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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59 불교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2권

by Kay/케이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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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2

 

대보적경론 제2권 문함(文函) 제2권을 풀이한다.


보리류지 한역
이병욱 번역
하혜정 개역



이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 네 종류의 대승을 얻는 큰 조복장이 있다. 어떤 것 등이 네 가지인가?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지닐 수 있고, 여섯 바라밀을 들을 수 있고, 산림을 즐겨 안착하고 마음에 게으름이 없는 것이다.”

【문】무슨 까닭에 더도 덜도 아니고 꼭 네 가지 법만 정한 것입니까?
【답】무한히 이어지는 것[無窮]을 막기 위한 까닭이고, 또한 질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일찍이 없었던 인(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까닭에 네 종류를 말한다. 긴 밤 동안에 공을 잘 닦은 까닭이고, 일체지(一切智)를 얻는다 해도 공의 인을 닦았기 때문이다.
‘무명의 어둠이 세간을 가린다’고 한 것은 무명을 없애기 위한 까닭이고 ‘법을 말하여 열반의 마음에 가까이하고 향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 것은 고요함이 깊고 깊어 그것을 닦지 않은 까닭이며 조복하여 깨끗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세간’이라는 것은 위의 묘법을 말하면 누가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이니, 그러므로 재물과 법 두 가지를 보시한다. 이것은 질투하고 아끼는 마음과 서로 어긋나니 오래도록 닦아 익혔기 때문이다. 세간은 아리야(阿梨耶)를 즐겨 하고 아리야를 집착하기 때문에 법을 말할 때 가까이 할 수 있다. 혹 다시 모든 보살행을 거두어들이므로 간략히 네 가지 법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에게는 두 종류의 보살도를 돕는 행이 있다. 첫째 지혜의 도를 돕는 행이고, 둘째 공덕의 도를 돕는 행이다. 이 중에서 공과 무아를 믿고 열반 등을 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지혜의 도를 돕는 행이다. 신업보(身業報) 등의 세 구절을 믿는 것은 공덕과 지혜를 도와 이루는 것이고, 6바라밀을 널리 닦아서 행을 거두어들이므로 네 종류의 행을 돕는다.
이 중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뜻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재산과 법 두 가지를 보시하고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을 돕는 행이라 말한다. 열반의 뜻을 버리지 않으므로
이것이 계바라밀을 돕는 행이다. 열반의 마음을 향하는 보살은 항상 세간을 두려워하고 항상 계율을 깨뜨리는 등의 모든 번뇌의 인(因)을 막고 누르기 때문에 참된 성품의 계를 지키는 법의 근본을 얻는다.
보살이 무아의 인(忍)을 성취하여 중생상이 의지하는 것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설사 중생이 핍박하거나 괴로움을 끼칠 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는 업의 과보를 믿기 때문이고 뜻으로 세간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진바라밀의 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돕는 것이고, 공덕과 지혜행의 과보를 이루는 것을 돕는 것이다.
살바야(薩婆若)1)의 일을 믿는 보살은 비록 세간의 무거운 고통을 비추어 보더라도 스스로 마음은 중생을 버리지 않고, 장부의 뜻이 있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고통을 버리지 않으며, 오직 세간에 있으면서 선근을 늘어나게 하는 까닭에 큰 정진을 일으킨다. 큰 자비 때문에 선정바라밀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큰 자비’라는 것은 근본의 선정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공을 믿는다’는 것은 지혜바라밀의 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돕는 것이다.
“보살이 보리심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여 속이지 않는 까닭이다. 저 보살은 큰 자비와 업의 과보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항상 세간의 도반을 향하므로 중생의 처소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전도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큰 자비와 업의 과보를 믿는 마음으로 세간의 행을 버리지 않는다. 보리심의 인(因)을 버리지 않으므로 이 모든 법은 이와 같이 진리의 말을 간직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보살의 진리의 말’이란 보리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는 마음을 일으킨 곳[發心處]을 취하여 과보를 바라지 않는 재산과 법 등의 보시이다. 이것이 세(勢)를 간직하는 것이다.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이란 재산과 법 두 가지 보시 중에서 아끼는 마음의 일을 깨뜨리는 것이다.
‘열반을 향하는 마음을 이룬다’고 한 것은 고요한 일을 간직하는 것이고, ‘보살의 고요함’이란 고요하지 않은 일을 없애는 까닭에 착한 인(因)을 이루어 공과 무아 등을 믿는 것이니,
이것은 지혜를 간직하는 것이다. ‘보살의 지혜’란 모든 번뇌를 눌러 없애고 대치해서 깨끗한 보리를 얻게 하고 선근이 늘어나게 하며 나아가 보리를 얻고서도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재산과 법 두 가지 보시 등의 자비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까닭이다.
‘대비(大悲)’라는 것은 이름이 대비라는 것이니, 대비를 으뜸으로 삼고 업의 과보를 믿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행할 때 중생에게 이로움만을 지어주는 이러한 성취한 일들 중에서 생긴 마음의 기쁨 등을 희(喜)라고 이름한다.
혹 또는 마음이 열반에 향하였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조복하여 번뇌가 없어진 까닭에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희라 한다. 혹 모든 행이 무아 등인 것을 관조하고 모든 법에 대해 애착하는 것과 그것을 공경하는 것에서 벗어나거나 여래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기억하는 것을 연유하여 기쁨을 내는 것이 희이다.
혹 다시 스스로 관조해서 알고서 내가 세간을 벗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고, 혹 세간의 모든 중생이 번뇌의 티끌 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서 내가 이 큰 세간의 티끌 중에서 온갖 무명의 어둠이 중생을 가린 것을 없애 버리고서 고요한 열반의 세계를 이루게 하는 것을 희라 한다.
또 모든 이 세계를 건너 중생의 마음에서 티끌을 뽑아준다거나, 혹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보고서 서로 멀리 떠나지 않는다거나, 혹 중생이 모든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본 까닭에 마음에서 즐거운 일을 내는 것을 희라 한다. 모든 행이 무아(無我)인 것을 관조하므로 원수와 친한 사람 등의 일을 제거하고 진여의 평등함을 얻어 중생에게 이익을 짓는 것이다. 서로 어기는 법 중에서 자연히 보리분법을 베푸니[捨], 이것을 재산과 법 등의 보시를 베풀고 보시의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라 한다.
보시와 자애의 말과 자비와 중생에게 이익 주는 일을 버리지 않는다. 이익의 나머지 구절도 항상 이익 되게 중생의 행을 간직하기 때문에 일을 함께 하는 것[同事]을 밝힌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의 도를 돕는 행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따라서 이 네 구절의 풀이가 성립된다.

【문】지금
공의 뜻을 말하려 하니, 어떤 것이 공입니까?
【답】지혜로 제행(諸行)의 성품과 모습을 잘 풀이하지만 그 성품과 모습을 얻지 못하는 것을 공이라 한다.

【문】지혜가 제행을 없앨 수 있습니까?
【답】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의 모습[識相]의 경계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 중에 허망한 것이 없다. 보시한다는 의식의 경계는 참다운 일이 아니다. 수행의 인지(因地)에서는 같은 의식이 지혜를 낸다. 행을 일으키는 것에서 아래의 인(忍) 내지 성품과 법에 이를 때까지 상ㆍ중ㆍ하를 점차로 구분하고, 전ㆍ중ㆍ후를 잘 구분하고 나서 무루의 지혜에게 연을 지어준다. 또한 무루의 지혜마저 없앴기 때문이고 진실한 것 중에는 그 성품이나 모습이 없기 때문이고, 허망하지만 의식은 존재하기 때문에 식의 경계는 실제의 일이 아니다.
수행의 인지를 짓는 중에서는 같은 식이 지혜를 낸다. 행을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인(忍) 내지 성품과 법[性法]에 이르기까지 상ㆍ중ㆍ하를 점차 구분하고 전ㆍ중ㆍ후를 잘 구분하고 나서 무루의 지혜에게 연을 지어준다. 이미 무루의 지혜마저 없앴기 때문이고, 또한 진실한 견해 중에 인(因)을 장애하는 모습과 의식의 경계 중에서는 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기의 진실한 경계로 물러나 돌아가기 때문이고, 모습 없는 경계[無相境界]를 보고 법계를 보기 때문이고, 번뇌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은 자상(自相)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상의 경계는 다만 행식(行識)이 있기 때문에 저 법의 일은 평등할 뿐이다.
‘오직 식(識)만이 세간을 짓는다’고 한 것은 도를 닦는 행이 이루어져 지혜를 향하는 것이니, 이 모습은 스스로 모습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지혜에 의지한다면 성품이나 모습이 아닌 분별지혜이고, 이것의 자상(自相)은 본래 무상(無常)하다는 등의 지혜이고, 바른 일이 아닌데 그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식(識)인 것이다. 그러므로 식은 열등하거나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스스로의 모습[自相]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혜가 모습[相]이 아니라면 지혜는 동상경계(同相境界)이니 저것은 허망하게 스스로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의 모습[自相]을 취할 수 있다면 자기의 모습을 버리는 까닭에 오직 모습을 마음속에 기록하는 일이 있어
식을 풀이하여 성립시키니 이것은 식과 다르지 않다.
‘과보에 수순한다’고 한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지혜에 의지한다면 식과 함께 생하는 것이 연(緣)이다. 그러나 이 일의 경계는 이와 같이 서로 누적되니 지혜도 자기의 모습을 취한다. ‘위가 없다’는 등의 일은 이 일이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기의 같은 모습도 서로 어긋나서 이미 색(色)의 일에도 항상 하지 않음이겠는가.
만약 색의 일이 항상 하지 않는 것이 된다면 지혜는 이를 취할 수 있을 것이나 이러한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는 스스로 모습을 취하는 뜻이 없다. 지혜는 식을 수순하기 때문이고 저 성품은 이러한 이유로 멸하지 않는다. 진실한 경계의 모습을 지으므로 자기의 모습을 버린다는 뜻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지혜는 자기 모습의 경계가 없으며 혹 식은 진실한 경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어떻게 공(空)을 믿으면서 업보의 일을 수순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뜻 때문에 모든 업보를 믿을 수 있다고 말만 할 뿐입니다.
【답】공하다고 해도 생기는 작용이 있으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없다. 여기에도 지혜로 분별함이 있으니, 제행(諸行)에 대해 중생이 제대로 볼 수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지혜로 제행이 낳는 것에 모습도 없고 분별함이 없음을 아니 그러므로 잘 머무는 일과 무분별(無分別)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누가 지은 것이고, 이것은 어떤 것의 과보인가? 모습을 수순할 수 있기 때문에 의혹이 생기고, 의혹이 생기므로 업의 과보를 믿지 않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중생이라는 견해를 일으켜 그것 쌓기를 수미산같이 할지라도 아만(我慢)을 가진 자가 아만심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컨대 논에서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일체의 견해를 비우고 제거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볼 것이나
만약 공(空)이라는 소견이 있다면
이 사람은 교화할 수 없도다.

모든 공(空)을 바르게 관조하지 못하여
지혜의 밝음을 무너뜨려 없애니
비유하면 뱀을 잘못 잡고
주술을 행함에 방편이 없는 것과 같도다.

이러한 중에서 회향하므로
여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셨으니
법과 차법(次法)을 알아야 하며
근기가 둔한 사람은 헤아리기 어렵다.


보살은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교묘하게 제시하고, 모든 행을 잘 관찰해서 분별하여 모든 인연의 집기(集起)를 통달한다. 또한 깊고 깊은 지혜로 이미 오래도록 익혔으므로 그 식(識)이 인연의 일을 안다. 그러므로 의혹을 내지 않고 이와 같은 인(因)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이미 성품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행에 분별하는 것이 없다. 이러한 뜻 때문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는 것은 염불의 방편으로 교묘히 거두어 지을 행을 이룬 것이니 응신불이 교화하는 곳과 같기 때문이다. 점차로 살바야의 과를 얻으니 보살이 믿는 마음 때문에 위의 용맹한 정진과 무아(無我)를 인(忍)하는 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무아를 감내하는 일을 말해야만 합니까?
【답】중생의 상(想)과 식(識)의 경계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세제가 있으므로 모든 법은 같지만 다만 알아서 잘 가려 분별해야 한다. 이미 구하고 찾았으나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듯한 법일 뿐이다. 또한 이것은 허깨비와 같아서 분별함이 없다. 번갈아 서로 힘을 인연하는 것이 없으니, 업과 번뇌라는 땔나무와 불의 인(因)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등불의 불꽃의 근본과 같다. 근본법의 인연은 비슷한 뜻이 있기 때문에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저것은 생길 때 쫓아 나오는 곳이 없고 없어질 때도 자취가 없으며 이르는 곳도 없다. 이 중의 모든 것에서 오히려 바라고 써서 구한다면 이것을 무아인(無我忍)이라 한다.

【문】만약 무아인으로 중생이 없다는 것을 분별을 할 수 있고, 보살들로 하여금 모두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무아인의 일을 말합니까?
【답】모든 중생의 처소에서 이익의 뜻을 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의 무아인을 말하는 것은 다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저 무아인 때문에 보살은 모든 번뇌를 조복하고 닦는 중생의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에 제행(諸行)의 연(緣)이 거짓이어서 분별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 뿐이다.
설사
중생의 근심이 있고 세간의 행으로 돌아와서 보살을 괴롭힌다고 해도 중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리심을 버리지 않는다. 저 마음을 또한 간직하고 지혜와 자비를 성취하므로 중생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선근을 닦고 익힌다. 살바야를 얻기 위한 까닭에 모든 행위를 버리지 않으니 이래야 보리를 얻는다.

【문】공(空)을 믿는 것과 무아를 감내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답】공을 믿는 것과 무아의 일은 모든 행을 분별하고 관찰하는 것을 수순할 수 있으므로 법계의 근본처를 증득한다. 무아인은 자기 모습의 경계이므로 저 사람이 중생의 물건을 분별하고 관찰하는 것을 수순할 수 있으니, 오로지 법의 처소에서 본래의 근본을 보기 때문이다. 공을 믿는다는 것은 법의 성품을 취하는 교만을 제거하는 것이고, 무아인은 중생의 성품이 있다는 교만을 제거하는 것이다.

【문】보살에게 중생상이 있기 때문에 큰 자비를 일으킨다면 무슨 까닭에 무아의 법을 믿으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보살의 대자비상(大慈悲相)과는 어긋납니다.
【답】이것은 큰 자비의 인(因)이므로 보살이 모든 법이 무아임을 증득해서 알 뿐이다. 중생계만을 생각하니 이 모든 중생이 무명의 어둠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무아법을 익히는 중에 제멋대로 생각해서 중생상을 지으니 이미 짓고 나서는 이것이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집착한다. 이미 인연에 애착하였기에 또 업을 조작하여 두게 되고, 이 때문에 다시 세간의 생사를 끊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든 법을 믿고 즐거워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깊고 두터운 연민의 마음과 자비의 마음을 낸다.

【문】열반의 마음을 향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열반의 뜻을 풀이해야 합니다.
【답】업번뇌와 가깝게 인연하는 과보가 없기 때문이고, 인연이 없기 때문이고, 5음(陰)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마치 불이 생길 인연이 없기 때문에 불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혹 지혜의 불이 따뜻하더라도 저 식의 종자라는 연이 없으면 없어진다. 미래의 연(緣)이 있어 비록 가지고 있다 해도,
싹이 마치 불의 씨앗이 타오르는 것처럼 생겨나도 싹이 생기는 것을 없애고 번뇌의 불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열반이다. 예를 들면 나무에서 뿌리를 뽑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열반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有餘)이고 둘째는 무여(無餘)이다. 이 중에서 유여는 번뇌만을 없애는 것이고, 무여는 연(緣)이 없기 때문이다. 집(集)을 좇지 않아 고통이 없어지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열반에 도달하므로 도열반(到涅槃)이라 하고 ‘열반에 머문다’고 한다.

【문】열반을 향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답】세간의 모든 근심이 이와 같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이 번뇌를 없애고 저 고요한 감로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열반을 향하는 등의 뜻이 식과 함께 한결같이 생겨나 모든 착한 법이 마음에 모이는 것이다. 이것을 열반을 향하는 뜻이라 한다.

【문】‘뜻으로는 세간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세간의 뜻입니까?
【답】업번뇌의 일 중에서 거짓된 인연이 서로 번갈아가며 이어져서, 시작이 없는 이래로 서로 이어져 세간을 끊지 않고 세간 등에 이르므로 도세간(到世間)이라 한다. 세간을 고요히 하려면 이 뜻을 배워야 한다. 비록 보살이 모든 근심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을 일으켜 세간의 뜻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으므로 세간의 행을 행함을 일으키는 것을 닦는다.

【문】마음을 따라 비슷하게 모든 행을 일으킬 때, 착한 법을 닦아 착한 과보를 얻고 악한 법을 닦아 악한 과보를 얻는다면, 어찌하여 보살은 그 뜻을 열반으로만 향하고 세간에서는 똑같은 온갖 업의 행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답】보살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므로 오래도록 행을 닦아 익힌다. 보살이 열반을 향하는 뜻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마음에서는 어긋나고 물러날 수 있으니 세간에 많은 근심이 있는 줄 잘 알기 때문이다. 비록 보살은 세간을 싫어하고 열반을 향하는 뜻이 있지만 마음으로는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행을 일으킨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즉 ‘모든 보살이 무루법의 근본 중에서 보살의 법을 늘리고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루의 근본 중에서 모든 불법을 늘리고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보살법을 버리지 않는다. 비록 세간의 모든 근심을 보지만 세간을 취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아, 비유하면 종자가 허공 가운데에 있어도 태어나 자랄 수 있는 것처럼, 또 모든 번뇌의 잡된 세간법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자라게 할 수 있다.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보시를 행한다”고 하였다.

【문】이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풀이해 주십시오.
【답】번뇌라는 물로 적시어 자기의 모습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계율과 문혜(聞慧)와 사혜(思慧) 등을 닦고 따뜻한 모습을 짓는 것을 처음으로 삼으며, 또 세간을 벗어나려는 선근이 따뜻하게 모여서 완성되기 때문에 마음을 따라 무루의 선근 종자 가운데 편안히 있게 한다. 중생의 마음에 따라 계율로 널리 교화하므로 교화하는 보살이라 한다.
자비를 잘 닦는 것과 방편이 교묘한 것이 중생심을 교화하는 계율이 되므로 재물과 법의 두 가지 보시로 중생을 거두어들인다. 중생을 거두고 나서 중생이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관찰하여 자기의 힘에 따라 3승법 중에서 교화한다.

【문】보시를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보시라고 합니까?
【답】탐하지 않는 것 등이 마음의 생각에서 함께 생기고 하나의 과보로 보시하는 법을 함께 일으키고 보시를 행하는 것과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니, 이것을 보시라고 한다. 이 중에서 여러 가지로 교화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 과(果)를 보상받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즐거움을 버리고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문】‘중생을 버리지 않는 뜻으로 보시를 행한다’고 했으니 어찌 과보를 구하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습니까? 무슨 까닭에 보시를 행하고도 마음은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답】비록 과보를 구하지 않지만 보시를 행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므로 허물이 없다. 혹은 ‘이것은 과보의 처소이니 방편을 넓혀야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모든 중생을 생각하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보시를 행한다. 보시를 행하고서 세간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얻는다. 그러나 후에 살바야를 얻는 일 중에서는 서로 어긋난다.
비록 현재에 중생을 향하여 보시를 행하지만 저를 막기 위한 까닭이고, 보살의 진실한 공덕을 닦도록 권하는 까닭에 ‘보시를 행하고도 그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은 깊은 마음과 곧은 마음을 성취하였기 때문이고, 자기의 즐거움을 바라고 구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 등의 법을 행하고서도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因)과 과(果) 중에서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바라고 구하지 않고 다만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다른 중생으로 하여금 불보리를 얻게 하는 까닭이다. 모든 원(願)을 일으키고 모든 선근을 닦을 때 이와 같은 원을 짓는다.
보살은 또 ‘만약 이와 같은 법이 있다면 나는 살바야를 닦은 다음에 버리고서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각기 체(體)가 있어서 행을 닦는 사람은 자기의 몸으로 과보를 얻는다. 비록 그렇다 해도 나는 이 살바야로 다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편의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은 고요한 마음에서부터 모든 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혜와 보시 등의 모든 법의 인(因)을 일으킨다. 모든 인연에 의지하는 지혜 등의 과보의 법, 저 모든 법이 다 보살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마음을 일으켜 현전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보살의 공덕은 성문ㆍ연각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보살의 진실한 공덕이라고 한다.
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의 행은 세간의 보시이니, 자신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보시를 행한다. 또한 모든 외도는 정법에서 벗어난 바깥의 일의 과보를 구하기 위해서 삿된 행을 행하므로 그것들을 대치하여
바른 행에 머무르는 뜻을 말한다. 그러므로 네 종류의 이익을 밝히니, 네 가지 4구(句)를 설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 등이 네 종류의 이익 된 일인가? 첫 번째는 큰 조복의 장을 얻는 것이니 일에 자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마군[魔]의 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모든 원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을 벗어나서 비고 한가한 곳 등에 있기 때문이고 모든 수용(受用) 중에 헐뜯고 싫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으로 장엄하는 것을 돕는 까닭에 끝없는 공덕의 일을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이익 등을 순서대로 해석하겠다.
이 중에서 첫 구절인 ‘큰 조복의 장(藏)을 얻는다’는 것은 공덕과 지혜의 행을 이루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 중에서 ‘모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은 공덕의 행을 이루는 것을 돕는 것이다. 나머지 세 구절도 지혜의 행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그 이유는 공덕과 지혜의 행을 모으는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4구는 마군의 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모든 장애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애를 깨끗하게 하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4구는 모든 선근의 법을 거두고 모든 백법문(白法門)2)을 모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백법문을 모으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4구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모으고 이루는 것을 도와서 모든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의 모습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니, 끝없는 공덕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 큰 조복의 장을 얻는 것은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바른 법을 들을 수 있고, 고요히 사유해서 법과 차법(次法)을 수순해서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6바라밀을 들을 수 있으므로 바른 법을 들을 수 있고, 무아의 마음으로 설법하는 사람을 친히 모시는 까닭에 고요히 사유해서 마음에서 게으르지 않는다. 산림에 즐겨 머물러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므로 법과 차법을 수순하는 것을 행한다.
이 중에서 모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기 때문에 공덕의 행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나머지 세 구절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와 수혜(修慧) 등이 깨끗하기 때문에 지혜의 행을
이루는 것을 돕는다. 세간 세력의 일과 비슷한 법에 의지하므로 이 네 가지 큰 조복의 장 등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네 종류의 일이란, 첫째는 일의 모습을 볼 때에 여러 가지 유희 등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악 등의 일을 받아들여 듣는 것이고, 셋째는 창고와 곳간의 모든 재물 등을 받아들여 생각하고, 넷째는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한 음식 등을 받아들여 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보는 사람은 문혜와 사혜와 수혜 등을 알아야 한다.
‘보살에게 네 종류의 마군[魔]의 도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는 말은 네 종류의 마군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군의 도를 넘어서는 법을 말하는 것이니 알아야 한다.
‘네 종류의 마군’란 대승법을 행하는 중에 장애를 지어 보리심을 버리게 하는 것이며, 중생을 교화하는 중에 장애를 지어 모든 중생의 처소에 대해 악심을 내지 않는 것이며, 불이(不異)의 행을 하는 중에서 장애를 지어 모든 견해를 잘 알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행이 만족한 중에 장애를 지어 모든 중생에게 교만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다스려서 움직이지 않는 승(乘)을 말하니, 스스로 중생의 모든 옳지 않은 행의 인(因)을 버리고, 모든 삿된 행의 인(因)을 버리고, 바른 행을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인(因)을 버려야 마군의 도를 넘어선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 모든 선근을 거두어들이니, 네 종류의 선근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네 종류의 법을 말하여 모든 착한 법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일심(一心)의 경지에서 닦는 모습이고, 둘째 일심이 아닌 경지의 모습이니 이것은 세 종류의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이고, 고행을 닦는 모습이며, 문혜와 사혜의 모습으로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을 벗어나는 것이다.
‘비고 한가한 곳에 있다’고 한 것은 닦는 모습의 선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 대해 4섭법(攝法)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행을 행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므로 행을 행한다. 이것이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이다.
모든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중생을 위해서 바른 법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고행(苦行)의 모습에서 들어도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것이 없고 뜻[義]에도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선근을 모으고 정진을 행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문혜와 사혜의 모습이다.
보살에게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복덕과 장엄의 일이 있으니 욕(欲)에 의지해서 일으켜서 중생으로 하여금 버리게 하므로 네 가지 처(處)를 말한다. 어떠한 것 등이 네 가지 처인가?
의혹하여 머뭇거리는 것 등과 악도에 떨어지는 것과 소승을 즐거워하는 것과 불법 중에서 악한 마음의 비방 등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중에서 ‘마음으로는 과보를 구하지 않지만 보시를 행한다’고 한 것은 저 의혹하여 머뭇거리는 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까닭이다.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에게 큰 자비를 낸다’고 한 것은 저 악도에 떨어지는 중생을 돌이키기 위한 까닭이다. ‘칭찬하고 찬탄하여 권하여서 모든 중생들이 보리심을 내도록 교화한다’고 한 것은 저 소승을 즐겨하는 마음을 돌리기 위한 까닭이다. ‘모든 하열한 사람들에 대해 인(忍)을 닦고 익힌다’고 한 것은 불법 중에서 악심의 비방 등을 일으키는 것을 돌이키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 좁고 열등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바른 법 중에서 악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살에게는 네 가지 무명의 번뇌지(煩惱地) 법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것 등이 네 가지인가? 금계(禁戒)를 간직하는 일과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일과 또 광명을 놓아 세월마다 의지해서 사용하는 일과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일이다. 이것을 네 가지 법인 무명의 번뇌지를 넘어서는 것이라 한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장애 없는 것이 있어서 장애 없는 지혜를 갖추게 한다.
첫째는 법의 보시이고, 둘째는 바른 법을 거두어 보호하는 것이고, 셋째는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다른 사람을 가볍게 여겨 비방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름만 보살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바른 행의 차별을 보여 나타내기 때문에 뜻을 일으키고 점차로 법을 말하는 행[法行] 등의 방편으로 나타내 보이니, 이와 같은 뛰어난 행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법행(法行)은 성문 등의 행보다 뛰어난 것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등행(等行)은 자기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을 자기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살의 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이니
모든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착한 행은 보살행 중에서 뛰어난 뜻[義]을 나타내 보여 모두 착하고 깨끗한 것에 이르고 방편이 교묘하여 보리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바른 법의 행을 실천하는 것은 보살행 중에 저 방편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보살은 바른 법의 행을 행하니, 성문과 연각의 행 가운데 다섯 종류의 뛰어난 일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중생의 깊은 이익을 위해서 즐거움을 구하여 일체지(一切智)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공덕을 잘 헤아릴 수 있다’고 한 것은 깊은 마음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보살은 깊은 마음이 뛰어나기 때문에, 자기 몸이 항상 모든 중생의 깊은 이익을 위해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모든 성문과 연각 등이 네 종류의 뛰어난 행으로 일체지에 믿어 들어가도록 권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든 보살을 안다’고 한 것은 중생에게 권하여 일체지 중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성문과 연각 등이 자기의 공덕을 잘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보살은 자기가 얻은 것을 잘 알고, 또한 2승(乘) 등의 행을 아는 것이니, 2승 등이 보살의 공덕을 통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은 보살은 집착하고 교만한 마음이 없으니 법무아(法無我)를 증득하여 아는 까닭에 그것을 닦는다.
두 번째 구절의 성문 등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있으니 복전(福田)의 처소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견고한 뜻에 깊이 들어간다’고 한 것은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에 견고한 뜻에 깊이 들어갈 생각을 일으키니, 모든 성문과 연각 등은 중생의 이익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보살 등의 행 중에는 여덟 가지 등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공경한다’는 말 등은 세 종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마음의 행(行)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헛되이 사랑하거나 공경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원수나 친한 사람에게 그 마음이 동등하다’고 한 것은
이익이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등에서 동등한 행을 실천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선지식이 되고 나아가 열반을 이룬다’고 한 것은 모든 때에 사랑과 공경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항상 계산하고 헤아려서 의념(意念)에 이르고 앞의 뜻을 충분히 사랑하고 공경하고 물었다’고 한 것은 물은 것을 위로하고 가르쳐 주는 가운데에 동등한 마음인 까닭이고, 한량 있는 모든 성숙한 마음 등으로 교화하여 기쁘고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허락된 일에서 끝내 근심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동등한 일을 돕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허락된 무거운 짐을 따르거나 아직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서 큰 자비의 마음을 행하는 것을 끊지 않고 피로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자비한 마음이 동등하여 치우친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니, 모든 무거운 짐을 허락한 까닭이다.
‘다시 마음에 피로하고 게으름이 없다’고 한 것은 속박을 당함이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동등하여 마음에 기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없으므로 장차 모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바른 법의 이름을 구하고 듣는 것에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방편이 교묘해서 동등하고 글의 뜻이 교묘하기 때문이다.
‘교화를 따른다’고 한 것은 방편으로 교화하기 때문에 다만 자기의 허물만을 본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본다’는 것은 성내지 않는 마음으로 저 사람을 말하게 하는 것이니, 모든 말 중에서 동등한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의 허물을 보지 않고 성내는 마음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동등하지 않은 말이다.
‘보리심으로 모든 의의(依儀)를 행한다’고 한 것은 원을 일으키는 것 등이 모든 착한 것과 동등하기 때문에 지은 것이 모두 큰 보리에 동등하게 회향한다. 원과 선근의 행을 짓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6바라밀로 행한 보시에서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하나하나의 바라밀을 말하는데 장애가 있으면 장애가 없는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 등을 다스려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설혹 몸과 입을 인(忍)할 수 있다 해도 모든 중생에 대해 마음의 인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경에서 ‘모든
중생의 인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생을 위하여 모든 착한 뿌리를 닦고 모은다’고 한 것은 3승의 보리를 닦고 익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비록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도 선정의 행을 일으킨다’고 한 것은 생(生)이 있기 때문에 색계 중에 아주 열등하다는 말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삼마발제(三摩拔提)3)가 아닌 중에서 보살이 색계 중에 태어난다’고 한 것은 자기 몸의 불법을 성숙시키기 때문이고, 다른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 욕계 중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색계처(色界處)의 방편에서 거두어지는 지혜의 행이 아니다.
4섭법(攝法)에 거두어지는 방편이라는 말에서 저 ‘방편’이란 말은 4섭법으로 거두어진다는 뜻이다. 어떠한 네 가지 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인가? 첫째는 법행(法行)의 일이고, 둘째는 수행의 일이고, 셋째는 성행(性行)의 일이고, 넷째는 과수행(果修行)의 일이다.
‘세 종류 모습의 행이 있다’는 것은 계를 지키고 계를 깨뜨리는 중생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고, 무이(無二)의 마음과 분별을 짓는 마음을 낸다는 뜻이다. ‘이러한 교수(敎授)’라고 한 것은, 이것은 계를 지키는 것이고 이것은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교수(敎授)’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과 모든 근심 등에서 저것은 모든 분별을 버리고 교수를 바라고 구하고 교수를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고 한 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용맹스럽게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산림을 즐긴다’고 한 것은 고요함에 의지해서 모든 욕심과 탐욕 등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 세 구절에서 수행의 일을 나타내 보인다.
어떠한 세 구절에서 성(性)의 일을 나타내 보이는가? ‘마음에서 세간의 여러 일을 즐겨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마음의 모습이 흩어지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어지럽지 않으므로 소승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승 중에서 항상 큰 이익을 본다’고 한 것은 소승의 마음을 넘어서서 버리고 대승의 마음을 수순하는 것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악한 지식을 떠나고 착한 벗은 가까이 한다’고 한 것은 고요한 중에서 용맹스러워 잠시도 쉬는 때가 없다는 말이다. 중생을 가까이 하고 인(忍)을 가까이 하여 고요히 용맹스럽게
잠시도 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말한 법행(法行)’이라고 한 것은 사마타(奢摩他)4)와 비파사나(毗婆舍那)5)로 생각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거두는 것이다. 생각을 따르고 함께 있는 동료를 따르기에 이러한 법행의 일이 있게 된다. 성과(性果)에 두 종류의 모습이 있으니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이고 중생을 교화한다. 이 중에서 ‘마음이 깨끗하다’고 한 것은 지혜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세간과 출세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네 가지 범행을 이루고 장엄하여 다섯 가지 신통에 노닌다’고 한 것은 세간을 깨끗이 하는 지혜에 의지해서 큰 공덕을 받으니, 힘에 의지해서 과보를 닦는 것을 돕고 모으기 때문이다. 세간을 깨끗이 하는 지혜를 알아야 한다. ‘항상 지혜에 의지한다’고 한 것은 세간의 지혜를 닦아서 만족할 줄 알고 저 마음을 버리고 깨끗해져서 출세간의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세간지혜라고 하니 알아야 한다.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네 가지로 나타내 보인다. ‘모든 중생이 삿된 행과 바른 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번뇌 등의 근심에 머물기 때문이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도록 괴로운 것을 참지만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결정한다’고 한 것은, 말한 것이 항상 정해져 있고 앞과 뒤의 모습을 공경해서 잘못을 덮는 것이다.
‘앞에서 말하고 뒤에서 귀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참다운 말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보호하여 말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모든 위의(威儀)에서 지은 것 중에서 오직 보리심이 으뜸이다’라는 말은 중생을 위해서 보리를 얻는 것에 의지하는 때문이고, 이양과 명성과 소문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분별하여 바른 행에 머무른다. 보살은 이미 모든 뛰어난 공덕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까닭에 모든 비유를 말했으니 알아야 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대지(大地)가 모두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은 첫 비유 중에서 보살이 중생에 의지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서 여러 가지 과보에 애착하는 종자를 늘리고 일으키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분별이 없다.
‘그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악을 짓고 갚을 수 없고,
좋은 것을 짓고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익과 악 중에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ㆍ세 번째ㆍ네 번째 비유로 의(義)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선근의 인(因)을 늘리게 하고 모두 일에 이르게 하니, 비유하면 달이 처음 생길 때 달의 광명과 형색이 날마다 더욱 밝아지며 차츰 원만하게 불어나는 것과 같다.
다섯 번째 비유는 중생의 이익에 의지하므로 보살이 보리의 조도행(助道行)을 스스로 성취하는 것을 늘리는 것이니, 비유하면 사자는 짐승의 왕이어서 이르는 곳마다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니 편안히 행하는 것과 같다6).
일곱 번째 비유는 세간과 열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저 두 가지를 집착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비유하면 잘 길들여진 코끼리는 모든 무거운 짐을 질 수 있고 피로하고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여덟 번째 비유는 세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피로하고 게으른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비유하면 연꽃이 물속에서 생기지만 물에 집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홉 번째 비유는 세간의 번뇌가 물들일 수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비유하면 사람이 나무를 베어도 뿌리가 있으면 다시 자라나는 것과 같다. 열 번째 비유는 비록 번뇌에 물들었지만 열반을 증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비유하면 모든 방향의 강물들이 모두 큰 바다에 들어가는데 바다에 들어가고 나서는 모두 한 맛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열한 번째 비유는 비록 선근과 번뇌가 있으나 회향하고 원을 일으켜 거두어 취하므로 보리의 인(因)을 보이는 것이니, 비유하면 수미산에 도리천과 사천왕천 등이 모두 의지하여 머무는 것과 같다. 열두 번째 비유는 성문과 함께 하는 열반을 막는 것이니, 저 성문은 자기의 원과 모든 선근을 버리고 열반을 취한다. 모든 보살은 비록 열반을 보여주지만 자기의 원을 버리지 않으니, 모든 선근에서 큰 자재함을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비유하면 국왕이 신하로 힘을 삼기 때문에 나라를 이어가는 등의 온갖
일을 갖출 수 있는 것과 같다.
열세 번째 비유는 어떻게 열반에 들어가서 중생의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풀이하여 성립시킨 것이다. 비유하면 하늘이 큰 구름을 일으키면 반드시 비를 내려 모든 과실을 익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열네 번째 비유는 전륜왕이 나가는 곳마다 저곳에서는 칠보를 모두 갖추는 것과 같다.
열다섯 번째 비유는 무슨 까닭에 항상 말하지 않고 태어나서 때를 기다리는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열여섯 번째 비유는 비유하면 마니의 구슬이 있는 곳마다 저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의 금은의 보물이 있는 것과 같다. 열여섯 번째 비유는 성문 등과 함께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열반 중에 허물과 근심이 있는 까닭에 저 성문 등은 없다. 비유하면 도리의 모든 하늘이 동등한 뜰에 들어가니 모든 사용하는 물건이 모두 동등한 것과 같다.
열일곱 번째 비유는 저 성문 등은 힘이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이니 성문은 뛰어난 법을 증득하여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은 자기와 남에게 평등한 행으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 비유하면 주술과 약의 힘으로 독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과 같으니, 여러 큰 성 안에 있는 분뇨가 만약 사탕수수나 포도밭 안에 있게 된다면 이로운 것과 같다.
열여덟 번째와 열아홉 번째 비유는 보살이 비록 모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한 것을 말하지만 뛰어난 성문 등이 근심을 짓지 않고 큰 이익과 공덕의 일을 짓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이 모든 비유에서 앞의 구절은 분별하여 말하는 것을 드러내고 뒤의 구절은 점차임을 알아야 한다.

【문】저것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답】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모든 중생의 선근을 이루는 것을 돕지만 과보를 바라는 마음은 없다. 모든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대지와 같은 마음이지만 그러나 또 아무런 분별이 없는 경지와 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중생은 자기에 의지하고 자기의 힘을 빌려야 수용할 수 있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선근의 인(因)을 내기 위한 까닭에 공경과 사랑 등을 일으킨다.
마음이 물과 같지만 또한 물과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바르게 수용함[正受]이 늘어가는 중에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선근을 성숙시키고자 싫어하여 떠나는 등의 법을 말한다.
마음이 불과 같지만 또한 불과 같은 것이 아니니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서로 어긋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선근이 성숙한 자를 교화하고자 해탈을 나타내 보인다. 기운을 나타내어 교화에 응하기 때문에 바르게 가르치는 것을 돕는다.
마음은 바람과 같지만 또한 바람 같은 것이 아니니 모습을 보아 힘을 빌리기 때문에 수용할 수 있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모든 백법(白法)을 스스로 늘릴 수 있다.
마음은 달과 같지만 또한 달과 같은 것이 아니니 오직 백월(白月)만이 비출 수 있고 흑월(黑月)은 비추지 않는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그리하여 모든 백법과 흑법 중에서 평등한 마음으로 지혜로써 모든 법을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해와 같지만 또한 마음은 해가 아니니 라후(羅睺)7)의 장애를 두려워하여 행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모든 6도(道)의 태어난 곳에서 모든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고 행한다.
마음은 사자와 같지만 또한 사자와 같은 것이 아니니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서 태어나서 물러나 돌아가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무거운 짐과 고통 등을 참을 수 있다.
마음은 조복된 용왕과 같지만 또한 용왕과 같은 것이 아니니, 이익을 얻거나 이익을 잃을 때 부드럽게 고통과 즐거움을 말하여 이익을 보호하고 손실을 막는 가운데 물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세간법 중에서 이익을 늘리는 일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다.
마음은 연꽃과 같지만 또한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니니 줄기를 자르고 나면 다시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비록 모든 번뇌를 다시 없애지만 선근의 힘 때문에 세간에서 마음을 낼 수 있다.
마음은
나무의 뿌리를 베지 않는 것과 같지만 또한 나무의 뿌리를 베는 것과 같지도 않으니, 바른 뿌리만이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선근으로 회향하여 큰 보리와 열반을 발원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바닷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만 또한 바닷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다만 수순하는 것이 바닷물과 같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크게 성취한 큰 보리와 열반 등의 모든 선근을 닦고 모으는 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유희할 수 있다.
마음은 수미산에 머무는 모든 하늘세계[諸天]와 같지만 또한 수미산에 머무는 것과 같지 않으니, 그저 자신의 즐거움만 즐기고 집착하여 마음에 방일함이 많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불공(不共)의 방편과 지혜의 힘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은 국왕이 신하의 힘으로 국가를 계승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지만 또한 국왕이 신하의 힘으로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나라를 막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자기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을 보호하고 이롭게 하려 한다.
마음은 하늘에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지만 또한 하늘에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항상 그때에 맞춰 잘 익도록 비를 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보리분(菩提分)8) 등의 법을 영원히 늘리고 자라게 할 수 있다.
마음은 전륜왕이 나가는 곳과 같지만 또한 전륜왕이 나가는 곳과 같은 것이 아니니, 오직 하나일 뿐 둘이 없는 대인(大人)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해탈심 등으로 함께 일시에 생기기 때문이다.
마음은 마니 구슬 같지만 또한 마니 구슬 같은 것이 아니니 영원히 고장가(庫藏迦)를 벗어나고 사파나(沙波那) 등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이미 무루의 계(戒) 중에 들어가서 짓는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모든 즐거움을 받는다.
마음은 도리(忉利)의 모든 하늘[諸天]이 동등한 뜰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만 또한
도리의 모든 하늘이 동등한 산림[林]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 않으니, 모든 번뇌의 업만을 늘려 몸을 버리고 악도 중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모든 번뇌를 없애어 악한 곳에 떨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번뇌의 독을 눌러 없애는 것과 같지만 다시 독을 간직하는 것을 그치는 것과 같지는 않으니, 중생을 해치고 이익이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렇지 않으니 보살은 자기의 번뇌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마음은 큰 성 안에 있는 더러운 번뇌와 같다. 보살도 또한 그렇다. 마치 세간에서 찬탄하는 등등의 일의 공덕과 같이, 저 공덕을 넘어서서 뛰어나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 없는 공덕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 때문에 모든 보살을 비교할 것이 없는 공덕을 가진 사람이라 부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바른 행의 차별 중에서 모든 뛰어난 공덕을 이미 말하고, 바른 행의 근본과 성품과 모습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 근본과 성품과 모습을 중도의(中道義)로써 보인다. 두 극단[邊]을 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중도의 뜻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두 극단인가? 첫째 외도의 극단에 있는 아견(我見)이다. 그들은 5음(陰)과 18계(界)9)와 12입(入)10)에 대해 제멋대로 헤아려서 집착한다. 이것은 상견(常見)이다. 이것을 나중에 총괄적으로 말할 것이다. 항상하다[常]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아(我)도 하나의 극단이다. 둘째 성문과 연각의 극단이다.
모든 5음 등 중에서 무상(無常)에 집착하고 무아(無我)에 집착하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총괄적으로 말하겠다. 무상도 제2의 극단이고 무아도 제2의 극단이다. 모든 이 두 극단의 중간을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그것에는 분별하는 뜻이 없으므로 무색(無色)이라 하고, 연설할 수 있는 뜻이 아니므로 볼 수 없다[不可見]고 하고, 식(識)의 일이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하고, 취할 주관과 취할 대상을 벗어났으므로 모습이 없다[無相]고 하고, 취하는 주관을 벗어나 기식(記識) 등의 의(義)가 있으므로 무기(無記)라고 하고, 세간과 열반의
뜻에 머물지 않으므로 집착이 없다[無著]고 이름한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이 모든 외도가 아(我)가 있다고 제멋대로 집착하는 까닭에 대치하는 법을 말한다. 만약 아(我)와 인(人)과 중생(衆生)과 중생의 수명양육(壽命養育)을 관찰하지 못한다면 장부인 부가라(富伽羅)11)와 마나파(摩那婆)12) 등을 관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한 것을 응당 알아야 한다.
성문과 연각은 모든 5음 중에서 무상과 무아라고 제멋대로 집착하니 저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만약 색(色)이 항상 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고, 수ㆍ상ㆍ행ㆍ식도 항상 한 것이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고, 내지 아(我)도 하나의 극단이고, 무아도 제2의 극단이라고 관찰하여, 모든 이 두 가지의 중간에서 저 모든 것은 색도 없고 행도 없으며, 명(命)과 지혜와 깨달음과 집착도 없다고 한다면, 가섭아, 이것을 중도(中道)의 모든 법의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무상(無常)에 집착하고 무아(無我)에 집착함을 인(因)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5음이 무상하다는 집착을 깨뜨릴 때가 없고 또한 5음이 무아라는 집착을 깨뜨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분별하여 취할 일이 한량없기 때문에 취하는 주관의 일도 한량없음을 분별하여 말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가섭아, 만약 마음에 진실함이 있다면 이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만약 마음에 진실함이 없다면 이것도 제2의 극단이다’ 여기에서 진실하다는 마음은 말한 대로 무상하고 무아라고 분별하는 것에 수순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진실하다’는 것은 예컨대 항상 하다는 것과 아(我)에 분별하는 것이다. 심수(心數)가 없다 해도 업행(業行)이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수(心數)가 없다’는 것은 업의 행만을 지었기 때문이고, ‘의(意)가 없다’는 것은 생각해서 말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識)이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은 보(報)이고,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이라고 한 것은 어리석은 것과 어리석지 않은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과보를 애착하지 않으니 그것에 대치하기 때문이다. ‘죄가 있고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은 모든 악의 세간과 출세간이 없기 때문이다.
유루와 무루에서 ‘무루’는 유루의 마음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고 ‘유루’는 흑붕(黑朋)이 말한 물드는
등의 법이기 때문이다. ‘백붕(白朋) 등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깨끗한 등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만약 마음에 진실함이 있고 진실함이 없다면’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가지는 저 수순하는 모든 법 중에 착함과 착하지 않음과 나아가 더러움과 더럽지 않은 것인 모든 이러한 두 극단을 얻을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니, 이것을 모든 법 중에서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라 한다.
이 중에서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저것으로 보기 때문이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저것만을 말하기 때문이고, 근본을 말할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와서 묻는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바르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 다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면[傍]의 뜻이 있다.
‘착하고 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은 이것은 본래 나머지 상상(上上)의 구절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외도와 성문 등을 다스리는 말을 하고 중도의 뜻을 다스리는 말을 마치고서 보살의 극단을 다스리는 말을 한 것이다. 이 중에서 모든 외도들은 항상 하다는 것과 아(我)라는 것에 집착하여 전도되는 것이다.
전도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마치 눈먼 사람이 땅에 넘어져 엎어지듯이 모든 성문과 연각 등도 수행하여 인무아(人無我)를 보고 나서, 깨닫고서 행하기 때문에 모든 행(行)은 무상하고 무아라는 생각을 내고 본래 법에는 아가 없다는 것을 본다.
모든 행이 무상하고 무아인 것에서부터 생기는 것에 의지해서 보살은 법무아(法無我)를 보고 수행하고 나서 본래부터 법무아를 익힌다. 후에 제멋대로 끝이 있다는 것[有邊]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세 종류의 유변에 마구 집착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대치와 같은 자상(自相)에 대해 제멋대로 집착을 드러내 보인다”고 말하였다.
유와 무의 일에 대하여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유는 하나의 극단이고 무는 제2의 극단이며, 그리고 명(命)도 없고 지(知)도 없고 깨달음과 집착도 없다. 이것이 중도의 모든 법에서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다”라고 하셨으니, 말한 것과 같이 알아야 한다. 장애가 있는 것에 의지해서 대치하므로 집착된 무명은 밝음[明]을 위해서 말해진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가섭아, 내가 너희들을 위해 말한 12인연은 말하자면 무명은 행(行)을 연(緣)하니, 무명이 없어지고 나면 근심과 슬픔과
고뇌와 괴로움과 번민 등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유위와 무위의 집착과 나머지 윤회의 도를 없애는 까닭이다. 행과 행을 없애는 이와 같은 구절에서 이것은 모든 집착 등을 대치한 것이다. 이것이 불이(不二)에서 망상하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성품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평등한 성품이기 때문이고, 불이의 모습을 말하기 때문이다.
‘밝음을 생기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무명을 없애게 하는 것도 아니며, 행(行) 등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 멸(滅)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비록 분별의 성품과 모습이 성취되었다 해도 이와 같이 저 모든 지혜로 저들이 비방하는 극단을 막을 수 있으니, 밝음이 아니고 무명이 아닌 것도 이것들과 같다.
만약 공을 쓰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하게 되지만 그러나 법의 성품은 그대로 공이다. 무상(無相)을 쓰지 않으면 모든 법의 모습이 없게 되지만 그러나 법에는 자연히 모습이 없다. 게다가 다만 법에는 자연히 일어나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고 성품도 없다.
이와 같은 말들은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이미 공(空) 등의 모습이 인연으로 생긴 법임을 밝혔으나 그 성품을 망상분별하면 혹 성품을 성취하게 되어 공(空)을 이해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법의 근본이 그런 것이다.
만약 성품을 망상분별하면 다시 성품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또한 공하며, 이와 같이 본래 성품이 없다. 여기서는 밝음이 있는 것과 저 장애가 있는 것을 말하여 망상으로 성품을 성취하는 것을 벗어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비방하는 극단을 이미 막고 보호하니, 이 중에서 일곱 종류의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 있으므로 밝음을 말하여 공을 삼고 내지 성품 없음[無性]을 삼는다.
일곱 종류의 장애의 첫째는 견해이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공을 말하였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모습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습 없음[無相]을 말하였다. 다시 이 중에 원(願)을 취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원 없음을 말하였다. 다시 모든 업의 행을 지으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짓는 것 없음을 말하였다.
저것에 과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생(生)이 있으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무생(無生)을 말하였다. 태어나면 반드시 고통과 즐거움을 일으키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을 말하였다. 공을 보는 까닭에
아만을 내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법도 성품이 없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무아관(無我觀)을 지어 사람의 잡고 취하는 모습[執取相]을 막는다. 나머지 불이(不二) 등의 모습은 모든 법에서 모습을 잡고 취하므로 ‘가섭아, 인(人)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공이라 하였다.
‘그저 공하며 스스로 공이다’라는 말은 사람과 법에 대하여 제멋대로 취하는 모습을 막기 위한 것이지, 중생이 잡고 취하는 모습을 없애려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잡고 취하는 모습을 없애는 것이 아니므로 공을 닦는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공하여 멸법(滅法) 중에서 잡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고, 성품을 망령되이 집착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공도 공인데, 어찌 하물며 모든 망령된 법을 분별하여 잡아 취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을 쓰면 일이 없으니 성품을 분별하여 망령되이 집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니 성품을 성취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공과 같이 모든 법도 그렇다. 모든 법 중에서 잡고 취하므로 법무아(法無我)를 보여 나타낸다. 그러나 저것은 성취하고 보여 나타내므로 『일월경(日月經)』에서 “전제(前際)가 공하고 중제(中際)가 공하며 후제(後際)도 공하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일 때 범부와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근본 중에서 있는 것을 보여 나타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공에 의지해야 한다’고 한 것은 요의(了義)에 의지하기 때문에 공에서 부정하는 방편을 보여 나타내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요의에 의지하는 까닭이니, 저것에 의지하는 것을 부정한 다음 요의의 일에 의지함에 머무른다고 이름한다. 모든 사람이 분별하고 일에 따르는 인(因), 저 두 가지는 부가라(富伽羅)이기 때문이다.
‘만약 공을 얻으면 문득 공에 의지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어떤 의미를 나타내 보이려는 것인가? 공성(空性)인 깨달음을 망령되이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공의(空義)에 의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의지하고 나서 본래 인아견(人我見)에 집착하는 까닭이고 취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품으므로 아(我)와 법(法)도 잃게 되니, 잃는 것이 더욱 빨라진다.
저것을 짓고 빨리 잃는 일을 알고 풀이하여 성립시키므로 말하기를 “가섭아, 차라리
아견을 일으켜 쌓는 것이 수미산과 같을지라도 공견(空見)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니, 나아가 공(空)만이 모든 견해를 없앨 수 있다”고 하였다. 공을 분별해서 깨달으므로 아만을 비운 진실한 의미를 알게 하여 얻지 못하게 한다. 얻고 나면 비방을 일으키니 이것은 사람의 견해를 제거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움직이는 병을 치료하려면 이는 안에서 치료하여야지 밖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병이 있다는 말이다. 경에서 “가섭아, 만약 공견(空見)을 일으키면 나는 저 사람을 치료할 수 없다”고 하였다. 혹 성품을 분별하여 망령되이 집착하고, 모든 사물과 모든 일이 아닌 것에 대해 다만 제멋대로 집착한다는 뜻이다.
허공의 비유는 전변(轉變)하여 바르지 않게 잡아서 취하는 것을 막는다. 만약 공견이 있다면 저것이 공이기 때문이고, 색 등의 법 중에서 일이 아닌 것을 구하기 때문에 일 중에서 일이 아닌 분별을 짓는다. 그것을 전변 중에 제멋대로 잡고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색 등의 법의 성품은 자연히 없다는 비유에서 만약 모든 중생을 제거해서 비우는 것을 일으켜 구한다면 이것은 행을 비유한 것이니, 공법(空法)의 근본 중에 허깨비 같이 저 근본을 두려워하고 나서 일을 망령되이 분별하기 때문이다.
만약 색 등의 모든 법이 없다면 헛되이 모든 행을 수행한 것이니 이러한 근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화가의 비유를 말한다. 비유가 실제라면 귀신은 없는 것이니 화가가 스스로 분별하고 헤아리며 미혹하고 빠져서 땅에 쪼그려 앉는 것이다. 무색계 등의 일도 이와 같다.
모든 범부가 제멋대로 헤아리며 스스로 분별하여 행하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세간에 불법의 수레를 굴려[轉輪] 행하면 저 지혜 없는 것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망령되이 분별하는 행을 이미 풀이하였으니, 이제 행을 일으키는 것 중에서 헛되지 않은 일을 말하겠다. 만약 이것이 다만 마음을 미혹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 마음을 안다고 하는가?
저 마음을 막고 보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망령되이 분별하여 취함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것을 말하였다. 이제 행 일으키는 일[發行事]을 말하려고 요술쟁이의 비유를 말하였다. 이 중에서 ‘요술쟁이의 처소와 같다’고 한 것은 마음과 생각을 지혜에 묶는 것이고,
‘요술쟁이의 환작(幻作)’이라고 한 것은 일 없는 지혜[無事智]를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밥을 먹는 사람을 다만 관찰만 할 뿐 생각하는 지혜가 없는 것과 같으니,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기 때문이다. 본래 성스러운 지혜의 근(根)을 따라 여실하게 관찰하여 보기 때문에 저것이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여실하게 관찰하지 않고도 출세간의 지혜를 얻는가? 힐난을 막기 위해서 말하자면, 두 나무가 서로 마찰하는 자리에 고요히 생각하는 인연 때문에 불이 난 곳에서 성스러운 지혜의 근(根)이 생기고, 생기고 나서는 저 고요한 관찰을 버리는 것을 보여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생긴 지혜와 없는 지혜를 다스리고 미래에 생기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한 까닭에 등불의 빛을 비유하여 말하였다. 지혜에 분별하는 모습이 없어서 지혜가 생길 때에 곧 지혜 없음을 대치하는 것을 보여 나타낸 것이다. 어찌하여 시작 없는 번뇌의 물듦에 시작 있는 대치가 있는가? 이러한 힐난을 없애고 막을 수 있도록 안에 걸어둔 등불의 빛이라는 비유를 말하였다.
이 비유는 중도의 뜻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간략히 풀이하여 말한 것이고, 자세히 분별하자면 보살이 바른 행과 계율 중에 머문 까닭에 차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법행(法行) 보살’이란 세제(世諦)의 참다운 말의 이치를 분별하여 참다운 말을 하고 점교(漸敎)를 보일 때 들은 소리 그대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모습 때문에 성문승에 의지하지 않고 저들을 만나고서 말한다.
이 중에서 ‘일찍이 공양하고 선근을 닦았다’고 하는 것은 대승의 모든 깊은 법에 수순하고 향하며 공에 수순하는 것이다. 분별하는 것과 분별하지 않는 것에서 참다운 진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세제와 진실제(眞實諦) 중에서 말하였어도 다만 일법계(一法界)의 요의(了義) 중에서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의지한 것에 수순하고 향하는 것을 행이 고요하다고 한다. 행이 고요하므로 중도의 뜻에 수순하고 향한다. 이와 같이 저 법을 가르치고 배척한다. 열세 종류의 중도의 일을 풀이하여 말하는데, 중생공(衆生空)을 풀이하는 것은 중생이 무아(無我)라는 것이고, 법공(法空)은 법무아(法無我)라는 것이다.
제멋대로 분별하는 것은 변(邊)과 같으며 변을 비방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증득하고 아울러 저 원을 일으키는 것은 큰 보리에
향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행하고서 번뇌와 고통 중에서 마음이 싫거나 만족함이 없어서 두 가지 무아(無我)를 잘 믿는다. 앞의 무아 중에서 뒤의 무아는 아주 다해서 모두 공하기에 이른다. 저것도 이와 같이 신력(神力)을 풀이하여 말한다. 어떻게 중생공(衆生空)을 풀이하는가?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관찰하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을 보여 나타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처럼 분별하지 않는 것이 세 종류가 있다. 중생의 일 중에서 5음의 일을 밝히고 저 여러 가지 일을 모든 18계 중에서 밝히며 저 수용할 일 가운데 모든 12입 등을 더욱 밝히는 것이다. 안과 밖과 그리고 둘의 중간에서 범부는 제멋대로 집착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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