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3권
대법거다라니경 제3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6. 보살행품 ②
“‘또한 마나바(摩那婆)야, 나는 이미 모든 보살들에게 방편으로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을 거두는 법에 대해 설하였으니, 무릇 보살을 가르쳐서 물러나지 않게[不退轉] 하는 것에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냐 하면, 이른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과 반야(般若)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세간을 위해 그 밖의 네 가지의 바라밀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다시 모든 그 밖의 중생들을 위하여 조보리법(助菩提法)을 말씀하셨으니, 방편으로 성숙케 하기 위해서이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응당 알아야 한다. 저 네 바라밀 가운데서 단(檀)바라밀과 시(尸)바라밀의 두 가지 바라밀은 저 성문ㆍ벽지불 내지 외도와 오통신선(五通神仙)이 함께 행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만일 찬제(羼提)바라밀이라면 오직 아라한만이 성취하여 사(事)를 버리기 때문이며, 그 선(禪)바라밀이라면 여기서 육바라밀을 능히 낸다고 총체적으로 설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이러한 모든 바라밀을 여래가 이와 같이 차별되게 설하였다. 너희들은 응당 알아야 하나니, 일체 법은 허공이 낳은 바라서 모습이 허공과 동일하다.
마나바야, 만일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바라밀의 지위[地]를 저 성문이나 벽지불의 이승(二乘)의 성인들조차도 오히려 성취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외도의 신선과 그 밖의 범부들이 어떻게 성취하겠느냐?
마나바야, 만일 보살이 이 두 가지의 바라밀을 성취하고자 하면 의당 일심으로 염(念)하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여래가 비유로 교묘히 말씀하는 변재[辯]를 생각하고자 하면 의당 먼저 이 다라니문(陀羅尼門)을 배워서 관(觀)해야 한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저희들이 어떻게 하면 이 다라니의 관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다시 비유로써 이 뜻을 나타내어 쉽게 알게 하겠다.
마나바야, 고기 잡는 사람이 아들을 낳은 이야기를 비유로 들겠다. 어부는 이익을 탐한 나머지 일찍부터 아들에게 물 밑에서 잠행(潛行)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젖먹이 일 때부터 그릇에다 물을 떠다 놓고 하루에 세 번씩 빠지게 해서 물속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이와 같이 점차로 빠지게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가 다 되도록 물 아래 있게 하였으며, 혹은 이틀 또는 사흘, 열흘, 스무 날, 한 달 내지 일 년 동안을 물속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죽지 않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어린아이는 점차로 크게 자라나서 큰 강물에 들어가도 이 강물 속에 있는 모든 수족(水族) 중생들의 품류(品類)를 똑똑하고도 분명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나중에 몸의 기상이 뛰어나 물속을 관찰하는 것이 분명하고 예리하게 되자 드디어 바다에 능히 들어갈 수 있었다. 큰 바다 속에 있는 많은 상이한 종류의 기이한 벌레와 이상한 바다짐승과 거대한 물고기와 질투하는 용이며 독을 품은 괴물들이 비록 많았지만 끝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또 뭇 보물들을 맑고 명료하게 보았으니 여타의 범부로서는 목도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은 이 큰 바다 속에 있으면서 진기한 보물을 두루 취하여 온갖 일을 지었으니, 무릇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이면 뜻대로 곧 이루어졌다.
이처럼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다라니의 심히 깊은 법문에 들어가면 일체의 온갖 불법을 능히 이루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나바야, 큰 바다라 하는 것은 곧 다라니문이니, 만일 처음에 이 다라니문에 들면 의당 닦고 배워서 속히 성취하게 해야 한다. 마치 고기잡이의 아들이 점차로 자라나면서 업(業)을 익혀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마나바야, 만일 이 보살이 다라니 불법의 바다 속에 능히 들어가서 자유자재로 온갖 불사(佛事)를 이룬다면, 마치 어부의 아들이 큰 바다 속에 있으면서 갖가지의 일을 이루는 것과 같다.
마나바야, 너는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菩提]은 사소한 행[少行]과 사소한 인연[少緣]으로는 능히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요컨대 반드시 이 다라니의 법문에 들어가 이 다라니의 일구의(一句義) 가운데 갖가지의 음성과 갖가지의 언어와 갖가지의 변재와 갖가지 방편과 방편이 없는 곳을 모두 능히 알아야 하며 모든 중생들의 심행(心行)의 차별도 모두 능히 알아야 한다.
또 중생으로서 혹은 나타나 있거나 나타나 있지 않거나, 혹은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거나 간에 모두 다라니 구절의 방편의 힘으로부터 명료하게 증명해 알며, 혹은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 나아가 날짐승ㆍ길짐승의 사생(四生)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혹은 음성이나 언어나 혹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일이거나 업을 짓는 일이거나 혹은 서원하는 것이거나 원이 없는 일이거나 혹은 많은 일이나 적은 일이나 혹은 나쁜 일이거나 나쁘지 않은 일이거나 혹은 두려운 일이거나 두려움이 없는 등의 이와 같은 일도 모두 분명하게 안다.
이렇게 작용하는 곳을 전부 다 알며, 나아가 수기(授記)하는 일이거나 신업(身業)이거나 구업(口業)이거나 중생의 업이나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이를 가르치려 하거나 하는 것 등을 모두 다 능히 안다.
만일 보살이 아란나(阿蘭拏)에 있으면서 방편의 행을 배우면 곧 지은 선근(善根)과 할 사업(事業)을 성취하게 되며, 나아가 불퇴전의 일[不退轉事]을 이루고자 하여도 또한 능히 다 안다.
어떻게 벽지불의 과(果)를 얻는가도 역시 요달해 알고, 어떻게 성문의 과지(果地)를 얻는가도 역시 능히 다 알며, 혹은 재가(在家)의 모든 사람들의 갖가지 사업(事業)과 언어나, 혹은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을 괴롭히면서 재물을 구하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하는 것도 모두 능히 안다. 혹은 지옥ㆍ아귀ㆍ축생은 마음과 뜻이 도착해서 악을 행하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축생으로 태어난 것임을 역시 여실히 안다.
혹은 업행(業行) 때문에 아귀 가운데 떨어지고, 또한 아첨과 왜곡ㆍ인색함과 탐욕ㆍ질투(嫉妬)ㆍ교만과 거만의 인연 때문에 아수라 중에 태어나며, 혹은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의 업으로 인하여 욕계의 인천(人天) 가운데에 태어나는데 자신이 지은 허물은 후회를 하면서도 다른 이의 허물은 보지 않는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온갖 방편지(方便智)로 다른 이가 지은 것은 다른 이가 받고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받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사생(四生) 중생과 오도(五道)의 처소에서 지은 모든 업의 방편과 업의 명자(名字), 업상(業相)의 성숙과 과보를 받는 곳, 갖가지 심행(心行)과 언설과 인락(忍樂)과 모든 소견과 착한 법이 없는 곳 등 이와 같은 일을 모두 다 뽑아 없애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라니문이라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만일 반드시 능히 이와 같이 행하는 이가 있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방편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만일 자기의 지혜의 힘으로 결정코 이 일을 성취하는 자라면, 마땅히 홀로 앉아 사유하면서 모든 욕심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마나바야, 이와 같은 법 안에는 갖가지 음성과 언어, 갖가지 변재(辯才)와 행행(行行), 갖가지 태어나는 곳[生處]과 갖가지 짓는 업[作業]이 있으니, 너는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여 수지봉행(受持奉行)하고 잊거나 잃어서는 안 된다.
하늘과 사람이 일을 짓는 방편이 화합하기 때문에 언어가 있으니, 축생 중생의 갖가지 구업(口業)과 음성의 차별 내지 태어나는 곳[生處]의 이름이 또한 다르다. 그들 중생은 모두가 다 그 형류(形類)와 음성에 따라 이름을 짓는데, 그 몸에 이름붙이는 것이 마치 까마귀ㆍ참새 따위와 같다. 저 아귀 중생 속에선 결정적으로 차별된 이름이 없으니, 그 중에서 이름을 듣고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지옥 속에서도 오직 지옥 중생들이라고만 말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하늘은 반드시 하늘이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이며, 아귀는 반드시 아귀라고 말해선 안 된다.
마나바야,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총체적으로 간략히 설하였으니, 이제 모두 분별하여 명칭과 그 의미하는 바를 밝히겠다.
마나바야, 마치 한 가지 일에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과 같고, 한 사람에게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하늘 내지 아귀ㆍ축생에게도 갖가지의 이름이 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많은 아귀가 있으면서도 전혀 이름이 없는 것이 있으니,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잠깐 동안에도 몸을 바꾸고 변하면서 갖가지 형상을 짓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이와 같이 중생은 한순간에도 한량없는 색신(色身)을 나타내니, 어떻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느냐? 아귀 등에게 태어나는 곳에 대한 이름과 받을 음식에 대한 이름과 수명에 대한 이름이 있다거나, 또는 지옥 중생으로 이름과 태어나는 곳이 없는 자라면 그 형상은 역시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들에게는 나쁜 업의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에 일념(一念) 속에서 갖가지로 몸이 변하는 것이다.’
그 때에 무외보살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인간의 언어는 대를 이어 가까이 익힌 것이라서 저희들이 이미 알고 있지만, 저 사도(四道)의 중생의 언어와 이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때문에 이제 세존께 청하여 묻사오니 원컨대 설하여 주십시오.’
아난아, 저 무외보살이 이와 같이 묻자, 그 때 방광부처님이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모든 불보살의 신통과 지혜의 경계이지 모든 성문ㆍ벽지불이나 그 밖의 보살의 지혜로 분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마나바야, 만약 보살이 중생의 말소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 중생들 가운데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보살이 온갖 중생들의 말소리와 그 하는 일들을 알게 되면 문득 거기에 나기를 원할 것이니,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설법으로 교화해서 합당함에 따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의 말소리와 심업(心業)을 알기 때문에 곳곳의 모든 유(有)에서 생(生)을 받는 것이니, 중생으로 하여금 이해의 수행을 일으켜 모든 업을 끊도록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저 삼도(三道)에서는 앎이 있기 때문에 교화할 수 있는 것이며, 이도(二道) 중생에게는 지해(知解)가 없기 때문에 보살이 거기에 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임을 응당 알아야 한다.
마나바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드시 지옥ㆍ아귀ㆍ축생 중에도 지해(知解)가 있어서 교화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이와 같은 보살은 낱낱의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큰 지옥에 머물면서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겁이 지나도록 중생으로 하여금 저 법의 이익을 얻게 한다.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성취하고 구족하며, 이와 같은 정진을 성취하기 때문에 반드시 삼십이상을 얻게 된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가 간략히 설한 보살의 자비 인연이다.’”
7. 상호품(相好品) ①
“아난아, 그 때에 무외 보살마하살이 다시 방광여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를 위하여 보살이 성취하는 모든 상호[相]로서 결감(缺減)이 없는 것을 남김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또한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먼저 저희들을 위하여 바라밀의 방편으로 보살의 행(行)을 말씀하셨으나, 저희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바라밀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세존이시여, 바라밀이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자 저 방광부처님이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른바 바라밀이란 양(量)으로 헤아릴 수 없고 수효로 알 수도 없으며 변제(邊際)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또 바라밀이라 함은 가장 높고 뛰어난 것이어서 온갖 범부나 온갖 성문ㆍ벽지불 등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네가 물은 바와 같이 바라밀이란 구절의 뜻에 이와 같은 뜻이 있으니, 이른바 수효와 양(量)이 없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세존의 말씀처럼 한량없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하면, 제가 지금 현재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행하는 걸 보아도 다만 자재(資財)와 자기의 몸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이미 한량이 있는데, 어찌하여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지금 그 범부의 마음이 무엇을 취착(取着)해서 보시하는지 아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범부가 사(事)에 취착하여 보시를 행하고 있음을 아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무엇을 말하여 사(事)라고 하느냐?’
무외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현재의 모든 음(陰)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사(事)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외야, 너는 모든 음(陰)을 사(事)라고 여기느냐? 너는 의당 여래가 말한 바를 살펴서 사유한 뒤에야 내게 대답해야지 세간 범부의 소견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나바야, 너는 이제 만일 음을 취하여 사로 삼는다면 오음(五陰) 가운데서 어느 것이 사(事)이겠느냐? 색(色)이 사이겠느냐? 수(受)가 사이겠느냐? 나아가 상(想)ㆍ행(行)ㆍ식(識) 등이 사이겠느냐?
마나바야, 이러한 모든 음은 사(事)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니, 네가 어떻게 지금 취하여 사(事)로 삼겠느냐?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여래 방편의 총상(總相)에서는 이 오음의 모든 법사(法事)가 사가 아님을 설할 뿐이다.
마나바야, 모든 범부의 사람은 오음 가운데서 화합하는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다시 십이입(十二入) 등에 집착한다. 범부는 이처럼 세간에 묶여 집착하는 것이니, 이른바 눈[眼]에 취착하는 것이 바로 속박[縛]이 되며, 눈에 취착하는 것처럼 귀[耳]에 취착하며, 나아가 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 등에 취착하는 이것이 큰 속박[大縛]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事)를 분별하고 취착하면서 끝없이 치밀하게 잡아 지니면서 견고하게 깊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속박이란 또한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다시 여섯 가지 속박하는 곳[六縛處]이 있어서 중생을 속박하기 때문에 속박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이를테면 눈[眼]과 빛깔[色]과 같은 것이 속박이 된다. 모든 범부들이 이곳에 집착하고 나면 해탈을 얻기 어려우니, 온갖 욕심의 인연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생사(生死)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속박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나아가 뜻[意]과 법(法)이 속박이 되니, 뜻을 생각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곧 뜻에 맞는 바를 원하고 구하므로 속박이라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보살마하살 등은 모든 선근(善根)이 청정하기 때문에 곧 서른두 가지 대인의 상호[大人之相]를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또한 청정한 선근(善根)으로 상호를 성취하는 법을 설하겠다.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오직 하나의 선근만이라도 닦으면 문득 한 가지 대인의 상호를 성취할 수 있으며, 만일 다시 청정한 하나의 선근을 완전히 구족하면 그런 뒤에는 삼십이상을 성취하게 된다.’
무외는 다시 물었다.
‘모든 보살들이 하나의 선근만을 닦는데, 어떻게 서른두 가지 대인의 상호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때에 방광 부처님이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는 이제 그 모든 상호를 취하는 것으로 여래로 삼아선 안 된다. 왜 그런가? 너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뭇 상호를 성취한 것을 듣지 못했느냐?’
무외가 대답하였다.
‘저도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저 전륜성왕은 실로 뭇 상호를 갖추었기는 하지만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해서 또한 부처님이라고는 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뭇 상호로써 여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마나바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저 뭇 상호를 취하면서 저 뭇 상호에 집착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아직 아상(我相)과 중생상(衆生相)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나바야, 그러므로 보살은 성취한 모든 상호와 성취한 색(色) 등을 집착하지 않는다.
마나바야, 무릇 부처님의 보리에는 집착하는 곳이 없고 새기는[想] 곳도 없고 설하는 곳도 없고 합하는 곳도 없어서 세간의 모든 범부들이 상호의 법 가운데서 기뻐하고 집착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나바야, 이런 이치 때문에 살펴서 들어야 한다.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상호 닦는 법을 설하겠다.
마나바야, 만일 어떤 이라도 하나의 선근을 성취하면 또한 서원을 세워서 반드시 삼십이상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하나의 선근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가령 어떤 보살마하살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곳에서 홀연히 세존의 사리탑묘(舍利塔廟)가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세존의 탑을 내가 만일 보수하지 않으면 곧 무너져 못쓰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식을 하여 음식을 얻고 난 뒤에 사람을 구하여 자신의 먹을 것을 주고 탑의 보수를 청하면서 ‘이것은 바로 여래의 사리(舍利)를 모신 보탑(寶塔)입니다. 복전(福田)으로서 존귀하고 귀중한 것인데 이제 거의 무너지려고 합니다. 당신은 장부로서 기력이 씩씩한 분이시니, 당신과 함께 보수하여 이 복을 함께 누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필요한 곳을 가려내서 곧 보수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자기 자신의 배고픔을 참으면서 남에게 베풀고 오히려 자기 몸조차 가벼이 여기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음식을 중히 여기겠느냐? 또한 수승한 서원을 세우면서 말로 맹세한다.
‘나는 이제 희유하게도 보탑을 성취하였다. 이 공(功)이 깊고도 두터우니 어찌 한 끼의 밥을 아끼겠느냐? 음식을 탐내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미 ‘나’를 버리고자 하는데 어찌 음식을 생각하겠는가? 나는 이제 이와 같이 정진하면서 모든 음식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응당 버릴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음식을 보시했기 때문에, 탑을 장엄했기 때문에,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곧 삼십이상을 만족하게 된다.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런 순서로 장차 서른두 가지의 대인의 상호를 두루 얻는 것이니, 마치 저 보살이 여래의 사리탑을 보수한 까닭에 몸이 곧 서른두 가지의 대인의 묘한 상호를 성취하게 되는 것과 같다. 장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나바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심업(心業)을 성취하면 보살도(菩薩道)를 구족해서 원만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마나바야, 일체의 모든 상호[相]는 심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저 업을 지으면서 마땅히 서원을 세운 이도 역시 이것을 얻는데,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보리로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나바야, 또한 한량없이 미묘한 선근이 있어서 분별하여 설명할 수 있으니, 갖가지 한량없는 방편으로 한량없는 마음 덩어리를 두루 갖추어서 온갖 선근으로 응당 속히 성취한다. 다만 온갖 여래는 역시 모든 보살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자세히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중의 어떤 보살들은 이 일을 듣고 나서 마음에 두려움을 내는데, 바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곧 물러나려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물러서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 지위[不退轉地]를 속히 증득할 수 없다. 물러서지 않는 보살의 공덕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어긋나서 등지는 것이니, 이 보살들은 본래의 서원[本願]을 버리고 나서 편의에 따라 바라고 좋아하면서 저 성문이나 벽지불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점차로 어긋나면서 등지고, 어긋나 등지기 때문에 이 법문에 대하여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 오직 저 세간의 업만을 이루다가 그로 인해 다시 갖가지 모든 착하지 않은 일[不善事]을 지어서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져 바퀴 돌듯 오가면서 두루 생사(生死)를 받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여래는 이 모든 보살들과 미래 세상에 두려워할 허물들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근의 일을 완전히 갖추어서 설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능히 감당해서 응당 받아들여 행할 이를 수순해 설할 뿐이다. 저 진실을 보고 불법(佛法) 중에 결정(決定)을 얻은 자 이외에 부처님ㆍ여래가 보살들이 불법 속에서 아직 결정을 얻지 못한 걸 보면 끝내 그들에게 자세히 선근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 마나바야, 너는 마땅히 이 서른두 가지의 대인상(大人相)의 법을 들어야 하므로 다시 그 밖의 선근들에 대해 설하겠다.’
이 때 무외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서른두 가지의 대인상의 법이라 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뭇 상호는 나타난 것도 있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는데, 이 대중 가운데 근기가 무딘 이[鈍根者]는 아직도 서른두 가지의 대인상이라는 이름조차도 오히려 듣지 못했는데 하물며 능히 이해하겠습니까? 오로지 바라노니 여래께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두루 삼십이상을 설하여 주십시오. 중생들이 듣고 이 뜻을 분명히 알게 되면 여래의 처소에서 존중의 마음을 낼 것이니, 이로 인하여 속히 대반열반(大般涅槃)을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난아, 그 때에 무외보살이 이와 같이 묻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무외 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무릇 서른두 가지의 상호[相]가 있는데, 서른 가지 상호는 나타나 있고 두 가지의 상호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마나바야, 이제 응당 살펴서 들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상호의 나타나 있는 것과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의 뜻을 밝힐 것이다.
마나바야, 여래의 열 가지 상호는 발에 있다.
마나바야, 또한 여래의 여섯 가지 상호는 손에 있다.
마나바야, 다시 네 가지 상호는 몸에 있고 또한 두 가지 수레바퀴 상호[二輪相]가 있으며, 다시 네 가지 상호가 있는데 머리에 있다.
마나바야, 또한 네 가지 상호는 모든 몸에 두루 있는 것이다.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이와 같은 서른 가지 상호가 나타나 있고, 나머지 두 가지 상호는 나타나 있지 않으니, 이른바 말의 생식기처럼 감추어져 있는 것[馬陰藏]이며, 혀가 넓고 긴 모양의[舌闊長] 상호이다.
또한 마나바야, 여래는 이제 다시 너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상호의 공덕을 분별하리라.
마나바야, 여래는 일곱 군데의 원만한 상호가 있으니, 양쪽 손, 발, 어깨와 목 등이다.
마나바야, 여래는 물갈퀴의 상호[網縵相]가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있다.
마나바야, 여래는 흰 털의 상호[白毫相]가 있는데 눈썹 사이에서 마치 달빛처럼 희게 빛나며, 마흔 개 치아의 상호[齒相]가 있고, 넓고 긴 혀의 상호[寬長舌相]가 있다. 큰 공덕의 상호가 머무르는 이와 같은 설근(舌根)은 모든 언어와 음성을 판별해서 구족하게 널리 설하게 된다. 또한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 상호[目不眴相]도 있다.
마나바야, 여래의 정수리 상호[頂相]는 온갖 사람ㆍ하늘, 나아가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나바야, 여래의 손발의 스무 개 손톱과 발톱은 마치 붉은 구릿빛 같고 얇기는 마치 연꽃 같은데, 광택이 분명하고 다른 빛깔보다 뛰어나다.
마나바야, 여래의 곧은 발의 뒤꿈치 상호[傭足跟相]의 붉기는 마치 꽃잎과 같은데 먼지ㆍ물이나 진흙의 때[垢]가 더럽히지 못한다.
마나바야, 여래의 넓적다리와 장딴지가 곧고 견고한 것은 마치 금강(金剛)과 같아서 멀고 가까운 길을 걸었을 적에도 끝내 고달픔이 없다.
마나바야, 여래 몸의 금빛 상호(身金色相)는 온갖 것보다 수승하며 능히 동요함이 없다.
마나바야, 모든 천상의 궁전은 자금(紫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자금을 겨자씨만큼 가져 와도 칠보를 염부제(閻浮提)에 가득히 채운 것보다 뛰어나다. 이처럼 마나바야, 만일 천상의 자금 더미를 여래의 앞에 가득히 채워 놓는다 하더라도 부처의 영원한 광명[常光]은 천상의 금빛을 모두 다 캄캄하게 하여 광택이 없게 할 수 있다.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해가 나오면 모든 반딧불의 광명이 모두 소멸되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저 천상의 금빛은 해로써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의 영원한 광명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이처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온갖 상호를 이와 같이 분별하여 나타내 보인다는 것을 너희는 응당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마나바야, 여래는 이제 모든 상호의 선근(善根) 인연을 분별할 것이니, 너희는 일심의 정념(正念)으로 산란함 없이 모든 감관[根]을 조복하고 귀를 가다듬어 고요히 머물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수승한 지혜를 얻고자 하면 다른 인연을 따르지 말고 은근하고 정중한 마음을 내고 희유한 뜻을 발하여 여래의 처소에서 지극히 정성스런 마음을 일으켜 모든 상호의 공덕을 잘 분별해 마땅히 여래ㆍ응공ㆍ정변각 앞에서 자세히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
양쪽 발바닥의 천 수레바퀴살 상호[千輻輪相]에서는 그 낱낱의 상호에서 천의 광명을 놓으며, 양쪽 발이 밟는 곳에서는 이 광명의 빛살이 곧장 하방(下方)의 모든 세계에까지 이르므로 그 안의 중생들은 이 광명을 보자마자 희유한 마음을 내고 존중하는 뜻을 일으켜서 저 여래ㆍ응공ㆍ정변각 앞에서 법상(法相)을 변론한다. 저 부처님께서 다시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의 발 수레바퀴 상호[足輪相]의 광명이다. 공능(功能)과 힘의 작용이 타방(他方)까지 멀리 이르러서 중생을 교화하고 선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너희는 자세히 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모든 선근이 성취하는 일을 분별하겠다.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이 부처님ㆍ세존을 위하여 산이나 숲 가운데 거닐 곳[經行處]을 만들 때 기와조각이나 돌을 쓸어내고 단장해서 부드러운 풀을 그 위에 깔고 다 된 뒤에 봉헌하면, 이와 같은 보살은 여래가 경행하는 곳에 계신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왕래하시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편히 쉬시면서 뜻대로 위의(威儀)를 나타냄을 보기도 할 것이다.
이 보살들은 또한 여래의 발에서 천의 수레바퀴 상호가 풀 아래를 사무쳐 지나면서 땅 위를 빛나게 하는데, 그 오묘함이 마치 연꽃과 같아서 뭇 광명이 장엄함을 볼 것이니, 보살들이 이런 상호를 본 뒤에는 자기의 몸에 대하여 아끼는 생각이 없게 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금 이 여래는 이와 같은 원만한 상법(相法)과 희유한 일이 있는데도 오히려 아끼시지 않는데, 하물며 이 몸에는 더럽고 나쁜 것이 가득 차서 똥과 오줌이 넘치고 피부 속의 흐르는 피와 뼈, 근육, 살이 서로 얽혀서 아홉 구멍으로 언제나 흘러내리는 종기 고름이 뭉친 더러운 곳이니, 이는 청정치 못한 더미로서 모든 벌레들의 거처거늘 어찌 우리가 속히 싫어하면서 여의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보살은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보리의 갈래[菩提分]를 구하고 수레바퀴의 상호[輪相]를 성취해서 마음과 말로 찬탄하며 모습 없는 법[無相法]에 들어간다.
이처럼 보살들은 밤낮으로 사유(思惟)하면서 문득 환희하고 이 환희의 마음으로 ‘여래는 경행하기도 하고 혹은 앉기도 하며 혹은 서 있기도 하며 혹은 선정(禪定)에 들기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들은 이렇게 분별하고 나서 또한 생각한다.
‘나는 이제 모든 상호에 취착(取着)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라도 상호에 취착하지 않으면, 곧 나(我)라는 생각[我想]과 중생이라는 생각[衆生想]을 여읠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사유한 뒤에는 곧 무연정진(無緣精進)을 두루 일으킬 수 있다.
또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무연정진을 일으킬 수 있는가? 마치 공중의 바람이 방향이나 처소가 없어서 동방과 그 밖의 다른 방향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며, 이미 머무는 바가 없는데 어떻게 이름할 수 있겠느냐?’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실로 이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법에 이름이 없다면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없는 가운데서는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이 없는 가운데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생각[念]이 있겠느냐? 만일 생각이 없다면 곧 아무 것도 없는[無所有] 것인데, 만일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들어감[入]이 있겠느냐? 이미 들어감이 없거늘 어떻게 음(陰)과 모든 대(大)가 있겠으며, 만일 음과 대가 없다면 어떻게 유(有)가 있겠느냐? 만일 유가 없다면 어떻게 생(生)이 있겠으며, 만일 생이 없다면 어찌 생겨나는 처소[生處]가 있겠느냐? 만일 생겨나는 처소가 없다면 어떻게 이름과 물질[名色]의 모든 모양이 있겠느냐?
마나바야, 만일 모든 모양이 없다면 이것은 바로 모양 없는[無相] 것이니, 모양 없는 것으로 모양을 삼는다면, 이것을 바로 아가 없다[無我]고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만일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는 이라면, 바로 그가 물러서지 않는 보살[不退菩薩]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양 없음을 잘 말하면서 모양 없음을 행하기 때문이다.
마나바야, 여래의 수레바퀴 상호의 성취는 이와 같은 순서로 모든 선근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한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후신(後身)보살이 보리수 아래의 도량에 앉아 삼명(三明)을 획득할 때 어떠한 법을 증득하며, 다시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름하여 증득[證]이라 하느냐?’
무외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 때에 증득한다고 함은 자기의 법신(法身)을 보기 때문에 몸으로 증득한다[身證]고 하는 것이며, 명(明)의 힘을 두루 갖추어 무명(無明)을 끊어 없애고 무명을 여의는 까닭에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큰 지혜[大智]를 멀리 여의면 그 무명의 어둠에 가리어지니,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밝은 지혜[明慧]와 두려움 없는 힘[無畏力]으로써 모든 중생들이 저 무명의 어둠에 가려져서 아만(我慢)과 오만으로 목마르고, 진에(瞋恚)로 성내고 다투어서 불타는 것 같고, 전도되어 마음을 잃고, 소경이 되어 눈을 잃고, 다른 이에게 부림을 당하며, 바른 도[正道]를 배반하고, 정념(正念)을 파괴하고, 혹은 망령된 행(行)으로 미혹해서 마음이 흐트러져 삿된 길[邪徑]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아십니다.
이 때문에 여래께서는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여서 모든 중생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모두 이 올바른 길을 타서 뜻을 편하게 해서 갈 수 있다. 이 길은 두려움이 없고 안온하며 즐거움이 있어서 능히 상응하는 이는 큰 이로움을 거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중생으로서 이 길을 가는 이가 있으면 모두 가없는 큰 이로움이 상응하며 모든 보살은 법답게 정진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의심의 그물을 끊어 없애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것입니다.’
아난아, 저 방광여래가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마나바야, 너는 이제야 여래의 방편설을 능히 수순하는구나.
또한 마나바야, 여래의 두 손바닥에는 천의 수레바퀴살 상호가 있어서 넓고 크며 선명하다. 이 두 상호를 성취한 선근의 인연을 너희들은 살펴서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마땅히 설하리라.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나타나 기거하는 곳에 스승[敎誨師]이 있는데, 그는 진실한 아라한이어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할 일을 다 마친 이였다. 이 아라한은 진정한 법사(法師)가 되어서 실답게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능히 설하였으며, 비록 항상 법을 보시하긴 하였지만 그 보답을 구하지 않았으니, 모든 번뇌가 다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뒷날 그 법사는 우연히 두 가지 병에 걸렸다. 첫째는 위로 토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아래로 설사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위독한 병을 너무 오래 앓아서 몹시 여위고 피폐해졌다.
이 보살은 그 법사에 대하여 언제나 희유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낸지라 법사가 병이 들어 고통 받는 것을 보고는 전심전력으로 치료하느라 밤낮 부지런히 힘쓰면서 잠시도 멀리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토한 것을 받고 왼손으로는 똥을 치면서 비록 더러운 일이 많아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법사의 목숨을 사랑한 까닭에 손으로 여러 가지 약을 법사의 입 안에다 넣어 주었다. 그러나 너무도 파리하고 여위었기 때문에 약이 넘어가지 않자 보살은 스스로 그것을 문지르고 비벼서 먹였으며, 또 법사를 부축하고 모시면서 종일토록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래서 병이 낫게 되었다. 보살은 이렇게 몸소 사장(師長)을 만지고 씻은 공덕의 선근으로 손바닥 안에 바퀴살의 상호가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그 보살이 사장에게 공양한 것을 보고 희유한 마음을 내서 저 비구가 중한 병이 들면 나을 수 있게 할 것이며, 혹 어떤 사람들이 발심해서 청법(聽法)해 법을 들을 적에는 존중한 마음을 일으켜서 법사가 설한 대로 수순하면서 받들어 행할 것이며, 또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법을 들어 기뻐하게 하는 것이 마치 저 보살이 목숨을 다하여 은혜를 갚으면서 일심으로 스승의 병을 치료하여 낫게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선근의 인연으로 바퀴살의 상호가 완전히 구족하여 모자라거나 적음이 없다.
마나바야, 이 손의 수레바퀴 상호의 선근 인연을 이제 해설하여 마친다.
또한 마나바야, 여래의 어깨뼈에는 세 수레바퀴의 원만한 상호[三輪滿相]가 있다. 그 선근 인연을 너희들은 살펴 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설하겠다.
마나바야, 어떤 보살이 여래가 멸도(滅度)하신 뒤에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없어지려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이 보살은 대비의 마음[大悲心]을 일으키고 용맹스런 뜻[勇猛志]을 내서 세상일을 끊어 없애고 출가하여 모든 외도와 원수가 되었다. 왜냐하면 정법을 건립하여 주지(住持)하고 정법을 수호하고 정법을 섭수(攝受)하기 때문이며, 정법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정법이 더욱 증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은 혼자 몸으로라도 반드시 재가(在家)와 출가의 모든 사람들과 외도 등을 조복하려 하기 때문에 국왕과 대신이 모인 한량없는 대중 가운데서 갖가지 방편으로 모든 여래의 이름을 칭찬하고 찬탄하며 또한 공덕의 수승하고 묘한 일들을 설하였다.
또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온갖 법문을 설하였고, 정념(正念)과 그 밖의 모든 선근을 설하면서 일체의 모든 외도들을 조복하였다.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정법을 건립하여 짊어진 것이니, 이 선근의 인연으로 세 수레바퀴의 원만한 상호를 성취하여 두루 갖춘 것이다
이 상호는 미묘하여 온갖 세간을 모두 능히 비출 수 있어서 보는 이들이 기뻐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라도 모든 여래의 뭇 상호와 서원을 들을 때는 마땅히 공경과 믿음을 내어야 하고 또한 경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가 하나의 선근으로 모든 공덕을 섭수하면서 세 가지의 원만한 상호를 이룬 것이다.
또 마나바야, 여래의 손가락과 발가락에 있는 물갈퀴 상호[網縵相]는 마치 거위 왕의 것과 같아서 그 사이에 결루(缺漏)가 없고 연꽃처럼 얇고 세 개의 줄이 선명해서 중생으로 이를 보는 자는 누구나 기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상호의 선근의 인연을 내가 이제 해설할 것이니, 너희들은 살펴서 들어야 할 것이다. 마치 내가 과거의 한량없는 겁 동안에 모든 선근을 닦아서 이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게 된 것과 같다.
마나바야, 어떤 보살마하살이 대왕(大王)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를 부(富)하게 하고 백성을 번성하게 해서 모든 창고가 가득 차지 않음이 없고 사업과 궁전이 모두 충족하였다.
이 보살인 왕이 교화하는 나라 안에는 많은 종류의 농업ㆍ상업ㆍ공업과 장사꾼과 관리들이 있었다. 이 나라 안의 백성들이든,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이든 모두 성을 내고 독을 품으며 각기의 주장을 고집하고, 간혹 분노하고 다투면서 저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그 보살에게로 와서 소송을 제기하며 이기기를 구하였다. 그 때 보살은 그 중생들이 성을 내면서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자 그들을 구제하고 화해시키기 위하여 자재한 힘으로 가르치고 책망하였다.
‘다투지 말라. 무릇 다툼이란 것이 어찌 사람이 할 법이겠느냐? 이것은 짐승들의 일이다. 모든 짐승들은 어리석음과 성냄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다투고 서로 부딪치며, 혹은 서로 깨물고 밟으며 다시 서로 짬을 엿보다가 살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지옥 중생들의 나쁜 법이니, 너희 중생들은 지옥을 배우지 말 것이며, 짐승이 짓는 나쁜 업을 익혀선 안 된다. 너희들은 모두 여래께 귀의하고 법(法)과 승(僧)에게 귀의해서 그 몸이 다하도록 살생하지 말고 오계(五戒)를 수지하여야 내가 너희들을 거두고 받아들인다. 내가 거두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지금의 몸으로 언제나 안락을 누리게 할 것이고, 이 몸을 버린 뒤에는 곧 천상에 날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온갖 악한 일을 버리고 저마다 서로 사랑하면서 다시는 나쁜 마음이 없음을 알고는 불탑(佛塔) 앞에서 삼귀(三歸) 오계를 수여하고 인도함으로서 모두가 악을 끊고 선을 내게 하니,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을 능히 화합시키는 인연 때문에 물갈퀴와 같은 상호를 성취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의 손발에 있는 물갈퀴라는 선근의 인연이니, 나는 이미 해설하여 마쳤다.
또 마나바야, 여래의 손가락과 손톱은 곧고 길며 가늘고 촘촘하면서 성김이 없다. 그 성취한 인연을 이제 설할 것이니, 너희들은 일심으로 들으면서 다른 것은 생각지 말라.
마나바야, 어떤 보살마하살은 여러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혹은 홀로 앉아서 사유하거나 혹은 대중과 담론하기도 하면서 다른 생각 없이 마음이 언제나 기뻐한다. 이와 같은 보살은 무릇 세간에 머물면서 어떠한 부류든 수순하면서 그들과 동화해 행할 수 있다. 그들 대중이 도적이거나 또한 전타라거나 사냥꾼이거나 망나니이거나 간에 말이다.
또한 모든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이가 있으면, 보살은 그들을 수순해 깨달아 알 수 있어서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그들에게 법요(法要)를 설하는데, 먼저 중생으로 하여금 갖가지 모든 불선업과 악한 마음을 멀리 여의게 하고, 그러한 뒤에야 열 손가락을 합쳐 합장하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한다.
‘나는 이제 세간의 모두가 존중하는 복전(福田)이자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자 만물을 위하여 출현하셔서 지혜 있는 사람이 찬탄하는 이른바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응공ㆍ정변각과 정법(正法)ㆍ승보(僧寶)의 처소에 귀명(歸命)하니,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한량없는 공경심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그 한량없는 악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모두가 마음을 돌이켜 온갖 선업(善業)을 닦게 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묘한 손톱이 마치 붉은 구리와 같고 손가락이 곧고 가늘며 길고 또한 부드럽고 촘촘하면서 광택이 나게 되는 것이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의 손가락과 손톱의 모든 상호의 공덕ㆍ인연이니, 나는 이제 설하여 마친다.
마나바야, 너는 이 안의 것에 대하여 깊이 공경하면서 믿어야 한다.
마나바야, 모든 보살은 때로 선행을 하는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설법하고 교화하기도 한다. 혹 어떤 이는 악한 중생을 위하여 한때[一時]에 설법하기도 하며, 나아가 한 번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설법하기도 하는데, 이때 얻게 되는 공덕은 또한 앞의 것과 견줄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나바야, 잠시 동안이라도 여래께 공양하고 공경히 섬기면서 존중하면, 곧 저 지혜 있는 이의 찬탄을 받는다고 여래는 항시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 마나바야,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몸의 자금빛을 성취한 선업의 인연을 너희들은 살펴 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설하겠다.
마나바야, 여래가 세간에 계실 때에 모든 보살들이 법을 듣기 위하여 여래의 처소에 와서 여래대승경(如來大乘經)의 이름과 보살행(菩薩行)의 법을 물었다. 그 때에 부처님ㆍ세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나 유행(遊行)하시다가 마침 황량하고 험한 어떤 곳에 이르셨다. 오직 날짐승과 길짐승들만이 많이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성이나 부락, 가옥도 보이지 않은데다가 숲과 뭇 풀도 없었으므로 설령 잠시 쉬었다 가시려고 해도 바닥에 깔개를 베풀 수도 없었다.
그 때에 이 보살은 언제나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녔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자갈밭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하늘에 구름이 드리우더니 우렛소리가 진동하면서 큰 비가 왔다.
그 때 저 여래의 의복이 모두 젖었다. 보살은 그 모습을 보고 존중하는 마음이 더 커져서 드디어 스스로 옷을 벗어 부처님 위를 가렸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옷을 가져다 볕에 말린 뒤에 다시 자신이 입고 부처님을 따랐다. 세존께서는 이로 인해 처음으로 보살을 위하여 비로소 신원(身願)이라는 대승경을 말씀하셨다.
그 때에 그 대중 가운데는 아첨하는[諂曲] 보살과 초학(初學)의 출가 사문, 혹은 아직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 보살은 옷뿐만 아니라 발우에 필요한 것을 수시로 채워주어서 쌓아 놓은 게 없자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곧바로 정념(正念)을 얻어 기쁨이 충만하였다.
보살이 이때 경전을 듣고 나서 보살 대중과 비구 앞에서 대승경전을 자세히 해석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아첨과 파계(破戒)하는 마음을 제거하게 했으니, 이 선근의 인연으로 금빛 몸을 과보로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파계와 아첨의 때[垢]를 능히 제거한데다 몸을 아끼지 않고 옷을 벗어서 부처님을 덮어 드렸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훗날 몸이 자금빛이 되어 세간을 비치고 가리면서 오래도록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래의 몸이 순금빛이 되신 선근의 인연이니, 이제 연설하여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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