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6권
대법거다라니경 제6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12. 삼법장품(三法藏品)
“그 때에 방광여래는 다시 비사거(毘舍佉)에게 말씀하셨다.
‘비사거야, 내가 해설한 세 가지 업장(業藏)의 뜻을 잘 생각하면 곧 온갖 법문(法門)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비사거야, 만일 사람이 이 법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좋아하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은 끝내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사람은 이와 같은 바른 법을 구족하며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응당 선지식(善知識)에 의거하여 깊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배워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비유하면 파리주(頗梨珠)나 유리주(琉璃珠)와 같은 묘한 보배나 아울러 그 밖의 청정한 보물을 연못가에 놓아두면 그 물이 보물의 빛깔과 같아지게 되는 것과 같으니, 까닭인즉 이 보주(寶珠)의 청정한 힘 때문에 멀리서 서로 비추어 그 물로 하여금 보물의 빛깔을 따르게 하는 것이니라.
그렇고 그러하나니, 비사거야, 온갖 중생들이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는 그 일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또한 그 물속에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던져 넣어도 역시 보물의 빛깔이 되며, 이 보물의 위광(威光)이 그것을 다른 빛깔로 능히 변화하게 하는 것이니, 이 보물 외에는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느니라.
비사거야, 지금 이 세 가지 방편의 업장도 역시 그와 같나니, 만일 사람이 스스로 배우거나 다른 이로 하여금 배우게 하면 온갖 사람과 하늘로서는 능히 파괴하는 이가 없느니라.
비사거야, 이 세 가지의 업장은 바로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언교(言敎)이니, 일체의 것을 드러내어 말하는 언어(言語)와 음성(音聲)과 말씨[詞辯]와 논란(論難)과 해설하는 뜻[解義]이며, 모든 비유는 모두가 다 이 세 가지 교장(敎藏)으로부터 생기느니라.
비사거야, 만일 사람이 세 가지 교장의 뜻을 받아 지니면 끝내 저 외도와 삿된 이론[邪論]에 파괴당하지 않느니라. 가령 염부제에 가득 찬 한량없는 사람들 모두가 총명한 외도의 대논사(大論師)들이 된 후 그들 모두가 와서 갖가지로 어려운 것을 묻는다 해도 끝내 굴복할 수 없느니라.
비사거야, 염부제 안에 가득 찬 논사들은 차치하고, 가령 이 사천하 안에 가득히 찬 중생들 모두에 이르기까지 능히 논의하고 어려운 것을 묻는다 하여도 역시 굴복할 수 없느니라.
또한 비사거야, 사천하는 차치하고,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찬 중생들의 일체가 다 대논의사(大論義師)로서 부처님의 경전과 외도의 서적을 모조리 능히 받아 지닌 후에 그들이 모두 일시에 어려운 것을 묻는다 하여도 모두 다 능히 대답하며 걸림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 법에서 먼저 이 세 가지 방편을 거치며 배웠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사거야, 법사(法師)로서 집에서 살거나 출가하거나 간에 다만 이 세 가지 법장(法藏)만을 능히 받아 지니면 온갖 어려운 질문에도 뜻에 따라 능히 대답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법은 곧 한량없고 가없는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니라.
비사거야, 이 법은 희유(希有)하고 불가사의한지라 이름하여 일체 세간에서 무너뜨리기 어려운 경전이라 하느니라. 내가 지금 간략하게 해설한 것조차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많이 해설하는 것이랴?
비사거야, 그는 오래 지혜의 방편을 익혀야 비로소 이 세 가지의 업장 분별할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의 지혜는 깊고 크지만 중생의 마음은 조그마한지라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큰 지혜를 만일 능히 이해하고 안다면 온갖 중생들의 한량없는 의심 그물을 끊어 없애 줄 수 있느니라.
또한 비사거야, 만일 사람이 비록 이 세 가지 업장의 언교를 능히 받아 지닌다 하더라도 만일 방편을 알지 못하면 깨달음의 방편을 알지 못하거늘 어떻게 하여 이것을 해석할 수 있겠느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이와 같이 말씀을 마치시자 비사거는 다시 방광여래께 물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업장의 근본은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나이까?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에 이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사거야, 내가 도리어 너에게 물으리니 너희 뜻대로 대답하여라.
비사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와 같은 바람[風界]은 어디서부터 생기느냐?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 좁은 것이냐, 넓은 것이냐? 긴 것이냐, 짧은 것이냐? 거친 것이냐, 미세한 것이냐?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이르는 것이냐? 성씨는 무엇이고 집은 어디이며, 마을은 어디이고 고을은 어디이며, 성(城)은 어디고 나라는 어디이며, 나아가 이와 같은 것이 생기는 곳[生處]과 분제(分齊)와 형량(形量)과 대소(大小)며 오가며 의지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느냐?’
비사거가 말하였다.
‘모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바람은 알 수 없사오니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볼 수 없사오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나아가 집이나 성씨[姓]나 생기는 곳도 모두 알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바람은 허공으로부터 생겨서 의지하거나 머무는 데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으면서 온갖 처소에 두루하나이다.’
‘그러하느니라. 비사거야, 바람은 허공에서 나오고 방소가 없으며 집이나 성씨나 생기는 곳도 실로 알 수 없느니라. 의당 그와 같아서 세 가지 업장의 언교와 방편도 역시 방향이나 처소가 없어서 좇아오는 바도 없고 도다랳 가는 곳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한량없어서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만 알 뿐이기 때문이니라.
마나바(摩那婆)야, 이 세 가지 업장은 진실로 알 수 없고 끝내 그 변제(邊際)와 수량조차 얻을 수 없으니, 일 겁 또는 감일(減一) 겁, 백 겁, 백천 겁 또는 백천 나유타 겁 나아가 한량없고 가없는 셀 수 없는 겁을 지난다 해도 역시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님ㆍ세존이라야 비로소 이 세 가지 업장을 능히 아시어 그 근성(根性)에 따라서 설할 뿐이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이 세 가지 언교는 머무르는 곳도 없고 변제도 없나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보리(菩提)는 머무르는 곳이 없고 또한 의지(依止)함도 없으며, 나아가 행업(行業)과 인연(因緣)의 체성(體性)도 어디서부터 오는 데도 없고 또한 이르는 데도 없느니라. 만일 이와 같이 알면 곧 업장은 머무는 곳이 없어서 한량없고 가없다는 걸 아느니라.’
그 때에 비사거 바라문은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업연(業緣)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비사거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처음 태(胎)에 들어갔을 때를 무엇이라 하느냐?’
비사거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는 이를테면 수계(水界)로서 이름하여 가라라(迦羅邏)라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가라라가 첫 칠 일을 지나면 다시 무엇이라고 하느냐?’
‘알부타(頞浮陀)라 하나이다.’
‘이 알부타가 칠 일을 지나고 나면 다시 무엇이라 하느냐?’
‘비라시(鞞羅尸)라 하나이다.’
‘이 비라시가 칠 일을 지난 뒤에는 다시 무엇이라 하느냐?’
‘가나(伽那)라 하나이다.’
‘이 가나가 7일을 지난 뒤에는 다시 무엇이라 하느냐?’
‘세존이시여, 이 가라라ㆍ알부타ㆍ비라시와 가나 등이 지난 뒤에는 수(受)라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사거야, 이 수는 본래부터 실다움이 없고 오직 허망함이 있을 뿐이고, 허망한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기는 줄 알아야 하나니, 이로 인하여 온갖 몸뚱이와 뼈마디[支節]가 생기게 되느니라.
이른바 다섯 가지 포[皰]가 생겼기 때문에 가죽과 살이 생기고, 가죽과 살이 생겼기 때문에 힘줄과 뼈가 생기며, 힘줄과 뼈가 생겼기 때문에 골수와 뇌[髓腦]가 생기고, 골수와 뇌가 생겼기 때문에 머리칼과 터럭이 생기며, 머리칼과 터럭이 생겼기 때문에 손발톱과 이가 생기고, 손발톱과 이가 생겼기 때문에 온갖 몸뚱이와 뼈마디가 생겼느니라.
이와 같은 온갖 몸뚱이와 뼈마디 모두는 어디서 오는 곳도 머무르는 데도 없으며 모두 인연으로부터 화합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오음(五陰)ㆍ십이입(十二入)ㆍ십팔계(十八界)의 모양과 형색과 크고 작고 길고 짧음 모두는 역시 어디서 오는 곳도 머무르는 곳도 없느니라. 그것이 만일 진실로 존재한다면 응당 가고 오는 것이 있어야 하거늘, 이와 같이 일체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전혀 알 수가 없고 이미 이름도 없는데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비사거야, 만일 부모의 인연이 화합하는 바로 이때는 식의 갈래[識支]가 태(胎)에 의탁하면서 가라라대(迦羅邏大)를 이루게 되므로 장(藏)이라고 하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만일 그 부모가 화합하지 않을 때에는 가라라대도 없고, 나아가 가죽ㆍ살ㆍ힘줄ㆍ뼈와 모든 골수ㆍ뇌ㆍ머리칼ㆍ터럭ㆍ손톱ㆍ발톱ㆍ이의 온갖 몸뚱이도 없겠거늘, 어떻게 빛깔과 형상과 길고 짧음, 오음ㆍ십이입ㆍ십팔계ㆍ십이인연이 머무르는 곳과 오가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 만일 이 식(識)이 한 방울의 정수(精水)와 화합하여 태 안에 처하지 않는다면 형색 등의 사물은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느니라.
또한 만일 십이인연의 형상이 화합하지 않는다면 늙고 죽음[老死]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생기지 않으며, 만일 생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름이 있고 설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이처럼 비사거야, 다만 십이인연으로 상속(相續)하는 힘 때문에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이 화합하면서 생기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이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은 방소(方所)도 없고 변제도 없으며 또한 오가는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법은 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근본도 없어서 다할 수도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비사거야, 의당 이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세 가지의 업장이라 하는가? 첫째는 사람의 언교 업장[人言敎藏]이요, 둘째는 하늘의 언교 업장[天言敎藏]이며, 셋째는 사람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언교의 업장[非人非天言敎之藏]이니라.
바라문아, 이른바 사람의 언교 업장이란 모두가 언어(言語)의 형상이니, 응당 사람의 언교를 이름한 걸 알아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른바 하늘의 언교란 사상(事相)이 다르기 때문에 보고 듣게 되지만 여실(如實)하여 다르지 않은 것이니, 이와 같은 마음을 내고 이와 같은 사유(思惟)를 내는 방편을 안 뒤에는 선정(禪定)ㆍ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천심의 지혜[天心智]를 능히 얻느니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는 힘 때문에 이와 같은 청정한 지혜가 생길 수 있나니, 이것을 최상의 청정한 하늘의 언교라고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른바 사람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하늘의 언교장이란 큰 자비로 세 가지 언교를 낳아 거두어서 삼승의 도[三乘道]와 온갖 법에 뛰어난 것이니, 이 때문에 장(藏)이라 하느니라.
이 교(敎)의 방편은 대비(大悲)의 과(果)에 의지하여 온갖 처소에 두루한데, 악도(惡道)에서의 모든 중생들이 오직 고통만 있는 것을 관찰하여 일심으로 구제하려고 할 뿐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대비(大悲)라고 하며, 그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언교(言敎)라고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 세 가지 업장[三業藏]이 생기고 머무르는 곳은 모든 불보살들이 언제나 일심으로 염(念)하면서 수호하여 지니느니라.’”
13. 법사상품(法師相品)
“‘또한 바라문아, 가지(加持)하는 힘이 항상 정진(精進)을 인해 생기는데, 무엇을 가지하는 힘이 정진을 인해 생기는 것이라 하느냐?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구족히 여래의 변재[如來辯]를 얻고자 하면, 모두가 부지런한 마음의 정진을 통해 이루는 것이니, 일시(一時)에 백천만억의 수다라의 장구(章句)를 설하여도 다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는 구업(口業)을 잘 성취하고 가지하는 힘으로 인하여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를 얻기 때문이니, 이 변재 때문에 온갖 문답에 대하여 마르지도 끊어짐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높은 계곡에서 세찬 물이 흘러 아래로 쏟아져 내릴 때에는 비록 막아서 정지시키려 해도 끝내 끊어짐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 흐름이 내려갈 적에는 작은 물줄기도 오히려 끊어서 막기 어렵거든 하물며 큰 강물이랴?
이처럼 비사거야, 만일 어떤 법사(法師)가 이 세 가지 언교의 업장에 대하여 변재를 닦아 익히되 하루만이라도 듣거나 독송하거나 다시 사유하면, 그 정진 때문에 마땅함에 따라 연설함이 오히려 끊어짐이 없거늘 모든 그 밖의 어려운 질문으로 어찌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비사거야, 비유하면 마치 샘물이 흘러서 오직 강물에만 들어가고 바다에는 이르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만일 사람이 오랫동안 이 다라니를 닦고 정진하면 중도에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내가 지금 조금만 해설하는 것은 마치 큰 바다 안에서 한 방울의 작은 물을 뜬 것과 같거늘 어찌 손해되거나 줄어들 수 있겠느냐? 내가 이제 이 다라니의 정진과 변재 법문의 조그마한 부분을 해설하는 것도 역시 손해되거나 줄어듦이 없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너는 저 세 가지 업장의 변재(辯才)를 얻으면 일체 모든 법의 근저(根底)를 능히 비주는 줄 알아야 하나니, 모든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가히 다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법문은 끝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비사거야, 그 어떤 이라도 이 정진의 가지(加持)로 변재의 장(藏)을 얻은 이라면 어려운 질문을 당했을 때나 혹 다른 이가 헐뜯고 욕하여도 응당 기쁨을 내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욕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나와 남이라 관하지도 않으며 아소(我所)도 없고 또한 두려워함도 없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온갖 안팎에 있는 모든 두려움과 악이 모두 소멸하여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비사거야, 만일 모든 법사가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사부 대중에게 둘러싸인 채 설법하면, 이와 같은 대중들 가운데에는 오래전부터 배워왔던 이도 있을 것이며, 혹은 처음 듣는 이가 있기도 할 것이며, 혹은 신심(信心)이 있기도 하고 혹은 믿지 않은 이도 있기도 할 것이니라. 또한 그 가운데 중생으로 만일 여인의 모습이 단정한 것을 보면 염착(染著)하는 마음을 내면서 법에 관한 기억[法念]을 잊어버리는 이도 있으리라.
그 때에 법사는 응당 잘 관찰하여 오묘한 방편으로 그 사람을 조복하고 죄상(罪相)을 분명하게 보임으로서 그를 각오(覺悟)시켜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성을 내게 하지는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그가 성을 내고 원망하면서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때로 법사를 헐뜯고 욕하거나 경전을 비방하거나 하여 불법을 장애하는 허물이나 우환이 더욱 더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사거야, 만일 법사로서 꾸짖거나 그 일을 조복하려 하는 이면, 응당 먼저 스스로 욕(欲;욕심)ㆍ진(瞋;성냄)ㆍ치(癡;어리석음)ㆍ만(慢;교만)을 제거한 뒤에야 가르치고 꾸짖어서 다른 이로 하여금 이것을 없애고 끊게 해야 하느니라. 만일 자기 자신이 끊지도 않고서 다른 이로 하여금 제거하게 함은 옳지 못하나니, 이 때문에 법사는 반드시 먼저 자신이 행한 후에야 사람을 바르게 해야 하지 먼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해서 스스로 자기의 덕을 이지러뜨리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비사거야, 온갖 중생의 탐욕의 속박은 깊고 두꺼워서 탐욕의 경계가 나타날 때는 제 몸을 돌보지도 않기 때문이니, 만일 방편을 버리고 먼저 꾸짖게 되면 오직 성내는 때[瞋垢]만 더하는 것으로서 마치 불에 땔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을 뿐이니라. 성냄이 왕성할 적에는 어리석음은 다시 더욱 자라나 삼독(三毒)의 번뇌를 한꺼번에 같이 짓게 되며, 모든 중생에게 삼독이 왕성하게 일어나면 그 밖의 말은 들리지도 않고 자기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선법ㆍ악법 일체를 알지 못하니, 설사 잠깐 동안 들었다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느니라.
비사거야, 저 모든 중생들에게 삼독이 일어나면 마치 소경이 길의 평탄함과 험난함을 모르는 것과 같고, 또한 귀머거리가 음성의 거칢과 정묘함을 듣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술에 취한 사람이 동ㆍ서ㆍ남ㆍ북의 방소를 가리지 못한 것과 같고, 귀신에 홀린 이가 그 처소가 불안하여 미쳐서 허망한 말을 하는 것과 같나니, 온갖 중생들에게 독의 불[毒火]이 마음을 태우면서 선악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비사거야, 이와 같이 중생에게 번뇌가 왕성할 때 법사는 응당 그를 위하여 다스리는 법과 부정관(不淨觀) 등을 말해 주어서 그로 하여금 빨리 무루의 지혜[無漏智]를 얻어서 삼독의 모든 번뇌가 타버리게 해야 하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이것이 큰 지혜와 변재를 지닌 법사가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등의 사부 대중을 능히 방편으로 깨우치고 인도하여 모두를 기쁘게 해서 그 중생의 모든 번뇌의 병을 소멸하게 하는 것이니라.
또 비사거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하려 할 때 응당 먼저 그 중생 근기의 마땅함을 관찰하고, 그런 뒤에야 수순(隨順)하면서 그를 위하여 연설해야 하나니라. 만일 그 중생이 보시(布施)를 들어서 이로움을 얻게 될 것을 알면, 법사는 곧 먼서 보시를 연설하여 그로 하여금 기쁘게 해야 하며, 이때는 다시 그 밖의 다른 법문을 연설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혹은 다시 어떤 사람이 즐거이 지계(持戒)하기를 바라면, 법사는 곧 그를 위하여 계율 지니는 것을 연설해야 하고, 역시 그 밖의 다른 깊은 법은 연설하지 말 것이니라. 이렇게 중생이 간혹 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를 행하기 좋아하고 나아가 갖가지 법문을 듣기 좋아하면, 곧 모두 그들을 위하여 연설하면서 속히 깨우치게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와 같은 법사는 응당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방편으로 설법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성불(成佛)하고자 하면 반드시 한량없고 가없는 겁 동안 용맹스레 정진하고 부지런히 고행(苦行)을 닦아서 손ㆍ발과 머리ㆍ눈ㆍ골수ㆍ뇌 등의 몸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니, 마치 다른 경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라.
또한 모든 법사는 쟁론(諍論)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무릇 쟁론이라 함은 곧 무명 번뇌의 근본이니, 이 때문에 법사는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속히 무명을 없애고 또한 다른 이에게도 권하여 여의게 해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 모든 법사는 반드시 먼저 앞에서와 같은 공덕을 두루 갖추고, 그러한 뒤에야 대중을 위하여 방편으로 연설해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법사는 언제나 ‘내가 지금 처한 곳은 바로 여래의 사자좌(師子座)이다. 마땅히 참고 지내야 하거늘 어찌 소홀히 성을 내겠느냐? 저 중생들의 온갖 어려운 질문에 따라 나는 해석해 주어서 모두 기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니라.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면 모든 쟁론과 그와 나라는 마음이 있던 것도 저절로 소멸하게 되느니라.
또 비사거야, 무릇 법사라 함은 언제나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스런 말을 하면서 겸손히 낮추며 대중의 마음을 보호해야 하나니, 왜냐하면 성내거나 질투심을 품어서 이기고 지는 마음을 간직하면 크고 중한 죄를 얻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인자한 마음으로 설법하면 큰 공덕을 이루어서 부처님 법을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게 할 수 있으며, 무릇 태어나는 곳마다 언제나 불ㆍ보살과 뭇 성현을 만나서 능히 세간의 갖가지 공양을 소진하고, 높고 큰 사자좌의 보배 자리를 빌리나니, 또한 억수(億數)의 값을 따질 수 없는 이름난 의복을 법사에게 바친들 어찌 그 법사의 은덕을 갚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법사는 비록 이런 것을 받는다 하더라도 응당 깊이 부끄러이 여기면서[慚愧] 탐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응당 자비로운 마음을 내면서 아만(我慢)을 부리지 말며, 시주(施主)의 선근을 소멸되게 함이 없어야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함께 기쁨을 얻게 해야 하느니라.
또한 비사거야, 만일 모든 법사가 무릇 설법으로 대중을 조복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총명하고 근성이 영리하고 견문이 많고 식견이 넓고 용모가 단아(端雅)하고 정견(正見)을 지닌 집에서 태어났으니, 세 가지 업(業)이 청정하고 뭇 덕[衆德]을 두루 갖추었으며 정결한 옷을 입고 위의가 단정하나니라. 이와 같은 법사는 대중이 응당 권청(勸請)한 후에 설법해야 하나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구족하게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닦고 쌓아 공덕이 원만하신 뒤에야 비로소 큰 법륜을 굴리셨고, 중생들은 들은 뒤에 부지런히 대장부의 상호[丈夫相]을 닦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법사가 무릇 설법할 적에는 응당 차례대로 삼십이상의 과보(果報)도 그와 같고 선근(善根)도 그와 같음을 연설해야 하고, 또한 차례로 세 가지의 업의 청정함을 연설해야 하며, 업이 청정해지고 난 후에야 보시행 등의 청정한 법을 연설하고, 나아가 갖가지 차별된 이치의 문[差別義門]에 이르러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차례대로 하는 연설이라 하는가? 비사거야,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가르침을 받을 적에 그 스승은 먼저 마제가(摩帝迦)의 글자를 가르쳐 주고, 다음에는 알(頞)의 글자를 가르쳐 주며, 나중에는 아(阿)의 글자를 가르쳐 주고, 이와 같이 차례로 열네 음(音)을 가르친 뒤에 다시 차례로 서른네 자(字)를 가르치며, 이와 같이 하여 쉰 두 자를 두루 가르치고 난 뒤에야 온갖 음성(音聲)과 글자의 체[字體]와 이름과 말의 모든 교장(敎藏)의 일을 분별하고, 나아가 불가사의한 힘을 드러내 연설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사람이 저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를 성취하여 문득 뜻에 따라 차례대로 차별하면서 모든 교의(敎義)를 연설하여 성취하고 잊지 않을 수 있으면, 모든 부처님의 삼십이상과 그 밖의 공덕이 구족하고 원만한 것을 능히 알며, 대중을 위하여 널리 일체 모든 법의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미신(味身)을 펴면서 마음으로 잘 사유하여 반드시 헛되게 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법사가 설법을 할 때 법을 듣는 대중들은 이 한 구절의 법상[一句法相]을 듣기까지 수순하면서 이해하지 온갖 전도됨과 다른 생각[異想]을 행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을 잘 알아서 사실대로 연설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을 바로 청정하게 차례대로 연설하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또한 비사거야, 비유하면 마치 활 쏘는 스승이 여러 아이들에게 처음 활 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같으니라. 먼저 평평한 땅에다 칠 보(步)쯤에 살받이를 놓아두고, 그런 뒤에 아이들의 힘을 헤아려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다. 너희는 이제 저 살받이에 활 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 어린아이들은 비록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처음 배우기 때문에 그들이 쏜 화살은 거기까지 이르던 이르지 않던 간에 끝내 맞히지 못하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이 꾸준하자 조금씩 살받이에 다가갔느니라. 이 아이가 뒷날 점차로 자라면서 배우기를 그만두지 않자 쏠 적마다 맞추어서 살받이에 떨어지는 것이 없었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저 설법하는 법사가 따르는 무리를 가르칠 적에도 역시 그러해야 하나니, 마땅히 중생의 상근(上根)ㆍ중근(中根)ㆍ하근(下根)을 자세히 살피어 점차로 가르쳐 주어야 하지 깊은 법을 단박에 일시에 해설할 수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근기[根]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설법하면 다른 이로 하여금 이로움을 잃게 하고 전도됨만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응당 먼저 그를 위하여 저 육바라밀을 해설해 주어서 차례로 닦게 한 뒤에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말해 주어야 하느니라.
만일 중생을 위하여 이 공의 법[空法]을 말하면, 어떤 이는 듣게 되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사유(思惟)하기도 하며, 혹 어떤 이는 능히 증득한 이도 있으리니, 이 역시 다만 말의 해설만 있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공의 법은 오직 마음의 생각[心想]만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니, 만일 저 공의 법이 마음의 생각만으로 능히 증득해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일체 중생들은 아직 도를 닦지 않았을 때도 또한 아라한이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비사거야, 저 공의 법이란 역시 모양이나 형체로 설명할 수 없나니, 만일 설명할 수 있다면 곧 이것은 형상[相]을 짓는 것이요, 만일 형상을 짓는 것이 있다면 곧 원하고 구하는 것이 있으며, 만일 원하고 구하는 것이 있다면 곧 이것은 삼세(三世)이니라.
왜냐하면 비사거야, 무상법(無相法)에서는 온갖 삼세를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의 일은 모두 고요히 사라졌기[寂滅] 때문이니, 어떻게 원(願)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또한 응당 색(色)을 관하면서도 형상이 없다는 생각[無相想]을 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색을 관하면서도 형상이 없다는 생각을 짓는 것인가? 이 색은 나고 없어지는 것이 바퀴 돌듯 해서 생각 생각마다 정지하지 않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와 같은 색의 형상[色相]은 눈으로는 볼 수 없으니, 그것은 바로 심식(心識)의 경계로서 오직 뜻[意]으로만 아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눈으로는 볼 수 없느니라.
비사거야, 온갖 중생의 모든 마음과 뜻[心意]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오직 부처님의 지혜[佛智]로만 알 뿐이니라. 비록 생각하여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볼 수는 없어서 생각 생각 머무르지 않음이 마치 환화(幻化)와 같거늘, 어떻게 취할 수 있고 볼 수 있겠느냐?
이처럼. 비사거야, 저 중생의 심식으로는 마음의 진장(眞相)을 취할 수 없으며, 이미 취할 수 없거늘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왜냐하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평등에 어긋나기 때문이니라.
비사거야, 만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생각을 없애고자 하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온갖 법은 모두가 공하고 고요하여 집착할 것이 없다고 관하여야 하느니라.
또한 바라문아, 만일 이와 같이 사랑함과 미워함을 없애면서 법상(法相)을 취하지 않을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무상(無相)을 안 뒤에는 이와 같이 차례대로 원하고 구함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하고 구함이 없는 것이 바로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일체 모든 법은 다 평등하고 취착할 것이 없다고 관하나니, 이른바 눈과 빛깔을 보지 않고 나아가 뜻과 법을 보지 않는 것이니라. 만일 이와 같이 능히 취착하지 않으면 근심과 기쁨이 끊어지고 없어지면서 평등한 마음을 얻나니, 이것이 바로 공해탈문(公解脫門)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 세 가지 해탈문을 능히 얻어서 삼세가 평등함을 방편으로 삼고 나면, 그런 뒤에는 무생관(無生觀)에 들게 되는데, 다시 그 색(色)이 어디서부터 생기는가를 관하면 삿된 생각[邪念]으로 인하여 청정하지 않음이 생기고, 삿된 생각으로부터 남자ㆍ여인이라는 생각[男女想]이 일어나며, 남자ㆍ여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애착하는 마음[愛著心]이 일어남을 아나니, 애착이 더한 뒤에는 화합하여 음주의 일을 행하므로 범행(梵行)을 깨뜨린다고 하느니라.
그들이 화합할 때 이미 태장(胎藏)을 이루므로 이것을 가라라(迦羅邏)의 대(大)라 하고, 이 가라라일 때에는 남녀의 형상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느니라.
비사거야, 이와 같은 가라라의 형상은 오직 부처님ㆍ여래의 성스런 지혜[聖智]로만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여래는 그러한 때에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너희들은 이제 바르게 색의 형상[色相]을 관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색을 관하는가? 무상(無常) 등을 여실히 아는 것을 말한다’고 하시느니라. 그들은 들은 뒤에 즉시 온갖 욕상(欲想)과 색탐(色貪)이 모두 없어지게 되나니, 색욕(色欲)이 소멸하고 나면 이와 같은 기쁨ㆍ즐거움ㆍ근심ㆍ슬픔ㆍ고뇌의 온갖 것이 모두 소멸하느니라.
비사거야, 처음에 아직 사람이 되기 전 가라라가 처음 수태(受胎)할 때는 그것이 남자인가 여인인가를 증명해 안다 해도 어머니 태에서 나올 때에는 어느 한 법도 그 밖의 다른 곳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또한 그 밖의 다른 곳으로 이르지도 않나니, 오직 정수(精水)의 붉고 흰 것만이 있으면서 화합하여 가라라의 장(藏)을 이루었을 뿐이니라. 여래는 그것을 건립하여 원인으로 삼은 것이지만 실로 모든 법에는 머무르는 곳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온갖 법은 생겨나고 멸함이 없기 때문이니, 수다라(修多羅) 가운데 차례로 해설한 바와 같으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너희들은 이것에 대하여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하나니라. 이를 이름하여 과거의 모든 언교(言敎)의 일을 널리 연설했다고 하나니, 이미 스스로 알고 나면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해서 이와 같이 차례로 미래의 일과 현재의 일을 연설하는 것이니라. 가라라에서 설했듯이, 마치 물거품과 같고 포말 같으며 아지랑이 같고 파초 같으며 환화(幻化) 같아서 도무지 진실이 없는 것이니, 이처럼 십이인연이 차례로 상속(相續)하여 생(生)에서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어떤 때는 구름이 끼고 어떤 때는 맑고 밝은 것과 같거늘 어찌 가르치는 이가 있겠느냐? 이처럼 계대(界大)는 화합이라서 짓는 이가 없으며, 이 가운데에는 오직 여실히 바른 법만 있을 뿐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느니라. 그러나 한량없는 업행(業行)과 차별되는 법계(法界)의 이치의 문이 있는지라, 마땅히 이와 같이 설명해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사거 바라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모든 법사가 과거ㆍ미래ㆍ현재 삼세의 일을 다른 이가 와서 물을 때나 혹 스스로 설하려고 하면 홀연히 피곤하고 미혹해서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와 같은 법의 장애[法障]를 어떻게 제거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아, 만일 모든 법사에게 다른 이가 의혹을 물을 적에 피곤하고 능히 해설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법사는 아직 세 가지 언교(言敎)의 방편의 장[方便藏]을 통달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설령 조그마한 부분은 안다 하여도 다만 이름[名字]만을 얻었을 뿐 이치를 익히지 못한 것이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이 삼세의 일은 한량없고 가없어서 다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 때문에 초제(初際)ㆍ중제(中際)ㆍ후제(後際)의 생멸이 빙빙 돌아가는 것이 비유하면 마치 풍륜(風輪)과 같아서 끝이 없느니라.
비사거야, 그러나 저 풍륜에 대해서는 끝내 어떤 사람도 그 한제(限齊)와 형량(形量)과 대소(大小)를 아는 이가 없나니, 과거ㆍ미래ㆍ현재도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마치 저 시절(時節)은 하루에서 시작하여 이틀, 나아가 열흘에 이르고, 반달, 한 달, 나아가 한 때에 이르며, 반년, 일 년, 나아가 한량없음에 이르지만, 실제로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이르는지 모르는 것과 같으니라.
또 마치 빛의 그림자[光影]가 형상과 걸림이 없으면서도 시절과 주야(晝夜), 왕래(往來)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ㆍ미래ㆍ현재를 세어서 알 수 없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삼세는 이미 알 수 없고 또한 볼 수 없으니, 이미 볼 수도 없으면 곧 있는 바가 없고, 이미 있는 바가 없으면 곧 이름(名字)도 없으며, 만일 이름이 없다면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비사거야, 이러한 인연 때문에 이 세 가지 언교 방편(言敎方便)이 있나니, 너는 이와 같은 법구(法句)를 잘 생각하면서 듣고 말할 때 의혹을 내지 말아야 하며, 오직 법사의 모든 감관[諸根]의 적정(寂靜)함만을 염(念)하면서 오로지 지혜와 변재를 구하며 쟁론(諍論)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법을 아는 사람은 쟁론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을 할 적에 대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라도 쟁론을 일으키면, 법사는 응당 그로 하여금 저 지력(智力)의 다라니를 염하게 해서 마군이 끼는 것[魔事]을 소멸시켜야 하느니라.’”
14. 방법과보품(謗法果報品)
“그 때에 비사거 바라문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사람이 이 세 가지 법 가운데서 의심이나 비방을 내면 어떻게 소멸시켜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이라도 이 세 가지 법문에 의심이나 비방을 내면, 집에 있는 이거나 출가한 이거나 간에 온갖 법사도 모두 능히 제거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비사거야,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서 깊이 의심과 비방을 일으킨 것이라서 온갖 선법(善法)의 근본이 파멸(破滅)되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제거하여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느니라.’
비사거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큰 지혜 문[大慧門] 속에서도 믿지 않는 마음을 낸다면 어떠한 과보(果報)가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아, 이 사람이 지은 업(業)은 세간에서 지극히 무겁나니, 그래서 일체의 더욱 중한 나쁜 과보가 모두 이 사람에게 있느니라. 이 사람은 영원히 불법의 깊은 이로움을 잃게 되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같이 버리시느니라.
심히 깊은 법에 대하여 믿고 좋아하지 않는지라 스스로 이미 온갖 불법을 믿지 않게 되고,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비방을 많이 내게 하며, 항시 극히 나쁜 벗을 따라다니기 좋아하면서 어리석음을 배우고 익혀 사견(邪見)이 더욱 자라고, 언제나 자기 몸을 위하여 옷과 음식을 몹시 탐하게 되리라. 이런 사람은 미래에 비록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실 온갖 오묘한 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역시 믿음을 내지 않으리니, 그에게는 지금 믿는 분수[信分]의 선근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사람은 스스로 부처님 법에 대하여 깊은 장애를 일으키고 다시 다른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정법(正法)에 대해 깊은 장애를 짓게 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갖가지 한량없는 큰 고통을 두루 받느니라. 왜냐하면 나쁜 업을 갖추어서 선근을 끊었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어리석음과 무지(無智)의 사견을 익힌 연유요,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무지의 사견을 가르치기 때문이니, 깊은 법문을 들어도 능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경솔하고 아만[輕慢]을 내느니라. 경솔하고 아만을 내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에게 수승한 법을 물을 수도 없느니라.
비사거야, 만일 지혜 있는 이면 언제나 응당 물어야 하고 어리석고 사견을 지닌 무지한 중생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교장(敎藏)을 들었을 때 믿고 행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 사람과 온갖 하늘ㆍ사람의 세간에 이르기까지 기쁘게 하거나 믿고 이해시킬 수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이 세 가지 업장(業藏)의 연설을 듣고서도 믿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설사 다시 온갖 그 밖의 법상(法相)을 듣는다 해도 능히 믿음을 낸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으니, 이 사람은 불법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이처럼 어리석고 지혜 없는 중생이 행한 바는 수순하지 말아야 하고 나아가 설명이 있더라도 역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실로 이 법을 비방한 사람이 태어날 악취(惡趣)를 능히 분별하거나 자세히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이 비방하는 사람이 생(生)을 받을 곳과 몸의 크기와 분제(分齊), 형체와 용모의 이상할 만치 추악함도 말하고 싶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세히 설명하면 중생들은 그 말을 듣고 혹은 두려움으로 죽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설명하지 않느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만일 어떤 사람이 법에 대하여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라도 훼방을 놓고 헐뜯으려 한다면, 그가 얻는 과보는 자세히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나는 이제 아직 비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허물을 분명히 인식시키려고 조금만 설명했을 뿐이니라.
비사거야, 저 법을 비방한 사람은 가령 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큰 지옥과 작은 지옥에 태어나서 모든 고통을 두루 받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는 온갖 선근을 끊어 없앴고 다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법을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사견과 모든 악행의 업을 더욱 자라게 하였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악도(惡道)를 두루 지나면서 재앙을 받느니라.
이와 같은 중생은 지옥에서 나온 뒤에도 다시 다른 갈래[趣]에 나서 한량없는 세상을 거치면서 어리석고 무지할 것이니, 만일 인간으로 태어나면 정념(正念)을 얻지 못해서 모든 감관이 어둡고 혼탁하고 광란으로 마음을 잃을 것이요, 삿된 법을 기꺼이 익히면서 의리(義理)를 알지 못할 것이니라.
비사거야, 이 사람이 받는 과보와 형량(形量)과 시절과 분제를 이제 간략하게 설명하였지만, 이와 같은 것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온갖 초목과 수림을 모조리 산가지로 삼아 그 죄의 과보를 계산한다 해도 견줄 수 없느니라. 즉 몸의 형상이 거칠고 더러운 것은 자세히 말하기조차 어렵고, 무릇 이르는 곳마다 모두가 고통의 인연을 이루리니, 이것은 바로 법을 비방하기 때문에 이런 과보를 얻는 것이니라.
15. 권수지품(勸受持品)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비사거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비사거야, 그러므로 너희들은 부처님으로부터 듣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언교(言敎)의 장의(藏義)를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오로지 전념해서 수지해야지 다른 생각은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여래가 해설한 삼장(三藏) 법문은 설명할 어떤 법도 없고 듣거나 볼 수도 없으며, 또한 열어 보일 수 있는 어느 한 법도 없느니라. 만일 여래의 이렇게 설함을 알고 나면 그 밖의 다른 법문에 대하여 의혹을 낸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ㆍ세존이 헛되이 설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해설할 때에 만일 어떤 사람이 듣고서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다시 다른 이를 장애한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무명의 사견을 일으키는데다 다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법을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그리하여 그 중생이 잘난 체하고 교만하고 문답할 줄도 모르고 가서 듣지도 않다가 깊은 법을 상실하고 의리도 몰라서 사악한 벗을 뒤따라 다니고 지혜 있는 사람을 멀리 여의게 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나쁜 과보를 많이 받느니라.
비사거야, 비유하면 마치 호랑이 새끼가 나서부터 어미를 따라다니면서 날마다 어미의 살생을 보며 그 몸이 자라다 보면 살생의 업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으니라.
비사거야, 중생도 역시 그러해서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두루 삿된 업[邪業]을 지어서 지옥과 축생과 아귀에 떨어져 큰 고뇌를 받느니라.
비사거야, 이런 인연 때문에 너희들은 응당 먼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난 뒤에 설법해야 하니, 스스로 바로 하는 것을 잊어서 제 몸을 해치거나 남을 함정에 빠뜨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비사거야,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을 건립하고 널리 연설하신 것이니, 너희들은 응당 온갖 중생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와 입으로 묻고자 하는 바와 몸으로 행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야 하며, 이와 같이 안 뒤에는 인자한 마음으로 가르쳐 보이고 중생들이 듣고 난 뒤에는 기뻐하면서 받아 행하게 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기 위하여 큰 자비를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그 때에 비사거 바라문이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대략 말씀하신 것을 들었사오나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다시 세 가지 업장을 자세히 말씀하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사거야, 나는 이제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바르게 대답해야 하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유하면 마치 세간의 뛰어나게 좋은 말이 망아지를 낳아 얼마 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몸이 연약하고 기력도 아직 생기지 못했는데, 사람이 그것을 타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지니고 모든 전투 기구를 지워서 싸움터에 나가 승패를 결정지으려 한다면, 이 사람이 하는 일을 옳다고 여기겠느냐?’
비사거가 말하였다.
‘옳지 않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사거야, 정녕 그렇고 그러해서 네가 말한 바와 같으니라. 그 어떤 새롭게 뜻을 낸 보살과 이승(二乘)의 사람은 지혜도 적고 수행이 적어서 아직 신통을 얻지 못한 탓에 내가 말한 바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도리어 다시 미혹하여 네 가지 전도(顚倒)를 내는 것이 마치 저 망아지의 나이가 아직 차지도 않았고 기력을 성취하지 못하여 감당해 낼 수 없는데도 무거운 짐을 지워 싸움터에 나가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비사거야, 만일 이 망아지가 털과 뼈가 점차로 성장하고 나이도 완전히 차고 몸이 웅장하고 기력도 용맹하면서 귀와 눈이 밝고 예리해지면, 사람을 태우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멀리 갈 수 있고, 가볍게 기동하며 습격도 하고, 전장에 나가서 승패도 결정하며, 놀라거나 패배할 것을 염려하지 않으며, 거침없이 곧장 나아가고, 나아가 북소리가 진동하고 소라를 불며 칼을 휘두르고 창이 떨쳐도 역시 놀라거나 두려워함이 없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나이가 다 찼기 때문이요, 몸의 힘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자주 길들이고 익혔기 때문이요, 종성(種姓)이 양호하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비사거야, 너희들이 만일 사무애변(四無礙辯)13)과 모든 힘[諸力]과 두려움 없음[無畏]을 얻는다면, 그런 뒤에는 세 가지 교장(敎藏)을 감당할 수 있어서 갖가지 거친 말을 들어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온갖 부처님 법을 능히 받아 지니는 것이 마치 저 좋은 말이 몸이 씩씩해지고 기력이 왕성해진 뒤에야 비로소 무거운 짐을 지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과 같으니라.
비사거야, 이것이 첫 번째 전투(戰鬪)의 일이니라. 이른바 부처님 법을 열어 보여서 다른 이를 교화할 때에 만일 싸우는 기구와 무기를 반드시 많이 지니고 있다면, 이때는 외도가 비록 갖가지 이단(異端)의 쟁론(諍論)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두 능히 참으면서 두려움을 내지 않느니라.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소라나 북이라는 것은 소위 불법을 해설할 때 온갖 어려움이 많아도 역시 감당하면서 두려움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만일 어떤 이가 부지런히 힘써 닦아 익히고 수지하면서 불법을 행하면 장애가 없거니와, 만일 어떤 이가 출가해서도 파계(破戒)하고 어리석어서 능히 의지해 행할 수 없으면 장애가 있어서 설령 능히 배우는 이라 해도 혹 성문이나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느니라.
비사거야, 또한 어떤 이가 오랜 세월동안 부처님 법을 구족하게 정진하면서 수행한다 하여도 그는 이 법에 대해 오히려 알기 어려워서 사소한 부분만을 얻게 되거늘, 하물며 수행하지도 않고 다시 나쁜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랴. 그 사람은 이 대승의 교장[大乘藏] 가운데 믿는 마음이 없거늘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바사거야, 너는 이와 같은 모든 중생들에게 언제나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놓아 버리지 않아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정념(正念)의 마음을 일으켜 다만 한 게송이나 혹은 글귀나 글자만을 배우면서 칠 일에 이른다 하여도 너희들은 역시 부지런히 그를 가르쳐야 하나니, 저 중생에 따라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너희들은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되느니라. 비사거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무릇 설하시는 바는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니, 믿든 믿지 않든 혹은 행하든 행하지 않든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구업(口業)은 성취하신 것이니라. 다만 어떤 이라도 말씀하신 바를 듣기만 하면 반드시 이로움을 얻게 되며, 헛되이 지나치지 않은 이라면 그 사이에 혹 있는 것이 비록 획득을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모두가 이미 지은 것이라, 당연히 인연을 얻게 되느니라.
비사거야, 너희들은 이와 같은 여래장(如來藏)을 닦아서 증득하고자 하면 응당 여래와 여래의 법 가운데서 평등한 생각을 일으키고 평등한 행(行)을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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