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14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77권

by Kay/케이 2024. 1. 19.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77

 

대보적경 제77권


후진(後秦) 삼장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송성수 번역


17. 부루나회 (富樓那會) ①

1) 보살행품(菩薩行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죽원(竹園) 안에서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으며 그리고 큰 보살마하살도 그 수가 한량없었다.
그때에 혜명(慧命) 부루나(富樓那) 미다라니자(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조금 있습니다. 여래께서는 가엾이 여기셔서 허락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물어라. 나는 마땅히 해설하여 너로 하여금 기쁘게 하리라.”
부루나가 말하였다.
“저는 이제 모든 행(行)이 으뜸이어서 공덕과 명성이 높고 멀며 항상 중생들을 위하여 안락을 구하고 있는 모든 보살마하살들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그때에 부루나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행이 가장 으뜸가서
공덕과 명성이 극히 높고 멀며
깨끗한 계율로 법을 좋아하는 이에 대해
저는 그의 행할 바를 묻겠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닦고 다스리며
어떻게 널리 보시를 행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항상 도(道)를 행해야 하겠습니까?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이런 대사(大士)들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묻는 것입니다. 보살이 어떻게 하면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가 말라 다하지 않음과 같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 광[寶藏]을 닦고 쌓아야 모든 법에 대해서 이치를 결정할 수 있으며, 모든 언어에 대해서 그 장구(章句)를 잘 알 수 있게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보살이 어떻게 구하여야
법을 많이 들어 앎을 마치 큰 바다와 같이 하며
법에서 이치를 결정할 수 있고

부처님의 도를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 마디의 말씀에서
한량없는 이치를 이해하고
지혜의 힘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많이 들어 앎이 다함 없으면서
어려운 질문에 동요하지 않으며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면서 설법하여
중생들의 의심을 끊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그 지위[地]의 지혜 힘에 따라 여래께 묻겠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뭇 재난(災難)을 여의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을 만난 뒤에는
속히 청정한 믿음을 얻을 수 있나이까?

위없는 믿음을 얻은 뒤에는
버리기 어려운 일을 능히 버리며
모든 것을 버린 뒤에는
힘써 장애 없는 도[無礙道]를 행할 수 있나이까?

어떻게 하면 즐거이 출가하여
고요한 데서 공의 지혜 닦으며
어떻게 하면 법을 거스르지 않나이까?
이런 일을 자세히 대답하여 주소서.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지혜를 갖추셨고 이미 온갖 신통의 저 언덕[彼岸]을 건너셔서 삼계(三界) 중에서 제일 높고 높으시며 견줄 데 없는 미묘한 큰 지혜를 얻으시어 모든 법 가운데서 행(行)에 장애가 없다 함을 알고 있나이다. 이 때문에 저는 이런 일을 청하며 묻나이다.”
그리고는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부처님은 맨 위의 공덕에 머무시고
이미 신통의 언덕 건너셨으며
장애 없는 지혜를 얻으셨으므로
저는 용맹을 내어 묻고 있나이다.

모든 법을 잘 배우셔서
공덕이 가장 높고 뛰어나며
어둠을 깨뜨리고 지혜 광명 내시어
중생들을 모두 기쁘게 하나이다.

원수나 친한 이에 대해 증애(憎愛)의 마음 없고
근심함도 없고 속임수도 없으며
크게 싸워 죽음의 왕[死王]을 이기고
악마의 군사들을 꺾어 부수었나이다.

칼과 몽둥이를 잡지 않고서도
모든 원수와 적을 항복받았으며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면서
굳게 청정한 계율에 머물렀나이다.

세존께서는 아첨과 굽은 마음 없으시고
교만도 없고 희롱함도 없으시며
명해탈(明解脫)을 증득하셨으므로
공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시나이다.

본래 행하셨던 도(道) 그대로

얻으신 바의 수승한 지혜를
이제 저에게 말씀하여 주소서.
어떻게 행하여 부처님이 되셨나이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너는 여래에게 그런 일을 물을 수 있구나.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 것이니라. 너희들을 위하여 모든 보살들이 마음을 내어 행할 바와 온갖 한량없는 불법을 닦고 쌓는 일을 말하여 주리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보살들이
처음에 보리의 마음을 내어
언제나 용맹스러운 힘으로써
즐거이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는 일이며
모든 보살들이 행할 바와
갖가지 깊은 마음으로 하는 행과
부처님에게서 수기(授記)를 얻는
이런 일들을 간략하게 말할 것이니라.

깊은 마음으로 법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나니
갖가지로 모든 행을 나타내는 것이요
한 가지 일로써는 이루어지지 않느니라.

기뻐하는 마음이 속에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이요
보시한 뒤에는 후회함이 없으면서
그 뜻은 더욱더 기뻐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중생들은 항상 가난하여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의 재산이 없으므로
나는 마땅히 그들을 구해야 한다.

중생들이 항상 가난한 것은
모두가 게으름을 피운 탓이니
나는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이로부터 보리를 얻어야겠다.

나는 마땅히 중생들을 위하여
마음을 더하면서 인욕(忍辱)을 행하며
나쁜 말로 꾸짖고 매를 때린다 해도
묵묵히 받으면서 갚지 않겠다.

그 누가 나를 꾸짖는 것일까?
꾸짖는 이를 얻을 수 없으며
욕하고 성을 내고 원망하는 것도
모두 다 이것은 공한 일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면
마음에는 성냄과 원한이 없나니
항상 인욕을 수행하면서
이로부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중생들은 모두 착한 마음이 없으므로
마땅히 세간의 등불이 되어서
그들이 돌아와 의지하게 하고
재물이 없으면 재물로써 만족시켜야 한다.

중생들은 참으로 불쌍하게도
모두 삿된 도[邪道]를 행하고 있나니
나는 마땅히 그들을 제도하여
열반에 머무르게 하여야 한다.

중생들은 모두 가난하여
지혜의 재물이 없나니
나는 온갖 지혜를 얻어
그들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마음을 내고 보리를 구하면서
이러한 원을 행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그 마음을 나타내 보이면서 하나의 법에만 머무르지 않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보살은 온갖 법을 배우고 그런 뒤에야 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의 크게 희유한 일이 있나니, 이 일보다 더 훌륭한 다른 법은 볼 수 없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은 게으름을 피우는 중생 가운데서는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나니 이것을 희유한 일이라 하고, 억세고 성을 내는 중생들 가운데서는 인욕을 수행하나니 이것을 희유한 일이라 하며, 모든 중생들이 삿된 도를 행한 것을 보면 자신은 바른 도에 힘을 쓰나니 이것을 희유한 일이라 하고, 생사(生死)에 윤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깊은 마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나니, 이것을 희유한 일이라 하느니라.
부루나야, 이 네 가지의 희유한 일을 바로 보살의 가장 큰 희유한 일이라 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게으름을 피우는 중생을 보면
부지런한 마음으로 정진하면서
나는 그를 본받지 않아야 하며
법이 아닌 일들은 하지 않겠다 하라.

성냄을 본받지 않아야 하며
성냄은 부처님의 도가 아니니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닦으라.
보리는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중생들은 삿된 길을 좋아하고
삿된 길에 의지하나니
보살은 바른 도를 구하여
중생들을 바른 도에 머무르게 하라.

나고 죽고 하는 허물을 보고서
일심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며
나는 위없는 재물을 얻어
중생들을 제도해야겠다고 하라.

이와 같은 희유한 일은
이 밖에 다시 더 뛰어난 것 없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장애를 여읜 법을 얻게 되리라.

설사 몸과 옷이 불타고
불붙은 머리를 못 구한다 하여도
게으른 마음이 만일 생기면
바로 속히 없애 버려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에 네 가지의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이냐 하면, 모든 중생들이 생사(生死)에 편히 있으면서 정진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자신은 부처님 도에 있으면서 수행하며 정진하고 있음을 보면서 곧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모든 중생이 마음에 항상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보았을 때에 자기 자신은
부처님 법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음을 보면서 곧 기뻐하는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들이 성을 내고 질투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자기 자신은 성을 내거나 질투도 하지 않고 항상 자비를 품고 있음을 보면서 곧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자기 자신과 함께 부지런히 불법을 행하는 그 밖의 사람들은 보지 않으면서 곧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중생들이 게으른 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은 정진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스스로 기뻐하는 마음을 얻는다.

나고 죽고 하는 허물을 보면서
싫증을 내는 마음을 내며
삼계(三界)의 감옥을 두려워하면서
부지런히 버리고 여읠 것을 구한다.

중생들은 성을 내고 원망하기 좋아 하나
자기는 자비심에 머무르나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기쁨과 즐거움을 내게 된다.

중생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니
이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위없는 불도를 구해야 한다.

이것을 진실한 지혜라 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는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이 지혜를 배워서
중생의 귀의할 곳이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이 보살은
항상 기뻐하는 마음을 얻으며
유무(有無)의 공위(空爲)에 따라
진실한 법을 내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모든 재난을 여의게 되고 재난이 없는 곳을 만나며 만난 뒤에는 잃지 않으면서 불법을 잘 닦게 되는 네 가지의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법인가 하면, 첫째는 보살이 겸손하고 그 마음은 부드러우면서 무릇 중생을 보면 언제나 ‘어서 오시오’라고 말을 하고 온화한 얼굴과 기쁜 빛으로 먼저 인사하며 그와 함께 말을 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는 것이요, 둘째는 한마음으로 법을 구하면서 항상 묻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좋은 이익을 구하되 만족해함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항상 조용하고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요, 넷째는 자기 자신이 부처님의 보리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생들을 교화하여 부처님 도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 네 가지의 법을 지니면 모든 재난을 여의게 되고 재난이 없는 곳을 만나며 만난 뒤에는 잃지 않으면서 불법을 잘 닦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드러운 마음을 두루 갖추어
항상 즐거이 자비를 행하며
만일 중생들과 말을 하게 되면
겸손하면서 마음을 온화하게 지닌다.

언제나 부처님들께서 찬탄한 바인
심히 깊고 미묘한 법을 구하며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니면서
즐거이 두타(頭陀)의 일을 행한다.

비록 두타의 법을 행할지라도
또한 깊고 묘한 지혜를 행하나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재난을 여의고 재난이 없는 경우를 만난다.

항상 모든 부처님께
모든 깊은 법을 물을 것이니
이 때문에 지혜가 더욱 자라고
모든 어려운 것이 생기지 않는다.

항상 고요한 곳에 있기 좋아하면서
청정하게 두타를 행할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재난을 여의고 재난이 없는 경우를 만난다.

모든 지혜 있는 이들이
이 네 가지의 법을 친근하면
온갖 재난을 여의게 되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 뵙게 된다.

모든 부처님을 만난 뒤에는
믿음을 두루 갖춰 파괴되지 않고
으뜸가는 정진을 일으키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는 이는
마땅히 바른 법을 배워야 하나니
만일 바른 법을 배우게 되면
불도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

2) 다문품(多聞品)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 곧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가 다하지 않음과 같이 하며,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광[寶藏]을 닦고 쌓아야 모든 법에 대해서 이치를 결정할 수 있으며, 모든 언어에서 그 장구(章句)를 잘 알 수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은 이른바 12부경(部經)인 수다라(修多羅)와 기야(祇夜)와 수기(受記) 등의 경(經)과 가타(伽陀)와 우다나(憂陀那)와 니다나(尼陀那)의 이와 같은 모든 경과 본사경(本事經)․본생경(本生經)․방광경(方廣經)․미증유경(未曾有經)․아파다나(阿波陀那) 및 논의경(論議經)의 법을 구하여 구한 뒤에는 읽고 외우며 읽고 외운 뒤에는 바르게 기억하며 바르게 기억한 뒤에는 말씀한 대로 수행하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에게 이 첫째의 법이 있으면 곧 법을 많이 들어 앎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다할 수 없게 되며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광을 닦고 쌓아 모든 법에 대해서 이치를 결정할 수 있으며
모든 언어에서 그 장구(章句)를 잘 알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은 온갖 법 가운데서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비록 선정(禪定)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의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에서 머무르지 않는 지혜[不住智]를 얻고 머무르지 않은 지혜를 얻은 뒤에는 모든 법 가운데서 장애가 없는 지견(知見)을 얻느니라. 왜냐하면 부루나야, 탐을 내거나 장애가 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에게 이 셋째의 법이 있으면 곧 법을 많이 들어 앎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다하지 않게 되며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광을 닦고 쌓아 모든 법에서 결정된 이치를 얻고 모든 언어에서 그 장구를 잘 알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은 법의 인연으로써 부처님을 염(念)하고 부처님 법을 염하는 것이니라. 이 사람이 법의 인연으로써 부처님을 염하고 부처님 법을 염할 때에는 어떠한 법도 탐애(貪愛)할 만한 것을 볼 수 없느니라. 이 사람은 탐애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법에 대하여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고 이 사람이 온갖 법에 대하여 집착한 바가 없기 때문에 모든 어려운 질문에도 묻는 대로 대답하면서 거리낌이 없게 되느니라.
보살에게 이 셋째의 법이 있으면 곧 법을 많이 들어 앎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다하지 않게 되며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광을 닦고 쌓아 모든 법에 대해서 이치를 결정할 수 있으며 모든 언어에서 그 장구를 잘 알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은 얻을 바 없는 자비[無所得慈]를 성취하여 행(行)에 장애가 없는 것이니라. 얻을 바 없는 자비라 함은 모든 일[事]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부루나야, 이 모양[此相]에 머무르면 혹은 탐욕을 내기도 하고 혹은 성을 내기도 하고 혹은 어리석음을 내기도 하고, 저 모양[彼相]에 머물러도 역시 혹은 탐욕을 내기도 하고 혹은 성을 내기도 하고 혹은 어리석음을 내기도 하며, 일의 모양[事相]과 물건의 모양[物相]과 5음의 모양[陰相]과 6입의 모양[入相]과 18계의 모양[十八界]과 법의 모양[法相]과 법이 아닌 모양[非法相]에 머물러도 역시 혹은 탐욕을 내기도 하고 혹은 성을 내기도 하며
혹은 어리석음을 내기도 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루나야, 받아들이는 모양은 모두 삿된 소견[邪見]이라 하느니라. 보살은 모든 모양을 없애고 자비로운 마음[慈心]을 닦고 쌓나니, 중생이 허물어지기[敗壞] 때문에 모양 역시 허물어지고 모양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일 역시 허물어지며 일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소견 역시 허물어지느니라. 보살은 그때에 모든 법을 허물어뜨리고 자비를 닦고 쌓나니, 이와 같은 자비를 얻을 수 없는 자비라 하고 이와 같은 얻을 수 없는 자비를 법의 자비[法慈]라 하며 이와 같은 법의 자비를 부처님의 자비[佛慈]라 하느니라.
부루나야, 무엇을 부처님의 자비라 하는가 하면, 짓는 것도 없고 무너뜨리는 것도 없으므로 이것을 부처님의 자비라 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사실대로 온갖 모든 법을 통달하면 이것을 부처님의 자비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사실대로 온갖 모든 법을 통달한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통달할 바란 이것이 법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법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부루나야, 만일 법이 있다고 하면 곧 그것은 법이 아니요 만일 법이 없다고 하면 법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니, 곧 그 안에는 쓸모 없는 이론도 없으며 만일 쓸모 없는 이론이 없다면 그것을 열반이라 하느니라. 너는 극히 멀고 극히 가까움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느니라.”
부루나가 말하였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나이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이치에는 방향도 없고 처소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부루나야, 법에 대하여 수(數)를 짓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법에 대하여 수를 짓는 것입니까?”
“부루나야, 마치 모든 범부들이 집착하는 법 같은 데서는 여래는 얻지도 않고 닦지도 않으며 깨닫지도 않고 통달하지도 않나니, 이러한 법에서 수를 짓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이 모든 법에서의 수(數)는 법을 분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니라. 부루나야, 이제 너를 위하여 말하리니, 이와 같은 첫 번째의 적멸(寂滅)한 법은 부처님의 도를 잘 포섭하느니라.
부루나야, 장차 오는 세상에 어떤 사람이 기꺼이
세간의 이익에 나아가면서 만일 이 경을 듣는다면 즐거이 들어 받지 않으리라.
부루나야, 나의 이 보리(菩提)는 너희들이 다만 음성과 장구(章句)만으로써 조금 알 뿐이니라. 그 안의 이치는 너희가 알지 못할 것이며 이 이치야말로 깊고 멀어서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나니, 오직 지혜가 있는 이만이 속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치를 잘 모르는 이면
불법을 듣고 근심하며 괴로워하나
만일 이치를 잘 아는 이면
여래를 스승으로 삼게 되느니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으면
그는 곧 열반을 구하게 되고
다투거나 송사하는 마음이 없이
바르게 법을 헤아리게 되느니라.

이 안에선 법의 생김이 없고
또한 법의 없어짐도 없으며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는
이것이 모든 법의 참 모습[寶相]이니라.

만일 법에 생김이 없다면
곧 짓거나 일으킴이 없으며
옳고 그름과 하나와 다름이
이 법 안에서는 모두 없느니라.

이것을 열반이라 이름하고
그 안에는 없어지는 것이 없으며
만일 극히 멀고 가깝다 하면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공이니라.

만일 공임을 알 수 있으면
곧 열반을 안다고 하나니
만일 열반을 아는 이라면
그를 바로 나의 제자라 하느니라.

“부루나야, 보살에게 이 네 가지의 법이 있으면 곧 법을 많이 들어 앎을 닦고 쌓아서 마치 큰 바다와 같이 다할 수 없게 되며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의 보배광을 닦고 쌓아 모든 법에서 결정된 이치를 얻고 모든 언어에서 그 장구를 환히 잘 알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 법을 많이 들어 앎을 구하고자 함은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한 바이며
반드시 진실한 이치를 얻나니
그러므로 마치 큰 바다와 같으니라.

하나의 글자 가운데서
그리고 한 구절의 이치에 대하여
천만억 겁 동안에
설명한다 하여도 다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바른 법을 구해야 하고
구한 뒤엔 바르게 생각하면서
법의 모양을 탐하거나 취하지 말며
부처님께서 찬탄한 바도 탐하지 않느니라.

모든 여래를 기억하여 염(念)하며
그리고 바른 법을 염하면서도
탐내거나 다투는 마음으로써
길잡이를 구하지 않을 것이니라.

언제나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로운 마음을 수행하면서도

중생들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온갖 법을 흩어 없애느니라.

큰 이름 가진 보살은
이와 같은 법을 닦고 익히어
빨리 다라니(陀羅尼)를 얻게 되나니
법을 많이 들어 앎도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마치 허공의 성품이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듯이
법의 성품도 또한 그와 같아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느니라.

나는 지혜의 힘으로써
한량없는 겁 동안 법을 설하고
설한 바가 무앙수(無央數)라 하여도
오히려 또한 설했다고 하지 못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의 성품을 다하여
모두가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두루 다 함께 출가하여서
법을 많이 들어 앎은 아난(阿難)과 같아서
다라니의 보살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천억겁 동안 설법한다 하여도
그 지혜는 오히려 다하지 않느니라.

부처님의 지혜는 견줄 데 없어
허공과 같이 한량없으며
허공이 나거나 일어남이 없듯이
지혜 또한 그와 같으니라.

마치 용(龍)이 물을 취하지 않았어도
큰물을 비 내리게 하며
그 물은 머무를 곳이 없으면서도
비를 내리게 함이 끝없듯이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 다라니를 얻는 것이며
모든 법은 머무는 곳이 없으면서도
이 반연으로 하는 말은 끝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법을 많이 들어 앎을 구해야 하고
구한 뒤에는 바르게 생각하며
법의 인연으로 부처님을 염(念)해야 하나니
법을 많이 들어 앎도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자비로 두루 중생을 덮어 주어
중생의 모양[相]을 흩어 없애고
모든 법의 모양도 없앨 것이니
법을 많이 들어 앎도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3) 불퇴품(不退品)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의 법이냐 하면, 보살은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어도 그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려야 하며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느니라. 보살이 이 첫째의 법을 성취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어도
그는 마음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리며
바로 법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느니라.

만일 공의 법을 들으면
언제나 그 이치를 구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가 더욱 자라며
부처님 도는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
그 이치를 구해야 하나니
이 때문에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지혜는 더욱 자라게 되느니라.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
잘난 체하는 마음에 따르지 않고
아첨하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그 마음을 일으키면 보리가 아니니라.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
그 이치를 알려고 해야 하며
먼저 비록 들은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일심으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사람은 법을 구할 때에
바른 법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면서
보리에서 물러나거나 잃지 않느니라.

모든 부처님을 뵌 뒤에는
곧 바른 질문을 하게 되나니
성문(聲聞)들은 그것을 듣고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면서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하여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구나.
우리들은 오히려 마음에조차 없었거늘
이런 일을 들을 수 있었겠느냐 하느니라.

성문들은 희유하다고 칭찬을 하고
천신(天神)들은 모두가 다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 이름을 찬탄하나니
이것이 바로 법을 많이 들어 앎의 과보이니라.

만일 어떤 이가 질문을 할 때에
부처님께서 그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한량없는 모든 대중들이
모두 큰 이익을 얻게 되느니라.

법을 많이 들어 아는 것으로
보살이 문답하는 것을 듣게 되면
한량없는 중생들이
위없는 법의 눈[法眼]을 얻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은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 믿어 받고 거역하지 않으며, 바른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부루나야, 과거 세상의 한량없고 그지없고 불가사의한 아승기겁 전에 그때에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명호는 일체공덕광명왕(一切功德光明王)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 세존(佛世尊)이었느니라.
부루나야, 이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께서는 수명이 80억 세였고, 그 부처님의 한 번의 법회에 모인 성문 제자로서 모든 법을 받지도 않고 번뇌가 다하여 해탈한 이의 수는 항하 모래알만큼 많아서 헤아릴 수 없었으며, 이 모든 아라한은
모두가 함께 해탈을 얻었고 보살들의 수도 역시 그와 같았느니라.
부루나야, 그 부처님께서 멸도한 후에 법은 6만 년 동안 머물렀으며, 열반하실 때에는 백억의 보살에게 법을 보호하게 하기 위하여 모두 신력(神力)을 주어서 백억의 염부제 안에 두루 배치하셨으므로 낱낱의 염부제에는 각기 한 보살씩이 있었느니라.
부루나야,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는 모든 제자들이 점점 모두가 게으름을 피우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깊은 경전을 외거나 지니지 않았으므로 모든 법이 공한 경전과 청정한 계율과 두타(頭陀)에 관한 경전들이 점차로 모두가 없어져 버렸나니, 그것은 읽고 외우고 연설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그의 법은 광대하여서 8백4만의 법장(法藏)이 있었고 그 낱낱의 법장에는 6천8백만 억 나유타의 수다라(修多羅)가 있었으며, 그 낱낱 수다라 안에는 3만 6천의 우다나(憂陀那)가 있었고 그 낱낱 우다나 안에는 7백6만 억의 게송이 있었느니라.
부루나야, 최후의 말세(末世)에 법이 소멸하려 할 때에는 이렇게 많은 부처님의 법장 가운데서 남은 것은 오직 한 수다라의 우다나만이 있었을 뿐이니라.
그때에 이 염부제 안에 나라연(那羅延)이라는 한 비구가 있었는데, 법을 보호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신력을 주셨느니라. 이 나라연 법사는 법을 많이 듣고 널리 알아서 설법을 잘하고 문장과 말씨가 아름다우며 이치가 명료하였는데 매양 늘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말하기 좋아하였느니라.
그가 설법할 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역하고 헐뜯었으므로 나라연 법사는 생각하기를 ‘이 모든 사람들은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서도 듣고는 믿지도 못하고 즐거이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따르지도 않으며, 들은 뒤에는 거역하고 헐뜯으면서 도리어 잘못이라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도 아니고 큰 스승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껏 스승이신 화상(和上)으로부터 그런 경전을 들은 일도 없고
또 여러 장로(長老) 비구도 그분들의 스승인 화상으로부터 내려오며 들었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오.≻라고 한다.
지금 모든 비구들에게는 오직 이 남은 하나의 수다라의 우다나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어찌 고요한 데로 가서 혼자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느니라.
부루나야, 나라연 법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혼자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렸느니라.
그때에 염부제 안에는 겁초(劫初)부터 6만 8천의 큰 성(城)이 있었고 그 성들의 길이는 12유순이며 넓이는 7유순이었느니라. 장엄하게 꾸며졌고 거리와 마을도 그러하였으며, 백성들은 가득 찼고 풍요하며 안온하였느니라. 그 뒤에도 계속하여 84억의 작은 성들을 만들었는데 어떤 것은 넓이가 7유순이기도 하고 혹은 6, 5, 4, 3, 2유순이기도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성은 넓이가 1유순이기도 하였느니라.
부루나야, 그때에 염부제 안에 이름이 안락(安樂)이라는 하나의 큰 성이 있었고, 그 안에는 사익(闍匿)이라는 한 장자(長者)가 살고 있었으며 그에게 마하내마타(摩訶耐摩陀)라는 한 아들이 있었느니라. 이 장자의 아들이 조용한 곳에 혼자 있는데 어느 한 하늘이 와서 게송으로 말을 하였느니라.

당신은 즐겨 법을 구하고
구한 뒤에는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공덕광명왕 여래께서는 이미
당신이 부처님이 되신다고 수기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루나야, 하늘은 게송을 말하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때에 장자의 아들은 곧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서 머리 조아려 발에 절하고 말하였느니라.
‘저는 출가하여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범행(梵行)을 닦아 익히려고 합니다.’
그러자 사익 장자는 게송으로 대답하였느니라.

우리 집에는 재보가 많아서
금과 은이 한량없으며
염부제 안에서 없는 것도
우리 집에는 모두 갖추고 있다.

내가 재보를 구함은
아들이 욕락(欲樂)을 누리게 하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출가하여서
세상의 업신여김을 받으려 하느냐?


그때에 장자의 아들은 게송으로써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느니라.

저는 항상 법을 구하고
구한 뒤엔 바르게 생각하기 좋아하며
부유함과 욕락은 좋아하지 않으니
장차 세간을 위하여 부처님이 되겠습니다.

가업(家業)과 재보는 필요가 없으니
저는 욕심을 적게 하면서
법의 재보를 구하기 위하여
이제 출가를 하여야겠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기 어렵고
부처님의 설법도 만나기 어려운 것인데
저는 이제 부처님 법을 만나게 되었거늘
어떻게 버리고 여읠 수 있으리까?

부루나야, 이때에 장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발 아래 절하고 돌고 난 뒤에 나오면서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설사 1억 분의 아버지가 계시고
100억 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하여도
제가 지금 출가하려는 마음을
오히려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몸과 목숨을 버리고
부모․친족․재보는 버릴 수 있으나
오직 불법만은 버릴 수 없으므로
기어이 출가를 하여야겠습니다.

부루나야, 그때에 장자의 아들은 이런 게송을 말한 뒤에 출가하여 도를 닦기 위하여 곧 나라연 법사에게 나아가서 법을 듣고자 하였느니라. 나라연 법사는 곧 그에게 전에 듣지 못했던 경을 연설하였다. 이때 마하내마타 비구는 전에 듣지 못했던 경을 듣고 나서 나라연 법사에게 물었다.
‘저는 이러한 경을 여태껏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은 누가 읽었고 누가 외웠으며 누가 받아 지녔습니까?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나라연은 말하였다.
‘나에게는 전생에 심은 선근(善根)의 인연 때문에 또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 때문에 이와 같은 깊은 경전이 저절로 마음속에 새겨 있느니라.’
부루나야, 이 마하내마타 비구는 이런 말을 들은 뒤에 마음을 더하여 생각하다가 지혜의 힘이 곧 생겼으며, 그 큰 지혜의 방편의 힘 때문에 나라연 법사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게 되었고 나라연 법사는 이치대로 대답하고 나서 말하였느니라.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 때에 어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이런 일을 물었는데 마치
그대가 지금 물은 것과 같았으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느니라.’
그러자 그때 이 비구는 이런 말을 듣고 나서 기뻐하였느니라.
부루나야, 이 마하내마타 비구는 다시 나라연 법사에게 물었고 나라연은 말하였느니라.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느니라.’
그러자 그때에 이 비구는 그런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였느니라.
부루나야, 그때에 마하내마타 비구는 나라연 법사에게 말하였느니라.
‘정사(正士)시여, 옛날 부처님으로부터 얼마만큼이나 이렇게 문답하는 일을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나라연은 말하였느니라.
‘그런 말은 묻지도 말라. 이런 일은 믿기조차도 어렵다. 다른 사람의 몸은 아직 뛰어난 법[增上法]을 증득하지 못했으므로 역시 믿기 어려우니라.’
두 번 세 번 역시 이렇게 묻다가 다시 마하내마타 비구가 말하였느니라.
‘정사께서는 옛날 부처님으로부터 얼마만큼이나 이렇게 문답하는 일을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나라연이 말하였느니라.
‘그런 말은 묻지도 말라. 그러나 마지못해 하는 수 없이 이제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들어 해설하리라. 모든 지혜 있는 이는 비유로 이해하게 되느니라. 비구여, 나는 일체공덕광명왕 부처님에게서 중생의 성품은 땅의 요소[地種]보다도 많다는 것을 들었느니라.
비구여, 가령 온갖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으로서 색계(色界)이건 무색계(無色界)이건, 유상처(有想處)이건 무상처(無想處)이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이건 간에 그 수를 모두 다하여 사람의 몸이 되고 지혜의 힘이 있게 하고는 그 낱낱의 중생들이 손가락을 퉁기는 한 동안에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으며 그것도 묻는 바가 각각 같지 않은 질문을 한다고 하자.
비구여, 이렇게 차츰차츰 빠짐없이 시방세계의 온갖 중생들까지 1겁 동안 또는 1겁 이상 질문을 하며, 다시 어느 한 사람이 손가락을 튀기는 한동안에 그러한 많은 사람의 각각 서로 다른 모든 질문을 한꺼번에 하고
이 한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이 다시 온갖 중생들이 빠짐없이 1겁 동안 또는 1감겁(減劫) 동안 갖가지의 질문을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제기한 질문들이 과연 많다 하겠는가?’
그러자 대답하였느니라.
‘심히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자 나라연은 마하내마타 비구에게 말하였느니라.
‘나는 이제 너에게 분명히 말하겠으니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말라. 마치 저 중생들이 빠짐없이 1겁 동안 아니 1감겁 동안 제기했던 의문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느니라. 하나의 법문 중에는 대답하신 바가 그보다도 더 많았으며 이와 같이 하여 둘의 법문 아니 3, 4, 5의 법문과 10, 20, 30, 40, 50 내지 백천만 억의 법문도 그러하였느니라.
비구여, 나는 모든 산수(算數)의 이름으로 간략하게 설명하였지만 한량없고 그지없고 불가사의한 이보다도 더한 수를 나는 모두 외워 지녔느니라.
비구여, 이 모든 대답은 모두 다 하나의 법문 안에 통틀어 있음을 나는 모두 알고 있나니, 이른바 일체공덕광명왕 여래께서는 이 도의 구절[道句]과 문의 구절[門句]과 도장의 구절[印句]과 본사의 구절[本事句]과 금강의 구절[金剛句]과 중한 구절[重句]과 동요할 수 없는 구절[不可動句]과 얻기 어려운 구절[難得底句]을 말씀하셨느니라.
비구여, 하나의 문 안에는 온갖 법을 포섭하고 있나니 지음이 없는 문[無作門]이 그것이니라. 모든 법과 모든 구절은 이 문을 근본으로 삼아 모두 이 문으로 들어가고 수다라와 우다나도 모두 이 문의 구절에 들어가며 따로 나누어진 하나의 글자에도 여러 글자가 들어갈 수 있느니라.
비구여, 이와 같이 하여 7만 8천의 모든 다라니가 들어가느니라. 이 안에는 9만 2천의 모든 근(根)의 차별이 있고 이 중생이 행한 문[行門] 안에는 8만억의 형색(形色)이 있으며 모든 길[道]에 차별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형색에 대하여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낱낱의 형색 안에서도 나는 백 가지의 이름을 알며, 이렇게 하여 2백 가지의 이름,
3백 가지의 이름 내지 1천 가지의 이름도 아느니라. 모두 염부제 안에 있는 아니 더 나아가 시방의 불국토 안에 있는 각각의 인연과 각각의 이름들도 나는 다 알 수 있느니라.
요약하여 말하건대, 부처님께서 지니고 계신 힘에서 모든 법 안에서의 각각의 차별과 문답하신 차별들을 나는 모두 다 아나니, 이것은 모두가 일체공덕광명왕 여래의 위신력 때문이니라.’
부루나야, 그때에 마하내마타 비구가 나라연 법사에게 말하였느니라.
‘원컨대 정사여, 도로 마을과 성읍(城邑)으로 나아가셔서 일체공덕광명왕 여래의 법륜(法輪)을 굴려주십시오. 저의 청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저는 마땅히 호위하면서 법을 받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러자 나라연이 말하였느니라.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지금 세상의 비구들은 모두가 다 게을러서 선(善)을 쌓는 법에 깊은 의욕이 없느니라.’
마하내마타가 다시 말하였느니라.
‘저는 오늘부터 선법(善法)에 대하여 깊은 의욕을 내겠으며 이 법을 구하기 위하여 감히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부루나야, 마하내마타 비구는 곧 나라연에게 청하여 도로 마을로 들어가서 바른 법을 설하게 하면서 그를 따라 호위하며 아직 듣지 못했던 법을 묻고 들었느니라.
부루나야, 그 때의 마하내마타 비구는 여러 사람들에게 공양과 공경을 받았으며 그 때의 사람들은 모두가 계율을 지니고 지혜 있고 법을 많이 들어 아는 가장 으뜸가는 공덕이 한량없는 이로 여겼느니라.
마하내마타 비구는 성읍과 마을로 들어가서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법에 들어가고 또 불법이 널리 유포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나라연 법사를 칭찬하고 다녔느니라.
부루나야, 이때 마하내마타 비구는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법을 듣게 하려고 법을 공양하게 하고 나라연 법사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게 하면서 수호하였느니라.
부루나야, 그 후에 나라연 법사는 마하내마타 비구의 수호를 받으면서 성읍과 마을로 들어가서
갖가지로 일체공덕광명왕 여래께서 아승지겁 동안 닦으셨던 보리를 널리 말하여 주며 두루 유포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면서, 부루나야, 마하내마타 비구는 100년 동안을 늘 나라연 법사를 따라다녔는데 묻는 바의 모든 법은 언제나 새롭고 다른 것이었으며 거듭 묻는 말이 없었느니라.
부루나야, 나라연 법사는 이 마하내마타 비구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성인의 법 안에 머무르게 하였고 한량없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보리에 머무르게 하였느니라.
부루나야, 그때에 나라연 법사로서 법을 수호하고 설법을 잘한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느냐? 바로 지금의 미륵(彌勒)보살이 그이니라.
부루나야, 마하내마타 비구는 법사를 수호하고 도우면서 권하고 청한 이 복덕의 힘으로 목숨을 마친 뒤에는 곧 하방(下方)의 열 번째 세계의 상중불(上衆佛) 처소에 태어났고, 그 부처님 앞에서『단일체중생의경(斷一切衆生疑經)』을 물었으며, 그 부처님께서는 백천 번 ‘장하다’고 칭찬하시고 곧 그에게『단일체중생의경』을 널리 연설하셨느니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는 한량없는 중생들이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이내 필정(必定)에 들어갔느니라.
부루나야, 마하내마타 비구는 목숨을 마친 뒤에 다시 수미산불(須彌山佛)을 만났고 그 부처님 앞에서『섭출일체법경(攝出一切法經)』을 물었으며 그 부처님께서는 그를 백천 번 ‘장하다’고 칭찬하시고, 곧 그에게『섭출일체법경』을 널리 연설하셨느니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는 한량없는 중생들이 필정(必定)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또 목숨을 마친 뒤에는 다시 산왕불(山王佛)을 만났고 그 부처님 앞에서 『일체법문경(一切法門經)』을 물었으며, 그 부처님께서는 그를 백천 번 ‘장하다’고 칭찬하시고, 곧 그에게『일체법문경』을 널리 연설하셨느니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필정(必定)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또 목숨을 마친 뒤에는 다시 범음성불(梵音聲佛)을 만났고 그 부처님 앞에서 『섭일체법문경(攝一切法經)』을 물었으며, 그 부처님께서는 그를 백천 번 ‘장하다’고 칭찬하시고, 곧 그에게『섭일체법경』을 널리 연설하셨느니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한량없는 중생들이 필정(必定)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부루나야, 마하내마타 비구가 이렇게 점차로 모든 부처님을 만난 뒤에 경을 묻고 제도한 중생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게 한 일 등을 내가 1 겁 동안 아니 1겁이 지나도록 그 모든 부처님의 명호와 중생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게 된 이를 설명한다 하여도 다할 수 없느니라.
부루나야, 이 마하내마타 비구가 무릇 보호하고 지닌 바의 모든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으며 이 모든 부처님께서는 지금 현재 세상에 계시기도 하고, 또는 이미 열반하시기도 하셨으니,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이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듣고 그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와 같은 등의 큰 공덕과 이익을 얻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부루나야, 너는 그때에 나라연 법사에게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듣고 그 이치에 따른 마하내마타 비구란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느냐? 바로 지금의 교월도(橋越兜)보살이 그이니라.
그때에 마하내마타 비구가 바른 법을 수호하면서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듣고 그 이치에 따르면서도 언사(言辭)에 집착하지 않았던 그 인연 때문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났고 만난 뒤에는 모든 깊고 묘한 경전을 들었으며, 그 옛날에 심은 선근의 인연 때문에 지금은 나에게서 역시『섭일체법대해법문경(攝一切法大海法門經)』을 물은 것이요, 내가 그를 위하여 연설할 때에도 한량없는 중생들이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일을 거듭 밝히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이 전에 듣지 못했던 일을 들으면
마땅히 그 이치를 생각하여야 하며
나는 옛날에 들은 일이 없었다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으면
바른 생각으로 그 이치를 생각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는 더욱 자라서
마치 바다가 뭇 흐름을 받아들임과 같으니라.

법을 많이 들어 앎이 더욱 왕성해지면
지혜도 역시 그렇게 되며
모든 부처님께 일을 물을 수 있어
널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느니라.

법을 많이 들어 앎을 쌓아 바다와 같아지면
그 지혜는 다할 수 없게 되며
글의 장(章)과 구(句)를 잘 알게 되므로
서로 다른 것 안에서 첫째가느니라.

이 때문에 마땅히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들어야 하며
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구하면
이러한 과보를 얻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은 불법을 많이 들어 앎을 구하는 데에 깊이 의욕적인 마음을 내고 고요한 곳을 아주 좋아하면서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며, 구한 뒤에는 성냄을 끊기 위하여 자비관(慈悲觀)을 닦고, 탐욕을 끊기 위하여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며, 어리석음을 끊기 위하여 인연관(因緣觀)을 닦느니라.
부루나야, 어떤 것이 보살의 정진(精進)이며 보살은 어떻게 정진을 닦아 익히는가 하면, 부루나야, 만일 어떤 보살이 1겁 또는 감(減) 1겁 동안에 다니거나 앉거나 간에 항상 정진을 일으킨다면, 부루나야, 이와 같은 것은 진실한 정진이라 하지 않느니라.
또 어떤 보살이 1겁 또는 감 1겁 동안 청정한 계율을 수행하고 행하기 어려운 행을 애써 행하며 두타(頭陀)를 두루 갖추며 반연할 바의 일에 따라 깊이 의욕을 내면서 모든 법의 참모습[實相]을 여의면 이와 같은 것도 진실한 정진이라 하지 않느니라.”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느 것이 보살의 진실한 정진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세속의 지혜 있는 이가 헐뜯고 싫어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전에 듣지 못했던 것에 대하여 마땅히 깊이 법을 비워서
조그마한 모양도 없이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에 부합시켜야 하고, 이와 같은 깊은 경전에 어기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그 이치를 분명하게 알며,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켜 마음이 물러나거나 침몰하지도 않으면서 듣고 받들고 읽고 외우며 사람들을 위해 해설하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정진이라 하느니라. 이를테면 깊은 경전을 듣고 그 이치를 통달하면서 어기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으면 이와 같은 정진은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바요, 세간의 지혜 있는 이도 꾸짖을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부루나야, 보살은 이와 같은 장엄(莊嚴)을 일으켜야 하나니, ‘세간의 중생이 근본[底]을 얻지 못한다 해도 나는 여기에서 그 근본을 다하여야 하고, 세간의 중생이 침몰할 수 있는 곳이라 해도 나는 여기에서 침몰하지 않아야 하며, 세간의 중생이 두려워할 만한 곳이라 해도 나는 여기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장엄을 일으켜 세간과는 영합하지 않는 것은 세간의 법을 여의기 위하여 장엄을 일으키는 것이요, 세간의 법을 행하기 위하여 장엄을 일으키지 않고 세간의 법을 행하지 않기 위하여 장엄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간의 법을 따르기 위하여 장엄을 일으키지 않고 세간의 법을 굴리기 위하여 장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진실한 정진이라 하나니, 보살이 이 둘째의 법을 성취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뜻을 환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깊은 법을 구하면서
항상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며
그 이치를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음성을 따르지 않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말을 따르지 않으면서
모두가 그것은 거짓임을 알며
모든 법이 공함을 아는 까닭에
다만 착한 말을 구할 뿐이니라.

만일 천만 억의
한량없는 겁 동안
밤낮으로 언제나 가고 앉고 하면서
마음을 더하여 고행을 하여도
아직껏 듣지 못했던 경전에 대하여
믿지 않으면 이는 정진이 아니니라.

깊은 이치의 근본[底]을 얻으면

게으른 이라고 하지 않으며
이와 같이 정진을 하면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느니라.

세간에서는 근본[底]을 얻지 못하여도
보살은 그 근본을 얻어야 하고
세간에서 두려워하고 침몰하여도
보살은 두려워하거나 침몰하지 않느니라.

부지런한 마음으로 언제나
공적(空寂)하고 참으로 묘한 법을 구하려 하면
공한 법 안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또한 물러나거나 침몰함이 없겠지만
나의 모양과 법의 모양에 머무르기 때문에
두려움과 침몰함이 생기느니라.

온갖 법을 흩어 무너뜨림을
보리의 도[菩提道]라고 이름하나니
부지런한 마음으로 정진을 일으켜
많이 들어 앎의 바다[多聞海]를 속히 이루라.

“또 부루나야, 보살은 5음(陰)을 잘 알고 12입(入)을 잘 알며 18계(界)를 잘 알고 12인연(因緣)을 잘 알 것이니, 5음과 12입과 18계와 12인연을 잘 알기 때문에 의지함이 없는 지혜[無依止智]를 성취하게 되느니라. 의지함이 없는 지혜를 얻기 때문에 온갖 법에 대하여 기억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기억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면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므로 온갖 소견을 깨뜨려 몸에 대한 소견[身見]을 제거하게 하느니라. 보살이 이 셋째의 법을 성취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5음과 12입이
모두가 공한 것임을 알고
18계를 분별하며
12인연을 통달할 것이니라.

5음을 따르지 않으면서
몸은 바로 거짓임을 알아야 하며
모든 안팎의 입(入)에 대하여도
모두 그 성품이 공한 줄 알지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고
안 뒤에는 남들에게 설하나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지혜가 더욱 높아지고 커지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은 결계(結戒)한 그대로 설계(設戒)한 것을 잘 따라 배우면서 빠뜨리거나 범함이 없을 것이니라. 어떤 것이 보살이 계율을 배우는 것이냐 하면,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보살이 계율을 배우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부루나야, 보살이 온갖 법을 배우면 온갖 법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
이 법의 지혜로써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慧]를 얻고 이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온갖 일을 알게 되느니라. 어떻게 온갖 일을 아느냐 하면, 보살의 온갖 안의 일과 바깥의 일과 안팎의 일을 모두 아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무엇 때문에 안[內]이라 하느냐 하면, 안이라는 이름은 무릇 모든 탐착(貪着)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곳이어서 바로 안의 몸[內身]이니, 12인연으로부터 생기느니라. 이 안에서는 다만 세속에서 붙인 이름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 이 눈[眼]이라는 것과 이 귀[耳]라는 것과 이 코[鼻]라는 것과 이 혀[舌]라는 것과 이 몸[身]이라는 것과 이 뜻[意]이라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안이라 하느니라. 이 법은 범부가 탐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이라 하나니, ‘나는 이러한 눈을 얻고 그러한 눈은 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귀․코․혀․몸․뜻을 얻고 그러한 귀․코․혀․몸․뜻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안에서는 다만 일으킨 바의 업연(業緣)으로써 과보가 있으면서 생겼을 뿐이니, 이 때문에 안이라 하느니라. 그 안에서의 차별은 범부가 탐착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눈이다. 이것은 귀․코․혀․몸․뜻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 모두를 안이라 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안[內]을 둘[二]이라 하는데 이런 일은 거짓이요, 속이는 것인데도 모든 범부들은 탐착하고 받아 가지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여래는 이것에 대하여 본래부터 사실대로 알아서 탐착하지 않느니라. 어떻게 여래는 사실대로 알아서 탐착하지 않는가 하면, 여래는 이런 법 안에서 따라잡지 않는 것이니, 무엇을 따라잡지 않는가 하면 바로 애결(愛結)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 눈을 따라잡지 않으므로 눈을 여의면서 따라잡지 않으며 귀․코․혀․몸․뜻을 따라잡지 않으므로 귀 내지 뜻을 여의면서 따라잡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부루나야, 여래는 법에 있어서 안을 얻지도 않고 바깥도 얻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이런 법에 대하여 따라잡지 않느니라. 여래는 바로 진실한 말을 하는 이라 말하나니, ‘비구들의 눈은 너희들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본 체성(體性)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어느 법이 눈이고 이 눈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어느 법이 귀․코․혀․몸․뜻이고 이 귀와 나아가 뜻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 속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본래의 체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부루나야, 눈이란 것을 이제 분별하고 따지면서 추검(推檢)하여 보아야 하고 귀․코․혀․몸․뜻도 이제 묻고 따지면서 추검하여 보아야 하느니라. 법에서는 탐하고 받아들일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만일 받아들이는 법이 있으면 고뇌가 생기고 고뇌가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루나야, 법에 대하여 받아들임이 있으면 모두 고뇌를 받아들이게 되고 만일 고뇌를 받아들이면 고통을 여의지 못하게 되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눈에 대하여 캐고 따지면서 추검한다고 하고, 귀․코․혀․몸․뜻에 다하여 분별하고 따지면서 추검하여 들어가는 곳[入處]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부루나야, 만일 들어가는 곳이 있다면 나오는 곳[出處]도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경 안에서 말하기를 ‘눈 이것은 공하고 나와 내 것이 없나니 본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였나니, 이 성품은 성품이 없고 이와 같이 성품이 없기에 지음[作]도 없고 파괴됨[壞]도 없느니라.
부루나야,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은 모든 부처님께서 출생하셨거나 출생하지 않으셨거나 이 성품은 항상 머무르는 것이니, 여래는 모든 법의 생김에 대하여 이것은 생기지 않은 것으로 아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진실된 말씀을 하는 이라 말하거니와 ‘부처님이 출생하셨거나 부처님이 출생하지 않으셨거나 이 성품은 항상 머무른다[常住]’고 하느니라.
부루나야, 어떤 것을 생김이 없다[無生]하고 어떤 것을 생김이 없는 지혜[無生智]라 하는가 하면, 부루나야, 모든 법이 평등한 것을 생김이 없다 하고 도(道)를 생김이 없는 지혜라 하며, 괴로움이 다함[苦盡]을 생김이 없다 하고 도를 생김이 없는 지혜라 하느니라. 이것을 바로 여래가 두 가지 진리[二諦]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니, 세속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그것이니라.
부루나야, 여래가 말한 괴로움의 모양[苦相]이라 함은 곧 모양이 없음[無相]을 말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괴로움의 모양이라 하는가 하면, 그것은 무위의 모양[無爲相]인 것이니, 무위인 그것이 곧 모양이 없는 것이니라. 지혜가 있는 이는
무위가 바로 모양이 없음임을 아느니라.
부루나야, 지혜 있는 이가 어떻게 무위가 바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아는가 하면, 곧 무위법은 공임을 알고 그것은 고요히 사라진 것[寂滅]임을 알며, 그것은 귀의할 곳[歸處]임을 알고 첫째가는 이익임을 알며 뜨거운 번뇌가 없음을 아느니라. 지혜 있는 이는 이렇게 무위를 알며 이 지혜 안에서도 역시 모양이 생기지 않느니라.
부루나야, 지혜 있는 이는 모든 모양을 여의면서 제일의(第一義)의 이익을 얻어 조작함도 없고 파괴됨도 없느니라.
부루나야, 만일 사람이 조작함이 있으면 곧 그것은 파괴되며, 만일 조작함이 없으면 파괴됨도 없느니라. 파괴됨이 없는 모양이 바로 공이요 파괴됨이 없는 모양은 바로 모양[相]이 없으며 파괴됨이 없는 모양은 바로 원(願)도 없느니라.
부루나야, 공한 법은 어떤 사람의 조작도 없고 어떤 사람의 파괴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원도 없으면 어떤 사람의 조작도 없고 어떤 사람의 파괴도 없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파괴되지 않는 모양[不壞相]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하면 모든 여래가 얻지 못할 바[所不得]의 그것이니라.”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이 바로 모든 여래께서 얻지 못할 바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이 모든 여래께서 얻지 못할 바이니라.”
“세존이시여, 그 때문에 온갖 법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보리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부루나야, 온갖 법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보리이니라. 그러나 이 보리를 온갖 법이라고 하지 않나니, 온갖 법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보리라고 말함은 다만 세속에서 이름과 말을 빌어서 말한 것일 뿐이니, 정진하지 않은 이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정진하지 않은 이는 모든 법의 평등함을 닦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니, 만일 평등하지 않으면 부처님과 다투게 되느니라.
부루나야, 어떠한 사람들이 평등함을 수행하지 못하느냐 하면, 부루나야 모든 세간은 평등하지 못함을 행하니 모든 부처님의 보리 안에서는 평등함도 없고
평등하지 않음도 없느니라.
부루나야, 나는 이 도(道)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이 인연 때문에 나는 경 안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바른 자리[正位] 안에서 모두가 필정(必定)에 든다’고 하였나니, 이것을 필정하여 보리의 문(菩提門)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부루나야, 온갖 법은 모두가 보리이니라.”
그때에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또한 일정하기도 하고 일정하지 않기도 하며, 또한 문자에 들어가기도 하고 문자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며, 또한 언어에 들어가기도 하고 언어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나이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부처님으로부터 이 경전을 설하심을 듣고 모든 법 가운데서 결정된 광명을 널리 얻었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이와 같이 모든 법 가운데서 결정된 광명을 얻어 하나의 일 안에서 온갖 일을 알고 온갖 일 안에서 하나의 일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부루나를 칭찬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부루나야, 너는 그와 같이 빨리도 모든 부처님의 온갖 법의 이익에 들어가게 되었구나. 너는 이미 일찍이 과거의 세상에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고 모든 선근을 심었으며 가까이 하여 물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부루나야, 나는 기억하건대 과거 세상에 이 토지의 허공이 있는 가운데서 너는 이미 일찍이 6만 8천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이 경을 얻어 들었나니, 이 선근 공덕의 인연으로 너는 모든 법에서 결정된 광명을 두루 얻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제가 이미 그 많은 부처님에게서 이 경을 얻어들었다면 저는 어째서 한 생각 동안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억하건대 과거의 세상에 너는 일찍이 1겁 동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으나 다른 마음을 여의지 못하여 도로 물러나게 되었느니라.
이 복덕의 인연으로써 나는 이제 너에게 모든 법사(法師) 중에서 맨 첫째라는 것을 말하느니라.”
부루나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본래 무슨 죄장(罪障)을 지었기에 1겁 동안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다가 도로 물러나 잃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나쁜 벗을 따르면서 의지했기 때문이요, 또 널리 법을 유포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에서 도로 물러나고 잃게 되었느니라.
부루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 성문승(聲聞乘)이 되는 네 가지의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이 나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선근을 더욱 싫어하고 멀리 여의게 되는데, 그는 말하기를 ‘이렇게 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고 죽고 하는 것이 길고도 멀고, 고뇌는 한량없어서 5도(道:세계)를 가고 와서 재난이 없음을 만나기 어렵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기도 어려우며 청정하게 믿는 것도 다시 어렵다. 비록 부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출가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대는 지금 재난이 없음을 만나게 되었다면 다시는 잃지 말라. 그대는 모든 부처님에게서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授記)도 얻지 못했고 선근도 아직 정해지지 못했으며 열반도 얻지 못하여 5도(道)를 윤회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이 곧 물러나게 되고 보리의 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에게 이런 첫째의 법이 있게 되면 보리에서 물러나 성문승을 이루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이 상응(相應)한 보살 경전을 듣지 않는 것이니, 이를테면 보살장경(菩薩藏經)과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는 경[發菩薩心經]과 보살의 일을 포섭하는 경[攝菩薩事經]과 6바라밀에 상응한 경[應六波羅蜜經] 등이 그것이니라. 이러한 경을 듣지 않기 때문에 말씀한 대로 행하지 못하고 말씀한 대로 배우지도 못하나니, 이 사람은 보살로서 ‘어느 법은 가까이해야 하고 어느 법은 멀리 여의어야 할 것인가? 어느 법은 받아야 하고 어느 법은 받지 않아야 할 것인가? 어느 법이 바로 보살의 법이고 어느 법이 성문의 법인가?’를 모르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알지도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가까이 해야 할 법에서는 가까이 하지 못하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법에서는 도리어 가까이하게 되나니, 이 사람이 가까이해야 할 법에서 가까이 하지 못하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법에서는 친근하기 때문에 곧 모든 부처님의 보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마음이 약해져서 게으름을 피우게 되며 본래의 서원을 버리게 되느니라.
부루나야, 보살이 이 둘째의 법이 있게 되면 보리에서 물러나고 성문승을 이루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이 모든 법을 헤아려 얻으면서 나에 탐착하고 삿된 소견을 행하며 치우친 소견[邊見]에 떨어지고 나쁜 소견에 빠져 있는지라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며, 깊은 경전과 상응한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를 얻어들어도 조그마한 모양도 있지 않아 거역하면서 믿지 않고 통달하지도 못하며 법을 파괴하는 죄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재난이 있는 곳에 태어나고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며 법을 얻어듣지도 못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법도 만나지 못하고 선지식(善知識)도 만나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은 부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듣지 못하고 법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을 만나지도 못하며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선지식을 만나지도 못하고,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재난이 없는 곳을 잃으며 재난이 있는 곳에 태어나며, 재난이 있는 곳에 있게 되기 때문에 선지식을 여의고 나쁜 벗을 만나게 되고 나쁜 벗과 함께 종사하기 때문에 본래의 생각을 잃게 되느니라.
이 사람은 본래의 생각을 잃기 때문에 보살의 마음을 버리게 되고 보살승(菩薩乘)을 버리면서 곧 물러나게 되며, 영원히 보리에 대한 생각을 잃고 다만 나고 죽는 법만을 행하여 대승이 행하는 법을 닦아 익히지 못하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이 이 셋째의 법이 있게 되면 보리에서 물러나 성문승을 이루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들으면서도 깊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지도 못하고 그 마음이 물러나면서 혼자 행하기만을 즐기며
법에 인색하여서 말하여 주려는 마음이 없고 법으로써 널리 사람들을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선근이 아닌 인연 때문에 지혜로운 생각을 잃게 되고 지혜로운 생각을 잃은 뒤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법을 읽고 외지 않으며 법으로써 다른 이와 같이 하지를 못하게 되므로 이 사람은 몸을 바꾸면서 보살의 마음을 잃게 되고 보살로서의 생각을 잃어버리느니라.
부루나야, 보살이 이 넷째의 법이 있게 되면 보리에서 물러나 성문승을 이루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일을 환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게 되면
보리에서 게으르게 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으뜸가는 보리의 마음을 잃는 것이니라.

매우 나쁘게 나라는 소견을 내고
치우치며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법을 파괴하는 죄를 일으키면
재난이 있는 곳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재난이 있는 곳에 태어난 뒤에는
곧 보리의 마음을 끊게 되고
본래의 기억을 잃게 되나니
이 때문에 보리를 잃는 것이니라.

이 사람이 얻어듣지 못하였는데도
보리 마음의 법을 내면
이 사람은 더욱더 자라나서
보리를 능히 이루게 되느니라.

광대하고 미묘한 법을 얻었으면서도
아끼면서 말하려고 하지 않으면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에서 물러나고 잃게 되느니라.

대승(大乘)을 구하는 보살은
이 네 가지의 법을 알아야 하며
만일 이 네 가지의 법을 알면
보리는 그로부터 생기게 되느니라.

이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나쁜 법은 멀리 여의어야 하고
부지런히 공한 법을 수행하면
선지식을 만나고 가까이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은 경전을 얻은 뒤에는
마땅히 인색하지 않아야 하며
부지런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말하면
이로부터 보리가 생기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보리에 따라 회향(廻向)하면서 마음이 물러나거나 잃지 않고 모든 선근에 따라 회향하면서 역시 물러나거나 잃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은 계율을 지니면서 청정하게 기억하고 존재하는 기억[有念]을 성취하여 지혜에 편안히 두며, 부지런한 마음으로 정진하면서 게으르지 않고 법을 많이 들어 앎을 성취하여 지혜를 내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에게 이 네 가지 법이 있게 되면
보리에 따라 회향하면서 마음이 물러나거나 잃지 않고 모든 선근에 따라 회향하면서 역시 물러나거나 잃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이치를 환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계율을 갖춰 지니고
기억하는 바가 깊고도 멀며
부지런한 마음으로 정진해야 하며
법을 많이 들어 앎으로 지혜를 장엄하느니라.

보살이 언제나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가까이하면
마음으로 일으키는 일마다
모두 잘 성취하게 되느니라.

이 때문에 언제나
깨끗한 계율을 지니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며
기억하는 법을 끊지 않고
항상 힘써 많은 견문을 구해야 하느니라.

계율을 지니면 태어나는 곳이 청정하고
기억은 지혜를 청정하게 하며
정진은 불법을 청정하게 하고
법을 많이 들어 앎은 큰 지혜를 내게 하느니라.

이 때문에 모든 보살은
이 으뜸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으뜸가는 법을 배운 뒤에는
위없는 법륜(法輪)을 굴려야 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에게는 보리에 이익되게 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계율을 지니면[持戒] 바로 보리의 법에 이익되고, 인욕(忍辱)하면 바로 보리의 법에 이익되며, 정진(精進)하면 바로 보리의 법에 이익되고, 법을 많이 들어 앎[多聞]이 바로 보리의 법에 이익되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보리에 이익되는 네 가지 법이라고 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이치를 환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이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면
보리에 이익이 되나니
인욕과 정진과
법을 많이 들어 앎 역시 그러하느니라.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는 이는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되고
계율이 청정하면 이익이 많으며
보리도 이룸이 어렵지 않느니라.

보살이 인욕을 행하면
상호[相]와 지혜가 이루어지나니
그러므로 인욕을 행하면서
부처님의 상호와 지혜를 구해야 하느니라.

정진도 또한 보리에
이익이 많게 되는 것이므로
항상 정진을 행하는 이는
보리에 곧 어렵지 않으리라.

불법을 많이 들음도 역시 이익이 되나니
들은 뒤에는 법을 가까이할 수 있고
법이 아닌 것을 멀리 여의므로
보리에 곧 어렵지 않느니라.

네 가지 법이 종자가 되어

이로부터 보리가 생기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은
이 이익되는 법을 가까이해야 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몸의 빛깔이 두루 갖추어지고 재물이 두루 갖추어지고 권속이 두루 갖추어지며, 마침내 언제나 모든 악하고 재난이 있는 곳에는 태어나지 않으며,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고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보살이 자비를 행하여 성을 내지 않고 온갖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무엇을 보살이 자비를 행하여 성을 내지 않고 온갖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하는가 하면, 보살은 자비를 행하여 모든 중생에 대하여 ‘나는 구하리라’라는 자비를 일으켜 모든 중생들의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는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여 이런 중생을 제도하리라. 나고 죽음의 고통을 겪는 이 중생들에게 나는 즐거움을 주리라. 나는 구제하여 나고 죽는 고통을 여의게 하리라’라고 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 뒤에는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면서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 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은 반야(般若)바라밀로 인하여 6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게 되나니, 어떤 것을 보살의 반야바라밀다라 하고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다로 인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느냐 하면, 부루나야,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어떤 법을 나[我]라 하고 어떤 법을 내 것[我所]이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헤아릴 때에 그것이 나라는 법을 볼 수가 없고 그것이 내 것이라는 법을 볼 수가 없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니라.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이 법 안에서는 나라는 법이 없고 내 것이라는 법이 없느니라. 보살은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몸이 공함을 알고 몸이 공하기 때문에 중생도 공하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 안에는 나와 내 것조차도 오히려 공하거늘 하물며 중생이겠느냐?
보살은 이와 같이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중생이 공함을 알고, 중생이 공하기 때문에 물질의 쌓임[色陰]이 공함을 알며
물질의 쌓임이 공하기 때문에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의 쌓임[識陰]이 공함을 아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몸이 공함을 알고, 몸이 공하기 때문에 중생이 공함을 알며, 중생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쌓임의 공함을 알고 모든 쌓임이 공하기 때문에 요소[種]도 역시 공함을 아나니, 땅[地]․물[水]․불[火]․바람[風]․허공(虛空)․의식[識]의 요소가 그것이니라. 땅의 요소[地種]와 땅의 요소의 모양[地種相]이 공하고, 물․불․바람․허공․의식의 요소와 물에서 나아가 의식에 이르기까지의 요소의 모양도 공하나니, 이 요소는 짓는 이도 없고 짓게 하는 이도 없느니라. 만일 짓는 이가 없으면 그 법은 곧 공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은 이것에서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몸이 공함을 알고, 몸이 공하기 때문에 중생이 공함을 알며, 중생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쌓임이 공함을 알고, 모든 쌓임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요소의 공함을 알며, 모든 요소가 공하기 때문에 모든 감관[入]이 공함을 알고, 모든 감관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감관의 모양도 공하나니, 모든 감관은 짓는 이가 없고 짓게 하는 이도 없느니라. 만일 법에 짓는 이가 없고 짓게 하는 이가 없다면 그 법은 곧 공이니라.
부루나야, 보살은 이로써 온갖 법의 공함을 관찰하며 온갖 법의 공함을 관찰할 때에는 모든 법의 본체(本體)에서 성을 낼 만한 곳을 보지 못하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대자(大慈)라 하며, 몸이 공한 대자와 중생이 공한 대자와 쌓임․감관․요소가 공한 대자를 아는 것이니,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은 대자를 행할 수 있으면 이것을 온갖 법이 공한 대자를 행한다 하느니라.
부루나야, 이것을 보살이 대자(大慈)를 행한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은 나와 내 것을 여의고 마음으로 매우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는 것이며, 만일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참 모습[實相]을 알지 못하면 알게 하기 위하여 큰 장엄(莊嚴)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이 대비를 행한다고 하느니라.
나 자신이 구제하기 때문에 자(慈)라 하고, 나 자신이 짓기 때문에 비(悲)라 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대자를 성취하면
중생들을 위한 구제자가 되어 주고 귀의처가 되어주고 집[舍]이 되어 주고 섬[洲]이 되어 줄 수 있으며 마지막[究竟]이 되어 줄 수 있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이와 같이 대자를 수행하면서 중생에 탐착하지 않고 또한 성을 내거나 원한을 품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것을 보살 중생이 공한 대자로써 성을 냄이 없다고 하느니라.
부루나야, 만일 보살이 자(慈)로 인하여, 여읨[離]으로 인하여, 공(空)으로 인하여 온갖 모든 법의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음[不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항상 대자(大慈)를 행한다 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통달하면 모든 악마와 악마의 백성과 그 악마의 심부름꾼이 모두 깨뜨릴 수 없나니, 보살이 이 첫째의 법을 성취하면 온갖 공덕 안의 속박을 끊을 수 있고 공덕의 속박을 끊기 때문에 평등한 바라밀을 얻는 것이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일을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언제나 이와 같이
인자함을 닦으면서 공함을 관찰하여
5음․6입․18계의 여읨을 아나니
이 가운데에는 나가 없느니라.

나와 내 것의 두 가지 법은
결정코 얻을 수 없나니
얻지 못하는 모든 법을 위하여
인자한 마음을 수행하느니라.

모든 법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모든 부처님의 도에서
모든 의지하지 않는 법이라 하느니라.

위없는 법인(法忍)을 얻어
모든 법의 참 모습에 머무르면
모든 법에는 생멸(生滅)이 없다는
그 이치를 잘 통달할지니라.

모든 지혜가 있는 이는
이 법을 가까이하므로
언제나 묘한 몸의 빛깔을 얻으며
또한 요설변재(樂說辯才)를 얻느니라.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고
모든 법의 의리(義利)를 얻나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위가 없는 도(道)를 얻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은 부지런히 힘쓰면서 모든 부처님과 탑과 절에 공양하는 것이니, 공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꽃과 향과 영락과 바르는 향․가루향․번기․일산 및 음악 등의 갖가지의 공양 거리로써 공양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 둘째 법을 성취하면 온갖 공덕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훌륭한 공양거리로써
으뜸가는 지혜 지닌 이와 탑에 공양하며
꽃과 향과 번기와 일산으로써
으뜸가는 지혜를 구하느니라.

이러한 공덕의 인연 때문에
받은 몸은 언제나 단정하고
재물이 넉넉하며 보물도 많고
권속도 갖추어 성취하게 되느니라.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항상 법에 편안히 머무르며
태어나서 있을 적마다
공덕은 더욱 높아지고 더하느니라.

모든 왕에게는 공경을 받고
하늘과 용과 신(神)은 항상 기억하며
모든 중생들도
함께 공경할 것이니라.

만일 사람이 부처님께 공양을 하면
현재 또는 죽은 후에
태어날 적마다 공양을 얻고
항상 재난이 없는 곳에 있게 되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이 언제나 부지런한 마음으로 법(法)에 공양하느니라. 무엇을 법이라 하고 무엇을 공양한다 하는가 하면, 법이란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4선(禪)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성도(聖道)와 지(止)․관(觀)․명해탈(明解脫)과 3해탈문(解脫門)과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등이니, 이것을 법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공양하는가 하면, 이런 법 안에서 말씀대로 행하고 따르면서 거역하지 않으며, 하려 하는 의욕을 내어 정진하면서 구족하게 닦고 익히는 것이니, 이것을 법에 공양한다고 하느니라.
다시 부루나야, 법에 공양한다는 법은 이와 같은 등의 경전을 말하나니, 믿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따르면서 마음으로 거역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을 법에 공양한다고 하나니, 보살이 이 셋째의 법을 성취하면 온갖 공덕을 두루 갖추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 부지런히 법에 공양하면서
말씀대로 그 안에 머무를 것이요
깊고 공한 묘한 법을 듣고는
그 마음이 거역하지 않는 것이니라.

이 때문에 몸은 항상 단정하고
또한 요설변재를 얻나니
내가 칭찬한 법 그대로 하면
이 때문에 더욱더 높아지느니라.


“또 부루나야, 보살마하살은 부지런한 마음으로 여래의 성인 대중에게 공양할 것이니라. 꽃과 향과 영락과 가루 향과 바르는 향과 또는 번기․일산․의복․음식․침구․의약 등의 생활필수품으로써 하기도 하며, 또는 승방(僧坊)을 짓기도 하고, 또는 동산 숲을 세우기도 하며, 또는 다니는 곳과 목욕하는 못과 샘과 우물 등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심부름을 하는 등의 이러한 그 밖의 공양거리로 이와 같은 성인 대중에게 공양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 넷째의 법을 성취하면 온갖 공덕을 두루 갖추게 되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이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위없는 공양거리로써
부처님들께 공양하나니
이 공덕의 인연 때문에
태어날 적마다 재보가 많으니라.

몸의 빛깔은 항상 단정하고
또한 요설변재도 얻으며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어
지혜는 더욱더 높아지느니라.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 공양하고
나와 내 것이 없나니
이 지혜로운 인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공양을 얻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이 네 가지 법을 항상 가까이 하면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존귀(尊貴)하며
공덕은 더욱더 높아지느니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