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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26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7권

by Kay/케이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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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7

 

대반열반경 제27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1.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 ①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만일 부처님이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승가가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이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實]가 있는지 없는지, 내[我]가 있는지 없는지,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깨끗함이 있는지 없는지, 항상함이 있는지 없는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인(因)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지음[作]이 있는지 없는지, 업이 있는지 없는지,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가 의심된다면, 너희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낱낱이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나는 진실로 하늘이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내게 와서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그때 그 회중에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하며 의복을 바로 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쭙겠으니, 여래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허락해주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지금 마땅히 이 보살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찬탄하며, 가지각색 향ㆍ꽃ㆍ풍류ㆍ영락ㆍ번ㆍ일산ㆍ의복ㆍ음식ㆍ좌복ㆍ의약ㆍ집ㆍ전당으로 공양하며
영접하고 전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지나간 부처님들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사자가 자기의 기운을 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뽐내며 네 발로 땅을 짚고 굴속에 있으면서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듯이, 이런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추면 이는 크게 사자후하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자왕이 새벽에 굴속에서 나와 몸을 다듬고 입을 벌리고 사방을 살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열한 가지 일을 위해서이다.
그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 행세를 하는 무리를 부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몸에 있는 기운을 시험하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있는 곳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새끼들로 하여금 있는 처소를 알게 하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여러 동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또 여섯 번째는 자는 놈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마음을 놓아버린 짐승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여러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복종케 하려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향상(香象)들을 조복하려는 것이며, 열 번째는 새끼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자기의 권속들을 장엄하려는 것이다.
모든 짐승들은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상들은 두려워 달아나며 똥을 지린다.
선남자들이여, 여우는 사자를 100년 동안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는데, 사자의 새끼는 3년만 되어도 큰 사자처럼 사자후를 한다.
선남자야, 여래 정각(正覺)께서는 지혜의 이빨과 발톱이며, 4여의족(如意足)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10력이 용맹하고
대비(大悲)로 꼬리를 삼아서 4선정의 청정한 굴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마군을 쳐부수고 중생에게 10력을 보이시며, 부처님이 행하는 곳을 나타내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곳을 만드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편안히 어루만져 무명의 졸음에서 깨어나게 하시며, 나쁜 짓을 행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깨우치신다.
육사외도는 사자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까닭이며, 부란나(富蘭那)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2승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5주(住) 보살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사견을 가진 4부중에게 두려운 생각이 없게 하려는 까닭이다.
거룩한 행ㆍ청정한 행ㆍ하늘의 행을 하는 굴속으로부터 몸을 쭉 펴면서 나오는 것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입을 벌리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사방을 살피는 것은 중생들이 4무애(無礙)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며, 네 발로 땅을 짚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지계(持戒)바라밀에 구족하게 머물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자후를 하시는 것이다. 사자후라고 함은 결정된 말이니, 모든 중생이 모든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계셔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남자야, 성문이나 연각들은 한량없는 백천 아승기겁 동안 여래 세존을 따라다니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지만 10주 보살은 이 세 가지 행을 닦기만 하면 능히 사자후할 것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이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이제 이러한 대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깊은 마음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히 여기고 찬탄하여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사자후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가 물으려거든 이제 마음대로 물어라.”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불성이라고 하며,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합니까?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10주 보살은 무슨 법에 머물러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무슨 법에 머무르셔서 분명하게 보십니까?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께서는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십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장하고 장하다. 어떤 사람이나 법을 위하여 물으면, 이는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다. 첫째는 지혜이며 둘째는 복덕이다. 만일 보살이 이런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라면 곧 불성을 알며, 불성이라 이름하는 것도 알 것이며, 나아가 10주 보살은 무슨 눈으로 보고 부처님 세존들은 무슨 눈으로 보는가를 알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지혜 장엄이라 하고 어떤 것을 복덕 장엄이라 합니까?”
“선남자야, 지혜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1지(地)로부터 10지에 이르는 것을 지혜 장엄이라 하고, 복덕 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로부터 나아가 반야에 이르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은 아니다. 또 선남자야, 지혜 장엄은 부처님과 보살들을 말하며, 복덕 장엄은 성문ㆍ연각과 9주 보살을 말하는 것이다.
또 선남자야, 복덕 장엄은 함이 있는 것이며, 유루(有漏)이며,
유(有)가 있고 과보가 있고 걸림이 있고 항상하지 않은 것이니, 범부의 법이며, 지혜 장엄은 함이 없는 것이며 무루이며 유가 없고 과보가 없고 걸림이 없고 항상 머무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대는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깊고 묘한 이치를 묻는 것이며, 나도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이 의미를 대답하는 것이다.”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이러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다면 한 가지 두 가지를 물을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 두 가지를 대답한다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모든 법에는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는 까닭이니, 한 가지 두 가지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집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두 가지 장엄이 없다면 한 가지 두 가지를 알지 못하겠지만, 보살은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한 가지 두 가지를 이해한다. 모든 법이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면, 모든 법은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선남자야,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범부의 집착이라고 하면 이는 곧 10주 보살이라고 할 것이며, 범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라고 함은 열반이며 둘이라고 함은 생사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를 열반이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둘을 생사라고 하는가? 애(愛)와 무명이기 때문이다. 항상함을 열반이라고 함은 범부의 모양이 아니며, 생사를 둘이라고 함도 범부의 모양이 아니다. 이런 뜻으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는 능히 묻고 능히 대답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어떤 것을 불성이라고 하는가?’ 하였으니,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에게 하나하나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불성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하고, 제일의공은 지혜라고 한다.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한 것이니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지혜라고 하는 것은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않은 것과, 항상한 것이나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과, 나인 것이나 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공이란 것은 온갖 생사이며 공하지 않다는 것은 대열반이며, 나아가 내가 없다는 것은 생사이며 나라는 것은 대열반이다.
온갖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中道)라고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온갖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라고 할 수 없다. 중도란 것은 불성이라고 하니 이런 뜻으로 불성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으며, 무명에 덮여서 중생들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한다. 성문과 연각은 모든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며, 나아가 모든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인 것은 보지 못한다. 이런 뜻으로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며,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가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 못한다.
선남자야, 중도를 보지 못하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코 즐거운 행이며, 둘째는 결정코 괴로운 행이며, 셋째는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苦樂行]이다. 결정코 즐거운 행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비록 아비지옥에 있더라도 3선천락과 같이 여기는 것이며, 결정코 괴로운 행이라고 함은 범부들을 말하는 것이며,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이라고 함은 성문과 연각이다. 성문과 연각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행하면서 중도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뜻으로 비록 불성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묻기를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고 이름하는가?’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불성이라고 함은 곧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중도 종자이다.
또 선남자야, 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下)와 상(上)과 중(中)이다. 하라고 함은 범천이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는 것이며, 상이라고 함은 생사가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고, 3보가 항상함을 무상하다고 잘못 여긴다. 어찌하여 상이라고 하는가? 가장 위가 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이라고 함은 제일의공이라고 이름한다. 무상한 것은 무상하다고 보고 항상한 것은 항상하다고 본다. 제일의공은 하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범부들이 얻지 못하는 까닭이며,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곧 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보살들이 닦는 도는 상도 아니고 하도 아니다 이런 뜻으로 중도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생사의 본고장[本際]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명이며 둘째는 애(愛)이다. 이 두 가지 중간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는데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중도가 생사를 깨뜨리므로 중도라고 하며, 이런 뜻으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불성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지만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불성은 진실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가난한 집에 숨은 보배[寶藏]가 있지만 이 사람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다가, 어떤 선지식이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숨은 보배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빈궁하고 곤고하여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방편으로 보게 하면, 이 사람이 보기 때문에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되는 것과 같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이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지만, 선지식인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방편으로써 가지가지로 가르쳐 보게 하면, 보기 때문에 중생이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는다.
또 선남자야, 중생들이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이며, 둘째는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이다. 이러한 두 소견은 중도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항상함도 없고 아주 없다는 것도 없음은 곧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이니, 이것을 불성이라고 한다. 2승들은 비록 12인연을 관찰하여도 불성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불성이 항상하지만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덮였으므로 보지 못한다. 또 12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함은 토끼나 말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종자이니,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마치 오이[胡苽]를 열병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열병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며 12인연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불성은 인이 있고 인의 인[因因]이 있으며, 과가 있고 과의 과[果果]가 있다. 인은 12인연이이며 인의 인은 곧 지혜이며, 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과의 과는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다.
선남자야, 마치 무명이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식(識)이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는 것처럼 불성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12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다. 선남자야, 인이며 과가 아님은 불성과 같고, 과이며 인이 아님은 대열반과 같고, 인도 되고 과도 됨은 12인연으로 생긴 법과 같으며,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님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인도 과도 아니므로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서 말하기를 ‘12인연은 그 뜻이 매우 깊어서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부처님과 보살의 경계이며, 성문이나 연각은 미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매우 깊다고 하는가? 중생의 업행(業行)은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지만 과보를 얻으며 비록 생각마다 멸하지만 잃지 않으며, 짓는 이는 없지만 짓는 업은 있으며, 받을 이는 없지만 과보는 있으며, 받는 이가 멸하더라도 과보는 없어지지 않으며, 생각하여 앎이 없지만 화합하여 있다.
모든 중생들은 12인연과 함께 행하면서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나중과 처음이 없다. 10주 보살은 나중만 보고 처음을 보지 못하지만 부처님 세존께서는 처음도 보고 나중도 보신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불성을 보신다고 한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은 12인연을 보지 못하므로 바퀴 돌 듯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듯이 모든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스스로 번뇌의 업을 짓고 나고 죽는 데서 헤매는데, 마치 공을 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12인연을 보는 이는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곧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이란 곧 불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으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12인연을 보는 지혜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下)이며 둘째는 중(中)이며 셋째는 상(上)이며 넷째는 상상(上上)이다. 하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의 도를 얻는다. 중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각의 도를 얻는다. 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보아도 분명하지 못하며, 분명하지 못하므로 10주지(住地)에 머문다.
상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분명히 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를 얻는다.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고 이름한다. 불성은 곧 제일의공이며,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이름하며 부처는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부처님과 불성이 차별이 없다면 모든 중생들은 도를 닦아서 무엇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물은 것은 옳지 않다. 부처님과 불성이 비록 차별이 없으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족하지 못하였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어미를 살해하고 뒤에 뉘우침을 냈다면, 두 가지 업이 비록 선하더라도 이 사람은 지옥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록 지옥의 5음과 18계와 6입이 없더라도 오히려 지옥 사람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이가 선한 일을 닦으면 하늘 사람을 본다 하고 나쁜 일을 행하면 지옥을 본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반드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으나, 모든 중생이 참으로 32상과 80종호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 경에서 게송을 말하였다.

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며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니
이 세상 앞세상 다음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다네.

선남자야, 있다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음에 있는 것이며 둘째는 지금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과거에 있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오는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이것을 불성이라 하고, 모든 중생이 지금에 번뇌의 결박이 있으므로 현재에 32상과 80종호가 없으며, 모든 중생이 지나간 세상에 번뇌를 끊은 일이 있었으므로 현재에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며, 나아가 일천제들도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일천제들은 선한 법이 없으며 불성은 선한 법이지만, 오는 세상에 있을 것이므로 일천제들이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천제들도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마치 어떤 집에 우유와 타락이 있는데, 다른 이가 그대에게 소(酥)가 있느냐고 하니, 있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타락이 실제로는 소가 아니지만 공교한 방편으로 소를 만들 수 있으므로 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모두 마음이 있으며, 마음이 있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뜻으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떳떳하게 말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필경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엄필경(莊嚴畢竟)이며 둘째는 구경(究竟)필경이다. 첫째는 세간필경이며 둘째는 출세간필경[出世畢竟]이다. 장엄필경은 6바라밀이며 구경필경은 모든 중생이 얻을 1승(乘)이며, 1승은 불성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한다. 모든 중생이 다 1승이 있지만 무명에 덮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북구로주나 삼십삼천은 과보가 덮여서 여기 있는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성도 그러하여 번뇌에 덮였으므로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선남자야, 불성은 곧 수릉엄삼매이니 성품이 제호(醍醐)와 같으며, 여러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수릉엄삼매의 힘으로써 부처님들로 하여금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다 수릉엄삼매가 있지만 닦아 행하지 않으므로 보지 못하며,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한다.
선남자야, 수릉엄삼매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수릉엄(首楞嚴)삼매이고 둘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고 셋째는 금강(金剛)삼매이고 넷째는 사자후(師子吼)삼매이고 다섯째는 불성(佛性)이다. 그 짓는 대로 따라서 곳곳마다 이름을 얻는다. 선남자야, 한 삼매가 가지가지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마치 선(禪)에는 4선이라 하고, 근(根)에는 정근(定根)이라 하고, 역(力)에는 정력이라 하고, 각(覺)에는 정각(正覺)이라 하고 정(正)에는 정정(正定)이라 하고, 8대인각(大人覺)에는 정각(定覺)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수릉엄삼매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세 가지 정(定)을 구족하였으니 상과 중과 하이다. 상정(上定)은 불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며, 중정(中定)은 모든 중생이 초선(初禪)을 구족하였으니, 인연이 있으면 닦아 익히고 인연이 없으면 닦지 못한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재(火災)이며, 둘째는 욕계의 결박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모두 중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한다. 하정은 10대지(大地) 중에 심수정(心數定)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하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한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지만 번뇌에 덮여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10주 보살이 비록 1승을 보지만 여래가 항상 머무는 법인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10주 보살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수릉(首楞)이라 함은 온갖 일이 필경이라는 말이며, 엄(嚴)은 견고하다는 말이니 온갖 일이 필경에 견고함을 얻으므로 수릉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릉엄정(首楞嚴定)을 불성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내가 어느 때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아난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목욕하려고 하니 너는 옷과 비누[澡豆]를 가져 오너라’ 하고 물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온갖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생물들이 모두 와서 나를 보고, 또 500의 범지(梵志)들이 강가에 왔다가 나에게 와서 서로 말하기를 ‘어떻게 금강 같은 몸을 얻었는가? 만일 구담이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따라서 재계하는 법을 받으리라’ 하였다. 내가 그때에 타심통[他心智]으로 범지의 마음을 알고 범지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말한다고 하는가?’
범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담이여, 먼저부터
여러 경에서 모든 중생들은 모두 내가 없다[無我]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아주 없다는 소견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없다면 계행을 갖는 이는 누구며, 계행을 파하는 이는 누구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모든 중생이 모두 내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불성이 어찌 내가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나는 아주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고 한다.’
그때 여러 범지들은 불성이 곧 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고 나서 마침내 출가하여 보리도[菩提道]를 닦았다.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생물들도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마음을 내고 나서 곧 몸을 버렸다. 선남자야, 이 불성이 실제로는 내가 아니지만 중생을 위하여 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선남자야, 여래는 인연이 있으므로 내가 없는 것을 말하여 나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내가 없으며 비록 이런 말을 하였으나 허망하지 않다. 선남자야, 인연이 있으므로 나를 말하여 내가 없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내가 있는 것이며, 세계를 위하여 비록 내가 없다고 하였으나 허망하지 않다. 불성은 내가 없지만 여래가 나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항상한 까닭이며, 여래는 나이지만 내가 없다고 말한 것은 자재함을 얻은 까닭이다.”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는 것이 금강역사와 같다면 무슨 이치로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마치 색법(色法)이 비록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이 다르고, 길고 짧은 모양이 있지만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이며, 소경이 보지 못한다 하여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길고 짧은 모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소경은 비록 보지 못하나 눈이 있는 이는 보는 까닭이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은 보지 못하나 10주 보살은 일부분을 보고 여래는 전부를 본다.
10주 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밤에 색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낮에 색을 보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애꾸눈이 물체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지만 용한 의원이 눈병을 치료하면 약의 효력으로 분명하게 보게 되듯이 10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치 못하지만 수릉엄삼매의 힘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선남자야, 만일 어떤 사람이 온갖 법[一切法]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이런 사람은 불성을 보지 못한다. 온갖 법은 생사라 이름하고 온갖 법 아닌 것은 3보를 이름한 것이다. 성문과 연각은 온갖 법이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이런 뜻으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10주 보살은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부분적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본다. 이런 뜻으로 10분(分) 가운데서 한 부분을 본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로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으로 본다. 이런 뜻으로 불성 보기를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한다. 이런 뜻으로 수릉엄정을 필경이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마치 초하루 달을 볼 수는 없으나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범부들이 보지 못하지만 불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선남자야, 불성이라고 함은 10력과 4무소외(無所畏)와 크게 불쌍히 여김과 3념처(念處)이다. 모든 중생은 모두 세 가지로 번뇌를 깨뜨림이 있으므로 그런 뒤에야 보는 것이며, 일천제들은 일천제를 깨뜨린 뒤에 10력과 4무소외와 크게 가엾이 여김과 3념처를 얻는다.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선남자야, 12인연은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가진 것이며,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무엇을 인연이라고 하는가? 과거의 번뇌를 무명이라 하고, 과거의 업을 행(行)이라 하고, 현재 세상에 처음으로 태에 드는 것을 식(識)이라 하고, 태에 들어서 5분(分)과 4근(根)이 구족하지 못한 것을 명색(名色)이라 하고, 4근을 구족하였으나, 촉(觸)이라 이름할 수 없는 때를 6입(入)이라 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이라 하고,
한 가지 사랑[一愛]에 물드는 것을 수(受)라 하고, 5욕을 익혀 가까이함을 애(愛)라 하고, 안과 밖으로 탐하여 구함을 취(取)라 하고, 안과 밖의 일을 위하여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일으킴을 유(有)라 하고, 현재 세상의 식을 미래의 생(生)이라 하고, 현재의 명색ㆍ6입ㆍ촉ㆍ수를 미래 세상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12인연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비록 12인연을 가지고 있으나 혹은 구족하지 못하니, 가라라(歌羅羅) 때에 죽으면 12인연이 없고, 생으로부터 늙고 죽는 데 이르면 12인연을 구족하는 것이다. 색계의 중생들은 세 가지
수와 세 가지 촉과 세 가지 애가 없고, 늙고 병드는 일이 없지만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하며, 무색계의 중생들은 색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지만 역시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반드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평등하게 12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말하였다.
선남자야, 설산에 이름을 인욕(忍辱)이라고 하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나는 것이다. 또 이상한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없어진다. 비록 제호가 없어지더라도 설산에 인욕초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불성도 그와 같다. 설산이라고 함은 여래를 말하며 인욕초는 대열반을 말하고, 이상한 풀은 12부경을 말한다. 중생이 만일 대반열반을 듣고 물으면 불성을 볼 것이니, 12부경 가운데에 비록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선남자야, 불성은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고,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며, 모양이기도 하고 모양이 아니기도 하고,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 아니기도 하고,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다. 또한 항상함도 아니고 아주 없음[斷]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고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다. 인이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고,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기도 하며,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고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며, 글자이기도 하고 글자 아니기도 하고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다.
어찌하여 색이라고 하는가? 금강 같은 몸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색이 아니라고 하는가? 18불공법(不共法)은 색법이 아닌 까닭이다. 어찌하여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닌가? 색과 색 아닌 데에 일정한 모양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모양이라고 하는가? 32
상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모양이 아니라 고 하는가? 모든 중생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모양과 모양 아닌 데에 결정치 못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하나라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다 1승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가 아니라고 하는가? 3승을 말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헤아릴 수 있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항상함이 아니라고 하는가? 인연을 따라 보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아주 없음이 아니라고 하는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여읜 까닭이다. 어찌하여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나중과 처음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있다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모두 가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없다고 하는가? 알맞은 방편을 따라서 보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허공의 성품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다한다고 하는가? 수릉엄삼매를 얻은 까닭이다. 어찌하여 다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라고 하는가? 모든 다했다는 모양이 없어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인이라고 하는가? 요인(了因)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과라고 하는가? 결과가 결정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뜻이라고 하는가? 뜻에 장애 없음[義無礙]을 모두 거두어 가진[攝取] 까닭이다.
어찌하여 뜻이 아니라고 하는가?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필경까지 공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라고 하는가? 이름이 있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가 아니라 고 하는가? 이름하는 것이 이름이 없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온갖 글자가 없어진 까닭이다. 어찌하여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고 하는가? 온갖 받는 것[受]을 없앤 까닭이다.
어찌하여 내가 아니라고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함[八自在]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나도 아니고 나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이라고 하는가? 제일의공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이 아니라고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다. 어찌하여 공도 아니며 공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가? 선한 법을 위하여 종자가 되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대열반경』의 이러한 뜻을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성을 본 것이다. 불성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부처님 여래의 경계이고 성문이나 연각이 아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불성은 5음도 18계도 6입도 아니며, 본래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도 아니며,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선한 인연을 따라야 중생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검은 쇠[黑鐵]가 불에 들어가면 붉어지고, 나와서 식어지면 도로 검어지는 것과 같다. 이 검은 빛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불성도 그러하여 모든 중생의 번뇌의 불이 꺼지면 보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씨앗이 소멸하여 싹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싹의 본성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는 것이며 꽃의 열매 또한 이와 같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선남자야,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은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다. 불성도 그러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몇 가지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기에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들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셨기에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까?”
“선남자야, 보살은 열 가지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였으므로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다. 무엇이 열인가? 첫 번째는 욕심이 적고[少欲] 두 번째는 만족함을 알고[知足] 세 번째는 고요함[寂靜]이며 네 번째는 정진이며 다섯 번째는 바른 생각[正念]이다. 여섯 번째는 바른 정[正定]이며 일곱 번째는 바른 지혜[正慧]이며 여덟 번째는 해탈이고 아홉 번째는 해탈을 찬탄함이며, 열 번째는 대열반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욕심이 적은 것과 만족함을 아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야, 욕심이 적은 것은 구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 것이며, 만족함을
아는 것은 적게 얻었을 때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욕심이 적은 것은 하고자 함이 적음이며 만족함을 아는 것은 불법의 일만 위하고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욕심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나쁜 욕심이며, 둘째는 큰 욕심이고, 셋째는 욕망의 욕심[欲欲]이다. 나쁜 욕심이란 것은 만일 비구가 탐욕을 내서 모든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비구들이 나의 뒤에 따르고, 여러 사부대중이 모두 나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존중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내가 가장 먼저 사부대중에게 법을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으며, 국왕ㆍ대신ㆍ장자들도 모두 나에게 공양하여 나로 하여금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와 의약과 훌륭한 가옥을 많이 얻어서 생사의 욕망을 만족하려 하면 이것은 나쁜 욕심이다.
어떤 것이 큰 욕심인가? 만일 비구가 욕심을 내어서, ‘어찌하면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내가 초주(初住)에서부터 나아가 10주를 얻었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아라한과에서부터 나아가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4선(禪)과 4무애지(無礙智)를 얻은 줄을 알게 할 것인가?’라고 하며, 이양을 위한다면 이것은 큰 욕심이다.
욕망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만일 비구가 범천에나 마왕천에나 자재천에나 전륜성왕이나 찰제리나 바라문으로 태어나서 자재하고자 하면, 이는 이양을 위하는 것이므로 욕망의 욕심이라고 한다.
만일 이런 세 가지 나쁜 욕심의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는 욕심이 적다고 한다. 욕심은 25애(愛)라고 하는데, 25애가 없으면 욕심이 적다고 한다.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을 구하지 않으면 욕심이 적다고 하고, 얻고도 집착하지 않으면 만족한 줄 안다고 하며, 공경을 구하지 않으면 욕심이 적다 하고, 얻고도 쌓아 두지 않으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야, 또 욕심은 적으나 만족함을 안다고 하지 못할 것이 있으며, 만족할 줄은 아나 욕심이 적다고 하지 못할 것도 있으며,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안다고 할 것이 있으며, 만족한 줄도 모르고 욕심도 적지 않다고 할 것이 있다. 욕심이 적은 이는 수다원이며, 만족함을 아는 이는 벽지불이고,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아는 이는 아라한이고, 욕심도 적지 않고 만족함도 모르는 이는 보살이다.
선남자야,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 데 또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선한 것이며 둘째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은 범부이며 선한 것은 성인과 보살이다. 모든 성인은 비록 도과(道果)를 얻었으나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시끄럽지 않다. 이것을 이름하여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대승 『대열반경』을 닦아서 불성을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 것을 닦아 익혔다고 한다.
어떤 것을 고요함이라고 하는가? 고요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고요하고 둘째는 몸이 고요함이다. 몸이 고요함은 몸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않는 것이고, 마음이 고요함은 뜻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한다. 몸이 고요한 이는 사부대중을 친근히 하지 않고, 사부대중의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으며, 마음이 고요한 이는 마침내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을 익히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한다.
어떤 비구는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이가 있고,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다.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고요한 데서 좌선(坐禪)하느라고 사부대중을 멀리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쌓아 둔다. 이를 일러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다고 한다.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사부대중과 국왕과 대신을 친근히 하면서도, 마음에는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을 끊었으면 이것을 말하여 마음은 고요하나 몸은 고요하지 못하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는 부처님과 보살이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는 모든 범부들이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몸과 마음이 비록 고요하더라도,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음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범부들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법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일천제들은 4중금을 범하고 5역죄를 지으므로 이런 사람들도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이름하지 못한다.
어떤 것을 정진이라고 하는가? 어떤 비구가 몸과 입과 뜻으로 하는 업이 깨끗하기 위하여 온갖 선하지 못한 업을 멀리 여의고, 모든 선한 업을 닦는 것을 정진이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는 이는 여섯 군데에 생각을 둔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와 계율과 보시와 하늘이다. 이것을 바른 생각[正念]이라고 한다.
바른 생각을 갖춘 이가 얻는 삼매를 바른 정[正定]이라고 한다.
바른 정을 갖춘 이는 모든 법을 관찰하되 허공과 같이 한다. 이것을 바른 지혜[正慧]라고 한다.
바른 지혜를 갖춘 이는 온갖 번뇌의 결박을 여의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을 얻은 이는 중생들을 위하여 해탈을 칭찬하면서, 이 해탈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해탈은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며, 열반은 곧 번뇌로 결박한 불이 꺼지는 것이다. 또 열반은 집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번뇌라는 사나운 비바람을 막는 까닭이다. 또 열반은 귀의할 데라고 한다. 왜냐하면 능히 모든 공포를 없애는 까닭이다. 또 열반은 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네 가지 빠른 물결[四暴流]로도 떠내려 보낼 수 없는 까닭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욕심 빠른 물결[欲暴流]이며 둘째는 유(有)의 빠른 물결이며 셋째는 소견의 빠른 물결이며, 넷째는 무명의 빠른 물결이다. 그러므로 열반을 섬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필경에 돌아갈 곳이다. 왜냐하면 모든 필경의 낙을 얻는 까닭이다. 만일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 갖추면 불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출가한 사람에게 네 가지 병이 있어서 네 가지 사문의 과를 얻지 못한다. 무엇을 네 가지 병이라고 하는가? 네 가지 나쁜 탐욕이니, 첫째는 의복을 위한 탐욕이며 둘째는 음식을 위한 탐욕이며 셋째는 와구를 위한 탐욕이며, 넷째는 유(有)의 탐욕이다. 이것을 네 가지 나쁜 탐욕이라고 한다.
이 출가한 이의 병은 네 가지 좋은 약이 있어 치료하는데, 누더기옷[糞掃衣]으로는 비구의 의복을 위하는 탐욕을 고치고, 걸식함으로는 음식을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나무 밑에 앉음으로는 와구를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몸과 마음이 고요함으로는 비구들의 유(有)의 탐욕을 깨뜨린다. 이 네 가지 약으로 네 가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성인의 행이라고 하며, 이런 성인의 행을 일러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고요함은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는 출가한 즐거움이며, 둘째는 고요한 즐거움이고 셋째는 영원히 멸하는 즐거움이며 넷째는 끝까지 즐거움이다. 이 네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고요하다고 한다.
4정진을 갖추었으므로 정진이라 하고, 4념처(念處)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생각이라 하고, 4선정을 갖추었으므로 바른 정이라 하고, 네 가지 진실한 이치[四聖實]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지혜라 하고, 모든 번뇌의 결박을 영원히 끊었으므로 해탈이라 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꾸짖으므로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경을 듣고 친근히 하고 닦아서 모든 세상일을 멀리 여의면 욕심이 적다 하고, 출가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만족함을 안다 하고, 고요한 곳을 가까이하고 시끄러운 데를 멀리 여의면 고요하다고 한다.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하지 않지만,
만족함을 아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한다. 그리고 고요한 데서 항상 생각하기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말하여 사문의 도를 얻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얻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을 속이겠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사문의 도과를 닦는 것을 정진이라 하고, 대열반을 친근히 하여 익힘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하늘의 행을 따라 익힘을 바른 정이라 하고, 이 정에 편안하게 머물러 옳게 보고 옳게 아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옳게 보고 옳게 아는 이가 번뇌의 결박을 멀리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10주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욕심이 적다는 것은 비구가 고요한 데 있어서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거나, 나무 밑에 있거나 무덤 곁에 있거나 한데[露處]에 있거나 풀밭에 가서 앉으며, 걸식하여 먹으면서 얻는 대로 만족하고, 혹은 한 자리에서 먹으면서 한 때만 먹고, 세 가지 가사와 누더기 옷과 취의(毳衣)1)만을 가지면, 이것을 욕심이 적다고 한다.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것을 고요하다고 하고, 4과를 얻고도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쉬지 않음을 정진이라 하고, 여래는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고 마음을 두어 생각함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8해탈을 닦음을 바른 정이라 하고, 4무애를 얻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일곱 가지 누(漏)를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열반에는 열 가지 모양이 없다고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열 가지 모양은 낳는 것ㆍ늙는 것ㆍ병나는 것ㆍ죽는 것ㆍ색ㆍ소리ㆍ향기ㆍ맛ㆍ촉감ㆍ무상이다. 이 열 가지를 여의는 것을 대열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다.
또 선남자야, 탐욕이 많아서 국왕ㆍ대신ㆍ장자ㆍ찰제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를 친근히 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나, 나아가 아라한과를 얻었다’라고 하여 이양을 위하며, 가고 서고 앉고 눕거나 나아가 대소변을 하다가도 단월을 만나면 공경을 행하거나 상대하여 말을 하여 나쁜 욕심을 파하는 이는 욕심이 적다고 이름하며, 모든 번뇌를 깨뜨리지 못하였더라도, 여래의 행하는 곳과 같이 하면 만족함을 안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두 가지 법은 바른 생각과 바른 정에 가까워지는 인연이며, 스승이나 함께 공부하는 이의 칭찬을 받으며, 나도 항상 여러 경전에서 이 두 가지 법을 찬탄하였으니, 이 두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는 대열반의 문과 다섯 가지 낙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계행을 굳게 지니는 이를 정진이라 하고, 부끄러움이 있는 이를 바른 생각이라 하고, 마음의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 하고, 모양이
없어져서 번뇌가 끊어짐을 해탈이라 하고, 이러한 『대열반경』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문다고 하는데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는 않다.
선남자야, 그대가 묻기를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기에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고, 부처님 세존께서는 무슨 눈이기에 불성 보기를 분명히 하는가?’라고 하였다. 선남자야, 혜안(慧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불안(佛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한 것이며, 보리행을 하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행함이 없으므로 분명한 것이다.
10주에 머물렀으므로 보는데도 분명하지 못하고,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므로 분명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지혜의 인이므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끊었으므로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온갖 것을 깨달은 것을 불성이라고 하지만, 10주 보살은 온갖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비록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다.
선남자야, 보는 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들어서 보는 것[聞見]이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눈으로 불성을 보시므로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하시고, 10주 보살은 불성을 들어서 보므로 분명하지 못하다. 10주 보살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스스로는 알지만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선남자야, 또 눈으로 보는[眼見] 일이 있으니, 부처님 여래와 10주 보살은 불성을 눈으로 본다. 또 들어서 보는 일이 있으니 모든 중생과 9지 보살들은 불성을 들어서 본다. 보살이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믿음을 내지 않으면 들어서 본다고 할 수 없다.
선남자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하거든 마땅히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해야 한다.”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관찰하여야 알게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하면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들어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의 몸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눈으로 본다고 한다.
만일 여래의 입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들어서 본다고 한다. 만일 얼굴빛이 모든 중생으로는 같을 수 없는 줄을 본다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음성이 미묘하고 훌륭하여 중생들의 음성과 같지 않은 것을 들으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께서 짓는 신통이 중생을 위하는 것인가, 이양을 위하는 것인가 하여, 중생을 위하는 것이며 이양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본다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가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로 중생을 관찰할 때에 이양을 위하여 말하는 것인가, 중생을 위하여 말하는 것인가 하여, 중생을 위하는 것이며 이양을 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이것이 여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래가 어떻게 이 몸을 받았으며, 무슨 까닭으로 몸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하여 몸을 받았는가 하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래가 어떻게 법을 말하며 무슨 까닭으로 법을 말하며 누구를 위하여 법을 말하는가를 관찰하면,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몸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나에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내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다.
만일 보살이 처음 태어날 때에 시방으로 일곱 걸음씩 다녔고, 마니발타(摩尼跋陀)ㆍ부나발타(富那跋陀) 신장들이 깃발과 일산을 들고 한량없는 세계를 진동하여 금빛이 찬란하게 허공에 가득하였으며, 난타(難陀)용왕과 발난타(跋難陀)용왕이 신통의 힘으로 보살의 몸을 목욕시켰고
모든 하늘의 형상들이 영접하여 예배하였으며,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합장하여 공경하였고, 청년시절에는 욕락을 버리기를 침 뱉듯 하여 세상 향락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고요한 데를 좋아하였고,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6년 동안 고행하였으며,
또한 여러 중생에게 평등하여 둘이 없었고, 마음은 항상 선정에 있어 애초부터 산란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몸매가 단정하고 그 몸을 장엄하였고, 다니는 곳마다 언덕이나 구렁이 평탄하였으며, 옷은 몸에서 네 치쯤 떨어져 있어도 흘러내리지 않고, 다닐 때에는 앞만 보고 좌우로 살피지 않았다.
음식은 항상 갖춰져 있어 거르는 일이 없고, 앉고 일어나는 곳에는 풀이 요동하거나 어지럽지 않았으며,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가서 법을 말하되 마음에 교만이 없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
곧 보살은 일곱 걸음을 다니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 몸이 최후의 몸이다’라고 하였고, 아사타 선인도 합장하고 말하기를 ‘대왕은 아십시오. 실달 태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 전륜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2상과 80종호(種好)가 분명한 까닭입니다. 전륜왕은 상호가 분명하지 못하지만 태자의 상호는 매우 분명하시니,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보살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은 참으로 가련하다.
이렇게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므로 함께 따라다니면서도 보지 못하고 항상 괴로움만 행하니 내가 마땅히 끊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아라라(阿羅邏) 5통 선인에게서 무상정(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 나서 옳지 못함을 말하고, 울타(鬱陀) 선인에게서는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정[非有想非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 나서 열반이 아니고 나고 죽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또 6년 동안 고행하고서도 얻은 바가 없어서 말하기를 ‘고행을 하는 일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실지가 있다면 내가 마땅히 얻었을 것인데, 허망하기 때문에 얻은 바가 없으니 그것은 삿된 술법이며 바른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도한 뒤에 범천이 권청하기를 ‘바라건대, 여래께서 중생을 위하여 감로의 문을 열어 위없는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하니, 여래가 말하기를 ‘범왕이여, 모든 중생들이 번뇌에 가려져서 내가 말하는 바른 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천이 다시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세 가지가 있으니, 영리한 근성과 중품 근성과 둔한 근성입니다. 영리한 근성은 받을 수 있으니 말씀해주십시오’ 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왕이여,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감로문을 열리라’ 하시고, 바라나국에 나아가 바른 법륜을 운전하여 중도를 말씀하셨다. 이에 모든 중생이 여러 가지 결박을 깨뜨리지 않았으나 깨뜨리지 못한 것이 아니다. 깨뜨린 것도 아니며 깨뜨리지 못한 것도 아니므로 중도라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지 않았으나 제도하지 못한 것이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온갖 것을 이룬 것도 아니며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무릇 말한 것이 있으나 스스로 스승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제자라고 말하지도 않으므로 중도라고 한다.
말하는 것이 이양을 위함이 아니며 과를 얻지 못함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바른 말이며 진실한 말이며 때에 맞는 말이며 참된 말이며, 말을 헛되이 내지 않아 미묘하기가 제일이다. 이런 법을 들어서 본다고 한다.
선남자야,
여래의 마음은 실제로 볼 수 없지만,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두 가지 인연을 의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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