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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22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3권

by Kay/케이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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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3

 

대반열반경 제23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0.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

또 선남자야, 모든 범부는 비록 몸을 보호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세 가지 나쁜 감각을 낸다. 이런 인연으로 번뇌를 끊는다 하여도, 비상비비상천에 태어났다가 도로 3악도에 떨어진다.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이 바다를 건널 때에 저 언덕에 오를 뻔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같이, 범부도 그와 같아서 삼계의 업을 끝낼 뻔 하다가 3도(塗)에 도로 떨어진다. 왜냐하면 선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한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6념처(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범부들은 선한 마음이 쇠약하고 선하지 않은 마음이 치성하니, 선한 마음이 쇠약하므로 지혜가 엷고 지혜가 엷으므로 모든 누가 늘지만 보살마하살은 지혜 눈이 청정하여 세 가지 나쁜 감각의 허물을 보며, 이 세 가지 나쁜 감각에 가지가지 걱정이 있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3승의 원수가 되게 하는 줄을 안다. 세 가지 나쁜 감각의 인연이 한량없는 범부 중생으로 하여금 불성을 보지 못하게 하며, 한량없는 세월에 뒤바뀐 마음을 내게 하여서, 부처님 세존께는 항상하고 즐겁고 나인 것은 없고 깨끗한 것만 있다고 하며, 여래도 필경에 열반에 든다고 한다.
또한 모든 중생은 무상하고 즐거움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함이 없지만 뒤바뀐 마음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하며, 진실로 3승이 없지만 뒤바뀐 마음으로 3승이 있다고 하며, 실상 도리는 한결같이 진실하여 헛되지 않지만 뒤바뀐 마음으로 한결같은 실상이 없다고 한다. 이 세 가지
나쁜 감각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항상 꾸중하는 것이며, 이 세 가지 나쁜 감각은 항상 나를 해롭게 하고 혹은 다른 이도 해롭게 한다.
이 세 가지 나쁜 감각이 있으면 온갖 나쁜 일이 항상 따라오는 것이며, 이 세 가지 나쁜 감각은 곧 세 가지 속박이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그지없는 생사를 계속하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항상 이렇게 세 가지 나쁜 감각을 관찰한다. 보살이 어떤 때에는 무슨 인연으로 탐욕의 나쁜 감각을 내게 되더라도 잠자코 받지 않는다.
마치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이 모든 더러운 것을 받지 않는 것 같으며, 뜨거운 철환은 아무도 받을 자가 없는 것 같으며, 바라문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 같으며, 배부른 사람이 맛없는 음식을 받지 않는 것 같으며, 전륜왕이 모든 전타라들과 한 평상에 함께 앉지 않는 것 같아서 보살마하살이 세 가지 나쁜 감각을 미워하여 받지 않고 맛보지 않음도 그와 같다.
왜냐하면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중생들은 내가 좋은 복밭이라는 것을 아는데, 내가 어찌 이러한 나쁜 법을 받겠는가? 만일 나쁜 감각을 받으면 중생의 좋은 복밭이 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복밭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중생들이 모습을 보고 나를 복밭이라고 하니, 내가 만일 이런 나쁜 감각을 일으키면 이는 모든 중생을 속이는 것이다. 내가 지난 세상에 남을 속인 탓으로 한량없는 세월을 생사에 헤매면서 3악도에 떨어졌다.
내가 만일 나쁜 마음으로 남의 신실한 보시를 받으면 모든 천인과 5신통을 얻은 신선들이 모두 알고 꾸짖을 것이며, 내가 만일 나쁜 감각으로 남의 신실한 보시를 받으면 시주의 과보가 감소하거나 혹은 과보가 없을 것이며, 만일 나쁜 감각으로 시주의 보시를 받으면 시주에게 원수가 될 것이다. 모든 시주들이 항상 나에 대하여 어린 아기처럼 생각하는데, 내가 어찌 저들을 속여 원수라는 생각을 내게 하겠는가?
왜냐하면 혹은 시주로 하여금
과보를 받지 못하게 하거나, 과보가 감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출가한 사람이라고 자칭하지 않았는가? 출가한 사람은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만일 나쁜 마음을 일으키면 출가가 아니다. 출가한 사람은 몸과 말이 서로 응하여야 한다. 서로 응하지 않으면 출가가 아니다. 나는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과 친구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니, 모든 선한 감각을 닦는 시절이며, 선하지 못한 감각을 닦는 시절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서 보배를 구하면서 진귀한 보배는 갖지 않고 수정을 가지는 것과 같으며, 또 어떤 사람이 미묘한 음악을 버리고 거름더미에서 유희하는 것과 같으며, 훌륭한 여인을 버리고 비루한 여자와 교류하는 것과 같으며, 황금 그릇을 버리고 오지그릇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감로수를 버리고 독약을 먹는 것과 같으며, 친구인 용한 의원을 버리고 원수진 나쁜 의원을 따라가서 약을 구하여 복용하는 것과 같다.
나도 그와 같아서 큰 스승이신 여래 세존의 감로법을 떠나고, 마군이며 원수인 가지가지 나쁜 감각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움이 우담바라꽃과 같은데 나는 이미 얻었으며, 여래를 만나기 어려움이 우담바라꽃보다 더한데 나는 이미 만났으며, 청정한 법보를 보고 듣기 어려운데 나는 이미 들었으니, 마치 눈먼 거북이 나무의 구멍을 만난 듯하다. 목숨이 잠깐도 멈추지 않음이 산 위의 물과 같아서 오늘은 남아 있더라도 내일까지 보증하기 어려운데, 어찌하여 마음을 놓고 나쁜 법에 머물겠는가? 젊은 시절이 머물지 않는 것이 달아나는 말과 같은데, 무엇을 믿고 교만을 내겠는가?
마치 나쁜 귀신이 사람의 허물을 엿보는 것처럼, 4대라는 악귀도 그와 같아서 항상 따라다니면서 나의 허물을 엿본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쁜 감각이 일어나게 하겠는가? 마치 낡은 집이 바로 무너질 것처럼 나의 수명도 그와 같은데, 어찌하여 나쁜 감각을 일으키겠는가?
나는 이름이 사문이다. 사문은 선한 감각을 배우는 것인데
내가 이제 선하지 못한 감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사문이라 하겠는가?
나는 이름이 출가한 사람이다. 출가한 이는 선한 도를 닦는 것인데, 내가 이제 나쁜 감각을 행한다면 어떻게 출가한 이라 하겠는가? 나는 이름이 진정한 바라문이다. 바라문은 청정한 행을 닦는 것인데, 내가 이제 깨끗하지 않고 나쁜 감각을 행한다면 어떻게 바라문이라 하겠는가? 나는 지금 찰리 대성이다. 찰리는 원수와 대적을 물리치는 것인데, 내가 이제 나쁜 대적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찰리라 하겠는가? 나는 이름이 비구이다. 비구는 번뇌를 깨뜨리는 것인데, 내가 이제 나쁜 감각인 번뇌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비구라 하겠는가?
세상에 여섯 가지가 만나기 어려운데 내가 이미 만났으니, 어찌하여 나쁜 감각을 마음에 두겠는가? 무엇을 여섯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부처님 세상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둘째는 바른 법을 듣기 어려운 것이고, 셋째는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기 어려운 것이고, 넷째는 큰 나라에 태어나기 어려운 것이고, 다섯째는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운 것이고, 여섯째는 모든 기관이 구족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섯 가지는 얻기 어려운 것인데 내가 이미 얻었다. 그러므로 나쁜 감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보살이 이렇게 『대열반경』을 수행할 때에는 부지런히 나쁜 마음을 살피지만 모든 범부들은 이러한 나쁜 마음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가지 나쁜 감각을 받는 것을 누를 받는다[受漏]고 한다. 보살은 이미 보았으므로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았으며, 내버려 두고 수호하지 않으며 8성도(聖道)를 의지하여 밀어 보내고 끊어 없애므로 보살들은 누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에게 누가 있다 하겠는가? 이런 이치로 여래 세존께서는 유루가 아니다.
또 선남자야, 범부들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나면 가지가지 나쁜 짓을 일으키고, 만일 몸에 병이 나거나 마음에 병이 생기면 몸과 입과
뜻으로 여러 가지 나쁜 짓을 짓게 하고, 나쁜 짓을 지었으므로 세 갈래로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갖추어 받는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생각하는 지혜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가지가지의 누를 내는 것을 염루(念漏)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항상 스스로 생각한다.
‘내가 지나간 수없는 겁 동안에 이 몸과 마음을 위하여 갖가지 나쁜 짓을 지었고, 그러한 인연으로 나고 죽는 데 헤매면서 3악도에서 모든 고통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3승의 바른 길을 멀어지게 하였다. 보살은 이런 나쁜 인연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어 모든 악을 버리고 선한 길로 가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자면 어떤 임금이 네 마리의 독사를 한 상자에 담아 두고 다른 이를 시켜 먹을 것을 주어 기르게 하며, 누울 때에나 일어날 때에 그 몸을 쓰다듬게 하고, 만일 어떤 독사라도 성을 내게 하면 법에 의지하여 사형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임금의 명령을 듣고 무서운 생각을 내어 상자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임금은 다시 전타라 다섯 사람을 보내면서 칼을 빼어 들고 따라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전타라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더욱 빨리 달아났다. 그때 다섯 전타라는 나쁜 방편으로 들었던 칼을 숨기고 가만히 다른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친근한 척하면서 도로 가자고 달랬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어느 마을로 들어가서 숨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마을에 들어가서 여러 집들을 살펴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많은 독이나 뒤주에는 아무것도 담긴 것이 없었다.
사람들도 만날 수 없고 물건도 얻을 수 없어서 그냥 땅바닥에 앉았더니 공중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가엾다. 그대여, 이 마을은 비어서 사는 사람이 없고, 오늘밤에는 여섯 도둑이 올 것이다. 그대가 만일 그들과 마주치면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는 어떻게 면하려는가?’
그 사람은 무서운 마음이 점점 더하여 그 마을에서 떠나가다가 큰
강을 만났는데, 물살은 급하고 배도 뗏목도 없었다. 황망한 중에 여러 가지 풀과 나무를 꺾어다가 뗏목을 만들면서 다시 생각하였다.
‘내가 만일 여기 있다가는 독사와 다섯 전타라와 거짓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에게 해를 당할 것이고, 만일 이 강을 건너려면 뗏목도 믿기 어려우니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저 독사나 도둑의 피해를 입지는 않으리라.’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뗏목을 물 위에 밀어 넣고 그 위에 몸을 의지하여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강을 건너가 저 언덕에 닿으니, 아무 걱정이 없고 마음이 태연하여 공포가 없어졌다.
보살마하살이 이 『대열반경』을 듣고 받아 지니면, 몸은 상자와 같고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는 네 마리의 독사와 같다고 보니, 보기도 독하고 건드리는 것도 독하고 기운도 독하고 물리는[齧] 것도 독한 것이다. 모든 중생이 이 네 가지 독을 만나므로 목숨을 잃게 된다. 중생들의 4대도 그와 같아서 보는 것도 나쁘고 건드리는 것도 나쁘고 기운도 나쁘고 물리는 것도 나쁘다. 이런 인연으로 여러 선한 일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독사에 네 가지 족성(族姓)이 있음을 관한다. 이른바 찰리(刹利)ㆍ바라문(婆羅門)ㆍ비사(毗舍)ㆍ수타(首陀)이다. 4대라는 뱀도 그와 같아서 네 가지 성질이 있으니, 굳은[堅] 성질ㆍ젖는[濕] 성질ㆍ더운[熱] 성질ㆍ동하는[動] 성질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4대가 네 마리의 독사와 성질이 같다고 본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4대를 네 마리의 독사와 같다고 관한다. 어떻게 관하는가? 네 마리의 독사는 항상 사람의 짬을 엿보아 어느 때에 볼까, 어느 때에 건드릴까, 어느 때에 독기를 뿜을까, 어느 때에 물까 하는 것이다 4대의 독사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의 짬을 엿보아 그 기회를 기다린다. 설사 네 마리 독사에게 물려
죽는다 하더라도 3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만일 4대의 살해를 받으면 반드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 네 마리의 독사를 아무리 보살펴서 기른다 하더라도 항상 사람을 물려고 하니, 4대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리 공급하여도 사람을 이끌어 나쁜 업을 짓게 한다. 네 마리 독사 중 한 마리만 성내어도 사람을 죽이니, 4대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하나의 대(大)만 발작하여도 사람을 해친다.
이 네 마리 독사가 비록 한곳에 있어도 마음이 각각 다르듯이, 4대의 독사도 그와 같아서 한곳에 있더라도 그 성품이 제각기 다르다. 네 마리 독사를 아무리 공경하더라도 친근하기 어렵듯이, 4대의 독사도 그러하여 비록 공경하더라도 친근하기 어렵다. 저 네 마리 독사가 사람을 해칠 때에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주문과 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4대의 독사가 사람을 해칠 때에는 사문이나 바라문의 주문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마치 스스로 기뻐하는 사람이 네 마리 독사의 냄새가 나쁜 것을 맡고 멀리 여의는 것과 같이 부처님과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4대의 냄새를 맡고 멀리 여읜다. 그때 보살은 4대의 독사는 매우 무서운 것이라고 거듭 생각하고 버리고 달아나서 8성도(聖道)를 닦았다.
다섯 전타라란 것은 곧 5음이다. 어찌하여 보살이 5음 보기를 전타라와 같이 하는가? 전타라는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은 이별하고 원수는 모이게 한다. 5음도 그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법은 탐하게 하고 선한 법은 여의게 한다.
또 선남자야, 전타라는 가지각색 무기로
스스로 무장하고, 칼이나 방패나 활이나 살이나 갑옷이나 창 따위로 사람을 해친다. 5음도 그와 같아서 여러 가지 번뇌로 굳게 무장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해쳐 생사에 떨어지게 한다. 선남자야, 전타라는 죄 지은 사람들을 해치니, 5음도 그러하여 번뇌의 허물 있는 사람들을 해친다. 그러므로 보살들이 5음을 보기를 전타라와 같이 한다.
또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라와 같이 한다는 것은, 전타라는 자비한 마음이 없어서 원수나 친한 이를 모두 해치니, 5음도 그와 같아서 자비한 마음이 없이 선과 악을 함께 해친다. 전타라가 모든 사람을 괴롭게 하듯이, 5음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로써 모든 나고 죽는 중생들을 시끄럽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들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라와 같이 한다.
또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라와 같이 한다는 것은, 전타라는 항상 해치려는 마음을 품으니, 5음도 그러하여 항상 모든 번뇌로 해치려는 마음을 품는다. 마치 사람이 발이나 칼이나 작대기나 시종이 없으면 전타라에게 살해될 줄을 알아야 하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발도 없고 칼도 없고 시종도 없으면 5음의 해를 입게 된다. 발은 계행이며 칼은 지혜이고 시종은 선지식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5음의 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라와 같이 한다.
또 선남자야, 보살은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라보다도 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생이 만일 다섯 전타라에게 살해당하더라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지만, 5음에 살해당하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보살이 5음을 관찰하기를 전타
라보다 더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서 서원을 세우되 ‘내가 종신토록 전타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깐 동안만이라도 5음을 친근히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전타라는 다만 욕계의 어리석은 사람만을 해치지만 5음은 삼계의 범부 중생을 모두 해치는 것이다. 전타라는 다만 죄 있는 사람만을 살해하지만 이 5음의 도둑은 중생들의 죄가 있고 없건 간에 모두 해치는 것이다. 전타라는 늙은 할머니나 어린아이들은 해치지 않지만 5음의 도둑은 중생의 늙은이, 어린이,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롭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5음을 보기를 전타라보다 더하다고 한다. 그리고 발원하기를 ‘차라리 종신토록 전타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라도 5음을 친근히 하지 않겠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전타라는 다른 사람만 해치고 자기는 해치지 않지만 5음의 도둑은 자기도 해치고 다른 이도 해치고 전타라도 해친다. 전타라는 좋은 말을 하거나 재물이나 보배를 주고 벗어날 수 있지만, 5음은 그렇지 않아서 좋은 말로 달래거나 재물이나 보배를 주고 벗어날 수 없다. 전타라는 네 시절을 두고 늘 살해하는 것이 아니지만, 5음은 그렇지 않아서 어느 때나 항상 중생을 해친다. 전타라는 한곳에만 있으므로 도피할 수도 있지만, 5음은 그렇지 않아서 간 데마다 있으므로 도피할 수가 없다. 전타라는 사람을 해치더라도 해친 뒤에는 따라오지 않지만, 5음은 그렇지 않아서 중생을 죽이고도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차라리 종신토록 전타라는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라도 5음을 친근히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좋은 방편으로 5음을 벗어날 수 있는데, 좋은 방편이란 8성도와 6바라밀과 4무량심이다.
이런 방편으로 해탈하면 몸과 마음이 5음의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금강과 같고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몸과 마음을 파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보살은 5음이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을 성취함을 보고 두려운 생각을 내어 8성도를 닦는다.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타라를 두려워하여 강을 건너가고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거짓 친근한 척하는 것은 탐애(貪愛)라고 하며, 보살은 탐애의 번뇌를 원수같이 생각한다. 만일 실정을 알면 어찌할 수 없지만 만일 알지 못하면 반드시 해를 받는다. 탐애도 그러하여 만일 그 성품을 알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헤매게 하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섯 갈래로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탐애의 병을 버리기 어려움이, 마치 친한 척하는 원수를 멀리 떠나기 어려움과 같기 때문이다. 친한 척하는 원수는 항상 짬을 엿보아서 사랑하는 것은 이별하게 하고, 미워하는 것은 모이게 한다. 탐애도 그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선한 법은 멀리 여의게 하고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을 가까이하게 한다. 이러한 이치로 보살마하살이 탐애를 보기를 원수가 거짓 친한 척하는 것과 같이 하니,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범부가 생사의 허물을 보는 것 같아서, 비록 지혜가 있으나 어리석음이 가린 탓으로 다시는 보지 못하니, 성문과 연각도 그와 같아서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 까닭을 말하면 탐애하는 마음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사의 허물을 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빨리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으로 보살마하살은 탐애의 번뇌를 친한 척하는 원수와 같이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일러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원수는 참이 아닌 것을 참인 듯이 나타내고 친근해서는 안 되는 것을 친근한 듯이 나타내고 실제로는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듯이 나타내며,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듯이 나타낸다. 왜냐하면 항상 사람의 짬을 엿보아 해치려는 까닭이다. 탐애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을 위하여 참이 아닌 것을 참인 듯 꾸미고, 친근하지 않은 것을 친근한 듯이 꾸미며,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듯이 꾸미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듯이 꾸며서, 모든 중생들을 속여 생사에 바퀴 돌 듯 하게 한다. 이러한 뜻으로 보살이 탐애를 보기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몸과 입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므로 능히 속이는 것이다. 탐애도 그러하여 다만 허황할 뿐이며, 실상은 얻을 수 없으므로 모든 중생들을 의혹케 한다.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처음도 있고 나중도 있어 멀리 떠나보낼 수도 있지만, 탐애는 그렇지 않아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므로 멀리 여의기 어렵다. 원수가 친한 척함은 멀면 깨닫기 어렵고 가까우면 알기 쉽지만, 탐애는 그렇지 않아서 가까워도 알기 어렵다. 하물며 멀다면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이치로 보살이 탐애를 볼 때에 친한 척하는 원수보다 더하다고 본다. 모든 중생들은 탐애하는 번뇌의 탓으로 대열반을 멀리하고 생사를 가까이한다. 그리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멀리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 없고 부정함을 가까이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가지 경전에서 세 가지 더러움[三垢]이라고 말하였다. 현재의 일에는 무명 때문에 허물을 보지 못하여 여의지 못하지만, 탐애의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지혜 있는 사람은 해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탐애를 보고 두려움을 내어 8성도를 닦는다.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타라와 친한 척하는 이를 무서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다.
‘빈 마을’이라 함은, 곧 안으로 여섯 군데 받아들이는 것[內六入]이다. 보살마하살이 이 6입(入)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되, 빈 마을과 같이 여기는 것은 마치 저 무서워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갔지만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독이나 뒤주 따위를 살펴보았으나 한 물건도 찾지 못한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6입을 관찰하였으나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중생이나 한 물건도 실다운 것이 없으므로 보살이 안의 6입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보되, 빈 마을과 같이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저 빈 마을을 도둑들이 멀리서 보고 비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범부들도 그러하여 6입의 마을에 대하여 비었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비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므로 생사에서 바퀴 돌듯이 하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선남자야, 도둑들이 마을에 들어가고 나서 빈 줄을 알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이 6입을 보고 비었다는 생각을 내며, 비었다고 생각하므로 생사에서 바퀴 돌듯 하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이 여섯 군데에 뒤바뀌지 않으니, 뒤바뀌지 않으므로 다시 생사에서 바퀴 돌듯 하지 않는다.
또 선남자야, 마치 도둑들이 빈 마을에 들어가고 나서 편안한 것같이 번뇌의 도둑도 그러하여 이 6입에 들어가면 안락하게 되는 것이다. 도둑이 빈 마을에 머무를 때에 두려운 마음이 없듯이 번뇌의 도둑도 그러하여 6입에 머물면 두려움이 없다. 저 빈 마을에는 사자나 호랑이, 이리 따위의 영악한 짐승들이 사는 것처럼, 안의 6입도 그와 같아서 온갖 나쁜 번뇌 짐승들이 머문다. 그러므로 보살이 6입을 보되,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순전히 선하지 못한 것들만이 머무는 데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안의 6입이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볼 때에, 빈 마을처럼 생각함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이 허황하여 참되지 못한 까닭이며, 아무것도 없는 데를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며,
즐거울 것이 없음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며, 사람이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의 6입도 역시 그러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며, 즐거울 것이 없는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사람이 없는 것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만이 분명히 알고 진실(眞實)을 얻게 된다.
또 선남자야, 빈 마을은 어떤 때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6입은 그렇지 않아 한결같이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성질이 항상 공한 까닭이다. 지혜 있는 이가 알 것이며, 눈으로 볼 것이 아니므로 보살들은 안의 6입이 피해가 많음을 보고 8성도를 닦아서 잠시도 쉬지 않는다.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타라와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이 무서워서 바른 길로 달아나는 것과 같다.
여섯 도둑이란 것은 밖에 있는 여섯 티끌[外六塵]을 말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6진(塵)을 여섯 도둑처럼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온갖 선한 법을 빼앗기 때문이다. 여섯 도둑이 모든 사람의 재물을 빼앗듯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의 선한 재물을 빼앗는다. 마치 여섯 도둑이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있는 것은 좋건 나쁘건 모두 빼앗아 큰 부자라도 금시에 가난뱅이가 되게 하듯이 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사람의 근(根)에 들어가면 모든 선한 법을 빼앗으며, 선한 법이 다 없어지면 가난하고 외로운 일천제(一闡提)가 된다. 그러므로 보살이 6진을 보기를 여섯 도둑과 같이 한다.
또 선남자야, 여섯 도둑이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 할 때에는 안에 있는 사람과 결탁하여야 한다. 만일 안에 있는 사람이 없으면 문득 중도에 물러간다.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선한
법을 빼앗으려면 안에 있는 중생의 지견인 항상하고[常] 즐겁고[樂] 나이고[我] 깨끗하여[淨] 공하지 않다는 모양을 연결하여야 한다. 안에 만일 이런 모양이 없으면 6진의 나쁜 도둑이 모든 선한 법을 빼앗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안에 이런 모양이 없지만, 범부에게는 있으므로 6진이 항상 와서 선한 법을 침노하는 것이며, 잘 수호하지 못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수호하는 것은 지혜라고 하며, 지혜 있는 사람은 잘 방비하고 수호하여서 빼앗기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6진을 보기를 여섯 큰 도둑과 같이 하여 차별이 없다.
또 선남자야, 여섯 도둑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고뇌하게 하듯이, 6진의 도둑도 그와 같아서 중생의 몸과 마음을 항상 고뇌하게 한다. 여섯 도둑은 사람의 현재 있는 재물만 빼앗지만 6진의 도둑은 중생들의 3세의 선한 재물을 빼앗는다. 여섯 도둑은 밤이면 즐거워하며, 6진의 나쁜 도둑도 그러하여 무명의 어두운 밤에 즐거워한다. 여섯 큰 도둑은 임금의 법으로만 막을 수 있듯이 6진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막을 수 있다.
여섯 도둑이 재물을 빼앗을 때에는 단정한 가문이나 총명한 철인(哲人)이나 많이 아는 박사나 부유하고 빈천한 이를 가리지 않듯이, 6진의 큰 도둑도 그와 같아서 선한 법을 빼앗을 때에는 단정하거나 나아가 빈천한 이를 가리지 않는다. 여섯 나쁜 도둑은 비록 왕의 법률로 그들의 손과 발을 끊을 수 있으나, 그들의 마음을 쉬게 할 수는 없다. 6진의 나쁜 도둑도 그와 같아서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이 그 손과 발을 끊을 수는 있으나, 선한 법을 빼앗지 못하게는 할 수 없다. 용맹한 사람은 여섯 큰 도둑을 굴복시킬 수 있듯이, 부처님과 보살들은
6진의 나쁜 도둑을 꺾어 굴복시킨다.
마치 사람이 문벌이 흥왕하고 종족이 많으면 여섯 도둑의 빼앗음을 받지 않을 수 있듯이, 중생들도 그러하여 선지식이 있으면 6진의 나쁜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여섯 큰 도둑은 사람의 물건을 보고 나서야 훔치지만, 6진은 그렇지 않아 보거나 알거나 듣거나 맡거나 부딪치고 지각하는 것을 모두 빼앗는다. 여섯 도둑은 욕계 사람의 재물만을 빼앗고 색계나 무색계의 것은 빼앗지 못하지만,
6진의 도둑은 그렇지 않아 삼계의 온갖 선한 보배를 모두 빼앗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6진을 관찰할 때에 여섯 도둑보다 지나치게 하며, 그렇게 관찰하고 8성도를 닦아서 바로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타라와 친한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둑을 무서워하여 빈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과 같다.
길에서 강을 만났다는 것은 번뇌를 말한다. 어찌하여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과 같이 하는가? 물살이 급한 강물이 향상(香象)을 떠내려 보내듯이, 번뇌의 강물도 그러하여 연각도 떠내려 보낸다.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물살 급한 강물과 같이 한다. 깊어서 바닥을 알 수 없으므로 강이라 하고, 넓어서 가[邊]를 알 수 없으므로 크다고 한다. 그 속에 나쁜 고기들이 많이 있으니, 번뇌의 강도 그러하여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바닥을 얻을 수 있으므로 매우 깊다 하고,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가를 얻을 수 있으므로 크다 하고, 모든 어리석은 중생을 해치므로 나쁜 고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물처럼 하는 것이다. 마치 강물이 온갖 초목을 자라게 하듯이 번뇌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25유(有)를 자라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번뇌 보기를 큰 강과 같이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강물에 빠지면 부끄러움이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강에 빠지면 부끄러움이 없다. 강에 빠지는 사람은 바닥까지 이르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듯이, 번뇌의 강에 빠진 이도 그와 같아서 밑바닥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25유에 두루 돌아다니며 헤맨다. 밑바닥이라 함은 공한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공한 모양을 닦지 않으면 이 사람은 25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중생들도 공하여 모양이 없는 것을 잘 닦지 못하므로 번뇌의 강에 항상 빠져 있는 것이다. 강물은 몸만 빠지는 것이며, 모든 선한 법은 빠뜨리지 못하지만 번뇌의 강은 그렇지 않아서 몸과 마음의 모든 선한 법을 파괴한다. 빨리 흐르는 강물은 욕계의 사람만을 표류하게 하지만, 번뇌의 강물은 삼계의 세간 사람, 천상 사람들까지 표류하게 한다. 세간의 강에서는 손과 발을 움직이면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지만 번뇌의 강에서는 보살만이 6바라밀을 말미암아서야 건너가는 것이다.
저 강물을 건너가기 어렵듯이, 번뇌의 강물도 그러하여 건너가기 어렵다.
어찌하여 건너기 어렵다고 하는가? 10주(住)에 오른 대보살들도 끝까지 건너가지 못하고, 부처님만이 필경까지 건너가는 것이므로 어렵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강에 표류하면 털끝만큼의 선한 법도 닦을 수 없다.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강에 빠져서는 선한 법을 닦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강에 빠져서 물에 떠내려가는 것은 기운 센 사람이면 건져낼 수도 있지만, 번뇌의
강에 빠져서 일천제가 된 사람은 성문ㆍ연각이나 부처님까지도 건져내지 못한다. 이 세상의 강물은 겁이 끝날 때에 일곱 태양이 한꺼번에 뜨면 마르기도 하지만 번뇌의 강물은 그렇지 않아, 성문이나 연각이 7각지(覺支)를 닦더라도 말릴 수 없다. 그러므로 보살은 번뇌 보기를 물살 급한 강과 같이 한다.
저 사람이 네 마리 독사와 다섯 전타라와 친한 척하는 한 사람과 여섯 도둑이 무서워서 빈 마을을 버리고 빨리 가다가, 강가에 이르러서는 초목을 모아 떼를 만드는 것처럼, 보살도 그러하여 4대의 독사와 5음의 전타라와 친한 척하는 탐애와 6입(入)의 빈 마을과 6진의 나쁜 도둑이 무서워서 번뇌의 강에 이르러서는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과 6바라밀과 37도품(道品)을 닦아서 뗏목을 만들고, 이 뗏목을 의지하여 번뇌의 강을 건너서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른다.
보살로서 대열반을 닦는 이는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이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참지 못하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의 강을 건너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였으므로 비록 몸과 마음의 고통이 있더라도 잠자코 참으며, 참고 견디므로 누(漏)를 내지 않는다. 보살도 이렇게 모든 누가 없는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들은 누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무루가 아니라고 하는가? 여래는 항상 유루 중에 있기 때문이며, 유루는 곧 25유이므로 성문이나 범부들은 부처님이 유루라고 말하지만 부처님 여래께서는 참으로 무루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 여래께서는 결정한 모양[定相]이 없다 고 한다. 선남자야,
4중금(重禁)을 범하거나, 방등경을 비방하거나, 일천제들은 모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거룩하신 말씀과 같아 온갖 법은 모두 결정되지 않았으며,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여래께서도 필경의 열반에 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아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 가운데는 열반이 있고 대열반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을 열반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대열반이라고 합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을 찬탄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어떤 보살이든지 생각하는 총지[念摠持]를 얻어야 네가 묻는 바와 같이 물을 것이다. 선남자야,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있고 큰 바다가 있으며, 강과 큰 강이 있으며, 산과 큰 산과 땅과, 사람과 대인과, 하늘과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과, 도(道)와 큰 도가 있다고 하니 열반도 그와 같아서 열반도 있고 대열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가? 선남자야,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조금만 먹어도 안락하다고 하는 것처럼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고 하며, 병이 나으면 안락하다고 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 하며, 어떤 사람이 공포를 느끼다가 의지할 데를 얻으면 안락을 얻었다고 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고 하며, 가난하던 사람이 7보를 얻으면 안락을 얻었다고 하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고 하며, 사람이 뼈를 보고 탐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락을 얻으니 이런 안락도 열반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열반들은
대열반이라고 이름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갈(飢渴) 때문이며 병 때문이며 두려움 때문이며 가난 때문이며 탐착(貪着) 때문이니, 열반이라고 하며 대열반은 아닌 것이다.
선남자야, 범부나 성문들이 혹 세속을 원인으로 하거나 혹 성인의 도를 원인으로 하여 욕계의 속박을 끊으면 안락함을 얻는다. 이런 안락은 열반이라 고 하며 대열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초선의 속박을 끊거나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속박을 끊으면 안락함을 얻는다. 이런 안락은 열반이라고 하며 대열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도로 번뇌를 내거나 습기(習氣)가 있는 까닭이다.
어떤 것을 번뇌의 습기라고 하는가? 성문이나 연각은 번뇌의 습기가 있다. 이른바 나의 몸이다, 나의 옷이다, 내가 간다, 내가 온다, 내가 말한다, 내가 듣는다, 여러 부처님 여래께서는 열반에 들었다, 열반의 성품은 내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다만 항상하고 깨끗함만 있다고 하는 등 이것을 번뇌의 습기라고 한다.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들은 차별한 모양이 있고, 여래는 필경의 열반에 드시며, 성문이나 연각이나 부처님께서 얻는 열반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고 한다. 이런 뜻으로 2승이 얻는 열반은 대열반이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없는 까닭이다.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야 대열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곳에서 여러 강물을 받아들이는 데가 있으면 큰 바다라고 하듯이,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여러 부처님 여래께서 들어가시는 데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4선정(禪定)ㆍ3삼매(三昧)ㆍ8배사(背捨)ㆍ8승처(勝處)ㆍ10일체처(一切處) 따위의 한량없는 선한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대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어떤 강이 있는데 첫째가는 향상(香象)으로도 바닥에 닿지 못한다면 큰 강이라고 하듯이 성문ㆍ연각이나 10주 보살까지가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며 대열반은 아닌데, 만일 불성을 분명하게 본다면 대열반이라고 이름한다. 이 대열반은 큰 코끼리왕이라야 바닥을 밟을 수 있는데, 큰 코끼리왕은 부처님을 말한다. 선남자야, 마하나가(摩訶那伽)나 발건타(鉢犍陁) 대역사들이 오랜 세월을 걸어도 올라갈 수 없는 것을 큰 산이라고 하듯이, 성문ㆍ연각이나 보살인 마하나가나 대역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야 대열반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소왕(小王)이 있는 데는 작은 성이라 하고, 전륜왕이 있는 데는 큰 성이라고 하듯이, 성문이나 연각이 8만ㆍ6만ㆍ4만ㆍ2만ㆍ1만 겁 동안 머무는 데는 열반이라 하고, 위없는 법주(法主)인 성왕(聖王)이 머무는 데라야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 이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네 가지 군대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중생이라고 이름할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3악도의 번뇌와 나쁜 업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지 않고, 그 속에서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면 이 사람은 대열반을 얻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를 공양하며 사문이나 바라문을 공경하고 선한 법을 닦으며 말이 진실하여 속이지 않으며, 나쁜 것을 참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면 대장부라고 이름할 것이다. 보살도 그러하여 대자비가 있어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여러 중생을 부모같이 여기며, 나고 죽는 바다에서
중생들을 건지고, 중생들에게 한결같은 실상의 도를 보여 준다면 그런 이는 대반열반이라 이름할 것이다.
선남자야, 크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한다.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고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고 한다.
선남자야,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라고 한다.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라고 한다.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에는 내가 없지만 크게 자재하므로 큰 나[大我]라고 한다.
어떤 것을 크게 자재하다고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가 있으므로 나라고 한다.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나타내는데, 몸의 크기가 티끌과 같아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티끌이 아니지만 자재하므로 티끌 같은 몸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이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이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20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다.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지만
자재하기 때문에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넷째는 자재하기 때문에 자재하게 된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는 한 마음이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변화하여 나타내는 한량없는 종류들로 하여금 제각기 마음이 있게 하며, 여래는 어떤 때에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신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다섯째는 근(根)이 자재한 까닭이다.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고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고 촉감을 지각하고 법(法)을 알기도 하지만, 여래의 여섯 가지 근은 색을 보지도 않고, 소리를 듣지도 않고 냄새를 맡지도 맛을 느끼지도 않고 촉감을 지각하지도 않고 법을 알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재하기 때문에 근으로 하여금 자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온갖 법을 얻지만,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얻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고 하겠지만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고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고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고 한다. 자재함으로써 온갖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큰 나라고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한량없는 겁을 지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거나 지혜 따위이다.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연설하고 저 사람이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고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함으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큰 나라고 한다.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볼 수 없지만, 자재함으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재한 것을 큰 나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큰 나를 대열반이라고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마치 보배 광에 신기한 보배가 많으며, 온갖 것이 구족한 것을 큰 광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깊은 법장도 그와 같아서 여러 가지 기특한 것을 구족하여 모자람이 없으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끝이 없는 물건을 크다고 하는데, 열반이 끝이 없으므로 대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크게 즐거움이 있으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즐거움이 없지만 네 가지가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낙이 끊어진 까닭이다. 낙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괴롭다고 하며, 괴로움이 있으면 큰 즐거움이라 하지 못하지만 즐거움이 없어졌으므로 괴로움이 없으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을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열반의 성품은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그러므로 열반을 크게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런 뜻으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낙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의 낙과 둘째는 부처님의 낙이다. 범부의 낙은 무상하여 파괴되므로 낙이 없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즐거워 변동이 없으므로 크게 즐겁다고 한다. 또 선남자야, 세 가지
받아들임[受]이 있으니, 괴로움[苦受]과 즐거움[樂受]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受]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괴로움이라고 하고, 열반은 비록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과 같지만 그래도 크게 즐거움이라 하며, 크게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둘째는 크게 고요하므로[大寂靜] 크게 즐겁다고 하니, 열반의 성품은 크게 고요하다. 왜냐하면 온갖 시끄러움을 멀리 여읜 까닭에 크게 고요하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셋째는 온갖 것을 아는 까닭으로 크게 즐겁다고 한다. 온갖 것을 아는 것이 아니면 크게 즐겁다고 하지 못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온갖 것을 아시므로 크게 즐겁다 하고, 크게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넷째는 몸이 무너지지 않음을 크게 즐겁다고 한다. 몸이 무너진다면 즐겁다고 할 수 없지만 여래의 몸은 금강과 같아서 무너지지 않으며, 번뇌의 몸이 아니고 무상한 몸이 아니므로 크게 즐겁다 하며, 크게 즐거우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세간의 이름은 인연이 있기도 하고 인연이 없기도 하다. 인연이 있다는 것은 저 사리불은 어머니의 이름이 사리이니, 어머니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사리불이라고 한다. 마유라(摩鍮羅)1) 도인은 마유라국에 태어나서 나라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마유라 도인이라고 한다. 목건련 존자는 목건련이 성(姓)인데, 성으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목건련이라 고 한다. 나는 구담(瞿曇)의 문중에 났으니, 성으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구담이라고 한다. 비사거(毗舍佉)2) 도인의 비사거는 별 이름이다. 별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므로 비사거라고 한다. 육손이라고 함은 손가락이 여섯이므로
육손이라고 이름하며, 불노(佛奴)ㆍ천노(天奴)라고 함은 부처님을 인하고 하늘을 인하였으므로 불노ㆍ천노라고 하며, 습기를 인하여 났으므로 습생이라 하며, 소리로 인하여서 가가라(迦迦羅)3)ㆍ구구라(究究羅)4)ㆍ달달라(呾呾羅)5)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이런 이름들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인연이 없는 이름은 연꽃ㆍ땅ㆍ물ㆍ불ㆍ바람ㆍ허공 따위이다. 저 만타바(曼陀婆)6)는 한 이름에 두 가지 실물이 있으니, 첫째는 전당(殿堂)이고 둘째는 물을 마시는 것이다. 전당도 아니고 물을 마시지도 않았지만, 만타바라고 이름을 지었다. 살바차다(薩婆車多)는 사개(蛇蓋)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개가 아니다. 이런 것은 인연이 없이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라바이(坻羅婆夷)는 기름을 먹는다는 것이니, 실제로 기름을 먹지 않았지만 억지로 이름을 지어 기름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런 이름들은 인연이 없이 억지로 지은 이름들이다. 선남자야, 대열반도 그와 같아서 인연이 없는 것을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허공을 작은 허공을 인하여 큰 허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작은 것을 인한 것이 아니지만 대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어떤 법을 칭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크다고 하는 것처럼, 열반도 그러하여 칭량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므로 대반열반이라고 하였다. 순수하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순수하게 깨끗하다고 하는가? 깨끗함에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25유는 부정하다 하고 능히 끊은 것을 깨끗하다 하며, 깨끗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열반을 유(有)라고도 하는데, 열반은 유가 아니지만 부처님께서 세속을 따라서 열반을 유라고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세상 사람이 아비가 아닌 이를 아비라 하고 어미가 아닌 이를 어미라 말하여, 실제로는 부모가 아니지만 부모라고 말하는 것처럼 열반도 그와 같아서
세속을 따르므로 부처님께 대열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업이 청정한 까닭이다. 모든 범부는 업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열반이 없지만 부처님들은 업이 청정하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셋째는 몸이 청정한 까닭이다. 몸이 무상하면 부정하다고 하지만, 여래의 몸은 항상하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넷째는 마음이 청정한 까닭이니, 마음에 누(漏)가 있으면 부정하다고 하지만 부처님 마음은 누가 없으므로 크게 깨끗하다 하고, 크게 깨끗하므로 대열반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이것을 이름하여 선남자ㆍ선여인이 이렇게 『대열반경』을 수행하여 첫째 공덕을 성취하여 구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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