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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35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

by Kay/케이 202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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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

 

 

대반열반경 제36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2. 가섭보살품 ④

선남자야, 여래는 또 자기의 뜻을 따르는 말이 있다. 여래의 불성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는 것은 32상과 80종호와 10력과 4무소외와 3념처와 대자대비와 수릉엄 등의 한량없는 삼매와ㆍ 금강 등 한량없는 삼매와 방편 등 한량없는 삼매와 5지인(智印) 등 한량없는 삼매는 있는 것이라 한다. 없다는 것은 여래의 지난 세상의 선과 불선과 무기(無記)와 업과 인과 과와 보(報)와 번뇌와 5음(陰)과 12인연 등이니, 이것을 없는 것이라 한다.
선남자야, 유ㆍ무ㆍ선ㆍ불선ㆍ유루(有漏)ㆍ무루ㆍ세간ㆍ비세간(非世間)ㆍ성인ㆍ비성인ㆍ유위(有爲)ㆍ무위ㆍ진실함ㆍ진실하지 못함ㆍ고요함ㆍ고요하지 않음ㆍ다툼ㆍ다투지 않음ㆍ계(界)ㆍ비계(非界)ㆍ번뇌ㆍ비번뇌ㆍ취(取)ㆍ비취ㆍ수기(受記)ㆍ비수기ㆍ유ㆍ비유ㆍ삼세ㆍ비삼세ㆍ시(時)ㆍ비시ㆍ항상함ㆍ무상ㆍ나ㆍ내가 없음ㆍ즐거움ㆍ즐겁지 않음ㆍ깨끗함ㆍ깨끗하지 않음ㆍ색수상행식ㆍ색수상행식이 아님ㆍ 내입(內入)ㆍ비내입(非內入)ㆍ외입(外入)ㆍ비외입(非外入)ㆍ12인연ㆍ비(非)12인연들을 여래의 불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고 하며 나아가 일천제 불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선남자야, 내가 비록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중생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자기의 뜻을 따라서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이런 말은 후신 보살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2승이나 다른 보살들이겠느냐?
선남자야, 내가 지나간 어느 때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미륵보살과 더불어 세제(世諦)를 의논할 때에, 사리불 등 500성문은 이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출세간의 제일의제(第一義諦)이겠느냐?
선남자야, 어떤 불성은 일천제에게는 있고 선근인(善根人)에게는 없으며 어떤 불성은 선근인에게는 있고 일천제에게는 없으며, 어떤 불성은 두 사람에게 모두 있고 어떤 불성은 두 사람에게 모두 없다. 선남자야, 내 제자들로서 이와 같은 네 글귀의 뜻[四句義]을 아는 이는 마땅히 논란하기를 일천제가 반드시 불성이 있느냐, 반드시 불성이 없느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여래가 자기의 뜻을 따라서 하는 말이니 여래의 이러한 자기의 뜻을 따라 하는 말을 중생이 어떻게 한결같이 이해하겠는가?
선남자야, 마치 항하 속에 일곱 가지 중생이 있는데, 첫째는 항상 잠겨 있고, 둘째는 잠깐 나왔다가 도로 잠기고, 셋째는 나와서는 곧 머물고, 넷째는 나와서는 사방을 두루 살피고, 다섯째는 살펴보고는 가고, 여섯째는 가다가 다시 머물고, 일곱째는 물과 육지에 모두 다닌다. 항상 잠겨 있는 것은 큰 고기이니 크고 나쁜 업보를 받아 몸이 무거워서 깊은 데 있고, 이 때문에 항상 잠겨 있는 것이다.
잠깐 나왔다가 도로 잠기는 것은 이 큰 고기가 나쁜 업보로 몸이 무거우나 옅은 데 있으면서 잠깐 광명을 보며, 광명을 인하여 잠깐 나오고 무거우므로 도로 잠기는 것이다. 나와서 곧 머무는 것은 지미어(抵彌魚)1)가 얕은 물에 있으면서 광명을 좋아하므로 나와서는 머무는 것이다. 사방을 두루 살피는 것은 상어[䱜魚]가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사방을 살피느라고 이리저리 보는 것이다. 살펴보고 가는 것은
상어가 멀리 있는 물건을 보고 먹을 것인가 하여 빨리 따라가느라고 보고 나서 가는 것이다. 가다가 다시 머무는 것은 이 고기가 따라가서 먹이를 얻고 나서 즉시 정지하므로 가다가 머무는 것이다. 물과 육지에 모두 다니는 것은 거북이다.
선남자야, 이와 같이 미묘한 대열반의 강에도 일곱 가지 중생이 있으니, 처음의 항상 잠겨 있는 것으로부터 일곱째까지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항상 잠겨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 『대반열반경』을 들으니 ‘여래는 항상 머물러 있어 변하지 않으며,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 필경까지 열반에 들지 않으며,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고 일천제들이 방등경을 비방하고 5역죄를 짓고 4중죄를 범하고도 반드시 보리를 이루며,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들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는 믿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열반의 가르침은 외도의 글이며 부처님 경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지식을 멀리하고 바른 법을 듣지 않으며 비록 듣더라도 생각하지 않고, 설사 생각하더라도 선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선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나쁜 법에 머문다.
나쁜 법에 머무는 것은 여섯 가지이다. 첫째는 악함이며, 둘째는 선이 없음이며, 셋째는 더러운 법이며, 넷째는 업보를 더함이며[增有], 다섯째는 번열함[熱]이며, 여섯째는 나쁜 과보를 받음이다. 이것이 잠긴다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잠긴다고 하는가? 선한 마음이 없는 까닭이며 나쁜 짓을 항상 행하는 까닭이며 다스릴 것을 닦지 않으므로 잠긴다고 한다. 악하다 함은 성인이 꾸짖는 까닭이며 마음에 두려운 까닭이며 선한 사람이 멀리 떠나는 까닭이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한다. 선이 없다 함은 한량없는 나쁜 과보를 내기 때문이며 항상 무명에 얽히기 때문이며 나쁜 사람과 동무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선한 일을 닦는 방편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뒤바뀌어 항상 잘못되므로 선이 없다고 한다. 더러운 법이라 함은 몸과 입을 항상 더럽히는 까닭이며 깨끗한 중생을 더럽히는 까닭이며 불선한 업을 더하는 까닭이며 선한 법을 멀리 하기 때문에 더러운 법이라고 한다.
업보를 더한다고 함은 위에 말한 세 사람이 행하는 법이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업을 더하고 해탈하는 법을 닦지 못하며 몸과 입과 마음의 업으로 생사를 싫어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하여 업보를 더한다고 한다. 번열이라 함은 이 사람이 위에 말한 네 가지 짓을 모두 행하여 몸과 마음을 시끄럽게 한다. 고요함을 멀리 떠남을 번열이라 하고 지옥의 보를 받으므로 번열이라 하고 중생들을 태우므로 번열이라 하고 선한 법을 불사르므로 번열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신심의 서늘함을 이 사람은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번열이라 한다. 나쁜 과보를 받는다 함은 이 사람이 위에 말한 다섯 가지를 구족하게 행하였으므로 죽어서는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진다. 선남자야, 세 가지 나쁜 일이 있으므로 나쁜 과보라고 한다. 첫째는 번뇌가 나쁘고, 둘째는 업이 나쁘고, 셋째는 과보가 나쁘다. 이것을 이름하여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 사람은 위에 말한 여섯 가지를 갖추었으므로 선근을 끊고 5역죄를 짓고 4중죄를 범하고 3보를 비방하며, 승가의 물건을 사용하며 여러 가지 법답지 못한 일을 짓는다. 이 인연 때문에 아비지옥에 빠지는 것이며, 받는 몸은 가로 세로가 8만 4천 유순[由延]이다. 이 사람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죄업이 무거워서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에
선한 법을 내지 못하므로 한량없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더라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잠겨 있다고 하며 마치 항하의 큰 고기와 같다.
선남자야, 내가 비록 일천제들을 항상 잠겨 있다고 말하였으나 일천제가 아니면서 항상 잠겨 있는 이가 있다. 어떤 이들인가? 어떤 사람이 생사를 위하여 보시와 계율의 선한 일을 닦으면 항상 잠겨 있다고 한다.
선남자야, 네 가지 선한 일이 있으면 나쁜 과보를 얻는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남을 이기려고 경전을 읽는 것이며, 둘째는 이양(利養)을 위하여 계율을 가지는 것이며, 셋째는 다른 이에게 붙기[屬] 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이며, 넷째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위하여 마음을 두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선한 일은 나쁜 과보를 얻는다.
어떤 사람이 이런 네 가지를 닦으면 이것을 일러 빠졌다가 나오고 나왔다가 다시 빠진다고 한다. 어찌하여 빠진다고 하는가? 3유(有)를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온다고 하는가? 광명을 보기 때문이다. 광명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과 보시와 선정을 듣는 것이다. 어찌하여 도로 빠지는가? 나쁜 소견이 늘고 교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이런 게송을 말하였다.

어떤 중생 모든 유(有)를 좋아하면서
유를 위해 선업 악업 짓는다 하면
이 사람은 열반 길을 잃게 되나니
이를 일러 나왔다가 다시 빠진다 하며

캄캄한 생사의 바다 돌아다니며
해탈을 얻더라도 번뇌가 섞이면
이 사람은 나쁜 과보 다시 받나니
이를 일러 나왔다가 다시 빠진다고 하네.

선남자야, 저 큰 고기가 광명을 보기 위하여 잠깐 나왔다가도 몸이 무거워서 도로 빠지듯이 위의 두 사람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3유(有)를 좋아하면 이것을 빠진다 하고, 이 『대열반경』을 듣고 신심을 내면 이것을 나온다고 한다. 무슨 인연으로 나온다고 하는가?
이 경을 듣고 나서 나쁜 법을 멀리 여의고 선한 법을 닦으므로 나온다고 한다.
이 사람이 비록 믿으나 구족하지는 못하니, 무슨 인연으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는가? 이 사람이 비록 『대열반』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줄을 믿지만 여래의 몸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깨끗함이 없다고 말한다. 여래에게 두 가지 열반이 있으니, 첫째는 함이 있음[有爲]이며, 둘째는 함이 없음[無爲]이다. 함이 있는 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없고, 함이 없는 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있다. 비록 불성이 중생에게 있음을 믿으나 반드시 온갖 중생에게 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믿음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믿음이며 둘째는 구함이다. 이런 사람은 믿음은 있으나 능히 구하지 못하므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믿음에는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들음으로부터 생기고, 둘째는 생각함으로부터 생긴다. 이 사람의 신심은 들음으로부터 생겼고 생각으로부터 생기지 않았으므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도가 있음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얻는 이를 믿는 것이다. 이 사람의 신심은 도가 있는 것만 믿고 도를 얻는 사람이 있는 것은 믿지 않으므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른 것을 믿고 둘째는 삿된 것을 믿는 것이다. 인과 과가 있음을 믿고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가 있음을 믿는 것은 바른 것을 믿는다 하고, 인도 과도 없고 3보의 성품이 다르다고 말하며, 부란나(富蘭那)2) 등의 삿된 말을 믿는 것은 삿된 것을 믿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비록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믿으나 3보가 동일한 성품인 줄은 믿지 않으며, 인과 과는 믿으나 얻는 이는 믿지 않으므로 믿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구족하지 못한 신심을 구족하였으므로 받은 계율도 구족하지 못하였다. 무슨 인연으로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인을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얻은
계율도 구족하지 못하였다. 또 무슨 인연으로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계율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의계(威儀戒)이며, 둘째는 종계계(從戒戒)3)이다. 이 사람은 위의계만 구족하였고 종계계는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짓는 계[作戒]이며, 둘째는 지음이 없는 계[無作戒]이다. 이 사람은 짓는 계만 구족하였고 지음이 없는 계는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과 입으로 좇아 정명(正命)을 얻음이고, 둘째는 몸과 입으로 좇아 정명을 얻지 못함이다. 이 사람은 비록 몸과 입을 좇으나 정명을 얻지 못하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하는 계이며, 둘째는 버리는 계이다. 이 사람은 구하는 계만 갖추었고 버리는 계는 얻지 못하였으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를 따르는 것[隨有]이며, 둘째는 도를 따르는 것[隨道]이다. 이 사람은 유를 따르는 계만 갖추었고 도를 따르는 계는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선한 계이며, 둘째는 악한 계이다. 몸과 입과 뜻이 선한 것을 선한 계라 하고, 우계(牛戒)ㆍ구계(狗戒)를 악한 계라고 한다. 이 사람은 이 두 가지 계에 모두 선한 과가 있다고 믿으므로 계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믿음과 계율을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닦는바 들음[多聞]도 구족하지 못한다. 어떤 것을 들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여래가 말한 12부경에서 6부만 믿고 6부는 믿지 않으므로 들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비록 이 6부경을 받아 가지면서도 읽거나 외우거나 다른 이를 위하여 해설하지 못하며 이익됨이 없으므로 들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비록 이 6부경을 받았더라도 논의(論議)하기 위하여, 남을 이기기 위하여,
이양을 위하여 모든 유를 위하여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므로 들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내가 경전 중에서 들음이 구족함을 말하였다. 어떤 것을 구족하였다고 하는가? 만일 비구가 몸과 입과 뜻이 선하고 예전부터 화상과 스님들과 덕이 있는 이를 공양하였다면 이 스님들이 이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이런 인연으로 법을 가르쳐 주는데,
이 사람이 지성으로 받아 지니고 외우며 익히고, 지니고 외우고 익히고 나서 지혜를 얻으며, 지혜를 얻고 나서 잘 생각하고 법답게 머물며, 잘 생각하고 나서 바른 이치를 얻으며, 바른 이치를 얻고 나서 몸과 마음이 고요하며,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나서 기쁜 마음을 내며, 기쁜 마음의 인연으로 마음에 선정을 얻고, 선정을 얻었으므로 바른 지견(知見)을 얻으며, 바른 지견을 얻고 나서 모든 유(有)에 대하여 싫어하여 뉘우치는 마음을 내고 뉘우치기 때문에 해탈을 얻는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러한 일이 없으므로 들음을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렇게 세 가지를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보시도 구족하지 못한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며, 둘째는 법을 보시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비록 재물 보시는 행하지만 구함이 있기 때문에 비록 법으로 보시하지만 구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숨기고 모두 다 말하지 않으며, 다른 이가 이길까 두려워하므로 보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재물 보시와 법 보시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스럽고 둘째는 성스럽지 못함이다. 성스러운 것은 보시하고 나서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며, 성스럽지 못한 것은 보시하고 나서 과보를 바라는 것이며, 성스러운 것은 법 보시가 법을 증장하기 위함이며, 성스럽지 못한 것은 법 보시가 유(有)를 증장하기 위함이다. 이 사람은 재물을 늘리기 위하여 재물을 보시하고, 유를 증장하기 위하여 법을 보시하는 것이므로 보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이 사람이
6부경을 받고서도 법을 받는 이를 보고 나서 이바지하고, 법을 받지 않은 이에게는 이바지하지 않으므로 보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위에 말한 네 가지를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닦는 지혜도 구족하지 못한다. 지혜의 성품은 분별하는 것인데 이 사람은 여래가 항상한지 무상한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여래는 이 열반경에서 말하기를 ‘여래가 곧 해탈이며, 해탈이 곧 여래이며, 여래가 곧 열반이며, 열반이 곧 해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이치를 능히 분별하지 못한다.
범행(梵行)이 곧 여래이며, 여래가 곧 자비희사(慈悲喜捨)이며, 자비희사가 곧 해탈이며, 해탈이 곧 열반이며, 열반이 곧 자비희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불성을 분별하지 못하니, 불성이 곧 여래이며 여래가 곧 함께하지 않는 법이며 함께하지 않는 법이 곧 해탈이며 해탈이 곧 열반이며 열반이 곧 함께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고ㆍ집ㆍ멸ㆍ도의 4제를 분별하지 못한다. 4진제(眞諦)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성인의 행을 알지 못하고, 성인의 행을 알지 못하므로 여래를 알지 못하고, 여래를 알지 못하므로 해탈을 알지 못하고, 해탈을 알지 못하므로 열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이러한 다섯 가지를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선한 법을 증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악한 법을 증장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악한 법을 증장한다고 하는가? 이 사람은 자기가 구족하지 못한 것을 보지 못하므로 스스로 구족하였노라 말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동등한 이에게 자기가 수승하다고 하며 자기와 같은 나쁜 동무를 가까이하며 가까이하고 나서 다시 구족하지 못한 법을 들으며 듣고 나서 마음이 기쁘고 거기에 마음이 물들어서 교만을 일으키고 방일한 짓을 행하며 방일함을 인하여 집에 있는 이를 가까이 하고 집에 있는 이의 일을 듣기를 좋아하며 청정하게 출가한 법을 멀리 떠난다. 이런 인연으로 나쁜 법을 증장하고 나쁜 법이 증장하므로 몸과 입과 뜻 등에 부정한 업을 짓고 3업이 부정하므로 지옥ㆍ축생ㆍ아귀를 증장한다. 이것을 일러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진다고 한다.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진다 함은, 나의 불법 가운데서 누구인가? 제바달다ㆍ 구가리(瞿伽離) 비구ㆍ완수(惋手) 비구ㆍ선성 비구ㆍ저사(低舍) 비구ㆍ만수(滿宿) 비구ㆍ자지(慈地) 비구니ㆍ광야(曠野) 비구니ㆍ방(方) 비구니ㆍ만(慢) 비구니ㆍ정결(淨潔) 장자ㆍ구유(求有)우바새ㆍ사륵(舍勒) 석종(釋種)ㆍ상(象) 장자ㆍ명칭 우바이ㆍ광명 우바이ㆍ난타 우바이ㆍ군(軍) 우바이ㆍ영(鈴) 우바이 등이다. 이런 사람을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진다고 한다. 마치 큰 고기가 광명을 보려고 나왔다가 몸이 무거워서 빠지는 것과 같다.
둘째 사람은 행을 구족하지 못한 줄을 깊이 깨닫고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하므로 듣지 못한 것을 즐겁게 물으며, 듣고 나서 받아 가지기를 좋아하고 받고 나서 잘 생각하기를 좋아하며, 잘 생각하고 나서는 법답게 머무르므로 선한 법이 증장하고, 선한 법이 증장하므로 다시는 빠지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머문다고 한다. 나의 불법 가운데서는 누구일까? 이른바 사리불ㆍ대목건련ㆍ아야교진여 등 다섯 비구, 야사 등 500비구,
아누루타(阿樓陀)ㆍ동자 가섭ㆍ마하가섭ㆍ십력 가섭ㆍ수구담미(瘦瞿曇彌) 비구니ㆍ파타라화(波吒羅花) 비구니ㆍ승(勝) 비구니ㆍ실의(實義) 비구니ㆍ의(意) 비구니ㆍ발타(跋陀) 비구니ㆍ정(淨) 비구니ㆍ
불퇴전 비구니ㆍ빈바사라왕ㆍ욱가(郁伽) 장자ㆍ수달다(須達多) 장자ㆍ석마남(釋摩男)ㆍ빈(貧) 수달다ㆍ서랑장자자(鼠狼長者子)ㆍ명칭 장자ㆍ구족(具足) 장자ㆍ사자(師子) 장군ㆍ우바리(優波離) 장자ㆍ도(刀) 장자ㆍ무외(無畏) 우바이ㆍ선주(善住) 우바이ㆍ애법(愛法) 우바이ㆍ용건(勇建) 우바이ㆍ천득(天得) 우바이ㆍ선생(善生) 우바이ㆍ구신(具身) 우바이ㆍ우득(牛得) 우바이ㆍ광야(曠野) 우바이ㆍ마하사나(摩訶斯那) 우바이 등이니, 이러한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들은 머문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머문다 하는가? 선한 광명을 항상 보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인연으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거나 나시지 않거나 간에, 이런 사람은 끝내 나쁜 업을 짓지 않는다. 이것을 머문다고 하는데 마치 저미어(低彌魚)가 광명을 보기 좋아하여 잠기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는 것과 같다. 이런 대중들도 그와 같으므로 내가 경전 중에서 게송을 말하였다.”

어떤 사람 바른 뜻을 잘 분별하여
지성으로 사문 과보 항상 구하며
일체의 생사 업보 꾸짖는다면
그 사람은 법답게 머문다 하리.

한량없는 부처님께 늘 공양하고
한량없는 오랜 세월 도를 닦으며
세상 낙을 받더라도 방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법답게 머문다 하리.

선지식을 친근히 하여 바른 법 듣고
속으로 잘 생각하며 법답게 있어
광명을 즐겨 보고 도를 닦으면
해탈을 얻고 나서 편안하리라.


“선남자야,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는 것에 무릇 다섯 가지4)가 있는데 이 사람이 그것을 알고 선지식을 친근히 하면, 그 선지식은 이 사람이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생각 중 어느 것에 치우쳐 많은가를 관찰한다. 만일 이 사람이 탐욕이 많은 줄을 알면 부정관(不淨觀)을 말하여 주고, 성내는 일이 많은 줄을 알면 자비관(慈悲觀)을 말하여 주고, 어리석은 생각이 많은 줄을 알면 수식관(數息觀)을 가르쳐 주고, 나에 집착함이 많은 줄을 알면 18계(界) 등을 분석하여 준다.
이 사람이 듣고 나서 지극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며, 마음으로 받아 지닌 뒤에는 법답게 수행하고, 법답게 수행하여서는 몸[身]과 받음[受]과 마음[心]과 법[法]의 4념처관(念處觀)을 차례로 얻고, 이 관(觀)을 얻고 나서 차례차례 12인연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난 다음에는 난법(煖法)을 얻는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이 다 난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법이 화합한 것을 중생이라고 이르니, 수명[壽]과 난기[煖]와 알음알이[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이 뜻을 따른다면 모든 중생이 먼저부터 난법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난법이 선지식으로 인하여 생긴다’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물은 난법은 모든 중생과 일천제까지 모두 있다고 하는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난법은 방편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니,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이치로 모든 중생들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모든 중생에게 모두 난법이 있다고 말할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이러한 난법은 색계의 법이며 욕계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만일 모든 중생이 있다고 말하면 욕계의 중생에게도 있어야 하나 욕계에는 없는 것이므로 모든 중생에게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색계에는 비록 있더라도 모든 중생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 제자에게는 있고 외도에게는 없으니, 이런 뜻으로 모든 중생에게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선남자야, 모든 외도들은 6행(行)5)만 보지만 나의 제자는 16행6)을 구족하였으니, 이 16행은 모든 중생에게 반드시 다 있는 것이 아니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시는 난법은 어째서 난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제 성품이 따뜻한 것입니까, 다른 것 때문에 따뜻한 것입니까?”
“선남자야, 이 난법은 제 성품이 따뜻한 것이며, 다른 것 때문에 따뜻한 것이 아니다.”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마사(馬師)7)와 만숙(滿宿)8)은 난법이 없다. 왜냐하면 3보에 신심이 없는 탓으로 난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신심이 난법인가 합니다.”
“선남자야, 신심이 난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심으로 인하여 그 뒤에 난법을 얻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난법이라고 함은 곧 지혜이다. 왜냐하면 4제를 관찰하기 때문에 16행이라고 하며 행은 곧 지혜이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무슨 인연으로 난이라고 합니까?’라고 하는데 선남자야, 난법은 곧 8성도(聖道)의 불의 모습[火相]이므로 난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마치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낼 때에, 먼저 따뜻한 기운이 있고 다음에 불이 나고 나중에 연기가 나듯이 무루의 도도 그와 같다. 따뜻하다고 함은 16행이며 불은 수다원과이고 연기는 도를 닦는 자리에서 번뇌를 끊는 것이다.”
가섭보살은 또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난법은 또한 유(有)의 법이며 함이 있는 법이니, 이 법은 과보로 색계의 5음을 얻으므로 유라 하고, 인연이기 때문에 함이 있는 것이라고 하겠으니, 만일 함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무루의 도가 되겠습니까?”
“선남자야, 그렇다. 그대의 말과 같다. 선남자야, 이 난법이 비록 함이 있는 법이며 유의 법이지만 도리어 함이 있는 법과 유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무루도의 모습이 된다. 선남자야, 사람이 말을 탔을 때에 사랑하면서도 채찍질하듯이 따뜻한 마음도 그와 같아서 사랑하기 때문에 태어나고, 싫어하기 때문에 행을 관찰한다. 그러므로 비록 유의 법이며 함이 있는 법이지만 바른 도의 모습이 된다.
난법을 얻는 사람은 73종류로서 욕계가 열 가지이다. 이 사람은 온갖 번뇌를 구족하고 1분을 끊기 시작하여 9분까지 이르며, 욕계와 같이 초선(初禪)으로부터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도 그와 같다. 이것을 73종류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난법을 얻고 나서 다시 선근을 끊거나 5역죄를 짓거나 4중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선한 동무를 만나는 것이며, 둘째는 나쁜 동무를 만나는 것이다. 나쁜 동무를 만난 이는 잠깐 나왔다가 도로 빠지고 선한 동무를 만난 이는 사방을 두루 살핀다. 사방을 살피는 것은 곧 정법(頂法)이다. 이 법이 비록 성품은 5음이나 4제를 반연하므로 사방을 두루 살핀다고 이른다. 정법을 얻고 난 다음에 인법(忍法)을 얻는데, 인법도 그와 같아서 성품이 5음이며 4제를 반연한다.
이 사람이 다음에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얻나니, 이 법도 비록 성품이 5음이나 4제를 반연한다. 이 사람은 다음에는 고법인(苦法忍)을 얻는다. 인(忍)의 성품은 지혜이며 1제를 반연한다. 이 인법이 1제를 반연하고 나서 나아가 견도위(見道位)에서 번뇌를 끊고 수다원과를 얻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넷째의 사방을 두루 살핀다고 하며, 사방은 곧 4제이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수다원이
끊은 번뇌는 너비와 길이가 40리 되는 물과 같고, 남아 있는 것은 털 한 개로 찍어 낸 물방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어찌하여 세 가지 결박[三結]을 끊은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는 나라는 소견[我見]이며, 둘째는 인이 아닌 것을 인으로 보는 것이며, 셋째는 의심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이 사방을 살핀다고 하며, 또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이라고 하며, 또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을 상어[䱜魚]에 비유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수다원이 비록 한량없는 번뇌를 끊지만 이 세 가지가 중대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수다원들이 끊을 결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마치 대왕이 순행할 때에 네 가지 군병이 따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만 ‘왕이 오셨다, 왕이 가셨다’라고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세간에서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번뇌도 그와 같다. 무슨 인연으로 중대하다고 하는가? 온갖 중생들이 항상 일으키기 때문이며, 미세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중대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 결박을 끊기 어렵기 때문이며,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로 다스릴 대적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어떤 중생들은 수다원이 한량없는 번뇌를 끊는다는 말을 듣고는 물러나는 마음을 내어 말하기를 ‘중생이 어떻게 이러한 한량없는 번뇌를 끊으리오’ 하기에, 여래가 방편으로 세 가지를 말하였다.
그대가 묻기를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을 사방을 살피는 데 비유하였습니까?’ 하였는데, 선남자야, 수다원은 4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를 얻는다. 첫째는 견고한 도에 머무는 것, 둘째는 두루 살피는 것, 셋째는 실상과 같이 보는 것, 넷째는 원수를 깨뜨리는 것이다.
견고한 도라고 하는 것은 수다원이 가지는 5근(根)을 흔드는 이가 없으므로
이것을 견고한 도에 머문다고 한다. 두루 살핀다고 하는 것은 안팎 번뇌를 능히 꾸짖는 것이며, 실상과 같이 본다고 하는 것은 곧 인(忍)과 지(智)이며, 원수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4전도(顚倒)를 말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이라고 이름하였습니까?’라고 하는 것은 선남자야, 수(須)는 무루이며 다원(陀洹)은 닦음이니, 무루를 닦으므로 수다원이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또 수는 흐른다는 뜻이다. 흐르는 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흐름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흐름을 거스르므로 수다원이라고 이름한다.”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 뜻을 따른다면 무슨 인연으로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은 수다원이라고 이름하지 않습니까?”
“선남자야, 수다원으로부터 부처님까지도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다. 만일 사다함으로부터 부처님까지 수다원이 없다면 어떻게 사다함으로부터 부처님까지라고 하겠는가? 모든 중생의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옛 것[舊]이며, 둘째는 객(客)이다. 범부인 때에는 세간의 이름이 있고, 도를 얻은 뒤에는 다시 일러 수다원이라고 한다. 먼저 얻었으므로 수다원이라 하고 뒤에 얻었으므로 사다함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수다원이라고도 하고 사다함이라고도 하며 나아가 부처님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흐르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탈이며, 둘째는 열반이다. 모든 성인들이 모두 이 두 가지가 있으므로 수다원이라고도 하고 사다함이라고도 하며 나아가 부처님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수다원을 보살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곧 번뇌를 모두 다한 지혜[盡智]와 나지 않는 지혜[無生智]이다. 수다원도 이 두 가지 지혜를 구하는 것이므로
수다원을 보살이라 이를 수 있다. 수다원을 각(覺)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를 보고 번뇌를 끊음을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이며 인과 과를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이며, 한께 하는 도[共道]와 함께 하지 않는 도를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다함으로부터 아라한까지도 이와 같다. 선남자야, 수다원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리한 근성이며 둘째는 둔한 근성이다. 둔한 근성의 사람은 인간과 천상에 일곱 번 오고 간다. 둔한 근성의 사람은 또 다섯 가지가 있다. 혹은 여섯 번, 다섯 번, 네 번, 세 번, 두 번 오고 가며, 영리한 근성의 사람은 현재에 수다원과부터 아라한과를 얻는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무슨 인연으로 수다원을 상어에 비유하였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선남자야, 상어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뼈가 가늘어서 가벼운 것이고, 둘째는 지느러미가 있어서 가벼운 것이고 셋째는 광명을 보기 좋아하는 것이고, 넷째는 물건을 물고 놓지 않는 것이다. 수다원도 네 가지가 있다. 뼈가 가는 것은 번뇌가 경미한 데 비유한 것이고, 지느러미는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에 비유한 것이고, 광명을 보기 좋아함은 도를 보는 데 비유한 것이고, 물건을 물고 놓지 않음은 여래가 말하는 무상과 괴로움과 내가 없음과 부정함을 듣고 꼭 가지고 놓지 않는 데 비유한 것이다.
마치 마왕(魔王)이 부처님 모양으로 변화한 것을 수라(首羅) 장자가 보고 놀라는데, 마왕은 장자의 마음이 동요함을 보고 장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먼저 말한 4제는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다시 너에게 5제ㆍ6음(陰)ㆍ13입(入)ㆍ19계(界)를 말하리라’ 하였으나 장자가 듣고 나서 법상(法相)을 자세히 생각하니 그럴 리가 없으므로 마음을 굳게 가지고 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수다원은 먼저 도를 얻었으므로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초과(初果)이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만일 먼저 도를 얻었으므로 수다원이라고 한다면 고법인(苦法忍)을 얻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수다원이라 하지 못하고 수다원향(須陀洹向)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만일 초과이므로 수다원이라 한다면 외도들이 먼저 번뇌를 끊고 무소유처에 이르러서 무루도를 닦아 아나함과를 얻은 것은 어찌하여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초과이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한다. 그대가 묻기를 ‘외도들이 먼저 번뇌를 끊고 무소유처에 이르러서 무루도를 닦아 아나함과를 얻는 것은 어찌하여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였지만 선남자야, 초과이기 때문에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때 8지(智)와 16행(行)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아나함을 얻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8지와 16행을 구족하는데 어찌하여 수다원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유루(有漏) 16행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함께하는 것[共]이며, 둘째는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9)이다. 무루 16행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향하는 과[向果]이며, 둘째는 얻는 과이다. 8지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향하는 과이며, 둘째는 얻는 과이다. 수다원은 함께하는 16행을 버리고 함께 하지 않는 16행을 얻으며, 향하는 과의 8지를 버리고 얻는 과의 8지를 얻지만 아나함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초과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수다원은 4제를 반연하고 아나함은 1제만 반연한다. 그러므로 초과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상어에 비유한다. 두루 살피고 가는 것은 곧 사다함이 마음을 두어 도를 닦음은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과 교만을 끊기 위함이다. 저 상어가 사방을 두루 살피고 나서 먹이를 위하여
가는 것과 같다.
가서는 다시 머무는 것은 아나함에 비유한 것이니, 먹을 것을 얻고 나서 머무는 것이다. 이 아나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재에 아나함을 얻고 닦아 나아가서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며, 둘째는 색계와 무색계의 적정(寂靜)삼매에 탐착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욕계의 몸을 받지 않으므로 아나함이라 고 한다.
이 아나함에 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며, 둘째는 수신(受身)반열반이며, 셋째는 행(行)반열반이며, 넷째는 무행(無行)반열반이며, 다섯째는 상류(上流)반열반이다. 또 여섯 가지가 있으니 다섯 가지는 위와 같고 여섯째는 현재(現在)반열반이다. 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여섯째는 위와 같고 일곱째는 무색계(無色界)반열반이다.
행반열반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혹은 두 몸을 받고 혹은 네 몸을 받는다. 만일 두 몸을 받았다면 영리한 근성이라 하고, 네 몸을 받았다면 둔한 근성이라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진하고 자재한 선정이 없는 것이며, 둘째는 게으르고 자재한 선정이 있는 것이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진과 선정을 갖춘 것이며 둘째는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선남자야, 욕계와 색계 중생에게 두 가지 업이 있으니, 첫째는 짓는 업[作業]이며 둘째는 태어나는 업[生業]이다. 중열반(中涅槃)은 짓는 업만 있고 태어나는 업은 없다. 그러므로 중간에서 반열반한다. 욕계의 몸을 버리고 색계까지 이르기 전에 영리한 근성이므로 중간에서 열반한다. 이것을 중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열반하는
아나함에게 네 가지 마음이 있으니, 첫째는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며, 둘째는 학(學)이며, 셋째는 무학이며, 넷째는 비학비무학10)으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어찌하여 중반열반이라고 하는가? 선남자야, 이 아나함의 네 가지 마음 중에서 두 가지는 열반이며, 두 가지는 열반이 아니다.11)
그러므로 중반열반이라고 한다. 수신열반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짓는 업이며, 둘째는 나는 업이다. 이 사람이 욕계의 몸을 버리고 색계의 몸을 받아서 부지런히 도를 닦다가 수명이 다한 뒤에 열반에 든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수명이 다하여 열반에 든다면 어찌하여 수신열반이라고 합니까?”
“선남자야, 이 사람은 몸을 받은 뒤에야 삼계의 번뇌를 끊는다. 그러므로 수신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행반열반은 항상 도를 수행하여 함이 있는 삼매의 힘으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드는데, 이것을 행반열반이라고 한다. 무행반열반은 이 사람이 열반을 얻을 줄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게으르지만 역시 함이 있는 삼매의 힘으로 수명이 다하면 열반에 든다. 이것을 무행반열반이라고 한다.
상류반열반은 어떤 사람이 제4선을 얻었는데도 초선천에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그 인연으로 물러나 초선천에 태어난다. 여기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류(煩惱流)이며 둘째는 도류(道流)이다. 도류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2선천에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사랑하는 인연으로 2선천에 태어나며 나아가 제4선도 그와 같다.
이 4선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색계에 들어가고 둘째는 5정거천(淨居天)에 들어간다. 이 두 사람은 하나는 삼매를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지혜를 좋아하는데, 지혜를 좋아하는 이는 5정거천에 들어가고 삼매를 좋아하는 이는 무색계에 들어간다.
이 두 사람이, 하나는 4선정을 닦는 데 다섯 가지 단계가 있고 또 하나는 닦지 않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하(下)ㆍ중(中)ㆍ상(上)ㆍ상중(上中)ㆍ상상(上上)이다. 상상을 닦는 이는 무소천(無小天)에 있고, 상중을
닦는 이는 선견천(善見天)에 있고, 상품(上品)을 닦는 이는 선가견천(善可見天)에 있고, 중품을 닦는 이는 무열천(無熱天)에 있고, 하품을 닦는 이는 소광천(少廣天)에 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는 논의를 좋아하고 또 하나는 고요함을 좋아한다. 고요함을 좋아하는 이는 무색계에 들어가고 논의를 좋아하는 이는 5정거천에 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훈습하는 선정[熏禪]12)을 닦고 또 하나는 훈습하는 선정을 닦지 않으며, 훈습하는 선정 닦는 이는 5정거천에 들어가고 훈습하는 선정을 닦지 않는 이는 무색계에 났다가 그 수명이 다하면 반열반한다. 이것을 상류반열반이라고 한다.
만일 무색계에 들고자 하는 이라면 4선의 다섯 계급을 닦지 못하지만 만일 다섯 계급을 닦으면 무색계정을 꾸짖는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열반하는 이는 영리한 근성이라고 하는데, 만일 영리한 근성이라면 어찌하여 현재에 열반에 들지 않으며 무슨 까닭으로 욕계에는 중열반이 있고 색계에는 없습니까?”
“선남자야, 이 사람이 현재에는 4대(大)가 쇠약하여서 도를 닦지 못한다. 어떤 비구가 4대가 건강하더라도 집과 음식과 의복과 와구와 의약이 없으면 모든 연(緣)을 구족하지 못하였으므로 현재에 열반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내가 예전 어느 때에 사위국 아나빈저(阿那邠低:給孤獨) 정사에 있을 때 어떤 비구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항상 도를 닦지만 수다원과 나아가 아라한과까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아난에게 말하여 이 비구를 위하여 모든 필요한 용품을 준비하여 주라고 하였더니,
아난이 그 비구를 데리고 기타숲에 가서 좋은 방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때 비구가 아난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여, 바라건대 나의 방을 훌륭하게
장엄하고 정결하게 치우며, 7보로 꾸미고 비단 번[繪幡]과 일산을 달아 주시오.’
아난이 대답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가 사문인데, 내가 이런 것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비구가 말하였다.
‘대덕이 나를 위하여 이런 것을 마련하면 아주 좋겠으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세존께서 계신 데로 돌아가겠소.’
그때 아난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지난번에 그 비구가 저에게 요구하기를 여러 가지 장엄과 7보로 된 번과 일산을 달라고 하였는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아난에게 다시 말하였다.
‘너는 다시 돌아가서 그 비구가 달라는 대로 이바지하라.’
아난은 곧 다시 그 방에 가서 그 비구를 위하여 온갖 것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 비구는 그런 것을 얻은 뒤에는 마음을 모아 도를 닦다가 오래지 않아서 수다원과부터 아라한과까지를 얻었다.
선남자야, 한량없는 중생들이 마땅히 열반에 들 것이지만, 궁핍한 것이 많아 마음을 산란하게 하므로 얻지 못한다. 선남자야, 또 어떤 중생들은 교화하기를 좋아하면서도 마음이 분주하여서 선정을 얻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열반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무슨 까닭에 욕계의 몸을 버리고 나서 중열반하는 이가 있고 색계에는 없습니까?’ 하였는데 선남자야, 이 사람이 욕계의 번뇌 인연을 관찰하는 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안이며, 둘째는 밖이나 색계에는 바깥 인연이 없다. 욕계에 또 두 가지 애착하는 마음이 있으니, 첫째는 욕망에 대한 애착이며 둘째는 색(色)에 대한 애착이다. 이 두 가지 애착을 관찰하고 지성으로 꾸짖으며 꾸짖고 나서 열반에 든다.
이 욕계 중에서 모든 거친 번뇌를 꾸짖게 되는데, 아끼고 탐하고 성내고 질투하고 부끄럼 없고 수줍은 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열반을 얻는다. 욕계의 도(道)는 성품이 용맹하다. 왜냐하면 4과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중열반이 있고 색계에는 없다.
선남자야, 중열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상과 중과 하이다. 상은 몸을 버리고서 욕계를 떠나지 않고 열반을 얻고, 중은 처음 욕계를 떠나서 색계에 이르기 전에 열반을 얻고, 하는 욕계를 떠나고 색계의 끝에 이르러서야 열반을 얻는다. 이를 상어가 먹이를 얻고 나서 머무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 사람도 그러하다.
어떤 것을 머문다고 하는가? 색계와 무색계에 처해 있으면서 몸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문다 하며, 욕계의 인간ㆍ천상ㆍ지옥ㆍ축생ㆍ아귀의 몸을 받지 않으므로 머문다고 하며, 이미 한량없는 번뇌의 결박을 끊고 조금만 남았으므로 머문다고 한다. 다시 무슨 인연으로 머문다고 하는가? 마침내 범부와 함께하는 일을 짓지 않으므로 머문다고 하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고 다른 이도 두려움이 없게 하므로 머문다 하며, 두 가지 애욕인 간탐과 성내는 일을 멀리 떠났으므로 머문다고 한다.
선남자야,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ㆍ벽지불ㆍ보살ㆍ부처님을 비유한 것이니 마치 거북이 물과 육지에 모두 다니는 것과 같다. 무슨 인연으로 거북에 비유하는가? 다섯 가지를 잘 감추기 때문이다. 아라한으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아서 5근을 잘 가리므로 거북에 비유하였다. 물과 육지라고 하는 것에서 물은 세간에 비유하였고 육지는 출세간에 비유하였으며 여러 성인들 또한 이와 같이 모든 나쁜 번뇌를 능히 관찰하므로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물과 육지에 모두 다닌다고 비유하였다.
선남자야, 항하 속의 일곱 가지 중생이 비록 고기나 거북이라고 하는 이름은 다르나 물을 떠나지 않음과 같이 이 미묘한 대열반 가운데도 일천
제로부터 위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비록 다르나 불성이란 물을 떠나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 일곱 중생이 선한 법이거나 선하지 않은 법이거나 방편도(方便道)거나 해탈도(解脫道)거나 차제도(次第道)거나 인이거나 과거나 모두 불성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가 자기의 뜻을 따르는 말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인(因)이 있으면 과(果)가 있고 인이 없으면 과가 없을 것입니다. 열반을 과라고 한다면 항상하기 때문에 인이 없을 것이니, 만일 인이 없다면 어떻게 과라고 하겠습니까? 이 열반을 또한 사문이라 이름하며 사문과(沙門果)라 이름하니 어찌하여 사문이며 어찌하여 사문과입니까?”
“선남자야, 모든 세간에 일곱 가지 과보가 있다. 첫째는 방편의 과보[方便果]이며, 둘째는 은혜 갚는 과보[報恩果]이며, 셋째는 친근한 과보[親近果]이며, 넷째는 남은 과보[餘殘果]이며, 다섯째는 평등한 과보[平等果]이며, 여섯째는 과보의 과보[果報果]이며, 일곱째는 멀리 여읜 과보[遠離果]이다. 방편의 과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을에 곡식을 많이 거두면, 방편의 과보를 얻었다고 하는데 방편의 과보는 업행(業行)의 과보라고 하며,
이런 과보에는 두 가지 인이 있다. 첫째는 가까운 인[近因]이며 둘째는 먼 인[遠因]이다. 가까운 인은 종자를 말하며, 먼 인은 물과 거름과 사람의 공력이니, 이것을 방편의 과보라고 한다. 은혜 갚는 과보라고 함은 세상 사람이 부모에게 공양하면 부모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낳아 길러 준 과보를 받는다’고 하며, 자식이 능히 은혜를 갚으므로 과보라고 한다.
이런 과보에도 두 가지 인이 있다.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부모의 과거의 선한 업이며, 먼 인은 곧 낳은 효자이니 이것을 은혜 갚는 열매라고 한다.
친근한 과보라고 함은 마치 어떤 이가 선지식을 친근하면 수다원과부터 아라한과까지를 얻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친근한 과보를 얻었다’고 한다. 이런 과보에도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믿는 마음이며 먼 인은 선지식이니 이것을 친근한 과보라고 한다.
남은 과보라고 하는 것은 살생하지 않는 것을 인하여 셋째 번 몸에 오래 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남은 과보라고 한다. 이런 과보에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함이며 먼 인은 장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남은 과보라고 한다.
평등한 과보라고 하는 것은 기세계[世界器]13)을 말한다. 이런 과보에도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중생들이 열 가지 선한 업을 닦는 것이며, 먼 인은 3재(災)14)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평등한 과보라고 한다.
과보의 과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청정한 몸을 얻고 나서 몸과 입과 마음의 청정한 3업을 닦는 것과 같은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과보의 과보를 얻었다’라고 한다. 이런 과보에도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현재의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한 것이며, 먼 인은 과거의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한 것이다. 이것을 과보의 과보라고 한다.
멀리 여읜 과보라고 하는 것은 곧 열반이다. 모든 번뇌를 여읜 온갖 선한 업은 열반의 인이다. 이 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 인이며, 둘째는 먼 인이다. 가까운 인은 곧 3해탈문이며, 먼 인은 한량없는 세월에서 닦은 선한 법이다.
선남자야, 세간의 법에서 혹은 내는 인[生因]을 말하고, 혹은 나타내는 인[了因]을 말하는 것처럼 출세간의 법도 그와 같아서 내는 인도 말하고, 나타내는 인도 말한다. 선남자야, 3해탈문과 37품(品)은 모든 번뇌를 위하여 나지 않는 내는 인[不生生因]이 되고, 또한
열반을 위하여 나타내는 인[了因]이 된다. 선남자야, 번뇌를 멀리 여의면 분명하게 열반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열반에는 나타내는 인만 있고 내는 인은 없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어찌하여 사문나(沙門那)15)이며, 어찌하여 사문과입니까?’ 하였는데 선남자야, 사문나는 곧 8정도(正道)이며, 사문과는 도로부터 필경에 모든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을 영원히 끊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사문나, 사문과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8정도를 사문나라고 합니까?”
“선남자야, 세상에서 말하기를 사문(沙門)은 궁핍이라 하고, 나(那)는 도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온갖 궁핍을 끊고 온갖 도를 끊는다. 이런 뜻으로 8정도를 사문나라고 하며, 이 도로부터 과를 얻으므로 사문과라고 한다. 선남자야, 또 사문나라고 함은 세상 사람으로서 고요한 데를 좋아하는 이도 사문나라고 한다. 도라는 것도 그러하여 행자(行者)로 하여금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나쁜 일과 삿된 목숨[邪命]을 여의고 고요함을 즐기게 하므로 사문나라 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마치 세상에서 하등 사람으로서 상등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을 사문나라고 하는데, 도라는 것도 그와 같아서 하등 사람으로 하여금 상등 사람이 되게 하므로 사문나라고 한다.
선남자야, 아라한으로서 이 도를 닦는 이는 사문과를 얻으므로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라한과는 곧 무학(無學)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이니,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이 다섯 가지로 인하여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으므로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며, 저 언덕에 이르렀으므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일이 끝났고, 범행이 이미 섰고,
할 일을 이미 마쳤고, 다시 생사[有]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 아라한은 3세(世)에 태어나는 인연을 영원히 끊었으므로 스스로 말하기를 ‘태어나는 일이 끝났다’ 하고, 3계의 5음으로 이루는 몸을 끊었으므로 ‘나는 태어나는 일이 끝났다’라고 하며, 닦는 범행을 마쳤으므로 ‘범행이 이미 섰다’고 말하고, 또 도를 배우는 것을 버렸으므로 ‘이미 섰다’고 하며, 본래 구하던 일을 오늘 얻었으므로 ‘할 일을 이미 마쳤다’라고 말하며,
도를 닦아서 과를 얻었으므로 ‘이미 마쳤다’라고 말하며, 다하는 지혜[盡智]와 나지 않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일이 이미 끝났고 모든 유[有]의 결박을 다하였다’라고 한다. 이런 뜻으로 아라한을 저 언덕에 이르렀다[到彼岸]고 한다. 아라한과 같이 벽지불도 그러하며 보살과 부처님께서는 6바라밀을 구족하게 성취하였으므로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부처님과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므로 6바라밀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6바라밀의 결과를 얻은 까닭이며 결과를 얻었으므로 구족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 일곱 중생은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는다. 이 네 가지 일을 닦지 않으면 5역죄를 지으며 선근을 끊으며 4중죄를 범하며 3보를 비방한다. 그러므로 항상 빠진다고 한다. 선남자야, 일곱 사람 중에 능히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이는 지성으로 여래의 바른 법을 듣고 속으로 잘 생각하여 법답게 머물며, 몸과 계행과 마음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는다.
그러므로 생사의 강을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한다. 만일 말하기를 ‘일천제들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하는 이는
잘못 집착한다고 하고 ‘얻지 못한다’고 말하면 허망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 일곱 가지 사람은 혹 한 사람이 일곱을 갖추기도 하고, 혹 일곱 사람이 각각 한 가지를 가지기도 한다.
선남자야, 만일 마음과 입으로 달리 생각하고 달리 말하되 ‘일천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이 마음과 입으로 달리 생각하고 달리 말하되 ‘일천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어떤 이가 말하기를 ‘8성도(聖道)는 범부가 얻을 것이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이며, 만일 말하기를 ‘8성도는 범부가 얻을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만일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반드시 불성이 있다거나 반드시 불성이 없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내가 경에서 말하기를 ‘두 가지 사람이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한다. 첫째는 믿지 않고 성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믿으면서도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만일 사람이 신심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이 사람은 무명을 증장하고, 지혜는 있으나 신심이 없으면 이 사람은 삿된 소견을 증장한다.
선남자야, 믿지 않는 사람은 성내는 마음 때문에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가 없다고 말하고, 믿는 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뒤바뀌게 뜻을 해석하여 법을 듣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게 한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성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믿는 사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불보ㆍ법보ㆍ승보를 비방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천제들이 선한 법을 내지 못하고도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하는 것이며, 또 말하기를 ‘일천제가 이 일천제를 버리고 다른 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면 이 사람도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한다고 하지만 만일 말하기를 ‘일천제가 능히 선근을 내며, 선근을 내고 나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일천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하고 말하면 이 사람은 3보를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반드시 불성이 있어 항상하고[常] 즐겁고[樂] 나이고[我] 깨끗하고[淨] 짓지도 않고[不作] 나지도 않지만[不生] 번뇌의 인연 때문에 보지 못한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없는 것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지만 방편으로 나는 것이어서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으며, 있고 나서 다시 없어진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ㆍ교법ㆍ승가를 비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말하기를 ‘중생의 불성은 있어도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며, 없어도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항상하기 때문이며 토끼의 뿔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할 것이니, 있으므로 토끼의 뿔을 깨뜨리고, 없으므로 허공을 깨뜨린다’라고 하면 이런 말은 3보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불성은 1법이라 말하지 않고 10법이라 말하지 않고 백 법(百法)이라 말하지 않고 천 법(千法)이라 말하지 않고 만 법(萬法)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모든 선과 불선과 무기(無記)를 모두 불성이라고 말한다. 여래는 어느 때에는 인 가운데 과를 말하고 과 가운데 인을 말하는데, 이것을 여래가 자기의 뜻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뜻을 따라 말하므로 여래라 이름하고, 자기의 뜻을 따라 말하므로 아라하라 이름하고, 자기의 뜻을 따라 말하므로 삼먁
삼불타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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