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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3 불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頌)

by Kay/케이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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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頌)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
(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頌)


무착보살(無着菩薩) 지음
당(唐) 의정(義淨) 한역
김두재 번역


으뜸가는 이익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제 몸은 물론 그 권속에게까지 이익을 주기 때문이며
증득했거나 증득하지 못했거나 물러나지 않게 하므로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광대(廣大)하고 가장 뛰어나며
지극하고 뒤바뀜이 없으니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意樂) 때문에
이 승(乘)의 공덕이 원만해진다.

여섯 가지 바라밀[六度]을 모두 보시라 이름하니
재시(財施)와 무외시(無畏施)와 법시(法施)로 말미암으며
이 가운데 하나와 둘과 셋[一二三]1)
머무르지 않는 수행이라 이름한다.

자기 몸을 위해서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건
선행(先行)의 과보(果報)에 대해 모두 집착하지 않아야 하니
이런 집착 여의기 위해 마음 일으키지 않고
다른 일[餘行]2)을 위해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거두어 항복하는 방법은 세 바퀴[三輪]3)에 있으니
형상[相]에 대한 마음 제거해 버려야 하며
뒤로 갈수록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혹들
생기는 대로 모두 다 제거해야 한다.

만약 모여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지고
오묘한 모습이라 생각하여도 그것은 뛰어난 모습이 아니니
세 가지 모습[三相]4)으로 변천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여래라고 말할 수 없다.

인(因)과 과(果)가 너무도 심오하여
저 악한 세상에서도 설법할 수 있으며
이것은 이익 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보살의 세 가지 덕[三菩薩]5)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에 부처님의 처소에서
계율을 배워 받들어 지키고
아울러 선근(善根)을 심었기 때문에
계율과 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말한다.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我想]과
법이라고 집착하는 생각[法想]을 끊었기[能斷] 때문에
지혜를 원만하게 갖추었다 이름하지만
이 둘엔 각각 다른 네 가지가 있어서 여덟 가지를 이룬다.

바탕이 다르다는 생각과 계속 이어져서 일어난다는 생각
수명이 다할 때까지 머무른다는 생각
다시 다른 세계를 구하려는 생각이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我想]의 네 가지이다.

모든 법은 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공한 성품은 있는 것이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언설(言說)의 원인[因]이 되므로
법이라는 관념[法想]에도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저들은 믿고 이해하는 힘으로 말미암으며
믿음 때문에 진실한 생각을 내니
말한 것처럼 취하지 않기 때문이며
바른 설법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과보를 아신 것은 비지(比知)6) 때문이 아니며
원지(願智)7)로 말미암아 아셨으니
이익을 얻고 남에게 존경받기를 구하는 자에게
덕이 있다거나 계율을 지닌다는 말[自說]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법에 머물지 않아야 함을 증명하셨으니
이것은 법을 따르고 법에 순종하기 때문이며
강을 건넌 뒤엔 뗏목을 버려야 함을 비유하셨으니
여기에 있는 비밀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화신의 몸인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가 아니고
또한 법을 설하지도 않으니
설하신 법을 두 가지[二取]8)로 취해서도 안 되며
설하신 법은 언어로 규정할 수도 없다네.

스스로도 받아 지니고 다른 이를 위해 설법한다면
이익이 없지 않으며 복이 쌓이게 되나니
복은 보리의 성품을 지니지 않지만
저 두 가지9)는 능히 보리의 성품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성을 증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밖의 불신(佛身)이 여기에서 나며
오직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가장 으뜸가는 복을 성취할 수 있다.

스스로 성취한 과업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두 가지 장애[二障]10)를 해탈하였기 때문에
묘생(妙生)11)은 무쟁(無諍)이라고 말한 것이다.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 계셨을 적에
언설로 법을 취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여기에서 증득한 법은
취할 바도 말할 바도 아니라는 진리가 성립된다.

지혜의 흐름은 오직 식성(識性)일 뿐이며
국토는 집착할 대상이 아니니
형상이 없기 때문에 수승하며
장엄이 아니기 때문에 장엄성(莊嚴性)이 허용된다.

비유하면 묘고산(妙高山)12)과 같아서
수용신(受用身)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번뇌가 있는 성품[漏性]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조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네.

많은 차이와 다름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훌륭한 비교를 성립하셨으며
앞뒤의 복이 같지 않기 때문에
다시 공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셨다.

두 가지13)의 성립이 존중받는 까닭에
동등한 흐름이 수승(殊勝)해지며
번뇌의 원인이 되는 성품 때문에
하열한 것도 훌륭하게 되네.

저 과보[果]가 수승하지만 괴로운 까닭은
훌륭한 일이라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열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법이 함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심오한 성품인 까닭은
그 밖의 약전[略詮]14)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며
으뜸가는 족성(族姓)으로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어느 복덕보다도 가장 우세한 것이다.

저 인욕행[堪忍]을 행할 때에
비록 괴롭지만 잘 수행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이것을 뛰어난 일이라고 이름한다.

성내거나 분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성품이라 부르지 않으니
안락(安樂)하고 큰 자비심이 있기에
행할 때에 괴로움의 과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버리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굳세게 노력해야 하며
이것을 일러 인변제(忍邊際)를 증득했다 하고
이것을 마음의 방편이라고 말하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른 수행이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
유정(有情)의 일과 모습에 대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저런 일을 취(聚)라고 말하는데
가장 수승한 일은 그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세존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은
참다운 견해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과(果)는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지만
이것이 곧 저 과보의 원인이 되나니
세존께선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점을 세워주고 하승(下乘)15)을 설해주며
또한 대승(大乘)의 이치도 설해 주는
여러 가지 수기(授記)한 일들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하네.

법[彼]을 증득하지 못한 채 따르기만 한다면
이는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법문을 듣고 증득할 과보(果報)에만 집착하는 이에게
그를 다스리기 위하여 선설(宣說)하셨네.

진여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있건만
그 참다운 성품을 얻지 못하고
무지(無知) 때문에 머무름이 있으니
지혜가 있으면 머무름 없이 진실을 얻는다.

지혜가 없으면 꽉 막힌 문과 같으니
지혜는 어둠을 밝히는 광명과 같아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得)과 실(失)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와 같은 바른 수행으로 인하여
이렇게 한량없는 복을 획득하나니
법을 바르게 수행 하는 이에게
이제 마땅히 업(業)의 작용을 설하리라.

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고 연설하는 것이며
뜻으로 증득하거나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으로 자신을 성숙시킨다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유정도 성숙시키는 것이
일과 시간의 큰 성품을 따라서
그 복덕은 어느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게 된다.

다른 경계에서의 성품이 아닌 유독 이 성품만이
능히 큰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성품이며
얻어 듣기 어려운 것이니
최상 경지의 원인을 증장(增長)시키기 때문이라네.

다만 이 바른 법만을 지니고
여기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큰 그릇을 성취하리니
모든 업장을 끊어 없애면
곧 지혜를 달통한 성품을 획득하리라.

세간의 미묘한 일들이 원만하고
이숙(異熟)에서는 매우 존귀하게 되리니
이 법을 잘 닦아 행하면
틀림없이 이러한 업(業)을 획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각자 스스로 수행할 때에
장차 나는 보살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마음에 장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니
머무름이 없는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뒤에 깨달음을 얻으리라 수기(授記)하셨으니
연등불의 처소에서 행한 것은 뛰어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보살의 그와 같은 수행이
실제로 원인을 지은 것은 아니다.

저 모습이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은 거짓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고
이 법이 곧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모두가 유위(有爲)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법신의 부처님을 가지고
장부(丈夫)에 비유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장애(障碍)16) 없이 원만하게 갖추신 몸이며
모든 장소에 두루 가득하게 계시는 성품이기 때문이라네.

증득하신 몸[德體] 광대(廣大)하신 까닭에
또한 큰 몸이라 이름하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몸이 아니므로
그는 몸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한다네.

법계(法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유정(有情)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거나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속임이며 거짓이라 한다네.

보살과 중생이
모든 법엔 자성이 없음을
만약 그것을 알면 비록 성인이 아닐지라도
성인 또는 지혜로운 이라고 불리게 됨을 마땅히 알라.

비록 모든 법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니
부처님께선 다섯 가지 눈을 갖추셨기에
경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계신다네.

가지가지 마음이 유전(流轉)하여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지니고 있지 않고 항상 변천하므로
허망하다고 말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이 지혜 지녔기에
그 복은 곧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 복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거듭 이 비유로써 설명하신 것이라네.

참다운 법신(法身)이란
좋은 상호 원만함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며
또한 상호가 원만하게 갖추어진 것도 아니니
몸의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신은 분별이 없지만
여래가 아니면 이 두 가지17)가 없으니[無二]
거듭 원만하게 갖춘 상호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 몸이 다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두 번 말씀하신 것은 집착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며
법계를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자성(自性)도 없다고 설법하였기 때문이다.

법을 설한[能說] 이나 설해진[所說] 법이 비록 매우 심오하고
또한 공경하고 믿는 이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것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면서
성인은 아니지만 성인의 성품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법도 없는 까닭에
무상각(無上覺)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법계는 증감(增減)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평등한 성품이라고 한다.

방편은 위가 없어서
유루(有漏)의 성품으로 말미암는 것은 법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선법(善法)이 아니라도
이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선(善)하다고 이름한 것이다.

말씀하신 법이 비록 무기(無記)라 하더라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한 법의 보배만을 따르면
저 한량없는 보배보다 뛰어나다.

모든 산수[筭]와 세력[勢] 따위와
그리고 인과(因果)에도 차별이 있으니
세간에서 자세히 살펴 생각하거나
어떠한 비유를 하더라도 미칠 수 없네.

법계는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선 중생을 제도하지 않나니
모든 이름은 취(聚)와 함께 하지만
법계를 벗어나서 존재하지도 않네.

만약 법집(法執)이 일어난다면
아집(我執)의 허물과 같으니
결정코 유정(有情)들을 해탈시켜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도
곧 집착해서는 안 될 망집(妄執)이라네.

마땅히 색(色)의 몸을
여래의 법신(法身)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니
저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여래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곧 원만하게 갖추어진 상호의 과보(果報)는
원만한 복으로 받은 것이 아니니
법신을 불러오게끔 한 것은
방편의 특이한 성품 때문이었네.

오직 색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알지 못하리니
이 진여(眞如)의 법신은
인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그 복은 망실되지 않고
과보(果報)도 끊어지지 않으며
증득한 법인(法忍)도 또한 끊어지지 않나니
번뇌 없음[無垢]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복의 원인을 논(論)하며
이것 밝히기 위해 적절한 비유를 들었으니
저 복은 과보 없는 까닭에
바르게 취하는 것일 뿐 지나치게 취하려는 것이 아니네.

그 복은 화신의 과보[化果]를 불러
유정들의 일을 유익하게 하나니
그 일은 임의대로 운행할 수 있기에
부처가 되어 모든 곳에 나타난다.

화신은 가고 오는 등의 일이 있지만
정각(正覺)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나니
저 화신은 법계의 처소에서
한결같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작은 먼지로 장차 먹[墨]을 만든다고 하는 말은
비유로 법계를 나타낸 것이니
여기에서 먹을 만드는 일을 논한 것은
번뇌의 멸진(滅盡)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무리[聚]의 성품도 아니고 모이는[集]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이것이 동일한 성품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것이 다 합집(合集)된 성품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각기 다른 성품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다만 속된 말인 줄 알지 못하여
여러 어리석은 이들이 부질없이 집착하나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이 두 가지를 끊었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본래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이런 까닭에 견(見)이니 견이 아니니 하면서
아무 경계도 없는 것에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니
이런 미세한 장애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 없애야 한다.

이 두 가지 지혜[二種智]18)
선정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저것이 제거되면
복을 펼쳐서 화신(化身)을 밝히니
무진(無盡)한 복 없는 것이 아니네.

모든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실 때에
자신이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으니
스스로 그런 말씀 하시지 않으셨기에
이 말은 진실한 말씀이라네.

여래께서 증득하신 열반은
조작해서 된 것도 아니지만 또한 그와 다른 것도 아니니
이 모여서 만들어진 아홉 가지19)
바른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견상(見相)과 인식작용[識]과
거처[居處]와 몸[身]과 수용(受用)과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모습[相]을 관찰하고
수용과 변천하는 흐름을 관찰한 까닭에
유위(有爲)의 일 가운데에서
번뇌 없이[無垢] 자재(自在)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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