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34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5권

by Kay/케이 2023. 10. 15.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5

 

 

 

대반열반경 제35권

북량 사문 담무참 한역

12. 가섭보살품 ③

“선남자야, 이러한 쟁론[諍訟]은 부처님의 경계이며 성문이나 연각이 알 바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의심을 내더라도 오히려 한량없는 번뇌의 수미산 같은 것을 끊어버리겠지만 이 가운데 결정을 내는 이는 집착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집착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런 사람이 다른 이에게서 듣거나 스스로 경을 보거나 다른 이가 짐짓 가르칠 때에 그런 일에 놓아 버리지 못하는 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집착을 선이라고 합니까, 선이 아니라고 합니까?”
“선남자야, 이런 집착은 선이라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능히 의심을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이런 사람은 본래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의심을 깨뜨리지 못한다고 합니까?”
“선남자야, 대개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의심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수다원이 3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이 사람도 집착이라고 하며 의심이라고 하겠습니까?”
“선남자야, 그것은 결정함이라고 할 것이며 의심이라고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먼저 사람과 나무를 보고 그 뒤에 밤에 다니다가 멀리서 나무 등걸을 보면 문득 사람인가 나무인가 의심 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사람이 먼저 비구와 범지를 보고 뒤에 길을 가다가 멀리서 비구를 보면 문득 사문인가 범지인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사람이 먼저 소와 물소를 보고 뒤에 멀리서 소를 보면 저것이 소인가 물소인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이 먼저 두 물건을 보면 뒤에 의심을 낸다. 왜냐하면 마음에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수다원이 3악도에 떨어지기도 하고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의심을 냈는가?”
가섭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먼저 본 뒤에야 의심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물건을 보지 않고도 의심을 내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른바 열반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어떤 이가 길가다가 흐린 물을 만나면 미리 보지 않았지만 역시 의심하기를 이 물이 깊은가 얕은가 하는 것 같으니, 이 사람이 일찍이 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의심을 내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열반은 괴로움을 끊은 것이며, 열반 아닌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중생이 두 가지 있음을 보았으니 괴로움과 괴롭지 않음이다. 괴로움과 괴롭지 않음이라고 함은 곧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성냄과 기쁨, 병듦과 평안, 늙음과 건강함, 속박과 해탈, 사람과 이별함과 원수를 만남이다. 중생이 보고는 의심하기를 ‘필경에 이런 괴로움을 멀리 여의는 수가 있을까 없을까하므로 중생이 열반에 대하여 의심을 낸다. 그대의 생각에 그 사람이 먼저 흐린 물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의심하는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먼저 다른 데서 보았으므로 아직 이르지 않았던 여기에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이 먼저 깊고 얕은 데를 보았을 때에는 의심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째서 의심을 내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본래 다녀 보지 않았으므로 의심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분명히 알지 못하므로 의심한다’고 하였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의심이 곧 집착이며 집착이 곧 의심이라고 함은 어떤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선근을 끊은 자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무리들이 선근을 끊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만일 총명하고 잔꾀 있고 근성이 영리하고 잘 분별하면서 선지식을 멀리 떠나고 바른 법을 듣지 않고 잘 생각하지 않고 법답게 머물지 않으면 이런 사람이 선근을 끊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떠나고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보시하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시한다는 것은 재물을 버리는 것이므로 만일 보시한 과보가 있다면 시주는 항상 빈궁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자로부터 생긴 과보[子果]와 같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한다’라고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하면 이것이 곧 선근을 끊는 것이다.
또 생각하기를 ‘시주와 받는 이와 재물의 세 가지가 무상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니,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시주이고 받는 이고 재물이라고 말하겠는가? 만일 받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과보를 얻을 것이며 이런 이치로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한다’라고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하면 이 사람이 선근을 끊는 줄을 알아야 한다.
또 생각하기를 ‘시주가 보시할 때에 다섯 가지로 보시하는데, 받는 이가 받고는 혹은 선한 일을 짓고 혹은 선하지 않은 일을 짓지만 시주는 선한 과보나 선하지 않은 과보를 얻지 못한다.
마치 세간법이 씨로부터 열매가 생기고 열매는 다시 씨를 내는 것처럼 인은 시주이며 과는 받는 이지만 받는 이가 능히 선한 법과 선하지 않은 법으로써 시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로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하면 이 사람이 선근을 끊는 줄을 알 것이다.
또 생각하기를 ‘보시하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시하는 물건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다. 무기라면 어떻게 선한 과보를 얻겠는가? 선과 악의 과보가 없으면 곧 무기이며, 재물이 무기라면 선과 악의 과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도 없고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선근을 끊은 줄을 알아야 한다.
또 생각하기를 ‘보시한다는 것은 곧 뜻이다. 만일 뜻이라면 볼 것도 없고 상대도 없으므로 색법(色法)이 아니며 만약 색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보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보시도 없고 인도 없고 과도 없는 것이다’라고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선근을 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생각하기를 ‘시주가 만일 불상(佛像)이나 천상(天像)과 목숨을 마친 부모를 위하여 보시를 행한다면 곧 받을 이가 없고 만일 받을 이가 없다면 마땅히 과보가 없는 것이며 만일 과보가 없으면 이것은 인이 없는 것이니, 만일 인이 없으면 이는 과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도 없고 과도 없다고 말하면 이 사람이 선근을 끊는 줄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것이다. 만일 부모가 중생의 인이어서 중생을 낳는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항상 낳아서 끊어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낳는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부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중생의 몸이 부모를 인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한 사람이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둘을 갖춘 이가 없으니 중생은 부모를 인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부모를 인하여 중생을 낳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건대 중생이 부모와 닮지 않았으니, 몸과 빛깔과 마음과 위의(威儀)와 행동 등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중생의 인이 아니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세간에 네 가지 없는 것이 있다. 첫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없다고 하는데 흙반죽[泥團]일 때에는 질그릇의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둘째는 멸한 뒤에는 없다고 하는데 질그릇이 깨어진 뒤에는 없다는 것과 같다. 셋째는 각각 다른 것을 제각기 없다고 하는데 소[牛]에는 말[馬]이 없고 말에는 소가 없는 것과 같다. 넷째는 끝까지 아주 없는 것이니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은 것이다. 중생의 부모도 그러하여 이 네 가지 없는 것과 같으며, 만일 부모가 중생의 인이라면 부모가 죽을 때에 자식은 반드시 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중생의 인이 아니라고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부모가 중생의 인이라면 마땅히 부모를 인하여 항상 중생을 낳아야 할이다. 그러나 다시 화생(化生)과 습생(濕生)도 있으므로 부모를 인하여 중생을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중생은 부모를 인하여 나지 않는 것이 있다. 비유하면 공작이 천둥소리를 듣고 새끼를 배는 것과 청작(靑雀)이 수컷의 오줌을 먹고 새끼를 배는 것과 명명조(命命鳥)가 수컷이 춤추는 것을 보고 새끼를 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선근을 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세간에는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중생들은 열 가지 선한 법을 갖추고 보시하기를 좋아하며 공덕을 부지런히 닦지만 이 사람도 병이 들어서 일찍 죽기도 하고 재물이 손실되어 고생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열 가지 나쁜 짓을 하고 간탐하고 질투하고 게을러서 선한 일을 행하지 않지만 몸이 편안하고 무병하고 장수하며 재물이 많고 걱정이 없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도 일찍 성인의 말씀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하고도 죽어서 3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행하고도 죽어서 인간에나
천상에 나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성인들이 두 가지 말이 있다. 혹은 살생을 하고도 선한 과보를 얻는다 하고, 혹은 살생을 하면 나쁜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도 일정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성인이 일정치 않다면 내가 어떻게 일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세간에 성인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성인이라면 마땅히 바른 도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번뇌를 구족하였을 때에 바른 도를 닦는 이는, 이 사람이 바른 도와 번뇌가 동시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며 만일 동시에 갖추어져 있다면 바른 도가 번뇌를 깨뜨리지 못할 것을 알 것이며, 만일 번뇌가 없으면서 바른 도를 닦는다면 이런 도는 무슨 작용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번뇌를 갖추었다면 바른 도가 깨뜨리지 못하고, 번뇌를 갖추지 않았다면 바른 도가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세간에 성인이 없다고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무명(無明)은 행의 반연이 되고 나아가 나는 것[生]은 늙고 죽음의 반연이 되며 이 12인연은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가졌고 8성도가 그 성품이 평등한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이 도를 얻을 때에 모든 사람이 마땅히 얻을 것이며, 한 사람이 닦을 때에도 모든 사람의 괴로움이 멸할 것이다. 왜냐하면 번뇌가 평등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으므로 바른 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들도 모두 범부와 같은 법이 있다. 이른바 마시고 먹고, 가고 서고 앉고 눕고 자고, 웃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덥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범부와 같다면 성인은 성스런 도를 얻지 못한 것임을 알 아야 한다. 만일 성스런 도를 얻었다면 마땅히 이런 일을 끊었을 것인데, 이런 일을 끊지 못하였으니 바른 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도 몸이 있어
5욕락을 받기도 하고 또 사람을 꾸짖고 때리며, 질투하고 교만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며 선한 업과 악한 업을 짓는다. 이런 인연으로 성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만일 도가 있다면 이런 일을 끊을 것인데 이런 일을 끊지 못하니 도가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가엾이 여기는 생각이 많은 이를 성인이라고 한다. 무슨 인연으로 성인이라고 하는가? 도의 인연으로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의 성품이 가엾이 여김이라면 마땅히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길 것이니 반드시 닦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가엾게 여기는 성품이 없다면 어찌하여 성인이 성스런 도를 얻고 나서야 가엾이 여기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 성인의 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4대는 인으로부터 나지 않고 중생에게 평등하게 4대의 성품이 있는데, 중생의 여기에는 마땅히 이르고 저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만일 성인의 도가 있다면 성품이 그와 같을 것인데 이제 그렇지 않으니 이것으로 세상에 성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여러 성인에게 하나의 열반이 있다면 이것은 성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항상 머무는 법은 얻을 수 없으며, 취하고 버리지 못할 것이다. 만일 여러 성인에게 열반이 여럿이라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셀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열반이 하나라면 한 사람이 얻었을 때에 모든 사람이 얻을 것이고 열반이 많다면 이는 끝이 있는 것이다. 끝이 있다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열반의 자체는 하나이나 해탈이 많은 것이니, 마치 하나의 어금니에 혀가 여러 개인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씩 얻는 것은 모두가 얻는 것이 아니며 끝이 있으므로 무상할 것이다. 만일 무상하다면 어떻게 열반이라고 이름하며, 열반이 만일 없다면 누가 성인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의 도는 인연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인의 도가 인연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지 못하는가? 만일 모든 사람이 성인이 아니라면 이는 성인과 성인의 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의 바른 소견이라고 말하는 것이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다른 이에게서 법을 듣는 것이며, 둘째는 안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인연이 만일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면 생길 그것도 인연으로부터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점점 미루어서 끝이 없는 허물[無窮過]이 있을 것이며, 만일 이 두 가지가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들은 어찌하여 얻지 못하는가? 이런 관찰을 할 때에 능히 선근을 끊는다.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이렇게 인연이 없고 과가 없음을 깊이 본다면 이 사람은 신(信) 등의 5근을 끊음이다. 선남자야, 선근을 끊는 사람은 하열(下劣)하고 우둔(愚鈍)한 사람이 아니며 천상이나 3악도의 중생도 아니니, 승가를 파괴[破僧]하는 일도 그와 같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런 사람은 어느 때에 선근이 도로 생겨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사람은 두 때에 선근이 도로 생기는데, 처음 지옥에 들어갈 때와 지옥에서 나올 때이다. 선남자야, 선에 세 가지가 있으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다. 과거인 것은 그 성품이 스스로 멸하는 것이며, 인은 비록 멸하였지만 과보가 성숙하지 못하였으므로 과거의 과보를 끊는다고 하지 않으며, 단은 3세의 인을 끊으므로 끊었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만일 3세의 인을 끊으므로 선근을 끊는다고 하면 선근을 끊은 사람도 불성이 있을 것이니, 이 불성은 과거라고 하겠습니까, 현재라고 하겠습니까, 미래라고 하겠습니까? 3세에 두루하였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과거라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습니까? 불성은
항상한 것이니 과거가 아닌 줄을 알겠습니다.
만일 미래라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이 반드시 결정코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만일 반드시 얻는다면 어찌하여 끊었다고 합니까? 만일 현재라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반드시 결정코 본다고 하였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성이 여섯 가지이니 첫째는 항상함이고 둘째는 참됨이고 셋째는 진실함이고 넷째는 선함이며 다섯째는 깨끗함이고 여섯째는 볼 수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선근을 끊었어도 불성이 있다면 선근을 끊었다고 할 수 없으며, 만일 불성이 없다면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합니까? 만일 불성이 있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항상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야, 여래 세존은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로 대답하였다. 첫째는 결정한 대답이며, 둘째는 분별하는 대답이며, 셋째는 물음을 따르는 대답이며, 넷째는 두는 대답[置答]이다. 선남자야, 어떤 것을 결정한 대답이라고 하는가? 만일 묻기를 ‘악한 업은 선한 과보를 얻는가, 불선한 과보를 얻는가?’ 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불선한 과보를 얻는다고 결정하여 대답할 것이며, 선한 업도 이와 같다.
만일 묻기를 ‘여래께서는 일체지(一切智)이신가?’ 하면, 이것은 마땅히 일체지라고 결정하여 대답할 것이다. 만일 묻기를 ‘부처님 법이 청정한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청정하다고 결정하여 대답할 것이다. 만일 묻기를 ‘여래의 제자는 법답게 머무느냐[如法住]?’ 하면 이것은 마땅히 법답게 머문다고 결정하여 대답할 것이니 이런 것을 결정한 대답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하는가? 내가 말하는 4진제법(眞諦法)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이다. 어떤 것을 고제라고 하는가?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으므로 고제라고 한다. 어떤 것을 집제라고 하는가? 5음의 인이므로 집제라고 한다. 어떤 것을 멸제라고 하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끝까지 없어졌으므로 멸제라고 한다. 어떤 것을 도제라고 하는가? 37조도법(助道法)을 도제(道諦)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이른다.
어떤 것을 물음을 따르는 대답이라고 하는가? 내가 말한, 온갖 법이 무상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묻기를 ‘여래 세존께서 무슨 법을 위하여 무상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한다면 대답하기를 ‘여래는 함이 있는 법[有爲法]을 위하여 무상하다고 말한다’라고 할 것이다. 내[無我]가 없다는 것도 그와 같다. 나는 온갖 법이 저것을 태운다고 말하였는데, 또 묻기를 ‘여래 세존께서는 무슨 법을 위하여 온갖 것이 태운다고 합니까?’라고 하면 대답하기를 ‘여래는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을 위하여 온갖 것이 태운다고 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선남자야, 여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대자대비ㆍ3념처(念處)ㆍ 수릉엄(首楞嚴) 등 8만억 삼매문ㆍ32상(相)과 80종호(種好)ㆍ5지인(智印) 등 3만 5천 삼매문ㆍ금강정(金剛定) 등 4천 2백 삼매문ㆍ방편삼매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 등의 법은 이것이 부처님의 불성이다. 이와 같은 불성은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항상함[常], 둘째는 나인 것[我], 셋째는 즐거움[樂], 넷째는 깨끗함[淨], 다섯째는 참됨[眞], 여섯째는 진실함[實], 일곱째는 선함[善]이다. 이런 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후신(後身) 보살의 불성은 여섯 가지이니, 첫째는 항상함, 둘째는 깨끗함, 셋째는 참됨, 넷째는 진실함, 다섯째는 선함, 여섯째는 조금 보는 것[少見]이다.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그대가 먼저 묻기를 ‘선근을 끊은 사람이 불성이 있느냐?’라고 한 것은 이 사람은 여래의 불성도 있고 후신 보살의 불성도 있지만 이 두 불성은 미래를 장애하는 까닭에 없다고 하고 필경에는 얻기 때문에 있다고 한다.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의 불성은 과거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며, 후신 보살의 불성은 현재이며 미래이니 조금 볼 수 있으므로 현재라 하고, 구족하게 보지 못하므로 미래라고 한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때의 불성은 인이기
때문에 또한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지만 과(果)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것은 3세이기도 하고 3세가 아니기도 하다. 후신 보살의 불성은 인이기 때문에 또한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며 과도 그와 같다. 이런 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9주(住) 보살의 불성은 여섯 가지이니, 첫째는 항상함, 둘째는 선함, 셋째는 참됨, 넷째는 진실함, 다섯째는 깨끗함, 여섯째는 볼 수 있음이다. 불성이 인이기 때문에 또한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며, 과도 그러하니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8주 보살에서 6주 보살까지의 불성은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참됨, 둘째는 진실함, 셋째는 깨끗함, 넷째는 선함, 다섯째는 볼 수 있음이다. 불성이 인이기 때문에 역시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며, 과도 그러하니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5주 보살에서 초주(初住) 보살까지의 불성은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참됨, 둘째는 진실함, 셋째는 깨끗함, 넷째는 볼 수 있음, 다섯째는 선과 불선이다. 이 다섯 가지 불성과 여섯 가지 불성과 일곱 가지 불성은 선근을 끊은 사람이 마땅히 얻을 것이므로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만일 말하되 선근을 끊은 이는 반드시 불성이 있다. 반드시 불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답을 그만두는 것[置答]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듣기로는 대답하지 않음을 대답을 그만 두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여래께서 지금은 무슨 인연으로 대답하시면서 대답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선남자야, 나는 그만 두고 대답하지 않음을 대답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선남자야, 이렇게 대답을 그만두는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막는 것이며, 또 하나는 집착하지 말게 함이다. 이런 뜻으로 대답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말씀과 같이 어찌하여 인은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며 과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이기도 하고,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아니기도 하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5음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인이며 하나는 과이다. 이 인의 5음은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며, 과의 5음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이기도 하고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아니기도 하다.
선남자야, 모든 무명 번뇌 등의 결박이 모두 불성이다. 왜냐하면 불성의 인이기 때문이다. 무명ㆍ행과 모든 번뇌로부터 선의 5음을 얻는 것을 불성이라고 하며, 선의 5음으로부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얻는다. 그러므로 내가 경에서 먼저 말하기를 ‘중생의 불성은 피 섞인 젖과 같다’고 하였다.
피는 곧 무명ㆍ행 등의 모든 번뇌이며 젖은 곧 선의 5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번뇌와 선의 5음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마치 중생의 몸이 모두 정기와 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불성도 그러하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이 일부분의 번뇌를 끊은 불성은 젖과 같고, 아나함의 불성은 타락[酪]과 같고, 아라한은 생소(生酥)와 같고, 벽지불로부터 10주 보살까지는 숙소(熟酥)와 같고, 여래의 불성은 제호(醍醐)와 같다.
선남자야, 현재의 번뇌가 장애를 짓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향산 속에 있는 인욕초(忍辱草)는 모든 소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불성도 그러하다. 이런 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섯 가지 불성과 여섯 가지 불성과 일곱 가지 불성이 만일 미래에 있다면 어찌하여 선근을 끊은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과거의 업이 있고 이 업으로 인하여
중생이 현재에 과보를 받는 것이며, 미래의 업은 아직 생기지 않았으므로 과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현재에는 번뇌가 있으니, 만일 번뇌가 없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현재에 불성을 분명하게 볼 것이다. 그러므로 선근을 끊은 사람은 현재의 번뇌 인연으로 능히 선근을 끊고 미래세의 불성의 힘의 인연으로 선근을 다시 낸다.”
가섭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래에 어떻게 능히 선근을 내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마치 등불이나 해는 비록 나오지 않았더라도 능히 어둠을 깨뜨릴 수 있는 것처럼 미래에 나올 것이 능히 중생의 미래의 불성을 내는 것도 이와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5음이 불성이라면 어찌하여 중생의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선남자야, 무슨 인연으로 그렇게 뜻을 잃어버리느냐? 내가 먼저 말하기를 중생의 불성이 중도(中道)라고 하지 않았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실로 뜻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중생이 이 중도에서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선남자야, 중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중도이니, 어떤 때는 이해하고 어떤 때는 이해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나는 중생들이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불성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범부 중생이 혹은 말하기를 ‘불성이 5음 가운데 있음이 마치 그릇 가운데 과실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5음을 여의고 있음이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중도를 말하되
‘중생의 불성이 안의 6입도 아니며 밖의 6입도 아니고 안과 밖이 화합함을 중도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불성이 곧 중도이니,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므로 중도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어떤 것을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고 하는가? 선남자야,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외도(外道)이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겁 동안에 외도 중에 있어서 번뇌를 끊고 마음을 조복하고 중생을 교화한 연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므로 불성은 외도라고 한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내도(內道)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비록 한량없는 겁 동안에 외도를 닦았다 하더라도 내도를 여의었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불성은 내도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막기 위하여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안과 밖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도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분별하는 대답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여래의 금강 같은 몸인 32상과 80종호이다. 왜냐하면 허망하거나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10력ㆍ4무소외ㆍ대자대비ㆍ3념처ㆍ수릉엄 등의 모든 삼매이다. 왜냐하면 이 삼매로 인하여 금강 같은 몸인 32상과 80종호를 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막기 위하여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안과 밖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중도라고 이름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분별하는 대답이라 한다.
또 선남자야,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안으로 잘 생각하는 것[內善思惟]이다. 왜냐하면 잘 생각함을 떠나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성은 곧 안으로 잘 생각함이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곧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고 나서야 안으로 잘 생각할 것이니, 만일 법을 듣지 않고서는 생각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불성은 곧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래서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막기 위하여 말하길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안과 밖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중도라고 이름한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불성은 바깥이니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말한다. 단바라밀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므로 단바라밀이 불성이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안이니, 다섯 가지 바라밀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 다섯 가지를 따나고는 불성의 인(因)과 과(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다섯 가지 바라밀이 불성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막기 위하여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이것을 중도라고 이름한다.
또 선남자야, 혹은 말하기를 ‘불성은 안에 있는 것이 비유하면 역사의 이마 위에 있는 보배 구슬과 같다. 왜냐하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보배 구슬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안에 있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불성이 밖에 있음이 가난한 이의 보물 광과 같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밖에 있으니 방편으로 볼 수 있다’ 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막기 위하여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다’고 말하니, 이것을 중도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불성이 비록 있으나 허공과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세간의 허공은 한량없는 공교한 방편으로도 볼 수 없지만 불성은 볼 수 있으므로 비록 있으나 허공과는 같지 않다고 한다. 불성이
비록 없으나 토끼의 뿔과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은 한량없는 공교한 방편으로도 낼 수 없지만 불성은 낼 수 있으므로, 비록 없으나 토끼의 뿔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찌하여 있다고 하는가? 온갖 것에 모두 있으니, 모든 중생들이 끊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음이 불꽃과 같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므로 있다고 한다.
어찌하여 없다고 하는가? 모든 중생들이 현재에는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부처님 법이 있지 않으므로 없다고 한다. 있음과 없음이 합하므로 중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생의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 종자 속에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자를 떠나서는 열매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있다 하고, 종자에서 싹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고 할 것이니, 이런 뜻으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무슨 까닭인가? 시절은 다르나 그 자체는 하나이니, 중생의 불성도 이와 같다. 만일 중생 중에 따로 불성이 있다고 하면 이치가 그렇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냐? 중생이 곧 불성이며, 불성이 곧 중생이지만 다만 시절이 다르므로 깨끗하고 깨끗하지 못할 뿐이다.
선남자야, 어떤 이가 묻기를 ‘이 종자가 열매를 내겠는가? 이 열매가 종자를 내겠는가?’ 하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한다’고 할 것이다.”
“세존이시여, 세상 사람이 젖 속에 타락[酪]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이치가 어떠합니까?”
“선남자야, 만일 젖 속에 타락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집착이며, 타락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허망함이니, 이 두 가지를 떠나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여야 한다. 어째서 있다고 하는가? 젖으로부터 타락이 나오며,
인은 젖이고 과는 타락이다. 그래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빛과 맛이 각각 다르고 쓰는 데도 같지 않아서 열이 나는 병에는 젖을 쓰고 냉한 병에는 타락을 쓰며, 젖은 냉병을 일으키고 타락은 열병을 일으킨다.
선남자야, 젖 속에 타락의 성질이 있다고 말한다면 젖이 곧 타락이며 타락이 곧 젖이어서 그 성품이 하나일 것인데 무슨 인연으로 젖이 먼저 나고 타락은 먼저 나지 못하느냐? 만일 인연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찌하여 말하지 못하며, 만일 인연이 없다면 어찌하여 타락이 먼저 나지 못하는가? 만일 타락이 먼저 나지 못한다면, 누가 차례차례로 젖과 타락과 생소와 숙소와 제호를 짓는가? 그러므로 타락이 먼저는 없다가 지금에 있는 것이니, 만일 먼저는 없다가 지금에 있다면 이것은 무상한 법이다.
선남자야, 만일 말하기를 젖에는 타락의 성질이 있어서 타락을 내고 물에는 타락의 성질이 없어서 타락을 내지 못한다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물과 풀에도 젖과 타락의 성품이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물과 풀로 인하여 젖과 타락이 난다. 만일 젖에는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고, 물과 풀에는 없다고 말하면 이는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므로 허망하다 한다. 선남자야, 만일 젖 속에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타락에도 역시 반드시 젖의 성품이 있을 것인데 무슨 인연으로 젖에서는 타락이 나는데 타락은 젖을 내지 못하는가? 만일 인연이 없다면 이 타락이 본래 없다가 지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이는 마땅히 말하기를 ‘젖 속에는 타락의 성품이 있지도 않고 타락의 성품이 없지도 않다’고 한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여래가 이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반드시 불성이 있다고 하면 이는 집착함이며 만일 불성이 없다고 하면 이는 허망한 것이니, 지혜 있는 이는 마땅히 중생의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네 가지가 화합하여
안식(眼識)을 낸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눈과 빛과 밝음과 의욕[欲]이다. 이 안식의 성품은 눈도 아니며 빛도 아니며 밝음도 아니며 의욕도 아니나, 화합함을 따라서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안식이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으며 있다가는 도로 없어지므로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며, 젖 속의 타락 성품도 그와 같다. 만일 말하기를 ‘물에는 타락의 성품이 없으므로 타락을 내지 못하므로 젖 속에는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모든 법들이 인이 다르고 과가 다르니 한 인에서 모든 과가 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과가 한 인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선남자야, 네 가지로부터 안식이 생긴다고 하여 또 이 네 가지로부터 이식(耳識)이 생기리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선남자야, 설사 방편을 여의고 젖 속에서 타락을 얻더라도 타락에서 생소가 생기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반드시 방편을 요구하게 된다.
선남자야, 지혜 있는 이는 방편을 여의고 젖으로부터 타락 얻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생소를 얻는 것도 이와 같이 방편을 여의고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경에서 인이 생기므로 법이 있고 인이 멸하므로 법이 없다고 하였다.
선남자야, 마치 소금의 성품이 짜서 짜지 않은 물건을 짜게 하니, 만일 짜지 않은 물건에 먼저 짠 성품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슨 까닭에 소금을 구하겠느냐? 만일 먼저 짠 성품이 없었다면 먼저는 없다가 지금에 있음을 알 것이니 다른 인연으로 짜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모든 짜지 않은 물건들이 모두 짠 성품이 있지만 미미한 까닭에 알지 못하니, 이 미미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소금이 능히 짜게 하며 만일 본래 짠 성품이 없다면 비록 소금이 있더라도 짜게 하지는 못한다. 마치 종자에 스스로 4대가 있기 때문에 바깥 4대로 말미암아 움과 줄기와 가지와 잎이 자라는 것처럼 소금의 성품도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이냐?
짜지 않은 물건에 먼저 짠 성품이 있었다면 소금에도 미미하게 짜지 않은 성품이 있을 것이니, 소금에 만일 이런 두 성품이 있다면 무슨 까닭에 짜지 않은 물건을 떠나고는 혼자 작용하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소금에 본래 두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소금과 같아서 온갖 짜지 않은 물건도 모두 그와 같다.
만일 바깥 4대의 힘으로 안의 4대를 자라게 한다는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차례로 말하기 때문에 방편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젖 속에서 타락과 생소를 얻으나 나아가 모든 법이 다 그와 같지 않아 방편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4대도 그와 같다. 만일 바깥 4대로부터 안의 4대를 자라게 한다 하여도 안의 4대로부터 바깥 4대를 자라게 함을 보지 못한다. 마치 시리사 열매는 먼저는 형체가 없다가 좀생이별[昴生]을 볼 때에 열매가 생겨서 다섯 치나 자라는 것처럼 이런 과실은 바깥 4대로 인하여 커지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12부경은 혹은 자기 뜻을 따라 말하고 혹은 남의 뜻을 따라 말하고 혹은 자기 뜻과 남의 뜻을 따라 말하였다. 어떤 것을 자기 뜻을 따라 말한 것이라고 하는가? 마치 다음과 같다.
500비구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큰스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몸의 인(因)을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이 옳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스님들이여, 당신들도 각각 바른 해탈을 얻었으니 스스로 알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묻는가?’
어떤 비구가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제가 바른 해탈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 무명이 몸의 인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관찰하다가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큰스님, 제가 바른 해탈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 애(愛)와 무명이 몸의 인이리라 생각하고 이렇게 관찰하다가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
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음식ㆍ5욕락이 곧 몸의 인입니다.’
그래서 500비구가 각각 자기가 아는 소견을 말하고는 함께 부처님 계신 데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서 예배를 마치고 한쪽에 물러가 앉았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대로 자기가 이해한 뜻을 부처님께 말하였다.
사리불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여러 사람의 말이 누구의 것이 옳은 말이고 누구의 것이 옳지 않은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한 말이다. 여러 비구들의 말이 하나도 옳은 말 아닌 것이 없다.’
사리불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뜻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욕계의 중생을 위하여서는 부모가 몸의 인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경전을 자기 뜻을 따라 말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남의 뜻을 따라 말한 것이라 하는가? 마치 다음과 같다. 파타라(巴吒羅) 장자가 내게 와서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당신이 환술을 아십니까? 만일 환술을 안다면 곧 대환인(大幻人)이며, 만일 모른다면 온갖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가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여, 환술을 아는 사람을 환인이라고 하는가?’
‘옳습니다, 옳습니다. 환술을 아는 사람이 환인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여, 사위국의 바사닉왕에게 기허(氣噓)라는 전다라가 있는데 그대는 아는가?’
‘구담이시여,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나는 또 물었다.
‘그대가 벌써부터 알았다면 그대도 전다라이겠구나.’
‘구담이시여, 제가 그 전다라를 알지만 제 몸은 전다라가 아닙니다.’
‘장자여, 그대는 전다라를 알아도 전다라가 아닌 이치를 알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어찌하여 환술을 알지 못해야 환인이 아니라고 하는가? 장자여, 나는 환술도 알고 환인도 알고 환술의 과보도 알고 환술하는 기술도 안다. 나는
죽이는 것도 알고 죽이는 사람도 알고 죽인 과보도 알고 죽이고 해탈함도 안다. 나아가 나쁜 소견도 알고 나쁜 소견을 가진 사람도 알고 나쁜 소견의 과보도 알고 나쁜 소견에서 해탈하는 것도 안다. 장자여, 만일 환술 아닌 사람을 환인이라고 말하거나 나쁜 소견 아닌 사람을 나쁜 소견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 한량없는 죄를 얻는다.’
‘구담이시여, 당신의 말과 같다면 저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가진 물건을 모두 드릴 것이니, 바라건대 바사닉왕으로 하여금 저의 이 일을 알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장자여, 그 죄로 인하여 재물을 잃을 것까지는 없고 마땅히 3악도에 떨어질 것이오.’
그때 장자는 나쁜 갈래라는 말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내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성인이시여, 제가 잘못하여서 큰 죄를 얻게 되었는데, 성인께서는 온갖 지혜를 가진 어른이시니 해탈을 얻는 일도 아실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지옥ㆍ아귀ㆍ축생에서 해탈하겠습니까?’
내가 그때 4진제를 말하여 주었더니 장자가 듣고 나서 수다원과를 얻었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처님께 참회하였다.
‘제가 본래 어리석어서 환인이 아니신 부처님을 환인이라고 말하였으니 저는 오늘부터 3보에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일이오, 장자여.’이것을 일러 남의 뜻을 따라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자기 뜻과 남의 뜻을 따라서 말한 것이라고 하는가? 내가 말한 바와 같다. 만일 모든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나도 있다고 말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나도 없다고 말한다.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 5욕락에는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는 것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 5욕락에는 항상하고 나이고 깨끗함이 있다는 것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 나도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일러 자기와 남의 뜻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바 10주(住) 보살이 불성을 조금 본다고 함은 남의 뜻을 따라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조금 본다고 하는가? 10주 보살은 수릉엄삼매와 3천 법문을 얻었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줄을 분명하게 알지만 모든 중생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줄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10주 보살은 불성을 조금 본다고 하였다.
선남자야,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 것은 자기의 뜻을 따라서 한 말이며, 모든 중생이 끊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한 것은 자기의 뜻을 따라서 한 말이며,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지만 번뇌에 가렸으므로 보지 못한다고 하여 나의 말도 이러하고 그대의 말도 그러하니, 이것을 일러 자기의 뜻과 남의 뜻을 따라서 한 말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여래는 어떤 때에는 한 법을 위하여 한량없는 법을 말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온갖 범행(梵行)의 인은 선지식이다’라고 하였으니, 온갖 범행의 인이 한량없지만 선지식을 말하면 모두 그 속에 들었고, 내가 말하기를 ‘온갖 나쁜 행은 삿된 소견이 인이 된다’고 하였으니 온갖 나쁜 행의 인이 한량없지만 삿된 소견이라 말하면 그 속에 모두 들었다. 혹은 말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신심이 인이 된다’고 하였으니, 보리(菩提)의 인이 한량없지만 신심이라고 말하면 그 속에 모두 들었다. 선남자야, 여래가 비록 한량없는 법을 말하여 불성이라고 하였으나, 5음ㆍ6입ㆍ18계를 여의지 않았다.
선남자야, 여래가 법을 말하는 것이 중생을 위하므로 일곱 가지 말이 있다. 첫째는 인에 대한 말[因語], 둘째는 과에 대한 말[果語], 셋째는 인과 과에 대한 말[因果語], 넷째는 비유하는 말[喩語], 다섯째는 안 맞는 말[不應說語], 여섯째는 세상에
퍼뜨리는 말[世流布語], 일곱째는 뜻대로 하는 말[如意語]이다.
어떤 것을 인에 대한 말이라고 하는가? 현재의 인에서 미래의 과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선남자야, 네가 중생들이 살생을 좋아하고 나아가 나쁜 소견을 행하기를 좋아함을 보거든, 이 사람은 곧 지옥 사람이라고 관찰하라.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살생이나 나아가 삿된 소견을 좋아하지 않거든, 이 사람은 곧 천상 사람이라고 관찰하라’라고 한 것은 인에 대한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과에 대한 말이라고 하는가? 현재의 과에서 과거의 인을 말하는 것이니,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야, 네가 만일 빈궁한 중생으로서 얼굴이 누추하고 자재하지 못한 이를 보거든, 이 사람은 반드시 파계(破戒)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중생이 재물이 거부인데다가 모든 근을 구족하여 위엄과 덕이 자재한 것을 보거든, 이 사람은 반드시 계를 지키고 보시하고 정진하고 부끄러움을 알며 질투하거나 성내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과에 대한 말이다.
어떤 것을 인과 과에 대한 말이라고 하는가? 경에서 말하기를 ‘선남자야, 중생들의 현재의 6입은 촉(觸)의 인이며 과거의 업의 과보라고 한다. 여래도 업이라고 말하며 이 업의 인연으로 미래의 과를 얻는다’고 한 것은 인과 과에 대한 말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하는가? 마치 사자왕을 내 몸에 비유한 것과 같은 것이니, 대상왕(大象王)ㆍ대용왕ㆍ파리질다라나무[波利質多羅樹]1)ㆍ7보 더미[聚]ㆍ큰 바다[大海]ㆍ수미산ㆍ땅덩이[大地]ㆍ큰비[大雨]ㆍ뱃사공[船師]ㆍ도사(導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역사(力士)ㆍ우왕(牛王)ㆍ바라문ㆍ사문ㆍ큰 성(城)ㆍ다라(多羅)2)나무 따위로 비유한 것은 비유하는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안 맞는 말[不應語]이라고 하는가? 경에서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합할 수 있고,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하거나 바사닉왕을 위하여 ‘사방에서 산이 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녹모(鹿母) 우바이를 위하여 ‘사라수(婆羅樹)3)가 8계를 받으면 인간이나 천상의 낙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10주 보살이 퇴전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할지언정 여래는 두 가지 말씀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수다원이 3악도에 떨어진다고 말할지언정 10주 보살이 퇴전할 마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 등은 안 맞는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을 세상에 퍼뜨리는 말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남자ㆍ여자ㆍ큰 것ㆍ작은 것ㆍ가는 것ㆍ오는 것ㆍ앉는 것ㆍ눕는 것ㆍ수레ㆍ집ㆍ질그릇ㆍ옷ㆍ중생ㆍ항상함ㆍ즐거움ㆍ나ㆍ깨끗함ㆍ군대ㆍ숲ㆍ성읍ㆍ승려ㆍ환술[幻]ㆍ모임ㆍ흩어짐 등을 세상에 퍼뜨리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뜻대로 하는 말이라고 하는가? 내가 계율을 깨뜨린 사람을 꾸짖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책망하고 계율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과, 수다원을 찬탄하여 범부들로 하여금 선한 마음을 내게 하는 것과, 보살을 찬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는 것과, 3악도의 고통을 말하여 선한 법을 닦게 하는 것과, 온갖 것이 불탄다고 말한 것은 오직 모든 함이 있는 법을 위하기 때문이니, 내가 없다는 것도 그와 같으며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방일하지 못하게 한 것 등은 뜻대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