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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58 불교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1권

by Kay/케이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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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 1

 

대보적경론(大寶積經論)1) 제1권문함(文函) 제2권을 풀이한다.


후위(後魏)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이병욱 번역
하혜정 개역



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 저 언덕으로 가신 분이시며
큰 자비로 마군과 원수를 꺾으신 분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제가 『보적경』을 풀이해 보니
열여섯 가지 차별상으로 진실하고 미묘한 의미를 장엄하였으니
법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여
자신에게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었습니다.

【문】당신께서 『보적경』을 풀이하려 하니 먼저 이 법의 의미를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보적(寶積)이라 이름하였습니까?
【답】대승법의 보배 가운데 모든 법의 차별된 뜻을 거두었기 때문이며, 온갖 대승법의 보배 가운데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이 경전에서 다 거두어 의미를 취하였으므로 보적이라고 이름하였다.
첫째는 취(聚)이며 둘째는 적(積)이고 셋째는 음(陰)이며 넷째는 화합[合]이니, 뜻은 한 가지인데 이름이 다른 것이다. 이 가운데 일체의 대승법 중에서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위해 열여섯 가지 차별된 모습을 구분하여 말씀해 주신다.
무엇을 열여섯 가지 차별상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법을 삿되게 행하는 모습[邪行相]이니, 이와 같이 보살이 삿된 행을 행하는 것을 삿된 행을 행하는 모습이라 이름한다.
둘째는 바르게 행하는 모습[正行相]이니 이와 같이 보살이 바른 행을 행하는 것을 바른 행을 행하는 모습이라 이름한다.
셋째는 바른 행을 행하는 이익 된 모습[行正行利益相]이니 보살이 바른 행에 머물러 마친 것을 법행(法行)으로 착한 행[善行]을 평등하게 행한다[等行]고 한다.
넷째는 법행을 행하는 모든 모습의 차별이다.
다섯째는 모든 보살이 자애로운 마음을 내는 모습에 대한 것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 보살이 행하고 말하는 모습[行說相]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보살이 바른 행에 머물러서 계를 배우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성문계와 보살계 가운데 뛰어나거나 열등하며 훌륭하거나 동등함을 말하는 모습이다.
여덟째는 보살이 보살계를 잘 배운 뒤에 세간의 지혜 등으로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차별의 모습을 행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저 보살장(菩薩藏)을 받을 때는 성문계를 닦는 모습의 차별이다.
열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문(沙門)의 모습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한째는 배우지 않는 사문의
모습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두째는 가명(假名)에 머무는 행의 모습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열셋째는 진실에 머무는 행의 모습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넷째는 여래께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시는 모습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다섯째는 은미(隱微)하고 비밀스러운 말씀의 모습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열여섯째는 보살장 중 가르침을 얻은 다음에 잘 믿는 이익의 모습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 가운데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위하여 이와 같은 열여섯 가지 모습의 차별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저 법문 중에 이 모든 모습이 말씀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저 대승법의 보배 가운데 온갖 모습을 모두 다 거두기 때문에 이 묘한 법문을 보적이라 이름한다.

【문】어째서 저 대승의 바른 법의 보배 가운데 모든 모습을 이 가르침에서 거두려 합니까?
【답】“가섭아, 네 가지 법[四法]이 있어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한다”는 등과 같은 흑붕(黑朋)에 포함된 여덟 종류의 4구(句)가 있으니, 삿된 행을 포섭하는 모습의 차별[攝邪行相差別]이기 때문이다.
“가섭아, 보살에는 네 가지 큰 조복장[伏藏]이 있다”는 이와 같은 등등의 말은 여섯 종류의 4구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은 바르게 행하는 이익 된 모습의 차별[正行利益相差別]이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는 스물두 가지의 4구를 가지고 청정한 일과 번뇌에 물드는 일과 지혜에서 물러나는 일과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일을 모두 말하였다.
“가섭아,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그저 이름만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서른두 가지 모습[三十二相]의 차별이 있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섭아, 보살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다. 나는 비유로써 이와 같은 열아홉 가지 비유를 말할 것이니 (열아홉 가지 비유로) 밝힌 모든 모습의 차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섭아, 보살이 이 『대보적경』을 배우고자 하여 그 등불을 밝히기에 이른다면 바로 성스러운 지혜의 근기[聖慧根]인 것이다” 하는 것이 이것이고, “그 어둠은 바로 모든 번뇌와 업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바른 행에 머물러 그 중에서 모든 계를 거두는 모습의 차별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섭아, 비유하면 종자를 허공 속에 두어도 자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주장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헤아릴 수 없는 수백, 수천 명의 성문과 벽지불의 과보를 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성문의 계율을 비유로 밝힌 것으로 보살계 중에 뛰어나고 열등한 모습의 차별을 거두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다시 가섭에게 “내지 근본에서부터 끝까지 청정한 까닭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를 거두어서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의 차별된 모습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섭아, 너희들은 안을 관조할 것이며 밖으로 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는데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증상만(增上慢)을 품고서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이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저 보살장을 거두어 취할 때 성문의 계를 가르치고 닦는 모습의 차별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섭아, 사문(沙門), 사문 하는데, 무슨 뜻으로 사문이라 하는가? 또 어떤 것이 사문인가? 가섭아, 네 가지 종류의 사문이 있으니, 이와 같이 두루 밝은[普明] 이것을 보살이 빨리 법에 통한다고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설명은 앞의 세 가지 사문과 잘 배우지 않는 사문의 모습의 차별을 포섭한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때 존자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희유하고 희유하옵니다. 이 『대보적경』은 대승을 수행하는 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으니, 이 『대보적경』을 독송하고 지니고 베껴 쓰는 사람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 등은 보살에게 가르치고 (보살이) 잘 믿어서 이익 되는 모습의 차별을 포섭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대승에서 말하는 것은 열여섯 가지 모든 법의 모습이 차별되게 거두어지기 때문에 이 법문을 보적이라 이름한다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왕사대성(王舍大城)에 머물러 계셨다.

【문】무슨 까닭에 맨 앞에 머무는 곳을 밝혔습니까?
【답】부처님께서 이곳에 머무신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그곳을 공경히 여기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고 복을 중히 여기는 중생이
이곳을 공경하기 때문이었으니, 선근(善根)을 늘리기 위해서 먼저 머무는 곳을 밝힌 것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왕사성에서만 말씀하시고 다른 성곽에서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답】이 법문을 법왕의 처소에서 풀이하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왕사(王舍)는 왕이 머무르는 곳이므로 왕사라고 하였으니 이 큰 법문도 이와 같이 법왕이 머무는 곳에서 이 뜻을 풀이하고 완성하였기 때문에 왕사성에 머문다고 말한 것이다.

【문】무슨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기사굴산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았습니까?
【답】이 대승법을 말하는 것은 성문과 연각승 가운데서 비교하면 불어난다는[增上] 뜻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행이 더욱 불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비구 무리 8천 명과 함께 하시고 만 6천 명의 보살과 함께 하셨다.

【문】이미 보살로 인하여 이 법문을 밝히셨으니 이러한 뜻에 따라 보살이라는 큰 이름의 무리를 말씀하셔야 할 것인데, 성문의 무리를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성문의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만일 대승의 가르침에 의심을 갖는 성문이 있다면 그들의 의심을 없애주기 위한 까닭이며, 만약 부정(不定)으로 바른 믿음을 이루는 것을 돕거나 만약 스스로 청정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깨끗한 마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성문이 모든 번뇌를 다 없애서 부처님의 법 가운데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즉 말하자면 모든 번뇌 등의 장애를 소멸하여 자기의 이익을 빨리 얻겠다는 생각에 미친다면 그 중생의 자만심을 벗어나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이 법문 가운데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 번뇌장이 없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저 번뇌장과 멸지장(滅智障)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지 다른 이유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 이것은 성문과 연각 중에서 뛰어난 과보[上果報]를 얻는 것보다 뛰어나다.

【문】성문 무리의 수효와 이 모든 보살은 어디에서 이르렀습니까?
【답】미래세 중에 의혹이 있는 자가 있다면 저들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이다. 경가(經家)의 말에는 “저 다른 지역의 모든 불국토로부터 와서 이 모임에 모였다”고 하였다.

【문】무슨 까닭에
모두 불퇴전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합니까?
【답】모두 불퇴전의 경지를 얻었다고 한 것은 네 가지 인[四忍]을 갖추는 경지를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한 생을 얻은 자[一生得者]라야 이 법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법기(法器)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이 모든 보살이 다른 지역의 모든 불국토로부터 왔다면 이 땅에서는 무슨 이익을 이루게 됩니까? 저 세계에서도 이 모든 여래께서 각기 법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답】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이 세계에도 중생이 있으니 저 여러 보살들이 본래 교화해야 할 자들이다. 본래 함께 닦은 모든 행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즐겁다는 견해[樂見]와 본래 교화한 모든 보살법으로 다시 이 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니, 중생이 애타게 우러르고 공경하고 존중하면서 법을 여쭈어 청하고 가까이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에 용맹 정진을 일으켜 피로하거나 게으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이들 중생은 석가여래께서 본래 교화할 대상이므로 교화하여 제도하고 수행하겠다던 본래의 모든 원과 행과 일을 기억해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와서 여래를 가까이 하는 것이다.

【문】무슨 까닭에 보살을 밝힌 것은 많고 성문을 말한 것은 적습니까?
【답】보살의 무리를 말한 것이 많은 이유는 이 법문 가운데 밝힌 모든 행, 그것들 모두가 보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무슨 까닭에 앞서 성문의 무리를 말했습니까?
【답】저를 말미암아 말씀하신 법을 가지(加持)하기 때문이다.

【문】무슨 까닭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와서 모임에 모였다고 말합니까?
【답】모두 한 생[一生]을 얻은 사람들인데, 게으름과 아만(我慢)을 말씀하시어 이것들이 생기지 않게 되었다. 이 땅에 와서 바른 법을 구하고 이 근심에 맞서 다스리기 위해서, 스스로 즐거운 법을 말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와서 집회에 모였으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순종하려는 것이 아닌 까닭에 멀리서 와서 풀이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이 모든 보살이 이미 부처의 지위를 얻었는데도 오히려 법을 위해 왔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오지 않겠는가?

【문】여래께서는 무슨 까닭에 가섭만을 상대해서 이 법문을 말씀하시고
보살을 상대하지 않으셨습니까?
【답】여래께서 대가섭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가섭이 감당할 줄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하고 또 바르게 믿지 못하는 것에서 대승의 뜻을 알고 깨달아 믿을 수 있게 됨을 풀이하여 성립시킨 것이다.
이 중에 삿된 행[邪行]에 포섭되는 여덟 가지의 4구(句)가 있으니 맨 위에서부터 풀이하여 점차로 알아야 한다.
첫 번째 4구는 지혜에서 물러나서 삿되게 행하는 모습과 일을 말한다. 두 번째 4구는 지혜에서 물러난 뒤에 이미 정념(正念)을 잃은 것을 말한다. 세 번째 4구는 정념이 없어진 뒤에 백법(白法)2)을 없앤 것을 말한다. 네 번째 4구는 백법을 없애고 난 뒤에 사이비 보살이 악한 마음을 행하는 모습을 말한다.
다섯 번째 4구는 악한 마음을 행한 모습 다음에는 조복하기 어려운 까닭을 말한다. 여섯 번째 4구는 조복하기 어려운 다음에 삿된 도적질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일곱 번째 4구는 삿된 도적질을 행한 다음에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덟 번째 4구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된 뒤에 보살의 행을 돕지 않고 삿된 행을 이루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상대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바른 행[正行]에 포섭되는 것 또한 여덟 가지 4구가 있으니 맨 위에서부터 서로 풀이하여 점차로 알아야 한다.
첫 번째 4구는 조도(助道)3)의 지혜를 만족시킨 다음에 정념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4구는 정념을 잊지 않아 조도의 지혜가 늘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세 번째 4구는 정념을 잊지 않은 뒤에 백법을 늘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네 번째 4구는 백법을 늘어나게 한 뒤에 사이비 보살의 마음과 생각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 4구는 악한 마음과 일을 행하지 않고 잘 조복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 4구는 잘 조복하고 나서 바른 도[正道]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일곱 번째 4구는 이미 바른 도를 행한 다음에 가까이 해야 할 것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덟 번째 4구는 가까이 해야 할 것을 가까이 한 다음에 보살이 행할 모든 행을 따르게 하여 바른 행을 이루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바른 행의 이익에 여섯 종류의 4구가 있으니, 맨 앞에서부터
서로 풀이하니 점차로 알아야 한다.
첫 번째 4구는 보살이 이와 같이 바른 행을 많이 행하고서 복덕과 지혜를 익혀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4구는 공덕과 지혜에 의지해서 익히고 이룬 다음에 장애가 청정해짐을 얻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4구는 장애가 깨끗해지는 것에 의지한 다음에 모든 법문으로써 일체 법문을 익히는 것을 도와서 통달하게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네 번째 4구는 모든 선한 법문[白法]을 익히는 것에 의지한 다음에 모든 모습과 모든 종류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까닭에 다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 4구는 이미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닦은 다음에 무명주지(無明住地)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4구는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넘어서고 난 다음에 장애 없는 경지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스물두 가지의 4구에서 말한 점차(漸次)라는 것이다. 이후에는 저 앞의 4구를 순서대로 해석해서 말하겠으니 마땅히 알아 두어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지혜에서 물러나고 잃게 한다”고 하셨다.

【문】무슨 뜻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답】대승을 닦는 자라면 위없는 보리의 방편을 얻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바른 법을 보이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게으른 사람이라면 바르게 권하기 위한 까닭이며, 겁약하여 소심한 사람이라면 도와주고 위로해주며 일깨워주어서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려는 까닭이며, 이미 바른 행을 행하는 자라면 찬탄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문】네 가지 법을 밝힌다고 했는데 이 숫자는 의미가 없으니 자체(自體)가 밝은 것을 말씀한 것입니까?
【답】4라는 숫자는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니, 광대하기가 한이 없어 듣는 사람을 눌러 막아서 너무 많이 듣는 것을 즐겨하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숫자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기억하여 간직하게 하면 쉬우니, 예를 들면 노끈으로 꽃을 꿰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문】무슨 이유로 꼭 네 가지만을 정해 놓고 그보다 많지도 않게 하고 적지도 않게 합니까?
【답】끝이 없고 뜻도 없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이다. 다시 비유를 한 것은 세 가지 돕는 지혜[助智]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것을 포섭하는 까닭이며, 네 가지 숫자를 밝힌 것은 다시 남은 것이 더 있다는 말이다.

간략히 세 종류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 것은 문(聞)과 사(思)와 수(修) 등이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가지 법은 대개 문(聞)의 지혜를 돕는 것을 모두 잃게 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 번째 법은 사(思)와 수(修) 등의 지혜를 모두 잃게 되는 것을 밝혔다. 이런 까닭으로 네 가지 법을 말한 것이다.
다음은 이 모든 법 중에 서로 가까운 점차의 차별을 해석하는 뜻을 보여준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실 때 무리들에게 듣도록 권하시자, 듣는 무리도 한 마음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지 않고 들었기 때문이다.
법(法)이란 사람을 버리는 것이므로 ‘법을 듣는다[聽法]’고 말한다. 만약 법을 말하지 않는다면 혹 의심이 생길 수 있으니, 법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문】앞에서 보살을 먼저 말했는데 무슨 뜻으로 보살이라 한 것입니까?
【답】대승을 수행하는 자이니, 이 보살이란 이름은 많은 뜻을 포섭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 뜻으로 말할 것이니 잘 알아 두도록 하여라.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수행이며 셋째는 증득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깊은 지혜를 깨달아서 아는 것이니, (남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인(因)이 되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향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증득이란 무엇인가? 지혜의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로부터 물러나고 잃게 된다는 것은 두 때[二時]4)에 두 가지 잃음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첫 번째는 이미 얻은 것을 잃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래에 얻을 것을 잃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물러나는 것이고 어떤 것을 일러 잃는다고 하는 것인가? 무루(無漏) 가운데 미래에 얻을 것을 잃는 것을 말한다. 나머지는 세간이기 때문에, 두 때에 모두 잃는다는 것은 식별하지 않고 말하여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된다는 말이다.

【문】무루도 잃게 됩니까?
【답】해석하면 그렇지 않다. 지혜에 물러나 잃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게으르지 않은 인(因)을 밝히고자 함이니, 지을 일에 대해 법을 짓게 하기 때문이다.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된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유루지(有漏智)는 무루지(無漏智)에게 있어 조도(助道)의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이 유루지를 얻었다 해도 아직 두 가지를 얻지는 못했으므로 문득 잃게 되는 것이다. 무루지를 잃는다는 것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무루지를 증득했다면 물러나 잃을 것이 없다.


【문】무엇 때문에 법을 존중하지 않고 평등하게 여기지 않아서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성내고 원망하기 때문에 공경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않고, 듣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모든 법을 인색하게 아껴서 받아들인 모든 법을 비밀스럽게 감추며 모두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다. 듣지 못하므로 미래세에 많은 연을 갖출 수 없고, 연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지혜에서 물러나 잃는 것이다.
법을 즐기는 사람은 어려움에 머무는 행동을 짓게 되고, 모든 인연을 말하여 그 마음을 막고 무너뜨리며, 필요 없는 말을 하여 지은 죄를 덮어 숨기며, 허물 등을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가 되는 과보를 듣게 되면 장애가 되는 과보를 들었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인(因)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미래에 반드시 어리석음을 얻게 될 것이니 어리석기 때문에 지혜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스스로 높여 자신을 칭찬하면서 다른 사람을 낮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원망스럽게 한다. 다른 사람을 원망스럽게 하기 때문에 전도(顚倒)되어 말하고, 이미 전도되어서 말하기 때문에 미래세에 전도됨을 초래한다. 전도됨을 초래하기 때문에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것이다.

【문】어느 때에 물러나 잃게 됩니까?
【답】두 때 중이니 현재와 미래이다.

【문】만약 보시 등의 여러 법도 물러나 잃는 것이 인색함 등의 여러 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어째서 다만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인(因)만을 말하고 보시 등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인은 말하지 않습니까?
【답】쉽게 잃는 까닭에 보리를 먼저 말한 것이다. 이것은 지혜의 성품이기 때문에 모든 다른 바라밀은 저 지혜에서 생겨난다. 지혜에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에 보살이 지혜 가운데 삿되게 행하게 되면 보리와 보리를 돕는 법 중에서 바른 행이라 이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다만 지혜에서 물러나 잃어버리게 되는 인만을 말하고 보시 등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인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공경하지 않는 등의 법은 지혜에서 물러나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4구(句)에서는 즐겨 듣지 않는[不樂聞] 등의 네 가지 법을 드러내 말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존경하고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 말한 것이다. 즐겨 듣지 않고 법에 인색하여 아끼기
때문에 다른 법을 듣지 않고 장애하며, 그렇기 때문에 듣지 않는 장애의 과보[不聞障報]를 얻고, 아만(我慢) 때문에 더러운 마음으로 전도된 말을 한다. 이처럼 듣는 것 등의 법을 도울 수 없기에 지혜에서 물러나서 잃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네 가지 법 말고도 또 다른 지혜의 모습이 있으니, 즉 현재와 미래에 네 가지 후회하는 법[四悔法]을 내는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 법[四法]이라 하는가?
첫째는 이해를 낼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많은 연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은 복의 과보를 돕는 것이고, 넷째는 이미 전도되기에 이르는 까닭이다. 듣지 못하는 것에 의지하므로 현재의 법에 바른 이해를 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에 의지하므로 미래세 가운데 많은 연이 갖추어지지 않는다. 듣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또한 미래세에 어리석은 과보를 얻고, 더러운 마음으로 전도된 말을 하기 때문에 미래세에 전도된 과보를 얻는다.

【문】법을 존경하고 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법사(法師)를 공경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를 거듭 말하는 데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답】이 두 구절을 거듭 말하는 중에 즐겨 듣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충분히 나타내었다. 설령 어떤 사람이 법에 대해 성을 내고 비방하며 공경하지 않는 까닭에 그 법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법사를 공경하고 중히 여긴다면 법을 듣기를 즐겨할 것이다. 또한 성내고 원망함이 있어서 법사를 공경하고 중히 여기지 않으며 또 법을 듣는 것에도 성냄이 있다 하더라도 법을 공경하고 중히 여긴다면 법을 듣기를 즐겨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에 대해서 모두 성을 내고 원망을 가져 비방하고 공경하지 않고 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무리들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그들은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을 거듭 말하여 법을 즐겨 듣지 않는 뜻을 충분히 나타낸 것이다.

【문】모든 법을 아끼고 받아들이며 모든 법을 비밀히 여겨 모두 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두 구절에 어떤 뜻이 있습니까?
【답】모든 법을 아끼는 것은 견해가 이미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견해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곧 법을 비밀히 여기고 모두 다 말하지 않는 것이며, 얻은 후에 뛰어난 것을 공경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다시 뜻이 있더라도 법을 청하거나 청하지 않거나 한결같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을 아끼는 자는 혹 여태까지는 말했지만 다시 말하지 않기도 하고, 혹 또 법을 아끼기에 바른 법을 버리기도 한다. 법을 이미 버리고 나면
그 마음을 무너뜨린다. 받아들인 모든 법을 비밀히 여기고 모두 다 말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 행하기 때문이니 말로 행동을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법을 즐기는 사람은 어려움에 머무는 행동을 짓게 되며 모든 인연을 말하여 그 마음을 막아 무너뜨리며, 본뜻과는 다른 말을 하게 되며, 범한 죄를 덮어 가리면서 허물을 뉘우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구절에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는가?
이 가운데 법을 즐겨하지만 어려움에 머무는 행동을 짓게 되면, 이것은 본뜻과는 다른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법을 즐겨하는데 어려움에 머물기를 짓는 것인가? 모든 인연을 말하여 그 마음을 막고 무너뜨리고 가책하여 본의와는 다른 말을 하여 범한 죄를 덮고 가려서 허물을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람과 법을 막고 무너뜨리고 또한 모든 악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법은 사람이 즐겨 듣고자 하는 것에 따른다. 저 법과 저 사람은 이미 참다운 말과 뜻이 없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다음에 다시 듣기를 즐기게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모든 인연을 말하는 것에 가책 등을 하는 것인가? 말한 것이 바르지 못하고 다시 말도 무한하게 된다. 혹 다시 듣기를 즐겨하는 자라면 여러 가지 탐색하기 어려운 것을 돕기 위하여 무한하다는 등의 말을 한다. 탐색하기 어려운 것을 듣는 것 등은, 즉 듣지 않는 것이고 또한 즐겨 듣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말씀해주지 않는 까닭인가? 다시 청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저 법을 즐겨하는 사람이 있으면 와서 청하고 묻고 법을 이미 말한 다음에 법을 아끼는 까닭에 곧 중생을 위해서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다른 법사 등을 청하지 않으며 만약 청하고 듣고자 한다면 중생을 위해서 허가해 주지 않는다.
어떤 것이 바른 법을 가리고 덮는 것인가? 그 듣는 사람과 듣는 무리를 꾸짖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저 법을 말하면서, 너희 등은 지혜가 없어 이 법의 깊고 깊은 것에 대해 통달하여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미 청중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바른 법을 덮고 가린다. 이와 같은 것이 법을 장애하는 인연이다.
어려운 곳에서 과보를 얻게 하고 그 마음이 교만해서 스스로 높이고 자기를 칭찬하며 다른 사람을 낮춘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등의 구절에 무슨 뜻이 있는가? 교만은 위의 첫 구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떤 것이 교만인가? 예컨대 자기를 칭찬하여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기를 칭찬하여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자기가 말한 것은 착하지 못하고 자기의 수행도 바르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은 모두 착하고 다른 사람의 수행도 바른 것을 보고서 이 중에서 교만심과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인가?
예컨대 다른 사람이 착하게 말하고 착하게 수행하는 중에 착하지 않은 말과 착하지 않은 수행을 한다고 해서 교만심과 질투심을 내는 것이다. 이미 교만의 병이 있으므로 바른 깨달음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며 모든 법을 다 증득하여 포섭할 수 없게 한다.
이것의 요점을 간략히 말하면, 첫째는 다만 물러나 잃는 것이고, 둘째는 어떻게 물러나 잃는 것인가이며, 셋째는 어느 때에 잃는가이며, 넷째는 모든 것이 이미 법에서 물러나 잃은 것이다. 저것을 모두 드러내 보이겠다.
어느 곳에서 물러나 잃는가? 지혜로부터이다. 어떻게 물러나 잃는 것인가와 무슨 생각으로 물러나 잃었는가에 대해서는 먼저 이미 해석하였다. 어느 때에 물러나 잃는가? 현재와 미래이다. 모든 것이 이미 법에서 물러나 잃었다고 하는 것은 공경하지 않고 중히 여기지 않는 등의 네 가지 법을 밝힌 것이다. 이미 이 공경하지 않는 등의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지혜 등에서 물러나 잃게 하고 법을 장애하기 때문에 네 가지 대치법을 말한다.
“다시 가섭이여,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큰 지혜를 이룬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법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고 법사를 공경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 법을 공경하는 등의 인(因)을 수순하여 행하고, 큰 지혜의 인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지혜를 낳는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성숙하는 것이고, 셋째는 조도(助道)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보리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공경하기 때문에 법을 듣기를 즐겨한다. 이미 법을 듣고 나서 문득 지혜를 일으킬 수 있다. 모든 법을 듣고 독송하고 수지함을 따라 청정한 마음으로 널리 사람을 위해서 말한다. 그러나 모든 명성과 소문과 이익 된 공양과 공경 등의 일을 구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교화해서 마음의 지혜를 성숙시킬 수 있다. 지혜는 다문(多聞)에서 생긴다는 것을 잘 알아서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아야 하니,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법을 듣고 독송하고 수지하고 즐겨 말한 대로 행한다.
말을 따르지 않고
항상 다문을 구한다. 들으면 기억하고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조도의 지혜를 만족하게 하여 그 실다운 행을 행할 수 있게 한다. 행은 언어와 자기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실다운 행을 위한 까닭에 보리지혜를 이룰 수 있게 한다.
이 가운데 법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중히 여기며 법사를 공경한다는 것은 공경하고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니 그것을 대치해서 공경하고 중히 여기라고 말한다. 마땅히 알아라. 들은 법을 따라 독송하고 수지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듣는다는 것은 이식(耳識)이기 때문이고, 독송하고 수지한다는 것은 의식(意識)이기 때문이다.
혹 다시 듣는다는 것은 문혜(聞慧) 때문이고, 독송하고 수지한다는 것은 사혜(思慧) 때문이다. 경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널리 사람을 위해 말한다’고 한 것은 인색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벗어나기 위한 까닭이다. ‘모든 명성과 소문과 이익 된 공양과 공경 등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것들이 법을 아끼는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이익된 공양’이라는 것은 의복 등이며, ‘공경’이라는 것은 예배하는 것 등이며, ‘명성과 소문’은 모든 공덕을 칭찬하여 올리는 것이다. 많이 들었기 때문에 문혜 등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미 머리에 불난 듯이 문혜를 닦고 구했으니, 문혜를 구하기 때문에 수혜(修慧)를 더욱 밝히기를 권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은 혹 머리가 불타고 혹 의복이 불타면 저 사람은 모든 일을 버리고 머리와 의복을 구하듯이 보살도 이와 같다.
문혜를 아는 것은 지혜의 인(因)이니 지혜 있는 사람은 모든 지혜의 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혜를 구하라고 더욱 권하는 것은 스스로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들은 법을 따라 독송하고 수지할 수 있고 가르침대로 수행한다’고 말한 것은 만약 들은 것을 따라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저 사람은 이미 행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여순지(如順智)를 낼 수 있다.
‘다만 음성과 언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만 듣는 것을 구하거나 다만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무의미하거나 말한 것이 모두 세간을 벗어나 이익이 없는 것이다. 순서에 따라 법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중히 여기는 것과 행이 법을 좇는 것을 다 해석하고 나서 모든 법을 아끼고 법을 아끼고 나서
즐겨 법을 구하는 것에 모든 장애를 일으키며 비밀히 여겨 중생을 위해서 말해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이 세 가지 지혜의 인(因)을 없앤다.
이미 지혜가 없는 까닭에 곧 아만을 일으킨다. ‘선한 법으로 다스려서 법을 존경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법과 그 다음 법을 수순하여 행하였기 때문에 인색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벗어나 들은 법에 따라 널리 사람을 위해서 말한다. 법을 즐기고 좋아하므로 다문(多聞)의 말을 구하고 다문을 갖춘 다음에 자기에게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수행할 수 있다.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언어에 집착하지 않는다.
언어란 음성 등의 일이다. 보리심이란 것은 다만 지혜의 근본이고 일체지라는 것은 다만 보리심이 근본이니 그러므로 보리심을 잊지 않기 때문이고 보리심을 잊고 모든 법의 인(因)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보리심을 잊어버린다’ 하셨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아사리를 속이는 것 등이다.

【문】무슨 까닭에 보리심을 잊어버릴 수 있는 원인으로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네 가지 법만을 말하였습니까?
【답】잊어버리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네 종류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바르게 믿지 않아 보리심을 잊어버림이고, 둘째는 믿음이 전도되어 보리심을 잊어버림이니 보리심 가운데 허물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셋째는 받아들인 법이 모두 가명(假名)의 마음이기 때문에 보리심을 잊어버린다. 넷째는 법의 본체를 얻는 마음으로 보리심을 잊어버린다. 이 네 가지 잊어버림 가운데 이것을 다스리는 네 가지 인(因)이 있으니 이와 같은 순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가운데 ‘아사리와 스승과 어른을 속인다’고 한 것은 스승과 어른 앞에서 여실한 말을 할 수 없으니 이미 죄를 범하여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고, 거짓말로 인해 마음을 속였기 때문에 곧 스승과 어른을 속이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아사리’라는 말은 간택해서 권하여 가르쳐 주는 사람이니, 저가 범한 죄대로 드러내게 한다.
이것을 지으면 안 되니 먼저 죄를 범하고 참회하여 없애고자 하기 위한 까닭에 모든 방편을 말한다. 그대는 이와 같이 지어야 한다. 스승과 어른은 예컨대 도와서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어른 중에서 빼어난
성인은 비록 스승과 어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모든 공덕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즐거움을 주고 악을 그치고 선을 닦으라고 권하는 사람이다.
이미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저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말로 잊어버리게 하고, 이러한 뜻 때문에 업보를 도와서 늘어나게 하며, 이미 업보가 늘어나게 도우므로 바르게 믿지 않아 보리심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 사람으로 하여금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 해도 이와 같이 저 사람은 이미 거짓말을 익혔고 계율의 장애를 얻었으므로 보리심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첫 번째 인(因)이라 한다.
의심과 후회가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과 후회를 내게 하고, 함께 범행을 닦는 가운데 의심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도되어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함께 범행을 닦는 중에 바르게 계행(戒行)을 닦는 자가 계율에 대해 의심과 미혹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저 사람은 이와 같이 함께 범행을 닦는 중에 지극한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고 아첨하고 굽은 마음으로 행하여 계율에 대해 의심과 미혹이 생기기 때문에 깊고 무거운 업의 장애를 낳는다.
저 사람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리심에 대해 전도되어 바르게 믿지 않는 허물을 드러내며 그런 까닭에 보리심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저 사람으로 하여금 만약 의심과 미혹을 내지 않게 한다 해도 이와 같이 저 사람은 이미 비방하였기 때문에 보리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인(因)이다.
대승을 닦는 사람이 꾸짖고 욕하고 비방하여 악명을 널리 드러내면서 법 닦기를 즐겨한다면 모든 법의 이로움만을 따르는 것이니, 저 사람을 멀리 벗어나 등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을 갖고 대승 닦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저 사람을 무너뜨리고자 하기 위한 까닭에 꾸짖고 욕하고 비방하여 널리 악명을 드러내고, 착하지 않은 말을 하여 저 사람의 선근을 깨뜨리려 한다면, 말에 이익이 없으며 이익 된 말이 없다.
이 중에 착하지 않는 말은 악명을 말하여 그 모든 허물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니 말하자면 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모두 악하여 사람의 단점을 널리 드러내니 이것은 범행이 아니다. 분별해서 말하는 것이 공덕에 맞지 않으니 그 악을 말하는 것을 드러냄에 따른다. 이와 같은 일 등이 있으니 저 사람은 이와 같이 모든 보살에게 이익 없는 말을 하고, 분별하여 악명 등을 널리 드러낸다.

만약 대승을 닦고자 하는 사람이 이와 같은 일 등을 하면 진리의 세계에서 물러나 미혹하게 될 것이다. 저 사람이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을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기에 모든 공덕이 문득 덮어지고 가려진다. 이미 덮어지고 가려지므로 악하게 되어 업의 장애는 깊고 두터워지고, 저 장애 때문에 본래 닦은 계의 마음이 문득 없어진다.
설사 보살의 진실한 공덕을 덮어 가리지 않는다 해도 저 사람은 이와 같이 계의 장애를 얻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진리의 세계에서 물러나 참된 마음이 없어진다. 이것을 세 번째 인(因)이라 한다.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종사하면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모든 법사들로 하여금 모든 비밀한 일을 열어 펼치게 하여 미혹을 생기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아첨은 거짓되어 진실한 마음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종사하기 때문이고, 굽히는 것이란 마음으로 아첨하고 속여서 진실한 마음이 아닌 것으로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이니, 모든 법사들로 하여금 비밀한 일을 열어 펼쳐 말하고 행하게 하고자 하기 위해 모든 법사의 처소를 따라 다니면서 깊고 비밀하고 미묘한 법을 듣는다. 그런 다음 만약 대승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에게 비방하는 뜻을 일으킬 수 있고, 이와 같은 뜻을 짓고 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악한 업을 조장한다.
저러한 업의 장애가 있기 때문에 법을 따르는 마음을 얻어도 멀리 벗어나서 물러나 잃게 된다. 만약 멀리 벗어나는 것을 비방할 수 없다면 저 사람은 이와 같은 이유로 계의 장애에 처해 마음이 물러나 잃게 된다.
간략히 말해서 어떤 것이 물러나 잃는 것인가? 말하자면 마음이다. 어느 때에 물러나 잃는가? 현재의 법 가운데와 과거와 미래의 행 가운데에서이다. 어떠한 것 등의 행인가? 스승과 존경할 만한 분과 어른에 대해서 바르게 공경하지 않는 것 등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모습이 있는가? 네 가지 법을 갖추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저것을 다스리는 것을 드러내서 말하므로 네 가지 선한 법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보살은 목숨을 잃는 인연에 이르더라도 짐짓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참다운 말을 보호하고 다스리기 위한 까닭이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니, 하물며 희롱하거나 비웃음이겠는가?
보살은 미미하고 가벼운 죄에서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므로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아(我)의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을 벗어나 없애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진실한 마음 ’이라고 한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따르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아(我)의 근심을 벗어나 없애는 것’이라고 한 것은 보살이 여실히 친근하고 거짓된 이름뿐인 행을 보이지 않아 아첨하고 굽은 것을 벗어나고 조복되지 않은 악한 마음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에 대해 세존이라는 생각을 내면 모두 보살이 될 수 있고, 사방에서 공덕을 칭찬하여 올리는 것은 얻은 법의 이로움에 따라 저 사람이 항상 칭찬하고 찬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든 소승의 법을 좋아하거나 즐기지 않고 교화할 중생에 따라 저 모든 사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협소한 소승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이유는 열등하고 약하기 때문이고, 이미 위 뜻의 행에 포섭되어 교화하는 뜻의 의욕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구절을 차례로 거듭 해석한다. ‘아사리 등을 속이는 것’은 다시 아사리와 스승과 어른 등을 공양하고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계법에 대하여 은근하고 소중하고 빠르게 하려는 뜻을 내지 않는다.
‘스스로 참괴(慚愧)하고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 없고, 다른 사람은 참괴하고 허물을 뉘우치게 한다’고 한 것은 괴롭게 하기 위한 까닭에 안락하지 못한 마음을 도와서 저를 걱정스럽고 괴롭게 한다. 자기 자신은 참괴하여 뉘우치게 하는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닦는 사람에 대해 모든 악한 일을 말하여 보리심을 비방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니,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종사하니 진실한 마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또 잃지 않는 여러 구절이 있어서 점차로 거듭 해석하니 참다운 말로 보리심을 모이게 하는 인(因)을 잊지 않기 때문이며, 보리심을 잃지 않아 중생에게 이익 되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모든 헤아릴 수 없이 희유한 온갖 법이 있는 줄을 알고 나서 보리심과 모든 지혜의 인(因)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보리심과 모든 보살의 처소에서 세존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나서 보리심을 공경하기 때문에 교화할 중생, 저 모두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게 하고,
좁고 열등한 소승의 법을 결코 좋아하거나 즐겨하거나 구하여 행하지 않도록 권한다. 보리심이란 이것은 보리에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만약 보살이 처음 발심하였다면 나는 마땅히 바른 깨달음을 이룰 것이니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등등의 성품이 있고, 다시 어떠한 모습이 있으며, 어떠한 등등의 생각이 있고, 어떠한 공덕이 있으며, 어떠한 뛰어난 일이 있고, 무엇에 포섭되며,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어떤 것이 현재 기운의 인[氣因]이며,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입니까?
【답】처음부터 바르게 성품을 원하니, 어찌 모습의 보리를 구하려고 하겠는가? 중생을 염(念)하고 염하기 위함이니, 모든 지혜로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인연하여 모든 세간의 성문과 연각의 원 중에서 윗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뛰어난 믿음의 지위에 포섭된 위없는 보리의 근본이 된다. 자비가 현재 기운의 인이고 보살의 계가 의지할 대상이다.
그런데 보리심을 일으키는 데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간을 벗어나는 인(因)이고, 둘째는 세간을 벗어나지 않는 인이다. 이 가운데 세간을 벗어나는 인은 예컨대 발심하고 나서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인이다. 세간을 벗어나지 않는 인은 예컨대 마음이 영원하지 않아 마침내 도중에 저 마음을 잊는 것이다.
물러나는 것에도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영원히 물러나는 것이고, 둘째는 영원히 물러남이 아닌 것이다. 이 가운데 영원히 물러나는 것은 예컨대 자주 물러나지만 거듭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영원히 물러남이 아닌 것은 예컨대 물러나면 곧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저 마음은 네 종류의 연(緣)과 네 종류의 인과 네 종류의 힘[力]으로 생길 수 있다.
어떠한 것 등이 네 종류의 연인가? 첫째는 여래에게 희유한 변화가 있는 것을 보고 듣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킨다. 둘째는 위없는 보리를 말미암으니 법을 듣고서 중생을 어여삐 여겨 이롭게 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킨다. 셋째는 보살이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에 보리심을 일으킨다. 넷째는 말세의 중생이 모든 무거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는 까닭에 보리심을 일으킨다.
어떤 것이 네 종류의 인인가? 첫째는 성품을 갖추는 것이고, 둘째는
선지식을 갖추는 것이며, 셋째는 자비가 으뜸이 되기 때문이고, 넷째는 세간의 긴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여러 가지 깊고 두터운 것에서 듣는 등의 인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 힘인가? 첫째 자기의 힘이고, 둘째 다른 사람의 힘이며, 셋째 인(因)의 힘이고, 넷째 수행의 힘이다. 이 가운데 자기의 힘은 자기의 힘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즐겨 일으키고자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니, 이것이 자기의 힘이다.
다른 사람의 힘은 다른 사람이 권해서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다른 사람의 힘이다. 앞에서 익힌 대승의 착한 법이 바로 인(因)의 힘이다. 현재법 중에 선지식을 친근히 하고, 긴 밤중에 문혜와 사혜 등의 바른 법으로 선(善)을 익히고 행해서 그치지 않는 것을 수행의 힘이라 한다.
이 가운데 장황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이 있으니, 이 네 가지 연과 네 가지 인(因)을 의지하는 까닭이다. 가령 내부의 자기의 힘과 인(因)의 힘, 이 두 가지 인(因)을 갖추어 저 마음을 내게 하는 자라면, 이와 같은 까닭에 이익이 있다[有利益]고 말하고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는다[堅不動]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힘과 수행의 힘이 저 마음을 생기게 한다면 마땅히 흔들리거나 잃지 않아야 한다[不應動失]고 말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 사람의 마음이 물러나는 모습에도 네 종류가 있다. 성품이 없으므로 악지식(惡知識)에 포섭되는 것이니, 그 이유는 모든 중생에 대해 자비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세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잊지 않는 것이니, 그 이유는 보살이 저 보리심을 또한 기억해서 간직하기 때문이다. 수행하여 공덕과 지혜가 밝아서 조도(助道)에 포섭되는 착한 법 중에서 저 사람은 이와 같이 모든 행을 닦을 뿐이다. 착한 법이 없어지고 악이 늘어나는 인(因)이 되지 않으므로 모든 법을 설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이미 생긴 착한 법은 없어지고 늘어나지도 않는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다만 교만한 마음으로 세간의 경전과 주술을 독송하는 것이다.’”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네 가지 법을 두어 그로 인해 착한 법이 없어지고 늘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밝힌 것입니까?
【답】
착한 법에는 네 종류가 있다. 악한 법을 없애어 늘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간략하게 네 종류의 착한 법을 없애어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을 말한다. 첫째는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게 하여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고, 둘째는 늘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이니, 멸하여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셋째는 근본을 제거해서 멸하여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고, 넷째는 일어나 멀리 떠나서 소멸하여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이 가운데 모든 착한 법을 생기지 않게 하고 멸하게 하는 인(因)은 바로 아만심 때문이니, 세간의 경전을 독송하고 모든 주술을 구하여도 보살의 6바라밀과 보살법의 장(藏)을 통달할 수 없다.
보살이 아만심에 눌려 명성과 소문과 이익 된 공양을 바라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질투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여 항상 속이는 까닭에 세간의 주술을 구하고 착한 백법(白法) 등을 구할 수 없으니, 이미 모든 백법을 내지 않았기에 백법이 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 없앨 수 있다는 것과 앞에서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일을 인연하므로 듣고 익힌 것이 더욱 약해지기 때문이니, 이것 때문에 늘어나지 않고 없어진다.
무엇 때문인가? 이양(利養)과 이름과 소문을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단월을 가까이 한다. 이 중에서 이양[利]은 의복 등이고 공양[供]은 예배 등과 같은 것이다.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잡착하므로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집착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집착하기 때문에 삿된 명(命)의 자양(資養) 등을 받는 것이다. 분명히 말한 것을 알아야 한다.
단월의 집을 가까이 하므로 가까이 하는 중에 모든 근심이 많이 있다. 만약 저 사람이 이와 같은 두 가지 의심이 있어 도와서 이루게 하는 까닭이라면 여법하게 재산과 이양을 얻었으므로 없어지지 않는 인(因)이라 여긴다고 말한다. 아첨하고 굽히는 뜻에 의지하므로 성스러운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저 사람은 명성과 소문과 이양에 이와 같이 집착한다. 그 이유는 모든 재가의 집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대개 친척에 인연하기 때문에 문혜 등의 착한 법이 늘어나지 못하고, 문혜 등이 늘어나지 못한 다음에는 문혜 등의 모든 착한 법들이 다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의(義)를 다하여 문득 근본의 인(因)을 없애게 하기 때문이다.
비방을 늘리는 보살은
이미 사악한 견해가 또한 늘어나서 보살법장을 비방한다. 이미 성을 냈기 때문에 모든 보살에게서 모든 착오와 잘못 등의 병폐를 찾아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허(虛)하고 실(實)한 죄로 비방하게 하기 때문에 큰 죄를 얻게 한다.
이 죄업의 인연 때문에 모든 착한 법이 근본에서 제거되어 멀리 벗어나 없어져 버린다. 인(因)을 멀리 떠나 없앴기 때문에 모든 수다라법을 아직 듣지 못하고 수지하지 못하였으면서도 비방을 할 수 있다. 듣지 못했다는 것은 이식(耳識)의 길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직 수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록 이식의 길에 이르렀으나 독송하고 수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득 말한 모든 가르침과 모든 수다라법을 비방하니, 이러한 뜻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 수다라를 말씀하시고 대아바제사(大阿波提舍) 중에서도 이 뜻을 말한다.
만약 여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삿된 스승이 있다면 저 사람은 바른 법을 크게 비방하는 일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저 사람은 모든 다하는 법을 멀리 떠나므로 모든 착한 법 등을 없어지게 하니 전도되어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 착한 법 등을 밝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가섭에게 말하기를 “가섭아, 보살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생겨난 착한 법은 더욱더 늘어나게 하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며 더욱더 곱절로 훌륭하게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삿된 법을 버리고 다만 바른 법을 구하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서 ‘다만 바른 법을 구한다’고 한 것은 6바라밀과 보살법장에서 말한 것을 바르게 들음이니, 바른 들음 아닌 것이 없다. 세간의 주술 등을 밝힌 것은 결정코 현재의 일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코 들음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시 여여함에 따라 마음을 권한다’라고 한 것은 유연한 착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뜻을 드러내는가? 세간의 언어와 주술 등을 구하는 것이니 인(因)을 구하기 때문이다. ‘아만에 집착한다’는 것은 세간의 주술 등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 세간의 주술과 언어를 구하는 것은 이양과 공경과 명성과 소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을 이루는 것이니, 버리게 하므로 6바라밀과
보살법장을 구한다고 말할 뿐이다.
“법의 재산과 이양을 족하게 여기고 모든 삿된 명(命)들을 버리고 떠나며 성스러운 주인의 성품에 안주하고 족함을 안다”고 한 것은 법의 이익을 족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 이유는 법대로 얻은 이양에 마음이 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삿된 명을 버리고 떠난다”고 한 것은 모든 아첨하고 굽은 것 등의 마음을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주인의 성품 가운데 안주하고 족함을 안다”고 한 것은 피로하고 게으른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얻고 잃는 것을 마음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은 이와 같이 행한다. 바르게 행하고 나서 스스로 이롭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을 이루기 위한 까닭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막고 보호한다.
만약 계를 잃어버린 일이 있어도 사람의 죄와 허물의 허(虛)와 실(實)을 가리지 않으면, 어찌 하물며 사람의 장점과 단점의 모든 허물을 찾겠는가? 이 보살은 6바라밀과 보살법장을 수행하더라도 이 모든 불법 가운데에서 마음이 통달하지 못하니 이 가운데 부처님만이 현전에서 증명을 하시므로 비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의 보리는 끝이 없고 신근(信根)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연설하여 모든 법을 다스리니, 모두 간략히 밝힌다. 무엇이 물러나 잃어서 늘어나지 않는가? 어찌하여 물러나 잃는가? 어느 때에 잃는가? 어떠한 법들인가? 저 사람은 분명히 말했으니, 무엇이 물러나 잃어서 늘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모든 착한 법을 말한다.
어찌하여 물러나 잃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만심으로 세간의 언어와 주술 등을 구하기 때문이라고 점차로 말한다. 어느 때에 잃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현재의 법과 미래의 법을 말한다. 어떠한 법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네 가지 법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재가신자[白朋] 중에도 이와 같다.
모든 착한 법이 생기는데 어찌하여 생기고, 어느 때에 생기고, 어떠한 법 등이 생기고, 어떤 대치를 말하는가? 다시 이 모든 법은 점차로 어떠한 아만에 포섭되는가? 모든 이양 등과 세간의 언어와 주술 등을 희망하고 구하며, 구하여 처소에 따라 다니고, 집 안에서 이양을 본다면 이것은 이 집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몸이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얽매여 질투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저 집에 소유한 것으로 인하여 다른 보살들이 친근히 할 때 화가 일어나고 나쁘게 비방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에게 화를 내고 비방하기 때문에 곧 바른 법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재가신자[白朋]의 법 중에서 점차로 아만 등의 모든 근심을 벗어날 것을 밝히고 있으므로 6바라밀에 포섭되고, 보살이 닦고 배우고 바르게 들으므로 법을 행하고 좇는다.
법을 행하고 좇은 다음에 법대로 보시를 얻어 양(量)을 알고, 모든 삿된 명 등을 버리고, 성스러운 주인의 성품에 안주하고 만족함을 안다.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집착하고 비방하는 인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 실(實)을 불실(不實)로 하는 일, 남의 단점을 구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 비방을 벗어나는 보살의 마음 때문에 이익 되고 법다운 등의 일을 행할 수 있다.
법다운 행을 행하므로 바른 법을 비방하지 않고 모든 백법(白法)의 인이 되는 모든 법을 벗어나 없애기 때문에 멸하지 않는 백법의 인(因)을 수행한다. 사이비 보살의 하나하나의 모습에 따라 악한 마음 등을 익히고 행하는 것을 벗어나고, 보살과 비슷한 곧은 마음으로 닦는 모습을 수행하고 모든 행을 익히는 까닭이며, 권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생멸의 고통을 분명히 하고 모든 번뇌 등의 행을 행하지 않는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보살에게 네 종류의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이 있으니 보살은 항상 벗어나야 한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인가? 불법 가운데 마음에 의심과 후회가 생겨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이러한 것 등이다.

【문】무슨 까닭에 오직 네 가지 법만 말하였습니까?
【답】네 종류의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 등의 법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종류의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이 있으므로 네 종류의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을 말한 것이니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 등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승(乘)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것이다. 둘째는 화수(化受)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것이다. 셋째는 공덕을 돕는 것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것이다. 넷째는 지혜를 돕는 것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승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것은 불법에 대해 마음에서 의혹이 생겨 분명하지 못한 것 등과 불법을 공경하고 존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 모든 계 등의 법을 공경하지 않고 불법에 대해
의혹 등을 내는 까닭에 모든 대승 가운데 믿지 않고 침묵하는 행을 내지 않는다.
이 중 모든 불법에 대해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심을 내고, 큰 뜻의 덕이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혹을 낸다. 그러나 얻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하지 못한 일들을 낳는다.
화수(化受)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인(因)이란 것은 모든 중생에 대해 교만과 성냄과 원한과 망상 등을 일으키는 것이니, 교만 등의 마음 때문에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원한을 품고 침묵한다. 그러므로 교만과 성냄과 원한과 망상 등을 교화하여 이끌지 못하고 모든 존귀하신 분과 제자에게 아울러 이익이 있고 없는 것 등을 간택하라고 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공덕을 돕는 것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인(因)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얻은 이양에 대해 질투하고 아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여기에서 다른 사람이 이양을 얻은 것을 보면 마음에서 분노와 괴로움과 성내는 뜻과 질투를 일으킨다.
만약 그가 구하는 것을 보면 아까운 마음이 일어나니 이것이 인색한 것이다. 저 사람이 이와 같이 질투하고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치성하기 때문에, 공덕을 돕는 지혜 중에서 원한을 품고 수행하지 않으므로 모든 공덕의 지혜가 문득 물러나 잃게 된다.
지혜를 돕는 것에 대해 아첨하고 굽히는 인(因)이란 것은 모든 보살에게 모든 악과 악명과 악칭(惡稱)과 악행 등을 널리 밝히는 일이다. 악명 등의 일을 말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모든 보살을 위해서 모든 악 등의 구절을 말하고 모든 보살을 위해서 대승경전을 말했으니 알아야 한다. 대승을 비방하므로 보살이 조도의 지혜[助道智] 가운데 묵묵히 앉아 게으름을 피우고 수행하지 않아서 도를 닦는 지혜[修道智] 중에서 물러나 잃게 되니, 이 때문에 친구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첨하고 굽히는 것에 대응하여 다스리므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 네 가지 질직(質直)한 모습이 있으니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범한 모든 죄를 끝내 덮어 가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서 ‘범한 모든 죄를 끝내 덮어 가리지 않는다’고 한 말은 몽땅 다른 사람에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일을 드러내는 까닭에 말하는 것이며, 죄를 범하였기에 참회하는 까닭이다.
저 사람이 이와 같이 참회하였기에 뒤에 뉘우침과
한(恨) 등의 정을 생기지 않게 하고 착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혹 국토나 재산을 잃는 것은 진(眞)으로써 실(實)을 구하는 까닭이며, 모든 보시 등을 아끼지 않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몸과 목숨이 어렵다는 것은 몸과 목숨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나머지 여러 가지를 의지하지 않고 거론하지 않으니 저 일을 버리고 나서 사람을 미혹하게 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모든 악한 일 가운데 욕하고 꾸짖고 비방하고 치고 때리고 묶고 여러 가지로 해치는 일이 있으니, 이 고통을 받을 때 다만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 기억하는 업보를 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 이 모든 구절에 무슨 다른 뜻이 있는가?
이 가운데 ‘욕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고, ‘화를 낸다’는 것은 거짓말과 진실을 모두 말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은 이미 종성(種姓) 등을 말하여 모든 악한 일을 말했기 때문이다. ‘비방한다’는 것은 참다운 견해로 말미암아 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치고 때리고 꾸짖기를 자주 한다’는 것은 몸 가운데 모든 연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자주 꾸짖는다’는 것은 세 가지 업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다시 치고 때린다’는 것은 손과 발 등의 모든 몸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죽인다’는 것은 몸과 손 등과 칼과 몽둥이 등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묶는다’는 것은 새끼줄과 노끈과 자물쇠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 가운데 자기의 업보만을 꾸짖으니 선악의 업보의 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 마음에 성냄과 원한 등을 품지 않고 모든 번뇌가 없으니, 성냄과 원한과 번뇌를 품지 않으면 저 사람은 믿음과 욕(欲)에 견고히 잘 머문다. 설사 모든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믿을 수 있으니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대승 가운데 몸과 마음이 성취되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이 모든 구절은 점차로 말한다. 모든 불법 가운데 의심하고 계행을 닦지 않기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삿된 행을 행하게 한다. 삿된 행을 행한 뒤에는 그 이양 중에서 아끼고 질투하는 마음을 낸다. 질투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공덕과 이양을 받는 모든 보살에 대해서 보고 들으면 이에 대에 비방을 일으켜 널리 악명을 퍼뜨리는 것이다.
재가신자의 법[白朋法]에서도
또한 점차로 계에 의지하는 행을 짓는 까닭이다. 계를 잘 지킨다는 것은 잘 보호하고 잘 살펴서 말하는[諦語] 것이다. 보호하여 살펴서 말하는 것은 법에 수순하여 참는[忍] 것이고, 참는 것을 갖추면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을 얻는다.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믿을 수 있다. 아첨하고 굽히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이는 항상 마음이 부끄러워하는 일을 이른다.
어느 곳에 아첨하고 굽히는가? 모든 불법 가운데와 중생에 처하는 것이다. 어느 때에 아첨하고 굽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현재의 법 중에서 익숙해져서 버리려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모든 법을 따르고 또 설하신 두 가지 4구(句)와 모든 진실하고 곧은 모습을 따르기에 이른다.
어떤 뜻 가운데에 있으며 또한 어떤 때인가? 기(記) 등의 법을 대치해서 선한 법을 밝히니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아첨하고 굽히는 마음 중에서 모든 보살은 간택하고 모든 진실하고 곧은 마음을 쓴다. 보살이 진실하고 곧은 마음을 말한 뒤에는 진실하고 곧은 마음의 보살을 위해서 모든 조복의 뜻을 말하기 때문이고, 아첨하고 굽히는 법을 방지하기 때문이며, 저 사람에게 조복하고 따르기를 권하고 조복하고 따르는 법과 조복하거나 따르지 않는 법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에게 네 종류의 조복하거나 따르지 않는 흩어져 무너지는 모습이 있다. 어떤 것 등이 네 가지인가? 경전을 독송하면서 장난스러운 의론[戱論]을 내고, 법과 순법(順法)에 따라서 행하지 않으며, 모든 가르침 중에서 조복하지 않고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다.
무슨 까닭에 네 가지 법만을 말하는가? 네 가지 법을 둔 것은 네 종류의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인(因)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네 가지 법인가? 첫째는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에 처하는 것이다. 둘째는 행을 일으키는 가운데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셋째는 용(用)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넷째는 함께 머물러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란 잘 조복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까닭에 사나운 말[惡馬]에 비유한다. 이 모든 조복하지 않아 흩어지는 네 가지 법은 능히 저 보살행 닦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까닭에 조복하지 않아 흩어지는 법이라 한다. 여기에서 모든 법을 듣고 수행처에서
장난스러운 의론을 낸다는 것은 바로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것에 처하는 인(因)이라 한다. 비유하면 조복하지 않아 흩어진 사나운 말[馬]과 같다.
조복하지 않은 까닭에 도리어 본래의 처소에 편안히 있을 뿐이나 이때 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조복하지 못하고 흩어져 무너뜨리지 못한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여법한 뜻을 많이 들었으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조복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 선지식이 바르게 권하면 모든 법과 차법(次法)을 수행하게 되지만, 그러나 바르게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가르침 가운데 바르게 법을 받아들여 행하지 못하니 이것이 행을 일으키지만 조복하지 못해서 흩어져 무너지는 인(因)이다.
비유하면 길들지 않은 사나운 말은 바른 길에 잘 두어도 조복하지 않는 까닭에 악한 길로 향하게 되는 것과 같다. 조복하지 않은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선지식에게 법과 차법을 수행하라고 권유 받았지만 모든 가르침 가운데 현재 마음이 전도되어 분별하여 생각하므로 곧 전도되어 취한다.
“다른 믿음 있는 사람이 보시한 공양과 공경을 손상시킨다”고 말한 것은 용(用)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인(因)이다. 비유하면 길들지 않은 사나운 말이 모든 길들여진 말과 한곳에 함께 있으면, 모든 길들여진 말과 그 행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조복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조복하지 않은 보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조복한 보살과 한곳에 함께 있더라도 이미 계행이 샜기 때문에 모든 믿음 있는 사람이 보시한 공양과 공경을 받더라도 후회와 원한을 갖게 된다. 잘 조복한 보살이 행하는 것과는 그 행이 비슷하지 않고, 지견(知見)을 즐기지 않으며, 잘 조복한 보살 가운데서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켜 공경심을 내지 않는다. 이것을 조복하지 않아 흩어져 무너지는 곳에 처한 인(因)이라 한다.
비유하면 길들지 않은 말은 여러 길들여진 말들과 한곳에 함께 있더라도 길들여지지 않은 까닭에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과 같다. 잘 조복된 자가 조복되지 않은 자와 한곳에 함께 하는 것도 이와 같으며, 조복하지 않은 보살도 이와 같다. 스스로 보아서
취하는 뜻이 있는 까닭이고, 잘 조복한 보살과 함께 한곳에 함께 있는 까닭에 마음이 즐겁지 않다. 잘 조복한 보살도 이와 같다.
이 중에서 조(調)라는 것은 근(根)을 조절하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복(伏)이라 하는 것은 한 마음에 악을 없애서 뛰어난 행을 얻는 까닭이다. 모든 나쁜 법을 전환하고 대치해서 백붕법(白朋法)을 말하니 잘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들은 것을 잘 설명하고, 들으면 바로 믿고 받아들인다. 말한 바와 같이 행하고 법에 의지하되 언설(言說)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질투하는 마음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바른 법을 들어 이익을 얻기를 구할 뿐, 남의 여러 단점을 찾기를 구하지 않는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행을 행한 뒤에는 법을 벗어나지 않는 선지식을 만나고, 스승의 가르침에 수순(隨順)해서 의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머지 언어로 지은 것은 모두 착한 것이어서 스승의 뜻을 잃지 않는다.
“계율과 선정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이 말의 모든 구절은 다른 뜻이 있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곳에서 스승의 가르침에 수순한다”고 한 이 말은 총체적으로 착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에 비유한 것은 선과 악 등의 인(忍)을 들은 까닭이다. “짓는 것이 모두 착하다”고 한 것은 언제나 계율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뜻을 잃지 않는다”고 한 것은 가르침에 대해 마음으로 공경하고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행을 행하고서 아란야를 벗어나지 않는 선지식을 항상 만나기 때문이다. “계율과 선정에 물러나지 않고 조복하고 수순하는 마음으로 공양을 받는다”는 말에서 말한 계율과 선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은 계율을 거듭 밝혀 선정의 이름으로 이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 알아야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은 행을 행하고서 모든 공덕을 행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 선지식을 항상 만난다.
“잘 조복하고 수순하는 보살을 보고 나서 착한 사람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수순한다. 수(受) 등의 행으로 향(向)을 수순하고, 의(意)를 수순하고, 모든 공덕에 수순하며 이익을 얻게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구절에는 어떤 다른 뜻이 있는가? 이 중에 잘 조복하고 수순하는 등의 모든 구절은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공경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한다’고 한 것은 기뻐하고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향에 수순한다’고 한 것은 즐겨 보기 때문이고, ‘의에 수순한다’고 한 것은 바르게 친근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덕에 수순한다’고 한 것은 즐겨 듣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저 이익을 얻게 한다’고 한 것은 이 법을 수순하여 행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행을 행하고서 무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우두머리 선지식이 된다.
간략히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조복하고 수순하지 못했던 변(邊)이 무너지는 일을 조복하고 수순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존재하는가? 다만 문혜 등의 모든 모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인가? 현재의 법과 미래에 익히고 배워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모습들인가? 네 가지 법을 갖추어서 문혜 등의 법을 행하여 대치하기 때문이다.
재가신자[白朋] 등의 법을 말하니, 알아야 한다. 순서를 세워 말하는 것은 문혜 등의 법을 행하여 마음에서 뽐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른 법과 차법(次法) 등의 행을 좇아 행하고 나서 바른 가르침의 처소에서 법답게 행하지 않는다. 이미 바르게 가르치는 곳에서 법답게 행하지 않았기에 받아들인 보시 가운데 모든 일을 이익 되지 않는 곳에 떨어지게 한다.
저 사람은 이와 같이 잡되고 더럽게 물든 마음 때문에 모든 마음을 잘 조복한 보살을 보면 공경하고 대치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점차로 백붕(白朋) 등의 법을 말했으니 알아야 한다. 조복하지 않은 모든 법을 가리고 나서 조복 등의 법 닦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조복에 머무는 법과 보살의 잘못된 법 등을 막고 보호하며, 잘못되지 않은 법을 닦도록 권한다. 그러므로 잘못되고 잘못되지 않은 법들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에게 네 가지 잘못된 법이 있으니 어떤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교화할 대상인 믿고 받아들이는 중생과 함께 할 뜻이 아직 없는 이것이 보살의 잘못된 점이고, 그리고 계율을 깨뜨리는 악인 등을 거두어 취하는 이것이 보살의 잘못된 점이다”라고 하셨다.

【문】무슨 까닭에 네 가지 법만을 말하였습니까?
【답】네 가지 잘못된 법을 의지하기 때문에 보살에게 네 종류의 잘못된 점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것들이 그 네 종류인가? 첫째 짓지 않는 잘못이고, 둘째 양을 넘어서는 잘못이고, 셋째 바르게 짓지 않는
잘못이고, 넷째 악하게 짓는 잘못이다.
여기에서 짓지 않는 잘못은 교화를 받아들이는 중생과 함께 하는 뜻이 없는 것이니, 교화할 중생에 의지해서 구경에 도달하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믿는 마음으로 중생을 공경하는 가운데 설법하는 중에 단절함이 있으니, 이것이 보살의 잘못이다.
양을 넘어서는 잘못은 그릇이 아닌 중생에게 깊이 있고 묘한 수준 높은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소승의 중생에게 대승을 바라고 구하라고 하여 그 근기에 따라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은 보살의 잘못이다.
바르게 짓지 않는 잘못은 모든 상근기[上根]의 중생에게 소승법을 말하는 것이니, 대승의 중생에게 소승을 구하도록 한다면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잘못이다.
악하게 짓는 잘못이란 바른 행에 머무는 중생으로서 법대로 계율을 지키는 자가 벌을 간직하는 것을 공경하지 않고 계를 깨뜨리는 것을 거두어 취하는 등의 일이니, 즉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깨뜨리는 것에 대해서 치우친 마음으로 전도되어 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계를 지키는 것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알아야 한다. ‘바른 행에 머문다’고 한 것은 모든 업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율을 지킨다’고 한 것은 모든 계율을 부족하게 하거나 새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법’이라 한 것은 계율의 법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모습이 있으니 계율을 깨뜨리는 것을 해석해서 성립시키는 것은 계율을 깨뜨리고 계율을 부족하게 하거나 새게 하기 때문이다. ‘악한 법’이라 한 것은 모든 계를 공경하고 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되다[錯謬]’라는 말은 바르지 않은 도를 취하고 바르지 않은 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네 가지 잘못의 구절에 대해 네 가지 법을 지금 말한다. 첫째는 말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비슷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고, 셋째는 근기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것이고, 넷째는 악하게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앞뒤에 마주 대해서 법을 말하는 것에 대해 귀찮고 게으른 생각을 내는 것이니, 이미 악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말하는 것에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근기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것은 소승의 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악하게 말하는 것은 이양을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악한 마음’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선근(善根) 가운데서 문득 물러나 잃어 만족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을 길들이고 속이게 되는 것인데,
이미 법을 말하는 중에 방편의 교묘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선근을 거두어 취하지 못하는 것은 소승을 즐겨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선근을 멀리 떠나 다시 이양심(利養心)과 행을 가르치는 것을 구하여 행하기 때문에 공덕을 모으지 않고 모든 악을 돕기 때문이다. 중생을 길들이고 속이니 저것을 대치하므로 백붕(白朋)에서 말한 것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고 내지 중생들로 하여금 평등하게 바른 행에 머물게 한다”고 하였다. ‘모든 중생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다’고 한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깊이 믿지 않는 중생을 대하여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서 법을 말해 주어 방어하고 보호해서 잘못된 점을 짓지 않게 한다. ‘마음으로 모든 중생에 대해 평등하게 법을 말할 줄 안다’고 한 것은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평등한 법이라 말한다.
‘그릇이 아닌 중생에 대해 소승 등을 즐겨하고 대승을 구한다’고 한 것은 힘에 따라 법을 말하여 양을 넘어서는 오류를 방어하고 보호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릇에 따라 말하는 까닭에 모든 중생을 널리 교화해서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고 한 것은 대승을 믿고 즐겨하는 상근기의 중생이 뜻으로 소승법을 구하면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도록 권하는 것이니 이는 바르게 짓지 않는 오류를 막고 보호한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한다.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행에 평등하게 머물게 한다’는 말은 모든 이양과 명성과 소문과 계율을 깨뜨리는 것과 계율을 지키는 것 등의 마음을 버리고 평등하게 함께 법을 말한다는 뜻이다. 악하게 짓는 잘못된 일을 막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바르지 않게 인(因)을 취하는 것과 친근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려서, 친근해도 좋은 것과 친근해서는 안 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에게 네 가지 선지식이 아닌 것과 착한 친구들이 아닌 것이 있으니 보살은 항상 그것을 버려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소승을 구하는 사람은 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친근하게 다가가니, 세간의 이로움은 이루나 법의 이로움은 없다”고 하셨다.

【문】무슨 까닭에 네 가지 법을 정해서 말합니까?
【답】선지식이 아닌 사람으로 인하기 때문에 네 종류의
선지식이 아닌 것과 착한 친구가 아닌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것 등이 네 종류인가? 첫째는 승(乘)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고, 둘째는 행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며, 셋째는 불법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고, 넷째는 바른 법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소승인은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은 구하지 않는다. 성품과 행동이 좁고 열등한 것이 보살에게 대승법에서 멀리 벗어나기를 권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것을 승(乘)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연각을 구하는 사람은 조금 바라고 조금 지어서 중생의 이익과 수행의 처소를 등지며, 보살에게 중생의 이익과 모든 행 등을 멀리 벗어나라고 권하게 하니, 중생의 이익을 멀리 벗어나므로 행을 잃어버리는 행의 인(因)을 이룬다. 이것이 행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노가야타(盧伽耶陀)5)’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말을 함으로써 불법에서 멀리 떠나도록 권하는 것이니, 이는 멀리 떠나므로 행을 잃는 인(因)이 된다. 이것을 바른 법 중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라 한다. 알아야 한다.
저 사람을 친근히 하면 세간의 이익만 있고 법의 이익이 없다. 착한 법 중에서 부지런히 닦아야만 물러나 잃는 인(因)을 이룰 수 있다. 착한 법의 인(因)에 물러나 잃는 까닭에 바른 법에서 선지식이 아닌 것이라 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릇된 것을 다스리므로 네 종류의 선지식을 말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와서 구하는 모든 사람은 보살의 선지식이다”라고 하였다. 불도의 인연은 대승법을 끊지 않는 것과 짝하기 때문에 와서 구하는 모든 사람은 보살의 선지식이라 말한다. 이러한 차별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선지식의 인(因)을 와서 구하는 것에 의지하므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닦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고 수행이 헛되지 않으므로 소승을 바라여 구하지 않으며, 보시를 닦은 것으로 보리를 이루는 것을 도우며 선근을 지었으므로 대승의 행을 잃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법을 말한다’는 것은 보살의 선지식이며,
‘지혜를 낳아서 순수하게 지향한다’고 한 것은 행을 잃지 않고서 대치하는 것이다.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법을 말해줄 수 있다. 그러므로 조금 바라는 일[少欲]을 구하지 않는다. 문혜는 대개 순수하게 지향하므로 비록 세간의 고통을 얻었다 해도 피로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다.
‘사람을 교화하여 출가하게 한다’고 한 것은 보살의 선지식이다. ‘모든 착한 법을 늘리는 것을 순수하게 지향한다’고 한 것은 바른 법의 이치를 끊지 않고 대치하여 추가하도록 권하기 때문에 모든 삿된 법을 멀리 떠나게 된다. 또한 모든 선근을 순수하게 지향하기 때문에 이익 되는 일을 할 때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피로하다는 생각을 내어 물러나 잃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세존께서는 보살의 선지식이다. ‘모든 불법이 늘어나는 것을 순수하게 지향한다’고 한 것은 다스려서 불법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께서 헤아리는 것이 뛰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양과 명성과 소문을 풀이하여 성립시켰다.
이미 이양과 명성과 소문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모든 불법에서 멀리 벗어나 물러나 잃게 된다. 그러나 모든 불법을 닦고 익히고 순수하게 지향하고 선근의 힘을 쌓은 까닭에 물러나 잃지 않는다. 이러한 뜻 때문에 선지식이 아닌 것 중에서 가려내고 나서 이와 같은 참다운 행을 닦기를 권하니 보살의 일을 행하기 때문이고, 여실(如實)하지 않으면서 여실한 듯 보이는 모든 보살의 모습을 밝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에는 네 가지 보살이 아니면서 보살과 비슷한 보살이 있으니, 어떤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이양을 욕심내 구하지만 법을 구하지 않고 모인 무리를 즐거워하고 멀리 떠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문】무슨 까닭에 네 가지 법만 두었습니까?
【답】네 종류 보살의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네 종류의 아닌 것을 말하였다. 어찌하여 보살의 모습과 일이 보살과 비슷하다는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많이 들은 것이 비슷하고, 둘째는 아란야(阿蘭若)가 비슷하며, 셋째는 공덕의 행을 짓는 것이 비슷하고, 넷째는 무리들을 거느리는 것이 비슷하다.
‘이양을 욕심내 구하지만 법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보살이 모든
믿는 마음이 있는 사람 중에서 이양을 바라고 구하는 사람이 비록 다시 법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이것은 여실한 것이 될 수 없고 여실한 것도 아니다. 명성과 소문을 욕심내고 구하며 자기의 덕을 칭찬하지만 세간을 벗어나는 공덕을 구하지 않거나 명성과 소문을 즐기는 보살이라면 비록 아란야에 있다 해도 이것은 여실한 것이 될 수 없고 여실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즐거움을 욕심내고 구하지만 중생의 모든 고통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양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비록 보살이 공덕의 행을 지었지만, 여실한 것이 될 수 없고 여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인 무리 구하기를 즐겨하고 멀리 떠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공양 받고 공경 받는 마음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비록 보살이 무리의 우두머리이지만, 여실한 것이 될 수 없고 여실한 것이 아니다. 보살이 이러한 행을 행하고서 함께 법을 간직하거나 아란야에서 모든 공덕을 짓거나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일을 짓는 것을 잃게 된다. 저것을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진실한 공덕을 말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공(空)을 믿고 이해하고 업의 과보를 믿는다”고 하였다. 공을 믿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양 등의 일을 즐겨하지 않고, 업의 과보를 믿기 때문에 모든 법의 인(因)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법을 즐거워하므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인(忍)을 듣고 닦는다. 모두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다고 한 것은 무아(無我)를 감내[忍]하므로 명성과 소문과 명칭 등의 일에 집착하는 것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모든 중생에 대해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큰 자비이기 때문에 보살의 공덕을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열반의 뜻에 들어간다”는 것은 열반의 뜻 때문에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세간의 행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을 뽑아준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라고 한 것은 마음이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보시를 행한다”고 한 것은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중생의 공덕을 잘 아는 것이다. “비록 보시를 수행하지만 과보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고요함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지만 과보를 구하지 않을 뿐이다.

【문】백붕(白朋) 가운데에서 믿고 즐거워하는 등의 법을 연설하고, 공(空) 등의 법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보시
등의 조도(助道)인 모든 행은 성문ㆍ연각 등과 함께 하는 모든 행을 의미하니 보살의 뛰어난 행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마음을 내는 중생에게 성문ㆍ연각과 함께 하지 않는[不共] 바른 깨달음을 도와 이루는 모든 보살법을 드러내 말하고자 하기 위한 때문이다.

이 논의 송나라 본[宋本] 제1권이 국본(國本)과 거란본[丹本] 두 본과 크게 차이가 나서 어느 것을 삭제하고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지금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을 조사해 보니 그 중에서 이 논(論)에 관해서 말하기를, “아래의 구역(舊譯)인 단권(單券) 『대보적경』을 해석한 것은 「보적부(寶積部)」 제43회”라고 하였다. 보적부 제43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를 조사해 보니 “1권이 실역(失譯)되었고 아래의 구역(舊譯) 단권 『대보적경』을 해석한 논(論) 4권이 있다”6)라고 하였다.
지금 대조해서 검토해 보니 송본 제1권은 완전히 저 『대보적경』이고, 해석한 논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송본(宋本)이 착오를 일으켜 경본(經本)으로 논(論)의 초권을 삼은 것이다. 경명(經名)에 ‘논자(論字)’를 덧붙이고 또 보리류지 역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따라서 지금 저 송본을 삭제하고 이 국본과 거란본을 취해서 정본(正本)으로 한다. 지금 풀이하는 경본은 『대보적경』 112권이다. 후현(後賢)이 지금 삭제하는 송본(宋本) 초권(初卷)이 어느 것인지를 알고자 하면, 이 경을 보길 바란다. 바로 이 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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