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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06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69권

by Kay/케이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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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69

 

대보적경 제69권


북제 삼장 나련제야사 한역
송성수 번역


16. 보살견실회 ⑨

22) 광과천수기품(廣果天授記品)
그때 8억의 광과천(廣果天) 하늘들은 모든 아수라와 가루라며 용과 용녀․구반다․건달바․야차․긴나라․마후라가․하라가사천․사천왕천․삼십삼천․야마천․도솔타천․화락천․타화자재천․범마천․광음천 및 변정천 하늘들이 여래께 공양하는 것과 수기하신 것을 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흐뭇해하고 하나하나의 법문(法門)에 들어갔다.
그리고 저 하나하나의 법문으로부터 한량없는 법문을 보았고 또 모든 법문에서 한량없는 변재[無量辯]와 끊임없는 변재[不斷辯]와 서로 상응하는 변재[相應辯]와 해탈하는 변재[解脫辯]와 집착이 없는 변재[無著辯]와 걸림이 없는 변재[無礙辯]와 미세한 변재[微細辯]와 매우 깊은 변재[甚深辯]와 갖가지 변재[種種辯]와 아름답고 묘한 변재[美妙辯]와 서로 이어가는 변재[相續辯]를 얻었으며 그 변재를 모두 다 안 뒤에는 여래께 공경하고 믿고 존중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세존이시여, 다라니가 있사온데 그 이름은 무량문(無量門)이옵니다.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다라니를 닦고 쌓으면 저 끊이지 않는 변재 등을 얻어 모든 경계에서 마음이 미혹되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이다. 이 모든 경계는 하나의 법도 다라니(陀羅尼)가 아님이 없어서 보살마하살이 이 다라니를 얻을 때에는 모든 법 가운데서 다라니를 얻고 변재에 걸림이 없음을 아나이다.
만일 보살이 이 무량 법문의 다라니에 머물 때에는 5음(陰)에 들어가고 12입(入)에 들어가며 18계(界)에 들어가고 모든 근(根)에 들어가며,
네 가지 진리[四諦]에 들어가고 12인연(因緣)에 들어가며, 중생(衆生)에 들어가고 중생 아닌 데에 들어가며 있는 것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 데에 들어가며, 모양을 취하는 것에 들어가고 모양을 취하는 것이 아닌 데에 들어가며, 의지하는 것에 들어가고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에 들어가며, 공에 들어가고 나에 들어가며, 모양에 들어가고 모양이 아닌 데에 들어가며, 소원에 들어가고 소원이 아닌 데에 들어가며, 유위(有爲)에 들어가고 무위(無爲)에 들더라도 이와 같은 모든 곳에 무너지지 않는[不壞] 변재를 얻나이다.
이 보살은 5음에 들어가 가운데 다라니를 얻나니, 이른바 물질의 음[色陰]이란 곧 이루어지는[成就] 것이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조그마한 물질의 법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옵니다. 왜냐 하면 지계(地界)의 성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와 같이 수계(水界)․화계(化界)․풍계(風界)의 성품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왜냐 하면 지계는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법에 체성(體性)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니, 이와 같이 수계․화계․풍계의 성품도 스스로 여의기 때문이며 법에 체성이 없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와 같이 물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과거․현재며 그리고 미래라고 말할 수가 없나이다. 왜냐 하면 물질은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얻을 수 없나이다.
만일 물질이 나지 않는다면 곧 없어지지도 않나니, 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곧 말로 설명할 수는 없나이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모든 과거의 물질과 현재․미래의 물질인 이들이 화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물질의 음[色陰]이라 한다’고 하지만, 그 물질의 체성도 얻을 수 없거늘 어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겠나이까? 그러므로 물질의 음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그와 같나이다.
그러므로 5음에 들어가는 것은 곧 다라니에 들어가는 것이요 다라니에 들어가기 때문에 5음은 얻을 수 없고 5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라니도 얻을 수 없고 다라니에 들어가는 것도 얻을 수 없나니, 오직 이것은 이름[名]일 뿐이요 작용[用]일 뿐이요 거짓[仮]일 뿐이며 이것은 세속(世俗)일 뿐이요
이것은 언설(言說)일 뿐이며 이것은 시설(施設)일 뿐이옵니다.
음(陰)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또한 물질의 입[色入]도 아니요 또한 다라니의 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이른바 5음 등은 작용하는 법[作法]이 아니요 작용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쌓여 모임[積聚]도 없지만, 쌓여 모이기 때문에 음(陰)이라 하는 이름을 얻는 것이옵니다. 비유하면, 마치 세간에 물건이 많이 쌓여 모인 것을 성(城)이라고 이름을 붙일 때에 사택(舍宅)과 전당(殿堂)과 중각(重閣)과 누궐(樓闕)과 창과 난간과 성벽(城壁)과 성위의 낮은 담과[女牆] 각적(却敵)과 요공(寮孔) 등이 빙 둘러서 두루 갖추어져 있어야 성(城)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나이다.
저 물질의 성품은 곧 얻을 수 없고 쌓여 모임도 없나니, 쌓여 모임이 없기 때문에 곧 물질도 없고 또한 물질의 음도 없으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이와 같아서 성품을 얻을 수 없고 쌓여 모임도 없나이다. 쌓여 모임이 없기 때문에 곧 의식[識]도 없고 의식의 음[識陰]도 없나이다.
저 모든 음에 들어가는 것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하리다.
눈에 들어감이라 함은, 이것이 무엇에 들어가는 것인가 하면 괴로움에 들어감[苦入]이옵니다. 무엇이 눈[眼]인가 하면, 깨끗한 4대(大)로 된 물질을 눈이라 하나이다. 무엇이 4대이냐 하면, 깨끗한 지계(地界)와 수계(水界)․화계(火界)․풍계(風界)이니, 저 깨끗한 지계는 성품을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법의 체성을 얻을 수도 없고 그것은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와 같이 깨끗한 수계․화계․풍계도 체성을 스스로 떠났으므로 법의 체성을 얻을 수도 없고 그것은 곧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옵니다.
이와 같아서 눈에 들어감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설명할 수도 없나이다. 왜냐 하면 눈에 들어감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만일 나거나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곧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나이다. 이와 같아서 눈은 나거나 없어지지도 않고 들어감도 나거나 없어지지 않나니, 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곧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나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은 이름일 뿐이요 작용일 뿐이요 거짓일 뿐이며 이것은 세속일 뿐이요 언설일 뿐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리다.

그 이름은 이름의 바탕도 자성을 여의나니, 왜냐 하면 어떤 법도 눈이라 하거나 들어간다 하거나 괴로움[苦]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이름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눈에 들어감도 얻을 수 없으며, 눈을 얻을 수 없으면 곧 그것은 다라니에 들어감이나 이 다라니에 들어감도 얻을 수 없나이다. 왜냐 하면 성품을 스스로 떠났기 때문이니, 다만 이름일 뿐이요 작용일 뿐이요 거짓일 뿐이며 시설과 세속과 언설일 뿐이옵니다. 이와 같이 눈에 들어감으로써 다라니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요 다라니를 얻은 뒤에는 곧 변재를 얻게 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귀․코․혀․몸․뜻과 빛깔․소리․냄새․맛․접촉․법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리다.
저 계(界)에 들어가도 다라니를 얻나이다. 눈은 눈의 바탕[體]을 얻을 수 없고 계는 계의 바탕을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눈은 눈의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요 계는 계의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옵니다. 법의 바탕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곧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나거나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은 곧 과거도 아니요 현재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며, 다만 이름일 뿐이요 작용일 뿐이요 거짓일 뿐이며 다만 언설일 뿐이요 시설일 뿐이옵니다.
저 이름은 이름의 자성을 떠났고 나아가 시설도 시설의 자성을 떠났나이다. 만일 법에 자성이 없어서 얻을 수 없다면 곧 그것은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곧 나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곧 그것은 과거도 아니요 현재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옵니다.
만일 3세(世)에 속하지 않은 것이면 그 이름은 곧 모양도 아니요 생각도 아니며, 작용도 아니요 가설(仮說)도 아니며, 유위도 아니요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며, 남을 위하여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인식(認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검은 것도 아니요 흰 것도 아니옵니다. 그리고 굴택(窟宅)이 아님은 굴택을 떠났기 때문이요 이르는 것이 아님은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얻는 것이 아님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증득하는 것이 아님은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범부가 아니고 범부의 지위도 아니며, 성문도 아니고 성문의 지위도 아니며, 연각이 아니고 연각의 지위도 아니며, 보살도 아니고 보살의 지위도 아니며, 지위도 아니고 지위가 아닌 것도 아니옵니다. 이것은 곧 진여(眞如)이니 진여와 다르지 않고 진여가 아닌 것도 아니어서 적멸하여 모양이 없고 다만 작용일 뿐이요 가설일 뿐이니, 여래(如來)란 다만 세속에서 일부러 말하여 여래라 하는 것이요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여래가 있지 아니하옵니다. 왜냐 하면 저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여래도 없는 것입니다.
저 계(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은 눈․귀․코․혀․몸․뜻의 계와 법의 법계(法界)와 의식의 경계[意識界]에 들어가야 하고, 이와 같이 그 밖의 모든 경계도 그렇게 알아야 하며 이렇게 널리 법의 경계에 들어가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 법의 경계에서 5음을 말할 때에도 그 법의 경계의 본성품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12입(入)을 말할 때와 18계(界)를 말할 때와 네 가지 진리를 말할 때와 12인연을 말할 때에도 본래 법의 경계의 체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며, 그 법의 경계는 말한 바의 처소에 따라 모든 법에 이름을 붙였으되 모두가 그 법의 경계의 체성을 무너뜨리지 않았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지계(地界)는 그 있는 곳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었으면서도 그 본래 지계의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처럼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의 경계도 그 있는 곳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었으면서도 법의 경계의 본 성품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며, 이와 같이 수계․화계․풍계도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허공은 있는 곳에 따라 서로 다르게 작용하면서도 그 허공의 체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으며,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의 계도 있는 곳에 따라 서로 이름과 작용이 다르면서도 그 법의 경계의 체성을 무너뜨리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근(根)에 들어갈 때에는 곧
법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모든 근이라 함은 이른바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과 남근(男根)․여근(女根)․명근(命根)과 낙근(樂根)․고근(苦根)․희근(喜根)․우근(憂根)․사근(捨根)과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과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지근(知根)․지이근(知已根)이 그것이옵니다.
저 눈[眼]은 눈의 바탕을 얻을 수 없고 근(根)은 근의 바탕을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이 눈은 눈의 자성을 떠났기 때문이옵니다. 법에 체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곧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곧 나지 않나이다. 만일 나지 않는다면 곧 없어지지도 않고 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말로는 그것이 과거요 현재요 미래라고 설명할 수 없나이다. 만일 3세 중에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곧 눈도 아니고 안근도 아니거늘 어떻게 작용이 있겠나이까?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빈주먹은 거짓이요 물건이 없고 다만 이름과 나아가 말만 있는 것과 같으니, 첫째가는 이치 가운데서는 빈주먹도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눈과 안근도 마치 빈주먹과 같아서 허망하여 진실이 아닌데도 거짓 모양을 나타내어 범부를 속이나니 다만 이름과 나아가 말만이 있을 뿐이요, 첫째가는 이치에서는 눈과 안근을 모두 얻을 수 없나이다.
이러함에도 세존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얻으신 뒤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근(根)이라고 이름하신 것이나 저 모든 근들은 첫째가는 이치 가운데서는 성품이 스스로 떠났기 때문에 근의 바탕은 모두가 공하나이다. 그 법의 바탕이 공하다면 작용도 허망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진실한 것도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되게 하나이다. 제 성품을 떠났기 때문에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나니, 나거나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과거요 현재요 미래임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나이다.
만일 3세 가운데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생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안 것도 아니고 장차 알 것도 아니며 이미 들은 것도 아니고 장차 들을 것도 아니며, 인식할 것도 아니고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미 증득한 것도 아니고 장차 증득할 것도 아니며,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장차 얻을 것도 아니며, 이미 본 것도 아니고 장차 볼 것도 아니며, 이미 도달한 것도 아니고 장차 도달할 것도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그의 꿈속에서 쾌락을 느껴 기뻐서 웃고 잠꼬대를 하며 재미있게 놀다가 이 사람이 그때에 잠에서 깬 뒤에 그 꿈속에서 쾌락을 받고 재미있게 놀던 기억을 하면서 그것을 찾아보았으나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과 같나이다. 왜냐 하면 저 사람이 꿈속에서 쾌락을 느껴 기뻐서 웃고 잠꼬대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던 그 자체가 오히려 진실함이 없거늘 하물며 깨어났을 때에 보거나 얻는 일이겠나이까? 만일 보게 되고 얻게 된다면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모든 근은 마치 꿈속에서 쾌락을 받고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진실을 얻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체성도 얻을 수 없나이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과거요 현재요 미래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일 3세 중에서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곧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니, 모든 근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리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의 경계에 들어가면 곧 모든 법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든 법에 들어가면 곧 그것이 법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네 가지 진리[四諦]의 법에 들면 곧 법계에 드는 것이옵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진리냐 하면, 괴로움[苦]․쌓임[集]․사라짐[滅]․도[道]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모든 법은 공하므로 중생(衆生)도 아니요, 목숨[命]도 아니요, 보특가라(補特伽羅)도 아니요, 생각도 아니요, 모양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저희들은 이 법에 대하여 의심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중생이 없기 때문에 또한 괴로움도 없나니, 왜냐 하면 중생이 없는 곳에는 괴로움의 진리[苦諦]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쌓임의 진리[集諦]도 없나니, 왜냐 하면 이러한 원인이 없으므로 결과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쌓임이 없기 때문에 사라짐의 진리[滅諦]도 없나니, 왜냐 하면
쌓임의 진리가 없기 때문에 쌓임을 끊을 것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사라짐이 없기 때문에 도의 진리[道諦]도 없나니, 왜냐 하면 쌓이는 것을 끊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도의 과위라는 것은 곧 사라짐의 진리인데 그 번뇌는 끊어지게 할 수도 없고 번뇌를 사라지게 할 수도 없으며 사라지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도[道]를 얻을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도가 없는지라 그 결과도 없나이다.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다만 분별일 뿐이요 허망하여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요 현재요 미래라고 설명할 수도 없나이다.
만일 3세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면 그것은 곧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모양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며 시설도 아니고 시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드러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말[言語]이 아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언사(言辭)가 아니고 언사일 수도 없으며, 해설하는 것도 아니고 해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또 보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아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헤아리는 것도 아니고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통달하는 것도 아니고 통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얻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듣는 것도 아니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옵니다.
또 보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흰 것도 아니고 검은 것도 아니며,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얕은 것도 아니고 깊은 것도 아니며, 맑은 것도 아니고 흐린 것도 아니며, 두려운 것도 아니고 편안한 것도 아니며, 묶인 것도 아니고 푼 것도 아니며, 미운 것도 아니고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옵니다.
또 번뇌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지혜가 아닌 것도 아니며, 길도 아니고 길이 아닌 것도 아니며,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무너지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섭수하는 것도 아니고 섭수하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나거나 죽는 것도 아니고 나거나 죽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옵니다.
또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며 목숨도 아니고 목숨이 아닌 것도 아니며,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며, 나도 아니고 나가 아닌 것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고 물건이 아닌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도 아니고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소원도 아니고
소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옵니다.
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아주 없는 것[斷]도 아니고 항상한 것[常]도 아니며, 삿된 것도 아니고 바른 것도 아니며,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며, 부질없는 생각도 아니고 부질없는 생각이 아닌 것도 아니며, 처소도 아니고 처소가 아닌 것도 아니며, 집도 아니고 집이 아닌 것도 아니옵니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닦는 것도 아니며, 나고 죽는 것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며, 깨닫는 것도 아니고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범부의 경계도 아니고 성문의 경계도 아니며, 연각의 경계도 아니고 보살의 경계도 아니고 부처님의 경계도 아니며, 경계가 아닌 것도 아니며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작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와 같이 진리에 들어가는 것이 곧 법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법의 경계에 들어간 뒤에는 곧 다라니를 얻고 다라니를 얻은 뒤에는 곧 변재를 얻나이다.
12인연에 들어가는 것이 곧 법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니, 무명(無明)은 지어감[行]에 반연하고 지어감은 의식[識]에 반연하며 의식은 이름과 물질[名色]에 반연하고 이름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관[六入]에 반연하며, 여섯 가지 감관은 접촉[觸]에 반연하고 접촉은 느낌[受]에 반연하며, 느낌은 욕애[渴愛]에 반연하고 욕애는 취함[取]에 반연하며, 취함은 존재[有]에 반연하고 존재는 생겨남[生]에 반연하며, 생겨남은 늙어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老死憂悲苦惱]에 반연하나니, 이것이 많은 괴로움의 큰 무더기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도 사라지고 나아가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까지도 사라져서 많은 괴로움의 큰 무더기가 사라지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 무명은 무명의 바탕을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성품이 스스로 떠났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법에 체성이 없다면 그것은 곧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곧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옵니다. 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면 곧 과거도 아니요 현재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옵니다.
만일 3세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면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생각도 없고 또한 서로가 다른 것도 아니며, 오직 그것은 이름일 뿐이요 거짓일 뿐이요 세속일 뿐이요 언설일 뿐이니, 모든 범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이옵니다. 저 무명은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실로 얻을 수 없나니, 얻을 수 없다면
곧 차별된 것도 아니며 작용 또한 설명할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것이 이름일 뿐이요 나아가 시설일 뿐이라면 그것은 곧 진실이 아니요 허망한 것일 뿐이며, 언설과 분별과 각관(覺觀)으로 정할 것도 아니요 다만 이것은 쓸모 없는 다른 논리일 뿐이옵니다. 저 무명이 만일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지어감[行]을 나게 할 수 있겠나이까? 무명이 없기 때문에 지어감도 생기지 않으며 지어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곧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유전(流轉)하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나지 않는 것이옵니다.
왜냐 하면 만일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늙음이 있겠나이까? 늙음이 없기 때문에 나지도 않나이다. 만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면 곧 모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다만 세속에서의 이름일 뿐이요 첫째가는 이치는 아니어서 말한 바의 무명은 곧 보리이옵니다. 모든 존재의 갈래[有支]도 이와 같음을 알겠으며 이와 같이 12인연에 들면 곧 그것이 법의 경계에 드는 것임을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나지 않고 모든 법도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곧 여래이옵니다. 여래는 없어지지 않고 모든 법도 없어지지 않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곧 여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모양이 없고 모든 법도 모양이 없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곧 여래이옵니다.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모양이 없으면 얻을 수 없으므로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미운 것도 아니니, 법의 경계는 인식할 수도 없고 또한 알 수도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진여는 곧 여래이고 모든 법은 곧 진여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곧 여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실제(實際)는 곧 여래이고 모든 법은 곧 실제이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곧 여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따르는 가운데 곧 여래가 있으며 그 법 가운데는 곧 모든 법이 있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곧 여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라고 하면 저 모든 중생은 곧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여래는 둘이 아니며[不二] 보리도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둘이 아니라 함은 둘이 아닌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최상의 법륜(法輪)을 굴린다’ 하면 저 모든 중생은 곧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여래는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물러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滅度)하게 한다’ 하면 그들 모두는 곧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에는 실로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멸도를 얻는 이도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한량없는 중생을 이롭게 한다’ 하면 그들 모두는 곧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여래는 중생을 이익 되게 하려 하거나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세간에 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미래의 세상에 말하기를 ‘여래는 수명을 버렸다’ 하면 그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법계(法界)는 섭수함도 없고 또한 버림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경계에 들었다’ 하면 저 모든 중생은 곧 집착하는 견해이옵니다. 왜냐 하면 법계는 나고 죽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열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제가 말하는 법을 결연히 아는 이면 저 모든 중생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모두가 물러나지 않으리다.
세존이시여, 가령 법계가 변하고 달라진다 해도 이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렇게 믿을 수 있으면 반드시
최상의 보리를 깨달을 것이요 변하거나 물러남이 없으리다.”
그때 8억 광과천 하늘들은 세존에게 자기가 증득한 법을 연설하고 나서 머리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합장하고 소리를 같이하여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선서(善逝)요, 법을 아시는 이며
나라연(那羅延)의 힘을 지닌 큰 길잡이께 경례하나이다.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훌륭한 모니(牟尼)시여,
방편으로 진실함을 나타내 보이소서.

이미 스스로 모든 법을 분명히 알고
사실대로 모든 세간을 드러내 보이시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닌 몸이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최상의 선비[無上士]께 머리 조아리나이다.

이와 같이 진실하고 미묘한 법을
상응하여 다름없이 거룩하게 말씀하시는
세존이며 같은 이 없는 큰 의왕(醫王)이시여, 등
중생으로 하여금 법눈[法眼]이 깨끗하게 하소서.

여덟 가지 진실하고 거룩한 길을 널리 펴서
최상의 큰 보리를 얻게 하시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닌 몸이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위없는 선비께 귀의 공경하나이다.

보리의 바르고 곧은 길을 드러내 보여
끝내 꼭 큰 열반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며
견줄 데 없는 훌륭한 보리를 획득하여
적멸하고 안온함이 가장 견고하게 하나이다.

많은 억 나유타의
나고 죽는 괴로움에 윤회하는 중생을 제도하시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닌 몸이며
지혜가 가장 뛰어난 최상의 선비께 머리 조아리나이다.

5음(陰)을 관찰하면 모두가 공하여 없는 것이어서
5음의 본체[體]는 마침내 얻을 수 없나니
저 5음의 본체에 나아가면 모든 관(觀)을 떠났으나
어리석은 중생을 속게 할 뿐입니다.

범부가 이것에 모두가 속박됨은
마치 원숭이가 아교에 달라붙음과 같지만
지혜로운 이는 여기서 해탈하게 되어
돌아다님이 걸림 없음은 마치 공중의 바람과 같나이다.

모든 경계[界]의 바탕에 나아가면 성품은 스스로 공함을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나니
저 공 또한 공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마지막까지 구하여도 얻을 수 없나이다.

범부가 여기에 모두가 속박됨은
도무지 진실한 성품을 모르는 까닭이니

지혜로운 이는 관찰하여 해탈하게 되며
저 3계(界)에 집착함이 없나이다.

모든 입(入)은 본체가 없고 스스로 공적(空寂)함을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나니
마치 빈주먹이 비고 진실이 아닌데도
어리석은 중생들은 속게 됨과 같나이다.

범부가 망령되이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킴은
모두가 법에 의혹을 내는 까닭이니
생사(生死)에 떨어져서 모두 죽고 부서짐은
마치 상인(商人)이 큰 바다에 침몰함과 같나이다.

그들의 모든 근(根)의 성품은 스스로 공하여
마침내 추구(推求)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마치 거울에 얼굴과 형상 비칠 적에
그 형상은 진실이 없고 끝내 공한 것과 같나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 이것에 집착함은
바로 진실한 법을 모르는 까닭이니
마치 많은 새들이 그물 속으로 들어가고
못 속의 고기들이 낚시에 물리는 것 같나이다.

중생은 본체가 없고 나는 모양[生相]을 떠났으므로
진실에 의거하여 구하면 얻을 수 없나니
마치 벽 위에 채화(彩畵)로 그린 형상이
마침내 진실한 중생의 성품이 없는 것 같나이다.

범부가 지혜 없어 취착(取著)함은
모두 진실한 이치를 모르는 까닭이니
지혜 있는 이는 그것을 관찰하여 해탈하게 됨이
마치 알로 나는 것[卵生]이 알에서 나오는 것 같나이다.

인연(因緣)으로 나는 법은 모두가 무상하고
모두 공적하여 반연을 떠났나니
마침 꿈속에서 받았던 쾌락이
진실이 아니요, 어리석은 범부를 속게 한 것과 같나이다.

어리석고 지혜 없어서 그것에 속박됨은
허망한 분별임을 헤아리지 않는 까닭이며
지혜 있는 사람은 관찰하여 해탈하게 됨은
마치 나는 새가 새장을 나온 것 같나이다.

부처님의 공덕이 불가사의하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나니
모든 법이 모양 없음은 모니(牟尼)와 같고
법의 체성이 고요히 사라짐은 열반과 같나이다.

모든 법에 의지함이 없음은 마치 여래께서
3계(界)에 취착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모든 성불한 이는
이 이치를 알기 때문이옵니다.

모든 법에 두려움이 없음은 마치 세존께서
자기 몸과 다른 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법에 생각하기 어려움은 마치 길잡이께서
부처님만이 중생 인도함을 아는 것 같나이다.


법에 분별이 없음은 마치 선서(善逝)와 같아서
이는 범부 마음으로 행할 것이 아니니
이 모든 여래의 묘한 경계는
부처님․큰 성인께서만 분명히 아시나이다.

만일 지혜 없는 이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견줄 데 없는 큰 보리 증득하셨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이미 묘한 법륜을 굴리셨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서는 이미 나유타 중생을 제도하셨다’ 하면
저 모두는 견해에 얽매여 있나니
모두 진실한 성품을 모르는 까닭이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는
‘행음(行陰)과 목숨을 살해한다’고 하셨고
또 ‘10력(力)이 열반에 드셔서
한량없는 중생을 이롭게 하셨다’고 하면
그 사람들 모두는 집착하는 견해라서
악마의 그물에 걸려든 것이니
진여의 법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을 알지 못하나이다.

만일 옳고 그름을 잘 아는 이는
큰 길잡이를 능히 아나니
장차 최상의 공덕더미 얻고
성불하여 세간을 가엾이 여기리다.

이것이 곧 진여의 바뀌어짐 없음이요
모든 법에 의혹을 여읜 것이니
인간에서 위없고 가장 높으신 이여,
저희들은 이미 이러한 이치를 아나이다.

이와 같이 광과천의 모든 하늘들은
모두 함께 법을 다 알고 있으므로
자기 마음속의 깨끗한 신해(信解)를 나타내어
부처님․길잡이 앞에서 스스로 연설하나이다.

모두는 기뻐하며 의심이 없어졌고
각각 뵙고 나면 장차 성불할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미묘한 법이요
그것은 곧 스스로 길잡이의 수기 받는 것이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광과천 하늘들이 깊은 신심을 구족하였고 부처님 법에서 결정코 의심이 없음을 아시고 대중으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하여 빙그레 웃으셨다. 그때 혜명 마승이 게송으로써 세존께 물었다.

지혜 지닌 길잡이요 공덕의 산이시여,
까닭 없이 웃으시지는 않으셨으리다.

저는 선서(善逝)로부터 친히 들었사온데
세존께서 웃으심은 반드시 까닭이 있나이다.

여래께서 미소짓는 모습 보이시어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청량(淸凉)한 쾌락을 받게 하셨으니
하늘․사람․아수라의 큰 길잡이시여,
원컨대 웃으신 인연을 연설하여 주소서.

지금 여래의 입으로부터
웃으심의 심히 청량함을 보고는
여기에 모인 대중들은 모두 의심을 품고
일심으로 여래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있나이다.

대비(大悲)하시고 가장 뛰어난 인중상(人中上)이시여,
원컨대 희유한 미소의 인연 말씀하여 주소서.
세간에서 만일 부처님 말씀 들으면
기필코 의혹된 마음을 없애리다.

세존이시여, 저 모든 하늘들은
모두 함께 연설하여 스스로 수기를 받았나니
어떤 공덕으로 어떠한 과위를 얻었나이까?
성불함과 신통에 관한 일을 말씀하여 주소서.

미묘한 범음(梵音)의 소리 펴시어
두루 모든 의혹들을 끊어주소서.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 말씀 들으면
모두 뛸 듯이 기뻐하리다.

이들은 합장하고 모두가 일심으로
깨끗이 믿고 우러러보며 공경히 서있나니
불자인 하늘들은 저마다 생각하며
위없는 큰 보리를 희구하고 있나이다.

여기 모인 대중들은 의혹 있나니
원컨대 여래께서는 끊어 없애주소서.
반드시 힘을 얻고 옳고 그름 알면서
일체지(一切智)를 구족하게 성취하리다.

여래의 여덟 가지 음성을 듣게 되면
하늘들은 다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리니
장차 여래의 교법을 보호하고 지니면서
바른 법을 따르며 말씀대로 행하리다.

저 하늘들 마음을 관찰하여 아신 뒤에
위없는 큰 지혜께서는 해설하여 주소서.
이 대중들은 기쁨을 내며
불법에서 신해(信解)를 얻으리다.

지금 길잡이께 듣기 원하는
하늘들은 과거에 수행한 바라
만일 여래의 해설을 입게 되면
소원이 모두 다 만족하게 되리다.

광과천의 하늘들 법답게 행하여
반드시 일체지를 성취할 것이요
장차 세간의 중생들을 제도하며
진여의 법 체성을 드러내 보이리다.


그때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써 혜명 마승에게 대답하셨다.

장하구나. 마승아, 너는 때를 알아서
지금 나에게 물었는데 마땅한 일이로다.
나는 광과천의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이 대중에게 미소를 나타내었느니라.

지금 너희들에게 분별하여 주리니
모두 함께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
나타낸 미소의 인연의 이치를
너와 대중들은 모두 듣게 되리라.

여래는 일체지를 두루 갖추어
인연에 세 가지 있음을 관찰하나니
양족(足)의 덕 무더기 바르게 관찰한 뒤에
미소를 세간에 보이는 것이니라.

열반에 즐거이 머무른 이는
지혜가 적고 얕아서 성문(聲聞)되기를 원하고
또 잠잠함에 즐거이 머무른 이는
벽지불(淪支佛)의 보리를 구하게 되며

또 세간의 길잡이 되기를 즐거이 구한 이는
성불하여 큰 힘의 나라연(那羅延)이 되나니
나는 그들의 깊은 신심을 살핀 뒤에
좋아하는 것을 따라 제도하느니라.

성문을 구하는 이를 위해 나타내는 것은
가장 하품(下品)의 웃음인 줄 알 것이요
내가 중품(中品)의 웃음을 웃을 때에는
벽지불을 구하는 이를 위해 나타낸 줄 알지니라.

마승아, 상품(上品)의 웃음은
하늘들을 위한 부처님의 수기인 줄 알지니
나는 이 세 가지 웃는 인연 말하나니
이른바 가장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니라.

세간을 잘 아는 훌륭한 길잡이는
웃음으로 상서로운 모양을 나타내며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3승으로
거룩한 과위[聖果]를 즐겨 구하는 것을 아느니라.

성문을 구하는 이를 위해 웃을 때에는
미소할 때의 광명이 발에서 없어지고
벽지불을 구하는 이를 위해 웃을 때에는
그 광명이 배꼽으로 들어가는 줄 알 것이며

위없는 10력(力)을 받으려는 이를 위할 때에는
부처님의 정수리 위로 들어가나니
마승아, 너는 이제 미소하는 인연에
이 세 가지 있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내가 전에 웃었을 때의 그 광명은
나의 정수리 위에서 없어졌나니
이번에 나타낸 그 미소는
모두 위없는 보리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다시 너에게
미소에 세 가지 까닭 있음을 말하리라.
장하도다. 마승과 대중들아,
일심으로 뜻을 고요히 하여 자세히 들어라.

조금 전의 미소는 부처님을 위하여 웃은 것이라
그 광명은 곧 정수리 위로 들어갔으나
광명이 얼마 동안 몸과 허리에 머물다가
잠깐만에 없어지면 벽지불을 위한 웃음이니라.

내가 지금 웃으면서 놓은 광명이
잠시 동안 발 앞에 머물러 있는데
이 광명은 승(乘)을 따라 변화한 것이니
이 웃음은 성문을 위함인 줄 알지니라.

이제 또 미소하는 인연을 말하리니
마승아, 자세히 들어라. 세 가지가 있느니라.
길잡이께서 놓는 모든 광명은
나온 뒤에 10력(力)을 빙 둘러싸느니라.

그 광명 나와서 모두 분산되었다가
다시 속히 모여 몸과 허리를 두르며
점점 더 넓어져서
또한 돌아와 여래를 오른편으로 도느니라.

어떤 광명은 처음 멈추었다가 뒤에 넓고 커지면서
점차로 오른편으로 나의 몸을 돌며
그 광명은 모두 세존의 형상에 두루하여
몸과 똑같이 되며 다름이 없나니
그 광명은 부처님 몸매[身相]를 장엄하는 것인데
빛남은 마치 순금의 무더기와 같으니라.

모니(牟尼)가 놓은 미소의 광명에서
이 광명은 국토[刹土]를 나타낸 줄 알지니
광명이 나온 뒤에 마치 일산과 같이 되어
위에서 세존의 몸을 두루 덮느니라.

어떤 광명은 꽃처럼 공중에 머물며
그 광명이 길잡이를 비추어 주다가
모두 다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
여래의 몸을 둘러싸나니
이 광명은 수명(壽命)을 나타낸 줄 알라.
세간 벗어난 큰 지혜로 이런 상서를 나타내느니라.

이들 세 가지 미소지을 때의 광명은
선서가 근기 따라 달리 나타냄이니
마승아,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세 가지 웃는 까닭이니라.

세간의 길잡이가 나타낸 모양은
중생의 깊은 믿음과 좋아함을 잘 알기 때문이니
지금 여래의 교법 가운데서
너희들은 이를 듣고 의심 없어지리라.

이 광과천의 모든 하늘들은
그 수가 꼭 8억이 있나니

미묘한 바른 법문 널리 말하며
저마다 다른 세계에서 성불하게 되리라.

수명은 완전히 갖추어 한량없어서
여러 겁 동안 세간에 머무르게 되리니
그러므로 여래는 광대한 광명의
다섯 가지 색깔의 이런 상서를 나타내었느니라.

이 모든 하늘들은 지난 세상에
36의 아승기겁 동안
항상 모든 세존을 만나 뵙고
몸소 받들고 공양하며 선(善)을 익혔느니라.

또 다시 36의 아승기겁을
지나면서 널리 수행하였으며
이들 대사(大士)는 세간에 머물 때에
여래께 공양하며 게으름이 없었느니라.

중생을 제도할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자주자주 힘써 닦고 부처님께 공양하되
세존께 공양함은 그 시의(時宜)에 맞추었고
최상의 큰 보리를 희구하였느니라.

저 모든 하늘들은 미래 세상에
장차 성불하여 나라연(那羅延)이 되고
묘한 모니(牟尼)의 공덕의 산을 이루리니
그 겁의 이름은 승금당(勝金幢)이라 하리라.

이 모든 여래는 스스로
깨끗하고 장엄한 국토 속에 머무르며
그 부처님 명호는 똑같이 일광륜(日光輪)이요
한량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두루 갖추시리라.

한 분 한 분의 여래는 각자 세상에
한량없는 나유타 겁 동안 계실 것이며
이 모든 선서께 모이게 될 대중은
한량없고 끝없으며 헤아릴 수 없으리라.

각각의 길잡이께서 성불할 때에
있을 성문의 제자들은
10력(力)께서 나유타 겁 동안 계시면서
그들을 헤아릴지라도 다할 수 없으리라.

만일 산술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서
그들을 다 헤아린다 해도 다할 수 없으며
그때에 있을 모든 보살은
저 성문들보다도 갑절이나 많으리라.

모두가 발심하여 불승(佛乘)에 머물러
장차 일체지를 이루기 원하다가
저 깨끗한 국토 속에서
모두가 성불하여 10력을 갖추리라.

이 모든 보살들이 수행한 것은
모두 본사(本師)와 같아 다름이 없으며
저 모든 여래께서 멸도하신 뒤에
정법(正法)이 흥성하여 오랜 세상 머무르고

12나유타 겁을 지나도록
모든 불자들이 보호하여 지니게 되리라.

이 모든 부처님 법이 치성할 때에
최상의 보리 마음 내는 이들이 있어서
그 수는 항하의 모래보다 많으리니
모두 부지런히 보살행을 닦으리라.

저 모든 선서께서 멸도하신 뒤에
거기 있던 모든 성문들은
모두가 열반을 얻으리니
큰 바다의 모래 수보다 더 많으리라.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세간에 완전히 드날리게 되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그 가르침은 법대로 크게 흥성하리라.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은 뒤에
모든 대중들은 믿고 이해하여
반드시 장차 부처님 세존이 되어
널리 모든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리라.

이때에 모인 대중은 다 기뻐하며
머리 조아려 여래의 발에 예배하였고
견줄 데 없이 선서를 공경하면서
천인사(天人師)께 법답게 공양하였다.

그러므로 용맹하게 정진을 일으킴이
마치 어떤 사람의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항상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면서
부지런히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견실회(見實會)의 승진(勝進)행이니
그대들 비구는 닦고 익혀야 하며
장차 위없는 양족존(兩足尊)을 이루어
공덕이 산과 같이 세간을 이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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