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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1 불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중권

by Kay/케이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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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중권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무착보살 게송
세친보살 해석
의정 한역
김두재 번역


어떤 것을 능히 성립하게 된 원인의 모습[因相]이라고 말하는가?

두 가지1)의 성립이 존중받는 까닭에
동등한 흐름이 수승(殊勝)해지며
번뇌의 원인이 되는 성품 때문에
하열한 것도 훌륭하게 되네.

두 가지 성립이 존중받는다는 말은 몸이 의탁하고 있는 땅에 탑을 만들어 세웠기 때문이니, 이것은 설법할 땅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 대사(大師)와 같이 존중 받을 만한 성품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는 곧 경을 지닌 사람이 보배를 보시 받는 땅이지만 보시를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아래 경문에서 이 법문(法門)을 밝혔으니, 그것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친히 증득하여 깨달은 바와 같은 등류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일찍이 있어온 법은 곧 여래께서 설하신 것인가,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말인가?
어느 한 법도 여래(如來) 혼자서 말씀하신 것은 없었으니, 이 모두는 여러 부처님께서 다 함께 선양(宣揚)하셨음을 말한 것이다.
또 보배구슬[珍寶]의 보시로 얻은 복은 곧 고통과 번뇌[苦惱]의 일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며, 법문으로 얻은 공덕만이 비로소 번뇌와 의혹을 끊어 없애는 데에 요긴하므로 우열(優劣)관계에 있어서 현격(縣隔)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대지의 티끌로 비유를 들어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티끌이 아닌 것을 가지고 티끌이라 말한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데 이것을 실제 세계라고 말한다”고 하셨다.
여기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이 대지의 티끌은 더러움에 물드는 따위의 성품이 있는 티끌이 아니니, 그러므로 대지의 티끌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저 세계는 곧 번뇌의 인자(因子)가 없는 계(界)를 이름한 것이니 이것을 세계라고 말하였다. 계(界)란 인(因)의 의미가 있으며,
이것은 곧 세(世)의 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저 복(福)은 곧 번뇌와 의혹, 그리고 진분(塵坌)의 원인이 되니, 저것은 밖의 티끌[外塵]2)로 말미암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비록 이것이 미진(微塵) 무기(無記)여서 복을 심고 선을 행하는 곳으로는 가장 비근(卑近)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 모든 것이 부처를 이룩하는 복의 원인으로서 다시금 미열(微劣)하지 않음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또 저것은 능히 대장부의 모습을 성취하여 지니게 된 복덕이며, 이것은 보리를 성취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4구게(句偈)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법문을 설하는 복도 이보다는 하열하다.
저 여러 가지 모습은 정각(正覺)의 체성(體性)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대장부상(大丈夫相)이라고 말한다. 저것은 표상(標相)3)이기 때문에 4구게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설법함으로써 그 복덕이 비로소 대각(大覺)의 성품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하열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저 복덕은 진귀한 보배를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거늘 하물며 법신(法身)을 근본 원인으로 하는 이 복덕을 초월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하열하면서도 우세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이 복덕은 지극히 비근(卑近)하여 능히 대각(大覺)을 성립하는 원인이 되지만, 이는 이미 보배를 보시하여 성취한 복덕과 4구게를 지녀 다른 이에게 설법한 복덕의 원인과는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 아래의 모든 글에서 다시 성립된 내용들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과보[果]가 수승하지만 괴로운 까닭은
훌륭한 일이라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열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법이 함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심오한 성품인 까닭은
그 밖의 약전[略詮]4)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며
으뜸가는 족성(族姓)으로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어느 복덕보다도 가장 우세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답하기를, 보배를 보시한 복으로 획득한 자신의 수용과(受用果)인 그 몸도 훌륭하긴 하지만 저 한량없이 많은 몸을 희생하고 버려 얻은 이 복이 앞에 것보다 훨씬 우세하니,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움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법을 위하여 보시를 행한 것이겠는가?
그때 구수(具壽) 묘생(妙生)은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운 것임을 알고 법의 세력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러한 법문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묘생에게 스스로의 지혜가 생겨난 후로 지금까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수승한 일이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반야(般若)의 이름을 밝히려고 한 말이다.
이 아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수승하고 절묘한 일을 성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경전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반야바라밀다라고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답하기를, 열반의 경계는 알기 어려운 것인데 그는 열반의 경계를 알고 있었으니, 부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문을 듣고 나면 실상(實想)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실상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이곳에만 있기 때문이며, 실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경문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들으면 능히 이와 같은 생각을 낼 텐데,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 희유(希有)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또한 매우 심오한 뜻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 경전을 혹시 조금이라도 받았거나 두루 지니게 되었다면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취한 바의 경계가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은 곧 실제 생각이 아니라’고 한 것은 취한 이도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두 가지는 그 차례와 같이 나[我]와 법(法) 두 가지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지혜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뜻에 대하여 묘생이 말한 일을 따라 인가하셨으니,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두렵다[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니, 그것은 곧 경구(驚懼)ㆍ포구(怖懼)ㆍ외구(畏懼)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일에 따라 다르므로 세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경(驚)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 하여 생겨나는 두려움이니만약 옳게 번역하자면 범음(梵音)으로는 마땅히 월포(越怖)라고 해야 하는데 이제 경(驚)이라고만 말한 것은 옛 뜻을 옮기기엔 충분치 못한 것 같다. 만약 논석(論釋)에 준해 보면 경(驚)이라는 뜻은 매우 걸맞지 않다. 아래 두 가지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 보기 바란다, 바른 이치를 어기고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 싫어하기 때문이며, ‘포(怖)’라고 말한 것은마땅히 속포(續怖)라 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무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런 마음이 이미 생겨난 뒤에는 끊어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畏)라고 말한 것은마땅히 정포(定怖)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정된 마음을 내어 한결같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문득 성립되지 않아 마음속에 두려운 의혹이 생겨 멀리 떠나는 것이다.만약 글에서 본음(本音)과 본의(本意)를 보지 않고는 뜻을 해석하기에 충분치 못할 것이다. 여기의 주석은 본음에서 나온 것이니, 의혹을 내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역자들은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 논(論)은 잘못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다른 경전[略詮]보다 수승한 것이니, 경에 말하기를 “이것은 가장 수승한 바라밀다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했기 때문이다.경전을 여기서는 약전(略詮)이라고 말했다.
또 이 법문은 가장 으뜸가는 족성으로 높고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수승한 족성이다’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진귀한 보배의 보시에는 이와 같이 많은 덕을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 이것은 이 성립된 복이 앞의 복덩어리보다는 더 뛰어나니, 더구나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이겠는가?
그래서 이른바 “몸은 괴로운 성품이니, 그것을 보시하는 것은 곧 고통스러운 과보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 복은 비열(卑劣)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법문에 근거하여 경을 가지고 설법할 때에 저 보살들이 모든 고행(苦行)을 행하는 것도 어찌 고통의 과보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것만은 고통스런 과보를 얻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아래의 글이 생겨났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저 인욕행[堪忍]을 행할 때에
비록 괴롭지만 잘 수행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이것을 뛰어난 일이라고 이름한다.

성내거나 분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성품이라 부르지 않으니
안락(安樂)하고 큰 자비심이 있기에
행할 때에 괴로움의 과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답하기를, 가령 저 사람이 고행(苦行)을 행할 때에 고뇌(苦惱)의 결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때 감인(堪忍)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훌륭한 일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거기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첫째는 착한 성품인 까닭에 모든 바라밀다가 다 착함으로써 체성(體性)을 삼는 것이며, 둘째는 거기에서 얻어지는 덕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저 공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피안[岸]은 일찍이 아는 이가 없으므로 그 언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승한 법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곧 이 행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앞의 고뇌와 비교하면 저절로 다름이 있거늘 더구나
나라는 생각과 성냄이라는 생각이 모두 없는 것이겠는가?
결정코 그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고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자비와 즐거움이 생겨날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또한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이 있는 것과 자비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니, 이 말의 이치에 준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유정(有情)이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 등을 제거해 버리지 못한다면 고행을 할 때에 고뇌가 있음을 보고서 문득 보리(菩提)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이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는 무엇을 밝히고자 한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수승한 보리심을 내지 않는다면 문득 이와 같은 과실이 있어서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버리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굳세게 노력해야 하네.

묻기를, 어떤 마음이 곧 이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이기에 버려야 하며, 굳세게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어느 곳에서 이 보리심의 원인을 버리지 않고 정진을 구하게 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것을 일러 인변제(忍邊際)를 증득했다 하고
이것을 마음의 방편이라고 말하네.

이것은 초지(初地) 승의(勝義)의 마음에 들어가서 인변제행(忍邊際行)5)을 증득한 것을 말한 것이니, 머무름 없는 마음이 곧 이것이다.
경문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발하여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머무르거나 집착함이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만약 물질 등의 처소에서 머물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불과(佛果)를 구하고자 매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고 한 글의 뜻은 보시가 여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머물러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일으켜 방편을 행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여 인욕바라밀을 증득하고 나면 비록 다시 괴로움을 만난다 해도 큰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묻노니 어떻게 마음을 내고 수행하여야 유정(有情)들을 이익 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유정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취하고 버리는 것에 대한 설법에서와 같다.

묻노니 의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는가?

답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른 수행이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
유정(有情)의 일과 모습에 대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이는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여기에서 ‘바른 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을 말한 것이니,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면서도 유정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엔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유정의 사물과 모습이라고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런 일을 취(聚)라고 말한다.

저 중생이라는 것은 곧 명자(名字)로 시설(施設)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중생이 의지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른 수행이라고 하는가?
중생이라는 사물의 모습은 다 제거해야 하는데 저 명자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것은 곧 생각이 아니니, 그것은 곧 그 자체(自體)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저 중생이란 실제로 중생이 아닌데 5온(蘊)을 가지고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 중생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나와 법에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까닭에 불세존께서 모두 갖가지 생각을 여의었는가?
이것은 나와 법, 이 두 가지 관념이 다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어떻게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가장 수승한 일은 그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세존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은
참다운 견해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저 두 가지6)는 실제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닌데 모든 대사(大師)들은 억지로 그 생각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여래(如來)는 진실한 견해로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과(果)와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과의 인을 알 수 있는가? 이미 이런 의심들이 생겼을 것이 아닌가?
경에서는 답하기를 “묘생(妙生)아, 여래는 진실한 말을 하시는 분이니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과(果)는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지만
이것이 곧 저 과보의 원인이 되니
세존께선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진실한 말의 성품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요점을 세워주고 하승(下乘)7)을 설해주며
또한 대승(大乘)의 이치도 설해 주는
여러 가지 수기(授記)한 일들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하네.

부처님께서는 요기(要期)8)를 세웠기 때문에 원래 불과(佛果)를 구함에 있어 허망하거나 거짓이 없다.
하열승(下劣乘)9)과 대승(大乘)에 대한 모든 수기(授記)에 조금도 거짓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차례를 따라 “진실한 말, 여여(如如)한 말, 거짓이 없는 말, 달라지지 않는 말”이라고 하여 서로 배속(配屬)시켰다.
여래께서 성문승에 대하여 괴로움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실하여 헛되지 않으며, 그 대승에 대하여 법에는 성품이 없음을 설하니 설명한 진여는 곧 실지(實知)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가 곧 이 이치를 알고 계시므로 일체시(一切時), 즉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하여 수기한 바가 그 말한 것과 같아서 모두 거짓되거나 속임이 없기 때문에 여래라고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증득하신 법과 말씀하신 법은 곧 진실한 것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법[彼]을 증득하지 못한 채 따르기만 한다면
이는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법문을 듣고 증득할 과보(果報)에만 집착하는 이에게
그를 다스리기 위하여 선설(宣說)하셨네.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법에 대하여 이 설법에서 저것을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저것을 수순한다. 저 설법으로 말미암아서 친히 안으로 법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 속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실이 아니요,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다.
‘나는 현재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한 것은 곧 문구(文句)의 도리에 의거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묻노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스스로 중생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말을 세워서 나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라고 해놓고 또다시 내가 설한 법은 진실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라고 하였는가? 한 마디 말에 두 가지를 겸한다는 것은 이치로 보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의혹 때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말한 것대로 집착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하기를 ‘모든 성인은 곧 무위(無爲)로부터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여의 성품은 어느 곳이나 두루 있다’고 하였다.”
어째서 불과(佛果)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야만 능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또 어느 때나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곧 진실한 바탕의 진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는 이것을 얻는데 어떤 이는 이것을 얻지 못하는가?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어둠 속에 들어가는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진여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있건만
그 참다운 성품을 얻지 못하고
무지(無知) 때문에 머무름이 있으니
지혜가 있으면 머무름 없이 진실을 얻는다.

여기에서의 뜻은 진여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때나 항상 하여 두루 있으나, 지혜가 없어 머무르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없으면 이것은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지혜가 있어 머무르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있으면 이것은 청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세존은 곧 진여(眞如)에서 나타나셨으니, 이런 이치 때문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으면 진여를 증득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지혜가 없으면 꽉 막힌 문과 같으니
지혜는 어둠을 밝히는 광명과 같아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得)과 실(失)이 눈앞에 나타난다.

‘어둠과 같다’고 한 것은 곧 어둠과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이 어둠을 가지고 저 무식(無識)함에 비유하였고, 저 햇빛을 가지고 지혜가 있고 안목이 있는 것에 비유한 이치도 이와 똑같으니, 경문에 잘 갖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과 실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말한 것이니, 그 호응하는 바를 따라서 안목이 있는 이는 밝음으로 능히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밤이 다 지나고 새벽이 되면 밝은 빛이 나타나 다스려야 할 바[所治]를 깨뜨림으로써 깜깜한 것을 없앤다. 밝은 해가 떠올라 그 광명이 이미 앞에 나타나면 그 햇빛이 이미 중생의 색상(色像)을 비추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뒤의 경문에서는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였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와 같은 바른 수행으로 인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복을 획득하니
법을 바르게 수행 하는 이에게
이제 마땅히 업(業)의 작용을 설하리라.

‘이와 같이 바른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곧 글에서의 바른 수행을 밝힌 것이다.
게송으로 설하리라.

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고 연설하는 것이다.

‘글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은, 첫째는 받아 지니는 것이며, 둘째는 읽고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연설하는 것이다.
‘받아 지닌다’는 것은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말한 것이며, ‘읽고 외운다’는 것은 많이 듣고 말함에 의지하는 것이니, 비록 완전히 지니진 못했어도 능히 독송하기 때문에 역시 많이 들어 섭수할 수 있다.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이라는 것은 곧 두루두루 그 뜻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뜻으로 증득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뜻으로 증득하는 것은 다른 이로부터 자기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다른 이로부터’이며, 어떤 것이 ‘자기에게 미치는 것’인가?
법문을 듣고 나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례대로 다른 이로부터 자신에게 미친 것을 증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두루 뜻을 증득함에 의거한 것이니, 이것은 문자와 뜻에 있어서 바른 수행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것은 안으로 자신을 성숙시킨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도 성숙시키는 것이
일과 시간의 큰 성품을 따라서
그 복덕은 어느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게 된다.

여기에서 ‘받아 지닌다’고 한 것 등은 다만 안으로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有情)도 성숙하게 한다. 곧 이것은 다른 이를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설하여 이와 같은 복(福)의 양을 획득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복의 양(量)에 대한 차별을 밝힌 것이다.
“일과 시간의 큰 성품으로 말미암아 희망하는 복은 어느 복보다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몸을 버린 복덕은 이에 앞서 몸을 버린 복덕보다 더 우세하다.
일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있고, 시간이 크기 때문에 하루 내내 오히려 매우 많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보시를 행한다.
또 경에서 “많은 시간을 법에 대하여 바르게 수행하는 자에 대하여 업(業)의 작용을 이제 마땅히 설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저 행에 대한 업의 작용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른 경계에서의 성품이 아닌 유독 이 성품만이
능히 큰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성품이며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니
최상 경지의 원인을 증장(增長)시키기 때문이라네.

다만 이 바른 법만을 지니고
여기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큰 그릇을 성취하리니
모든 업장을 끊어 없애면
곧 지혜를 달통한 성품을 획득하리라.

세간의 미묘한 일들이 원만하고
이숙(異熟)에서는 매우 존귀하게 되리니
이 법을 잘 닦아 행하면
틀림없이 이러한 업(業)을 획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경에서 말한 “이루 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범부의 마음으로는 행할 바 경계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루 다 재고 헤아릴[稱量] 수 없다’고 한 것은 유독 이 성품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복이며, 성문(聲聞) 등은 함께 할 수 없는 성품임을 밝힌 것이다.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대승의 유정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곧 이 법문은 대승(大乘)만이 의지하는 대승의 가르침이므로 극상승(極上乘)과 대승만이 행할 수행이라 말하고, 또한 최승승(最勝乘)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열(下劣)의 승을 즐기는 이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듣기 어려운 성품을 가진 이는 들어도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사량(思量)하기 어려운 등등의 복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최상의 원인을 증장시키면 복의 종자도 증장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경문에 이르기를 ‘생각할 수도 없고 칭량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한량하지도 못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을 말함이니, 순서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어깨에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은 법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을 드러낸 것이다. 법을 지닐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보리(菩提)를 지닐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에는 향과 꽃을 공양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경전이 의지하고 있는 곳은 뛰어나고 미묘한 그릇을 성취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시당하고 욕(辱)을 당하기 때문에 마땅히 생겨나게 되는 악한 세계의 업은 장차 모두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업장(業障)을 제거하여 맑힘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경을 받아 지녀 독송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욕을 당할 때에 이렇게 욕을 당하는 사람에게 복덕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자고이래(自古以來)로 번역하는 모든 이들이 다 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범본(梵本) 중에 그 내용의 글자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서 먼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섬겼으므로 그때 얻은 복덕이 말법(末法)시대에
이 법문을 받아 지닌 이가 획득한 복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로 통달한 성품을 밝힌 것으로서 많은 복덕의 자량(資糧)이 다 원만하게 갖추어졌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데까지는 그 과보(果報)가 불가사의함을 밝힌 것이다. 곧 이것은 위의 게송에서 말한 “세간의 미묘한 일 원만하여 과보(果報)가 지극히 존귀하리라”고 한 것으로서 세상을 보호하는 제석(帝釋)과 바라문(婆羅門) 등은 그가 증득한 원만한 공덕 때문에 모두 마땅히 섭수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광란(狂亂)’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마음을 광란하게 하는 요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수 없는 과보다’라고 말한 것은 여기에 많다[多]는 성품과 수승하다[勝]는 성품의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범부의 마음으로는 모두 헤아려 알 만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바른 법을 바르게 수행하면 문득 이와 같은 많은 덕에 편안히 머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른 행업(行業)으로 인한 과보의 공용(功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앞에 세 가지의 문답이 있었는데도 여기에서 거듭 물었으니, 그 뜻이 어떻게 다른가?
게송으로 대답하겠다.

각자 스스로 수행할 때에
장차 나는 보살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마음에 장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니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묘생(妙生)아, 실제로 아무런 법도 없는 것을 보살행이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만약 보살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면 왜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보살행을 행하셨는가?
이런 의혹을 끊어주기 위하여 수보리가 “실제로는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여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계실 때에”라는 이와 같은 등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슨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뒤에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기(授記)하셨으니
연등불의 처소에서 행한 것은 뛰어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보살의 그와 같은 수행이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은 아니다.

이 게송에 담긴 뜻은 “나는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수승하고 가장 으뜸가는 행인 보살행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또 “내가 옛날 수행할 때에 실제로 아무 법도 없었다. 만약 어떤 법이라도 있었다면 그 부처님의 처소에서 정각(正覺)을 증득하였을 것이며, 만일 정각을 증득하였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뒷날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또 어떤 이는 ‘그는 수행할 때에
스스로 나는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보리(菩提)가 없다면 부처도 없을 터이니 그렇다면 곧 다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의심을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이런 의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경문에서 “묘생아, 여래라고 말하는 것은 곧 실제의 성품인 진여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뒤바뀜이 없는 이치를 실제 성품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뜻을 진여라고 말한다.
“묘생아,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증득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 되느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답하기를 “보리는 그의 수행과 같아서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게송에서 말했으니, 이 말은 옛날 보살이 수행할 때에 실제로 행한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다 그와 같다는 말이다.
‘법이 없었다면 정등보리도 증득하지 못했을 터이니 이는 도리어 무상정등보리는 실제로 없다고 말해야 되지 않는가?’라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 것이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해 “묘생아, 여래께서 증득한 정각의 법은 곧 실제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은 진여(眞如)의 진리이니, 그것은 곧 실제로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은 곧 모여서 이루어진 모습이지만, 저것은 물질 등의 모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모습이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은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고
이 법이 곧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모두가 유위(有爲)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물질과 소리 등의 모습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물질 등의 모습은 본래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니, 이로 말미암아 “저 모습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게송에서 말했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여래께서는 이 법을 증득하셨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이 법은 모두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다 유위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위(無爲)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무슨 뜻을 진술하려 한 것인가?
모든 법은 진여로써 자성을 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만 부처님만이 깨달은 것이므로 모든 법은
곧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였다.
이 물질 등은 그 자체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저 모든 물질과 소리 등의 법은 다 이 법이 아니다. 이 법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 법을 성취하였으니, 이것은 곧 필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부의 비유는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신의 부처님을 가지고
장부(丈夫)에 비유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장애(障碍)10) 없이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며
모든 장소에 두루 가득하게 계시는 성품이기 때문이라네.

증득하신 몸[德體] 광대(廣大)하신 까닭에
또한 큰 몸이라 이름하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므로
그는 몸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한다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이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다.
‘두루 가득하다’고 말한 것은 두루 다닌다는 뜻이다. 모든 곳에 두루 하기 때문에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라고 말했으며, 증득한 몸이 크기 때문에 또한 큰 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두루 다닌다는 것은 곧 진여의 성품으로서 모든 법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성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곧 “그는 몸이 아닌 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고 설하셨느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무슨 뜻을 진술하기 위함인가?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은 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니, 실체의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원만히 갖춘 몸, 큰 몸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보살이 없다고 말한다면 정각(正覺)도 또한 없을 것이며, 깨달을 대상[所覺]도 역시 없을 것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에 들게 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도 엄숙하고 청정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보살 등이 일을 행하여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원적(圓寂)에 들게 하고, 또한 다시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려는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까닭에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아래의 글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계(法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유정(有情)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거나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속임이며 거짓이라 한다네.


“만약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속이는 것이며 거짓이니, 이것을 보살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살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혹이 일어날 것이므로 “묘생이 만약 일체법은 성품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한다면”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에서 “일체법이 성품이 없다”는 이와 같은 등의 글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보살과 중생이
모든 법엔 자성이 없음을
만약 그것을 알면 비록 성인이 아닐지라도
성인 또는 지혜로운 이라고 불리게 됨을 마땅히 알라.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이는 모든 법엔 아무런 성품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법에 성품이 없다’는 것은 곧 중생과 보살이 소유한 법에 의거한 것이니, 저들이 만약 능히 믿고 이해한다면 세간지(世間智)이거나 출세간지(出世間智)이거나 간에, 즉 이생(異生)이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모두 보살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문득 결정을 이루어 부속보살(覆俗菩薩:世諦菩薩)과 승의(勝義:出世諦)보살, 이 두 종류의 보살을 허락한 것이다. 이는 곧 저들에게 순종하기를 밝힌 것이므로 보살, 보살이라고 두 번 말한 것이다.
앞의 경문에서 말하기를 “여래는 나타난 바를 증득한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 이치가 명백하여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저 성인이 전혀 본 것이 없겠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눈을 허락하여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록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니
부처님께선 다섯 가지 눈을 갖추셨기에
경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계신다네.

이것은 ‘왜 허망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비유를 들었을 뿐이다.
“저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성품에서 그 마음이 유전(流轉)했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이와 같이 자세하게 말했으니, 이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말인가?
저의 허망한 견해 때문이 아니요 경계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니, 어떤 것이 곧 허망한 경계인가 하면 가지가지 허망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가지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여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지니고 있지 않고 항상 변천하므로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갖가지 인식작용이 있어서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각기 다른데 그런 까닭에 다시금 이런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인식작용이라고 이름하기에 마음이 유전(流轉)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다라(陀羅)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실상의 염처를 여읜 성품을 밝힌 것이다. 저 염처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염처를 지니는 법인데 그가 만일 이 염처가 없다면 곧 다라(陀羅) 남아라(喃阿羅) 아타라(痾陀羅)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이름에는 모두 각각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다 지닌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한 유주(流注)한다는 뜻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흘러 흩어지는 것이니,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항상 유전하는 인연을 밝힌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유전하여 허망한 성품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물었다. 무슨 까닭에 본경(本經)에서는 애초부터 범어(梵語)로 된 다라(陀羅)를 보류한 채 한자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거기에는 무슨 의취(意趣)가 있는가? 대답했다. 범본의 세 곳에는 모두 이 다라니가 있지만 그 뜻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지금 이 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만약 전적으로 범자(梵字)만을 따른다면 소리가 중국東土에 막히게 될 것이고, 만일 모두를 중국음唐音으로 번역한다면 그 뜻이 서역(西域)과 어긋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 썼던 범자의 의미가 그대로 잘 보전되어 전해지게 되었다고 이유를 말할 수 있겠다. 이 안에서 지(持)자를 말한 것은 아마도 집지(執持)의 일을 기술한 것 같은데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송(頌)을 지은 무착(無着)보살의 뜻을 맞추고, 이를 주석한 세친(世親)보살의 마음을 맞춘 것이며, 이것을 잘못 기술하여 결코 손을 상하게 하게끔 하는 근심이 없게 하려고 한 것 같다. 만약 이것을 모두 유(流)자로만 번역했다면 지(持)자의 이치는 전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모두 지(持)자로만 번역했다면 유(流)자의 뜻은 진실로 끝내 나타지지 못한 채 아주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겸할 수 있게 번역해야 비로소 생각했던 것과 같이 되어 시원스러워질 것이다. 만약 유자로 번역하면 이치에는 꼭 맞아떨어질 것이나, 그러나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다라니의 뜻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 곳이 이미 그러하다면 다른 곳이야 이를 유추해보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다라니가 남아 있는 모든 범본이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 『반야경』은 이미 네다섯 번의 번역을 거쳤으므로 이를 찾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잘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미가 기이한 것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거듭 번역되면서 그 의미가 길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서쪽 나라의 성명(聲明)은 하나의 이름에 많은 일을 지목하고 있고 하나의 일에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 다라(多羅)라는 한 마디의 말도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어 유(流)라는 뜻이 있고 지(持)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치가 지방 풍속의 다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인 듯하므로 옛것만을 굳게 믿어 융통성을 갖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옛 번역만 고집한다면 그 뜻이 소원하거나 지루하게 될 것이며 그 잘잘못에 대해서는 말해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 등의 마음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와 미래의 성품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이란 곧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서 자성이 있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곧 허망한 인식작용의 성품이 인연한 바라서 3세의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또 무슨 뜻으로 복의 덩어리에 비유하여 설하였는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 지혜 지녔기에
그 복은 곧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 복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듭 이 비유로써 설명하신 것이라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마음이 이미 흘러 변천한다면 이것은 속이고 거짓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니, ‘복의 덩어리가 있다는 것도 또한 모두 허망한 것일 텐데 이것이 이미 허망한 것이라면 어떻게 착한 법을 이룩하겠는가?’라는 깊은 의혹이 이미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일 것이기에 이를 결단하여 밝히기 위해 ‘흘러 변천하는 마음은 정말로 허망한 것’이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 덩어리의 실체는 곧 허망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정각의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것이 곧 그것(佛智慧)을 지닌 성품임을 밝혔는가?
경에 이르기를 “묘생아, 만약 이것이 복의 덩어리라면 여래께서는 곧 복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말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다섯 가지 취온(取蘊)으로 말미암았으므로 그 바탕이 곧 허망한 것이다. 만약 이 복의 덩어리가 이 취온에서 생긴 것이라면 여래는 곧 이 복의 덩어리가 복의 덩어리의 성품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은 이치상으로 지혜를 지닌 곳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는 곧 색신 등이 모여 조작됨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째서 여래께서는 여러 가지 좋은 상호가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라고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땅히 색신(色身)이 원만하고 상호가 구족(具足)한 것을 가지고 여래를 관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색신이라고 말한 것은 좋은 뜻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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