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07 불교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3권

by Kay/케이 2023. 5. 22.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3

 

능가아발다라보경 제3권


송 구나발타라 한역
최윤옥 번역


3.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

이때 세존께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뜻대로 나타나는 몸[意生身]의 통상(通相)에 대한 설명을 하겠으니,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뜻대로 나타나는 몸에는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삼매락정수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三昧樂正受意生身], 법자성의 성품을 깨달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覺法自性性意生身], 여러 종류가 함께 생기지만 짓는 행이 없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種種俱生無作行意生身]이다. 수행자가 초지(初地)에서부터 점점 위로 나아가는 모습을 확실히 알면 이 세 가지 몸을 얻는다.
대혜야, 삼매락정수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란 무엇인가? 제3지ㆍ제4지ㆍ제5지의 삼매락정수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마음이 적정하게 안주하여 마음의 바다에 파도의 식상(識相)이 생기지 않고,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인 줄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를 삼매락정수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라고 한다.
대혜야, 법자성(法自性)의 성품을 깨달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란 무엇인가? 제8지에서 법이 환(幻) 등과 같아서 모든 것이 무소유(無所有)이며, 몸과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고 바뀐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이다. 묘한 꽃으로 장엄하듯 여환삼매(如幻三昧)와 그 외 삼매문(三昧門)의 무량한 모습과 힘과 자재함과 밝음을 얻고, 환ㆍ꿈ㆍ물에 비친 달ㆍ거울 속 형상처럼 빠르고 뜻과 일치되며, 만드는 것도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또한 만들고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색의 모든 부분을 갖추어 장엄하고, 모든 불국토와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들어가니, 이는 자성법(自性法)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를 법자성(法自性)의 성을 깨달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라고 한다.
대혜야, 여러 종류가 함께 생기지만 짓는 행이 없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란 무엇인가? 모든 불법의 연(緣)을 깨달아 저절로 즐거운 모습을 얻는 것을 말하니, 이를 여러 종류가 함께 생기지만 짓는 행이 없음으로써 뜻대로 나타내는 몸이라고 한다. 대혜야, 이 세 가지 몸의 모습을 관찰해 깨달아야 할 것이니,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대승(大乘)을 타는 것이 아니고
말도 아니고 또한 문자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경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하연(摩訶衍)을 타면
삼마제(三摩提)가 자재하며
뜻대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몸이
꽃으로 장엄하듯 자재하리라.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남자와 여인이 다섯 가지 무간업(無間業)을 행하고도 무택지옥(無擇地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 남자나 여인이 다섯 가지 무간업을 행하고도 무택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그대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이 다섯 가지 무간업인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 어머니를 죽이는 것, 아라한을 해치는 것, 승단을 깨뜨리는 것, 악한 마음으로 부처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다.
대혜야, 무엇이 중생의 어머니인가? 애착[愛]하여 다시 생을 받아 태어나면 탐욕과 기쁨이 함께하니, 이는 마치 어머니를 연(緣)하여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무명(無明)이라는 아버지가 연이 되어 입(入)의 취락(聚落)이 생긴다. 이 두 가지 근본을 끊는 것을 부모를 해치는 것이라 한다. 저 모든 번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마치 쥐가 독(毒)을 내뿜는 것과 같으며 구경(究竟)에 모든 법을 끊으면, 이를 아라한을 해치는 것이라 한다. 무엇이 승단을 깨뜨리는 것인가? 다른 모습의 모든 음(陰)이 화합하여 쌓인 것을 구경에 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승단을 깨뜨리는 것이라 한다.
대혜야, 바깥 경계의 자상과 공상이 자심의 현량인 7식신(識身)인 줄 깨닫지 못하고
번뇌가 없는 3해탈문(解脫門)으로써 악한 생각을 일으켜 저 일곱 가지 식(識)의 부처를 끊으니, 이를 악한 마음으로 부처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라 한다. 어떤 남자나 여인이 이러한 행위를 끊임없이[無間] 하는 것을 다섯 가지 무간사(無間事)라고 하고, 또 무간업(無間業)이라고도 한다.
또 대혜야, 외무간(外無間)이 있다. 지금 연설할 것이니, 그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이 이 뜻을 듣게 되면 미래의 세상에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무간인가? 앞에서 말한 무간을 말한다.
만약 이것을 행한 사람이 3해탈문에서 각각의 무간법들을 얻지 못했다면, 이러한 수행법을 버리고 성문의 교화하는 신력[聲聞化神力]ㆍ보살의 교화하는 신력[菩薩化神力]ㆍ여래의 교화하는 신력[如來化神力] 등 다른 사람의 교화하는 신력으로 무간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머지 무간죄(無間罪)를 지으려는 사람을 위해 의심하고 후회하는 허물을 없애고, 권하여 발심하게 하기 위해 신통력으로 무간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늘 무간사(無間事)를 짓기만 했다면 무간 등의 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심의 현량임을 깨달아 신재(身財)의 망상을 벗어나고, 나[我]와 나의 것[我所]으로 받아들인 것을 벗어나는 경우는 제외한다. 혹 때로는 선지식을 만나 다른 세계에서 계속 이어지던 망상을 해탈하기도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탐욕과 애착을 어머니라 하고
무명을 아버지라고 한다.
경계와 식(識)을 깨닫는 것을 부처라 하고
모든 번뇌는 아라한이라 한다.

음(陰)이 모인 것을 승(僧)이라 하며
계속해서 순서대로 끊으면
이를 다섯 가지 무간이라 하니
무택지옥(無擇地獄)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부처님의 지각(知覺)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어떤 것들이 부처님의 지각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깨닫고, 두 가지 장애를 명료하게 알며, 두 가지 죽음을 여의고, 두 가지의 번뇌를 끊는 것이다. 이를 부처의 지각이라고 한다.
성문이나 연각도 이 법을 얻으면 역시 부처라고 할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1승을 설하였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두 가지 무아(無我)를 잘 알고
두 가지 장애와 번뇌가 끊어져
두 가지 죽음을 영원히 여의는 것
이를 부처의 지각(知覺)이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 세존께서는 대중 가운데서 널리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과거의 모든 부처였다’고 하시며, ‘갖가지로 태어났었으니, 나는 그때 만타(漫陀)전륜성왕이었고,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큰 코끼리였고, 앵무새였고, 석제환인(釋提桓因)이었고, 선안선인(善眼仙人)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등, 이와 같은 백천 가지 생애에 대해 경에서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네 가지가 같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대중 가운데서 ‘내가 그때 구류손불(拘留孫佛)이었고, 구나함모니불(鉤那含牟尼佛)이었으며, 가섭불(迦葉佛)이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이 같은 네 가지인가? 글자[字]가 같고, 말[語]이 같고, 법[法]이 같고, 몸[身]이 같은 것이다. 이를 네 가지 같은 것이라고 하며, 네 가지가 같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대중 가운데서 이와 같이 선언한 것이다.
무엇이 글자가 같다는 것인가? 만일 어떤 글자가 나를 가리켜서 부처라고 했다면, 다른 글자도 역시 모든 부처를 가리킬 것이니, 다른 글자의 자성(自性)은 차별이 없다. 이를 글자가 같은 것이라 한다. 무엇이 말이 같다는 것인가? 내가 64종류의 범음(梵音)으로 된 언어의 모습에 의해서 생긴 것처럼, 저 모든 여래ㆍ응공ㆍ등정각 역시 이와 같아 64종류의 범음으로 된 언어의 모습에 의해 생겼다. 더함도 덜함도 없어 차별이 없는 것이, 마치 가릉빈가의 범음 소리의 성품과 같다.
무엇이 몸이 같다는 것인가? 나와 모든 부처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의 훌륭한 모습에 있어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하니, 저 모든 취(趣)의 서로 다른 중생들을 조복시키기 위해
온갖 다른 색신을 나타내 보이는 경우는 제외한다. 이를 몸이 같은 것이라 한다. 무엇이 법이 같다는 것인가? 나와 저 부처 모두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얻은 것이니, 간략히 말하면 장애 없는 불법(佛法)의 지혜이다. 이것을 네 가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대중 가운데서 그렇게 선언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가섭불과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이 바로 나이다.
이는 네 가지가 같기 때문이니
내가 불자를 위해 말한 것이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느 날 밤에 최고의 정각[最正覺]을 얻었고 어느 날 밤에 열반에 들어가는데, 그 중간에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말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부처의 말이라고 하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대혜가 이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께서는 왜 ‘부처의 말이라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가지 법으로 인해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무엇이 두 가지 법인가? 자신을 연하여 얻는 법[緣自得法]과 본래 머무는 법[本住法]을 말한다. 이를 두 가지 법이라고 하니, 이 두 가지 법으로 인해 내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무엇이 자신을 연하여 얻는 법인가? 만약 저 여래가 얻은 것이면 나도 역시 얻어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다. 자신을 연하여 얻은 법은 구경의 경계로서 언설망상(言說妄想)을 벗어나고, 두 가지 문자를 벗어난 것이다. 무엇이 본래 머무는 법인가? 옛 성인의 도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금이나 은 등의 성품과 같아 법계에 항상 머무르니,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세상에 출현하지 않든지 간에 법계에 항상 머문다. 만일 그곳으로 향한다면 도(道)를 이루게 되리라. 이는 마치 사람이 광야(曠野)를 지나가다가 중간에 오래된 성(城)을 향해 나있는 평탄하고 곧은 길을 보고는 곧 그 길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 마음껏 즐기는 것과 같다.
대혜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 사람이 이 길과 성안에 있는 온갖 즐거움을 만들었느냐?”
대혜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와 과거의 모든 부처가 법계에 항상 머무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내가 어느 날 밤에 열반에 드는데 그 중간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말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날 밤에 도(道)를 이루었고
어느 날 밤에 이르러 열반에 드는데
그 중간에
나는 전혀 한 말이 없다.

스스로 얻은 법에 머물기에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니
저 부처들과 나는
어떤 차별도 없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법의 있고 없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이 있다거나 없다는 모습을 벗어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들을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의지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있음[有]에 의지하고 없음[無]에 의지한다. 또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탐욕의 견해에 떨어져 상(相)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혜야, 세상이 있음[有]에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고 있지 않음[不有]이 아니며, 있음에서 생기는 것이고 없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혜야, 저들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세상에 인(因)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혜야, 세상이 없음[無]에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을 받아들인 뒤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망상으로 계착하는 것이다. 대혜야, 성품이 있다는 견해를 취하지 않으면 성품과 상(相)이 적정해진다. 따라서 모든 여래와
성문과 연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을 취해 있다거나 없다고 하지 않는다. 대혜야, 이 중에서 누가 무너뜨리는 자[壞者]이냐?”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을 취하고, 뒤에 다시 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네가 이와 같이 이해하는구나. 대혜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계착하는 사람만 ‘무너뜨리는 자’가 아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부처도 역시 무너뜨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안과 밖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번뇌의 성품이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혜야, 탐욕과 번뇌와 어리석음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얻을 수 없으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은 몸[身]이 없기 때문이며, 취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와 성문과 연각은 이 무너뜨리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와 성문과 연각은 자성해탈(自性解脫)하기 때문이며, 얽어매는 것과 얽어매는 인(因)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얽어매는 주체가 있다면 반드시 얽매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얽어매는 인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무너뜨리는 자를 ‘무소유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차라리 수미산과 같은 인견(人見)을 취할지언정 무소유(無所有)라는 증상만(增上慢)으로 공견(空見)을 일으키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무소유를 말하는 증상만인을 무너뜨리는 자라고 한다.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견해에 떨어져 이를 희망하며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줄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의 성품이 무상(無常)하여 찰나마다 전전하며 무너지는 것을 보며, 음(陰)ㆍ계(界)ㆍ입(入)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 변하고 없어지는 것을 보며, 문자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 분별하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자’라고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있음과 없음은 두 극단이며
나아가 마음의 경계이니
이 경계를 깨끗이 없애면
평등한 마음 적멸(寂滅)하리라.

경계의 성품을 취함이 없으면
없어지지만 무소유(無所有)는 아니니
있는 그대로가 모두 여여(如如)라
현성(賢聖)의 경계와 같다.

종자가 없이 생김이 있고
생긴 후에 다시 없어진다고들 하나
인연으로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니
나의 교법에도 머물지 말라.


외도(外道)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나[我]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도 아니지만
인연이 모여 일어난 것이니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누가 인연이 모여 있다 하고
또 없다고 말하는가.
사견(邪見)으로 생기는 법을 논하며
망상으로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한다.

생기는 것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음을 알아
세상이 다 공적(空寂)함을 관찰하면
있다 없다 두 가지를 함께 벗어나리라.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와 모든 보살들을 위해 종을 통달한 모습[宗通相]을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종을 통달한 모습을 잘 분별해 주신다면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들은 이 모습에 통달할 것이며, 이 모습에 통달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각(覺)이나 상(想)이나 여러 악마[魔]나 외도(外道)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성문과 연각과 보살에게 두 가지 통달한 모습이 있으니, 종을 통달한 것[宗通]과 설법을 통달한 것[說通]이다. 대혜야, 종을 통달한 것은 자신에게 의지하여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는 모습[勝進相]을 얻어 말과 문자의 망상을 여의고, 무루계(無漏界)와 자각지(自覺地)와 자상(自相)으로 나아가 모든 허망한 각(覺)과 상(想)을 벗어나고 모든 외도와 많은 악마를 항복받으며, 자각(自覺)에 의지하여 광명이 비추는 곳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를 종을 통달한 모습이라 한다.
무엇이 설법을 통달한 모습인가? 9부(部)의 온갖 교법(敎法)을 설명하여 다름과 다르지 않음, 있음과 없음 등의 모습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니,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묘한 방편으로 설법함으로써 중생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를 설법을 통달한 모습이라 한다.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의 모습은
스스로 깨닫고 남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이니
이를 보아 잘 분별하면
어떤 각(覺)과 상(想)도 따르지 않으리라.

어리석은 사람의 망상처럼
진실한 성품이 있는 것 아니니

어찌하여 욕심을 일으켜
성품이 아닌 것[非性]을 해탈이라 하는가.

모든 유위(有爲)와
생멸(生滅) 등의 상속을 관찰하고는
두 가지 견해만 증장시키면
전도되어 아는 것이 없으리라.

이 하나의 법이 곧 진리이며
무죄(無罪)가 열반이 되니
세상이 망상이어서
환(幻)과 꿈과 파초와 같음을 관찰하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으나
실(實)은 그런 사람이 없고
애착에서 모든 음(陰)이 생기니
존재하는 것은 모두 환과 같고 꿈과 같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진실하지 못한 망상은 어떻게 생기며, 어떤 법들을 진실하지 못한 망상이라고 하며, 어떤 법들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게 망상을 부리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래에게 이와 같은 뜻을 물으니, 이는 많은 이익과 많은 안락이 있고 세상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말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야, 갖가지 뜻에 대해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계착하여 망상이 생긴다. 대혜야,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여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없다는 견해에 떨어져 외도의 견해를 증장시키니, 망상과 습기로 바깥 경계의 갖가지 뜻에 계착하여 심(心)ㆍ심수(心數)ㆍ나[我]ㆍ나의 것[我所]에서 생겼다고 망상으로 계착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갖가지 뜻에 대해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계착하여 망상이 생기며,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여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없다는 견해에 떨어져 외도의 견해를 증장시키며, 망상과 습기로 바깥 경계의 갖가지 뜻에 계착하여 심과 심수, 나와 나의 것에서 생겼다고 망상으로 계착한다면, 바깥의 온갖 사물의 모습[種種義相]은 유무(有無)의 모습[相]에 떨어진 것이니,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벗어나고 견상(見相)도 벗어나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일의(第一義)도 이와 같아서 양한분(量限分)ㆍ비유분(譬喩分)ㆍ인상분(因相分)을 벗어나야 하는데, 세존께서는 왜 한쪽의 망상은 진실하지 않은 이치의 갖가지 성품에 계착하여 생긴다고 하시고, 제일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은 망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세존의 말씀은 잘못된 인(因)으로 그릇된 의견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까? 한곳에서는 생긴다 하시고 한곳에서는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망상이 한곳에서는 생기고 한곳에서는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망상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깥 경계로 나타나는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이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는다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
대혜야, 내가 말할 것은, 나머지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기 마음의 갖가지 망상 때문에 사업(事業)이 앞에 나타나면 갖가지 망상으로 성품과 상(相)의 계착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범부가 나와 나의 것이라고 계착하는 견해를 벗어나고, 짓고 지어진다는 인연의 허물을 벗어나며, 자기 망상심(妄想心)의 현량과 몸과 마음[身心]의 엇바뀜[轉變]을 깨달아서 구경에 모든 지위와 여래의 자각 경계를 분명히 알아 다섯 가지 법의 자성사(自性事)를 보는 망상을 벗어나겠는가?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망상은 온갖 진실하지 않은 뜻에 계착하여 생기므로, 진실한 뜻을 알면 해탈을 얻고 온갖 망상이 끊어지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인(因)과 연(緣)
이것으로 세상이 생기나
망상으로 네 구(句)에 집착하여
내가 깨우쳐 준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생김이 있는 것[有生] 아니고
또한 생김이 없는 것[無生]도 아니다.
생김이 있으면서 없음[有無生]도 따르지 않고
또한 있으면서 없음을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과 연을
어찌하여 어리석게 분별하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보면
마음을 돌이켜 무아(無我)를 얻는다.
모든 성품은 생기는 것이 아니니
연(緣)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연(緣)으로 지어진 것
지어진 것은 스스로 있는 것 아니며
일[事]에서는 저절로 일이 생기지 못하니
두 가지 일이 함께 있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의 허물이 없는 까닭에

얻을 만한 성품이 있는 것 아니니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여
반연(攀緣)과 소연(所緣)을 벗어나라.

무심(無心)한 심량(心量)이기에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심량이란 자성처(自性處)이니
연(緣)과 성품, 둘을 다 벗어나
성품이 구경에 묘하고 청정한 것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세제(世諦)로써 나[我]를 시설하였으나
이것은 실다운 사체(事體)가 없나니
모든 음(陰)과 음을 시설하나
사실[事]이 없는 것도 그러하다.

네 가지 평등한 것이 있으니
모습[相]과 인성(因性)이 생기는 것
세 번째는 무아(無我) 등
네 번째는 닦음과 닦는 자.

망상과 습기가 돌고 돌아
온갖 마음이 생기고
밖으로 경계가 나타나니
이것이 세속(世俗)의 심량(心量)이다.

밖으로 나타나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저 온갖 것을 보고
신재(身財)를 세우는 걸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모든 견해를 벗어나고
생각과 생각하는 대상을 벗어나
얻음도 없고 생김도 없는 것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성품과 성품 아님을 모두 벗어나면
그것이 심해탈(心解脫)이니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여여(如如)와 공(空)의 세계
열반(涅槃)과 법계(法界)
갖가지 뜻대로 나타내는 몸[意生身]을
나는 심량이라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살마하살은 말[語]과 뜻[義]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살마하살이 말과 뜻을 잘 아는 것이라 합니까? 무엇을 말이라고 하며, 무엇을 뜻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들을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말이라 하는가? 단어[言]와 글자[字]와 망상이 화합한 것이다. 목구멍과 입술과 혀와 이와 뺨에 의지하고 너와 나의 언설망상(言說妄想)과 습기의 계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말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을 뜻이라고 하는가? 모든 망상의 모습과 언설의 모습을 벗어나는 것을 뜻이라고 한다.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뜻에 대해
홀로 고요한 곳에서 듣고 생각하고 닦은 지혜로 스스로의 깨달음을 반연해 열반성(涅槃城)으로 향하고 습기의 몸을 바꾼 뒤, 스스로 깨달은 경계로써 수행하는 지위와 지위 사이의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는 뜻[勝進義]의 모습을 관찰하면, 이를 보살마하살이 뜻을 잘 아는 것이라 한다.
또 대혜야, 말과 뜻을 잘 안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말과 뜻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님을 관찰하고, 뜻과 말 역시 이와 같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만일 말이 뜻과 다르다면 말로써 뜻을 설명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등불이 물건을 비추듯 말로써 뜻에 들어간다.
또 대혜야,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든가, 자성(自性)이라든가, 열반이라든가, 3승이라든가, 1승이라든가, 마음의 자성[心自性]이라는 등의 언설을 반연해 그 뜻을 계착하면 건립하거나 비방하는 견해에 떨어져 다른 주장을 건립하고 다른 망상을 부리게 되니, 환(幻)이 갖가지 망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마치 어리석은 중생은 갖가지 환을 보면 다르다고 망상을 지으나 성현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저 말이란 이미 망상으로써
모든 법을 건립한 것이니
그것을 건립한 까닭에
죽어서 니리(泥犁:지옥)에 떨어진다.

음(陰) 가운데 내[我]가 없어
음은 곧 나가 아니며
저 망상과는 같지 않으므로
또한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이 성품이 있다고 하면
어리석은 사람의 망상과 같으니
만약 이 소견(所見)과 같다면
모두 진리를 보아야 하리라.

모든 법은 성품이 없어
깨끗함과 더러움이 모두 없으니
진실하지 않은 것이 저들의 소견과 같으나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또 대혜야, 지혜[智]와 식(識)의 모습을 이제 말하겠다. 만약 지혜와 식의 모습을 잘 분별하면,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지혜와 식의 모습에 통달할 수 있게 되어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대혜야, 이 지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세간의 지혜[世間智]ㆍ출세간의 지혜[出世間智]ㆍ출세간의 가장 높은 지혜[出世間上上智]이다.

무엇이 세간의 지혜인가? 모든 외도와 범부가 있음과 없음에 계착하는 것이다. 무엇이 출세간의 지혜인가? 모든 성문과 연각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떨어져 이를 희망하고 계착하는 것이다. 무엇이 출세간의 가장 높은 지혜인가? 모든 부처와 보살이 무소유(無所有)인 법을 관찰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면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벗어나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고,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가 이로 인해 저절로 생기게 된다.
대혜야, 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식(識)이고,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지혜이다. 또 모습[相]이 있다거나 모습이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고 갖가지 모습의 인[相因]이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는 것은 식이고, 모습이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초월하는 것은 지혜이다. 또 모습을 기르는 것[長養]은 식이고, 모습을 기르지 않는 것은 지혜이다. 또 세 가지 지혜가 있으니, 생김과 없어짐[生滅]을 아는 것, 자상(自相)과 공상을 아는 것,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또 걸림이 없는 모습이 지혜이고 갖가지 장애가 있는 경계의 모습이 식이다. 또 3사(事)가 화합해서 방편이 생기는 모습이 식이고, 방편이 없는 현실[事]의 자성(自性)의 모습이 지혜이다. 모습[相]을 이루는 것이 식이고 모습을 이루지 않는 것이 지혜이니, 이는 스스로 얻은 성지(聖智)의 경계이어서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업을 채집하면 식이 되고
채집하지 않으면 지혜[智]가 되니
모든 법을 관찰하여
무소유(無所有)에 통달하라.

자재력(自在力)을 얻게 되면
이를 혜(慧)라 하고
경계에 속박되면 마음[心]이라 하며
각상(覺想)이 생기면 지(智)라 한다.

무소유와 수승한 경계
지혜가 이것에서 생기니
심과 의(意)와 식(識)에서
사유(思惟)와 상(想)을 멀리 벗어나라.

사상(思想)이 없게 되면
불자(佛子)이지 성문이 아니며
적정(寂靜)과 훌륭한 곳으로 나아가는 인[勝進忍]은
여래의 청정한 지혜[智]이다.

훌륭한 뜻을 일으키고
행하던 것 모두 벗어나
나에게 세 가지 지혜 있으니
성인이 개발(開發)한 진실이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사유하며

모든 성품을 받아들이는
이승은 상응하지 못하니
지혜는 모든 소유(所有)를 벗어난다.

자성(自性)에 계착하므로
모든 성문이 생겼으니
모든 심량(心量) 초월하여 건너면
여래지(如來智)가 청정하리라.

또 대혜야, 외도에게는 아홉 가지 전변론(轉變論)이 있어 전변한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이른바 형처(形處)가 전변한다는 것, 모습[相]이 전변한다는 것, 인(忍)이 전변한다는 것, 이루어진 것[成]이 전변한다는 것, 견해[見]가 전변한다는 것, 성품[性]이 전변한다는 것, 연(緣)이 분명히 전변한다는 것, 지어진 것[所作]이 분명히 전변한다는 것, 사(事)가 분명히 전변한다는 것이다. 대혜야, 이것을 아홉 가지 전변한다는 견해라 한다. 모든 외도가 이것을 바탕으로 있음과 없음이 생기는 것은 전변이라는 주장을 일으킨다.
무엇이 형처가 전변한다는 것인가? 이는 형처가 변한다는 견해이다. 마치 금을 변화시켜 모든 그릇과 물건을 만들면 온갖 모양에 따라 물건이 나타나지만 금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성품이 변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혹 어떤 외도들은 이와 같은 망상을 일으키고 나아가 사(事)가 전변한다는 망상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모든 법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망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성품이 전변하는 것은 마치 우유와 낙(酪)과 술과 과일 등이 익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외도들은 전변한다고 망상을 일으키지만 거기에는 또한 전변함이 없다.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바깥에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어리석은 중생은 스스로의 망상에 수습(修習)할 뿐이다. 대혜야, 본래 법이란 없는 것이니, 생긴다거나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환(幻)을 보는 것과 같으며, 꿈속에서 물질이 생기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형처(形處)가 때때로 전변하여
4대종(大種)과 모든 감관
중음(中陰)이 차례로 생긴다고 하나
망상이지 밝은 지혜가 아니다.

가장 훌륭한 자[最勝]의 연기법(緣起法)은
그들의 망상과는 다르니
세상이 연(緣)으로 일어나는 것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법의 상속(相續)하는 뜻과 해탈(解脫)하는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법의 상속하고 상속하지 않는 모습을 잘 분별해 주신다면,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들은 모든 상속하는 것과 교묘한 방편을 잘 이해할 것이며, 말씀하신 뜻에 계착하여 상속하는 데 떨어지지 않고 모든 법의 상속하는 모습과 상속하지 않는 모습을 잘 알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설(言說)과 문자(文字)와 망상각(妄想覺)을 벗어나 모든 불국토의 한량없이 많은 대중 사이를 다니면서, 자재한 신통력과 총지(總持)의 인(印)으로 온갖 변화를 일으키고 밝은 빛을 아름답게 비출 것이며, 깨달음의 지혜로 10무진구(無盡句)에 잘 들어가 해나 달이나 마니(摩尼)나 4대(大)처럼 방편이 없는 행[無方便行]을 실천할 것입니다.
모든 지위에서 자기 망상의 모습을 보는 것을 벗어나 모든 법이 환이나 꿈 등과 같다는 사실을 보고, 불지신(佛地身)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계(衆生界)에서 중생이 응하는 데 따라 그들을 위해 설법하고 인도해, 모두에게 모든 법은 환이나 꿈 등과 같다는 데 안주하게 할 것입니다. 또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 생긴다거나 없어진다는 망상, 언설과 뜻[義]이 다른 것을 벗어나게 하여 그 몸을 훌륭하게 바꾸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모든 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뜻[義]에 계착하여 상속한다. 말하자면 모습[相]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연(緣)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성품[性]과 성품이 아닌 것[非性]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생긴다거나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없어진다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승(乘)이라거나 승이 아니라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유위(有爲)라거나 무위(無爲)라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지위[地]와 지위의 자상[地自相]이라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자기의 망상[自妄想]이 끊임없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외도가 의지하는 있다거나 없다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하고,
3승과 1승에 차이가 없다는 망상에 계착하여 상속한다.
또 대혜야, 이들과 나머지 어리석은 중생의 망상이 저절로 상속하는 것은 이러한 상속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은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망상이라는 실로 자신을 얽어매고 남도 얽어매며 있고 없음이 상속하는 모습에 계착한다. 또 대혜야, 그 속에는 상속하는 모습도 없고 상속하지 않는 모습도 없으니, 모든 법이 적정함을 알면 망상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적정함을 알아야 한다.
또 대혜야,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이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모습임을 깨달아, 무소유(無所有)에 수순하여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있고 없음 등 일체의 성품에 상(相)이 없음을 관찰하면, 상속하는 것이 적정함을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법은 상속하는 모습도 상속하지 않는 모습도 없다. 대혜야, 그 속에는 묶이거나 풀거나 하는 일이 없지만, 그 외에 진실하지 않은 각지(覺知)에 떨어지면 묶임도 있고 풂도 있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법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할 것이 없고 또 그럴 중생도 없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세 가지 상속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사랑[愛]이 미래에 있을 기쁨[喜]ㆍ사랑[愛]과 함께함으로써 이것이 상속하기 때문에 취(趣)의 상속이 있게 된다. 그 상속은 5취(趣)로 이어진다. 대혜야, 상속이 끊어지면 상속하는 모습도 없고 상속하지 않는 모습도 없다. 또 대혜야, 연(緣)ㆍ작(作)ㆍ방편 세 가지가 화합한다고 계착하고 식(識)이 끊임없이 상속하여 방편을 낸다고 계착하면 곧 상속이 있게 된다. 연(緣) 등 화합하는 세 가지와 식(識)이 끊어져 3해탈(解脫)을 보면 모든 상속이 생기지 않는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
이것을 상속하는 모습이라 말하니
저 진실을 안다면
상속의 그물 곧 끊어지리라.

모든 성품을 알지 못하여
말을 따라 받아들이니

비유하면 저 누에가
고치[網]를 엮어 자신을 얽어매는 것처럼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에 얽혀
상속하면서 관찰하지 못한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의 말씀처럼 이런 저런 망상으로 이런 저런 성품이라고 망상을 부리지만 그것은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망상자성(妄想自性)일 뿐입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망상자성일 뿐이며 성자성(性自性)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존께서 ‘번뇌는 청정하여 성품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허물이 되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모든 법의 망상자성은 성품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고 하며 망상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는 망상자성일 뿐, 성자성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혜야, 성지(聖智)에는 성자성이 있으니, 이는 성인의 지혜와 견해와 지혜로운 눈으로 이와 같은 성자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성인들이 그들의 지혜와 견해, 천안(天眼)도 육안(肉眼)도 아닌 혜안으로써 이와 같이 성자성을 알아서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과는 다르다면, 세존이시여, 어떻게 어리석은 범부가 이러한 망상을 여읠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경계[聖性事]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은 전도된 것도 아니고 전도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인의 경계인 성자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모습이 있음과 없음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성인은 또한 이와 같은 망상을 이와 같이 보지 않으니, 자상경계(自相境界)를 경계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것도 역시 성자성의 모습이니,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이와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니, 이른바 자성의 모습이 있다는 견해에 떨어졌기 때문이며, 다른 경계는 저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와 같은 무궁한 허물이 생깁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성자성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망상자성이 성자성의 모습으로 인해 있는 것도 아닌데,
저들이 어떻게 망상이고 망상이 아닌지, 여실(如實)하게 망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망상과 자성상(自性相)은 다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인(因)이 비슷하지도 않은 망상자성상(妄想自性想)을 저들은 왜 각각 망상이 아니라고 합니까? 어리석은 범부는 여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망상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는 망상의 모습과 같아 여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로 사물의 자성(自性)에 계착하고, 성지(聖智)가 행하는 경계에 계착하여 있다는 견해에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법은 공(空)하여 성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지(聖智)의 자성사(自性事)를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법은 공(空)하여 성품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있다는 견해에 떨어져 성지(聖智)의 자성사를 말한 것도 아니다. 중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자성(性自性)을 말했고, 중생이 끝없는 옛날부터 성자성의 모습에 계착하고 성인의 자성경계에 계착하는 모습을 보고 법이 공하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나는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혜야, 나는 단지 스스로 얻은 여실한 공법(空法)에 머물러 미혹되고 산란한 상견(相見)을 벗어나고, 자기 마음이 나타낸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견해를 벗어나며, 3해탈을 얻고 여실히 증명되는 바를 증명하며, 성자성에 대해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반연하고 관찰하여 머묾을 얻으며, 있고 없다는 견해의 모습을 벗어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宗]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품[性]은 성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인(因)으로 모습이 생기므로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곧 무너진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우면 주장이 무너진다고 한 것은 그 주장이 상대를 두고 생겼기 때문이다. 또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모든 법의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 역시 생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운다면, 이것은 말하자마자 곧 무너진다.
대혜야,
있고 없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운다면, 이 주장은 모든 성품에 들어가므로 모습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대혜야, 만일 저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성품이 생기지 않는데 주장을 세운 것이 되므로 그 주장은 무너진다. 모습과 성품이 있거나 없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오분론(五分論)에는 잘못이 많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하는 인(因)이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며, 짓는 것[作]이 되기 때문이니,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모든 법은 생기지 않으므로 공(空)하고,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대혜야, 그러나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은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견각(見覺)의 허물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성품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것을 벗어나게 하려고 할 경우는 제외한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니, 저들이 두려움으로 마하연(摩訶衍:대승)을 멀리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자성도 없고 말할 것도 없고
사물[事]도 없고 상속함도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이니
죽은 시체의 악각(惡覺)과 같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저 외도의 주장이 아니다.
끝까지 이르러도 생기는 바 없으니
오직 성품과 연(緣)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고
지혜로운 이는 생각을 짓지 않는다.
이 주장은 생기는 것을 인(因)하니
깨달은 이는 모두 없앤다.

비유하면 병난 눈으로 보면
허망하게도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이니
성품이라고 계착하는 것도 그러하여
어리석은 범부의 그릇된 망상이다.

3유(有)를 시설하나
사물의 자성이 없다.
사물의 자성을 시설하여
생각하므로 망상을 일으킨다.

상사(相事)로 언교(言敎)를 시설하니
뜻이 어지러워 심하게 흔들린다.
불자는 능히 뛰어넘어
모든 망상을 멀리 벗어난다.

물이 아닌데 물이라는 모습을 받아들이니
이것은 갈애(渴愛)로 생긴 것
어리석은 범부, 이와 같이 미혹하나
성인이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

성인의 견해는 청정하여
3해탈과 삼매가 생기니
생사를 멀리 벗어나고
두려움 없이 유행(遊行)한다.

무소유(無所有)를 수행하고

성품도 성품 아닌 것도 없으면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이 평등하리니
이로부터 성과(聖果)가 생긴다.

무엇이 성품이고 성품이 아니며
무엇을 평등하다고 하는가.
저 마음이 알지 못하기에
안팎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니
만일 저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마음이 곧 평등하게 보리라.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말씀처럼 사물에 반연(攀緣)하는 것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은 시설량(施設量)으로 건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설량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성품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없는 까닭에 지혜[智]가 생기지 않으니, 오직 이름만 시설했을 뿐입니다.
세존이시여, 성품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 다르고 다르지 않은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자상과 공상이 온갖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산과 바위와 석벽과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의 장애 때문에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멀거나 가깝기 때문에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늙거나 어리거나 눈이 멀거나 모든 감관[根]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자상과 공상의 다르고 다르지 않은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은 지혜라고 하지 말고 무지(無智)라고 해야 할 것이니, 유위법의 사물[有事]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또 온갖 자상과 공상이 성자성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이것도 역시 무지이며 지혜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염(爾炎:智母ㆍ境界ㆍ所知)이 있음으로 지혜가 생기는 것이니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며, 이염과 만나는 까닭에 지혜라고 합니다. 만약 산ㆍ바위ㆍ석벽ㆍ땅ㆍ물ㆍ불ㆍ바람 때문에, 매우 멀거나 가깝기 때문에, 늙거나 어리기 때문에, 눈이 멀거나 어리석거나 여러 감관[根]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이것 역시 지혜가 아니며 반드시 무지일 것입니다. 유위법의 사물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것은 무지(無智)가 아니다. 이것이 분명 지혜이니 지혜가 아닌 것이 아니다. 나는 이와 같이 감추고 덮어 말하지 않으니, 사물에 반연하는 지혜는 얻을 수 없다. 이는 시설량으로 건립된 것이다.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달아
있음과 없음,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을 알지만 사물로는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지혜는 이염에서 생기지 않으며, 3해탈(解脫)에 수순하는 지혜 역시 얻을 수 없다.
망상을 부리는 자들이 끝없는 옛날부터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거짓되게 익힌 지혜로 이러이러하다고 아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바깥 경계의 사물과 처소와 모습과 성품에 대해서 성품이 없다고 하며 망상이 끊이지 않는다.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으로 건립하고선 나와 나의 것의 모습이라 말하며 받아들이고 계착해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이염에 대해 망상을 일으키며, 망상 때문에 바깥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관찰하지 못하고 단견(斷見)에 의지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모든 일을
지혜로 관찰하지 않고서
이를 무지(無智)라 하고 지혜가 아니라 하면
이것은 망상을 부리는 자의 말이다.

다르지 않은 상(相)과 성품에 대하여
지혜로 관찰하지 않고
장애라거나 멀고 가까움 때문이라 하면
이를 그릇된 지혜라 한다.

늙고 어리고 모든 감관이 둔해서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하고
실재로 이염이 있다고 하면
이 역시 그릇된 지혜라 한다.

또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악하고 그릇된 망상으로 회전(迴轉)하게 된다. 회전할 때 스스로 종을 통달함[宗通]과 설법을 통달함[說通]을 명료하게 잘 알지 못하니, 자심의 현량인 밖의 성품과 상(相)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방편으로 한 말에 집착하여, 스스로 주장한 네 구절[句]의 청정하고 통달한 모습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진실로 존귀한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설법을 통달하고 종을 통달하는 것을 분별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이 두 가지에 통달하게 되면, 내세(來世)에 범부나 성문이나 연각이 단점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3세의 여래에게
두 가지 법에 통달함이 있으니, 설법을 통달함[說通]과 종을 통달함[宗通]이다.
설법을 통달함이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알맞게 갖가지 계경(契經)을 말해 주는 것이니, 이를 설법을 통달함이라고 한다. 종을 통달함이란 수행자가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온갖 망상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등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심ㆍ의ㆍ의식을 초월하여 건너는 것을 말한다. 자각성지의 경계[自覺聖境]는 인(因)으로 이루어진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을 벗어나니,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 같은 두 극단에 떨어진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를 종을 통달하는 법이라고 한다.
대혜야, 이를 종을 통달하고 설법을 통달하는 모습이라 하니,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설하는 두 가지 통달이란
종통과 설통이다.
설통은 동몽(童蒙)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종통은 수행자를 위한 것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모든 논(論)과 온갖 변설(辯說)을 부디 가까이하지 말라. 만약 가까이하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의 언론(言論)과 온갖 구(句)는 인연(因緣)과 비유(譬喩)를 채집하여 장엄한 것으로 어리석은 범부를 끌어들여 속이고 미혹시키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진실에 들어가 스스로 통달할 수 없으며, 모든 법을 깨닫지 못하고 망상으로 전도(顚倒)되어 두 극단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어리석은 범부는 미혹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여러 세계[趣]에 끊임없이 상속하고, 해탈을 얻지 못하고,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하고, 바깥 경계의 성자성(性自性)을 벗어나지 못하며 망상으로 계착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언론과 온갖 변설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와 미혹된 혹란(惑亂)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혜야,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여러 논을 자세히 알고 스스로 성론(聲論)을 만들었다. 세론자(世論者)에게 한 제자가 있어 용의 형상을 하고 석천궁(釋天宮)에 나아가 논의 종지[宗要]를 세워 천 복(輻)이나 되는 제석의 바퀴를 부수려고 꾀하였다. ‘만일 내가 진다면 모두에게 머리를 조아려 굴복시키려고 했던 점에 대해 사과하리라’고 맹세한 후 곧 법을 풀이함으로써 제석을 굴복시켰으며, 제석이 지게 되자 곧바로 그의 바퀴를 부수고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이와 같이 대혜야, 세상의 언론[世言論]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축생에까지 이르며, 또한 온갖 글귀로 저 모든 하늘과 아수라를 미혹시켜 생긴다는 견해와 없어진다는 견해에 집착하게 하니, 하물며 인간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혜야, 세상의 언론을 반드시 멀리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이 고통을 생기게 하는 인(因)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니, 행여나 가까이하지 말라.
대혜야, 세론(世論)이란 오직 몸이 느끼는 경계를 말할 뿐이다. 대혜야, 저 세론자가 백천이 있더라도, 이들은 먼 훗날 마지막 50년에 결집(結集)을 깨뜨리기만 할 뿐이다. 악각(惡覺)을 인(因)으로 한 소견이 성한 까닭에 악한 제자가 이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대혜야, 세론은 결집을 깨뜨린다. 온갖 구절과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외도의 일을 말한 것이며, 스스로 인연에 집착한 것이니 스스로 통달함이 없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는 스스로 통달한 논(論)이 없으므로 나머지 세론에 대해 한량없는 백천 가지 문(門)으로 자세히 설명하지만 스스로 통달함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세론이 어리석은 것인 줄도 알지 못한다.”
이때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외도와 세론이 온갖 글귀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였지만 스스로 통달한 것은 없고 자사(自事)에 계착한 것이라면, 세존께서도 역시 세론을 말씀하시어 여러 다른 곳으로부터 온 모든 대중과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를 위해 한량없는 온갖 글귀로 자세히 설명하셨으니, 이 또한 스스로 통달하지 못하신 것입니까? 이 역시 모든 외도의 지혜로운 언설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론(世論)을 말하지 않았고 또한 간다거나 온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직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대혜야, 온다는 것은 모이고 합해서 생기는 것이고, 간다는 것은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것은 곧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니, 내가 말한 것은 망상(妄想)인 세론 중 하나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계착하지 않으면, 자심(自心)의 현량처(現量處)에서 두 극단에 치우친 망상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습과 경계는 성품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달으면, 곧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은 생기지 않는다. 망상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공(空)ㆍ모습 없음[無相]ㆍ지음 없음[無作]의 3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대혜야, 내가 기억하기로 어느 때 어떤 곳에 머물고 있을 때, 세론자(世論者)인 바라문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청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다가 문득 나에게 ‘구담(瞿曇)이시여,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입니까[所作]?’라고 물은 일이 있다. 나는 그때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 최초의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다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非所作]?’라고 묻기에 나는 다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다시 ‘모든 것은 영원합니까[常], 모든 것은 무상합니까[無常], 모든 것은 생기는 것입니까[生], 모든 것은 생기지 않는 것입니까[不生]?’라고 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이 여섯 가지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혜야, 그는 다시 나에게 ‘모든 것은 같습니까[一], 모든 것은 다릅니까[異], 모든 것은 함께합니까[俱], 함께하지 않습니까[不俱], 모든 것은 온갖 것을 인(因)하여 생(生)을 받아 나타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이 열한 가지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혜야, 그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모든 것은 무기(無記)입니까, 모든 것은 유기(有記)입니까, 내[我]가 있습니까, 내가 없습니까, 이 세상은 있습니까, 이 세상은 없습니까, 다른 세상이 있습니까, 다른 세상이 없습니까, 해탈이 있습니까, 해탈이 없습니까, 모든 것은 찰나(刹那)입니까, 모든 것은 찰나가 아닙니까, 허공입니까, 자주 멸(滅)하는 것이 아닙니까,
열반입니까? 구담(瞿曇)이여, 만드는 것입니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중음(中陰)이 있습니까, 중음이 없습니까?’
나는 그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세론(世論)으로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세론이다. 나는 오직,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妄想)과 습기(習氣)와 온갖 악(惡)이 3유(有)의 인(因)인데,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해 망상을 일으켜 바깥 경계의 성품을 반연한다고 말할 뿐이다. 외도의 법에서는 나[我]와 모든 감관[根]과 뜻[義] 세 가지가 화합하여 지혜가 생긴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나는 인(因)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인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망상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진 성품으로 시설된 연기(緣起)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대나, 또는 나[我]는 상속한다는 견해에 떨어진 사람들이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열반(涅槃)과 허공(虛空)과 없어짐[滅]은 실제로 세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숫자로만 세 가지일 뿐이다.
또 대혜야, 그때 세론을 펴던 바라문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어리석음과 애착의 업인(業因) 때문에 3유가 있는 것입니까, 원인이 없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그 두 가지도 역시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다시 ‘모든 성품이 모두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들어갑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다시 ‘그것도 세론이다. 바라문이여, 나아가서 뜻[義]으로 외진(外塵)에 계착하는 것은 모두가 세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대혜야, 이때 세론을 펴던 바라문이 다시 나에게 ‘혹 세론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저는 모든 외도의 주장을 갖가지 글귀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말씀드렸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여, 너희에게 없는 것이 있다. 이를 종(宗)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말[說]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온갖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바라문은 ‘세론이 아니고, 종(宗)이 아닌 것도 아니며, 말[說]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세론이 아닌 것이 있다. 너희 외도들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바깥 경계의 성품에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허위로 계착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있고 없는 것이 자심의 현량인 줄 확실히 깨달아 망상이 생기지 않고 외진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망상이 영원히 그치는 것이니, 이를 세론(世論)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설하는 법으로 너희에게는 없는 것이다.
바라문이여, 저 식(識)이라는 것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오고 감, 죽음과 태어남, 즐거움과 괴로움, 잠김[溺], 견해, 접촉, 갖가지 모습에 대한 계착, 화합하여 상속함, 받아들임, 인(因)에 대한 계착,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등등의 것들은 모두 너희의 세론이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세론을 펴던 바라문이 이와 같이 물어, 내가 이와 같이 대답하였더니, 그는 잠자코 말없이 물러가 자신이 통달한 것을 사유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석자(沙門釋子)는 모든 외도의 법을 벗어났다. 그는 생김도 없고 모습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자기망상이 나타난 것인 줄 깨달으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혜야, 이것이 곧 네가 조금 전에 ‘무슨 까닭으로 세론의 온갖 변설을 가까이하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탐욕(貪欲)을 받아들이거나 법(法)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떤 구의(句義)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네가 마침내 미래의 중생을 위해 깊이 생각해서 이런 구의를 묻는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탐욕이라는 것은 취하거나 버리거나 감촉하거나 맛보거나 하는 것이니, 외진(外塵)에 집착하여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고음(苦陰)을 생기게 하는 것이니,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는
이와 같은 모든 근심은 모두 애착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는 세론과 세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에서 연유하니, 나와 모든 부처는 이것을 탐욕[貪]이라 한다. 이것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대혜야, 무엇이 법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자심의 현량을 잘 깨달아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모습을 보고, 망상이 생기지 않으며, 높고 낮은 지위를 잘 알아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며, 모든 부처의 관정(灌頂)을 받아 지혜를 다 갖추고, 10무진구(無盡句)를 받아들여 모든 법에 개발(開發)함이 없이 자재한 것이다. 이를 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모든 견해와 모든 허위와 모든 망상과 모든 성품과 두 극단에 치우친 온갖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혜야, 외도인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갖게 되니,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인(因)이 없다는 논(論)을 받아들여 상견을 일으키고, 바깥 경계의 인(因)은 허물어지는 것이므로 인연은 성품이 아니라 하면 단견을 일으킨다. 대혜야, 그러므로 나는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보지 않는 것을 법이라고 말한다. 대혜야, 이를 탐욕(貪欲)과 법(法)이라고 하니,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세상의 논(論)은
외도의 허망한 말이다.
망상으로 짓고 지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들에겐 자종(自宗)이 없다.

오직 나만이 유일한 자종이니
짓고 지어지는 것을 벗어나
모든 제자를 위해
모든 세론을 멀리 벗어나라고 설한다.

심량(心量)은 볼 수가 없어
두 가지 마음을 관찰하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성품이 아니니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두 가지를 떠나라.

나아가 마음이 유전하면
이것이 곧 세론이 되니
망상이 구르지 않는 자
그 사람은 자기 마음 보리라.

온다는 것은 현상계[事]가 생기는 것이며
간다는 것은 현상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
망상은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

유상(有常)과 무상(無常)
지어진 것과 지어진 것이 없음
이 세상과 저 세상 등
이것들은 모두 세간의 설통(說通)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열반이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한 것입니까? 모든 외도들이 각기 망상을 일으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모든 외도들은 망상을 열반이라 하는데, 그런 망상은 열반을 수순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혹 어떤 외도는 음(陰)ㆍ계(界)ㆍ입(入)을 없애고, 경계에 대한 욕심을 벗어나 법이 무상(無常)한 것을 보며, 마음[心]과 마음 법[心法]들이 생기지 않고, 오가는 현재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으며, 등불이 꺼지듯 모든 수음(受陰)이 없어지는 것, 썩은 씨앗처럼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 열반이라는 생각을 낸다.
대혜야, 견해가 무너지는 것[見壞]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혹자는 어느 곳에 이르는 것을 해탈이라 하기도 하고, 바람이 그치듯 경계라는 생각이 없어지거나 혹은 깨달음과 깨닫는 대상이 있다는 견해가 무너지는 것을 해탈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상(常)이나 무상(無常)을 보고 해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자는 온갖 모습[相]을 보고는 고통을 초래하는 인(因)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이것이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닫지 못하고서 모습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습이 없음을 보면 깊이 즐거워하며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 어떤 사람은 안팎의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달아 알고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허물어지지 않는 성품이 있다고 여겨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아(我)ㆍ인(人)ㆍ중생(衆生)ㆍ수명(壽命) 등 일체법이 무너지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외도가 악소지혜(惡燒智慧)로 자성(自性)과 장부[士夫] 둘 사이에 틈이 있어 장부가 나오는 곳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자성이라고 한다. 명초(冥初)와 비교되는 구나(求那)의 변화와 같다 하고는 구나를 곧 짓는 자[作者]라 여겨 열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혹은 복과 복 아닌 것이 다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지혜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자재(自在)가 진실로 생사(生死)를 짓는 자라고 보고 이를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번갈아 서로 생길 뿐 생사에는 다시 다른 인(因)이 없다고 하는데, 이와 같다면 곧 이것이 인에 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 어떤 외도는 진제(眞諦)의 도(道)를 얻는 것이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공덕과 공덕으로 일어난 것이 화합하여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함께하기도 하고 함께하지 않기도 하는 것을 보고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자성(自性)이 일으킨, 공작(孔雀)의 갖가지 색깔과 여러 가지 보배와 날카로운 가시 등의 성품을 보고 난 후 이를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대혜야, 혹 어떤 사람은 스물다섯 가지의 진실을 깨닫거나 혹은 왕이 나라를 수호하며 6덕론(德論)을 받아들이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시간[時]이 곧 짓는 자[作者]여서 시절(時節)과 세상을 만든다고 보고는 이와 같이 깨닫는 것을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성품이라고도 하고 혹은 성품이 아니라고도 하며, 혹은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아는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깨달음과 열반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망상이 있어 외도들의 말은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하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버리는 것이다.
대혜야,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다 두 극단에 떨어져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외도의 열반에 대한 망상 가운데에는 생김이건 없어짐이건 무엇도 없다.
대혜야, 낱낱의 외도들의 열반은 그들 스스로의 논리일 뿐, 지혜로 관찰하면 도무지 세울 것이 없다. 망상ㆍ심ㆍ의가 오가고 떠돌고 달리고 유동(流動)하는 저와 같은 자들은 어느 누구도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대혜야, 내가 말하는 열반이란 자심의 현량(現量)을 잘 깨닫는 것이며양(量)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전에 보는 것≺現見≻이고, 둘째는 추측해서 아는 것≺比知≻이며, 셋째는 비유(譬喩)이고, 넷째는 과거의 훌륭한 분이 서로 전하는 것≺先勝相傳≻이다. 저 외도는 네 가지 양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 바깥 경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4구(句)를 벗어나는 것이며, 여실한 경지를 보는 것이며,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의 경계인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며,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헤아림[度量]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며, 진실에 어두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것을 버리고 나서 스스로 깨달은 성인의 법을 얻는 것이며, 두 가지 무아(無我)를 아는 것이며, 두 가지 번뇌를 여의는 것이며, 두 가지 장애를 깨끗이 없애는 것이며, 영원히 두 가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며, 가장 높은 지위인 여래지(如來地)조차 그림자 같고 꿈과 같은 줄 아는 것이며, 모든 깊은 삼매에 들어 심ㆍ의ㆍ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닦아서, 속히 모든 외도들의 열반에 대한 온갖 견해를 멀리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외도의 열반에 대한 견해는
제각기 망상을 일으킨 것이며
이것은 심상(心想)에서 생긴 것이니
해탈의 방편이 없다.

어리석어 속박에 얽매인 자는
훌륭한 방편을 멀리하니
외도가 해탈이라고 생각하나
해탈은 끝내 생기지 않는다.

여러 지혜가 각각 취향[趣]을 달리하나
외도의 소견(所見)은 공통되어
거기에 모두 해탈 없으니
어리석은 망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리석은 외도는
헛되이 짓고 지어지는 것을 보아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논하니
그곳에는 모두 해탈이 없다.

어리석은 범부가 망상을 좋아하여
진실한 지혜를 듣지 않고
세 가지 괴로움의 근본을 말하나
진실만이 괴로움을 없애는 인(因)이다.

비유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비록 나타나지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망상이라는 마음의 거울로
어리석은 범부는 두 극단을 본다.

마음과 연(緣)을 알지 못하여
두 가지 망상이 일어나니
마음과 경계를 명료히 알면
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갖가지이나
보고 보이는 대상 멀리 벗어난 것이며
사물은 나타나지만 나타남이 없으니
저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과 같다.

3유(有)란 오직 망상뿐이어서
정의[義]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온갖 것이 망상으로 나타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알 수가 없다.

경(經)마다 망상을 이야기하나
결국 이름[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언어의 명칭을 벗어난다면
또한 말할 것도 없으리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