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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2 불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하권

by Kay/케이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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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하권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하권


무착보살 게송
세친보살 지음
의정 한역
김두재 번역


“여래께서 설하신 저것은, 원만하게 갖춘 모습은 곧 원만하게 갖춘 모습이 아닌데 이것을 원만하게 갖춘 모습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참다운 법신(法身)이란
좋은 상호 원만함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며
또한 상호가 원만하게 갖추어진 것도 아니니
몸의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신은 분별이 없지만
여래가 아니면 이 두 가지1)가 없으니[無二]
거듭 원만하게 갖춘 상호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 몸이 다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신은 실제로 원만하게 갖춘 좋은 색신(色身)을 따르는 것이 아니요, 또한 원만하게 갖춘 갖가지 상호도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것은 몸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곧 법신은 원만하게 갖춘 형상이 없다는 뜻을 말한 것이며, 또한 여래가 아니면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색신이 원만한 것과 훌륭한 상호를 원만하게 갖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법신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는 그러한 상호(相好)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해서 말한 것은 색신이 원만하고 또한 좋은 상호를 갖춘, 이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두 가지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원만하지도 않고 상호를 갖추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있다고 말한 것은 색신이 원만하고 훌륭한 상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가?
법신에는 이러한 상호(相好)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를 이름하여 여래라고 부른 것이다.
색신이 원만하고 좋은 상호를 갖추었다 하면 그 몸과 서로 떠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법신의 성품은 곧 이와 다르니, 법신은 그러한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마땅히 색신이 원만하고 상호를 갖춘 몸이라는 것으로써 여래를 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여래는 왜 이런 설법을 하시는 것일까?’라고 의심할 것이므로 이 의심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는 곧 “나쁜 집착을 가지고 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말한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래께서도 또한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두 번 말씀하신 것은 집착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법을 설한다, 법을 설한다”고 두 번 거듭 말씀하신 뜻은 무엇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두 번 말씀하신 것은 집착할까 염려한 때문이다”라고 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바로 이 글이며 다른 하나는 이 글의 뜻이다.
무슨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말로 설할 수 없는 법을 설한다고 하느니라”고 하였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법계를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자성(自性)도 없다고 설법하였기 때문이다.

‘법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법을 설한다면 자성을 얻어야 할 것인데, 만약 세존께서 능히 설법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면 설하신 법도 또한 법신(法身)을 여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존재하지 아니함이 성립될 터이니 이와 같은 심오한 법에 대하여 공경하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혹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런 의문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법을 설한[能說] 이나 설해진[所說] 법이 비록 매우 심오하나
또한 공경하고 믿는 이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경에 이르기를 “묘생아,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또한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면서
성인은 아니지만 성인의 성품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이 마땅히 공경하고 믿음을 낸다면 저것은 중생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중생이 성인의 성품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면 곧 범부의 성품과 서로 호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성인의 성품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니, 여기에서의 의미는, 저들이 범부의 성품을 보는 까닭에 곧 중생이 아니요 성인의 성품도 보기 때문에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중생, 중생이라고 하지만 여래께서 “저것은 중생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곧 우매하고 작은 이생(異生)의 성품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곧 성인의 성품에 의거한 것이다.
‘만약 여래께서 일찍이 아무 법도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아 알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나중에 그 뒤에 오는 바른 지혜의 차례를 떠난 것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말할까?’ 하는 의혹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법이 있어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닌 것을 비로소 무상정각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이유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조그만 법도 없는 까닭에
무상각(無上覺)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법계는 증감(增減)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고 평등한 성품이라고 한다.
방편은 위가 없어서

여기에서부터 나아가 조그만 법에 이르기까지 한 법도 벗어나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상(無上)이라고 한다.
또 법계는 더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법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무상상(無上上)이라 하였으니, 이보다 으뜸가는 성품[上性]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여래의 법신은 청정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그 법은 어느 것과도 같거나 평등하지 아니함이 없고 조금도 늘어날 것이 없으므로 무상(無上)이라고 부른다.
또 그 법은 곧 나라는 모습이 없기 때문에 이를 높다고 하고 높은 성품까지도 없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모든 방편도 위가 없고 지닌 선법(善法)이 모두 원만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상이라고 이름한다.
그 밖에 모든 보리는 여러 가지 선한 법을 닦지만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이 방편은 진실로 위없는 것은 아니므로 여래께서는 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선법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무슨 뜻이 있는가?
게송으로 대답하리라.

유루(有漏)의 성품으로 말미암는 것은 법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선법(善法)이 아니라도
이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선(善)하다고 이름한 것이다.

유루의 성품으로 말미암지만 저것은 곧 유루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 유루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선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루(無漏)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결정코 이 선한 성품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법을 닦아서 큰 보리(菩提)를 얻는다고 한다면 존재하는 선법으로도 마땅히 보리를 획득하지 못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라고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 의문을 차단하기 위하여 다시 차별이 있는 복을 말씀하신 것인가?

대답하기 위해 설법하신 것이 비록 무기(無記)라 하더라도 마침내 얻을 것이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말씀하신 법이 비록 무기(無記)라 하더라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떠나서는 보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힘입어 보리의 방계(方契)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한 법의 보배만을 따르면
저 한량없는 보배보다 뛰어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선설(宣說)한 법보는 앞의 무수한 수미산[妙高]과 같이 한량없는 보배에 비해 현격한 복의 차별이 있다.
“가령 백 등분을 하였다면 그 중에 하나에도 미칠 수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은 장차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말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든 산수[筭]와 세력[勢] 따위와
그리고 인과(因果)에도 차별이 있으니
세간에서 자세히 살펴 생각하거나
어떠한 비유를 하더라도 미칠 수 없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복으로써는 앞에서 일컬은 복의 덩어리에 비해 산수나 세력의 종류와 차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인과에 네 가지 차별이 있으며, 이 세간에서 두루 찾아보고 생각해 보아도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비유로도 비교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수로 말미암아 차별을 말한 것은 백분(百分)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혹 산분(算分)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차이를 나타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만 산수라고만 말한 것은, 이것이 곧 통틀어 포섭하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밖에 다른 산수(算數)가 있으니, 혹 세력으로 나뉜다는 것은 그 세력에 차이와 다름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강하고 약한 사람이 일을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혹은 비수(比數)라고 하니 이것은 품류(品類)가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복의 종류는 원래 앞의 복에 대하여 어떤 수로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니, 마치 귀하고 천한 사람을 서로 숫자로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因)이란 것은 그 원인을 밝힌 것이며 과(果)도 또한 서로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저것도 또한 이것의 인(因)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오파니살담(鄔波尼殺曇)을 인(因)자로 번역하였으나 개자(芥子)의 씨와 같은 것으로 송백(松栢)에 비유된다. 이 세간에서는 끝내 그 어떤 비유로도 가히 그 복에 견줄 수 없으니, 이 앞의 복은 이 복보다 감소하므로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아가 어떠한 비유를 한다 해도 미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저 법의 성품과 모양[性相]이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면 중생을 제도하는 사람[能度]도, 제도할 중생[所度]도 모두 없을 터인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유정(有情)들을 해탈시킨다고 하는가?’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뒤의 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장차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계는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선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니
모든 이름은 취(聚)와 함께 하지만
법계를 벗어나서 존재하지도 않네.

‘유정(有情)’이라고 이름한 것은 저 5온(蘊)이 있는 곳에서 5온과 함께하는 것을 말함이며 법계의 밖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 법계의 성품이 평등하니, 그런 까닭에 어떤 한 중생도 부처님께서 제도하여 해탈시킬 대상이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집(我執)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가?
만약 다만 그 5온만을 벗어나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중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약 법집(法執)이 일어난다면
아집(我執)의 허물과 같으니
결정코 유정(有情)들을 해탈시켜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도
곧 집착해서는 안 될 망집(妄執)이라네.

경에 이르기를 “묘생아, 아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여래께서는 집착이 아니라고 설하셨으며, 망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여래께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셨다”고 한 것은, 이것들이 곧 성인의 법을 생겨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마땅히 여래께서 상호(相好)를 원만히 갖추신 분이라고 관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저것은 자성(自性)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며, 이것은 법신의 자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래의 자성법신(自性法身)은 원만하게 갖춘 상호로써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심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러한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의 글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땅히 색(色)의 몸을
여래의 법신(法身)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니
저 전륜성왕(轉輪聖王)과
여래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과보의 복으로 얻은 상호(相好)도 역시 원만하게 갖춘 상호라고 말할 수 있으니, 저 복으로 인하여 이러한 상호를 이루었기 때문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 복의 힘을 바탕으로 보리를 증득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여래의 원만하게 갖춘 상호로써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증득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리라’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므로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땅히 원만하게 갖춘 상호를 가지고”라는 등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곧 원만하게 갖추어진 상호의 과보(果報)는
원만한 복으로 받은 것이 아니니
법신을 불러오게끔 한 것은
방편의 특이한 성품 때문이었네.

참다운 법신은 지혜의 자성이기 때문에 저 복의 체성(體性)과는 같지 않다.
이 두 가타(伽他)2)는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사근(邪勤)3)만 일으키는 사람이니
마땅히 나를 볼 수 없으리라.

마땅히 부처님의 법성(法性)인
곧 도사(導師)의 법신을 보려 하지만
법성의 인식작용은 알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그것을 알기 어렵다 하네.

이 두 게송에서 설한 뜻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하리라.

오직 색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알지 못하리니
이 진여(眞如)의 법신은
인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이 글에 나타난 뜻은 마땅히 색이나 소리, 이 두 가지를 가지고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부[異生]로 말미암아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사람은 사근(邪勤)만 일으킬 뿐’이라는 것은 그러한 이생(異生)은 부질없는 사근만 일으킨다는 말로서 바른 도에 의지하지 않고 나를 찾거나 보려고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법성이 곧 진여(眞如)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복으로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보살의 복업(福業)과 그 과보가 틀림없이 끊어질 것’이라는 의심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다음의 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의 성품이 아무리 회복된다 하더라도 능히 깨달음의 처소를 불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 복은 망실되지 않고
과보(果報)도 끊어지지 않으며
증득한 법인(法忍)도 또한 끊어지지 않으니

번뇌 없음[無垢]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복의 원인을 논(論)하며
이것 밝히기 위해 적절한 비유를 들었으니
저 복은 과보 없는 까닭에
바르게 취하는 것일 뿐 지나치게 취하려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곧 저 지혜의 자량(資糧)이 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어째서 다시 그 복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말했는가?
그것 때문에 “증득한 법인(法忍)도 또한 끊어지지 않으니, 번뇌 없는 경지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복의 원인을 논(論)하기 위해 이렇게 비유를 들어 진술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또 의심을 내어 말하기를 “이미 생멸이 없는 법인을 얻었으면 지혜도 또한 생겨나지 않아야 할 터이니, 보살의 모든 복덕도 당연히 모두 끊어질 것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나타난 복은 끊어져 없어지지 않고 지극히 청정하여, 획득한 복이 이미 많을 것이며 과보(果報)도 뛰어나리라”는 말을 한 것이다.
“생멸이 없는 법인에서 성품 없는 것을 증득한다”고 한 것에 두 가지 성품 없는 것이 있다. 그 두 가지 성품의 본질은 생멸이 없기 때문에 경전에 이르기를 “묘생(妙生)아, 마땅히 바르게 취할 뿐이며, 지나치게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어째서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답하기를 저 복은 과보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체로 존재하는 복은 과보로 인하여 불러들인 것이므로 곧 배척해도 되는 것이니, 그것을 취하는 것은 곧 지나치게 취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바른 길을 벗어나서 험한 길로 가는 것과 같다. 그 복은 과보를 부르지 아니하니, 그런 까닭에 “그 복은 바르게 취할 뿐, 지나치게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었다. 보살의 복진(福津)이 이미 과보의 감응으로 인한 것이 아니면 획득한 과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복은 화신의 과보[化果]를 불러
유정들의 일을 유익하게 하니
그 일은 임의대로 운행할 수 있기에
부처가 되어 모든 곳에 나타난다.

화신은 가고 오는 등의 일이 있지만
정각(正覺)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으니
저 화신은 법계의 처소에서
한결같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불세존께서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지만, 그 여래는 오고 가는 등의 일이 없으므로 “그 일은 임의로 운행되는 것이기에 부처가 되어 모든 곳에 나타난다. 화신은 가고 오는 등의 일이 있으나 정각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을 밝히기 위하여 다음의 글에서 일컫기를 “일찍이 오는 것도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여래라고 이름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여래에게 가고 옴이 있어 달라진다고 하면 그것은 옳지 못하니, 그 항상한 성품은 여여하여 변화하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먼지가 더럽히는 것에 비유한 것은 무엇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며, 무슨 일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답하였다.

저 화신은 법계의 처소에서
한결같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것은 여래께서는 법계의 처소에서 한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각기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닌 성품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밝히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비유를 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작은 먼지로 장차 먹[墨]을 만든다는 말은
비유로 법계를 나타낸 것이다.

또 세계가 검게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비유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기에서 먹을 만드는 일을 논한 것은
번뇌의 멸진(滅盡)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무리[聚]의 성품도 아니고 모이는[集]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이것이 동일한 성품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것이 다 합집(合集)된 성품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각기 다른 성품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검게 된다는 것에 비유한 것은 존재하는 먼지[塵埃]가 너무도 많고 지극히 미세한 성품이어서 한 장소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고, 그 덩어리는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물건이어서 한 가지의 일만도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성품도 아니니, 다 합집(合集)된 것이므로 이것은 따로따로 끊어져 분할될 이치가 없다.
이와 같아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이 법계에서 번뇌의 장애[煩惱障]가 다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한 곳에 머무는 성품도 아니요 또한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성품도 아니다’라는 것은 곧 삼천대천세계를 겸술(兼述)한 것이다. 덩어리의 성품이 아니라느니, 덩어리의 성품이라느니 하는 비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래께서 설하신 것은 덩어리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지극히 미세한 먼지의 모임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만약 그것이 한 덩어리의 물질이어서 이것이 곧 하나라고 한다면 마땅히 지극히 미세한 것이 모여서 된 덩어리라고 이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만약 이것이 한 세계라면 마땅히 삼천대천세계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것은 아마도 덩어리일 것이라고 하여 집착한다. 그래서 여래께서 집착할 일이 아니라고 설하셨다.

“덩어리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데 부질없이 집착하는 까닭에 이것을 덩어리라고 하여 집착하는구나”라고 설하셨으니, 이것은 곧 이 밖에 또 다른 무상정지(無上正智)가 없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또한 ‘무슨 까닭에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무리들은 실제로 덩어리가 없는데 덩어리라고 집착하는가?’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러한 의혹을 없애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덩어리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다만 속된 논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것 등은 무엇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만 속된 말인 줄 알지 못하여
여러 어리석은 이들이 부질없이 집착한다.

“묘생아, 모든 사람은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견(我見) 등을 선설하셨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이 두 가지를 끊었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본래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아집과 법집 두 가지를 말하지만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두 가지를 끊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보리를 증득할 수는 없다고 하니, 이것은 과연 누가 끊으며 누가 얻는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저 두 가지 소견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견해도 곧 제거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런 까닭에 견(見)이니 견이 아니니 하면서
아무 경계도 없는 것에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라고 하는 실체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므로 여래께서 잘못된 견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경계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나라고 집착하는 경계는 원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그런 까닭에 아견(我見)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허망한 분별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이 없는 이치에서 견성(見性)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을 뿐이며, 또한 저 법견(法見)에서도 견성이 없음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저 법이라는 생각에 있어서도 모양이나 성품이 없는 것은 마치 나라는 견해에서의 입장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무슨 뜻으로 이 아견(我見)과 법견(法見)의 두 소견에 견성(見性)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하였다.


이런 미세한 장애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 없애야 한다.

여기에서 밝힌 뜻은 이 아(我)ㆍ법(法)의 두 가지 견해는 곧 견취(見取)이므로 이것을 미세한 장애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견성이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알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의심을 끊어 없앨 수 있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두 가지 지혜[二種智]4)
선정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저것이 제거된다.

세속지[覆俗智] 및 승의지(勝義智)와 이 두 가지가 의지하고 있는 선정으로써 마침내 저 장애가 제거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논하건대 그렇다면 차별이 있는 복은 어느 곳에서 나타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복을 펼쳐서 화신(化身)을 밝히니
무진(無盡)한 복 없는 것이 아니네.

여래가 비록 다시 임의대로 운용하여 널리 화신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저 화신이 선설(宣說)한 바른 법은 곧 무루(無漏)의 복이라서 문득 다함이 없는 기약을 이룬다.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여 바르게 설법해야 하는가?’ 등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여래께서는 스스로 내가 화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실 때에
자신이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으니
스스로 그런 말씀 하시지 않으셨기에
이 말은 진실한 말씀이라네.

이것은 무엇을 진술하기 위한 것인가?
여래께서 비록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선양(宣揚)하여 교화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곧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으니, 이와 같은 말을 하여 올바르게 설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그 설법이 바른 설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가 교화시킨 모든 중생들이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많은 중생들의 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다시는 어떤 법으로도 설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많은 화신(化身)이 되어 끝없는 설법을 하신다면, 왜 그는 다시 열반(涅槃)이 있다고 설하실까?’ 하는 의혹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런 의혹을 풀어주기 위하여
게송[伽他]으로 말하였다.

여래께서 증득하신 열반은
조작해서 된 것도 아니지만 또한 그와 다른 것도 아니다.

모든 여래가 증득한 열반[圓寂]은 조작(造作)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유위(有爲)의 자성은 그 조작에 의한 것처럼 그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비록 열반을 보인 뒤에도 그는 화신으로 나타나 생사(生死)가 똑같다는 이치를 보여 유정(有情)을 이익 되게 한 것이니, 여래의 머무름 없는 열반은 생사(生死)와 열반, 이 두 가지 모두에 머무르지 않음을 밝히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무슨 까닭으로 생사와 같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생사인연(生死因緣)의 일에 머물지 아니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별ㆍ삼눈[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별 등 아홉 가지 일로써 법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니, 아홉 가지 일로 비유함으로써 바른 지혜로 경계를 관찰하게 한 것이다.
어떤 것을 아홉 가지 관찰이라고 하는가?
곧 이것은 아홉 가지로 관찰해야 할 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을 관찰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견상(見相)과 인식작용[識]과
거처[居處]와 몸[身]과 수용(受用)과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별[星宿]처럼 관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 심법(心法)의 바른 지혜는 태양처럼 밝으니 태양이 이미 떠오르면 그 물질은 모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며, ‘인연이 되는 경계의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마치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발단(髮團)5)이 보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허망하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며, 마땅히 그 인식 작용은 마치 등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곧 능의견(能依見)은 마치 등불에서 기름과 같은 존재인 애착(愛着)의 힘으로 인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땅히 거처에 대해서는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곧 기세간(器世間)6)에는 기이한 바탕이 많이 있지만, 그 성품이 부실(不實)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그 몸에 대하여 이슬과 같은 존재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몸이 이 세간에 머무는 시간이 이슬처럼 짧기 때문이며, ‘수용(受用)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물거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그 수용하는 성품이 이 세 가지 일[三事]7)이 합해져서 생겨난 성품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과거에 있었던 모여지고 지어진 일들을 마치 꿈속에 있었던 경계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다만 오직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성품 때문이며, ‘마땅히 현재의 일에 대하여 번개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빠르게 소멸하는 성품 때문이며, ‘마땅히 미래의 실체[體]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종자(種子)와 같은 위치에 있어서 실체가 능히 여러 가지 종자를 포섭하여 갈무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를 가지고 관찰할 때에 어떤 이익이 있으며 어떠한 뛰어난 지혜를 획득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습[相]을 관찰하고
수용과 변천하는 흐름을 관찰한 까닭에
유위(有爲)의 일 가운데에서
번뇌 없이[無垢] 자재(自在)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계와 인식작용을 관찰하기 때문에 곧 모여지고 만들어진 유위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며, 둘째는 기세계의 몸과 작용(作用)하는 것을 관찰하는 까닭에 곧 이것도 그 수용(受用)을 관찰하여 여기에서 저[彼]에게 수용되는 바가 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3세(世)가 차별이 있어 변천한 것임을 관찰한 까닭에 이것은 곧 변천하여 흐르고 머물지 않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기 때문에 문득 모든 유위법 가운데에서 장애(障礙)가 없음을 획득하여 마음대로 자재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생사(生死)의 세계에 거한다 하더라도 번뇌[塵勞]에 더럽혀지지 않아서 그 지혜가 원적회신(圓寂灰燼)함을 증득하리니, 어찌 그 비(悲)를 맛볼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모든 부처님의 희유(希有)한 법과
다라니 구절의 매우 심오한 뜻으로 말미암아
존귀한 이를 따라 자신의 뜻을 결정하고 널리 연설하여
복을 획득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빨리 청정케 하리라.
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略明般若末後一頌讚述)

당(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 지음
의정(義淨)은 무착보살(無著菩薩)의 반야송석(般若頌釋) 반야송석(般若頌釋) : 인도의 무착보살(無著菩薩)이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에 붙인 게송과 세친보살(世親菩薩)이 무착보살(無著菩薩)의 게송[般若頌]에 해석을 붙인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을 가리킨다.을 번역하면서, 무착 대사(大士)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아홉 가지 비유[九喻] 구유(九喩)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3권에,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별ㆍ눈의 백태[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云一切有爲法,如星、瞖、燈、幻、露、泡、夢、電、雲,應作如是觀者]”라고 나와 있다.로 밝힌 것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유로 밝힌 글의 운치는 너무나 그윽하고 깊었으며, 담긴 불법의 의미도 지극히 심오하면서 명료한 것이었으니, 대사 자신이 환희지[極喜] 극희(極喜) : 보살의 수행단계를 10가지[十地]로 나눈 것 중 첫 번째 경지에 해당하며, 보살이 수행을 하다가 깨달음의 눈이 뜨여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말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밝은 지혜를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서역(西域)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착 보살(無著菩薩)은 옛날에 도사다천(覩史多天) 도사다천(覩史多天) : 도솔천을 말한다. 이곳은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제4천으로,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돼 있고, 내원에는 미륵 보살이 수행중이라고 한다. 에 있는 미륵 보살[慈氏]이 머무르는 곳에서 미륵 보살에게 직접 이 80게송[八十頌]을 받아서, 반야(般若)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풀고 유가(瑜伽)의 근본 이치[宗理]에 따라서 유식(唯識)의 의미를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치 태양[金烏]이 동쪽 바다(扶桑) 부상(扶桑) :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 또는 그 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이듯 불법의 가르침이 인도(印度)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달[玉兔]이 눈 덮인 고개를 환히 비추듯이 불법의 진리가 중국[神州]에까지 환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은 인도[西方]에서도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기원을 살펴보면 무착 보살의 이 게송이 가장 앞선 것으로, 세친 대사(世親大士)가 직접 무착 보살을 위해 이 게송을 해석한 것이다. 비록 중국[神州]에서도 이것을 번역하였지만, 본래의 뜻을 나타내는 데에 모자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 의정이 다시 직접 이 경의 강론에서 본래의 의미를 궁구하고, 거듭 이 경의 오묘한 뜻을 자세히 살펴서 본래의 뜻에 부합되게 본경(本經)을 다시 번역하였다.
그리고 세친 보살(世親菩薩)은 다시 반야칠문의석(般若七門義釋)을 지었고, 나란타사(那爛陀寺) 나란타사(那爛陀寺) : 고대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북쪽에 인접해 있던 사원이다. 쿠마라굽타(kumāragupta) 1세가 창건한 이후, 역대 왕들이 증축하여 인도 불교의 중심지가 된 사원이다.에서 그 의론을 널리 전하였다. 그러나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 담겨있는 이치[義府] 의부(義府) : 원래는 시경이나 서경에 담겨있는 의미나 이치를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에 담긴 이치로 번역하였다.가 너무나 깊고 깊어서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월(師子月) 법사(法師)가 이 경의 논석(論釋)을 지었고, 또 동인도(東印度) 출신 다문속사(多聞俗士)로 그 이름이 월관(月官)인 학승이 여러 학파의 해석을 두루 검토하여 원문에는 검(撿)으로 되어 있는데 검(檢)으로 해석하였다. 의석(義釋)을 지었다. 이들의 해석은 그 의미가 삼성(三性) 삼성(三性) : 의식에 형성되어 있는 현상의 세 가지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온갖 분별하는 마음으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을 가리키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온갖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인식 작용을 말하며,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을 가리킨다.의 관점에서는 부합하지만, 중관(中觀) 중관(中觀) : 용수(龍樹)가 원시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緣起)설을 공(空)의 입장에서 심화시켜 내세운 사상이다. 원시불교의 연기설에서는, 현상 세계는 연기의 이법(理法)에 따라 생기거나 사멸하거나 하는 개물(個物)의 집합에 지나지 않지만, 연기의 이법 자체는 불변의 법칙으로서 전제되었다. 하지만 용수는 연기의 이법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공(空)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입장은 반야개공(般若皆空)의 사고 방식에 요약되어 있다. 즉 반야란 절대지(絶對知)이며 모든 존재에 그 자체의 본질을 상정하여 그것을 실체로 보는 고정적인 인식을 부정하는 지혜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는 인간의 관념 세계와 사물의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을 상대적인 관계성(空性)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과는 맞지 않았다. 다시 또 다른 해석이 있지만 이 해석도 용수[龍猛]의 견해는 따랐지만, 유가(瑜伽) 유가(瑜伽) : 산스크리트어 yoga의 음사로, 상응(相應)이라 번역한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바른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면,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유가(瑜伽)는 실재[真]는 존재하고 현상[俗]은 존재하지 않다고 하여, 삼성(三性)을 근본으로 삼는 입장이고, 중관은 실재[真]는 존재하지 않고 현상[俗]은 존재한다고 하여, 속제와 진제[二諦] 이제(二諦) : 용수가 쓴 『중론(中論)』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세속적 입장에서 본 진리, 즉 속제(俗諦)와 궁극적 입장에서 본 진리, 즉 진제(眞諦)를 말한다.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우리는 ‘물'과 ‘수증기'라는 이름으로 구획하고 고착화시킨 실체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차원의 진리 곧 속제(俗諦)이다. 그러나 이 속제는 임시적, 방편적 이름이요, 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상 또한 임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조건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찰나적 변화만이 존재할 뿐, 물이라든가 수증기라고 규정할 만한 대상은 경험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현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연기적 관점에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가 진제(眞諦)이다. 그러나 속제와 진제는 상호 의존적이다. 언어와 사유로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眞諦]를 가리키는 수단이며 기호가, 곧 속제이기 때문이다. 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이다. 반야(般若)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큰 뿌리이니, 유가와 중관의 두 관점을 모두 담고 있다.
그런데 중국[東夏]에서 불법이 남(南)과 북(北)으로 나뉘게 되고, 인도[西方]에서도 의론[義]이 유(有) 유(有) : 현상계에 나타나는 만물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와 공(空) 공(空) : 현상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 불법의 이치를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게 되고, 불법의 이치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화합하는 것도 없어져서,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부처님의 가르침[聖旨]을 해석하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고 그 해석도 서로 어긋나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末後一頌]에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有爲法]은 별ㆍ눈의 백태[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게송을 해석한 글이 그 의미가 너무나 깊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 깊은 의미가 오히려 가려질 것을 근심하여, 떠오르는 대로 아홉 개의 현상에 아홉 개의 비유[二九事喻] 원문에 환(丸)으로 되어 있는데 구(九)로 고쳐 번역하였다.를 들어, 열여덟 개의 글을 짓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이것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어 정신을 갉아먹는 번뇌를 없애고, 원문에는 망(网)으로 되어 있는데 망(罔)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야광주[夜光]같은 이 가르침을 직접 후대에 전해주어 낯선 보배에 칼을 잡는 어리석은 의혹이 없기를 바라노라. 이 내용은 한(漢)나라 때 추양(鄒陽)이 양왕(梁王)에게 올린 글에 유래한 것이다. “명월주나 야광벽 같은 보배를 어두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던져주면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까닭 없이 보배가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明月之珠、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라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아무리 훌륭한 보배라도 갑자기 접하게 되면 그 보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보는 것[見] 등의 아홉 가지 현상[九事]은 곧 삶과 죽음의 모든 세계[區寰]를 가리키는 것이고, 무착 대사[大士]는 이것들을 별 등의 비유로 밝힌 것이니, 이런 까닭에 무착 대사는 삶과 죽음의 현상 세계에 머물면서도 그 현상 세계에는 구속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지혜는 삶과 죽음의 경계[生津]에 머무르지 않았으니, 붉은 연꽃[紅蓮]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핀 것에 견줄 만하고, 자비는 깨달음의 세계[圓寂]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새하얀 옥돌[白玉]이 중생의 세계에 잠긴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대사는 열반(涅槃)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답하며, 이 아홉 가지의 비유를 전한 것이다.
보는 것을 풀이함[論見]보는 것을 깜깜한 밤에 반짝이는 별과 같은 헛된 집착[妄執]이라고 본 것이다.
마음을 보니 칠흑 같은 밤 풍경이고 헛된 집착 어둠에 퍼진 지 오래이나정토 향한 세 마음 삼심(三心) : 지성심(至誠心), 심심(深心), 회향발원심(迴向發願心)의 세 가지 마음을 가리킨다. 지성심은 정토(淨土)를 진실 되게 원하는 마음이고, 심심은 정토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며, 회향발원심은 공덕(功德)을 닦아 정토에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일으키니 허황된 집착들 정토를 향한 세 가지 마음이 일어나 마음속 망집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빛이 어둠을 비추어 어둠이 사라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두 사라지네.
별로 비유함[喻星]별이 밤에는 반짝이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느릅나무에 걸린 별들 밤하늘 수놓으니버드나무의 풀빛에도 밝은 빛 비치네천 가지 별빛이 찬란히 반짝거려도하루아침 뜨는 해에 모두 사라지리.
인식 대상[境] 경(境) :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논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에서는 경(境)을 경상(境相)으로 풀이했는데, 경상(境相)은 분별상(分別相)이다. 이것은 인연에 따라 온갖 분별로써 마음속에 지어낸 허구적 대상을 가리킨다.을 풀이함[論境]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백태가 낀 눈으로 헛되게 허공에 그려진 꽃[空花]을 보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분별로 인식한 세계는 장애일 뿐이니백태가 낀 눈으로 헛것을 본 것이네그러나 반야의 참된 지혜의 힘은다시는 미혹의 꽃을 보지 않게 하리.
눈에 낀 백태로 비유함[喻瞖]눈에 낀 백태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비유하여 애초에 망집(妄執)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만물의 실재 태허(太虛) : 천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형(無形)의 도(道)란 뜻이다.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나오는 말로, 역(易)의 태극(太極)과 거의 같은 뜻이다.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라 불렀다. 는 본래 막힘이 없고청정한 삼매 경성(境性) : 마음이 하나로 모여 어지럽지 않고 고요해진 상태인 삼매(三昧)를 가리킨다.에는 백태가 없었네그러나 백태가 낀 눈으로 바라보니결국 허공의 꽃을 보게 된 것이네.
인식 작용을 풀이함[論識]인식 작용이 마치 등불이 계속 꺼지지 않고 일렁이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감각의 작용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헛된 인식 다함이 없이 일어나네죽을 자리 머물러 움직이지 못하니진실로 인식 작용 때문이로구나.
등불로 비유함[喻燈]등불이 심지를 태워 불을 밝히는 것을 비유로 인식작용도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그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붙여진 등불 끝없이 일렁이고환한 불빛 한없이 퍼져가네심지를 태워 밤을 밝히니진실로 애착의 기름 때문이구나.
중생이 거주하는 세계를 풀이함[論界]허깨비를 빌려 중생이 거주하는 세계가 업(業)이 생겨나서 모였다가 사라지는 세계임을 설명한 것이다.
업공(業功)의 장엄한 처소 아름다우나미혹으로 여러 모습 생겨난 것뿐이네집착하여 만들어 낸 것 실재가 아니니중생세계 완전히 실체 없는 허깨비라네.
허깨비로 비유함[喻幻]허깨비로 비유함으로 중생세계가 거짓 장인이 생겨나서 끝없이 만든 세계임을 나타낸 것이다.
마술사의 솜씨가 교묘하여헛되게 여러 형상을 만드네만든 것들 진실로 실재가 아니니보이는 것 모두 허깨비일 뿐이네.
육신을 풀이함[論身] 육신을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여, 육신이 오래도록 일정한 곳에 머물 수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
던져지듯 산자락 끝에 태어난 몸잠시 맡은 목숨 강물에 빠져 죽네머문 곳에 이리저리 밤바람 부니오히려 풀무의 세찬 바람 같네
이슬로 비유함[喻露]이슬로 비유함으로 육신이 이슬처럼 바람을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슬방울 풀잎에 머물다가 떨어져 꽃 속에 자리 잡았지만숲을 흔드는 밤바람 구슬피 울면이슬도 바람 따라 쓸쓸히 사라지네.
감각의 작용을 풀이함[論受用] 물거품처럼 감각의 작용은 오근[根] 근(根) : 근(根, indriya)이란 ‘인드라 신에 상응하는 힘’을 뜻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며 두드러지게 뛰어난 힘을 가리킨다. 인간에게는 오근(五根)이 있는 데, 곧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식(識)이 발생하게 되는 근거로서, 안근(眼根, cakṣurindriya)·이근(耳根, śrotrendriya)·비근(鼻根, ghrāṇendriya)·설근(舌根, jihvendriya)·신근(身根, kāyendriya)을 말한다."⋅인식 대상[境]⋅인식 작용[識]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임을 진술한 것이다.
세상에서 오근에 여러 형상 쌓이면이 때문에 가지가지 생각 일어나네진실로 세 가지 만나 서로 작용하니드디어 세 감각[三受] 삼수(三受) : 내부의 감각기능과 외부의 감각대상이 대응하면서 느끼는 세 가지 감각을 말한다. 첫째는 괴로운 느낌[苦受], 둘째는 즐거운 느낌[樂受], 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이 생겨났네 
물거품에 비유함[喻泡]물거품으로 비유하여, 감각의 작용이 마치 물방울들이 잇달아 물결을 일으키듯 맞물려 작용함을 나타낸 것이다.
잔잔한 못에 수면은 고요한데물방울 떨어지자 물결이 출렁이네 원문에는 간(看)으로 되어 있는 데, 유(有)로 고쳐서 번역하였다.이렇듯 세 가지 것들 합쳐지자 삼사(三事) : 오근[根], 인식 대상[境], 인식작용[識],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만 가지 물거품 생겨나게 되었네.

과거를 풀이함[論過] 과거가 꿈과 같이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 인식할 대상이 없지만 깊은 생각과 뜻은 여전히 이어져있네이렇듯 사방 한 치 마음 안에서오히려 아홉 성의 위용이 드러나네.
꿈에 비유함[喻夢]꿈에 비유함으로 과거가 생각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낮엔 여러 인연 대상을 만들고  밤엔 기억과 생각으로 이어지니마침내는 잠자는 동안에도  더욱 예전 모습 생각해내네.
현재를 풀이함[論現] 현재가 번개와 같다고 하여, 잠깐 동안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온갖 형상 번개칠 때 드러난 들과 같고현상의 네 모습 사상(四相) :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의 네 가지 모습을 말한다. 첫째는 생상(生相)으로, 여러 인연이 모여 생기는 모습이고, 둘째는 주상(住相)으로, 머무는 모습이며, 셋째는 이상(異相)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고, 넷째는 멸상(滅相)으로, 인연이 흩어져 소멸하는 모습이다. 번쩍이는 빛 같으나어찌 찰나 한순간만 있음을 알았겠는가삼상(三常) 삼상(三常) : 여기서는 인연으로 생긴 모든 현상이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이 있다는 건 그릇된 생각일세.
번개로 비유함[喻電]번개로 비유함으로 현재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천둥소리 사방 들에 울리고  내려친 번개 수많은 빛 흩뿌리네만물은 찰나 원문에 방나(㧍那)로 되어 있으나 찰나(刹那)로 고쳐 번역하였다. 한순간에만 존재하니만물의 본체는 영원한 게 아니네.
미래를 풀이함[論未]미래는 구름과 같아서 아뢰야식[本識] 본식(本識) :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이다. 아뢰야식은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 의식으로, 모든 종자(種子)를 담고 주관할 수 있다.이 미래의 종자를 지닐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아뢰야식은 시작도 끝도 없어일어난 의념 계속해서 이어지니진실로 탐욕과 애착 때문이구나종자를 지니고도 정녕 의심하는가
구름으로 비유함[喻雲]구름으로 비유함으로 미래의 종자가 반드시 부처의 윤택을 입을 것을 나타낸 것이다
두둥실 두둥실 구름들 모여들어아름답고 밝은 모습으로 떠가네빛처럼 영화로워 사랑할 만하니  윤택을 입을 것 의심할 수 없네
다시 한마디 말로 위에서 언급한 현상과 비유를 각각 정리하고 그 핵심 의미를 뽑아내어, 하나의 글로 지었다.
별빛이 사라지듯 집착을 지혜로 없애고눈의 백태 제거하듯 미혹의 허상을 없애라등불의 불꽃처럼 인식함이 생각을 일으키니세상은 생각이 만든 것이라 꿈속 수레 같네.
이 한 몸은 잠시 나타나는 아침 이슬과 같고 세 감각은 홀연히 생겨나는 물거품처럼 허망하네
과거의 추억은 공허한 꿈을 꾸는 것일뿐이요현재의 집착은 깜빡이는 번개를 좇는 격이네 비를 뿌릴 구름 중에 머문 것을 이미 아니미래 종자는 항상 아뢰야식에 의지해 있구나 .
확히 했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잘 살피면 모두 이와 같으니  지혜로운 자는 당연히 열반[真常]에 힘써야 하네열반[真常]은 실로 깨닫기 어려운 것 아니니눈앞에서도 원만히 이룰 수 있는 것이네.
두 몸이 공임을 알면 뱀과 노끈의 구별도 사라지고진제도 속제도 없음을 깨달으면 거울에 달도 매다니거울에 달도 매달 때 진실로 모든 근심 사라지고다른 인연을 만들어서 비로소 복된 곳에 태어나네.
유식(唯識)은 초심자가 잠시잠깐 의지하는 것이요 진여(眞如)는 깨달은 뒤에도 오히려 기댈 수 없네기댈 것 없으니 곧 반야(般若)이고진속을 초월하니 참과 거짓도 없네  피안의 복락은 나룻배를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에 달렸으며자비와 지혜는 중생을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네.약명반야말후일송찬술(略明般若末後一頌讚述)계묘(癸卯)년 고려국(高麗國)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조칙을 받들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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