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5권
대반열반경 제25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0.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⑤
“또 선남자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으면 일곱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으면서 생각하기를 ‘어떤 법이 대열반의 가까운 인연[近因]이 되겠는가?’라고 하면, 네 가지 법이 대열반의 가까운 인연이 되는 것을 보살이 곧 알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온갖 고행(苦行)을 닦는 것이 대열반의 가까운 인연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네 가지 법을 여의고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나는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두어 생각하는 것이며, 넷째는 법대로 행을 닦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병에 걸렸을 때에 열병이거나 냉병이거나 허로(虛勞)거나 학질이거나 귀신의 독이거나 간에 용한 의원에게 가면 의원이 병의 증세를 따라 약을 일러 줄 것이다. 그 사람은 정성으로 의원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약을 지어 처방대로 먹을 것이며, 먹으면 병이 나아서 몸이 편안하게 된다.
병에 걸린 사람은 보살에 비유하고, 용한 의원은 선지식에 비유하고, 의원의 말은 방등경전에 비유하고, 의원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방등경전의 뜻을 생각하는 데 비유하고, 말한 대로 약을 짓는 것은 법대로 37조도품(助道品)을 수행하는 데 비유하고, 병이 나은 것은 번뇌를 멸하는 데 비유하고, 편안함을 얻음은
열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에 비유하였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왕이 법대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려고 지혜 있는 신하에게 방법을 물었더니, 신하들이 선왕의 예전 법을 이야기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지성으로 믿고 행하여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니, 원수와 적이 없어지고 백성들이 편안하여 걱정이 없었다.
선남자야, 왕은 보살에 비유하고 지혜 있는 신하는 선지식에 비유하고, 신하가 다스리는 법을 왕에게 말한 것은 12부경(部經)에 비유하고, 왕이 듣고 지성으로 믿고 행한 것은 보살이 12부경의 깊은 이치에 뜻을 두어 생각함에 비유하고, 법대로 나라를 다스림은 보살들이 법대로 수행하는 데 비유하였으니 곧 6바라밀이다. 6바라밀을 수행함으로써 원수와 적이 없어진 것은 보살이 번뇌의 나쁜 대적을 멀리 여의는 데 비유하고, 안락하게 된 것은 보살이 대열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데 비유하였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는데 선지식이 말하기를 ‘네가 수미산에 가면 병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유명한 약이 있기 때문이니 맛이 감로와 같으며, 그 약을 먹으면 온갖 병을 다 고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지성으로 그 말을 믿고 수미산자락에 가서 감로약을 구하여 먹고 병이 쾌차하여 몸이 안락하였다. 문둥병 걸린 것은 범부에게 비유하고, 선지식은 보살마하살에 비유하고 지성으로 믿은 것은 4무량심에 비유하고, 수미산은 8성도에 비유하고, 감로의 맛은 불성에 비유하고, 문둥병이 쾌차한 것은
번뇌를 멸한 데 비유하고, 안락함을 얻은 것은 열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데 비유했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여러 제자들을 두었는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이 사람은 밤낮으로 가르치고 게으르지 않았는데,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믿는 이도 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지만 항상 교화하고 싫어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선지식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과 방등경전을 믿는 사람들이다. 어째서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선지식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10악업을 여의고 10선업을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또 선지식은 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한다. 어떤 것을 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한다고 하는가? 자기가 살생하지 않고 다른 이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게 하며, 나아가 자기가 바른 소견을 행하고 다른 이에게 바른 소견을 가르친다.
만일 이렇게 하는 이라면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한 스스로 보리를 닦고 다른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자기가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많이 아는 것과 지혜를 닦아 행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계율을 가지고 보시하고 많이 알고 지혜를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지식이라고 함은 선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한 법이라고 하는가? 짓는 일이 스스로 즐겁기를 구하지 않고, 항상 중생을 위하여 안락을 구하며, 다른 이의 허물을 보고도 단점을 말하지 않고 입으로는 선한 말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허공에 있는 달이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는 점점 자라듯이 선지식도 그와 같아서
배우는 일에서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게 한다. 선남자야,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이는 본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의 지견이 없었더라도 문득 있게 되며, 구족하지 못한 이는 구족하게 된다. 왜냐하면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까닭이며, 친근함을 인하여 12부경의 깊고 묘한 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 12부경의 깊은 뜻을 듣는 이는 법을 듣는다고 할 것이며, 법을 듣는 것은 곧 대승의 방등경전이며, 방등경을 듣는 것을 참으로 법을 듣는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법을 듣는 이는 『대열반경』을 듣는 것이니
대반열반에 불성이 있지만 여래는 필경까지 열반에 들지 않으심을 듣는다. 그러므로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다고 하는 것이다.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것을 8성도라고 하며, 8성도로써 능히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끊으므로 법을 듣는다고 한다.
법을 듣는다고 함은 11공(空)을 말한다. 이 모든 공함으로써 온갖 법에 모양을 짓지 않는다. 법을 듣는다고 함은 초발심이라고 이름하며 나아가 구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 초발심을 인하여 대열반을 얻는 것이고 들음으로써 대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며, 닦음으로써 대열반을 얻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병난 사람이 의원의 가르침을 듣거나 약의 이름을 들음으로써 병이 낫는 것이 아니며, 약을 먹음으로써 병이 낫는 것이듯 12인연의 깊은 법을 들음으로써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두어 잘 생각함으로써 번뇌를 끊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셋째 마음을 가두어 생각함[第三繫念思惟]이라고 한다.
또 마음을 가두어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3삼매이니, 공삼매(空三昧)ㆍ무상(無相)삼매ㆍ
무작(無作)삼매이다. 공삼매는 25유에 대하여 한 가지 실다움도 보지 않는 것이며, 무작삼매는 25유에 대하여 원하는 일을 짓지 않는 것이며, 무상삼매는 열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빛깔 모양[色相]ㆍ소리 모양[聲相]ㆍ향기 모양[香相]ㆍ맛 모양[味相]ㆍ닿는 모양[觸相]ㆍ나는 모양[生相]ㆍ머무는 모양[住相]ㆍ멸하는 모양[滅相]ㆍ남자 모양[男相]ㆍ여자 모양[女相]이며, 이 3삼매를 닦는 것을 보살의 마음을 가두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러 법과 같이 수행한다고 하는가? 법과 같이 수행하는 것은 보시바라밀과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니, 5음ㆍ12입ㆍ18계의 진실한 모양을 알며, 성문ㆍ연각ㆍ부처님이 다 같이 한길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법이라고 함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이며, 나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으며,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괴롭지 않고 시끄럽지 않고 물러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대열반의 깊은 뜻을 아는 이는 부처님들께서 필경에 열반에 들지 않으심을 안다.
선남자야, 제일 진실한 선지식은 보살과 부처님 세존이시다 왜냐하면 항상 세 가지로 잘 제어하는 까닭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끝까지 부드러운 말[軟語]이며, 둘째는 끝까지 꾸짖음[呵責]이며, 셋째는 부드러운 말과 꾸짖음[軟語呵責]이다. 이런 뜻으로 보살과 부처님을 진실한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부처님과 보살은 큰 의원이므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병을 알고 약을 알아서 병에 맞추어 약을 주는 까닭이다. 용한 의원이 여덟 가지 의술을 잘 알아서 먼저 병의 증세를 보는데, 증세에 세 가지가 있다. 풍병[風]과 열병[熱]과 물병[水]이다. 풍병이 있는 이에게는 타락기름[酥油]을 주고 열병이 있는 이에게는 석밀(石蜜)을 주고 물병이 있는
이에게는 강즙[薑湯]을 주는데, 병의 근원을 알고 약을 주어서 낫게 하므로 용한 의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범부에게 세 가지 병이 있음을 아신다.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다. 탐욕의 병이 있는 이는 해골 모양을 관찰하게 하고, 성내는 병이 있는 이는 자비한 것을 관찰하게 하고, 어리석은 병이 있는 이는 12인연을 관찰하게 한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 고 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뱃사공이 사람을 잘 건네주는 까닭으로 훌륭한 뱃사공이라고 하는 것처럼,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나고 죽는 바다에서 중생을 건네주므로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또 부처님과 보살을 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의 근본을 구족하게 닦게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마치 설산은 가지각색 미묘한 약의 근본이 되듯이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선한 법의 근본이 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설산에 훌륭한 약이 있는데 이름이 사하(娑呵)1)이다. 그 약을 보는 사람은 목숨이 한량없고 모든 병이 없으며, 네 가지 독이 있더라도 상하지 못하고, 약에 닿는 이는 수명이 늘어서 120세를 살며, 생각하는 이는 숙명통(宿命通)을 얻는다. 왜냐하면 약의 힘 때문이다.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만일 보는 이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며, 네 가지 마군이 있더라도 산란하게 하지 못하고, 접촉하는 이는 목숨이 단명하지 않아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물러가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접촉한다 함은 부처님 곁에서 묘한 법을 듣는 것이다. 생각하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데, 이런 뜻으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향산 속에 아뇩달 연못이 있으며, 이 연못으로부터 4대하(大河)가 흐르니, 항하(恒河)와 신두하(辛頭河)와 사타하(私陀河)와 박차하(博叉河)이다. 세간 중생들이 항상 말하기를, ‘죄를 지은 이가 이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소멸된다고 한다. 이 말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이 밖에 어떤 것이 진실한가? 부처님과 보살들이 진실하니, 그 까닭은 만일 사람이 그를 친근히 하면 모든 죄악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이 땅에 있는 약풀이나 모든 숲이나, 곡식이나 감자나 꽃과 과일들이 가뭄을 만나서 말라죽을 때에 난다용왕과 우파난다용왕이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바다에서 나와 모든 숲과 온갖 곡식과 초목들을 다시 소생시킨다.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있는 선근이 소멸하려 할 때에 부처님과 보살이 자비한 마음으로 지혜 바다로부터 감로 비를 내려 중생들로 하여금 열 가지 선한 법을 도로 얻게 하신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용한 의원이 여덟 가지 의술을 잘 알면서 병난 사람만 보고, 문벌과 단정하고 추한 것이나 재물이 있고 없는 것을 보지 않으며 모두 다스리니 세상 사람들이 훌륭한 의원이라 하는 것처럼,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번뇌의 병이 있는 것만 보고, 문벌이나 단정하고 추한 것이나 재물이 있고 없음을 보지 않으시고 자비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법을 말씀 하시면 중생들이 듣고 번뇌의 병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말하여 선지식을 친근한 인연으로 대반열반(大般涅槃)에 가깝게 된다고 한다.
어찌하여 보살이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법을 들은 까닭으로 신근(信根)을 구족하고, 신근을 얻은 까닭으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즐거이 행하여 수다원과나, 나아가 부처의 과보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법을 얻는 것은 모두 법을 들은 인연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어떤 장자가 외아들을 다른 지방에 보내어 필요한 물건을 무역하게 하면서 도로가 통하고 막힌 데를 일러 주고, 또 경계하기를 ‘만일 기생 따위를 만나더라도 사랑하지 말라. 만일 사랑하면 몸을 망치고 생명이 위험하며 재물을 잃게 된다. 또한 나쁜 사람들도 사귀지 말라’고 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면 몸과 마음이 안락하고 재물을 많이 얻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연설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여러 중생과 사부대중에게 길이 통하고 막힌 것을 보여 주는데, 대중들이 법을 들은 까닭으로 나쁜 짓을 여의고 선한 법을 구족한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밝은 거울로 사람의 얼굴을 비치면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법을 듣는 거울도 그와 같아서 누구나 비치기만 하면 선한 일 나쁜 일이 분명히 나타나고 가리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선남자야, 마치 장사꾼이 보배 있는 섬에 가려 하면서 길을 모르는 것을 다른 이가 일러 주면, 그 사람이 그 말대로 보배 섬에 가서 한량없는 보배를 얻게 되듯이
모든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선한 곳에 가서 도의 보배를 얻으려 하면서 길을 모르는 것을 보살이 일러 주면 중생이 그 말을 따라 선한 곳에 가서 위없는 대반열반의 보배를 얻게 된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이 간다고 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술 취한 코끼리가 미친 듯이 포악하여 만나는 대로 살해하려고 하여도 코끼리 길들이는 사람이 굵은 쇠갈고리로 정수리를 찍으면 이내 길들어 사나운 성질이 없어지듯이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취하여 나쁜 짓을 하려 할 때에 보살이 법의 갈고리로 찍어서 머물게 하면 다시는 나쁜 짓을 하려는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이 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제자들이 전일한 마음으로 12부경을 들으면 5개(蓋)를 여의고 7각분(覺分)을 닦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7각분을 닦으므로 대반열반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법을 들은 까닭으로 수다원들이 공포를 떠난다. 왜냐하면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중병에 걸려서 매우 두려워하는 것을 사리불이 수다원에게 네 가지 공덕과 열 가지 안위(安慰)가 있음을 말하였더니, 그 말을 듣고 나서 두려움이 없어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이 간다고 한다. 왜냐하면 법의 눈을 뜨게 하는 까닭이다. 세상에 세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눈이 없고 둘째는 눈이 하나이고 셋째는 눈이 둘이다. 눈이 없는 이는 항상 법을 듣지 못하는 이며, 한 눈 있는 이는 잠깐은 법을 듣더라도 마음이 전일하지 않은 이며, 두 눈이 있는 이는 전심으로 법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하는 이다. 법을 듣는 데
세 가지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뜻으로 말하기를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내가 예전에 구시나(拘尸那)성에 있을 때에 사리불이 병에 걸렸으므로 아난에게 유촉하면서 법을 연설하였더니, 사리불이 그 소문을 듣고 4부 제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평상을 듣고 부처님 계신 데로 가자. 내가 법을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때 4부 제자가 평상을 들고 나에게 와서 법을 듣게 하였고, 법을 들은 힘으로 병이 나아서 몸이 편안하였다. 이런 뜻으로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보살이 생각한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가? 이 생각으로 마음이 해탈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항상 5욕락에 얽히는 것을 생각하는 까닭으로 해탈하게 된다.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네 가지 법에 뒤바뀌게 되었으나, 생각하는 까닭으로 모든 법이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부정한 줄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고 나서 네 가지 뒤바뀐 것이 즉시 끊어진다.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온갖 법이 네 가지 모양이 있으니, 무엇이 넷인가? 첫째는 나는 모양[生相]이고, 둘째는 늙는 모양[老相]이고, 셋째는 병드는 모양[病相]이고, 넷째는 없어지는 모양[滅相]이다. 이 네 가지 모양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범부로부터 수다원에 이르도록 큰 고통을 내게 하는데, 만일 마음을 가두어 잘 생각하면 비록 이 네 가지를 만나더라도 고통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온갖 선한 법이 모두 생각[思惟]을 말미암아 얻어진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더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만일 중생이 불ㆍ법ㆍ승 삼보가 바뀌지 않음을 믿고 공경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두어 생각한 인연의 힘으로 온갖 번뇌를 끊은 것이다. 이런 뜻으로 생각하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보살이 법대로 수행한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나쁜 법을 끊어 버리고 선한 법을 닦는 것을 일러 보살이 법대로 수행한다고 한다. 또 어떻게 법대로 수행하는가? 온갖 법이 공하여 있는 것이 아니며,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부정한 줄을 보고, 이렇게 보았으므로 몸과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율을 범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일러 보살이 법대로 수행한다고 한다.
또 어떤 것을 법대로 수행한다고 하는가? 수행하는 것이 두 가지이다. 진실한 것과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하지 않다고 함은 열반ㆍ불성ㆍ여래ㆍ 법ㆍ승가ㆍ실상ㆍ허공의 모양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진실하다고 하는가? 열반ㆍ불성ㆍ여래ㆍ법ㆍ승가ㆍ실상ㆍ허공의 모양을 아는 것을 진실하다고 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 열반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가? 열반의 모양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다함[盡]이며, 둘째는 선한 성품[善性]이며, 셋째는 진실함[實]이며, 넷째는 참됨[眞]이며, 다섯째는 항상함[常]이며, 여섯째는 즐거움[樂]이며, 일곱째는 나[我]이며, 여덟째는 깨끗함[淨]이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해탈이며, 둘째는 선한 성품이며, 셋째는 진실하지 않음이며, 넷째는 참되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무상함이며, 여섯째는 즐겁지 않음이며, 일곱째는 내가 없음이며, 여덟째는 부정함이다. 또 여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해탈이며, 둘째는 선한 성품이며, 셋째는 진실하지 않음이며 넷째는 참되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안락함이며 여섯째는 청정함이다. 만일 중생이 세속의 도를 의지하여 번뇌를 끊었으면, 이런 열반은 여덟 가지 해탈이 있으나 진실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항상하지 않은 까닭이다. 항상함이 없으므로 진실함이 없고, 진실함이 없으므로 참되지 않으며, 비록 번뇌를 끊었으나 다시 일어나므로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부정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 해탈의 여덟 가지 일이라고 한다.
무엇을 여섯 가지 모양이라고 하는가? 성문과 연각은 번뇌를 끊었으므로 해탈이라고 하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진실하지 않다고 한다. 진실하지 않으므로 참되지 않다는 것이며, 오는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항상함이 없고 무루한 8성도를 얻었으므로 안락하고 청정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렇게 아는 것은 열반을 아는 것이나 불성ㆍ여래ㆍ법ㆍ승가ㆍ실상ㆍ허공의 모양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불성을 안다고 하는가? 불성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항상함이며, 둘째는 깨끗함이며, 셋째는 실다움이며, 넷째는 선함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보는 것이며, 여섯째는 참됨이다. 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증득할 만함[可證]이며, 다른 여섯은 위와 같다. 이것을 일러 보살이 불성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여래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가? 여래라고 함은 깨달음과 선함과 항상함과 즐거움과 나와 깨끗함과 해탈함과 진실함과 도를 보임과 볼 수 있음이다.
이런 것을 일러 보살이 여래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법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가? 법이라고 함은 선한 것 선하지 못한 것과, 항상한 것 항상하지 않은 것과, 즐거운 것 즐겁지 않은 것과, 내가 있는 것 내가 없는 것과, 깨끗한 것 부정한 것과, 아는 것 알지 못하는 것과, 이해할 것 이해하지 못할 것과, 참된 것 참되지 못한 것과, 닦는 것 닦지 못한 것과, 사승(師承)할 것 사승하지 못할 것과, 진실한 것 진실하지 않은 것 따위이다. 이런 것을 일러 보살이 법의 모양을 안다고 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승가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가? 승가라고 함은 항상하고 즐겁고 내가 있고 깨끗하며 제자의 모양과 볼 수 있는 모양과 선하고 참되고 진실하지 않음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문이 부처님의 도를 얻은 까닭이며, 또 참되다는 것은 법의 성품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런 것을 말하여 보살이 승가의 모양을 안다고 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실상을 안다고 하는가? 실상이라고 함은 항상하고 무상한 것, 즐겁고 즐겁지 않은 것, 내가 있고 내가 없는 것, 깨끗하고 부정한 것,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 있는 것 없는 것, 열반이고 열반 아닌 것, 해탈이고 해탈 아닌 것, 알고 알지 못하는 것, 끊고 끊지 못하는 것, 증득하고 증득하지 못하는 것, 닦고 닦지 않는 것, 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니 이것은 실상이라 이름하지만, 열반ㆍ불성ㆍ여래ㆍ법ㆍ승가ㆍ허공은 아니다. 이런 것을 일러 보살이 대반열반을 닦음으로 인하여 열반ㆍ불성ㆍ여래ㆍ법ㆍ승가ㆍ실상ㆍ허공 등의 차별한 모양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으면 허공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님과 보살이 비록 다섯 가지 눈이 있지만 보지 않는 까닭이며, 혜안(慧眼)으로 보는 것이니, 혜안으로 보는 것은 볼 수 있는 법이 아니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아무것도 없는 데를 허공이라고 한다면, 이런 허공을 진실하다고 하며, 진실하므로 항상 없다 이름하며, 항상 없으므로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도 없다.
선남자야, 공은 없는 법을 이름한 것이며, 없는 법은 공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물건이 없는 것을 공이라고 이름하듯이, 허공의 성질도 그와 같아서 있는 물건이 없는 데를 허공이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중생의 성품과 허공의 성품이 모두 실다운 성품이 없다. 왜냐 하면 마치 사람들이 있는 물건을 없애 버리고 그런 뒤에 허공을 만든다 말하는데, 허공은 실제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없는 까닭이니, 있는 것이 없으므로 허공도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허공의 성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상하다 할 것이니, 만일 무상하다면 허공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허공은 색(色)도 없고 막힘[礙]도 없고 항상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허공의 성질을 말하여 다섯째 요소[第五大]라고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허공은 실로 성품이 없는 것을 광명이 비치므로 허공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허공은 없는 것이다. 마치 세상법[世諦]은 실로 제 성품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세상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열반의 자체도 그와 같아서 머무는 곳이 없고, 오직 모든 부처님의 번뇌를 끊은 곳[斷煩惱處]이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다. 열반이 즐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감각하여 즐거움[受樂]이 아니고, 가장 묘하고 적멸(寂滅)한 낙이다.
부처님 여래께 두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적멸한 낙[寂滅樂]이며, 둘째는 깨달아 아는 낙[覺知樂]이다. 실상의 체에는 세 가지 낙이 있으니, 첫째는 감각하는 낙[受樂]이고 둘째는 적멸한 낙[寂滅樂]이며 셋째는 깨닫는 낙[覺知樂]이다. 불성은 오직 한 가지 낙이니 마땅히 볼 수 있는 까닭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을 보리락(菩提樂)이라고 이름한다.”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번뇌가 끊어진 데를 열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예전에 처음으로 부처님의 도를 이루려고 니련선하(尼連禪河) 가에 가셨을 때에, 마왕이 권속들을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말하기를 ‘세존이여, 열반하실 때가 되셨는데 어찌하여 열반에 들지 않으십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왕이여, 나에게는 지금 많이 아는 제자로서 계율을 잘 지니고 총명하고 지혜 있는, 중생을 교화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번뇌가 끊어진 데가 열반이라고 한다면 여러 보살들은 한량없는 겁 전에 이미 번뇌를 끊었는데, 어찌하여 열반이라고 하지 않으며, 다 같이 끊었는데 어찌하여 부처님만 열반이 있고 보살에게는 없다고 하십니까? 만일 번뇌를 끊었어도 열반이 아니라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에 생명(生名) 바라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지금 이 몸이 곧 열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비사리(毘舍離)성에 계실 때에 마왕이 여쭙기를 ‘여래께서 예전에는 많이 알고 계율을 잘 지니고 총명하고 지혜가 있어, 중생을 교화할 만한 제자가 없어서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구족하였는데 왜 열반에 들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더디다는 생각을 내지 마라. 지금부터 석 달 뒤에는 내가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멸도(滅度)함이 열반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석 달 뒤에 열반에 든다고 하셨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번뇌를 끊음이 열반이라면 여래께서 처음 도량에 계실 때에 보리수 아래서 번뇌를 끊으신 때가 곧 열반인데, 어찌하여 앞으로 석 달 뒤에 열반에 드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때가 열반이라고
하면 어찌하여 구시나성에서 여러 역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벽녘에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까? 여래께서는 진실하신데 어찌하여 허망한 말씀을 내십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여래가 광장설(廣長舌)을 얻었다면 여래는 한량없는 겁 전부터 허망한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하는 말은 진실하여서 허망하지 않다. 선남자야, 그대의 말과 같이 파순이 예전에 나에게 청하여 열반에 들라고 하였다면, 선남자야, 이 마왕은 열반의 일정한 모양을 진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순의 생각엔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을 열반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이가 말을 하지 않고 아무 하는 일이 없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은 죽은 자와 다름이 없다’고 하듯이, 파순도 그와 같아서 여래가 중생을 교화하지도 않고 잠자코 말이 없는 것으로써 여래가 열반에 든다고 생각하였다.
선남자야, 여래는 불ㆍ법ㆍ승 삼보가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항상 머무는 법과 청정한 법이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부처님도 ‘부처나 불성이나 열반이 차별한 모양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오직 항상하고 변하지 않음이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도 열반과 실상이 차별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항상 있고 진실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그때 나의 성문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구섬미(拘睒彌)국의 나쁜 비구들은 나의 가르침을 어기고 계율을 범하며 깨끗하지 않은 물건을 받아
이양(利養)을 구하면서 재가의 사람들을 향하여 스스로 칭찬하기를 ‘나는 무루(無漏)를 얻었으니 수다원과와 나아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를 헐뜯어 욕하며 불ㆍ법ㆍ승 삼보와 계율과 화상도 공경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내 앞에서 이런 물건은 받으라고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말하지만 나는 허락한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도 그들은 나와 반대로 이런 것은 참으로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한다.
이런 나쁜 사람이 나의 말을 믿지 않기에, 내가 파순에게 말하기를 ‘너는 궁금하게 기다리지 마라. 이제부터 석 달 뒤에 열반에 들겠다’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이러한 나쁜 비구들로 인하여 성문의 배우는[受學] 제자들로 하여금 나의 몸을 보지 못하고 나의 법을 듣지 못하게 하여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보살들은 내 몸을 보고 내 법을 들으므로 내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며, 성문 제자들이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실로 열반에 들지 않는다.
선남자야, 나의 성문 제자들이 만일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며 마군의 도당(徒黨)이며, 나쁜 소견을 가진 사람이며 바른 소견이 아니다. 여래가 열반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 사람이 참으로 나의 제자이며 마군의 도당이 아니며, 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며 나쁜 무리가 아니다.
선남자야, 나는 본래부터 제자들 중에서 ‘여래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은 열반에 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선남자야, 어떤 장자가 여러 아들을 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아들들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자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지만, 아들들이 잘못 생각하여 죽은 줄로 아는 것이다.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나를 보지 못하므로 여래가 구시나성의 한 쌍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실로 열반에 들지 않은 것을 성문 제자들이 열반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밝은 등불을 어떤 사람이 가렸을 때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하는데, 등불은 실제로는 꺼진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해서 꺼졌다고 생각하듯이,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비록 혜안이 있으면서도 번뇌에 덮여서 마음이 뒤바뀌었으므로 참된 몸[眞身]을 보지 못하고 멸도하였다는 생각을 낸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멸도한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배냇소경은 해와 달을 보지 못하며, 해와 달을 보지 못하므로 낮과 밤이 밝고 어두운 줄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해와 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와 달은 진실로 있지만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탓으로 잘못된 생각을 내어 해와 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성문 제자들도 그와 같아서 저 배냇소경과 같이 여래를 보지 못하므로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는데, 여래는 실로 열반에 들지 않았으며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이다.
선남자야, 안개와 구름이 해와 달을 가렸을 때에 어리석은 사람은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해와 달은 실제로는 있는 것이며 구름이 가렸으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문 제자도 그와 같아서 번뇌가 지혜 눈을 덮었으므로 여래를 보지 못하고,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는 여래가 젖먹이 아기의 행을 나타내는 것이며 멸도한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염부제에 해가 졌을 때에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흑산(黑山)이 가린 까닭이며, 해는 본래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들이 보지 못하므로 졌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다. 성문 제자도 그와 같아서 번뇌의 산이 가려서 내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가 멸도한다는 생각을 내지만 나는 실로 끝까지 멸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비사리성(毗舍離城)에서 파순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석 달 뒤에 내가 열반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선남자야, 여래는 가섭보살이 석 달 뒤에 선근이 성숙할 것을 미리 보았으며, 또 향산의 수발다라(須跋陀羅)가 안거를 마치고 나서 나에게 올 것을 알았으므로 마왕 파순에게 석 달 뒤에 열반에 든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러 역사가 있으니 그 수가 500이며, 석 달을 마치고 나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파순에게 석 달 뒤에 열반에 들 것이라고 말하였다. 선남자야,
순다(純陀)2)와 500명의 리차(梨車)3)와 암라과녀(菴羅果女)4)가 석 달 뒤에 위없는 보리를 이루려는 선근이 성숙할 것이므로, 내가 파순에게 석 달 뒤에 열반에 들겠다고 말하였다. 선남자야, 수나찰다(須那刹多)5)가 니건자(尼乾子)6) 외도를 친근히 하면서, 내가 12년 동안 법을 말하였으나 나쁜 소견으로 믿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의 나쁜 소견의 뿌리가 석 달 뒤에 뽑힐 것을 알았으므로 내가 파순에게 말하기를 석 달 뒤에 열반에 들겠다고 하였다.
선남자야, 무슨 인연으로 내가 예전에 니련선하 가에서 파순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지혜 있는 제자가 없다. 그래서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는가? 나는 다섯 비구들을 위하여 바라나에서 법의 수레를 굴리려고 했기 때문이며, 또 야사(耶奢)7)ㆍ부나(富那)8)ㆍ비마라사(毗摩羅闍)9)ㆍ교범바제(憍梵波提)10)ㆍ수바후(須婆睺)11) 등의 다섯 비구를 위해서이며, 또 욱가(郁伽)12) 장자 등 50사람을 위해서이며,
또 마가다국의 빈바사라왕 등 한량없는 세간 사람과 천상 사람들을 위해서이며, 또 우루빈라 가섭(優樓頻螺迦葉)의 제자 500비구를 위해서이며, 또 나제가섭(那提迦葉)ㆍ가야가섭(伽耶迦葉)의 형제 두 사람과 그의 500제자를 위해서이며, 또 사리불과 목건련 등 250비구를 위해서 미묘한 법의 수레를 운전하려고 마왕 파순에게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선남자야, 열반이라 이름하고 대열반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하고 대열반이라 이름하지 않는가? 불성을 보지 못하고 번뇌만 끊은 것은 열반이라 하고 대열반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항상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즐거움과 깨끗함만 있다.
이런 뜻으로 번뇌를 끊었으나 대열반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을 보고 번뇌를 끊었으면 대반열반이라고 이름하는데, 불성을 보았으므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한다. 이런 뜻으로 번뇌를 끊은 것도 대반열반이라고 일컫는다.
선남자야, 열(涅)은 아니라는[不] 말이며 반(槃)은 조직하다[織]는 말이니, 조직하지 않는다는 뜻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또 덮는다[覆]는 뜻이니, 덮이지 않았다는 뜻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또 간다 온다[去來]는 뜻이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취(取)하는 뜻이니, 취하지 않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일정치 않다[不定]는 뜻이니 선정이 일정치 않음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새 것과 낡은 것[新故]이란 말이니, 새 것과 낡은 것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장애[障]란 말이다. 장애가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우루가(優樓迦)와 가비라(迦毗羅)의 제자들이 말하기를 반은 모양[相]이란 뜻이니, 모양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반은 있다[有]는 말이니, 있지 않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화합(和合)이라는 말이니 화합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반은 괴롭다[苦]는 말이니, 괴로움이 없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번뇌를 끊은 것은 열반이라 하지 않고 번뇌가 생기지 않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부처님 여래께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시므로 열반이라고 이름하며, 가진 지혜가 법에 장애되는 것이 없음을 여래라고 한다. 여래는 범부도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아니니, 이름을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여래의 몸과 마음과 지혜가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 세계에 가득하여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허공이라고 하며, 여래가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으므로 실상이라고 한다. 이런 뜻으로 여래는 실로 끝까지 열반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일러 보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일곱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다시 선남자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여덟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아서 다섯 가지를 끊어 버리고, 다섯 가지를 멀리 여의고, 여섯 가지를 성취하고, 다섯 가지를 익히고, 한 가지를 수호하고, 네 가지를 친근하고 한결같은 실상을 믿고 순종하여 마음이 잘 해탈하고 지혜가 잘 해탈한다.
선남자야, 무엇을 말하여 보살이 다섯 가지를 끊어 버린다고 하는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음(陰)을 말한다. 음은 무슨 뜻인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가 서로 계속하여 무거운 짐을 여의지 못하게 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하여 3세에 포섭되는데, 그 진실한 뜻을 구하여도 찾을 수 없으므로 음이라고 이름한다. 보살마하살은 비록 색음(色陰)을 보아도 모양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 가지 색 중에서 성품을 구하여도 찾을 수 없지만 세계를 지어내므로 음이라고 한다. 수음(受陰)에 108이 있으며, 비록 수음을 보아도 애초부터 수음의 모양이 없다. 왜냐하면 수음이 비록 108이지만 이치로는 일정한 실제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음을 보지 못하며, 상음(想陰)과 행음(行陰)과 식음(識陰)도 그와 같다. 보살마하살은 5음이 번뇌를 내는 근본임을 분명하게 보았으므로 방편으로 끊어 버린다.
선남자야, 보살이 어떻게 다섯 가지를 멀리 여의는가? 다섯 가지 소견을 말한다. 첫째는 몸이란 소견[身見], 둘째는 한쪽에 집착하는 소견[邊見], 셋째는 사특한 소견[邪見], 넷째는 계에 집착하는 소견[戒取見], 다섯째는 소견에 집착하는 소견[見取見]이다. 이 다섯 가지 소견으로 인하여 62견해를 일으키며, 이 모든 견해로 인하여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방비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살이 여섯 가지를 성취하는가? 6념처(念處)를 말함이니, 첫째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둘째는 법을 생각하고, 셋째는 승가를 생각하고, 넷째는 하늘을 생각하고 다섯째는 보시를 생각하고 여섯째는 계율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보살이 여섯 가지를 성취한다고 한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다섯 가지를 익힌다고 하는가? 다섯 가지 선정을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아는 선정[知定]이고, 둘째는 고요한 선정[寂定]이고 셋째는 몸과 마음이 쾌락한 선정이고
넷째는 쾌락이 없는 선정이고 다섯째는 수릉엄정(首楞嚴定)이다. 이 다섯 가지 선정을 익히면 대열반에 가깝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한 가지 일을 수호한다고 하는가? 보리심을 말한다. 보살마하살이 항상 보리심을 수호하는데, 세상 사람이 외아들을 수호하듯 하며, 외눈박이가 외눈을 수호하듯 하며, 거친 벌판에 가는 이가 길잡이를 수호하듯 하여
보살이 보리심을 수호함도 그와 같다. 이렇게 보리심을 수호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므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구족하게 갖는 것이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한 가지 법을 수호한다.
어떤 것을 보살이 네 가지를 친근히 한다고 하는가? 4무량심을 말함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크게 인자함[大慈]이며, 둘째는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이며, 둘째는 크게 기뻐함[大喜]이며, 셋째는 크게 버림[大捨]이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인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마음을 가두어 친근히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한결같은 실상으로 믿고 순종한다고 하는가? 보살은 모든 중생이 한 길로 돌아감을 분명히 안다. 한 길은 대승인데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셋으로 나눈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믿고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여 보살이 마음이 잘 해탈한다고 하는가?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마음을 아주 끊은 까닭이다.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마음이 해탈하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여 보살이 지혜가 잘 해탈한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을 막힘이 없이 안다.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고 한다. 지혜가 해탈하므로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을 이제 듣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이르지 못한 데에 이제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마음이 해탈한다고 함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얽매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마음의 본래 성품은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번뇌에 속박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얽매인 것이 아닌데, 무엇을 말하여 마음이 해탈한다고 하겠습니까?
마음의 본 성품이 탐욕 따위 번뇌에 얽히는 것이 아닌데, 무슨 인연으로 속박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사람이 뿔을 짜는 것 같아서 그것에는 우유의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공력을 들여도 우유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우유를 짜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공을 적게 들여도 우유가 많이 나는 것인데, 마음도 그와 같아서 본래부터 탐욕이 없었는데 지금엔들 어찌 있겠습니까? 만일 본래는 없던 탐욕이 뒤에 생긴다고 하면, 부처님과 보살이 본래는 탐욕이 없었으나 지금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석녀(石女)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니, 아무리 한량없는 공력(功力)의 인연을 들이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본래 탐욕이 없으므로, 아무리 여러 인연을 짓더라도 탐욕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젖은 나무는 아무리 비벼도 불을 낼 수 없습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비벼도 탐욕이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탐욕의 번뇌가 마음을 얽어맬 수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마치 모래를 짜서는 기름을 얻을 수 없듯이 마음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짜더라도 탐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탐욕과 마음은 두 가지 이치가 각각 다른데, 설사 탐욕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말뚝을 허공에 박아서는 마침내 박히게 할 수 없듯이, 탐욕을 마음에 두는 것도 그와
같아서 가지각색 인연을 쓰더라도 탐욕으로 하여금 마음을 얽어맬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마음에 탐욕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과 보살이 어찌하여 허공중에 가시[刺]를 뽑지 못합니까? 세존이시여, 지난 세상의 마음은 해탈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오는 세상의 마음도 해탈이 없으며 지금 세상의 마음은 도와 함께하지 않았으니, 어느 세상의 마음을 해탈이라 이름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지나간 등불은 어둠을 멸하지 못하고, 오는 날의 등불도 어둠을 멸하지 못하고, 지금의 등불도 어둠을 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밝음과 어둠은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은데, 어떻게 마음이 해탈한다고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탐욕은 있기도 한 것이니 만일 탐욕이 없다면 여인을 볼 때에 탐욕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 만일 여인으로 인하여 탐욕이 생긴다면 이 탐욕은 참으로 있다고 할 것이며, 탐욕이 있기 때문에 3악도에 떨어질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은 여인의 그림만 보고도 탐욕을 내며, 탐욕을 내는 탓으로 가지각색 죄를 짓습니다. 만일 본래 탐욕이 없다면 어찌하여 그림을 보고 탐욕을 내며,
만일 마음에 탐욕이 없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고 합니까? 만일 마음에 탐욕이 있다면 어찌하여 모양을 보고 나서야 탐욕이 생기고 보지 않을 때에는 생기지 않습니까? 내가 현재에 나쁜 과보를 보는 것은 탐욕이 있기 때문인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도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중생이 몸은 있으나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모든 범부들은 부질없이 나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며, 비록 나라는 생각을 가지더라도 세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데, 어찌하여 탐욕이 있는 이는 여인의 형상이 없는 데에 여인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3악도에 떨어집니까?
세존이시여,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내지만 불의 성품이 모든 인연 중에 있는 것이 아닌데, 무슨 인연으로 불이 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탐욕도 그와 같아서 빛 가운데 탐욕이 없고 향기ㆍ맛ㆍ감촉ㆍ법 중에도 탐욕이 없는데, 어찌하여 빛ㆍ향기ㆍ맛ㆍ감촉ㆍ법에 탐욕을 냅니까? 만일 모든 인연 중에 탐욕이 없다면 어찌하여 중생만이 탐욕을 내고 부처님과 보살은 내지 않습니까?
세존이시여, 마음은 일정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만일 일정하다면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 없을 것이며, 만일 일정하지 않다면 어떻게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겠습니까? 탐욕도 일정하지 않으니, 만일 일정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탐욕을 인하여 3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탐하는 이와 경계가 둘이 다 일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같이 한 가지 빛을 반연하되 혹은 탐욕을 내고 혹은 성냄을 일으키고 혹은 어리석음을 냅니다. 그러므로 탐하는 이와 경계가 모두 일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두 가지가 모두 일정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보살이 대열반을 닦으면 마음이 해탈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마음은 탐욕의 번뇌에 얽히는 것도 아니고 얽히지 않음도 아니며, 해탈함도 아니고 해탈하지 않음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어떤 외도들이 말하기를 ‘인과 연이 화합하면 결과가 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인연 가운데 본래 날 성품이 없는데 능히 난다고 하면, 허공도 날 것이 없지만 결과를 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내지 않으니 인이 아닌 까닭이다. 모든 인연 중에 본래 결과의 성품이 있으므로 합하여 모이면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마치 제바달(提婆達)이 담을 쌓으려면 진흙을 취하고
채색을 취하지 않으며, 그림을 그리려면 채색을 취하고 초목을 취하지 않으며, 옷을 만들려면 천을 취하고 흙이나 나무는 취하지 않으며, 집을 지으려면 흙을 취하고 천을 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취함으로써 그 가운데 결과를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하며, 결과를 냄으로써 인연 가운데 먼저 결과의 성품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성품이 없다면 한 물질에서 모든 물질이 생겨야 한다. 만일 취할 만하며 지을 수 있고 낼 수 있다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결과가 있었을 것이며, 만일 결과가 없다면 사람들이 취하지도 않고 짓지도 못하고 내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허공은 취할 것도 없고 지을 수도 없으므로 온갖 만물을 내는 것이니, 인이 있는 까닭이다.
니구타(尼拘陀) 열매는 니구타나무에 있고, 우유에 제호가 있으며 실에는 천이 있고, 진흙에는 질그릇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선남자야, 모든 범부들이 무명 때문에 눈이 멀어서 이런 결정적인 말을 하여 색에는 집착하는 뜻이 있고, 마음에는 탐하는 성품이 있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범부의 마음에 탐하는 성품도 있고 해탈의 성품도 있어서, 탐할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탐욕을 내고 해탈할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해탈한다’고 한다. 비록 이런 말을 하나 뜻이 옳지 않다.
어떤 범부는 또 말하기를 ‘온갖 인 가운데는 모두 과가 없다.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세(微細)하고 둘째는 굵은 것[麤大]이다. 미세한 것은 항상하고 굵은 것은 무상하다. 미세한 인으로부터 변하여 굵은 인이 되고, 이 굵은 인으로부터 다시 과를 이루는데, 굵은 것이 무상하므로 과도 무상하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어떤 범부는 말하기를 ‘마음도 인이 없고 탐욕도 인이 없는데 시절을 인하여 탐욕의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이런 무리는 마음의 인연을 알지 못하므로 여섯 갈래로 바퀴 돌 듯 하면서 생사를 받는다.
선남자야, 마치 개를 묶어서 기둥에 매어 두면 종일토록
기둥을 돌고 벗어나지 못하듯이 모든 범부도 그와 같아서 무명에 얽혀 나고 죽는 기둥에 매여 있으면서 25유를 돌고 벗어나지 못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뒷간에 빠졌다가 나와서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어떤 이가 병이 나았다가 다시 병드는 것과 같으며, 길 가는 사람이 허허벌판을 만났다가 지나가고 나서 다시 오는 것과 같으며, 또 깨끗이 씻었다가 다시 흙을 칠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범부도 그와 같아서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해탈하였으나, 비비상처(非非想處)를 해탈하지 못하고 다시 3악도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모든 범부들이 과보만을 관찰하고 인연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개가 흙덩이만 쫓아가고 사람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범부들도 그와 같아서 과보만 보고 인연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비상처로부터 다시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선남자야, 부처님과 보살들은 마침내 인 가운데 과가 있다거나, 인 가운데 과가 없다거나, 인 가운데 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거나, 인 가운데 과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거나를 결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인 가운데 결정된 과가 있었다거나, 결정된 과가 없었다거나, 결정된 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다거나, 결정된 과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았다고 말하면, 이런 사람은 모두 마군의 무리로서 마군에게 속했으니, 곧 애욕의 사람이다. 이렇게 애욕에 빠진 사람은 생사의 속박을 영원히 끊을 수 없으며, 마음의 모양과 탐욕의 모양을 알지 못한다.
선남자야, 부처님과 보살들은 중도(中道)를 나타내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말하면 눈을 인하고 색(色)을 인하고 밝음[明]을 인하고 마음[心]을 인하고 생각함[念]을 인하여 알음알이[識]가 생기지만, 이 알음알이는 반드시 눈에나 빛에나 밝음에나 마음에나 생각하는 데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인연으로부터 나는 것이므로 있다고 이름하고, 제 성품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가 말하기를 모든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선남자야, 부처님과 보살들은 마침내 마음에 깨끗한 성품과 부정한 성품이 있다고 결정된 말을 하지 않으니, 깨끗한 마음이나 부정한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는 까닭이다. 인연을 따라 탐욕을 내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 하고, 본래 탐욕의 성품이 없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남자야, 인연을 따르므로 마음에 탐욕이 생기고, 인연을 따르므로 마음이 해탈한다. 선남자야, 인연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는 생사를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대열반을 따르는 것이다.
선남자야, 인연이 있으므로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기도 하며, 혹은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기도 하며, 혹은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것이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는 것인가? 선남자야, 만일 범부가 탐심을 끊지 못하고 탐심을 닦으면, 이런 사람은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마음이 탐욕과 함께 멸한다고 한다. 모든 중생들도 탐심을 끊지 못하여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마음이 탐욕과 함께 멸한다.
마치 욕계의 중생이 모두 초지미선(初地味禪)이 있으므로 닦거나 닦지 않거나 간에 항상 성취할 것이고 인연을 만나면 곧 얻는 것과 같다. 인연이라고 함은 화재(火災)를 말하는데, 모든 범부도 그와 같아서 닦거나 닦지 않거나 간에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마음이 탐욕과 함께 멸한다. 왜냐하면 탐욕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 것인가? 성문 제자들이 인연이 있으므로 탐심을 내고, 탐심을 두려워하여 백골관(白骨觀)을 닦는다. 이것을 일러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성문들이 4과를 증득하지 못하였을 때에 인연이 있어 탐심을 내고, 4과를 증득할 때에 탐심이 멸한다. 이것을 일러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고 하며, 보살마하살이 부동지(不動地)를 얻을 때에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이 탐심을 끊고도 중생을 위하여 탐욕이 있는 듯이 나타내는 것이니, 일부러 나타내므로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선한 법을 물어서 구족하게 성취하게 한다. 이것을 일러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한다고 한다.
어떤 것을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아라한과 연각과 부처님과 부동지를 제외한 보살들이다. 이것을 일러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과 보살들이 반드시 마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다거나 본래 부정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 마음은 탐욕의 번뇌와 화합하지 않고 성내는 일이나 어리석음과도 화합하지 않았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해와 달이 연기나 티끌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아수라에 의해 가리게 되면, 이런 인연으로 중생들이 보지 못한다.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해와 달의 성품이 그 다섯 가지 가림과 화합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인연으로써 탐욕을 내는데, 중생들이 마음이 탐욕과 화합하였다고 말하지만 이 마음의 성품은 진실로 화합하지 않았다. 만일 탐심이 곧 탐욕의 성품이라 하고, 탐하지 않는 것이 탐하지 않는 성품이라면, 탐하지 않는 성품은 탐욕이 되지 않고 탐욕의 마음은 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탐욕의 번뇌가 마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보살은 영원히 탐욕의 번뇌를 깨뜨렸으므로 마음이 해탈하였다고 한다.
모든 중생들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탐욕을 내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는다. 선남자야, 마치 저 설산의 험준한 곳에는 사람이나 원숭이가 모두 가지 못하며, 어떤 곳에는 원숭이는 가지만 사람은 가지 못하며, 어떤 곳에는 사람과 원숭이가 모두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사람과 원숭이가 모두 가는 곳에 사냥꾼이 억센 끈끈이를 널쪽 위에 놓아두고 원숭이를 잡는데, 원숭이가 어리석어서 손으로 건드리면 손이 들러붙고 손을 떼기 위하여 발로 밟으면 발이 또 들러붙고, 발을 떼려고 입으로 씹으면 입이 들러붙어서, 이와 같이 다섯 군데를 모두 떼지 못하게 되면 사냥꾼이 몽둥이에 꿰어 메고 집으로 돌아온다. 설산의 험준한 데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얻는 바른 도에 비유하고, 원숭이는 범부에 비유하고, 사냥꾼은 마왕 파순에게 비유하고, 끈끈이는 탐욕 번뇌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이나 원숭이가 모두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범부와 마왕 파순이 모두 행하지 못하는 데 비유하고, 원숭이는 가고 사람은 못 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외도와 지혜 있는 이에게 비유하였으니, 마군들이 5욕으로도 속박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과 원숭이가 모두 가는 데라고 하는 것 모든 범부와 파순이 나고 죽는 가운데에 항상 있으면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범부들이 5욕락에 얽매이면 파순이 데려가는데, 사냥꾼이 원숭이를 붙들어 가지고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한 나라의 임금이 자기의 나라 안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안락하지만 다른 나라에 가면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게 된다.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만일 자기의 경계에 있어서는 안락하지만 다른 경계에 이르게 되면 마군을 만나 괴로움을 받는다. 자기의 경계는 4념처(念處)를 말하며, 다른 경계는 5욕락을 말한다.
어떤 것을 마군에게 얽매인다고 하는가? 중생들이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고, 항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보며, 괴로움을 즐겁다고 보고 즐거움을 괴롭다고 보며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보고 깨끗함을 부정하다고 보며, 내가 없는 것을 내가 있다고 보고, 나인 것을 내가 없다고 보며, 진실한 해탈이 아닌 것을 허황되게 해탈이라고 보고, 진실한 해탈을 해탈이 아니라고 보며, 승(乘)이 아닌 것을 승이라고 보고 승인 것을 승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사람을 일러서 마군에게 얽매였다고 하며, 마군에게 얽매인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만일 모든 법에 공통한 모양과 제각기 다른 모양이 참으로 있다고 보는 이는 이 사람이 색(色)을 볼 때에는 색이란 모양을 짓고, 나아가식(識)을 볼 때에는 식이라는 모양을 지으며, 남자를 보면 남자란 모양을 짓고 여자를 보면 여자란 모양을 지으며, 해[日]를 보면 해라는 모양을, 달을 보면 달이란 모양을, 세월[歲]을 보면 세월이라는 모양을, 음(陰)을 보면 음이라는 모양을, 입(入)을 보면 입이라는 모양을, 계(界)를 보면 계라는 모양을 짓는다. 이렇게 보는 이는 마군에게 얽매였다 하며, 마군에게 얽매인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만일 내가 곧 색이며 색 가운데 내가 있다, 내 가운데 색이 있다, 색이 내게 부속되었다고 보거나, 나아가 내가 곧 식이다, 식 가운데 내가 있다, 내 가운데 식이 있다, 식이 내게 부속되었다고 본다면, 이렇게 보는 이는 마군에게 얽매인 것이니, 나의 제자가 아니다.
선남자야, 나의 성문 제자로서 여래의 12부경을 여의고 외도들의 경전을 익히거나, 출가한 적멸(寂滅)의 업을 닦지 않고 재가(在家)한 세속의 일을 경영하는 이가 있다. 무엇을 재가한
일이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 부정한 물건인 하인ㆍ전택(田宅)ㆍ코끼리ㆍ말ㆍ수레ㆍ약대ㆍ나귀ㆍ닭ㆍ개ㆍ원숭이ㆍ돼지ㆍ양 따위나 가지각색 곡식을 받아 두거나, 스님을 멀리 여의고 속인들을 가까이하며, 성인의 말씀을 어기고 재가자들에게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여러 가지 부정한 물건을 받기를 허락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재가의 일을 익힌다고 한다.
또 제자들이 열반을 위하지 않고 이익만을 위하여 12부경을 친근히 하고 듣거나, 초제승물(招提僧物)이나 승만물(僧鬘物)을 입고 먹기를 자기의 것처럼 생각하거나, 다른 집을 아끼거나 칭찬하거나, 임금이나 왕자들을 친근히 하거나, 길흉을 점치고 책력(冊曆)에 관한 것[推步盈虛]을 숭상하며, 바둑ㆍ장기ㆍ노름ㆍ투호(投壺)하는 일이나,
비구니나 처녀들을 친근히 하거나, 두 사미를 거느리거나, 사냥하고 고기 팔고 술 파는 집과 전타라들이 사는 데를 놀러 다니거나, 여러 가지로 장사하거나,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나라의 사신으로 이웃 나라에 가거나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군의 권속이며,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이런 인연으로 마음이 탐욕과 함께 나고 탐욕과 함께 멸하며, 나아가 어리석은 마음과 함께 나고 함께 멸하는 일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이런 인연으로 마음이 깨끗한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마음이 해탈한다고 한다. 만일 온갖 부정한 물건을 받지도 않고 저축하지도 않으며, 대열반을 위하여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남에게 해설하면 이런 사람은 나의 참된 제자인 줄을 알아야 한다. 마왕 파순의 경계를 행하지 않으면, 37도품(道品)을 닦는 것이며, 도품을 닦으므로 탐욕과 함께 나지 않고 탐욕과 함께 멸하지 않는다.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여덟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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