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1권
대반열반경 제21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0.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①
그때 세존께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摩訶薩)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대열반경』을 수행하면 열 가지[十事] 공덕을 얻어 성문ㆍ벽지불과는 함께하지 않는다. 생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며 듣는 이가 놀라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며,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며 모양[相]도 아니고 모양 아닌 것도 아니며, 세상법도 아니고 형상도 없고 세간에는 없는 것이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 듣지 못한 것을 듣는 것이며, 둘째 듣고 나서 이익이 되는 것이며, 셋째 의혹하는 마음을 끊는 것이며, 넷째 지혜의 마음이 곧고 굽지 않은 것이며, 다섯째 능히 여래의 비밀한 법장[密藏]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라고 한다.
어떤 것이 ‘듣지 못한 것을 듣는 것’인가? 매우 깊고 미세하고 비밀한 법장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고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가 차별이 없으며, 삼보의 성품과 모양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며, 모든 부처님께서 필경까지 열반에 드시는 분이 없고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다. 그래서 여래의 열반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함이 있는[有爲] 것도 아니고 함이 없는 것[無爲]도 아니며, 샘이 있는 것[有漏]도 아니고 샘이 없는 것[無漏]도 아니며, 색(色)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이름 아님도 아니며, 모양[相]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며, 있음[有]도 아니고 있지 않음도 아니며, 물질[物]도 아니고 물질 아님도 아니며,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기다림[待]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음도 아니며, 밝음[明]도 아니고 어둠[暗]도 아니며, 나옴[出]도 아니고 나오지 않음도 아니며, 항상함[常]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며, 끊음[斷]도
아니고 끊지 않음도 아니며, 처음[始]도 아니고 끝[終]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음(陰)1)도 아니고 음 아님도 아니며, 입(入)도 아니고 입 아님도 아니며, 계(界)도 아니고 계 아님도 아니며, 12인연도 아니고 12인연 아님도 아니다. 이와 같은 법이 매우 깊고 미세하고 비밀하며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을 능히 듣는 것이다.
또 듣지 못하던 것이 있으니, 모든 외도들의 경전으로서 4비타론(毗陀論)2)ㆍ비가라론(毗伽羅論)3)ㆍ위세사론(衛世師論)4)ㆍ가비라론(迦毗羅論)5)ㆍ모든 주문[呪術]ㆍ의방(醫方)ㆍ기예(伎藝)ㆍ일식과 월식ㆍ별들[星宿]의 운행ㆍ도서(圖書)ㆍ참기(讖記) 따위이다. 이러한 경들에 대해 애초부터 듣지 못하던 비밀한 뜻을 이 경전에서 듣게 되며, 또 비불략(毗佛略)6)을 제외한 11부 경에도 없던 비밀한 이치를 이 경전으로 인하여 알게 된다. 선남자야, 이것을 일러 듣지 못하였으나 듣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듣고 나서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만일 이 『대열반경』을 들으면 온갖 방등 대승경전의 매우 깊은 이치를 모두 아는 것이다. 마치 남자나 여자가 밝고 깨끗한 거울 속에서 자기의 형상을 분명하게 보듯이 대열반의 거울도 그와 같아서 보살들이 붙잡으면 대승경전의 깊은 이치를 모두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횃불을 들면 모든 물건들을 다 볼 수 있듯이, 대열반의 횃불도 그러하여 보살이 들면 대승의 깊고 오묘한 뜻을 보게 된다. 또 해가 뜨면 밝은 광명이 모든 산의 깊고 어두운 데를 비추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사물을 보게 하듯이 대열반의 지혜의 해도 그와 같이 대승의 깊은 이치를 비추어서 2승들로 하여금 부처님 도를 보게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듣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대반열반경』을 들으면 모든 법의 이름을 들으며, 만일 쓰고 읽고 외우고 통달하여 다른 이에게 말하여 주고 뜻을 생각하면 모든 법의 이치를 알게 된다. 선남자야, 듣기만 하는 이는 이름만 알고 뜻을 모르지만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그 뜻을 생각하면 그 뜻을 알게 된다.
또 선남자야, 이 경전을 듣는 이는 불성이 있음을 듣기만 하고 보지는 못하지만 읽고 외우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뜻을 생각하는 이는 보게 된다. 이 경을 듣기만 하는 이는 보시[檀]의 이름을 알기만 하고 보시바라밀을 보지는 못하지만 쓰고 읽고 외우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뜻을 생각한다면 보시바라밀을 보게 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까지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대열반경』을 들으면 법도 알고 뜻도 알며 두 가지 걸림 없음을 갖추어서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마군이나 범천 등 모든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12부경을 열어 보이고 분별하며 그 뜻을 연설하는 데 잘못됨이 없을 것이며, 다른 이에게서 듣지 않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움을 스스로 알 것이다. 선남자야, 이것을 일러 듣고 나서 이익이 된다고 한다.
의혹하는 마음을 끊는다고 하는 것에는, 의혹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을 의혹함[疑名]이며, 둘째는 뜻을 의혹함[疑義]이다. 이 경을 들은 이는 이름을 의혹하는 마음을 끊고, 뜻을 생각하는 이는 뜻을 의혹하는 마음을 끊는다. 또 선남자야, 의혹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반드시 열반하는가를 의혹하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항상 계시는가를 의혹하고, 셋째 는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즐거운가를 의혹하고, 넷째는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깨끗한가를 의혹하고, 다섯째는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나[我]가 있는가를 의혹하는 것이다. 이 경을 들은 이는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열반하는가 하는 의혹을 영원히 끊게 되고, 쓰고 읽고 외우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뜻을 생각하는 이는 네 가지 의혹을 영원히 끊게 된다.
또 선남자야, 의심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문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연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불승(佛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 경을 들은 이는 이런 세 가지 의심을 영원히 끊어 남음이 없고, 쓰고 읽고 외우고 다른 이에게 말하고 뜻을 생각하면 온갖 중생에게 모두 불성(佛性)이 있음을 안다.
또 선남자야, 만일 중생들이 이와 같이 『대반열반경』을 듣지 못하면 그 마음에 의심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항상한가[常] 무상한가, 즐거운가[樂] 즐겁지 않은가, 깨끗한가[淨] 깨끗하지 못한가, 나[我]가 있는가 나가 없는가, 수명[命]인가 수명이 아닌가, 필경(畢竟)인가 필경이 아닌가, 다른 세상[他世]인가 지나간 세상[過世]인가, 있는가[有] 없는가, 고통[苦]인가 고통이 아닌가, 집(集)인가 집이 아닌가, 도(道)인가 도가 아닌가, 멸(滅)인가 멸이 아닌가, 법(法)인가 법이 아닌가, 선(善)인가 선이 아닌가, 공(空)한가 공하지 않은가 따위이다. 이 경을 들은 이는 이런 의심들이 아주 끊어진다.
또 선남자야, 이런 경을 듣지 못한 이는 갖가지 의혹이 많으니, 색이 나인가,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나인가, 눈이 보는가, 내가 보는가, 나아가 식이 아는가, 내가 아는가, 색이 과보를 받는가 내가 과보를 받는가, 나아가 식이 과보를 받는가, 내가 과보를 받는가이다. 또 색이 다른 세상에 가는가 내가 다른 세상에 가는가, 나아가
식도 그와 같으며, 나고 죽는 법이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는가, 처음이 없고 나중이 없는가이다. 그러나 이 경을 듣는 이는 이런 의혹을 영원히 끊게 된다.
또 어떤 이는, 일천제7)는 4중금(重禁)을 범하고 5역죄를 지으며 방등경전을 비방하는데, 이런 무리들은 불성이 있는가 불성이 없는가를 의혹한다. 그러나 이 경을 듣는 이는 이런 의혹이 모두 끊어진다. 또 어떤 이는, 세간이 끝[邊]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시방세계가 있는가 시방세계가 없는가를 의혹 하지만, 이 경을 듣는 이는 이런 의심들이 아주 없어진다. 이것을 일러 의혹하는 마음을 끊는다고 한다.
‘지혜의 마음이 곧고 굽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에 의혹이 있으면 소견이 바르지 못하니, 모든 범부들이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듣지 못하면 소견이 삿되게 잘못되고, 나아가 성문ㆍ연각들도 소견이 잘못된다. 무엇을 일러 모든 범부들의 소견이 삿되게 잘못됐다고 하는가? 유루(有漏)가운데에서 항상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보고, 여래에게는 무상하고 고통이고 깨끗하지 않고 내가 없다고 보며, 중생과 수명(壽命)과 지견(知見)이 있다고 보며,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처소를 헤아려 열반이라고 하며, 자재천(自在天)에 8성도(聖道)가 있다고 보며, 있다는 소견ㆍ없다는 소견 따위를 잘못됐다고 하지만 보살마하살이 이 『대열반경』을 듣고 거룩한 행[聖行]을 닦으면 이렇게 잘못된 소견을 끊게 된다.
어떤 것을 성문ㆍ연각의 삿되고 잘못된 소견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도솔타천에서 내려와 흰 코끼리를 변화해 내어 타고 어머니의 태에 드시니, 아버지는 정반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가비라성(迦毗羅城)에서 태중에 있다가 열 달이 차서 태에서 나올 때에 땅에 닿기 전에 제석천왕이 받들어
모시고, 난타용왕과 바난타용왕은 물을 뿜어 몸을 씻기고, 마니발타(摩尼跋陀) 대귀신왕은 보배 일산을 받들고 뒤에 모시고 섰으며, 지신(地神)은 연꽃을 변화로 지어 발을 받드니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었고, 천신의 사당에 이르자 천신의 상[天像]들이 일어나 맞았다.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와서 태자를 안고 상(相)을 보았으며, 상을 보고 나서는 슬픈 생각을 내어 부처님께서 출현하심을 보지 못할 것을 스스로 서러워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과 산수와 활쏘기, 말 타기와 도참(圖讖)과 기예를 배웠으며, 깊은 궁전에 있어서는 6만 채녀와 더불어 즐겁게 향락하였다. 네 군데 문으로 나가 유람하다가 가비라 동산에 이르는 도중에 노인과 나아가 법복을 입고 가는 사문을 보았고, 궁중에 돌아와서 채녀들을 보니 형상은 마치 송장과도 같고 소유한 궁전은 무덤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싫어져서 집을 떠나 밤중에 성을 넘었으며, 울다가(鬱陀伽)8)와 아라라(阿羅邏)9) 신선에게 가서 식처천(識處天)과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나서 그런 곳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부정하고 내가 없음을 관찰하였으며, 거기를 버리고 나무 아래 가서 6년 동안 고행을 닦으면서 이런 고행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때 다시 아리발제(阿利跋提)10)강에 이르러 목욕하고, 마침 소 기르는 여자가 받드는 우유죽을 받고 나서 보리수 아래로 가서 마왕 파순을 패배시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다. 바라나(波羅奈)11)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법의 수레를 굴리셨고, 나아가 구시나성(拘尸那城)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런 소견을 말하여 성문ㆍ연각의 잘못된 소견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대반열반경』을 들으면
이러한 소견들을 끊어 버리게 되며, 만일 쓰고 읽고 외우고 통달하여 다른 이에게 연설하고 뜻을 생각하면 올바른 소견을 얻어 잘못된 소견이 없어진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대열반경』의 가르침[諦]을 수행하면 보살이 한량없는 겁으로부터 도솔타천에서 내려와서 어머니의 태에 들며, 나아가 구시나성에서 반열반에 드시지 않을 줄을 알 것이다. 이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올바른 소견이라고 한다.
‘여래의 비밀한 뜻을 능히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대반열반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어서 네 가지 중대한 계율 범한 것을 참회하고, 법을 비방한 죄를 없애고, 5역죄를 끝내고, 일천제를 멸하며, 그런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깊고 비밀한 뜻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무엇을 매우 깊은 뜻이라고 하는가? 비록 중생에게 진실로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음을 알지만 미래에 업의 과보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비록 5음이 여기서 소멸함을 알지만 선악의 업은 마침내 없어지지 않으며, 비록 여러 가지 업이 있지만 짓는 이가 없으며, 비록 이르는 곳이 있으나 가는 이가 없으며, 비록 속박이 있으나 속박 받는 이가 없으며, 비록 열반이 있으나 열반하는 이가 없으니, 이것을 일러 깊고 비밀한 뜻이라고 한다.”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光明遍照高貴德王)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는 뜻을 해석하기로는, 그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만일 있다면 반드시 있을 것이고, 법이 만일 없다면 반드시 없을 것이니, 없는 것이면 생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면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들을 것이면 곧 들었을 것이며, 만일 듣지 못할 것이면 곧 듣지 못할 것인데, 어찌하여 듣지 못할 것을 듣는다고 하십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들을 수 없는 것이면
그것은 듣지 못할 것이며, 만일 이미 들었으면 다시 듣지 않을 것이니, 이미 들은 까닭인데, 어찌하여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하십니까?
비유하면 가는 이가 이르렀으면 가지 않을 것이며, 간다면 이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났으면 나지 않을 것이며, 나지 않은 것이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얻었으면 얻지 않을 것이며, 얻지 못하는 것이면 얻지 못할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들었으면 듣지 않을 것이며, 듣지 못하는 것이면 듣지 못할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면 모든 중생이 보리를 소유(所有)하지 못한 것을 마땅히 소유할 것이며, 열반을 얻지 못한 것을 마땅히 얻을 것이며, 불성을 보지 못하였으나 마땅히 볼 것인데, 어찌하여 10주(住) 보살이 비록 불성을 보아도 분명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면, 여래께서는 옛적에 누구에게서 들으셨으며, 만일 듣는다 하시면,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아함(阿含) 가운데에서 다시 스승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만일 듣지 못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도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다면, 모든 중생들도 듣지 못한 것을 듣지 못하고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여래께서 만일 이 『대열반경』을 듣지 못하고 불성을 보았다면, 모든 중생들이 이 경을 듣지 못하였으나 또한 마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색(色)이란 것은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볼 수 없는 것도 있으며, 소리[聲]도 그와 같아서 들을 것도 있고 듣지 못할 것도 있지만, 이 대열반은 색도 아니고 소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보고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까? 세존이시여, 과거는 이미 없어졌으므로 들을 수 없고, 미래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들을 수 없으며, 현재 들을 때에는 듣는다고 하지 못할 것이니, 들었으면 소리는 이미 없어졌으니 다시 들을 수 없습니다. 이 대반열반도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아닙니다. 만일 3세가 아니라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들을 수가
없는데, 어찌하여 보살이 이 『대열반경』을 닦으면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는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을 찬탄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네가 지금 온갖 법이 환술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건달바성과 같고 물에 그린 자취와 같으며, 물거품 같고 파초나무가 공하여 실속이 없는 것 같으며, 수명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음을 잘 알았으니, 10주 보살의 지견과 같다.”
그때 대중 가운데에 홀연히 큰 광명이 있었다. 푸르지 않은데 푸르게 보고, 누르지 않은데 누르게 보고, 붉지 않은데 붉게 보고, 희지 않은데 희게 보며, 빛깔이 아닌데 빛깔을 보고, 밝지 않은데 밝게 보고, 보는 것이 아닌데 보게 되었다. 그때 대중들이 이 광명을 만나고 나서 몸과 마음이 쾌락하기가 마치 비구들이 사자왕정(師子王定)에 든 듯하였다.
그때 문수사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광명은 누가 놓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말씀하지 않으셨다.
가섭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물었다.
“무슨 인연으로 이 광명이 대중에게 비치는 것입니까?”
문수보살 역시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무변신(無邊身)보살이 가섭보살에게 이 광명은 누구의 것인지를 물었으나 가섭보살은 잠자코 말하지 않았고, 정주왕자(淨住王子)보살이 무변신보살에게 무슨 인연으로 대중 가운데 이 광명이 있는가를 물었으나 무변신보살도 잠자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500보살이 서로 물었으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물으셨다.
“문수사리여,
무슨 인연으로 대중 가운데 이 광명이 있는가?”
문수사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광명은 지혜(智慧)라고 하며, 지혜는 항상 머무는 것이고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 광명이 있느냐?’고 물으십니까? 이 광명은 대열반이라 이름하고 대열반은 항상 머문다 하며,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묻기를 ‘무슨 인연으로 이 광명이 있느냐?’고 하십니까? 이 광명은 곧 여래이며, 여래께서는 항상 머무시는 것이고,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을 물으십니까? 이 광명은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하고 대자대비는 항상 머무는 것이라 하며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을 물으십니까? 이 광명은 곧 염불이며 염불은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하며,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을 물으십니까? 이 광명은 모든 성문ㆍ연각과 함께하지 않는 도[不共之道]이며, 모든 성문ㆍ연각과 함께하지 않는 도는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하며, 항상 머무는 법은 인연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을 물으십니까? 세존이시여, 역시 인연이 있으니, 무명이 없어짐으로 인하여 곧 환하게 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불을 얻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너는 모든 법의 깊고 깊은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가지 말고 세상법[世諦]으로써 해설하여라.”
문수사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동쪽으로 20항하사(恒河沙)만큼의 세계를 지나서 한 세계가 있는데 이름을 부동(不動)이라고 합니다. 그 부처님 계시는 곳은 가로와 세로가 똑같아서 1만 2천 유순이며, 땅은
7보로 되어 흙이나 돌이 없고 반듯하고 단정하고 부드러워 도랑과 구덩이가 없습니다. 그곳의 나무들은 네 가지 보배로 되어 있으니 금과 은과 유리와 파리이며, 꽃과 열매가 무성하여 없는 때가 없습니다. 만일 중생이 그 꽃향기를 맡으면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마치 비구가 제삼선(第三禪)에 든 듯합니다. 그 주위에 다시 3천의 강이 있는데, 물이 미묘하여 여덟 가지 맛이 갖추어졌으며 만일 중생이 그 물에서 목욕하면 즐겁기가 제이선(第二禪)에 들어간 비구와 같습니다. 그 물에 가지각색 꽃이 있으니 우발라화(優鉢羅花)ㆍ파두마화(波頭摩花)ㆍ구물두화(拘物頭花)ㆍ분타리화(分陀利花)ㆍ향화(香花)ㆍ대향화(大香花)ㆍ미묘항화(微妙香花)와 모든 중생들이 애호하는 꽃입니다.
그 강의 양쪽 언덕에도 여러 가지 꽃이 있으니 아제목다가화(阿提目多伽花)ㆍ점파화(占婆花)ㆍ파타라화(波吒羅花)ㆍ파사라화(婆師羅花)ㆍ마리가화(摩利迦花)ㆍ대마리가화(大摩利迦花)ㆍ신마리가화(新摩利迦花)ㆍ수마나화(須摩那花)ㆍ유제가화(由提迦花)ㆍ단누가리화(檀迦利花)ㆍ상화(常花) 등 모든 중생들이 좋아하는 꽃입니다. 바닥에는 금모래가 깔리고, 네 가지 계단이 있으니 금ㆍ은ㆍ유리와 잡색 파리(頗梨)이며, 여러 가지 새들이 그 가운데 모여들고 또 한량없는 범ㆍ이리ㆍ사자 등 사나운 짐승들이 있으나 마음이 유순하여 어린 아기들처럼 서로 어울립니다.
그 세계에는 중대한 계율을 범한 자나 바른 법을 비방하는 자나 일천제(一闡提)나 5역죄를 짓는 자가 없으며, 그 토양이 조화롭고 기후가 알맞아 춥고 덥고 굶주리고 목마른 고통이 없고, 탐욕과 성내는 일과 방일하고 질투하는 일이 없고, 해와 달과 밤과 낮이 없는 것이 도리천(忉利天)과 같습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광명이 있고 교만한 마음이 없어서
모든 사람이 다 보살들이며, 모두 다 신통을 얻었고 큰 공덕을 구족하였으며, 마음으로 바른 법을 존중하여 대승에 올라타며 대승을 사랑하며, 대승을 즐거워하며 대승을 애호하며, 큰 지혜를 이룩하여 큰 총지(摠持)를 얻었고 마음으로는 항상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깁니다. 부처님 명호는 만월광명(滿月光明)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며 계시는 곳을 따라 법을 강설하시니, 그 나라의 중생들은 그 부처님께서 유리광(琉璃光)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이와 같이 『대열반경』을 연설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대열반경』을 수행하면 듣지 못한 것을 모두 듣게 된다’라고 하셨고, 저 유리광보살마하살이 만월광명(滿月光明)부처님께 여쭌 것도, 여기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물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 만월광명부처님께서 유리광보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여기서 서쪽으로 20항하사만큼의 부처님 국토를 지나면 거기 세계가 있는데, 이름이 사바(娑婆)이다. 그 세계에는 산과 구릉이 많고 흙ㆍ모래ㆍ자갈ㆍ돌ㆍ가시 등이 가득하며 항상 기갈과 춥고 더운 고통이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부모나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법답지 않은 것을 탐하며, 잘못된 법을 욕구하여 삿된 법을 행하고 바른 법을 믿지 않는다. 수명이 짧고 간사한 짓을 행하므로 국왕이 그것을 다스리며, 국왕이 나라를 가졌어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다른 임금이 가진 토지에 탐심을 내어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싸워 억울하게 죽는 이가 많다.
임금이 행하는 일이 이렇게 옳지 못하므로 사천왕과 선신들이 환희한 마음이 없고, 그리하여 가뭄과 재앙을 내려 곡식이 풍년 들지 못하고 괴질이 유행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니, 이름은 석가모니(釋迦牟尼)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순수하고 두터워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구시나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중을 위하여 이와 같이 『대열반경』을 연설하신다. 거기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광명변조고귀덕왕(光明遍照高貴德王)이다. 이미 이 일을 물은 것이 그대와 다름이 없어 부처님께서 지금 대답하시니, 네가 빨리 가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리광(琉璃光)보살은 이 말을 듣고 8만 4천 보살마하살과 더불어 이곳으로 오려 하므로 이런 상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 광명이 있으니 이것은 인연이라고도 하고 인연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때 유리광보살이 8만 4천 보살과 함께 많은 깃발과 일산과 향과 꽃과 영락과 가지가지 풍악이 앞의 것보다 갑절이나 훌륭한 것을 가지고 구시나성의 사라쌍수 사이로 와서, 가지고 온 공양거리로 부처님께 공양하고 얼굴을 부처님 발에 대어 예배하고 합장하고 공경하여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으며, 그렇게 공경하고 나서 물러가서 한쪽에 앉았다.
그때 세존께서 그 보살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도래(到來)하였는가, 도래하지 않았는가?”
유리광보살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이르렀어도 오지 않았고, 이르지 않았어도 오지 않았으니, 제가 이 뜻을 관찰하건대 도무지 오는 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행(行)이 항상하더라도 다시 오지 않았고,
무상하더라도 오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람이 중생의 성품이 있는 줄로 보면 오고 오지 않음이 있겠지만, 저는 지금 중생의 결정된 성품을 보지 않는데, 어찌 오고 오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교만이 있는 이는 가고 오는 일이 있음을 보지만, 교만이 없는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집착하는 행[取行]이 있는 이는 가고 옴이 있음을 보지만, 집착하는 행이 없는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만일 여래가 필경에 열반하는 줄로 보면 가고 옴이 있지만, 여래가 필경에 열반하는 줄로 보지 않으면 가고 옴이 없습니다.
불성을 듣지 못한 이는 가고 옴이 있지만 불성을 들은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성문ㆍ벽지불에게 열반이 있는 줄로 보는 이는 가고 옴이 있지만, 성문ㆍ벽지불에게 열반이 있는 줄로 보지 않는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성문ㆍ벽지불에게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보는 이는 가고 옴이 있지만 보지 않는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여래에게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 없는 줄로 보는 이는 가고 옴이 있지만, 여래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줄로 보는 이는 가고 옴이 없습니다. 이 일은 그만두고 여쭐 일이 있으니 가엾이 여기시고 허락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마음대로 물어라. 지금이 바로 물을 때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하나하나 설명해 주겠다. 그 까닭을 말하자면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우담꽃과 같고, 법도 그러하여 듣기 어려우며, 12부 경전에서 방등경[方等]은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전일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때 유리광보살마하살은 이미 허락을 받았고, 또 경계하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이 『대열반경』을 수행하여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합니까?”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그대는 지금 이와 같은 대승 대열반의 바다를 다하고자 하여 나의 훌륭한 해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너에게 있는 의심의 그물과 독화살은 내가 큰 의원이 되어 잘 뽑아줄 것이며, 네가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였으니 내게 있는 지혜의 횃불로 능히 밝게 비쳐줄 것이며, 네가 나고 죽는 바다를 건너려 하니 나는 능히 너를 위하여 큰 뱃사공이 되어 줄 것이며, 네가 나를 부모같이 생각하니 나도 너를 아들처럼 생각할 것이며, 네가 마음으로 법보를 탐구하니 나에게 있는 것을 너에게 보시하여 주겠다. 자세하게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마땅히 너를 위해 분별하여 해석하겠다.
선남자야, 법을 들으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법을 듣고 나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믿음을 내어 지성으로 듣고 공경하고 존중하라. 바른 법에 대하여 허물을 찾지 말며,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말며, 법사의 문벌이 높고 낮음을 보지 말며, 법을 듣고 나서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며, 공경과 명예와 이양을 위하지 말고 세상을 건지는 감로법이 되어야 한다. 또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법을 듣고 나서 먼저 내 몸을 제도하고, 그런 뒤에 남을 제도하리라. 먼저 내 몸을 해탈하고 그런 뒤에 남을 해탈케 하리라. 먼저 내 몸을 편안케 한 뒤에 남을 편안케 하리라. 먼저 내가 열반한 뒤에 다른 이도 열반을 얻게 하리라.’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에 평등한 생각을 내며, 나고 죽는 데는 괴로운 생각을 내며, 대열반에는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생각을 내며, 먼저 다른 이를 위하고 나중에 나를 위하며, 대승을 위하고 2승을 위하지 말며,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모든 법의 모양만을 집착하지 말며, 모든 법에 대하여 탐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항상 법을 알고 법을 보려는 생각을 내야 한다. 선남자야, 그대가 능히 이렇게 지성으로 법을 들으면 이것을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한다.
선남자야, 듣지 못하면서 들음이 있고, 듣지 못하면서 듣지 못함이 있고, 들으면서 듣지 못함이 있고, 들으면서 들음이 있다. 선남자야, 나지 않으면서 나고, 나지 않으면서 나지 않고, 나면서 나지 않고, 나면서 나는 것과 같으며, 또 이르지 않으면서 이르고, 이르지 않으면서 이르지 않고, 이르면서 이르지 않고, 이르면서 이르는 것과 같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나지 않으면서 나는 것[不生生]이라고 말합니까?”
“선남자야, 세제(世諦)에 편안히 머물러서 처음 태에서 나올 때를 일러 나지 않으면서 난다고 한다.
어떤 것을 나지 않으면서 나지 않는다[不生不生]고 하는가?
선남자야, 이 대열반은 나는 모습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나지 않으면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것을 나면서 나지 않는다[生不生]고 하는가?
선남자야, 세제에서 죽는 때를 일러 나면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것을 나면서 난다[生生]고 하는가?
선남자야, 온갖 범부들을 일러 나면서 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고 나는 것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며, 온갖 유루(有漏)들이 찰나찰나 나는 까닭으로 이것을 일러 나면서 난다고 한다. 4주(住) 보살을 일러 나는 것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것이 자재한 까닭으로 나면서 나지 않는다고 한다. 선남자야, 이것을 안의 법[內法]이라고 한다.
무엇을 밖의 법[外法]이라고 하는가? 나지 못하는 것이 나며[未生生], 나지 못하는 것이 나지 못하며[未生未生], 나는 것이 나지 못하며[生未生], 나는 것이 나는 것[生生]이다.
선남자야, 마치 종자에서 싹이 나지 못할 때에 4대가 화합하고 사람이 공들여 가꾸면 나게 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러 나지 못하는 것이 난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나지 못하는 것이 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마치 썩은 종자가 연(緣)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으니, 이런 것을 일러 나지 못하는 것이 나지 못한다고 한다.
무엇을 나는 것이 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마치 싹이 나고도 자라지 못하는 것을 일러 나는 것이 나지 못한다고 한다.
무엇을 나는 것이 난다고 하는가?
마치 싹이 나서 자라는 것과 같지만 만일 나는 것이 나지 못하면 자라는 일이 없다. 이러한 모든 유루법을 일러 밖의 법의 나는 것이 난다고 한다.”
유리광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유루의 법이 만일 난다면 항상함이 됩니까, 무상함이 됩니까? 나는 것이 만일
항상하다면 유루의 법은 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나는 것이 만일 무상하다면 유루의 법이 항상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나는 것이 능히 스스로 난다면 나는 것이 제 성품이 없을 것이며, 만일 능히 다른 것을 낸다면 무슨 인연으로 무루(無漏)는 내지 못합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나지 않았을 때에 나는 일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이제야 났다고 합니까? 만일 나지 않았을 때에 나는 일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허공이 났다고는 말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나지 않는 것이 난다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나는 것이 난다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나는 것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나지 않는 것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나는 것도 말할 수 없고, 나지 않는 것도 말할 수 없지만, 인연이 있으므로 말할 수 있다. 어찌하여 나지 않는 것이 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지 않는 것을 난다고 하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가 났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는 것이 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는 것이 나는 까닭으로 나고, 나는 것이 나는 까닭으로 나지 않으므로 역시 말할 수 없다. 어찌하여 나는 것이 나지 않음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는 것은 났다고 하지만, 나는 것이 스스로 나지 않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지 않는 것이 나지 않음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지 않는 것을 일러 열반이라고 하는데, 열반은 나지 않으므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를 닦아서야 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는 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지 않는 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가? 얻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인연이 있으므로 말할 수도 있다고 하느냐? 열 가지 인연법12)이 나는 것의 인이 되니, 그런 이치로 말할 수가 있다.
선남자야, 그대는 깊고 깊은 공한 정[空定]에 들어가지 마라. 왜냐하면 대중이 둔한 까닭이다.
선남자야, 함이 있는 법은 나는 것이 항상하지만 머무는 것[住]이 무상하므로 나는 것도 무상하며, 머무는 것이 항상하지만 나는 것로 내게 되므로 머무는 것도 무
상하며, 달라지는 것[異]이 항상하지만, 법이 무상하므로 달라지는 것도 무상하며, 무너지는 것[壞]이 항상하지만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으므로 무너지는 것도 무상하다.
선남자야, 성품인 까닭으로 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무너지는 것이 모두 항상하지만 찰나찰나 멸하는 까닭으로 항상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대열반으로써 끊어 없앨 수 있으므로 무상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유루의 법은 나지 않았을 때에 벌써 나는 성품이 있으므로 나는 것이 능히 내지만, 무루의 법은 본래 나는 성품이 없으므로 나는 것이 능히 내지 못한다. 마치 불은 본래 성품이 있으므로 연을 만나면 불이 나는 것이며, 눈은 본래 보는 성품이 있으므로 빛을 원인으로 하고 밝음을 원인으로 하고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서 보는 것과 같다. 중생의 나는 법도 그와 같아서 본래 성품이 있으므로 업의 인연과 부모가 화합함을 만나면 나는 것이다.”
그때 유리광보살마하살과 8만 4천 보살마하살들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공중으로 다라나무의 7배 높이까지 솟아올라서 합장하고 공경하여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의 은근한 가르침을 입어 대열반으로 인하여 비로소 깨닫고 듣지 못한 바를 들었습니다. 또한 8만 4천 보살들로 하여금 모든 법이 나지 않으면서 나는 것들을 깊이 알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알고서 의심을 끊었으나, 이 회상에 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을 무외(無畏)라고 하는데, 부처님께 여쭙고자 하니 허락해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무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마음대로 물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해설하겠다.”
그때 무외보살이 6만[어떤 판본에서는 8만이라 함] 4천 보살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바로 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계의 중생들은 무슨 업을 지어야 저 부동(不動)세
계에 가서 날 수 있습니까? 그 세계의 보살들은 어떻게 지혜가 성취되었으며, 사람 중의 코끼리 왕으로서 큰 위덕이 있으며, 모든 행을 갖추어 닦아서 영리한 지혜가 빠르며, 듣고 나서 곧 이해합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중생의 목숨 해치지 않고
여러 가지 계율을 굳게 지키며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 받으면
곧 부동국(不動國)에 태어나리라.
다른 이의 귀한 재물 빼앗지 않고
항상 모두에게 보시를 하며
초제[招提]와 승방을 지으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남의 여자를 범하지 않고
때가 아니면 자기 처도 범하지 않으며
계행 지키는 이에게 와구(臥具)를 보시 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나와 남의 이익을 위하여
아무리 두려운 일 닥치더라도
입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언제라도 선지식을 헐뜯지 않고
좋지 못한 권속들을 멀리 떠나며
입으로는 화합한 말 항상 말하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저 모든 보살마하살처럼
나쁜 말은 입안에서 멀리 여의고
사람들이 즐겨 듣는 말만 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희롱으로 웃는 말을 할 때에라도
때가 아닌 말은 말하지 않고
조심조심 말할 때만 말을 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다른 이가 이양(利養)을 얻는 일 보고
어느 때나 즐거운 마음을 내어
시기하고 질투하는 생각 없으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중생들을 고뇌하게 하지도 않고
어느 때나 인자한 마음을 내며
방편으로 짓는 악도 내지 않으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잘못된 소견으로 보시도 없고
부모와 과거 미래도 없다고 하는
이러한 나쁜 소견 내지 않으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넓은 벌판 먼 길에는 우물을 파고
간 데마다 과실나무 많이 심으며
거지에겐 좋은 음식 항상 준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부처님과 법보와 스님들에게
향 한 개나 등불 하나 공양하거나
하다못해 꽃 한 송이 바치더라도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하여서나
이양이나 복덕을 얻기 위하여
이 경전을 한 게송만 쓴다 하여도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어떤 이가 복덕ㆍ이양 얻기 위하여
여러 날은 그만두고 하루 동안만이라도
이 경전을 외우고 읽는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어떤 이가 무상도를 얻기 위하여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이라도
정성으로 8계재(戒齋)13)를 받아 지니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크고 중한 계율을 범한 사람과
한곳에서 함께 있지 않거나
방등경전 훼방한 이 꾸짖는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어떤 이가 병난 사람 살펴보거나
맛난 과실 한 개라도 보시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간호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스님들의 쓰는 물건 범하지 않고
부처님의 상주(常住)물을 잘 지키며
절 도량을 잘 치우고 소제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부처님 형상이나 부처님 탑을
엄지손가락만하게라도 조성해 놓고
어느 때나 즐거운 맘 항상 낸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대반열반 이 경전을 위하는 마음
내 몸이나 재물 보배 아끼지 않고
설법하는 법사에게 보시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부처님의 비밀한 이런 법장을
듣거나 배우거나 읽고 외우며
쓰거나 통달하여 해설한다면
곧 부동국에 태어나리라.
그때 무외보살마하살은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짓는 업을 따라서 저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일을 알았습니다. 이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겨 먼저 여쭌 바를 여래께서 해설하시면, 세간 사람ㆍ천상 사람ㆍ아수라ㆍ건달바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그대는 지금 여기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들어라. 내가 그대에게 낱낱이 말해 주겠다. 인연이 있으므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지 못하고, 인연이 있으므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고, 인연이 있으므로 이를 데에 이르지 않고, 인연이 있으므로 이를 데에 이른다. 무슨 인연으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지 못하는가? 선남자야, 이르지 못할 데는 대열반인데, 범부는 이르지 못한다.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 있는 탓이며, 몸으로 짓는 업과 입으로 짓는 업이 깨끗하지 못한 탓이며, 모든 깨끗하지 않은 물건을 받아 둔 탓이며, 4중금(重禁)을 범한 탓이며, 방등경을 비방한 탓이며, 일천제인 탓이며, 5역
죄를 지은 탓이다. 이런 이치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선남자야, 무슨 인연으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는가? 이르지 못할 데는 대열반인데, 어떠한 뜻으로 이르는가?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과 몸과 입으로 짓는 나쁜 짓을 아주 끊은 까닭이며, 온갖 부정한 물건을 받지 않은 까닭이며, 4중금을 범하지 않은 까닭이며, 방등경전을 비방하지 않은 까닭이며, 일천제가 되지 않은 까닭이며, 5역죄를 짓지 않은 까닭이다. 이런 뜻으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른다고 하며, 수다원은 8만 겁에 이르고, 사다함은 6만 겁에 이르고, 아나함은 4만 겁에 이르고, 아라한은 2만 겁에 이르고, 벽지불은 10천(千) 겁에 이른다. 이런 뜻으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른다고 한다.
선남자야, 무슨 인연으로 이를 데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를 데라 고 함은 25유(有)이다. 모든 중생이 한량없는 번뇌의 온갖 결박에 덮여서 갔다 왔다 하면서 끊지 못하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 같아 이것을 이른다 고 한다. 성문과 연각과 보살들은 이미 영원히 끊었으므로 이르지 않는다고 하며,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그 가운데 일부러 있으므로 이른다고도 한다.
선남자야, 무슨 인연으로 이를 데에 이른다고 하는가? 이를 데라고 함은 25유인데, 온갖 범부들과 수다원(須陀洹), 나아가 아나함(阿那含)은 번뇌의 인연으로 이를 데에 이른다고 한다. 선남자야,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듣지 못할 것을 듣는 일도 있고, 듣지 못할 것을 듣지 못하는 일도 있고, 듣는 것을 듣지 않는 일도 있고, 듣는 것을 듣는 일도 있다. 어찌하여 듣지 못할 것을 듣는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듣지 못할 것을 대열반이라고 하니, 어찌하여 듣지 못한다고 하는가? 함이 있는[無爲] 것이 아닌 까닭이며, 음성(音聲)이 아닌 까닭이며, 말할 수 없는[不可說] 까닭이다. 어찌하여 듣는다고 하는가?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른바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이다. 이런
이치로 듣지 못할 것을 듣는다고 한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대열반을 들을 수 없다면, 어찌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번뇌를 끊은 이는 열반을 얻었다고 하고, 번뇌를 끊지 못한 이는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치로 열반의 성품은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다고 합니다. 만일 세간의 법이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다면 무상하다고 합니다. 마치 병(甁) 따위가 본래는 없다가 지금에 있으니 이미 있다가는 도로 없어지므로 무상하다고 하는데, 열반이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하겠습니까? 또 세존이시여, 무릇 장엄함을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무상하다고 합니다. 열반이 만일 그러하면 으레 무상하다고 할 것입니다. 무엇을 인연이라고 합니까? 37품(品)ㆍ6바라밀ㆍ4무량심(無量心)ㆍ뼈의 모양을 관함[骨相觀]ㆍ아나파나(阿那波那)14)ㆍ6념처(念處)ㆍ6대(大)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법들은 모두 열반을 성취하는 인연이므로 무상하다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있는 것을 무상하다고 하니, 만일 열반이 있는 것이라면 역시 무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예전에 『아함(阿含)』에서 말씀하시기를, ‘성문과 연각과 부처가 다 열반이 있다’고 하셨으니, 이런 뜻으로 무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볼 수 있는 법을 무상하다고 하니,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열반을 보는 이는 온갖 번뇌를 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세존이시여, 마치 허공이 중생들에게 평등하여 장애가 없으므로 항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만일 열반이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중생이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합니까? 열반이 그와 같이 중생들에게 불평등하다면 항상하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100사람에게 공통한 한 사람의 원수가 있을 때에 그 원수를 살해하면 여러 사람이 즐거울 것입니다. 만일 열반이 평등한 법이라면 한 사람이 얻을 때에 여러 사람이 함께 얻을 것이니, 한 사람이 번뇌를 끊으면 여러 사람도 번뇌를 끊을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임금이나 왕자나 부모나 스승에게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고 이양을 얻으면 이것은 항상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열반도 그러하여 항상하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예전에 『아함』 가운데에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열반을 공경하면 번뇌의 결박을 끊고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는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으로 항상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열반에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는 이름이 있으면 항상하다고만 이름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없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열반의 자체는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열반의 자체가 본래 없다가 지금 있다면 무루(無漏)의 항상 머무는 법이 아닐 것이다.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있지만 중생들은 번뇌에 가렸으므로 열반을 보지 못하고 없다고 하며, 보살마하살은 계율과 선정과 지혜로써 마음을 닦아 번뇌를 끊었으므로 문득 보는 것이다. 열반은 항상 머무는 법으로서 본래는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어두운 우물 속에 갖가지 7보가 있는 것을 사람들도 알지만 어두워서 보지 못한다. 지혜 있는 사람이 방편을 알고서 등불을 켜 가지고 가서 비추면 모두 보게 된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생각하기를 ‘물과 7보가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다’고 하지 않는다. 열반도 그와 같아서 본래부터
있는 것이며, 지금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다. 번뇌가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데, 큰 지혜인 여래가 알맞은 방편으로 지혜의 등을 켜서 보살들로 하여금 열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이는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장엄을 인하여 보리를 이루는 것이라서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그 이치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열반의 자체는 나는 것도 아니며 나오는 것도 아니며 진실한 것도 아니며 빈 것도 아니며 업을 지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유루(有漏)인 함이 있는 법이 아니며, 들을 것도 아니며 볼 것도 아니며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며,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도 아니다. 가는 것도 아니며 돌아오는 것도 아니며,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며 긴 것도 아니며 짧은 것도 아니며, 둥근 것도 아니며 모난 것도 아니며, 뾰족한 것도 아니며 비낀 것도 아니다. 있는 모양도 아니며 없는 모양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며 빛도 아니며, 인도 아니며 과도 아니며, 나와 나의 것도 아니다. 이런 이치로 열반은 항상한 것이며 영원히 변역하지 않는 것이지만,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선한 법을 닦아 모아서 스스로 장엄한 뒤에야 보게 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땅 밑에 여덟 가지 맛을 가진 물이 있는 것을 모든 중생들이 얻지 못하는데, 지혜 있는 사람이 공력을 들여서 파면 얻게 되는 것처럼 열반도 그와 같다. 마치 눈먼 사람이 해와 달을 보지 못하다가 용한 의원이 눈을 치료하여 고치면 보게 되는 것처럼, 해와 달은 본래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도 그와 같아서 원래 있었던 것이며 지금에야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죄가 있어 옥에 갇혔다가 오랜 뒤에 놓여나와 집에 돌아가면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들을 보게 되는 것처럼 열반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네가 말하기를 ‘인연이기 때문에 열반의 법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선남자야, 인(因)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내는 인[生因]이며, 둘째는 화합하는 인[和合因]이며, 셋째는 머무는 인[住因]이며, 넷째는 자라는 인[增長因]이며, 다섯째는 먼 인[遠因]이다. 무엇을 내는 인이라고 하는가? 내는 인이란 곧 업과 번뇌이며 밖으로는 초목의 종자들이다. 이것을 내는 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화합하는 인이라고 하는가? 선한 것은 선한 마음과 화합하고, 선하지 못한 것은 선하지 못한 마음과 화합하고, 기억이 없는 것[無記]은 기억이 없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이니, 이것을 화합하는 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머무는 인이라고 하는가? 마치 아래에 기둥이 있으면 집이 무너지지 않고, 산과 강과 초목은 땅을 인하여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안으로 4대와 한량없는 번뇌가 있으므로 중생이 머물러 있다. 이것을 머무는 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자라는 인이라고 하는가? 의복과 음식 따위를 인연하여 중생이 자라는 것이다. 마치 종자가 불에 타지 않고 새가 먹지 않으면 자라는 것 같으며, 사문(沙門)이나 바라문들이 화상(和上)이나 선지식을 의지하여 자라는 것 같으며, 부모를 인하여 아들이 자라는 것들이니, 이것을 자라는 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먼 인이라고 하는가? 마치 주문 때문에 귀신이 해치지 못하고 독이 해치지 못하며, 임금을 의지하여 도적이 없으며 싹이 땅과 물과 더운 것과 바람 등에 의지하는 것과 같고, 물과 젓는 것과 사람의 노력이 생소[酥]의 먼 인이 되며, 밝음[明]과 빛이 식(識)의 먼 인이 되며, 부모의 정기와 피가 중생의 먼 인이 되며 시절 같은 것을 이름하여 먼 인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열반의 자체는 이러한 다섯 가지 인으로 이룬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무상의 인이라고 말하겠는가?
또 선남자야, 다시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짓는 인[作因]과 아는 인[了因]이다. 마치 옹기장이의 물레와 노끈 따위는 짓는 인이라 하고, 등촉으로 어두운 데 물건을 비추는 것은 아는
인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대열반은 짓는 인을 따라 있는 것이 아니고 아는 인으로 좇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인이라고 함은 37조도법과 6바라밀 등으로 이것을 아는 인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시는 열반의 인이며 대열반의 인은 아니다. 보시바라밀이라야 대열반의 인이라고 한다. 37품은 열반의 인이며 대열반의 인은 아니니, 한량없고 그지없는 아승기겁 동안의 도를 돕는 법이라야 대열반의 인이라고 한다.”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하고,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 이름하며, 나아가 반야는 어떤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하고 어떤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까? 어떤 것은 열반이라 이름하고, 어떤 것은 대열반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방등 대반열반을 수행할 때는 보시를 듣지 못하고 보시를 보지 못하며, 보시바라밀을 듣지 못하고 보시바라밀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반야를 듣지 못하고 반야를 보지 못하며, 반야바라밀을 듣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을 보지 못하며, 열반을 듣지 못하고 열반을 보지 못하며, 대열반을 듣지 못하고 대열반을 보지 못한다.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 법계를 알고 보며 실상을 이해하여, 공하여 있는 것이 없고 화합하여 깨닫는 모양이 없으며, 무루의 모양과 짓는 일이 없는 모양과 환술과 같은 모양과 더울 때의 아지랑이 같은 모양과 건달바성 따위의 비고 공한 모양을 얻게 될 것이다. 보살이 이러한
모양을 얻으면 탐욕ㆍ성내는 일ㆍ어리석음이 없어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것이며, 이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진실한 모습이며 실상에 머문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그때는 이것은 보시이며 이것은 보시바라밀이며, 나아가 이것은 반야이며 이것은 반야바라밀이며, 이것은 열반이며 이것은 대열반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선남자야, 어찌하여 이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지만, 달라는 이가 없는데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항상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 나서 도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주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재물에 대하여 임금ㆍ도둑ㆍ수재(水災)ㆍ화재(火災)의 네 가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기쁘게 보시하면 이름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과보를 희망하여 주는 것은 이름이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고, 주고도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공포(恐怖)나 명예나 이양이나 집의 규모[家法]를 상속하거나 천상의 5욕락을 위한다면 교만을 위하는 것이고, 아는 동무[知識]를 위하는 것이고, 오는 세상의 과보를 위하는 것이므로 장사하는 법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서늘한 그늘과 꽃과 과실과 재목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보시라고 이름하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대열반을 수행하는 이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주고받는 재물을 보지 않으며 시절을 보지 않으며
복밭과 복밭 아님을 보지 않는다. 또 인을 보지 않고 연을 보지도 않고 과보도 보지 않으며, 짓는 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많음도 보지 않고 적음도 보지 않는다. 또 깨끗함도 보지 않고 부정함도 보지 않으며, 받는 이와 자기와 재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보는 이도 보지 않고 보지 않는 이도 보지 않는다. 또 자기와 남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방등한 대반열반의 항상 머무는 법을 위하므로 보시를 수행하고 모든 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온갖 중생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받는 이와 주는 이와 재물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한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큰 바다에 빠졌을 때에 송장이라도 붙들면 벗어나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할 때에도 그와 같아서 송장과 같이 한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옥에 갇히면 문은 굳게 잠기고 측간의 구멍만이 있는데, 그리로 나와서 걸림 없는 곳에 이르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할 때에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마치 존귀한 사람이 위급하고 무서울 때에 의지할 데가 없으면 전타라15)에게라도 의지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마치 병난 사람이 병고를 소멸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면 부정한 것이라도 먹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바라문들이 곡식이 귀할 때에는 목숨을 위하여서 개고기라도 먹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대열반 중에서는 이러한 일을 한량없는 겁 동안에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하며, 지계와 지계바라밀과, 나아가 반야와 반야바라밀은 『불잡화경(佛雜花經)』16)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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