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19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7권

by Kay/케이 2023. 12. 31.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7

 

 

대법거다라니경 제7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16. 지성취품(智成就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그 대중 가운데 전단나(栴檀那)라는 한 보살마하살이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세 가지 법장문(法藏門)은 모든 언교(言敎)를 섭수한다고 저희들은 들었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비록 이 세 가지 언교를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 의리(義理)를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묻사오니, 원하옵건대 저를 위하여 그 의리를 자세히 해석하여 주옵소서.
세존이시여, 제가 여래 삼장(三藏)의 의문(義門)에 대하여 거듭 청해 묻는 것은 희론(戱論)을 위해서도 아니요, 또한 시비(是非)도 없사오며 집착을 일으키지도 않고 의혹도 없나이다. 저는 다만 저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과 외도의 모든 스승들을 위해서일 뿐이오니, 그들이 간혹 다시 삼장의 의문을 말하게 되면 저희들은 어떻게 듣고 받아들여야 하나이까?’
아난아, 그 때에 그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전단나 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장하고 장하도다. 전단나야, 그렇고 그러하니라, 전단나야. 비단 너만이 이 법에 대하여 의심을 내지 않은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이 법에는 또한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느니라.
너 전단나야, 너는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이 법 가운데는 저 외법(外法)이 없고, 저 외법 가운데서도 역시 이 법은 없느니라. 내가 이제 해설하리니 너는 지극한 마음으로 들어라. 만일 모든 법사로서 이 세 가지 업장(業藏)의 의리(義理)를 얻은 이면 곧 온갖 중생의 모든 마음의 차별을 능히 알며, 또한 중생의 업행(業行)과 선악(善惡)이 같지 않음을 능히 아느니라. 그 법사가 설법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중생 마음의 근기[心根]와 업행을 관찰하고, 그러한 뒤에 그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하느니라.
전단나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신통의 힘[神通力]은 갖추었으면서도 지혜의 힘[智慧力]은 없는 이가 있고, 지혜의 힘은 있으면서도 신통의 힘은 없는 이가 있으며, 또한 신통도 있고 지혜의 힘도 있는 이가 있느니라. 그 신통은 얻었으면서도 지혜의 힘이 없거나 지혜는 있으면서도 신통의 힘이 없는 이는 모두 생사(生死)에서 속히 벗어나지 못하지만, 만일 신통과 지혜의 힘을 모두 얻은 이라면 훗날 무거울 짐을 능히 짊어지느니라.
마나바야, 그 크고 무거운 짐을 능히 짊어지는 자가 오직 지혜의 힘만 있으면 물러나 잃음이 없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마나바야, 모든 외도와 선인(仙人)으로서 다섯 가지 신통[五通]을 구족한 이는 갖가지로 자유자재하게 변화를 부릴 수 있어서 하나의 몸을 여러 몸으로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그 신통은 때로는 물러나 잃게 되기도 하나니, 물러나 잃기 때문에 도리어 제 몸을 해치느니라. 왜냐하면 모두는 저 지혜의 힘이 없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만일 지혜가 있는 이면 끝내 몸을 해치지도 않고 또한 염오(染汚)도 없어서 언제나 천상에 나고 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느니라.
또한 전단나야, 지금의 이 회중(會中)에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은 모두 법을 듣기 위해서이니라. 이와 같이 나아가 시방에서 각각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사람들이 역시 모두 모였고, 또한 한량없는 모든 하늘의 대중으로서 이른바 사천왕천(四天王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낱낱 하늘들이 저마다 백천만억의 대중을 거느리고 역시 모두 모였으며, 또한 한량없는 색계(色界)의 모든 하늘 대중으로서 이를테면 대범천(大梵天)의 대중과 나아가 정거천(淨居天)의 대중도 역시 와서 법을 듣고 있느니라.
전단나야, 이와 같은 대중이 모여 있을 때 저 보살마하살은 이 세 가지 업장문(業藏門) 가운데 응당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중생과 갖가지 심행(心行)과 갖가지 작업(作業)과 갖가지 신(身)ㆍ구(口)ㆍ의(意)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저 법사가 이 세 가지 방편의 업장문을 이해하면 곧 중생의 마음 작용[心行]이 나아가는 바를 알 것이므로 그 중생에게 있는 갖가지 의심과 갖가지 질문에 갖가지로 대답할 수 있느니라. 설령 질문하지 않는 이라 하여도 법사는 곧 그의 마음과 뜻에 믿고 믿지 않음이 있다는 것과 그 처음의 발심에서부터 나아가 여러 마음에 이르기까지도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법사는 모두 차례로 응당 요달해 알아야 하고, 안 뒤에는 그를 위하여 결단해서 쟁론(諍論)하지 않게 하나니, 법사는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여 간략하거나 또는 자세하게 마땅함에 따라 널리 연설해야 하느니라.
법사는 먼저 모름지기 스스로 지혜의 힘과 정진의 힘을 성취하여야 하며, 스스로 배울 적에는 응당 잠과 게으름을 여의겠다고 생각해야 하고, 이와 같이 배우고 나서는 저 한량없는 억백천 수효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그의 총명과 위덕(威德)으로 조복하고 그런 뒤에 연설하느니라.
또만 마나바야, 너희들이 만일 지혜의 힘과 정진의 힘을 성취한 뒤에는 응당 다시 큰 정진의 마음[大精進心]을 배워야 하리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들의 마음을 능히 조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욕계ㆍ색계의 모든 하늘들을 교화할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너희들은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래는 모든 법에 인색하시다’라고 여기지 말며, 또한 내가 중생들에게 업신여기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여기지도 말라.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축생에게조차도 오히려 속이거나 오만을 부리지 않으시거늘 하물며 보살마하살이겠느냐?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는 세간에 출현하셨고, 일 겁 또는 감일(減一) 겁 또는 한량없는 겁 동안 머무르시면서 보살을 교화하시기 위하여 짐짓 그 안에 살아 계시느니라.
마나바야, 지금 어떤 보살마하살이 바른 법을 들으려고 하는데도 여래가 숨기고 아까워하면서 그들을 위해 연설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너는 살펴서 잘 들어라. 비유로써 말하겠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장자(長者)에게 오직 외아들이 있는 것과 같다. 집에는 재보와 모든 하인들이 넉넉하므로 그 부모는 집안사람들에게 엄명을 내려 받들어 모시게 하면서 다치지 않게 하고, 모든 질병이나 고통이나 추위ㆍ더위ㆍ배고픔ㆍ목마름도 없게 하며, 물과 불의 여러 가지의 재난과 부적합한 일을 모두 멀리 여의게 하고, 또한 갖가지 의약ㆍ음식ㆍ의복ㆍ방사ㆍ평상ㆍ깔개 등을 구족해 무릇 살림에 필요한 것은 모자라는 바가 없게 하며, 이 아이를 위하여 유모(乳母)에게도 으뜸가는 훌륭한 음식을 공양하면서 또한 언제나 풍족하게 하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보살의 아버지인지라 언제나 보살을 가르치면서 육바라밀을 행하게 해서 장차 보리(菩提)를 기르고 보호하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보리의 마음을 더욱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니, 그 마음으로 하여금 간탐하지도 성내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게 하고, 나아가 마음으로 하여금 다시는 물러서거나 무너지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물러서지 않으므로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여래는 언제나 보살을 가르치는 보살의 아버지이자 또한 길잡이[導師]라고도 하느니라. 보리의 도(道)에서 능히 물러서지 않기 때문에 길잡이라 하며, 또한 보리의 도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길잡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전단나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곧 다시 방광부처님께 물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지금의 이 한량없는 억수의 대중 가운데 혹 보살로서 이 법을 얻은 이가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단나야, 너는 이제 무슨 연유로 그렇게 깊이 우려하면서 보살 대중으로써 거듭 여래께 묻는 것이냐? 이 모든 보살들은 여래의 깊고 비밀한 법 가운데서 신심이 굳고 단단하기가 마치 금강(金剛)과 같거늘, 무슨 일로 ‘이 보살 대중에게 이와 같은 깊은 법을 얻은 이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냐?’
전단나가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억수(億數)의 보살 대중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법을 부처님처럼 해설하는 이가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어찌 너는 마음에 이런 의심을 지니고서 그처럼 나에게 ’이 보살 대중에는 이 법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냐?
마나바야, 너는 여래에게 성실(誠實)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이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는 이 법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냐? 네가 의심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비유를 인용하겠느니라.
비유하면 제화광왕(祭化光王)에게 있는 한 대신이 대중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는 이제 이 제화광왕이 보시를 능히 행하고 나아가 소중한 신명(身命)까지도 버릴 수 있는 이임을 믿어 안다’고 하고서도 훗날 대중 가운데서 다시 ‘이 제화광왕은 탐내고 아끼어 쌓아 모으고 나아가 조그마한 것까지도 역시 보시하지 못한 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너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에는 ‘나는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을 믿는다’고 말하고도 이제는 내가 말한 바를 믿지 못할 뿐 아니라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지 못한다고 하니, 곧 먼저의 말과는 스스로 부합하지 못하는구나. 오직 자주 나에게 세 가지 교장(敎藏)을 묻기만 했을 뿐이지 나의 지혜의 힘과 정진의 일체 모든 일들은 모르고 있느니라.
마나바야, 어떤 사람은 여래의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와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才]의 해설을 들으면 곧 믿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중생으로서 견문도 지혜도 적은 이는 물을 수조차 없으니, 이와 같은 중생은 생각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라. 이런 이들이 여래의 모든 힘과 무소외와 변재 등을 능히 믿고 이해하면서 헤아리고 분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이 업(業)은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니, 반드시 한량없는 백천억 겁 동안 모든 바라밀 등을 수행했어야 비로소 이와 같은 힘과 무소외 등을 믿고 이해할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혹 어떤 중생은 앞서 말한 모든 공덕의 일을 듣고도 믿음을 내지 않는 이가 있나니, 나는 이 사람도 역시 언제나 가르치고 거두어 주면서 끝내 버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너희들은 언제나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17. 인성취품(忍成就品)

“그 때에 전단나 보살이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성취하는 인욕의 힘[忍力]이옵니까? 부처님ㆍ여래께서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인욕 가운데 머무시면서 저 외도의 삿된 스승과 온갖 대중의 백천 가지 어려운 질문에 대해서도 기울거나 동요가 없는 것을 배우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는 인욕의 힘을 묻는구나. 인욕의 힘은 여러 가지인데, 너는 어떠한 인욕의 힘을 묻는 것이냐? 이른바 모든 여래의 인욕이 있고, 모든 보살의 인욕이 있으며, 모든 아라한의 인욕이 있고, 아나함의 인욕이 있으며, 사다함의 인욕이 있고, 수다원의 인욕이 있으며, 팔인지(八人地)14)의 인욕이 있고, 신행인(信行人)의 인욕이 있으며, 또한 모든 외도의 오통신선(五通神仙)의 인욕도 있느니라.
마나바야, 이제 이와 같은 갖가지 인욕의 문이 있는데, 너는 이 가운데서 어떠한 인을 묻는 것이냐?’
그 때에 전단나 보살마하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가운데서 보살의 인욕을 물었나이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인욕을 얻나이까? 온갖 부처님 법을 문득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 어찌 보살의 인욕의 힘이 아니겠나이까? 여래의 큰 인욕의 힘에 의지한 뒤에야 비로소 온갖 부처님의 법을 두루 갖출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또한 실로 여래의 인욕의 힘에 의지하여 부처님 법을 성취하지만, 그러나 일체 부처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니라.
마나바야, 저 인욕이 짓는 바를 너는 살펴서 들어라. 나는 이제 해설하겠느니라.
마나바야, 온갖 보살마하살이 인욕의 힘을 두루 갖추는 데는 무릇 네 가지의 평등한 마음이 있는 줄 알지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일어남에 따라 즉각 깨닫고, 깨닫고 나서는 즉각 능히 다스리면서 끊어 없애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구족하게 성취하는 첫 번째 인욕의 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다른 사람에게 나쁜 말과 욕설과 비방과 헐뜯는 일을 당하거나 혹은 손으로 때리고 치고 하는 갖가지 괴롭고 견딜 수 없는 일을 당하거나 하면, 모두 다 능히 받아들이면서 갚을 뜻이 없으며 또한 원망하는 마음도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이 구족하게 성취하는 두 번째 인욕의 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한량없는 모든 나쁜 중생들이 언제나 나쁜 업을 행하고 은덕을 알지 못하며, 부모에게 불효하고 친척을 사랑하지 않으며, 스승과 어른에게 순종하지 않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지 않으며, 착한 벗을 멀리 여의고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면, 보살은 비록 이와 같은 등의 모든 나쁜 중생들을 보았다 해도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원망함이 없고 그 단점도 구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가르치고 유도하여 선법(善法)에 편히 머무르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구족하게 성취하는 세 번째 인욕의 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중생이 인과(因果)를 믿지 않고서 현재의 쾌락에 탐착하고, 성냄과 분이 많아서 원망하며 싸우며, 남의 허물을 구하기 좋아하고, 삿된 소견과 어리석음으로 바른 법에 어긋난 것을 보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자비를 일으켜 인도하여 기쁘게 한 뒤 정법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구족하게 성취하는 네 번째 인욕의 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응당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인욕 가운데 머물러서 법답게 행한다면 또한 뛰어난 인욕의 힘을 능히 일으키느니라. 인욕과 법은 항시 스스로 상응하는 것이니, 만일 법을 배우지 않으면 능히 인욕하지 못하므로 인욕에 머무르고자 하면 응당 부지런히 배워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로서 인욕을 성취한 이면 반드시 여러 가지의 공능(功能)을 구족하게 얻느니라. 간혹 갖가지 괴로운 일이 그의 몸을 핍박하기도 하나니, 이른바 나쁜 욕설과 헐뜯음과 속박과 매를 맞는 등의 모진 고통으로서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니라.
하지만 보살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도 않고 끝내 두려워함도 없으며, 또한 도망치면서 피하지도 않고 달게 여기는 마음으로 참고 받느니라.
인욕을 완전히 갖출 시에는 저절로 곧 여덟 가지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增上勝功德事]을 얻느니라.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인욕을 성취하고 나면 무릇 태어나 거치는 곳마다 큰 명문(名聞)이 있고, 뭇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찬미(讚美)하는 소리가 널리 퍼지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게 되며, 벗이나 친척들 모두 세간에서 높고 뛰어난 이들이고, 나아가 온갖 하늘ㆍ용ㆍ귀신에 이르기까지 이 보살을 보면 희유한 마음을 내면서 기뻐하고 좋아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의 첫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항상 은덕을 베풀지만, 간혹 어떤 사람은 보살의 은덕을 입고도 은혜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어서 보살의 위력과 수승한 은혜와 모든 공덕의 일들을 보고 듣고도 기뻐하지 않으며, 질투하고 나쁜 마음을 일으켜 보살을 모함하고 해치나니, 이른바 온갖 주술(呪術)과 고매(蠱魅)와 독약과 칼과 몽둥이 등의 갖가지 나쁜 일로 중상(中傷)하려 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보살에게는 이런 인욕의 힘이 있기 때문에 끝내 손해나 파괴됨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두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이 인욕을 갖추고 나면 곧 한량없는 지혜와 변재를 얻어서 갖가지 법문을 잘 연설하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보살이 인욕에 머무르고 난 후에는 세간에 있는 모든 선행(善行)의 중생으로서 부처님ㆍ세존에 대해 배우거나 아라한과 그 밖의 성문에 대해 배우거나 또는 보살마하살에 대해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큰 보리[大菩提]를 섭취(攝取)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의 이치를 묻게 하고, 다시 이 다라니 가운데 제십팔분(第十八分)의 하늘 궁전[天宮殿]의 일을 차례로 끊임이 없게 하고, 그 수다라 가운데에 차례로 능히 들어가 이 제육종(第六種)을 분별하여 수행하게 해서 앞서 말한 바대로 구족하고 결정적으로 요달하기 때문이니,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이 다라니문의 세 가지 업장을 분명하게 해설하고 또 저 일흔두 종류의 구문(句門)을 차별하여 해설할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세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이 인욕을 갖춘 후 대중들에게 경을 독송하고 해설할 때 만일 마음이 산란하거나 다른 일을 생각하다가 외우고 지니던 한량없는 언교(言敎)의 문구와 방편을 간혹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러할 적에는 정거천(淨居天)의 모든 하늘들이 보살을 위하여 내려와서 잊었던 것을 가르쳐 주는데, 이 보살로 하여금 저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재를 더욱 더하게 함으로서 앞서 잊었거나 잘못된 바를 명료하게 하면서 빠뜨림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네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인욕에 편히 머무른 뒤에는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그의 몸은 언제나 한량없는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이니, 이른바 저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세 가지 악하고 중한 고통을 받거나, 나아가 인간의 갖가지 모든 고뇌와 근심과 슬픔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나 저 보살은 인욕의 힘 때문에 나고 죽음 속에서도 두려움이나 변심으로 물러서서 휴식하는 것이 없나니, 무릇 원하고 구하는 바는 뜻대로 얻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다섯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이 인욕을 갖추고 나면, 인욕의 힘 때문에 비록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세 가지 악도[三惡道]의 고통에 처한다 하더라도 놀람과 두려움을 내지 않고, 여덟 가지의 재난[八難] 가운데서도 역시 놀람과 두려움을 내지 않으며, 나고 죽는 오랜 고통에서도 역시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저 보살은 인욕의 힘 때문에 비록 큰 불덩이가 허공에 가득 차 몸이 그 속에 처한다 하더라도 역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끝내 물러서는 일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이 인욕에 안주(安住)할 적에는 자기의 몸을 보지도 않고 또한 머무르는 곳도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여섯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인욕을 성취하고 나서는 공덕을 좋아하고 즐기면서 언제나 보시를 행하며, 보시할 적에는 먼저 평상[床座]을 버리나니, 이 때문에 내생에 무릇 태어나는 곳마다 대종성[大姓]과 큰 집안[大家]이며, 태어난 뒤에는 곧 네 가지의 공덕을 얻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음식과 재물이니, 이른바 곡식과 음식 거리, 나아가 의복과 값진 보물이어서 모자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둘째는 친한 벗[親友]과 권속이니, 이른바 부모와 노비며 하인이어서 모자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셋째는 걸림 없는 변재에 안존하는 것이니, 이른바 무릇 그가 태어나는 곳마다 몸과 마음이 쾌락하여 끝내 마음에 거슬리거나 맞지 않은 일이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변재(辯才)를 얻어서 상속하여 끊이지 않으며, 이르는 곳마다 거의 변재의 묘한 말로써 중생을 인도하고 이롭게 하느니라.
넷째는 태어나게 되면 다른 이의 사랑과 공경을 받나니, 이른바 무릇 태어나는 곳마다 형체가 단정하고 장엄하여 사람과 하늘로서 보고 듣는 이마다 기뻐하지 않음이 없으며,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중생들에게 큰 이로움을 주기 때문에 언제나 중생들에게 존중을 받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이 일곱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보살은 이 일곱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나면 수행하는 곳에서 장애가 없게 되나니, 이른바 사람이나 하늘이나 범(梵)이나 악마 내지 귀신에 이르기까지도 훼방을 놓지 못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인욕을 완전히 갖추고 나서 출가할 때에는 온갖 처자(妻子)ㆍ가속(家屬)과 자재(資材)와 진보(珍寶)를 모두 능히 버리나니, 인욕의 힘 때문에 나시는 염착(染著)하지 않고 모든 그 밖의 번뇌도 장애하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이 온갖 곳에서 장애가 없고 나서 만일 성문승(聲聞乘)을 성취하고자 하면 곧 아라한의 과위와 선정(禪定)의 해탈ㆍ무애변재(無礙辯才)를 능히 증득하게 되고, 만일 연각승(緣覺乘)을 성취하고자 하면 혹 부처님이 세간에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정법(正法)이 소멸한 뒤에 인연을 관찰하여 벽지불을 얻게 되며, 만일 가장 훌륭한 상승(上乘)인 모든 부처님이 행하는 바인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성취하여 원만함을 구족하고자 하면 곧 위없는 보리[無上菩提]를 능히 성취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인욕을 갖춘 보살마하살의 여덟 번째 으뜸가고 뛰어난 공덕의 일이니라.”

18. 증열반품(證涅槃品) ①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때에 전단나보살마하살이 다시 방광여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이 다라니경(陀羅尼經)에서 이미 제7의 사량법의(思量法義)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법문 중 1구(句)의 별의(別義)를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희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앞서 억수입(億數入)이라는 하나의 법문(法門)을 말씀하셨는데, 이 법문에 대해 제가 이제 묻고자 합니다. 만일 부처님ㆍ여래께서 말없이 허락하시는 분이라면, 어찌 이 세 가지 언교의 방편 업장[言敎方便業藏]의 묘한 법문을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저희들은 이 제7 법구(法句)의 억수 법문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이 억수의 모든 보살 대중으로 하여금 곧 매우 깊으며 두려움 없는 곳으로 분별하여 들어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방편으로 이 억수 보살들의 장래의 이로움을 위하여 이 제7구 법문의 백천억수(百千億數)를 말씀하시어 뜻[義]를 사유하는 곳에 차례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 연설해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저희들도 분수에 따라 이 법문의 뜻을 받아 지니겠습니다.’
아난아, 그때에 방광여래께서는 저 전단나보살마하살을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마나바야, 너는 이제 이 매우 깊은 법문에 대하여 묘하게 이름을 지었고, 또한 언교 업장을 잘 받아 지녔으며, 뜻 또한 그와 같구나.
마나바야, 너는 이제 이 억수 보살 대중의 인연을 위하여 나에게 이런 뜻을 묻는구나. 이처럼 마나바야, 너는 지금 억수 법문에 드는 것을 듣고자 하느냐?’
전단나보살이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만일 부처님ㆍ여래께서 이 제7의 사유구(思惟句)의 뜻을 말하게 되면 곧 이미 이 억수 법문을 포섭한 것이다.
마나바야, 여래ㆍ세존께서는 이 세 가지 방편 언교에 대하여 가르쳐 보이고 널리 연설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그러한 뒤에 이 억수 법문을 알아 차례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그때 전단나가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억수 법문에 들어가며, 무엇 때문에 억수 법문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그리고 저는 들어가게 되는 곳[所入之處]을 알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 억수 법문에 들어가게 되는 곳을 물었으며 또한 증득하여 알고자 합니다. 만일 깨달아 알게 되면 반드시 받아 지닐 것이며, 다시 이 억수 법문의 들어가게 되는 곳을 더욱 증장시키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아는 바처럼 이 법문에 들어가서 인욕의 권속의 뜻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실로 이 대중 가운데 어느 한 보살도 이 깊은 인욕의 문[忍門]을 성취하지 않은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일을 보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이와 같은 의처를(義處)를 묻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의처는 실로 저 게을러빠지고, 이익만을 탐착하며, 정념(正念)이 없고, 잠을 많이 자기를 좋아하며, 마음이 언제나 산란하고, 세상일에 즐겨 빠진 이는 이와 같이 깊고 큰 법문을 물을 수조차 없으며 또한 듣고 읽고 외우고 받아 지녀 사유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말씀하신 대로 닦아 증득할 수도 없습니다.’
아난아, 그때에 전단나가 이렇게 청하고 나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전단나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 이 억수 법문에 들어가서 스스로 받아 지닐 걸 염(念)하면서 일심으로 함께 하며 다른 일에 반연하지 말며, 마음이 산란하지도 않고 몸에 동요도 없어야 할 것이며, 너희들은 다시 이 법률(法律)을 지니면서 다툼의 뿌리[諍根]를 없애야 한다.
마나바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옛날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菩薩行)을 행할 적에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어려움과 모진 고통을 두루 겪었으며, 그 고통을 받을 적에는 이미 오랫동안 인욕의 지위[忍地]에 머물렀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용맹하게 정진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이 진제법문(盡際法門)에 들어가서도 이 말뜻[語義]을 아직 다하지 못하게 되면, 이 가운데서 언제나 부지런히 배워야 하고, 인욕의 힘을 성취하여 구족하게 정진해야 하니, 끝내 이 법문을 버리지 않는 이는 반드시 마음을 고요히 하고 그러한 뒤에 증득하여 알 것이다.’
전단나가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 어떤 것을 여래의 일구법문(一句法門)이라 합니까? 저희들이 받아 지닌 뒤에 수다라의 억수의 법 가운데서 그 뜻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이 뜻을 듣고 싶습니다. 어떠한 방편으로 가장 수승한 법[最勝法]을 가르치셔서 저희들이 즉시 들어가고 혹은 온갖 법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두 가지 뜻[義]은 네가 증득하여 알아야 하며, 또한 차례로 억수의 법에 들어가고, 아울러 진제문의 구절의 뜻[句義]이 머무르는 곳에 들어가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온전히 분별한 뒤에는 그 어떤 이라도 이와 같은 공덕과 청정한 지계(持戒)를 성취하여 비로소 저 온갖 법문에 들어갈 수 있으니, 모름지기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또한 낱낱의 털구멍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장애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면서 마땅히 변재(辯才)를 다하여 법답게 널리 연설해야 한다. 무엇이 마음을 일으키는[作心] 것인가? 이를테면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을 내고 위덕(威德) 있는 마음을 세워서 온갖 하늘과 사람의 대중 가운데 뛰어난 것이 마치 사자왕이 큰 자재함을 갖추어 이른바 범과 표범과 승냥이와 이리며, 나아가 야간(野干)과 여우와 살쾡이의 족속 등 일체 모든 짐승들을 항복시키는 것과 같다.
법사도 그러해서 설법할 때는 ‘나는 중생을 언제나 돕고 인도하며, 나아가 온갖 하늘 악마와 외도와 모든 이론의 스승[異論師]들을 모두 조복하고 거두는 것이 마치 저 사자가 위력으로 야간을 제압하듯이 하리라’고 마음을 내야 하니,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나서 그러한 뒤에 그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한다.
또한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보리수 아래의 도량에 앉았을 때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 인해서 오른 손바닥으로 땅을 누르면 한량없는 억수의 큰 광명의 그물이 나와서 하방(下方)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두루 비추는데, 그 세계 안의 온갖 중생으로서 법을 받을 수 있는 이는 이 광명을 만난 후 저절로 곧 법을 깨닫고 법을 증득하느니라.
또한 이 광명이 무릇 미치는 온갖 세계의 그 세간에는 한량없는 많은 대중들이 있나니, 이른바 사문의 대중과 바라문의 대중과 외도의 대중과 천마(天魔)의 대중과 또는 악마의 교화를 받은 이들인데, 혹은 묻거나 혹은 대답하거나 혹은 권하거나 혹은 청하거나 간에 모두가 보살의 옛 본원(本願)과 큰 서원으로 장엄한 정진의 힘 때문에 손으로 땅을 누를 적에 그 모든 대중들의 온갖 하는 일은 흩어지고 소멸하지 않음이 없으며, 설령 존재하는 것이 있다 하여도 다시는 위광(威光)이 없고, 다시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귀머거리와 벙어리 같으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보살이 있는 지방에서 손으로 누르는 곳은 광명의 그물이 나오는 것처럼 곧 한량없는 억수의 법문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처음 진제법문(盡際法門)에 들어가서 두루 갖추어 결함이 없는 것이니라. 나는 이제 설하여 마쳤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너희들이 이 가장 청정한 진제법문에 들어가고자 하면 이름하여 천만입(千萬入)이라고도 하고 또한 억입(億入)이라고도 하나니, 모름지기 맨 먼저 청정하고 깊은 마음으로 사유하고 관찰해서 모든 의심의 그물을 끊고 묘한 음성을 내면서 변재를 성취하고 그런 뒤에야 들어갈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을 이름하여 진제법문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것이니, 너희는 자세히 들어야 하느니라.’
그 때에 모든 보살들은 다 함께 말하였다.
‘그러하리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는 이제 진제법문을 알아야 하리니, 그 들어가는 것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어떤 것을 진제법문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름[名字]은 허공으로부터 생긴 것이니, 너희들은 응당 이 언교의 법[言敎法]이 마치 허공처럼 변제(邊際)가 없어서 끝내 허공의 가[邊]와 분량[量]을 설명할 수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처럼 들어간다[入]는 이치는 허공에서 생겨서 되돌아 허공에 의지하나니, 마치 저 바람[風界]이 허공에 의지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가[邊]나 분량이 없고 또한 머무르는 곳도 없으며 얻어 볼 수도 없고 또한 말로 설명할 수도 없나니, 두 가지 인연 때문에 언설 내지 온갖 동요와 가고 옴이 있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허공이 결국 지을 수 있는 모양이 없는 것처럼, 이처럼 이 법문에 들어가는 차제(次第)의 곳도 오직 그 마음의 모양[心相]만으로 부지런히 힘쓰면서 방편으로 모든 법의 이치를 구하며 한마음으로 잘 사유하면서 법답게 관찰할 뿐이니라. 이미 관찰한 뒤에는 곧 억수(億數)의 진제법문에 들어가게 되면서 자재한 곳[自在處]을 얻으며, 그로 인하여 보시의 사업을 일으켜 수행하고 그러한 뒤에 널리 연설하여 구족하게 모든 바라밀을 성취해서 다른 의심을 끊어 없애고 법의 이치를 열어 드러내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제팔의 진제법문이요, 모든 부처님의 십력과 사무소외이며, 한량없는 변재로써 법을 설하고 이치를 논하는 것이니, 오래도록 닦았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서 도무지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 여덟 가지 진제법문과 보살이 오른손으로 땅을 누르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이치를 말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이 땅의 곧장 아래로 백억의 세계를 지난 그 세계에서는 오직 광명만으로 불사(佛事)를 건립한다는 것을 말하느니라. 만일 모든 중생이 교화를 받을 수 있을 때 그 광명을 보고 접촉하면 곧 이로움을 얻게 되나니, 모든 보살들 내지 일구(一句)의 법문과 업행(業行)을 해설하지 않았어도 그 중생은 이미 바른 법을 이해하였느니라.
마나바야, 저 모든 보살들이 오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못했어도 저 중생들은 이미 부처님의 지혜[佛慧]를 증득했고 모든 법사들도 역시 이와 같이 바른 법을 이미 받아 지녔느니라.
마나바야, 이 일이야말로 희유하고 불가사의하느니라. 저 보살들은 한 구절, 한 글자를 설하지 않고서도 오직 손으로 땅을 누르는 것만으로 한량없고 가없는 세계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널리 법을 증득하고 구족히 기쁘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저 모든 보살에게 있는 한 글자는 공(空)하다 칭하지 않으니, 옛날의 정진과 원지(願智)의 힘의 인연 때문에 손바닥으로 땅을 누르면서 중생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내가 오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방편과 비유로 해설하지만, 이 중생들은 듣기를 좋아하지 않고, 나의 법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받들어 행하지도 못하고, 또한 증득하여 알지도 못하며, 나아가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느니라. 내가 지금 이 허공과 같은 곳에서 생기는 법을 설하여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내가 다시 깊고 비밀하며 수승한 법[深密勝法]을 해설하고 있는데 어떻게 진실한 정혜(定慧)를 낼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모든 법의 수효[法數]와 차례와 이름은 저 사대(四大)가 화합한 것이고, 또한 이것은 오음(五陰)으로 의지하며 육입(六入)의 처소이니, 모두가 허공으로부터 생기는 바로서 다만 망상의 분별 때문에 명색(名色)과 사대가 같은 분량의 화합이 있을 뿐이니라. 이 이치를 널리 연설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는 다만 어리석은 모든 중생들을 섭수하기 위하여 음(陰)ㆍ입(入) 등을 말할 뿐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어린아이에게 처음 학문을 가르칠 적에 부모가 그를 데리고 가서 스승에게 맡기면 먼저 글의 근본[章本]을 통하게 하고, 그러한 뒤에 그 밖의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처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저 어리석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먼저 사대의 이치를 분별함을 최초의 처소로 삼아서 차례로 저 중생의 모든 음(陰)을 해설하는데, 먼저 그 이름을 밝히고 나중에 음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느니라.
마나바야, 알아야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나는 다만 색(色) 등의 다섯 가지 법[五法]이 합한 더미가 음이 된다는 것을 널리 연설할 뿐이요, 진실로 색 등의 더미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나니, 중생이 알지 못하고서 망령되이 분별하기 때문에 색 등의 더미를 취하여 반드시 진실한 것이라고 여기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세간에 두 개의 발자취가 있는데, 하나는 먼지를 밟아서 이루어지고, 또 하나는 진흙을 밟을 적에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두 자취는 분별하는 가운데 모두 자취의 이름을 얻는 것이니, 바로 세간에서 분별하는 언설이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치 박사(博士)가 저 어린아이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글씨를 판(板)에다 쓰면서 글의 장[章]과 구(句)를 이루는 것과 같나니, 이것도 역시 세간에서 분별하는 언설이니라. 실로 저 참된 법계[眞法界] 가운데서는 본래부터 그 자취[跡]가 없거늘 어떻게 구(句)가 되겠느냐? 이처럼 진실[實] 가운데서 그 자취와 구를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도 없고, 분별 때문에 자취와 구가 있다고 보아도 마침내는 자취와 구의 차별은 없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여래가 해설하는 음(陰)과 그 이치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이른바 색(色)이란 온갖 오음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처음에 이 뜻을 설명하기 때문에 음이라고 세우며, 비록 색음(色陰)을 말한다 하더라도 다만 색 스스로가 음일 뿐 마음[心] 등을 얻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두 번째에는 다시 수음(受陰)을 세우느니라.
색(色)과 수(受)를 비록 정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상(想)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에는 세 번째로 다시 상음(想陰)을 세우고, 색과 수와 상의 세 가지를 비록 차례대로 설명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네 번째로 다시 행음(行陰)을 설명하며, 비록 행(行)을 설명한 뒤라 하더라도 그 행의 온갖 것은 얻어 볼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행온은 이미 보거나 알 수 없거늘 어떻게 오온의 수효에 넣을 수 있겠느냐? 이 때문에 그 가운데에 다시 식음(識陰)을 세워서 다섯 번째로 삼았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이와 같이 갖가지 방편과 비유의 언사(言辭)로써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을 열어 보이나니, 다만 온갖 어리석은 중생들이 참된 법[眞法]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짐짓 세간의 이름을 붙여서 임시로 말하게 된 뿐이며, 저 지혜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역시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너는 저 색(色)이 어느 곳에 머무른다고 여기느냐? 저 색은 머무르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저 색이 이미 없거늘 어떻게 머무르는 곳이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와 같은 많은 방편과 비유로써 차례로 설명한 뒤에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저 법이 이미 없거늘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는 다만 소멸하여 다한다[滅盡]는 이치일 뿐임을 알아야 하나니, 이 소멸하여 다한다는 이치를 누가 있어서 깨닫는단 말이냐? 이 이치는 또한 여래가 모든 성인의 지혜[聖智]를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니라.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어찌 온갖 중생들에게 인색함이 있겠느냐?
마나바야, 너는 응당 생각하기를, ‘여래가 일찍이 어떠한 중생들의 처소에서도 법을 아까워하여 설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라고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법을 널리 연설할 적에 끝내 질투나 숨기고 감추려는 마음이 없나니, 다만 중생이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만 관찰할 뿐이니라. 만일 받을 수 있는 이면 도리어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은 등의 법을 연설하였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다라니 법문의 명자(名字)와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業藏)은 역시 억수와 진제법문에 들어가는 서원과 지혜의 힘인데, 까닭 없이 망령되이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할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전륜왕의 훌륭한 음식을 기와 그릇 속에 담아 둔다면 이것은 도리가 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내가 오랜 세월 동안 보살행을 행할 적에 한량없는 겁 가운데서 큰 고뇌를 받으면서도 그토록 원하고 구한 바는 ’어떻게 하면 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법을 이해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다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법을 증득한 뒤에 안온한 즐거움을 받게 할까?’였느니라. 나는 금일 이미 보리(菩提)를 이루었으므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큰 법륜(法輪)을 굴리고 있거늘, 어찌 너희들을 다시 애착하면서 널리 연설하지 않겠느냐? 만일 중생으로 하여금 욕락(欲樂)이 있게 하는 것이면 나는 마땅함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내가 기억하건대 오랜 옛날 부처님ㆍ세존이 계셨으니, 명호는 보관(寶觀) 여래ㆍ응공ㆍ정변각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완전히 갖추시고 세간에 출현하셨느니라.
그 부처님ㆍ세존께서 처음 도솔천에서 어머니 태 안으로 내려오실 때에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의 온갖 세계를 두루 비추셨고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항시 끊어지지 않았느니라. 보살이 탄생하실 때 삼천대천세계의 대지(大地)와 모든 산과 나무며, 뭇 약초와 돌ㆍ모래ㆍ기와ㆍ조약돌의 이와 같은 일체가 다 능히 말을 하였고 뭇 보배로 변했느니라.
마나바야, 그러하느니라. 보살은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곧 범행(梵行)을 수행하였고,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가하였으며, 그 때에 십팔억의 모든 중생들이 보살을 따라 다 함께 같이 출가해서 도량에 나아가 보리수를 보았고, 또한 꽃과 풀이 온갖 보배를 다 이룬 것도 보았느니라.
보살이 생각하기를, ‘반드시 풀로 된 자리에 앉아야겠는데, 이제 여긴 풀이 없으니 나는 무엇을 가져다 깔아야 하느냐?’고 하자, 그 때 천제석(天帝釋)이 보살의 마음을 알고서 즉시 구억이나 되는 천상의 좋은 옷을 가지고 보리수로 나와서 자리를 깐 뒤 보살의 주위를 공경스럽게 돌고는 청하였느니라.
‘인간의 사자왕이시여, 이 자리에 오르소서.’
그러자 보살이 대답하였느니라.
‘나는 이미 자리를 받았으니, 그대는 이제 먼저 하늘 궁전에 돌아가 있다가 내가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 것을 들으면 그 때 여기로 와서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을 받들어 뵈어야 하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제석은 예배하고 궁전으로 돌아갔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그 때에 그 보살은 날이 저물어서야 보리수 아래로 나아가 결가부하고 앉았는데 안온하고 견고함이 마치 금강(金剛)과 같았으며, 이날 밤 초분(初分)에 숙명명(宿命明)을 얻었고, 밤의 중분(中分)에 천안명(天眼明)을 얻었으며, 밤의 후분(後分)에 누진명(漏盡明)을 얻었었느니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