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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14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2권

by Kay/케이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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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2

 

 

 

대법거다라니경 제2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3. 수마기품(授魔記品)

“아난아, 그 때 방광여래가 마왕에게 말씀하셨다.
‘사치(闍致)야, 너는 이제야 비로소 대용맹을 일으켜 정진(精進)을 능히 갖출 수 있으니, 너희 마음을 견고하게 해서 본래의 뜻[本志]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마치 계(戒)를 수호한 이가 스스로 장엄(莊嚴)을 서원한 것과 같아서 마음으로 원한 바를 성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모든 악마들의 정진이 순박하고 견고하여 모두가 보리(菩提)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아셨으니, 이런 인연 때문에 곧 빙그레 웃으셨다
부처님께서 빙그레 웃으셨을 때 그 대중 가운데에 월상(月上)이라고 하는 한 보살마하살이 있었다. 이 보살 역시 방광여래가 보살이었을 때 같이 수행한 착한 도반이라서 언제나 함께 했다.
이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하고는 말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또한 빙그레 웃으셨습니까?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무릇 미소(微笑)를 지을 적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지 인연이 없으면 끝내 웃지 않으셨습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저를 위해 설해 주십시오.’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곧 월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 악마의 무리들을 보고 있느냐?’
월상보살이 대답하였다.
‘네,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 모든 악마의 무리들은 나의 눈썹 사이에서 나온 큰 광명을 보고는 비록 욕계(欲界)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넓고 큰마음을 일으킨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항하(恒河: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많은 겁(劫)을 지나면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되면서 모두 무사광(無思光)이란 동일한 명호로 불릴 것이다.
그 부처님들은 세간에 머무르면서 큰 이로움을 지을 것이니, 만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부처님들을 본다면 모두가 보리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로움을 지은 뒤에는 반열반(般涅槃)에 들 것이요, 부처님들이 열반한 뒤에 세계의 모든 악마들은 큰 공양을 일으켜 저 모든 여래와 성문 대중에게 공양할 것이며, 이 모든 악마들은 속인(俗人)이 살고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그들이 꿈꿀 때에 경우에 따라 감응해 보여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날 것이니, 혹은 장자(長者)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거사(居士)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사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바라문(婆羅門)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범왕(梵王)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보살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의 형상 등을 나타낸 뒤에도 그 중생들이 마음에 미혹을 품으면, 그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설해서 의심의 그물을 제거한 후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집을 버리고 출가하여라. 여래세존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여서 응당 공양을 받을 만하고 하늘이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모든 고통을 능히 뽑아 주시고 똑같은 쾌락을 주셨다. 우리도 부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제 역시 안온을 얻었다.’
그 악마는 이와 같이 큰 신통을 나타내서 모든 거사나 우바새 등을 교화하여 더욱 믿고 기쁘게 한 후에 법을 설해 발심(發心)시켜서 여래와 대중을 존중하고 공양하게 하며, 큰 서원을 세워 정진을 구족히 닦아서 모든 공덕을 위없는 보리[無上菩提]에 회향해 끝내 이승(二乘)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무릇 교화한 바가 오직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을 권할 뿐이었는데, 어떻게 다시 온갖 악마의 일이 있겠느냐? 바로 이때 일체 중생들이 큰 안온과 쾌락을 누리는 것이 마치 도리천(忉利天)의 하늘들과 같고, 모든 중생 중에서 부처님의 제자가 몸과 마음이 안락함은 마치 제석천왕(帝釋天王)과 같을 것이다.
악마의 무리들이 모두 성불한 뒤에는 온갖 중생들이 평등하게 큰 쾌락을 누리고 그 국토에서 온갖 향기로운 꽃들이 자라는데 모두 천상의 파리야다구비다라수(波利耶多拘毘陀羅樹)5) 꽃과 같다. 일체의 장엄이 저 모든 중생들에게 모자람이 없고 나아가 마사(魔事)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중생들은 다시는 산란한 마음이 들지 않고 번뇌가 미미하고 희박해서 번뇌의 침노를 받지 않으며, 모두가 항시 한마음으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법문을 염(念)하기 때문이다. 이 법문에서 큰 정진을 일으켜 한량없는 공삼매(空三昧)의 행(行)과 무원삼매(無願三昧)의 행과 무상삼매(無相三昧)의 행을 수행해서 각관(覺觀)을 없애고 수면(睡眠)을 제거하며 도회(掉悔)를 끊고 시끄럽고 복잡함을 여읜다. 그리하여 언제나 적멸한 아란나(阿蘭拏)의 처소에서 즐기고, 항시 걸식(乞食)하면서 다만 세 가지 옷만을 입고, 어기거나 다툼이 없으며, 반려(伴侶)를 끊을 것이다.
필경에는 이와 같이 보살행(菩薩行)을 행하면서 모든 불법에 대하여 능히 결정적으로 알게 되며, 보살을 벗으로 삼아서 다시는 두려움이 없고, 사자ㆍ범ㆍ이리 등의 모든 사나운 짐승이나 독충의 무리도 끝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모든 악마들이 보리(菩提)를 얻고 나니, 이 모든 세존과 성문 대중은 공덕을 구족하고, 그 밖의 중생들도 훼방을 놓거나 조복시킬 수도 없고, 온갖 외도(外道)들이 파괴할 수 없고, 온갖 뭇 악마도 거스르지 못한다.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게 하고 삿된 도[邪道]를 멀리 여의어 마음에 자재(自在)를 얻게 한다.’
그 때에 월상보살마하살이 다시 방광부처님께 말했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사의합니다. 여래는 한량없는 공덕을 완전히 갖추셨으며 큰 자비(慈悲)가 있고 큰 신력(神力)이 있어서 한 눈썹 사이의 광명으로도 이롭게 함이 많습니다.’
부처님이 월광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너는 여래ㆍ세존의 지혜와 공덕을 잘 아는구나.
마나바야, 여래는 이와 같이 대비(大悲)를 완전히 구족하니 모든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고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여래는 이와 같이 설법(說法)을 성취하니 중생으로 하여금 설한 대로 행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누가 능히 믿고 이해할 수 있는가? 오직 모든 부처님과 불퇴전(不退轉)의 큰 보살마하살 등이 있을 뿐이다. 그 밖의 성문ㆍ벽지불(辟支佛)과 네 종류의 사람조차도 오히려 경계가 아니거든 하물며 그 밖의 범부와 사견(邪見)을 지닌 외도이겠느냐?
생사(生死)의 악마는 지혜 없는 길[無智道]을 다니면서 깊고 캄캄한 무명(無明)의 알껍데기 속[[穀-禾+卵]藏]으로 들어가서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전도된 길[顚倒道]에 머무르며, 올바른 길을 미혹해 잃고 언제나 그릇된 법을 좋아하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지 않으며, 삿된 경[邪經]에 심취하여 모든 금계(禁戒)를 깨뜨린다. 항시 이와 같은 온갖 불선법(不善法)에 머무른지라 미혹(迷惑)이 마음을 가려서 악하고 삿된 지혜를 지닌 온갖 외도를 익히기에 늘 어리석음에 가려져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성내는 독[瞋毒]의 사나운 불길이 훨훨 타기 때문에 불법을 따르는 대중들에게 온화하고 공경하지 못한데다가 또한 서로 침범하면서 다투는 일을 곧잘 일으키니, 이 인연 때문에 속히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백천의 큰 고통을 받으면서 한량없는 백천만 세(世)를 지나며, 설령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여도 전타라(旃陀羅)의 집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나쁜 주문 외우는 집에 나기도 하며, 혹은 백정의 집에 나기도 하고, 혹은 죽세공의 집에 나기도 하며, 혹은 고기잡이의 집에 나기도 하고, 혹은 사냥꾼의 집에 나기도 한다. 혹 불법이 있는 세상에 나게 되더라도 성문의 모든 제자들과 항시 다툼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분쟁을 하고 나서는 더욱 나쁜 업을 더욱 키워서 그 밖의 다른 착한 일을 소멸되게 하니, 이 때문에 미래에는 고뇌를 많이 받게 된다.’”

4. 삼승행품(三乘行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방광여래는 다시 뭇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의 십력(十力)은 줄어듦이 없고 위의를 구족하며 작용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염(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저 사성제(四聖諦)를 능히 잘 분별하여 방편으로 가르쳐서 성문의 행[聲聞行]을 성취하고, 또한 육바라밀을 잘 설하여 보살이 온갖 바라밀의 마음을 일으켜 행하도록 권유함으로서 수지심(受持心)과 신수심(信修心), 그리고 보시와 정진을 행함이 견고하고 용맹스러워 온갖 거짓이 없으니, 이와 같은 방편으로 지혜 문[智門]에 들어가는 것이다.
너희들은 또한 삼십칠조보리법(三十七助菩提法)을 알아서 방편으로 사문의 과인[沙門果印]을 증득하며, 또 십이인연법으로 부지런히 관행(觀行)을 닦아서 벽지불을 이루거나 성문이 되기도 하니, 이처럼 일체의 법과 상응(相應)하여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
만일 벽지불을 행하는 이라면, 이는 바로 여래께서 방편으로 가르쳐서 전도된 설법으로 이 뜻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니, 이 사람은 불법이 없는 세상에 나와 혼자 십이인연법을 염(念)하고 사유하여 독각의 열반[獨覺涅槃]을 얻는 것이니, 이와 같은 독각은 여래나 성문과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 벽지불은 인연(因緣)을 사유하여 의혹을 끊은 것이라서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고 스스로 혼자 깨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직 계행(戒行)만이 청정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혜의 힘만을 구하며, 지혜의 힘을 구하기 때문에 방일(放逸)하지 않아서 지혜의 언덕에 이를 수 있지만, 모든 부처님의 법은 없고 오직 계만 구족해서 열반에 들게 되므로 벽지불이라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월상보살이 다시 방광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어떤 연유로 저 벽지불은 지혜를 두루 구족하였지만 다시 법을 설하여 사람을 제도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미 설법할 수 없는데 어떻게 복전(福田) 가운데서 성문보다 더 뛰어날 수 있습니까?’
아난아, 그 때에 방광부처님이 월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들은 과거 처음 발심(發心)할 때에 다만 보리(菩提)의 이름만 취했을 뿐 용맹이 없어서 단바라밀(檀波羅蜜)과 시(尸)바라밀과 찬제(羼提)바라밀과 비리야(毘離耶)바라밀과 선(禪)바라밀괴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할 수 없었고, 문(聞)ㆍ사(思)ㆍ수(修) 등도 모두 수행하지 못한 것이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은 위없는 보리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 가운데서 처음 보살이 행하는 육바라밀을 들으면서도 능히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육바라밀을 갖추어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보살의 법 가운데 물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또한 기꺼이 수지하기 어려운 계를 얻지도 않았고, 위없는 큰 보리의 계를 지닌 것도 아니요, 다만 중간의 계[中戒]만을 지녔을 뿐 또한 아래의 계[下戒]도 아니다. 중간의 법[中法]을 행하기 때문에 본래의 서원[本願]을 성취해 중간의 보리를 얻은 것을 벽지불이라 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요(法要)를 묻고, 이미 듣고 난 뒤에는 용맹스럽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용맹스런 정진을 버리지 않아야 속히 위없는 큰 보리를 증득하는 까닭에 언제나 많은 견문[多聞]을 닦고 부지런히 방편을 일으키며, 항시 모든 불법을 버리지 않고 구하며, 외도를 멀리 여의고 삿된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치 어자[馭者]처럼 무거운 짐[重擔]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말씀하신 법문은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말씀이므로 응당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다.
또 마나바야, 어떻게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의 깊고 은밀하게 비장(秘藏)된 방편설문(方便說門)에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을 잡아매어[繫念] 편히 머물고, 마음이 이미 머물고 나면 그 뒤에 다라니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월상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다라니의 문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미 너를 위하여 이 구절의 뜻[句義]을 말하였으니, 마치 허공으로부터 모든 일[事業]들이 생기면서 일찍이 단절된 적이 없는 것과 같다. 다시 아(阿)와 가(迦)라는 두 글자 구의(句義)의 바탕이 바로 첫 방편[初分便]인 줄 알아야 하리니, 십이인연에 수순하여 들어가 차례로 알고 나서는 그 사람이 비록 다시 그 밖의 다른 법구(法句)를 안다 하더라도 모두가 처음의 두 가지를 인(因)한 것이다.
마나바야, 이 다라니의 방편인 법문은 온갖 것에 두루 편재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만일 이 법문에 들고자 하면 응당 발심하여 한량없는 법 가운데 가없는 선교(善巧) 방편을 닦아 익혀야 할 것이다.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지혜는 장애가 없지만, 이 법에서는 어떤 것이 장애가 되는가? 이른바 일체의 모든 법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일 저 모든 여래의 지혜에 들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온갖 집착을 버려야 하고 또한 모든 장애되는 곳을 멀리 여의어서 교묘한 방법으로 지혜의 방편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가 다시 월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집착하는 곳[著處]과 집착한다[著]고 말한 것은 말하자면 모든 존재[有]를 버려서 여의지 못하고 무위(無爲)의 처소에서는 지혜가 없어서 항시 생을 받음[受生]을 생각하고 태어날 곳[生處]을 구하는 것이니, 모두 무명(無明)이 생(生)과 유(有)를 짓는 근본이다. 그래서 나는 비록 아나함(阿那含)이라 하더라도 생(生)에 오히려 집착하면서 멀리 여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이 크게 집착하는 것인가? 이른바 가르침[敎]에 따라 수행하지도 못하고 여타의 일에서도 전도되게 찬술(讚述)하는 것이다. 이는 재물의 일[財事]로 말미암아 인연을 애착해 취하는 것이라서 자재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어기면서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경계에 대하여 탐심(貪心)을 일으키고, 탐심을 낸 뒤에는 다른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다른 이의 처첩(妻妾)에게 음행하며, 다시 진에(瞋恚)를 일으켜서 때로는 살해하여 남의 목숨을 끊으며, 또한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삿된 마음에 가려져서 전도된 법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언제나 극악무도한 악인(惡人)을 벗으로 삼기 좋아하면, 이 인연 때문에 갖가지 모든 불선업(不善業)을 짓게 되니, 혹은 부모와 사장(師長)을 죽이기도 하고, 혹은 아라한과 모든 성인을 해치기도 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을 헐뜯기도 하고, 혹은 바른 법을 비방하기도 하며, 혹은 승가를 파괴하기도[破僧]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나쁜 업을 지은 뒤에는 극히 악한 비인처(非人處)에 나서 파계(破戒) 속에 떨어진다.
어떤 것을 비인처에 떨어진다고 하는가? 마나바야, 나는 이미 너를 위하여 이 일을 간략하게 말하였으니, 가령 저 어리석은 사람이 오로지 나쁜 업만을 즐기다가 이 인연으로 악취(惡趣)에 나는 것을 비인처라고 한다.
마나바야, 지혜 있는 사람은 마땅히 부처님ㆍ여래의 비밀스럽고 묘한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5. 문법성품(問法性品)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당시 그 대중 안에는 무외(無畏)라는 한 보살마하살이 있었다. 본래 그는 의료 처방으로 세간을 구제하는 집의 아들이었으며, 옛날에는 늘 저 방광여래와 함께 한 친한 도반이었다.
그 때에 방광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서 무외보살을 똑바로 보시며 자세히 살피자, 무외보살은 이미 알아차리고 드디어 부처님 앞에 나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 채 일심으로 합장하며 생각했다.
‘이것은 세존께서 아직 성불하시기 전에 뜻을 같이하는 친한 사이였으므로 다시 이렇게 보시면서 살펴주시는 거구나.’
그래서 세존의 처소에서 삼가고 두려운 모습으로 오직 더욱 공경하고 존중할 뿐 마음엔 의심스런 생각이 없었다. 다만 방광여래께 수다라장(修多羅藏)의 법성(法性)인 허공 다라니문의 심히 깊은 이치의 근거를 묻고자 했을 뿐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무외보살이 이처럼 심히 깊은 구절의 뜻을 묻고자 함을 아시고 곧 말씀하셨다.
‘무외야,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내 앞에 있으면서 두려운 마음만 낼 뿐 속히 묻지 않느냐?’
아난아, 무외보살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곧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진실로 여래께 큰 뜻[大義]을 묻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에 미리 근심과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중생이라도 이 법을 듣고 난 뒤에는 모든 불법을 깨달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공경하거나 믿지도 않고, 혹은 비방을 일으켜 선근(善根)에서 물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중생의 이러한 면을 알기에 감히 묻지 않는 것입니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부처님이 다시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무외야, 너는 다만 묻기만 하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 세간에 출현한 것은 네 마음의 의심에 따라 마땅히 끊어 없애 주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바로 모든 여래의 업(業)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ㆍ정변각은 자비와 연민으로 온갖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내가 옛날 보살도를 행할 때 이 법구(法句)를 위하여 뭇 고통도 두루 감수하여 받았거늘, 하물며 이제 할 일을 다 마치고 모든 법을 명료하게 통달해서 일체지(一切智)를 얻고 큰 보리(菩提)를 증득하였음이겠는가? 오직 모든 중생들의 안락만을 위할 뿐이다.’
아난아, 이 때 무외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말했다.
‘세존이시여, 지금 여래께서 온갖 법이 허공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응당 증득해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이제 그 뜻을 묻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허공이라는 말뜻은 무엇이며, 수다라의 온갖 법문과 다른 모양[異相]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아난아, 그 때에 방광부처님이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장하도다. 너는 오늘날에야 법을 구하기 위해 불법 가운데 이러한 뜻을 묻는구나. 무외야, 대저 허공이라 함은 여래라 하고 또한 응공ㆍ정변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어떤 이치로 허공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허공이란 곧 있는 바가 없는[無所有] 것이니,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 여래를 곧 허공이라 한다면 여래와 허공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큰 지혜가 행할 바의 경계라서 알기도 어렵고 증득하기도 어렵다. 만일 능히 이해하여 안다면 법성(法性)에 대하여 삼세(三世)가 평등하고 다시는 의혹이 없을 것이다.
무외야, 가령 다라니문의 심히 깊은 근원을 궁구하여 다하려고 하는 자는 마치 물의 성품이 맑고 깨끗한 저 큰 연못 밑에 금 모래[金砂]와 흙이 섞여 있는데, 어떤 지혜로운 자가 연못 밑의 모래를 취하여 그 많고 적음에 따라 한 곳에 모아 물로 씻으면서 정(精)한 것만 것을 골라 화로에다 넣은 뒤 불 속에서 공을 들여 단련시키면 이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반드시 모래와 돌이 제거된 깨끗하고 묘한 금을 얻어 사용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때 이 사람은 뜻대로 다른 장엄구(莊嚴具)를 만들되 충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무외야, 여래ㆍ세존ㆍ응공ㆍ정변각은 탐(貪)ㆍ진(瞋)ㆍ치(癡)를 여의고 티끌의 때[塵垢]인 온갖 번뇌와 모든 습기(習氣)를 없애서 청정하고 장애 없는 지혜를 성취하였다. 온갖 사생(四生)의 중생보다 뛰어나 천상과 인간 대중에서 첫 번째가 되므로 세간에서는 상수(上首)라고 일컫는데, 큰 법북[大法鼓]을 치면서 스스로 이렇게 제창하신다.
‘어진 이들이여, 오너라. 너희 모든 중생들, 즉 의심의 그물을 일으키고 지혜가 없어서 모든 법에 어둡거나, 혹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일에 대하여 능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때로 온갖 하늘ㆍ용의 팔부(八部)에서부터 나아가 한량없는 억 겁 이래로 갖고 있던 모든 의심으로 헛갈리고 전도(顚倒)되어 정도(正道)를 잃고서 갖가지 업을 짓다가 모든 유(有)에 떨어져 스스로 벗어날 수 없으면, 이런 무리들은 속히 와서 부처님ㆍ세존께 물으라. 여래는 모두 너희들을 위해 잘 설법하여 그 뜻을 명료하게 드러내 의혹을 끊어 없애 줄 것이다.’
또 무외야,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서 모든 색상(色像)을 보는 것과 같으니, 여래ㆍ세존께는 악행(惡行)과 첨곡(諂曲; 아첨과 왜곡)과 번뇌(煩惱)와 예탁(穢濁)과 질투(嫉妬)와 다툼[諍競]과 더러운 때[垢汚]와 진창[淤泥]과 염착(染著)이 없으며, 오직 장애 없고 가없는 지혜와 변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언교(言敎)와 방편으로 모든 세간 중생을 개발(開發)하는데, 이 모두는 허공으로부터 나와 허공에 머무르는 것이며, 언어ㆍ교조(敎詔)ㆍ강설(講說)ㆍ담론(談論)도 마치 허공처럼 모든 염착(染著)을 여의어서 머무는 곳도 없고 변제(邊際)도 없으며 대상 및 언어도 없다.
또한 무외야,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이와 같은 허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며, 어느 곳에서 설명이 있는 것이며, 누가 설명하고 누구에게 설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면, ‘허공의 성품은 본래 청정해서 물듦도 없고 때[垢]도 없어 모든 장애를 여의었다’고 할 것이다.
무외야, 여래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말도 없고 대상도 없으며 물듦도 없고 집착도 없어서 모든 장애를 여의었으니, 이와 같은 언설(言說)이 곧 허공삼매(虛空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다.
무외야, 비유하면 마치 열반의 본래 성품은 고요한데 한량없는 언사를 빌려 설하는 것이니, 그 체상(體相)을 구하고자 하면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무외야, 네가 질문한 허공이라는 뜻은 이미 널리 설하였으며, 그와 같이 말한 것이 바로 여래의 방편이요, 미묘하고 비밀스런 법요(法要)인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래의 미묘한 가르침을 알게 되면 이러한 것을 곧 큰 이로움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응당 여래가 어떠한 소견으로 어떠한 법이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하였는지, 또한 어떠한 것이 여래의 지혜로서 허공과 동일하다고 말하였는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여래의 가르침 중에서 방편으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무외야, 나는 지금 갖가지 비유로써 여래의 지혜[如來智]를 비유했는데, 혹은 열반(涅槃)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실제(實際)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열반은 다 같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분별할 수도 없으니, 모양도 없고 생각[念]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도 없으며, 나아가 세간의 일체 모든 법도 역시 열반과 똑같이 보아서 설할 수 없다.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이 가운데서는 실로 범부(凡夫)는 지견(知見)을 얻을 수 없다.
범부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모든 범부는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보는 것을 내가 증득해 알았다고 말할 뿐이다. 이제 나는 이미 요의(了義)의 법구(法句)와 증득한 곳이 없음을 말하였지만, 이와 같이 말한 바는 피차(彼此)에 있지 않고 양쪽 사이에도 있지 않고 평등의 중도라서 증득해 아는 자가 없다.
이미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 모두가 평등하므로 증득하여 설명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것은 누가 말한 바요,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며, 어디에서 설했는가?’라고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또 무외야, 여래ㆍ세존은 그것을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너는 마땅히 언교의 방편을 관찰해서 응당 잘 사유해야 한다. 이미 사유하고 나면 곧 한량없는 지혜 더미를 성취할 것이다.
무외야, 부처님의 지혜는 가없고 불가사의해서 무릇 섭수(攝受)하는 바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그러므로 열어 보인 언교를 잘 분별하고 사유해야 하니, 앞에서 물었던 것은 곧 이런 뜻이다.
또 무외야, 이제 묻노니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대답하라. 너는 온갖 후신 보살(後身菩薩)이 어디서 와서 태(胎)에 처했다고 생각하느냐?’
무외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알기로는 보살은 도솔타천(兜率陀天)으로부터 내려와서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외야, 이제 거듭 너에게 묻노니 대답하여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후신 보살이 하늘로부터 왔다면 취할 법이 있어서 태에 들어간 것이냐?’
무외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취할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어머니의 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정녕 그러하다.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취할 바가 없고 다만 망상의 분별때문에 생겼을 뿐이다. 너는 이와 같은 분별의 법 가운데서 이미 세 가지를 나에게 청하며 물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허공이라는 이름에 뜻이 있고 없음을 물은 것이고, 둘째는 허공과 모든 법이 동일한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며, 셋째는 허공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물은 것이다.
무외야, 네가 물었듯이 무엇이 허공이냐? 이와 같은 허공은 의지함이 있느냐, 없느냐?’
무외가 다시 물었다.
‘실제로 허공이 있어서 의지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외야, 또한 허공이 있는 것은 의지하는 법이다. 만일 범부(凡夫)의 봄[見]에 의지함이 있다거나 의지함을 여의었다고 하면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서 또한 명자(名字]의 유무를 설명할 수 없다.
무외야, 만일 허공이 있어도 현상[事]의 나타남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곧 명자가 없는 것이니, 현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명자가 있으면서 현상과 화합하여 수상(數相)에 들어가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허공이 현상과 화합하여 명자가 있어서 수(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 듣지 않았느냐? 지금의 이 몸은 지계(地界)에 의지하고, 지계는 수계(水界)에 의지하며, 수계는 화계(火界)에 의지하고, 화계는 풍계(風界)에 의지하니, 이와 같은 네 가지와 식계(識界)는 모두 허공에 의지하는 것이다.’
무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외야, 이것을 허공이 의지해서 수(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은 곧 여래가 모든 범부들을 위하여 비유와 방편으로 열어 보이고 가르쳐서 명자를 인하여 알 수 있게 한 것이니, 이 때문에 허공이 의지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무외야, 만일 지혜로운 사람이 사유하고 관찰하여 능히 안다면 이 평등한 법을 세간에 두루 증명하더라도 단지 명칭만이 있을 뿐이니,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시 다른 이를 가르쳐서 진실한 뜻을 얻게 할 것이다.
마나바야, 지혜 있는 사람은 응당 여래가 스스로 증득해서 중생들을 위했기 때문에 이 법문을 설하셨다고 사유해야 한다.
마나바야, 나는 이미 너를 위해 수순하고 분별하였으니, 마땅히 여래의 방편을 이와 같이 알아서 내가 말한 바를 수지(受持)하고 염송하면서 이치[義理]를 사유하여 법답게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과거의 모든 공덕과 원행(願行)이 더욱 증장해서 구족히 성취되리니, 여래는 이미 너희들을 위하여 일체의 법이 가고 오는 것이 없음을 설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말한 바는 진실해서 허망함이 없고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가장 수승한 법을 분별하여 드러내 보인 것이니, 그 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구족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여래가 언설한 바가 대승의 법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원행(願行)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조차 없으니, 보살은 응당 아(我)의 경계가 아님을 사유해야 한다.
또 마나바야, 마치 허공계(虛空界)를 이름하여 ‘다닐 수 있어서 중생이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저 새들이 허공을 날아다닐 적에 빙빙 돌며 자유로이 나는 것과 같으며, 가령 땅을 밟는 것이 비록 날개의 힘과 바람의 인연으로 오고 가며 노니는 곳이라도 자취는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마나바야, 또한 어떤 중생들은 허공계에 의지하여 머무른다. 가령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의 삼십삼천 이상의 모든 하늘의 궁전이 모두 허공에 의지하면서 안주(安住)하고, 나아가 도솔천(兜率天)과 타화자재전(他化自在天)까지의 욕계(欲界)하늘들의 모든 궁전이 허공에 의지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다.
마나바야, 가령 저 색계(色界)가 범천(梵天)이 머무른 곳으로부터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기까지 허공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나바야, 내가 간략하게 말한 것처럼 이로부터 위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를 무색계(無色界)라 하고, 유정천에서 벗어난 것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
허공으로 다닌다[虛空行]고 함은 오직 따로 풍륜계(風輪界)라는 한 가지가 있을 뿐으로 그 두께는 육십팔천 유순(由旬)이며, 이것을 지나가서 다시 허공계가 있는데 이 두 세계의 중간도 역시 의지하는 바가 없다.
마나바야, 이로부터 그 위에 다시 부동(不動)이라고 칭하는 풍륜(風輪)이 있는데, 두께는 육십사 구치(俱致) 백천(百千) 유순으로 수계(水界)에 머물러 유지하고 있다. 그 풍륜계는 중생이 오고 가며 의지하는 처소가 없는데, 왜냐하면 저 허공과 바람은 각기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니, 저 허공계는 보거나 알 수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마나바야, 지금 내가 설한 법은 마치 저 허공과 같아 다름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밤중에 앉아서 활과 화살을 잡고 함부로 허공에다 쏠 때 어두운 데서 쏘기 때문에 방향과 처소[方所]를 모르는 것처럼, 마나바야, 온갖 범부는 어리석어서 지혜의 눈이 없고 또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업행(業行)을 닦는다 하더라도 온갖 방편이 없어서 성취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그와 같다.
마나바야, 마치 서생[生]이 활쏘기를 배우지 않았다면 비록 과녁을 흉내 내어 쏜다 하더라도 결국 들어맞지 않는데, 하물며 앞에 화살받이[垜]조차 없으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
무엇을 집착이라 말하는가? 마나바야, 이 모든 범부들이 심히 깊은 법에 대하여 스스로의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이니, 스승에게 묻는 것을 버려서 깨쳐 알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마나바야, 너는 앞에서 나에게 세 가지 뜻을 물었으니, 이른바 허공(虛空)과 평등함과 모든 법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비록 말하고 듣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나는 이 곳이 의지할 곳인지 의지하지 못하는지를 안다.
마나바야, 네가 모든 법의 평등을 물었으므로 이제 그 뜻을 밝혀 주리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비유로써 허공을 나타내 보였다. 모든 지혜 있는 이는 이 비유의 언교(言敎)와 방편으로 평등을 나타내 보인 줄 알리니, 의지와 언설의 분별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허공계가 가없는 것처럼 부처님 법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처럼 법계(法界)는 모두가 평등에 의지하며 별도의 다른 것이 없다. 마치 저 허공이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처럼 법과 법 아님도 역시 의지하는 곳이 없으니, 이 가운데서 모두가 평등함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저 허공의 비유와 방편으로 나타내 보인 것은 다만 지혜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을 뿐 온갖 범부의 경계는 아니다. 저 모든 범부들은 하나의 모양[一相]을 집착해 취하면서 잘 분별하지도 못하고 능히 요달하지도 못한 채 허망한 생각으로 취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 깊은 법을 환히 알아서 이로움을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범부는 허망한 집착을 내면서 깊은 불법을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고 지혜 있는 사람에게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세간의 일에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켜 집착하면서 버리지 않으니, 이른바 이것은 바로 땅이요, 이것은 물이며, 이것은 불이고, 이것은 바람이라고 하는 따위이다. 이와 같이 하면서 나아가 모든 하늘의 궁전과 머무르는 곳과 왕래하는 것을 분별하고 취착(取着)하며, 땅과 하늘 그리고 모든 용ㆍ야차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땅에 살고 있는 무리들을 취착한다.
또한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처음 성도(成道)하실 때에 큰 소리로 설법하자, 그들은 듣고 나자 즉시 땅에서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출현하여 설법하셨으니 하늘과 사람이 도(道)를 더할 것이요, 그 소리는 위로 색구경천(色究竟天)까지 사무쳤다’고 분별하면서 모두가 여래께서 법륜(法輪)을 굴리는 일을 말했다.
마나바야, 세간의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 일(事; 현상)에 집착해버리는 것이 마치 허공의 수레바퀴[空輪]를 타고서는 큰 수레[大車]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범부가 취착하는 것은 이와 같다.
또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구 어떤 사람이 활 쏘는 기술을 희구하면서도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지 않으면 비록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하더라도 끝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마나바야, 세 가지 법도 역시 그러하여 만일 방편으로 공(功)을 베풀면서 닦아 쌓지 않으면 증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다.
마나바야, 이와 같은 세 가지 법을 여래께서 만일 설하신다면 끝내 다함이 없어서 일겁, 십겁, 백겁, 천겁 또는 한량없는 겁 동안 설하여도 역시 다함이 없다. 여래는 이러한 겁수(劫數)의 시절에 대해 많든 적든 더하든 덜하든 간에 뜻에 따라 갖가지 명자와 의미를 설하고자 하면 곧 해설할 수 있다. 그러나 여래의 구업(口業)과 언교(言敎)에는 역시 덜함이 없으니, 이 세 가지 구절의 뜻을 이 억수(億數)의 모든 보살들이 받아 지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구절의 뜻의 처소에서 여래는 간혹 한 구절 속에서 한량없는 갖가지 이름과 뜻의 차별을 설할 수 있으니, 만일 이 법구와 담겨 있는 뜻 내지 글자의 근본[字本]에서 나온 온갖 언어와 음성이 바로 색법(色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가령 삼천대천세계에서 토지ㆍ산석(山石)ㆍ초목을 다하여 없애고 동ㆍ서ㆍ남ㆍ북과 위로 유정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공이 된다 하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이 세계에 겨자씨를 가득히 채워 놓고 때로 한 개씩을 취하여 모든 겨자씨가 다한다 하여도 여래가 설하는 한 구절은 작은 부분이라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이 한 구절의 다라니문을 필경 잘 수지할 수 있는 자라면 한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도 남김없이 분별할 수가 있다.
마나바야, 이 구의문(句義門)은 가령 한량없는 중생들이 갖가지 질문을 일으킨다 하여도 끝내 언설로써는 남김없이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 보살은 모조리 분별하여 대답하는 것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음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라니를 이름하여 대사(大事)라 하는 것은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라니라는 말은 이 하나의 법 구절에서 한량없는 구절이 나온다는 것이니, 이것은 큰 총지(總持)로서 모든 뜻을 통틀어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쉽게 알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비유와 방편의 언사를 인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모든 법을 깨칠 수 있게 하되, 모두가 볼 수 없는 것은 그 자체(自體)가 본래 공(空)하여 언어를 멀리 여읜 까닭이다.
마나바야, 모든 보살이라면 처음 대심(大心)을 발해서 큰일을 행하고자 하는데, 큰일[大事]이란 대승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보살이 헛되이 그 마음을 발해서 묻지도 않고 닦지도 않으면 끝내 이루어짐이 없다.
마나바야, 마치 성문승(聲聞乘)을 행하는 이가 비록 서른일곱 가지의 조보리법(助菩提法)을 들었다 하더라도 의념(意念)의 수행이 없이 스스로 ‘나는 아라한이 되어서 할 바를 다 마쳤다’고 부르짖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마나바야, 만일 어떤 이라도 불법의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응당 이 마음을 발해서 수미산처럼 안주하여 흔들리지 않고 수순하며 수행해야 한다.’”

6. 보살행품(菩薩行品) ①

“아난아, 그 때에 무외보살이 다시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말했다.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큰 자비로 저와 나머지 배우지 못한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저와 다름이 없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회들이 거듭 물어도 여래께서는 가엾이 여기고 사랑하셔서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심이 마치 부모와 같습니다. 저희는 지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더욱더 존중하면서 감히 훼방하지 않으리다.’
그 때 방광여래가 무외에게 말씀하셨다.
‘정녕 그러하다. 마나바야, 네가 말한 바처럼 어떤 보살이라도 여래께 끊임없이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들은 이런 보살에 대하여 역시 깊이 공경하고 존중할 것이다.
이와 같은 보살은 나의 법 가운데서 크게 이롭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보살은 온갖 부처님 법에 머물고 가르침에 수순하면서 장차 올 세상에서 크게 불사(佛事)를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런 보살이 불법의 그릇[器]으로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기증(記證)과 방편을 받아들임을 알아서 그로 하여금 속히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무외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지극히 사랑한다고 한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내가 말한 지극히 사랑한다고 함은 곧 세간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그들을 불법에 입문시켜 끊어지지 않게 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는 이것을 대사(大事)라 하고 크고 무거운 짐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보살은 오래 있다가 이 짐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외야, 이 보살은 ’반드시 나는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할 것이니, 만일 중생들이 다한다면 이 짐도 비로소 쉬리라’고 생각한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말씀한 무거운 짐이 만일 세간에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지는 것과 동일하다면 보아서 알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네가 말한 것처럼 짐이 머리나 어깨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세간의 어리석은 범부가 힘으로 짊어지는 것이지 보살의 짐은 아니다. 보살의 짐이란 서원(誓願)으로 온갖 중생들을 짊어지고[荷負]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지 머리와 등에 지는 것이 아니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비원(悲願)으로 짊어지는 것이면 이미 머리나 어깨에 지는 것이 아닌데, 무슨 이치로 짐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마치 동방의 일체 가없는 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보살이 발심하여 짊어져서 다 무여열반에 들게 해야 하는 것처럼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의 모든 허공계의 온갖 중생들을 보살이 편히 쉬게 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마나바야,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중생 세계가 나타나 있든 나타나 있지 않든 보살은 모두 그들을 열반에 머무르게 하니, 이런 인연으로 짐[擔]이라 하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이치로 또한 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장자(長者)의 집안이 풍요로워 갖가지 진기한 보물과 모든 자재(資材)가 창고에 가득 차 있고 동복(童僕)과 노예(奴隸)가 구족하지만 아들은 오직 하나뿐인데, 이 장자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하고 염려하면서 끝내 잠시도 버리지 않으며 그가 하는 짓을 보고도 거스르지 않고 사랑스럽게 생각하기에 재보와 즐거움을 모두 다 주면서도 고달파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마나바야,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가엾이 여김도 마찬가지라서 온갖 즐거움을 모두 그들에게 주고 나아가 무여열반에 들게 하니, 이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겨 큰 정진을 행함으로서 또한 중생들로 하여금 보살의 일을 행하여 속히 모든 바라밀을 성숙하게 하며, 또한 자기 자신도 정진을 원만하게 장엄한다.’
무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성숙(成熟)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성숙하다고 함은 보살이 모든 중생들에게 큰 자비를 일으켜 구경의 즐거움[究竟樂]을 주면서 스스로 근심과 괴로움을 여읨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성숙하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고 언제나 찬탄을 더하는 것도 또한 성숙하다고 하는 것이다.’
무외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 그와 같다면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중생들 가운데 가장 수승하시니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내가 말하는 성숙하다고 함은 온갖 선법(善法)에 대해 원만함을 구족해야 비로소 성숙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옹기장이가 갖가지 그릇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옹기장이는 먼저 좋은 흙을 가져다가 돌과 모래를 섞어 물을 붓고 이기되 손으로 주무르고 발로 밟아 아주 잘 이겨서 그릇을 만들 수 있게 하고는 모든 바퀴 위에다 놓고 막대기로 바퀴를 돌리되 아주 빠르게 돌게 하면서 손으로 토닥거리면 어느 그릇이든 만들고자 하는 굽지 않은 그릇이 모두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진흙을 먼저 잘 반죽했기 때문이다. 그 옹기장이는 모든 굽지 않은 그릇을 햇빛에 두기도 하고 혹은 그늘에 두기도 해서 점차 마르게 하고는 그 뒤에 색을 섞어 칠하고 햇빛에 드러내서 단단하고 실하게 한다. 그리고 가마 안에 쌓거나 땅 바닥에다 놓고서 땔나무와 분뇨로 밤낮으로 불을 지피니, 옹기장이는 그의 권속들과 함께 주위에서 두루 살피며 교대로 지키면서 나쁜 사람들이 푸른 콩이나 참깨를 쥐고 와서 가마 안에 던져 모든 그릇을 못 쓰도록 하지 않게 한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고 불기운도 다 되어 그릇이 모두 만들어지면, 이때서야 옹기장이는 비로소 크게 기뻐하면서 물러나 앉아 생각하기를, ‘그릇들이 이루어졌으니 나의 일은 다 끝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나바야, 여래가 늘 모든 보살들을 육바라밀을 차례로 수행하도록 가르쳐서 성숙하게 하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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