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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38 불교(광석보리심론 4권 / 廣釋菩提心論)

by Kay/케이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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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석보리심론(廣釋菩提心論) 4

 

연화계 지음

시호 한역

김치온 번역

 

 

또한 다시 이 중에 보운경에서 설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대승의 법을 얻는가? 만일 보살이 훌륭하게 일체의 법을 배운다면, 그는 비록 배움이 있기는 하지만 배우는 때와 배운 법은 모두 얻을 수 없다. 비록 배우는 중이라도 결정코 얻은 바가 없으며, 또한 저 인연법 가운데서도 단견(斷見)을 일으키지 않는다.”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어떠한 것이 모든 보살들이 행하는 것인가? 보살은 몸과 말과 뜻으로 행하는 것들 중에서 오랫동안 일체의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속마음으로 대비를 일으켜 증상하는데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지어야 한다. 나의 현재의 행과 이미 행한 행은 모두 일체의 중생들과 함께 광대한 이익과 안락을 베풀어 짓는 것이다. 보살은 비록 오온[諸蘊]을 관하여 허깨비와 같이 여기지만, 역시 그 가운데에서 싫어해 버리는 마음을 내지 않아서 일체의 행하는 바에 모두 장애가 없다. 십이처(十二處)를 공의 모임[空聚]과 같이 여기지만, 역시 그 가운데에서 싫어해 버리는 마음을 내지 않아서 일체의 행하는 바에 모두 장애가 없다. 십팔계(十八界)를 뱀의 독과 같이 여기지만, 역시 그 가운데에서 싫어해 버리는 마음을 내지 않아서 일체의 행하는 바에 모두 장애가 없다. 또한 다시 비록 색을 관하여 물거품[聚沫]이 모인 것처럼 여기지만, 역시 여래 색신의 상호를 버려서 여의지 않는다. ()를 마치 떠 있는 물거품과 같이 여기지만, 역시 모든 여래의 선정과 삼마지와 삼마발저(三摩鉢底)에서 출생한 묘한 즐거움 속에서 방편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다. ()을 아지랑이처럼 여기지만, 역시 모든 여래의 지혜 가운데에서 수승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다. ()을 마치 파초(芭蕉)와 같이 여기지만, 또한

 

 

일체 부처님 법의 행 가운데에서 행한 바 아님이 없다. ()을 마치 마술사[幻士]와 같이 여기지만, 역시 여래의 삼업지혜[三業智]가 선도하는 가운데에서 행한 바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일체의 행한 바가 모두 장애가 없다.”

다시 다음으로 여러 경들에서 모두 설하고 있다. 응당 알아야 하나니, 지혜와 방편은 보살들이 바르게 행한 행이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은 저 수없는 일체의 행 속에서 항상 지혜와 방편을 일으키고 오랜 시간을 짬도 없이 생각을 관하고 닦음을 짓는다. 이와 같이 하여 곧 십이분위(十二分位)를 얻는데, 모든 지위에서 안립(安立)함을 얻고 나면 그 각각의 지위에서 수승하고 높은 공덕을 다 구족한다. 십이분위란 신해행지(信解行地)에서 불지(佛地)까지이다. 이러한 지위 가운데에서 다만 불지를 제외하고 그 밖의 모두는 중생 및 보살에 포섭된다. 이 중에서 신해행지란 아직 능히 두 무아[二無我]의 이치를 증득하지 못하지만 한결같이 견고한 신해(信解)를 일으키므로 마()가 능히 움직이지 못한다. 또한 그 신해력(信解力)은 아직 유식(唯識)의 참된 성품을 관할 수 없고 단지 신해법을 견고히 하는 가운데서 해행지(解行地)를 세운 것이다. 또한 모든 지위에 따른 각각 수없는 삼마지와 총지(總持)와 해탈과 신통 등의 공덕들을 갖추게 된다.

보운경에서 설하였다.

네 종류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을 안립(安立)하니, 그 네 가지 지위에서 하()거나 중간[]정도, 최상[]의 지혜 광명이 나온다. 이 네 가지 지위는 모두 모든 법의 무아를 관하는데, 이 중에서 만일 하품(下品)의 지혜의 광명이 생하면 이를 난위(煖位)라고 한다. 그 증득한 선정을 이름하여 명득(明得)이라 한다. 만일 중품(中品)의 지혜 광명이 생하면 이를 정위(頂位)라 하고, 그 증득한 선정을 이름하여 명증(明增)이라 하다. 만일 밖으로 상대하여 장애가 없는 최상의 지혜 광명이 생하면,

 

 

마음의 분위(分位)에서 능히 취하는 모습[取相]을 여의게 된다. 이것을 이름하여 인위(忍位)라고 하며, 그 증득한 선정을 일분입(一分入)이라고 한다. 만일 능히 취함[能取]과 취해지는 것[所取]의 모습 중에서 모두 얻는 바가 없으면, 둘이 없는 지혜로 결정코 그 두 가지 취하는 모습의 공()함을 각인한다. 이것을 세제일위(世第一位)라고 하며, 그 증득한 바의 선정()을 무간(無間)이라 한다. 이 무간으로부터 유식의 성품[唯識性]에 들어간다. 여기서 총체적으로 간략히 하면, 이와 같은 것들의 설명은 모두 신해행지에 포섭된다.

다음은 열 가지 지위[十地], 즉 열 가지 분위[十分位]이다. 저 처음의 지위[初地]란 앞서 말한 세제일법의 간격 없는 첫 마음[無間初心]으로부터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성스러운 성품을 획득하고 큰 기쁨이 생하므로 이를 이름하여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이것은 능히 두 무아의 이치를 나누어 증득[分證]해서 법의 성품 없음을 얻고 진실한 지혜가 생하여서 일체의 분별과 희론을 모두 여읜다. 이 중에서 능히 백열두 가지의 견도위에서 끊어야 할 미혹을 끊고 나머지 수도위에서 끊어야 할 삼계의 총 열여섯 가지 미혹을 감응하는 대로 끊는다. 이 지위의 보살은 평등한 지혜를 얻어, 스스로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보시바라밀다(布施波羅蜜多)에서 원만함을 얻고 삼마지에 편안하게 머무른다. 나아가 아직 미세하게 훼손하고 범하는 번뇌[微細毁犯垢染]를 멀리 여의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증득한다면[分得] 이지(二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두 번째 지위란, 능히 계율을 범하는 일체의 더러움과 물듦을 떠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이구지(離垢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능히 계율을 범하는 미세한 더러움과 물듦을 바르게 멀리 여의고서 계()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은 능히 수승한 삼마지와 삼마발저 및 문총지(聞總持)를 성취하지는 못하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分得] 삼지(三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세 번째 지위란, 한량없는 수승한 지혜의 광명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발광지(發光地)라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수승한 삼마지와 문총지를 두루 다 획득하고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참아서 인()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고 나면 일체 삼마발저의 애착하는 마음속에서 버린다. 나아가 아직은 능히 보리분법(菩提分法)까지 널리 닦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사지(四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네 번째 지위란, 보리분법인 지혜의 불꽃이 능히 모든 번뇌의 섶을 태우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염혜지(焰慧地)라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결함과 감소가 있는 말과 뜻의 분별을 이미 여의고 결함과 감소가 없는 보리분법을 잘 닦아서 정진(精進)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은 네 가지 진리의 관[四諦觀]까지 짓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오지(五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다섯 번째 지위란, 생사와 열반에서 훌륭한 방편으로 평등을 관찰해서 지극한 어려움 속의 승리가 바로 수승한 수습(修習)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난승지(難勝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사성제 중에서 많이 닦아 지은 것을 능히 잘 관찰하여 정()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순결택분(順決擇分)으로부터 나와 이 지위에 이르면 비로소 모습 없는 행[無相之行]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은 능히 연생관(緣生觀)까지 짓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육지(六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여섯 번째 지위란, 수승한 지혜가 구족하여 능히 일체 부처님 법의 수승한 현전문(現前門)을 따라 구를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현전지(現前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연생법(緣生法)을 능히 잘 관찰하여 혜()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으며, 모습 없는 행[無相行]을 획득한다. 나아가 아직은 이 행까지 원만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칠지(七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일곱 번째 지위란, 공용(功用)이 없는 방편의 도() 중에서 비록 아직 능히 구족하지는 못하였지만 멀리까지 교섭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원행지(遠行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일체의 모습이 모두 허깨비 같은 일임을 관해서 모습과 공용의 행하는 바가 모두 어긋나거나 장애함이 없음을 진실로 요달해 아는 것이다. 그것은 능히 모습 없는 행을 성취하여 방편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은 공용 없는 행까지 구족하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팔지(八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여덟 번째 지위란, 모든 모습과 공용 등이 모두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부동지(不動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모습 없는 공용행(功用行)을 잘 얻어서 원()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 능히 일체의 모습까지 분별하여 자재하게 법을 설하지는 못하지만, 만약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구지(九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아홉 번째 지위란, 가장 수승한 지혜를 구족하여 모든 법을 훌륭하게 설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선혜지(善慧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가장 수승한 사무애해혜력(四無礙解慧力)과 상응함을 얻어서 역()바라밀다에서 원만함을 얻는다. 나아가 아직은 능히 불국토의 모임 중에서 감응에 따라 화현(化現)하여 설법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까지 자재하고 원만하지는 못하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십지(十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그 열 번째 지위란, 가없는 일체의 세계에서 능히 큰 법의 구름이 감로비를 뿌리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법운지(法雲地)라고 한다. 이 지위의 보살은 수승한 지혜에 상응하여 설법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모든 변화하는 일을 자재하게 짓는다. 나아가 아직은 능히 일체

 

 

아는 모든 모습 가운데에서 장애 없는 지혜[無礙智]까지 획득하지는 못하였지만, 만일 능히 나누어 얻는다면 불지(佛地)에 나아가 머물 것이다.

위와 같이 모든 지위에 건립한 행상은 화합해탈경(和合解脫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모든 지위에서 자세히 설한 온() 등의 청정과 분위의 모습[分位相]은 다른 곳에도 글이 있지만, 번잡함을 피하고자 우선 그친다.

다음으로 불지(佛地)는 바로 하나의 분위이다. 불지는 일체의 수승한 모습을 모두 다 구족하고 일체의 공덕이 모두 다 원만하다. 능히 일체의 변제(邊際)를 두루 다하니, 이것을 넘는 별도의 수승하고 높은 분위는 없다. 그리고 불지 중에 있는 모든 공덕은 가령 모든 부처님의 묘한 언사로도 일부분이나마 칭하여 거양(擧揚)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한량없고 가없어서 헤아릴 수가 없다. 오직 불세존만이 자연지(自然智)로써 관하여 스스로 증득해 알기[自證知] 때문이다.

마치 화엄경속에서 설한 공덕과 같으니, 역시 일부분이라도 능히 다 궁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시 내가 지금 이 논()을 지어서 감히 언사로써 찬술할 수 있겠는가? 또한 불지 중의 모든 공덕은 일체의 수승한 뜻을 총체적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는데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요달해 알지니, 삼신(三身)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일체 몸을 두루 포섭한 것이니,

가장 훌륭한 승의법(勝義法)의 의지처인지라

이 때문에 삼신의 모습을 열어 보이시네.

 

자성신(自性身)ㆍ정보신(正報身)ㆍ화신(化身)

삼신의 가장 수승하고 높음은

모든 부처님이 갖고 계신 몸을 분별한 것으로

처음의 몸은 두 몸과 더불어 의지하고 있네.

 

어려운 행과 희유한 행을 이미 닦았고

백 가지를 연마하고 참는 마음에 안주하여

일체 갖가지의 선한 문()

두루 쌓을 수 있어서 내버림이 없도다.

 

 

 

한량없는 겁으로부터 오랫동안

대승의 최상의 미묘한 법문을 닦아

일체의 장애를 모두 제거하고

남김없이 모두 멸하여 청정함을 얻었네.

 

() 가운데 있는 미세한 장애

() 중의 지력(智力)으로 뽑아버리니

비유하면 묘한 보배상자를 비로소 연 것과 같아

맑은 광명을 놓아 일체를 비추도다.

 

세간에 나타나는 중생들을 수순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보리과를 부지런히 구하니

이롭게 하는 백천문의 설법이

모든 곳에 두루하여 잘 베풀어 짓도다.

 

여래께서 높이 나타나 다시 움직임 없으니

세간의 대성존(大聖尊)으로 편안히 머물러

수미산들 중의 최고봉처럼

높고 높은 최고의 수승함을 우러러 바라보네.

 

대비심으로써 근본을 삼고

삼마지문에서 훌륭히 출생하니

삼유(三有) 가운데 그 몸을 두루 나투시어

일체에 나타나 보이지 않는 곳이 없도다.

 

청정한 해가 한줄기 빛을 놓아

세간을 두루두루 모두 비추듯이

모든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의 묘한 광명은

모든 법이 이와 같음을 능히 알도다.

 

모든 성문인(聲聞人)이 증득한 과()

세간을 출리(出離)하여 가장 수승하나

그 성문이 증득한 것은

또한 다시 연각지(緣覺地)와 같지 않도다.

 

연각을 만일 보살지와 견준다면

모든 분위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고

보살을 불여래와 비교하여 헤아린다면

배나 많은 분위 중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네.

 

여래께서 증득하신 보리의 과[]

한량없는 공덕으로 부사의하니

그 때와 장소에 따라 응한 행은

방편을 수순하여 훌륭히 전전하도다.

 

() 중에 증득한 최승상(最勝上)

오근(五根)이 청정하여 묘용(妙用)을 이루고

열두 지위 중의 공덕문은

저 일체의 뜻을 모두 능히 굴릴 수 있네.

 

() 중에 증득한 최승상(最勝上)

일체의 뜻과 도()가 모두 청정하도다.

그 증득한 바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가 더러움이 없고 분별이 없음을.

 

과 중에 증득한 최상승은

모든 뜻과 이로움을 포섭함이 다 청정해서

 

 

청정한 불국토에 응하는 대로

일체가 자재하게 출현하도다.

 

과 중에 증득한 최승상은

일체의 분별이 모두 청정하고

지은 것이 무너지지 않는 항상의 시간 속에서

일체지의 사업(事業)을 훌륭히 닦는도다.

 

과 중에 증득한 최승상은

일체의 청정으로 훌륭히 안주하니

이미 무주의 대열반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구()를 원만히 하는도다.

 

과 중에 증득한 최승상은

일체 물든 법이 이미 청정해져서

번뇌에 뒤섞이지 않고 본래 허물이 없어

항상 모든 부처님의 묘락행(妙樂行)에 들어가도다.

 

과 중에 증득한 최승상은

상념[]은 허공과 같아서 모두 청정하며

광대한 승의문(勝義門)을 쌓아서

모든 색상을 여의고서 관찰하도다.

 

여래의 변화의 모습은 지극히 광대하고

이 한량없는 행은 모두 청정하도다.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묘하여 생각하기 어렵고

모든 부처님은 무구(無垢)하고 수승한 의지처라네.

 

이 가운데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청정법계가 곧 일체법의 진여로서 일체법의 전도(顚倒) 없는 자성의 올바른 인()이 되어 능히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출생한다. 모든 장애와 물듦을 여의고 삼마지와 총지법문(總持法門) 및 나머지 한량없는 복과 지혜의 모든 행을 건립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등의 일을 성취하고 나아가 일체 올바른 법의 듣고 아는 종자를 성숙시키니, 이와 같은 것들이 모습이 모두 성취하게 된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란 곧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처음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이 지혜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모습을 멀리 여의고 능히 취하는 것[能取]과 취해지는 것[所取]의 분별을 여의어서 일체의 번뇌와 물듦에 뒤섞이지 않는다. 일체의 반연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아는 바의 모습 속에서 잊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니, 지혜와 그림자가 서로 생하면서 종자를 나타내어 의지한다. 저 일체지가 의지하는 청정함은 바로 진여가 반연된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이다. 두 번째는

 

 

평등성지(平等性智)로서 수승하고 높은 소연(所緣)을 얻는다. 이 지혜는 능히 나와 남을 평등하게 관하여 능히 무주열반(無住涅槃)에 안주한다. 대자비를 일으켜 일체를 따라 가면서 일체의 몸을 나투고 위()1)를 나투어 훌륭한 방편으로써 필경 상응한다. 세 번째는 묘관찰지(妙觀察智)로서 일체의 삼마지와 삼마발저와 총지법문(總持法門)을 두루 거두어들인다. 일체의 아는 분위에서 장애 없이 굴러가면서 능히 수승한 공덕의 보배를 발생하고, 방편으로 몸을 나투어 여러 의혹을 훌륭히 끊고 그 응하는 대로 능히 훌륭하게 설법한다. 네 번째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서 능히 갖가지 부사의한 방편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일체 지은 것을 성숙시켜서 응하는 대로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한다. 이와 같은 것들의 모습을 네 가지 지혜라고 한다.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삼신(三身)의 분위는 둘ㆍ둘ㆍ하나이니,

두 법신과 두 보신과 한 화신이네.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법계 가운데에는

하나이거나 많거나 성품을 세울 수 없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청정한 법신은 오히려 허공과 같아 형상이 없는데, 이 법신으로부터 일체의 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모두가 묘하여 비유할 수 없는 최승의 백법[最勝白法]이다. 청정한 진리는 큰 이익과 즐거움의 원인으로서 부처님 경지의 가장 높고 훌륭한 즐거움을 낳고, 그리고 능히 원만한 다함없는 법의 바다이다. 다시 청정하고 묘한 지혜를 능히 구족해서 즉각 대보리심을 능히 성취한다. 위와 같이 해석한 것이 보리심의 뜻이다. 여러 경들에서 간략하게 모으고 글을 요약했는데, 오직 불보살님만이 능히 다 보고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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