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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08 불교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

by Kay/케이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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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

 

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


송 구나발타라 한역
최윤옥 번역


4.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저를 위해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의 자성(自性)에 대해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깨우치는 일도 잘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묻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묻는 대로 말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짓습니까[作], 짓지 않습니까[不作]? 사(事)입니까, 인(因)입니까? 형상[相]입니까, 형상이 나타내는 것[所相]입니까? 깨닫는 자[覺]입니까, 깨달은 것[所覺]입니까? 이와 같은 말의 구절들은 다른 것입니까,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이러한 말에 대해 사(事)도 아니고 인(因)도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일 여래가 사(事)라면, 혹 짓기도 하고 혹은 무상(無常)하기도 할 것이니, 무상이기 때문에 모든 사는 반드시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모든 부처가 원치 않는 것이다. 만일 지어진 것[所作]이 아니라면,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방편이 공(空)하여 토끼의 뿔과 같고 반대의 아들[般大之子:石女之子]과 같을 것이니,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일 사(事)와 인(因)이 없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닐 것이며, 만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4구를 벗어날 것이다. 4구란 곧 세상의 언설(言說)이니, 만약 4구를 벗어난다면 4구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다. 모든 여래의 구의(句義)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慧者]는 마땅히 알라.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내가 말한 것과 같다.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아성(我性)이 없으므로 곧 무아라는 것이다. 모든 법에는 자성(自性)이 있고 타성(他性)이 없으니, 마치 소나 말과 같은 경우이다.
대혜야, 마치 소는 말의 성품이 아니고, 말은 소의 성품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 자상(自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대혜야, 모든 법은 자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아는 어리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뿐이니, 망상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공해서 생기는 것도 없고 자성도 없으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래와 음(陰)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음과 다르지 않다면 무상(無常)이어야 할 것이며, 다르다면 방편(方便)이 공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라면 반드시 다름이 있어야 하니, 마치 소의 뿔이 서로 닮은 까닭에 다르지 않으며 길고 짧은 차별이 있으므로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법도 역시 이와 같다. 대혜야, 마치 소의 오른쪽 뿔이 왼쪽 뿔과 다르고 왼쪽 뿔이 오른쪽 뿔과 다른 것처럼, 이와 같이 길고 짧은 것과 여러 가지 모습이 각각 다르다.
대혜야, 여래는 음(陰)ㆍ계(界)ㆍ입(入)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이 여래와 해탈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와 같으므로 여래를 ‘해탈’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만일 여래가 해탈과 다르다면 물질의 모습[色相]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며, 물질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므로 무상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다르지 않다면, 수행자(修行者)가 모습을 얻어도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나 수행자는 분별을 본다. 그러므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智]와 이염(爾炎)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야, 지혜와 이염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므로, 상(常)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짓는 자도 아니고 지어진 것도 아니며,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며, 깨닫는 이도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니며, 형상도 아니고 형상이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음(陰)도 아니고 음과 다른 것도 아니며, 말하는 자도 아니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모든 양(量)을 벗어난다.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을 양(量)이라고 한다.
모든 양을 벗어나면 말이 없고, 말이 없으면 생기는 것이 없고, 생기는 것이 없으면 적멸(寂滅)하고, 적멸하면 자성열반(自性涅槃)이다. 자성열반이면 사(事)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사도 없고 인도 없으면 반연하는 것이 없고, 반연하는 것이 없으면 모든 거짓을 벗어나며, 모든 거짓을 벗어나게 되면 곧 여래이니, 여래가 바로 이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다.
대혜야, 이를 삼먁삼불타라고 하니, 불타란 모든 감관[根]과 양(量)을 벗어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감관[根]과 양(量)을 다 벗어나며
사(事)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깨달은 자와 깨달음을 이미 벗어났고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도 벗어났다.

음(陰)과 연(緣)과 등정각(等正覺)
그 같고 다름을 볼 자 없으니
보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분별할까.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며
사(事)도 아니고 인(因)도 아니며
음도 아니고 음에 있는 것도 아니며
여러 다른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모든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저 망상(妄想)으로 보는 것들
또한 없는 것도 아닌 줄 알아야 하니
이 법은 본래 법 자체가 그런 것이다.

있는 까닭에 없는 것이 있으며
없는 까닭에 있는 것이 있으니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말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말라.

나[我]라 하고 내가 아니라 하며
말로 헤아려 방황하다가
두 극단에 빠져서는
자신도 무너뜨리고 세상도 무너뜨린다.

모든 허물을 해탈하고
나를 바르게 관찰하여 통하면
이를 올바른 관찰[正觀]이라 하니
대도사(大導師)를 헐뜯지 않는 것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다라(修多羅)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셨고, 또 불생불멸이 곧 여래의 다른 명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존이시여, 성품이 없으므로 불생불멸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래의 다른 명칭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면, 법을 받아들인다는 일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름[名字] 중에 법이 있다면,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내가 너를 위해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如來)는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생기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연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며, 또한 뜻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혜야, 나는 ‘뜻대로 태어나는 법신여래[意生法身]’라는 여래의 명호를 말하였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不生],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과 7주(住) 보살은 그 경계가 아니다. 대혜야, 저 ‘생기지 않는 것[不生]’이란 곧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불란타라(不蘭陀羅)와 같이 모든 물건들 하나하나 각각에 여러 이름이 있으나 또한 여러 이름에 따라 여러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혜야, 나는 이 사가(娑呵)세계사가는 번역하면 ‘참을 수 있다≺能忍≻’는 뜻이다.에서 3아승기(阿僧祇) 백천 개의 명호가 있으나, 어리석은 범부는 제각기 내 이름을 말하는 걸 들으면서도 나 여래의 이름인 줄 알지 못한다.
대혜야, 혹 어떤 중생은 나를 여래(如來)로 알고, 어떤 중생은 일체지를 가진 이[一切智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부처[佛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救世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스스로 깨닫는 이[自覺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인도하는 스승[導師者]이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널리 인도하는 이[廣導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모두를 인도하는 이[一切導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선인자(仙人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범자(梵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비뉴자(毘紐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자재자(自在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승자(勝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가비라자(迦毘羅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진실변자(眞實邊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달[月]이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해[日]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생자(生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무생자(無生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무멸자(無滅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공자(空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여여자(如如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제자(諦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실제자(實際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법성자(法性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열반자(涅槃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상자(常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평등자(平等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불이자(不二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모습이 없는 이[無相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해탈자(解脫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도자(道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뜻대로 태어나는 이[意生者]라고 안다.
대혜야, 이와 같은 3아승기 백천 개의 명호가 있으니,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모두 다 나를 아는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이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과 같다.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나를 알 수 없으니, 두 극단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나를 공경하고 공양하지만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며, 스스로 통할 줄을 모르고, 온갖 말과 글귀에 집착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에서 ‘성품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여래 명호의 차별이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불란타라(不蘭陀羅)와 같은 줄 모르며, 스스로 통달해 마지막 도달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는 모든 법에 있어서 말하는 데 따라 계착한다.
대혜야,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뜻은 말과 같아서 뜻과 말은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뜻은 몸체가 없기 때문에 말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으므로 오직 말에 그치는 것이다.’
대혜야, 저들은 악(惡)이 지혜를 태워 말의 자성(自性)을 모르고, 말은 생기고 없어지지만 뜻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대혜야, 말은 문자에 치우치나 뜻은 치우치지 않는다.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생김이 없고 또한 몸[身]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야, 여래는 문자에 치우친 법을 말하지 않는다. 문자는 있음과 없음[有無]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문자에 치우치지 않는 경우는 제외한다.
대혜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문자에 치우친 법을 말한다’고 한다면
이는 망령된 말이다. 왜냐하면 법(法)은 문자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나를 비롯한 모든 부처와 보살들은 한 자[一字]도 말하지 않고 한 자도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문자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주는 뜻[義]과 말[言說]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말이란 중생의 망상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모든 법을 말하지 않는다면 교법(敎法)이 무너질 것이니, 교법이 무너지면 모든 부처나 보살이나 연각이나 성문이 없을 것이며, 만약 없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말에 집착하지 말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편을 써서 자세히 경법(經法)을 설명해야 한다. 중생들의 희망이나 번뇌는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모든 부처는 저 갖가지로 다르게 이해하는 중생들을 위해, 모든 법을 설명해서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라고 할 뿐이요, 자각성지처(自覺聖智處)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대혜야, 모든 법에는 소유(所有)가 없으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줄 깨달아 두 가지 망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뜻에 의지해야지 문자에 의지하진 말아야 한다.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문자에 의지하다면 스스로 제일의(第一義)를 무너뜨리고, 또한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할 수도 없으며, 악견(惡見)에 치우쳐 상속(相續)하면서도 대중을 위해 연설하고, 모든 법과 모든 지위와 모든 모습을 명료하게 잘 알지 못하며, 또한 글의 장(章)과 구(句)도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법과 모든 지위를 잘 알고, 글의 장과 구에 통달하고, 성품과 뜻[意]을 충분히 알면, 이 사람은 올바른 무상(無相)의 즐거움으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으며, 평등한 대승(大乘)을 중생에게 세워 줄 것이다.
대혜야, 대승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연각과 성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며,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법(正法)을 받아들이고, 정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처의 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게 하며,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은 수승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수승한 깨달음을 얻을 줄 아는 보살마하살은 항상 화생(化生)하고, 대승을 건립하며 열 가지 자재력(自在力)으로 여러 가지 몸[色像]을 나타내고, 중생의 종류[形類]나 희망하거나 번뇌하는 모든 모습에 통달하여 여실하게 설법할 것이다. 여실한 것은 다르지 않은 것이며, 여실한 것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모습이니, 모든 허위(虛僞)가 그친다. 이를 여실하다고 한다.
대혜야, 선남자ㆍ선여인은 말하는 대로 받아들여 계착해선 안 된다. 진실이란 명자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혜야, 마치 어리석은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켜 보이면, 어리석은 사람은 손가락만 보고 진실한 뜻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말이라는 손가락에 따라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끝내 이를 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말이라는 손가락을 떠난 제일의 진실한 뜻을 끝내 얻을 수 없다.
대혜야, 이는 마치 어린 아기에게는 익힌 음식을 먹여야 되고 날 것을 먹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날 것을 먹이면 곧 탈이 나게 된다. 이는 차례대로 방편을 써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방편을 써서 수행하지 않으면 불선(不善)이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방편을 잘 닦아야 하니, 손가락 끝을 보는 것처럼 말을 좇진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혜야, 진실한 뜻을 얻으려면 방편을 잘 닦아야 한다. 진실한 뜻은 미묘하고 적정(寂靜)한 것이며, 이는 열반의 인(因)이다. 말은 망상과 합하고 망상은 생사를 모은다.
대혜야, 진실한 뜻은 다문(多聞)으로부터 얻는다. 대혜야, 다문이란 뜻을 잘 아는 것을 말하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잘 알면 어떤 외도의 경론(經論)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자신도 떨어지지 않고 남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를 대덕다문(大德多聞)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뜻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니, 이는 뜻을 잘 아는 사람을 말한다. 반드시 많이 들어서 뜻을 잘 아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며,
이와 어긋나 말에 계착하는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을 드러내 보여 주셨으나, 특별할 것도 기이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가 말하는 인(因) 역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며, 세존께서도 허공은 수(數)ㆍ연(緣)ㆍ멸(滅)이 아니고 열반계(涅槃界)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외도도 ‘인(因)으로 모든 세상이 생긴다’고 하고, 세존께서도 ‘무명(無明)과 애착[愛]과 업(業)과 망상(妄想)이 연(緣)이 되어 모든 세상이 생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인이라 하고 우리는 연이라 하여 이름의 차이는 있으나, 외물(外物)의 인연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외도의 논과 차별이 없으십니다.
외도도 ‘미진(微塵)ㆍ승묘(勝妙)ㆍ자재천(自在天)ㆍ중생주(衆生主) 등,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물질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고, 세존께서도 ‘모든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도도 ‘4대(大)는 무너지지 않으며, 자성(自性)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4대는 항상 존재한다. 이 4대가 모든 중생 세계에 두루 흐르는데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고, 세존께서 하신 말씀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특별하고 기이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외도보다 더 훌륭하고 기이한 이유를 차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차이가 없다면, 모든 외도도 역시 부처일 것이니,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한 세계에 여러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세계에 많은 부처가 있어야만 할 것이니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한 것은 외도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저 모든 외도들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 여기고서 생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모습을 얻으나, 나는 이와 같은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내 말은
있다거나 없다[有無]는 견해를 벗어나고, 생김과 없어짐[生滅]을 벗어나며, 성품도 아니고[非性]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非無性] 것이다. 마치 온갖 환(幻)과 꿈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므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성품이 없다는 것인가? 물질[色]에는 받아들일 만한 자성상(自性相)이 없는 것을 말하니,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며,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품은 성품이 없으며, 또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줄 깨닫기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 안온하고 쾌락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이 영원히 그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으로 일을 만드는 것이지 모든 현성(賢聖)은 그렇지 않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은 건달바(乾闥婆)의 성(城)이나 요술로 나타난 사람과 같다. 대혜야, 건달바성과 요술로 만든 사람인 갖가지 중생들이 사고팔고 들고 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으로 정말로 들고 난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나가는 사람도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니, 그것은 망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들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견해를 일으키지만 그들 역시 유위(有爲)도 무위(無爲)도 없다. 마치 요술로 만든 사람이 생긴 것처럼 실제로는 생김이나 없어짐이 없고 성품도 성품이 없음도 없으니,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생김과 없어짐을 벗어난다.
어리석은 범부는 진실이 아닌 것에 떨어져 생기고 없어진다는 망상을 일으키지만 모든 성현은 그렇지 않다. 여실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자성(性自性)과 같은 경우 망상과 또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고 하면 모든 성자성에 계착하여 적정(寂靜)함을 보지 못하고, 적정함을 보지 못하면 끝내 망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모습이 없다는 견해[無相見]가 모습이 아니라는 견해[非相見]보다 훌륭하다. 모습이란 생(生)을 받는 인(因)인 까닭에 훌륭하지 않은 것이다. 대혜야, 모습이 없으면[無相] 망상이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므로, 나는 열반이라고 말한다. 대혜야, 열반이란 진실한 이치에 대한 견해와 같으니, 이전의 망상과 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을 벗어나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저 생긴다는 논(論)을 없애려고
생기지 않는다는 뜻을 건립(建立)하였으니
나는 이러한 법을 말하나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한다.

모든 법은 생기지 않아
성품도 없고 소유(所有)도 없으니
건달바성ㆍ환ㆍ꿈과 같아
성품이 있다고들 하지만 인(因)이 없고
생김이 없고 자성도 없으니
무슨 인으로 공(空)을 설할까.

화합을 벗어나면
깨달아 아는 성품도 나타나지 않으니
따라서 공하여 생기지 않는 것을
나는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낱낱이 화합해
성품이 나타나지만 있는 것 아니니
분석하면 화합도 없어
외도의 견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환이나 꿈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아지랑이나 건달바성처럼
이 세상 갖가지 일
인(因) 없이 모습이 나타난다.

인이 있다는 논(論)을 꺾으려고
생김이 없다는 논리 편 것인데
생김이 없다고 선언하는 자들
법의 흐름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구나.

인이 없다고 맹렬히 주장하며
모든 외도를 두렵게 하니
어떻게, 무엇을 인하여
저것은 어떤 까닭으로 생기며
어느 곳에서 화합하는가 하며
인이 없다고 주장한다.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면
인이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니
저 생멸을 주장하던 사람들
그들의 소견(所見)이 이로써 없어진다.

왜 생김이 없다고 하고
성품이 없다고 하는가?
모든 연(緣)을 돌아보면
무생(無生)이라 이름붙일 법이 있는가?

이름에는 뜻이 없을 수 없으나
오직 분별하는 말일 뿐이니
성품이 없으므로 생김이 없다는 것 아니고
또한 모든 연을 돌아본다는 것도 아니며
성품이 있어 이름을 붙인 것도 아니고
이름 역시 뜻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체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
7주(住) 보살의 경계가 아니니
이를 무생(無生)의 모습이라 한다.

모든 인연을 멀리 벗어나고
또한 모든 사(事)도 벗어나며
오직 미세한 마음[微心]만 머물 뿐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대상 모두 벗어나
그 몸이 이에 따라 전변(轉變)하는 것
나는 이것을 무생이라 한다.

바깥에 성품도 성품 없음도 없고
또한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도 없어
모든 견해를 끊어 없애면
나는 이것을 무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성은 없는 것이니
공(空) 등을 잘 분별해야 한다.
공하므로 공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생김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말한다.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생김이 있고 없어짐이 있으니

모든 인연을 벗어나면
따로 생김과 없어짐도 없다.

인연을 버리고 벗어나면
다시 다른 성품이 없으니
같음과 다름을 말하면
이는 외도의 망상이다.

있음[有]과 없음[無]의 성품 생기지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수(數)가 전변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는 모두 얻을 수 없다.

단지 모든 세속법이 있어
전전하며 사슬이 될 뿐이니
저 인연의 사슬을 벗어나면
생긴다는 뜻을 얻을 수 없다.

생김은 성품이 없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외도의 허물을 벗어나지만
연(緣)의 사슬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연의 사슬을 벗어나
따로 성품의 생김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무인론(無因論)이니
사슬[鉤鎖]의 뜻을 깨뜨리는 것이다.

등불이 여러 형상을 비추듯
사슬이 나타남도 그러하거늘
이는 곧 사슬을 벗어나
따로 다시 모든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품도 없고 생김도 없어
허공(虛空)의 자성과 같으니
사슬을 벗어나면
지혜[慧]가 분별할 것도 없도다.

다시 다른 무생(無生)이 있으니
현성(賢聖)이 얻는 법이다.
저 생김이란 무생이니‘저 생김’이란 4상(相)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생인(無生忍)이다.

만약 모든 세상 사람이
사슬을 관찰하여
모두 사슬을 벗어난다면
이로부터 삼매(三昧)를 얻으리라.

어리석음과 애착과 모든 업 등
이는 곧 안의 사슬이며
찬(攢)ㆍ수(燧)ㆍ진흙덩이ㆍ바퀴
종자 등을 바깥의 사슬이라 한다.

만약 다른 성품이 있어
인연으로 생긴다면
저 사슬의 뜻이 아닐 것이니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일 생기는 것이 자성이 없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사슬이 될까?
전전하며 서로 생기기 때문이니
인연의 이치인 줄 알라.

생긴 것에 다른 성품이 있어
인연으로 생긴다면
저것은 사슬의 뜻이 아니니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딱딱함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 이런 법은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을 내는 것
수(數)를 떠나 다른 법이 없으면
이를 성품이 없다고 말한다.

의사가 많은 병을 치료함에
여러 가지 논(論)이 없으나
병이 각기 다르기에
온갖 치료법을 쓰는 것과 같다.

나도 저 중생을 위해
모든 번뇌를 없애려고
그 근기의 우열을 알아
저들에게 건너는 문[度門]을 말한다.

번뇌의 뿌리가 다를 뿐
갖가지 법이 있는 것 아니기에
오직 1승법(乘法)만 말하니

이것을 곧 대승이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외도들이 다 무상(無常)이라는 망상을 일으키는데, 세존께서도 역시 ‘모든 행(行)은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은 무엇입니까? 그릇된 것입니까, 바른 것입니까? 몇 종류의 무상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에는 일곱 종류의 무상이 있으니, 이는 내가 설한 법이 아니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그들은 ‘만들고 나서 버리니, 이것을 무상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또 ‘형처(形處)가 무너지니 이를 무상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바로 물질[色]이 곧 무상이다’고 말한다.
‘물질이 전변(轉變)하는 중간을 무상이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틈이 없이 스스로 흩어지고 무너지는 것이 마치 우유와 낙(酪) 등과 같아서 전변하는 중간은 볼 수 없으나, 무상하여 모든 성품을 무너뜨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또 ‘성품이 무상하다’고 말하고, ‘성품[性]과 성품 없음[無性]이 무상하다’고 말하며, ‘모든 법은 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하여 모든 법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대혜야, ‘성품과 성품 없음이 무상하다’는 것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것들은 자상(自相)이 무너지고, 4대의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하다’는 것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다. 모든 법은 있든 없든 생기지 않으므로 미진(微塵)까지 쪼개어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이치이며 생긴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 ‘생기지 않으므로 무상한 모습’이라고 한다. 만일 이를 깨닫지 못하면 모든 외도에 떨어져 무상하다는 뜻을 일으킨다.
대혜야, ‘성품이 무상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망상이니, 영원한 성품도 아니고 무상한 성품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상(無常)의 자성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것이 바로 모든 성품과 성품 없음이 무상한 일[無常事]이라는 것이다. 무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법의 성품을 성품이 없게 하는 것은 없다. 마치 몽둥이나 기와나 돌로 모든 물건을 깨뜨릴지라도 현전(現前)에서 각각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성품의 무상한 일’이다. 짓는 자와 지어진 것에 차별이 있는 것이 무상(無常)이고 이것이 사(事)라는 게 아니다. ‘짓는 자와 지어진 것에 다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성품이 영원하여 인성(因性)이 없다는 것이다.
대혜야, 모든 성품과 성품 없음에는 인(因)이 있으나,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지 않은 것들이 인이 되어서 사(事)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만일 생긴다면 모든 성품은 다 무상할 것이다. 비슷하지 않은 것과 사(事)가 짓는 자와 지어진 것이 되지만 따로 다른 것이 없는데 모두들 다른 것이 있다고 본다.
만일 성품이 무상하다면 짓는 인[作因]의 성품과 상(相)에 떨어진다. 만일 떨어진다면 모든 성품이 구경(究竟)이 아닐 것이며, 모든 성품이 짓는 인[作因]의 상(相)에 떨어진다면 무상 자체가 무상해야만 할 것이니, 무상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품이 무상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것은 상(常)이어야 한다. 만일 무상이 모든 성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3세에 떨어질 것이다. 저 과거의 물질이 무너졌으므로 미래에 생기지 않을 것이며, 물질이 생기지 않으므로 현재의 물질도 무너지는 모습과 함께할 것이다.
물질이란 4대(大)가 모여진 차별이나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의 자성(自性)은 무너지지 않으니,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외도의 4대는 무너지지 않으므로, 모든 3유(有)의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가는 곳마다 생기는 것과 없어지는 것이 있음을 안다.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을 벗어나면, 모든 외도가 어느 것을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하겠느냐? 4대는 생겨나지 않으니 자성의 모습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만든 자[始造]를 벗어나면, 무상이란 4대 안에 다시 다른 4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각각 다른 모습의 제 모습이니, 차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저것이 차별이 없으므로 이것들이 다시 만들어지지 않으니, 두 가지 방편을 짓지 않는다. 이것이 무상인 줄을 알아야 한다.
저 ‘형처(形處)가 무너져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무너지지 않아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혜야, ‘마지막까지’라 함은 쪼개어 미진이 되기까지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이 무너지는 것을 관찰하면 형처(形處)가 다르게 보이거나, 길고 짧은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는 4대가 아니다. 4대는 무너지지 않는다. 형처가 무너지는 것이 나타나면 수론(數論)에 치우치게 된다.
‘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은 물질이 곧 무상한 것을 말한다. 저것은 형처(形處)가 무상한 것이지 4대가 무상한 것이 아니다. 만약 4대가 무상하다고 하면 세속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말로는 ‘성품이 아니다[非性]’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세론(世論)에 떨어진다.
모든 성품을 보면 단지 말만 있을 뿐인데, 자기 모습이 전변(轉變)하여 무상한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는 물질이 성품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므로 4대가 아니라고 한다. 마치 금으로 장엄구(莊嚴具)를 만들어 모습이 변해 나타나면, 이는 금의 성품이 파괴된 것이 아니고 단지 장엄구로 모양만 변한 것과 같다. 처소(處所)가 파괴되는 것도 이와 같다.
나머지 성품이 전변되는 것 등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온갖 외도의 무상하다는 견해는 망상이다, 불이 4대를 태울 때 자상(自相)은 타지 않는다. 각각의 자상이 서로 무너진다면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은 반드시 끊어져야 할 것이다.
대혜야, 내가 설한 법은 일어나되[起],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다. 왜냐하면 바깥 경계의 성품은 결정(決定)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3유(有)와 미세한 마음만 말할 뿐, 갖가지 모습의 생김과 없어짐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4대가 화합하는데 차별이 있으니,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망상에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두 가지가 망상인 줄을 알고, 바깥 경계의 성품이 있다거나 성품이 없다는 두 가지 견해를 벗어나 자심 현량의 망상인 줄 깨닫는 자는, 생각해서 행(行)을 지어 행을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성품이 있다거나 성품이 없다는 망상을 벗어난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가장 높은 모든 법이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어서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하고, 두 극단에 떨어져 악한 견해가 끊임없이 계속되는데도 모든 외도들은 자기의 망상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범부가 근본이 없어 세간과 출세간의 가장 높은 법이라고 하며 말에 따라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만든 자를 멀리 벗어나고
또한 형처(形處)가 다르다며
성품과 물질이 무상하다고 하니
이는 외도의 어리석은 망상이다.

모든 성품이란 무너짐이 없는 것
크고 큰 자성(自性)이 머무르는데
외도는 무상하다고 생각하며
온갖 견해에 빠진다.

저 모든 외도들
없다고 하고 생긴다거나 없어진다고 하는데
크고 큰 성품은 스스로 영원하니
무엇을 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은 오직 심량(心量)이니
두 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며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없다.

범천(梵天)이 뿌리가 되어
가지가 되어 두루 덮듯이
내가 말한 것도 이와 같아
오직 저 심량(心量)일 뿐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보살과 성문과 연각이 멸정수(滅正受)에 이르고 상속하는 차례를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멸정수의 상속하는 차례를 잘 알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끝내 멸정수의 즐거움이라는 문(門)을 망령되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의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6지(地)에서 보살마하살과 성문과 연각이 멸정수에 들기 시작한다. 제7지의 보살마하살은 생각마다 정수(正受)에 들어서 모든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을 벗어나는 정수에 드니, 성문이나 연각과는 다르다.
모든 성문과 연각은 있다는 생각에 치우쳐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행하며 멸정수에 든다. 그러므로 7지는 염정수(念正受)가 아니니, 모든 법의 차별 없는 모습을 얻는 것은 그 분(分)이 아니어서 모든 상성(相性)을 얻고, 일체법선불선성상정수(一切法善不善性相正受)를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7지는 선념정수(善念正受)가 없다.
대혜야, 8지 보살과 성문과 연각은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의 망상된 모습이 없어진다. 초지(初地)에서
7지에 이르는 보살마하살은 삼계가 심ㆍ의ㆍ의식의 양(量)임을 관찰하고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지만, 자기 망상을 닦아 바깥 경계의 성품이라는 온갖 모습에 떨어진다. 어리석은 범부는 두 가지 자기 마음 즉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으므로, 무지(無知)로 향하면서 끝없는 옛날부터 허물과 악과 거짓된 습기에 의해 훈습된 것인 줄 깨닫지 못한다.
대혜야, 8지 보살마하살은 성문과 연각의 열반이니, 보살이란 삼매각(三昧覺)의 보호를 받으므로, 삼매문(三昧門)을 즐기고 열반에는 들지 않는다. 만일 보호받지 않는다면, 여래지(如來地)를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중생을 위한 모든 일을 버릴 것이므로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리라. 모든 부처님 세존이 여래의 불가사의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보여 주는데도 성문과 연각은 삼매문에서 얻은 즐거움에 이끌려 열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대혜야, 내가 나눈 7지는 심ㆍ의ㆍ의식의 모습을 잘 닦고, 나와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들,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생멸하는 것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잘 닦아 4무애(無碍)의 확고한 힘을 가진 삼매문에 능통해 지위가 차례로 상속하고 도품법(道品法)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자상과 공상을 깨닫지 못하거나 7지를 잘 알지 못하여 외도의 그릇된 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위를 차례로 세운 것이다.
대혜야, 저것이 실은 생멸이 없는 것이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일 뿐이다. 차례로 상속하는 지위와 삼계의 온갖 행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달을 수 없다.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은, 나와 모든 부처가 말한 지위의 차례와 상속과 그리고 삼계의 갖가지 행을 말한다.
또 대혜야, 성문이나 연각이나 제8 보살지(菩薩地)에서는 멸삼매(滅三昧)의 즐거움이라는 술에 취해 자심의 현량임을 능통하지 못하고, 자상과 공상의 습기에 가리며, 인(人)과 법(法)이 무아(無我)여서 모두 법에 포섭된다는 견해에 떨어져 망상으로 열반이라는 생각을 하니, 적멸한 지혜의 깨달음이 아니다.

대혜야, 보살이란 멸삼매문(滅三昧門)의 즐거움을 보고도 본원(本願)으로 불쌍히 여겨 커다란 자비심을 성취해 10무진구(無盡句)를 분별해 알며, 망상으로 열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열반이라는 망상이 생기지 않는 까닭에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망상을 벗어난다. 자심의 현량을 명료하게 깨달아 모든 법에 대해 망상이 생기지 않으므로 심ㆍ의ㆍ의식으로 바깥 경계의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에 계착하는 망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불법(佛法)의 인(因)이 아니면 지혜가 생기지 않으니, 지혜를 따라야 여래의 자각지(自覺地)에 태어날 수 있다. 마치 사람이 꿈에서 방편(方便)으로 물을 건너다가 미처 건너기 전에 깨어나서 ‘바른 방편인가, 그릇된 방편인가’를 생각하지만 바른 것도 아니고 그릇된 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 밖에 끝없는 옛날부터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의 인(因)이 되는 것은 생각이므로, 온갖 습기와 온갖 형처가 생각이 있고 없는 데 따라, 심ㆍ의ㆍ의식의 꿈에 나타난다.
대혜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제8 보살지에서 망상이 생기는 것을 본다. 초지(初地)에서 점점 나아가 제7지(地)에 이를 때까지는 ‘모든 법은 환(幻)과 같다’는 등의 방편을 알아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마음의 망상의 행을 건넌다. 그러고 나서 불법(佛法)의 방편을 써서 얻지 못한 사람을 얻게 한다.
대혜야, 이것이 곧 보살의 열반이니, 방편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고 심ㆍ의ㆍ의식을 벗어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 대혜야, 제일의(第一義)에는 상속하는 차례가 없으니, 모든 망상이 없는 것을 적멸한 법이라고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심량(心量)이 없는 것
여기에 머물면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
3세의 모든 부처님이 말한다.

심량의 지위는 제7지이고
소유(所有)가 없는 것은 제8지이니
두 지위를 주(住)라 하고
불지(佛地)를 최승(最勝)이라 한다.

스스로 깨닫는 지혜와 깨끗함
이것이 곧 나의 자리이니
자재(自在)하고 가장 훌륭한 곳
청정하고 묘하게 장엄하였다.


왕성한 불꽃처럼 밝게 비치니
광명이 모든 곳에 두루 이르며
타오르는 불꽃 눈을 상하게 하지 않고
두루 돌며 3유(有)를 교화하네.

현재의 3유를 교화시키고
혹 과거에도 교화해
거기에서 승(乘)을 연설하니
모두 이 여래지(如來地)이다.

10지가 곧 초지(初地)가 되고
초지가 곧 8지가 되며
제9지가 곧 7지가 되고
7지 역시 다시 8지가 된다.

제2지가 제3지가 되고
제4지가 제5지가 되며
제3지가 제6지가 되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무슨 차례 있겠는가.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영원합니까[常], 무상합니까[無常]?”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니, 둘 다 허물이 있다. 상(常)에는 짓는 자[作者]가 있다는 허물이 있다. 상이란 모든 외도가 ‘짓는 자[作者]는 만들어진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상(常)이기도 하고 비상(非常)이기도 하니, 짓는 자는 항상 있다는 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가 무상하다면 짓는 자가 무상하다는 허물이 있다. 음(陰)은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의 본성이 없으므로 음이 무너지면 끝나야 할 것이나, 여래는 끝나지 않는다.
대혜야, 모든 지어진 것[所作]은 무상하여 병(甁)이나 옷[衣] 등과 같다고 하면, 모두 다 영원하다[常]는 허물은 없다. 그러나 일체지(一切智)의 여러 가지 방편에는 의(義)가 없다는 허물이 있으니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지어진 것[所作]은 반드시 이 여래이어야 할 것이니 차별된 인성(因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여래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또 대혜야, 여래는 허공과 같은 상이 아니다. 허공과 같은 상이라면, 자각성지(自覺聖智)의 여러 가닥이 의(義)가 없다는 허물이 있다. 대혜야, 이는 마치 허공이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과 같아, 상과 무상,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을 벗어나니, 상이라거나 무상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래는 상이 아니다.
또 대혜야, 만약 여래가 생김이 없어서 상이라면, 이는 마치 토끼나 말 등의 뿔과 같을 것이니, 생김이 없어서 상이기 때문에
방편에 의(義)가 없는 허물이 된다. 생김이 없으므로 상이라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여래는 상이 아니다.
또 대혜야, 다시 다른 일이 있어 여래가 상인 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얻은 지혜가 영원한 까닭에 여래는 상이다. 대혜야,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건 세상에 출현하지 않건 간에 법은 끝내 일정하게 머물며, 성문이나 연각이나 모든 부처님 여래는 무간(無間)에 머물지 허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여래가 얻은 지혜는 곧 반야(般若)로 훈습된 것이다. 대혜야, 여래는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이나 저 모든 음(陰)ㆍ계(界)ㆍ입처(入處)에 의해 훈습된 것이 아니다. 대혜야, 모든 3유는 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妄想)으로 생긴 것이나, 여래는 진실하지 않고 헛된 망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대혜야, 두 가지 법 때문에 상과 무상이 있으니, 불이(不二)가 아니다. 불이란 적정(寂靜)이니, 모든 법의 두 가지 생기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대혜야, 말로써 분별이 생기므로 곧 상과 무상이라는 허물이 있으니, 분별각(分別覺)이 없어지면 어리석은 사람의 상이라거나 무상이라는 견해를 벗어난다. 적정한 지혜[慧]는 영원히 상과 무상을 벗어나니 상이나 무상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중구무의(衆具無義)란
생(生)함이 상(常)이건 무상(無常)이건 허물이라는 말이니
분별각(分別覺)이 없다면
영원히 상과 무상을 벗어나리라.

그 세운 종(宗)에 따라
여러 많은 뜻이 있게 되니
자심의 현량을 평등하게 보라.
말로는 얻을 수 없느니라.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시 저희를 위해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생김과 없어짐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我]가 없다면 누가 생기고, 누가 없어집니까? 어리석은 범부는 생기고 없어지는 데 의지하므로 고통이 다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을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장(藏)이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니, 능히 두루 모든 중생취(衆生趣)를 만들어 낸다. 이는 마치 광대가 변화로 모든 중생취를 나타내는 것과 같아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세 가지 연(緣)이 화합한다는 방편이 생겼는데, 외도가 깨닫지 못하고 짓는 자[作者]라고 계착한다.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악습(惡習)에 훈습된 것을 식장(識藏)이라 하니, 무명주지(無明住地)를 일으키고 7식(識)과 함께하며 마치 바다와 물결같이 몸이 항상 생겨 끊이지 않는다. 무상의 허물을 벗어나 있고 나[我]라는 주장을 벗어나 있어 자성(自性)이 무구(無垢)하여 끝내 청정(淸淨)하다. 그 밖의 다른 식(識)들은 생김이 있고 없어짐이 있으니, 의(意)와 의식(意識) 등 생각마다 일곱 가지가 있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으로 인하여 모든 경계의 온갖 형처(形處)를 취하여 이름이나 모습에 계착하면,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물질의 모습인 줄 깨닫지 못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며, 해탈에 이르지 못하고, 이름과 모습의 모든 얽매임에서 삶을 탐하고 탐욕을 내게 된다. 인(因)이건 반연(攀緣)이건 저 모든 느끼는 감관[受根]이 없어지면 차례로 생기지 않으며, 자기 마음의 망상을 없애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여 멸수상정수(滅受想正受)와 제4선(禪)에 들어가며, 진제해탈(眞諦解脫)을 잘 이룬다. 수행하는 사람이 해탈이라는 생각을 일으켜 벗어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不離不轉]을 여래장식장(如來藏識藏)이라고 한다.
7식은 유전하되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이 되어 반연한 모든 식에 생기기 때문이니, 성문이나 연각의 수행하는 경계가 아니다.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자상과 공상을 받아들이면 음(陰)ㆍ계(界)ㆍ입(入)이 생긴다. 여래장(如來藏)을 보면 다섯 가지 법의 자성(自性)과 인(人)과 법(法)이 무아여서 없어지며, 지위가 차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므로 나머지 외도의 견해로는 경동(傾動)시킬 수 없다. 이를 보살이 부동지(不動地)에 머무는 것이라고 하니, 열 가지 삼매도문(三昧道門)의 즐거움을 얻고 삼매각(三昧覺)에 의해 유지된다.

부사의한 불법의 원(願)을 관찰하고는 삼매문(三昧門)의 즐거움과 실제(實際)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성인(聖人)의 무리로 향한다. 모든 성문이나 연각, 외도가 수행하는 모든 도(道)와는 같지 않으니, 10현성(賢聖)의 종성(種性)의 도와 뜻대로 나타나는 몸과 지혜를 얻어 삼매행(三昧行)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훌륭하게 전진하기를 구한다면 장식(藏識)인 여래장을 깨끗이 해야 한다. 대혜야, 만일 식장(識藏)이 없다면 여래장은 생김과 없어짐이 없을 것이다. 대혜야, 그러나 범부와 성인은 모두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있으니, 수행자는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무리 속으로 나아가, 현재의 법에 즐거이 머물며[現法樂住] 방편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대혜야, 이 여래장식장(如來藏識藏)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이 심상(心想)으로 보는 것이다. 비록 자성이 청정하나 객진(客塵)에 덮인 까닭에 오히려 청정하지 못한 것을 보니, 모든 여래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여래에겐 현전(現前)의 경계가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아마륵(阿摩勒) 열매를 보는 것과 같다.
대혜야, 나는 이 뜻을 신통력으로 건립하여, 승만부인(勝鬘夫人)과 예리한 지혜가 가득한 보살 등에게 식장인 여래장이 7식과 함께 생긴다는 사실을 널리 펴서 연설하게 하였다. 성문이 계착하여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보는 까닭에 승만부인이 부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아 여래의 경계를 설명한 것이니, 이는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의 경계가 아니다.
여래장식장은 오직 부처와 그 밖의 예리한 지혜로 이치에 의지하는[依義] 보살 지혜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장식장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니, 듣고 깨닫는 것만으로 만족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깊고 깊은 여래장(如來藏)
7식(識)과 함께하여
두 가지가 생(生)을 받아들이니

지혜로운 이는 멀리 벗어난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마음이 나타나니
끝없는 옛날부터 훈습되어 온 것
여실(如實)하게 관찰하면
모든 사(事)란, 실은 사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 달을 가리켜 보이면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니
명자(名字)에 계착하는 자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광대 같고
뜻[意]은 광대의 조수[和伎者] 같으며
5식(識)으로 반려(伴侶)를 삼고
망상으로 구경꾼을 삼는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自性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의 구경(究竟)의 차별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모든 지위를 차례로 상속하면서 이 법을 분별하여 모든 불법(佛法)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불법에 들어가서는 여래께서 스스로 깨달은 지위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의 차별된 갈래의 모습이란, 이름[名]과 모습[相]과 망상(妄想)과 바른 지혜[正智]와 여여(如如)를 말한다. 만일 수행자가 수행하여 여래의 자각성취(自覺聖趣)에 들어간다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벗어나고 현재법의 즐거움을 누리는 정수[現法樂正受]에 머물 것이다. 대혜야, 저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바깥 경계의 성품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망상 때문이니, 모든 성현(聖賢)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망상이 생기고, 모든 성현에게는 생기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세속법[俗數]의 이름과 모습에 계착하여 마음이 따라 흘러서 흩어지며, 흩어지고 난 후 온갖 모습과 형상을 보므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치우치며, 묘한 물질[妙色]을 희망하고 계착한다. 계착하고 나면 무지(無知)가 덮고 가려 염착(染着)을 일으키며, 염착하고 나면 탐욕과 성냄으로 지은 업이 쌓이고, 쌓이고 나면 망상에 스스로 얽히니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다.

생사의 바다와 모든 취(趣)의 광야에 떨어지는 것이 마치 우물의 도르래와 같건만, 어리석은 까닭에 환(幻)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자성(自性)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벗어난 줄을 알지 못하고,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일으킨다.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벗어나건만 자심(自心)의 망상으로 일으키고, 자재천(自在天)이나 시절(時節)이나 미진(微塵)이나 승묘(勝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이름과 모습을 따라 유전(流轉)한다.
대혜야, 그 모습[相]이란 다음과 같다. 안식(眼識)이 비추는 것을 빛깔[色]이라 하고,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으로 비추는 것을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ㆍ법(法)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를 모습[相]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망상이란 여러 가지 이름을 시설하여 모든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코끼리나 말이나 수레나 걸어 다니는 남자나 여자 등의 이름[名]과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正智]란 저 이름이나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지나가는 손님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모든 식은 생기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고 항상 있지도 않으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바른 지혜가 있음으로 이름이나 모습을 세우지 않으나, 이름과 모습을 세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소견, 즉 건립과 비방을 버리고 벗어나며, 이름과 모습이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알면 이를 여여(如如)라고 한다.
대혜야, 여여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무소유(無所有)의 경계를 얻으므로 보살의 환희지(歡喜地)를 얻으며, 보살의 환희지를 얻고 나서 영원히 모든 외도의 나쁜 세계[惡趣]을 떠나 출세간의 세계에 바르게 머물고, 법상(法相)이 성숙하며, 환(幻)과 같은 모든 법을 분별하고, 법취상(法趣相)을 스스로 깨달아 모든 망령된 견해와 괴이한 모습을 여의며, 차례로 법운지(法雲地)까지 오르고 그 중간에 삼매(三昧)와 힘[力]과 자재(自在)와 신통(神通)을 열어서 편다.
여래지(如來地)를 얻고 난 뒤에는 갖가지 변화로 두루 비추어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생을 성숙시키니, 마치 물에 비치는 달과 같다. 구경(究竟)에 10무진구(無盡句)를 잘 만족하고
갖가지 뜻으로 이해하는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법하며, 법신(法身)을 얻어 뜻으로 짓는 일[意所作]을 벗어난다. 이를 보살이 여여로 얻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자성이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각각의 자상종(自相宗)이 있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자성과 8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모두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
대혜야, 저 이름[名]과 모습[相]은 망상자성(妄想自性)이다. 대혜야, 만약 저 망상에 의지해서 마음과 마음법이 생긴다면 이름이 동시에 생길 것이니, 마치 햇빛이 온갖 모습을 갖추었으나 각각 다르게 분별해서 가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연기자성(緣起自性)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는 무너질 수 없으므로 성자성(成自性)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망상을 여덟 가지로 분별하니, 식장(識藏)과 의(意)와 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다. 상(相)이란 진실하지 못한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두 가지 무아(無我)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대혜야, 이 다섯 가지 법이란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든 지위에 상속하는 차례이니, 모든 불법(佛法)이 다 이 속에 들어간다.
또 대혜야, 다섯 가지 법이란 모습[相]과 이름[名]과 망상(妄想)과 여여(如如)와 바른 지혜[正智]이다.
모습이란 처소(處所)와 형상(形相)과 색상(色像) 등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모습이라고 한다. 만일 저기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는데 병(甁) 등이라고 하면, 이것이 곧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름이라고 한다. 여러 이름을 지어 모든 모습, 즉 병(甁) 등과 마음[心]과 마음법[心法] 등을 현시하면, 이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저 이름과 저 모습을 필경에 얻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覺]도 없고 모든 법에 전전함이 없어,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벗어나는 것을 여여라고 한다.
진실하고
결정적인 구경(究竟)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진여(眞如)의 모습이니, 나와 모든 부처가 따라 들어가는 곳이다. 두루 중생을 위해 여실하게 연설하고, 저것을 시설하여 드러내 보여 정각에 들어가게 하며, 단절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하여 자각성취(自覺聖趣)를 따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은 얻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를 바른 지혜라고 한다.
대혜야, 이를 다섯 가지 법이라고 하니, 세 가지 자성과 여덟 가지 식과 두 가지 무아와 모든 불법이 이 가운데 들어간다. 그러므로 대혜야, 스스로 방편을 세워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해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과 세 가지 자성
여덟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
이 모두가 마하연(摩訶衍)에 포함된다.

이름[名]과 모습[相]과 헛된 망상은
자성의 두 가지 모습이며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
이것이 바로 성취한 모습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구(句)에서는 과거의 부처님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만큼 많다고 하셨고, 미래와 현재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습니까? 여래께서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해설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한 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3세(世)의 모든 부처의 수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비유로써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상(常)에 계착하고 외도는 망상으로 악견(惡見)을 증장시켜 생사가 끝이 없다. 생사를 싫어하여 벗어나게 하고, 돌이켜 열심히 정진하여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 모든 부처를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담발화(優曇鉢華)처럼 보기 어렵다고 하여 방편을 구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또 교화할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부처는 우담발화처럼 만나기 어려우니,
우담발화는 과거에 본 사람도 없었고 현재에 보는 사람도 없으며 미래에 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여래란 세상에서 모두 볼 수 있으나 저절로 통달한다는 인식을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 우담발화와 같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저절로 통달한다는 것을 스스로 건립하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초월하므로,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경계여서 비유할 길이 없다. 진실로 여래는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비유할 수가 없다.
대혜야, 그러나 내가 비유하여 ‘부처는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고 말한 것에는 잘못이 없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를 모든 물고기나 자라나 악어나 사자나 코끼리나 말이나 사람이나 짐승이 밟는다고 하여도 모래는 ‘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자성도 청정하여 모든 더러움이 없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의 자각성지(自覺聖智)는 항하의 모래와 같이 큰 신통력이 있어 자재하다. 모든 외도나 모든 사람이나 짐승들이 괴롭혀도 여래는 생각을 일으켜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니, 여래는 고요하여 기억도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본원(本願)이 삼매락(三昧樂)으로 중생을 안락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괴롭힘을 받는 것이 없으니,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등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또 탐욕과 성냄을 끊은 까닭이다.
비유하면 항하의 모래는 땅의 자성이어서, 겁이 다해서 불탈 때 모든 땅[地]을 다 태워도 저 지대(地大)는 자성을 버리지 않으니, 화대(火大)와 함께 생기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 밖의 어리석은 범부가 땅이 탄다는 생각을 하나 땅은 타지 않으니, 불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의 법신(法身)은 항하의 모래와 같아 무너지지 않는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한량없는 것처럼 여래의 광명 또한 이와 같이 한량이 없으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모든 부처와 대중을 두루 비추는 것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
이외에 따로 다른 모래를 구한다면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도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없으니, 이는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늘고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지혜로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도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니, 신법(身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법이란 무너짐이 있으니, 여래의 법신은 이 신법이 아니다. 마치 항하의 모래를 눌러 짜도 기름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여래를 핍박하고 나아가 중생들이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법계(法界)와 자삼매(自三昧)와 원락(願樂)을 버리지 않으니, 중생을 크게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항하의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르지 물이 없는 곳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대혜야, 여래가 말한 모든 법도 열반을 따라 흐른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가는 것[去]을 따라 유전(流轉)하지 않으니, 가는 것은 곧 무너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생사의 근본 진리는 알 수 없으니, 까닭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가는 것을 말하겠느냐? 대혜야, 가는 것이란 단절의 뜻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알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이 생사의 근본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탈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끝없는 옛날부터의 거짓된 허물과 악(惡)과 망상과 습기의 인(因)이 없어지면, 자기 마음이 현전(現前)에 바깥 경계의 이치를 알아 망상의 몸이 바뀌고 해탈이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무변한데 그렇다고 전혀 소유(所有)가 없는 것은 아니니, 저 망상이 무변 등의 다른 이름을 짓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관찰하여 망상을 벗어나면 달리 중생이 없을 것이니, 지혜나 이염(爾炎)과 같은 모든 법이 다 적정(寂靜)하리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망상이 생기니, 알면 곧 없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도사(導師)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 같아
무너지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구경(究竟)도 아니니
이는 바로 평등한 것이다.

모든 여래를 관찰하면
마치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모든 허물을 다 벗어나고
따라서 흐르나 본성(本性)은 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부처의 정각(正覺)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희를 위해 일체 모든 법이 찰나(刹那)에 무너지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찰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란 선(善)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不善]과 무기(無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유죄(有罪)와 무죄(無罪),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받아들이는 것[受]과 받아들이지 않는 것[不受]을 말한다.
대혜야, 간략히 말하면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습기(習氣)이다. 이것은 5수음(受陰)의 인(因)이니, 이 심ㆍ의ㆍ의식과 습기가 어리석은 범부의 선(善)하거나 선하지 않은 망상을 자라나게 한다. 대혜야, 삼매락(三昧樂)과 삼매정수(三昧正受)를 닦아 현재법의 즐거움에 머무는 것[現法樂住]을 현성의 선한 무루[賢聖善無漏]라고 한다.
대혜야, 선(善)과 불선(不善)이란 여덟 가지 식(識)을 말한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여래장(如來藏)인 식장(識藏)과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니, 외도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다섯 가지 식신은 심ㆍ의ㆍ의식이 함께하여 선(善)과 불선(不善)이 서로 전전하여 변하고 무너지며, 끊임없이 흘러들어 무너지지 않는 몸이 생기며, 또한 생기고 없어진다. 자기 마음으로 나타나서 차례로 없어지고 다른 식(識)이 생기며 형상(形相)이 차별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는, 의식(意識)이 다섯 가지 식과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여 상응하여 생기나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찰나라고 한다.
대혜야, 찰나란 식장(識藏)인 여래장과 의(意)가 함께하여 식(識)을 일으키는 습기이다. 이와 같은 것이 찰나이다. 번뇌가 없는 습기는 찰나가 아니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찰나를 논하는 데 계착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찰나이면서 찰나가 아닌 줄 깨닫지 못하고, 단견(斷見)으로 무위법(無爲法)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대혜야, 7식(識)은 유전하지 않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지 않으며, 열반의 인(因)이 아니다. 대혜야, 여래장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것이고, 더불어 인(因)이 되어 주며,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4주지(住地)와 무명주지(無明住地)에 빠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찰나에 망상으로 마음을 훈습한다.
또 대혜야, 금(金)이나 금강(金剛)이나 부처의 사리(舍利)와 같이 기이하고 특이한 성품을 얻어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대혜야, 만일 무간도(無間道)를 얻었는데 찰나가 있다면 성인은 성인이 아니어야 할 것이나, 성인이 아닌 적이 없다. 마치 금이나 금강이 비록 오랜 겁수(劫數)를 지나더라도 칭호(稱號)와 양(量)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은데, 어찌 어리석은 범부는 나의 은밀한 설법을 잘 알지 못하고서 안팎의 모든 법에 대해 찰나라는 생각을 내는가?”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6바라밀(波羅蜜)을 만족하면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여섯 가지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바라밀에는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과 가장 높은 출세간[出世間上上]이다. 대혜야, 세간의 바라밀이란 나[我]와 나의 것을 계착하여 받아들이고,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받아들이며, 온갖 생(生)을 받는 곳에서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만족하는 것이니, 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 바라밀 역시 이와 같다. 이로써 범부는 신통을 얻거나 범천(梵天)에 태어날 수 있다.
대혜야, 출세간바라밀이란 성문이나 연각이 열반을 받아들이는 데 떨어지기 때문에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 자기 자신이 즐겁기 위해 열반락(涅槃樂)을 구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출세간바라밀이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을 헤아려 받아들인다는 것과 자기 마음이 둘이라는 것을 깨닫는 까닭에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모든 갈래의 중생들을 거두어 주되 분(分)을 가리지 않고, 자기 마음이 물질의 모습에 계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중생을 안락(安樂)하게 하기 위해
단바라밀을 행한다. 훌륭한 방편(方便)을 일으켜 곧 그것에 연(緣)하여 망상이 생기지 않도록 계율을 지키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이다. 저 망상이 생기지 않도록 인내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초저녁부터 한밤중, 새벽까지 정진하는 방편과 수순하여 수행하는 방편으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다. 망상이 모두 없어져 성문에 떨어지지 않고 열반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자기 마음이 망상의 성품이 아닌 것을 지혜로 관찰하여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고, 이전의 몸[先身]을 훌륭하게 변화시켜 무너뜨릴 수 없게 하며,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세계를 얻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공(空)과 무상(無常)과 찰나(刹那)는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으로 짓는 것
강물과 등불과 종자와 같은
그런 찰나라고 생각한다.

찰나에 어지러운 번뇌가 그치고
적정하여 짓는 것을 벗어나
모든 법이 생기지 않으니
내가 찰나의 뜻을 말한다.

물질은 생기면 곧 없어지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이를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속하는 성품은
망상으로 훈습된 것이다.

무명(無明)이 그 인(因)이 되고
마음이 그것을 따라 생기니
물질이 생기기 전에
중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차례로 상속하여 없어지니
나머지 마음은 저것을 따라 생긴다.
물질이 머물지 않을 때
무엇에 연(緣)하여 생기겠는가?

저것을 따라서 생기므로
진실하지 않은 인에서 생기니
어찌 성취함이 없이
찰나가 무너지는 것을 알겠는가?

수행자의 정수(正受)와
금강과 불사리(佛舍利)
광음천(光音天) 궁전이
세상의 무너지지 않는 일이다.

정법(正法)에 머물러
여래의 지혜를 구족(具足)하면
비구가 평등을 얻으리니
어찌 찰나를 보겠는가?

건달바성(乾闥婆城)과 환(幻) 등
그런 색(色)에 찰나는 없으니
진실하지 않은 색 등을
진실인 듯 본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아라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리라고 수기하셨으며, 모든 보살 등과 차별이 없다고 하셨고, 모든 중생들의 법으로는 열반에 들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누가 불도(佛道)에 이릅니까?
처음부터 부처가 되고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그 중간에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았고 또 대답한 것도 없다고 하셨으며, 여래는 항상 정(定)하기 때문에 또한 생각도 없고 살피는 것도 없다고 하셨으며, 화불(化佛)이 변화로 불사(佛事)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식(識)이 찰나에 전전하여 무너지는 모습을 말씀하시며,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항상 따라 시위(侍衛)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어찌하여 본제(本際)를 시설하지 않으시고 마(魔)와 마업(魔業)과 악업(惡業)과 과보를 나타내시며, 전차마납(旃遮摩納:旃遮摩那)과 손다리녀(孫陀利女)의 빈 발우를 내보이시어 악한 업장을 나타내십니까?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셨으면서도 모든 허물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위한 것이다. 이로써 보살행(菩薩行)으로 나아가도록 유인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다.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보살행을 닦는 사람들이 성문승의 열반을 좋아하므로 그들이 성문승을 떠나 대승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화불(化佛)이 성문에게 수기를 한 것이니, 이는 법불(法佛)이 아니다.
대혜야,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성문에게 수기를 하고 보살과 다름없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다름이 없다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이나 모든 부처님 여래가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해탈한다는 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니, 지혜의 장애[智障]를 끊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혜야, 지혜의 장애란 법무아(法無我)를 보고는 수승하고 청정하다 여기는 것이니, 번뇌장은 먼저 인무아(人無我)를 보는 것을 익혔기 때문에 끊어진다. 7식이 없어지고, 법의 장애[法障]에서 해탈하며, 식장(識藏)의 습기가 없어지고, 구경에 청정하며, 본주법(本住法)에 인하기 때문에 전후가 성품이 아니며, 끝없는 본원(本願) 때문에 여래는 생각도 없고 살핌도 없이 법을 연설한다. 바른 지혜의 교화를 받기 때문이며,
기억하여 잊지 않으므로 생각도 없고 살핌도 없다.
4주지(住地)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습기가 끊어지므로 두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두 가지 죽음을 벗어나며, 인무아와 법무아를 깨닫고 두 가지 장애를 끊는다.
대혜야,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안식(眼識) 등, 일곱 가지 찰나습기(刹那習氣)의 인(因)을 벗어나고 선무루품(善無漏品)을 벗어나면 다시는 윤전(輪轉)하지 않는다. 대혜야, 여래장이란 열반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니, 고락(苦樂)의 인(因)은 공연히 뜻을 어지럽힌다. 대혜야,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대혜야, 금강역사의 호위를 받는 것은 화불이니, 진짜 여래가 아니다. 대혜야, 진짜 여래란 모든 근량(根量)을 벗어나는 것이니, 모든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근량이 다 없어지고 현법낙주(現法樂住)의 무간법지인(無間法智忍)을 얻었기에, 금강역사의 호위를 받지 않는다. 모든 화불은 업으로 생기지 않는다. 화불이란 부처도 아니고 부처를 벗어나지도 않으며, 도공(陶工)의 바퀴 등으로 만들어진 질그릇같이 중생의 짓는 일을 모습으로 설법할 뿐이며, 스스로 통달한 것에서 스스로 깨달은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7식신(識身)이 없어진다는 것에 의지하여 단견(斷見)을 일으키고, 식장(識藏)을 깨닫지 못하므로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자기의 망상 때문에 본제(本際)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망상인 지혜가 없어지는 까닭에 해탈한다. 4주지와 무명주지의 습기를 끊으므로 모든 허물이 끊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3승(乘) 또한 승(乘)이 아니고
여래는 마멸(磨滅)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모든 허물과 악을 벗어나라는 것.

모든 무간지(無間智)와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위해서
열등한 모든 사람을 유인해 나아가게 하니
그러므로 숨기고 덮어 말한다.

모든 부처가 일으킨 지혜로
분별해서 도(道)를 말하니
모든 승(乘)은 승이 아니며
그것은 열반이 아니다.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그에 따른 소견(所見)
이것을 4주지(住地)라고 말하니
의식이 일어난 곳이며
식(識)의 집이고, 의(意)가 사는 곳이다.

의(意)와 안식(眼識) 등이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무상(無常)이라 말하고
혹 열반이라는 견해를 지어
항상 머문다고들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저 모든 보살 등이
불도(佛道)를 구하려는 뜻을 두면
술과 고기와 파 같은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상존(無上尊)이시여
불쌍히 여겨 말씀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이 욕심내어 집착하는 것
냄새나고 더러우며 명성을 얻지 못합니다.

범이나 이리가 즐겨 먹는 것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으면 모든 허물이 생기고
먹지 않으면 복(福)과 선(善)이 되리니
먹고 먹지 않는 것의 죄와 복을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대혜보살이 게송으로 여쭈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의 공덕과 잘못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은 현재와 미래에 온갖 고기를 먹기를 희망하는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법할 것입니다.
저 중생들을 자심(慈心)으로 서로 향하게 할 것이며, 자심을 얻고 나서 각기 청정하고 명료한 지위에 머물러 속히 구경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게 하겠으며, 성문이나 연각은 자기가 머무는 경지에 그치어 쉬고 난 뒤 다시 무상보리를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악하고 그릇된 논법을 가진 모든 외도의 무리는 그릇된 소견과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으로 전도되고 계착합니다. 그런 그들도 오히려 이를 막는 법[遮法]이 있어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하물며 여래께서는 세간을 구호하고 정법(正法)을 성취하셨는데 고기를 드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인연이 있으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지금 너희를 위해 간략히 설하겠다.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윤회하는 인연으로 항상 여섯 친척[六親]이 되니, 친척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당나귀나 노새나 낙타나 여우나 개나 소나 말이나 사람이나 짐승 등의 고기를 백정(白丁)이 섞어서 팔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이는 부정(不淨)한 기분(氣分)으로 생겨서 자란 것이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중생이 그 기운을 느끼면 모두 두려워하니, 개가 전다라(旃陀羅)나 담파(譚婆) 등을 보면 증오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여 무리를 지어 짖는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또 수행자로 하여금 자심(慈心)이 생기지 않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어리석은 범부가 좋아하는 것이니,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여 좋은 명성이 없어지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모든 주술이 성취되지 못하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살생하는 사람은 그 형상만 보아도 식(識)을 일으켜 깊이 맛에 집착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모든 하늘이 버리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입에서 냄새가 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악몽을 많이 꾸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한적한 숲 속에서 범이나 이리가 냄새를 맡는 까닭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음식을 먹는데 절도가 없어지게 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수행자로 하여금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려는 생각이 생기지 않게 하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나는 항상 ‘음식을 먹을 때는 아들의 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하고, 약(藥)을 먹는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따라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대혜야, 과거에 사자소타사(師子蘇陀娑)라는 왕이 있었다. 그가 온갖 고기를 먹고 사람 고기까지 먹게 되자, 신하와 백성은 감당하지 못하고 곧 모반하여 그 봉록(奉祿)을 끊었다. 고기 먹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으므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또 대혜야, 모든 살생하는 사람들은 재물의 이익을 위해 살생해서 팔며, 고기를 먹는 모든 어리석은 중생들은 돈을 그물삼아
온갖 고기를 잡아간다. 살생하는 사람은 재물로든 그물로든 하늘을 날고 물에 살고 육지에 사는 중생을 잡아 온갖 것을 살해하고 팔아서 이익을 구한다. 대혜야, 또한 가르치지 않고 구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어육(魚肉)을 잡거나 먹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대혜야, 내가 언젠가 다섯 가지 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고, 혹은 열 가지를 규제하기도 했는데, 지금 이 경(經)에서는 모든 종류를 어느 때건 방편으로 허락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금한다.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먹는 것도 없는데 하물며 생선이나 고기를 먹겠느냐? 또한 남에게 가르치지도 않으니, 대비(大悲)를 앞세우는 까닭이다.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보므로 자식의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찍이 모두 친속(親屬)이었으며
더럽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섞였다.
부정(不淨)한 곳에서 생기고 자랐으며
기운을 느끼면 모두 두려워한다.

모든 고기와 파
그리고 모든 부추와 마늘 등
온갖 방일(放逸)한 술을
수행자는 항상 멀리한다.

또 항상 마유(麻油)와
모든 구멍 뚫린 상(床)을 멀리하니
저 작은 벌레들이
그 속에서 공포에 떨기 때문이다.

음식이 방일을 낳고
방일이 모든 각(覺)을 낳고
각에서 탐욕(貪欲)이 생기니
그러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

먹는 데서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마음을 미혹에 취하게 하고
미혹에 취함이 애욕(愛欲)을 길러
생사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이익을 위해 중생을 죽이고
재물로 온갖 고기를 잡아들이니
두 가지 모두 악업(惡業)이므로
죽어서 규호옥(叫呼獄)에 떨어진다.

만일 가르침과 생각과 구함이 없다면
3정육(淨肉)도 없으니
저것은 까닭 없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먹으면 안 된다.

저 모든 수행자는
이런 까닭에 모두 멀리 벗어나야 하니
시방의 부처님 세존이
모두 다 꾸짖는 것이다.

끝없이 윤회하며 서로 서로 잡아먹으니
죽으면 범이나 이리의 부류에 떨어지고
더러운 냄새가 혐오스러우며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어리석으리라.


대부분 전타라(旃陀羅)나
사냥꾼, 담파(譚婆)의 종족으로 태어나고
혹은 다이니(陀夷尼)와
모든 육식성(肉食性)으로 태어난다.

나찰(羅刹)이나 고양이나 살쾡이 등
두루 이 가운데 태어나 돌다가
박상(縛象)과 대운(大雲)
앙굴리마라(央掘利魔羅)로 태어난다.

이 『능가경(楞伽經)』에 이르러
나는 모든 고기를 먹지 못하게 제정하니
모든 부처와 보살
성문의 꾸지람 들으리라.

먹고 참회하지 않으면
태어날 때마다 항상 어리석고 어두우니
먼저 견문의(見聞疑)를 말하고
다음에 모든 고기를 끊어라.

망상으로 깨닫지 못해
고기 먹는 곳에 태어나며
저 탐욕의 허물이
성해탈(聖解脫)을 장애한다.

술과 고기와 파와 부추와 마늘
모두 성도(聖道)를 장애하는데
미래의 중생들은
고기에 대해 어리석게 말하리라.

이것은 깨끗해서 죄가 없다 말하고
우리가 먹는 것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하리니
먹으면서 약을 먹는다 생각하고
또한 자식의 고기를 먹는다 생각하라.

족한 줄 알아 싫어해 벗어날 생각하고
수행자는 걸식을 행하라.
자심(慈心)에 안주하면
항상 싫어해 벗어나게 된다고 나는 설했다.

범과 늑대와 모든 악한 짐승들
항상 그와 함께 노닐고 멈추리니
온갖 피와 고기 먹으면
중생이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심으로 고기를 먹지 말라.

고기를 먹으면 자비심(慈悲心)이 없어
영원히 바른 해탈을 등지고
성인의 표상(表相)을 멀리하리니
그러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범지종(梵志種)과
모든 수행처(修行處)와
지혜롭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는 것
이는 고기를 먹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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