엾이 여겨
미묘한 보시의 문을 연설하리니
모든 현사(賢士)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잘 들으시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대지(大地)는 모두 진동하고
바다에선 뭇 보배가 솟으며
지혜로운 구름은 묘한 꽃비 내리네.

무심한 물체들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감정 있는 것들이겠는가.
보살의 보시는 광대하여서
허공의 경계와 같네.

가령 5통(通)을 얻은 선인이
시방세계에 가득하다 하여도
듣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분별하여 연설하리오.

어느 한 지방에서도
보시하기를 바라지 않는 곳 없음이
깨끗한 물로 대지를 적실 때에
두루 스며들지 않는 곳 없는 것 같네.

어느 한 물건도
보살이 베풀지 않았던 것이 없고
어느 한 중생도
그 보시를 받지 않은 이 없네.

논자(論者)는 땅에게 말하기를
누구나가 그대를 예우해야 하리라 하는데
어째서 땅을 예우해야 하는가.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네.

보살이 하룻동안에
갖가지 물건을 보시해도
벽지불은 백 겁을 지나도
그 끝을 헤아리지 못하네.

벽지불이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은
대비(大悲)가 보시의 본체이기 때문이니
일체 종지를 성취하려면
보시의 인연이 가장 크네.

이는 지혜로운 이의 말로서
보시로 피안(彼岸)에 이르른다.
한 가지로 피안에 이르르면
다른 바라밀도 모두 갖추어지네.

바라밀의 의미는
합성된 말[和集聲]1)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대중이라 하는 것과 같네.

보리의 종자는
큰 지혜의 결과를 이루나니

온갖 일이 갖추어지는 것은
모두가 보시에 의해 이루어지네.

보시는 하늘에 나는 길이며
세간을 벗어나는 포태(胞胎)인데
상(相) 없는 보시가 묘하고
평등한 보시가 가장 훌륭하네.

몸과 물건을 모두 베풀어
하나도 아끼지 말아야 하고
어디서나 보시하여
일정한 장소가 없네.

언제나 보시하여
베풀지 않는 때 없나니
이러한 네 가지 보시에서
마음과 지혜를 요동치 말라.

이렇게 보시를 행하면
부사의한 보시라 하니
만약 한 중생에게 보시하여도
모두가 다 즐거움을 받는다네.

만약 이렇게 보시하지 않으면
거짓이라 하나니
비록 한 사람에게 보시하나
모두에게 보시한 것이 되네.

일체 보시라고 하는 까닭은
대비심이 넓기 때문이요
대비심이 넓은 까닭은
일체종지를 구하기 때문이네.

부처님과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
세상에서 좋은 복밭이라 하지만
대비와 평등의 보시가
가장 훌륭한 보시이네.

한량 없는 재물의 보시는
잠깐 지식(止息)2)하는 것만 못하네.
자비심으로 한 사람께 보시해도
공덕이 대지와 같네.

자기를 위해서 일체에게 보시하면
과보는 겨자씨 같지만
위태로운 한 사람을 구제하면
일체에게 보시한 것보다 훌륭하네.

뭇 별이 비록 광명이 있으나
달 하나의 밝음만 못하네.
중생들은 때 묻은 마음이 무거워
보시하는 것 언제나 자기를 위하네.

보살이 자비심으로 보시하는 것은
재[灰]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 같으며
구제하는 자비의 보시는
두루 중생들을 위하는 것이네.

이와 같은 자비의 보시는
공덕이 다함이 없으며
이러한 미묘한 보시는
모든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네.

부처님의 지혜를 탐내어 구함에
마음에 만족함이 없으며
이와 같은 대비의 보시는
무명의 가리움을 없애네.

어리석은 이를 인도하여
지혜의 눈을 얻게 하며
온갖 번뇌[結使]를 멸하여
늙음ㆍ병듦ㆍ죽음을 없애네.
보시와 자비의 마음을 갖추면
중생의 감로(甘露)이네.

2. 시승미품(施勝味品)

대비심으로 일으킨 보시는
보리를 이루기를 원하나니
이렇게 알고 보는 사람은
온갖 보시를 이룰 수 있네.

이와 같은 온갖 보시는
마침내 한 맛의 지혜를 이루니

대비심이 본체가 되므로
갖가지 보시를 일으킬 수 있네.

갖가지로 중생을 구제하여
지혜의 경지에 이르르게 하고
모든 애욕의 번뇌와
무명의 때를 없애며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안락을 얻게 하나니
이러한 대비의 보시를
뉘라서 좋아하지 않으랴.

대비심에서 일어난
공덕의 보시와 이익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구제하는 도리에 어긋나리라.

이 사람은 애욕에 얽매여
보리를 얻기가 매우 힘드니
부처를 구하려는 모든 사람은
보시의 감로를 좋아하네.

지혜로운 사람은 보시를 좋아하여
보리의 맛을 달게 여기며
삼유(三有)의 허물을 똑똑히 보고
열반의 맛을 매우 즐기네.

빨리 괴로움을 여의고자하면
잠깐 동안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또 보시의 즐거움이
열반에 지난다고 보아야하리.

보시를 좋아함이 자재하면
마음은 보리를 잊나니
마음이 보시를 잊었으므로
보리를 얻기 어렵다 하네.

보시를 좋아하는 마음 스스로 관찰하건대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네.
보시하는 맛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보시에는 세 가지 즐거운 맛이 있네.

첫째는 보답을 구하는 보시의 맛이요, 둘째는 해탈을 구하는 보시의 맛이요, 셋째는 대비심을 구하는 보시의 맛이니, 이 세 가지 맛은 즐거움을 증장시키는 맛의 보시[味施]라 한다.

3. 시주체품(施主體品)

받는 사람은 한량없는 재물을 얻어야지만 몹시 기뻐하며 베푸는 사람은 조금만 보시하여도 몹시 기뻐하여 받는 사람의 백ㆍ천ㆍ만 배를 지난다. 이와 같이 보시할 수 있다면 제1의 행이 된다.

구제하는 일을 이루려면
대비의 감로를 마셔야 하리.
보살은 이런 행을 행하여
인색함ㆍ병듦ㆍ늙음을 영원히 없애네.

보살의 대비심은 보시로써 본체를 삼고, 세간 중생은 번뇌로써 본체를 삼는다. 순전히 뭇 고통으로써 한 맛을 삼아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대비심의 보시를 행한다. 해는 비치는 것으로 작용을 삼고 달은 서늘함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보살은 대비심으로 본체를 삼아 지혜의 보시나 재물의 보시로써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한다.
마치 가라라(歌羅邏:탯속)로부터 늙기까지 열 단계로 구별되어 늙음에 이르지만 어릴 때의 모습을 버리지 않는 것 같이 보살이 보시에 주리고 목마른 듯한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할 때에도 범부를 버리지 않고, 애욕을 떠나 비상(非想)에 이르기까지 범부의 모습을 여의지 않는다.
보살이 보시할 마음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이러하니, 보시의 목마름을 제거하려면 큰 보시의 물을 마셔야 한다. 보시의 목마름은 잠시 쉬더라도 다른 목마름은 그치지 않나니, 보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은 음식에 의해서 사나니, 대비(大悲)도 그러하여서 보시에 의하여 존재한다. 보살의 법신은 음식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대비로써 음식을 삼아 보살의 몸이 존재한다. 대비의 마음은 불길 같고, 보시하고 싶은 마음은 주린 것 같고, 좋은 음식을 보시해 주는 것은 맛난 음식 같다. 보살은 주기를 좋아하여 싫은 생각이 없다.
대비는 큰 바다와 같고, 보시는 기름진 땅과 같고, 구제하려는 마음은 물이어서 기름진 땅이 흐르는 물을 삼키는 것 같다. 보리에 향하고자 하면 중생으로써 벗을 삼고 대비의 마음으로 본체를 삼아 보시하되 싫은 생각이 없는 것이 바다가 뭇 강을 삼키되 그치지 않는 것같이 하라.

일체 중생이 와서
제각기 다른 물건을 찾아도
보살은 모두 베풀어주되
피로한 생각이 없다.

중생들의 괴로움을
모두 제하여 주나니
괴로움을 제하지 못한 이가 있으면
만족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

4. 시주걸자증장품(施主乞者增長品)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생사에 있으면서 갖가지로 보시해 주어 중생들의 고통을 멸해 준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생사에 잘 머무는 것이다.

복덕스런 대장부는
자비한 마음으로 고마운 손을 뻗어
빈궁의 진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를 건져 주신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으로 본체를 삼아 큰 보시를 행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멸하나니, 마치 몹시 더울 때에 큰비와 구름을 일으키는 것 같이 대비의 구름을 일으켜 보시의 우박을 뿌려 빈궁을 부수되 산의 돌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빈궁한 이를 구제하려면 끝없이 구제하고 보시하여 빈궁한 자로 하여금 영원히 빈궁의 고통을 여의게 하나니 큰 보시의 비로써 일체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면 중생의 빈궁은 영원히 머무를 곳이 없다.
보살이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 보시를 할 때에 마군과 권속이 모두 질투와 근심 걱정을 하나니, 보살이 한량없이 재물보시와 법보시를 행할 때에 간탐하고 질투하는 모두가 놀라 부르짖으며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인자한 마음[慈心]은 단정한 몸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은 천 개의 눈이요
보시는 금강저요
보살은 제석과 같으니
모두가 빈궁의 아수라를
무찔러 버린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활이 되고
갖가지 보시는 화살이 되어
빈궁의 적군을 무찔러
영원히 발붙일 곳이 없게 한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견고한 뿌리가 되고
상냥한 말씨[愛語]는 줄기가 되고
참는 마음, 가지가 되고
보시는 주렁주렁 열매가 된다.

구하는 사람은 새나 사슴이요
구걸하는 사람은 큰바람과 같아
보시의 열매를 불어 떨어뜨려
빈궁한 이가 배부르게 한다.

보살이 태어나실 때는 밤이요
인자한 마음은 보름달이요
청정한 보시는 광채요
구하는 이는 구모두(拘牟頭)와 같으니
청정한 보시의 광명이
그 꽃을 피우게 한다.

구걸하는 사람이 만족하게 되면 기뻐하면서 자기도 또한 보시하기를 보살의 보시와 같이 하고, 구걸하는 사람의 소문이 점점 퍼지는 것도 보살과 같다.
보살의 보시가 널리 소문이 나면 빈궁한 무리가 모두 모여드나니, 마치 광야에 서 있는 나무 밑엔 행인들이 더울 때에 모두 그리로 모이는 것과 같다.
보살의 좋아하는 마음은 수승한 해탈을 얻는다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구걸하는 이가 와서 자기로 하여금 보시의 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보시의 복 때문에 승처(勝處)라 하며, 일체 중생이 모두 모여드니, 이런 대사(大士:보살)에게는 모두가 예배 공경해야 한다.
욕망 가운데서 뜻[意]의 탐냄[貪]ㆍ열망[熱]ㆍ번뇌[惱]ㆍ집착[著]보살은 기쁜 마음이 나면 몸이 거뜬해지나니, 이런 조짐 때문에 반드시 어떤 이가 구걸하러 올 줄 안다. 어떤 사람이 보살에게 와서 말하기를 “구걸하는 이가 왔다.”고 하면 보살은 반가워하면서 얼른 재물을 갖다가 심부름꾼에게 상으로 주고, 나머지 물건은 구걸하러 온 이에게 준다.
구걸하러 온 이를 보면 기뻐하고 공경하며 구걸하러 온 이가 “구걸합니다”라고 말하면 이렇게 말할 때에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만일 어떤 구걸하는 이가 보살은 본질적으로 보시를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보살은 그의 손목을 잡고 기꺼이 말해 주되 마치 친구같이 하여 그의 모르는 점을 깨뜨리고 알게 한다.
그 구걸하러 온 이가 재물을 얻고 기뻐하는 것을 곁에 사람이 보면 역시 기뻐하며 말하되 “나를 구제한 이 사람이 영원히 세상에 존속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니, 이것이 구걸하는 이가 진정하게 구제된 것이다.
보살이 구걸하러 온 사람을 보면 몹시 기뻐하여 얼굴이 보름달 같아지면서 구걸하러 온 이를 기쁘게 하되 감로(甘露)를 가슴에 바르는 것 같게 하며, 보살이 온화한 얼굴과 자비한 눈길로 눈앞의 사람을 굽어보되 마치 감로를 마시는 것 같이 한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파는데 빨리 팔리면 매우 기뻐하는 것 같이, 보살이 구걸하러 온 이에게 물건을 보시하고 나면 그 기뻐함이 이보다 훨씬 크다. 또 어떤 부자가 재물과 자식이 모두 구족하여 마음대로 나누어주고는 몹시 기뻐하지만 보살이 구걸하러 온 이에게 물건을 준 기쁨에는 미치지 못한다.
보살이 구걸하는 이를 볼 때에 매우 반가워함이 다른 사람들이 친한 사람을 만났을 때보다 크다. 만약 앞에 있는 사람이 많은 재물을 얻어 자랑하고 뽐내는 것을 보면
이 보살은 곱이나 기뻐한다.
구걸하러 온 이가 입을 열려는 것을 보면 보살은 목마른 듯이 보시하려는 생각이 두터워지고, 구걸한다는 말이 들리면 감로(甘露)를 마시는 것 같다. 만약 구걸한다는 말이 들리면 사랑스러워 하는 마음을 중하게 내어 아무도 막지 못하며, 만일 만족했다는 말을 들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무너진다. 보살은 구걸하는 이에게 항상 사랑하는 생각을 내나니, 만일 만족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랑스런 마음[愛味]이 무너진다.
보살은 자기의 앞에서 보시를 받는 사람을 관찰할 때에 나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하다가 탐욕이 많은 중생을 보면 나와 같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탐내는 마음이 만족할 때가 없고, 나는 보시하려는 마음이 싫을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 욕심 많은 사람은 큰 시주를 사랑하지만 보살은 욕심스럽게 구걸하는 이를 보아도 또한 깊은 사랑을 느낀다. 탐내어 구하는 이는 항상 시주를 구하여 구걸하려하고 보시할 이는 항상 구걸하는 이를 찾아서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되 보살은 항상 다 준다.
세상 사람들이 구걸할 때엔 모두가 보시하는 이에게 가서 빌고, 보살은 구걸하는 이에게 가서 베푼다. 구걸하는 이는 보시하는 이의 재물이 다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을 하고 보살은 구걸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걱정을 함이 이보다 백ㆍ천ㆍ만 배 더하다.
구걸하는 이를 찾을 때에 보살은 ‘부처님께서 구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렇구나’라고 생각한다. 보살은 구걸하는 이에 대하여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구걸하는 이가 없으면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할 수가 없으며 위없는 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걸하는 이에 관하여 몹시 걱정을 하는데 만일 구걸하는 이가 있으면 위없는 보리를 손에 넣기는 어렵지 않다.
보살은 구걸하는 이가 “나에게 주시오, 나에게 주시오” 하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나니, 바로 그 사람이 나에게 위없는 보리를 주기 때문이다.
세간의 어리석은 중생은 재물을 구걸하는 말을 들으면 업신여기는 생각을 내어 공경치 않지만,
보살은 생각하기를 ‘구걸하는 이라 하는 까닭은 대체로 어리석은 중생들이 인색한 마음 때문에 그런 나쁜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하나니, 이런 사람이라야 보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재물이 있으나 보시할 마음이 없는 경우도 있고, 재물과 보시할 생각은 있으나 받을 이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 세 가지 일을 갖추면 큰 복덕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큰 보물 덩어리를 얻고서 왕이나 도적이나 물ㆍ불의 침해를 받아 빼앗길 것을 걱정하는데 우연히 친한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 방편을 써서 빼앗기지 않게 하리라” 하면 몹시 기뻐하는 것 같이, 보살이 구걸하는 이를 만나 좋은 동무를 삼고 기뻐하는 것도 이와 같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온갖 곳에 두루하지만 구걸하는 이에게는 유달리 가엾이 여긴다. 보살은 자비한 마음씨로써 구걸하는 이를 보면 화창한 얼굴로 대하여 그로 하여금 꼭 얻겠다는 생각을 내게 하며, 구걸하는 이는 보살의 얼굴빛이 화창한 것을 보면 그가 곧 결정코 얻으리라는 생각을 낸다.
보살은 구걸하는 이를 보면 말하기를 “그대는 와서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마음대로 가지라” 하고, 또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서 오시오. 어진 이여, 겁을 내지 마시오. 나는 그대의 의지할 자리가 되어 주겠소” 한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구걸하는 이가 시원함을 맛보게 하고, 갖가지 재물을 희망하는 대로 준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탐욕의 불길이 훨훨 타는데 보살은 항상 보시의 젖으로 탐욕의 불길을 끈다. 만일 이와 같이 갖가지를 보시하는 이는 산 사람이라 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면 죽은 사람이라 한다. 보시를 받은 사람이 많은 재물을 얻으면 딴 사람이 이를 보고 몹시 기뻐하고 찬탄하는데 보살은 이럴 때에 ‘보리의 과위가 손아귀에 있는 것 같다’고 여긴다.
자비로운 마음이 청정하면 보시도 청정하며 자비로운 마음이 없으면 보시도 청정치 못하다.
보살은 ‘마음을 잘 길들인 이는 자비의 마음이 탁월한 이를 공경하여 보시가 깨끗해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보살은 빈궁한 이를 보면 자비로운 마음이 지극히 중하고, 중생이 지극히 빈궁하더라도 보살의 보시를 얻으면 당장에 거부가 된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여의주(如意珠)를 얻으면, 희망하는 것이 모두 얻어지는 것 같이 빈궁한 이들이 보살을 만나면 온갖 빈궁이 모두 소멸된다.
보살은 먼저 재물보시를 행하고 다음에 친하다고 여기는 것을 베풀고, 다음에 손발을 베풀고, 나중에는 몸과 목숨을 베푸나니, 이와 같이 차츰차츰 베푼다. 보살은 구걸하는 이에게 가서 재물을 주고, 그 구걸하는 이를 불러서는 자신의 모든 친한 이를 준다. 만일 구걸하는 이가 저절로 와서 구걸하는 시늉을 하면 손발을 주고 말을 하면서 구걸하면 몸과 목숨을 버리고, 오지 않으면 몸소 가서 보시한다. 와서 구하는 이에게 목숨까지도 버리거늘 하물며 주지 않겠는가.
보살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성취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하여 잠시도 여의지 않는다. 구걸하러 온 이가 자기의 몸에 대하여 남의 몸이란 생각을 하는 눈치를 보고는 보살은 속으로 화가 나서 생각하기를 ‘이 어리석은 사람아, 어째서 자기의 물건을 보고 남의 몸이란 생각을 하는가’ 하고 곧 그에게 말한다.
“온갖 재물은 벌써 모두 그대에게 주었으니, 전부가 그대의 물건이다. 그대는 갖기만 하면 된다. 어째서 구걸한다 하는가.”
구걸하는 이들이 말한다.
“언제 주셨습니까?”
보살이 대답한다.
“내가 전에 삼계의 존귀한 분(부처님) 앞에서 큰 서원을 세울 때에 벌써 그대에게 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제야 내게 와서 구걸하는가?”
보살은 발심하여 일체 중생이 자신의 재물에 대하여 자기의 것이란 생각을 내기를 원하니, 마치 신두하(辛頭河)의 물을 날짐승이나 길짐승이 가서 마음대로 마셔도 막는 이 없는 것과 같다.
주어도 주었다고 여기지 않나니, 먼저 다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준다는 말도 하지 않으며, 기뻐하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벌써 다 주었기 때문이다. 온갖 희사한 것은 모두가 중생들로 하여금 쾌락을 얻게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심부름꾼이요. 일체 중생은 모두가 큰 시주이니, 빈궁한 무리들의 마음이 흡족할 때에 보살의 보시바라밀은 모두가 만족해지고 보시바라밀이 만족해질 때에 공덕이 만족해지는 것을 안다.
인색한 무리는 구걸하는 이를 보면 얼굴을 돌리고, 공덕을 닦는 사람은 구걸하는 이를 보면 기뻐하면서 가까이 섬기므로 구걸하는 이가 얻게 된다.
보살이 보시할 때에 보시를 받는 이가 다음에 베푸는 것을 보면 기뻐한다.
일체 중생이 찬탄하고 기뻐할 때 보살이 그 찬탄하는 소리를 들으면 몹시 기뻐하여 해탈을 얻을 때의 즐거움보다 더하다.
보살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할 때에 일체 중생이 재물을 많이 얻고는 기뻐하는 것을 보나니, 중생들이 균등하게 쾌락을 얻은 뒤엔 서원을 세워 ‘나는 생사 속에 오래 머물러서 모든 공덕을 닦을지언정 해탈을 구하지 않으리라’ 한다.
보살은 중생들이 생사의 흐름 속에 오래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생각하되 ‘내가 지금 눈앞에서 과보를 얻게 하리라. 설사 보리를 얻지 못해도 만족한다’ 하느니라.

5. 승해탈품(勝解脫品)

보살은 생각하되 ‘항상 승해탈(勝解脫:훌륭한 해탈)을 사랑하는 자가 와서 나를 깨우쳐 준다. 그가 오는 것은 재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큰 일을 성취해서 온 것이다’고 한다.
보살이 혹 왕이 되었을 때에 모든 공덕을 닦는 이가 와서 구걸하는 이가 왔습니다 한다. 왕은 생각하되 ‘이가 말하는 구걸하는 이라는 것은 바로 훌륭한 해탈이 온 것인데, 내가 이제 얻게 되었다’ 한다.
왕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왕의 지위를 탐착할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하겠으며,
공연히 왕의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 보시를 닦아서 결과를 만족케 해야 하겠다. 그러니 저 심부름꾼은 나를 깨우쳐 주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무릇 구걸하는 이를 위하는데 심히 어려운 것은 얼굴빛이다. 마음속에 부끄러워하는 생각이 있으면 말과 얼굴빛에 변동이 생기나니, 보살은 얼른 그의 마음을 알고 위로하여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와서 가지라 한다. 구걸하는 이가 재물을 얻고는 몹시 기뻐하나니,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모두 흠뻑 기뻐함이 마치 열반의 즐거움과 같다.
삼계에 나고 죽는 훨훨 타는 큰 고통에 보살은 열반의 즐거움 같이 처한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생각하되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 곧 나의 해탈이다. 큰 보시로써 중생을 구제하여 중생이 쾌락을 얻는 것이 곧 나의 해탈이다’고 한다. 비록 큰 보시를 하나 자비한 마음이 없으면 보시라 할 수 없고, 자비한 마음이 있는 보시가 바로 해탈이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예전에 삼계의 존귀한 이 앞에서 해탈은 지극히 즐겁다라고 들었는데 내가 이제 증득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뜻에 맞게 보시하는 것이 곧 해탈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라한의 해탈의 즐거움이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한 즐거움과 같다면 나는 그것을 사랑하겠지만 만일 같지 않다면 나는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한다.
오직 보시의 즐거움을 사랑하여 해탈로 여긴다. 자비한 마음에서 일어난 보시로 얻는 즐거움은 견줄 곳이 없나니, 자비한 마음 없는 보시와 해탈의 즐거움은 자비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보시와 얻는 즐거움의 백ㆍ천ㆍ만 분의 하나로도 비유할 수 없다. 만일 비유를 든다면 가장 큰 것이어야 하리니 그러므로 비유할 수 없다.

6. 시주증장품(施主增長品)

자비로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보시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와 같이 시주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해탈보다 수승하므로 가장 수승하다[最勝]고 한다.
시주는 남의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이가 일체 중생에게서 평등한 마음을 얻나니. 이렇게 하면 단월(檀越)이라 하지만 이렇게 보시하지 못하면 구걸하는 이라 한다.
보시를 할 때에 듣는 이를 울게 하면 좋은 보시라 할 것이요, 이렇게 하지 못하면 좋은 시주라 하지 못한다. 보시를 할 때에 받는 이의 자손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수용하면서 기뻐하고 찬탄하게 하면 이는 굳건한 시주요, 구걸해야 준다면 시주라 할 수 없다. 몸소 가서 주면 좋은 시주요, 온갖 재물을 주면서도 마음에 아까워하면서 준다면 시주라 할 수 없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물건을 주지 않아도 큰 시주라 할 수 있다.
또 구하러 온 모든 무리들을 모두 뜻에 맞게 주고 본래 소원하는 것에 맞게 주면 좋은 시주요, 그가 본래 소원하던 바에 부합되지 못하면 아무리 부자라 해도 빈궁한 사람이다. 부자가 물건을 주더라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주었다고는 하나 시주라고는 하지 못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시주라 한다. 먹지 않으면 과보가 없나니, 비록 보시해 주었더라도 보시라 할 수 없다.
자비심이 없는 보시는 비록 주더라도 보시라 할 수 없고, 자비심이 있는 이는 주지 않더라도 보시라 할 수 있다.
만일 과보를 바라고 보시하는 사람을 시주라고 한다면 장사꾼도 보시하는 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과보를 바라고 보시하여도 과보가 한량없거늘 하물며 자비심이 있고, 과보를 바라는 생각이 없으면 갚음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갚음을 바라는 보시는 자기만이 즐거울 수는 있으나 남을 구제하지는 못하므로 공연히 피로하지만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이는 능히 남을 구제하고, 나중에 과보를 받을 때엔 남을 크게 이롭게 한다.
빈궁한 이는 재물 있는 이만 못하고, 재물 있는 이는 먹는 이만 못하고, 먹는 이는 보시하는 이만 못하다.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이는 일체 중생을 선하게 하나니, 부귀한 이는 보시해야 하고, 보시하는 이는 자비해야 한다. 부자가 보시를 하면
부귀가 더욱 굳어지고 보시한 이가 자비스러우면 보시가 더욱 견고해진다.
보시를 닦는 이는 부자가 되고, 선정을 닦은 이는 해탈을 얻고, 자비심을 닦은 이는 위없는 보리를 얻나니, 결과 가운데서 가장 수승하다.

7. 공경걸자품(恭敬乞者品)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 구걸하는 이를 인하여 보리를 증득하니, 나는 이 보리를 일체 중생에게 회향(廻向)할 것이니,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나는 지금 중생에게 보시한 까닭에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을 얻었는데 이 즐거움 때문에 보리를 얻었다. 이와 같은 보리를 나는 구걸하는 이에게 주리라. 내가 지금 구걸하는 이에게 보시함을 인하여 쾌락 가운데서도 가장 수승한 해탈의 즐거움을 얻었다. 인연 속에서 보시한 즐거움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위없는 보리이겠는가. 내 모두를 버려서 구걸하는 이에게 보시하리라.
이와 같이 구걸하는 이는 그 은혜가 심히 중하건만 갚을 길이 없구나. 이 구걸하는 이가 나에게 큰 즐거움의 원인이 되었는데 만일 재물을 주어서는 은혜를 갚지 못하니, 위없는 보리로써 베풀어주리니, 나의 복이기 때문이다. 이 구걸하는 이로 하여금 장래에 지금의 나와 같이 큰 시주가 되게 하소서.
보살이 속으로 생각한다.
‘구걸하는 이를 인하여 보시의 쾌락을 얻었으니 구걸하는 이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를 얻게 하여 법보시의 단월이 되게 할 것이다.’
구걸하는 이들이 보살의 큰 보시를 보고 묻는다.
“무엇을 구하기 위해 큰 보시를 골고루 행하십니까?”
보살은 그들에게 낱낱이 대답한다.
“나는 지금 인간과 하늘의 과보나 성문의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위없는 보리를 얻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인색한 이들이 생각하기를 ‘보살은 어찌하여 큰 보시를 행하면서도 피로함이 없을까?’ 하면, 보살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스승이신 삼계의 존귀한 이께서 일체중생을 가엾이 여기시는데
나는 지금 스승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에 보시함에 피로함이 없다. 온갖 즐거움 가운데 해탈의 즐거움을 이길 것이 없는데 나는 중생을 사랑함이 해탈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다.
나는 중생을 사랑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갖가지 보시를 닦는다. 만약 생사의 괴로움이 극심하지 않다면 내가 보시를 할지언정 보리를 구하지는 않겠지만, 생사가 괴롭기 때문에 나는 보시를 하여 보리를 구해서 건져 줄 것이다.
생사의 괴로움은 누가 짓는 것인가? 번뇌와 업이 짓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의 마음으로써 본체를 삼게 하여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게 하리라.”

8. 시간품(施慳品)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비로운 마음이 없다. 만일 자비로운 마음이 없으면 보시를 행하지 못하고, 보시를 행하지 않으면 중생들의 생사를 제도하지 못한다.
자비로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친한 벗이 없고, 자비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은 친한 벗이 있다. 나[我]를 생각하는 사람은 애욕으로 본체를 삼고 구제하는 사람은 자비로써 본체를 삼는다.
마음 속에 소중한 사랑이 있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깊은 자비가 있어도 역시 아는 사람이 없다. 만약 보시를 하지 않으면 자비의 마음을 가리우니, 마치 획석(畫石:금의 성분 유무를 조사하기 위해 그어보는 돌)으로 그어봐야 금의 참과 거짓을 아는 것과 같다. 만약 괴롭고 위태로운 사람을 보고 큰 보시를 행하면 자비의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색한 마음이 많은 사람은 설사 친한 사람을 시켜 구걸하게 하여도 원수를 이루는데, 자비로운 마음이 많은 사람은 원수가 왔더라도 친한 벗과 같이 대한다.
인색한 마음이 많은 사람은 진흙을 보시하고도 금이나 옥(玉)보다 소중히 여기고 자비로운 마음이 많은 사람은 금과 옥을 보시하고도 초목보다 가벼이 여긴다.
인색한 마음이 많은 사람은 재물을 잃으면 큰 걱정을 하지만, 자비심이 많은 사람은 재물이 있어도 보시할 곳이 없을 때 걱정함이 그 보다 크다. 재물을 버리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죽을 때에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보시할 때에 버리는 것이다. 죽을 때에 버린다는 것은 일체 것을 모두 버려서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음 세상[後世]에 이르는 것이요, 보시할 때에 버린다는 것은 조금의 물건을 버리고서 큰 과보를 받는 것이니,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이런 허물을 보고도 보시를 하지 않겠는가.
보시를 할 때에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자기도 기쁜 것인데, 만약 사람이 깊이 기뻐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어떤 구걸하는 사람이 무엇을 구하면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물건을 주더라도 기뻐한다.
또 어떤 보시하는 사람이 몸소 가서 보시하되 과보를 구하지 않고 큰 보시를 하여서 남은 것이 조금이어도 그 기쁨을 비유할 수 없다.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보시하지 않고 먹으면 맛있다고 여기지 않고,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도 보시를 한 뒤에 먹으면 기뻐서 퍽 맛있는 음식으로 여긴다.
보시하기를 끝낸 뒤에 남는 것이 있어야 자신이 먹는데 착한 대장부는 기뻐함이 열반을 얻은 것과 같거니와 신심이 없는 사람은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주린 사람이 앞에 있어도 보시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음식도 보시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수승한 해탈을 남에게 보시할 수 있겠는가. 재물이 많아도 구걸하는 사람이 오면 보시할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적은 물건을 보시하는 일이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생사 속에서 조금의 즐거움이 없으니, 열반에 나가서 머물러라.
만약 어떤 사람이 큰 강가에서 적은 물을 보시하지 못한다면, 생사 속에서 괴로움이 한량없을 것이니, 그대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속히 열반에 들라. 큰 강가에서 사람에게 보시하려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 같이 자비한 마음이 있으면 열반을 얻기도 어렵지 않다.
세간에서 썩은 흙은 물보다 얻기가 쉬운데 인색한 사람은 썩은 흙을 구걸한다는 말만 들어도 아까워하거늘 하물며 재물이겠는가.


9. 재물시품(財物施品)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큰 부자이고 하나는 빈궁한데 구걸하는 사람이 왔다면 이 두 사람은 모두가 걱정이 있나니, 재물이 있는 사람은 그가 구걸할 것을 근심하고 재물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어찌 하여야 조금의 재물이라도 보시할까 걱정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걱정은 같으나 과보는 각각 다르니 안타까워 한 사람은 인간이나 하늘에 나서 끝없는 즐거움을 받고 인색한 사람은 아귀가 되어서 끝없는 고통을 받는다.
보살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앞에 있는 중생에게 그대로 만족을 주는 것인데 하물며 작은 물건을 줌에 있어서랴. 어떤 사람이 큰 부자이어서 재물이 많아 마음대로 쓰면 기쁜 것처럼 보살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보시할 걱정을 한다면 그 사람의 즐거움보다 백ㆍ천ㆍ만 배나 더하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재물이 없는데 구걸하는 이가 오면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어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수승한 사람은 가령 남의 괴로움을 듣기만 하여도 차마 견디지 못하거늘 하물며 남의 고통을 눈으로 보고서 구제하지 않겠는가. 그럴 수가 없다. 가엾이 여기는 이는 빈궁한 중생을 보았을 때 줄 재물이 없으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탄식함이 비유할 곳이 없다.
중생을 구호하는 사람은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부드러운 줄 알 수 있다.
보살의 본체는 청정하여 모두가 나타난다. 무슨 까닭으로 모두가 나타나는 줄 아는가. 괴로워하는 중생을 볼 때에 눈에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그의 본체가 청정하고 부드러운 줄 알 수 있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마치 눈 더미와 같나니, 눈더미가 해를 보면 모두 녹는 것 같이, 보살의 인자한 마음은
눈더미인 까닭에 괴로워하는 중생을 보면 눈에 눈물이 흐른다.
보살이 눈물을 흘리는 때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덕을 닦는 이를 보면 사랑하고 공경하는 까닭에 눈물을 흘리고, 둘째는 괴로워하는 중생이 공덕 없는 것을 보면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눈물을 흘리고, 셋째는 큰 보시를 닦을 때에 감격하고 기뻐 뛰노라고 역시 눈물을 흘린다.
보살이 지금까지 흘린 눈물을 헤아리건대 사방의 큰 바다보다 많다.
세간의 중생들이 친족을 여읠 때에 흘린 눈물로 보살이 괴로워하는 중생을 보았으나 보시할 재물이 없을 때에 슬피 우는 눈물에는 미치지 못한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선정에 들면 지극히 즐거운 마음이 상응하고 끝없는 보물이 자연히 솟으며, 온갖 구걸하는 사람이 자연히 온다. 착한 대장부가 재물로써 구걸하는 사람에게 크게 보시하면 구걸하는 사람도 재물을 얻은 뒤엔 역시 큰 보시를 행한다.
보살은 재물을 가지고 중생에게 보시하여 모두가 풍족하게 하는데 골고루 보살피는 마음으로써 구걸하는 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눈물을 흘린다. 구걸하는 사람은 보살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 보살이 준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으나 꼭 얻을 줄을 안다.
보살은 구걸하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볼 때에 심히 괴로워하고, 그가 물건 얻는 것을 볼 때에는 퍽 기뻐하여 슬픔의 고통을 멸한다.
보살은 구걸하러 왔다는 말을 들으면 슬피 울어, 눈물을 멈추지 못하다가 그가 만족하다는 말을 들어야 멈춘다. 보살이 갖가지 보시를 닦아 중생이 만족하면 곧 산으로 들어가서 선정을 닦되 어찌하여야 중생의 3독의 고통을 덜어 줄까 한다.
보살은 재물이 더욱 많아졌는데 보시할 수 있는 구걸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어째서 지켜야 하는가. 이제 마땅히 모두 버리고서 출가하리라 한다.

10. 사일체품(捨一切品)

보살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데 구걸하는 사람이 없어서 불러도 오지 않으면
그 보살은 생각하되 ‘일부러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주려는데 아무도 오는 이가 없구나’ 한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일체 중생에게 뭇 괴로움이 얽혀 있는 것을 보면 그 중생들을 제도하리라고 원을 세운다. 보살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두를 다 주어서 남기지 않고, 부처의 지혜를 구하여 가장 훌륭하게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 한다. 수승한 자비심을 갖는 것이 존귀하거늘 구제하는 수행을 하려는 사람이 무슨 물건을 버리지 못하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열반도 버리거늘 하물며 몸이겠는가. 몸과 재물을 버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재물을 버리는 것은 몸을 버리는 것만 못하고, 몸을 버리는 것은 열반을 버리는 것만 못한데, 열반도 버리거늘 무엇을 버리지 못하랴.
자비한 마음이 뼈에 사무쳐서 자재한 자비를 얻어 구제하는 행을 닦는 사람은 보살의 보시라도 도무지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이는 일체 중생에게 가장 친절하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얻게 하는 인연이 되어 준다. 자비한 사람은 온갖 것을 모두 버려도 아무런 피로가 없다. 일체 중생의 참된 구제는 원수와 친한 사람이 평등하여 몸과 목숨까지도 버리거늘 어떤 물건을 버리지 못하랴.
일체 중생은 재물을 지극히 소중히 여기고, 목숨을 아끼기는 재물보다 소중히 여긴다. 일체 중생은 재물을 버리기는 쉽게 여기고, 목숨을 버리기는 어렵게 여긴다. 보살이 온갖 재물을 버리고 기뻐하는 것은 몸과 목숨을 버릴 때의 뛰어난 기쁨에 미치지 못한다.
갖가지 보시의 맛을 모두 알아 보시로써 음식을 삼고, 그로 인해 존속한다.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은 몸을 보시하는 맛을 알고자하여 몸을 베푸는데 어떤 사람이 몸을 구하는 것을 보면 기뻐함이 재물을 버릴 때의 기쁨보다 더하다. 보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쁨을 얻는다 하여도 보살이 몸과 목숨을 버릴 때의 기쁨만 못하다.
염부제(閻浮提) 사람이 재물을 구걸하는 이가 있지만 나에게 복덕이 없기 때문에 몸을 구걸하는 이를 만났다. 재물을 준다면 재물 때문에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몸을 바치는 사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생각에 따라서 줄지언정 저에 의하지 않는다.
이 몸은 견고치 않고, 일정치 않고 속히 썩는 물건이니 사랑하고 생각할 만한 것이 있으면 속히 가져가라 하면 사람의 살을 먹는 무리들이 보살에게 말한다.
“그대가 지금 더운피와 살을 내게 보시하니, 나는 무엇으로 보답하리까?”
보살은 그들에게 말한다.
“만일 은혜를 갚으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거든 자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몸과 살을 보시하고 있으니 가서 얻으라 하라. 만일 이렇게 한다면 내 은혜를 갚는 것이다.”
보살은 구걸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그대는 지금 나의 견고치 않은 몸을 가져가서 나로 하여금 견고한 몸을 얻게 하였다. 그대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무엇으로 보답하랴. 오는 세상엔 내가 몸을 보시한 공덕을 그대에게 주리라. 나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버렸다. 몸을 버린 사람은 법신을 얻고, 법신을 얻은 사람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다.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이 결과를 얻게 하려 하노니, 이 몸을 버리면 법신을 얻고, 법신은 일체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리라.”
능히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어찌 기쁜 생각을 내어서 이 몸을 속히 버리지 않겠는가.
보살이 몸을 버릴 때에 생각하되 ‘나는 중생들의 친구가 되리라. 나는 생사를 면했으니, 의당 일체 중생의 생사를 제도해 주리라. 이런 까닭에 나는 지금 몸을 버린다’ 한다.
보살은 다시 생각하되 ‘내가 지금 몸을 버린 공덕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뿐 아니라. 도리어 나의 공덕 법신을 기르는 것이다’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결정한 뒤엔 몸을 버리기에 아무런 주저도 없다.
보살이 몸을 버리기를 어렵지 않게 여기는 까닭은 법신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니, 그러기에 기뻐한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많은 재물을 얻었을 때에 끝없이 기뻐하지만 보살이 몸을 버렸을 때의 기쁨에는 천ㆍ만 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으로 본체를 삼아
중생을 위하여 법신을 구한다. 보살이 몸을 버릴 때의 즐거움은 세상 사람이 전륜왕의 자재한 쾌락을 얻는 것보다 수승하다. 찰리 종족이 적군을 무찌르거나 몸을 버리고 하늘에 태어나려 할 때에 몸을 버릴 때의 기쁨은 끝이 없는데 보살이 지혜와 자비심으로써 몸과 목숨을 버렸을 때의 기쁨은 그보다 더하다.
어리석은 중생은 재물을 위해 적진에서 몸과 목숨을 버리거나 해탈을 위해 바위에서 떨어지거나 불에 뛰어들어 몸을 버리는 일이 무수한데 하물며 보살은 지혜와 자비심으로써 일체 중생을 위하거늘 어찌 목숨을 버리지 않으랴.
어리석은 중생은 애착심으로 국토를 위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버리는데 보살은 지혜와 자비심으로 중생을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니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보살이 서원을 세울 때엔 일체 것을 모두 버리리라 하였지만 일체 중생이 실제로 이익을 얻지 못했다 하고, 보시를 한다. 그럴 때에 일체 중생이 이익을 얻는다.
보살은 몸을 버리기는 어렵게 여기지 않나니, 몸이란 괴롭고 공하고 부정함을 알기 때문이다. 중생을 위하면서도 몸을 버리지 못함이 어려움이요,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고, 버리는 것을 즐거워하여 만족함이 없는 것이 어려움이 된다.
가령 어떤 범부에게 땅덩이를 뒤집어엎으라 하면 힘이 모자라 몹시 걱정하는데, 보살이 괴로워하는 중생이 해탈치 못함을 보았을 때에 괴로워함은 이보다 더하나니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보살은 몸을 초목보다 더 가볍게 여기거늘 중생을 위해 몸 버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위해 잠깐 동안에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지키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반드시 하늘에 태어나지만 보살이 중생을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린 공덕은
생사(生死)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받아들일 곳이 없고, 오직 보리의 경지에 이르러야 받아들인다.
보살은 어떤 사람이 와서 몸을 달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하되 ‘나는 벌써 이 몸을 버린 지 오래거늘 자기들이 취하지 않고, 이제야 나에게 와서 달라 하니, 반드시 나에게 인색한 마음이 있다고 여겨 나를 시험한다 하겠구나’ 한다.

11. 사음수음품(捨陰受陰品)

아라한이 마지막 몸을 버리고서 열반을 얻는 즐거움은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몸을 버릴 때의 즐거움에 미치지 못하고, 아라한이 해탈을 얻을 때도 보살이 중생을 위해 몸을 받을 때의 즐거움에 미치지 못한다.
보살은 생각하되 ‘나는 열반을 취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이 몸을 받은 것으로써 가장 묘함으로 여긴다’ 하며, 보살은 또 생각하되 ‘나는 몸을 버려 보시하고는 다시 몸을 받더라도 해탈에 들지 않는 것으로 가장 묘함으로 여긴다. 나는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하신 공덕을 듣기를 좋아한다. 나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심의 맛을 얻고는 열반을 취하지 않는 것이 몹시 즐겁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몸을 보시할 때 열반을 증득하지는 않으나 열반을 얻은 사람보다 더 훌륭하나니, 중생을 위해 몸을 버리는 맛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 5음의 몸을 받는 것은 지극히 괴로운 일이지만 중생을 위해 몸을 버릴 때의 즐거움보다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세간의 범부들은 빈궁과 병고에 시달려도 쾌락과 애욕의 몸을 버리지 못한다. 중생은 5음의 몸을 싫어하여 구제하지 못하면 속히 열반에 들려 하지만 보살은 생각하되 ‘열반이 심히 즐겁고 생사의 몸은 지극히 괴롭다. 내가 일체 중생들 대신하여 이 5음의 몸의 고통을 받아 해탈케 하리라’ 한다.
아라한의 몸이 다하면
부처의 몸도 다한다. 몸이 다하는 것은 같으나 구제하지 못하나니, 부처님이 몸을 멸한 것은 선이 된다.

12. 사신명품(捨身命品)

보살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위하기 때문에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버리어 공하지 않은 과보를 받는다. 만일 몸을 버린 온갖 사람들이 과보를 얻지 못한다면 공연히 몸을 버렸다 한다.
보살이 몸을 버리는 것은 재물에 집착한 중생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니, 보살이 중생을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색한 사람이 한 술의 밥을 보시하기보다 쉽다.
보살이 몸과 목숨을 버리는 까닭은 인색한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함이니, 보살이 목숨을 버리는 까닭은 남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인가? 남의 목숨이 곧 자기의 목숨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몸과 목숨을 버릴지라도 남의 목숨을 구제하지 않는 까닭은 5음의 몸의 허물을 보기 때문이니, 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몸을 받는다. 만일 대비의 마음이 아니라면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5음의 몸을 좋아하겠는가.
만일 대비심으로 보시하는 맛이 없다면 생사 속에 있지 못한다. 보살은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한다. 대비심이 자재하면 생사하는 곳마다 열반과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


13. 현비품(現悲品)

보살의 대비심은 지극히 크면서 몸 안에 있으되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보살이 몸과 목숨을 버릴 때에는 일체의 하늘과 사람이 볼 수 있다. 보살의 대비심이 지극히 깊고 커서 일체 중생에게 두루하나 아무도 보는 이가 없고 재물보시ㆍ법보시ㆍ무외시(無畏施)로써 알려지게 된다.
일체 중생의 몸은 병 아닌 것이 없는데도 아는 사람이 없다. 세 가지 일에 의하여 병이 있음을 아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음식ㆍ의복ㆍ탕약이니 이것이 병의 모습이다. 보살의 자비심은 세 가지 일에 의하여 나타나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재물보시와 법보시와 무외시이다. 보살은 일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멸해 주기 위하여 몸을 버려 구제한다.
보살은 과보를 구하지 않고 풀같이 여기나니, 보살은 대비심으로 갖가지 방편을 쓰되 젖이나 피를 보시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쉽게 여긴다. 마치 옛적에 보살이 다섯 곳에서 피를 뽑아 야차 귀신에게 보시하고 기뻐 뛰기를 비유할 수 없이 한 예와 같으니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살에게 묻되 “대비심이 있는 사람은 무슨 재미가 있기에 피를 버리기를 물을 주는 것보다 쉽게 여기는가?” 하면, 대비심이 있는 보살은 대답하되 “과보를 구하지 않고, 남이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버린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즐거움은 형상 없음을 으뜸으로 하여 자비한 마음의 쾌락에 들기 때문이다” 한다.
어떤 사람이 보살의 대비심을 보고 대비의 본체인가 의심하다가 큰 보시를 하는 것을 보고서야 대비의 본체임을 안다. 세상 사람들은 의심하되 대비가 와서 보살의 몸으로 들어갔는가. 보살이 대비 속으로 들어갔는가 한다.
보살이 몸을 버리는 것은 아무도 함께하지 못하고 대비가 있는 이라야만 능히 할 수 있으며, 일체 종자지혜를 얻을 때는 일체 중생이 아무도 함께하지 못한다. 대비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희망하는 바를 모두 얻게 하나니, 이것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결정코 공(空)을 얻는다.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대비를 항상 마음에 두는 사람은 위없는 보리가 손아귀에 있는 것과 다름없나니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머무른 사람은 능히 다라니(陀羅尼)를 나타내고 10지(十地)에 머물러서 자유자재하나니 그는 곧 부처와 같은 줄 알라.

14. 법시품(法施品)


재물보시를 하는 사람은 인간에 백ㆍ천ㆍ만 사람이 있는데 재물보시의 과보는 능히 법보시를 하게 된다. 오직 대비심이 있는 이라야 법보시와 재물보시의 과보를 얻고, 나중 받는 몸으로는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는다.
가엾이 여기는 이의 법보시는 현전에 열반을 증득하며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기뻐하고, 감로(甘露)가 만족하게 된다. 보살의 가엾이 여기는 대비는 한 맛이니, 그런 까닭에 한 찰나에도 해탈을 얻으려는 생각이 된다.
갖가지 법보시를 끝내고는 법문들을 이를 청하되 내가 법보시의 과보를 받을 때엔 반드시 나의 청을 들어달라 한다.
보살일 때에 보시하는 것은 욕망의 보시[欲施]라 할지언정 근본 법보시라 하지 못하거니와 부처가 된 때에 보시한 것이라야 근본 법보시라 한다.

부처의 지혜가 허공에 높았는데
대비는 빽빽한 구름인 양 퍼졌네.
법보시가 단비같이 고루 뿌려서
5음과 18계의 못물에 넘쳐 있네.

네 가지 거두는 법[四攝] 방편 삼으면
안락한 해탈의 원인이 되니
여덟 가지 바른 길 닦아 나가면
열반의 높은 결과 얻게 되리라.

재물보시는 중생의 몸의 고통을 덜어 주고 법보시는 중생의 마음의 고통을 덜어 준다. 한량없는 겁에 재물보시를 하는 것은 법보시의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인데 법보시는 중생들에게 무외시를 줄 수 있다.
생사를 몹시 싫어하는 지혜로운 이는 열반을 구하고, 보살이 돈과 재물을 받는 뜻은 보시를 하기 위함이요, 보시를 행할 때엔 법보시를 얻기 위해서 애쓴다.
중생을 보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탐욕과 어리석음이다.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는 재물을 보시하고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에게는 법을 베풀어준다. 재물을 보시하는 뜻은 재물이 다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요, 법을 보시하는 뜻은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게 한다. 재물보시는 몸의 즐거움을 얻고 법보시는 마음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교화해 줄 중생들이 얻으려는 이치에 따라 뜻에 맞추어 만족케 하는 것을 피로 없는 뜻이라 부르나니, 큰 공덕의 법보시를 얻어 기뻐하고 더욱 단정해져서 마치 한가위의 달과 같고, 항상 중생을 위하여 마음과 눈을 떼지 않는다.

재물보시는 중생의 사랑을 받고 법보시는 항상 세간의 존경을 받는다. 재물보시는 어리석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법보시는 지혜로운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재물보시는 재물의 빈궁한 이를 물리치고 법보시는 공덕이 빈궁한 이를 물리친다. 이 두 가지 보시를 뉘라서 존중하지 않으랴.
재물보시는 능히 이 세상의 즐거움을 주고, 법보시는 능히 하늘세계와 열반의 즐거움을 준다. 대비를 즐기고 사랑하는 이는 일체 중생을 사랑하고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라한이 중생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 있는 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이 뉘라서 좋아하랴.
항상 보시를 행하여 열 가지 악을 멀리 여의고, 부모를 공경하라. 만일 이렇게 한다면 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만일 부처의 종자를 잇고자 한다면 대비의 마음으로 으뜸을 삼아 남을 이롭게 하고, 항상 중생들을 성취시킬 일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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