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3권
대당서역기 제3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4. 북인도8개국
1)오장나국(烏仗那國)
오장나국1)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하며 산과 계곡이 서로 이어져 있고 하천과 늪과 초원이 이어진다. 비록 씨를 뿌려 곡식을 심기는 하지만 땅이 기름지지 않다. 포도가 많이 나고 사탕수수가 적게 수확된다. 금과 쇠가 토산품이며 울금향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이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무성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비와 바람도 때를 맞춰 적당하다.
사람들의 성격은 겁약하며 풍속은 속임수를 잘 쓴다. 학업에 힘쓰기를 좋아하지만 공을 들이지 않는다. 주문을 외거나 주술을 부리는 것이 예업(藝業)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모포를 입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옷차림을 한다. 언어2)는 다르기는 하지만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문자와 예의는 인도와 서로 관계가 있다.
이 나라는 부처님의 법을 숭앙하고 존중하며 대승을 믿고 경배한다. 소파벌솔도하(蘇婆伐窣堵河)를 끼고서 옛날에는 1천 4백 개의 가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 황폐해졌다. 옛날에는 승려들의 수가 1만 8천 명에 달하였지만 지금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으며 선정에 잠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능히 글을 잘 외지만, 심오한 뜻을 깊이 궁구하지는 않는다.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특히 금주(禁呪)3)에 능하다.
율의(律儀)가 전하는 가르침에는 5부가 있으니 첫째는 법밀부(法密部), 둘째는 화지부(化地部), 셋째는 음광부(飮光部), 넷째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다섯째는 대중부(大衆部)이다. 천사(天祠)는 10여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견고한 성이 4~5개 있고 그 왕은 대부분 몽게리성(瞢偈釐城)4)을 다스리고 있는데 성의 둘레는 16~17리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몽게리성의 동쪽으로 4~5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상서로운 징조가 매우 많이 일어나고 있다. 옛날 부처님께서 인욕선인(忍辱仙人)이셨을 때 이곳에서 갈리왕(羯利王)당나라 말로는 투쟁(鬪爭)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가리(哥利)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위하여 자신의 신체를 잘랐던 곳이다.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250~260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들어가게 되며 이곳에서 아파라라용천(阿波邏羅龍泉)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바로 소파벌솔도하(蘇婆伐窣堵河)의 원천이다. 샘의 물줄기는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데 봄과 여름에도 얼음이 얼고 저녁 무렵이면 눈발이 날린다. 눈은 5색을 띄면서 내리고 빛은 4방으로 퍼진다.
이 용은 본래 가섭파(迦葉波)부처님 시절에 인간으로 태어나 그 이름을 긍기(殑祇)라고 하였다. 그는 주술에 아주 달통해 있었으므로 사악한 용을 다스리고 제어하여 폭우를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여분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집집마다 한 말의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그에게 바쳤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세금을 제때에 내지 못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그러자 긍기는 분노를 품고서 사악한 용이 되어서 비바람을 마구 일으켜 농작물을 손상시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목숨을 마친 후에 이 못의 용이 되었으며 샘에서 백수(白水)를 흘려보내 지리(地利)를 상하게 하였다.
이때 석가여래께서 대비(大悲)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는데 이 나라 사람들만이 홀로 이런 재난을 당하는 모습을 가엾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집금강신(執金剛神)을 내려보내 포악한 용을 교화시키고자 하셨다. 집금강신이 금강신저(金剛神杵)를 들어서 절벽을 내리치니 용왕이 크게 놀라 밖으로 뛰쳐나와서 귀의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마음이 깨끗해졌으며 믿고 깨닫게 되었다.
여래께서는 이어서 농사일을 망치지 못하도록 제지하시니 용이 말했다.
“제가 먹는 것은 모두 사람들의 밭에서 거둔 것입니다. 이제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지만 장차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할지 두렵습니다. 그러니 원하옵건대 12년에 한 번씩은 식량을 받아둘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래께서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지금도 12년에 한 번씩은 백수(白水)의 재난을 입고 있다.5)
아파라라용천에서 서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백수의 북쪽 기슭에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사람들 각자의 복덕의 힘에 따라 그 흔적이 짧거나 길게 보인다. 이곳은 여래께서 이 용을 항복시키고 나신 뒤에 떠나시면서
흔적을 남기셨던 곳이다. 후에 사람들이 그 위에 돌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4방에서 잇달아 찾아와 꽃과 향을 공양한다. 강물을 따라서 아래로 30여 리 가다 보면 여래께서 옷을 빨았던 돌이 있는데 가사의 무늬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지금도 또렷하다.
몽게리성의 남쪽으로 4백여 리 가다 보면 혜라산(醯羅山)6)에 이른다. 계곡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역류하여 동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온갖 이름 모를 꽃과 열매들이 산골짝을 뒤덮고 있으며 벼랑을 장식하고 있다. 산봉우리들과 바위들이 가파르고 위험하며 계곡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어떤 때는 이 물소리가 말다툼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음악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네모반듯한 평상과도 같은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과 같다. 이런 돌이 서로 이어져서 벼랑의 골짜기까지 깔려 있다.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반송(半頌)구역에서는 가(伽)라고 하는데 범문(梵文)의 약어(略語)이다. 어떤 이는 게타(偈他)라고 하는데 범음(梵音)이 잘못된 것이다. 이제 올바른 음을 따라서 가타(伽他)라고 한다. 가타라는 것은 당나라 말로는 송(頌)이라고 하는데 송은 32언(言)이다의 법을 듣기 위해 목숨을 버린 곳이다.7)
몽게리성의 남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큰 산 옆으로 마하벌나(摩訶伐那)당나라 말로는 대림(大林)이라고 한다가람에 이른다. 여래께서 옛날에 보살행을 닦으셨을 때 그 이름을 살박달지왕(薩縛達之王)당나라 말로는 일체시(一切施)라고 한다이라고 하셨는데 적들을 피하여 나라를 버리고 잠행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굶주린 바라문들이 다가와서 구걸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왕위를 잃은 뒤라 아무것도 베풀 것이 없었다. 결국 자신을 묶어서 적군의 왕에게 끌고 가도록 하여 포상금을 타도록 하는 보시를 베푸신 곳이다.
마하벌나가람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가 30~40리를 가다 보면 마유(摩愉)당나라 말로는 두(豆)이다가람에 이르는데 이곳에도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그 옆에 커다랗고 네모반듯한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흔적이 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 돌을 밟으시고 구지(拘胝)8)의 광명을 놓으셔서 마하벌나가람을 비추셨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과 하늘에게 본생(本生)의 일을 들려주셨다. 이 솔도파의 기단 아래에 돌이 있는데 황백색을 띠고 있고 언제나 습기를 머금고 있으며 매끄럽다. 옛날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에 정법을 듣기 위하여
이곳에서 뼈를 부러뜨려서 경전을 서사(書寫)한 곳이다.9)
마유가람에서 서쪽으로 60~70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에 이르는데 이것은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닦으실 때 시비가왕(尸毘迦王)당나라 말로는 여(與)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시비왕(尸毘王)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라 이름하셨다. 그때 불과(佛果)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갈라서 비둘기를 대신하여 매의 먹이가 되셨던 곳이다.
비둘기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곳에서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산니라사천(珊尼羅闍川)10)으로 들어가서 살부살지(薩裒殺地)당나라 말로는 지약(地藥)이라고 한다승가람에 이른다. 이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가 80여 척에 달한다. 여래께서 옛날에 제석(帝釋)이셨을 때 기아와 전염병이 유행하는 흉년을 만나셨다. 백 가지 처방이 아무런 효과도 없어 길에는 죽은 자가 발길에 채일 정도로 속출하였다. 제석께서 이것을 슬퍼하고 가엾게 여겨서 구제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곧 커다란 이무기로 몸을 변화시켜서 그 시체를 산과 계곡에 눕힌 뒤에 공중에서 널리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하며 서로 앞다투어 달려갔으며 그 살점을 베어먹는 대로 활력을 되찾아서 기아와 질병을 치료하게 되었다.11)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소마대솔도파(蘇摩大窣堵波)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제석이셨을 때에 세상에 전염병이 돌자 모든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서 자신의 몸을 커다란 소마뱀[蘇摩蛇]으로 변화시켜서 모두에게 먹인 곳으로, 이것을 먹은 자들은 건강해졌으며 병고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산니라사천의 북쪽 암벽 가에 솔도파가 있는데 병든 자가 와서 정성을 다해 병이 낫기를 기도하면 치유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래께서 옛날에 공작왕(孔雀王)이셨을 때에 그 무리들과 함께 이곳에 이르셨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목이 말라 괴로움을 당하여 물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자 공작왕이 부리로 벼랑을 쪼았다. 그 결과 샘이 솟아 흘렀는데 지금에는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질병이 쾌유되는데 돌 위에는 지금도 공작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몽게리성의 서남쪽으로 60~70리를 가면 큰 강이 있는데 동쪽에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60여 척이며 상군왕(上軍王)이 세운 것이다.12) 옛날 여래께서 장차 입멸하려 하실 때 모든 대중에게 고하셨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 오장나국의 상군왕에게도 마땅히 사리를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여러 왕들이 사리의 양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려 하는 중에 뒤늦게 상군왕이 오자 왕들은 깔보고 업신여기는 말을 던졌다. 이때 하늘과 인간의 대중이 거듭 여래의 유언을 일러주니 이에 상군왕까지 포함하여 그 몫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 나라로 가지고 돌아간 뒤에 법식에 의거하여 솔도파를 세웠던 것이다.
솔도파 옆의 거대한 강가에 큰 돌이 있는데 모습이 마치 코끼리와도 같다. 옛날 상군왕이 크고 흰 코끼리에게 사리를 싣고서 돌아오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코끼리가 느닷없이 발에 무언가 걸린 듯 넘어졌다. 이로 인하여 숨을 거두게 된 코끼리는 그대로 돌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그 곁에 솔도파를 세웠던 것이다.13)
몽게리성의 서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강을 건너서 노혜달가(盧醯呾迦)당나라 말로는 적(赤)이라고 한다솔도파에 이르게 된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50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 자력(慈力)이라는 이름을 지닌 큰 나라의 왕이셨다. 이곳에서 몸을 찔러 흘러나온 피로 다섯 명의 야차(藥叉)구역에서는 야차(夜叉)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를 먹이셨다고 한다.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보면 알부다(遏部多)14)당나라 말로는 기특(奇特)이라고 한다라는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에 이른다. 이것의 높이는 40여 척이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계시면서 모든 인간과 천상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여래께서 떠나신 후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이니, 모든 백성들이 높이 숭앙하였으며, 향과 꽃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의 서쪽으로 큰 강을 건너서 30~40리를 가다 보면 어떤 정사(精舍)에 이르게 된다. 그 속에는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당나라 말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하는데 글자를 합하여 연달아 소리를 내어 발음하면 범어(梵語)는 위와 같아진다. 단어를 나누어 하나씩 발음을 내어볼 때 아박로지다(阿縛盧枳多)는 번역하면 관(觀)이고, 이습벌라(伊濕伐羅)는 번역하면 자재(自在)이다. 구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음(觀世音)이라고 하거나 또는 관세자재(觀世自在)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보살상이 있는데 위력 있고 신령스러운 가피가 은밀하게 내려지고 있으며 신비스러운 자취가 밝게 비치고 있으므로 재가자나 출가자가 앞다투어 끊임없이 공양을 올리고 있다.
관자재보살상의 서북쪽으로 150리를 가다 보면 남발로산(藍勃盧山)15)에 이른다. 산봉우리에 용이 살고 있는 못이 하나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에 달한다. 맑은 물이 못에 가득 넘치도록 차있고 깨끗한 물줄기가
거울같이 맑다.
옛날 비로택가왕(毘盧擇迦王)16)이 앞장서서 여러 석가족[釋種]17)을 정벌하였을 때 네 사람이 군(軍)에 저항하였다. 왕이 그들의 일가친척을 모두 내쫓자 그들은 각각 흩어졌다. 그 가운데 석가족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의 도성을 벗어난 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피로에 지쳐서 도중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앞으로 날아왔는데 길이 잘 들여진 것이었다. 그가 기러기 위에 올라타자 기러기는 날아올라서 이 연못 옆에 내려앉았다. 석가 종족인 이 사람은 허공을 타고 날아와 멀리 이국에 내려앉았으며 지리에 어두워 길도 잃었으므로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 연못에 사는 용의 딸이 물가에서 노닐다가 문득 석가족 사람을 발견했는데, 용의 모습으로는 그와 마주 대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 뒤에 그에게 다가가 어루만지니, 석가족 사람이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서 인사를 하였다.
“먼 여행길에 지친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다정하게 어루만지시는 것입니까?”
급기야 사랑의 감정이 은근하여져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여자가 말하였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훈계를 공경하여 받들어왔으며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그대의 정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부모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석가족 사람이 말하였다.
“산골이 깊고 깊은데 그대의 집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여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 연못에 사는 용의 딸입니다. 그대의 종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난을 피하여 유랑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마침 이리저리 물가를 노닐던 덕택에 감히 피로한 그대를 위로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운명이기는 합니다만, 아직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재앙을 쌓아서 이렇게 용의 몸을 받았습니다. 사람과 축생은 길이 다르니 이렇게 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석가족 사람이 말하였다.
“그 한 마디 말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지난 세상의 마음은 이미 끝났습니다.”
용의 딸이 말하였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대로 행하소서.”
그러자 석가족 사람이 마음으로 맹세하며 말하였다.
“내가 지닌 모든 복덕의 힘으로 이 용의 딸의 몸이 사람으로 변할지어다.”
복력의 감응을 받아서 용은 마침내 모습을 바꾸어 곧 사람의 몸을 얻었으며 이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석가족 사람에게 인사하였다.
“저에게는 재앙의 운이 쌓여 악한 갈래[惡趣]를 떠돌았는데 이제 다행히도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입어 그 복력의 가피를 입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흉한 모습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덕에 보답하고 싶으나 몸이 부수어져라 보답하여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마음으로 바라는 일은 당신을 곁에서 모시는 일이지만, 이 일은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습니다. 원하옵건대 부모에게 말씀드린 뒤에 예를 갖추고 싶습니다.”
용의 딸은
연못으로 돌아가서 부모에게 말하였다.
“지금 밖에서 노닐다가 문득 석가족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복력에 감응 받아 저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이미 맞으니 이제 감히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용왕의 마음은 인간계[人趣]를 좋게 여기고 있었으며 성스러운 석가족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곧 딸의 간청을 따라 연못에서 나와서 석가족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하였다.
“비류(非類)18)인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존귀한 데에서 내려오셔서 비천한 데에 나와 주셨습니다. 원하건대 제가 사는 곳에 임하시어 저의 극진한 접대를 받아주소서.”
석가족 사람은 용왕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마침내 그의 궁궐로 갔다. 이에 용궁 안에서는 친영(親迎)의 예식이 준비되었는데 연회가 떠들썩하게 베풀어졌고 즐기고 환대하는 것이 지극하였다. 하지만 석가족 사람은 용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꺼림칙했기 때문에 이내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용왕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먼 곳에 살지 마시고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사소서. 그러면 마땅히 이 강토(疆土)에 웅거하여 대왕의 칭호를 받게 될 것이며, 신하와 백성을 총괄하여 왕조가 언제까지라도 이어지게 되리이다.”
석가족 사람이 고마움을 표하면서 말하였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자 용왕은 보배 검을 상자 속에 넣고 진귀하고 질이 좋은 하얀 모직을 그 위에 덮은 뒤 석가족 사람에게 건네주며 말하였다.
“부디 이 천을 국왕에게 바치소서. 왕은 틀림없이 먼 곳에서 온 사람의 헌상물이라면 친히 받을 것이니, 바로 그 때를 틈타 왕을 해치소서. 이로 인하여 그 나라에 웅거하게 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석가족 사람은 용의 지시를 받고서 곧 오장나왕에게 가서 천을 바쳤다. 왕이 친히 그 천을 들어올리는 순간 석가족 사람이 왕의 소매를 잡고 그를 찔렀다. 그러자 좌우에서 왕을 모시던 신하들과 호위병 사이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지며 계단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석가족 사람은 칼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들고 있는 이 칼은 신룡(神龍)이 내려 준 것이다. 뒤늦게 복종하는 자는 이 칼에 베일 것이요, 신하되기를 거부하는 자는 목이 잘릴 것이다.”
그러자 모두들 신령스러운 무력에 겁을 먹고 그를 받들어 왕위에 모셨다. 그리하여 나쁜 제도는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고 어진 이를 표창하고 불행한 이를 구제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중들을 움직여서 왕의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곧 용궁에 알려서 용의 딸을 맞아들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용의 딸에게는 지난 세상의 업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과보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래서 관계를 가질 때마다 머리에서 아홉 개의 용의 머리가 나왔다. 석가족 사람은 이것이 꺼림칙하였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
예리한 칼로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러자 용녀가 놀라서 깨어나 말하였다.
“이것은 후손에게 좋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 저에게 조그마한 상처를 낸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자손들이 이 일로 인하여 두통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종족들은 언제나 이런 우환을 겪게 되었는데,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따금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석가족 사람이 죽고 나자 그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올달라서나왕(嗢呾羅犀那王)19)당나라 말로는 상군(上軍)이라 한다이다.
상군왕이 왕위를 이은 뒤 그 어머니가 시력을 잃었다. 여래께서 아파라라용(阿波邏羅龍)을 제도하시고 하늘을 날아서 돌아오시다가 그 궁전으로 내려가셨다. 상군왕은 이때 마침 사냥을 하러 나가 있었다. 여래께서 그 어머니를 위하여 간략하게 법의 요체를 설하셨다. 어머니는 성인을 만나 법을 듣게 되자 마침내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여래께서 물으셨다.
“그대의 아들은 나의 종족이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아침에 사냥하러 나갔으니 이제 돌아올 것입니다.”
여래께서 여러 대중들과 함께 곧바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러자 왕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다행히 저는 운이 좋아서 성스러운 종족을 낳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이런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또 친히 이곳에 와 주셨습니다. 제 아들이 이제 돌아올 터이니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나의 종족이오. 가르침을 들으면 믿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오. 친히 일러주지 않아도 발심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갈 것이나 아들이 돌아오면 이렇게 말하시오. ‘여래가 이곳에서 구시성(拘尸城) 사라수(娑羅樹) 사이로 가서 열반에 들 것이니 마땅히 사리를 거두어 공양하도록 하라’고 말이오.”
여래께서는 대중들과 함께 허공을 타고 떠나가셨다. 한편 상군왕은 사냥을 즐기고 있다가 멀리서 궁중을 바라보니 광명이 번쩍이고 있었다. 불이라도 난 것이 아닐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서둘러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서 자신의 어머니가 시력을 되찾은 것을 보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물었다.
“제가 궁궐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떤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기에 능히 어머니로 하여금 다시 예전처럼 광명을 되찾게 하였습니까?”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였다.
“그대가 나간 후에 여래께서 이곳에 도착하셨소. 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침내 다시 빛을 되찾은 것이오. 여래께서는 이곳에서 구시성의
사라나무숲 사이로 가셔서 장차 열반에 드실 것이오. 여래께서는 그대에게 빨리 와서 사리를 나누어 가지도록 명하셨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비통하게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뒤 가마를 빨리 몰도록 명하여 사라쌍수 사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열반에 드신 뒤였다. 이때 여러 나라 왕들은 상군왕을 변방의 왕이라 하여 경멸하면서 사리를 보배처럼 중히 여기며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하늘과 인간의 대중들이 부처님의 뜻을 거듭 일러 주었다. 여러 왕들은 이 말을 듣고 나서 마침내 본래대로 균등하게 나누어주었다.
몽게리성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서 신도하(信度河)를 거슬러 올라가면 길이 몹시 험하고 산골짜기가 깊은 곳이 있는데, 어떤 곳은 그물을 밟고 올라야 하고 또 어떤 곳은 쇠줄을 끌어 당겨서 올라야 하는 것도 있다. 잔도(棧道)20)가 허공에 매달려 있고, 비량(飛梁)21)이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나무 사다리를 기어올라 그렇게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달려라천(達麗羅川)22)에 이른다. 이곳은 바로 오장나국의 옛 도읍지23)로서 황금24)과 울금향이 많이 난다.
달려라천의 큰 가람 옆에는 나무로 새긴 자씨보살상(慈氏菩薩像)이 있다. 이 보살상은 금색이 눈부시게 찬란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은밀하게 통하는데 그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 말전저가(末田底迦)25)구역에서는 말전지(末田地)라고 하는데 잘못 줄여진 말이다아라한이 만든 것이다. 아라한이 신통력으로 장인(匠人)을 데리고 도사다천(覩史多天)26)구역에서는 도솔타(兜率他)라고 하거나 또는 도술타(兜術他)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올라가 미묘한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세 번이나 거듭 보여 준 다음에 일을 마쳤다고 한다. 이 보살상이 생겨난 이후부터 부처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이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신도하를 거슬러 올라가 비량과 잔도를 위태롭게 밟고서 험한 길을 건너면 5백여 리를 지나 발로라국(鉢露羅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2) 발로라국(鉢露羅國)
발로라국27)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대설산의 산간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보리와 콩이 많이 나고 금과 은도 난다. 금을 캔 이익으로 인해 국고는 풍요롭다. 기후는 매섭게 추운 날씨만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의 성품도 포악스럽다. 인의(仁義)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고 예절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다. 생김새는 추하고 초라하며,
모피나 거친 옷을 입는다.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고 언어28)는 다른 나라들과 차이가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수천 명이 된다. 학문은 오롯하게 전문으로 익히는 것이 없으며 계행은 아주 많이 어지럽혀져 있다.
이곳으로부터 다시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으로 돌아와서 남쪽으로 신도하를 건넌다. 이 강의 폭은 3~4리이며 남쪽으로 흐른다. 물은 비할 데 없이 맑아서 거울처럼 비치고 세차게 흘러 내려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독룡과 사악한 짐승들이 그 속에 굴을 파서 살고 있는데, 진귀한 보배나 꽃과 열매의 씨앗이나 부처님의 사리를 지니고 건너는 자들의 배가 많이 침몰하기도 한다.29) 강을 건너면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30)[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3)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
달차시라국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31)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각 세력 집단의 우두머리들이 힘을 겨루고 있지만 왕족의 후사는 끊겨졌다. 옛날에는 가필시국에 속해 있었으나 근래에는 또다시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32)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의 수확물도 매우 많다. 샘이 많고 꽃과 풀이 무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풍속은 경박하며 용맹스럽다. 3보를 받들고 있으며, 가람의 수는 비록 많지만 아주 많이 황폐해졌다. 승도는 아주 적은데 모두 대승을 공부하고 있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70여 리를 가다 보면 의라발달라용왕지(醫羅鉢呾羅龍王池)33)가 있다. 연못의 둘레는 백여 걸음 정도이고 물이 아주 맑으며 온갖 색의 연꽃이 동시에 피어나 이채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 용은 바로 옛날 가섭파부처님 시절에 의라발라(醫羅鉢羅) 나무를 망가뜨린 필추(苾蒭:비구)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우제를 모시거나 맑은 날씨를 빌 경우에는 반드시 사문과 함께 이 연못으로 와서 손가락을 튀기며 위로하는데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게 된다.
용의 연못에서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두 산 사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 솔도파는 무우왕이 지은 것으로 높이는 백여 척34)이다. 이것은 석가여래께서 ‘장차 자씨(慈氏)세존이 세상에 날 때 저절로 4대보장(大寶藏)35)이 생겨날 것인데, 이곳이 바로 그 승지(勝地) 가운데 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기별하셨던 곳이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때는 지진이 일어나서 모든 산들이 흔들리지만 보장(寶藏) 주위로 백여 걸음 안에서는 기울어지거나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또 어떤 어리석은 자가 망령되게 발굴하려 했다가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넘어지고 말았다고도 한다.” 곁에 또 가람이 있는데 허물어진 정도가 매우 심하였으며 승도의 자취는 오래 전에 끊어지고 말았다.
성에서 북쪽으로 12~13리 떨어진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지은 것이다. 어떤 때는 재일(齋日)에 간혹 빛을 발하거나 신기한 꽃과 하늘의 음악을 듣거나 보는 사람도 있었다.
선지(先志)의 말에 의하면, “근래에 어떤 부인이 몸에 악성 종기가 생겼는데 몰래 솔도파에 와서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고 예경하였다. 그리고 그 정원에 오물더미가 있는 것을 보고 말끔히 소제하고 향을 바르고 꽃을 뿌렸으며, 푸른 연꽃을 따다가 그 땅에 겹겹으로 깔자 악성질환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 모습은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뿐만 아니라 몸에는 빼어난 향기가 풍겨 나왔으니 마치 푸른 연꽃 향과도 같은 향이었다. 이곳은 승지(勝地)로서 바로 여래께서 옛날에 이곳에서 보살행을 닦으셨던 곳이다. 대국의 왕이셨을 때 그 호를 전달라발랄파(戰達羅鉢剌婆)당나라 말로는 월광(月光)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왕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여 머리를 잘라서 베풀었는데, 이와 같이 무려 천 번의 생을 지내오면서 제 몸을 베풀었다고 한다.36)
머리를 베푼 솔도파 옆에 승가람37)이 있는데, 정원은 황폐해지고 황량하며 승도들은 그 수가 줄어들었다. 옛날 경부(經部)38)의 구마라라다(拘摩羅邏多)39)당나라 말로 동수(童受)라고 한다논사가 이곳에서 여러 가지 논을 지었다.40)
성의 외곽에서 동남쪽으로 남산(南山)의 북쪽에 탑이 있는데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의 태자인 구랑나(拘浪拏)가 계모의 무고(誣誥)로 인하여 눈이 도려내어진 곳으로, 솔도파는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눈이 먼 사람이 기도하고 청하면 시력을 되찾게 되는 일이 많다.
이 태자는 정후(正后)의 소생이었는데 풍모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어질고 인자하여 그 이름이 어려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후실을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음란하였다. 계모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었으며 제멋대로 여서 사사로이 태자에게 접근하였다.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몸을 피하며 사죄하였지만 계모는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태자를 보자 더욱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하여 왕이 한가한 틈을 타서 투정을 부리며 말하였다.
“달차시라(呾叉始羅)는 나라의 중요한 영토입니다. 왕의 친지가 아니라면 어찌 맡길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태자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널리 소문이 나있습니다. 부친께서 어지시기 때문에 항간의 소문이 이렇게 나있는 것입니다.”
왕은 새 왕비에게 미혹되어 있던 터라 그녀의 말을 듣고서 간사한 꾀에 매우 기뻐하며 즉시 태자에게 명하였다.
“나는 혈통[餘緖]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조상의 업을 잇고 있다. 그르쳐서 선왕의 위력에 누(漏)가 되지 않을까 오직 그것만을 염려하고 있다. 달차시라는 나라의 금대(襟帶)41)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 그 나라를 진정시킬 것을 명한다. 국사는 대단히 막중하며 사람의 정은 잡스럽게 어긋나는 것이니 망령되게 행동하여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릇 부르는 명이 있을 때에는 나의 치아 도장[齒印]을 조사하라. 도장이 내 입 안에 있으니 어찌 오류가 있겠느냐?”
이에 태자는 명을 받아서 진정시키러 갔다. 세월이 오래 지났으나 계모의 분노는 더욱 커져가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서(詔書)를 꾸며내어 자니(紫泥)42)로 봉인하고서 왕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치아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사자를 시켜서 문책서를 보내었다.
태자를 보좌한 신하는 꿇어앉아서 그 문서를 읽다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였다.
태자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가?”
신하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칙서를 내리셨는데 태자를 꾸짖고 계십니다. 태자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산골짝으로 추방해 버려서 태자 부부의 생사를 시간에 맡겨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이런 명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믿을 만하겠습니까? 지금은 의당 다시 한번 여쭈어 보시고 두 손을 뒤로 묶고서 죄를 기다리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태자가 말하였다.
“부친이 죽음을 내리셨는데 어찌 고사할 수 있겠느냐? 치아 도장으로 봉인되어 있으니 이는 실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전다라43)에게 명하여 이 눈을 도려내게 하여라.”
눈을 도려내자 태자는 이내 실명하고 말았다. 태자 부부는 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정처없이 떠다니다 이윽고 아버지의 도성에 이르게 되었다.
태자의 아내가 일러 주었다.
“이곳은 왕성입니다. 아아, 배고픔과 추위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옛날에는 왕자이시더니 지금은 걸인이 되었군요. 부디 이 사실을 알리시어 다시 한번 지난번의 질책을 말할 수 있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에 꾀를 내어서 궁궐 안에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소리를 길게 빼고 울고 구슬프게 흐느끼면서 공후(箜篌)와 북으로 화음을 이루었다.
이때 왕은 높은 누각에 있다가 원통하고 비탄에 잠긴 노래 가사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서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공후와 함께 들려오는 노래 소리는 내 아들의 음성과 비슷한데 지금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그리하여 누가 노래하고 탄식을 하는지 마구간으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마침내 앞을 못 보는 태자가 불려왔고 그리하여 왕과 대면하게 되었다.
왕은 태자를 보고 슬픔에 잠겨서 물었다.
“누가 너의 몸을 다치게 했으며 이런 환난을 만나게 하였느냐? 사랑하는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구나. 이런 내가 만백성들을 어찌 살피겠느냐. 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제 나의 덕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까?”
그러자 태자가 슬피 울면서 절을 하고 답하였다.
“실로 저의 불효를 하늘에 물었습니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일에 느닷없이 아버님의 명이 내려왔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어 감히 문책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마음속으로 후첩의 소행임을 깨닫고서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도 없이 곧 바로 형벌을 가하였다. 이때 보리수 가람에 구사(瞿沙)44)당나라 말로는 묘음(妙音)이라고 한다대아라한이 있었는데 그는 네 가지 걸림 없는 말솜씨와 3명(明)45)을 갖춘 자였다. 왕은 곧 앞을 못 보는 아들을 데리고 가서 사정을 말하며 오직 바라는 것은 아라한이 자비를 내려 아들이 예전처럼 앞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아라한은 왕의 청을 받고서 즉시 그날로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가 훗날에 미묘한 이치를 설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모두 그릇 하나씩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법을 들으며 그 그릇에 눈물을 담도록 하라.”
이에 그 나라의 백성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모여들었다. 아라한은 12인연46)을 설하였는데 무릇 이 법을 들은 자로서 슬피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던 그릇에 눈물을 담았다.
설법이 끝난 뒤 사람들의 눈물을 모두 모아서 이것을 금쟁반에 담아 두고 아라한은 스스로 맹세하였다.
“무릇 내가 설한 것은 모든 부처님의 지극한 이치입니다. 만일 이 이치가 진실하지 않은 설법이었고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디 이 눈물들이 저 사람의 어두운 눈을 씻어 주어서 다시 광명을 되찾아 예전과 같은 시력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한 뒤에 눈물을 가져다 그의 눈을 씻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마침내 광명을 되찾았다.47) 왕은 이에 그를 보좌하던 신하들을 질책하여 관직에서 내쫓거나 국외로 추방하거나 좌천시키거나 죽였다.
그리고 이 사건과 연루된 모든 호족들은 설산의 동북쪽에 있는 사막으로 이주해 살게 하였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여러 산과 계곡을 지나 7백여 리를 가면 승가보라국(僧訶補羅國)북인도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4) 승가보라국(僧訶補羅國)
승가보라국48)은 둘레가 3천 500~3천 600리에 달하며 서쪽으로는 신도하에 접하고 있다. 나라의 큰 도성은 둘레가 14~15리이다. 산과 산봉우리에 의거하고 있으며 견고하고 험준하다. 농사일은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땅에서 수확을 많이 한다. 날씨는 춥고 사람들의 성품도 용맹스럽다. 풍속은 굳세고 용감한 것을 숭상하나 또 속임수가 많다. 나라에는 우두머리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장식에 손상이 있기는 하나 예사롭지 않은 기적이 잇달아 일어난다. 곁에는 가람이 있는데 텅 비었으며 승려가 살고 있지 않다. 성의 동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에 이르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한다.
연못이 열 곳 정도 있는데 좌우에서 빛과 경치가 물에 서로 비치며 어우러진다. 돌을 새겨서 둑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여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맑은 물살이 세차게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급하게 흘러간다. 용이나 물고기 그 밖의 수족(水族)들이 동굴에 살고 있는데 이 물에서 자맥질하고 헤엄치며 노닌다. 네 가지 색의 연꽃들이 맑은 연못에 가득하게 피어나 있고, 온갖 과일이 풍성하게 영글어 있으며 이채롭다. 숲과 연못이 서로 비치니 참으로 노닐 만하다. 옆에는 가람이 있는데 오래 전에 승려의 자취가 끊겼다.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백의외도(白衣外道)의 개조(開祖)49)가 자신이 추구하던 이치를 깨닫고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이 있다. 지금도 그 봉기(封記)가 있으며 곁에 천사(天祠)를 세웠다. 그의 무리들은 밤낮으로 정근(精勤) 고행하며 잠시도 쉬거나 한가하게 노닐지 않는다. 그들의 스승이 설한 법의 대부분은 불경의 뜻을 훔쳐온 것이며, 청법(聽法)의 대상에 따라서 법을 만들고, 궤의도 모방하였다.
나이든 사람을 필추라고 하고 어린 사람을 사미라고 부르며, 위의와 율행이 자못 승가의 법과 비슷했다. 머리털을 조금 남겨둔 점과 거기에 더하여 벌거벗었다는 점, 어떤 자들은 흰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 부류의 차이에 의거하여 구분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 천사상(天師像)은 여래의 상을 모방한 것으로 의복에 차이가 있을 뿐 상호(相好)에는 차이가 없다.
이로부터 다시 달차시라국의 북쪽 경계로 돌아와서 신도하를 건너 남동쪽으로 2백여 리 가다 보면 큰 돌문을 지나게 된다. 옛날 마하살타 왕자가 이곳에서 제 몸을 던져 굶주린 까마귀[烏擇]에게 먹인 곳이다. 그 남쪽으로는 140~150걸음쯤 걸어가다 보면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다.
이 마하살타는 동물이 너무 굶주린 나머지 먹을 힘마저도 없어진 것을 가엾게 여겼다. 그리하여 걷다가 이곳에 이르러 마른 대나무로 제 몸을 찔러 피를 내어 동물에게 먹였다. 피를 마신 동물들은 그제야 힘을 되찾고 그를 삼켰다고 한다. 이곳의 땅에는 초목들에 이르기까지 엷게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이 광경은 마치 피에 얼룩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 땅을 밟으면 마치 뭔가 가시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의심하는 자이거나 믿는 자이거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한결같이 슬픔에 잠기고 처연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마하살타 왕자가 몸을 베푼 곳으로부터 북쪽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돌을 새긴 솜씨가 매우 빼어나고 때때로 신령스러운 빛을 비치기도 하며 작은 솔도파와 여러 석감(石龕)들은 백여 차례씩 움직이면서 이 유적지50)를 둘러싸고 있는데 병든 사람이 이곳을 빙빙 돌면 대부분 쾌유하게 된다.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의 동쪽에 가람이 있는데51) 승도가 백여 명 살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50여 리를 가다 보면 외따로 떨어진 산이 하나 있다. 그 속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도가 2백여 명 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꽃과 열매가 풍성하고 연못이 거울처럼 드맑다. 곁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가 2백여 척에 달한다.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서 사악한 야차를 교화하여 살코기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 가다 보면 오랄시국(烏剌尸國)북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5) 오랄시국(烏剌尸國)
오랄시국52)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산이 잇달아 이어져 있고 경작지가 매우 좁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7~8리이며 우두머리가 없고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농사를 짓기에 좋으나 꽃과 열매가 적다. 기후는 온화하고 눈과 서리가 조금 내린다. 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은 강건하고 용맹스럽다. 속임수를 많이 행하고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는다. 큰 성의 서남쪽으로 4~5리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곁에는 가람이 있는데 승려는 아주 적으며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가 험난한 길을 걸어서 철교를 건너 천여 리 가다 보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구역에서는 계빈(罽賓)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6)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가습미라국53)의 둘레는 7천여 리이며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들은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산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좁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웃나라의 적들이 침공하여 정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큰 도성54)은 서쪽으로는 큰 강55)에 접해 있고, 남북으로 12~13리이고 동서로 4~5리이다.
농사짓기에 적합하며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 품종이 좋은 말과 울금향, 화주(火珠), 약초가 많이 난다. 기후는 추위가 심하며 눈이 많고 바람이 적다. 모갈(毛褐)을 입으며 흰 모포를 두른다. 풍속은 경박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겁약하다. 나라는 용의 보호를 받으며 이로써 마침내 인근 국가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사람들의 용모는 아름다우나 성품은 속임수를 많이 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많이 들으며,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같이 믿는다. 가람의 수는 백여 곳이고 승도의 수도 5천여 명이다. 네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모두 무우왕이 세운 것이며, 각각 여래의 사리가 한 되[升] 남짓 안치되어 있다. 『국지(國志)』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용이 사는 연못이었다.
옛날 불세존께서 오장나국으로부터 사악한 신에게 항복받고 나신 뒤 중국(中國)으로 돌아오고자 허공을 타고 오시던 중에 이 나라 상공에 이르셨다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말전저가(末田底迦)아라한이라는 이가 있을 것이니, 장차 이 땅에 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안위하게 하고 불법을 널리 펼치리라.”
여래께서 적멸에 드신 후 50년 되던 해에 아난의 제자인 말전저가아라한은 6신통(神通)을 얻고 8해탈(解脫)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기별하신 것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곧 이곳의 큰 산꼭대기에 이르러 숲 속에서 참선에 들어 있었다. 그러던 중 커다란 신통력을 나타내니, 용이 이것을 보고 깊은 믿음을 내어 원하는 것을 해드리겠노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아라한이 말하였다.
“부디 연못 안에 내 무릎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주시오.”
그러자 용왕은 물을 조금 덜어내어서 그만한 자리를 마련하여 아라한에게 바쳤다. 하지만 아라한은 이에 신통력을 내어 몸을 좀 더 크게 불렸다. 그러자 용왕은 힘껏 물을 더 덜어냈다. 결국 연못은 텅 비어버리고 물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용이 자신의 못을 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아라한은 이에 서북쪽에 연못 하나를 남겨두었는데 둘레가 백여 리에 달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권속들에게는 따로 작은 연못에서 살게 해 주었다.
용왕이 말하였다.
“연못의 땅을 모두 베풀어 드렸습니다. 부디 언제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말전저가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머지않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것이다. 그대의 청을 받고 싶기는 하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용왕이 거듭 청하였다.
“5백 나한은 언제나 저의 공양을 받을 것이며 법이 다하는 날까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법이 다한 뒤에는 이 나라를 다시 거두어들여서 제가 사는 연못으로 만들겠습니다.”
말전저가는 그 용의 청을 따랐다. 그리하여 아라한은 그 땅을 얻고 난 뒤에 큰 신통력을 부려서 5백 개의 가람을 세웠는데, 다른 여러 나라에서 천민을 사서 부역을 시켰다. 그리하여 이로써 승가 대중을 공양하였다. 말전저가가 적멸에 든 후 천민들은 스스로 우두머리를 세웠다. 그러나 인근의 여러 나라들은 이들의 비천한 종족을 경멸하며 글리다(訖利多)56)당나라 말로는 매득(買得)이라고 한다라고 부르면서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따금 샘의 물이 많아져서 범람하는 일이 있다.
마게타국(摩揭陀國)은 무우왕이,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지 백 년째 되던 해에 군왕의 자리에 올라 백성을 다스렸는데 그 위력은 다른 나라에까지도 미쳤다. 그는 3보를 깊이 믿고 4생(生)을 자애롭게 길렀다. 이때 오백 나한승(羅漢僧)과
오백 범부승(凡夫僧)57)이 있었는데, 왕은 이들을 공경하고 받들면서 차별을 두지 않고 공양을 올렸다. 범부승 가운데 마하제바(摩訶提婆)당나라 말로는 대천(大天)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지혜로웠으며, 조용하게 명실(名實)의 이치를 추구하며 깊이 사유하여 논을 지었지만, 그 이치는 성스러운 가르침에 어긋나 있었다. 무릇 다소의 지식이 있는 자들이 무리지어 이 이론(異論)을 따랐다.
한편 무우왕은 범부와 성현의 구별을 하지 못하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좋아하였는데, 친한 자들의 역성을 들어 주려고 승도들을 모두 불러 모아 긍가하로 몰고 가 깊은 강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려고 하였다. 나한들은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고 나서 모두 신통력을 부려서 허공을 타고 올라 이 나라(가습미라국)에 와서 산골 깊숙이 은거하였다.58) 그러자 무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몸소 찾아와서 허물을 사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나한들은 요지부동하여 왕의 청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무우왕은 나한들을 위하여 5백 곳의 승가람을 지었으며 이 나라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중승들을 공양하게 하였다.
건타라국의 가니색가왕은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백년 째 되던 해에 천운(天運)을 타고 군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왕의 위풍은 멀리에까지 미쳤으며 모든 나라들이 복속하게 되었다. 왕은 나라 일을 돌보는 틈틈이 언제나 불경을 익혔으며 날마다 승려 한 사람을 청하여 궁 안으로 모셔다 법을 설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논의들이 난립하여 부파마다 같지 않자, 왕은 깊은 의혹에 빠졌으나 미혹을 제거할 길이 없었다.
이때 협존자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을 버리신 지 세월이 아득하게 흘렀습니다. 제자들은 부파를 만들었고 스승과 제자는 다른 주장을 하며 제각기 보고들은 바에 의거하니 한결같이 모순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자 왕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오래도록 비탄에 잠겨 있다가 존자에게 말하였다.
“외람되게도 여복(餘福)이 있어 선조의 유업을 이어 받고 있소. 부처님께서 비록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으나 아직은 행운이 있었소.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법의 가르침을 잇고자 하니, 그 부파에 따라서 자세하게 3장을 해석하시오.”
협존자가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지난 세상에 선의 근본을 심으셔서 참으로 많은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법에 마음을 두시니 이것은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왕은 곧 4방에 널리 영을 내려서 모든 성현과 철인들을 불러모았다. 이에 4방
만 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으니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나 빼어난 성현들 할 것 없이 모두가 모여들었다. 왕은 이들에게 7일 동안에 걸친 4사공양(事供養)59)을 마치고 난 뒤에 법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였지만 어수선한 소란이 일어날 것이 걱정스러웠다.
왕은 곧 세심하게 생각하고 나서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성과(聖果)를 증득한 사람은 남고 번뇌에 얽매여 있는 자는 돌아가시오.”
이렇게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다시 명을 내렸다.
“무학인(無學人)은 남고 유학인(有學人)은 돌아가시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또다시 명을 내렸다.
“3명(明)을 갖추고 6통(通)을 지닌 자는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줄어들 줄 몰랐다. 그래서 또다시 명령을 내렸다.
“이 중에 안으로는 3장(藏)을 궁구하고 밖으로는 5명(明)에 통달한 자는 남고 그렇지 않은 자는 돌아가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499명이 남게 되었다. 왕은 본국에서 이 일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덥고 습기가 많아 고생스러웠다.
또 왕은 왕사성의 대가섭파가 결집한 석실60)에서 하고 싶어서 협존자 등과 상의하였지만 그들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그곳에는 외도들이 많고 이론(異論)들이 난립하여 그들과 대론하여 답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터인데 어떻게 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대중들은 이 나라(가습미라국)에서 할 것을 뜻에 두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4방이 산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있고 또 야차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지가 비옥하며 생산물도 풍성합니다. 또한 성현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신선들이 노니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뜻도 이럴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들 말하였다.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이에 왕은 여러 나한들과 더불어 그곳(건타라국)으로부터 가습미라국에 와서 가람을 세우고 3장을 결집하고 『비바사론』을 짓고자 하였다.
이때 존자 세우(世友)는 문 밖에서 옷을 깁고 있었는데 아라한들이 세우에게 말하였다.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못한 자는 청정한 논의를 일그러뜨린다. 너는 여기서 멀리 가거라. 이곳에 있지 말라.”
세우가 말하였다.
“여러 현자들께서는 법에 대해서 의심이 없으셔서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대의(大義)를 모으셔서 바른 논을 짓고자 하시는군요. 비록 제가 명민하지는 못하나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을 대충이나마 터득하였으며, 3장의 현묘한 문장과 5명(明)의 지극한 이치까지도 자못 깊이 연구하여 그 취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한들이 말하였다.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은둔하여 하루 빨리 무학(無學)을 증득하라. 그 후에 이곳에서 만나자. 그래도 때는 아직 늦지 않을 것이다.”
세우가 말하였다.
“나는 무학을 마치 눈물이나 콧물과 같다고 봅니다. 뜻을 불과(佛果)에 두고 구하였지만 작은 길을 달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제 이 실 꾸러미[縷丸]를 공중에 던지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반드시 무학의 성과(聖果)를 증득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라한들은 거듭 이를 질책하며 말하였다.
“증상만(增上慢)61)에 가득 찬 사람이란 바로 이 자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무학과(無學果)란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니 마땅히 속히 증득해서 대중들의 의심을 풀어야 할 것이다.”
이에 세우가 실 꾸러미를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여러 천신들은 실 꾸러미를 받고서 청하였다.
“바야흐로 불과를 증득하실 것이며, 다음에 자씨보살(미륵보살)을 이어 삼계에서 가장 존귀하고 4생(生)의 의지처가 되실 분이 어찌하여 이곳에서 소과(小果)를 증득하시고자 합니까?”
이에 모든 아라한들은 이 일을 보고 나서 자신의 허물을 사과하고 그 덕을 추앙하여 상좌로 모셨으며 의심나는 모든 내용을 결정하도록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5백 명의 현성들이다.
먼저 『십만송오바제삭론(十萬頌鄔波第鑠論)』구역에서는 『우바제사론(優波提舍論)』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지어서 소달람장(素呾纜藏)구역에서는 수다라장(修多羅藏)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해석하였고, 이어서 『십만송비나야비바사론(十萬頌毘奈耶毘婆沙論)』을 지어서 비나야장(毘奈耶藏)구역에서는 비나야장(毘那耶藏)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해석하였으며, 나중에 『십만송아비달마비바사론(十萬頌阿毘達磨毘婆沙論)』을 지어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또는 아비담장(阿毘曇藏)이라고 하는데 간략히 말한 것이다을 해석하였다.
대략 30만 송(頌) 960만 어(語)로써 자세하게 3장을 풀이하여 이것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였다. 지엽적인 면까지 궁구하였고 깊은 부분과 얕은 부분[深淺]을 두루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의(大義)가 거듭 밝혀졌고 미묘한 말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그리하여 두루 널리 유포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에 의거하게 되었다.
가니색가왕은 적동(赤銅)으로 철판을 만들어서 논장의 글을 베껴 새기고 석함(石函)에 넣어서 봉하여 솔도파를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야차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호위하여 이학(異學)들로 하여금 이 논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 명하였으며, 배우고 익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학업을 배우고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성공리에 마친 뒤 본국의 수도로 돌아온 뒤 이 나라의 서문(西門) 밖으로 나가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어앉으니, 다시 한번 이 나라를 승도(僧徒)에 보시하게 된 것이다.62)
가니색가왕이 죽고 난 뒤에 글리다 종족이 다시 스스로 왕을 칭하며 승도들을 내쫓고 불법을 무너뜨렸다. 한편 도화라국(都貨邏國)의 희마달라왕(呬摩呾羅王)당나라 말로는 설산하(雪山下)라고 한다의 선조는 석가 종족이다. 그는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6백 년째 되었을 때 크게 강토(疆土)를 장악하고 왕업을 이었는데, 마음을 부처님 땅에 심었고 정(情)은 법의 바다로 흐르게 하였다. 그런데 글리다가 부처님의 법을 훼멸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온 나라의 용감한 병사 3천 명을 모았다.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 여행하는 것처럼 속여 보배와 재물을 많이 지니고 그 속에 무기를 숨겨서 이 나라로 들어왔다.
이 나라의 군주는 특별히 극진하게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장사꾼 행렬 중에서 또다시 5백 명의 용맹하고 꾀가 많은 자들을 특별히 선발하였는데, 그들은 각자 예리한 칼을 소매에 숨기고는 귀중한 보배를 갖고 갔다. 그리하여 몸소 진상 올릴 것을 가져가 그것을 왕에게 헌상하였다. 이때 설산하왕이 그 덮개를 없애고 곧 자리에 오르니 글리다왕이 이것을 보고 놀라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산하왕은 마침내 글리다왕의 목을 베고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바로 도화라국의 설산하왕이다. 이 비천한 종족이 공공연하게 학정을 자행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제 그 죄인을 주살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다.”
그 나라의 신하들은 다른 나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나라가 평정되자 승도들을 불러 모으고 가람을 세워 예전과 같이 평안을 찾았다. 또한 다시 이 나라 서문(西門) 밖에서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승려들에게 보시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 글리다 종족은 여러 차례 승도들이 종문(宗門)을 뒤덮고 제사를 없애자 대대로 원한이 쌓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법을 혐오하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자 다시 왕이라고 스스로 일컫는 자가 나왔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에는 부처님의 법을 숭앙하고 믿는 자가 거의 없으며 외도와 천사(天祠)에 특히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성63)의 동남쪽으로 10여 리 가다 보면
옛 성의 북쪽에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의 남쪽에 승가람이 있고 승도는 3백여 명 있다. 그 솔도파 속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길이는 1촌 반은 됨직하고 황백색이다. 어떨 때는 재일(齋日)이 되면 때때로 광명을 발하기도 한다. 옛날 글리다 종족들이 불법을 파괴시키자 제각기 형편에 맞는 거처를 찾아 흩어졌다.
이때 한 사문이 인도 곳곳을 옮겨다니면서 부처님의 유적을 참배하였다. 그는 지극한 정성을 올리다가 후에 본국이 평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즉시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도중에 코끼리 떼들이 늪지를 제멋대로 오가고 성난 듯이 달리거나 울부짖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사문은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하였다. 그러자 코끼리떼들은 경주하듯이 달려가 연못의 물을 앞다투어 빨아 마시고서 사문이 피신해 있는 나무 뿌리를 적시더니 흙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나무가 쓰러지자 코끼리들은 사문을 싣고 큰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병든 코끼리가 있었는데 상처로 고통스러워 하며 누워있었다. 그의 손을 이끌어 상처에 올려놓았더니 그곳에는 마른 대나무가 박혀 있었다. 사문은 곧 대나무를 뽑고 약을 발라준 뒤 옷을 찢어서 그 상처가 난 발을 싸매 주었다. 그러자 다른 큰 코끼리가 금 궤짝을 가지고 오더니 병든 코끼리에게 주었다. 코끼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사문에게 주었다. 사문이 궤짝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들어있었다. 코끼리들이 호위하고 있어 스님은 그곳을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다음날 밥 먹을 때가 되자 코끼리들은 제각기 다양한 과일을 가지고 와 그것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 코끼리들은 스님을 싣고 숲을 빠져나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내려 주더니 각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뒤에 떠나갔다.
이윽고 나라의 서쪽 경계에 도착한 사문은 급류를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강 중류쯤에 이르렀을 때 배가 전복되려고 하였다. 같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말하였다.
“지금 배가 뒤집어지려는 것은 사문이 탔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여래의 사리가 있을 것이다. 용들이 이것을 가지려고 다투기 때문에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선장이 조사해 보니 과연 부처님의 치아가 있었다. 그러자 사문은 부처님의 치아를 들고서 몸을 구부려 용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이것을 너에게 맡기나 오래지 않아서 가지러 올 것이다.”
그러나 끝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배는 방향을 돌려서 돌아갔다.
사문은 강을 돌아보며
한탄하여 말하였다.
“내게는 용을 막을 주술이 없구나. 용이라는 축생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다시 인도로 가서 용의 해악을 막는 법을 배워야겠다.”
3년이 지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그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을 설치하자 그 용이 나타나 부처님의 치아가 든 궤짝을 사문에게 바쳤다. 마침내 사문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에 이 가람에 공양을 올리게 된 것이다.
가람의 남쪽으로 14~15리 가다 보면 작은 가람이 있다. 그곳에는 관자재보살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만일 단식을 하고 죽기를 맹세하며 보살을 보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상에서 묘한 색의 자태가 나온다.
작은 가람의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이른다. 그곳에는 옛가람이 있는데 그 제작법과 모습은 아주 장엄하지만 잡초만 심하게 우거져 있으며 현재는 다만 한 편에 작은 중각이 서 있는데 승도의 수는 30여 명이다.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옛날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64)당나라 말로는 중현(衆賢)이다논사가 이곳에서 『순정이론(順正理論)』을 지었다. 가람의 좌우에는 여러 솔도파가 있는데 그 속에는 모두 대아라한의 사리가 들어있다.
들짐승이나 산원숭이들이 꽃을 따다가 공양을 하는데 해마다 마치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처럼 변함없이 공양을 올린다. 그런데 이 산 속에는 여러 가지 신령스러운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데 어떤 때는 석벽(石壁)이 가로로 쪼개지기도 하고 봉우리에 말의 자취가 남겨져 있기도 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그 형태가 괴이하였다. 모두가 바로 아라한과 사미들이 무리를 이루어 노닐다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말을 타고 오간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자세하게 기술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부처님의 치아가 모셔진 가람에서 동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북쪽 산 낭떠러지 사이에 작은 가람이 있는데 옛날 색건지라(索建地羅) 대논사65)가 이곳에서 『중사분비바사론(衆事分毘婆沙論)』을 지었다.
작은 가람 안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다. 이곳에는 아라한의 유신사리(遺身舍利)가 안치되어 있다. 옛날에 어떤 아라한이 있었는데 그의
몸집은 매우 컸고 그가 먹는 음식은 코끼리의 양과 똑같았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며 말하였다.
“하릴없이 포식할 줄만 아니 어찌 옮고 그름을 가리겠느냐?”
그 아라한이 장차 적멸에 들게 되자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이제 오래지 않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게 되니 내 몸이 증득한 묘법(妙法)을 설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서로 비웃음치며 모두들 과연 그 말대로 이루어질지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러자 아라한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본생인연(本生因緣)을 설하겠다. 이 몸의 전신은 코끼리 몸이었고 동인도의 한 왕궁의 코끼리 우리에 살고 있었다. 마침 이 나라에 어떤 사문이 있었는데 그는 멀리에서부터 인도로 유행하면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여러 경전과 논서를 두루 찾아다녔다. 이때 왕이 나를 사문에게 보시하면서 불경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나는 목숨을 마쳤고, 경을 싣고 간 복덕의 힘으로 마침내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복덕을 심은 덕에 일찍이 법복을 입게 되었으며 부지런히 해탈을 구하여 잠시도 편하게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6신통을 얻고 삼계의 탐욕을 끊었다. 하지만 먹는 것은 이전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었으므로 언제나 스스로 몸을 조절하여 3분의 1만을 먹었다.”
이렇게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문은 허공으로 올라가 화광정(火光定)66)에 들어서 몸에서 연기와 불꽃을 내뿜더니 적멸에 들었다. 남은 유해가 아래로 떨어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거두어서 솔도파를 세운 것이다.
왕성의 서북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상림(商林)가람에 이른다. 포라나(布剌拏)67)당나라 말로는 원만(圓滿)이라고 한다논사가 이곳에서 『석비바사론(釋毘婆沙論)』을 지었다.
성의 서쪽으로 140~150리를 가다 보면 큰 강이 나오는데 북쪽으로 산을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가다 보면 대중부(大衆部)가람에 이른다. 승도는 백여 명 있으며 옛날 불지라(佛地羅)논사68)가 이곳에서 『대중부집진론(大衆部集眞論)』을 지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산을 넘고 험한 길을 지나서 7백여 리 가다 보면 반노차국(半笯奴故反嗟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7) 반노차국(半笯嗟國)
반노차국69)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산과 강이 많고 경작지는 좁다. 농사는 때에 맞추어 씨 뿌리며 꽃과 열매는 풍성하다. 사탕수수가 많이 나고 포도가 없다. 집집마다 암몰라과(菴沒羅菓)ㆍ오담발라(烏淡跋羅)ㆍ무차(茂遮) 등의 과일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는데 그 맛은 매우 진기하다.
기후는 따뜻하고 더우며 풍속은 용맹하고 강렬하다. 의복의 재료로 대부분 모포를 사용하여 입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질박하고 솔직하며 3보를 깊이 믿는다. 가람은 다섯 곳 있으며 대부분 황폐해졌다. 군주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성의 북쪽에 가람이 있는데 승도는 아주 적다. 가람의 북쪽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실로 신령스러운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갈라사보라국(曷邏闍補羅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
8) 갈라사보라국(遏70)邏闍補羅國)
갈라사보라국71)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이다. 매우 험하고 견고하며 산이 많다. 강의 원천은 매우 좁고 지리(地利)는 풍요롭지 못하다. 토양과 기후는 반노차국과 같고 풍속은 용맹하고 강렬하며 사람들의 성품은 경박하고 용맹스럽다. 나라에는 군주가 없으며 가습미라국에 복속되어 있다.
가람은 열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매우 적다. 천사(天祠)가 한 곳 있는데 외도는 매우 많다. 남파국으로부터 이 땅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사람들의 생김새는 초라하고 초췌하며 성품은 난잡하고 거칠다. 말도 비천하고 예의가 경박하니 인도의 바른 경계라 할 수 없으며 변방 오랑캐의 비뚤어진 풍속인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내려가 물을 건너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책가국(磔迦國)북인도의 경계이다에 이른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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