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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36 불교(광석보리심론 2권 / 廣釋菩提心論)

by Kay/케이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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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광석보리심론(廣釋菩提心論) 2

 

연화계 지음

시호 한역

김치온 번역

 

다음으로 여기서는 비로자나성불경(毘盧遮那成佛經)에서 말하였다.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비심(悲心)을 근본으로 삼으니, ()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고 그런 연후에 모든 방편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때에 항상 이 두 가지를 행한다. 보시 등의 방편으로 몸을 나투고 국토를 나투고, 권속과 색상(色相)의 광대한 과보도 두 가지 종류에 포섭되므로 모두 성취할 수 있다. 가령 불세존께서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체로 하여금 바른 지혜를 일으켜 널리 모든 전도(顚倒)를 능히 끊어 없애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다시 생사에 머물지 않는 것은 생사를 말미암아 전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머무름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와 방편은 자상(自相)이 행한 것으로 마땅히 공상(共相)과 훼방의 양변(兩邊)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양변을 여의므로 중간의 행한 바가 곧 무애함을 얻는다. 소위 공상과 훼방의 변()이란 말하자면 지혜는 공상의 변을 여의고 방편은 훼방의 변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만약에 모든 상호(相好)와 색신(色身)이 구족하면 즉시 관하는 자로 하여금 승의락(勝意樂)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만일 삼매 중에 법신을 관한다면 승의락을 일으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어떤 이가 말하였다. ‘지혜와 방편은 모든 여래를 생하고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해(信解)를 일으키게 하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였다. ‘세간의 법과 같이 응당 요별하여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응당 버리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어떠하겠는가? 모습을 취하는 것[取相]을 여의므로 그 모든 전도된 취착심이 끊어지고,

 

 

그것이 끊어짐을 말미암은 뒤에야 이것을 설하니, 이것이 진정한 승의락이다. 그 지은 일에 응하지 않고 실로 마음에 의지하여 결정함을 일으킨다.’ 또한 어떤 이는 말한다. ‘일체의 법 중에는 취할 것도 없으며, 또한 버릴 것도 없다. 그것은 취하고 버리는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떤 이는 말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은 생사의 과보를 감응한다. 이 가운데 무엇을 지혜를 여의고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조그마한 선()을 얻어도 기뻐 만족하면서 용감하고 굳센 마음을 일으켜 다시 수승한 선근을 증상하고자 하는 생각을 짓는 것이다.’”

유마힐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마땅히 지혜와 방편의 두 가지를 함께 행해야 한다. 보시 등의 모든 행을 만약에 지혜가 포섭하게 되면 곧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지만, 이름이 이것과 다르면 곧 보시 등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삼마지에 머물러서 능히 모든 지혜를 일으키면, 가행(加行)이 오로지 주입되어서 저 지은 바를 총괄한다. 말하자면 먼저 일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말미암아 근본 종의(宗義)로써 바르게 거두어 지닌 연후에 사소성혜(思所成慧)가 비로소 생기한다. 이 사소성혜 속에서 참다운 뜻[如實義]을 관찰해야 그 관찰한 바가 결정적으로 진실해서 다른 삿되고 허망하여 실답지 않은 전도(顚倒)가 없다. 이와 같이 관하므로 의혹이 그쳐 쉬는 것이며, 바른 지혜가 생겨나서 이치대로 바르게 닦는 것이다. 보리수에서 외도들에게 무아법을 설했듯이,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사유하고 관찰하면 반드시 바른 인[正因]이 있어 열반과를 얻을 것이다. 이와 다른 것은 모두 외도이며 항상 분별로 인하여 적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잡아함등에서 설하기를, ‘사소성혜 속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한 후에 모든 사물의 참된 자상(自相)을 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자상은 승의제 중에서는 곧 생함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함에서 설한 것과 결정적으로 상응한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설하였다.

무생(無生)의 진실은 실제로 별개의 다른 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등은 모두 승의제의 무생(無生)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진실이다. 또한 승의의 무생은 곧 무생이 아니니, 저 일체의 행한 바는 모두 과거의 성품이다.”

이 가운데서 또 말한다.

선남자여, 생멸의 두 법은 필경 모두 세간의 취착(取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대비는 세간에서의 온갖 행을 버릴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생멸 등이 필경에는 조그마한 법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무엇을 생함이라 하고, 무엇을 멸함이라고 하는가? 생함이 없음을 생함이라 이름하고, 멸함이 없음을 멸함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또 말하기를, “아자문(阿字門)에서 일체의 법은 생멸을 여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일체법무자성문(一切法無自性門)으로 자성의 공함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성이제경(聖二諦經)에서 설하였다.

만일 무생의 평등이라면 곧 일체법의 평등을 얻는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설하였다.

수보리야, 색과 색의 자성은 공하다. 나아가 식과 식의 자성은 공하다. 자상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액경(象腋經)에서 설하였다.

일체의 성품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생함이 없는 성품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함이 있다고 집착한다.”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 설하였다.

저 일체의 법은 모두 다 평등하고 삼세 또한 평등하다. 과거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여의었고 나아가 현재의 일체법 또한 자성이 여의었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아함 중의 견고한 뜻과 상응해서 응당 자세히 관찰해 보건대,

 

 

이것과 다른 어떤 인()은 성립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치대로 결정적으로 사유하고 관찰한 후에 요약해서 설하면, 모든 생함의 성품에는 인이 있다고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설하기도 한다. 여실하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에 인의 성품을 버린다면, 이 차별의 성품이 참으로 드러내 보이기도 하므로 저 인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만약에 법이 생할 때 비로소 일체의 성품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면 어떻게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저 성품이 없을 때에는 차별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생겨날 때에도 또한 얻음이 있지 않으므로 저 인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인이 없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고, 또한 인이 있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설한 것에 만일 아()가 있다고 계교(計較)한다면 바로 외도가 상인(常因)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성품이 없어야 생함을 얻어서 능히 모든 행을 일으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인의 성품이 파괴되었는데 어떻게 능히 모든 행을 생기하는가? 이치대로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외도가 집착하는 아() 등은 자체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별도의 법에서 버리지 않는 성품을 얻는데, 이미 항상하는 성품[常性]에 집착했다면 남에게 뜻을 지어 일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만일 뜻에 이로움이 없다면 상응하는 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착하는 아() 등의 일체 역능은 필경에는 모두 공인 것이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으니, 저 자성이 없는지라 짓는 일에서 그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 설령 짓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역능은 없다. 만일 짓는 바가 아니라면 또한 화합이 아니다. 또 일체의 일이 지음 있음을 따르는지라 생겨난 이후의 시기에 결정되는 것과 같다. 만일 역능이 있다면 곧 그 역능은 자성이 따라 구르니, 앞에서 설했듯이 일으켜 지은 일로 화합을 얻는다. 혹 따라 구르지 않음도 앞에서 설했듯이 저 자성이 없고 상인(常因)의 성품이 없어서 결정코 화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무상함

 

 

중에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을 수 없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혜여, 참되지 않은 공상(共相)이란 이른바 허공ㆍ멸열반(滅涅槃)ㆍ무작자(無作者)ㆍ무성(無性)ㆍ무취자(無取者)의 공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상이 이 불화합을 평등하게 생하므로 역시 무상이 아니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일의 성품에 역시 생함이 있지 않는데도 화합을 얻는 것과 같은데, 저 화합하는 인의 성품이 없어서 따라 구른다[隨轉]. 만일 동시에 생겨나서 상응하는 바가 있으나 또한 동시에 인이 짓는 자성의 일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저 동시(同時)의 관() 또한 이루어지는 성품이 없으며, 혹 다른 때[異時]의 관도 역시 다른 때가 아니다. 만일 때와 연() 가운데에서 관한다면 그것은 역시 생함도 없고 참됨도 없다. 과거에 만일 생하였다면 화합하는 바가 있다 해도 또한 연이 아니고 생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일체의 아()로도 또한 연이 없다. 또한 하나의 찰나 속에 일체의 찰나가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겁과 찰나의 분량으로도 화합하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 둥근 덩어리가 되는 가운데 또한 극미량의 아()도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부분 속에서 저 찰나에 모인 덩어리의 성품[蘊聚性]은 화합하지 않고 스스로 생할 수 없으며 인분(因分)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저 부분[]의 성품을 취한다면 곧 자아의 지은 바가 서로 어긋나므로 역시 두 가지 종류는 없다. 만약에 두 부분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곧 두 종류의 허물이 따라 붙는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 일체 세속에서 생한 것은 얻는 성품이 있으나, 승의제 중에서는 참으로 생함이 없으니, 이러한 설명은 아함 등과 더불어 서로 어긋남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모든 생()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설한 바가 이치 그대로인 것이 불세존의 진정한 승의(勝義)의 즐거움이다. 마치 세상의 벼와 벼 줄기 등처럼 자성과 타성 두 종류 가운데에서 인이 없는 생을 설한다. 이 뜻은 마땅히 그쳐야 하고 이 중에서 의당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색과 무색의 저 두 가지 성품이 병기(甁器) 등처럼 그 극미량이라도 색의 성품[色性]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앞의 분위(分位)에서는 하나의 성품이 아니다. 앞의 분위 중에서 만일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극미의 덩어리 중에는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하나와 다수의 성품을 여읜다면 어떻게 자성이 있겠는가?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얻은 색의 상()과 색()의 성()과 같다.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하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코끼리가 파괴되면 미세한 티끌과 같은데, 이 미세한 티끌의 모습 가운데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그의 색성(色性)은 실로 자성이 없다. 또한 색온 중의 푸름 등의 색들처럼 그것이 상대의 장애가 있더라도 자성이 없다. 이와 같이 필경에는 식() 외에는 색()이 아니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외부에 색들은 없으며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저 밖의 푸름 등 갖가지 색의 상은 실제로 상대의 장애[對礙]가 없다. 그리고 모습을 취하고 버리는 것도 또한 상대의 장애가 없다. 하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가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나의 성품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나가 모인 색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유()의 색상(色相)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가 없으며, 그 식()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의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라서

 

 

저 색이 식을 여의고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식의 자상은 갖가지가 실답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이유로 식은 실답지 않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은 마술사[幻士]와 같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에 보인 상()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며 다른 성품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一異性]을 여의기 때문이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어떤 사람이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자성이 실제로 얻을 수 없음을 관하니, 이 가운데서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모든 것들을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이것이 사소성혜(思所成慧)가 실답게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뜻이 성취되면 이로 말미암아 수소성혜(修所成慧)가 마땅히 생기하게 되는데, 만약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이 없다면 수소성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보운경(寶雲經)에서 설하였다.

모든 올바른 수행자는 지혜의 광명이 있다. 중간(中間)에 태어나도 그 올바름은 무너지지 않는다. 지혜의 출생을 말미암아 닦아 지은 것들이 출생하여 성취된다. 비유하자면 땅 속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두루 가득하다면 태어날 모든 존재가 어떻게 능히 생겨나겠는가? 모든 수행도 또한 마찬가지다. 지과(智果)를 밝게 깨달아야 진실의 성품 가운데서 이치대로 이치를 출현하게 된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에서 설하였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 종류의 추구함을 일으킨다면,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함과 의지함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저 진실한 수소성혜를 증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가장 먼저 사마타(奢摩他)를 닦아서 상응하는 수승한 법을 마음에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데, 마치 움직임이 그친 물처럼 해야 한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을 경우 사마타가 아니면 능히 거두어들여 머무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등인심(等引心)에 머무르면 능히 여실히 안다. 만약에 산란한 마음의 상태라면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닦을 때에는 모든 얻을 것과 바라는 바를 버려서 평등함에 머물러야 한다. () 가운데 고통 등을 다 버려서 없애버리고 청정한 계율에 편안히 머물면서 정진을 일으킨다면 빨리 성취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화합해탈경(和合解脫經)에서 설하였다.

먼저 보시 등의 수승한 행을 닦고, 다음에 청정한 계를 지님을 닦는다. 그런 연후에 사마타행에 머문다. 만약에 이 사마타에 머물고자 한다면 모든 분위(分位)에 따라야 한다. 먼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마땅히 귀명(歸命)하고 참회하면서 수희(隨喜)해야 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대비심을 일으켜 널리 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편안한 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몸을 곧바로 하고 단정히 머무르면 정념(正念)이 현전하고, 삼마지(三摩地)를 끌어 일으키면 상응함이 현전한다. 처음부터 전주(專注)해서 응하는 대로 관찰하고, 더 나아가 여러 종류의 반연하는 바와 평등한 일을 관찰한다. 그리고 번잡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다. 다시 총체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 색과 무색 두 종류에서 마땅히 산란과 허물을 여의어서 총체적으로 그것과 상응하여 반연하는 바가 수승한 작의(作意) 내지 오온(五蘊)ㆍ십이처(十二處)ㆍ십팔계(十八界)의 모든 일들을 일으키니, 일체 분별하지 않으면 곧 청정함을 얻는다.”

모든 반연하는 바의 행상을 자세히 설한 것은 화합해탈경의 제18 상응분(相應分)과 같다.

세존께서는 유정의 일들인 색 등의 분별과 일체사(一切事)의 분별을 거두어들이신다. 간략한 가운데 행상(行相)을 자세히 설한 것은 아비달마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뜻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관찰하고 난 뒤 허물을 여의어 다

 

 

섭수함으로서 마음의 상속으로 하여금 수승하게 진행시켜 수행을 증장케 하는 것이다. 혹시 마음에 탐욕 등이 생기면, 이때 마땅히 부정등관(不淨等觀)을 지어서 그쳐서 쉼[止息]을 얻는다. 또한 다시 이전[]을 넘어서 수승하게 나아가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 부정등관의 온갖 행상(行相)은 번잡함을 두려워해서 또한 그친다. 혹 그 마음이 수승하게 나아가 승의락(勝義樂)을 일으키지 못하면, 또한 이는 산란의 허물이다. 이때에 마땅히 삼마지의 공덕을 관해서 승의락을 일으키면 곧 승의락이 아닌 것을 능히 그쳐 쉬게 한다. 만약 그 때에 혼침과 수면이 생기한다면 마땅히 부처님 등의 공덕인 수승하게 기쁜 일들을 관해야 하나니, 그것은 능히 그쳐 쉴 수 있다. 다시 이와 같이 반연한 것 중에서 응하는 대로 견고하게 거두어서 흩어지지 않으면 곧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또한 다시 만일 앞의 마음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함에 따라 뒤의 마음이 높게 들떠서 일어난다면, 이때에는 마땅히 무상등관(無常等觀)을 지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반연하는 것 속에서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한결같은 집중으로 고요히 머물러야만 높고 낮은 법을 여의고 평등을 행해서 마음이 청정함을 얻는다. 저 깨달음을 일으킴은 산란 등의 원인이므로 모두 버린다. 혹 어떤 사람이 진실로 깨달음을 일으키면 그 마음을 산란하게 지어도 반연한 것에 움직임이 없으리니, 이와 같아야 바라는 바와 행한 바에 수승한 정()이 상응함을 얻을 것이다. 이때에는 마땅히 사마타가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룸을 알아야 하며, 모든 사마타의 공상(共相)이 이른바 심일경성(心一境性) 중의 자성임을 알아야 한다. 저 사마타가 반연한 바는 결정코 이와 같으니, 이러한 사마타법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 등의 경에서 설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마타를 닦는 데는 아홉 종류의 법이 있다. 첫째는 제()이며, 둘째는 정제(正除), 셋째는 분위제(分位除), 넷째는 근제(近除)이며, 다섯째는 조복(調伏)이며, 여섯째는 지()이며,

 

 

일곱째는 근지(近止)이며, 여덟째는 일향소작(一向所作)이며, 아홉째는 지지(知止)이다. 이러한 아홉 종류의 행상은 어떠한가? 이 아홉의 법에 두루하는 것을 이름하여 제()라 하니, 반연하는 것 중에서 번잡한 마음이 두루 제거되는 것이다. 반연하는 것 중에 상속하여 전전하는 것이 분위제이다. 산란함이 현전하나 모두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 근제이다. 산란함을 여의고 다시 수승함이 현전할 때 반연하는 바를 두루 제거하는 것이 조복이다. 만일 애착이 일어날 때 굴복시키므로 이름하여 지()라고 한다. 산란과 과실이 현전하면 승의락을 일으키지 않아도 능히 그치므로 근지라 한다. 혼침과 수면 등이 일어날 때 빨리 떠나 보내버리는 것이 일향소작(一向所作)이다. 반연 속에서 움직임이 없음을 얻고 그런 연후에 한결같이 집중하여 그침[]과 상응함을 얻는다. 이 그침을 얻은 후에 마음이 평등함[]에 머물게 되는데, 이것을 지지(知止)라 한다. 이러한 뜻은 성 미륵보살께서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삼마지를 닦을 때에 여섯 종류의 과실이 있다. 첫째가 해태(懈怠)이며, 둘째는 반연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所緣忘失], 셋째는 가라앉는 것[沈下], 넷째는 높이 들뜨는 것[高擧], 다섯째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無發悟], 여섯째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發悟]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과실이 생할 때에 마땅히 여덟 종류로 끊는 행을 일으켜서 대치(對治)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믿음[]이며, 둘째는 하고자 함[]이며, 셋째는 부지런함[]이며, 넷째는 가벼워 편안함[輕安]이며, 다섯째는 기억함[]이며, 여섯째는 바르게 앎[正知]이며, 일곱째는 사유[]이며, 여덟째는 평등함[]이다. 이러한 것들의 대치행상(對治行相)은 어떠한가? 믿음[] 등의 네 법은 해태를 대치한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삼마지의 공덕으로 요컨대 정신순상(正信順相)을 증대시킴을 갖춤이니, 그에 상응하면 수승한 희망을 일으킨다. 희망할 때에 정진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정진으로 몸과 마음이 용맹해진 후에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 때문에 대치(對治)인 것이다. 기억[]은 반연하는 바의 망실(忘失)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르게 아는 것[正知]으로 가라앉는 것과 높게 들뜨는 것을 대치한다. 이른바 올바른 앎으로 바른 관찰을 일으켜서 능히 높고 낮은 두 법을 그쳐 쉬게 하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사유[]는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대치하니, 이러한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평등함[]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것을 대치한다. 앞의 높고 낮음으로 말미암아 그쳐 쉼을 얻은 후에 마음이 정직(正直)에 머무르는 것이 곧 깨달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대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단행(斷行)이 여섯 종류의 과실을 대치한 후에야 가장 높은 삼마지 사업이 곧 성취되면서 신족(神足)의 공덕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여덟 가지 단행(斷行)을 구족하면 곧 능히 네 종류의 신족[四種神足]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수승하고 높은 사업이 올바른 상응을 얻으면 비로소 선정해탈법문에 증입(證入)하여 일체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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