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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61 불교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4권

by Kay/케이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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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4

 

대보적경론 제4권문함(文函) 제2권을 풀이한다.


보리류지 한역
이병욱 번역
하혜정 개역



“가섭아, 미래의 비구는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중에서 외도를 향하는 것이 ‘개’와 같은 것이고, 색(色) 등의 다섯 종류의 경계가 ‘흙덩이’ 같은 것이고, ‘던진다[擲]는 것’은 예컨대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모든 경계를 두려워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저 사람은 경계를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워하는 인(因)을 증험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종류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므로 그저 경계만을 쫓을 뿐이다.
‘비고 한가로운 곳에 머문다’고 한 것은 뛰어난 경계를 더욱 얻고자 하여서 비고 한가로운 곳을 취하는 것이니, 저 사람은 혼자 있고 도반이 없는 곳에 머물고 저 잡된 물든 것을 제거하고 둘이 없는 곳에 영원히 머문다. 몸은 다섯 가지 욕심[五欲]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다섯 가지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이런 사람은 어느 때엔가는 어쩌다 좋은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생각하여 탐내는 마음이 생겨 은미하게 집착하며 안[內]을 관찰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기억하고 생각하며 참기 때문에 그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저 사람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므로 뒷날 성읍과 취락과 왕의 도시 등에 와서 사람의 무리 중에 있을 때에 또한 좋은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의 다섯 가지 욕심에 묶이게 되므로 청정한 경계에서 다시 물러나게 된다. 만약 비고 한가로운 곳에서 죽는다면 세속의 계율을 지켰으므로 문득 하늘에 태어남을 얻는다. 위의 하늘에서도 다섯 가지 욕심에 애착하여 묶이면 다시 하늘에서 죽더라도 또한 네 가지 악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아수라의 세계이다. 하늘에서 태어났다가 떨어지면 모두 탐욕의 행에 의지하기 때문에 흑붕(黑朋)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견해와 행동에 의지하므로 백붕(白朋)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인무아(人無我)를 보기 때문에 저러한 대치로 두 종류의 흑과 백의 붕(朋)을 풀이하여 성립시키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행을 닦고 난 다음에
산란한 마음이 있으면 거두어 취하게 하고 이미 거두어 들였으면 해탈을 얻게 한다.
이 중에서 경전[修多羅]에서 구절의 비유가 있으니 선정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서 그것을 해탈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방편인 사마타를 말하여 모든 번뇌의 사마타(舍摩他) 등의 모습을 취하고 버려서 잘못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목구멍의 비유와 사람을 묶는 비유 등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결같은 마음인 선정의 마음 중에 해탈의 방편을 말하여 보고 닦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번뇌 중에서 방편을 말하여 번뇌를 없애게 하기 때문이고, 저것은 몸이란 견해를 장애하여 삼매를 사랑하고 즐거워하게 하기 때문이고, 예컨대 목구멍과 사람을 묶는 비유로 알게 하기 때문이고, 진리를 증득할 때 출세간의 지혜로 어렵게 하기 때문이니, 몸이 있다는 견해는 목구멍에 병이 든 것과 같은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행을 행하고서 막는 등의 법이 있는 것을 막으므로 두 종류의 공(空)을 말하여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비유한다. 첫째는 세간과 외도의 경서와 모든 논 등을 독송하는 것이고, 둘째는 좋은 옷과 좋은 발우를 많이 쌓아 두는 것이니, 업에 의지하고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법이 두 종류의 묶임을 얻게 한다. 순서대로 첫째는 견해에 묶이는 것이고, 둘째는 이로운 공양과 명성과 소문 등에 묶이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묶이게 하는 것이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을 생기게 하지 않고 장애를 짓게 하니, 두 종류의 법을 얻게 될 것이다. 첫째는 성스러운 종자라는 무리들[朋]이고, 둘째는 모든 단월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생긴 착한 법을 없애고 더러움에 물듦을 짓는 까닭에 두 종류의 더러움을 얻게 한다. 첫째는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감내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단월과 선지식 등을 탐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선근의 법을 영원히 끊고 뿌리 뽑으므로 두 종류의 비와 우박의 무너뜨리는 법을 얻게 한다. 첫째는 바른 법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계를 깨뜨리고도 믿음 있는 사람의 보시를 받는 것이다.
현재의 법 중에 저것을 다스릴 수 없으므로 두 종류의 부스럼을 얻게 한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허물 보기를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죄를 스스로 덮는 것이다. 현재의 법 중에 고통스럽고 악한 행동 때문에 두 종류의 선근을 태우는 법을 얻게 한다. 첫째는 더러움이 있는 몸과 마음으로 가사를 받아서 입는 것이고, 둘째는 저 계를 지켜 공덕 있는 사람에게 예배와 공양 등을 받는 것 등이다.
미래를 비유한 것은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선근이 생기지 못하는 까닭이니, 두 종류의 병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얻게 한다. 첫째는 증상만을 품어서 마음을 스스로 조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이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무너뜨리니 보살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성문의 계율에 의지하는 것도 미래에 점차가 있을 것이니 알아야 한다.
‘가섭아, 스스로 안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은 이와 같으니, 중간에 누가 간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탐욕과 번뇌 등을 조복하는 까닭에 증상계행(增上戒行)과 다문(多聞)의 비유를 말하고, 싫어하고 후회하는 뜻이 생기는 까닭에 증상심계행(增上心戒行)과 목구멍의 비유를 밝혔다. 사람을 묶는 비유는 인무아와 법무아 때문에 지혜와 계행을 늘린다는 뜻이다.

【문】만약 탐욕과 번뇌 등을 조복하여 마음의 계행을 늘린다는 것이 경에서 말한 것이라면 무슨 까닭에 여기서는 계행을 늘리는 것을 말합니까?
【답】탐욕과 번뇌의 행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니, 죄는 대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므로 탐욕과 번뇌 등을 조복하는 것이 계행을 늘리는 것이다.

【문】어찌하여 탐욕과 번뇌 등이 죄를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답】두 종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니, 저 사람이 참회할 수 없거나 혹은 저 사람이 참회를 하더라도 참회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예컨대 여러 사문과 바라문이 번뇌의 인(因)을 알지 못하므로 색 등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한가하고 빈 곳에 머무르지만 자기의 마음이 일어날 때에 잘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에 탐욕과 번뇌와 아만의 경계를 일으키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탐욕 등을 생각하고 보는 것과 같다.
따라가는 것이 마치 개가 흙덩어리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흙덩어리로 때리는 까닭에 흙덩어리만을 따른다.
이와 같이 탐욕 등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취락 등의 모든 것을 가까이하는 일을 현전에서 생각하다면 이것을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의(義)에 수순하기 때문에 제거한다고 말하고 제거해서 마친다.

【문】무슨 까닭에 흑붕(黑朋) 중에서는 탐욕을 조복하는 것은 말하고 번뇌를 조복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며, 백붕(白朋) 중에서는 번뇌를 조복하는 것을 말하고 탐욕을 조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답】둘 다 욕계 중에 있기 때문이다. 유여(有餘)를 조복함과 유여를 조복하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유여를 조복하고 유여를 조복하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다’고 한 것은 만약 비고 한가로운 곳에서 목숨을 마치면 이와 같은 것이 아직 조복되지 않은 것인 까닭이다. 계에 머무는 사람도 무너지니 증상계(增上戒)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시 계에 머물지 않는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비유하면 말이 길을 내려가는데 혹 착각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행하는 사람은 증상계를 행하는 사람이다. 모든 염(念)을 착각하므로 어지럽다고 말한다. 비유하면 목구멍의 병이 명근(命根)을 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무아에 의지해서 증상지(增上智)를 이룬다. 몸이란 견해로 법의 명근을 끊을 수 있으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묶인 곳에 따라 해탈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법무아에 의지해서 증상지를 행한다. 성품에 벗어난 망념을 따르는 중에 마음을 헤아리게 한다. 이 세 가지 계를 닦는 중에 여덟 가지 계와 서로 어긋나는 법이 있고 여덟 가지 깨끗하지 않은 마음에 수순하는 것이 있다. 세간과 외도의 경서와 모든 논 등을 독송하는 것과 좋은 의복과 발우가 많은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연히 제멋대로 물들이는 것과 같으니 제멋대로 물들이는 것은 묶임[縛]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점차로 두 종류의 묶임을 말하니, 첫째는 견해에 의한 묶임이고, 둘째는 명성과 소문과 이익 된 공양에 의한 묶임이다. 묶이는 것이 원인이 되므로 이렇게 점차로 말한다. 견해에 묶이므로 성스러운 종자의 붕(朋)을 증오하고 비방하며, 이익 된 공양과 명성과 소문 때문에 재가인을 가까이한다.
예컨대 더러운 장애의 원인이므로 점차로 두 종류의 더러움을 말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종자의 붕을 증오하고 원망해서 모든 번뇌를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째는 재가인[白衣]을 가까이하는 까닭에 모든 단월과 선지식 등을 탐한다. 이 더러움은
비가 내리고 우박이 치는 원인과 같은 것이므로 다음으로 비와 우박을 말한다.
모든 번뇌를 참고 받아들이므로 바른 법을 헐뜯고 비방하며, 모든 단월을 탐하여 계를 깨뜨리는 인연을 가까이하므로 계를 깨뜨리고서도 믿음 있는 사람의 보시를 받는다. 비와 우박의 원인이기 때문에 다음에 부스럼이 있다. 바른 법을 헐뜯고 비방하며 계를 깨뜨리고서 믿음 있는 사람의 보시를 받기 때문이고, 모든 죄를 스스로 덮기 때문이고, 부스럼의 원인을 태우기 때문이므로, 다음에 태우는 법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허물 보기를 구하니 “더러움이 있는 몸과 마음으로 가사를 받아 입는다”고 말한다.
죄를 스스로 덮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공덕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예배와 공양 등을 받는다. 태우는 것이 병의 원인을 이루기 때문에 다음에 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더러움이 있는 몸과 마음으로 가사를 받아서 입고 증상만을 품는다고 말하였다. 계의 마음을 모으기 때문이고 계를 지키는 공덕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예배와 공양 등을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무너뜨린다.
이것에 짝하므로 백붕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두 사람 중에 처음 사람은 견행인(見行人)이고 두 번째 사람은 탐애행인(貪愛行人)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문】‘네 종류의 사문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점차로 나타내 보이는가?
【답】예컨대 저 사람은 계법을 어긴 근심이 있어서, 혹 친근히 하거나 혹 사람을 버리고 얻는 근심이 있고, 혹 사람의 공덕을 얻고 나서 모든 것이 생각 중에 장애가 되거나 혹 장애가 되지 않기도 한다. 저것은 이 중에서 사람의 근심에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에 의지하므로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형상과 복장의 모습[形服相]의 사문은 마음과 행동이 모두 무너진 사문이다. 악을 기뻐하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지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속이는 사문[誑詐]과 명성과 소문[名聞]의 사문은 행은 성취하지만 마음은 무너지는 사문이다. 두 종류에 의지하니, 대(大)를 희욕(喜欲)하고 희욕하는 마음이 있다[有喜欲]. 이 중에서 악을 기뻐하고 마음을 두어 하고자 하는 자는 설사 사문이라고 말하더라도 사문이 아니다.
큰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모든 덕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자기가 가진 덕을 그들이 넘어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유희욕은 설사 덕이 있더라도 덕 등과 함께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처음의 것에 두 종류의 행을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 첫째는 유여(有餘)이고, 둘째는 무여(無餘)이다.
유여는 네 가지 사문에 의지해서 말하니 알아야 한다. 계를 받는 유루에 의지하고 또 깨끗하지 않은 의업을 행하는 것에 의지한다. 이 세 가지 잘 조복하지 않은 것 등에 나아가서 순서대로 나타내 보이겠다.
걸식에 의지하므로 깨끗하지 않은 명(命)을 말하고, 받아쓰는 것에 의지하므로 아끼는 일로 받아쓰고 쌓아 두고 보관하는 일 등을 말한다. 업 닦는 것에 의지하므로 깨끗하지 못한 명을 말하고, 받아쓰는 것에 의지하므로 게으른 것을 말한다.
무여는 계를 깨뜨리기 때문이고, 근본이 되는 계를 깨뜨리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악한 법 때문이고, 저것을 덮어 가리기 때문이며, 두 번째 행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행과 명과 계와 받아쓰는 것과 도를 닦는 것에 의지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행을 성취한다’고 한 것은 행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경계를 성취한다’고 한 것은 명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위의를 성취한다’고 한 것은 물드는 마음의 네 가지 행 때문이다.
‘계에 의지한다’는 것은 수용하는 것이 거칠고 먹기에 껄끄러우므로 조금 바라는 것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종자의 성품’이라 한 것은 수용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모든 도인과 속인 등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한 때문이고, 도를 닦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조금 말하기 때문에 고요함을 즐겨하고 논에 의지해서 말하고 위로하여 깨우쳐 주는 등의 일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이와 같은 등의 법을 행하지만 모두 속이는 것이어서 착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마음을 무너뜨리기 때문이고, 수행에 의지해서 행하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항상 아견이 있다’고 한 것은 인무아에 의지하지만 아견의 행을 행하는 것을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공법 중에 두렵고 어렵다는 생각을 내니 비유하면 깊은 구덩이에 임하는 것과 같다.
법무아에 의지해서 공을 분별하지 못하고 저 말하는 사람도 원수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 번째 행을 성취해서 염(念)에 수순하고 머무르는 것은 그침에 의지하고 행에 의지하여
모든 법을 수순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머무는 것’은 계를 지키는 것이고, ‘염하는 것’은 많이 듣는 것이니, 저것을 염하므로 모든 일에 수순할 수 있는 것이다.
‘그침에 의지한다’는 것은 비고 한가로운 곳에 앉는다는 말인데, 비고 한가로운 곳에 앉으므로 모든 공덕에 수순한다. ‘모든 법에 수순한다’는 것은 조금에 만족을 알고[少知足], 조금 바라는 것[少欲] 등이다. 친한 사람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니, 친한 사람 중에서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염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 것은 싫어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저것을 대치하므로 활활 타오르는 등의 욕심을 없애고, 세 가지 보리이므로 세 가지 보리를 없애며, 도의 행과(行果)이므로 네 번째 사람이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한다. 아홉 종류를 성취하는 세력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항상 행하는 세력이고, 둘째는 많이 듣는 세력이며, 셋째는 욕망하는 세력이고, 넷째는 고요히 생각하는 세력이며, 다섯째는 바로 보는 세력이고, 여섯째는 증득하는 세력이며, 일곱째는 없애는 세력이고, 여덟째는 닦는 세력이며, 아홉째는 바로 증득하는 세력이다.
‘몸과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항상 행하는 세력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공 등의 법을 즐겨 듣고 마음으로 기뻐한다’고 한 것은 두 번째의 많이 듣는 세력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공이라는 견해를 기뻐하지 않고 다시 열반을 기뻐하여 범행을 닦는 것도 아니니, 어찌 하물며 삼계를 바라고 구하겠는가?
모든 보는 법을 바라고 구하지 않으며 또한 법을 없애야만 하기 때문이다. 저 과(果)와 저 도(道)로 열반을 얻으려는 뜻 때문이니, 세 번째의 욕망하는 세력을 말한다. ‘항상 법에 의지하고 문자와 구절과 문장에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에 대해 안으로 해탈을 구하고 밖을 향하여 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법에 의지하므로 선정 해탈의 생각과 마음과 세간의 지혜 등인 네 번째의 고요히 생각하는 세력을 구한다. ‘모든 번뇌에 대해 항상 해탈을 구하고 바깥을 향하여 하나의 법도 보기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의 성품은 더러움이 없어 필경에 청정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품이 물들지 않았으므로 출세간법을 배우는 것이 있어 안에서 스스로 보아 아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바른 견해의 세력은 바른 법의
몸으로도 오히려 부처님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색신(色身)으로 보겠는가라는 말이다. 삼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진실한 삼보는 또한 출세간의 지혜로 분별하고 염(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의 증득하는 세력은 공의 근심을 벗어나도 오히려 법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음성과 언어에 탐하여 집착하겠는가? 제거해야 될 것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의 없애는 세력은 닦는 것과 닦아야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닦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의 닦는 세력은 생사에 나지 않고 열반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법이 본래 고요하다는 것을 알아서 속박이 있는 것도 보지 않고 해탈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간을 버리지 않고 열반도 증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세간의 원인을 없애기 때문에 열반을 얻고 그렇기 때문에 세간에 태어나지 않고 열반을 구하지 않는다. 죽음과 수명을 바라고 구하지 않으며, 해탈을 구하지 않고 속박을 구하지 않는다.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고 나머지가 있기 때문에 행하지 않고 또한 없애지 않는다. 이 중에서 성품이 다해 없어지고 생기는 것이 없는 지혜 등에 포함되는 모든 무학법(無學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홉 번째의 바른 증득을 하는 세력이라 한다. 저 세 종류의 모든 사문이 사문의 이름을 세웠는데 저 이름은 의미가 없고 사문의 본래 의미와는 비슷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 보인다. 명성에 공격당하는 것이니 이것을 빈궁의 비유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명성에 공격당하는 것인가? 다른 사문의 이름난 형상과 복장 때문에 믿음 있는 이의 보시와 이익 된 공양을 망령되이 받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진실하지 못한 행을 하는 사문과 식지(識知)가 진실한 행의 사문에게 아만을 일으키고 계를 지키는 식지에게 계를 지키는 듯이 전도되게 말하기 때문이다.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와 수혜(修慧) 등에서 저 아만에 의지하므로 두 번째 비유를 말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큰물에서 표류하다 빠졌는데, 물이 부족하여 목말라 죽은 것과 같다. 이것은 문혜가 있기 때문에 아만을 내는 것을 말한다. 약사(藥師)는 사혜가 있기 때문에 삼마발제에 즐겨 집착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범부는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이지만 이익 된
공양과 공경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이고, 유학(有學)은 후회함을 일으켜 삼마발제를 닦는 자이지만 수혜의 삿된 행 때문에 바른 행을 행하는 중에 아만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므로 나머지 세 가지 비유를 말한다. 처음은 병든 사람의 비유이고, 둘째는 보배의 비유이며, 셋째는 죽은 사람의 비유이다.
계에 의지해서 저 아만을 일으키는 까닭에 네 종류의 계를 깨뜨리는 비구가 스스로 계를 잘 지키는 비유를 나타내 보인다. 이 중에서 처음은 가짜로 계를 받는 것이고, 둘째는 율을 잘 지켜서 분명히 이해하는 것에 게으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행이 저것과 비슷하기에 계의 장애를 깨뜨리는 것이 무너진 때문에 계를 무너뜨리고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열두 가지 두타(頭陀)18)를 모두 받아들이는 공덕을 말한다. 이것이 계를 지키는 것을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중에서 처음은 견해의 근심으로 계를 없애고 깨뜨리는 것을 대치하는 것에 대한 장애이다. 이것을 계를 깨뜨린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계를 깨뜨리기 때문에 저 중에 한 가지도 간직할 수 없다. 열반 중에 공포를 내어 계를 깨뜨리는 장애를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수행하여 대치한다.
두 번째는 아만 때문에 해탈을 얻은 모습을 내어 저것을 대치하므로 계를 지키는 모든 진실한 공덕을 말한다. 그러나 계를 깨뜨리는 악에 의해 드러난 것과 도를 닦는 행에 의해 드러난 것이 있다. 이 중에서 처음 계를 지키는 것은 안의 입(入)을 말하는 것이지 바깥의 입(入)을 말하는 것은 아닌 때문이다.
두 번째 물드는 업을 지었지만 지음이 없는 것이다. 착함은 지음이 없는 것이니 몸 등으로 짓는 것이 아니고 물드는 업은 지음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착함을 행하지만 행도 없고 행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잡되고 물드는 것과 잡되고 물들지 않는 것에 의지하며, 걸식에 의지하지만 행하는 것도 없고 행하지 않는 것도 없다. 잡되고 물드는 것과 잡되고 물들지 않는 것에 의지하여 수용하므로 이름도 없고 색도 없는 무여열반이라 이름한다. 그 이유는 생각이 없지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모습 없는 행 중에서 모든 생각을 염(念)하는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계를 염하는데 멸하는 것도 없고 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무학의 행은 열반에서는 유여이기 때문이고 번뇌는 무여이기
때문이다.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니 기쁨과 걱정을 벗어나는 것을 항상 행하기 때문이고, 염을 버리고 함께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취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없다. 그 이유는 또한 저 사람은 처음의 경계에서 걱정과 기쁨을 취하지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에 염이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중생도 없고 중생이란 이름도 없어야 그래야 무심(無心)에 이른다. 무심은 해석에 의지한 것이니 이는 이미 없어졌지만 기(記)할 수 있는 것에 따르는 것을 비유하였다. ‘기(記)하는 것에 따르고 장소에 따른다’고 한 것은 세간도 없고 세간이 아닌 것도 없는 것이니, 기세간(器世間)의 잡됨과 잡되지 않은 것을 의지해서 사람의 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의지함도 없고 의지함이 아닌 것도 없다’고 한 것은 잡되고 물드는 것과 잡되고 물들지 않는 것에 의지하고 6식(識)이란 촌락과 밭의 경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계로 스스로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계를 비방하고 낮추지 않는다’고 한 것은 친근한 집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 사람의 계를 기억하여 분별하지 않고, 스스로 나는 계를 지켰고 이와 같이 계를 간직했다고 분별하지 않으며, 저 성품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루도 세간에서 함께 없애야 할 것이지만 찾으면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함께 하지 않는다[不共]고 말한다. ‘그러나 저것은 예컨대 삼계의 과보는 아니고 삼계의 원인도 아니다’라고 한 이 두 구절에서 이 이름을 점차 나타내 보인 것이다. 계에 의지해서 모든 법에 수순하고 수순하지 않으므로, 잘 배운 사문과 잘 배우지 않은 사문의 차별된 일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잘 배우지 않은 사문인가? 이 중에 세 종류가 있으니 알아야 한다. 형색과 복장은 사문인 것 같지만 사문의 계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는 형색과 복장만 같을 뿐이다. 같지 않은 점은 형색과 명(命)으로 수용하는 것과 명과 계에 대한 견해의 마음이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이 중에서 형색에 처한 것과 복장에 처한 것이므로 행색과 복장으로 처한 것이 비슷하다고 한다.
이 중에서 복장에 처한 것은 저 승가리인 가사는 동등하므로 복장은 같다고 한다. 형색에 처하는 것은 머리를 자르고 발우를 가지고 다니므로 행색이 같다고 한다. 깨끗하지 않은 몸 등의 업을 행하므로 행이 같지 않다고 하고, 깨끗하지 않은 명(命)이므로 명이
같지 않다고 하며, 아끼기 때문에 수용하는 것 중에서 비슷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쓰고 행하는 것이 같지 않으며, 계를 깨뜨리기 때문에 계를 간직하는 것 중에서 같지 않은 것이다.
악한 법이므로 견해에서 비슷하지 않고, 조복하지 않고 모든 근(根)을 숨기지 않으므로 마음에서 비슷하지 않다. 두 가지 위의에서 속이는 사문은 걸식을 사용하고 정진을 사용하는 것 등이니 알아야 한다. 증상심(增上心)과 증상혜(增上慧)도 마찬가지이다. 저 행과 마음이 비슷하지 않으니 용(用)을 성취하는 뜻은 동등하기 때문이다.
증상계는 같으니 한 마음으로 편안히 상세하게 하기 때문이고 내지 잡되고 혼란한 것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상심과 증상행은 같으니 말을 적게 하기 때문이고, 증상지와 증상행은 같으니 속이는 등의 저 행과 마음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명성과 소문의 사문은 명성과 소문만을 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마타(舍摩他)의 몫은 같고 비파사나(毗婆舍那)의 몫도 같으며, 저 둘을 닦는 몫도 같고, 또한 저 두 가지 돕는 행은 같지만 마음의 성품은 같지 않다. 이 중에서 계이기 때문이고 계의 몫이기 때문에 사마타의 몫은 같다. 계는 삼매의 원인이기 때문이고 많이 들은 것이기 때문에 비파사나의 몫은 같다.
들어서 무루지를 받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비고 한가로운 아란야(阿蘭若)에 머물기 때문에 저 두 가지를 닦는 몫도 비슷하다. 비고 한가로운 곳에서 머무는 것이 닦는 원인이므로 조금 바라는[少欲] 등의 저 두 가지 조도행(助道行)은 같다. 저 조금 바라는 등은 익히는 것을 돕는 행[助習行] 등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마음은 비슷하지 않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문이 잘 배운 사문인가? 네 종류의 모습이 있으니 알아야 한다. 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이기 때문이며, 증득하기 때문이고, 다 이르기 때문이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고, 현재의 법 중에서 싫어하고 후회하는 행을 얻기 때문이며, 공(空) 등이 사문의 뜻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고, 미래에 태어나 교화를 몸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의 세력이라 하니 알아야 한다.
진여의 행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법무아(法無我)를 믿는 뜻이기 때문이며, 열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고, 공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어야 할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저것에서 거짓 이름[假名]의 성품과 모습을 벗어난다. 바르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요의(了義)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필요한 의미에서 바라고 구하기 때문이다. 번뇌 중에서 해탈을 구하고 밖을 향하여 달리지 않으니, 소리의 성품을 따르는 것만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음의 세력이라 이름하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의 근본이 영원히 청정하여 물들지 않는 것이 진여법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형상과 다른 형상을 짓고 돕지만 다른 지혜의 성품을 인연하지 않으니 물들지 않고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모든 과보 등이 다하여 견해에서 해탈하니 거짓 이름의 성품과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득하는 세력이라 말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의 자성은 멸하기 때문이고, 모든 번뇌의 물듦 등을 잘 닦는 대치를 더 이상 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멸도(滅度)를 취하지 않고 진여는 끊지 않기 때문에 일이 아닌 것은 관찰하지 않는다. 이것을 다 이른 세력[盡至勢]이라 하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비유와 잘 배우지 않은 사문은 세 종류의 모습이 되므로, 이름이 의미만 같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음을 무너뜨리고 행을 성취하며, 마음을 성취하고 행을 무너뜨리며, 또한 마음도 무너뜨리고 행도 무너뜨린다. 이 중에서 마음을 무너뜨리고 행을 성취하는 데 세 종류가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에서 마음이 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고, 저것을 말할 수 있는 중에서 족함을 알게 되는 것이며, 세간의 삼매를 얻은 까닭에 저 공덕을 얻어 그것을 즐거워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강물에 표류하여 떨어지는 비유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행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오직 듣는 등의 일만 있을 뿐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의사의 비유 또한 저 일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요술쟁이의 비유는 저 세간의 삼매를 얻어 저 일만을 즐겨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니 보배 구슬의 비유는 마음을 성취하고 행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알아야 한다. 죽음의 비유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행을 무너뜨리는 것이니 알아야 한다. 장자의
자식 비유는 마음을 성취하고 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니, 한 모습의 의미이기 때문에 잘 배운 사문을 알아야 한다.
계를 깨뜨린 비구도 계를 잘 지킨 것 같아 보이는 데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점차(漸次)가 있는가? 진실한 사문으로 진실한 행 받는 것을 보이고, 계와 같은 모습이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고, 거짓 이름의 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거짓 이름의 계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무는 행에 네 종류가 있으니 알아야 한다. 저것은 다시 아만 등으로 몸을 무너뜨리므로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무는 행이라 한다. 첫 번째는 여섯 종류의 계를 성취시키니 두 종류의 장애가 계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여섯 종류의 행인가? 분수에 따라 계를 지키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19)에서 말한 것에 의지해서 행이 성취된다. 행이 성취되면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성취되고 미세한 죄 중에서 두려움을 보게 되어 계를 받아들여서 수행한다. 모든 계의 행 중에 두 종류의 장애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종류인가?
몸이란 견해가 치성해서 계 중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과 명령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저 두 가지 근심을 버리는 것이니 몸이란 견해가 치성한 곳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율사이기 때문에 모든 계를 범하는 데에서 계를 잘 일으킨다. 그러나 세간의 깨끗함과 동등하기 때문에 모든 이익 된 공양에 움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몸이란 견해를 함께 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 같은 법은 세간의 깨끗한 계를 얻고 다시 함께 몸이란 견해를 내어서 법무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생긴다는 말을 들으면 겁을 먹고 게을러지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모든 함께 하는 근심을 벗어난다. 그러나 삿된 법무아를 믿기 때문에 아만의 계를 무너뜨리지만 네 종류의 바르지 못한 계에 머물러 비방하는 법의 계를 아는 것이다. 저 모습과 저 무루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비방하는 등의 법인가? 첫째는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문다’고 한 것은 또한 아(我)가 있음을 보고 또한 “나의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다”고 말한다. ‘계를 범하는 것을 행한다’고 한 것은 짓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지음도 없고 짓지 않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행을 하는 것, 저것도 행이 아니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지은 것도 없고 지은 자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행을 자세히 잘 살펴보면 또한 행이 아니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행도 없고 행 아닌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망념의 행은 행이 아닌 것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행하는 것이 없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무르는 행이다. 몸이란 견해의 붕(朋)인 번뇌를 수순하고 또한 이름을 보고 색을 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이름도 없고 색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하였다.
미래에 생각이 생기는 것이 결정코 있고 저 생각이 있다고 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생각도 없고 생각 아닌 것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저 치연한 번뇌를 없앤다’고 한 것은 불멸(不滅)이라 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멸도 없고 멸이 아닌 것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인무아와 취하고 버리는 사람에 집착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취함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저 중생의 무아에 대한 집착 중에서 또한 취할 수 있고 또한 취할 수 없다고 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버릴 만한 것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색 등으로 중생의 모습을 집착하지 않고서 저것에 대해 취함이 좋다고 말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중생도 없고 중생의 이름도 없다”라고 말한다.
언어 또한 저것을 취함이 좋은 분별이라고 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몸도 없고 몸의 이름도 없으며 입도 없고 입의 이름도 없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저 분별이 마음이고 저 분별을 취함이 좋다고 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마음도 없고 마음이라는 분별의 이름도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 계에 머무르는 행은 위로 세간에 태어나고 또한 아래로 향해서 버리므로 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저것을 대치하므로 “세간도 없고 세간 아닌 것도 없다”고 말한다. 삼매에 의지하고 또한 탐욕 아닌 것에 의지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의지함도 없고 의지함이 아닌 것도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계를 거두어 취하고 다른 사람의 계를 헐뜯지 않으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계로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계를 헐뜯고 낮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네 번째 거짓 이름의 계에 머무는 것은 말하기를 “나는 계를 지킬 수 있다”고 하는 분별의 생각을 내는 것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또한 계를 분별하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뛰어난 성품의 염 등으로 계를 분별하고 생각하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계를 분별하지 않고 이 계를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이 비방하는 법이다.
무루의 계 중에서 모두 없애 다할 수 있으니, 이것을 모든 성인이 계를 지켜 무루가 충분한 구절이라 한다.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출세간이기 때문이고, 삼계에 이르지 않으니 이치로는 모든 번뇌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의지하는 것을 벗어나니 번뇌를 대치하여 삼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有)에서 또한 깨끗하여 뛰어난 점을 나타내 보인다. 저 사람이 계를 지키기 때문에 모든 게송을 말하니 알아야 한다.

구족하여 계를 지키는 사람은
더러움도 없고 소유도 없어라.

처음 게송의 첫 번째 구절은 더러움을 벗어난 까닭에 성품의 청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탐욕 등의 유여를 벗어나고 나면 저것의 원인이 깨끗한 까닭에 계의 성품이 청정함을 얻고 원인 등과 깨끗한 것과 함께함을 나타내 보인다. 나머지 세 구절은 또한 저 계를 지키는 것에서 동반 등의 원인이 청정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 중에서 계를 깨뜨리는 동반과 원인을 함께하는 모든 원인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계에서 동반과 원인을 함께 하는 모든 것’은 세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계를 깨뜨리는 동반은 세 종류가 있다. 아만이 색 등과 함께하고 원인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뜻에 미혹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과 같은 것을 본다. 삼마발제를 함께 즐거워하고 굽혀서 동반과 함께 염을 취한다. ‘일을 함께 하는 염’은 거친 곳에서 몸을 같이 하여 즐거워하고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게송의 의미이다.
또한 저 계를 지키는 중에 모든 모습이 청정한 계에 의지한 것임을 밝혔으므로 두 번째 게송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고요하고 항상 하며 필경인 것이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 네 종류의 성품이 있으니
근심을 함께하여 대치하기 때문이다.
바라제목차와 계의 청정함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계를 받아들이는 데 청정하다. 나머지는 무루의 계가 청정한 것이니, 또한 저 계를 지키는 것에 모든 근심이 없고 청정한 것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게송을 말한다.

몸과 목숨을 탐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 등에 다섯 종류의 근심이 있다. 무엇이 저 다섯 종류의 근심인가? 첫째는 이익 된 공양과 공경의 근심이니, 몸을 아끼기 때문이다. 둘째는 게으른 근심이니, 염을 계속 이어서 죽지 않는다고 하고 목숨을 즐거워하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셋째는 원(願)을 일으켜 범행(梵行)을 지키는 근심이니, 모든 유(有)에 태어남을 바라고 구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戒)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근심이니, 바르게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지극한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니, 예컨대 모든 외도의 말은 바르지 않은 이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다섯 종류의 근심을 멀리 벗어나는 까닭에 청정하여 모든 근심이 없는 것을 풀이하여 성립시킨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번뇌가 없는 청정함에 의지하므로 네 번째 게송을 말한다.

계를 지키어 세간에 물들지 않는다.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집제(集諦)에 포함되는 물드는 것에 의지해서 치성하게 물드는 것에 함께 이르러 욕심의 경계를 일으킨다. 두 가지 식(識)으로 모든 애착과 물드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세간의 법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세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앞에 있는 것을 멸하고 다시 애착이 있으므로 멸한다.

속히 지혜의 광명을 얻으니
광명을 얻는 까닭에
견제(見諦)의 도 가운데 한다.

무소유(無所有)에도 장애가 없고, 무소유의 일에도 장애가 없다. 도를 닦아 무명(無明) 등과 나머지 번뇌에서 저것을 대치하므로 말하기를 “아(我)도 없고 저 모습도 없다”고 하였다. 자아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벗어났으므로 무학(無學)의 도에 의지하고 아만을 벗어나 청정하다. 다섯 번째 게송을 말한다.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도 없으며
그리고 또한 중간도 없도다.


모습이 없는 행 중에서 안과 밖의 입(入)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집착과 속박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번뇌를 없애고 치연하게 하는 것을 없애는 때문이다. 아첨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아만의 차별도 없으니 영원히 청정함에 의지하는 것을 밝힌다. 여섯 번째 게송을 말한다.

마음은 이름과 색에 집착하지 않고
유(有)에 대해 원을 일으키지 않는 까닭에
고요한 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저것은 계를 지키기 부족하기 때문이고, 모든 근(根)을 조복하기 때문이며, 삼매 중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자아와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내지 유정(有頂)세간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만족을 알기 때문이고, 계를 지키는 것에 머물기 때문이며, 계를 말하는 중에 세간의 청정함에 의지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게송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모든 계를 지키는 것을 행하지만
그 마음을 스스로 높이지 않도다.

계를 지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높고 낮은 생각을 내지 않으니 싫어하고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성스러운 도를 구하는 것을 넘어서 있도다.

계를 깨끗하게 지키는 자는 이 모습이니, 삼매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출세간의 도를 구하고 출세간의 청정함에 의지한다. 여덟 번째 게송을 말한다.

계를 최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로써 만족하지 않는 까닭이며
또한 삼매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삼매를 즐겨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이 두 가지 일을 넘어서서
위에 있는 지혜를 닦도다.

분별없음이 성스러운 성품이고, 분별없음이 증상지(增上智)를 닦아 거두어 취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이 칭찬하고 찬탄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나머지를 아는 사람은 찬탄할 일이기 때문이다. 유학과 무학과 유학 아닌 것과 무학 아닌 것의 청정함에 의지하므로 아홉 번째 게송을 말한다.


마음은 몸이란 견해에서 해탈하고
몸이란 견해를 분별함이 있는 것을 멸하였네.
계의 청정함 배우는 것을 나타내 보이므로
아(我)와 나의 것[我所]을 없앴도다.
함께 태어난 몸이란 견해를 없앴으므로
무학의 계가 청정함을 나타내 보였으니
공(空)은 부처님의 경계인 줄 믿을지어다.

공을 믿기 때문에 유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청정함의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청정함을 아끼고 집착함에 의지하므로 열 번째 게송을 말한다.

계에 의지해서 삼매를 얻으니
삼매로 지혜를 닦을 수 있어라.

8성도(聖道)20)의 계를 얻지 못한 것을 나타내 보이므로 계의 청정함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원인에 의지해서 지혜를 닦으니
청정한 지혜를 빨리 얻을지어다.
청정한 지혜를 얻었으므로
청정한 계를 구족하였네.

성스러운 지혜를 얻었으므로 뒤에 계의 청정함을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이 게송을 말한다.
그때 8백 비구는 모든 번뇌를 받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었다. 3만 2천의 사람이 티끌의 더러움을 멀리 벗어나서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다. 이 가르침 중에 이와 같은 등의 큰 이익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다시 현전에 곧 큰 과를 얻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교화하는 가르침에 대해 유학과 무학이 평등하게 얻기 때문에 5백 비구가 선정을 얻은 것이다. ‘이 깊은 법을 듣고 마음으로 믿고 이해하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고 한 것은 저 조복시키기 어려운 사람을 조복시키고 나서 믿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통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깊은 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모습이 있어 모든 법을 통달할 수 없으니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만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지혜로 모든 의미를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게송의 깊고 깊은 뜻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보리는 깊고 깊다’고 한 것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저 사람이 모든 선근을 순수하게 심지 않았다면 악지식(惡知識)에
포함된다. 스스로 믿는 힘이 적어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악지식에 포함되기 때문이고, 모든 선근을 순수하게 심지 않았으니 믿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존자인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리를 드러낼 때 모든 성문이 여래이어서 교화하고 제도하는 뛰어난 의미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내지 거짓 이름과 진실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곧 두 비구를 변화하여 만들어 내었다’고 한 것은 여래의 방편으로 제도해야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 때문이고, 교화하는 것에 두 종류의 모습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인 때문이며, 같이 입는 것을 믿고 같은 법의 일을 보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니, 저 모든 비구를 거두어 취한다.
이미 바른 가르침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저 사람은 열반을 망령되이 집착하여 취하고, 아만을 내기 때문에 두려움을 내며, 믿기 때문에 여실한 열반에는 중생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열반에 들어간다면 모든 탐욕 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 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저것은 생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다만 멸하여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기억하고 생각하지 말며 분별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안과 바깥의 입(入) 중에서 ‘이것이 자아[我]이고 나의 것[我所]이다’라고 한 순서대로이다. ‘곧 모든 법에 집착이 없다’고 한 것은 탐욕과 성냄이 본래부터 생김이 없기 때문이다. ‘벗어남이 없다’고 한 것은 미래에는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적멸(寂滅)이라 하는 것이다. 이 집착을 막으면 본래 적멸이 아니지만 적멸이 있다. 모든 계 등의 품, 저것도 머물지 않고 오지도 않는다.
‘다시 멸하여 다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중생이란 이름이 영원히 고요하기 때문이다. ‘머물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고 한 것은 물들지 않기 때문이고, ‘다시 멸하여 다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품은 스스로 멸하여 다하기 때문에 저것도 나머지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본래 고요한 것이 아닌데 후에 고요함을 이룬다면 그대들은 이 모습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열반은 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나는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지 말 것이니 모습으로 열반을 향하므로 열반의 모습을 짓는다. 탐욕 등의 모습이기 때문에 열반의 모습으로 인식하지 말 것이니, 탐욕 등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저것의 모습을 이름한 것이니 또한 모습 없는 행 가운데의 방편으로서 번뇌가 없는 것을 베푼 것일 뿐이다. 그 다음 현재의 법에 방편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멸진정에 들어가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혹 이것은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
경에 말하기를 “만약 저 사람이 모든 선근을 순수하게 심지 않았다면 지혜와 공덕의 조도행(助道行)이 부족하고 적어지므로 번뇌를 늘리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의미는 아니다. ‘악지식에 포함되다’라고 한 것은 선지식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 의미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믿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지혜를 벗어난 조도행이기 때문이다.
깊고 깊은 경지를 믿을 수 있다는 이러한 의미를 믿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괄적인 것이다. ‘통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은 헤아려 알아 법의 근본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믿고 이해할 수 없으니 이미 진정한 지혜를 바르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교화하시고 제도하시는 일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교화하는 것은 아만을 함께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고,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보여 나타내기 때문이며, 말한 것으로 가르침을 수순해서 행하기 때문이고, 가르침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을 얻기 때문이며, 바르고 깨끗한 가르침을 말하고 방편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저것은 다시 네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들고 깨끗한 것 중에서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수순하는 것에 의지해서 말하기 때문에 번뇌의 원인을 주는 것을 벗어나서 청정한 법 중에서 가르친다. 공포의 원인을 버리기 때문에 현재의 법을 가르치고, 가장 즐거운 행의 방편을 봄으로 이 몸에 다시 아견이 있게 된다.
내가 바르게 증득했기 때문이고, 청정하고 물든 것 중에서 공(空)의 수순함에 의지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나는 미래에 이유 없이 공포와 물듦을 낸다”고 말한다. 물들기 때문에 세간의 행을 처음의 모습이라 말한다. ‘그대들은 기억하고 생각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라’고 한 것은 번뇌의
원인에 두 종류 거짓 이름의 성품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아만과 집착과 번뇌의 분별 성품이기 때문이고, 저 공덕에 집착하는 근심이 분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두 번째 모습이라 이름한다.
청정함도 간략히 말하면 두 종류가 있으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청정한 도의 행이고, 둘째는 열반의 청정함이다. 이 중에 두 종류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청정한 도의 행은 두려움의 원인이니 알아야 한다. ‘너희들 비구가 가지고 있는 계의 품, 저것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다시 멸하여 다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헤아림이 진여 중에서 영원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번뇌가 있으면 분별이 있음을 풀이하고, 번뇌를 벗어나면 분별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청정한 도의 행 중에서도 번뇌와 번뇌를 벗어남이 있으니, 저 사람이 분별하고서 청정한 도(道) 중에서 공포를 낸다. 두 종류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니, 청정한 열반의 원인 중에서 공포를 내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이 생각을 버리고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하자면 열반과 다르지 않은 거짓 이름의 성품에 대해 생각으로 집착하기 때문이다.
‘생각에 따르지 말고, 생각 아닌 것에 따르지 말라’고 한 것은 열반에 대한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생각을 기억하고 짓기 때문에 다른 생각으로 인식하고 생각하지 말며 다른 생각으로 이름을 관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요한 안의 마음에 대한 생각이다. ‘다시 생각으로 생각을 관찰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 두 가지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 중에서 두려움을 내지 않으니, 이것을 세 번째 생각이라 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 두 가지 원인을 버리기 위한 까닭에 가장 위에 있는 행의 방편 등을 가르치는 것이니 알아야 한다. 저 두 가지 원인의 일을 버리고, 번뇌의 원인을 버리며, 청정한 법 중에서 두려움의 원인을 버리니, 이것을 네 번째 모습이라 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여래의 교화하고 제도하는 방편을 알아야 한다. 이로부터 뒤로는 바른 지혜로 큰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일에 의지하기 때문에 말한다. 첫째는 원인을 위한 일이고, 둘째는 일에 의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메아리 울리는 음성의 일이고, 넷째는 고요히 사유하는 일이며,
다섯째는 가르치는 일이고, 여섯째는 법을 증득하고 법의 일에 수순하는 것인 때문이다. 말하기를 “그때 존자 수보리가 저 비구에게 묻기를 ‘너희들 비구는 과거에는 어느 곳에 이르렀고 현재에는 어디에서 좇아 나오는가?’ 비구가 대답하기를 ‘수보리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좇아 나오는 곳도 없고 가되 이르는 곳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무슨 의미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첫 번째 원인을 즐거워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문】무슨 의미이기 때문에 저곳은 가고 오는 것이 없는가?
【답】비유하면 세간과 같기 때문이다.

【문】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답】우리들의 스승은 앞서 와서 생긴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두 번째 원인의 일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색신(色身)이 아닌 세존께 의지하기 때문에 저것은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이것이 열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어떠하며, 누구에게 법을 들었는가?
【답】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았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세 번째 메아리치는 음성인 원인의 일에 의해서이다. 중생을 위해서 법을 말하므로 저 사람은 속박되지 않았고 위와 같은 일들에서 생긴 애착을 대치하는 것에 의지하므로 해탈하는 것도 아니다. 저 사람은 이미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무슨 법을 익히고 행하는가?
【답】무명을 멸하려 하지도 않고 밝음을 생기게 하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네 번째의 고요히 사유하는 일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무명을 멸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며, 잡된 무명에 의지하지도 않기 때문이고, 모든 성인은 저 행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밝음을 생기게 하지도 않는다’고 한 것은 밝음이 이미 생겼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의 스승은 누구인가?
【답】만약 얻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바로 그 사람이니, 저 사람의 제자이다.

【문】만약 아직 얻지 못했고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면 무슨 의미이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다섯 번째의 가르치는 일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비구의 몸으로 변화시켜 저 사람에게 권하니, 그러므로 여섯 번째 법을 증득하는 것과 법행(法行)의 일에 수순하게 된다. 이는 열 가지 일에 의지하는데, 말하니
알아야 한다.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에 의지하고 견제행(見諦行)의 번뇌를 없애는 것과 수도행(修道行)의 번뇌를 멸하는 것과 고통을 멸하는 것에 의지한다. ‘존자에게 공양한다’고 한 것은 보시행을 행하여 범부의 경지를 넘어서고,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 머물며, 함께 얻어 해탈에 이르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누구와 함께 범행을 닦는가?
【답】예컨대 삼계에서 행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무슨 의미로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무여열반에 유여의 일이 있기 때문이고, 그때 모든 법을 같이 하는 사람이 함께 머물렀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언제 열반을 얻을 것인가?
【답】만약 여래께서 교화하신 사람이 열반에 들어간다면 우리들도 열반에 들어갈 것이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유여열반에 의지하니 저것은 본래 멸(滅)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다른 힘이 법 본래의 업으로 응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그때 나머지와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번뇌가 다했는가?
【답】모든 법이 필경에 모습을 다하였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견제(見諦)에 대한 미혹을 멸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영원히 멸한다’고 한 것은 모든 취(趣)가 악처(惡處)이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이미 자기의 이익을 얻었는가?
【답】자아가 없는 것과 나의 것이 없는 것을 알아서 끊었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닦는다는 생각의 번뇌를 멸하기 때문이고, 함께 생긴 몸이란 견해를 멸하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마군을 깨뜨리는가?
【답】음(陰)의 마군을 얻을 수 없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고통을 멸하기 때문이고, 음의 마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미래에 저것을 생기게 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중에서 모든 마군과 원수를 항복시키고 복종시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음이 없기 때문에 나머지 마군도 없다.

【문】너희들은 여래를 받드는가?
【답】몸과 입과 마음으로 받들지 않는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존자를 공경하는 데 몸 등으로 하지 않으니, 열반을 얻은 중에 친히 공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복전(福田)이 되는가?
【답】취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다.

【문】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단월이 짓고 공경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지을 수 없으니, 견해의 움직임과 악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순서대로이다.

【문】너희들은 생사와 가고 오는 것을 끊었는가?
【답】항상 함도 없고 끊을 것도 없다.

【문】무슨 의미로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성인이 아닌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간을 끊지 않고 조그마한 방편을 지어놓고 그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열반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끊지 않는 등의 일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성인의 경지를 수순해서 행하는가?
【답】유(有)를 취함을 떠나서 장애 없는 해탈을 얻는 것이다.

【문】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성인의 경지에 머물기 때문이고, 모든 취함을 벗어나 해탈하였기 때문이며, 제멋대로 집착하지 않고 바르지 않게 취하는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문】너희들은 구경에 어떠한 곳에 의지해야 하는가?
【답】여래께서 사람을 교화하여 이르는 곳에 따르는 것이다.

【문】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해탈하여 여래께 함께 이르면 다른 뛰어난 모습이 없이 법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해탈하여 함께 이르는 것을 보이고 혹은 다시 마음으로 자재함을 얻는다. 모든 선남자야 이것이때에 따라 바른 수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자를 위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바른 수기를 말씀해 주시어 큰 이익을 지을 수 있으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문】어떤 것이 은밀한 말인가?
【답】둘이 아닌 모습의 지혜와 모든 은밀한 말은 모습이지만 둘이 아닌 말에 들어간다.

【문】어떤 것이 말한 구절이 처한 일인가?
【답】그러나 저 성품은 없기 때문이고, 말한 성품이 한 모습을 훈습해서 경계의 성품과 모습을 갖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니 저 둘이 아닌 것 중에 집착을 낸다. 두 가지 모습은 물드는 것이고
두 가지를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한다.
비록 말한 모든 구절의 처소에 일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저것도 거짓 이름으로 모습을 훈습함을 말하는 것이다. 경계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저 두 가지는 모습을 훈습하고, 경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저것은 두 가지이다. 저 둘이 아닌 것에서 두 가지 모습을 집착하므로 물듦이 있고 집착하지 않고 다했으므로 청정하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은밀한 말에 들어간다. 이것이 두 가지 모습이니 알아야 한다.
이 중에 ‘다섯 종류의 모습’이라고 한 것은 존귀한 곳과 저 가르치는 것 중에서 다섯 종류 과보의 일이 있고 다섯 종류 과보의 이익 된 일이 있다는 말이다. 간직하는 것을 성취한 까닭에 모든 은밀한 일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 종류의 모습이 있으니 어떤 것이 다섯 종류의 존귀한 것인가? 예컨대 생각 있음으로 저 성취함을 말하므로 존귀한 일을 성취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문】다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답】열반에서 저것을 영원히 증득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좇아 나오는 곳이 없고 가도 이르는 곳이 없다. 여섯 종류의 입멸(入滅)을 벗어났기 때문에 저 세계 중에는 평등함이 있으니, 비방하려 해도 비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분별하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문】모든 법에 어떤 것이 저 존귀한 것이어서 법을 말할 수 있는가? 저것은 어떤 모습을 갖는가?
【답】앞에서부터 생기지 않았고 멸함도 없으니 법신은 나고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문】어떤 등등의 법을 말하는가?
【답】예컨대 속박되지 않고 해탈한 것도 아니다. 속박과 해탈은 성품과 모습이 없기 때문이고, 모든 행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문】몇 종류의 성품과 모습을 말하는가?
【답】무명을 끊어 멸하지 않고 밝음을 생기게 하지 않기 때문이고, 밝음과 무명의 거짓 이름의 성품을 보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어째서 아직 얻지 못한 것과 아직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는가?
【답】바른 깨달음이 계속되지 않으면 저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어떤 것이 과보의 뛰어난 일을 성취하는 것인가?
【답】무여열반계(無餘涅槃界)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계에서 행하지 않으면 무여열반계의 자리에 의지한다. 청정한 진여만이 머무는 경지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유여열반계(有餘涅槃界)는 여래가
교화한 자가 열반의 진실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성품의 열반이 있을 뿐이다.
모든 법이 세제(世諦)의 열반에 의지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성스러운 도의 행을 가득 채우고 지을 것을 마쳤기 때문에 “나는 지을 것을 이미 마쳤다”고 말한다. 자아 있음에 대해서 자아와 나의 것이 없고 법무아를 증득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다. 안의 원수를 정벌하니 안의 힘 때문이고, 모든 번뇌인 원수에 대해 법무아를 증득했기 때문이며, 영원히 멸하고, 말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바깥의 원수를 징벌하지만 음(陰)의 마군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바깥의 음에 포함된다. 음이란 바깥의 원수가 소리로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것보다 뛰어나다’고 한 것은 분별의 생각을 벗어나서 음(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과보 이익의 일을 성취한다’고 한 것은 이미 존자를 공경하는 일을 몸 등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법에 수순해서 행하기 때문이고, 믿음으로 보시하는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청정히 받기 때문이며, 복전을 요달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세간의 고통스런 바다를 건넌다. ‘세간을 건넌다’고 한 것은 법무아(法無我)여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복전의 경지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복전의 지위를 행하지만 법에 대한 교만을 취함을 버리기 때문이다. ‘법으로 교화한다’고 한 것은 불자가 되는 것을 말하니 여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어디로 가기에 가지만 이르는 곳이 없는가?’라고 한 것은 예컨대 여래가 교화하는 사람이 오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이와 같이 모든 비구와 문답하였는데 그때 8백 비구가 있어 모든 법을 집착된 견해로 받아들이지 않아 마음에서 해탈을 얻었으며, 3만 2천의 사람이 더러움을 멀리 벗어나 법안의 청정함을 얻었다’고 한 것은 이것은 바르게 수기를 주는 중에 이러한 큰 이익 된 일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유학이라면 무학의 경지를 얻고, 범부라면 성숙시켜 유학의 경지를 얻게 한다. “세존이시여, 이 보적(寶積)의 법문은 희유합니다. 대승의 선남자와 선여인과 함께 머물러 큰 이익을 줍니다”라고 말한 이후의 대목은
이 법문이 큰 이익 된 일을 말하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익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보살이 성취하는 불법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중도의 의미로 가르치는 것 등이니, 순서대로이다. ‘저 선남자 선여인이 얼마만 한 공덕을 얻었는가’라는 말은 보살장을 듣는 중에 가르침을 믿는 이익 된 일이 있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가섭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으면 이와 같은 등의 다섯 종류 모습을 나타내 보여 이로움 믿는 일을 나타낸다. 첫째는 세계에서 시간의 큰 덕을 간직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에서 물러나는 것을 자재하게 성취하는 것이며, 셋째는 몸을 전환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저곳 때문에 성취하여 법기(法器)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듣는 사람이 법기가 되기 때문이고, 몸을 버릴 때 청정한 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세계에서 ‘큰 것’이란 부처님과 저 성문과 모든 탑 등이다. ‘간직한다’고 한 것은 모든 보배로 가득 채운 세계의 의복 등이니 이때가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다섯 종류의 모습이 있어 큰 자재함을 얻어 원인에서 물러나는 일을 알아야 한다. 한량 있는 것으로 한량없는 과보의 원인을 바라기 때문이고, 다함 있는 것으로 다함없는 법을 바라기 때문이며, 위의 얻음과 위의 약(藥)이 아니기 때문이고, 도(道)에서 저 행하는 성품을 돕고 알기 때문이며, 저것으로 끌어들여 취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섯 종류의 모습이 있어 크게 자재하게 원인에서 물러나는 일을 성취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미세한 악을 즐기는 원인이고, 둘째는 결정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즐거운 원인이며, 셋째는 영원히 즐겁지 않은 원인이고, 넷째는 전도된 뜻으로 즐거움을 받는 원인이며, 다섯째는 고통스런 몸에 의지해서 즐거움을 받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저것이라고 하는 것은 최후에 여인의 몸을 받아 몸을 전환하기 때문이고, 저 땅과 저곳에서 공경하는 것이 성스러운 탑과 같기 때문이며, 저곳에서 법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저 법성(法性)을 따라 독송하고 수지하는 등이다”라고 한 것은 말하는 것이 법기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고, 저 사람이 목숨을 마쳤을 때 여래를 볼 수 있고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청정한 것을 얻어 몸을 버릴 때 견해가 청정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청정한 업을 얻었기 때문이고, 모든 근심 없이 목숨을 마칠 때 모든 고통 받는 것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며, 걱정과 번뇌의 원인을 벗어나기 때문이고 걱정과 번뇌의 마음을 누르고 조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은 채 눈을 깜박여 식(識)으로 모든 뜻이 있는 것을 살펴 알기 때문이고, 움직이지 않은 채 손과 발을 움직여 위의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변과 소변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가슴에 땀이 나는 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고, 주먹을 쥐어 허공을 더듬지 않으니 모든 악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자리에 따라 목숨 받는 것을 버린다’고 한 것은 몸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을 바르게 한다’고 한 것은 모든 두려움과 어려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으로 교묘히 이롭게 한다’고 한 것은 껄끄럽고 추악한 말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을 위에서 묘하게 한다’고 한 것은 위의 묘한 말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묘한 법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을 사랑하고 즐거워한다’고 한 것은 모든 여래를 칭찬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하늘과 인간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과 음성을 옹호하고 말과 음성을 부드럽게 한다’고 한 것은 법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는 이치로 펴서 대답하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 말함을 등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든 망령됨이 없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을 통쾌하게 말한다’고 한 것은 앞과 뒤의 말이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과 음성을 취할 만하다’고 한 것은 이치에 수순하는 말과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말과 음성을 옹호한다’고 한 것은 불법을 믿으면 모든 하늘이 옹호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말과 음성을 옹호하시는 것이다’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께서 거두어 취하시기 때문이고, 성내지 않아 현재에 얻은 악을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을 품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과거의 악을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하고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든 악을 덮어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과보를 마음에 품지 않는다’고 한 것은 걱정과 후회 등의 뜨거운 번뇌가 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허물과 근심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탐욕 등을 바라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품지 않는다’고 한 것은 보호함을 바라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모습이 없고 계법 중에 마음을 겁나게 하지 않고 약하게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다른 견해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게으르지 않고
마음을 부지런히 하여 정진한다’고 한 것은 고요한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겁내게 하지 않고 약하게 하지 않아 부처님 세계의 청정함을 취한다’고 한 것은 자기의 몸을 기뻐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간직한 것으로 위에 있는 묘한 부처님 세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아만과 증상만을 벗어난다’고 한 것은 모든 불법이 현전하는 기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만과 증상만을 벗어난다’고 한 것은 세간의 삼매와 삼마발제에 대해 미세하고 깊은 마음으로 분별하여 구하지 않고, 모든 불법이 현전하는 기운의 원인을 얻고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삼매를 보살장(菩薩藏)으로 삼고, 가르침 중에서 바르게 믿고 이익 된 일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 동안 저러한 분별이 원래부터 차별되니, 믿어서 이익 되는 일이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 동안 계속 이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보적경론』을 짓고
내가 얻은 공덕이여,
용감한 뜻으로 청정하게 하였으므로
원컨대 세간에서 구경의 진리를 얻게 하소서.

묘한 법의 『보적경』이여
더러움이 없는 큰 지혜의 광명이여,
이 논으로 가려진 장애를 제거하였으니
이 책을 만들고 베끼면 복을 얻을 것이로다.

모든 견해에 집착하면
지혜 없는 그물에 떨어지리니
장애 없는 부처님의 눈을
원컨대 세간에서 속히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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