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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56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9권

by Kay/케이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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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119

 

 

대보적경 제119권


대당 삼장 보리류지 한역
송성수 번역


48.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교살라(憍薩羅)의 파사닉왕(波斯匿王)과 말리부인(末利夫人)이 처음 법을 증득한 뒤에 함께 의논하기를 “우리 딸 승만(勝鬘)은 인자하고 총명하며 견문이 넓고 지혜가 있으므로 만일 여래를 뵙게 되면 깊은 법을 빨리 이해하면서 모든 의혹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잘 타일러 딸로 하여금 진실한 믿음을 일으키도록 해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의논을 한 뒤에 왕과 부인은 곧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그때 진제라(眞提羅)라고 하는 한 사신을 보내어 왕의 편지를 가지고 무투성(無鬪城)으로 가서 승만 부인에게 주게 하였다.
그때 승만 부인은 편지를 펴서 읽어 본 뒤에 정수리에 이고 기쁜 마음을 내며 진제라를 향하여 게송으로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여래의 음성은
세간에선 만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진실이라면
마땅히 그대에게 옷을 내리리라.

만일 저 부처님․세존께서
세간을 이익 되게 하려고 출현하셨다면
반드시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어
나로 하여금 참 모습을 보게 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말을 하는 잠깐 동안에
부처님은 허공 가운데서
불가사의한 몸을 나타내시며
큰 광명을 널리 놓으셨네.

승만과 그의 권속들은
모두가 나와 모였으며
합장하고 우러러 예배하면서
큰 길잡이[大導師]를 찬탄하였네.

여래의 미묘한 색신(色身)은
세간에서는 짝할 이가 없으며
견줄 데 없이 불가사의하나니
그러므로 이제 공경 예배하나이다.

여래의 모습은 다함이 없고
지혜도 역시 그러하며
모든 법에 항상 머무르시니
그러므로 저희는 귀의하나이다.


마음의 허물을 잘 다스리고
몸의 네 가지 요소[四種]는
불가사의한 자리에 이르렀나니
그러므로 저희는 이제 공경․예배하나이다.


모든 이염(爾炎) 법을 아시고
지혜의 몸은 걸림이 없으며
법에 있어서 잃어버림이 없나니
그러므로 저희는 이제 공경 예배하나이다.

헤아림을 넘어선 이께 머리 조아리고
비교할 이 없는 이께 머리 조아리며
법에 자재한 이께 머리 조아리고
생각을 넘어선 이께 머리 조아리옵니다.

저희들을 가엾이 여기셔서 보호하여
법의 종자가 더욱 자라게 하시며
맨 나중의 몸[最後身]에 이르러
항상 여래의 앞에 있게 하소서.

제가 닦는 복된 업은
이 세상과 그리고 그 밖의 세상에서
이 선근의 힘으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거두어 받아 주소서.

그때 승만 부인이 이 게송을 말하여 마치자 모든 권속과 대중들은 부처님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였다.
그때 세존은 곧 승만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옛날 보리를 위하여
일찍이 너에게 열어 보였으며
지금 또 나를 만나게 되었다.
오는 세상에서도 역시 그러하리라.

이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고 곧 그 모임 안에서 승만 부인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셨다.
“너는 지금 여래의 훌륭한 공덕을 찬탄한 이 선근 때문에 장차 한량없는 아승기 겁 동안에 천상과 인간에서 자재로운 왕이 되어서 모든 받아 쓸 것이 모두 다 구족할 것이요,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나를 만나게 되어 내 앞에서 찬탄함이 지금과 같이 다름이 없으리라. 그리고 또 한량없고 수없는 모든 부처님․세존을 공양하고 2만 아승기 겁을 지난 뒤에는 장차 부처님이 되리니, 명호는 보광(普光) 여래․응공․정등각이라 하시리라.
그 부처님의 국토는 모든 악한 모습과 쇠함과 늙고 병드는 고통이 없고 또한 착하지 않은 악한 업도(業道)의 이름도 없으며 그 안의 중생들은 모습이 단정 엄숙하고 다섯
가지 묘한 경계를 갖추어 순수하게 쾌락을 받음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모든 하늘들 보다 더 낫느니라. 그리고 그 모든 중생들은 대승에 나아갈 것이요, 이렇게 대승을 배우는 이들은 모두 그곳에 태어날 것이니라.”
그때 승만 부인이 이 수기(授記)를 받고 나자 한량없는 하늘과 사람들이 기뻐서 뛰며 다 함께 그 부처님 세계에 나기를 원하였으므로 이때 세존께서는 장차 모두 그곳에 태어날 것을 수기하셨다.
그때에 승만 부인이 부처님의 수기를 들은 뒤에 여래 앞에서 합장하고 서서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우며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菩提]에 이르기까지 받은 모든 계율을 범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승과 어른에 대하여 오만한 마음을 내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저보다 뛰어난 이나 모든 뛰어난 일에 질투하는 마음을 내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비록 조금의 음식이 있다 하더라도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제 몸을 위하여 재물을 받거나 쌓아두지 않겠으며 받으면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정들을 구제하는 데에 쓰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사섭사(四攝事)를 행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마음도 없고 싫증내거나 만족해하는 마음도 없으며 한정하거나 장애 하는 마음도 없이 중생을 거두어들이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생으로서 의지할 데가 없거나 갇혀있거나 질병으로 괴로움을 받거나 갖가지 위험과 재액을 받는 사람을 보면 끝내 떠나버리지 않고 반드시 안온해지기를 원하면서 매우 이롭게 하여서 고통을 면하게 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나쁜 율의(律儀)로 여래의 깨끗한 계율을 범하는 사람을 보면, 저에게 속한 성읍(城邑)이나 마을에서 사는 사람으로 마땅히 다스려야 할 이면
다스리겠사오며 거두어 주어야 할 이면 거두어주겠습니다. 왜냐 하면 다스리거나 거두어 줌으로써 바른 법[正法]이 오래도록 머무르기 때문이오니, 바른 법이 오래도록 머무르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은 더욱 가득 하고 나쁜 길[惡道]은 갈수록 줄어들어 여래의 법륜(法輪)으로 하여금 늘 구르게 할 수 있으리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바른 법을 거두어들여서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겠나이다. 왜냐 하면 바른 법을 잊거나 잃어버리면 대승을 잃기 때문이오니, 대승을 잃으면 곧 바라밀(波羅蜜)을 잃고 바라밀을 잃으면 곧 대승을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대승에 대하여 굳건한 믿음을 내지 못하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이 견고하지 못하여, 범부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곧 크게 잃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현재나 미래 세상에 바른 법을 거두는 모든 보살들은 끝없이 넓고 큰 이익을 두루 갖추어 이런 큰 서원을 일으킵니다. 위대한 주인[聖主]이신 세존께서 비록 또 증명하며 아실 것이오나 모든 유정으로서 선근이 작고 얇은 이면 혹 의심 그물을 일으키어 이 열 가지 큰 서원을 성취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는 오랜 밤 동안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면서 모든 고뇌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려고 이제 부처님 앞에서 정성스럽고 진실한 서원을 세우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운 것이 만일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라면 이 대중 위에 하늘 꽃이 내려오고 하늘의 묘한 음성이 들려오리이다.”
승만 부인이 여래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마자 때에 공중에서는 하늘의 꽃이 내리고 하늘의 묘한 음성이 나면서 찬탄하였다.
“장하십니다. 승만 부인이여, 그대 말은 진실하여 다름이 없습니다.”
그때에 대중의 모임에서는 이런 상서(祥瑞)를 보고 모든 의혹이 없어졌으므로 크게 기뻐하면서 소리를 같이하여 외쳤다.
“원컨대, 승만 부인과 함께 태어나는 곳마다 그의 서원과 행을 같이하게 하소서.”
그러자 부처님․세존은 그 대중들에게 소원대로 될 것임을 모두 수기하셨다.
그때 승만
부인은 다시 부처님 앞에서 세 가지 큰 서원을 세웠으니 이 서원의 힘으로써 끝없는 모든 유정들을 이익 되게 하였다. 그 첫 번째 서원은 ‘저의 선근으로 온갖 중생들에게 바른 법의 지혜를 얻게 하소서’라는 것이고 두 번째 서원은 ‘만일 제가 태어난 곳에서 바른 지혜를 얻고 나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베풀어 설하되 게으름이 없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세 번째 서원은 ‘나는 바른 법을 거두어 보호하여 지니기 위하여 태어날 때마다 목숨을 아끼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세존은 이런 서원을 듣고 나서 승만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온갖 물질[色]이 모두 공의 세계[空界]에 드는 것처럼 보살의 항하의 모래 같은 많은 서원들도 모두 이 서원 안에 들어가나니, 이 세 가지 서원이야말로 진실하고도 크다.”
그때 승만 부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과 변재의 힘을 받들어서 큰 서원을 말씀하려 하나이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승만아, 네 마음대로 말하여라.”
승만 부인이 말하였다.
“보살이 지니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서원은 모두가 하나의 큰 서원 안에 들어 가리이다. 이 하나의 큰 서원이란 이른바 여래의 바른 법을 거두어 받는 것이오니, 이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 받는 것은 진실이요 넓고 크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도다. 승만아, 너는 오랫동안 닦아 익힌 지혜와 방편이 매우 깊고 미묘하여 네가 말한 이치를 환히 알 수 있구나. 그들이 오랜 밤 동안 모든 선(善)의 근본을 심었어야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 받으리니 이는 모두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 말씀하며 장차 말씀할 것이니라. 나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고서 역시 또 항상 갖가지 모양으로 바른 법을 거두어 받는 것을 말하였고 이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 받는 것을 찬양한 것이니, 그것에서 얻게 되는 공덕은 끝이 없고 여래의 지혜도 역시 끝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바른 법을 섭수하면 큰 공덕이 있고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때 승만 부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다시 바른 법을 거두어 받는 넓고 큰 이치를 연설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말할 것을 허락하겠느니라.”
승만 부인이 말하였다.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넓고 큰 이치란 한량없는 온갖 부처님의 법을 얻게 되고 나아가 8만의 행온(行蘊)을 거두게 되나이다. 비유하면 겁초(劫初)에 모든 빛깔의 구름이 일어나서 보배 비를 내리는 것처럼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착한 뿌리의 구름도 한량없는 복의 과보[福報]의 비를 내리나이다.
세존이시여, 또 마치 겁초의 큰 물 속에서 삼천대천세계의 광[藏]과 4백억의 갖가지 큰 섬이 솟아 나오는 것처럼 바른 법을 거두어들일 때에도 대승의 한량없는 광과 모든 보살의 신통스런 힘과 갖가지 법문이 나와서 온갖 세간과 세간 밖에 안락이 두루 갖추어져서 온갖 천상과 인간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옵니다.
또 마치 대지(大地)가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짊어짐과 같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 무거운 짐인가 하면 첫째는 큰 바다요, 둘째는 모든 산이며, 셋째는 풀과 나무요, 넷째는 중생들이니, 그와 같아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이 네 가지 무거운 임무를 짊어질 수 있음은 저 대지보다 더하나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무거운 임무인가 하면 착한 벗을 떠나 들음이 없고 그릇된 법을 지닌 모든 유정들을 인간과 하늘의 선근으로 성숙시키되 성문을 구하는 이면 성문승을 주고 독각을 구하는 이면 독각승을 주며 대승을 구하는 이면 대승으로 주나니, 이것을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고 하나이다.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네 가지 무거운 임무를 짊어질 수 있음은 저 대지보다도 더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바른 법을 섭수하는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대지(大地)를 이룩하고 세워서 네 가지 무거운 임무를 짊어질 수 있나니, 두루
중생을 위하여 청하지 않은 벗이 되어 주고 대비(大悲)로 이익 되게 하며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어 세간 법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옵니다.
또 마치 대지가 이 네 가지 보배를 내는 곳인 것과 같나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보배인가 하면 첫째는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無價]이요, 둘째는 아주 비싼 값어치의 것[上價]이며, 셋째는 그 중간 값어치의 것[中價]이요, 넷째는 아주 하찮은 값어치의 것[下價]이옵니다.
그와 같아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대지를 이룩하여 유정이 만나기만 하면 네 가지 큰 보배를 얻게 되나니, 온갖 보배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 큰 보배인가 하면 모든 유정들이 이 착한 벗을 만나면 어떤 이는 인간과 하늘의 선근을 얻으며 어떤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혹은 무상승(無上乘)의 선근 공덕을 증득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와 선여인이 대지를 이룩하여 세워서 유정이 그를 만나기만 하면 곧 네 가지 큰 보배를 얻게 된다고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큰 보배가 나온다 함은 진실하게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또 다른 바른 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달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는 것도 없으니, 바른 법이 곧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또 다른 바라밀도 없고 달리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도 없나니,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곧 바라밀이옵니다. 왜냐 하면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마땅히 보시[施]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보시로써 성숙시키고 심지어는 몸을 버리면서 그의 뜻을 따르며 그를 성숙시켜 그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계율[戒]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여섯 감관을 지키고 보살펴서 몸과 말과 뜻 나아가 위의를 깨끗하게 하면서 그 뜻을 따라 그를 성숙시키어 그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계율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인욕[忍]으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설령 그 유정이 꾸짖고 욕하고 헐뜯고 비방하고 요란 시킨다 하여도 성냄이 없는 마음과
이익을 주려는 가장 으뜸가는 인욕의 힘으로써 심지어 얼굴빛조차도 변하지 않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성숙시키어 그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정진(精進)으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그 유정에 대하여 게으르거나 보잘것없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크나큰 의욕을 일으켜 으뜸가는 정진으로써 네 가지 위의(威儀)에서 그의 뜻에 따라 성숙시키어 그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선정[靜慮]으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그 유정에 대하여 산란함이 없음으로써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일찍이 짓는 일을 끝내 잊거나 잃지 않으면서 그의 뜻을 따라 그를 성숙시켜 저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선정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지혜(智慧)로써 성숙시켜야 할 사람이면 그 모든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법을 물을 때에는 게으른 마음이 없이 그를 위하여 모든 이론과 온갖 명처(明處)와 나아가 갖가지 공교처(工巧處)를 연설하여 궁극을 얻도록 그 뜻을 따르며 그를 성숙시키어 그 유정으로 하여금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지혜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바른 바라밀도 없고 달리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도 없나니,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곧 바라밀이옵니다.“
때에 승만 부인이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과 변재의 힘을 받들어서 다시 큰 이치를 말씀드리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큰 이치라 하는 것이냐?”
“세존이시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인다 함은 달리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도 없고 또 다른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이도 없습니다.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선남자와 선여인이 바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옵니다. 왜냐 하면 만일 바른 법을 섭수하는 선남자와 선여인이면 바른 법을 위하여
몸과 목숨과 재물을 버리기 때문이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몸[身]을 버리기 때문에 나고 생사를 벗어나 늙고 병듦을 멀리 여의면서 항상 무너지지 않는 힘을 얻어 달라지거나 바뀜이 없으며 마침내 고요하고 불가사의한 여래의 법신(法身)을 증득합니다. 목숨[命]을 버리기 때문에 나고 죽는 생사를 영원히 벗어나 끝없이 항상 함을 얻고 불가사의한 모든 착한 공덕을 성취하며 온갖 부처님 법과 신통 변화에 편히 머무름을 증득합니다. 재물[財]을 버리기 때문에 생사를 벗어나 유정을 뛰어넘어 다함도 없고 줄어듦도 없는, 과보(果報)가 원만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함을 갖추므로 모든 유정들의 존중과 공양을 받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몸과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바른 법을 거두는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모든 여래의 수기를 받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선남자와 선여인은 바로 법이 소멸하려 할 때 어떤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서로서로 편을 갈라 분쟁을 일으키면 아첨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른 법을 좋아하고 바른 법을 거두어 착한 벗 안에 들어가나니, 이 착한 벗 안에 들어간 이는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바른 법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이런 큰 힘이 있음을 보거니와 여래께서는 이것으로 눈을 삼고 법의 근본을 삼으며 인도하는 법을 삼고 통달하는 법을 삼으시나이다.”
그때 세존은 승만 부인이 말한 바른 법을 거두어들임에 큰 위력이 있다 함을 들으시고 찬탄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장하구나 승만아, 너의 말과 같이 바른 법을 거두어들일 때의 큰 위덕의 힘은 마치 힘센 역사[大力士]가 살짝 손끝으로 만지기만 해도 큰 고통이 생기고 무거운 병이 더욱 더해지는 것처럼 승만아, 가령 조금이라도 바른 법을 거두어들여서 악마 파순(波旬)으로 하여금 몹시 근심하고 괴로워서 슬피 울고 탄식하게 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승만아, 나는 언제나 그 밖의 하나의 착한 법이라도 악마로 하여금 근심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나니, 마치 조금이라도 바른 법을 거둘 때와 같은 경우이니라.
승만아, 비유하면 소왕[牛王]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몸의 크기가 특출하여 다른 모든 소보다 뛰어나는 것처럼 승만아, 대승을 닦는 이가 설령 조금이라도 바른 법을 거두면 곧 성문이나 독각의 온갖 착한 법보다 뛰어나는 것이 그와 같으니라.
승만아, 또 마치 수미산이 높고 넓고 장엄하고 고와서 많은 산들보다 뛰어난 것처럼 승만아, 처음 대승에 나아가는 이가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바른 법을 거두면 곧 몸과 목숨을 돌보며 오래도록 대승의 온갖 선근에 머무르는 이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승만아, 마땅히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면서 온갖 유정을 깨우쳐 보이고 교화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승만아, 바른 법을 거두면 큰 복의 이익과 큰 과보를 얻게 되느니라.
승만아, 내가 수없는 아승기겁 동안 이와 같이 바른 법을 거둘 때에 얻게 되는 공덕을 칭찬한다 하여도 다함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면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승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다시 내가 말한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면 모든 부처님도 같이 좋아함을 연설해야 하느니라.”
승만이 말하였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바른 법을 거두어 받음을 곧 대승(大乘)이라 하나이다. 왜냐 하면 대승에서는 온갖 성문과 독각과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착한 법을 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뇩달지(阿耨達池)에서 팔대하(八大河)가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이 대승에서도 온갖 성문과 독각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법이 나오나이다.
세존이시여, 또 마치 온갖 종자와 초목과 우거진 숲은 대지(大地)에 의지하여 나고 자라는 것처럼 이 성문과 독각과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법도 모두가 대승에 의지하여 나고 자라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물러서 대승을 거두어 받아들임이 바로 성문과 독각,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법에 머물러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이옵니다.
마치 부처님․세존께서 말씀하신 여섯 가지 처소[處]와 같습니다. 그것은 곧 바른 법이 머무름[正法住]과 바른 법이 사라짐[正法滅]과 따로따로의 해탈[別解脫]과 비나야(毘奈耶)와 바른 출가[正出家]와 구족계를 받는[受具足] 것이니, 대승을 위하여 이 여섯 가지 처소를 말씀하셨나이다.
왜냐 하면 바른 법이 머무른다 함은 대승을 위하여 말씀한 것으로서 대승이 머무르면 곧 바른 법이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바른 법이 사라진다 함도 대승을 위하여 말씀한 것으로서 대승이 사라지면 곧 바른 법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로따로의 해탈과 비나야의 이 두 가지 법은 뜻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비나야는 곧 대승의 배움[大乘學]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에게 출가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계율[戒蘊]이 바로 비나야며, 이것이 바른 출가요 이것이 구족계를 받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에는 출가함과 구족계를 받는 것이 없나이다. 왜냐 하면 아라한은 여래가 되려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지 않기 때문이오니, 아라한은 두려운 생각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 귀의하나이다. 왜냐 하면 아라한은 온갖 행에서 두려워함이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쥐고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궁극의 안락을 증득하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의지하면서도 의지함을 구하지 않음은 마치 모든 중생은 귀의함이 없으나 저 여러 가지를 두려워하여 안온함을 위하기 때문에 귀의를 구함과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아라한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여래께 귀의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태어나는 법[生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범행(梵行)은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며 할 일[所作]도 아직 마치지 못하고 끊어야 할 것도 아직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반과는 거리가 머나이다.
왜냐 하면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열반을 증득하고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끊어야 할 것을 모두 이미 끊었고 마지막까지 청정하여 모든 유정들이 우러러 사모하며 이승과 보살의 경계를 뛰어나기 때문이오니, 아라한들은 이렇게 되지 못하므로 열반을 증득한다는 말은 부처님의 방편이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들은 열반과는 거리가 머나이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하는 지혜를 관찰하여 마침내 쉬게 된다는 말은 모두가 여래께서 다른 이의 뜻을 따라 한 말씀이요, 분명하지 않은 이치[不了義]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두 가지 죽음[死]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죽음인가 하면 첫째는 분단(分段)이요, 둘째는 변역(變易)이옵니다. 분단의 죽음이라 함은 유정으로서 상속(相續)함을 말하며 변역의 죽음이란 곧 아라한과 벽지불과 자재한 보살이 보리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意生身]을 말하나이다.
두 가지 죽음 가운데서 분단의 죽음[分段死]으로써 아라한과 벽지불에게 ‘나의 생[我生]은 이미 다했다는 지혜가 생한다 합니다. 남음이 있는 과위[有餘果]를 증득한 까닭에 ‘범행(梵行)은 이미 섰다’라는 지혜가 생겼으며 범부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곱 부류의 배울 것 있는 사람[學人]이 아직 마치지 못한 상속하는 번뇌를 마침내 끊은 까닭에 할 일[所作]을 이미 다 마친 지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나중의 몸[後有]을 받지 않는 지혜를 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아라한과 벽지불은 모든 번뇌를 다 끊지 못하였고 온갖 태어남을 받는데 대한 지혜도 환히 알지 못하였음을 뜻합니다. 왜냐 하면 이 아라한과 벽지불은 번뇌에 남음이 있어서 다 끊지 못하였고 온갖 생사를 환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주지(住地)의 번뇌와 일으킴[起]의 번뇌이옵니다. 이 주지의 번뇌에도 네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와 욕애주지(欲愛住地)와 색애주지(色愛住地)와
유애주지(有愛住地)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주지 번뇌가 두루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냅니다. 두루 일어나는 번뇌[起煩惱]라 함은 찰나찰나마다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무명주지(無明住地)는 없는 때로부터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주지번뇌의 힘은 두루 생겨나는 번뇌의 의지할 곳이 되지만 무명주지에 비교하면 산수(算數)와 비유(譬喩)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무명주지는 유애주지(有愛住地)보다 그 힘이 가장 크나이다. 비유하면 악마 왕의 모습과 힘과 위덕과 대중 권속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모든 하늘들보다 뛰어난 것처럼 이 무명주지는 나머지 네 가지 주지번뇌보다 뛰어나나니,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번뇌가 의지하는 것이요, 또한 네 가지 번뇌로 하여금 오래 머무르게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로는 끊을 수 없고 오직 여래의 지혜만이 끊을 수 있을 뿐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무명주지의 힘은 가장 크나이다.
세존이시여, 마치 집착함[取]이 연(緣)이 되어 유루업[有漏業]을 인(因)하여 세 가지 있음[三有]을 생하는 것처럼 무명주지가 연이 되고 무루의 업[無漏業]을 인하여 아라한과 벽지불과 큰 힘 지닌 보살이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意生身]을 내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지위에서의 생각하는 대로 생기는 몸과 무루의 업은 모두가 무명주지를 의지할 곳[所依處]으로 삼으니 그것에 비록 연(緣)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연이 될 수도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세 가지 생각대로 생기는 몸[意生身]과 무루의 업은 모두가 무명주지를 연(緣)으로 삼나니, 유애(有愛)주지에서와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유애주지는 무명주지의 업(業)과는 같지 않고 무명주지는 네 가지 주지번뇌와도 다르며 네 가지 주지번뇌와 다른 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나이다. 왜냐 하면 아라한과 벽지불은 네 가지 주지번뇌를 끊지만 번뇌가 다한[漏盡]힘에 있어서는 자유자재할 수 없으며 증득함을 나타내지도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라고 함은 ‘번뇌가 다함(漏盡)’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과 최후의 몸[最後有]으로 있는 보살들은 무명주지에 가려지기 때문에 저 여러 법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저 여러 가지 법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다하여야 할 것을 다하지도 못하나이다. 저 여러 모든 법에 끊지도 다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남음이 있는[有餘] 해탈을 얻고 모든 해탈을 얻지 못하며 남음이 있는 깨끗함을 얻고 온갖 깨끗함을 얻지 못하며 남음이 있는 공덕을 얻고 온갖 공덕을 얻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남음이 있는 해탈은 완전한 해탈이 아니요 나아가 남음이 있는 공덕은 완전한 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남음이 있는 괴로움[苦]을 알고 남음이 있는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으며 남음이 있는 사라짐[滅]을 증득하고 남음이 있는 도(道)를 닦게 되나이다.”
그때 승만 부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남음이 있는 괴로움을 알고 남음이 있는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남음이 있는 사라짐을 증득하고 남음이 있는 도를 닦는다면 이것을 조그마한 부분의 멸도[少分滅道]라 이름하며 조그마한 부분의 열반을 증득하여 열반의 경계를 향하는 것입니다. 만일 온갖 괴로움을 알고 온갖 괴로움의 원인을 끊으며 온갖 번뇌의 사라짐을 증득하고 온갖 도를 닦는다면 그것은 덧없고 무너지는 세간에서 항상 고요하고 맑고 시원한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보호할 데 없고 의지할 데가 없는 세간에서 보호하는 이가 되고 의지할 곳이 되나이다. 왜냐 하면 모든 법 가운데서 높고 낮음을 보는 이는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거니와 지혜가 평등한 이와 해탈이 평등한 이와 청정함이 평등한 이는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열반을 평등한 한 맛[等一味]이라 하나이다. 어떤 것을 한 맛이라 하는가 하면 해탈의 맛[解脫味]을 말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무명주지를 끊지도 못하고 다하지도 못하면, 열반인 한 맛의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하옵니다. 왜냐 하면 무명주지가 끊어지지도 않고 다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끊어야 할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온갖 허물의 법을 끊지 못하고 마땅히 다해야 할 것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오니,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온갖 허물의 법을 끊지도 못하고 다하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모든 공덕의 법을 알지도 못하고 증득하지도 못하나이다. 그러므로 무명주지번뇌는 완전히 끊어야 할 법인 모든 수번뇌(隨煩惱)가 생기게 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마음을 장애 하는[障心] 번뇌와 그침을 장애 하는[障止] 번뇌와 관찰을 장애 하는[障觀] 번뇌와 선정을 장애 하는[障靜慮] 번뇌가 생기고 이와 같아서 나아가 삼마발지(三摩鉢底)와 가행(加行)과 지혜와 증과[果]며 힘[力]과 두려움이 없음[無畏]을 장애 하는 모든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온갖 번뇌를 생기게 하며 여래의 보리와 부처님의 금강 같은 지혜[金剛智]로 끊을 수 있는 번뇌도 무명주지에 의지하고 무명주지를 인연으로 삼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일어나는[起] 번뇌는 찰나찰나마다 마음과 상응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무명주지는 끝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여래의 보리와 부처님의 금강 같은 지혜로 끊어야 할 법은 모두가 이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이룩되며 세워지나이다.
비유하면 온갖 종자와 우거진 숲이 대지(大地)에 의지하여 나고 자라며 만일 대지가 무너지면 그것들도 또한 무너지는 것처럼, 이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여래의 보리와 부처님의 금강 같은 지혜로 끊어야 할 법도 모두가 이 무명주지에 의지하여 나고 자라며 만일 그 무명주지가 끊어지면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여래의 보리와 부처님의 금강 같은 지혜로 끊어야 할 법도 모두 따라 끊어지나이다.
이와 같이 항하의 모래보다 더 많은 끊어야 할 법인 온갖 번뇌와 일어난 번뇌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곧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증득하고 온갖 법에서 걸림이 없는 신통을 증득하며
모든 지견(智見)을 얻고 온갖 허물을 여의며 모든 공덕을 얻어 대법왕(大法王)이 되고 법에 자재하면서 온갖 법의 자재한 지위를 증득하여 바르게 사자처럼 외치되 ‘나의 생(生)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마쳤고 나중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하나니, 그 때문에 세존께서는 사자후(師子吼)로써 분명한 이치[了義]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말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나중의 몸을 받지 않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나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모든 여래는 조복하고 제어하는 힘으로 네 가지 악마를 꺾어 항복 받아 모든 세간을 초월하며 온갖 유정들이 우러러 쳐다보는 바 되며 불가사의하고 깨끗한 법신(法身)을 증득하며 알 자리[所知地]에서 법의 자재함을 얻고 가장 뛰어나며 위가 없어서 다시는 할 일이 없으며 다시는 증득할 지위도 보지 않고 10력(力)을 두루 갖추며 가장 뛰어나고 두려움이 없는 지위에 올라가 온갖 법에 걸림이 없이 관찰하면서 바르게 사자처럼 외치며 나중 몸을 받지 않나이다.
둘째는, 아라한과 벽지불은 한량없는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서 해탈의 즐거움을 받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이 생사의 두려움을 이미 여읜지라 모든 괴로움은 받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이와 같이 관찰하면서 나중 몸을 받지 않는다고 여기나 제일 소식열반(第一蘇息涅槃)을 증득하지는 못하나이다. 그들은 아직 증득하지 못한 자리에서 법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이제 남음이 있는 자리[有餘依地]를 증득한지라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리라’고 스스로 깨달아 아나이다. 왜냐 하면 성문이나 독각이 모두 대승(大乘)에 들어가면 대승은 곧 그것이 불승(佛乘)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3승(乘)이 곧 1승(乘)이요, 1승을 증득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그것이 열반이옵니다.
열반이라 함은 곧 그것이
여래의 깨끗한 법[法身]이오니, 법을 증득하면 곧 1승이어서 여래와 다름이 없고 법신과도 다름이 없나이다. 여래라 함은 곧 그것이 법신이오니, 마지막의 법신을 증득하면 곧 마지막의 일승이요 마지막의 일승은 곧 상속[相續]함을 여의나이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머무르는 때는 한량이 없으며 미래에도 그러합니다. ‘여래는 한이 없는 대비(大悲)와 한이 없는 서원으로 세간을 이익 되게 하신다’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이것을 ‘잘한 말씀[善說]’이라 하나이다.
만일 또 ‘여래는 바로 항상 계시고 그지없는 법이며 모든 세간이 마지막 의지할 분이다’라고 말한다면 역시 ‘잘한 말씀’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보호함이 없는 세간과 의지할 데 없는 세간에서 미래에도 더불어 함께 하여 끝없이 귀의[無盡歸依]하고 항상 머무르며 귀의[常住歸依]하며 마지막으로 귀의[究竟歸依]할 이가 귀의하면 여래․응공․정등각이시옵니다.
법(法)이란 바로 1승의 도(道)요 승(僧)이란 바로 3승의 대중이니, 이 둘에 귀의함은 마지막의 귀의가 아니므로 조그마한 부분의 의지처[少分依]라 하나이다. 왜냐 하면 1승의 도에서 마지막 법신을 증득한다고 말하면 다시는 1승의 도를 말함이 없고, 3승의 대중이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또 여래께 귀의하여 출가를 구하고 닦고 배우니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귀의는 마지막 의지처가 아니라 이것은 한정이 있는 의지처[有限依]이옵니다.
만일 모든 유정이 여래의 조복으로 여래께 귀의하면 법과 율에 젖어들어 믿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법과 비구승에게 귀의하게 되나이다. 이 두 가지 귀의는 법과 율에 젖어들어 믿어 들어가 귀의하게 되거니와 여래께는 법과 율에 젖어들어 믿음으로 들어가는 귀의가 아니옵니다.
여래라 함은 바로 진실한 귀의며 이 두 가지에도 진실한 이치로써 귀의하기 때문에 곧 마지막에는 여래께 귀의한다 하나이다. 왜냐 하면 여래는 이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여래는 곧 세 가지 귀의이옵니다. 왜냐 하면 1승의 도로 말하면 여래는 가장 뛰어난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을 갖추고서 바르게 사자후를 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모든 여래께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방편으로써 2승을 말하면 곧 그것이 대승이오니, 제일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2승이 없고, 2승이란 다같이 1승에 들어가며 1승이란 곧 으뜸가는 이치의 승[勝義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독각이 처음에 거룩한 진리[聖諦]를 증득할 때는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주지(住地)번뇌를 끊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하나의 지혜로써 네 가지 변지(遍知)와 모든 공덕 등을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법으로써 이 네 가지 법의 이치를 환히 아는 것도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出世智]에서는 네 가지 지혜가 점차로 이르거나 점차로 반연한다는 것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에는 점차로 이르는 법이 없나니, 마치 금강유(金剛喩)와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성문이나 독각은 갖가지 거룩한 진리의 지혜로 모든 주지(住地)번뇌를 끊지마는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가는 이치의 지혜[出世第一義智]는 없고 오직 여래․응공․정변지에게만 있을 뿐이며, 모든 성문이나 독각의 경계가 아니요 불가사의한 공한 성품[空性]의 지혜로써 온갖 번뇌의 알을 깨부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의 알을 깨부수는 마지막 지혜를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가는 이치의 지혜라 하고 처음 거룩한 진리를 증득하는 지혜는 마지막의 지혜가 아니며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나아가는 지혜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진실로 거룩한 이치[眞聖義]는 곧 2승(乘)이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성문이나 독각은 오직 조그마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거룩하다[聖]고 하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거룩한 진리라 함은 모든 성문이나 독각의 진리와 그의 공덕이 아니옵니다. 이 진리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에게만이 있을 뿐이며 처음부터 환히 알고 난 연후에야 무명(無明)의 알에 감추어진 세간 중생들을 위하여 열어 보이고 연설하기 때문에 거룩한 진리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거룩한 진리는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며 분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도 아니며 온갖 세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아실 뿐이옵니다. 왜냐 하면 여기서는 매우 깊은 여래장(如來藏)을 말씀하기 때문이옵니다. 여래장이란 바로 부처님의 경계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행할 바가 아니며 여래장에서 거룩한 진리의 이치를 말씀하나니, 이 여래장이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에 말한 거룩한 진리도 역시 깊고 미묘하여서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며 분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경계도 아니며 온갖 세간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알 수 있을 뿐이옵니다. 만일 한량없는 번뇌로 얽혀있는 여래장에 대하여 의혹이 없다면 온갖 번뇌의 창고를 벗어난 여래의 법신(法身)에 대하여도 역시 의혹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여래장과 부처님의 법인의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비밀한 경계에 대하여 마음에 마지막 경지[究竟]를 얻으면 거기서 말한 두 가지 거룩한 진리를 믿을 수도 있고 환히 알 수도 있으며 뛰어난 이해[勝解]를 낼 수도 있나이다. 어떤 것을 두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는가 하면 이른바 지음이 있고[有作] 지음이 없는[無作] 것이옵니다. 지음이 있는 거룩한 진리라면 이것은 원만하지 않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니, 왜냐 하면 다른 이가 보호하는 까닭에 온갖 괴로움[苦]을 알고 온갖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으며 온갖 사라짐[滅]을 증득하고 온갖 도(道)를 닦게 될 수 없기 때문이오니, 그러므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와 열반에 대하여 알지 못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지음이 없는 진리라면 바로 원만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뜻하나니, 왜냐 하면 스스로가 보호하는 까닭에 온갖 괴로움을 알고 온갖 원인을 끊으며 온갖 사라짐을 증득하고 온갖 도를 닦게 되기 때문이오니, 이와 같이 말한 여덟 가지 거룩한 진리를 여래께서는 다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옵니다. 이 지음이 없는 네 가지
거룩한 이치는 오직 여래․응공․정등각만이 일의 궁극에 이를 수 있고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힘으로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뛰어나거나 못난 하․중․상의 법으로써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어떻게 여래는 지음이 없는 진리에서 일의 궁극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모든 여래․응공․정등각은 모든 괴로움을 두루 알아서 모든 번뇌를 끊고 그리고 번뇌에 포함된 괴로움의 원인을 넘어서 생각한 대로 생기는 몸[意生身]에 있는 모든 괴로움의 사라짐을 증득하며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는 도를 닦을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파괴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이 사라진다[苦滅]고 하나이다. 왜냐 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말은 처음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다하는 것도 없으며 항상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고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여 번뇌의 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해탈하는 지혜를 갖춘 불가사의한 법을 성취하셨기에 법신(法身)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신이 번뇌를 여의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곧 여래의 공한 성품[空性]의 지혜이옵니다. 여래장은 온갖 성문이나 독각으로서는 일찍이 보지 못할 뿐더러 또한 얻지도 못하며 부처님만이 분명히 아시고 증득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여래장의 공한 성품의 지혜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옵니다. 공여래장이란 이른바 해탈하지 않은 지혜와 온갖 번뇌를 여의나이다.
세존이시여, 불공여래장은 항하 모래보다도 더 많이 갖춘 부처님의 해탈하는 지혜와 불가사의한 법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두 가지 공한 지혜에 모든 큰 성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온갖 성문이나 독각은 공한 성품의 지혜를 네 가지 뒤바뀐 경계에 반연해서 굴리게 되나니, 그러므로 온갖 성문이나 독각은 보지도 못하고 또한 증득하지도 못하나이다. 온갖 괴로움의 사라짐[苦滅]은 오직
부처님만이 실제로 증득하여 모든 번뇌를 무너뜨리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도(道)를 닦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진리에서 세 가지 진리는 항상함이 없고[無常] 한 가지 진리는 항상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세 가지 진리는 유위(有爲)의 모양에 들기 때문이오니, 유위의 모양이란 곧 항상함이 없는 것이옵니다. 항상함이 없다는 말은 바로 파괴되는 법이요 파괴되는 법이라면 진리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常]도 아니며 귀의할 곳[歸依處]도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진리를 한 가지 진리에서 보면 진리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귀의할 곳도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한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苦滅諦]는 유위의 모양을 여읜 것이니 유위의 모양을 여읜지라 성품이 항상 머무르고 성품이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파괴되는 법이 아니며 파괴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요 이것은 항상하는 것이며 이것은 귀의할 곳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모든 유정의 심식(心識)의 경계를 넘어서고 또한 온갖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로도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비유하면 소경이 모든 빛깔을 보지 못하고, 7일이 된 젖먹이는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움이 사라진 진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범부의 심식으로는 반연할 바가 아니고 또한 온갖 성문이나 독각으로서의 지혜의 경계도 아니옵니다. 범부의 심식(心識)이라 함은 두 가지 치우친 소견[邊見]을 말하며 온갖 성문과 독각의 지혜라 함은 깨끗한 지혜[淨智]를 이름하나이다. 치우친 소견이란 5취온(取蘊)을 집착하여 나를 삼으면서 다른 분별을 내는 것이니 치우친 소견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이른바 항상하다는 소견[常見]과 아주 없어진다는 소견[斷見]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나고 죽음[生死]은 덧없되 열반은 항상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아주 없다거나 항상 있다거나 하는 소견이 아니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나이다. 왜냐 하면 모든 헤아리는 이가 몸의 모든 감관의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법에서 없어지고 파괴된다고 보기 때문이오니, 상속(相續)함이 있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모르고 눈이 멀어서 지혜의 눈이 없으므로 아주 없다는 소견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이 상속하여 찰나마다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에 대하여 어리석고 어두워서 의식(意識)의 경계를 분명히 모르므로 항상 있다는 소견을 일으키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이치는 모든 분별과 하열한 소견을 초월한 것이온데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망령되어 다른 생각과 뒤바뀐 집착을 내므로 말미암아 아주 없다고도 여기고 항상 있다고도 여기나이다.
세존이시여, 뒤바뀐 유정은 5취온(取蘊)에 대하여 항상하지 않는 것인데도 항상하다[常]는 생각을 하고 괴로운 것인데도 즐겁다[樂]는 생각을 하며 나가 없는 것인데도 나[我]라는 생각을 하고 깨끗하지 않는 것인데도 깨끗하다[淨]는 생각을 하나이다. 그리고 성문과 독각이 지닌 청정한 지혜[淨智]로는 여래의 경계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아직 보지 못하옵니다. 혹 어떤 중생은 여래를 믿기 때문에 여래에 대하여 항상 있다는 생각과 즐겁다는 생각과 나라는 생각과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뒤바뀐 소견이 아니고 바로 바른 소견이오니, 왜냐 하면 여래의 법신은 바로 항상 있음의 바라밀이요 즐거움의 바라밀이며 나의 바라밀이요 깨끗함의 바라밀이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모든 유정으로서 이러한 소견을 짓는 이라면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나이다. 만일 바른 소견을 지닌 이면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라 하고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하며 바른 법으로부터 나왔다 하고 법의 교화로부터 나왔다 하리니, 불법을 얻은 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깨끗한 지혜[淨智]라 함은 곧 온갖 성문이나 독각의 지혜바라밀이오니, 이 청정한 지혜는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苦滅諦]에 있어서도 오히려 경계가 아니거든 하물며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이겠습니까. 이것은 네 가지 입류(入流)의 지혜로 행할 것이오니, 왜냐 하면 3승(乘)의 맨 처음의 업[初業]으로서 법에 어리석지 않은 이는 그 이치를 당연히 증득해야 하고 당연히 알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이치 때문에 네 가지 입류를 말하는가 하면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입류는 바로 세간의 법이옵니다.
세존이시여, 하나의 입류만이 모든 입류에서 가장 으뜸가고 맨 위이니, 제일가는 이치[第一義]로써 보면 이것이 입류이고 이것이 귀의(歸依)이며 이것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진리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나고 죽음은 여래장에 의거하며 여래장으로써 과거는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나고 죽음이 있게 되나니, 이것을 잘한 말씀[善說]이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나고 죽는다 함은 모든 느끼는 감관[根]이 소멸하고 끊임없이 상속하면서 아직 느끼는 감관이 생기지 않은 것을 나고 죽는다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나고 죽는 두 가지 법이 바로 여래장이며 세속의 법에서 나고 죽는다고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죽는다[死] 함은 모든 느끼는 감관이 사라지는 것이며 난다[生] 함은 모든 느끼는 감관이 생기는 것이어니와 여래장은 곧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오르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으며 유위(有爲)의 모양을 여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항상 한결같아서 무너지지 않나이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해탈을 여의지 않는 지혜의 광[藏]과 함께 하면서 이것으로 의지[依]하고 이것으로 지속[持]되고 이것으로 이룩하여 세우며 또한 밖으로는 해탈하지 못한 지혜인 모든 유위의 법에 의지하고 유지되며 이룩되어 세우기를 떠나서 함께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래장이 없다면 마땅히 괴로움을 싫어하거나 즐거이 열반을 구하는 것도 없어야 하나이다. 왜냐 하면 이 6식(識)과 그것을 앎에 있어서 이러한 일곱 가지 법은 찰나마다 머무르지 않고 뭇 고통도 받지 않으며 싫증내어 떠나지도 않고 열반을 원하고 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여래장이란 과거에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법이요 모든 고통도 없는 법으로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원하며 구하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나와 사람과 중생과 수명도 있지 않으며, 여래장이란 몸에 대한 소견[身見]을 지닌 유정이나 뒤바뀐 유정이나 공하다는 소견[空見]을 지닌 유정으로서 행할 경계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바로 법계(法界)가 간직되어 있고 바로 법신(法身)이 간직되어 있으며 세간을 벗어남[出世間]이 간직되어 있고 성품의 청정함[性淨]이 간직되어 있으며 이것은 본래의 성품이 청정하나이다. 여래장이란 제가 이해하기로는 비록 티끌 같은 번뇌에 물들게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은 불가사의한 여래의 경계이옵니다.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찰나찰나의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마음은 티끌 같은 번뇌로 물이 들 수는 없기 때문이옵니다. 왜냐 하면 번뇌는 마음에 닿지 못하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거늘
어떻게 법에 닿지 않는데도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번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라 마음을 물들임이 있거니와 번뇌를 따라 물이 드는 것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환히 알기도 어렵나니, 오직 부처님․세존만이 눈이 되고 지혜가 되고 법의 근본이 되고 높은 이가 되고 인도한 이가 되고 바른 법의 의지처[依]가 되어서 사실대로 아시고 보시나이다.”
그때 세존께서 승만 부인을 찬탄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너의 말과 같으니라. 성품이 청정한 마음이 번뇌를 따라 물드는 것은 참으로 환히 알기 어렵느니라.
또 승만아, 환히 알기 어려운 두 가지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성품이 청정한 마음을 환히 알기 어렵고 그 마음이 번뇌에 물들게 되는 것도 역시 알기 어렵느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너와 큰 법을 성취한 보살이라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밖의 성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 있느니라.
승만아, 만일 나의 제자로서 믿음이 뛰어난 이라면 법지(法智)를 따라서 이 법 가운데서 궁극의 경지[究竟]를 얻으리라. 법지를 따른다 함은 감관[根]과 인식[識]과 경계[境]를 관찰하고 업보(業報)를 관찰하며 아라한의 번뇌[隨眠]을 관찰하고 마음의 자재함을 관찰하면서 선정의 즐거움[禪樂]을 좋아하며 성문과 독각의 성스런 신통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교묘한 관찰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현재와 미래 세상의 성문 제자들이 뛰어나고 왕성한 믿음으로 인하여 법지를 따르면서 성품이 청정한 마음을 잘 알고 번뇌에 물이 들면서도 궁극을 얻는 것이니라.
승만아, 이 궁극이란 대승의 인(因)이 되나니, 너는 이제 여래를 믿는 이는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비방을 하지 않는 줄 알지니라.”
그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다시 그 밖의 이치가 있어서 이익이 많사오니, 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그 일을 연설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도다. 이제 네 마음대로 말하여라.”
승만 부인이 말하였다.
“세 부류의 선남자와 선여인이 있사온데 매우 깊은 법에서 스스로 헐뜯지 않고 많은 공덕을 내면서 대승의 도에 들게 되나이다. 어떤 것이 세 부류인가 하면,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스스로 깊고 깊은 법지(法智)를 성취하고 혹 어떤 이는 법지를 따라서 성취하기도 하며 혹 어떤 이는 이 깊고 깊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만이 알 바요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여래께 우러러 미루기도 하나이다. 이 부류의 선남자와 선여인을 제외하고 나서 그 밖의 유정들은 깊고 깊은 법에 대하여 자기가 취한 바를 따라 집착하고 망령되어 말하면서 바른 법을 어기고 모든 외도(外道)를 익히나니, 부패(腐敗)한 종자라 설령 다른 곳에 있다 하여도 마땅히 가서 제거하여야 하고 그 부패한 이는 온갖 하늘과 사람들이 함께 꺾어 항복시켜야 하나이다.”
승만 부인이 이 말을 다하고 나서 모든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리고 예배하였다.
그때 부처님․세존께서 칭찬하셨다.
“장하구나. 승만아, 깊고 깊은 법을 방편으로 지켜 보호하면서 원수를 항복받고 잘 통달하였나니, 너는 이미 백천 억의 모든 부처님․여래를 친근하였기에 이런 이치를 말할 수 있었도다.”
그때 세존은 수승한 광명을 놓아 대중을 널리 비추면서 몸을 다라수(多羅樹) 일곱 그루 높이의 허공으로 올라가셔서 신통의 힘으로 발로 허공을 밟으면서 사위성으로 돌아가셨다.
그때에 승만 부인과 그의 권속들은 세존을 우러러 쳐다보면서 눈을 잠시도 떼지 않다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하며 함께 여래의 공덕을 칭찬하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무투성(無鬪城)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우칭왕(友稱王)에게 권하여 대승을 이룩하여 세우게 하면서 성 안의 일곱 살 이상의 여인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였고 우칭 대왕 역시 대승으로써 일곱 살 이상의 남자를 모두 교화하였으니, 온 나라 대중들이 모두 배우지 않는 이가 없다.
그때 세존은 서다림(逝多林:祇園精寺)으로 들어가셔서 존자 아난에게 말씀하시며,
제석천왕을 생각하셨다. 그러자 제석천왕과 그의 권속들은 때맞추어 부처님 앞에 이르렀으므로 그때 세존께서는 제석천왕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너는 이 경을 받아 지니면서 삼십삼천에게 연설하고 열어 보이어 안락함을 얻게 하라.”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도 역시 받아 지니면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분별하고 연설하라.”
그때에 제석천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제석천왕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이야말로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나니 온갖 성문이나 독각의 힘으로는 미칠 수조차 없거든 하물며 그 밖의 유정이겠느냐. 교시가야, 알아야 하느니라.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한 큰 공덕의 무더기이니, 이제 너를 위하여 간략하게 그의 이름을 말하리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지니라.”
그때에 제석천왕과 존자 아난이 여쭈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찬탄여래진실공덕경(讚歎如來眞實功德經) 또 설불사의십종홍서경(說不思議十種弘誓經)․이일대원섭일체원경(以一大願攝一切願經)․설불사의섭수정법경(說不思議攝受正法經)․설입일승경(說入一乘經), 설무변제경(說無邊諦經)․설여래장경(說如來藏經) 또 설불법신경(說佛法身經)․설공성의은부진실경(說空性義隱覆眞實經)․설일제의경(說一諦義經)․설상주부동적정일의경(說常住不動寂靜一依經)․설전도진실경(說顚倒眞實經)․설자성청정심번뇌은부경(說自性淸淨心煩惱隱覆經)․설여래진자경(說如來眞子經)․설승만부인정사자후경(說勝鬘夫人正師子吼經)이라고도 하나니 마땅히 이렇게 지녀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경에 말한 것은 모든 의심을 끊으며, 결정코 모든 이치를 분명히 밝혀 일승도에 들어간다. 교시가야, 이제 말한 승만부인사자후경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노니 법이 머물러 있을 때까지 시방세계에 열어 보이고 연설할지니라.”
제석천왕이 말하였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그때에 제석천왕과 존자 아난과 그리고 이 큰 법회에 있는 모든 하늘․사람․아수라․건달바 등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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