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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0 불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상권

by Kay/케이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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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상권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상권


무착보살(無着菩薩) 게송
세친보살(世親菩薩) 해석
의정(義淨) 한역
김두재 번역


이 경전 문구(文句)의 뜻과 차례를
세간에는 밝은 지혜가 없어 알 수 없으니
여기 머리 조아려 저희들을 가르쳐 주시기를
한량없는 공덕으로 생겨난 몸께 예배합니다.

이와 같은 덕 갖추신 분께 마땅히 예 올려 공경하며
그 족적(足跡)에 이마 대어 예배하오니
타기 어려운 깨달음의 수레[覺轅]를 저 분께선 타시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널리 모든 중생[舍識] 이롭게 한 까닭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근기가 성숙(成熟)한 보살을 근거로 말한 것이고, “가장 으뜸가는 부촉(付囑)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보살을 근거로 말한 것이다. 어떤 것이 모든 보살에게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 되는 것이며, 또 어떤 것을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라고 말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렇게 게송을 설하였다.

으뜸가는 이익이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제 몸은 물론 그 친속에게까지 이익을 주기 때문이며
증득하였거나 증득하지 못했거나 물러나지 않게 하므로
가장 으뜸가는 부촉이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살의 몸에 이익이 되게 하고 또한 그 보살로 하여금 그가 간직한 것을 도반들에게 서로 이어지게 하여 이익 되게 하므로 가장 으뜸가는 이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몸에서 불법(佛法)을 성숙시켜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곧 그 몸을 이익 되게 하는 동시에 또한 다른 유정(有情)들을 교화하여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고 모두 다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권속에게까지 이익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간에 가지고 있는 공덕을 가지고 능히 그들을 위하여 물러나지 않는 인(因)을 지으며 착한 벗을 친근히 하고 몸을 맡겨 의지하는, 이것을 으뜸가는 부촉이라 하며 또한 서로 부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증득하고 나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大乘)을 버리지 않게 하려고 함이며, ‘증득하지 못했어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승에서 다시 더욱 수승(殊勝)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보살승(菩薩乘)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이들이 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이렇게 게송을 설하였다.

마음이 광대하고 가장 뛰어나며
지극(至極)하고 뒤바뀜이 없으니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意樂) 때문에
이 승(乘)의 공덕이 원만해진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만약 보살이 이 네 가지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를 일으켰을 때 맨 처음 발한 마음[發心]을 이 대승에 두고서 이 의요(意樂)를 갖춘다면 비로소 공덕이 원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 이익을 주어야겠다는 의요인가?
첫째는 광대(廣大)이고 둘째는 최승(最勝)이며, 셋째는 지극(至極)이며 넷째는 전도되지 않는[無顚倒]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승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발심한 모든 이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는 말에서 “이와 같은 모든 것”까지는 광대(廣大)한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며, “내가 그들로 하여금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의 경지를 증득하게 하리라”라고 한 것은 가장 으뜸가는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며, “비록 이와 같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여”에서부터 “보살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까지는 지극(至極)한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을 다 거두어 보살과 같게 하되, 제 자신이 이로 말미암아 적멸(寂滅)하게 되면 제 자신이 유정(有情)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따로 중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중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만약 모든 중생을 거두어들여서 제 몸같이 여기면 이는 곧 지극한 버리지 않음이니, 이러한 까닭에 지극(至極)한 의요(意樂)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수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또 다른 생각을 구한다면 이런 자는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라는 것은 곧 뒤바뀐 생각이 없는 이익에 대한 의요를 밝힌 것이다. 이 뒤바뀐 생각은 몸이 있다는 견해를 연유하거나 의지하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런 생각을 알아 바로 끊어버리면 곧 뒤바뀐 생각이 없어진다.
그 다음 아래 경문의 내용은 마땅히 보살승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낸 이들이 있으면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일에 머물지 않고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첫 번째 보시만 설해도 여섯 가지 도피안(到彼岸)1)을 다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여섯 가지 바라밀[六度]을 모두 보시라 이름하니
재시(財施)와 무외시(無畏施)와 법시(法施)로 말미암으며
이 가운데 하나와 둘과 셋[一二三]2)
머무르지 않는 수행이라 이름한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은 모두 보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보시의 성품은 재시(財施)와 두려움 없는 보시[無畏施]와 법보시(法布施)를 연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것을 첫째로 말미암은 것은 첫 번째 보시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 없는 것을 두 번째로 말미암은 것은 지계[戒]바라밀과 인욕[忍]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원수가 없는 것[지계바라밀]과 원수의 처소[인욕바라밀]가 없는 곳에는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법을 베푸는 것을 세 번째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바로 정진[勤] 등을 말하는 것이니 게으름 없음[정진바라밀]으로 말미암아 저 실정을 깨닫고 난 뒤[선정바라밀] 여실[如實]한 법을 선설(宣說)하는 것[지혜바라밀]이다. 이것이 곧 큰 보살들이 수행하는 법이다.
이것이 곧 첫 번째 재물을 베푸는 설법으로써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 된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어떤 일에 머무르지 않고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하니, 이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는 것을 성품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자기 몸을 위해서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건
선행(先行)의 과보(果報)에 대해 모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일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않고 처소를 따라 머물지도 않는 것을 밝힌 것이며,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은 곧 은혜에 대한 보답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란 이양(利養)이나 공경(恭敬)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은혜를 구하거나 이익을 바라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처소를 따라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물질적 존재 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선행의 결과에 대한 보답이 있기를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었다. 왜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답하였다.

이런 집착 여의기 위해 마음 일으키지 않고
다른 일[餘行]3)을 위해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제 자신을 돌아보아 보시를 행하지 않고 그런 보시를 여의고자 하여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에
제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속히 보시를 행하라고 말한 것이다.
은혜에 보답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선행에 대한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마침내는 정각(正覺) 보리과(菩提果)의 성품을 버리게 되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떤 결과를 바라거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는 이 두 가지를 버려야만 한다고 말한 것이다.
다음에는 마음을 거두어 항복받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마땅히 설명하리라.

마음을 거두어 항복하는 방법은 세 바퀴[三輪]4)에 있으니
형상[相]에 대한 마음 제거해 버려야 하며
뒤로 갈수록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혹들
생기는 대로 모두 다 제거해야 한다.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이와 같이 마땅히 보시를 행해야 하며, 나아가 모습이라는 생각에까지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베푸는 물질과 베푸는 것을 받는 중생, 그리고 베푸는 사람 등 이 세 가지에서 모든 생각이나 마음에 집착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다음엔 보시에 대한 이익을 밝힌 것이다. 어떤 이가 논란하여 말하기를 “이미 보시 등에 대하여 그 모습을 여의었다면 장차 어떠한 복덕(福德)의 이익을 받겠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대하여 “생겨나는 복이 매우 많을 것이다”라는 말로 대답하였다.

묻기를, 무슨 까닭에 수행(修行)에 대하여 선설(宣說)하면서도 복덕이나 이익에 대하여는 드러내 말하지 않고,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거두어 항복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는가?
답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모습이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비로소 그는 집착 없는 보시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뒤의 경문(經文)은 모두 뒤로 가면 갈수록 생겨나는 의혹을 제거해 없애는 것이니, 여기에서 문득 이와 같은 의혹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묻노니, 만약 모든 법(法)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면 왜 정각(正覺)의 뛰어난 결과를 구하기 위해 보시를 행하는가?
이 의혹에 대답하기 위하여 경에서 이르기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뛰어난 상호[勝相]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여 이처럼 자세히 설하고 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약 모여서 만들어진 형상을 가지고
오묘한 모습이라 생각하여도 그것은 뛰어난 모습이 아니니
세 가지 모습[三相]5)으로 변천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여래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여래를 보시 등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형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품을 증득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자가 문득 여래가 지니고 있는 훌륭한 모습을 보고 만약 여래 진여(眞如)의 성품을 희망한다면, 이러한 모습은 곧 훌륭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수승하고 미묘한 모습으로는 여래를 관(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저 법신(法身)은 모여서 만들어져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르기를 “왜 그런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저 수승한 모습은 세 가지 모양으로 변천하여 달라지니, 이 뛰어난 모습은 곧 진정으로 뛰어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담겨 있는 뜻은 세 가지 모습의 바탕은 곧 옮겨 흘러가기 때문에 묘생(妙生)6)이 훌륭한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훌륭한 모습을 모습이 아니라고 보면 여래(如來)를 관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의미는 인연을 따라 생기는 법은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여래께서 저 전무(全無)한 세 가지 모습[三相]7)으로 말미암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습을 여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아무 모습도 없는 것을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서 여래께는 생(生)ㆍ주(住)ㆍ멸(滅)의 변이(變異)하는 성품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이것은 곧 여래는 조작(造作)이 있는 성품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은 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성품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나면 비록 불과(佛果)를 위해서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는 법시(法施)라야 한다고 말하여 곧 중생들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앤 것이다.
이 아래의 내용들은 묘생이 거듭 의혹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만약 이와 같이 머무름이 없는 보시를 행하는 이는 곧 인(因)이 지극하고 매우 심오할 것이다’라고 의심하여, 또 말하기를 “여래가 곧 작용이 없는 성품[無爲性]이라면 이는 곧 과(果)가 지극하고 매우 심오할 터인데 어떻게 말법시대의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을 얻게 하여 그 과보(果報)를 헛되이 버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게송을 설한다.

인(因)과 과(果)가 너무도 심오하여
저 악한 세상에서도 설법할 수 있으며
이것은 이익 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보살의 세 가지 덕[三菩薩]8)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말법시대라 하더라도 계율과 덕과 지혜를 원만히 갖춘 보살이 법을 설하기 때문에 과(果)의 이익이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게송을 설한다.


과거에 부처님의 처소에서
계율을 배워 받들어 지키고
아울러 선근(善根)을 심었기 때문에
계율과 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다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그러나 저 보살들은 오직 한 부처님의 처소에서 수행하고 공경하여 섬긴 것도 아니요, 또한 한 부처님 아래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은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과거 부처님에게서 계율을 받아 지녔고 또 공경하고 받들어 섬겼으며, 나아가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그 순서대로 계율과 덕을 원만히 갖추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다음엔 지혜를 원만하게 갖춘 사람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게송을 설한다.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我想]과
법이라고 집착하는 생각[法想]을 끊었기[能斷] 때문에
지혜를 원만하게 갖추었다 이름하지만
이 둘9)엔 각각 다른 네 가지10)가 있어서 여덟 가지를 이룬다.


이것은 나라고 집착하는 관념에 존재하는 네 가지와 법이라고 집착하는 관념에 존재하는 네 가지 때문에 모두 여덟 가지 관념을 이루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게송을 설한다.

바탕이 다르다는 생각과 계속 이어져서 일어난다는 생각
수명이 다할 때까지 머무른다는 생각
다시 다른 세계를 구하려는 생각이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我想]의 네 가지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관념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곧 나라는 관념, 유정(有情)이라는 관념, 수명이라는 관념, 다시 다른 세계를 구하는 관념을 말한다.
네 가지가 같지 않으므로 여기서 따로따로의 5온에 대하여 유정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끊어 분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라는 관념이 되고, 존재가 상속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정이라는 관념이 되며살타(薩埵)는 곧 상속(相續)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목숨이 존재할 때까지 수명이라는 관념이 되고, 목숨이 다한 뒤에 변천하여 다시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이 곧 다른 세계에서의 존재를 구하는 관념이 된다. 법(法)이라는 관념에도 네 가지가 있다.
게송을 말하리라.

모든 법은 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공한 성품은 있는 것이지만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언설(言說)의 원인[因]이 되므로
법이라는 관념[法想]에도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법이라는 관념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첫째는 법이라는 관념, 둘째는 법이 아니라는 관념, 셋째는 관념이라는 생각, 넷째는 관념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모든 법은 다 없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관념이 생기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곧 법이라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저 법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법에는 자성(自性)이 없으나 공(空)한 성품은 있기 때문에 법이라는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곧 저것은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성품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을 말로 평론할 바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이 언설(言說)의 인(因)이 되므로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관념의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비록 말로는 나타낼 수 없지만, 언설이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 뜻이 서로 다른 것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네 가지 관념과 법이라고 집착하는 네 가지 관념, 도합 여덟 가지 관념을 끊기 때문에 지혜를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고 하니, 이 이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노니, 다만 지혜만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말하고 계율과 덕을 원만하게 갖추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무슨 까닭인가?
답하노니, 현실(顯實)적 관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들은 믿고 이해하는 힘으로 말미암으며
믿음 때문에 진실한 생각을 내니
말한 것처럼 취하지 않기 때문이며
바른 설법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설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경전을 들으면 한결같이 믿음을 낼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지혜를 원만하게 갖춘 이는 말한 대로 취하지 않고 승의지(勝義智)만을 따르고 순종하기 때문이며, 바른 설법에서 취하기 때문에 진실한 생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행하기 때문에 그 뒤에 문득 말하기를 “마땅히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되며, 마땅히 말한 것 그대로를 법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또한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치로 인하여 승의지만을 따라 순종하고 바른 설법에서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이 경전 설함을 들으면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묘생(妙生)아, 여래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중생 등을”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부처님께서 과보를 아신 것은 비지(比知)11) 때문이 아니며
원지(願智)12)로 말미암아 아신 것이다.

저 계율 등을 원만하게 갖춘 사람이 소유(所有)한 과보(果報)를 아신 것은 부처님의 비지로 인한 것이 아니다. 다만 원지로 현실을 헤아림으로써 아신 것이다.
만약 보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비지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며,
만약 안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면 아마 육안(肉眼)으로 보신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알고 보았다는 말을 한꺼번에 말씀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이익을 얻고 남에게 존경받기를 구하는 자에게
덕이 있다거나 계율을 지닌다는 말[自說]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계율 등을 원만하게 갖춘 저들은 이양(利養)이나 공경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덕이 생겼다고 말한다. ‘여래께서 이미 나에 대하여 멀리서 꿰뚫어 보아 아시고 계시므로 이렇게 스스로 말하더라도 의심하지13)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경에 이르기를 “묘생이여, 저 모든 유정(有情)들이 태어나는 곳마다 마땅히 한량없는 복덩어리를 섭수하여 취하리라”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이것은 저 한량없는 복덩어리가 당연히 생겨날 것이며, 또한 그 복은 마땅히 계속 이어지면서 훈습(熏習)되어서 끊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거나’ 등의 말은 아마도 수면(隨眠)14)의 성품만 있고 현행(現行)15)의 집착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 비밀한 뜻으로 뗏목에 비유한 법문을 말씀하셨으니 지혜 있는 모든 이들은 법까지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어떤 비밀한 뜻이 있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법에 머물지 않아야 함을 증명하셨으니
이것은 법을 따르고 법에 순종하기 때문이며
강을 건넌 뒤엔 뗏목을 버려야 함을 비유하셨으니
여기에 있는 비밀한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전 등의 법은 증상(增上)의 지혜로 증득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득하고 난 뒤에는 마땅히 그 법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비유하여 마치 강을 건너 저 언덕에 이르면 타고 갔던 뗏목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증상하기 위해서는 증지(證智)를 따르고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섭수하여 취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아직 저 언덕에 도달하기 전에는 반드시 뗏목을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곧 비밀한 뜻이다.
한 개의 뗏목을 두고도 취하고 버려야 할 시기가 있기 때문에 비밀하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 밖에 증득한 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치도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차후(次後)에 다시 의심을 제거하려 하였으니, 그것은 어떤 것인가?
윗글에서 이르기를 “마땅히 으뜸가는 상호[勝相]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위(無爲)에서 나타난 성품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석가모니(釋迦牟尼)여래께서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셨으며, 마침내 법을 선양(宣揚)하시고 가르쳤는가? 이 도리로 말미암는다면 저것은 정각(正覺)도 아닐 것이며 또한 설법도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의혹에 답하기 위해 게송을 설하였다.

화신의 몸인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가 아니고
또한 법을 설하지도 않는다네.

세 가지 부처님이 있으니, 첫째는 법신불(法身佛)이며, 둘째는 수용신불(受用身佛)16)이며, 셋째는 화신불(化身佛)이다.
여기에서 석가모니불이라고 말한 것은 곧 화신불이니, 이 부처님께서는 원래 정각(正覺)을 증득한 것도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글에서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등의 말을 한 것은 일체 설법의 일에 대하여 모두 반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화신의 몸인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없는 것도 아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설하신 법을 두 가지[二取]17)로 취해서도 안 되며
설하신 법은 언어로 규정할 수도 없다네.

여기에서 말한 ‘두 가지’란 법의 성품[法性]인 것과 법의 성품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니,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이 아니라거나 법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진여(眞如) 도리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저 법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이 법엔 그 성품이 없기 때문이며, 또 법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것엔 자성(自性)은 없지만 바탕은 있기 때문이다.
왜 다만 설한 법이라고만 말하고 증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가?
답하기를 다만 말로만 설명한 것은 곧 증득할 수 있다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니, 만약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설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모든 성현은 다 무위(無爲)로부터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법은 설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인들은 모두 진여인 청정한 법으로부터 현현(顯現)했기 때문에 무위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도리어 무위법(無爲法)을 설하면서 “무릇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일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취할 수 있는가?
그는 또 자성(自性)은 말로써 그 행할 바 처소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로는 그 성품을 설명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이 가운데 따로 가려 차별하지 않고 통틀어 성현이라고 말하고 부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답하기를, 성인은 다 청정한 진여(眞如)로부터 나타났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니, 전체가 청정하면 일부분도 청정하기 때문이며, 그 호응하는 바를 따르면 과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복에 대하여 차별을 두어 말한 것은 무엇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답하기를, 법이 비록 진실한 것이어서 그 성품을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스스로도 받아 지니고 다른 이를 위해 설법한다면
이익이 없지 않으며 복이 쌓이게 되니

무엇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세존이시여, 이 복덩어리는 곧 모여서 된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복덩어리, 복덩어리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복은 보리의 성품을 지니지 않지만
저 두 가지18)는 능히 보리의 성품을 지니기 때문이다.

‘복은 보리의 성품을 지니지 않으니, 저 두 가지만이 보리의 성품을 지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으니, 게송의 뜻이 이와 같다면 무엇을 두 가지라고 말하는가?
스스로 받아 지니는 것과 다른 이를 위해 설법해 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이미 스스로 받아 지니고 난 뒤에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장차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덩어리[聚]라고 말한 뜻에는범어(梵語)의 색건타(塞建陀)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어떤 때는 덩어리(聚)라는 뜻으로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깨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며, 혹은 분단(分段)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여기 중국의 번역에 의하면 덩어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쌓여서 뭉쳐진 덩어리라는 뜻이다. 그밖에 다른 뜻은 없고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 뜻에 의거하였다. 이것을 옛날 사람들이 범음(梵音)을 잘 몰랐기에 또한 취(趣)로 번역하여 본래의 뜻과 거리가 매우 멀어지게 되었다. 또 이것을 취(聚)의 뜻, 견(肩)의 뜻으로 알아내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점이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쌓여서 모인 덩어리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어깨에 짊어진다[肩荷]는 뜻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과 같다는 의미로서 여기에서 견(肩)은 곧 취(聚)의 뜻이 된다.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서 살펴볼 때 저 복이 쌓인 덩어리라는 것을 복의 덩어리라고 했으며, 그것이 보리의 성품을 짊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덩어리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곧 어깨에 짊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쌓여 모인 덩어리라는 뜻만 될 뿐이기 때문에 복은 보리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저 두 가지만이 보리의 인(因)을 가지고 있어서 그 복이 매우 많다고 한 것이다.


묻노니 무슨 까닭에 이 두 가지만이 보리의 성품을 지니는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왜냐하면 묘생(妙生)아, 모든 여래의 무상보리(無上菩提)가 이 경전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에 보리가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모든 부처님도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자성을 증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밖의 불신(佛身)이 여기에서 난다.

‘보리’라고 말한 것은 곧 법신(法身)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 자성(自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곧 저런 것들을 증득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이것을 생기게 하는 원인은 되지 못한다. 만약 이밖에 수용신(受用身)19)과 화신(化身)을 희망한다면 이것은 곧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이로 말미암아 친히 보리를 가질 수 있으므로 매우 많은 복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등이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성립될 수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오직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에
가장 으뜸가는 복을 성취할 수 있다.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깨달은 법은 오직 부처님이라야 능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며,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성인들은 그 성품을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곧 가장 으뜸가는 복이 되는 원인의 성품이기 때문에 매우 많은 복을 불러오게 되니, 아마 여기에서는 이것이 능히 가장 으뜸가는 복을 생겨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됨을 밝히려고 한 것 같다.
‘위의 경에서 이르기를 〈성인은 모두 쌓여서 이루어졌거나 조작(造作)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성인이 증명하여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고 하였는데, 모든 예류과(預流果)20) 등의 성인이 모두 스스로 그 과를 취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취할 수 없는 성품을 취해서 그 취한 것을 가지고 선설(宣說)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성품에 대하여 말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라는 이런 의심을 떨쳐버리게 하기 위해서 먼저 의심이 일어나게 해놓고 뒤의 글에서 곧바로 취할 바도 아니요 증득할 바도 아니라는 이치를 드러내어 훌륭하게 완성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스스로 성취한 과업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이것은 무위에서 나타난 성품이기 때문에 그는 여섯 가지 경계[六境]21)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그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미 들어갈[預] 수 없기에 예류(預流)라고 말한 것이니, 나아가 아라한(阿羅漢)에 이르기까지에 있어서도 또한 법이 없는 그 이치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무위의 법으로 체득한 것은 취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성인은 자기가 증득한 과(果)에 대하여 취하지도 않고 말로 표현하지도 않은 것이다. 만약 성인이 ‘나는 과를 얻었다’라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낸다면 이는 곧 나라는 생각 등에 집착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의미는 아마도 수면혹(隨眠惑)22)은 현행하는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과(果)를 증득하여 현관(現觀)하였을 때에 나라는 것 등에 집착하지 않고 나는 과를 증득했다고 말한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무슨 뜻으로 묘생은 스스로 아라한을 증득하였다고 말했는가?
일부분을 증득한 유정(有情)들로 하여금 자신이 친히 증득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또다시 ‘무쟁(無諍)23)에 머무름을 증득하였다’고 스스로 말한 것은 몸과 훌륭한 덕이 서로 호응함을 밝혀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수승하다는 마음을 내어 공경하고 믿게 하려고 한 까닭이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묘생은 전혀 머무르는 바가 없는데, 나는 무쟁에 머무름을 증득하였다. 나는 무쟁에 머무름을 증득하였다”라고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장애[二障]24)를 해탈하였기 때문에
묘생(妙生)은 무쟁(無諍)이라고 말한 것이다.

장애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번뇌장(煩惱障)이며 다른 하나는 정장(定障)25)이다. 이 두 가지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말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무쟁의 성품을 말한 것으로 곧 이러한 번뇌의 장애가 없다는 뜻이다.
또 의심을 내어 “세존께서 옛날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 어떤 법을 얻었기에 그는 또 다른 이를 위하여 그 법요(法要)를 설하시는 것일까?”라고 말한다.

이런 이치로써 말한다면 어떻게 취함도 없고 말한 것도 없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는가?
답하기를, 이러한 의문을 끊어주기 위하여 말하기를 “실제로 얻은 법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취하신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 계셨을 적에
언설로 법을 취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라네.


이 말은 세존께서 연등불의 처소에 계셨을 때에도 언어와 문자에 취착함으로써 그 법을 증득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러므로 여기에서 증득한 법은
취할 바도 말할 바도 아니라는 진리가 성립된다.

만약 모든 성인은 다 무위(無爲)로부터 나타나셨기에 그 법은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모든 보살이 장엄하고 수승한 부처님의 국토를 취하는가? 또 수용신(受用身)은 어떻게 스스로 법왕신(法王身)을 받으려 하는가?
세간에서 그가 장차 법왕신이 될 것이라는 의심을 일으키므로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한 까닭에 비로소 아래의 글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의 뜻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지혜의 흐름은 오직 식성(識性)일 뿐이며
국토는 집착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부처님 국토의 장엄하고 수승함에는 취해야 할 일이 없으며, 다만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로부터 흘러 오직 식성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이것은 곧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데, 만약 사람들이 실제로 형질(形質)이 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성품이라고 분별하여 ‘나는 마땅히 국토의 장엄하고 수승함을 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장엄하거나 수승한 것이 아닌데 이것을 두고 국토를 장엄한다느니, 국토가 수승하다느니 하고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엔 어떤 뜻이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형상이 없기 때문에 수승하며
장엄이 아니기 때문에 장엄성(莊嚴性)이 허용된다.

‘장엄’이라고 말한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형상(形相)이며, 둘째는 승상(勝相)이다. 이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며 제일의(第一義)이다.
형체나 바탕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 하지만 곧 장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장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가장 수승하다고 말했으며, 수승한 법이 여기에 모였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부처님 국토의 형상이 수승하고 장엄한 것이라고 집착하여 ‘나는 마땅히 이런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색(色) 등의 경계에 대하여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견해를 막기 위하여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앞의 글에서 이르기를
“장차 받을 용신불(用身佛)은 왜 스스로 법왕신(法王身)을 취하였는가?”라고 하였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논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장차 받을 용신불은 묘고산(妙高山)26)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글은 어떤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비유하면 묘고산(妙高山)과 같아서
수용신(受用身)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마치 묘고산왕처럼 그는 수승하고 큰 존주(尊主)의 성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묘고라고 이름하였고, 스스로 산왕(山王)의 성품을 취하지 않는 것은 산은 분별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수용신불도 이와 같아서 법왕의 성품을 갖추고, 수승하고 큰 존주의 성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수승하다, 크다고 말한다. 스스로 그 법왕의 성품만을 취하여 ‘내가 곧 법왕이다’라고 하는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분별이 없는가?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제의 몸이 아니니라’ 하셨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실제의 몸이 아닌 것을 가지고 몸이라고 한다”고 하셨으니 여기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번뇌가 있는 성품[漏性]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조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네.

그러나 “수용신은 번뇌가 있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몸을 가지고 몸이 있다고 말한다”고 하였는데, 깨끗하고 밝고 순수한 자체만 있는 까닭에 이것 또한 조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이러한 몸은 곧 다른 인연에 의지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앞에서는 복덕의 성품에 대하여 이미 비유까지 들어 설명했으면서 여기서는 왜 또다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많은 차이와 다름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훌륭한 비교를 성립하셨으며
앞뒤의 복이 같지 않기 때문에
다시 공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기도 했다.

앞에서 삼천세계의 비유를 들어 복이 많음을 밝히고 이제 또 무수히 많은 삼천세계를 설하여 다시 자세하게 밝혔는데, 왜 앞에서는 이런 비유를 말하지 않았는가?
교화를 받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먼저는 적고 뒤에는 많은 뜻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 거론한 복과 차별을 둔 것은 성립하는 원인을 밝히지 않으려고 보리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작용이 없음을 말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능히 성립할 수 있었던 인상(因相)을 밝히고자 하여 다시 따로 비유를 들어 일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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