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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015 불교(관소연연론 / 觀所緣緣論)

by Kay/케이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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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

 

진나보살(陳那菩薩) 지음

현장(玄奘) 한역

송성수 번역

 

모든 존재[]가 눈 등 다섯 식[五識]으로 하여금 바깥 물질로써 연()할 것의 연을 만들려고 하는지라, 혹 지극히 미세한 것을 고집하여 실체(實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능히 식을 내기 때문이다. 혹 화합한 것으로 고집하여 그것으로 식이 생길 적엔 저 모양을 띠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이치가 아니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지극히 미세한 것에 다섯 가지 식에 있어서

혹 연하더라도 연할 바가 아니니

저 모양은 식이 없기 때문에

마치 눈의 감관과 같은 것이네

 

연할 것의 연이란 이를테면, 연하는 식이 저 모양을 띠고서 일어나거나 또는 실체(實體)가 있어서 연하는 식으로 하여금 저것을 의탁하여 물질 등 지극히 미세한 것을 내는지라, 설사 실체가 있어서 능히 다섯 가지 식을 낸다면 용혹 연의 뜻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연할 것은 아니니, 눈 등이 눈 등의 식에 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극히 미세한 것은 눈 등의 식에 연할 것의 뜻이 없는 것이다.

 

화합이 다섯 가지 식에 있어서

혹 연할 바라도 연함이 아니니

저 체()가 사실 없기 때문에

마치 둘째의 달[第二月]과 같네.

 

물질 등의 화합이 안식(眼識)에 저 모양이 있기 때문에 연할 것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러나 연의 뜻이 없는지라, 마치 눈이 착란(錯亂)하여 하나의 달을 둘째의 달로 보는 것과 같음이니, 저 실체가 없어서 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가은 화합이 눈 등 식에 연하는 뜻이 없기 때문에 바깥 두 가지 일이 그 연할 것이 연에 서로 한 갈래만 빠져도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아니한다. 물질이라고 고집하는 따위가 각각 많은 모양이 있되 그 중에 한 부분이 현량(現量)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극히 미세한 것이 서로 어울려서 각각 하나의 화합하는 모양이 있긴 하지만, 이 모양이 실지에 있어서 각각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자기 모양의 식과 같기 때문에 다섯 가지 식과 더불어 연할 것의 연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 또한 이치가 아니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화합이 견고한 물질 같은 것은

눈 등의 식을 일으키지마는

이 연은 연할 것이 아니니

지극히 미세한 모양을 인정하기 때문이네

 

견고한 물질과 같은 모양이 비록 실지 있어서 눈 등의 식에 혹 연의 뜻이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연할 것은 아니니, 눈 등의 식 위에 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들의 지극히 미세한 모든 화합의 모양도 그 이치가 또한 그러하나니, 저 모두가 지극히 미세한 모양을 고집하기 때문에 눈 등 식의 연하는 것도 지극히 미세한 모양을 고집하기 때문에 눈 등 식의 연하는 것도 지극히 미세한 모양이라고 고집한다면, 모든 화합의 모양이 다시 따로 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병과 항아리 등의 깨닫는 모양은

저 고집이 응당 차별이 없으리니

형상의 차별 때문에 차별이 아님은

그 형상의 차별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네

 

병과 항아리 등 물건의 크고 작음이 동등한 것은 능히 지극히 미세함을 이룩함이 다소가 같기 때문에 저것을 연하여 깨닫는 형상도 응당 차별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저 물건의 형상 차별 때문에 깨닫는 형상도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치가 또한 그렇지 않다. 병 등의 형상 차별은 다만 그 병들의 가법(假法) 위에 있을 뿐이고 지극히 미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지극히 미세한 것도 역시 차별의 형상이 있다고 응답 고집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지극히 미세한 분량이 동등하기 때문에

형상의 차별은 다만 가법에 있을 뿐이니

저것을 분석하여 지극히 미세함에 이르면

저 깨달음은 결정코 버리기 때문이네

 

병과 항아리들이 지극히 미세함을 이룩하여 형상과 분량의 차별 있는 것이 아니니, 미세하거나 원만한 형상을 버리기 때문에 차별의 행상이 가법에 있고 진실이 아닌 줄을 아는 것이다. 또 형상의 차별된 물건을 분석하여 지극히 미세함에 이르면, 저 깨달음은 반드시 버리는 것이고 푸른 빛 등이 물건이 아니다. 분석하여 지극히 미세한 것에 이르면, 저 깨달음을 버리는 것이다. 이 현상의 차별로 말미암아 다만 세속에 있을 뿐이고 푸른 빛 등이 역시 실물(實物)에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이 때문에 다섯 가지 식의 연할 것, 그 연의 체는 바깥 빛 등이 아닌 그 이치가 충분히 성립되는 것이다. 저 연할 것의 연이 어찌 전연 있지 않거나 전연 있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또 어떠한 것인가.

 

안의 빛이 바깥의 나타남과 같아서

식의 연할 것의 그 연이 되나니

이는 저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 식에 있고

또는 저 형상에 대한 식을 내기 때문이네

 

바깥 대경은 비록 없더라도 안의 빛이 있어서 바깥 대경의 나타남과 같은 거을 이르되, 식의 연할 것의 연이라 함이니, 눈 등의 식이 저 형상을 띠고서 일어나거나 또는 저 형상으로부터 생겨나는 이 두 가지 뜻을 갖추기 때문이다. 이 안의 대경과 형상이 이미 식을 떠나지 않는지라, 어떻게 함께 일어나서 식의 연을 지을 수 있는가 하면,

 

반드시 서로가 따르기 때문에

때를 함께 하고 또 연을 짓나니

혹시 앞 것이 뒤의 연이 되는 것은

저 공능(功能)을 이끌기 때문이네

 

대경과 현상이 식과 더불어 서로가 따르기 때문에 비록 한꺼번에 일어나더라도 역시 식의 연을 짓는 것이다. 인명론(因明論)자들은 말하기를, “만약에 이것과 저것이 있거나 없거나 서로 따른다면 비록 한꺼번에 생겨나더라도 역시 인과(因果)의 모양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혹시 앞 식의 모양이 뒷 식의 연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나니, 이는 본식(本識) 가운데 생겨나는 자과(自果)와 비슷한 공능(功能)을 이끌어 어긋나지 않는 이치를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섯 가지 식의 생겨나는 것이 다만 안의 빛을 연할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또 눈 등을 연이라고 말하겠는가.

 

본식 위의 다섯 빛 공능이

이른바 다섯 감관의 상응되는 이치이니

공능과 대경과 빛은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서로 인이 되는 것이네

 

능히 식을 내는 것으로써 있음을 견주어 아나니, 이는 다만 공능이 바깥의 조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식 위의 다섯 빛 공능인 이른바 눈 등의 감관이 역시 이치를 어기지 않는 것은 그 공능이 식을 내되 이치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식에 있고 다른 데에 있는 것을 비록 말할 수는 없지만, 바깥의 모든 법은 이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이 식에 있고 다른 데에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감관의 공능이 앞의 대경과 빛과 더불어 처음이 없는 때로부터 서로가 전전(展轉)하면서 인()이 되었다. 이를테면 이 공능이 성숙위(成熟位)에 이르러서 현식(現識) 위의 다섯 가지 안의 대경과 빛을 내고 이 안의 대경과 빛이 다시 이숙식(異熟識) 위의 다섯 감관의 공능을 끌어 일으키는지라, 감관과 대경의 두 물질이 식과 더불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혹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니, 그 즐거워함에 따라 말해야 할지라, 이러한 모든 식은 다만 안의 대경과 현상이 그 연할 것의 연이 될 뿐이니, 이 때문에 이치가 잘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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